[국선도 이야기] 화랑도와 차(茶)

2018. 4. 22. 03:05차 이야기




[국선도 이야기] 화랑도와 차(茶)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41   

   한국 다도(茶道)의 유래는 본래 신라 화랑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화랑들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다니면서 차(茶)를 즐기며 심신(心身)을 수련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릉 경포대 한송정에는 차(茶)의 달인이며 신라 당시 전국토의 인심을 풍미했던 영랑 술랑 남랑 안상, 4선(仙)이 차(茶)를 달여 마시던 다구(茶具)들이 지금까지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4선(仙)은 차(茶)의 달인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영랑(永郞)은 우리민족 고유의 선맥(仙脈)을 이어받은 중요 인물이다.

고려시대의 많은 문인(文人)들은 한송정(寒松亭)을 유람하며 한결같이 4선(仙)과 함께 남겨져 있는 다구(茶具)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먼저 김극기(金克己, 1148~1209)의 〈한송정〉이란 시(詩)를 보자.

여기는 4선(仙)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酒臺)는 쓰러져 풀 속에 묻히고
다조(茶竈)에는 내당굴 이끼 끼어 있구나.

역시 고려말 문인 이곡(李穀, 1298~1351) 또한 그의 《동유기(東遊記)》 ‘관동팔경을 유람 중, 강릉의 경포대 한송정에서 4선(仙)이 차(茶)를 달이던 석조((石竈, 돌부뚜막)와 석정(石井, 돌우물), 석구(石臼, 돌절구)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또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강릉에는 고선(古仙)의 자취가 있다. 한송정에는 4선비(四仙碑)가 있으며, 산정(山頂)에는 차(茶)를 달이던 아궁이가 있다.’

   조선시대 고종(高宗) 때의 강릉 부사 윤종의(尹宗儀, 1805~1886)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인용하여, 한송정은 푸른 솔이 울연히 우거져 있으며, 정반(亭畔)에 다천(茶泉)과 돌부엌 돌절구(石臼)가 있으며, 화랑선도(花郞仙徒)들이 놀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도 한송정에 다정(茶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여러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4선(仙)이 살던 당대에 이미 풍류도(風流道)의 일환으로서 다천(茶泉), 다정(茶井), 석정(石井), 석지조(石池竈), 석구(石臼) 등 다도(茶道)에 필요한 다구(茶具)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 4선(仙)이 생존했던 시기는 언제인가?
역대 풍월주(風月主)들을 기록한 김대문(金大問)《화랑세기(花郞世紀)》에 이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대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제1대 풍월주는 진흥왕 원년(540년)에 취임한 위화랑(魏花郞)이다. 위화랑은 이미 그 이전인 법흥왕 때부터 총애를 받아 ‘화랑(花郞)’이라고 불리었다.

신라 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은 고대의 풍류도(風流道)를 신라에 처음 부흥시킨 왕이며, 그것을 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 대에 더욱 더 발전시키고 제도화시켰다. 그러므로 영랑의 생존 시기는 540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조선시대 선가사서(仙家史書)인 《청학집(靑鶴集)》은 신라 10대 내해왕(재위196~230년) 때의 선인(仙人) 물계자보덕(寶德)의 유파(流派)라고 하였다. 보덕은 바로 영랑의 제자이니, 영랑의 생존 시기는 다시 196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학집(靑鶴集)》은 또 단군(檀君)이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선(神仙)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潔淸之學)으로 요약되어 문박씨(文朴氏)를 통해 신라의 영랑(永郞)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문헌의 기록들로 보아, 영랑은 신라 초기 인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영랑의 제자 보덕의 이름 앞에는 꼭 ‘마한(馬韓)의 신녀(神女) 보덕(寶德)’라는 접두어가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고운(孤雲) 최치원(857~ ?) 선생은 ‘마한(馬韓)은 고구려’라고 하였으니, 적어도 고구려가 안정되기 이전이므로 ‘마한의 신녀 보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수입된 것은 527년이다. 그러니 불교가 융성하기 이전에 이미 신라의 화랑(花郞)과 귀족들은 민족 고유의 풍류정신(風流精神)이 깃든 차(茶)를 즐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역사가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불교 승려들에 의해서 전래되었다는 통설(通說)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선덕여왕대 즉 통일신라 전후에는 화랑이나 귀족, 승려들 사이에서 차(茶)가 보편적인 음료로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화랑 김유신이 산중 수련했던 경주 단석산(斷石山)‘화랑헌다공양상(花郞獻茶供養像)’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에 다도(茶道)를 즐긴 고승(高僧)들은 원광법사, 원효대사, 충담사, 월명사 등인데, 이들은 한결같이 화랑도와 깊은 연관이 있던 승려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하여 화랑들의 다도(茶道)가 불교계로 건너갔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화랑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가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이며, 아버지가 제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 동생이 제12세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이고, 조카가 제20세 풍월주 예원공(禮元公), 조카의 아들이 제28세 풍월주 오기공(吳起公)이었다. 그리고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지은 김대문은 바로 오기공의 아들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이며, 원광법사는 그들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법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5가지 실천 덕목은 원광법사가 처음 설한 것은 아니고,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소도(蘇塗) 정신(精神)이었으며 국선(國仙)의 5대 강령(綱領)이었다.

   원효방(元曉房)에서 다(茶) 정신(精神)에 큰 영향을 미친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또한 제7대 풍월주를 역임했던 설화랑(薛花郞, 572~579)의 증손자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으로 인하여 원효대사 또한 풍월도(風月道)를 수련하였는데, 이는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작품화 한 바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는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사모하여 향가(鄕歌) 〈찬기파랑가〉를 지었다. 향가는 신라 화랑들이 즐기던 노래였다.

咽嗚爾處米露曉邪隱月羅理 구름을 헤치고 달아난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흰 구름 좇아 떠가는 어디에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새파란 강물 속에
耆郞矣모史時邪藪邪 기파랑의 모습 비쳐 있어라.
逸烏川理叱적惡希 일오천 조약돌에서
郞也支以支如賜烏隱 낭(郎)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네.
心未際叱힐逐內良齊 아아!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잣나무 가지 드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서리조차 모르실 화랑이시여!

   충담사는 구름 속에 나타난 달을 기파랑의 순결한 모습으로 보고 있으며, 은하수와 잣나무에서도 기파랑의 이상(理想)과 고결한 절조를 그리워하고 있다.

경덕왕 19년(760년) 4월 1일에 해 두 개가 한꺼번에 나란히 떠서, 10일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일관(日官)이 이렇게 주청하였다.
“인연이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경덕왕이 친히 청양루(靑陽樓)에 나아가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리니, 마침 월명사(月明師)가 지나갔다. 왕이 불러 기도문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단지 향가(鄕歌)만 알뿐, 범성(梵聲)에는 능숙하지 못합니다.”
“이미 인연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그러자 월명사〈도솔가〉를 지어 바치니, 태양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좋은 차 1봉지와 수정 염주 108개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원광법사, 원효대사, 충담사, 월명사 등을 통해 불교계로 건너간 다도(茶道)는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국교로 되면서 다(茶) 문화는 승려들의 전유물처럼 되어졌다.

즉, 세력(勢力)의 이동에 따라 다(茶) 문화도 옮겨지게 된 것이다. 신라시대에 풍류도(風流道)로부터 시발된 다(茶) 문화는 고려시대에 불교승려들에게, 조선시대는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전기 문인 서거정(1420~1488)은 가장 많은 다시(茶詩)를 남겼으며, 다산(茶山)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茶人)들이었다.

   청한자 김시습이나 점필재 김종직 같은 선도(仙道) 수행자들도 화랑도의 다(茶) 문화를 계승하여 직접 차(茶)를 재배하였으며 홍유손, 정희량, 남효온 등 많은 선도인들이 다인(茶人)들이었다. (유교에서는 이들을 모두 유학자로 치고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다(茶) 문화는 다시 임진왜란을 기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다구(茶具)와 다기(茶器)들을 모두 약탈해 갔으며 ‘기자에몬 이도다완'이라 해서 보물로 보관해 놓고, 일본 국보 제26호로 삼았다.

그리고 유명한 일본의 초암다(草庵茶)는 바로 청한자 김시습이 전해 준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외교승으로 와 있던 일본 승려들은 당대 5세 신동으로 소문난 김시습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교류를 나누었으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시습의 초암다(草庵茶)는 그가 쓴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와 함께 일본 승려들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일본의 초암다실(草庵茶室)의 지붕은 명칭 그대로 ‘이엉’으로 엮은 초가지붕이다. 조선의 지붕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건축자재 또한 일본에서 많이 나는 삼나무나 노송을 마다하고 한국에서 흔히 나는 적송(赤松)을 사용하고 있다.

다실(茶室)을 장식하는 꽃 역시도 여름에는 무궁화, 겨울에는 동백으로 하고 있다. 무궁화는 예로부터 한국을 상징하는 꽃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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