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4

2018. 5. 1. 22:13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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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游錄[中] 申靑泉維翰著 / 九月      ㅡ 신유한(申維翰) , 1719

十一日庚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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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曉起。舟已泊浦岸。岸上轎已具。卽下陸就館。是山城州。臨江築城曰淀城。城外設水車二具。能激水而灌城中。壕廣二丈許。緣壕築石。上設板堞。粉白甚麗。覆以瓦。瓦間作穴以通砲。日本城制如此。使館在城外。守官平松和泉守遣奉行支待。飯後將發。而人馬不卽辦。三使行諸人所騎馬外。衣籠行李。悉不能運。使臣詰責其由。倭言罪在本州。迫之多窘色。因欲輟行。則馬島奉行輩。蒼黃求乞曰。今若不進。吾屬殆矣。請先啓行。謹當留蕫群馬。綰致行裝云。如是責難間。日向西矣。蓋聞使行所入騎馬載馬。準數以待者。國有常法。而馬州居中欺謾。當日鷄鳴。用其馬先運渠齎裝。而貨馬者知爲所詐。不復來矣。於是奉行以下罪當誅。事敗情露。辭遁色惴。使臣以此督過。而旣無奈何。遂發。譯官擧例云。今日當宿倭皇京。使臣以下當着紅團領云。余留從者李震浩。使綰行李之在後者。獨夾一童一僕而行。大坂倭肩輿者四人。馬州倭帶劍而從者二人。自館所東過大塚 山。山上蓋多倭皇塚云。又十餘里而望。粉墻隱映者爲伏見城。城卽秀吉都居。是其離宮別榭。閭里繁庶。不減於賊奴在時。而遠不能目見。倭言淀江之岸。有名晉州島者。乃壬辰倭獲晉州人而處之。今其一村無他種。令人想得當時。毛髮竦然。自此村廬夾道。或瓦或茅木皮蓋木片蓋。綴絡不絶。其樹多橘柚。左右原畝。具五穀。土膏而力農。秋熟未穫。䆉稏盈疇。稻色皆白。木綿最美。爛漫如雲。刈稻者各於田中。立雙大竿爲丈餘。束禾而岐之。倒着橫竿。其穎皆垂。以曝以乾。摘綿者盛之竹篝。分載而歸。藍輿中坐瞰農野。慨然憶馬少游言耳。行未及倭京二十里。日已昏暮。路左右夾植大竿。竿懸大燈如盎。爇燭其中。晃朗瑩耀。如是者五步而一雙。夜明如晝。時使行入實相寺改服。遲遲不至。余所帶童僕在後乘馬稍間。余獨與六七倭人穿街。而觀光男女錦繡之服炫眼者。比大坂不啻倍蓰。路左有二層樓。縹緲半空。名曰東寺。余疑其爲宮闕。而過東寺。見層樓寶閣。金銀煌耀者。又不可勝記。神疲眼熱。不自知歷過幾町。而月色與燈光。上下無涯。宵行數十里。閱得千萬奇觀。皆非世間曾經。怳惚若琪花叢裏。見蓬萊白金仙闕矣。余旣熟聞倭語。時有可解。頻頻喚倭。索茶飮燒靈草問道里。倭輒大驩而應。列肆茶姬。玉面。鴉鬢。手按神仙爐煎茶以待者。宛似畫中人。有時街頭。忽聞金鐵錚錚。驚問是何聲。倭曰夜深則巡街者。持鐵杖擊地以警云。余惟目前背後。了不見我國人顏面。藐然七尺。夜入倭城中。坐視簇簇劍鋒。而無懼無訝。王靈是仗耳。街頭群倭立而噪。舁者止轎於堂下。見其題。曰學士館。館宇弘敞。供帳亦備。童子金世萬亦至。以行李之落後爲憂。有頃使行到館。館名本能寺。壯麗無敵。三使臣合坐。對馬守湛長老菖長老皆入見。京尹源忠周又至。著公服戴一角帽執牙扇。與使臣相揖序坐。使馬守傳語。馬守俯伏聽命。不敢仰視。逡巡膝行。體貌甚截。忠周白晳好容儀。擧止安整。骨格挺秀。有貴人氣像。時年二十五。作尹皇京。治信濃州之上田城。食俸五萬八千石。秩與江戶執政等。館伴本多下總守藤原康。命與支待奉行兩人見。以關白命。設宴享于大廳。而饌品如大坂所供。康命治近江州之膳所城。食俸七萬石。兩奉行亦江戶近臣。秩甚貴。蓋以使行供給。從關白別藏而出者。則必遣大官而儐之。它所經州府。自有本倅視供具。天皇宮。在使館之西南云。而倭皆諱之。問而不對。亦不令我人望其城闕。不知天子在是宮矣。是日行四十里。
倭京地屬山城州。北有愛宕山。雄峙秀拔。是爲鎭山。新羅人日羅者。死於此有神靈。立祠山上云。倭國本都大和。而國號大和。至今國人。自言爲和人。我國曰韓。故凡諸文字。稱兩邦則必曰和韓。世傳梁武帝改名大和曰野馬臺。是皆音譯之訛者。大和之爲野馬臺。猶博多之爲霸家臺也。一笑。後徙筑前州復遷山城州。州之地膏壤沃野。宜五穀桑麻。民力蠶被服。飮食饒樂。東有險嶺之阻。西控兩關之固。四方諸郡國道里均。魚鹽材貨商賈之湊。若周之有雒邑也。大和今爲畿內。租稅之入。悉以歸皇宮。謂京曰和京。是其都邑。亦古之大和也。在昔天皇擅威福。置三公六官。以釐百工。置大將軍。統理軍政。中世以後。大將軍自爲關白。而執國命。所謂天皇。戶居其宮。號令不出王城。只以年號曆書行國中。銀貨恪寶字而有什一之稅。爵帖用皇章而有謝恩之禮。又以圻內百里。奉湯沐。望前端坐焚香。望後燕樂娛嬉。出有金銀雕輦。居有錦衣玉食。嫡嗣之外。諸子皆出家。號爲法親王。女子亦令爲比丘尼。無駙馬公主之名。其稱貴近諸臣掌文史者。必曰法印法眼。蓋其君臣如文殊羅漢。列坐帝釋宮苑耳。
上古有神人。以一釵一璽一鏡。降于日向州。自立爲天皇。而有曰神武天皇者。與周幽王同時。神武七世至孝靈天皇。而秦始皇遣徐市入海。居于紀伊州。其子福。享年一百八十。死爲熊野山守神。世傳倭皇遣使通書云。日出處天子。致書于日沒處天子。而無所傳姓名。唐咸亨初。倭人惡倭名。改國號曰日本。日本之稱。自此始。至大明高皇帝。遣趙秩賜書諭王。其王良懷。奉表稱臣。文皇帝又遣趙居任。賜王冠服。令十年一貢。又命都御史兪士吉。賜王印章。封爲日本王。詔命其國之鎭山曰。壽安鎭國山。爲文勒石云云。而皇朝前後諭冊。及日本之奉貢上表。實非倭皇親受命而身貢獻也。皆使其臣。假作名號。詐稱納款。而天皇之自帝其國。自爲正朔則亘萬古不易矣。所以倭皇姓字不聞於世。或稱王氏。或謂源氏。彼其爲君之法。但有焚香禮天。而自謂天降神人。擬己於歲起攝提無爲而化者。則初未有姓氏之可論也。仙洞天皇第三子名慶仁。己丑嗣位。年今二十六歲。改元爲享保四年。如佛之有名無姓。


11일(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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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갰다. 새벽에 일어나니 배가 이미 언덕에 닿았고 언덕 위에는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곧 육지에 내려서 관(館)으로 갔다. 여기는 산성주(山城州)인데, 강에 다다라 성을 쌓아서 정성(淀城)이라 하고 수차(水車) 두 대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 올려 성중에 물을 댄다고 했다. 호(壕)는 너비가 두 발쯤 되었고, 호를 따라 돌을 쌓았고 그 위에다 판첩(板堞)을 설치하였는데, 분백(粉白)이 매우 화려하였고 기와로 덮고 기와 사이에 구멍을 만들어 대포가 통하게 하였으니, 일본의 성 제도가 이와 같았다.
사관(使館)은 성 밖에 있었는데, 지키는 관원인 평송 화천수(平松和泉守)가 봉행을 보내어 접대하였다. 밥 먹은 뒤에 출발하였는데 하인과 말이 곧 준비되지 못하였다. 세 사신 행차의 여러 사람이 탄 말 외에는 의복상자와 행장을 모두 운반할 수 없었다. 사신이 그 연유를 힐책하니, 왜인이 죄가 본주(本州)에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독촉하자 군색한 기색이 많았다. 그로 인하여 출발을 중지하려 하니, 대마도 봉행들이 황급하여 애걸하기를,
“지금 만약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들 목숨이 위험합니다. 청하건대, 먼저 출발하시면 저희들이 삼가 마땅히 남아있다가 여러 말[馬]을 독촉하여 행장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와 같이 힐책하는 동안에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다. 대개 사신 행차가 드는 곳에 사람이 탈 말, 짐을 실을 말을 숫자대로 준비하여 기다리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인데, 대마도 왜인들이 중간에 들어 속이므로 당일 새벽에 그 말[馬]들을 가지고 먼저 저희들의 행장을 운반하였기 때문에 말을 빌린 자들이 속은 줄 알고 다시 오지 않은 것이다. 이 지경이 되면 봉행 이하는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 이러한 실정이 드러나자, 둔사(遁辭)로 말[辭]하면서 두려워한 것이다. 사신이 이 문제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였지만, 이미 어찌할 수 없어 드디어 출발하였다. 역관이 전례를 들어 말하기를,
“오늘은 마땅히 왜황경(倭皇京)서 자게 될 것이니, 사신 이하는 마땅히 홍단령(紅團領)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다. 나는 종자(從者) 이진호(李震浩)를 남겨두어 뒤에 있는 행장을 정리하게 하고 홀로 동자와 종 하나씩을 데리고 출발하였는데, 견여(肩轝)를 탄 대판 왜인이 네 사람이요, 칼을 차고 따르는 대마도 왜인이 두 사람이었다.
관(館)으로부터 동으로 대총산(大塚山)을 지났는데, 산 위에는 왜황의 무덤이 많다고 했다. 또 10여 리쯤 가서 바라보니, 분칠한 담이 어른어른 하였는데 이것이 복견성(伏見城)이었다. 성은 곧 수길이 도읍하던 곳이어서 별궁과 별장과 시가지의 번성함이 왜놈[賊奴]이 있을 때 보다 덜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멀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왜인이 말하기를,
“정강 언덕에 진주도(晉州島)라고 칭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임진년 전쟁에 왜인들이 진주 사람을 포로로 잡아 와서 살게 한 곳으로 지금도 그 한 마을에는 다른 인종이 없다.”
하였다. 당시를 생각하니 털끝이 쭈삣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마을 집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혹은 기와집, 혹은 초가집, 혹은 나무 껍질로 덮고, 혹은 나무조각으로 덮기도 한 것이 연결되어 끊기지 않았다.
나무는 귤과 밀감이 많고 좌우의 들판에는 오곡을 갖추어 심었다. 땅이 비옥한데다 농사에 주력하기 때문에 가을이 풍성하였지만 아직 추수를 하기 전이어서 벼가 들어차 있었고 색깔은 모두 희었다. 목화가 가장 아름다워 구름처럼 화사했다. 벼를 베는 사람들이 각기 논 가운데에다 큰 장대를 쌍으로 그 사이를 한 발 남짓하게 세웠는데, 장대 하나를 그 위에다 가로 지르고, 벼를 묶어 두 갈래로 매어 빗긴 장대에다 거꾸로 달아 그 이삭이 아래로 드리워지게 하여, 쪼여서 말리었다. 목화를 따는 사람은 목화를 대바구니에 담아서 나누어 싣고 돌아갔다.

   나는 남여(籃轝)에 앉아서 농사짓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감개(感慨)하여 마소유(馬少游)의 말이 생각났다. 왜경(倭京) 20리를 채 못가서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길 좌우에 큰 장대를 세우고 장대마다 동이만한 큰 등을 달고 그 속에다 촛불을 켠 것이 밝고 빛났다. 이와 같은 것이 다섯 걸음에 한 쌍씩이니, 밤이 낮과 같이 밝았다.
   이때에 사신의 행차는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느라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내가 데리고 온 동자와 종이 뒤에 있었는데 내가 탄 말과 조금 사이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혼자서 6, 7명의 왜인과 함께 거리 한 가운데로 지나가는데, 구경나온 사람들이 입고 있는 비단옷이 대판에 비하여 몇 갑절 더 눈이 부셨다. 길 왼편에 날아갈 듯한 2층 누각이 있었는데 이름을 동사(東寺)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궁궐인가 의심하였다. 동사를 지나자 금문(金文)이 찬란한 층루(層樓)와 보각(寶閣)은 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정신이 피로하고 눈이 뜨거워 몇 시가를 지나왔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달빛과 등불 빛이 위아래로 끝이 없었는데, 밤에 수십 리를 행하여 천만 가지 기이한 구경을 하였으니, 모두 세상에서 일찍이 보던 것이 아니요, 황홀하기가 기화요초(琪花瑤草) 속에서 백금으로 된 봉래산 신선의 궁궐을 보는 듯하였다. 나도 이미 왜인의 말을 익히 들어서 때로 아는 말이 있기 때문에 자주 왜인을 불러서 차를 청하여 마시고 담배를 태우면서 길 이수를 물으니, 왜인들이 매우 흥미를 갖고 대답하였다.

   가게에서 차를 파는 여인들은 옥 같은 얼굴에 까마귀 같은 귀밑을 하였고 신선로(神仙爐)를 안고 앉아 차를 다려놓고 기다리는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사람과 같았다. 때때로 거리에서 문득 쨍쨍하는 쇳소리가 들리기에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놀래어 물으니, 왜인이 말하기를,
“밤이 깊으면 거리에 순라 도는 자가 쇠막대기를 가지고 땅을 쳐서 야경을 합니다.”
하였다. 나는 앞뒤로 우리나라 사람이라곤 볼 수 없는데, 왜소한 몸 하나로 밤에 왜성 가운데 들어와서 뾰족 뾰족한 칼날을 예사로 보면서 두려움도 없고 의심도 없었으니, 이것은 우리 왕령(王靈)을 믿은 탓이었다. 거리에서는 여러 왜인들이 서서 떠들었다.

   가마를 메고 온 자가 마루 밑에 멈추기에 써 붙인 것을 보니, 학사관(學士館)이라 하였다. 관은 크고 널찍했으며 장막과 기구가 또한 잘 구비되어 있었다. 동자 김세만(金世萬)이 도착하여서 행장이 뒤에 떨어진 것을 걱정하였다. 조금 있다가 사신의 행차가 관에 이르렀다. 관의 이름은 본능사(本能寺)였는데 굉장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세 사신이 함께 앉으니, 대마수(對馬守)담 장로(湛長老)ㆍ창 장로(菖長老)가 모두 들어와서 뵈었고, 경윤(京尹) 원충주(源忠周)가 또 이르렀는데, 공복(公服)을 입고 일각모(一角帽)를 쓰고 손에는 아선(牙扇)을 잡고 있었다. 사신과 더불어 서로 읍하고 차례대로 앉아서 대마수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니, 대마수가 엎드려서 명을 들었고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무릎으로 기는 등 체모가 매우 엄격하였다. 충주는 살결이 희고 용모가 의젓하였고, 거동이 조용하며 정숙하였고, 골격이 빼어난 것이 귀인의 기상이 있었다. 나이는 25세였는데 황경(皇京)의 윤(尹)이 되어 있었다. 신농주(信濃州)의 상전성(上田城)에 거처하는데 식봉(食俸)이 5만 8천 석이었고, 관계(官階)는 강호의 집정(執政)과 같았다. 관반(館伴)인 본다 하총수(本多下摠守)등원강명(藤原康命)이 지대(支待)하는 봉행 두 사람과 함께 들어와 뵙고, 관백의 명으로 대청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음식은 대판에서 차린 것과 같았다. 강명은 근강주(近江州)의 선소성(膳所城)에 거처하는데 식봉은 7만 석이다. 두 봉행은 다 강호(江戶)의 근신(近臣)으로서 관계가 매우 높았다. 대개 사신의 행차가 올 때에 공급(供給)이 관백의 별장(別藏)에서 나오는 것은 반드시 대관(大官)을 보내어 접대하고, 경유하는 다른 주부(州府)에서는 본관이 그 공급을 살핀다. 천황의 궁은 사관(使館)의 서남쪽에 있다 하는데 왜인이 모두 숨기고는 물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궁궐을 바라보지도 못하게 하여, 천자(天子)가 이 궁에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한다. 이날 40리를 행하였다.

   왜경(倭京)은 땅이 산성주에 속하였는데, 북쪽에 있는 애탕산(愛宕山)은 웅장하고 높고 빼어났는데 이것이 왜경의 진산(鎭山)이다. 그런데 신라 사람 일라(日羅)란 자가 여기에서 죽었는데 신령이 있으므로 산 위에 사당을 세웠다 한다. 왜국이 본시 대화(大和)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대화라 하였으므로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화인(和人)이라고 말하고 우리나라를 한(韓)이라 하므로 무릇 모든 문자에 두 나라를 칭할 적에는 반드시 화한(和韓)이라 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양 무제(梁武帝)야마대(野馬臺)라고 이름을 고쳤다 하나, 이것은 음역(音譯)이 잘못 전한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왜국의 박다(博多)를 패가대(覇家臺)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 번 웃을 일이다.
   뒤에 대화로부터 축전주(筑前州)에 옮기고, 다시 산성주로 옮겼다 한다. 산성주의 땅은 비옥(肥沃)한 들에 오곡ㆍ뽕나무ㆍ삼[麻]이 잘 되고 백성이 누에 치기에 힘써서 음식 의복이 풍족하였다. 동에는 험한 영(嶺)이 막히고 서에는 양관(兩關)이 견고하여 사방 모든 군(郡)과의 도로의 이수가 같아서, 생선ㆍ소금ㆍ재목 등의 물자를 파는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것은 주(周) 나라에 낙읍(洛邑)이 있는 것과 같았다. 대화는 지금 기내(畿內)가 되어 조세의 수입은 다 황궁(皇宮)에 바친다. 경(京)을 화경(和京)이라 하니 이는 그 도읍지가 역시 옛날의 대화인 때문이다. 옛적에는 천황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삼공(三公)ㆍ육관(六官)을 두어서 백관(百官)을 다스리고, 대장군을 두어서 군정(軍政)을 통리(統理)하였었는데, 중세(中世)이후에는 대장군이 스스로 관백이 되어 나라의 권력을 잡았다. 그 후 소위 천황은 자기 궁궐 안에서 송장처럼 살고 호령이 궁성(宮城) 밖에 나가지 못하였다. 다만 연호(年號)ㆍ역서(曆書)를 국중에 행하고, 은화(銀貨)에 보(寶)자를 넣어주고 10분의 1의 세를 받고, 작첩(爵帖)에 황장(皇章)을 쓰고 사은(謝恩)하는 예(禮)를 받고 있고, 또 기내(圻內)의 백 리의 땅을 탕목읍(湯沐邑)으로 받고 있다. 보름이 되기 전에 단정히 앉아 향을 태우고 보름 뒤에는 연회하고 오락한다. 출입함에는 금은으로 아로새긴 수레가 있고, 집에는 비단 옷과 좋은 음식이 있다. 장자(長子) 이외의 모든 아들은 다 중이 되어 칭호를 법친왕(法親王)이라 하고 딸자식도 또한 비구니(比丘尼)가 되게 하여 부마(駙馬) 공주(公主)의 명칭이 없고, 측근의 여러 귀한 신하로 문학(文學)을 맡은 자는 반드시 법인(法印)ㆍ법안(法眼)이라 칭한다. 대개 그 임금과 신하는 마치 문수(文殊)와 나한(羅漢)이 제석궁(帝釋宮) 동산에 벌여 앉은 것과 같다.

   상고(上古)에 신인(神人)이 비녀 하나, 옥새(玉璽) 하나, 거울 하나를 가지고 일향주(日向州)에 내려와서 스스로 천황이 되었다 한다. 신무천황(神武天皇)이란 자는 주(周) 나라 유왕(幽王)과 동시이며, 신무로부터 7대인 효령천황(孝靈天皇) 때 이르러 진 시황(秦始皇)서불(徐巿)을 시켜 바다에 들어가 불사약(不死藥)을 캐어오게 하였는데, 서불은 왜국에 와서 기이주(紀伊州)에 살았고 그 아들 복(福)이 나이 1백 80세에 죽어서 웅야산(熊野山)의 수신(守神)이 되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왜황이 중국에 글을 보내면서, ‘해뜨는 곳 천자(天子)는 해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올립니다.’ 하였다.”
하는데, 성명은 전하는 바 없다. 당 나라 함형(咸亨) 초년에 왜인이 왜(倭)라는 명칭을 싫어하여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 고쳤으니, 일본이란 명칭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명 나라 때에 이르러 태조(太祖)조질(趙秩)을 보내어, 글을 주어 그들의 왕에게 타이르니, 왕이 글을 올려 신(臣)이라 칭하였고, 또 성조(成祖)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왕에게 관복(冠服)을 주고 10년 만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게 하였고, 또 도어사(都御史) 유사길(兪士吉)을 보내어, 왕에게 인장(印章)을 주어 일본왕으로 봉하고 조서(詔書)를 내려 그 나라의 진산(鎭山)인 진국산(鎭國山)을 수안진국산(壽安鎭國山)이라고 글을 만들어 돌에 새기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명 나라 전후의 조칙(詔勅) 및 조공을 바치면서 올린 일본의 글은 실로 왜황이 친히 명령을 받고 공헌(貢獻)한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신하로 하여금 가짜로 칭호를 조작하여 거짓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한 것이요, 천황이 제 나라에 천황노릇 하고 제 정삭(正朔)을 시행한 것은 만세(萬世)에 바꾸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왜황의 성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혹은 왕씨(王氏)라고 하고 혹은 원씨(源氏)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임금노릇 하는 법이란 다만 향을 태우며 하늘에 예배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이라 자칭하여 태고(太古)의 천황씨(天皇氏)에 비하고 처음부터 성(姓)은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선동천황(仙洞天皇)의 셋째 아들은 이름이 경인(慶仁)인데 기축년에 사위(嗣位)하였으며 나이 지금 26세다. 연호(年號)를 형보(亨保)라 하여 지금 4년이 되었다. 석가모니가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것과 같다.


  *** 신유한(申維翰) : 주백(周伯), 청천(靑泉)

요약  : 1681(숙종 7)∼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문장가.

개설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 출생지는 경상도 밀양, 거주지는 경상도 고령. 증조는 신구년(申龜年)이고, 아버지는 신태래(申泰來)이며, 어머니는 김석현(金碩玄)의 딸이다. 신태시(申泰始)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5년(숙종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제술관(製述官)으로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에 걸작품이 많고 사(詞)에도 능하였다. 최두기(崔杜機)와 친하였다.

저서로는 『해유록』·『청천집』이 있다. 유정(惟政)의 문집을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해유록(海遊錄)

   고전 수필, 기행 수필. 신유한이 조선 숙종 45년(1719) 4월 11일부터 이듬해 1월 24일까지 261일 동안(10개월간)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사행 일기(使行日記)이다.
신유한은 글 잘하는 선비를 발탁하여 문화 교류를 위한 책임자 역할을 맡기는 직임인 제술관으로 뽑혀 통신사 일행이 되었다. 그는 ‘해유록’에 일본의 국토 · 산천 · 기후 · 역사 · 도시 · 풍습 · 산업 · 의복 · 음식 · 가옥 · 인물 · 관제 · 병제 등 모든 분야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꼼꼼하게 기록했으며, 일본의 문인들과 교류한 경험도 담았다. 이 일기는 이후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만 하는 글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총 12회에 걸쳐 이루어진 통신사 관련 일본 기행문은 수십 종에 달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유록’을 문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는 것은 ‘해유록’의 문장이 유려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묘사와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비상(한철우)  / 다음 백과 <문학 작가>


청천집(靑泉集) 신유한 (申維翰) 1681∼1752 (숙종 7∼영조 28)字: 周伯, 號: 靑泉ㆍ伽倻樵叟, 本貫: 寧海 | 한국문집해제-규장각본
樂民(장달수) | 조회 21 |추천 0 | 2018.02.02. 11:49 

   
문집명청천집(靑泉集)(18C)
간략서지靑泉 申維翰의 문집. 6권 3책〈奎 5030〉ㆍ〈奎 6217〉
간략해제저자의 사후 遺稿는 문생들에 의해 수집되었는데, 저자와 선대로부터 교분이 있던 李瀰가 영남의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유고 중 뛰어난 詩文만을 선별하여 6권 3책으로 편찬한 것을 177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권1∼2에는 187題 413首의 시가 실려 있다. 신유한은 詩文에 두루 능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시세계는 현실에 대한 초월과 참여 의식이 함께 나타나면서 풍부한 낭만성을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성리학적 수양론을 염두에 두면서도 沿情論과 天機論에 입각한 性情之眞을 강조하는 새로운 문풍을 강조한 점도 주목된다. 권3에는 賦 4편과 書 31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서간문인 「與任正言-璞-論文書」는 신유한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는 글로서 특히 유명하다. 권4에는 序 17편과 記文 18편, 권5에는 記文 8편과 跋文 4편, 傳 1편, 贊 1편, 碑銘 3편, 祭文 13편, 권6에는 哀辭 3편과 雜著 22편이 각각 실려 있다. 이중 잡저에는 題後와 說, 錄, 敍事, 상량문 등 다양한 문체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叙與尹太學士-淳-論文事」는 신유한의 문학론이 피력된 글로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권두에 李瀰가 쓴 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경위와 연도를 알 수 있다. 권말에 「誤字改正章」이 첨부되어 있는데, 원집의 오탈자 등을 고쳐 놓은 일종의 정오표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3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4-6557〉, 〈4-6558〉),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 1034〉) 등에 동일한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편저자신유한 (申維翰)
저자개요1681∼1752 (숙종 7∼영조 28)字: 周伯, 號: 靑泉ㆍ伽倻樵叟, 本貫: 寧海, 父: 泰始, 生父: 泰來, 生母: 金海 金氏 碩玄의 女.
저자내용신유한은 1681년(숙종 7) 4월 15일 密陽 竹院에서 泰來와 金海 金氏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伯父 泰始가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養子로 들어가게 된다. 1698년(숙종 24) 18세에 高陽 金氏 金鼎重의 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11월 부친상을 당한다. 1705년(숙종 31) 25세의 나이로 進士試에 합격한다. 1708년(숙종 34) 3월 生父의 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生母의 상을 연달아 당한다. 1712년(숙종 38)에 杜機 崔成大와 詩交를 맺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중국 당 나라 때의 元稹과 白居易의 사귐에 비유하였다는 기사가 전한다. 그리고 가을에 矗石樓에 오른 기록이 있는데, 유명한 「題矗石樓」시가 이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713년(숙종 39) 33세의 나이로 增廣試에 甲科 壯元으로 급제한다. 1719년(숙종 45) 4월에 製述官으로 통신사 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간다.《海槎東遊錄》ㆍ《海遊見聞錄》 등의 使行錄은 이 기간의 견문을 저술한 것이다. 그리고 漢唐 때에 일본에 전해진 중국의 古典籍 100여 권을 구입해 온 기록이 전한다. 이듬해 1월, 일본에서 돌아와 復命하였고, 承文院 副正字를 거쳐 成均館 典籍이 되었다. 金昌集의 제청으로 명을 받아《太常寺志》 편찬에 착수한 것도 이 무렵이다. 1721년(경종 1) 봉상시 판관이 되고 이어 太廟 典祀官에 차출되었는데, 祭品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일로 臺諫의 啓斥를 받아 義禁府에 잡혀 들어갔다가 朝臣의 救護로 곧 풀려난다. 이듬해 茂長 縣監이 되어 갔다가, 1726년(영조 2) 무장에서 돌아와 僉正에 오르고, 다음해 平海 郡守가 되었다. 이후 봉상시 첨정, 扶安 縣監, 延日 縣監을 거치다가 1749(영조 25) 6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靈川(高靈)으로 돌아간다. 이듬해 崔致遠을 경모하여 향리에 景雲齋를 짓고 伽倻樵叟로 호를 삼았으며,《經學略說》과《易理粗解》를 저술하고, 「詩書正宗後題」와 「文章袞鉞」을 찬술하였다. 1751년(영조 27) 李周鎭, 李天輔, 南泰齊의 천거로 奉常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52년(영조 28) 6월 9일 高花洞 景雲齋에서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내용제목靑泉集 내용개요청구기호奎 5030
권수권제목:
序 (序1)李瀰가 쓴 서문이다. 영남에는 많은 문헌이 있지만 시에서는 최치원을, 산문에서는 김종직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라며, 신유한의 시문은 두 사람의 경지를 넘어 별도의 문호를 연 것이라고 극찬한다. 이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신유한을 높이 평가했고, 자신도 직접 신유한을 가까이서 보았던 인연을 함께 적고 있다.
권제권제목:卷一
奉李載允-顯坤-七歌-七首, 臘月偶以事出山到官城口占一律, 黃天用遇余官邸將別又贈一律走筆以和, 白蓮社贈別李天與-錫輔-二首, 香樓夜坐俯臨方塘口占, 黃天用自海上還過余白蓮社盛言統制樓船甚壯神仙舊跡髣髴可見且有所著詩律添一格雄奇余大喜卽和一篇,白蓮社唱酬詩-七首,香樓遇演初山人自湖南楞伽寺來喜爲詩-二首, 李一之別歸累日余意邑邑復次前贈韻奉寄-四首, 竹下居謝孫昌卿過訪-二首, 丁亥歲暮病蘇謝諸友以書問訊-七首(1707), 裵丈公山齋在竹村上頭甚淨而幽余往訪爲半日懽丈公命其胤秀才于天甫口拈五律韻-六首,幽棲累月感念成懷拈韻信手題詩贈華陽子-二首, 懷一之, 贈天與, 題白蓮菴, 咏書史, 湖西李士馨自海到香樓甚懽臨別要作韻語-二首,山中無伴忽憶鰲西金子長爲十二韻却寄, 立春日權大雅來吉過訪, 上元日到淸衙奉贈子舍兩大雅,十六夜余曁兩大雅共登香樓翫月時金子長黃天用諸君來會酒酣放歌一曲仍爲呼韻-三首, 次黃天用-龍瑞-見贈韻, 香樓夜坐與一之敍懷且憐別思漸緊, 黃天用讀書竹林寺賦詩寄思, 同李大雅夜燕次元美與于鱗登郡樓韻, 黃天用賦得春夢一首辭甚婉孌戲爲和奉-四首,李明府將歸進士黃龍瑞先唱別調遂次之,復以前韻奉別李載允昆季赴洛中, 坐中復呼韻共賦, 洛中與李慈仁-世擎-同宿呼韻唱酬, 黃天用有詩意若有不怡然者戲爲放語以和,淸江曲戲奉李秀才, 憶秦娥, 郭皆春-萬澤-筆法歌, 別詩五言絶五章奉送李一之-聖一-五首, 香樓夜坐與一之敍懷爲賦七言短歌, 賦得邊馬有歸心次李滄溟韻-三首, 長歌行, 情詩-二首, 采蓮詞-三首, 醉時歌奉盧積城丈, 將適商山渡洛江集李星卿-台壽-宅-二首, 次李慶山韻-二首, 早春夜對月獨坐聞星卿季通出獵未歸,將發商山奉酬內舅蒼淵公贈別韻-二首, 道州城樓別演初上人-二首, 和星卿早春曲, 和權南岡詠古-四首, 商山寓舍示同居諸友, 何草不黃行, 長安少年行, 安院驛贈李季鷹, 到商山次內舅韻-二首, 怨歌金鹿盧行呈雞林李侍郞-宗城-二首, 次三淵金居士孤峯亭韻-二首, 竹林風雨歌, 秋夜贈孫秀才, 贈華山上人師安, 磧川寺過方丈英禪師-五首, 金沙曲寄初上人-四首, 石榴花-二首, 題矗石樓, 筆園夜話有述五十韻-幷序, 暮秋客夜士集以二律見贈自敍其落魄之思因念吾旅懷不平切切如風簷落木之響感而和寄-三首, 果州酒店待孫督郵, 晨發果州口占, 到郵亭留歡數日將向嶺南自敍道里游觀因寫平生心素得八十韻留奉孫督郵, 行到娥林與金使君-始鑌-唱和-二首, 情詩二十韻書贈月中花, 詩成金使君戲云海無艭之語得亡遼闊詒阻乎余遂作會眞詩二十韻以續斷絃且供一笑,憶同遊五十韻寄贈元秀才-景夏, 靈川館奉李學士-廷濟-夜話有述四十韻-四十首, 海上贈林君-萬華-二首, 癸巳登第時士集以二律賀余率爾和奉(1713), 朝陽閣次板上韻奉洪御史-致中-二首, 平海客舍次西坡板上韻贈李使君-益馝-二首, 越松亭又次西坡韻-二首, 春夜海上詠崔士集山有花歌感別多懷因得六十韻, 代贈春詞三十韻-三十首,羽林郞裴君輓歌-二首, 伽倻山贈演初上人-二首,野城作客牢愁鬱結自敍平生六十韻-六十首,書情四十韻奉李季鷹兼懷士集, 道與洪上舍文饒敍別, 復以一律奉洪使君, 洪參奉-濟猷-挽
권제권제목:卷二
到商山和李星卿,行至成歡驛奉和舅氏二首, 舅氏和余贈文饒韻余亦和之,又和星卿別余韻二首以奉舅氏-二首,舅氏得參郵書用余韻寄詩余又和寄,舅氏作送余韻二首余又裁成五言-三首, 又以濱字韻寄參郵-二首,舅氏又成別韻二首余和其一,稷山倅金東翼有詩余與舅氏共和以寄-二首, 又用前韻奉舅氏-二首, 奉和舅氏述懷-四首, 奉和舅氏, 舅氏得參郵書及詩喜甚賦七律余和之, 復次舅氏詩寄參郵-三首, 舅氏於天安水仙亭與崔注書-守範-相會拈汾西七言律韻賦三篇歸而使余和之篇成並寄崔崔乃余同年以其尊堂作郡天安來省云-二首,戲用稷山韻增成七言自嘲自解, 驛樓南路翫半吐芙蓉二朶謾成二十韻情色艷佚頗有白家門風題罷一笑,天安郡齋與崔同年-守範-共賦-三首, 奉贐昇平南使君-九明-十六韻-十六首, 奉和金稷山詩稿中十絶句, 舅氏和余歡城韻以當驪駒余復和奉, 奉和終南莊賞花詩軸韻-二首, 和士集秋響別詩-二首, 中秋夕與士集會飮終南李上庠宅-二首, 會金正言-啓煥-於稷山靈通村同賦,自成歡將歸弊廬次內舅夜坐見贈韻, 山有花曲-九首, 君馬黃曲-幷引-三首, 月善君宅有小幛畫山水甚奇請余題詩,送萬頃權使君-相一-莅任-九首, 金光漢自呼五明狂客訪余郡齋留數日飽談金剛諸勝頗爽客懷臨別次其所贈詩韻-二首, 山人國坦自通度寺來謂與雪松大師同棲雪松名演初余方外友因贈五言三篇兼示雪松-三首, 雪松見余詩和寄余復和之倒用韻, 金進士-應鏡-守藏史五臺山過余郡齋索詩, 梧月樓與三陟李使君一源-秉淵-抽劍南韻, 步出前林, 病中得崔士集洛中唱和之什次韻却寄, 任學士-聖方-詩與崔書偕至感深述懷, 復用前韻述懷續呈士集, 學士臺感懷-二十首, 立春夜坐次駿兒韻, 暮春游海印寺贈訥上人-三首,士集爲長延宰即專伻致書且曰向者吾兩人必五年一會邀請甚勤病中欣慰因寄-三首, 長延縣齋詩軸-六首, 吳伯玉-瑗-邀作避暑會翌日和示少陵苦熱韻-二首, 和赤岸李仲晦-相顯-韻-二首, 奉和槎川李翁懸弧日韻-二首, 除夕和士集見寄, 士集新除柏臺有寄三絶句喜甚却和-三首, 尹學士士弘-光毅-訪余旅舍自誦其所和士集三絶句詞華暢麗余又和呈以申惠好-三首, 題熊淵精舍-二首,二月二十日赴任漣川强引官醪因吟自慰, 遊攢翠巖遣悶述懷-五十首, 輓姜生-柱華-二首, 寄洞陰任使君-瑢-十首, 午發澄波江, 朝過通津, 祖江行, 到衙又被他役將赴楊州, 霖雨歎, 南山長短句奉李京兆相公-衡佐, 醉歌行奉巵齋任長公-珽, 又作晦洞逍遙歌奉任和仲-璞, 金判書-始煥-葬漣川乾井洞作輓九歌, 太常直廬聞李侍郞-宗城-出寓桐江-三首,士集在水原鄕莊寄詩三首喜甚即和-三首, 金參判-啓煥-輓歌-七首, 送尹學士-光毅-出宰臨陂縣-三首, 苦寒在京邸得任和仲見寄詩蒼勁可誦因和之-二首,嶺南僧南鵬携其祖師松雲事蹟乞詩都下得公卿大人題墨已多余於是有宿緣次軸中韻-二首,白雲僧智門携詩軸來訪, 太常直中聞士集與尹學士士弘任承旨-聖方-任進士-景潤-諸賢會飮南山松澗且有投詩速招之語余辭以在公使人齎酒一甁遙酌諸公因和見寄三絶以謝厚意-三首,陽川江閣宋相國-寅明-命韻-四首, 泮宮試圍幹事經旬秋懷有述, 大殿春帖子-二首, 大殿延祥詩-四首, 相隨歌二闋奉餞宣城金使君光遂赴任-二首,毗瑟山人慧澄訪余京中寓舍片語知非塵土間得與之約後會於頭流雲月漫筆俚詞以別, 烏川寫懷二十二韻寄晦洞, 贈梅妓-幷引, 使節旬宣歌十絶句奉呈觀察使南公-泰良-十首,裁詩樓與金使君成仲-光遂-共賦,奉和萊州使君-洪重一-見酬裁詩樓韻, 更和槎川翁見寄萊府七言歌, 和陜川任使君-安世-二首, 兄山江舟中贈南生-碩老, 次野城沈使君-師周-三江遊韻-二首,通信副使竹裏南公泰耆方乘月槎歷扶桑謂余曾有偸桃之緣願得紀行詩篇替作指南車余今髩髮星星矣十洲佳處杳然如夢强草日東竹枝詞七言三十四首以佐櫂謳且曰珍重愼行李必以所得於彼者遞歌而和之也-三十四首, 曹學士-命采-東征歌, 正使洪公胤郞有以軍官陪往書一律贈行, 庚午元日(1750), 奉謝苞山使君-洪應麟-見過和余壁上元日韻-二首, 奉和東閣-鄭昌兪-見贈韻-三首, 敬次東閣喜雨詩-三首, 竹院孫處士-壽民-輓歌-五首, 景雲齋偈, 景雲齋歌, 題景雲齋, 奉呈息山李處士-萬敷
권제권제목:卷三
秋篁對 (1)문생인 朴秀才를 저자가 권면하기 위해 지어준 글이다. 秋篁은 가을의 대숲을 뜻하는데, 신유한이 堂 뒤에 100여 竿의 대를 심은 것을 가리킨다. 추위와 더위에도 제 빛을 바꾸지 않고 늘 곧은 대의 덕성으로 문생의 교훈을 삼은 것이다.
抽懷賦 (3)저자가 자신을 司馬遷에 견주어 감회를 적은 賦이다.
淸香樓賦 (8)맑은 향[淸香]이라는 누각의 명칭을 제재로 하여, 주변의 경관과 함께 자신의 감흥을 분방한 필치로 적은 賦이다.
擬赤壁賦 (9)1742. 漣川 縣監으로 재직 중 관찰사 洪景輔, 陽川 縣監 鄭歚과 함께 적벽강에 배를 띄우고 노닐며 지은 작품으로, 蘇東坡의 「赤壁賦」를 依倣한 것이다. 이때에 저자는 賦를, 정선은 그림을, 洪景輔는 記文을 각각 남겼다고 전한다.
上李學士-廷濟-書 (11)學士 李廷濟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자유분방한 莊子的 필치가 특징적인 글이다.
與李季鷹-世璜-書 (11)季鷹 李世璜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李世璜의 글을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與崔士集-成大-書 (13)士集 崔成大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세사에 경황이 없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하는 글이다.
書與李仲晦 (14)저자에게 시에 관해 조언을 청하는 仲晦 李相顯에게 답한 글이다. 詞華聲曲이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그 일에 대해 싫증이 난다고 하여, 세상의 이름 있는 시인이나 문인으로서보다 평범하게 세속을 떠나 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
答李三陟-秉淵-書 (15)槎川 李秉淵에게 답장으로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제목의 三陟은 이병연이 일찍이 삼척부사에 재직한 데서 유래한 명칭인데, 시에 능한 그를 일컬어 ‘李三陟詩’라고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자가 지은 梧月樓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與李三陟書 (15)李秉淵에게 답장으로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이병연의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한 글이다.
與崔士集書 (16)崔成大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관리로서 생활과 필요한 물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與崔士集書 (17)崔成大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어지러운 당시 세상에 대한 저자의 심경을 전하는 글이다.
答崔士集書 (19)崔成大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안부와 함께 三南 城邑의 상황에 대한 저자의 심경을 전하는 글이다.
答崔士集書-二 (21)崔成大에게 보내는 문안 서간이다. 최성대의 시를 평하면서 詩人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答李參議-宗城-書 (23)李宗城의 편지에 답하는 글이다. 자신의 처지를 ‘生意甘衰白, 天涯正寂寥.’라는 杜甫의 시구를 인용하여 빗대어 술회하는 내용이다.
答金靈巖-墰-書 (24)金墰의 편지에 답하는 글이다. 그동안 서로 주고받은 시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上兪鐵原-㝡基-書 (25)兪㝡基에게 올리는 안부 서간이다.
與任正言-璞-論文書 (26)任璞에게 문장에 대해 논한 서간이다. 저자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 있는 글로서, 전통적인 文章을 紀事, 紀言, 紀物로 나누어 그 연원을 설명하였다. 우리나라 문학의 開祖로는 崔致遠을 꼽고 있다.
答金麟蹄-光遂-書 (31)金光遂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崔致遠을 경모하여 伽倻山 아래 景雲齋를 짓고 생활하던 당시 저자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答東萊伯洪公-重一-書 (33)洪重一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홍중일이 편지에 적어 보낸 시를 칭찬하고 자신이 지은 시의 구절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答東萊伯書 (34)洪重一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시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관심사를 전하는 내용이다.
答通信副使南公-泰耆-書(36)通信副使인 南泰耆의 편지에 답장하는 편지글이다. 伽倻山 아래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회를 전하고 있다.
與任谷山-珽-書 (36)任珽에게 보내는 서간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沈盈德-師周-書 (37)沈師周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늙고 병들어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만 벼슬을 그만 두지도 못하고, 옛글을 익혀 좋은 시문을 쓰고 싶었던 젊은 날의 포부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심사주의 시문집인《三江錄》에 대해 평하고 있다.
與趙慶州-明鼎-書 (38)趙明鼎에게 보내는 서간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李生-敏德-書 (39)李敏德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崔士集書 (40)崔成大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최성대가 새 관직을 맡은 것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자신의 벼슬살이에 대해 적고 있다.
上南漢留守李公-宗城-書 (42)南漢留守인 李宗城에게 올리는 서간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悔軒鄭伯英-儁-書 (43)鄭儁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생의 악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세상 일이 꿈과 같고 이슬과 같다는 부처의 말에서 위안을 얻었노라고 고백한다.
上南觀察-泰良-書 (45)觀察使 南泰良에게 올리는 서간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與芝山李斯文書 (46)이석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고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과 딸을 결혼시켰다는 것 등의 소식을 전하고,《도덕경》의 문자를 쓴 일로 죄를 얻게 된 데 대해 소회를 전하고 있다.
與芝山李斯文書-二 (47)이석에게 보내는 서간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與尹進士-東星○後改名東昇-書 (48) 尹東昇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다.
答李伯深-思游-書 (49)李思游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鄭進士-震瑞-書 (49)鄭震瑞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이다.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권제권제목:卷四
送李東望-柱泰-之燕序 (1)李柱泰가 燕京에 가는 것을 전송하여 쓴 贈序이다. 지금의 중국 사람은 육경사서를 읽지 않고 胡服을 입으니 중국인이 아니고, 시서예악은 모두 동방에 있으므로 우리가 중국 사람이라고 한 뒤, 중국이 이주태의 존재를 알게 하라고 격려한다.
追和崔士集-成大-別詩序 (2)崔成大의 別詩에 和韻한 시에 덧붙여 쓴 序이다.
送萬頃權使君-相一-莅任序 (4)1727. 이 해에 萬頃(지금의 김제)의 수령을 제수 받고 가게 된 近巖 權相一(1679∼1759)에게 주는 序이다. 권상일의 인물됨과 그에 대한 권계, 그리고 그를 통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奉壽金護軍八十九序 (5)金護軍이 89세가 된 것을 축하하여 쓴 贈序이다. 장수를 기원하며 그의 덕행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平海郡先生案序 (7)平海郡先生案에 대한 序文이다. 주로 서명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적은 글이다.
奉贐任書狀-珽-赴燕序 (8)任珽이 書狀官으로서 燕京에 가는 것을 전송하여 쓴 贈序이다.
賀元騎省-景夏-狀元序 (10)이십년 지기인 元景夏의 장원을 축하하여 쓴 贈序이다. 그의 뛰어난 문장을 칭찬하면서 부단한 정진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奉送冬至副使金參判-龍慶-赴燕序 (12)冬至副使인 金龍慶이 연경에 사행을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글이다.
念佛契序 (13)寶蓋山 주위의 善男善女들이 信心으로 모여 만든 念佛契에 대해 쓴 序文이다. 저자가 불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을 미루어 보면 저자가 특히 만년에 佛敎에 깊이 심취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杜機詩選叙 (15)杜機 崔成大(1691∼?)의 詩選集《杜機詩選》에 대한 서문이다. 최성대는 詩文에 뛰어나, 金昌翕 이후의 제일인자라 칭해진 문인이다. 저자와 친교를 맺고 화답한 시작품이 많다.
送李子循-達中-游金剛山序 (16)李達中이 金剛山에 유람가는 것을 전송하여 쓴 贈序이다. 금강산의 명승을 찬미하고 부러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贈朴聖光-履-序 (18)저자와 同鄕으로 進士인 朴履에게 주는 序文이다. 先秦 兩漢의 글을 중시하는 저자의 문학관이 나타난 글이다.
贈鄭幼觀-瀾-序 (20)伽倻山에 은거하고 지내는 저자를 찾아온 鄭瀾에게 주는 序文이다. 古文, 天機 등 문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鄭蒙仙書序 (21)저자가《列子》와《莊子》에서 글을 가려뽑고 각각 그들의 출생지명을 따서《鄭蒙仙書》라고 명명한 책이 있는데, 이 글은 그 책의 序文이다. 老莊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신뢰를 확인할 수 있다.
奉送通信正使洪公-啓禧-往日本序 (22)1747. 이 해에 일본사절단의 통신사가 되어 사행을 가게 된 淡窩 洪啓禧(1703∼1771)에게 전하는 序이다. 일본에 대한 정보의 제공을 통해 저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펼치고 있다.
送趙太史-明鼎-赴燕序 (24)趙明鼎이 연경에 사행을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글이다.
贈鄭大哉-元始-序 (26)鄭元始에게 주는 序文이다. 金丹 등 도가적 내용이 담긴 글이다.
比鰍堂記 (28)比鰍堂에 대한 記文이다. 堂名을 붙인 경위와 의미를 적은 記文이다.
木覔山記 (29)남산에 올라 서울의 전모를 바라보며 쓴 記文으로, 인재를 등용함에 서울과 지방의 차별을 두고 또 당파로 나뉘어 배척하는 폐해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雲水庵記 (30)佛僧 會閑上人의 부탁으로 雲水庵에 대해 써서 준 記文이다. 운수암 주변의 경계와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平海郡軍官廳記 (31)저자가 平海 郡守 시절 수축한 軍官廳에 대해 쓴 記文이다.
客舍新修記 (32)큰 비바람에 무너진 客舍를 新修한 데 대한 記文이다. 客舍를 신수한 경위와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梧月樓記 (32)저자가 창축한 梧月樓에 대한 記文이다. 누정 주변의 경관과 창축 경위에 대해 적은 글이다.
長延好會記 (33)최성대 등과 長延縣에서 가진 모임에 대한 記文이다. 모임에 관한 경위와 내용을 담고 있다.
新莅漣川縣記 (34)저자가 漣川縣監으로 부임하여 지은 記文이다. 임지인 연천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서술한 것으로서, 연천의 환경과 백성들의 생활에 주목한 글이다. 연천의 척박한 지세와 백성들의 피폐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遊熊淵記 (35)저자가 몇몇 사람을 이끌고 熊淵에 가서 노닐었던 일을 쓴 記文이다. 그때의 정황과 흥취를 생생한 필치로 담고 있다.
澄波江泛月記 (37)朴天休 등과 함께 저자가 泛月의 놀이를 한 일을 쓴 記文이다.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四美亭記 (40)저자가 피폐한 고을인 연천에서 무기력한 관직생활을 하던 중, 관아 옆의 버려진 땅에 ‘四美亭’이라는 정자를 세운 일의 始末을 적은 記文이다. 고을에 정자 하나를 세움으로 인해 연천의 상황이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觀許相國恩居堂園記 (41)許穆(1595∼1682)의 恩居堂을 저자가 보고 쓴 記文이다. 은거당의 설립 경위와 허목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淸華洞記 (44)저자가 연천에 부임했을 때 그곳에 있던 淸華洞을 답사하고 쓴 記文이다.
李相國葬禮時壙中石標記 (45)李相國의 葬禮時에 壙中에 두는 石標記이다. 고인의 행적과 인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攢翠巖記 (46)연천의 寶蓋山 남쪽 기슭에 있는 攢翠巖에 대한 記文이다. 攢翠巖 주변의 풍경을 적은 글이다.
縣齋與諸生讀書記 (47)저자가 연천에 재직할 당시 현의 齋室에서 여러 문인들과 독서하고 시문을 지은 일에 대한 記文이다.
紺岳山記 (48)紺岳山에 대한 記文이다. 紺岳山 주변의 풍경을 적은 글이다.
是閑亭記 (50)是閑亭에 대한 記文이다. 누정 명칭의 유래와 주변의 경관을 담고 있다.
권제권제목:卷五
二可齋記 (1)二可齋에 대한 記文이다.
畯喜樓記 (2)畯喜樓에 대한 記文이다. 누정 명칭의 유래와 주변의 경관을 담고 있다.
東川夜雪好話記 (4)저자가 東川에서 눈 내리는 밤에 몇몇 문인들과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한 일에 대한 記文이다.
海月樓記 (5)海月樓에 대한 記文이다. 누정 명칭의 유래와 주변의 경관을 담고 있다.
淸明閣記 (6)저자가 영일현감으로 있으면서 읍을 옮기고, 그로 인한 관아의 신축에 대한 記文으로, 遷邑改治의 始末을 적고 있다.
觀瀾李先生旌孝閣記 (8)李承曾의 旌孝閣에 대한 記文이다. 고인의 덕행을 찬미하고 孝閣의 유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景雲齋與鄭生履寅讀書記 (10)景雲齋에서 鄭履寅의 방문을 받고 함께 讀書한 내용을 적은 記文이다.
慕軒記 (11)慕軒은 舜임금의 부모 공경의 뜻을 본받아 저자가 지은 것이다. 이 글은 軒을 지은 경위와 ‘慕’의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
林西河集跋 (13)고려시대 문인 林椿의 문집인《西河集》에 대한 跋文이다. 임춘의 행적과 문학에 대해 적은 글이다.
新刻松雲大師奮忠紓難錄跋 (15)松雲大師의《奮忠紓難錄》을 새로 인각한 것에 대한 跋文이다.
海雲雙遊圖跋 (17)《海雲雙遊圖》의 跋文이다.
野城三江錄跋 (18)《野城三江錄》의 跋文이다.
朴節士傳 (19)박유라는 인물이 효와 충을 어떻게 구현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박유는 영남 사람으로서 壬辰倭亂 중에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605년 돌아온 인물이다. 이후 늦은 나이에 무예와 학업에 정진하다가, 다시 丁卯胡亂이라는 국가의 위기를 맞아 전쟁에 참여하여 충의를 실현하며 죽게 된다. 저자는 이 인물의 삶을 통해 충효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故西河任學士臨終詩贊-幷序 (24)任珖의 臨終詩에 대한 贊이다. 그의 인격과 덕망을 찬미하고, 그가 남긴 시문에 대해 적고 있다.
孤雲寺事蹟碑 (25)孤雲寺의 事蹟을 적은 碑文이다.
法廣寺釋迦佛舍利㙮重修碑 (27)法廣寺의 釋迦佛舍利㙮을 重修하면서 세운 碑文이다.
洛巖大師碑銘 (29)洛巖大師의 墓碑銘이다.
祭鳳巖崔公守慶文 (32)鳳巖 崔守慶에 대한 제문이다.
笠巖祈雨文 (33)기우제를 위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祭厲神文 (34)癘疫을 방지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祭文이다.
漣川縣社稷祈雨文 (36)기우제를 위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寶盖山川祈雨文 (36)기우제를 위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祭堂叔文 (37)堂叔에 대한 祭文이다.
祭故友金天開文 (38)옛 친구인 金天開에 대한 祭文이다.
寶盖山川祈雨文 (40)기우제를 위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祭厲神文 (40)癘疫을 방지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祭文이다.
祭金木川-湜-文 (43)金湜에 대한 祭文이다.
祭任參判-守迪-文 (44)任守迪에 대한 祭文이다.
祭故友李潤若-垕聖-文 (46)옛 친구인 李潤若에 대한 祭文이다.
祭昆侖崔學士-昌大 (48)副提學을 역임한 昆侖 崔昌大에 대한 祭文이다.
권제권제목:卷六
申孺人哀詞-幷序 (1)原城 元文仲의 부인인 孺人 申氏에 대한 哀詞이다. 부인의 志行의 훌륭함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鄭一吾-守道-哀詞 (3)一吾 鄭守道에 대한 哀詞이다. 저자가 長沙에서 목민관을 맡고 있을 때, 博學多識하고 詩文에 능한 선비인 鄭守道에 대해 알게된 내용을 다룬 글이다.
南子章哀詞-幷敍 (4)南子章에 대한 哀詞이다. 南子章은 저자가 延暘의 현리로 재직할 당시 嶺南按察使로 부임해 있던 인물로, 이 글은 그의 훌륭한 덕행을 찬미한 것이다.
書孫仲深-壽玄-史記抄 (7)仲深 孫壽玄이 15세의 나이에 司馬遷의《史記》에 심취하여, 손수 초록하고 애독한 일에 대해 적은 글이다.《史記》의 가치를 중시하는 저자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莊子盜跖篇後題 (8)제목 그대로《莊子》 「盜跖」편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적은 글이다. 기존에 제출된 「盜跖」편에 대한 견해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논쟁, 그리고 그로부터 산출된 견해를 거부하고 자신의 논리로 새로운 결론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題楚詞卷末 (9)《楚詞》의 卷末에 적은 글로서,《楚詞》가 가지는 높은 문학성과 위상에 대해 적은 글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楚詞》를《詩經》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題士集秋響別詩後 (10)1716. 이해 가을에 저자가 일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최성대를 만나 「秋響」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이 글은 그 시에 붙인 것이다.
題金稷山-東翼-詩藁後 (11)金東翼의 詩藁에 적은 글이다. 시를 애호하는 김동익을 칭찬하고,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叙與尹太學士-淳-論文事 (12)尹淳에게 문장을 논한 글을 써서 준 것이다. 저자의 문학론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유명한 작품이다.
書元黃州-命龜-碑文後 (14)元命龜의 碑文 뒤에 쓴 글이다.
讀金人銘後題 (15)金人銘을 읽고 쓴 글이다.
書烈婦韓氏傳後 (16)1743. 한 여인의 烈을 그린 작품이다. 도입부에서 밝혀져 있듯이 원래 李用休(1708∼1782)가 지은 「烈婦韓氏傳」을 읽고 쓴 글이다. 그런데 독후감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이루고 있어 改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짓게 된 동기인 도입부, 韓儒人에 대한 本傳, 論贊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僞鶴事 (18)1741. 이 작품은 저자가 61세로 漣川縣監에 재직하던 때에 지은 것으로 寓言의 형식을 빌려 지은 점이 특징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단에는 ‘僞鶴’에 대한 일화가 제시되어 있고, 후단에는 객이 찾아와 ‘僞鶴’의 일과 관련하여 제시한 의견과 그에 대한 저자 자신의 견해가 표출되어 있다.
題李仲浩詩卷 (19)李仲浩의 詩卷에 적은 글이다.
書杜樊川文集抄卷 (20)杜牧의 문집을 초록한 책에 적은 글이다.
尙古堂自叙後題 (21)尙古堂에 적은 글이다.
書許生西漢文抄 (23)許生은 저자에게 글을 배운 許汝楫이고, 西漢文抄는 그가 직접 쓴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西漢 古文을 뽑은 책이다.
書鑿龍門卷末 (24)秦漢 古文을 가려 뽑은 鑿龍門의 卷末에 저자가 적은 글이다.
金司直殉節錄 (25)1744. 壬辰倭亂 중에 㺚川 전투에서 申砬(1546∼1592)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司直公 金逸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보여준 충의 가치 등이 잘 나타나 있다.
李子野字說 (27)東京의 尹인 李公의 장남 子野의 이름에 대한 작명 경위와 의미를 담은 글이다.
節士贈軍器副正廣陵李公忠烈錄 (29)1751. 丙子胡亂 중에 雙嶺 전투에서 순국한 영남 사람 李瑞雨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인물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준다.
書鵝山桂石卷 (32)鵝山桂石에 적은 글이다. 서명의 경위와 의미를 적은 산문이다.
題詩書正宗後 (33)詩書正宗의 말미에 쓴 題文이다.
題宜閒錄 (34)權台式의 시고 宣閒錄에 대한 題文이다.
迎日縣衙舍上樑文(35)迎日縣의 衙舍에 올린 上樑文이다.(박종우)


 



일세를 풍미한 영남 시인 신유한(申維翰) | 성대중 청성잡기


樂民(장달수)

    조회 39 |추천 0 | 2017.06.20. 01:54


일세를 풍미한 영남시인 신유한(申維翰)

 

   신유한 주백(申維翰周伯)은 영남 출신으로 도성에까지 명성을 떨쳤는데 나이 서른셋에 장원 급제하였다. 숙종(肅宗) 기해년(1719)에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가던 길에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 상공을 방문하여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당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이 설악산에서 서울로 들어와 그의 형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삼연은 평소 신유한의 명성을 잘 알고 있어서 처음 만났지만 구면인 듯하였다. 그의 시권(詩卷)을 보자고 요청하고는 일본으로 가는 배가 떠나기 전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사신 일행이 부산에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리다가 배가 출발하려는 참이었는데 홀연 설악산에서 온 승려가 삼연이 빌려갔던 시권과 삼연의 시찰(詩札)을 신유한에게 전해 주니, 삼연이 과연 약속을 어기지 않은 것이었다. 삼연의 시는 다음과 같다.

명성은 남도에서 일어났는데 / 聲名自朱鳥
발자취 이제 또 동해로 가네 / 足目又歸墟
천지는 동남쪽이 기울어졌고 / 天地東南缺
문장은 굴원(屈原), 송옥(宋玉) 따를 만하네 / 文章屈宋餘

돛 달고 유람하던 사 강락(謝康樂)이요 / 揚帆謝康樂
붓 들어 휘갈기던 목현허(木玄虛)로다
/ 肆筆木玄虛
보게 되리 섬나라 용궁 속에서 / 將見蛟宮裏
청라동(靑蘿洞) 남긴 글 전해지는 걸 / 流傳蘿洞書

   여기서 ‘청라동 남긴 글’이란 바로 신유한의 시축(詩軸)으로 청라동에서 지은 것들이다. 신유한이 삼연의 시를 보고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이 내가 사부(辭賦)에 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신유한의 시 역시 청신하고 생동감 있었으니 그는 왕세정(王世貞)이반룡(李攀龍)을 배워 그들의 묘리를 터득한 자이다. 그가 충주에 갔을 때 절구(絶句) 두 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충원이라 고을에 이르러 보니 / 行至忠原縣
저 아래 탄금강 흘러가는데 / 下有彈琴江
거문고 가락인가 여울물 소리 / 灘聲似琴調
구름 피는 창가에 기댄 나그네 / 征客倚雲牕

이른 새벽 새재에 올라와서는 / 明發上鳥嶺
낙동강 물줄기 굽어본다오 / 俯瞰洛東江
저기 저 강 오른편 내 집 창가에 / 儂家在江右
매화나무 버드나무 우거졌겠지 / 梅柳掩前牕

   일본에 갔을 때 물무경(物茂卿)이란 자가 있었는데 문장을 잘하는 선비였다. 그 역시 왕세정이반룡을 좋아하였고 스스로 문장을 통해 도를 깨쳤다고 여겼는데, 신유한의 시를 보고는 당시(唐詩)의 풍격에 아주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유한은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해서 시를 빨리 짓지 못했으므로 일본인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허나 그의 《해유록(海遊錄)》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무릇 남쪽 땅의 일개 선비로 30년 동안이나 도성의 문단을 주도하였는데 어찌 아무런 까닭이 없겠는가.
   신유한과 동시대에 영남에는 그 밖에도 시에 능한 자가 많아서 김시빈(金始鑌), 권만(權萬) 같은 자가 모두 문장을 잘한다고 자부했지만 모두 신유한을 떠받들어 그와 시재를 다투려 하지 않았다. 김시빈이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있던 신유한에게 보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학과 같은 그대 모습 깃 없어 유감이니 / 君姿如鶴恨無翎
아득한 봉래(蓬萊) 영주(瀛洲) 무슨 수로 날아가랴 / 其奈蓬瀛隔杳冥
《황정경(黃庭經)》 읽을 곳 곰곰이 따져 보니 / 細算黃庭堪讀處
세간엔 오직 하나 월송정이 있으렷다 / 世間惟有月松亭

   권만이 신유한을 위해 지은 만사(挽詞)에,

그 누가 그대들을 해동에 나게 했나 / 誰遣若曹生左海
한가로이 벗들 함께 영주로 올라갔네 / 等閒流輩上瀛洲

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유한을 위해서만 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영남 사람들은 김시빈이나 권만보다 신유한의 시를 더욱 애송하였다. 이미(李瀰)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너무 많이 인출하는 바람에 얼마 안 되어 목판이 닳아 훼손되었다. 그러나 그 판본에는 좋은 글이 많이 누락되었는데 충주에서 지은 절구 두 편과 평해 군수 재직 시의 여러 작품들이 모두 빠져 있다. 그의 조부의 무덤이 영덕(盈德)에 있는데 문필봉(文筆峯)이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주-D001] 천지는 동남쪽이 기울어졌고 : 
   중국의 전통적인 지리 관념에 의하면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아서 모든 강물이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여기서는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신유한(申維翰)이 동남쪽 영남 출신임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2] 돛 …… 목현허(木玄虛)로다 : 
   강락(謝康樂)은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으로 강락은 그의 세습 봉호이다. 사영운의 시는 강남의 뛰어난 산수를 유람하면서 경치를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목현허는 서진(西晉) 시대의 시인으로 현허는 그의 자이고, 이름은 화(華)이다.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고 유일하게 해부(海賦) 한 편이 《문선(文選)》에 전한다. 여기서는 통신사의 일행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는 신유한을, 배를 타고 강남의 뛰어난 경치를 유람하며 많은 산수시를 남긴 사영운과 대해(大海)의 광대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한 목화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3] 왕세정(王世貞) : 
   명나라의 문인으로 자는 원미(元美), 호는 봉주(鳳州) 또는 엄주산인(弇州山人)이다. 젊을 때부터 문명(文名)이 높아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고,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이왕(李王)이라 불리며 명대 후기 시단을 주도하였다.
[주-D004] 이반룡(李攀龍) : 
   명나라의 문인으로 자는 우린(于鱗), 호는 창명(滄溟)이다.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을 중심으로 하는 홍치칠자(弘治七子)의 복고설을 계승, 왕세정 등과 고문사설(古文辭說)을 제창하여 진한(秦漢)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고 한(漢)ㆍ위(魏)ㆍ성당(盛唐) 시의 격조를 중시하였다.
[주-D005] 봉래(蓬萊) 영주(瀛州) : 
   모두 전설상의 신산(神山) 이름으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D006] 황정경(黃庭經) :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도교 경전이다.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에서 만난 도인에게 이 경전을 써 주고 대가로 거위를 받아 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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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游錄[中] 申靑泉維翰著 / 九月    ㅡ 신유한(申維翰) , 1719

十二日辛巳

[DCI]ITKC_GO_1379A_0020_010_0030_2004_001_XML DCI복사 URL복사
晴。使臣以人馬不齊之意。貽書京尹。欲令馬島人知罪。奉行輩惶甚請行。遂發。閭町男女簇路華艶。與昨一般。行十餘里。愈往愈新。度三乘橋。橋長百餘步。高十丈許。左右有欄。欄柱皆銅鐵冒。甚壯也。又十里踰小峴。夾路人家皆酒店。地勢近峽。村落或稀少。居人各設酒餠煎茶燒芋。列置路旁。以待行者覓錢。當罏女子。必傅粉鮮衣。盤皿亦淨新。倭俗器不潔不食。見主者色陋亦不食。所以列店多姣姬。晡抵大津。閭里人民亦殷盛。是爲近江州地。使行館于本長寺。余則有別舍蕭洒。支待官靑山因幡守。遣一僧致牘。謂以公務多煩。未卽承晤。意甚惓惓。僧名貞侃。略解文字爲禪語。觀其意。欲乞我手書而去。以爲主官光色。余寫兩絶句給之。正使相患瘧。停行仍留宿。昏暮震浩自淀城。綰行李追到。備言兩晝一夜。彷徨鬱念之狀。人情喜慰。是日行三十里。


12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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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음. 사신이 하인과 말이 일정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경윤(京尹)에게 글을 보내어 대마도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자 하니, 봉행의 무리가 매우 겁을 내어 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출발하였다. 거리에는 남녀들이 길에 총총 서서 화려하고 어여쁜 것이 어제와 같았다.
   10여 리쯤 가니 갈수록 더욱 신기하였다. 삼승교(三乘橋)를 지나는데 다리의 길이는 백여 보였고 높이는 10장(丈)쯤 되었으며 좌우에는 난간이 있었고 구리와 쇠를 씌운 난간의 기둥은 모두 웅장하였다. 또 10리쯤에 작은 다리를 건너가니 길 좌우의 인가들은 모두 술집이었다. 지역이 두메에 가까워 촌락이 혹 드물기도 하였는데, 주민들이 각각 술ㆍ떡ㆍㆍ군 토란[燒芋] 등을 길가에 벌여놓고 길가는 사람을 기다려서 돈벌이를 하였다. 술상 앞에 앉은 여인은 반드시 분을 바르고 고운 옷을 입었으며, 소반과 그릇들이 또한 깨끗하고 새 것이었다. 왜인의 풍속에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먹지 않고 주인의 얼굴이 누추해도 먹지 않으므로 모든 주점에는 아름다운 계집이 많은 것이다.
   신시(申時)에 대진(大津)에 당도하니, 거리와 인민이 또한 번성하였다. 여기는 근강주(近江州)의 땅이다. 사신 행차는 본장사(本長寺)에 관(館)을 정하였는데, 나에게는 따로 고요하고 깨끗한 집에 머물게 하였다. 지대관(支待官) 청산 인번수(靑山因幡守)가 중 하나를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공무가 번다하여 곧 만나지 못한다.’ 하여,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중의 이름은 정간(貞侃)인데 조금 글을 알아서 선어(禪語)를 하였다. 그의 뜻을 살피건대, 내가 쓴 글씨를 얻어 가서 주관(主官)에게 생색을 내려 하므로 내가 두 절구(絶句)를 써서 주었다. 정사(正使)가 학질(瘧疾)을 앓으므로 가기를 정지하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어두울 때에 진호(震浩)가 정성(淀城)에서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쫓아와서, 두 낮 하룻밤 동안에 방황하고 답답하였던 정상(情狀)을 갖춰 말하니, 인정에 기뻐서 위로하였다. 이날 30리를 행하였다.




申製述海遊錄[下] / [附聞見雜錄]     ㅡ 신유한(申維翰) , 1719

附聞見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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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有八道六十六州六百三十四郡。用明天皇時。定爲五畿七道。文武天皇時。分爲六十六國。山城太和河內攝津和泉。卽畿內五國也。伊賀伊勢志摩尾張參河遠江駿河伊豆甲斐相模武藏安房上總下總常陸。卽東海道十五國也。近江美濃飛驒信濃上野下野陸奧出羽。卽東山道八國也。若狹加賀越前越中越後能登佐渡。卽北陸道七國也。丹波丹後但馬因幡伯耆出雲石見隱岐。卽山陰道八國也。播摩美作備前備中備後安藝周防長門。卽山陽道八國也。紀伊淡路阿波讚岐伊豫土佐。卽南海道六國也。筑前筑後豐前豐後肥前肥後日向大隅薩摩。卽西海道九國也。言其地方則東自陸奧西至肥前四千二百里。南自紀伊。北至若狹。不過九百里。此其連陸之地。東西長而南北短。然海中諸道。如永良多彌一艘八丈甑島之類。星羅碁布。地或有倍於對馬者。皆不列於六十六州。而其相去亦各數千里。爲島主者曰君曰侯。而受命於日本。治軍賦習戰艦。材穀土產百貨之貢。輻湊國中。所以自有日本。便得稱皇帝建年號。自爲正朔云者。比趙佗黃屋。亦優矣。○余與雨森東論方域曰。嘗聞陸奧州廣大無涯。北接蝦蛦島。東西五十日程。南北六十日程。此果信傳否。東曰。傳者妄矣。陸奧比諸州差大。然其地方不過數日程。其北果有蝦夷島。有稱松前守者管之。本非大地。地惡不可居。居民面黑有毛。不識文字。便同禽獸。但其被服言語。爲日本人矣。○在馬島時。遙望東南海上。有島如拳。似與壹岐對峙。問是何地。倭言是名驢島。地廣人衆。爲筑前州所管。而在馬島東水路六百餘里云。○日本地形。在天地之正東。與我國齊等而差高。唯對馬島在我國之南。而水路不過五百里。自馬島東北行三千餘里。而至大坂。自大坂又東北行一千六百里而至江戶。江戶之地。東南皆大海。而其北陸尙遠。直至野人界。以此揆之。我國之關東諸郡。可與彼之山城大和等地相値。而江戶以上。便當嶺北之六鎭。然東方日月所出。最爲陽明。其寒凜不若我北關。使行十月留江戶。而寒色物候。與我三南九十月同矣。○倭言若自陸奧。直到朝鮮東北。則水路甚近。而北方風高。海無島嶼。所以不得行船云。又聞秀吉入寇時。欲從陸奧出我境。海中有沮洳沒膝者三百里。布以竹籬。欲渡兵馬而竟未遂計云。其言怪誕不足信。然蓋論地勢。似爲便近。而自古兩國。一不開路。必有險難故也。○余與雨森東筆談時。問日本在大海中。或有異人異物。如山海經所記神怪之狀。漂到境內否。東曰。海外諸國之來賈於長崎者。阿蘭陀西洋國諸人。而衣服言語。▣不同。形骸則別無異者。但十餘年前。不知何處人。破船漂沒。其船及裝物。無一收拾。有一夫漂岸得生。髮長不斂。垂之覆額。兩脚皆靑色。膝無蓋骨。狀若竹竿。不食五穀。喫鹽數升。言語不通。故終未辨何國人而死。余曰。大荒經。有玄股之國。脚下靑色。可謂玄股而但無食鹽之文。不可考。○又問東海中有女人之國。或有見聞否。東曰。日本與海中諸國。水路相通。若有女人國。則千百年故老相傳之言。豈無一見其人乎。日本東南海中。有八丈島。地大民衆。而皆是女子。男則什二三。俗號爲女子鄕。古所謂女人國。似出於此。而今爲日本封域云。余意上古神人之所記。皆據海島鴻荒之始。故其土風人物。或因近似而得名。今則風移俗變。百無一可驗。而自秀吉統合以後。諸國之合屬於日本者。必多此類。○問紀伊州。有徐市 徐福祠。福等之入海。在秦皇燔書之前。故世傳日本。有古文眞本云云。至今數千年。其書之不出於天下何也。東曰。此說悠悠。歐陽子亦有所言。然皆不近理。夫聖賢經傳。自是天地間至寶。神鬼之所不能祕。故古文尙書。或出於魯壁。或見於大杭頭。日本雖遠在海中。自有不得不出之理。日本人心好夸耀。若有先聖遺籍。獨藏於此。而可作千萬世奇貨。則雖別立邦禁。當不能遏其轉賣。況初非設禁者乎。○徐福入海之後。莫知所向。世之好事者。仍言福之子孫。至今爲倭皇。五百童男女。各爲氏族。始有倭國。此乃無稽之言。夫開闢以來。有土斯有人。有人斯有君長。倭地並合諸島殆數千萬里。佳山麗水膏壤沃野。百穀豐焉。萬寶生焉。此豈待秦時而有人。豈待徐福而有君耶。徐福父子。本以方外異人。見海中可居之地。而爲避秦之計。以采藥之說。得樓船男女而去。其時中國。不知有倭地。地之饒樂如此。福之居於日本死於日本。似爲可信。而其爲子孫及五百男女遺種。皆易其姓。遠而無徵。
國中名山水沿路所見者。莫大於富士山琵琶湖。嶺之險者。獨有箱根嶺。其他愛宕山摺針嶺金絶河六鄕江之類。並無可論。陸奧之金華。下野之日光。伊勢之熱田。紀伊之熊野。皆以名山著稱。而自非目見矣。倭俗妄誕。務爲神異之談。曰富士山一日自出。琵琶湖一日自開。此其靈變之所設。故四方游觀者。必齋而後免於殃禍。富士則齋滿一旬乃可。琵琶則齋一日亦可。余聞而笑曰。若然則不但富士琵琶。天地間一土一石。何莫非造化之神所辦設耶。又聞熱田山有太眞院。此假明皇夢游太眞院之語。欲以熱田爲蓬萊。而虛置宮觀。喚作仙窟。安知熊野之徐福祠。亦非此類耶。一笑。○國中諸山。發祖於東北。故觀其地勢。亦東高而西下。大抵山形秀麗。卽高岡大麓。必奇姸峭拔。而無雄險壯遠之勢。其外殘山抱野。淺岫籠流。率皆蕭森朗麗。若在畫圖中。水亦源本不塼。變環淨碧。似由翦鑿而成。其人之敏晳者多。而朴厚者少。蓋得其江山之氣。
日本曆法。與我國大同而小異。自謂其地在日出之東。故晷刻長短。與中華不同。朔之大小。互有差池。嘗觀其冬至。間日先後。而除夕則無異。彼其日月參差。而歲獨不變。殊未可曉也。○成汝弼。解占星。在海上望星。指點言南方七宿之外。有諸大星。皆我國所未見者。似是老人星。余曰古語云。得見老人星者。壽過百歲。今君此行。可以眉壽。李長興思晟。亦曉天文。以爲方書中老人星。自無現證。雨森東在傍曰。吾不解甘石家。然竊有怪焉。日本僻在海中。能以星紀分野之法。分排於國內諸州。各有星土定位。而著於國史。自古及今。其地之吉凶休咎。亦能彷彿有應。如中國人所占之言。其理誠難究矣。言甚可笑。然天文星宿。不但爲中國而示象。則度外九州之外。推占吉凶者。又非獨日本矣。○四時名節。略與我國相似。而八月初一日十月初一日。亦爲俗節。端午中元日。最爲佳節。端午則家家樹旗。爲習戰之戲。如我國兩男角力之類也。中元則上山懸燈。歌舞娛樂。每人各懸一燈。子孫多者或至數十燈。酒食兼備。以餉家中人云。○冬寒不猛。自古無雪下盈尺之時。國無藏氷之法。唯富士山頂。四時凝氷。端午日采之。獻於天皇關白之宮。庶民則作餠如氷形呑之。謂之禦署之方。可笑。陸奧州出黃金。金山在海中。采金者必齋沐而祭於神曰。請得金幾萬斤。然後乃入。稍溢其數。歸船必敗。石見佐渡但馬等州產銀。備中播摩產銅。豐前豐後產鐵。攝津州多木花。越前州多雪綿。筑前州多米穀。相模州多材木。壹岐之布。加賀之絹。美濃之紙。赤關之硯。杉原之酒。宇治之茶。韜浦之茵席。皆國中名品。甲斐州出馬。馬多而駿。削鬃鬣。縛藁履着蹄而行。長門州出牛。體小而色黑。是無屠宰之法。而所產僅僅不能給農場。備前尾張薩摩等州。出長槍利劍。爲天下美器。○海產魚品。一如我國東海魚。而石決明最多。靑魚大口魚連魚松魚文魚古刀魚。只產於北陸山陰諸道。山猪肉獐肉鹿肉及皮物之貨。亦北賤而南貴。蔬菜各種。皆如我國。而菁根之長。過尺而無味。芋之大者如盂。剖而煨之。賈於市。人爭取食以禦飢。果品。橘柚最繁。到處成林。柑之小者曰蜜柑。味甘故得名。其大如拳者。曰九年母。昔有何物嫗。稱以九年母者始種樹。故得名。金橘。色香俱美。而味酸不可食。他梨棗桃李柹栗之屬。皆如我國。而眞瓜。長而味淡。西瓜。瓤赤而味甘。花卉。菊爲盛。梅竹次之。絲櫻茶花枇杷蘇鐵棕 。盡爲名品。冬柏。家家必植。取膏資生。絲櫻花。葉淺細長。枝䙚䙚如垂楊。又有海棠而垂絲者。如紅絲貫珠。聯絡可愛。茶花則隆冬盛開。枇杷則冬華而夏子。亦異物也。所不產者。果無柏子胡桃。鳥無鶯鵲鷹鸇。獸無虎豹。藥無人蔘。食無蜂蜜。是二者。皆得用於我國。故甚貴。飮食之甘者。皆和雪糖。燭用鯨膏木液。至於胡椒丹木雪糖花糖黑角孔雀羽等物。皆非日本土產。而或出閩淅。或出南蠻諸國。是其海賈交通於長崎島。貿取金銀。故日本人得之。轉貨於東萊。則我人呼之爲日本物貨云。○余與雨森東。食柑問曰。此物。我國南方海邑。亦或有之。濟州則所產甚多。逐年納貢。而其味皆不如貴國之柑。柑亦有美種否。東曰美惡各隨土宜。寧有種乎。昔年有貴國船隻。漂到於籃島者。其人與物。已盡沈沒。而獨於破舡餘板中。得柑子一籠。籠上有文書。卽濟州牧使所貢。故自官上聞。然後發其籠。柑皆腐敗不可食。島中人以爲他國物而貴之。取植其子。樹成而名曰濟州柑。今所謂濟州柑者。味甘而品好。與此無別云。○余在江戶時。有一倭人。作筆語問之曰。日本無虎豹。雖未知其狀。而但聞其獰牙鉤爪。食人爲糧。一吼而蒼崖且裂。烏獲孟賁之勇。亦莫敢當前。若果然矣。貴國之多用虎豹皮。未知何術而屠之。余曰。天地間食人之獸。無不爲人所食。如夏育太史噭。身死於庸夫。此固理也。我國之制虎豹。或以穽或以鳥銃弓箭。西北邊郡之材官勇士。皆以鐵匣蒙臂。能使手格殺者比比。又有食虎之獸。名曰羆。而此輩則亦無所畏群倭相顧失色。大抵日本。非徒虎豹。亦無熊羆貙狼之食人者。人皆脆弱。長於詐謀而短於威武。其爲聽聞驚怯如此。○倭人又問。貴國人蔘。性味天生乎。或有人方而造成否。余曰。藥性以天稟爲貴。有毒者。泡製之外。不致傷損。況此靈藥。豈容人力。倭言日本亦有草。莖葉與根。一如人蔘。而服之無味。亦無其效。或疑有造成之方。而今聞公言。則日本所產。必是似而非者矣。○余見倭人所用器皿百物。皆玄漆如鑑。宮室船板橋輿等處。亦皆施漆。漆光照耀。與我國所見判異。若專以漆木之液。而塗澤如此。則彼其庶民之家。一歲所用漆液。度不下數斗。而公侯貴人。當用十斛而不足。然所過閭里山野。亦未見漆林。心甚怪之。問於倭人。則曰靑柹搗取汁貯之器。善藏於密。經年不變。日本漆法。先用柹汁而塗之。再三塗乾。磨以彭葉。然後其光炯然。乃加漆液。所以漆小而色美云云。其言又不可信。○飮食之制。飯不過數合。味不過數品。極其草草。隨食更添。無有餘遺。飯後飮淸酒。次進果。果後啜茶而罷。酒以諸白爲上品。以白米麴。和白米飯而成。故名曰諸白。梅酒桑酒忍冬酒覆盆酒。味佳而香烈。練酒則如我國梨花酒。醬則雜用豆麪而造成。味乍酢而色麤。餠如我國仁切味者甚多。有曰篠粽者。如我國拳拇餠。而裹竹葉以蒸。狀如竹筍。以十顆爲一把。有曰外郞餠者。與篠粽略同。而長可尺餘。有稜有節。色赤味甘。裹以竹葉。狀若竹竿。饋之者書以一竿二竿云。有曰饅頭。如我國霜花餠。而外白內黑味甘。有曰養命餹。如我國白餹之類。而柔軟不膠。有曰求肥飴。黑糖之類而狀如煎藥。有曰淺冶飴。卽天門冬和雪糖者也。有曰唐糕。如我國雪糕而和餹味甘。衣以胡麻。食之最佳。又稱卞果子者。倭俗謂乾爲卞。蓋用乾字之半 雪餹水調米麪末而爲菓。其狀或方或圓。大小相雜。其色靑紅斑白。或施金銀。如我國氷沙果藥果之類。而不用油煮。麪則有絲麪索麪。稍細曰索。至細曰絲。葛粉和蕎麥而爲之。縷長不絶。帖而成卷。調湯色白。其味亦佳。湯餠則用粘米餠。圓厚者二枝。貯器中合水醬。味乍酢而可食。○饌品以杉煮爲美。雜用魚肉菜蔬百物。和酒醬爛煮。如我國雜湯之類。昔有群倭避雨於杉木之下。飢甚思食。各以所有之物。合投於一器。而炊杉木以煮。其味便好。因爲得名。方言謂杉曰勝技。故俗呼勝技冶岐。冶岐又煮之訛音也。魚品以粕漬爲美。沈魚酒糟中。味熟淨拭。如我國食鹽魚之類。而別無奇者。又有卞鰹爲名者。狀如牛角堅難破。觀其肉理。似是我國古刀魚之肉厚者。搗合而成。倭人必於煮羹及麪湯時。以刀磋切爲末。用調滋味。謂大口魚曰鱈。銀口魚曰鰷。道味魚曰鯛。古刀魚曰鮎。或曰鯖。魴魚曰紅魚。或曰鰤。鰱魚曰鮭魚。賊魚曰?。乾者曰卞。生者曰鮮。沈鹽曰鹽漬。沈糟曰粕漬。此外水鳥。全其毛而乾之。海螺不去其殼而烹之。點塗金銀。以爲宴享之華羞。○盛食之器。有曰杉重一組。以杉木板爲三層盒。上貯餠餌。中貯果菜。下貯魚肉。斑絲織組係其腰。檜木爲之則曰檜重。白木樻曰白折。采色者曰花折。五層大榼曰櫥。饋酒曰一荷二荷。倭人運物。必以肩荷。荷則前後兩桶。故其曰一荷者。酒至兩桶。其他羹飯酒果日用器皿。皆用紅漆黑漆木器。或有白鐵器。而元無鍮器。宴禮則酒用土杯。而赤埴陶成。狀如接匙。而制甚朴陋。上自君長。下及閭氓。以此行杯。謂之尊敬。其意蓋出於主客之禮。以誠爲主。故不飾浮文。示以古朴。行於酬酢之間云。國中貴賤男女。無一飮水之法。而必飮茶湯。卽家家蓄茶。甚於穀物。茶是雀舌之類。而或取靑芽。搗乾細末。溫湯調飮。或以長葉煮湯。去滓而飮。每食後必健倒一盂。至於市街道路。設壚煎茶者。千里相望。使行大小數百人。日日所供。各得靑茶一合葉茶一束。而所過館中。別置茶僧。晝夜煎湯以待。其俗之日用常禮。莫茶若也。 我國所謂南草。本自東萊倭館而得來。俗諺呼爲淡麻古。卽倭音多葉粉之訛也。倭人所呼。亦如我國之諺。而其義則取多葉草而細粉故云爾。觀其蒸乾殺毒。細切如絲。每人必具煙管二枚。遞易而吸之。不令熱氣逼喉吻。食物之致精如此。○倭人最重鯨膾。必峻價而買之。以爲宴客之華饌。柔滑脂澤。別無異味。余謂通事曰。聞日本人捕得一大鯨。可致終身富貴云。果然否。答曰。奚止於終其身。可以傳世。公侯貴家。以鯨膾鯨醢。爲第一名品。取之者不惜重價。日本燈燭。皆用鯨膏。而鯨肉一拳之大。能得膏一盂。是其販膏之利。立致萬金。齒膏鬐鬣。皆造器物。其利亦衆。所以海浦居民。有曰捕鯨將者。聚徒費財。設網罟器械。其得而致富者亦鮮矣。○倭人善造葛粉。以葛根沈搗作末。而軟細精白。味甘性冷。作麪最佳。爲菉末則不能如我國之精。故馬島之歲貢於江戶者。朝鮮菉豆粉云。
世傳日本舊無衣制。人皆裸體。而晉武帝時。百濟王阿花。以裁縫女工之法貢遺。日本始有服色云。其言考今觀所謂公服。略如我國團領之制。而袖廣如僧衫。旁無衽殺。但有兩旁直縫。又爲帖縫衣腰前後各七八寸許。以垂之。亦無所帶。其色有紅黑之差。世族最貴者黑色。而餘皆紅色。其次則用兩幅爲單衫而無袖。狀如半臂。承之以袴。結束於腰。其次如我國道袍之類。而前無衽旁有裾。此皆尊前通用之服也。袴制有三。必以靑白交織爲之。制如我國女人四幅袴。前後各有襞積。而前三後二。又有紐以結之。上半則不縫。而後面別付小板黑漆者。長可五寸餘。廣可二寸。橫貼於腰爲帶樣。此貴者之服。其次制如唐袴。而其長過足。曳地數尺。諸倭之尊前盛服者着之。其次長不掩足而窄甚。僅能容脚。此下賤者極寒時所穿也。冠制有三。其一略如紗帽。而低圓若鉢蓋。纔掩髮際。上有冠。梁尖而高。削黑木簪。橫揷於梁。而後有一角。長可尺餘。廣可數寸。聳出而乍屈下垂。又以長纓。從幅上結於頷下。世族官貴者。用紫絲纓。餘皆紙繩白色。此爲冠之最上。而關白以下各州太守着之。其一狀如丁字。謂之烏帽。其一狀如機杼。前有兩隅。名曰折烏帽。皆糊紙爲之而黑漆。各州奉行以上有職名者着之。而公私禮一着之後。更無平居着冠者。可笑。○僧徒有官品紫衫者爲上。黃衫者次之。餘皆緇衣。衣制略如深衣。而兩袖廣闊。裳幅或直或殺。袈裟如我國僧所着。而長廣有加。頷前合襟處。用鐵環拘之。皆內有寒暑長衣不設袴。頭無冠巾。卽湛長老菖長老。入見使臣。亦以赤頂對坐。江戶傳國書之日。兩長老入關白宮庭。始見其頭上有物。如櫝蓋之狀。長可尺餘。廣可容頭。漆以黃色。戴於頂上。後掛兩肩。未知厥名云何。而宮庭所着。則何不用之於外。一笑。○平民衣服。男女無別。皆如我國女人長衣之類。袖闊而短。其色多靑質而白紋。女子雜用綵繪花草之狀。望之如畫中佛。男無所帶。而女則以大帶束腰。男女皆用半幅靑布。自臍下遮前陰。無裙裳袴褌之屬。履則貴賤皆藁履。只設一條繩鼻。以鉗足指。襪亦分岐。穿繩而行。或以木皮爲笠。狀如篛笠而平廣。男女戴之。禦暘避雨。雨衣則用絹用紙作衫袖。單衣靑綠畫漆。寒具則佇絮尺帛以覆頂。狀如囊。女子有紅白雪綿子加頭。及紫色絹四角掩之。○倭俗坐必跪膝。無論貴賤男女老壯兒弱。有坐則跪。雖路畔當壚女。田中刈禾人。必以雙膝着地。斂衣而坐。觀其法。不由於修飾禮容而然也。蓋以其衣。前無旁衽。下無股褌。不如是。則難以祕陰陽。法生於不得已。而習慣成性。可笑。○又有最可笑者。關白殿上諸執政貴近之人侍者。着公服帶板之袴。則袴短而跪。故兩股間懸白布數尺。從後垂之。着長袴則其長過足尺許。皆曳地而行。群臣動作。綷綷有聲。紛亂席上。而以此爲敬。各州太守之家。其臣攝政以下又如此。蓋觀其法。以倭俗輕趫。勇於持刺。爲其君長者。慮有變。使之行步不便。運身有碍。不敢生事於衽席之間矣。國法又以徒跣爲恭。故下賤萌隷。生不着襪。各州攝政諸臣。見其太守而徒跣。太守又見關白而徒跣。令人失笑。余於過路驛壁。見畫天皇宴游之狀。金銀輦轂極華美。前後從官紅黑衣曳白布者。簇簇步行。其足皆跣。所見之可駭。如關白宮中。而群倭仰觀其畫。咸雀躍傾慕。若覩天上眞仙。可笑。宮室之制。務極精潔。不施丹雘。而棟樑纖細。瓦輕蓋密。甍高而簷低。木片蓋木皮蓋疊疊如鱗。功緻而完固。茅蓋則積累甚高。形如覆盆。可支四五十年。用板爲壁。每一面必設三粧子。推轉開闔。而無樞環之制。一間之廣。皆爲三步。而一國皆同。無毫髮差爽。每間鋪茵席三張。又無差爽。是以障子與茵席。或缺其一。則雖置於他方而補之。皆如合符。國中所用尺度之精。可知也。其爲堂室複道庖廩浴室。皆在連架結構之內。一屋之大。或至數百步。穿房出壁。或見曲墻如畫。方塘如鏡。又轉而歷重闈。或見怪石疏篁名花擁階。又入深廊密屋。錦帳紅氈。文木爲楣。接壁爲案。可憑可臥。令人入不知所從。出不知所向。簷際設長槲以承溜。屋頭置水桶以備火。庭場鋪細石。雨行不泥。閤道懸紙燈。夜行不迷。此其京外富貴人第宅之大較也。雖關白所居之宮。精緻有餘。而宏傑不足。帳御鋪陳。亦與州府館舍無別。蓋以工巧爲尙。而專昧禮法。國君之居。不立制度。而平民富豪。亦可與王侯競奢。其無等級如此。○國中王宮民屋。悉無置堗厝火之法。但於餔板之上。設重茵雪綿褥以寢。鼎鐺炊熟之器。皆別置於廚。煙火不相接。但於極寒時。房中去一板設地壚築土而熾炭。以小床着其上。床如我國小窓。有諸竅以通火氣。覆以衾褥。有升坐而取汗者。有擁旁而炙手足者。夏月暑時。蠅蜹甚稀。此則以室中精潔無汚。魚肉腐敗者。卽埋于土。廁間臭穢者。卽移田畔。蠅蜹無從而化矣。蚊蝱一起。則以靑絲苧布爲方帳。罩四方木機。其高可令人起坐。而中可容一人寢臥。俗呼溷廁曰雪隱。雪隱之旁。必有浴室。浴室中置大桶貯水。旁有一床。床上置白紵布數尺。其俗如廁之後。必洗浴。故有桶有床有巾。男女交合之室。亦設此具云。○寺刹則結構高大。倍於王宮。以連抱木爲圓柱。被以黃金。戶牖皆文木。軒楣黑漆如鑑。但不丹靑采色。而壁間時有畫。其稱寺者。或無奉佛留僧。而爲天皇諸子法王所居。及賓使行留之館。佛宇亦在閭里中。僧徒與甿俗雜處。時見民家有坐觀音金像。緇徒數人。立而擊磬。又有高大金佛。露坐於道傍者甚多。而造像之工。似不如我國矣。○溪山勝處。必有精廬別館。蕭灑精朗。有若羽人道士之居者。必曰關白以下各州太守所置茶屋。卽其往來游息啜茶飮酒之所也。又見路傍左右。時有別立草舍一二間。絶妙可憩。問之則乃爲貴人行路溷廁而設矣。
官制。其品有九。不曰品而曰位。亦有正從之別。有曰大執政左右執政。猶古之三公。而大將軍最貴。大納言爲亞相。而中納言小納言。如古之給事黃門之類。式部治部民部兵部刑部宮內省。是爲六官。而各有卿大小輔大小丞等官。掃部織部。掌灑掃織造之官。大藏。掌租稅。準人。掌儀仗。膳部。掌饗膳。典藥。掌醫藥。采女。掌女官。太學寮。掌文學。彈正寮。掌糾愆。中將小將左右衛門左右兵衛左右馬寮兵庫寮。皆掌宿衛。百官之職。各有官司。其稱寮者。必有頭允助三秩之官。稱署者又有首佑令使之官。各以其職。爲六官之屬。各州則有守有介有目有掾。守猶刺史也。介猶別駕也。目猶主簿也。掾猶司馬也。此其內外職之大略。然前世則天皇秉政。故帶官名者。各治其職。而自天皇尸居以後。關白以正二位大將軍之職。總理六十六州。瓜分各州之地。以爲宗室執政等食邑。而大小官舍。徒假空名。而有謝恩之禮。天皇之六官三公。今不知何如也。○余觀日本官名與所帶之職。箇箇不相關。如源正岑之河內守。源忠辰之駿河守。源重之之太和守。源重治之近江守。悉非其州之守也。源直惟之掃部頭。源繼友之中納言。源久忠之內膳正。平方誠之拾遺。又非京司之官也。彼其治在東道。而稱守於西州。身爲外守。而托名於內職。官銜與職掌。相去千里。而一州之太守。或至四五。意甚怪之。私問於雨森東。東但曰。日本官制。與貴國大異。雖言之。公必未易曉。亦有不欲言者云云。蓋其天皇立官。本有定名。內而三公六官百執事。外而六十六州之守。序級分明。大小畢具。自關白摠國之後。不爲別立官名。而假天皇之爵位。以馭其大臣。大小除拜雖出於關白。而爵帖必用皇章。謝恩亦於皇朝。是惟授官在天皇。故因舊名而不易。授職在關白。故隨所管而任事。其曰某州守某部官者。皆天皇所給。而其曰某城主者。乃關白命之也。關白雖稱國君。而在天皇之廷。則爲正二位大將軍之班。皇京之正從一位。必是大納言左右執政大執政之類。故爲關白之三宗室執政。世臣者。不過得朝散大夫正從四位中將中納言掃部頭之官。而無大納言以上之稱者。爲其越尊之嫌也。關白之使諸臣典邑食廩。亦出於治兵之制。而不立百官儀度。典邑者又各有攝政奉行記室之臣。所食六十萬石云者。以其所掌之地。一年田賦。可出六十萬石。而軍兵一人一歲之俸。乃二十五石。則一百石而養兵四人。一萬石而得兵四百人。十萬石而爲四千人。地廣者廩多。廩多者兵衆。其廉於割俸而謹於養兵者。謂之能官。而增之以賞。其黷於私藏而軍伍多蹙。謂之不臧。而削地以罰。居官戮力。務在治兵。故其有地邑者。皆曰武職。而所謂文學之任。如林信篤者流。則雖才兼管葛。不能守尺寸之地。但如醫官僧法。月食料廩而已。○烏山集中。有所稱丞相亞相大宗伯諸人。當時天皇大臣正從一位之資。而彼於軍國大事。一無與焉。土地人民。不格於政敎。而但得空名。以寄於上。焉在其爲尊貴也。又觀日本古史。有高麗王遣使奉表之語。而其時皇太子。見其辭意慢侮。怒裂其表。囚治使者云云。而我 朝通信。則在關白統國之後。故與關白通書。而使者乘軒鼓吹。睥睨天皇而過之。其於關白之位品。不必問也。辛卯使行時。則關白私自稱主。而今則執恭不居。回書中但曰日本國源吉宗。而不稱位號。蓋以大將軍爲號。則不可與隣國抗禮故也。雨森東謂余曰。若使貴國。詳知日本官品。則必有難便之端。故不敢盡言云云。其意似以其君之正二位爲不尊。而恐我國有所爭競矣。○各州之攝政奉行。亦皆世襲。其稱準人采女兵衛等號。用天皇官名。而品位又下於太守所得之班資。此則國君所命。而其外記室醫官之類。太守皆自辟而用之。對馬島以接款我邦。故事務最繁。加置裁判之官。是亦太守所命。故位在奉行之下。而廩料倍於記室矣。○余在江戶。嘗從容謂雨森東曰。竊觀貴國規模。亦有依倣於中華者。君知之乎。東曰可方何代。曰春秋戰國時。天子衰微。威福不在於王室。齊桓晉文。假天子之空名。以令諸侯。千乘之國。有百乘之大夫。百乘之家。各有宰臣。以治其邑。所謂宰臣事大夫。便作君臣。有主孤死義之法。卽孔門弟子。皆仕於大夫之家。今見貴國天皇。不親政。關白以下。但用其爵命。而曰君曰侯曰大夫。有城邑百官庶事。悉歸於大夫之家臣。而各州之攝政奉行諸人。又與太守。私作君臣之分。各能辦一國之事。如此者可方於戰國之世。東驚謝曰。是誠的論。然中華則此法只行於戰國。而日本則百世無弊。是爲難耳。余又曰。地形與民俗。視中華不同故也。周之末。列國分爭。政不由天子。所以諸侯大夫。以國爲家。戰伐相尋。民不堪命。故秦皇出而呑周。統一天下。政令皆出於上。然後有擇人授官。考課限三年之法。漢唐以下。皆用此法。貴國則僻在海中。無隣國用兵之禍。諸州大夫。狃於傳襲。而上下無異意。此其國祚不窮。而法亦不變。所以至今無弊。然自有天地人以來。實無一事一物。至於億萬年不改者。安知此後日本之官制。復有如秦漢者乎。東嘆曰。是卽識理之言。
田制則三十步爲一畝。十畝爲一畽。一畽上稅八石。中稅六石。下稅五石。一石。卽我國之二十五斗也。市廛則三步爲一間。六十間爲一町。三十六町爲一里。里之五町。卽田之三畝也。人家則每間稅銀五錢。工商則各以其物。什一而稅。每一町置一里門。以爲五家之法。一市有掌一市收稅者。其名座。一里有掌一里民役者。其名曰肝煎。外方則一村有管一村之事者。其名曰莊屋。各州則所管太守。各自收稅。而倭京大坂界濱兵庫天河崎今須墨街鳴海赤坂新居見付三島大礒新奈川等處。則地方雖屬於各州。而市閭之征稅。皆輸於關白。至於薩摩之籠島。肥前之長崎。又是商賈輻湊之所。故亦有關白別藏。大抵國中人民之衆。室廬之繁。市肆之富。多在於大路之傍。都邑之地。海舫停泊之處。行者轉貨。居者得利。不畊不織。而侈其衣食。高門華屋。連亘阡陌。然州國之稅法甚刻。秋毫不漏。遠村農民。則終歲畊作。盡歸公府。而豐年樂歲。半菽難繼。至有自鬻其妻子。貧富之不均。皆出於國法之弊。而但見其民。一納其稅。無他責應。關白以下各州太守出入之時。皆無調發夫馬及站路供億之費。通信使行許多役人及支供凡物。日以千萬計。而皆自官賃沽。一毫不煩於民。所以保民者以此。
兵制最爲精强。各州太守。皆爲武職。而所入田賦。悉爲養兵之具。軍兵一人。歲給廩二十五石。而無他繇。置將官百石以上。又割地以與之。力役收稅。任其自爲之。將官者或不拘於元定之數。虐民萬端。沒數輸入。各以所賦之地。養其部曲。而平民之膏血日盡。不入於兵家。則衣食無從而出。故民皆竭力自售。思託於將官部曲。而旣許爲兵。則其身不敢自有。死生飢飽。皆在於將官之手。一名膽薄。而到處不見劍佩差劣。而人類不見齒。刀鎗之痕在面前。則指爲勇夫而得祿。在耳後則指爲善走而被斥。蓋其法令之敺人如此。而衣食之原。無他路。彼所以輕生敢死者。初非爲主慕義也。又非天稟然也。實爲自謀其身也。是以平居軍卒。服習成性。遇事則如奔蛟突豕。見賊則如燈蛾轍螗。將雖駑材。而得士死力。卒雖脆弱。而勇於赴戰。此雖蠻夷種落之本習。而可謂得養兵之術矣。○軍兵試藝。每月六次。水有舟師。陸有步軍。皆以砲手爲上。而甲斐騎兵。薩摩劍士。最稱饒勇難敵云。其爲兵器。劍銃最精。佩劍者必以長短雙帶。長者用以擊刺。短者投而中之。出人不意。無不立死者。銃則有大中小三制。小者爲行用。中者其體稍大。載於轆轤而行。大者長可一丈。大如我國天字銃。只用於守城。鎗竿細而長。亦有單枝三枝。上懸黑白羽。或以紅氈爲旗。廣可寸許。長可尺餘。弓制以木爲榦。夾竹而膠之。纏藤而漆之。其長丈餘。力弱不能遠射。矢亦短細而羽廣。似難穿札矣。倭人見我國大弓。皆驚㥘。關白別擇力士彎之。不能開弦。使我軍官楊鳳鳴。引滿發矢。上下觀者皆絶倒。○國有四民。曰兵農工商。而士不與焉。兵則最逸。衣食有餘。商則雖富。稅法太重。工則伎巧而價廉。農爲最苦。而一年輸稅之外。無他繇役。蓋於四民之外。別有儒學僧徒醫學。然國俗。醫則功在活人。故醫爲上。僧徒次之。儒爲末。所謂儒者。學爲詩文。而無科擧仕進之路。故苟得聲譽。而爲各州記室。則能食累百石廩米。以終其身。不得則求入於兵家。又托於醫。余於驛路站館。有投文而求見者。或曰某地醫官。或曰某城武臣。其文字往往可稱。蓋以文士而爲醫爲兵。以求祿食者也。○各州太守出入時。左右擁立者。黑羽旗紅氈旗。皆有鎗尖。軍卒夾鳥銃爇火繩。以備不虞。奉行以下。必使人持槍旗而先導。記室諸人亦然。其爲儀度。皆出於武職。而不見一種文具。○各州人。皆有標識。觀其帷幙船帆及衣服。領後必以黑色爲標。標形或方或圓。或如梅花。或如木葉。如太極圖如品字。又於品上加一畫。各隨其地方而異之。若預知各地之標。則望其帆而知某地之船。見其人而識某州之人。此亦爲軍制而設。欲使部曲不相見亂。如我國各營各哨服色旗色之別。然束萬民於衣領。使平居出入。不敢相混於東西。則其法之峭刻。可知也。○其俗本無等威。宮室輿馬衣服器物。則僭踰無制。而但名分一定。則上下截然。敬畏遵奉。不敢怠忽。使行往來之路。見支待諸官。太守奉行以下。多有庸孱癡騃。不省人事者。而其徒不敢仰視。匍匐而行。聽令承使。不失尺寸。帶劍而司門。則兀坐門內。達夜無倦。設茶而待。進則擁爐爇炭。頃刻不離。凡有所呼。應之如響。不用笞扑。隨事皆辦。夾路觀光者。悉坐正路之外。小者居前。稍大者爲第二行。又其大者在後。次次爲隊。肅整無譁。數千里所見。無一人妄動犯路。蓋其人心俗習。皆如孫武穰苴之軍。此非有禮敎而齊之也。國君與各州太守之政。一出於兵制。而大小民庶。所見而習之者。一如軍法。
國無冠婚喪祭之禮。男子則未冠者。只削中央頭髮。留頂前腦後。有室之後。並削頂前。而存腦後一撮。長可四寸許。以紙繩括之。屈曲向上。此爲成人之儀。而或見前頭不剃。總髮於腦後而爲屈曲者。女子則束髻如唐制。而頂上無分岐。直總於腦後。三朶貼褶。鬈曲下垂。繫以白絲。而緩其髻。頂揷玳琄梳。已嫁者齒皆黑色。以鐵液水和藥含之。其齒卽染。少娥未適人及娼女。皆皓齒。婚娶則不用聘幣。而只於婚夕。送婦于夫家。彼此族黨。盛設燈燭威儀。以爲迎送之禮。而兩家各辦酒食。歡宴賓客云。喪祭則君親之喪。亦無擧哀服喪之節。飮食言語。一如平日。人死則取屍趺坐于木桶中。築石爲坎。立木爲標。貴人侯家。乃有碑石立綽楔。以表其地。而其祭禮。則不過散米澆酒。又其年忌月忌日。忌之說。如人死於正月初一日。則十一日二十一日。皆謂之忌。而每年正月及每月初一日亦如之。邀僧設齋。供養甚備。僧徒以此資生云。○馬島通事。有一人年少精敏者。從至江戶。余頻呼使之。或饋以食。忽間日不見。余問某通事何在。倭言某昨聞其母喪。又問其在馬島而死乎。曰然。余憐之。意謂其人已爲奔喪。故不復致問。後數日其人來見。服色言語。一如平常。余曰。嚮有人來傳爾慘遭母憂。甚爲驚怛云云。則其人稽頂而謝曰。一身遠來。有此慘境。不忍言喩。日本王法。無許人奔喪之例。身係公役。黽勉隨行。所着靑紋。無一變更。羞以此狀。對朝鮮人耳。其意蓋以我國重喪禮。渠亦有所聞。故知其可愧。而本心之秉彝。便若泚發於顙。爲其上者。何爲使民失此心耶。○俗呼鬼神。謂人之生。爲衆所敬信者。則死必爲人所享。設立祠宇。輒有齋沐祈禳之事。父母死日。或食素。而神人之忌。切禁魚肉。神堂淫祠。處處相望。有天照皇大神宮者。其始祖女神也。熊野山守神者。徐福也。愛宕山守神者。新羅人也。春日八幡住吉等號。最爲大明神。而其他小小神靈。人鬼及木石之妖。俗所崇奉者。不可勝記。凡有盟約禁戒。必引此等神以爲誓。男女嫁娶時。亦就所奉之神。澆酒告信云。○其俗。色尙斑味尙甘。饌羞以鯨膾爲上。鋪陳以紅氈爲上。其餘百物。皆尙輕簡。觀其執役者。無兩肫三肫。喫飯之事。亦無如我國人吏朝夕入匙之請者。而但於飢乏時。以數箇銅錢。貿油餠一圓或燒芋二三枚。以療其飢。所謂官長飮食之具。只有飯藏一樻。飯藏者。木樻也。高不盈尺。方廣數寸。其中貯紅黑染器木匙小盤等物。細小方圓。餠饌麪果茶酒之供。皆不滿一勺。雖高官奉命而行者。自齎飯藏之外。不煩於各站支應之費。所着服色。二三種外。頭無冠帽。足無靴履。炊食之器皆輕薄而工妙。故半束柴而可作飯羹諸湯。亦無突火之法。是其一人一日之食。計不過數三銅錢半束柴。而一年之衣。又不過一兩銀子。生齒雖繁。賦斂雖重。而人能衣食。薪木之貴。亦不至於艱乏者如此。○訊囚之法。不用榜笞。但令囚仰臥。以大鉢盛水。直灌口中。使之自服。然後重罪者。直斬其頸。而臨刑者飮酒迷醉。坐于坎中。爲其親友者。執刀而斫之。少無難色。倭人之大刀。必待斬人而有名。故聞有死罪。遠近持刀求試者。爭集如市。俗情之慘毒甚矣。罪當減死。則竄之海上孤島無人處。從輕重限其年數。罪雖輕。再犯則死。其有關係逆律者。則立十字木於通街。裸其身釘其手。而懸之於木。使往來觀者。燒之剔之。極其慘毒。然後施刑云。○余問雨森東曰。日本民俗。自古輕生。怒必自刎其頸。自剖其腹。所以官無箠楚訊刑之法云。果然否。東曰。好生惡死。人之情也。日本人奚獨不然。但薩摩州民俗自別。遇事輒死。其有大罪者。自官不爲囚繫。語之曰汝罪當死於汝家云云。則其人應諾而去。至家自殺。少無差違。官亦信之不疑。大抵日本輕生之說。實爲薩摩州而得名矣。曰然則此與燕趙間節俠同風。其中或有氣節可尙者乎。答曰傳所謂殺身成仁。舍生就義。君子之所難。而薩摩州則人人如此。豈有氣節之可論。槪其土風奇怪云。俗尙技巧。女工絹布之屬。皆極精細。而百物輕妙。有以數寸之器。能貯日用凡具。而入之懷中。至於花卉植物。一無任其天生者。必以枝葉舒縮。巧作模擬。若纛若蓋若累層浮圖。木之爲虯盤鳳翥。草之爲方床圓瓮諸狀。令人駭笑。假花之逼眞者。亦不辨眞贗。蓋其天性巧僞。不由眞實如此。○雨森東謂余曰。日本何事與朝鮮相似。余答曰。至京都而聞男女行販於道者。呼喚之聲。恰似我京男女。見衆人會坐飮食之狀。如我國僧徒會食。餘無所同。又問何事與中國相似。曰我未見中國。但以得於書籍者言之。日本之家家茶飮。及女子頭髻最近。運物必以肩荷者。亦華人之荷簣荷篠荷甑之類。雨森東曰。日本有三事可樂。無風瘡惡疾。無咀呪蠱毒害物之變。無下民殺官長之事云。俗無音樂。但於侯邑富貴家宴客悞神之時。略用鼓笛琵琶歌舞而已。余於馬守京邸。見其作樂。歸與諸文士筆談曰。禮樂出於儒家。而今觀貴國音樂。歌如梵音。舞如槍勢拳法。此可知貴國崇佛鍊兵之敎勝。而儒風則不競矣。諸生答曰。誠是格言。弊邦儒風。雖謂之絶無。可也。○俗喜書畫。貴家閭民雖不識字者。必求中華人書畫作屛幛。以爲珍貨。余觀日本書法。盡用弘法大師帖。間倣洪武格。而軟脆無骨。畫格則吾未知其所尙。然亦自妙麗。江山草木翎毛之類。却似有絶佳者。而人貌差失。○日本人求得我國詩文者。勿論貴賤賢愚。莫不仰之如神仙。貨之如珠玉。卽舁人廝卒目不知書者。得朝鮮楷草數字。皆以手攢頂而謝。所謂文士。或不遠千里。而來待於站館。一宿之間。或費紙數百幅。求詩而不得。則雖半行筆談。珍感無已。蓋其人生長於精華之地。素知文字之可貴。而與中華絶遠。生不見衣冠盛儀。居常仰慕朝鮮。故其大官貴游。則得我人筆語。爲夸耀之資。書生則爲聲名之路。下賤則爲觀瞻之地。書贈之後。必押圖章以爲眞蹟。每過名州巨府。應接不暇。○日本大小諸官。無印信符節受賜之規。但以私刻圖章。爲公簿署標。而諸般禁令頒示時。亦有手押。狀如樽盎。畫大而整。無官者稍解文字之類。勿論老少。必有字號。各爲圖章數枚。用之於書牘詩篇。而用朱紅。細押篆刻之妙。無讓於華人矣。
日本讀字之音。如東冬陽庚靑蒸之韻。則呼以二音。東字曰都于。陽字曰要于。靑字曰世伊。江字曰乂伊。眞文元先寒删等韻。與我國略同。而天千泉等字。皆曰仙。其他蕭豪韵及入聲。亦用二音。而時或與我國彷彿。然大 倭人弄舌。本多輕浮而啅噪。語似鳥音。故全淸而無濁。有淺聲而無重聲。如我國之於中華。不得其全濁也。嘗與雨森東。論音譯異同。東曰。華音多濁。鮮音多淸。日本之音。純淸無濁。是其聲音。各出於風氣。而朝鮮去中華爲近。日本又學於朝鮮。故吾嘗謂貴國則仍華音而訛者。日本則又因貴國音而訛者也。余曰此言誠是矣。東又曰。方言之長短。亦各有別。華人用文字爲語。故如對人問安之節。只有二三音。而貴國之譯。其長倍之。日本又長三倍。至於西洋南蠻國人。則其說之長。比日本又三倍。是知去中國道遠。而言逾長矣。余曰然。入此境以來。每見人欲陳所懷於余。先言于通事。使之翻傳。而聞其語。不勝支離。似有千百曲折。及通事以我國語告余。則不過爲三事所托也。○俗用文字。我國所無者甚多。如山田曰畠。十字街曰辻之類。皆有譯而無音。又有用字之異者。如以書 人。而書曰某官前者。稱以某樣。以物分人。而書曰某物幾許式者。不曰式而曰宛。殿字御字。爲平人尊待之辭。關白以下各州太守。則其下呼之曰。敦于沙麻。敦于殿之譯。沙麻樣之譯。卽殿樣也。其外尊敬者。皆呼曰烏麻伊沙麻。烏。卽倭音御字。麻伊。前字之譯。乃御前樣也。余在客館。見有所饋者。多書以御筆御扇御用紙御菓子之類。初甚驚駭。欲却之。譯官曰。倭俗如此。本非僭濫。却令改書。則不可勝改。因笑而置之。○國姓則本有平源藤橘四姓。而各以食邑。分爲氏族。今有兩字姓三字姓。皆以地名。如隨會羊舌肸之子孫。爲范爲楊之類也。其名有五郞三郞六郞七郞。卽左衛門右衛門兵衛等語。皆以官名。卽其文字不明。虛假官位而呼之。如胡元之以貌而名曰魯花不花帖木兒之類也。彼皆互用音譯。縷縷說道。一人姓名。多至八九言。○倭言之無義者。山曰夜麻。海曰由未。水曰閔注。紙曰加未。筆曰侯代。墨曰愁未。硯曰愁愁里。見物之美者曰乂伊。不好者曰曰伊。搖櫓者爲用力之聲曰乂沙乂沙。或稱夜沙夜沙。舁夫則前者唱曰高里臥沙。後者應曰高里臥是。徐行則緩聲曰伊卽于伊。疾行則急呼曰疏老疏老。大抵皆用疊語。○國中所用諺文有四十八字。字形皆截眞書首尾點畫。有音而無釋。互着而成聲。略如我國諺文。以其方音。叶於方言而用之。便於俗習而利於通情。倭男女無少長。皆解之而諺草奇怪。如落花飛鳥。不可分曉。是古弘法大師所造。而弘法則異僧也。余觀其刊行書蹟遍國中。肉勝而少骨。色態濃麗。倭人書法。皆出於此。○日本方言。亦有京外之別。外方則差緩而實。京則愈輕而簡。馬島之人至江戶。多以言 見笑。卽如我京之於嶺邑也。余謂雨森東曰。使余學得日本語。當用幾月而能。東曰。華語可數月而能。鮮語可一年而能。日本語。雖聰明過人。非三年不可能。
倭國舊無文字。百濟王遣文士王仁阿直岐等。始敎文學。經年講習。粗有所傳。其後唐玄宗時。倭人鼂衡。入中國有名。爲祕書監。返國之時。王摩詰作詩及序。具述其事。衡中路渰死而不得歸。自是以後。千有餘年。日本人無以文知名者。今觀其俗。不以文用人。亦不以文爲公事。關白以下各州太守百職之官。無一解文者。但以諺文四十八字。略用眞書數十字雜之。爲狀聞敎令。爲簿牒書簡。以通上下之情。國君之導率如此。聽其音譯。則山川地名六甲五行人之姓名職號。皆以方言釋而呼之。其爲字音。又無淸濁高低。欲學詩者。先以三韻。積年用工。能辨某字高某字低。然後苟合成章。其爲讀書。不解倒結先後之法。逐字辛苦。下上其指。然後僅通其義。如馬上逢寒食。則讀逢字於寒食之下。忽見陌頭楊柳色。則讀見字於楊柳色之後。文字之難於學習。又如此。雖有高才達識之人。用力之勤苦。視我國當爲百倍。所以文人韻士。閱世無聞。而其間一二操觚之輩。亦無由揚其聲於國中矣。往者源家宣。爲關白時。稍解文。嘗於私邸。與源璵遊學。故擢用源璵。參決國政。源璵者。才足以識古文。爲詩頗有聲響。有白石集行于世。其師木下順庵。亦號博識能文章。一時好學之徒。稍稍進用於世。其文辭往往有可稱。至今京外諸人。着力於書林藝苑者。可謂盛矣。大 其地爲陽明之區。江山秀麗。草木冬華。與北胡氈裘之屬。稟氣不同。故其人率多聰敏明辨。與之爲筆談。短簡則倉卒應對。或有奇言美談。國中書籍。自我國而往者以百數。自南京海賈而來者以千數。古今異書百家文集。刊行於闤闠者。視我國不啻十倍。彼其好文者。以本品聰敏之性。無科擧剽竊之累。而熟習專領。窮極其功。如蠹魚食字而眼明。所以吐論古事。評騭能否。有曰如此者爲漢。如此者爲唐爲宋云爾。則所見之的確。或庶幾於能言之士。而使之爲歌行律語。則平仄多乖。趣味全喪。爲我國三尺童子所聞而笑者。使之爲序記雜文。則又盲蛇走蘆田。法度與詞氣。無一可觀。是豈人才有定限而然哉。其土風與政敎。有以拘之也。余初至馬島。雨森東謂余曰。日本人學爲文者。與貴國懸殊。用力甚勤。而成就極難。公今自此至江都。沿路所接引許多詩文。必皆拙朴可笑之言。而彼其千辛萬苦。艱得而僅有之詞也。須勿唾棄。優容而奬詡之。幸甚。東卽彼中傑出人也。能通三國音。能辨百家書。其於方譯之異同。文字之難易。自有涇渭於胸中。故所言如此。○日本爲文者。皆以八大家文抄。讀習專尙。故見其長書寫情。則或有理贍而辭暢者。詩則人人自謂欲學唐音。而無一句畫虎於古人。夫以海外兜離之鄕。聲律全乖。韵韻語之難。百倍於敍述之文故也。間有人以書來問曰。皇明王李諸家。與歐蘇孰賢云云。而渠輩之學習明人者。亦未之見也。○日本詩文中。直賦其地山水者曰。秦山楚水洛陽長安吳越燕蜀等語。讀之而不知爲日本也。彼其地名人號皆殊怪。難以爲文。故假用中華。以文其陋。又如國不產鶯鵠。而寫景曰鶯啼鵲噪。樂不用琴瑟。而敍事曰彈琴鼓瑟。無冠而曰岸幘欹巾。無帶而曰錦帶玉佩。皆用虛名。而不能作稱情之詞。此則我國人。亦往往犯戒。○日本與余對坐酬唱者。率多粗疏遁塞。語無倫序。或見其橐中私藁。時有一句一聯之最佳者。視席上所賦。全是天壤。余意南京海賈。每以書籍來販於長崎島。故順治以後。江南才子之詩集。多在日本。而爲我人所未見者。則彼或暗偸狐白。而取媚於秦姬者歟。○林信智。以信篤之子。挾其家閱。甚有才望。其贈我五言排律二十韻詩曰。邈矣神嵩嶽。風雲竟宛然。物華惟萬古。人傑自千年。麟窟祥烟起。鳳山瑞日懸。東方通道里。南斗夾星躔。濟濟申家子。堂堂韓國賢。 王朝稽彼史。 宗廟執其籩。名重文郞省。才宏學士員。絲綸嘗屬務。翰墨已專權。侍制祕丘上。 賜恩淸禁前。張蘇唐代顯。班蔡漢宮傳。忽見聘交事。斯登禮會筵。壯遊何索落。逸興更聯翩。紫氣出關客。蒼波浮海仙。玉珂晨秣馬。錦纜夜留船。祗役歲云暮。望鄕月幾圓。九秋羈夢寂。一水旅情綿。驛接紅塵地。館開白雪天。折梅寧可寄。藉草且相牽。劍舃論奇節。杯盤說勝緣。還如聞大雅。三嘆在朱絃。又有七言古詩曰。大同江水千古色。奫淪靡迤萬里浮。倬彼銀河長天掛。西風一夜東海頭。方今手撑虹霓去。飄如八極作神遊。旌旆飄悠何處所。望中烟氣遶丹丘。信聘由來最盛事。衣冠玉帛仰嘉謀。君復濛氾堪裁賦。彩筆縱橫更不休。白露更拂琅干樹。蒼霞欲滿珊瑚鉤。回首關山無限路。客心久登王粲樓。布帆從此歸應疾。鵬翼風中日月流。寶管吹徹萬波息。漢陽城上五雲留。 聖代功名終赫奕。兩邦聲譽是誰儔。慚我傾蓋得妙契。縞紵難奈意綢繆。離歌一曲人不見。鴻䧹遙遙百年秋。君不聞桑弧蓬矢男兒事。四方素志竟何收。又不聞專對高才使者業。夙夜努力愼前修。其詩自謂俊俊。而多不成語。筆法似倣洪武體。而拙弱可笑。其兄信充。所贈詩亦多。而尤不足觀。○東溪飯田綽贈別詩曰。十月風寒紫綺裘。共憐殊域歲華流。彩虹落影三千丈。玄鶴遺聲十二樓。雲外霜鍾驚遠夢。驛程夜雨結淸愁。莫嫌遠有木瓜贈。賴把驪珠萬斛酬。末有小牘曰。本月哉生魄。晉接客館。月之望。文旆西指。如僕景慕丰采。睊睊夢寐。以席上所賜之高調。徒代覿面耳。鄙律一章。緬托鴻翼呈上。殆免洪喬之歎。而得經淸眄則天幸云。○雪溪井上有基贈行詩曰。驪駒歌罷客將歸。曉望灞橋淚滿衣。梓澤千年人盡去。平原十日事多非。芙蓉山下眼無極。楊柳渡頭魂欲飛。海水難傳朝夕信。憑欄怊悵對斜暉。末有小牘曰。邂逅之後。賓館令嚴。不許再拜階下。且無紹介通書。空抱暮雲春樹之想。聞歸輈旣牽。後會無期。悵恨謂何。蓋君子之執友也。在其心期厚薄之如何。而未曾以同異立藩籬也。惟恨會晤至淺。何以傾倒平昔之胸臆哉。區區之誠。托之夢寐。臨楮不堪怊悵。伏惟天寒。爲國自重。○鶴汀柱山義樹贈古風一篇詩曰。鳳凰樓外金銀闕。五羊城上群仙人。環佩昨夜降霄漢。武陵桃花一萬春。見我欣然供鼎役。頃刻爲御玉麒麟。扶桑碧水蹴天漲。人間無復槎問津。一日諸公駈風雨。重瞻佳氣滿城闉。南山野士原姓桂。謬中錢選非席珍。三冬文史嚼氷雪。一把雄劍寄精神。靑眸賜顧丘山重。百年夢想鉢宗巾。只愁紫鸞慕天翥。北斗夜夜望後塵。空將離恨付風去。逐君直落漢水濱。○甘谷源方敬贈別五排二十韵詩曰。海東君子國。隣德美名均。聘禮由來久。約盟令典循。羣賢輝繡節。專對見簪紳。欽仰祕書譽。更知玉府人。學識諳四庫。毫健挽千匀。雄辯朴淵掛。高標白岳新。申繻傳遠識。明道本溫純。常閱道山奧。元懷席上珍。多聞師古業。五絶世南倫。帆冒炎熱候。館近霜露晨。蓋傾投意氣。語高愧敷陳。泛愛容愚劣。丰儀絶點塵。新知交自淡。奇遇豈無因。何用舌端動。情依目擊親。脂車期已促。駕鶴亦隨臻。異域心還壯。垂天翼亦伸。歸程峯似戟。溟渤浪如銀。明日聞君去。暮雲傷我神。夢殘蓬島景。瑞滿釜山濱。萬里相思處。登樓望月輪。○尾張州記室木實聞作仙人篇贈別曰。玉京仙人馭六龍。翺翔遠欲窮扶桑。夜半東南日毬躍。大海湧動碎琳琅。倏忽騁轡凌紫虛。朝餮石髓暮瓊漿。兩兩神女吹鳳簫。雲間飄飄素霓裳。俯觀蓬萊五雲簇。少時停駕上高堂。珊瑚寶玦耀玳筵。仙人解顏共壼觴。左把芙蓉右弄芝。咳唾成丹滿玉床。雲氣聚散何容易。空望窈冥心欲狂。願使吾輩生羽翼。翻跡長游崑崙岡。○有姓名福昌言者。號鶴渚。頗有能詩聲。隱居尾張州。余自江都。歸過本州。其人不來見。因記室朝文淵。致七言二章侑別。其詩曰。隣好千年德不孤。喜看旌旆訪蓬壺。五雲染出鰲頭景。化作騷人筆下珠。又曰。萬里長風驛馬嘶。今宵偏要爲留題。憶君明日遙歸去。徒見白雲生水西。文淵盛稱其詩不是尋常調。倭人所稱上駟。不過如此。○釋徒之詩雖多。而尤不可置眼。余於佐和城。遇龍潭寺僧素盈者。筆談竟夜。歸路又與相見。其僧頗款款。以詩贈行曰。別後又相見。寒梅逞玉姿。暮雲逢客日。渭樹送君時。膠漆先爲約。金蘭更有誰。琶江兼漢水。明月照心知。語雖枯拙。情景可愛。○余所與雨森東唱和者亦多。舟次壹岐島候風時。東寄詩曰。秋風難借便。客舸繫蘭汀。影冷渡間火。光微露外星。漫將鬢堆雪。仍覺跡隨萍。擊劍柁樓底。吳歌不忍聽。舟至籃島。又寄七律一首曰。木蘭舟繫大瀛隈。徙倚高樓西望開。極浦雲遮神女廟。雄關月照霸家臺。千林橘柚秋霜冷。一島烟霞暮色哀。回首鄕山消息斷。夢中戍笛莫相催。又有五律二首。其一曰。衰病仍官繫。復成萬里遊。波濤終夜雨。松桂滿山秋。雁早書空度。螢閒照水流。陽春誰奏曲。能解老夫愁。其二曰。樗材甘自棄。何料此同遊。琴奏海雲曉。盞傳山榭秋。風烟供勝槪。詞藻屬名流。握手意相得。鄕心半減愁。舟泊地島。連日風雨。又有贈詩曰。積陰何日已。羈抱鬱難開。舟宿長依岸。蜃噓旋作臺。頻呼篙子語。時聽旅鴻哀。樽酒終無賴。秋風兩鬢催。末有小牘曰。連日陰晦。逆風作祟。汗漫之期。終未可卜。又不得與諸君子。同席晤語。好事之魔。何至於此。聞足下與同行諸公。日夜酬答。瓊琚成堆。龍府老翁。必謂待其江山妙處。發泄得盡。然後助以一榻淸風。直相送於長門烟水間也。然浩浩之學。滾滾之才。終無缺乏之時。則老龍所圖。徒爲多事。而相知之明。反不如我。一笑。昨與霞沼論詩。因言曰。余詩如廢貨肆。屋宇非不宏也。器皿非不夥也。所恨者臭銅璺磁。灰塵堆積。足令人發嘔而已。子詩如一朵茉莉。雖無雄偉之觀。自是淸雅可愛。執事以爲何如。此乃家醜外揚。不覺赧顏。一以博粲。一以乞敎。幸諒。霞沼。卽松浦儀之號。爲詩才情頗緊。而力不逮。未免於孤澹。故東錄其私相品題之語。欲聞余所論。余作書答之略曰。承與霞沼論詩。政如王長公詩中。以大海紫瀾自居。而雪中峩眉品于鱗。至今天下。用爲二家雌黃。夫大海則喩渾雄也。峩眉則語淸高也。足下之意。其在斯乎。不佞以爲。廢店灰銅。無非程鄭家物。卽一朝磨淨。可使如眞珠月貝。一朵茉莉。亦是雨露中滋達根葉。彼造化之培養者。假以歲月。安知異日。不至於馥馥漫山。作富有之觀乎。雖然日東陿矣。足下之貨。未嘗沽於人。而霞沼之花。亦無傷其孤艶也。勉旃自愛。後數日兩生俱來謝曰。辱惠書語。勉歎交至。敢忘知己之賜云。○攝津州文人三宅緝明號滄溟。以萍水集請序於余。而有書自通曰。僕弟茂忠號石屛有故。未能奉候文塌。頃憑馬島之人。呈書及萍水集於左右。需尊公作文。以弁其首云。未知達否。自古貴國之聘于吾邦也。寡君世預於館伴之事。僕乃寡君麾下之故舊。以故我祖考先人。皆得進退賓所。而塤箎於貴國之諸學士矣。祖考之於朴螺山。先人之於成翠虛。觀萍水集而後可知焉耳。往年辛卯之秋。僕兄弟扈從麾下。出入斯館。與李東郭諸公。追隨薰染。飽逍遙乎翰墨之間。僕等自以爲一生之奇歡。難再之事也。而今邂逅尊公。厚承靑眄如此。則僕之於貴國搢紳先生。蓋非偶然。而古人所謂前緣者。有存乎其間歟。何其奇哉。吾邦之人。托交於貴國諸學士者甚衆。而至于三世相繼。如僕兄弟者少矣。希世之風流。亦足以觀詒厥之福。而追慕之懷。益切悽愴。因共編次先世儐庭之諸作。欲藏之家廟。以爲追孝之一助。且願使後世子孫讀之。羨慕兩國之盛會。而愈欽乎先世之餘澤。愈不忘先世之遺業也。此萍水集之所由起也。其附以辛卯唱和。亦示之子孫也。夫旣有斯集。則又願請貴國碩儒之文。以爲之序。使後世子孫。讀之愈尊信斯集。十襲緹巾。以傳無窮也。僕兄弟之望之。猶秦人之於趙璧矣。方今尊公之 此也。是天將使僕等。頓遂宿志。而斯集永垂不朽者也。然則使僕等。順此天授與否。惟在尊公一人之意。而辛卯之歲。求愛蘭堂記文於李學士諸公。諸公未嘗拒之。欣然下筆。今尊公道德之殷。仁惠之厚。而能親愛異域之人如是。僕兄弟亦敬賢之深。尙德之切。而能不爲貴邦之君子所避棄如是。則不亦可乎。程子有言曰。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一命之士猶然。況於朝鮮大學士乎。敢問尊公。諾也否。石屛書則文多不盡錄。而眞所謂難爲弟也。滄溟爲詩。似不及於文。然往往沈實有致。余初至大坂。彼卽來相見。筆談竟日。書贈一絶云。異域同遊先聖門。儒流一派正源源。後生始可言殷禮。幸有箕邦文獻存。歸時又以一絶贈別云。歸舟乘雪似山陰。興盡交休淚滿襟。他日高樓回道處。浮雲不及別情深。石屛贈余詩云。和韓通地脈。嵩岳再生申。今日文章士。他年社稷臣。是其兄弟。蓋以文學。自爲巨擘。世世有名於泉南。故與羣倭相對時。辭色頗驕。似與雨森東不相款款矣。○林信篤。爲日本第一耆碩。其門徒輩。與余筆談時。皆稱學問之純粹。道義之淵深。我整宇先生一人而已。其爲國人之推宗如此。然余見其狀貌。謹厚有餘。而詩文。則無一可觀。余於復路之日。以書替別。信篤有答簡曰。今玆秋冬之交。朝鮮國三官使來聘於我國。公務之暇。携二子而往。遭逢製述官靑泉申學士。觴咏重席。殆修忘形耐久之好。未幾臥病。兩情未盡。頗失素懷。臨別惓惓。寄惠手書。吐露中情。凡別離。人所重也。黯然消魂者。丈夫之致也。潸然出涕者。兒女之仁也。在昔文節與子高別。抗手而行。范丹與王奐別。拂衣而去。不以分散而繫情者也。然比絶域遼遠。再會無期。則異日之談也。古律二和。兩胤解頤。不勝感佩。謝詞無措。情長筆短。姑此不備云。唯玆一書。差近乎朴直之言。○湛長老與余交最深。其所贈答諸篇。積成卷軸。詩皆呆拙。只錄其長書一通曰。頃啓短牘。纔詢興居。駕船悤悤。旣抵岐陽。辱荷回示。乃知足下置身於翰林酬酢間。遊心於我門典籍上。翠鬢學士。何克如斯博雅乎。不慧向偸視風度。實知厥爲雅也。服欽之深。靡言不陳。不慧自幼離家。入一叢林。出一叢林。酸辛痛苦。難自激礪。駑鈍之資。未嘗窺佛祖之藩籬。因循空消二三十年。只圖深林邃谷。木茹澗飮。俱草木腐而已。不意濫膺公選。住持官寺。更奉王命。接伴三使。因玆與學士曁三書記。神光廝結。獲荷厚誼。於不慧分上。奚能當之。靦悚惟多。所惠書中有云禪家之定慧。其要只在剗却僞魔。杜了妄想。寔如諭矣。吾佛之道。非瑰異妖孼之術。又非玄妙奇特之事。只在使羣蒙發明心地而已。心也者。何不涉古來今。超然無比況者。又如椽筆所托。然世殊事異。其道欲寢下衰。梁普通年間。吾齴齲祖。佩佛心印東來。戾至菘山。以不立文字直指人心。使人究決緊要。瞥轉樞機。是謂敎外別傳。神光三拜的的承當敎外之宗。布滿天下。而巨儒搢紳賢士大夫繼踵歸者。未爲不多矣。如張相國柳刺史黃太史蘇翰林曁宋文憲公。不離爵祿功名科擧婚宦之間。發明直指道。氣呑佛祖。眼高乾坤。此乃掃空文字語言。證得獨脫無依底之樣子也。雖然如此。又不由文字。詎庸傳澆末。以故吾祖有六門之字。而以垂兒孫。又非文字般若之力乎。道本無言。藉言顯道者是也。道與文字。孰曰有兩般乎。魯聖所謂克己復禮之敎。亦洞通聖旨。則何必稽滯字言乎。然則儒釋同其源。蓋應徵焉。儒雅風流之士。和調陽春白雪於摛藻操觚之際者。亦恐在玆。而足下當製述官。負穎脫資。高風雅韵。激昂志節。望彌高齡彌高。播聲光于上國。則雖曰張柳黃蘇之輩。或可不減之矣。今以官使來聘。遙踰溟渤。復寧非道義所存乎。祝祝。因憶記書三君旃檀林中。全無雜樹者。洵可尙也。丐同達鄙意幸甚。不備。○國中文才。多在童稚。大坂之水足童子。年十四。北山童子。年十五。倭京之明石景鳳。年十八。江都之河口皞。年十七。無論所讀述已富。皆貌如玉雪。視瞻端正。言動安詳。似禮法中人。蓋其氣稟之淸明。得之江山。而卒不免於政敎之鎔鑄。可使明珠化爲燕石耳。余在江都。有曰長澤學長澤主者兄弟。皆盲而皆能學詩。自願一得現謁。怪而呼入。命韻試之。應口而對。所作皆有感慨之思。問其號。則一曰不怨齋。一曰不尤齋。余爲和韻而贈之。
日本性理之學。無一可聞。蓋其政敎與民風。非兵則佛。郡國無庠序俎豆。又無君親喪禮。其民雖天稟良知。何從而得聞道也。會津侯源正之。以貴公子受爵。而律己治人。一遵程朱之訓。亦異事也。有號闇齋山崎氏者。亦慕程朱之學。以小學編目。續輯宋儒言行。爲書傳世。木順庵名貞幹。博學修行。源璵雨森東輩。皆其門弟也。沒後有謚曰恭靖云。○近世京都人伊藤惟貞者。以學問名於國中。撰集己見。以敎國人。其說以性理存養之說。爲無益。而只將日用行道之實爲務。其所以著書垂訓者。常曰凡人之孝弟忠信。只是日用切己工夫。學者不當問性理如何。中庸首章率性之訓。乃爲道從性理中出來。非謂行道者。以性理爲工夫也。餘外立論。多畔先儒。一時爲士之類。或有崇信者。或有譏其穿鑿者。余未見其文集。而每與諸文士酬酌言語之際。有提伊藤家說話。而質其可否。余輒曰。此與荀卿性惡之說。同罪。從其言者。欲求人道於禽獸草木之性乎。諸生或以爲然。
世傳日本欽明天皇時。百濟聖明王。貢佛經。日本之有佛法自此始。其後弘法大師。歷中國入天竺。學得宗法而歸。大闡佛敎云。今觀日本俗。大抵尙佛。而平民作僧者。十不能二三。其能讀佛書爲法師者。又不能三之一。蓋以國法甚苛。民無空丁。又無生理。僧舍在閭里。觀光女子與僧徒雜坐。是其貌麤而行薄。或有食肉行淫。而但服緇衣不帶劍。所以談經學佛者。甚鮮矣。○天皇之法。似佛祖。諸子爲法親王。諸女爲比丘尼。其臣曰法印宗。皆掌文史星曆。國中有五山差僧住持官。名曰和尙。亦稱長老。皆天皇之命而對馬島以酊庵及使行接伴長老。亦自江戶。請於五山中輪回而送之。龍菖則第二山住持。而性湛則第五山也。余所與逆旅酬唱者。僧素盈周恬了慧時習貞侃禪儀周鏡等。皆無官品。其詩或有優劣。而不足言也。其敎有曹洞宗臨濟宗二派。而得道者益寡矣。我國松雲大師惟政筆跡。在江戶。余見其古紙色渝。而筆有可辨也。倭俗珍藏百年。慕而重之。諸僧皆識西山大師名。乞聞其詩句。余書西山集中五言絶一篇贈之。輒傾倒。
醫學則最爲崇尙。自天皇關白以下各州太守。皆置官數人。給廩料甚厚。故醫官皆富。其俗學文者太半爲醫。其服色。與僧略同。但佩一劍。而盡削其髮。余於筑前州。見小野玄林。至江都。與林太醫父子交懽。其人悉喜文辭。貌端而心良。北尾春圃號當壯庵所著精氣神論數卷書。似有工程。余爲之序。製藥精妙。京外閭巷道塗之間。金牌如林。書以丸丹湯散諸名。而其曰和中散通聖散者居多。蓋觀其人性燥而偏於喜怒。又居炎燠之地。疾病多生於痰火滯之鬱候。故所用藥方。尤重於通和理中之劑。
女色多妖姸怪麗。雖不施脂粉。而大 細膩皓白。其傅粉濃粧者。亦以肌膚軟澤。自然如本色。卽畫眉紅顏黑髮花簪。着五色紋錦衣。以帶束腰抱扇而立者。望之不似人形。髻用冬柏油香膏諸物。髮光如漆。關白以下各州太守妃嬪之稱。必曰御內室。各有豐娘泰娘惠娘翼娘之號。貴家女子。出入乘轎。觀光則倚綉戶而垂簾。其餘在外者。或坐或立。手持畫帨。言笑琅?。見我國人。不勝欣慕。或作招邀之狀。或與倭男年少者。按頂撫腮。而相悅於稠人廣路。少無愧色○國中男女俱盛。而女比男加多。婚姻不避同姓。從父兄妹。相與嫁娶。兄嫂弟妻寡居。則亦爲率畜。淫穢之行。便同禽獸。家家必設浴室。男女同裸而浴。白晝相狎。夜必設燈而行淫。各齎挑興之具。以盡歡情。卽人人貯畫軸於懷裡。華牋累幅。各寫雲情雨態。百媚千嬌。又有春藥數種。助其荒惑云。○國俗。無各邑置妓絃歌之法。貴人豪遊富商行旅者。皆私狎娼女於所過之地。故名城大店。盡有娼屋。而大坂繁華。最以花柳著名。層樓曲榭。連亘長街。屛帳衾枕酒罍茶鐺之屬。皆錦繡金銀。其中各貯一名姬。上懸金牓曰上上娼樓。游人宕子橐金而至者。亦隨所欲。一向求焉。卽上上家一日雲雨。無過白金十兩。中下有差。余聞通事輩口語。笑而陋之曰。自古情色中。有癡郞憨姬。男悅緣而不惜千金。女感驩而不愛一錢。是乃上上風流事。而今爾所云上上姝。不問醜傖。不擇名類。只能算金而獻媚。此可爲倚市之下品。而價不直銖兩。通事曰國俗自異。女子之心腸。豈如此乎。日本豪貴家。貿此殊色。以爲賭利之奇貨。故所稱娼屋中。百物繁華。皆從主家辦出。而設榜於門。以程其價。逐日而稅之。彼姝者子有不敢自爲之謀。所以有泣涕而恨別者。含羞而强懽者。余問大坂娼名及年歲幾何。曰花紫。二十二。若紫。二十。小紫。十五。滿州春。二十。保野香。二十五。發枝。二十。友影。十七。村春。十六。村雨。二十一。此爲上上上中之姝。○日本男娼之艶。倍於女色。其嬖而惑者。又倍於女色。國中兒男年十四五以上。容姿絶美者。膩髮爲丱。面傅脂粉。被以彩錦衣。香麝珍佩修飾之具。可値千金。自國君以下富豪庶人。皆貨而蓄之。坐臥出入。必與相隨。耽狎無饜。或有外心。則妬狠殺人。其俗以竊人之妻妾爲易事。而男娼有主者。則不敢與之言笑。雨森東所作文藁中。有敍貴人繁華之物。曰左蒨裙而右孌丱。余指之曰。此云孌丱。乃所謂男娼乎。曰然。余曰貴國之俗。可謂怪矣。男女之欲。本出於天地生生之理。四海所同。而猶以淫惑爲戒。世間豈有獨陽無陰。而可以相感相悅者乎。東笑曰。學士亦未知其樂耳。如東之輩所言尙然。國俗之迷惑。可知也。
長崎島屬肥前州。非使行歷路。雖不得目見。實海外諸國都會之區。南京商賈航海而來者。或狎倭女。生子往來。故倭人以此得中國事情。亦通漢語。然所學語音。乃蘇杭閩浙福建以下。故與我人北京譯差異。又有南蠻諸種。群集貿販。聞其服色。堆結箕踞。尙有尉佗舊俗。而阿蘭陀國人。最爲異常。頭髮不長。而從後綰之。着紅錦氈笠珠履。其衣皆奇錦。狹窄僅容身。袴亦僅容兩脚。而不可屈伸。人人必夾一胡床而行。有坐輒踞床伸足。俗無文書。但以長短緩急之畫。爲凡事遲速之令。百物奢靡。衣不點汚。性情貪淫。來必與倭女相狎。晝夜耽弄。長崎娼屋。則每接異國人得珍貨云。余問國法旣無交通之禁。彼其耽弄者。亦或載去否。通事曰。此雖無禁。但不令載去。所生男女。終爲日本人矣。又問西洋國人利瑪竇。蓋亦異人。其所經歷紀述。雖不可盡信。而自有天地以來。爲此說者。獨有利瑪竇。余固奇異之。今聞西洋國人。亦通長崎島云。或有所傳於其人行蹟否。曰彼其來販於長崎者。賈人無識。別無問答之可憑。而但聞昔有一船。來泊於日本南海。而其人自稱西洋國敎主。以其君命。敎導萬國云云。其所謂敎。以利瑪竇爲聖人。而語皆無倫。自國設禁。不使人相通。遂怒而歸去云。○琉球國有大小二種。皆在日本西南海中。其小者曰中山主。自古朝貢於日本。聞其服色言語。與倭略同。而但使臣有職者。所着烏帽。如我國紗帽而差少。公服亦有團領之制。三年一朝貢。自薩摩州登陸至江戶。行禮而去。余與雨森東。問琉球土風人物。東曰。昔大明 高皇帝。勅遣中國二十四姓居之。其人子孫。今有十餘姓。而世修文學爲官人。官人服色。尙保中華餘俗。而平民則與日本無異。但着長衣而無袴。俗尙技巧。百工皆聚一區。不相混居。其所工作。必皆精妙。今日本所用玳瑁梳及重茅席。多出琉球云云。因指館中一席曰。此乃琉球人手織也。觀其制度。與倭席長短不差。而茅色甚黃。柔韌堅密。可以年久不敝矣。記余在國時。見京中一褐夫自云。曾於濟州海上。漂風至琉球。見百工所居各有部落。而渠在皮工之區。留得一歲。男女衣服飮食言語。一如日本。聞其國朝貢於日本。故國君送至日本。乃得傳到於東萊云。今與雨森東所言相符。又問於東曰。琉球官人之識字者。或有所傳詩文否。答曰聞有程寵乂者。至中國西湖。有詩云。西子湖頭唱竹枝。不堪往事繫人思。波濤白晝錢王弩。風雨蒼山陸相祠。衣濕雲香三竺路。囊餘柳色六橋詩。難將東海勞臣意。說與栽梅處士知。有雪堂燕游草一卷行于世云。
雨森東。嘗於江戶客館。從容謂余曰。吾有所懷。欲乘間言之。日本與貴國。隔海爲隣。信義相孚。敝邦人民。皆知朝鮮國王與寡君敬禮通書。故公私文簿間。必致崇極。而竊觀貴國人所撰文集中語及敝邦者。必稱倭賊蠻酋。醜蔑狼藉。有不忍言者。我文昭王末年。偶見朝鮮文集。每謂群臣曰。豈料朝鮮。侮我至此。憾恨終身。今日諸公可知此意否。辭色甚不平。怒腸漸露。余曰此自易知。顧貴國不諒耳。君所見我國文集。未知何人所著。然此皆壬辰亂後刊行之文也。平秀吉。爲我國通天之讎。 宗社之恥辱。生靈之血肉。實萬世所無之變。爲我國臣民。誰不欲臠而食之。所以上自薦紳。下至廝隷。奴之賊之。語無顧藉。發於文章者。固當如此。至于今日。 聖朝仁愛生民。關市通貨。且知日東山河。已無秀吉之遺類。故遣使修睦。 國書相望。大小民庶。咸仰 德意。豈敢復提宿怨。見諸辭氣。而頃到大坂。目擊平家舊墟。毛髮猶凜凜矣。東曰是則然矣。但今諸從者。有呼敝邦人。必曰倭人。亦非所望。余曰貴國之有倭名已久。君何所憾。東曰唐史旣云倭。改國號爲日本。今後則願飭下輩。呼我以日本人可矣。余又問貴國人呼我曰唐人。題我人筆帖曰唐人筆蹟。亦何意。東曰國令則使稱客人。或稱朝鮮人。而日本大小民俗。自古謂貴國文物。與中華同。故指以唐人。是慕之也。○余問雨森東曰。秀吉旣爲貴國故君。君亦有諱名諱惡之意乎。答曰無是也。彼其豺虺之性。應天人厄運而生者。故屠戮之慘。不但貴國。日本人赤族湛宗。不可勝紀。如僕高曾以上。世爲雨森守。以官爲姓。而亦被誅夷。一二孱孫。逃死民間。幸保餘卵。每念其人。實有腐心之痛矣。余曰然則秀吉於日本。有何功德。答曰少無功德。但秀吉以前。日本六十六州。多有各立爲國。而相攻擊者。故皇明時。日本諸島之侵擾中國者。種種未已。諸公必於明史。見之矣。秀吉窮兵黷武。盡爲勘定。若論其功。有此而已。又問壬辰西搶時。淸正最爲凶毒。我國之讎怨。必首其人。若其子孫。爲官爲民。來與於使行酬酌之間。則不可封面敍話。君爲我的指其人。答曰天道甚明。當時諸將殺人多者。皆無子孫。淸正安能有後。○聞源璵者本以微品。爲家宣所寵。官至筑後守。挾其才華。變更制度。辛卯回書。犯 諱爭執。時源璵主事。林信篤者。不能矯其非。凡所主張。多執異議。宗室大臣。皆怨之。今關白入承之後。卽黜源璵。親近信篤。故璵之黨友。一時廢錮。不敢與於儒官酬唱之席。雨森東以璵之同學。尙在絶島記室。嘗曰。白石公若至今秉權。吾輩亦有彈冠之望云云。余問白石何以不仕。答以老病。問居在何處。答以家住江都。杜門謝事。東雖以事關君政。故諱之。而觀其氣色自不平。傳 國書之後。出謂東曰。貴大君簡易儉率。甚有君人之度。治平可期。答曰君德則然矣。自古人國。用賢臣則治。姦臣則亂。其意若有所向。而輒不盡言。回路驛站。有一文士來見筆談曰。公在江戶。見幾個詞人。答曰林鳳岡弟子數十人。其客又書示曰。吾聞林鳳岡。拙於詩文。弟子何其多乎。余已知其物色。卽書紙末曰。言不可若是。客以手畫席作字曰彼皆可笑可笑。自裂其所寫紙而去。蓋亦源璵之黨流。而欲使余知其意也。
余觀日本人物。自國君以下。大官庶僚各種人民。不啻屢千萬。大抵其人皆精悍緊捷。軆多短小。兒多白晢。氣稟多耎弱。言動多粗淺。無一介傑特雄屬望而可畏之狀。至於位在執政。富有食邑。歲得廩數千萬。以傳子孫云者。則雖以相法論之。必其天倉命祿。高厚光明。有可以一見卽辨者。然今觀其淺劣庸陋。百不近似者十居八九。且論其性情。率多中躁而外薄。有利於己。則懽欣雀躍。肺肝全露。少拂於心。則踔噪跳踉。不知生死。對語而如狐聽氷。遇事而如螳拒轍。皆以鳥鼠之腸。奮其蜂䘍之怒。無一人博蓄弘量而坐負重望者。彼其家康以後。幅員不缺。軍伍精强。國無桴鼓之警。生民之衆。府庫之富。莫隆於近日。而所謂君臣者。雖黃口癡兒。晏然在位。高宮麗榭錦帳綺食之娛。世傳而不絶。其心習於安樂。岌岌焉事變之是懼。何計之可圖。以余揆之。自非天人遘厄。秀吉淸正之賊。復生於其地。則我國家邊疆之慮。萬無一矣。第自關市以來。馬島之狡詐無限。館驛之受侮多端。而 朝廷每加恩厚。使區區一島之長。必競毫厘。務勝而後已。識務者當有所見。
使臣以己亥四月十一日辭 朝。五月初一日到釜山。六月二十日辛酉。乘船開洋。九月初四日癸酉。次大坂城就陸。同月二十七日抵江戶。十月十一日復路。十一月初四日還次大坂城。復乘船。庚子正月初六日癸酉。回泊釜山。二十四日復 命。通計水路五千二百十里。陸路一千三百五十里。往還日字爲二百六十一日。行中大小四百七十五人。無一人疾病之虞。無一日風波之厄。自古所未有也。始余祈風於永嘉臺。齋沐之夜。夢有一偉丈夫。大書一酉字示余。覺而怪之。以余本命辛酉。故卜以稽疑。筮者曰祥。竟以辛酉日遇風發船。癸酉日到大坂登陸。心竊幸之。回還時至馬島。預謂同僚曰。此行當待正月初六日泊釜山。果於初六日癸酉。自西泊浦忽得順風。掛帆直來。諸僚驚喜。顧謂余曰君言不妄。使臣亦聞而怪之。蓋於永嘉臺上。夢得酉字而發船。登陸與還泊。皆酉日。是其龍府丈人。告余以書故歟。亦一異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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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문견잡록(附聞見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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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8도(道) 66주(州) 6백 34군(郡)이 있었는데, 용명천황(用明天皇) 시대에 5기(畿) 7도(道)로 정하였고, 문무천황(文武天皇) 때에 나누어 66국(國)으로 만들었으니 산성(山城)ㆍ태화(太和)ㆍ하내(河內)ㆍ섭진(攝津)ㆍ화천(和泉)은 곧 기내(畿內) 5국이요, 이하(伊賀)ㆍ이세(伊勢)ㆍ지마(志摩)ㆍ미장(尾張)ㆍ삼하(參河)ㆍ원강(遠江)ㆍ준하(駿河)ㆍ이두(伊豆)ㆍ갑비(甲斐)ㆍ상모(相模)ㆍ무장(武藏)ㆍ안방(安房)ㆍ상총(上總)ㆍ하총(下總)ㆍ상륙(常陸)은 곧 동해도(東海道) 15국이요, 근강(近江)ㆍ미농(美濃)ㆍ비탄(飛驒)ㆍ신농(信濃)ㆍ상야(上野)ㆍ하야(下野)ㆍ육오(陸奧)ㆍ출우(出羽)는 곧 동산도(東山道) 8국이요, 약협(若狹)ㆍ가하(加賀)ㆍ월전(越前)ㆍ월중(越中)ㆍ월후(越後)ㆍ능등(能登)ㆍ좌도(佐渡)는 곧 북륙도(北陸道) 7국이요, 단파(丹波)ㆍ단후(丹後)ㆍ단마(但馬)ㆍ인번(因幡)ㆍ백기(伯耆)ㆍ출운(出雲)ㆍ석견(石見)ㆍ은기(隱岐)는 곧 산음도(山陰道) 8국이요,파마(播摩)ㆍ미작(美作)ㆍ비전(備前)ㆍ비중(備中)ㆍ비후(備後)ㆍ안예(安藝)ㆍ주방(周防)ㆍ장문(長門)은 곧 산양도(山陽道) 8국이요, 기이(紀伊)ㆍ담로(淡路)ㆍ아파(阿波)ㆍ찬기(讚岐)ㆍ이예(伊豫)ㆍ토좌(土佐)는 남해도(南海道) 6국이요, 축전(筑前)ㆍ축후(筑後)ㆍ풍전(豐前)ㆍ풍후(豐後)ㆍ비전(肥前)ㆍ비후(肥後)ㆍ일향(日向)ㆍ대우(大隅)ㆍ살마(薩摩)는 서해도(西海道) 9국이다.

   그 지방을 말하면 동으로 육오(陸奧)에서부터 서로 비전(肥前)에 이르기까지가 4천 2백 리요, 남으로 기이(紀伊)에서부터 북으로 약협(若狹)에 이르기까지가 9백 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 육지가 서로 연한 땅이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있는 모든 도(道)의 영량(永良)ㆍ다미(多彌)ㆍ일수(一艘)ㆍ팔장(八丈)ㆍ증도(甑島)와 같은 등속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처럼 분포되어 지역이 혹 대마도보다 배나 되는 곳도 있으면서 모두 66주(州)에 들지 아니한 것인데, 서로의 거리는 또한 각각 수천 리가 된다. 도주(島主)가 된 자는 군(君) 또는 후(侯)라고 부르고 일본의 통치를 받아서 군대를 공급하고 군함을 연습한다. 그러므로 재화나 곡식과 같은 백 가지 토산물이 국중에 모여든다.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문득 황제(皇帝)라 칭하여 연호(年號)를 가졌고, 역서(曆書)를 따로 만들었으니 조타(趙佗)황옥좌둑[黃屋左纛]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지리(地理)를 논의하다가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육오주(陸奧州)는 넓고 크기가 가없어서, 북으로 하이도(蝦蛦島)와 접경이 되어 동서가 50일의 길이요, 남북이 60일의 길이 된다 하는데, 참으로 그러합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전하는 사람이 잘못 말한 것입니다. 육오주가 다른 주에 비하면 조금 크기는 하나 그 지방은 수일의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북쪽에 과연 하이도가 있는데 송전수(松前守)라 칭하는 자가 관리를 합니다. 본래 큰 지방이 아니며 토질이 나빠서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주민들은 얼굴이 검고 털이 있으며 글도 몰라서 동물과 같은데 다만 의복과 언어가 일본입니다.”
하였다.

○ 대마도에 있을 때에 멀리 바라보니, 동남 바다 위에 주먹 같은 섬이 있어 일기도(壹岐島)와 서로 대치한 듯 하였다. 이곳이 어느 지역인지를 물으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곳은 은려도(驢島)라 합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축전주(筑前州)의 관할에 속하는데, 대마도의 동쪽에 있어 수로(水路)로 6백여 리입니다.”
하였다.

○ 일본의 지형은 천지의 정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같으면서 조금 높다. 오직 대마도가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데 수로로 5백 리 거리에 불과하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으로 3천여 리를 가면 대판에 당도하고, 대판에서 또 동북으로 1천 6백 리를 가면 강호에 도착한다. 강호의 땅은 동남이 다 큰 바다로 그 북쪽의 육지가 멀어서 바로 야인(野人)의 경계에 이른다고 하니,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우리나라의 강원도 여러 고을이 일본의 산성(山城)ㆍ대화(大和) 등지와 서로 맞서고 강호 이상은 함경도의 육진(六鎭)에 맞먹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동쪽에 위치하여 해와 달이 뜨는 곳으로 가장 양명(陽明)함이 되고, 아무리 춥더라도 우리나라의 함경도와 같지는 않다. 사신의 행차가 10월에 강호에 머물렀는데도 추위와 물색(物色)이 우리나라 삼남(三南)의 9, 10월과 같았다.

○ 왜인이 말하기를,
“만약 육오(陸奧)로부터 바로 조선의 동북으로 오면 수로(水路)는 매우 가까우나 북쪽에 바람이 높고 바다에 섬들이 없으므로 배가 다니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수길(秀吉)이 조선을 침범할 적에 육오(陸奧)로부터 조선의 국경으로 나오려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구덩이가 3백 리나 되므로 대울타리[竹籬]를 펴고 군사와 말이 건너가려고 계획하였다가 마침내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족히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대개 지세를 논하면 가까운 지름길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예로부터 두 나라에서 한번도 길을 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험하고 어려움이 있는 때문이다.

○ 내가 우삼동과 필담(筆談)을 할 때에 묻기를,
“일본이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혹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된 괴이한 형상을 가진 이상한 무리들이 경내에 표류되어 온 일이 있는가?”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해외 여러 나라에서 장기로 찾아와 장사하는 이들은 아란타(阿蘭陀) 서양국(西洋國) 사람들인데, 의복과 언어는 비록 같지 않으나 형상은 별로 다른 것이 없고, 단 10여 년 전에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배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왔기 때문에 그 배와 행장은 하나도 수습된 것이 없고, 한 남자가 언덕에 닿아 살아났는데 머리털은 긴데 거두지 아니하고 드리워서 이마를 덮었고, 두 다리는 모두 푸른빛인데 무릎에는 슬개골(膝蓋骨)이 없어서 모양이 죽간(竹竿) 같고, 오곡을 먹지 않고 소금 두어 되를 먹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은 때문에 마침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황경(大荒經)》 현고국(玄股國)이 있다 하였는데 다리가 청색인 것은 현고라 할 수 있겠으나 다만 소금을 먹는다는 글이 없으니, 상고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또 묻기를,
“동해 가운데 여인의 나라가 있다 하니, 혹 보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이 바다 가운데 모든 나라로부터 수로로 통하는데, 만약 여인국이 있다면 천백 년 동안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어찌 그 사람을 한번도 본 이가 없겠습니까. 일본의 동남 바다 가운데 팔장도(八丈島)란 곳이 있어 땅이 크고 백성이 많은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는 열에 2, 3인밖에 되지 아니하므로 속칭 여자의 고을이라고 부르니, 옛말에 이른바, 여인국이란 것이 여기에서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상고에 신인들이 기록한 것은 모두 바다 섬의 원시 시대를 말한 것이므로 그 지방의 풍속과 인물이 혹 근사한 대로 이름을 지었지만, 지금은 풍속과 습성이 변하여 백 가지에 한 가지도 맞는 것이 없다. 수길이 통합한 이후로부터 모두 나라가 일본에 통합된 중에 반드시 옛날의 그러한 종류들이 많았을 것이다.

○ 내가 묻기를,
기이주(紀伊州)서불(徐巿)의 무덤서복(徐福)의 사당이 있다 하는데 서복 등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진시황(秦始皇)이 책을 불태우기 전이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고문(古文)의 진본이 있다 하는데, 지금 수천 년에 이르도록 그 글이 천하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이 말은 허황한 것입니다. 구양수(歐陽脩)도 이런 말을 한 바가 있으나 모두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입니다. 대저 성현의 경전은 천지간에 지극한 보배로서 귀신도 그것을 능히 감추지 못하므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혹 노(魯) 나라 벽에서 나오고 혹은 대항두(大杭頭)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본이 비록 멀리 바다 가운데 있으나 그 책이 있다면 반드시 나올 이치가 있고, 일본의 인심이 자랑하기를 좋아하는데, 만약 옛 성인의 남긴 책이 홀로 이 땅 위에 감추어져 있어 천만 세의 보배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비록 국법을 엄하게 세워도 그것을 외국에 파는 것을 금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책의 파는 것을 금한 일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겠습니까.”
하였다. 서복이 바다에 들어온 뒤에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세상에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복의 자손이 지금 왜황(倭皇)이 되고, 5백 명의 동남 동녀는 각각 씨족(氏族)이 되어 왜국이 생겼다.”
하니, 이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대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토지가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임금이 있기 마련이다. 왜국의 땅이 모든 섬을 합병하여 자못 수천만 리가 되어 아름다운 산, 고운 물, 기름진 토지에 백가지 곡식이 풍부하고 만 가지 보화가 자연스럽게 나는데, 이것이 어찌 진 나라 시대를 기다려서 사람이 있게 된 것이며 서복을 기다려서 임금이 있겠는가. 서복의 부자가 본시 방외(方外)의 이인(異人)으로서 바다 가운데 살 만한 땅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진 나라를 피할 꾀를 내어 불사약을 캔다는 말로서 진시황을 달래어 배와 동남 동녀를 얻어가지고 간 것이다. 그때에 중국에서는 왜라는 땅이 있고 그 땅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복이 일본에서 살다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것은 믿을 만하나, 지금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그 자손이다거나, 5백 명 남녀의 후손이 다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시대가 멀어서 알 수가 없다.

○ 국중에 이름난 산수를 내가 왕래하면서 본 것은 부사산(富士山)ㆍ비파호(琵琶湖)보다 큰 것이 없고, 영(嶺)의 험한 것으로는 홀로 상근령(箱根嶺) 같은 것이 없다. 기타 애탕산(愛宕山)ㆍ접침령(摺針嶺)ㆍ금절하(金絶河)ㆍ육향강(六鄕江)의 등속은 모두 논할 것이 없고, 육오(陸奧)금화산(金華山), 하야(下野)일광산(日光山), 이세(伊勢)열전산(熱田山), 기이(紀伊)웅야산(熊野山)은 모두 명산으로 드러났으나,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왜인의 풍속이 거짓이 많고 허황하여 신이(神異)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여 이르기를,
“부사산은 하루에 절로 솟아났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에 절로 열렸으니, 이것은 신령의 조화로 설치된 것이므로 사방에서 유람하러 오는 자가 반드시 재계한 뒤에야 앙화를 면하는데, 부사산은 재계를 열흘 동안 하여야 되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 재계를 하여도 된다.”
하여, 내가 듣고 웃기를,
“만약 그렇다면 부사산 비파호 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흙 한 줌, 돌 한 덩이가 조화의 신이 만들지 아니한 것이 어느 것이 있는가.”
하였다. 또 들으니,
열전산(熱田山)에는 태진원(太眞院)이 있다.”
하였다. 이것은 당 명황(唐明皇)이 꿈에 태진원에서 놀았다는 말을 빙자하여 열전산을 봉래산(蓬萊山)으로 삼으려고 궁관(宮觀)을 지어서 신선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웅야산(熊野山)서복사(徐福祠)도 또한 이런 종류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 국중의 모든 산이 동북에서 시작하였으므로 그 지세를 보면 역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대저 산의 형상이 수려(秀麗)하여 높고 큰 산이라도 반드시 기이하고 곱고 뾰족하여 웅장하여 험하고 원대한 형세가 없고, 그 밖에는 낮은 산이 들을 안았고 얕은 멧부리가 돌아서 거의 다 명랑하고 곱고 산뜻하여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고, 물도 또한 근원이 크지 않고 빙빙 돌고 맑고 푸르러서 파서 만든 것과 같다. 그 인물들이 민첩하고 명석한 자는 많은데 질박하고 두터운 자는 적으니, 대개 강산의 기운을 얻은 때문이다.

○ 일본의 역법(曆法)이 우리나라와 더불어 대동소이한데 자기네가 말하기를, 그 땅이 해 뜨는 동쪽에 있으므로 밤낮의 길고 짧은 것이 같지 아니하고 달의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틀림이 있다 한다. 내가 일찍이 그 동지(冬至)를 본 즉, 우리의 동지와 하루를 두고 먼저하고 뒤에 두는데, 섣달 그믐날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날과 달은 혹 틀리면서 해[歲]는 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여필(成汝弼)이 천문관측을 할 줄 알아서 바다 위에서 별을 바라보다가 가리켜 말하기를,
“남방 칠수(七宿) 밖에 여러 큰 별이 있는데, 이것은 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하던 바이니, 아마 이것은 노인성(老人星)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옛말에, ‘노인성을 보는 자는 수(壽)가 백 살 넘는다.’ 하는데, 지금 그대는 이번 걸음에 오래 살게 되었구나.”
하였다. 이장흥 사성(李長興思晟)은 또한 천문을 아는 사람인데, 말하기를,
“천문서(天文書) 가운데 노인성은 현증(現證)이 없다.”
하였다. 우삼동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는 천문가[甘石]의 말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이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으나 능히 별[星] 분야(分野)의 법으로써 국내의 모든 주(州)에 배정하여 각각 별과 지방의 정한 위치가 있어 국사에 기록되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지방의 길하고 흉한 것이 또한 능히 그럴 듯하게 징험이 있는 것이 중국 사람의 별 분야의 말과 같은 점이 있으니, 그 이치를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말이 심히 우습다. 그러나 천문의 별이 다만 중국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즉, 중국 구주(九洲) 밖에 천문의 분야로서 자기 국토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또 홀로 일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사시의 명절은 우리나라와 서로 같은데, 8월 초하룻날10월 초하룻날도 또한 속절(俗節)이 되고, 단오백중날이 가장 가절(佳節)이 된다. 단오에는 집집마다 기를 세워서 전쟁을 익히는 장난을 하니, 우리나라의 두 남자가 씨름을 하는 종류와 같은 것이다. 백중날에는 산에 올라가 등을 달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는데, 한 사람이 각각 등 하나씩 달아서 자손이 많은 자는 혹 수십 등에 이른다. 술과 음식을 많이 갖추어 집안 사람을 먹인다.

○ 겨울 추위가 맹렬하지 아니하여 예로부터 눈이 한 자 되도록 쌓일 때가 없고, 국가에도 얼음을 저장하는 법이 없다. 유일하게 부사산 상봉에는 사계절 내내 얼음이 있으므로 단옷날에 그것을 캐다가 천황과 관백의 궁에 바친다. 서민들은 얼음 모양의 떡을 만들어 그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막는 방법이라고 하니, 가소롭다.

육오주(陸奧州)에는 황금이 난다. 금산(金山)이 바다 가운데 있는데 을 캐는 자는 반드시 재계 목욕하고 신에게 제사지내어, 금 몇만 근(斤)을 얻겠다고 청한 후에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그 수량을 초과하면 반드시 그 배가 파손된다. 석견(石見)ㆍ좌도(佐渡)ㆍ단마(但馬) 등의 주에는이 생산되고, 비중(備中)ㆍ파마(播摩)에서는 구리쇠가 생산되고, 풍전(豐前)ㆍ풍후(豐後)에서는 철(鐵)이 생산된다. 섭진주(攝津州)에는 목화가 많고, 월전주(越前州)에는 흰 솜[綿]이 많고, 축전주(筑前州)에는 미곡(米穀)이 많고, 상모주(相模州)에는 재목이 많다. 일기(壹岐)의 포(布), 가하(加賀)의 비단, 미농(美濃)의 종이, 적관(赤關)의 벼루, 삼원(杉原)의 술, 우치(宇治)의 차(茶), 도포(韜浦)의 돗자리는 모두 국중의 명품이다. 갑비(甲斐)에서는 말이 나는데, 대부분 준마들이다. 총과 갈기를 깎아버리고 발에다가 짚신을 신겨서 다니게 한다. 장문주(長門州)에서는 소가 나는데 몸이 작고 색은 검다. 여기는 소를 잡는 법이 없는데도 산출되는 소가 농장에도 넉넉히 공급되지 못한다. 비전(備前)ㆍ미장(尾張)ㆍ살마(薩摩) 등 주에는 긴 창과 예리한 칼이 생산되어 천하의 좋은 기물이 되었다.

○ 바다에서 나는 어류 품종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동해의 어류와 같은데, 석결명(石決明)이 많고, 청어(靑魚)ㆍ대구어(大口魚)ㆍ연어(連魚)ㆍ송어(松魚)ㆍ문어(文魚)ㆍ고도어(古刀魚)는 다만 북륙도(北陸道)산음도(山陰道)에서만 생산되고, 산돼지[山猪]고기, 노루[獐]고기, 사슴고기 및 그 피물(皮物)들은 북쪽에는 천하고 남쪽에는 귀하다. 채소는 각종이 우리나라와 같은데, 무 뿌리는 길이가 한 자를 넘으나 맛이 없다. 토란[芋]은 그 큰 것은 사발만 하므로 쪼개어 구워서 시장에 팔곤 하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사먹고 요기를 한다. 과일의 종류는 귤과 유자가 가장 많아서 가는 곳마다 숲이 되었고, 감자(柑子)의 작은 것은 밀감이라 하는데, 맛이 달기 때문에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다. 그 크기가 주먹만한 것은 이름을 구년모(九年母)라 하는데, 옛적에 구년라는 어떤 노파가 맨 처음 심었다 하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금귤(金橘)은 색깔과 향기가 모두 아름다우나 맛이 시어서 먹을 수 없고, 기타 배ㆍ대추ㆍ복숭아ㆍ오얏ㆍ밤 등속은 다 우리나라와 같다. 참외는 모양이 길고 맛이 싱거우며, 수박은 속이 붉고 맛이 달다. 화초는 국화가 제일 번성하고, 매화와 대가 그 다음이다. 사앵(絲櫻)ㆍ다화(茶花)ㆍ비파(枇杷)ㆍ소철(蘇鐵)ㆍ종려(棕梠)가 다 명품이며, 동백은 집집마다 다 심어서 기름을 짜서 팔아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다. 사앵화(絲櫻花)는 잎이 엷고 가늘고 길며, 가지가 하늘거려 수양버들과 같고 또 해당(海棠)으로써 수사(垂絲)한 것이 있는데, 붉은 실로 구슬을 꿴 것 같아서 주렁주렁한 것이 사랑스럽다. 다화는 한겨울에 번성하게 피고, 비파는 겨울에 꽃이 피어 여름에 열매가 여니 또한 이상한 물건이었다.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는 과일은 백자(柏子)와 호두[胡桃]이며, 새는 꾀꼬리ㆍ까치ㆍ매ㆍ새매[鸇]이며, 짐승은 범ㆍ표범이 없다. 약에는 인삼이 없고, 음식에는 벌꿀이 없다. 이 두 가지는 다 우리나라에서 얻어다 쓰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음식을 달게 하는데는 모두 설탕을 타고, 촛불은 고래 기름과 나무의 즙을 쓴다. 후추[胡椒], 단목(丹木), 설탕, 화탕(花糖), 흑각(黑角)과 공작의 날개 등은 다 일본의 토산이 아니라 혹 중국의 복건(福建) 또는 절강(浙江)에서 나거나 혹은 남만 여러 나라에서 나는 것들이다. 이것을 그 나라 바다 상인들이 장기도에 내왕하여 금은과 무역해 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얻어다가 동래(東萊)에 팔곤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일본의 특산물이라고 부른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감자를 먹다가 묻기를,
“이 물건은 우리 남방 해읍(海邑)에도 간혹 있고, 제주(濟州)에는 생산이 많아서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는데, 그 맛이 다 귀국의 감자와 같지 않습니다. 감자도 또한 아름다운 종자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답하기를,
“좋고 나쁜 것이 각각 토질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귀국의 배가 남도(藍島)에 표류하여 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탔던 사람과 실렸던 물건은 이미 침몰되고 홀로 부서진 배의 남은 목판에서 감자 한 상자를 얻었는데, 상자 위에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제주 목사가 공물로 바친 것이었습니다. 관청에서 조정에 아뢴 뒤에 그 상자를 열어보니, 감자는 모두 부패하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섬 가운데 사람들이, 그것을 타국의 물건이라고 귀중히 여겨 그 씨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가 성장하자, 이름을 제주감자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른바 제주감자란 것이 맛이 달고 품질이 좋기가 일본의 감자와 구별이 없습니다.”
하였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한 왜인이 필담으로 묻기를,
“일본에 범과 표범이 없으므로 그 형상은 알지 못하거니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나운 어금니와 갈퀴 발톱으로 사람을 잡아먹곤 하며 한번 포효하면 산골이 찢어지는 듯하여 오확(烏獲)맹분(孟賁)같은 용사도 감히 앞에서 맞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귀국에서 범ㆍ표범 가죽을 많이 쓰는데 어떤 방법으로 잡습니까?”
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지간에 사람을 먹는 짐승이 사람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 없음이 마치 하육(夏育)ㆍ태사교(太史噭)가 보통 사람에게 목숨을 잃은 것과 같으니, 이것이 진실로 이치이다. 우리나라에서 범ㆍ표범을 잡는 데는 혹은 함정으로, 혹은 조총과 화살로써 하고, 서북도 변방에 재관(材官) 용사들은 모두 철갑(鐵匣)을 팔에 끼우고 능히 손으로 쳐서 잡는 것이 많다. 또 범을 먹는 짐승이 있어 이름을 비(羆)라 하는데, 이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두려운 바가 없다.”
하니, 여러 왜인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일본에는 다만 범ㆍ표범만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곰이나 비(羆)나 늑대와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부드럽고 약하여 간사한 꾀는 잘 내면서 위무(威武)에는 부족하므로, 나의 말을 듣고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 왜인이 또 묻기를,
“귀국의 인삼은 성분과 맛이 천연으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인력으로 만드는 수가 있습니까?”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약 성분은 천연으로 된 것이 귀중한 것이므로 독이 있는 약을 법제(法製)하는 외에는 그 성분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영약인데 어찌 인력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였다. 왜인이 말하기를,
“일본에도 또한 그런 풀이 있는데, 줄기와 잎과 뿌리가 한결같이 인삼과 같은데도 먹으면 맛이 없고 또한 그 효력이 없으므로 조선의 인삼은 만드는 방법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더니,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보니, 일본에서 나는 것은 필시 사이비(似而非)한 것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 내가 보건대, 왜인들이 사용하는 기명(器皿) 백물이 검은 칠 한 것이 반짝거려 거울과 같고, 궁실과 선판(船板)ㆍ다리ㆍ가마 같은 데도 또한 반드시 칠을 하였는데, 칠빛이 반짝거려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만약 그것이 오로지 옻나무 액을 가지고 이와 같이 광채나게 바른다면 서민의 집에도 한 해에 소용되는 옻나무 액이 아마 몇 말은 될 것이며, 공후(公侯) 귀인은 마땅히 열 섬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과한 동리나 산과 들에는 또한 칠림(漆林)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괴이하게 여겨 왜인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푸른 감을 두드려 즙을 짜서 깊이 잘 간직하면 해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데, 일본의 칠하는 법은 먼저 감즙을 가지고 바르고 재삼 발라 말린 다음 팽엽(彭葉)으로 갈[磨]면 그 빛이 환하게 되는데, 그런 뒤에야 옻칠을 하기 때문에 옻칠을 적게 하여도 색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 음식의 제도는 밥은 두 홉에 지나지 않고, 반찬은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아니하여 극히 초라하다. 먹는데 따라 다시 보태어 남는 것이 없게 하고, 밥 먹은 뒤에 청주를 마시고 다음에는 과실을 먹으며 과실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시고 파한다.
술은 제백(諸白)을 상품으로 삼는데, 백미와 누룩을 가지고 백미밥에 섞어 만드는 것이므로 제백이라 한다. 매주(梅酒)ㆍ상주(桑酒)ㆍ인동주(忍冬酒)ㆍ복분주(覆盆酒)는 맛이 아름답고 향기가 강렬하다. 연주(練酒)는 우리나라의 이화주(梨花酒)와 같다. 장(醬)은 콩과 누룩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맛은 약간 시고 빛깔은 거칠다.
떡은 우리나라의 인절미와 같은 것이 매우 많고, 소종(篠粽)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권무병(拳拇餠 가래떡)과 같이 만들어 댓잎에 싸서 쪄서 형상이 죽순과 같으며 열 개를 1파(把)라 한다. 외랑병(外郞餠)이란 것이 있는데 소종과 대략 같다.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모가 있고 마디가 나고 색은 붉고 맛은 단데 댓잎으로 싸서 형상이 죽간(竹竿)과 같으므로 남에게 선사하는 자는 일간(一竿), 이간(二竿)이라 한다. 또 만두(饅頭)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 상화병(霜花餠) 같은데 겉은 희고 안은 검고 맛은 달다. 양명당(養命糖)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백탕(白糖)과 같은데 부드럽고 들러붙지 않는다. 구비이(求肥飴)란 것이 있는데 흑당(黑糖)의 종류로써 약을 달여서 만든 것과 같고, 천야이(淺冶飴)란 것이 있는데 천문동(天文冬)에 설탕을 탄 것이요, 당고(唐糕)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의 설고(雪糕)와 같은데 엿을 타서 맛이 달고 참깨로써 입혔는데 먹으니 가장 아름답다.
변과자(卞果子)란 것은, 왜속에 간(乾)을 변(卞)이라 한다. 대개 간(乾)자의 반자(半字)를 쓴 것이다. 설탕물에다가 쌀과 누룩 가루를 섞어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어 크고 작은 것이 섞였고, 그 색은 푸르고 붉고 아롱지고 희고, 혹은 금과 은을 칠하여 우리나라 빙사과(氷沙果)ㆍ약과(藥果)의 종류와 같은 것인데 기름으로 굽지 않았다.
국수는 사면(絲麪)삭면(索麪)이 있으니, 약간 가는 것은 삭면이라 하고, 지극히 가는 것은 사면이라 하는데 칡가루에다가 메밀을 섞어 만들어서 가닥이 길어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접어서 사리[卷]를 만들었고, 국물에 타서 빛깔이 흰데 맛이 좋다. 떡국[湯餅]은 찹쌀떡 둥글고 두터운 것 두 가락을 가지고 그릇에 넣어서 물과 장을 탄 것인데, 조금 신맛이 있으나 먹을 만하였다.

○ 찬품(饌品)은 삼자(杉煮)로서 아름답다 하는데, 어육(魚肉)과 채소 백 가지 물건을 섞어서 술과 장을 타서 오래 달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잡탕 등속과 같은 것이다. 옛적에 여러 왜인들이 삼목(杉木) 밑에 비를 피하다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생각하여 각기 가진 바 물건을 가지고 한 그릇에 집어넣어 삼목을 가지고 불을 때어 달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으므로 인하여 삼자(杉煮)라 하였다. 왜인의 방언(方言)에 삼목을 승기(勝技)라 하므로 속(俗)에 이 음식을 승기야기(勝技冶技)라 하니 야기는 굽는다는 말의 와음(訛音)이다.

   어품(魚品)은 박지(粕漬)로써 아름다운 것을 삼는데 생선을 술찌꺼기에 담가서 맛이 익으면 깨끗이 닦아 마치 우리나라 식염어(食鹽魚)와 같은 종류이고,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또 변갱(卞鰹)이란 것이 있는데 형상이 소뿔과 같아서 단단하여 부수기가 어렵다. 그 육질을 보면 우리나라 고등어의 살 두터운 것을 두들겨 합하여 만든 것인 듯하다. 왜인들이 반드시 국을 끓이거나 면탕을 할 때에 칼로 다져 가루를 만들어 조미료로 쓴다. 대구어는 설(鱈)이라 하고, 은구어(銀口魚)는 조(鰷)라 하고, 도미어(道味魚)는 조(鯛)라 하고, 고등어는 점(鮎) 혹은 정(鯖)이라 하고, 방어(魴魚)는 홍어(紅魚) 또는 사(鰤)라 하고, 연어(鰱魚)는 규어(鮭魚)라 하고, 적어(賊魚)는 갈(?)이라 한다. 마른 것을 변(卞)이라 하고 생 것을 선(鮮)이라 하고, 소금에 담근 것은 염지(鹽漬)라 하고, 술 찌꺼기에 담근 것은 박지(粕漬)라 한다. 이 밖에 물새를 털 그대로 말리고, 바다 소라를 그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삶아서 금과 은으로 점을 찍고 도금해서 연회의 화려한 음식으로 삼았다.

○ 음식을 담는 그릇은, 삼중(杉重)이란 것이 있는데 일조(一組)에 삼목판(杉木板)으로써 삼층의 합을 만들어서 위에는 떡 등속을 넣고, 가운데 함에는 과실과 나물을 넣고, 아래층에는 어육을 넣고 아롱진 실로 노끈을 짜서 그 허리에 매었다. 회목(檜木)으로 만든 것은 회중(檜重)이라 하고, 백목(柏木)으로 한 것은 백절(白折)이라 하고, 채색을 한 것은 화절(花折)이라 한다. 2층 대합(大榼)은 주(橱)라 하는데 술을 선사할 때는 1하(一荷), 2하(二荷)라 한다. 왜인들이 물건을 운반할 때는 반드시 어깨에 메는데, 멜 때는 앞뒤에 두 통이므로, 1하라고 하는 것은 두 통의 술이다. 기타 국이나 밥이나 술과 과실을 담는 보통의 기명(器皿)은 다 붉은 칠, 검은 칠을 한 나무 그릇을 쓰고, 혹 백철기(白鐵器)가 있고 원래 유기(鍮器 놋그릇)는 없다. 연회에 술을 붓는데는 토배(土杯)를 쓰는데, 붉은 식토(埴土)로 만든 것으로서 형상이 접시와 같아 제도가 매우 질박하고 누추하였다. 위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민간에 이르기까지 이 잔으로 술을 수작하여 존경하는 것이라 하니, 그 뜻이 대개 주인과 손과의 사이의 예의는 성실함과 공경함을 위주로 하는 것이므로 헛 문채를 꾸미지 아니하고 예스럽고 질박함으로써 보여서 주인과 손과의 술자리에 쓰는 것이라 한다.

○ 국중에 귀하고 천한 남녀가 하나도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반드시 다탕(茶湯)을 마신다. 곧 집집마다 차(茶)를 저축하기를 곡식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차는 곧 작설(雀舌)의 종류인데, 혹 푸른 싹을 따서 두들겨 말리어, 가늘게 가루를 만들어 더운 물에 타서 마시고 혹은 긴 잎으로 더운 물에 끓여서 찌꺼기를 건지고 마시는데, 매양 식후에 반드시 한 사발씩 들이킨다. 시가와 길가에도 화로를 설치하여 차를 끓이는 사람이 천 리에 서로 바라볼 만큼 있었다. 사신 행차 대소 수백 인이 날마다 공급 받는 것이 각각 청다(靑茶) 한 홉, 엽차 한 묶음이요, 지나가는 곳마다 관(館) 가운데 따로 차 끓이는 중[僧]을 두어서 낮과 밤으로 물을 끓여 놓고 기다리게 한다. 그들 풍속의 매일 행하는 떳떳한 예절로 차와 같은 것이 없다.

○ 우리나라의 소위 남초(南草)란 것은 본래 동래(東萊)왜관(倭館)으로부터 얻어 온 것인데, 속담에, 담마고(淡麻古 담배) 곧 왜말에 다엽분(多葉粉)이란 음(音)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왜인도 역시 부르기를 우리나라 속음처럼 부른다. 그러나 뜻은 잎이 많고 가는 가루[粉]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쪄서 말리어 독을 제거하고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매인이 반드시 담뱃대 두 개를 가지고 번갈아 피워서 더운 기운이 목구멍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니, 식물(食物)에 대하여 정갈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 왜인이 고래고기의 회(膾)를 가장 중하게 여겨서 비싼 값으로 사서 손을 접대하는 화려한 찬으로 하나, 부드럽고 미끄럽고 기름져서 별로 다른 맛이 없었다. 내가 통역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일본 사람은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종신토록 부귀(富貴)를 할 수 있다 하니, 과연 그런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찌 한평생에만 그치겠습니까. 대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공후 귀가(公侯貴家)에서 고래 회ㆍ고래 젓[醢]을 제일의 명품(名品)으로 삼아서 중한 값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본의 등촉(燈燭)은 다 고래의 기름을 쓰는데 고래고기의 크기가 주먹만한 것이면 능히 기름 한 사발을 취할 수 있으니, 이것은 기름을 파는 이익만도 당장에 1만금을 얻을 수 있고, 이[齒] 기름, 등지느러미[鬐], 수염[鬣]도 다 기물(器物)을 만들 수 있어 그 이익이 또한 많으므로, 바다 근처의 사람들에게 포경장(捕鯨將)이란 것이 있어, 무리를 모으고 재물을 소비하여 그물과 기계를 설치하되, 그것을 잡아 부자가 된 자는 또한 적습니다.”
하였다.

○ 왜인은 갈분(葛粉)을 잘 제조한다. 갈근(葛根)을 물에 담가 두들겨 가루를 만드는데 부드럽고 가늘고 깨끗하고 희고 맛이 달고 성질이 냉(冷)하여 국수를 만들면 가장 훌륭하다. 녹말(菉末)을 만드는 것은 능히 우리나라처럼 정밀하게 하지 못하므로 대마도에서 강호에 해마다 바치는 것은 조선 녹두가루를 바치는 것이라 한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옛적에 의복의 제도가 없어서, 사람들이 알몸으로 있었는데, 진 무제(晉武帝) 시대에 백제왕(百濟王) 아화(阿花)가 여공(女工) 재봉하는 법을 일본에 전해주어 비로소 의복이 있었다 하니, 그 말은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 보건대 그들의 소위 공복(公服)이란 것은 대략 우리나라 단령(團領)의 제도와 같으면서 소매는 넓어서 중의 옷과 같고, 옆에는 재단이 없고 다만 양쪽에 바로 기운 것만이 있고 또 옷 허리에 붙여 기운 것이 앞뒤로 각각 칠팔 촌쯤 되게 드리웠으나 또한 띠도 없고 그 색깔은 붉은 것, 검은 것의 차별이 있으니, 가장 귀족은 흑색이요, 나머지는 다홍색이요, 그 다음은 두 폭을 가지고 단삼(單衫)을 하였는데, 소매가 없어 모양이 반비(半臂)와 같아 바지로써 받쳐서 허리에 결속(結束)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도포의 종류와 같은데, 앞에는 깃이 없고 옆에 자락이 있으니, 이것이 다 존전(尊前)에 통용하는 옷이다. 바지의 제도도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청백교직(靑白交織)으로 하여 제도가 우리나라 여인의 네 폭 바지와 같고, 앞뒤에 각각 주름이 있는데, 앞은 셋이며 뒤는 둘이요, 또 끈을 매었고 상반(上半)은 깁지 아니하였고, 후면에는 따로 검은 칠을 한 작은 판(板)을 붙였는데 길이는 5촌 남짓하고 넓이는 2촌인데 허리에 가로 붙여서 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귀인의 옷이요, 그 다음 제도는 중국인의 바지 같으면서 그 길이가 발[足]을 덮어서 땅에 두어 자나 끌리는데, 모든 왜인들이 존전(尊前)에 성복(盛服)을 할 때에 입고, 그 다음은 길이가 발을 가리지 못하고 매우 좁아서 겨우 다리를 꿸 만하니, 이것은 천한 자들이 심히 추운 때에 입는 것이다. 관(冠)은 제도가 세 가지가 있으니, 한 가지는 대략 사모(紗帽)와 같으면서 낮고 둥글기가 주발 뚜껑과 같아 겨우 발제(髮際)를 가릴 만하고, 위에 관이 있어 양(梁)이 뾰족하고 높은데 검은 나무 잠(簪)으로 양(梁)에다 가로 꽂았으며, 뒤에는 한 뿔이 있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두어 치나 되는 것이 솟아나왔는데 조금 구부려 아래로 드리웠고 또 긴 갓끈으로써 폭의 위에서부터 턱 밑에 매었는데 귀족들은 붉은 실 갓끈을 쓰고, 나머지는 다 흰 종이로 된 갓끈을 달았다. 이것은 관의 최상이 되므로 관백(關白) 이하의 각주(各州) 태수가 사용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정자(丁字)와 같은데 오모(烏帽)라 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베 짜는 북[杼]과 같은데 앞에 두 귀가 났다. 이것은 절오모(折烏帽)라 한다. 모두 종이에 풀칠을 하여 만들었는데 각주의 봉행(奉行) 이상 직명(職名) 있는 자가 쓴다. 공(公)이나 사(私)의 예석에 한 번 쓰는 외에는 다시 보통 때에 관을 쓰는 자는 없으니, 우습다.

중[僧]도 관품(官品)이 있으니, 자삼(紫衫)을 입은 자가 상품이 되고, 황삼을 입은 자가 다음이요, 나머지는 다 검정 옷이다. 옷의 제도는 대략 심의(深衣)와 같은데 두 소매는 넓고 상(裳)의 폭은 혹은 바로 하고, 혹은 재단을 하였다. 가사(袈裟)는 우리나라 중들이 입는 것과 같으면서 길이와 넓이가 더하고 턱 아래 합금(合襟)한 곳에 쇠고리를 가지고 걸어 매었으며, 모두 안에는 추울 때 더울 때에 입는 장의(長衣)가 있고, 바지는 입지 않았으며, 머리에는 관도 건(巾)도 없어 담 장로(湛長老)창 장로(菖長老)가 사신에게 들어와 볼 때에도 또한 맨머리로 대해 앉았다. 강호에서 국서(國書)를 전하는 날에 두 장로가 관백의 궁으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 머리 위에 물건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모양은 함(函)의 뚜껑과 같은 것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머리를 용납할 만하고 황색을 칠하였는데 그것을 머리 위에 이고 뒤로는 두 어깨에 걸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궁중에서 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밖에서는 쓰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습다.

○ 평민의 의복은 남녀가 구별이 없어 모두 우리나라 여인의 장의(長衣)와 같은 종류인데, 소매는 너르고 짧으며 그 색깔은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된 것이 많고, 여자는 화초를 여러 가지 채색으로 놓고 그려서 바라보면 그림 가운데 부처[佛]와 같았다. 남자는 띠가 없고 여자는 큰 띠로써 허리를 묶었다. 남녀가 모두 반폭의 푸른 베로써 배꼽 아래로부터 생식기를 가렸고, 치마, 바지의 등속은 없었다.

은 귀천(貴賤)이 모두 짚신을 신었는데 다만 한 가닥의 승비(繩鼻)로써 발가락을 걸었으므로 버선도 역시 두 쪽으로 쪼개져서 승비(繩鼻)를 걸고 다닌다. 혹은 나무껍질로 삿갓을 만들어 모양이 갈대 삿갓 같으면서도 편편하며 넓게 하여 남녀간에 그것을 쓰고 볕을 막고, 비를 피한다. 우의(雨衣)는 깁이나 종이를 가지고 삼수(衫袖)가 있는 단의(單衣)를 만들어 푸른 그림이나 칠을 하였고, 추위를 막는 데는 솜을 둔 한 자의 비단으로 정수리를 덮었는데 모양이 주머니와 같고, 여자는 붉고 흰 설면자(雪綿子)로 머리에 덮는 것과 자색의 깁으로 네 귀를 가리는 것이 있었다.

○ 왜인의 풍속은 앉으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귀천(貴賤), 남녀, 노장(老壯), 아이 병약(病弱)한 자를 막론하고 앉기만 하면 반드시 꿇어 앉아 비록 길가에 술을 파는 여인이나 논에서 벼를 베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옷을 여미고 앉는데 그 법을 본즉 예의(禮儀)로 꾸미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그 옷이 앞에는 옆으로 섶[衽]이 없고, 아래에는 바지가 없으므로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생식기를 가리기가 어려운 까닭에 부득이한 데서 법이 생겨 습관이 천성(天性)처럼 되었으니, 우습다.

○ 또 가장 우스운 것이 있으니, 관백의 궁중에 모든 집정(執政)과 측근자가 공복(公服) 판(板)을 붙인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짧은데도 꿇어앉게 되므로, 두 다리 사이에 두어 자나 되는 백포(白布)를 달아 뒤로부터 드리우는데, 긴 바지를 입을 때에는 백포의 길이가 발에서 한 자 남짓이나 더 되어 모두 땅에 끌고 다니므로 모든 신하들이 동작을 할 때에는 싹싹 소리가 있어 자리 위가 소란스러운데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은 공경하는 것이라 하고, 각주(各州) 태수의 집에도 그 신하되는 섭정 이하가 또 이와 같이 한다. 그 법을 보건대, 왜인의 풍속이 경망하고 날래서 사람을 찌르는 데에 용감하므로, 그 윗사람 된 자가 혹 무슨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보하기에 불편하여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도록 하여 감히 창졸에 일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국법에 또 맨발로써 공경하는 것이라 하므로 천한 사람들은 평생에 버선을 신어보지 못하고 각주의 섭정 이하 모든 신하들이 그 태수를 볼 때에 맨발로 하고, 태수가 관백을 볼 때에 맨발로 하니, 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내가 경과하는 역(驛)의 벽에 붙어있는 천황(天皇)의 놀러나가는 그림을 보면 금은으로 만든 수레가 극히 화려한데 앞뒤에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붉은 옷, 검은 옷에 백포(白布)를 질질 끌면서 옹기종기 걸어서 따르는데 전부가 맨발이어서 보기에 해괴하기가 관백의 궁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데도 여러 왜인들은 그 그림을 우러러보고서 참새처럼 뛰며 부러워하기를 마치 천상에 참 신선을 보는 것과 같이 하니, 우습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극히 정하고 깨끗하기에 힘쓰고 단청(丹靑)을 하지 아니하고, 기둥과 들보는 섬세(纖細)하고 기와는 가벼우나 덮기를 빽빽이 하였고 지붕의 마루는 높고 처마는 낮게 하여 나무 조각을 덮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덮기도 하여 첩첩으로 비늘과 같이 하였는데, 치밀(緻密)하며 완고(完固)하고 초가(草家)도 높이 쌓아올려 지붕의 형상이 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아 40, 50년은 유지할 만하고, 목판으로 벽을 만들되 매 1면마다 반드시 장자(障子) 셋을 설치하여, 밀어서 열고 닫으며 지도리[樞]와 문고리[環]의 제도가 없다. 한 칸의 넓이가 모두 3보(步)로 되었는데 이것은 온 나라 안이 다 동일하여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고, 매칸(每間)에 자리(일본의 다다미) 석 장을 펴는 것도 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장자(障子)와 자리가 혹시 그 하나가 없어지는 때에는 비록 아무 데서나 구해다가 보충하더라도 모두 병부(兵符)를 합하는 것과 같으니, 국중에 통용되는 척도(尺度)의 정밀함을 알 수가 있다.

○ 집을 짓는 데는 복도(複道)와 부엌ㆍ욕실(浴室) 등이 모두 한 지붕 밑에 있어서 집 하나의 크기가 혹 수백 보에 이르기도 한다. 방에서 벗어나면 아담한 담이 그림과 같고, 연못은 거울과 같다. 또 돌아서 겹겹의 문턱을 지나면 괴석(恠石)ㆍ대[竹]ㆍ이름난 꽃이 뜰을 둘렀고, 또 깊고 으슥한 방에 들어가면 비단 장막, 붉은 담요며 문목(文木)으로 중방[楣]을 만들었고, 벽에 접하여 상을 만들어 기댈 수 있고 누울 수 있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로 들어올지 어디로 나갈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 처마 끝에는 긴 홈을 설치하여 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고, 집 머리에는 물통을 두어 화재를 방지하고, 뜰과 마당에는 가는 돌을 펴서 비올 때에 다녀도 진흙이 묻지 않게 하고, 복도에는 종이 등을 달아서 밤에 다녀도 어둡지 않았다. 이것은 도성(都城)과 지방에 부귀(富貴)한 사람들의 가옥이 대략 이와 같다. 비록 관백의 거처하는 궁전이라도 정결하고 치밀(緻密)한 것은 더할 나위가 없으나 굉장(宏壯)한 것은 부족하고, 장막이나 자리도 또한 주부(州府)의 관사(館舍)와 차별이 없으니, 대개 교묘한 것만을 숭상하고 예법에는 전혀 어두워서 임금의 거처에도 따로 제도를 세우지 아니하고 평민의 부호들도 또한 왕후(王侯)와 사치함을 다툴 수 있으니, 그 등급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국중에 왕궁(王宮)이나 민가에 모두 온돌로 불을 지피는 법이 없고, 다만 판자방(板子房) 위에 두터운 자리와 솜요[雪綿褥]를 깔고 잠자며, 솥이나 남비같은 밥 짓는 그릇은 모두 따로 부엌에 두어 연화(煙火)가 사람의 거처하는 방에는 서로 접하지 아니하고, 다만 지극히 추울 때에는 방 가운데 지로(地爐)를 설치하여 흙을 쌓아 숯불을 피우고 작은 평상을 그 위에 놓는데, 평상은 우리나라의 작은 창처럼 모든 구멍이 있어 불기운을 통하고 이불과 요로써 덮어서 거기에 올라 앉아 땀을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옆에 끼고 앉아 손발을 쪼이는 사람도 있다.

○ 여름날 더울 때에도 파리와 모기가 매우 드므니, 이것은 방 안이 정결하여 더러움이 없고, 어육(魚肉)의 부패한 것은 곧 땅에 묻고, 측간(厠間)에 냄새나고 더러운 것은 곧 밭으로 옮기므로 파리나 모기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모기가 한 번 생기면 푸른 실로 방장(方帳)을 만들어 네 귀의 나무에 걸었는데, 그 높이는 사람이 그 안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할 만하게 하고 한 사람의 잠자는 것을 용납할 만하였다. 속(俗)에 측간을 설은(雪隱)이라 하고, 설은의 옆에는 반드시 욕실(浴室)이 있고 욕실 가운데는 큰 통을 두어 물을 저장하고, 옆에는 한 상이 있고, 상 위에는 흰 저포(紵布) 두어 자를 두었다. 그 풍속이 측간에 간 다음에는 반드시 씻으므로 물통이 있고, 상이 있고, 수건이 있다. 남녀가 교합(交合)하는 방에도 또한 이것을 설치하였다 한다.

사찰(寺刹)은 건축이 높고 크기가 왕궁(王宮)보다 배나 되어, 아름드리 나무로써 둥근 기둥을 만들고 황금으로써 입히고, 문과 창은 모두 문목(文木)이요, 문과 윗중방은 검은 칠이 선명하기 거울과 같은데, 다만 단청 채색만 하지 아니하였을 뿐이요, 벽 사이에 간혹 그림이 있다. 절이라 칭하는 것도 혹은 불상(佛像)을 모시거나 중을 두지도 않고, 천황(天皇)의 모든 아들인 법왕(法王)의 거처하는 곳 및 사신 행차의 머무는 관(館)이 되는 것이요, 정말 절도 또한 민간에 있어 중들이 민간인과 섞여 살아 혹 민간에 관세음보살의 금상(金像)을 모셔놓고 중들 두어 사람이 서서 경쇠[磬]를 치기도 하고, 또 높고 큰 금불(金佛)이 길 옆 노천(露天)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많은데, 조상(造像)의 교묘한 것이 우리나라만 못한 것 같았다.

○ 산수(山水)의 좋은 곳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별관(別館)이 있어 깨끗하고 명랑하여 신선이나 도사(道士)의 거처하는 곳과 같은데, 그것은 반드시 관백 이하 각주 태수의 설치한 찻집[茶屋]이라 하니, 곧 그들이 왕래할 때에 쉬면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또 길 옆 좌우에 간간이 깨끗한 한두 칸 집을 아주 묘하게 지어 쉴 만한 곳이 있는데, 물은 즉, 그것은 곧 귀인(貴人)이 길가다가 쓰는 측간으로 설치한 것이라 했다.

관제(官制)는 그 제도가 9품이 있는데, 품(品)이라 하지 않고 위(位)라 한다. 거기에도 정(正)ㆍ종(從)의 구별이 있다. 대집정(大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우집정(右執政)이란 것이 있으니, 옛적의 삼공(三公)과 같다. 대장군(大將軍)이 가장 귀하고, 대납언(大納言)은 아상(亞相)이 되고, 중납언(中納言)ㆍ소납언(小納言)은 옛적 황문(黃門)급사중(給事中)의 등속이다. 식부(式部)ㆍ치부(治部)ㆍ민부(民部)ㆍ병부(兵部)ㆍ형부(刑部)ㆍ궁내성(宮內省) 이것이 육관(六官)인데, 각각 경(卿)ㆍ대보(大輔)ㆍ소보(小輔)ㆍ대승(大丞)ㆍ소승(小丞) 등의 관(官)이 있고, 소부(掃部)ㆍ직부(織部)는 소제(掃除)와 직조(織造)를 맡은 관직이요, 대장(大藏)은 조세(租稅)를 맡고, 준인(準人)은 의장(儀仗)을 맡고, 선부(膳部)는 음식을 맡고, 전약(典藥)은 의약(醫藥)을 맡고, 채녀(采女)는 여관(女官)을 맡고, 태학료(太學寮)는 문학(文學)을 맡고, 탄정료(彈正寮)는 규찰(糾察)을 맡고, 중장(中將)ㆍ소장(小將)ㆍ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ㆍ좌병위(左兵衛)ㆍ우병위(右兵衛)ㆍ좌마료(左馬寮)ㆍ우마료(右馬寮)ㆍ병고료(兵庫寮)는 모두 숙위(宿衛)를 맡아 백관(百官)의 직책이 각기 관청이 있는데, 요(寮)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두(頭)ㆍ윤(允)ㆍ조(助)의 3등의 관(官)이 있고, 서(署)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수(首)ㆍ우(佑)ㆍ영(令)ㆍ사(使)라는 관이 있어서 각기 그 직책으로 육관(六官)의 속관(屬官)이 된다. 각주에는 수(守)ㆍ개(介)ㆍ목(目)ㆍ연(掾)이 있으니, 수는 자사(刺史)와 같고, 개는 별가(別駕)와 같고, 목은 주부(主簿)와 같고, 연은 사마(司馬)와 같다. 이것은 그들의 내외의 관직이다.

   전대(前代)에는 천황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관명(官名)을 띤 자들이 각각 그 직책을 행하였었다. 그러나 천황이 권력 없이 헛 명칭만 가진 뒤에는 관백이 정이위(正二位) 대장군의 직으로서 60주(州)의 땅을 총괄하여 통치하고, 각주의 땅을 외[瓜]처럼 쪼개어 종실(宗室) 집정(執政) 등의 식읍(食邑)으로 삼고, 대소(大小)의 관사(官舍)는 한갓 빈 명칭만을 빌려서 사은(謝恩)하는 예식만 있는데, 천황의 육관(六官)과 삼공(三公)은 지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다.

   ○ 내가 일본의 관명(官名)과 그들이 띄고 있는 직책을 볼 때에 낱낱이 상관이 되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원정잠(源正岑)이 하내수(河內守)라 칭하는 것과 원충신(源忠辰)이 준하수(駿河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之)가 태화수(太和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治)가 근강수(近江守)라 칭하는 것은 모두 그 주(州)의 수(守)가 아니며, 원직유(源直惟)의 소부두(掃部頭)와 원계우(源繼友)의 중납언(中納言)과 원구충(源久忠)의 내선정(內膳正)과 평방성(平方誠)의 습유(拾遺)는 또 중앙정부의 관직을 실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통치하는 구역은 동도(東道)에 있으면서 서주(西州)의 태수라 칭하고, 몸은 지방의 수(守)로 있으면서 중앙정부의 관직에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관명(官名)과 직책이 거리가 천 리나 되고, 한 주(州)의 태수가 혹은 4, 5명이나 되므로 내 생각에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삼동에게 조용히 물으니, 우삼동은 다만 말하기를,
“일본의 관제(官制)가 귀국과는 매우 다르니 비록 말하더라도 공은 반드시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또한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천황이 관제를 만들 때에 본래 정한 명칭이 있어서 안으로는 삼공(三公)ㆍ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밖으로는 66주의 태수가 등급이 분명하여 큰 것 작은 것이 다 갖추어졌던 것인데,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로부터는 따로 관직을 만들지 않고 천황의 관직을 빌려가지고 그 대신을 거느려서, 임명은 비록 관백에게서 나오나 작첩(爵帖)에는 반드시 천황의 인장을 찍고 임명을 받은 뒤의 사은(謝恩)도 반드시 천황에게 하였다. 이것은 천황이 벼슬을 주는 형식이 되므로 옛 명칭대로 바꾸지 아니하고, 직책을 주는 것은 관백에게 있으므로 관할을 따라서 일을 맡기게 되니, 아무 주(州)의 태수, 아무 부(部)의 관(官)이란 것은 다 천황이 주는 것이요, 아무 성주(城主)라 하는 것은 곧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관백은 비록 국군(國君)이라 하나 천황의 앞에 가서는 정이위(正二位) 대장군(大將軍)의 반열이 되고, 황경(皇京)의 정일위(正一位)와 종일위(從一位)는 반드시 대납언(大納言)ㆍ우집정(右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대집정(大執政)의 등류로서, 관백 삼종실 집정(三宗室執政)이 되고, 세신(世臣)이란 것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정사위(正四位) 종사위(從四位)의 중장(中將) 중납언(中納言) 소부두(掃部頭)의 벼슬에 지나지 못하고, 대납언 이상의 칭호가 없는 것은 월존(越尊)하는 혐의가 있는 까닭이다. 관백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읍을 맡아 늠료(廩料)를 받아먹게 한 것도 치병(治兵)의 제도에서 나온 것이나, 백관의 의도(儀度)를 세우지 않았다. 읍을 맡은 자는 또 각각 섭정(攝政)ㆍ봉행(奉行)ㆍ기실(記室)의 신하가 60만 석을 먹는다는 것은, 그가 맡은 땅에서 1년에 받는 토지의 납세가 60만 석이라는 말인데, 군사 한 사람의 1년 봉급이 25석으로 치면 1백 석에 군사 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고, 1만 석에 군사 4백 명을 기르고, 10만 석에 군사 4천 명을 기르게 되니, 땅이 넓은 자는 받는 것이 많고, 받는 것이 많은 자는 군사가 많게 되는 것이다. 태수가 자기 먹는 것을 많이 떼어 군사를 잘 기르는 사람은 유능한 관이라 하여 상으로 더 주고, 사사로 저축하여 군사가 부족한 자는 어질지 못한 관이라 하여 벌로 땅을 깎는다. 관에 있는 사람들은 힘을 다하여 군사를 기르는 데에 힘써야 하므로, 읍을 맡은 자는 모두 무직(武職)이요, 소위 문학의 직책을 가진 임신독(林信篤) 같은 사람은 비록 그 재주가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을 겸하였더라도 능히 한 자, 한 치의 땅도 얻어 맡을 수가 없고, 다만 의관(醫官)ㆍ승도(僧徒)처럼 달마다 봉급을 받아서 먹을 뿐이다.

오산집(烏山集)에 언급한 승상(丞相)ㆍ아상(亞相)ㆍ대종백(大宗伯) 등 여러 사람은 당시 천황의 대신 정일위와 종일위의 자급이 있으나 그는 군국(君國)의 큰일에는 전혀 참여한 일이 없다. 땅과 인민에게 정치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다만 빈 이름으로 위에 있기만 하니, 그 존귀(尊貴)할 것이 무엇인가. 또 일본의 고사(古史)를 보건대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글을 전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의 황태자가 고려왕이 보낸 글 중에 말이 거만스럽다 하여 노하여 그 글을 찢고서, 사신은 죄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조(我朝)와 통신사(通信使)는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에 있었으므로 관백에게 국서를 전하러 가는 길에 가마를 타고 군악을 울리면서 천황의 거처하는 옆을 거들거리고 지나갔으니, 관백의 위품(位品)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묘년에 우리 사신이 갔을 때에는 관백이 임금이라 자칭하였는데, 지금은 공순함을 지켜서 임금으로 자처하지 않아 회답하는 국서 중에 다만 일본국 원길종(源吉宗)이라 쓰고 위호(位號)를 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대장군이란 위호를 쓰게 되면 이웃 나라의 국왕과 대등(對等)의 예로써 국서를 주고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만약 귀국(貴國)에서 일본의 관품(官品)을 자세히 안다면 반드시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말을 다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 뜻은 아마 관백의 위호(位號)가 정이위(正二位)이어서 존귀하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하는 듯했다.

   ○ 각주의 섭정(攝政)ㆍ봉행도 또한 세습(世襲)으로 하고, 준인(準人)ㆍ채녀(采女)ㆍ병위(兵衛) 등의 칭호는 천황의 관명(官名)을 쓴 것인데, 품위(品位)는 또 태수의 계급보다도 아래에 있으니, 이것은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그 밖에 기실(記室)ㆍ의관(醫官)의 등속은 태수가 스스로 불러 쓴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접대해야 하기 때문에 사무가 가장 번다하므로 재판(裁判)이란 관직을 더 두었는데, 이것도 역시 태수가 임명한 바이므로 지위는 봉행의 아래에 있으나, 봉급은 기실(記室)보다 배나 된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조용히 우삼동에게 묻기를,
“내가 귀국의 제도를 보건대, 역시 중국을 모방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어느 시대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천자(天子)가 쇠미(衰微)하여 권력이 천자에게 있지 아니하므로 제환공(齊桓公)진문공(晉文公)이 천자의 빈 명의를 빌려서 제후에게 호령하였으며, 천승(千乘)의 나라에는 백승(百乘)의 대부(大夫)가 있고, 백승의 집에는 각각 재신(宰臣)이 있어 대부의 고을을 다스리니, 이른바, 재신이 대부를 섬기면 문득 군신(君臣)의 관계가 되어, 주인이 환란을 당할 때에 재신은 의리(義理)에 보면 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도 다 대부의 집에 벼슬하였습니다. 지금 본즉 귀국의 천황이 친히 정치를 하지 아니하고, 관백 이하가 다만 천황의 작명(爵名)만을 가지고서 군(君)이니, 후(侯)니, 대부(大夫)니 하여, 성읍(城邑)과 백관(百官)이 있어 모든 실무는 다 대부의 가신(家臣)에게 있고, 각주의 섭정ㆍ봉행 모든 사람은 또 태수에게 사사로 군신(君臣)의 분(分)을 맺어서 각기 능히 자기 일국의 정치를 행하니, 이와 같은 것은 전국의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놀라며 사례하기를,
“이는 진실로 정확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법이 다만 전국 시대에만 행하였는데, 일본은 오랫동안 폐단이 없으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지형과 민속이 중국과 같지 아니한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 말기에 열국(列國)이 나누어 경쟁하여 정치가 천자에게서 나오지 아니하므로 제후(諸侯)와 대부들이 나라를 집으로 삼아 전쟁을 일삼으니 백성이 견디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진 시황(秦始皇)이 나서 주(周) 나라를 삼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정치가 모두 황제(皇帝)에게서 결정된 후에 인재를 선택하여 관직을 주어 성적고사를 3년에 한정하는 법이 있었으며, 한(漢)ㆍ당(唐) 이하에 이 법을 썼는데 귀국은 바다 가운데 궁벽하게 있어 이웃 나라와 전쟁하는 화(禍)가 없으므로 모든 주(州)의 대부가 세습제도(世襲制度)에 습관이 되어 상하가 다른 뜻이 없으니, 이것이 나라의 운수가 다함이 없고 또한 변하지 아니하여 지금토록 폐단이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늘, 땅, 사람이 생긴 이래로 한 가지 일, 한 가지 물건도 억만 년 동안 고쳐지지 아니하는 것이 없는데, 이 뒤에 일본의 관제(官制)가 진(秦)ㆍ한(漢)과 같은 때가 다시 있을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탄식하기를,
“이는 곧 이치를 아는 말입니다.”
하였다.

전제(田制)는 30보(步)가 1묘(畝)가 되고, 10묘가 1탄(畽)이 되는데, 1탄에 상등은 세(稅)가 8석이요, 중등은 세가 6석이요, 하등은 세가 5석이니, 1석은 곧 우리나라 25두(斗)에 해당된다. 시전(市廛)은 3보가 1칸(間)이 되고, 60칸이 1정(町)이 되고, 36정이 1리(里)가 되니, 5정은 곧 전(田)의 3묘에 해당된다. 가옥(家屋)에 대하여는 매칸에 은(銀) 5전을 세로 바치고, 공업ㆍ상업을 하는 자는 각각 그 물건의 10분의 1을 세로 바친다. 1정마다 이문(里門)을 두어서 5가(家)의 법을 시행한다. 한 시(市)에는 한 시의 수세(收稅)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좌(座)요, 한 이(里)에는 한 이의 수세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간전(肝煎)이다. 외방에는 한 촌에 한 촌의 일을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장옥(莊屋)이요, 각 주에는 관할하는 태수가 각자 수세를 하고, 왜경(倭京 경도(京都))ㆍ계빈(界濱)ㆍ병고(兵庫)ㆍ천하기(天河崎)ㆍ금수(今須)ㆍ묵가(墨街)ㆍ명해(鳴海)ㆍ적판(赤坂)ㆍ신거(新居)ㆍ견부(見付)ㆍ삼도(三島)ㆍ대의(大礒)ㆍ신내천(新奈川) 등지는 지방은 비록 각 주에 소속이 되었으나, 시여(市閭)의 수세는 모두 관백에게 직접 바치고 살마주(薩摩州)의 농도(籠島)와 비전주(肥前州)의 장기(長崎)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또한 관백의 별장(別藏)이 있다. 대저 국중에 인민이 많고 집들이 번성하며 시전(市廛)의 풍부한 곳은 흔히 큰길 옆에 있어 도읍(都邑)이 있는 지방, 바다의 배가 정박하는 곳에는 여행하는 자는 물건을 무역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익을 얻어서 농사짓고 길쌈하지 아니하고도 입고 먹는 것이 사치하고 높은 대문, 화려한 집들이 골목에 연하였다. 그러나 주(州)ㆍ국(國)의 세법(稅法)이 심히 각박하여 추호(秋毫)도 빠뜨리지 아니하므로 먼 촌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청에 바치고, 풍년에 콩죽으로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제 아내와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다. 가난하고 부유함이 고르지 못한 것은 모두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다만 인민들이 한번 세를 바치고 나면 달리 사역되는 일은 없다. 관백 이하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도 다 인부와 말이 증발되거나 참(站)이나 길에 공급하는 비용이 없으므로 통신사의 행차에 대하여 많이 사역되는 인부 및 공급하는 모든 물자가 날마다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모두 관(官)에서 돈을 주고 사서 쓴 것이므로 털끝 만큼도 백성에게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니, 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제(軍制)는 가장 정(精)하고 강하다. 각 주의 태수는 다 무관(武官)인데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다 군사를 육성하는 데 쓴다. 군사 한 사람의 연급(年給)이 25석으로써 다른 부담은 없고, 장관(將官) 1백 석 이상을 두고 또 땅을 떼 내어 주어서 백성 부리고 세금 받는 것을 그 자유에 맡기므로 장관된 자가 혹 원래의 정한 수량에 구애되지 않아 만 가지로 백성을 학대하고 빼앗아 몰수(沒數)로 수입하여 각기 그 맡은 땅으로 그 부하를 기른다. 그래서 평민의 기름과 피가 날로 다되어 군사가 되지 않고는 입고 먹을 것이 나올 데가 없다. 그러므로 백성이 모두 힘을 다하여 운동을 하여 장관들의 부하에 들어가려한다. 이미 군사가 되고나면 제 몸을 제 마음대로 못하고, 죽고 살고 배고프고 배부른 것이 모두 장관의 손에 달렸으므로 한 번 비겁(卑怯)하다고 이름이 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다. 칼이나 창에 맞은 흔적이 안면의 앞에 있으면 용감한 사내라 칭하여 녹을 받고, 그 흔적이 귀 뒤에 있으면 잘 달아나는 자라고 지목되어 배척을 받는다. 대개 그 법령이 사람을 몰아넣기를 이와 같이하고 의식(衣食)의 나올 데가 다른 길이 없으므로 그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처음부터 의(義)를 위해 그런 것도 아니요, 또 타고난 성질이 그런 것도 아니라, 실은 스스로 제 몸을 위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일에는 군사들이 훈련되고 익히기로 성질이 되었다가 일을 만나면 달아나는 이무기[蛟]나 충돌하는 멧돼지와 같고, 적병을 보면 등불에 덤비는 불나방이나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당랑(螳螂)과 같아서 장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재라도 군사의 죽음 바치는 힘을 얻고, 군사는 비록 나약하더라도 전장에 달려가는 데는 용감하다. 이것이 비록 오랑캐 종족의 본습(本習)이긴 하나 군사 기르는 방법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군사의 재주 시험은 매월 여섯 차례 한다. 물에는 주사(舟師)가 있고 육지에는 보병이 있는데, 모두 포수(砲手)로써 상등을 삼는다. 갑비(甲斐)의 기병(騎兵)과 살마(薩摩)의 검사(劍士)가 가장 날래고 용감하여 당적할 수 없기로 이름이 났다 한다.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이 제일 정밀하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쌍칼을 차서 긴 것으로는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으로는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총은 대ㆍ중ㆍ소 세 가지가 있는데, 작은 것은 다닐 때에 쓰는 것이요, 중간 것은 그 몸이 조금 커서 녹로(轆轤)에 싣고 다니고, 큰 것은 길이가 한 발이나 되고 크기는 우리나라 천자총(天字銃)과 같아서 다만 성을 지키는 데에 쓴다. 창(鎗)은 간(竿)이 가늘고 긴데 또한 단지(單枝)와 3지(三枝)가 있고 위에는 검거나 흰 깃을 달았고, 간혹 붉은 담요로써 기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한 치 남짓하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하다. 활의 제도도 나무로 간(幹)을 만들고 대[竹]를 끼워 아교(阿膠)로 붙였고, 등(藤)으로 얽어서 칠을 하였는데, 그 길이가 한 발 남짓하며 힘이 약하여 능히 멀리 쏘지 못하고 화살도 또한 짧고 가늘며 깃[羽]이 넓어서 갑옷을 뚫기가 어려울 것 같다. 왜인이 우리나라 큰 활을 보고는 모두 놀라며 겁을 먹었다. 관백이 특히 힘센 사람을 선택하여 당겨도 능히 활줄을 버티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관(軍官) 양봉명(楊鳳鳴)으로 하여금 힘껏 당기어 화살을 쏘게 하니, 보고 있던 상하의 관리들이 모두 놀랬다.

○ 나라에 사민(四民)이 있으니, 병(兵)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다. 선비[士]는 그중에 속하지 않는다. 군사는 입고 먹는 것이 제일 편하고, 장사꾼은 비록 부(富)하나 세법(稅法)이 너무 중하고, 공(工)은 기술은 교묘하나 값이 헐하고, 농민이 제일 괴로우나 1년에 세를 바치는 외에는 다른 부담이 없다. 대개 사민(四民) 외에 따로 유학(儒學)과 승도(僧徒)와 의학(醫學)이 있다. 그러나 국속에 의학은 사람을 살리는 공이 있기 때문에 의학이 상(上)이 되고, 승도(僧徒)가 다음이 되고, 유(儒)는 말등이 된다. 소위 유(儒)라는 것은 시문(詩文)을 짓기를 배우나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할 길이 없으므로 명예를 얻어서 각주의 기실(記室)이 되면, 능히 수백 석의 봉급을 받으면서 평생을 바치고, 자리를 얻지 못하면 군사에 들기를 구하거나 또 의학에 붙어서 산다. 내가 지나가는 역로(驛路)ㆍ참(站)ㆍ관(館)에 자기가 지은 글을 보이며 만나기를 요청한 자가 있었는데 아무 지방의 의관(醫官)이라고 하고, 아무 성(城)의 무신(武臣)이라 하였다. 그 글이 간간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대개 문사(文士)로서 의관(醫官)이 되거나 군사가 되어 녹을 먹는 자들이었다.

○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는 좌우에 호위하는 자가 든 흑우기(黑羽旗)홍전기(紅氈旗)에 모두 뾰족한 창끝이 있고, 군사들은 조총(鳥銃)을 끼고 화승(火繩)에 불을 붙여 뜻밖의 사변을 예방하고, 봉행 이하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창과 기를 가지고 앞에 인도하고, 기실(記室) 등 여러 사람이 다 그러하여 그 의식(儀式)이 모두 무직(武職)에서 나온 것이요, 문구(文具)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각 주의 사람이 모두 표지(標識)가 있어서 그 장막 선범(船帆) 및 의복의 옷깃 뒤를 자세히 보면 반드시 검은 색으로 표(標)를 만들었는데, 표가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고 혹은 매화와 같고 혹은 나뭇잎 같고 혹은 태극도(太極圖)와 같고 혹은 품자(品字)와 같고 혹은 품자 위에 그림 하나를 덧붙여서 각기 지방에 따라 다르게 하였으니, 만약 미리 각 지방의 표를 알면 그 돛을 바라보아도 아무 지방의 배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사람을 보면 아무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도 또한 군제(軍制)를 위해 만들어서 부곡(部曲)이 서로 혼란되지 않게 한 것으로써 우리나라 각영(各營)ㆍ각초(各哨)의 복색(服色)ㆍ기색(旗色)의 구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백성을 옷깃에다 묶어서 평소 출입할 때에도 감히 서로 동서가 섞이지 않게 하였으니, 그 법이 준엄하고 각박함을 알 수가 있다.

○ 그 풍속이 본래 등급이 없어서, 가옥ㆍ가마ㆍ말ㆍ의복ㆍ기물은 참람되어 규제(規制)가 없으되, 명분이 한 번 정해지면 위아래의 차별이 엄하여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준행하고 받드는 것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신 행차의 왕래하는 길에 보면 접대하는 제관(諸官)으로, 태수ㆍ봉행 이하가 못나고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있는데 그 부하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명령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척촌(尺寸)도 잃지 아니하고, 칼을 차고 문을 지킬 때에는 문안에 오뚝하게 서서 밤새도록 나태함이 없고, 차(茶)를 끓여서 올리려고 할 때에는 화로를 끼고 숯불을 피우며 잠깐도 떠나지 아니하며, 무릇 부르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여 매질을 할 필요가 없이 일마다 잘 처리되고, 길을 끼고 관광하는 자는 모두 정로(正路) 밖에 앉되, 작은 사람은 앞에 있고, 조금 큰 사람은 제이의 열이 되고, 더 큰 사람은 뒤에 있어 차례로 대열(隊列)이 되어 엄숙하고 정돈되어 떠들지 아니하여 수천 리의 보는 바에 한 사람도 망동하여 길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 대개 인심과 습속이 모두 손무(孫武)양저(穰苴)의 군사와 같은 것이요, 예법과 교화로써 일제히 된 것이 아니었다. 관백과 각 주 태수의 정치가 한결같이 군제(軍制)에서 나왔으므로 대소(大小)의 백성이 보고 익혀서 한결같이 군법과 같이 된 것이다.

○ 국중에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예법이 없어서 남자가 장가들지 아니한 자는, 다만 중앙의 머리털을 깎고 정수리 앞과 머리 뒤의 털만 남겨 놓는다. 장가를 든 뒤에는 정수리 앞의 털까지 깎아버리고 머리 뒤의 한 줌의 털만을 길이 네 치쯤 남겨서 종이 끈으로 묶어서 구부려 위로 올린다. 이것이 결혼한 자의 표시이다. 혹은 앞머리도 깎지 아니하고 머리 뒤의 털을 틀어서 굴곡(屈曲)하게 한 자도 있다. 여자는 머리를 튼 것이 중국의 제도와 같이 정수리 위에 가르마도 가르지 아니하고 바로 머리 뒤에 틀어서 세 송이[朶]로 접어서 구불구불하게 아래도 드리우고 흰 실로써 매어 그 쪽을 느슨하게 하며, 정수리에는 대모(玳瑁)빗을 꽂는다. 이미 시집간 자는 이가 모두 검은 빛인데, 철액(鐵液)으로서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이빨이다. 혼인할 때에는 폐백을 쓰지 아니하고 다만 혼인날 저녁에 신부를 신랑의 집에 보내는데, 피차의 친척들이 성대하게 등촉(燈燭)과 위의(威儀)를 베풀어 보내고 맞이하는 예식을 하고, 두 집에서 각기 음식을 차려서 손님들에게 대접하여 즐겁게 연회를 한다. 초상과 제사는 임금과 부모의 초상에도 곡(哭)하거나 상복을 입는 법이 없고, 음식과 언어마저도 평소 때와 같이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통 가운데 앉혀서 돌을 쌓아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시를 한다. 귀인(貴人)의 집이라야 비석이 있고 붉은 문을 세워서 그 지점을 표시한다. 제사 지내는 예법은 쌀을 흩으며 술로 땅을 적시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또 연기(年忌), 월기(月忌), 일기(日忌)라는 설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정월 초하루 날에 죽었을 경우 11일, 21일을 다 기(忌)라 하고, 매년 정월 및 매월 초하루 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여 중을 청하여다가 재(齋)를 올리고 공양(供養)을 잘하니, 중들이 그 때문에 살아간다 한다.

대마도의 통역 중 한 사람인 나이 젊고 민첩한 자가 나를 따라서 강호에까지 갔으므로 내가 자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는데, 홀연히 하루 걸러 보이지 아니하므로, 내가 다름 사람에게 묻기를,
“아무 통사(通事)는 어디 있는가?”
하였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는 어제 모친이 죽었다고 부고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 모친이 대마도에서 죽었는가?”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불쌍히 여겨서 그가 이미 분상(奔喪)하였거니 하고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 뒤 수 일 만에 그 사람이 와서 뵙는데 의복과 언어가 한결같이 평일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그저께 사람들이 전하기를 네가 애통하게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하기에 매우 놀라고 슬퍼하였다.……”
하니, 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제가 멀리 왔다가 이런 애통한 일을 당하였으니,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왕법에는 분상을 허락하는 예(例)가 없으므로 몸이 공역(公役)에 매어서 억지로 따라다니느라 몸에 입은 푸른 무늬의 옷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조선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조선이 상례(喪禮)를 중히 여기는 것은 저도 또한 들은 바이므로 부끄러운 줄 알아서 타고난 양심에서 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 것이다. 위정자들은 어찌 이런 백성들로 하여금 이 본심을 상실하게 한다는 말인가.

○ 그들의 풍속에 귀신을 말하기를,
“사람이 살았을 적에 남의 존경과 믿음을 받은 자는 죽어서 반드시 제사를 받는다.”
하여, 사당을 설립하여 매양 재계목욕(齋戒沐浴)하고 기도하는 일이 있고, 부모의 죽은 날에 혹 소식(素食)을 하며 신(神)이 기(忌)한다 하여 어육(魚肉)을 절금하고 신당(神堂)음사(祠)가 곳곳에 있다.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들의 시조(始祖) 여신(女神)을 모셨다. 웅야산 수신(熊野山守神)이란 서복(徐福)이며, 애탕산 수신(愛宕山守神)이란 신라(新羅) 사람이요, 춘일(春日)ㆍ팔번(八幡)ㆍ주길(住吉) 등은 가장 대명신(大明神)이 된다. 기타 소소한 신령, 사람, 죽은 귀신 및 나무나 돌에 붙은 요망한 신으로서, 속(俗)에 숭봉(崇奉)하는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무릇 맹약(盟約)이나 금계(禁戒)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신을 증명으로 맹세를 하고, 남녀가 장가들거나 시집갈 때에는 역시 받드는 신의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붓고 맹세를 한다.

○ 그 풍속이 색은 아롱진 것을 숭상하고, 맛은 단 것을 숭상한다. 찬은 고래 고기의 회를 상품으로 삼고, 자리는 붉은 담요를 상품으로 삼는다. 그 나머지 온갖 물건도 다 가볍고 간략한 것을 숭상한다. 심부름을 하는 자도 두 끼 세 끼 밥을 먹는 일이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들이겠다는 청이 없고 다만 배고플 때에 두어 개의 동전으로 유병(油甁) 한 개나 소우(燒芋) 두세 개를 사 먹어 요기를 하고 소위 관장(官長)의 음식하는 기구라는 것도 다만 반장(飯藏) 반궤(飯樻)라는 것이 있다. 반장이란 것은 나무궤로서 높이는 한 자가 안 되고 길이와 넓이는 두어 치요, 그 속에 붉고 검은 그릇과 나무숟갈 소반 등의 물건을 넣었는데 모두 가늘고 작고 모나고 둥글고 떡, 국수, 과일을 들이는 것도 다 1작(勺)에 차지 않는다. 비록 높은 벼슬아치가 윗사람의 명령을 받들고 여행하는 자라도 스스로 반장(飯藏)을 가지고 다니는 외에는 각 참(站)의 접대하는 비용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고 입는 의복도 두세 가지 외에는 머리에 관이나 모자도 없고, 발에 가죽신이 없고, 밥을 짓는 기구도 모두 가볍고 얇고 교묘하므로 반 묶음의 나무로 밥ㆍ국 모든 탕을 만들 수 있고, 또한 온돌에 불을 지피는 법이 없으니, 한 사람이 1일에 먹는 것이 두세 개의 동전과 반 묶음의 나무에 지나지 아니하고, 1년에 입는 것이 한 냥의 은자(銀子)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인구가 비록 번성하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이 비록 중하여도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지 않으며 땔나무[薪木]의 귀한 것도 또한 부족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죄수를 문초하는 법은 매질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죄수로 하여금 드러눕게 하여 큰 주발에 물을 담아서 바로 입에다 들어부어서 자복하게 한 후에 중한 죄는 바로 그 목을 베는데 형을 받을 자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취하여 구덩이 속에 앉으면 친우 되는 자가 칼을 가지고 치는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다. 왜인의 큰 칼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 이름이 있으므로, 사형을 받을 죄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먼 데 가까운 데서 칼을 가지고 사람 죽이기 시험하려는 자가 장꾼처럼 다투어 모여드니, 풍속의 참혹하고 독함이 심하다. 죄가 감사(減死)에 해당될 경우에는 바다 위 외로운 섬, 사람 없는 곳에 귀양을 보내어 죄의 가볍고 중한 데에 따라서 그 연수(年數)를 한정하고,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두 번 범하면 사형을 한다. 역율(逆律)에 관계되는 자는 십자목(十字木)을 거리에 세워놓고 그 몸을 발가벗겨 그 손에 못을 쳐서 나무 위에 달아 놓고 왕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태우고 살을 깎게 하여 참혹하고 독한 짓을 극도로 한 후에 사형을 한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일본의 풍속이 자고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 성이 나면 반드시 스스로 목을 찌르고 스스로 배를 가르므로 관(官)에서 매질하여 문초하는 법이 없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니, 우삼동이 대답하기를,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일본 사람이라고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살마주(薩摩州)는 풍속이 특수하여 일을 당하여 걸핏하면 죽고 맙니다. 그리하여 큰 죄가 있는 자는 관(官)에서 잡아 가두지 아니하고 그에게 말하되, ‘네 죄는 마땅히 너의 집에서 죽어야 한다.’ 하면, 그 사람이 수긍하고 집에 돌아가 자살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관에서도 또한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니, 대저 일본 사람이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실로 살마주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것은 연조(燕趙)의 절사(節士) 협사(俠士)들과 풍속이 같은데, 그 가운데 혹 칭찬할 만한 기절(氣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옛글에 있는,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 함과,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함은 군자도 어렵게 여기는 바이어늘, 살마주에서는 사람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 기절이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그 지방의 풍속이 기괴한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여공(女工)은 비단과 베를 짜는 것이 정밀하고 가늘며, 온갖 물건이 가볍고 묘하여 두어 치의 그릇으로 능히 상용(常用)하는 모든 기구를 담아서 품속에 넣을 수가 있고, 화초(花草) 같은 식물에 이르러서도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없고, 반드시 가지와 잎을 펴거나 오므려서 교묘하게 모양을 만들어 둑[纛]과 같게 하고, 일산과 같게 하고 여러 층의 탑과 같이 하며 나무는 용이 서린 듯하며 봉이 나는 것과 같고 풀은 모난 상(床)과 둥근 독과 같은 모든 형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놀래며 웃게 하고, 조화(造花)가 꼭 참꽃과 같아서 참인지 만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으니, 대개 그 천성이 교묘하고 조작하여 진실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어느 일이 조선과 서로 같습니까?”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경도(京都)에 이르러 길에서 물건을 파는 남녀가 외치는 음성을 들으니 우리 서울의 남녀와 흡사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는 모양을 보니 우리나라 중들이 모여 앉아 밥 먹는 모양과 흡사하고, 그 나머지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일이 중국과 서로 같은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나는 중국을 보지는 못하였는데 다만 책에서 전한 것으로 말한다면 일본에서 집집마다 차를 마시는 것과 여자의 머리를 쪽진 모양이 가장 비슷하고, 물건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어깨로 메는 것이 또한 중국 사람들의 삼태기를 메고 시루를 메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에는 세 가지 좋은 것이 있으니, 문둥이 악질(惡疾)이 없고, 저주 고독(蠱毒)으로 사람을 해치는 변이 없고, 백성이 관장(官長)을 죽이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에 음악이 없고 다만 부귀(富貴)한 집에서 손님에게 연회하고 신(神)에게 굿을 할 때에 약간 북, 피리, 비파(琵琶), 노래, 춤이 있을 뿐이다. 내가 대마도 태수의 경저(京邸)에서 음악을 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여러 문사(文士)와 필담(筆談)하기를,
“예(禮)와 악(樂)은 유가(儒家)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귀국(貴國)의 음악을 본 즉 노래는 범음(梵音)과 같고 춤추는 것은 창을 쓰는 형상이나 권법(拳法)과 같으니, 이것으로써 귀국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군사를 연마하는 풍습이 승하고 유교(儒敎)는 흥성하지 못함을 알겠습니다.”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답하기를,
“참으로 바른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는 비록 아주 없다고 하여도 옳습니다.”
하였다.

○ 풍속이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여 귀족의 집이나 민간에서 비록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도 반드시 중국 사람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보물로 삼는다. 내가 일본의 글씨체를 본 즉 모두 홍법대사(弘法大師)의 법첩(法帖)을 모방하고 간간이 홍무격(洪武格)을 쓰는데, 연약하여 뼈가 없고 그림은 무슨 체를 쓰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절묘하고 고와서 강산(江山), 초목(草木), 영모(翎毛) 등속은 절묘(絶妙)한 것이 있으나,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은 틀렸다.

○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詩)와 문(文)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貴賤) 현우(賢愚)를 묻지 아니하고 우러러 보기를 신명(神明)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珠玉)처럼 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들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楷書)나 초서(草書)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하며, 소위 문사(文士)라 하는 자는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와서 역(驛)이나 관(館)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 혹은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詩)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 줄의 필담(筆談)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사해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대개 그들이 정화(精華)로운 땅에 생장하였으므로 본래 문자(文字)를 귀중히 여길 줄 알기는 하나 중국과는 너무 멀어서 평생에 의관(衣冠)의 성한 의식(儀式)을 모르고, 평소에 조선을 높이 사모하는 이유로 그 대관(大官) 귀인은 우리의 글을 얻어서 자랑 거리로 삼고, 서생(書生)은 명예를 얻는 길로 삼고 낮고 천한 자는 구경거리로 삼아서 우리가 글을 써 준 뒤에는 반드시 도장(圖章)을 찍어 달라고 청하여, 진적(眞蹟)인 것을 증명하므로 매양 이름난 도회지나 큰 고을을 지날 때에는 그들을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 일본의 크고 작은 모든 관원(官員)은 인신(印信)이나 부절(符節)을 위에서 받는 규정이 없고 다만 사사로 새긴 도장을 가지고 공문서에 찍으므로, 모든 금령(禁令)을 반포하여 보일 때에는 또한 수압(手押)이 있으니, 모양은 항아리와 같고 획이 크고 정연(整然)하다. 관직이 없는 사람도 조금 글을 아는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字)나 호(號)가 있어서 각각 도장을 두어 개 만들어서 편지나 시편(詩篇)에 쓰되 주홍(朱紅)으로 가늘게 찍는데 전각(篆刻)의 묘함이 중국 사람에게 양보할 정도가 아니다.

○ 일본 사람이 글자를 읽는 음(音)은, 동(東)ㆍ동(冬)ㆍ양(陽)ㆍ경(庚)ㆍ청(靑)ㆍ증(蒸)의 글자를 읽는 것을 예로 들 경우 두 개의 음절로 발음하여 동(東)은 도우, 양(陽)은 요우, 청(靑)은 세이, 강(江)은 예이라 읽고, 진(眞)ㆍ문(文)ㆍ원(元)ㆍ선(先)ㆍ한(寒)ㆍ산(刪)의 글자를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와 대략 같다. 천(天)ㆍ천(千)ㆍ천(泉) 등의 글자는 모두 션[仙]이라 읽고, 기타 소(蕭)ㆍ호(豪)의 글자나 입성(入聲)의 ‘ㄱㆍㄹㆍㅂ’의 글자는 역시 두 개의 음으로 읽고 간혹 우리나라와 방불하다. 그러나 왜인의 혀를 놀리는 것이 본래 가볍고 부(浮)한 것이 많으며, 지껄이는 말이 새소리와 같으므로 전청(全淸)이요 탁음(濁音)이 없으며, 얕은 소리만 있고 무거운 소리가 없어서,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 전탁(全濁)을 내지 못함과 같다. 일찍이 우삼동으로 더불어 음역(音譯)의 같고 다름을 말하여 보았는데,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발음은 탁음이 많고, 조선의 발음은 청한 것이 많고, 일본의 발음은 순청(純靑)이요, 탁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음성이란 것은 각각 풍기(風氣)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선은 중국과 거리가 가깝고 일본은 또 조선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므로 내가 일찍이 말하되, ‘조선은 중국의 음을 그대로 배워서 잘못된 것이요, 일본은 또 귀국의 음을 배워서 잘못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또 말하기를,
“방음(方音)의 길고 짧은 것도 또한 구별이 있으니, 중국 사람은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여 문안(問安)을 하는데 다만 서너 말이면 족한데 조선말로 번역을 하면 그 길기가 배나 되고, 일본은 또 길기가 3배나 되고, 서양(西洋)ㆍ남만(南蠻) 사람들은 그 말의 길기가 일본에 비교하여 또 3배나 되니, 이것으로써 중국과 거리가 멀수록 말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일본의 국경에 들어온 이후로 매양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자기의 소회(所懷)를 말하고자 할 때에 먼저 통역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번역하여 전달하게 하는데, 그 말을 들을 적에는 매우 지루하여 천백(千百)의 곡절이나 있는 것 같다가, 통역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전하는 것을 들으면 두세 가지 일을 부탁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풍속에 문자를 쓰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산전(山田)전(畠)이라 쓰고, 십자가(十字街)를 십(辻)이라 쓰는 유인데, 모두 번역만 있고 음은 없으며, 또 글자를 달리 쓰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편지를 남에게 보낼 때에 아무 전(前)이라 할 것을 아무 양(樣)이라 쓰고, 물건을 서로 나눌 때에 아무 물건 얼마씩[式]이라 할 것을 식(式)이라 하지 않고 완(宛)이라 쓰고, 전(殿)자, 어(御)자는 보통 사람의 존대하는 말로 쓰고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에게는 그 아래 사람들이 부르기를 돈우사마(敦于沙麻)라 쓰는데 돈우는 전(殿)의 번역이요, 사마는 양(樣)의 번역이니, 곧 전양(殿樣)이 된다. 그 밖에 존경하는 자제에는 모두 오마이사마라고 부르는데, 오라는 것은 왜말에 어(御)자의 번역이요, 마이라는 것은 전(前)자의 번역이요, 사마라는 것은 양(樣)자의 번역이니, 곧 어전양(御前樣)이다. 내가 관(館)에 있을 때에 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적에는 대개 어선(御扇), 어필(御筆), 어용지(御用紙), 어과자(御菓子)라고 쓴 것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놀래어 퇴각시키려 하였더니, 역관(譯官)이 말하기를,
“왜인의 습속이 이와 같고 본래 참람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고쳐 쓰라 하면 이루 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웃고 그대로 두었다.

○ 일본국의 성(姓)은 본래 평(平)ㆍ원(源)ㆍ등(藤)ㆍ귤(橘) 사성(四姓)이 있었는데, 각기 식읍(食邑)으로써 나누어 씨족(氏族)으로 삼았으니, 두 자 성, 석 자 성은 다 지명(地名)으로써 된 것이다. 중국의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수회(隨會)ㆍ양설힐(羊舌肹)의 자손이 범(范)씨ㆍ양(楊)씨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름에 오랑(五郞)ㆍ삼랑(三郞)ㆍ육랑(六郞)ㆍ칠랑(七郞) 등이 있고, 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 등의 말은 모두 관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니, 마치 원(元) 나라에서 얼굴을 가지고 이름을 노화(魯花)ㆍ불화(不花)ㆍ첩목아(帖木兒)라 지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말로 번역하여 누루(縷縷)라 부르는데, 한 사람의 성명이 많은 것은 8, 9자에 이른다.

○ 왜인의 말에 뜻이 없는 것은 산(山)을 야마라 하고, 바다를 유미라 하고, 물[水]을 민주라 하고, 종이를 가미라 하고, 붓을 후데라 하고, 먹을 수미라 하고, 벼루를 수수리라 하고, 물건의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는 예이라 하고, 좋지 않은 것은 왈이라 하고, 배에 노를 젓는 자가 힘을 쓰는 소리를 낼 때에는 예사예사라 하고, 혹은 야사야사라 하고, 메는 사람은 앞에 사람이 고리와사하면 뒤에 있는 자가 응하기를 고리와시라 하고, 천천히 행할 때에는 소리를 늦추어 이직우이라 하고, 빨리 행할 때에는 급히 부르기를 소로소로라 하니, 대저 겹친말을 많이 쓴다.

○ 국중에 쓰는 언문(諺文)은 48자가 있는데, 자형(字形)은 모두 진서(眞書) 수미의 점과 획을 잘라 만들었고, 음만 있고 석(釋)은 없어 서로 붙여 소리를 이루는 것이 거의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았다. 그래서 그 방음(方音)으로써 방언(方言)에 맞추어 일반 사람이 익히기에 편리하고 통정(通情)하기에 적당한데, 그 언문의 초서가 기괴하여 떨어지는 꽃, 나는 새와 같아서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곧 홍법대사가 만든 것인데, 홍법은 특이한 중이었다. 국중에 간행(刊行)되어 두루 퍼진 그의 필적을 보건대, 살[肉]이 많고 뼈는 작으면서 색태(色態)가 무르익고 고왔다. 왜인의 필법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일본의 방언(方言) 역시 강호(江戶)와 지방의 구별이 있으니, 지방은 약간 느리면서 실(實)하고, 강호는 더욱 가볍고 간단하므로 대마도 사람이 강호에 와서 말로써 많이 말[缺] 조롱을 당하는 것이 곧 우리나라의 서울과 영남과의 사이와 같다. 내가 우삼동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본말을 배운다면 몇 달이면 될까요?”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말은 두어 달이면 되겠고, 조선말은 1년이면 되겠고, 일본말은 비록 총명이 남보다 뛰어난 자라도 3년이 아니면 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왕(百濟王) 문사(文士)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보내어 비로소 문자를 가르쳐서 여러 해 강습을 시켜서 대략 전한 것이 있었다. 그 뒤에 나라 현종(玄宗) 때에 왜인 조형(鼂衡)이 중국에 들어가 이름이 있어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그가 본국에 돌아올 때에 왕마힐(王摩詰)이 시(詩)와 서(序)를 지어 그 일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중로에서 배가 전복되어 죽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천여 년에 일본 사람이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내가 보니 그 풍속이 글로써 사람을 쓰지 아니하고 또한 글로써 공사(公事)를 하지 아니하여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와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글을 아는 자가 없고 다만 언문(諺文) 48자에다가 약간 진서(眞書 한문(漢文))를 섞어서 장계(狀啓)와 교령(敎令)을 하고, 문부(文簿)와 편지를 만들어서 상하(上下)의 정을 통하니, 관백의 지도함이 이와 같다. 그 음역(音譯)을 들은 즉 산천, 지명, 육갑(六甲)이나 성명, 직호(職號)를 모두 방언으로 해석하여 부르고 그 자음(字音)이 또 청탁(淸濁)과 고저(高低)가 없으므로 시를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삼운(三韻)을 가지고 여러 해 동안 공부를 하여 능히 아무 글자는 높고 아무 글자는 낮은 것을 구별한 뒤에 억지로 맞추어 시를 만들고, 글을 읽을 때에는 선후(先後)를 거꾸로 맺는 법을 알지 못하고, 글자마다 애를 써서 그 손가락을 내렸다 올렸다 한 뒤에 겨우 그 뜻을 통하니, 당시(唐詩)‘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라는 귀(句)를 읽을 적에는 봉(逢)을 한식(寒食) 밑에 읽고, ‘홀견맥두양류색(忽見陌頭楊柳色)’을 읽을 때에는 견(見)을 양류색의 뒤에 읽어서 문자를 학습하기 어려움이 또 이와 같으니, 비록 높은 재주와 통달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부지런하고 애씀이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마땅히 백 배나 될 것이니, 문인(文人) 운사(韻士)들이 대를 지나도 이름난 자가 없고 그중에 한 두 사람 붓을 잡는 무리도 또한 그 명성을 국중에 날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 원가선(源家宣)관백으로 있을 때에 조금 글을 알았는데, 일찍이 사저(私邸)에서 원여(源璵)와 공부를 하였으므로 관백이 된 뒤에 원여를 발탁하여 써서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여는 재주가 족히 고문(古文)을 알 만하고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운치(韻致)가 있어서 그의 저술인 백석집(白石集)이 세상에 행한다. 그의 스승 목하순암(木下順庵)이 또한 박식(博識)하고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므로 일시에 문학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차차 세상에 진출하여 쓰이게 되었는데, 그 문장이 간간이 칭도할 만한 것이 있어 지금까지 강호(江戶)와 지방의 모든 사람이 서림(書林) 예원(藝苑)에 힘을 쓰는 자가 있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대저 그 땅이 양명(陽明)의 구역이 되어 강산이 수려(秀麗)하고 초목이 겨울에도 꽃이 피어 북쪽 오랑캐 털옷 입은 자들과는 자질이 다르므로, 사람들이 대개 총명하고 민첩한 이가 많아서 그들과 필담이나 짧은 편지를 주고 받아 보면 창졸간의 수작에 기이하고 아름다운 말이 많다. 국중의 서적은 우리나라로부터 간 것이 백(百)으로 셀 수 있고, 남경(南京)의 상인들을 통하여 온 것이 천(千)으로 셀 정도이므로 고금의 기이한 글, 백가(百家)의 문집이 민간에서 간행된 것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십 배 뿐이 아니다. 그들 중에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본래 타고난 총민(聰敏)한 성질에다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표절(剽竊)하는 폐단이 없이 익숙히 익히고 오로지 하여 두어(蠹魚 책을 파먹는 좀)가 글자를 파먹어 눈이 밝음과 같으므로 옛글을 토론하여 능하고 못한 것을 평할 때에 ‘이 같은 것은 한(漢)이요, 이 같은 것은 당(唐)이요, 이 같은 것은 송(宋)이다’ 하여, 소견의 정확한 것이 혹 거의 글을 잘하는 선비와 같으나, 그로 하여금 고시(古詩)나 율시(律詩)를 짓게 하면 평측(平仄)이 많이 어긋나고 운치(韻致)가 전혀 상실되어 우리나라의 삼척동자(三尺童子)가 들어도 웃음거리가 될 만하고, 서문(序文)ㆍ기문(記文)ㆍ잡문(雜文)을 짓게 하면 눈먼 뱀이 갈대밭에 달리듯 하여 법도와 기운이 하나도 볼 것이 없으니, 이것은 어찌 인재가 정한 한도가 있어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 토풍(土風)과 정치 교화가 구애(拘礙)시킨 것이다. 내가 처음 대마도에 이르니,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에서 문장을 배우는 사람들은 귀국과 아주 달라서 노력은 엄청 하는데 성취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공이 지금 여기서부터 강호까지 가는 도중에 얻어 보는 시문(詩文)들이 반드시 졸(拙)하여 우스운 것이 많을 것이나 천신만고(千辛萬苦)하여 애를 써서 겨우 그들이 얻은 글들이니, 모름지기 더럽다고 버리지 말고 수용하여 칭찬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그 나라에서 걸출한 사람이다. 능히 3국의 음에 통하고 능히 백가(百家)의 글을 분별하여, 방언(方言) 번역의 같고 다른 것과 문자의 어렵고 쉬운 것에 대하여 가슴 속에 시비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이다.

○ 일본 사람은 글을 짓는 자들이 반드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를 가지고 읽고 익혀 오로지 숭상하므로 심정을 서술한 장서(長書)를 보면 논리가 풍부하고 말이 유창한 것이 있으나, 시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당시(唐詩)를 배우려 하면서도 한 구절도 옛사람의 것에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대저 해외에서 오랑캐의 말을 지껄이는 것이 되어 성률(聲律)이 전혀 어긋나므로 운문(韻文)을 짓는 것이 서술문(敍述文)보다 백 배나 되는 때문이다. 간혹 편지로써 묻기를,
나라 왕감주(王弇州)ㆍ이우린(李于鱗) 등의 문장이 나라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나, 그들 중에 명 나라 사람의 문장을 배우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시나 문 가운데 그 땅의 산수를 두고 짓는 자가 쓰기를 진산(秦山)이니 초수(楚水)낙양(洛陽)이니 장안(長安)이니 오월(吳越)이니 연(燕)이니 촉(蜀)이니 하였으므로 그 글을 읽으면 일본인 줄을 모르게 된다. 그것은 지명(地名), 인명(人名)이 모두 이상하고 기괴하여 문장을 만들 수 없으므로 중국의 지명을 빌려서 문장을 만든 것이다. 그 땅에 꾀꼬리와 까치가 나지 않는데, 문장에는 꾀꼬리가 울며 까치가 지저귄다는 말이 있고, 음악에는 거문고와 비파를 쓰지 아니하면서도 문장에는 거문고를 타며 비파를 두드린다고 쓰고, 관(冠)이 없는데 또 건(巾)을 비스듬히 쓰고 있다는 문구가 있고, 띠가 없으면서도 금대(錦帶)니 옥패(玉佩)니 하는 문자를 써서 모두 헛된 이름을 쓰고 실지에 맞는 말을 짓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또한 간간이 범하는 일이다.

○ 일본 사람으로서 나와 마주 앉아 시를 지어 주고 받은 자는 대개 추솔하고 막혀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혹시 그가 내어 보이는 평소의 시고(詩稿)를 보면 간간이 한 구(句) 한 연(聯)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 있어서, 즉석에서 지은 그의 시에 비하면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수(特殊)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경(南京)의 해상(海商)들이 매양 서적을 싣고 와서 장기도(長崎島)에 팔기 때문에 순치(順治) 이후에 강남(江南)의 재자(才子)의 시집(詩集)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조선 사람으로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므로 저들이 가만히 호백구(狐白裘)를 도적질하여 진희(秦姬)에게 아첨한 것인가?

임신지(林信智)신독(信篤)의 아들로서 그 가벌(家閥)이 글 잘하는 집이므로 매우 재주 있다는 명망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멀고 먼 숭악(崇岳 삼각산(三角山))에 / 邈矣神嵩嶽
풍운이 완연하구나 / 風雲竟宛然
물화는 만고요 / 物華惟萬古
인걸은 천년이네 / 人傑自千年

기린굴(麒麟窟)에 아름다운 구름이 일어나고 / 麟窟祥煙起
봉산에 상서로운 해가 달려있네 / 鳳山瑞日懸
동방에 도로가 두루 통하였고 / 東方通道里
남두성(南斗星)에 분야(分野)를 꼈네 / 南斗夾星躔

아름다운 신가의 선비는 / 濟濟申家子
당당한 한국의 어진 이로다 / 堂堂韓國賢
왕조에서 역사책을 편찬하고 / 王朝稽彼史
종묘에서는 제기(祭器)를 받드는 집사관(執事官)이네 / 宗廟執其籩

이름은 비서성(秘書省)에 높았고 / 名重文郞省
재주는 훌륭한 학사로세 / 才宏學士員
임금의 조칙을 대신 짓는 직무를 맡았으니 / 絲綸嘗屬務
문필에 이미 전권이 되었도다 / 翰墨已專權

비서성에서 임금의 글 초하는 데에 모셨고 / 侍制秘丘上
어좌(御座) 앞에서 은혜를 받았네 / 賜恩淸禁前
장열(張說)ㆍ소미도(蘇味道)가 당 나라 시대에 드러났으며 / 張蘇唐代顯
반고(班固)ㆍ채옹(蔡邕)이 한(漢) 나라에서 이름을 전했네 / 班蔡漢宮傳

문득 사신(使臣)의 임명을 띠고 / 忽見聘交事
예회의 자리에 올랐네 / 斯登禮會筵
장한 놀이가 어찌 쓸쓸하리요 / 壯遊何索落
높고 맑은 흥취가 다시 날리네 / 逸興更聯翩

붉은 기운에 관을 나가는 손이요 / 紫氣出關客
푸른 물결에 바다에 뜨는 신선이로다 / 蒼波浮海仙
옥피리를 불면서 새벽에 말을 먹이고 / 玉珂晨秣馬
비단 뱃줄로 밤에 배를 멈추네 / 錦纜夜留船

객지에서 한 해가 저물려 하는데 / 祗役歲云暮
고향을 바라보매 달이 몇 번이나 둥글었는고 / 望鄕月幾圓
구추(九秋)에 손의 꿈이 고요하고 / 九秋覉夢寂
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그네의 정서가 기네 / 一水旅情綿

역은 홍진의 땅이 닿았으며 / 驛接紅塵地
관은 흰 눈 내리는 하늘에 열렸네. / 館開白雪天
매화를 꺾은 들 어찌 서로 보낼 수 있으랴? / 折梅寧可寄
풀을 깔고 서로 모여 앉아 보세 / 藉草且相牽

칼을 뽑아 기특한 기절을 논하며 / 劍舄論奇節
술과 안주로 좋은 인연 말하네 / 盃盤說勝緣
또 대아의 곡조를 듣는데 / 還如開大雅
붉은 줄의 소리에 세 번 탄식함과 같도다. / 三嘆在朱絃

하였다. 그는 또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지어 주었는데, 시에 이르기를,

대동강 물이 천고의 빛인데 / 大同江水千古色
깊게 일렁거리며 빙둘러서 만 리에 떴네 / 奫淪靡迤萬里浮
높디 높은 저 은하수가 긴 하늘에 걸렸는데. / 倬彼銀河長天掛
서풍 하룻밤에 바다 동쪽 머리에 닿았구나 / 西風一夜東海頭
지금 손으로 무지개를 버티고 가니 / 方今手撑虹霓去
표연(瓢然)하기가 천지 밖에 선선이 된 것과도 같네 / 飄如八極作神遊

깃발이 나부끼며 어디메로 가는고 / 旌旆飄悠何處所
바라 뵈는 곳 구름 기운 단구에 둘렀구나 / 望中煙氣遶丹丘
사신으로 왕래하는 것이 원래 가장 성한 일이라 / 信聘由來最盛事
의관 옥백에 아름다운 계책을 우러르네 / 衣冠玉帛仰嘉謀
그대는 다시 문장을 잘하니 / 君復濛汜堪裁賦
채색 붓을 종횡으로 놀리어 쉬지를 아니하네 / 彩筆縱橫更不休

흰 이슬이 대나무에 스치고 / 白露更拂琅干樹
푸른 노을은 산호의 갈퀴에 가득 차네 / 蒼霞欲滿珊瑚鉤
관산의 한없는 길에 머리 돌이키며 / 回首關山無限路
나그네의 마음 왕찬의 누에 오래 올랐네 / 客心久登王粲樓
베 돛이 이로부터 돌아감이 응당 빠를 것이니 / 布帆從此歸應疾
대붕새 날개 바람 가운데 일월이 흐르리 / 鵬翼風中日月流

보배 피리로 만파식곡(萬波息曲)을 불러내니 / 寶管吹徹萬波息
한양성 위에 오색 구름이 배회하리 / 漢陽城上五雲留
성스러운 시대에 공명이 빛나리니 / 聖代功名終赫奕
두 나라에 명성을 뉘가 능히 짝할 수 있을까 / 兩邦聲譽是誰儔
나와 처음 잠깐 만나서 마음이 깊이 합했으니 / 慚我傾蓋得妙契
비단과 모시로 서로 주매 뜻이 간절함을 어찌하랴 / 縞紵難奈意綢繆

이별가 한 곡조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니 / 離歌一曲人不見
기러기 멀고 먼데 백 년의 가을이로다 / 鴻雁遙遙百年秋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뽕나무 활, 쑥대 화살은 남아의 일이라 / 君不聞桑弧矢男兒事
사방으로 다니는 본 뜻을 마침내 어찌 거두려는고 / 四方素志竟何收
또 듣지 못하였는가, 외국에 교제하는 높은 재주는 사신의 사업이라 / 又不聞專對高才使者業
부지런히 노력하여 조심하소 / 夙夜努力愼前修

하였다. 그 시를 자기로서는 잘된 것이라 이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고, 글씨는 홍무체(洪武體)를 모방한 것인 듯 하나 졸(拙)하고 약하여 가소로웠다. 그의 형 신충(信充)이 나에게 지어준 시도 또한 많은데, 더욱 보잘 것이 없었다.

동계(東溪) 반전작(飯田綽)이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시월 바람이 붉은 비단 갖옷에 차가운데 / 十月風雲紫綺裘
이역(異域)에서 함께 세월 흐름을 슬퍼하네 / 共憐殊域歲華流
채색 무지개 늘어뜨린 그림자 삼천 길이요 / 彩虹落影三千丈
검은 학의 울음 소리 십이루에 들리네 / 玄鶴遺聲十二樓

구름 밖 종소리에 먼데 꿈이 놀라고 / 雲外霜鍾驚遠夢
역정의 밤비에는 맑은 시름이 맺혔네 / 驛程夜雨結淸愁
먼 길에 목과를 주었다고 혐의하지 마시고 / 莫嫌遠有木瓜贈
여주(驪珠) 만 곡을 받은 듯이 여기소서 / 賴把驪珠萬斛酧

하였다. 그 끝에 짧은 편지를 부기(附記)하기를,
“본월 재생명(哉生明 초3일)에 객관에서 만났으나 보름날에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나는 공의 풍채를 사모함이 꿈속에도 아른거립니다. 당일 석상(席上)에서 지어준 품격 높은 시를 가지고 한갓 안면을 대한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비루한 율시(律詩) 한 편을 기러기 날개에 부쳐서 아뢰오니, 그것이 홍교(洪喬)의 버림을 면하여 높은 눈에 접할 수 있다면 천행(天幸)이겠습니다.”
하였다.

설계(雪溪) 정상유기(井上有基)가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이별곡을 파하고 손은 돌아가려 하는데 / 驪駒歌罷客將歸
새벽에 패교를 바라보니 눈물이 옷에 가득하네 / 曉望㶚橋淚滿衣
재택 천 년에 사람이 다 없어졌고 / 梓澤千年人盡去
평원의 열흘 동안 일이 이제는 틀렸네 / 平原十日事多非

부용산 밑에 안계(眼界)가 가이 없고 / 芙蓉山下眼無極
버드나무 나루터에 혼이 날고자 하네 / 楊柳渡頭魂欲飛
바닷물에 아침저녁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우니 / 海水難傳朝夕信
난간에 기대어 섭섭하게 사양(斜陽)을 대했네 / 憑欄怊悵對斜暉

하였다. 끝에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만나 뵌 뒤로 사신의 관(館)에는 영(令)이 엄하여 뜰 아래에 재배(再拜)할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 또 소개와 편지를 통할 수도 없어 헛되이 저문 구름, 봄나무[暮雲春樹]의 생각만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이미 기름칠을 하였다고 들으니, 섭섭하고 한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대개 군자의 벗은 그 마음이 후함과 박함에 있는 것이요, 같고 다름으로써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만난 동안이 지극히 짧은 것이 한이 되니, 어찌 평일에 품었던 바를 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간절한 정성을 꿈에다 의탁하겠습니다. 편지를 대하니 슬프고 섭섭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날씨가 추운 때에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소서.”
하였다.

학정(鶴汀) 계산의수(桂山義樹)고풍체(古風體)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봉황루 밖에 금은 궁궐이요 / 鳳凰樓外金銀闕
오양성 위에 여러 신선이로다 / 五羊城上群仙人
어젯밤에 고리와 패로 하늘에서 내려오니 / 環佩昨夜降霄漢
무릉의 복숭아 꽃 일만 년 봄이로다 / 武陵桃花一萬春

나를 보자 흔연히 선약정(仙藥鼎)에 불을 피우게 하더니 / 見我欣然供鼎役
잠깐 사이 옥기린을 타고 갔네 / 頃刻爲御玉麒麟
부상의 푸른 물이 하늘에 넘치는데 / 扶桑碧水蹴天漲
인간에서 다시 길을 묻는 떼 배가 없었네 / 人間無復槎問津

하룻날에 여러분이 바람과 비를 몰아서 왔으매 / 一日諸公驅風雨
아름다운 기운이 도성에 가득한 것을 거듭 보겠네 / 重瞻佳氣滿城闉
남산의 야사는 성이 계인데 / 南山野士原姓
청전선(靑錢選)에 그릇 뽑혔으나 석상진(席上珍)은 아니로세 / 謬中銅非席

삼동의 문사에 빙설을 씹었고 / 三冬文史嚼氷雪
한 자루의 보검(寶劍)에 정신을 의탁하였네 / 一把雄劍寄精神
푸른 눈알로 돌아보아 주매 언덕이나 산처럼 중한데 / 靑眸賜顧丘山重
한평생에 곽임종(郭林宗)의 건을 꿈에라도 생각하네 / 百年夢想鉢

다만 붉은 난새가 하늘을 향해 날까 걱정되어 / 只愁紫鸞慕天翥
북두성(北斗星) 밤마다 높은 자취를 바래네 / 北斗夜夜望後塵
속절없이 이별하는 한을 바람에 부쳐가니 / 空將離恨付風去
그대를 좇아 바로 한강 가에 떨어지리 / 逐君直落漢水濱

하였다.

감곡(甘谷) 원방경(源芳敬)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이별시로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 동쪽 군자의 나라 / 海東君子國
덕이 이웃이요 아름다운 이름도 같도다 / 隣德美名均
통신사(通信使)의 내왕은 유래가 오래요 / 聘禮由來久
맹약(盟約)은 좋은 전례를 따랐도다 / 約盟令典循

여러 현인(賢人)의 비단 깃발이 빛나매 / 群賢輝繡節
사신으로 온 이는 사모 쓰고 큰 띠 매었네 / 專對見簪紳
비서의 명예를 흠앙하였는데 / 欽仰秘書譽
다시 옥당(玉堂)의 사람인 줄 알았네 / 更知玉府人

학식은 사고를 알았고 / 學識諳四庫
건필(健必)은 천 근(千斤)의 무거운 것을 당기네 / 毫健挽千匀
웅변은 박연폭포가 내리 쏟고 / 雄辯朴淵掛
높은 표격(標擊)은 백악산(白岳山)이 새롭네 / 高標

신유는 장래를 아는 식견이 있고 / 申繻傳遠識
명도는 본래 온순(溫純)하네 / 明道本溫純
항상 도산의 깊은 데를 열람하였고 / 常閱道山奧
원래 석상진을 지녔네 / 元懷席上珍

들은 것이 많으매 옛 학업을 스승으로 하였고 / 多聞師古業
오절은 남륜을 대대로 하였네 / 五絶世南倫
돛대는 더운 기후(氣候)를 무릅썼는데 / 帆冒炎熱候
관에서 서리 내리는 새벽이 가까웠네 / 館近霜露晨

일산을 기울이니 서로 의기(意氣)가 합하였고 / 蓋傾投意氣
말씀이 높아서 나는 수작하기가 부끄러웠네 / 語高愧敷陳
널리 사랑하매 어리석고 못난 이를 용납하고 / 泛愛容愚劣
풍채는 한 점의 티끌도 없었네 / 丰儀絶點塵

새로 알았는데 사귀는 정이 절로 담박하고 / 新知交自淡
기이한 만남이 어찌 인연이 없으랴 / 奇遇豈無因
하필 혀끝을 움직이랴 / 何用舌端動
목격에 의하여 해지네 / 情依目擊親

수레를 돌릴 기일이 이미 촉박한데 / 脂車期已促
학을 타고 또한 따라 왔네 / 駕鶴亦隨臻
이역에서 마음이 도리어 장하고 / 異域心還壯
하늘에 드리운 날개를 또한 폈네 / 垂天翼亦伸

돌아가는 길의 봉우리는 창과 같고 / 歸程峯似戟
큰 바다의 물결은 은빛 같네 / 溟渤浪如銀
내일은 그대가 떠난다는 말을 들으니 / 明日聞君去
저문 구름이 나의 마음 상하게 하네 / 暮雲傷我神

꿈에는 봉래산(蓬萊山)의 경치가 남았고 / 夢殘蓬島
서기(瑞氣)는 부산 바닷가에 가득하리 / 瑞滿釜山
만 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생각하는 곳에 / 萬里相思處
누각에 올라 달을 바라보리 / 登樓望月輪

하였다.

미장주 기실(尾張州記室) 목실문(木室聞) 선인편(仙人篇)을 지어 보내어 나에게 이별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옥경의 신선이 여섯 마리 용을 타고서 / 玉京仙人馭六龍
날아서 멀리 부상까지 오려 하였네 / 翶翔遠欲窮扶桑
밤중에 동남에서 태양이 뛰노니 / 夜半東南日毬躍
큰 바다가 솟구쳐 구슬을 부수는 듯 / 大海湧動碎琳琅
문득 고삐를 달려 천상에 올라가 / 倐忽騁轡
아침에는 석수를 먹고 저녁에는 경장을 마시네 / 朝餐石髓暮瓊漿

쌍쌍의 선녀가 봉황의 피리를 부는데 / 兩兩神女吹鳳簫
구름 사이에 흰 무지개 치마가 나부끼네 / 雲間飄颻素霓裳
봉래산을 굽어 보매 오색구름이 보였는데 / 俯觀蓬萊五雲簇
잠깐 동안 멍에를 멈추고 높은 당에 올랐네 / 少時停駕上高堂
산호의 패물이 대모(玳瑁)자리에 빛나는데 / 珊瑚寶玦耀玳筵
신선들이 웃으며 술잔을 함께 들었네 / 仙人解顔共壺觴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편에 지초(芝草)를 희롱하니 / 左把芙蓉右弄芝
가래침이 단약(丹藥)을 이루어 옥상에 가득하네 / 咳唾成丹滿玉床
구름의 모였다 흩어짐이 어찌 그리 쉬운고 / 雲氣聚散何容易
속절없이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니 마음만 미칠 것 같네 / 空望窈冥心欲狂
원컨대 우리로 하여금 날개가 돋쳐서 / 願使吾輩生羽翼
곤륜산(崑崙山)에 가서 길이 놀게 하소 / 翻跡長游崑崙岡

하였다.

복창언(福昌言)이란 사람이 있어 호를 학저(鶴渚)라 하며, 자못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미장주(尾張州)에 숨어서 살았다. 내가 강호(江戶)로부터 돌아올 때에 본주(本州)를 지나는데, 그 사람이 와서 보지는 아니하고 기실(記室) 조문연(朝文淵)을 소개로 하여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편을 지어 떠나는 나에게 보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이웃 우호(友好) 천 년에 덕이 외롭지 아니하니 / 隣好千年德不孤
사절(使節)이래산(蓬萊山) 찾아옴을 기쁘게 보네 / 喜看旌旆訪蓬壺
오색 구름이 자라머리의 경치를 물들여 / 五雲染出鼇頭
시인(詩人)의 붓 아래 주옥(珠玉)으로 변화하네 / 化作騷人筆下珠

하고 또 이르기를,

만 리 긴 바람에 역마가 우는데 / 萬里長風驛馬嘶
오늘 밤에는 머물러 시를 써 주시오 / 今宵偏要爲留題
그대가 내일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 憶君明日遙歸去
다만 흰 구름이 물 서쪽에 나는 것만 보이네 / 徒見白雲生水西

하였다. 조문연이 그의 시가 보통의 조격(調格)이 아니라고 매우 칭찬하였다. 왜인의 칭하는 상등(上等)에 속한다는 사람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다.

○ 중들의 시가 비록 많으나 더욱 눈에 들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좌화성(佐和城)에서 용담사(龍潭寺)소영(素盈)이란 자를 만났는데, 필담을 밤새도록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또 서로 만났는데 그 중이 자못 친하게 굴며 시로써 나에게 작별하기를,

이별한 뒤에 또 서로 보니 / 別後又相見
찬 매화가 백옥의 자태를 드러내네 / 寒梅逞玉姿
저문 구름 손을 만나는 날이요 / 暮雲逢客日
위수(渭水)의 나무 그대를 보내는 때로다 / 渭樹送君時

교칠을 먼저 서로 약속하였는데 / 膠漆先爲約
금란이 다시 누가 있을꼬 / 金蘭更有誰
비파호(琵琶湖)한강(漢江)에 / 琶江漢水
밝은 달이 마음 비쳐 아네 / 明月照心知

하였다. 시가 비록 고담스럽고 졸열하나 정경(情景)만은 사랑스러웠다.

○ 내가 우삼동과 시를 주고받은 것이 또한 많은데, 배가 일기도(壹岐島)에 멈추어 바람을 기다릴 때에 우삼동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가을바람이 편의를 빌려주지 않아서 / 秋風難借便
손의 배가 난초(蘭草) 나는 언덕에 매어 있네 / 客舸繫蘭汀
건너는 어구에 불 그림자가 차갑고 / 影冷渡間火
이슬 밖의 별은 빛이 희미하네 / 光微露外星

공연히 귀밑에 눈이 가득하고 / 漫將髩堆雪
다시 자취가 부평초(浮萍草) 따름을 깨달으리 / 仍覺跡隨萍
타루 밑에서 칼을 두드리노라면 / 擊劍柁樓底
이역(異域)의 노래 차마 듣지 못하리 / 吳歌不忍聽

하였다. 배가 남도(籃島)에 이르자 또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편을 지어 부치기를,

목란배가 큰 바다 언덕에 매었으니 / 木蘭舟繫大瀛隈
높은 누각에 이리저리 기대이매 서쪽으로 안계(眼界)가 열리네 / 徙倚高樓西望開
먼 포구에는 구름이 신녀묘를 막았고 / 極浦雲遮神女廟
웅장한 관문에는 달이 패가대에 비치네 / 雄關月照覇家臺

일천 숲의 귤과 유자에 가을 서리가 차고 / 千林橘柚秋霜冷
한 섬에 연기 안개는 저문 빛이 구슬프구나 / 一島煙霞暮色哀
고향 산천에 머리 돌리자 소식이 끊어졌으니 / 回首鄕山消息斷
꿈 가운데 변방의 피리를 서로 재촉하지 말라 / 夢中戍笛莫相催

하였다. 또 오언율시(五言律詩) 두 편을 지어 보냈는데, 그 첫 편에는,

늙어 병들었고 벼슬에 매었는데 / 衰病仍官繫
다시 만 리의 놀이를 하네 / 復成萬里遊
파도는 밤새도록 빗소리요 / 波濤終夜雨
솔과 계수나무 산에 가득한 가을이네 / 松桂滿山秋

기러기는 철 이르게 공중에 날아 지나가고 / 雁早書空度
반딧불 한가로이 물에 비치어 흐른다 / 螢閒照水流
누가 양춘곡(陽春曲)를 연주하여 / 陽春誰奏曲
노부의 시름을 풀어줄 수 있을까 / 能解老夫愁

하였다. 그 다음 편에는,

못난 자질로 희망을 버렸거늘 / 樗材甘自棄
이번에 함께 놀 줄을 어찌 헤아렸으리 / 何料此同遊
바다 구름의 새벽에 거문고 아뢰고 / 琴奏海雲曉
산장(山莊)의 가을에 술잔을 전하네 / 盞傳山榭秋

풍연은 좋은 경치를 제공하는데 / 風煙供勝槪
문장은 명류로세 / 詞藻屬名流
손을 잡고 뜻이 서로 합하니 / 握手意相得
고향 생각 시름이 반이나 감하리 / 鄕心半減愁

하였다. 배가 지도(地島)에 닿자 연일 비바람이 쳤는데, 그는 또 시를 지어 보내기를,

풍우는 언제나 개려는고 / 積陰何日已
나그네 회포 답답하여 트이지 못하리 / 覊抱鬱難開
배 안에서 자매 오랫동안 해안(海岸)에 의지하였고 / 舟宿長依岸
신기(蜃氣)를 뿜으매 곧 누대가 되네 / 蜃噓旋作臺

자주 사공을 불러 말하고 / 頻呼篙子語
때때로 기러기 소리 듣고 슬퍼하네 / 時聽旅鴻哀
술을 마셔도 마침내 소용이 없고 / 樽酒終無賴
가을 바람만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재촉하누나 / 秋風兩鬢催

하였다. 그 끝에 작은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
“연일 음천에 역풍(逆風)이 방해를 하므로 신선놀이의 기약은 아득하고, 또 여러 군자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여 담화하지 못하니,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들으니, 공은 동행한 여러분과 함께 주야로 서로 주고받아 좋은 시가 책상에 가득하다니, 바다 속에 늙은 용왕(龍王)이 필시 생각하기를, 강산의 기묘한 곳에서 공의 창자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시를 있는 대로 발설(發泄)시킨 뒤에야 한 자리 맑은 바람으로써 도와서 장문(長門)의 바다로 바로 보내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없는 학식과 다함없는 재주가 마침내 다할 때가 없을 것이니, 그러고 보면 늙은 용왕의 도모하는 바는 한갓 일 많은 것만 되고 말 것으로서 서로 밝게 알아주는 것이 도리어 나보다도 못하므로 가소롭습니다. 어제 하소(霞沼)와 더불어 시를 논하다가 인하여 말하되, ‘나의 시는 골동품점(骨董品店)과 같아서 집이 넓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기명(器皿)이 많지 아니한 것이 아니나, 한되는 것은 냄새나는 구리쇠와 깨어진 자기(磁器)에 재[灰]와 먼지가 쌓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嘔吐)를 하게만 할 뿐이요, 자네의 시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와 같아서 비록 웅위(雄偉)한 구경거리는 없으나 스스로 맑고 아담하여 사랑스러울 만하다.’고 하였으니, 공은 이 말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내 집안의 추한 것을 밖에 드러내는 것이 되므로 절로 얼굴이 붉어집니다마는 한편으로는 공으로 하여금 한번 웃게 하려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하소는 곧 송포의(松浦儀)의 호인데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재치(才致)와 정(情)은 있으나 기력이 미치지 못하여 고담(孤澹)한 것을 면하지 못하므로 우삼동이 그들끼리 서로 품평(品評)한 말을 기록하여 나의 평론을 듣고자 한 것이다. 내가 편지를 써서 답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편지를 받아보니, 하소와 더불어 시를 논평한 것은, 마치 왕장공(王長公 감주(弇州))의 시 가운데 자기의 시는 큰 바다 붉은 물결[大海紫瀾]로 자처(自處)하고, 이우린(李于鱗)의 시는, 눈속의 아미산[雪中峩眉]으로 평한 것이 지금까지 천하에 이가(二家)의 평이 된 것과 같습니다. 대저 큰 바다는 웅혼(雄渾)한데 비유한 것이요, 아미산은 맑고 높은 것을 말한 것이니, 공의 뜻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골동품점의 먼지 묻은 구리쇠는 정정(程鄭)의 집 물건 아님이 없으니, 곧 하루 아침에 갈고 닦으면 진주(眞珠)ㆍ월패(月貝)와 같게 할 수 있는 것이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도 역시 우로(雨露)의 덕택으로 자라는 가지와 잎이니, 저 자연이 배양(培養)하는 것이 세월이 더 간다면 다른 날에 향기가 산에 가득하여 풍부한 구경거리가 되지 아니할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일본은 좁은 땅이라, 공의 골동품도 일찍이 사람들에게 팔려 본 일이 없고, 하소의 말리화도 그 외롭게 고운 것을 상심할 것이 없습니다. 힘써서 스스로 아끼시오.
하였더니, 그뒤 수일 만에 두 사람이 와서 사례하기를,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권면함과 감탄함이 함께 지극하니, 감히 지기(知己)의 주는 말씀을 잊겠습니까.”
하였다.

섭진주(攝津州)의 문인(文人) 삼택즙명(三宅緝明)은 호를 창명(滄溟)이라 하는데, 평수집(萍水集)이란 책을 가지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면서 편지로 말하기를,
“나의 아우 무충(茂忠)이 호를 석병(石屛)이라 하는데, 연고가 있어 공에게 가 뵙지 못하고, 근간에 대마도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지 및 평수집을 공에게 바치면서 공의 서문을 얻기를 요청하였더니, 그것이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고로 귀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이 올 때에는 과군(寡君)이 대대로 관반(館伴)의 일에 참여하였는데, 나는 곧 과군 휘하의 고구(故舊)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조고(祖考)와 선인(先人)이 모두 사신의 관(館)에 출입하면서 귀국의 여러 학사들과 시를 주고 받고 하였으니, 조고와 박나산(朴螺山), 선인과 성취허(成翠虛)의 관계를 평수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신묘년에 우리 형제가 과군을 모시고 사관(使館)에 출입하여 이동곽(李東郭) 등 여러분과 더불어 함께 놀면서 문묵(文墨)으로써 즐겼으므로 우리들은 스스로 한평생의 기이한 즐거움이요 두 번 있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뜻밖에 공을 만나 반겨주심을 받았으니 내가 귀국의 선생들에게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의 이른바, 전생의 인연이라 한 것이 있는 것입니까, 어찌 그리도 기이합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귀국의 여러 학사에게 교분을 가진 이가 심히 많으나 3대로 서로 계승하기를 우리 형제와 같은 이는 드뭅니다. 세상에 드문 풍류는 또한 손자(孫子)된 복을 볼 수가 있고, 추모(追慕)하는 마음은 더욱 슬픔이 간절합니다. 인하여 함께 선대의 사관(使館)에 출입하면서 지은 모든 작품을 편찬하여 가묘(家廟)에 간직하여 선대에 효도하는 한 도움이 되게 하고 또한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읽어서 두 나라의 성(盛)한 모임을 부러워하며 사모하여 선대의 남긴 덕택을 공경하고, 더욱 선대의 유업(遺業)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평수집(萍水集)을 만든 까닭입니다. 거기에 신묘년의 시를 붙여 편찬한 것도 또한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집이 있는데다 또 귀국의 훌륭한 선비의 글을 얻어서 서문으로 삼아서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더욱 이 문집을 더욱 높이고 믿어서 비단보에 열 겹으로 간직하여 영원토록 전하기를 원하니, 우리 형제가, 바라는 것이 마치 진인(秦人)이 조(趙) 나라 옥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방금 공이 여기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장차 우리로 하여금 오래 품고 있던 소원을 이루어 이 문집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이 하늘이 주는 기회에 맞추어 주는 여부(與否)는 오직 공 한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입니다. 신묘년에 이 학사(李學士) 등 여러 분에게 애란당기(愛蘭堂記)를 청하였더니, 여러 분이 거절하지 아니하고 흔연(欣然)히 붓을 들었는데, 지금 공의 도덕의 높음과 인혜(仁惠)의 두터움으로써 능히 이역(異域)의 사람을 친애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주고, 우리 형제가 또한 어진 이를 깊이 존경하고 덕을 숭상함이 간절하여 능히 다른 나라 군자의 버리는 바가 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려고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건져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조선의 대학사(大學士)인데 이겠습니까. 감히 묻노니, 공은 승낙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석병(石屛)의 편지는 글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나 참으로 이른바, 형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 어렵다 할 수 있다. 창명(滄溟)이 시를 짓는 것은 문(文)보다는 못한 듯하나 간간이 운치가 있었다. 내가 처음 대판에 도착했을 때에 그가 곧 와서 서로 종일토록 필담을 하였다. 내가 한 절구(絶句)를 써서 주기를,

이역(異域)에서 같은 선성(先聖 공자(孔子))의 문하에 노니 / 異域同遊先聖
유가(儒家)의 한 물줄기가 흘러 쉼이 없구나 / 儒流一派正源源
후생이 비로소 은(殷) 나라 예(禮)를 말할 만하니 / 後生始可言殷禮
다행히 기자(箕子)의 나라에 문헌이 있었네 / 幸有箕邦文獻存

하였다. 돌아갈 때에 또 한 절구를 지어 주기를,

돌아가는 배가 눈 속에 온 것이 산음(山陰)과 같으니 / 歸舟乘雪似山陰
흥이 다하고 사귐이 쉬어지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興盡交休淚滿襟
다른 날 높은 누각 머리 돌려 바라는 곳에 / 他日高樓回首處
뜬 구름이 오늘 이별하는 정만큼 깊지 못하리 / 浮雲不及別情深

하였다. 석병이 나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일본과 한(韓)이 지맥(地脈)이 통하였고 / 和韓通地脈
높은 뫼가 신을 두 번째 낳았구나 / 嵩岳再生申
오늘날 문장의 선비요 / 今日文章士
다른날 사직신이 되리 / 他年社稷臣

하였다. 그 형제가 대개 문학으로써 스스로 거벽(巨擘)이라 하여 대대로 천남(泉南)에서 이름이 있으므로 여러 왜인과 상대할 때에 말과 안색이 자못 교만하여 우삼동과 서로 친절하지 아니한 것 같았다.

임신독(林信篤)이 일본 제일의 늙은 석학(碩學)이 되는데, 그의 문도(門徒)들이 나와 필담할 때에 모두 “학문의 순수함과 도덕의 깊기는 우리 정우(整宇)선생 한 분이다.” 하니, 그가 국중에 추앙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 얼굴을 본즉 근신하고 후함은 남음이 있으나 시문(詩文)은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편지로써 작별을 대신하였더니, 그의 회답 편지에 이르기를,
“금년 가을 겨울의 즈음에 조선국 세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 내가 공무의 여가에 두 아들을 이끌고 갔다가 제술관 청천(靑泉) 신 학사(申學士)를 만나 술 마시고 시 짓는 자리를 거듭하여 자못 망형(忘形), 내구(耐久)의 교분을 맺었더니, 얼마 안되어 병들어 누워서 두 사람 사이의 정을 다하지 못하여 자못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감에 다달아 간절하게 편지를 보내어 속 마음의 정곡을 토로(吐露)하여 주셨습니다. 무릇 이별이란 것은 인간에게서 중한 일이니, 처량하게 간장을 녹인다는 것은 장부의 정이요,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것은 아녀자(兒女子)의 정입니다. 옛적에 문절(文節)자고(子高)와 이별할 때에는 손을 쑥 빼어서 갔고, 범단(范丹)왕환(王奐)과 이별할 때에는 옷을 떨치고 간 것은 이별로써 정에 관계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멀어 두 번 모일 기약이 없으니 다른 날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고시(古詩)와 율시를 두 편 화답한 것은 두 아들이 기뻐하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례하는 시를 짓지 못함에 정은 길고 붓은 짧아 이렇게 초초히 올립니다.”
하였다. 오직 이 편지 한 장이 소박(素朴)하고 솔직한 데에 가까웠다.

담 장로(湛長老)는 나와 더불어 교분이 가장 깊어서 서로 주고 받은 시편이 한 권 한 축(軸)이나 되나 시는 모두 졸(拙)하므로 다만 그 긴 편지 한 장을 기록한다. 편지에 이르기를,
“근일에 짧은 편지를 올려 겨우 안부를 묻고는 탈 배가 총총하여 이미 기양(岐陽)에 도착하자 회답한 글을 받았습니다. 공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지위에 있었으면서 우리 불문(佛門)의 경전(經典)에 유의하였으니, 젊은 학사가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박식하며, 운치가 있습니까? 내가 전일 풍도(風度)를 엿보고서 실로 운치 있는 분인 줄을 알았습니다. 깊이 흠앙하므로 말을 다 진술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서 한 절에 들어갔다가 한 절로 나와서 고생살이 하느라고 스스로 격려(激勵)하기 어려워 둔한 자질이 일찍이 불조(佛祖)의 울타리도 엿보지 못하고, 그럭저럭 20, 30년의 세월만 소비하고 다만 깊은 숲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무 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초목과 함께 썩으려고 도모할 따름이더니, 뜻밖에 외람되이 뽑혀서 관사(官寺)의 주지로 있다가 다시 왕명(王命)을 받들어 세 사신을 접반(接伴)하게 되어 인하여 학사 및 세 서기와 더불어 마음이 서로 통하여 후의(厚誼)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분수에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이 많을 뿐입니다. 주신 편지 가운데 선가(禪家)의 정혜(定慧)는 그 요점이 다만 거짓의 마(魔)를 쫓아버리고 망상(妄想)을 막는 데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의 도리는 이상하고 요망한 술법이 아니며 또 아득하고 미묘하고 기특한 일이 아니라, 다만 뭇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자리를 발명하게 할 따름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옛적이나 지금이나 장래에도 관계가 없고 초연(超然)하여 견줄 데가 없는 것이요, 또 붓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매 그 도가 점차로 낮아지고 쇠퇴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양(梁) 나라 보통(普通) 연간에 우리 달마조사(達磨祖師)가 불(佛)의 심인(心印)을 차고 동방으로 와서 송산(菘山)에 이르러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不立文字直指人心]으로써 긴요한 것을 결단하여 갑자기 기틀을 바꾸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교 밖의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이라는 것입니다. 신광(神光)이 세 번 절하고 분명히 받아서 교 밖의 종(宗)이 천하에 두루 선포되어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잇따라 귀의(歸依)한 자가 많으니, 장상국(張相國 상영(商英)), 유자사(柳刺史 종원(宗元)), 황태사(黃太史 용(容)), 소한림(蘇翰林 식(軾)), 송문헌공(宋文憲公)같은 이는 벼슬과 공명(功名)과 과거(科擧), 결혼을 떠나지 아니하고도 바로 가리키는 도리[直指道]를 발명하여 기운이 불조(佛祖)를 삼키고 눈이 건곤(乾坤)에 높았습니다. 이것은 문자와 언어를 쓸어버리고 홀로 해탈(解脫)함을 증득(證得)한 것입니다. 비록 이와 같으나 또 문자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어찌 말세(末世)에 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사(祖師)가 육문(六門)의 문자가 있어서 아손(兒孫)들에게 남겨 주었으니, 또 문자반야(文字般若)의 힘이 아닙니까. 도는 본래 말이 없는 것이지만 말을 빙자하여 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것입니다. 도와 문자를 누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이른바, ‘자신을 극복하여 예(禮)를 회복하라’한 가르침도 공자의 뜻을 환히 통하면 어찌 반드시 문자 언어에 구애되겠습니까. 그런즉 유교와 불교가 그 근원이 같은 것임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유아풍류(儒雅風流)의 선비가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조를 시로 지을 때에 서로 화답하는 것도 역시 이에 있을 것입니다. 공은 제술관의 임무를 띠고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높은 풍류, 아담한 운치와 격앙(激昻)한 뜻과 절조로 명망이 더욱 높아지고 연령이 더 높아질수록 명성과 빛을 상국(上國 조선)에 떨치니, 비록 장상국, 유자사, 황태사, 소한림의 무리에게라도 혹 못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사절로 와서 멀리 창해를 건넜으니, 어찌 도의(道義)의 있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빌고 비나이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서기(書記) 삼군(三君)도 전단수(旃檀樹)의 수풀 가운데 전혀 잡목이 없는 격이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원컨대, 그들에게도 나의 이 성의를 같이 전달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 국중에 문장의 재주가 어린 아이들 중에 많이 있으니, 대판수족동자(水足童子)는 나이 14세요, 북산동자(北山童子)는 나이 15세요, 왜경(倭京) 명석경봉(明石景鳳)은 나이 18세요, 강호 하구호(河口皞)는 나이 17세인데, 읽고 짓는 것이 이미 풍부함은 물론이요, 모두 얼굴이 옥설(玉雪)과 같고 눈길이 단정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예법 속에서 자라난 사람과 같으니, 대개 그 자질의 청명한 것은 강산의 정기를 타고 난 것이나 마침내 정치 교화의 배양(培養)을 받지 못하고 명주(明珠)로 하여금 연석(燕石)이 되게 할 수가 있다.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장택학(長澤學)택주(長澤主)형제가 있어 모두 눈이 멀었고 모두 능히 시를 배웠는데, 한번 보기를 원하므로 괴이히 여겨 불러 들여서 운(韻)을 내어 시험한즉, 운을 부르자 문득 대답하는데 지은 시가 모두 감개(感慨)한 생각이 있었다. 그 호를 물으니, 하나는 불원재(不怨齋)라 하고, 하나는 불우재(不尤齋)라 하였다. 내가 차운하여 주었다.

   일본의 성리학(性理學)은 하나도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대개 그 정교(政敎)와 민풍(民風)이 군사가 아니면 불(佛)이므로 국내에 문묘(文廟)와 향교(鄕校)도 공자를 제사지내는 곳도 없고 또 임금과 부모의 상복(喪服)도 없으니, 그 인민이 착한 본성을 하늘에서 타고 났지만 어디로부터 도덕을 들어서 알겠는가. 회진후(會津侯) 원정지(源正之)는 귀공자(貴公子)로서 작(爵)을 받은 사람인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데에 한결같이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교훈을 준수한다 하니, 또한 특이한 일이다. 호를 암재(闇齋)라 하는 산기씨(山崎氏)가 있어 또 정자와 주자의 학을 사모하여 소학(小學)의 목차(目次)에 의방하여 송유(宋儒)의 언행(言行)을 편찬하여 책을 만들어 세상에 전한다.

   목하순암(木下順庵)은 이름이 정간(貞幹)이니, 학식이 넓고 행실을 닦았는데, 원여(源璵)ㆍ우삼동(雨森東)의 무리가 모두 그 문인(門人)이었다.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공정(恭靖)이라 하였다 한다. 근세에 경도(京都) 사람 이등유정(伊藤惟貞)이란 자가 있어 학문으로 국내에 이름이 나서 자기의 견해를 책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그의 설(說)은 성리존양(性理存養)과 같은 학설을 무익한 것이라 하고, 다만 일상(日常)에 실지로 도(道)를 행하는 것만을 힘쓰게 할 것이라 하고, 그가 저서(著書)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길 적에 항상 이르기를,
“무릇 사람은 효제충신(孝悌忠信)만이 일상(日常)의 몸에 절실한 공부이니, 학자는 성리(性理)가 어떠한 것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率性之謂道] 한 교훈은 도가 성리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요, 도를 행하는 자가 성리로써 공부를 삼으라 한 것은 아니다.”
하고, 그밖의 의논도 선유(先儒)에게 위배됨이 많은데, 일시의 선비들이 혹은 숭배하여 믿는 자도 있고 혹은 고집함을 나무라는 자도 있었다. 나는 그 문집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번 모든 문사와 담화할 때에 이등씨(伊藤氏)의 설을 들면서 그 옳고 그른 것을 묻는 이가 있을 때에 매번 말하기를,
“이것은 순경(筍卿)의 성악설(性惡說)과 죄가 같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따르는 자는 사람의 도리를 금수(禽獸)와 초목의 성(性)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혹은 나의 말을 옳다 하였다.

○ 세속에서 전하기를,
“일본 흠명천황(欽明天皇) 때에 백제(百濟) 성명왕(聖明王)이 불경을 보냈으므로 일본에 불법이 있게 된 것이 이때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중국을 거쳐 인도에 들어가서 종법(宗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한다. 지금 보니, 일본의 풍속이 대저 불교를 숭상하나 평민이 중이 된 자는 열에 두셋이 못 되고, 능히 불경을 읽어 법사(法師)가 된 자는 셋에 한 사람도 못 되니, 그것은 국법이 심히 가혹하여 백성이 공정(空丁)이 없고 또 중이 먹고 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절은 민간에 있어서, 관광(觀光)할 때에 여자와 중들이 섞여 앉으니 모양이 추솔하고 행실이 없다. 혹은 고기를 먹고 음행(淫行)을 하면서 다만 중의 옷만 입고 칼을 차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경(經)을 말하고 불(佛)을 배우는 자가 매우 적다.

   ○ 천황(天皇)의 법은 불조(佛祖)와 같아서 모든 아들은 법친왕(法親王)이 되고, 모든 딸은 비구니(比丘尼)가 되고, 그 신하는 법인종(法印宗)이라 하는데, 모두 문서ㆍ역사ㆍ천문(天文)ㆍ역법(曆法)을 맡았다. 국중에 절이 오산(五山)이 있어 중을 주지관(住持官)으로 임명하여 칭호를 화상(和尙)이라 하고 또한 장로(長老)라고도 칭하는데, 모두 천황이 임명한다. 대마도이정암(以酊庵) 및 사신을 접반(接伴)하는 장로도 또한 오산 중에서 청하여 돌림 차례로 파견한 것이니, 용창(龍菖)제2산(第二山)의 주지요, 성담(性湛)제5산의 주지이다. 내가 사관(使館)에서 데리고 시를 지은 자로서 중 소영(素盈)ㆍ주염(周恬)ㆍ요혜(了慧)ㆍ시습(時習)ㆍ정간(貞侃)ㆍ선의(禪儀)ㆍ주경(周鏡) 등은 모두 관품(官品)이 없고, 그 시는 혹 우열이 있으나 족히 말할 것도 못되었다. 그 교리(敎理)는 조동종(曹洞宗)임제종(臨濟宗) 두 파가 있으나 도를 깨달은 자는 더욱 적다. 우리나라 송운대사 유정(松雲大師惟政)의 필적이 강호에 있는데 내가 보니, 묵은 종이가 색이 변하였으나 필적은 알아볼 수 있었다. 왜인들이 보물로 간직하여 백 년 동안 사모하고 귀중히 여기며 모든 중들이 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을 알고 그 시를 들려주기를 원하였다. 내가 서산집에 있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편을 써 주었더니, 그들은 곧 흠모해 마지않았다.

의학(醫學)은 가장 숭상하는 바로서 천왕으로부터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가 모두 의관(醫官) 두어 사람씩을 두며 봉급도 매우 후하다. 그래서 의관은 모두 부자가 된다. 그 풍속이 글을 배운 자는 태반이 의원(醫員)이 되는데 그 복색은 중으로 더불어 대략 같으며, 다만 칼 한 자루를 차고 머리를 다 깎았다. 내가 축전주(筑前州)에서는 소야현림(小野玄林)을 보았고, 강호에 이르러서는 임태의(林太醫)의 부자와 즐겁게 사귀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문장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이 선량하였다. 북미춘포(北尾春圃)는 호를 당장암(當壯庵)이라 하는데, 저술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포부가 있는 것 같으므로 내가 서문을 지어 주었다. 제약법(製藥法)이 정묘(精妙)하여 수도(首都)와 지방의 거리 길가에 금패(金牌)가 총총하여 환(丸)ㆍ단(丹)ㆍ탕(湯)ㆍ산(散) 등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화중산(和中散)통성산(通聖散)이 가장 많았다. 그것은 아마 사람들의 성질이 조급하여 기뻐함과 성냄이 편벽되고 또 덥고 따뜻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병이 대부분 담(痰)ㆍ화(火)ㆍ체(滯)와 같은 울증(鬱症)에서 생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약방문이 통화 이중(通和理中)하는 화제(和劑)에 더욱 치중한 듯하다.

○ 여색은 요염하고 고운 것이 많아서 비록 연지와 분을 바르지 아니하여도 대개 부드럽고 희다. 분을 바르고 화장을 짙게 한 자도 살결이 부드럽고 미끈하므로 자연히 본색과 같으니, 눈썹을 그리고 불그스레한 안색, 검은 머리, 화잠(花簪)에 오색 무늬의 비단 옷을 입고, 띠로써 허리를 묶고 부채를 안고 선 자를 바라보니 사람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에는 동백 기름과 같은 향고(香膏)를 모두 써서 머리털 빛이 칠(漆)과 같았다. 관백 이하 각 주 태수의 비빈(妃嬪)의 칭호는 반드시 어내실(御內室)이라 하여 각각 풍랑(豐娘)ㆍ태랑(泰娘)ㆍ혜랑(惠娘)ㆍ익랑(翼娘)의 칭호가 있다. 귀가(貴家)의 여자는 출입할 때면 가마를 타고 관광할 때에는 비단 창에 기대어 주렴을 드리운다. 그 나머지 밖에 있는 자는 혹은 앉거나 설 때에 손에 그림 수건을 가지며,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맑았다.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는 좋아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혹은 손으로 부르는 형용을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이 젊은 왜남(倭男)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어루만지면서 서로 좋아하여 사람 많은 데나 넓은 길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국중에 인구가 매우 번성한데 여자가 남자에 비하여 더 많다. 결혼은 동성(同性)을 피하지 아니하여 사촌남매끼리도 서로 혼인을 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므로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禽獸)와 같다. 집집마다 반드시 목욕탕의 설비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을 한다. 대낮에 서로 정사(情事)를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 하는데, 각기 색정(色情)을 돋우는 기구를 사용하여 즐거움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곧 사람마다 춘화도(春畫圖)를 품속에 지녔는데,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각기 남녀의 교접하는 모습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묘사하였으며, 또 춘약(春藥) 몇 가지가 있어 그 색정을 돋운다고 한다.

○ 또 풍속에 각 지방에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을 설치하는 법이 없으므로 부상(富商)의 여행하는 자들이 모두 지내는 곳마다 사사로이 창녀(娼女)를 접하므로 이름난 도시의 큰 객점(客店)에는 모두 창루(娼樓)가 있는데, 대판(大坂)의 번화한 것은 가장 화류(花柳)로써 이름이 났다. 층층한 다락과 구불구불한 집이 길거리에 연하여 병풍ㆍ장막ㆍ이불ㆍ베개ㆍ술병ㆍ다당(茶鐺) 등 속이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되었고, 그 가운데 각각 한 미인을 두고 위에 금방(金?)을 달기를 상상창루(上上娼樓)라 하였는데, 호협한 남아들이 금을 싸가지고 온 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간다고 한다. 상상(上上)의 집이라도 하루의 화채(花債)가 백금(白金) 열 냥에 지나지 아니하고, 중ㆍ하는 차등이 있다고 한다. 내가 통역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웃으며 흉보기를,
“옛적부터 정(情)과 색(色) 가운데에 빠져서 혹한 남녀들이 있어, 남자는 인연을 기뻐하여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여자는 정에 감동되어 한 푼의 돈도 사랑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상상(上上)의 풍류스러운 일인데, 지금 너희들이 말하는 상상주(上上姝)라는 것은 추잡한 놈이나 이름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단지 돈만 보고 애교를 바친다 하니, 이것은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하품(下品)으로서 몇 푼어치도 못 된다.”
하였더니, 통역이 말하기를,
“나라의 풍속이 서로 다릅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일본의 호귀(豪貴)한 집에서 그런 특수한 미인을 사가지고 이익을 얻는 물건으로 삼기 때문에 소위 창루(娼樓)에 화려한 온갖 기구를 다 주인이 설비하여 놓고 문에 간판을 붙여서 그 값을 정하고는 매일 세(稅)를 받아가니, 저 미인들은 감히 제가 임의로 할 수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서러워하는 자도 있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억지로 몸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판에 이름 있는 창녀의 이름 및 나이가 얼마인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화자(花紫)는 22세요, 약자(若紫)는 20세요, 소자(小紫)는 15세요, 만주춘(滿州春)은 20세요, 보야향(保野香)은 25세요, 발지(發枝)는 20세요, 우영(友影)은 17세요, 촌춘(村春)은 16세요, 촌우(村雨)는 21세이니, 이들이 상상(上上)ㆍ상중(上中)의 미인입니다.”
하였다.

○ 일본에 남창(男娼)의 곱기가 여색보다 배나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혹하는 것이 또 여색보다 배나 된다. 국중의 사내아이가 나이 14, 15세(歲) 이상으로 용모가 특수하게 아름다운 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연지분을 바르고 채색 비단옷을 입히고, 향사(香麝)와 진기한 패물로 꾸며 그 가치가 천금에 해당한다. 관백 이하 부호(富豪)와 일반 백성이 다 그것을 사서 데리고 있어 앉으나 누우나 출입할 때에 반드시 딸려서 추행을 실컷 하고 혹은 밖의 사람과 통하면 질투하여 죽인다. 그들의 풍속이 남의 처나 첩을 몰래 통하는 것은 쉬운 일로 알아도 주인 있는 남창에게는 더불어 말도 웃지도 감히 못한다. 우삼동이 저술한 문고(文藁) 가운데 귀인들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한 글에 이르기를,
“왼쪽에는 붉은 치마요, 오른쪽에는 어여쁜 총각이다.”
라고 한 문구가 있었다. 내가 그 문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른바 어여쁜 총각이란, 소위 남창(男娼)을 말합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의 풍속이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천하가 동일한 바이나 오히려 음(淫)하고 혹(惑)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어찌 양(陽)만 있고 음(陰)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우삼동이 웃으며,
“학사(學士)는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였다. 우삼동과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도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보면 그 나라 풍속의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겠다.

장기도(長岐島)비전주(肥前州)에 속하는데, 사신 행차의 경과하는 곳이 아니므로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실로 해외 여러 나라가 모이는 구역으로써 남경의 장사꾼들이 항해(航海)하여 온 자가 혹 왜녀를 관계하여 자식을 낳고 왕래하는 때문에 왜인이 그로 인하여 중국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혹은 중국말도 통한다. 그러나 배운 바 어음(語音)이 소주(蘇州)ㆍ항주(杭州)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 이하의 지역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배운 북경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또 남만(南蠻)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역을 하는데 들으니, 그 복장(服裝)이 머리털을 뭉쳐 매었으며, 걸터앉아 아직도 위타(尉佗)의 옛 풍속이 있고 아란타국(阿蘭陀國) 사람들은 가장 이상하여 머리털이 길지도 않은데, 뒤에서부터 얽어 매었으며, 붉은 비단 전립(氈笠)을 쓰고 구슬 신이며, 옷은 모두 기이한 비단인데, 좁아서 겨우 몸을 용납할 만하고 바지도 또한 겨우 두 다리를 꿸 수 있어 굴신(屈伸)을 할 수 없어서 사람마다 호상(胡床) 한 개씩을 끼고 다니다가 앉을 일이 있으면 문득 걸터앉아 발을 편다. 풍속이 문서가 없고 길고 짧고 느리고 급한 획(畫)으로써 모든 일의 더디고 속한 부호(符號)로 삼고, 온갖 물건이 사치하여 옷에 한 점의 더러움도 없고, 성정이 탐하고 음란하여 오기만 하면 반드시 왜녀와 서로 사귀어 밤낮으로 희롱하여 즐기므로 장기(長崎)의 창루(娼樓)에서는 매양 외국인을 접하여 진기한 보물을 얻는다 한다. 내가 묻기를,
“일본의 국법에 이미 외국인과 교통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니, 외국인이 좋아하는 여자를 혹 싣고 갈 수도 있는가?”
하였더니, 통사가 말하기를,
“교통하는 것은 비록 금하지 않으나 다만 싣고 가지는 못하게 하고, 그들이 낳은 자녀는 마침내 일본 사람이 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양국 사람 이마두(利瑪竇)는 아마 이상한 사람인 모양인데, 그의 경력과 기록한 바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천지가 생긴 이래로 그런 설(說)을 하는 사람은 홀로 이마두 만이 있을 뿐이므로 내가 본래 기이하게 여겼다. 지금 들은즉 서양국 사람도 또한 장기도와 교통한다 하니, 혹시 그 사람의 행적을 전한 바가 있었는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장기에 와서 무역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라 무식하여, 별로 신빙(信憑)할 만한 문답도 없으나 다만 들은즉 전년에 배 한 척이 일본의 남해에 와서 닿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서양국의 교주(敎主)라 칭하면서 그 임금의 명령으로 만국을 교도(敎導)한다 하는데, 그의 소위 교(敎)란 것은 이마두를 성이라 하고 말이 황당하고 해괴하므로 국가에서 그를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금지하니, 그들이 노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유구국(琉球國)은 대소(大小)의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일본의 서남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작은 것은 중산주(中山主)라 하는데, 옛적부터 일본에 조공(朝貢)하였다. 들으니 그 의복과 언어가 왜인과 대략 같으나, 사신으로 온 관직이 있는 자의 쓴 사모(紗帽)가 우리나라의 사모와 같으면서 작고, 공복(公服)도 또한 단령(團領)의 제도가 있는데 3년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러 와서 살마주(薩摩州)로부터 상륙(上陸)하여 강호에 이르러 예(禮)를 행하고 간다한다. 내가 우삼동에게 유구국의 풍속과 인물에 대해 물었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옛적에 명 태조(明太祖)가 명령하여 중국의 24성(姓)을 보내어 유구(琉球)에 살게 하였는데, 그 자손이 지금 10여 성이 있어 대대로 문학을 하여 관인(官人)이 되었으므로 관인의 의복은 아직도 중국의 옛 풍속을 보존하였고, 평민은 일본과 다름이 없어 다만 긴 옷만 입고 바지는 없으며,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모든 공인(工人)들이 모두 한 구역에 모여 서로 섞여 살지 아니하며 그 만든 물건이 반드시 정묘(精妙)하여 일본에서 쓰는 대모빗[玳瑁梳]겹돗자리[重茅席]가 모두 유구국에서 나옵니다.”
하고, 인하여 사관(使館)에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유구 사람의 손으로 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제도를 본즉, 왜국 자리와 길고 짧은 것은 차별이 없으면서 띠[茅] 빛이 매우 누렇고 부드럽고 질기고 단단하고 빽빽하여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게 생겼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서울에 한 천인(賤人)이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제주(濟州) 바다에서 풍파에 표류하여 유구국에 이르렀더니, 온갖 공인의 사는 곳이 각각 부락이 있는데, 저는 피혁공(皮革工)의 구역에서 1년을 머물렀습니다. 남녀의 의복, 음식, 언어는 한결같이 일본과 같았으며, 그 나라에서 일본에 조공(朝貢)하므로 임금이 저를 일본에 보내주어 다시 동래로 왔습니다.”
하던 말이 기억이 났다. 지금 우삼동의 말한 바와 서로 부합하였다. 또 우삼동에게 묻기를,
“유구 관인(官人)의 글을 아는 사람이 혹 전한 바 시문(詩文)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정총예(程寵乂)란 자가 있어 중국 서호(西湖)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서자호 머리에서 죽지사를 부르니 / 西子湖頭唱竹枝
지나간 옛 일이 사람의 관심을 끄는구나 / 不堪往事繫人思
대낮에 파도는 전왕의 쇠뇌요 / 波濤白晝錢王
푸른 산 바람 비는 육수부(陸秀夫)의 사당이네 / 風雨蒼山陸相祠

옷에는 천축사(天竺寺) 길의 구름 향기가 젖었고 / 衣濕雲香三竺路
행장에는 버들 푸른 육교(六橋) 시(詩)가 남았네 / 囊餘柳色六橋
동해에서 온 사신의 뜻을 가지고 / 難將東海勞臣意
매화 심던 처사에게 말하기 어렵구나 / 說與栽梅處士知

하였는데, 《설당연유초(雪堂燕遊草)》 한 권이 세상에 전합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일찍이 강호 객관(客館)에서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회(所懷)가 있는데 틈을 타서 말하고자 합니다. 일본과 귀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의(信義)가 서로 맞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조선 국왕 과군(寡君)과 서로 공경하는 예의(禮儀)로 국서를 통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사(公私)의 문서에 반드시 극히 높이는데, 귀국 사람의 저술한 문집을 보면 그중에 말이 우리나라에 관한 것은 반드시 왜적(倭賊)이니 만추(蠻酋)니 하여 추하게 여기고 멸시함을 함부로 한 것이 차마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우리 문소왕(文昭王) 말년에 우연히 조선의 문집을 보고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어찌 조선이 우리를 모욕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하면서, 평생토록 한을 품었는데, 오늘날 여러분이 과연 이 뜻을 아시오?”
하면서, 말과 기색이 심히 불평하여 성내는 심정이 점점 드러났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알기 쉬운 것인데, 귀국이 양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이 본 우리나라 문집이 어느 사람이 저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임진란(壬辰亂) 뒤에 간행(刊行)된 글들입니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철천한 원수가 되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수치와 욕됨과 생령이 피를 흘린 것은 실로 만고에 있지 않던 변이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으로서 누가 그의 고기를 찢어서 먹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로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노(奴)와 적(賊)이라 말을 함부로 하고 글에 나타난 것이 진실로 마땅히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성조(聖朝)에서 생민(生民)을 인애(仁愛)하여 해관(海關)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서로 통하고 또 일본의 국토에 이미 수길의 남은 종자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친목을 도모하여 국서가 서로 연달아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덕의(德意)를 우러르니, 어찌 감히 다시 묵은 원한을 끄집어 내어 말에 나타내겠습니까. 근자에 대판에 이르러 평가(平家)의 옛터를 보니, 머리털이 오히려 쭈삣쭈삣 하였습니다.”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여러 종자(從者)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왜인이라 칭하니, 또한 평소에 바란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군이 무슨 유감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미 이르기를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 뒤에는 원컨대 하인들에게 신칙하여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筆帖)에 쓰기를 당인의 필첩이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民俗)이 옛적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한 때문에 당인이라 칭하니,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수길이 이미 귀국의 옛적 임금이 되었으니, 군도 또한 그의 이름자를 휘(諱)하고 그의 악한 것을 숨기는 뜻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는 시랑(豺狼)의 성품이 인간의 액운(厄運)에 응하여 태어난 자이므로 참혹히 도륙(屠戮)한 것이 귀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전 가족을 죽여 종자도 없게 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의 고조ㆍ증조 이상이 대대로 우삼(雨森)의 수(守)가 되어 성을 우삼이라 하였더니, 또한 그에게 멸족(滅族)을 당하였는데, 한두 사람 잔약한 자손이 민간에 숨어 죽음을 면하여 요행으로 종자가 남았습니다. 매양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실로 이가 갈리는 통분함이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러면 수길이 일본에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공덕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수길 이전에는 일본 66주(州)가 각각 나라를 세워 서로 공격함이 많이 있었으므로 명 나라 때에 일본 여러 섬에서 중국을 침노한 것이 종종 끊이지 않은 것은 여러 분이 반드시 명사(明史)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수길이 전쟁을 극도로 일삼아서 그것을 모두 평정하여 통일하였으니,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이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할 때에 청정(淸正)이 가장 흉악하고 독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원수로는 반드시 그를 첫 손가락으로 꼽는데, 만약 그의 자손이 관(官)이나 민(民)이 되어 우리 사신 행차와 접촉하는 사이에 끼었다면 대면하여 담화할 수 없으니, 군은 우리를 위하여 분명히 그 사람을 가리켜 주시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천도(天道)가 심히 밝아서 당시의 모든 장수 중에 사람을 많이 죽인 자는 다 자손이 없는데, 청정이 어찌 후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들은 바에 의하면, 원여(源璵)란 자는 본래 미천(微賤)한 가문에 났으면서 전 관백(關白) 가선(家宣)의 총애를 받아서 벼슬이 축후 수(筑後守)에 이르렀는데, 재주를 믿고서 제도를 변경하였다. 신묘년에 우리 국서에 회답할 때에 우리 어휘(御諱)에 범한 것이 있어 서로 다툴 때에 원여가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신독(林信篤)이란 자가 그른 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 무릇 그의 주장하는 것이 많이 이의(異議)를 고집하므로 종실(宗室)ㆍ대신(大臣)이 모두 원망하였다. 지금의 관백이 계승한 뒤에 곧 원여를 내쫓고 임신독을 친근히 하므로 원여의 당은 모두 벼슬길이 막혀서 감히 유관(儒官)이 사신과 교제하는 자리에 참예하지를 못하고 우삼동도 원여의 동학(同學)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마도의 기실(記室)로 있었다. 우삼동이 일찍이 말하기를,
백석공(白石公 원여의 호)이 만약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더라면 우리 무리도 또한 길이 트일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백석은 왜 벼슬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늙고 병들었다고 답하였다. 어느 곳에 사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집은 강호에 있는데 문을 닫고 일을 사절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일이 관백의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기휘(忌諱)하는 것이나 그 기색을 본즉 스스로 불평하였다. 국서를 전한 뒤에 나와서 우삼동에게 이르기를,
귀대군(貴大君 관백(關白))이 검소하고 간솔(簡率)하여 매우 임금의 도량이 있으니, 태평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덕은 그러합니다마는 자고로 어진 신하를 쓰면 다스려지고 간사한 신하를 쓰면 어지러운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뜻이 가리키는 바가 있는 듯하면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역참(驛站)으로 한 문사가 찾아와서 보고 필담으로 말하기를,
“공이 강호에 있을 때에 몇 사람의 문사(文士)를 보았습니까?”
하여, 답하기를,
임봉강(林鳳岡)의 제자 수십 명을 보았습니다.”
하니, 그 손은 또 써서 보이기를,
“내가 듣기로는 임봉강은 시문(詩文)이 치졸하다고 하던데 제자가 어찌 그리 많답니까?”
하였다. 나는 이미 그 눈치를 알고 곧 종이 끝에다 쓰기를,
“말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그 손은 앉은 자리 끝에다 직접 글자를 쓰기를,
“그들은 가소롭고 가소로운 자들입니다.”
하고, 스스로 필담한 종이를 찢어가지고 갔다. 아마 그도 역시 원여의 당으로써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인 듯 싶었다.

○ 내가 일본의 인물을 본 것이 관백 이하 대관(大官)ㆍ서료(庶僚)로부터 각종의 사람이 여러 천 명, 만 명만이 아닌데, 대저 그 인물들이 모두 정한(精悍)하고 긴착하고 민첩하고 몸은 짧고 작으며, 아이들은 살빛이 흰 것이 많고, 기품은 연약한 것이 많고, 말과 행동은 추솔하고 얕은 것이 많고, 한 사람도 걸출하고 웅장하여 바라보아 두려워할 만한 형상을 가진 자라곤 없었다. 그 지위가 집정(執政)에 이르고 부(富)로써 식읍(食邑)을 가져서 수천 석, 수만 석의 녹을 자손에게 전하는 자라면 비록 상법(相法)을 논하더라도 반드시 그 천창(天倉)명록궁(命祿宮)이 높고 후하고 광명(光明)하여, 한번 보면 곧 알만한 것이 있는 것인데 지금 본즉 그들이 천박(淺薄)하고 못나고 누(陋)하게 생긴 것이 열에 팔구가 되고 또 그 성정(性情)을 논하면 대개 속은 조급하고 밖은 박한 것이 많아서 자기에게 이익이 있으면 기뻐서 참새처럼 뛰어 폐간(肺肝)이 다 드러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떠들며 날뛰어 생사를 모른다. 대하여 말할 적에는 여우가 얼음 밑 물소리를 듣는 것 같고, 일을 만날 때에는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항거함과 같아서, 모두 새나 쥐의 창자로써 사람 쏘는 벌[蜂]떼의 성을 분발(奮發)하고 한 사람도 넓은 도량으로 중한 인망을 지닌 자가 없다. 그들이 가강(家康) 이후로 국토가 완전하고 군사가 정강(精强)하여 국중에 변란이 없어 인구의 많음과 국고의 풍부함이 근일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으므로 비록 젖내나는 작은 아이라도 태연히 높은 지위에 있어 높고 화려한 궁궐과 비단 장막, 좋은 음식의 안일함을 대대로 전하여 끊이지 아니하여 그 마음이 안락한 생활에 익어서 혹 사변이 있을 것만 두려워하는데, 무슨 다른 계책을 도모하겠는가. 내가 추측하건대, 인간에 액운이 닥쳐서 수길ㆍ청정과 같은 적이 다시 그 땅에 나지 아니한다면 우리 국가 변방의 걱정은 만(萬)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관시(關市)를 통한 이래로 대마도의 교활하고 간사한 것이 한이 없어 관역(館驛)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많은데도 조정에서는 매양 은혜로 후하게 대접하여 조그마한 섬의 장(長)으로 하여금 반드시 호리(毫釐)를 다투어 이기고야 말도록 만들었으니, 실무(實務)를 아는 이는 마땅히 보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사신이 기해년 4월 11일에 조정에 하직하여 9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2일(신유)에 배를 타고 떠나서 9월 4일(계유)에 대판성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라 27일에 강호에 도착하였고, 11월 4일에 도로 대판성에 당도하여 다시 배를 타고 경자년 정월 6일(계유)에 부산에 돌아와 닿았고, 24일에 복명(復命) 하였다. 내왕을 통틀어 계산하면 수로(水路)가 5천 2백 10리고, 육로가 1천 3백 50리요, 왕복한 날수는 2백 61일이 되는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의 병든 자도 없었으며, 하루 동안의 풍파의 액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처음에 내가 영가대(永嘉臺)에 바람을 빌 때에 재계하고 목욕하던 밤 꿈에 한 휼륭한 장부가 유(酉)라는 한 글자를 크게 써서 나에게 보이므로 깨어서 괴이히 여겨서 나의 본명(本命)이 신유(辛酉)이므로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신유일에 순풍을 만나 배를 출발시켰고, 계유일에 대판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랐으므로 마음으로 다행히 여겼다. 돌아올 때에 대마도에 당도하여서는 미리 동료(同僚)에게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는 마땅히 정월 6일이라야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
하였더니, 과연 6일 계유일에 서박포(西泊浦)로부터 문득 순풍을 만나서 돛을 걸고 바로 왔다. 모든 동료들이 놀라며 기뻐하여 나에게 돌아보고 말하기를,
“군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
하였다. 사신이 또한 듣고 괴이히 여겼다. 대개 영가대 위의 꿈에 유자(酉字)를 얻어서 배가 출발하였으며, 대판에서 육지에 오른 것과 부산에 돌아와 댄 것이 모두 유일(酉日)이니, 이것은 용부(龍府)의 어른이 글자를 써서 나에게 고한 때문인가, 또한 한 가지 특이한 일이었다.


[주-D001] 황옥좌둑[黃屋左纛] : 
남월왕이 자기 본국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황옥대둑[黃屋大纛]을 탔다. 황옥대독은 황제만이 타는 수레다.
[주-D002] 경저(京邸) : 
지방에 있는 봉후(封侯)가 수도(首都)에 두고 있는 저택(邸宅)이다.
[주-D003] 홍법대사(弘法大師) : 
일본의 중 공해(空海)의 시호(諡號)다.
[주-D004] 호백구(狐白裘) : 
   맹상군(孟嘗君)이 진(秦)에 가서 구금(拘禁)되었을 때에 보물인 호백구(狐白裘)진왕의 총희(寵姬)에게 바치고 풀려 나왔다. 호백구란 여우의 겨드랑이 밑 흰털 있는 가죽을 모아서 만든 옷이다.
[주-D005] 기린굴(麒麟窟) : 
고구려(高句麗) 동명왕(東明王)이 하늘에 올라간 자리인데, 평양에 있다.
[주-D006] 분야(分野) : 
하늘에 있는 별들이 각 지방을 나누어 맡은 것을 분야라 한다.
[주-D007] 만파식곡(萬波息曲) : 
   신라 신문왕이 이상한 대[竹]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불면 적병이 퇴각하고, 병이 낫고, 바람이 순하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한다. 그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주-D008] 십이루(十二樓) : 
천상의 옥경(玉京)에 12루가 있다 한다.
[주-D009] 여주(驪珠) : 
바다 속에 있는 여룡(驪龍) 턱 밑에 있는 보배 구슬.
[주-D010] 홍교(洪喬)의 버림 : 
   진(晉) 나라 은홍교(殷洪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중도에 편지를 물에 던지며, “뜰 것은 뜨고 잠길 것은 잠겨라. 나는 편지 전하는 우(郵)가 될 수 없다.” 하였다.
[주-D011] 패교 : 
패교는 당 나라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데, 사람을 그곳에서 송별하였다.
[주-D012] 재택 : 
진(晉) 나라 부호(富豪) 석숭(石崇)의 별장이 있는 금곡(金谷)이다.
[주-D013] 평원의 열흘 동안 일 : 
진왕(秦王)조(趙) 평원군(平原君)을 청하여 10일 동안 술을 마시자 하였다.
[주-D014] 청전선(靑錢選) : 
나라 장작(長鷟)이 문장을 잘하므로 사람들이 청전만선(靑錢萬選)이라 하였다. 청동전(靑銅錢) 만 개를 뽑아내어도 다 좋다는 뜻이다.
[주-D015] 석상진(席上珍) : 
예기(禮記)에, “유(儒)는 석상(席上)의 진(珍)이 있다.” 하였다.
[주-D016] 삼동의 문사 : 
동방삭(東方朔)상서(上書)삼동(三冬)에 문사(文史)를 공부하였다 하였음.
[주-D017] 푸른 눈알 : 
진(晉) 나라 완적(琓籍)이 눈으로 청안(靑眼) 백안(白眼)을 잘 만드는데, 뜻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푸른 눈알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흰 눈알을 하였다.
[주-D018] 신유(申繻)는 장래를 아는 식견이 있고 : 
노 환공(魯桓公)부인 강씨(姜氏)와 처가인 제국(齊國)에 가는데 신유(申繻)가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하였더니, 그 예언이 과연 맞았다.
[주-D019] 명도(明道)는 본래 온순 : 
명도(明道)는 나라 정호(程顥)인데, 자질이 온순한 사람이다.
[주-D020] 석상진 : 
예기(禮記)에, “유(儒)는 석상(席上)의 진(珍)이 있다.” 하였다.
[주-D021] 일산을 기울이니 : 
길에서 처음 만나 서로 일산[蓋]을 기울이고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주-D022] 사귀는 정이 절로 담박하고 : 
예기“군자의 사귀는 것은 담박하기 물과 같고, 소인이 사귐은 달기가 단물과 같다.” 하였다.
[주-D023] 목격에 의하여 친해지네 : 
   장자(莊子)온백설자(溫伯雪子) 공자를 만나서 쳐다만 보고 말을 하지 아니하니, 공자가 말하되, ‘이 사람은 눈이 부딪치면[目擊] 도가 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24] 하늘에 드리운 날개 : 
장자 “붕새[鵬]의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하였다.
[주-D025] 용을 타고서 : 
주역 건괘(乾卦) “여섯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하였다.
[주-D026] 위수(渭水)의 나무 : 
   두보(杜甫)이백(李白)을 생각한 시에, 위북춘천수(渭北春天樹), 강동일모운(江東日暮雲)이란 글귀가 있는데, 위북은 자기가 사는 곳이요, 이백은 강동에 있었다.
[주-D027] 교칠 : 
고시(古詩)에 “아교[膠]를 칠(漆) 속에 던진다.”는 글귀가 있는데, 친구의 우정이 그처럼 단단하게 합하여 뗄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28] 금란 : 
주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예리하기가 쇠[金]를 끊을 수 있고, 그 향내가 난초와 같다.” 하였다.
[주-D029] 정정(程鄭) : 
한대(漢代)에 주철업(鑄鐵業)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
[주-D030] 과군(寡君) : 
타국 사람을 상대할 때 자기의 임금을 칭하는 말이다.
[주-D031] 관반(館伴) :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할 때에 사신의 관(館)에서 접대를 맡은 사람.
[주-D032] 조(趙) 나라 옥 : 
조왕(趙王)초국(楚國)의 보옥(寶玉)을 얻었더니, 진왕(秦王)이 그것을 탐내서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는 고사.
[주-D033] 일명(一命) : 
주(周)의 관직의 등급에 1명으로부터 9명까지가 있는데, 1명이 최하의 낮은 벼슬이다.
[주-D034] 형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 어렵다 : 
   한 나라의 진식(陳寔)의 두 아들이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인데, 두 사람의 아들들이 서로 자기 아버지가 승하다고 다투어 조부에게 물었더니, 조부는, “원방이 형 되기 어렵고 계방이 아우 되기 어렵다.” 하였다.
[주-D035] 은(殷) 나라 예(禮)를 말할 만하니 : 
공자가, “은 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은의 후손인 송 나라에 고증할 수 없는 것은 문헌(文獻)이 부족한 때문이다.” 하였다.
[주-D036] 신(申)을 두 번째 낳았구나 : 
시경(詩經)에, “악(岳)의 정기로 신(申)을 낳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 재상 신보(申甫)를 칭찬한 말이다. 여기서는 유한(維翰)의 성이 신(申)이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37] 망형(忘形) : 
노인과 소년이 서로 벗하는 것을 망형(忘形)이라 한다. 그것은 서로 나이의 차이를 잊는다는 뜻이다.
[주-D038] 내구(耐久)의 교분 : 
오래도록 변치 않는 친구를 내구붕(耐久朋)이라 한다.
[주-D039] 선가(禪家)의 정혜(定慧) : 
불교의 수행(修行)에 정(定)과 혜(慧)가 있는데, 정은 마음이 안정되어 고요하며 맑은 것이요, 혜는 밝은 지혜다.
[주-D040] 신광(神光)이 세 번 절하고 분명히 받아서 : 
선종(禪宗)의 이조(二祖) 신광이 스승인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받아 전하였다.
[주-D041] 문자반야(文字般若) : 
문자(文字)를 통하여 지혜[般若]를 얻는 것.
[주-D042] 연석(燕石) : 
연석(燕石)은 옥과 비슷하나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주-D043] 소학(小學)의 목차(目次) :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의 목차는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가언(嘉言)ㆍ선행(善行)으로 되었다.
[주-D044] 공정(空丁) : 
병역(兵役)이나 납세(納稅)에서 빠진 사람.
[주-D045] 죽지사 : 
지방의 풍속을 읊은 시.
[주-D046] 전왕의 쇠뇌 : 
오월왕(吳越王) 전규(錢鏐)가 쇠뇌로써 항주(杭州)의 조수(潮水)를 쏘았더니, 조수가 물러가서 후일에 수환(水患)이 없어졌다 한다.
[주-D047] 매화 심던 처사(處士) : 
나라 때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매화를 많이 심고 숨어 살던 임포(林逋)를 말한다.
[주-D048] 천창(天倉) : 
관상법(觀相法)에 이마를 천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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