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8도(道) 66주(州) 6백 34군(郡)이 있었는데, 용명천황(用明天皇) 시대에 5기(畿) 7도(道)로 정하였고, 문무천황(文武天皇) 때에 나누어 66국(國)으로 만들었으니 산성(山城)ㆍ태화(太和)ㆍ하내(河內)ㆍ섭진(攝津)ㆍ화천(和泉)은 곧 기내(畿內) 5국이요, 이하(伊賀)ㆍ이세(伊勢)ㆍ지마(志摩)ㆍ미장(尾張)ㆍ삼하(參河)ㆍ원강(遠江)ㆍ준하(駿河)ㆍ이두(伊豆)ㆍ갑비(甲斐)ㆍ상모(相模)ㆍ무장(武藏)ㆍ안방(安房)ㆍ상총(上總)ㆍ하총(下總)ㆍ상륙(常陸)은 곧 동해도(東海道) 15국이요, 근강(近江)ㆍ미농(美濃)ㆍ비탄(飛驒)ㆍ신농(信濃)ㆍ상야(上野)ㆍ하야(下野)ㆍ육오(陸奧)ㆍ출우(出羽)는 곧 동산도(東山道) 8국이요, 약협(若狹)ㆍ가하(加賀)ㆍ월전(越前)ㆍ월중(越中)ㆍ월후(越後)ㆍ능등(能登)ㆍ좌도(佐渡)는 곧 북륙도(北陸道) 7국이요, 단파(丹波)ㆍ단후(丹後)ㆍ단마(但馬)ㆍ인번(因幡)ㆍ백기(伯耆)ㆍ출운(出雲)ㆍ석견(石見)ㆍ은기(隱岐)는 곧 산음도(山陰道) 8국이요,파마(播摩)ㆍ미작(美作)ㆍ비전(備前)ㆍ비중(備中)ㆍ비후(備後)ㆍ안예(安藝)ㆍ주방(周防)ㆍ장문(長門)은 곧 산양도(山陽道) 8국이요, 기이(紀伊)ㆍ담로(淡路)ㆍ아파(阿波)ㆍ찬기(讚岐)ㆍ이예(伊豫)ㆍ토좌(土佐)는 남해도(南海道) 6국이요, 축전(筑前)ㆍ축후(筑後)ㆍ풍전(豐前)ㆍ풍후(豐後)ㆍ비전(肥前)ㆍ비후(肥後)ㆍ일향(日向)ㆍ대우(大隅)ㆍ살마(薩摩)는 서해도(西海道) 9국이다.
그 지방을 말하면 동으로 육오(陸奧)에서부터 서로 비전(肥前)에 이르기까지가 4천 2백 리요, 남으로 기이(紀伊)에서부터 북으로 약협(若狹)에 이르기까지가 9백 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 육지가 서로 연한 땅이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있는 모든 도(道)의 영량(永良)ㆍ다미(多彌)ㆍ일수(一艘)ㆍ팔장(八丈)ㆍ증도(甑島)와 같은 등속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처럼 분포되어 지역이 혹 대마도보다 배나 되는 곳도 있으면서 모두 66주(州)에 들지 아니한 것인데, 서로의 거리는 또한 각각 수천 리가 된다. 도주(島主)가 된 자는 군(君) 또는 후(侯)라고 부르고 일본의 통치를 받아서 군대를 공급하고 군함을 연습한다. 그러므로 재화나 곡식과 같은 백 가지 토산물이 국중에 모여든다.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문득 황제(皇帝)라 칭하여 연호(年號)를 가졌고, 역서(曆書)를 따로 만들었으니 조타(趙佗)의 황옥좌둑[黃屋左纛]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지리(地理)를 논의하다가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육오주(陸奧州)는 넓고 크기가 가없어서, 북으로 하이도(蝦蛦島)와 접경이 되어 동서가 50일의 길이요, 남북이 60일의 길이 된다 하는데, 참으로 그러합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전하는 사람이 잘못 말한 것입니다. 육오주가 다른 주에 비하면 조금 크기는 하나 그 지방은 수일의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북쪽에 과연 하이도가 있는데 송전수(松前守)라 칭하는 자가 관리를 합니다. 본래 큰 지방이 아니며 토질이 나빠서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주민들은 얼굴이 검고 털이 있으며 글도 몰라서 동물과 같은데 다만 의복과 언어가 일본입니다.”
하였다.
○ 대마도에 있을 때에 멀리 바라보니, 동남 바다 위에 주먹 같은 섬이 있어 일기도(壹岐島)와 서로 대치한 듯 하였다. 이곳이 어느 지역인지를 물으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곳은 은려도(驢島)라 합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축전주(筑前州)의 관할에 속하는데, 대마도의 동쪽에 있어 수로(水路)로 6백여 리입니다.” 하였다.
○ 일본의 지형은 천지의 정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같으면서 조금 높다. 오직 대마도가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데 수로로 5백 리 거리에 불과하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으로 3천여 리를 가면 대판에 당도하고, 대판에서 또 동북으로 1천 6백 리를 가면 강호에 도착한다. 강호의 땅은 동남이 다 큰 바다로 그 북쪽의 육지가 멀어서 바로 야인(野人)의 경계에 이른다고 하니,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우리나라의 강원도 여러 고을이 일본의 산성(山城)ㆍ대화(大和) 등지와 서로 맞서고 강호 이상은 함경도의 육진(六鎭)에 맞먹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동쪽에 위치하여 해와 달이 뜨는 곳으로 가장 양명(陽明)함이 되고, 아무리 춥더라도 우리나라의 함경도와 같지는 않다. 사신의 행차가 10월에 강호에 머물렀는데도 추위와 물색(物色)이 우리나라 삼남(三南)의 9, 10월과 같았다.
○ 왜인이 말하기를,
“만약 육오(陸奧)로부터 바로 조선의 동북으로 오면 수로(水路)는 매우 가까우나 북쪽에 바람이 높고 바다에 섬들이 없으므로 배가 다니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수길(秀吉)이 조선을 침범할 적에 육오(陸奧)로부터 조선의 국경으로 나오려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구덩이가 3백 리나 되므로 대울타리[竹籬]를 펴고 군사와 말이 건너가려고 계획하였다가 마침내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족히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대개 지세를 논하면 가까운 지름길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예로부터 두 나라에서 한번도 길을 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험하고 어려움이 있는 때문이다.
○ 내가 우삼동과 필담(筆談)을 할 때에 묻기를,
“일본이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혹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된 괴이한 형상을 가진 이상한 무리들이 경내에 표류되어 온 일이 있는가?”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해외 여러 나라에서 장기로 찾아와 장사하는 이들은 아란타(阿蘭陀)와 서양국(西洋國) 사람들인데, 의복과 언어는 비록 같지 않으나 형상은 별로 다른 것이 없고, 단 10여 년 전에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배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왔기 때문에 그 배와 행장은 하나도 수습된 것이 없고, 한 남자가 언덕에 닿아 살아났는데 머리털은 긴데 거두지 아니하고 드리워서 이마를 덮었고, 두 다리는 모두 푸른빛인데 무릎에는 슬개골(膝蓋骨)이 없어서 모양이 죽간(竹竿) 같고, 오곡을 먹지 않고 소금 두어 되를 먹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은 때문에 마침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황경(大荒經)》에 현고국(玄股國)이 있다 하였는데 다리가 청색인 것은 현고라 할 수 있겠으나 다만 소금을 먹는다는 글이 없으니, 상고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또 묻기를,
“동해 가운데 여인의 나라가 있다 하니, 혹 보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이 바다 가운데 모든 나라로부터 수로로 통하는데, 만약 여인국이 있다면 천백 년 동안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어찌 그 사람을 한번도 본 이가 없겠습니까. 일본의 동남 바다 가운데 팔장도(八丈島)란 곳이 있어 땅이 크고 백성이 많은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는 열에 2, 3인밖에 되지 아니하므로 속칭 여자의 고을이라고 부르니, 옛말에 이른바, 여인국이란 것이 여기에서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상고에 신인들이 기록한 것은 모두 바다 섬의 원시 시대를 말한 것이므로 그 지방의 풍속과 인물이 혹 근사한 대로 이름을 지었지만, 지금은 풍속과 습성이 변하여 백 가지에 한 가지도 맞는 것이 없다. 수길이 통합한 이후로부터 모두 나라가 일본에 통합된 중에 반드시 옛날의 그러한 종류들이 많았을 것이다.
○ 내가 묻기를,
“기이주(紀伊州)에 서불(徐巿)의 무덤과 서복(徐福)의 사당이 있다 하는데 서복 등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진시황(秦始皇)이 책을 불태우기 전이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고문(古文)의 진본이 있다 하는데, 지금 수천 년에 이르도록 그 글이 천하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이 말은 허황한 것입니다. 구양수(歐陽脩)도 이런 말을 한 바가 있으나 모두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입니다. 대저 성현의 경전은 천지간에 지극한 보배로서 귀신도 그것을 능히 감추지 못하므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혹 노(魯) 나라 벽에서 나오고 혹은 대항두(大杭頭)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본이 비록 멀리 바다 가운데 있으나 그 책이 있다면 반드시 나올 이치가 있고, 일본의 인심이 자랑하기를 좋아하는데, 만약 옛 성인의 남긴 책이 홀로 이 땅 위에 감추어져 있어 천만 세의 보배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비록 국법을 엄하게 세워도 그것을 외국에 파는 것을 금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책의 파는 것을 금한 일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겠습니까.”
하였다. 서복이 바다에 들어온 뒤에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세상에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복의 자손이 지금 왜황(倭皇)이 되고, 5백 명의 동남 동녀는 각각 씨족(氏族)이 되어 왜국이 생겼다.”
하니, 이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대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토지가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임금이 있기 마련이다. 왜국의 땅이 모든 섬을 합병하여 자못 수천만 리가 되어 아름다운 산, 고운 물, 기름진 토지에 백가지 곡식이 풍부하고 만 가지 보화가 자연스럽게 나는데, 이것이 어찌 진 나라 시대를 기다려서 사람이 있게 된 것이며 서복을 기다려서 임금이 있겠는가. 서복의 부자가 본시 방외(方外)의 이인(異人)으로서 바다 가운데 살 만한 땅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진 나라를 피할 꾀를 내어 불사약을 캔다는 말로서 진시황을 달래어 배와 동남 동녀를 얻어가지고 간 것이다. 그때에 중국에서는 왜라는 땅이 있고 그 땅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복이 일본에서 살다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것은 믿을 만하나, 지금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그 자손이다거나, 5백 명 남녀의 후손이 다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시대가 멀어서 알 수가 없다.
○ 국중에 이름난 산수를 내가 왕래하면서 본 것은 부사산(富士山)ㆍ비파호(琵琶湖)보다 큰 것이 없고, 영(嶺)의 험한 것으로는 홀로 상근령(箱根嶺) 같은 것이 없다. 기타 애탕산(愛宕山)ㆍ접침령(摺針嶺)ㆍ금절하(金絶河)ㆍ육향강(六鄕江)의 등속은 모두 논할 것이 없고, 육오(陸奧)의 금화산(金華山), 하야(下野)의 일광산(日光山), 이세(伊勢)의 열전산(熱田山), 기이(紀伊)의 웅야산(熊野山)은 모두 명산으로 드러났으나,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왜인의 풍속이 거짓이 많고 허황하여 신이(神異)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여 이르기를,
“부사산은 하루에 절로 솟아났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에 절로 열렸으니, 이것은 신령의 조화로 설치된 것이므로 사방에서 유람하러 오는 자가 반드시 재계한 뒤에야 앙화를 면하는데, 부사산은 재계를 열흘 동안 하여야 되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 재계를 하여도 된다.”
하여, 내가 듣고 웃기를,
“만약 그렇다면 부사산 비파호 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흙 한 줌, 돌 한 덩이가 조화의 신이 만들지 아니한 것이 어느 것이 있는가.”
하였다. 또 들으니,
“열전산(熱田山)에는 태진원(太眞院)이 있다.”
하였다. 이것은 당 명황(唐明皇)이 꿈에 태진원에서 놀았다는 말을 빙자하여 열전산을 봉래산(蓬萊山)으로 삼으려고 궁관(宮觀)을 지어서 신선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웅야산(熊野山)의 서복사(徐福祠)도 또한 이런 종류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 국중의 모든 산이 동북에서 시작하였으므로 그 지세를 보면 역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대저 산의 형상이 수려(秀麗)하여 높고 큰 산이라도 반드시 기이하고 곱고 뾰족하여 웅장하여 험하고 원대한 형세가 없고, 그 밖에는 낮은 산이 들을 안았고 얕은 멧부리가 돌아서 거의 다 명랑하고 곱고 산뜻하여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고, 물도 또한 근원이 크지 않고 빙빙 돌고 맑고 푸르러서 파서 만든 것과 같다. 그 인물들이 민첩하고 명석한 자는 많은데 질박하고 두터운 자는 적으니, 대개 강산의 기운을 얻은 때문이다.
○ 일본의 역법(曆法)이 우리나라와 더불어 대동소이한데 자기네가 말하기를, 그 땅이 해 뜨는 동쪽에 있으므로 밤낮의 길고 짧은 것이 같지 아니하고 달의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틀림이 있다 한다. 내가 일찍이 그 동지(冬至)를 본 즉, 우리의 동지와 하루를 두고 먼저하고 뒤에 두는데, 섣달 그믐날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날과 달은 혹 틀리면서 해[歲]는 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 성여필(成汝弼)이 천문관측을 할 줄 알아서 바다 위에서 별을 바라보다가 가리켜 말하기를,
“남방 칠수(七宿) 밖에 여러 큰 별이 있는데, 이것은 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하던 바이니, 아마 이것은 노인성(老人星)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옛말에, ‘노인성을 보는 자는 수(壽)가 백 살 넘는다.’ 하는데, 지금 그대는 이번 걸음에 오래 살게 되었구나.”
하였다. 이장흥 사성(李長興思晟)은 또한 천문을 아는 사람인데, 말하기를,
“천문서(天文書) 가운데 노인성은 현증(現證)이 없다.”
하였다. 우삼동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는 천문가[甘石]의 말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이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으나 능히 별[星] 분야(分野)의 법으로써 국내의 모든 주(州)에 배정하여 각각 별과 지방의 정한 위치가 있어 국사에 기록되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지방의 길하고 흉한 것이 또한 능히 그럴 듯하게 징험이 있는 것이 중국 사람의 별 분야의 말과 같은 점이 있으니, 그 이치를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말이 심히 우습다. 그러나 천문의 별이 다만 중국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즉, 중국 구주(九洲) 밖에 천문의 분야로서 자기 국토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또 홀로 일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사시의 명절은 우리나라와 서로 같은데, 8월 초하룻날과 10월 초하룻날도 또한 속절(俗節)이 되고, 단오와 백중날이 가장 가절(佳節)이 된다. 단오에는 집집마다 기를 세워서 전쟁을 익히는 장난을 하니, 우리나라의 두 남자가 씨름을 하는 종류와 같은 것이다. 백중날에는 산에 올라가 등을 달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는데, 한 사람이 각각 등 하나씩 달아서 자손이 많은 자는 혹 수십 등에 이른다. 술과 음식을 많이 갖추어 집안 사람을 먹인다.
○ 겨울 추위가 맹렬하지 아니하여 예로부터 눈이 한 자 되도록 쌓일 때가 없고, 국가에도 얼음을 저장하는 법이 없다. 유일하게 부사산 상봉에는 사계절 내내 얼음이 있으므로 단옷날에 그것을 캐다가 천황과 관백의 궁에 바친다. 서민들은 얼음 모양의 떡을 만들어 그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막는 방법이라고 하니, 가소롭다.
○ 육오주(陸奧州)에는 황금이 난다. 금산(金山)이 바다 가운데 있는데 금을 캐는 자는 반드시 재계 목욕하고 신에게 제사지내어, 금 몇만 근(斤)을 얻겠다고 청한 후에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그 수량을 초과하면 반드시 그 배가 파손된다. 석견(石見)ㆍ좌도(佐渡)ㆍ단마(但馬) 등의 주에는 은이 생산되고, 비중(備中)ㆍ파마(播摩)에서는 구리쇠가 생산되고, 풍전(豐前)ㆍ풍후(豐後)에서는 철(鐵)이 생산된다. 섭진주(攝津州)에는 목화가 많고, 월전주(越前州)에는 흰 솜[綿]이 많고, 축전주(筑前州)에는 미곡(米穀)이 많고, 상모주(相模州)에는 재목이 많다. 일기(壹岐)의 포(布), 가하(加賀)의 비단, 미농(美濃)의 종이, 적관(赤關)의 벼루, 삼원(杉原)의 술, 우치(宇治)의 차(茶), 도포(韜浦)의 돗자리는 모두 국중의 명품이다. 갑비(甲斐)에서는 말이 나는데, 대부분 준마들이다. 총과 갈기를 깎아버리고 발에다가 짚신을 신겨서 다니게 한다. 장문주(長門州)에서는 소가 나는데 몸이 작고 색은 검다. 여기는 소를 잡는 법이 없는데도 산출되는 소가 농장에도 넉넉히 공급되지 못한다. 비전(備前)ㆍ미장(尾張)ㆍ살마(薩摩) 등 주에는 긴 창과 예리한 칼이 생산되어 천하의 좋은 기물이 되었다.
○ 바다에서 나는 어류 품종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동해의 어류와 같은데, 석결명(石決明)이 많고, 청어(靑魚)ㆍ대구어(大口魚)ㆍ연어(連魚)ㆍ송어(松魚)ㆍ문어(文魚)ㆍ고도어(古刀魚)는 다만 북륙도(北陸道)와 산음도(山陰道)에서만 생산되고, 산돼지[山猪]고기, 노루[獐]고기, 사슴고기 및 그 피물(皮物)들은 북쪽에는 천하고 남쪽에는 귀하다. 채소는 각종이 우리나라와 같은데, 무 뿌리는 길이가 한 자를 넘으나 맛이 없다. 토란[芋]은 그 큰 것은 사발만 하므로 쪼개어 구워서 시장에 팔곤 하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사먹고 요기를 한다. 과일의 종류는 귤과 유자가 가장 많아서 가는 곳마다 숲이 되었고, 감자(柑子)의 작은 것은 밀감이라 하는데, 맛이 달기 때문에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다. 그 크기가 주먹만한 것은 이름을 구년모(九年母)라 하는데, 옛적에 구년모라는 어떤 노파가 맨 처음 심었다 하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금귤(金橘)은 색깔과 향기가 모두 아름다우나 맛이 시어서 먹을 수 없고, 기타 배ㆍ대추ㆍ복숭아ㆍ오얏ㆍ밤 등속은 다 우리나라와 같다. 참외는 모양이 길고 맛이 싱거우며, 수박은 속이 붉고 맛이 달다. 화초는 국화가 제일 번성하고, 매화와 대가 그 다음이다. 사앵(絲櫻)ㆍ다화(茶花)ㆍ비파(枇杷)ㆍ소철(蘇鐵)ㆍ종려(棕梠)가 다 명품이며, 동백은 집집마다 다 심어서 기름을 짜서 팔아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다. 사앵화(絲櫻花)는 잎이 엷고 가늘고 길며, 가지가 하늘거려 수양버들과 같고 또 해당(海棠)으로써 수사(垂絲)한 것이 있는데, 붉은 실로 구슬을 꿴 것 같아서 주렁주렁한 것이 사랑스럽다. 다화는 한겨울에 번성하게 피고, 비파는 겨울에 꽃이 피어 여름에 열매가 여니 또한 이상한 물건이었다.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는 과일은 백자(柏子)와 호두[胡桃]이며, 새는 꾀꼬리ㆍ까치ㆍ매ㆍ새매[鸇]이며, 짐승은 범ㆍ표범이 없다. 약에는 인삼이 없고, 음식에는 벌꿀이 없다. 이 두 가지는 다 우리나라에서 얻어다 쓰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음식을 달게 하는데는 모두 설탕을 타고, 촛불은 고래 기름과 나무의 즙을 쓴다. 후추[胡椒], 단목(丹木), 설탕, 화탕(花糖), 흑각(黑角)과 공작의 날개 등은 다 일본의 토산이 아니라 혹 중국의 복건(福建) 또는 절강(浙江)에서 나거나 혹은 남만 여러 나라에서 나는 것들이다. 이것을 그 나라 바다 상인들이 장기도에 내왕하여 금은과 무역해 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얻어다가 동래(東萊)에 팔곤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일본의 특산물이라고 부른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감자를 먹다가 묻기를,
“이 물건은 우리 남방 해읍(海邑)에도 간혹 있고, 제주(濟州)에는 생산이 많아서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는데, 그 맛이 다 귀국의 감자와 같지 않습니다. 감자도 또한 아름다운 종자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답하기를,
“좋고 나쁜 것이 각각 토질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귀국의 배가 남도(藍島)에 표류하여 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탔던 사람과 실렸던 물건은 이미 침몰되고 홀로 부서진 배의 남은 목판에서 감자 한 상자를 얻었는데, 상자 위에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제주 목사가 공물로 바친 것이었습니다. 관청에서 조정에 아뢴 뒤에 그 상자를 열어보니, 감자는 모두 부패하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섬 가운데 사람들이, 그것을 타국의 물건이라고 귀중히 여겨 그 씨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가 성장하자, 이름을 제주감자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른바 제주감자란 것이 맛이 달고 품질이 좋기가 일본의 감자와 구별이 없습니다.”
하였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한 왜인이 필담으로 묻기를,
“일본에 범과 표범이 없으므로 그 형상은 알지 못하거니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나운 어금니와 갈퀴 발톱으로 사람을 잡아먹곤 하며 한번 포효하면 산골이 찢어지는 듯하여 오확(烏獲)과 맹분(孟賁)같은 용사도 감히 앞에서 맞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귀국에서 범ㆍ표범 가죽을 많이 쓰는데 어떤 방법으로 잡습니까?”
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지간에 사람을 먹는 짐승이 사람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 없음이 마치 하육(夏育)ㆍ태사교(太史噭)가 보통 사람에게 목숨을 잃은 것과 같으니, 이것이 진실로 이치이다. 우리나라에서 범ㆍ표범을 잡는 데는 혹은 함정으로, 혹은 조총과 화살로써 하고, 서북도 변방에 재관(材官) 용사들은 모두 철갑(鐵匣)을 팔에 끼우고 능히 손으로 쳐서 잡는 것이 많다. 또 범을 먹는 짐승이 있어 이름을 비(羆)라 하는데, 이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두려운 바가 없다.”
하니, 여러 왜인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일본에는 다만 범ㆍ표범만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곰이나 비(羆)나 늑대와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부드럽고 약하여 간사한 꾀는 잘 내면서 위무(威武)에는 부족하므로, 나의 말을 듣고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 왜인이 또 묻기를,
“귀국의 인삼은 성분과 맛이 천연으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인력으로 만드는 수가 있습니까?”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약 성분은 천연으로 된 것이 귀중한 것이므로 독이 있는 약을 법제(法製)하는 외에는 그 성분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영약인데 어찌 인력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였다. 왜인이 말하기를,
“일본에도 또한 그런 풀이 있는데, 줄기와 잎과 뿌리가 한결같이 인삼과 같은데도 먹으면 맛이 없고 또한 그 효력이 없으므로 조선의 인삼은 만드는 방법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더니,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보니, 일본에서 나는 것은 필시 사이비(似而非)한 것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 내가 보건대, 왜인들이 사용하는 기명(器皿) 백물이 검은 칠 한 것이 반짝거려 거울과 같고, 궁실과 선판(船板)ㆍ다리ㆍ가마 같은 데도 또한 반드시 칠을 하였는데, 칠빛이 반짝거려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만약 그것이 오로지 옻나무 액을 가지고 이와 같이 광채나게 바른다면 서민의 집에도 한 해에 소용되는 옻나무 액이 아마 몇 말은 될 것이며, 공후(公侯) 귀인은 마땅히 열 섬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과한 동리나 산과 들에는 또한 칠림(漆林)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괴이하게 여겨 왜인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푸른 감을 두드려 즙을 짜서 깊이 잘 간직하면 해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데, 일본의 칠하는 법은 먼저 감즙을 가지고 바르고 재삼 발라 말린 다음 팽엽(彭葉)으로 갈[磨]면 그 빛이 환하게 되는데, 그런 뒤에야 옻칠을 하기 때문에 옻칠을 적게 하여도 색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 음식의 제도는 밥은 두 홉에 지나지 않고, 반찬은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아니하여 극히 초라하다. 먹는데 따라 다시 보태어 남는 것이 없게 하고, 밥 먹은 뒤에 청주를 마시고 다음에는 과실을 먹으며 과실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시고 파한다.
술은 제백(諸白)을 상품으로 삼는데, 백미와 누룩을 가지고 백미밥에 섞어 만드는 것이므로 제백이라 한다. 매주(梅酒)ㆍ상주(桑酒)ㆍ인동주(忍冬酒)ㆍ복분주(覆盆酒)는 맛이 아름답고 향기가 강렬하다. 연주(練酒)는 우리나라의 이화주(梨花酒)와 같다. 장(醬)은 콩과 누룩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맛은 약간 시고 빛깔은 거칠다.
떡은 우리나라의 인절미와 같은 것이 매우 많고, 소종(篠粽)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권무병(拳拇餠 가래떡)과 같이 만들어 댓잎에 싸서 쪄서 형상이 죽순과 같으며 열 개를 1파(把)라 한다. 외랑병(外郞餠)이란 것이 있는데 소종과 대략 같다.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모가 있고 마디가 나고 색은 붉고 맛은 단데 댓잎으로 싸서 형상이 죽간(竹竿)과 같으므로 남에게 선사하는 자는 일간(一竿), 이간(二竿)이라 한다. 또 만두(饅頭)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 상화병(霜花餠) 같은데 겉은 희고 안은 검고 맛은 달다. 양명당(養命糖)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백탕(白糖)과 같은데 부드럽고 들러붙지 않는다. 구비이(求肥飴)란 것이 있는데 흑당(黑糖)의 종류로써 약을 달여서 만든 것과 같고, 천야이(淺冶飴)란 것이 있는데 천문동(天文冬)에 설탕을 탄 것이요, 당고(唐糕)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의 설고(雪糕)와 같은데 엿을 타서 맛이 달고 참깨로써 입혔는데 먹으니 가장 아름답다.
또 변과자(卞果子)란 것은, 왜속에 간(乾)을 변(卞)이라 한다. 대개 간(乾)자의 반자(半字)를 쓴 것이다. 설탕물에다가 쌀과 누룩 가루를 섞어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어 크고 작은 것이 섞였고, 그 색은 푸르고 붉고 아롱지고 희고, 혹은 금과 은을 칠하여 우리나라 빙사과(氷沙果)ㆍ약과(藥果)의 종류와 같은 것인데 기름으로 굽지 않았다.
국수는 사면(絲麪)과 삭면(索麪)이 있으니, 약간 가는 것은 삭면이라 하고, 지극히 가는 것은 사면이라 하는데 칡가루에다가 메밀을 섞어 만들어서 가닥이 길어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접어서 사리[卷]를 만들었고, 국물에 타서 빛깔이 흰데 맛이 좋다. 떡국[湯餅]은 찹쌀떡 둥글고 두터운 것 두 가락을 가지고 그릇에 넣어서 물과 장을 탄 것인데, 조금 신맛이 있으나 먹을 만하였다.
○ 찬품(饌品)은 삼자(杉煮)로서 아름답다 하는데, 어육(魚肉)과 채소 백 가지 물건을 섞어서 술과 장을 타서 오래 달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잡탕 등속과 같은 것이다. 옛적에 여러 왜인들이 삼목(杉木) 밑에 비를 피하다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생각하여 각기 가진 바 물건을 가지고 한 그릇에 집어넣어 삼목을 가지고 불을 때어 달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으므로 인하여 삼자(杉煮)라 하였다. 왜인의 방언(方言)에 삼목을 승기(勝技)라 하므로 속(俗)에 이 음식을 승기야기(勝技冶技)라 하니 야기는 굽는다는 말의 와음(訛音)이다.
어품(魚品)은 박지(粕漬)로써 아름다운 것을 삼는데 생선을 술찌꺼기에 담가서 맛이 익으면 깨끗이 닦아 마치 우리나라 식염어(食鹽魚)와 같은 종류이고,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또 변갱(卞鰹)이란 것이 있는데 형상이 소뿔과 같아서 단단하여 부수기가 어렵다. 그 육질을 보면 우리나라 고등어의 살 두터운 것을 두들겨 합하여 만든 것인 듯하다. 왜인들이 반드시 국을 끓이거나 면탕을 할 때에 칼로 다져 가루를 만들어 조미료로 쓴다. 대구어는 설(鱈)이라 하고, 은구어(銀口魚)는 조(鰷)라 하고, 도미어(道味魚)는 조(鯛)라 하고, 고등어는 점(鮎) 혹은 정(鯖)이라 하고, 방어(魴魚)는 홍어(紅魚) 또는 사(鰤)라 하고, 연어(鰱魚)는 규어(鮭魚)라 하고, 적어(賊魚)는 갈(?)이라 한다. 마른 것을 변(卞)이라 하고 생 것을 선(鮮)이라 하고, 소금에 담근 것은 염지(鹽漬)라 하고, 술 찌꺼기에 담근 것은 박지(粕漬)라 한다. 이 밖에 물새를 털 그대로 말리고, 바다 소라를 그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삶아서 금과 은으로 점을 찍고 도금해서 연회의 화려한 음식으로 삼았다.
○ 음식을 담는 그릇은, 삼중(杉重)이란 것이 있는데 일조(一組)에 삼목판(杉木板)으로써 삼층의 합을 만들어서 위에는 떡 등속을 넣고, 가운데 함에는 과실과 나물을 넣고, 아래층에는 어육을 넣고 아롱진 실로 노끈을 짜서 그 허리에 매었다. 회목(檜木)으로 만든 것은 회중(檜重)이라 하고, 백목(柏木)으로 한 것은 백절(白折)이라 하고, 채색을 한 것은 화절(花折)이라 한다. 2층 대합(大榼)은 주(橱)라 하는데 술을 선사할 때는 1하(一荷), 2하(二荷)라 한다. 왜인들이 물건을 운반할 때는 반드시 어깨에 메는데, 멜 때는 앞뒤에 두 통이므로, 1하라고 하는 것은 두 통의 술이다. 기타 국이나 밥이나 술과 과실을 담는 보통의 기명(器皿)은 다 붉은 칠, 검은 칠을 한 나무 그릇을 쓰고, 혹 백철기(白鐵器)가 있고 원래 유기(鍮器 놋그릇)는 없다. 연회에 술을 붓는데는 토배(土杯)를 쓰는데, 붉은 식토(埴土)로 만든 것으로서 형상이 접시와 같아 제도가 매우 질박하고 누추하였다. 위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민간에 이르기까지 이 잔으로 술을 수작하여 존경하는 것이라 하니, 그 뜻이 대개 주인과 손과의 사이의 예의는 성실함과 공경함을 위주로 하는 것이므로 헛 문채를 꾸미지 아니하고 예스럽고 질박함으로써 보여서 주인과 손과의 술자리에 쓰는 것이라 한다.
○ 국중에 귀하고 천한 남녀가 하나도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반드시 다탕(茶湯)을 마신다. 곧 집집마다 차(茶)를 저축하기를 곡식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차는 곧 작설(雀舌)의 종류인데, 혹 푸른 싹을 따서 두들겨 말리어, 가늘게 가루를 만들어 더운 물에 타서 마시고 혹은 긴 잎으로 더운 물에 끓여서 찌꺼기를 건지고 마시는데, 매양 식후에 반드시 한 사발씩 들이킨다. 시가와 길가에도 화로를 설치하여 차를 끓이는 사람이 천 리에 서로 바라볼 만큼 있었다. 사신 행차 대소 수백 인이 날마다 공급 받는 것이 각각 청다(靑茶) 한 홉, 엽차 한 묶음이요, 지나가는 곳마다 관(館) 가운데 따로 차 끓이는 중[僧]을 두어서 낮과 밤으로 물을 끓여 놓고 기다리게 한다. 그들 풍속의 매일 행하는 떳떳한 예절로 차와 같은 것이 없다.
○ 우리나라의 소위 남초(南草)란 것은 본래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부터 얻어 온 것인데, 속담에, 담마고(淡麻古 담배) 곧 왜말에 다엽분(多葉粉)이란 음(音)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왜인도 역시 부르기를 우리나라 속음처럼 부른다. 그러나 뜻은 잎이 많고 가는 가루[粉]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쪄서 말리어 독을 제거하고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매인이 반드시 담뱃대 두 개를 가지고 번갈아 피워서 더운 기운이 목구멍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니, 식물(食物)에 대하여 정갈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 왜인이 고래고기의 회(膾)를 가장 중하게 여겨서 비싼 값으로 사서 손을 접대하는 화려한 찬으로 하나, 부드럽고 미끄럽고 기름져서 별로 다른 맛이 없었다. 내가 통역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일본 사람은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종신토록 부귀(富貴)를 할 수 있다 하니, 과연 그런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찌 한평생에만 그치겠습니까. 대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공후 귀가(公侯貴家)에서 고래 회ㆍ고래 젓[醢]을 제일의 명품(名品)으로 삼아서 중한 값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본의 등촉(燈燭)은 다 고래의 기름을 쓰는데 고래고기의 크기가 주먹만한 것이면 능히 기름 한 사발을 취할 수 있으니, 이것은 기름을 파는 이익만도 당장에 1만금을 얻을 수 있고, 이[齒] 기름, 등지느러미[鬐], 수염[鬣]도 다 기물(器物)을 만들 수 있어 그 이익이 또한 많으므로, 바다 근처의 사람들에게 포경장(捕鯨將)이란 것이 있어, 무리를 모으고 재물을 소비하여 그물과 기계를 설치하되, 그것을 잡아 부자가 된 자는 또한 적습니다.”
하였다.
○ 왜인은 갈분(葛粉)을 잘 제조한다. 갈근(葛根)을 물에 담가 두들겨 가루를 만드는데 부드럽고 가늘고 깨끗하고 희고 맛이 달고 성질이 냉(冷)하여 국수를 만들면 가장 훌륭하다. 녹말(菉末)을 만드는 것은 능히 우리나라처럼 정밀하게 하지 못하므로 대마도에서 강호에 해마다 바치는 것은 조선 녹두가루를 바치는 것이라 한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옛적에 의복의 제도가 없어서, 사람들이 알몸으로 있었는데, 진 무제(晉武帝) 시대에 백제왕(百濟王) 아화(阿花)가 여공(女工) 재봉하는 법을 일본에 전해주어 비로소 의복이 있었다 하니, 그 말은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 보건대 그들의 소위 공복(公服)이란 것은 대략 우리나라 단령(團領)의 제도와 같으면서 소매는 넓어서 중의 옷과 같고, 옆에는 재단이 없고 다만 양쪽에 바로 기운 것만이 있고 또 옷 허리에 붙여 기운 것이 앞뒤로 각각 칠팔 촌쯤 되게 드리웠으나 또한 띠도 없고 그 색깔은 붉은 것, 검은 것의 차별이 있으니, 가장 귀족은 흑색이요, 나머지는 다홍색이요, 그 다음은 두 폭을 가지고 단삼(單衫)을 하였는데, 소매가 없어 모양이 반비(半臂)와 같아 바지로써 받쳐서 허리에 결속(結束)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도포의 종류와 같은데, 앞에는 깃이 없고 옆에 자락이 있으니, 이것이 다 존전(尊前)에 통용하는 옷이다. 바지의 제도도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청백교직(靑白交織)으로 하여 제도가 우리나라 여인의 네 폭 바지와 같고, 앞뒤에 각각 주름이 있는데, 앞은 셋이며 뒤는 둘이요, 또 끈을 매었고 상반(上半)은 깁지 아니하였고, 후면에는 따로 검은 칠을 한 작은 판(板)을 붙였는데 길이는 5촌 남짓하고 넓이는 2촌인데 허리에 가로 붙여서 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귀인의 옷이요, 그 다음 제도는 중국인의 바지 같으면서 그 길이가 발[足]을 덮어서 땅에 두어 자나 끌리는데, 모든 왜인들이 존전(尊前)에 성복(盛服)을 할 때에 입고, 그 다음은 길이가 발을 가리지 못하고 매우 좁아서 겨우 다리를 꿸 만하니, 이것은 천한 자들이 심히 추운 때에 입는 것이다. 관(冠)은 제도가 세 가지가 있으니, 한 가지는 대략 사모(紗帽)와 같으면서 낮고 둥글기가 주발 뚜껑과 같아 겨우 발제(髮際)를 가릴 만하고, 위에 관이 있어 양(梁)이 뾰족하고 높은데 검은 나무 잠(簪)으로 양(梁)에다 가로 꽂았으며, 뒤에는 한 뿔이 있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두어 치나 되는 것이 솟아나왔는데 조금 구부려 아래로 드리웠고 또 긴 갓끈으로써 폭의 위에서부터 턱 밑에 매었는데 귀족들은 붉은 실 갓끈을 쓰고, 나머지는 다 흰 종이로 된 갓끈을 달았다. 이것은 관의 최상이 되므로 관백(關白) 이하의 각주(各州) 태수가 사용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정자(丁字)와 같은데 오모(烏帽)라 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베 짜는 북[杼]과 같은데 앞에 두 귀가 났다. 이것은 절오모(折烏帽)라 한다. 모두 종이에 풀칠을 하여 만들었는데 각주의 봉행(奉行) 이상 직명(職名) 있는 자가 쓴다. 공(公)이나 사(私)의 예석에 한 번 쓰는 외에는 다시 보통 때에 관을 쓰는 자는 없으니, 우습다.
○ 중[僧]도 관품(官品)이 있으니, 자삼(紫衫)을 입은 자가 상품이 되고, 황삼을 입은 자가 다음이요, 나머지는 다 검정 옷이다. 옷의 제도는 대략 심의(深衣)와 같은데 두 소매는 넓고 상(裳)의 폭은 혹은 바로 하고, 혹은 재단을 하였다. 가사(袈裟)는 우리나라 중들이 입는 것과 같으면서 길이와 넓이가 더하고 턱 아래 합금(合襟)한 곳에 쇠고리를 가지고 걸어 매었으며, 모두 안에는 추울 때 더울 때에 입는 장의(長衣)가 있고, 바지는 입지 않았으며, 머리에는 관도 건(巾)도 없어 담 장로(湛長老)나 창 장로(菖長老)가 사신에게 들어와 볼 때에도 또한 맨머리로 대해 앉았다. 강호에서 국서(國書)를 전하는 날에 두 장로가 관백의 궁으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 머리 위에 물건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모양은 함(函)의 뚜껑과 같은 것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머리를 용납할 만하고 황색을 칠하였는데 그것을 머리 위에 이고 뒤로는 두 어깨에 걸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궁중에서 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밖에서는 쓰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습다.
○ 평민의 의복은 남녀가 구별이 없어 모두 우리나라 여인의 장의(長衣)와 같은 종류인데, 소매는 너르고 짧으며 그 색깔은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된 것이 많고, 여자는 화초를 여러 가지 채색으로 놓고 그려서 바라보면 그림 가운데 부처[佛]와 같았다. 남자는 띠가 없고 여자는 큰 띠로써 허리를 묶었다. 남녀가 모두 반폭의 푸른 베로써 배꼽 아래로부터 생식기를 가렸고, 치마, 바지의 등속은 없었다.
○ 신은 귀천(貴賤)이 모두 짚신을 신었는데 다만 한 가닥의 승비(繩鼻)로써 발가락을 걸었으므로 버선도 역시 두 쪽으로 쪼개져서 승비(繩鼻)를 걸고 다닌다. 혹은 나무껍질로 삿갓을 만들어 모양이 갈대 삿갓 같으면서도 편편하며 넓게 하여 남녀간에 그것을 쓰고 볕을 막고, 비를 피한다. 우의(雨衣)는 깁이나 종이를 가지고 삼수(衫袖)가 있는 단의(單衣)를 만들어 푸른 그림이나 칠을 하였고, 추위를 막는 데는 솜을 둔 한 자의 비단으로 정수리를 덮었는데 모양이 주머니와 같고, 여자는 붉고 흰 설면자(雪綿子)로 머리에 덮는 것과 자색의 깁으로 네 귀를 가리는 것이 있었다.
○ 왜인의 풍속은 앉으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귀천(貴賤), 남녀, 노장(老壯), 아이 병약(病弱)한 자를 막론하고 앉기만 하면 반드시 꿇어 앉아 비록 길가에 술을 파는 여인이나 논에서 벼를 베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옷을 여미고 앉는데 그 법을 본즉 예의(禮儀)로 꾸미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그 옷이 앞에는 옆으로 섶[衽]이 없고, 아래에는 바지가 없으므로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생식기를 가리기가 어려운 까닭에 부득이한 데서 법이 생겨 습관이 천성(天性)처럼 되었으니, 우습다.
○ 또 가장 우스운 것이 있으니, 관백의 궁중에 모든 집정(執政)과 측근자가 공복(公服) 판(板)을 붙인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짧은데도 꿇어앉게 되므로, 두 다리 사이에 두어 자나 되는 백포(白布)를 달아 뒤로부터 드리우는데, 긴 바지를 입을 때에는 백포의 길이가 발에서 한 자 남짓이나 더 되어 모두 땅에 끌고 다니므로 모든 신하들이 동작을 할 때에는 싹싹 소리가 있어 자리 위가 소란스러운데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은 공경하는 것이라 하고, 각주(各州) 태수의 집에도 그 신하되는 섭정 이하가 또 이와 같이 한다. 그 법을 보건대, 왜인의 풍속이 경망하고 날래서 사람을 찌르는 데에 용감하므로, 그 윗사람 된 자가 혹 무슨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보하기에 불편하여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도록 하여 감히 창졸에 일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국법에 또 맨발로써 공경하는 것이라 하므로 천한 사람들은 평생에 버선을 신어보지 못하고 각주의 섭정 이하 모든 신하들이 그 태수를 볼 때에 맨발로 하고, 태수가 관백을 볼 때에 맨발로 하니, 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내가 경과하는 역(驛)의 벽에 붙어있는 천황(天皇)의 놀러나가는 그림을 보면 금은으로 만든 수레가 극히 화려한데 앞뒤에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붉은 옷, 검은 옷에 백포(白布)를 질질 끌면서 옹기종기 걸어서 따르는데 전부가 맨발이어서 보기에 해괴하기가 관백의 궁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데도 여러 왜인들은 그 그림을 우러러보고서 참새처럼 뛰며 부러워하기를 마치 천상에 참 신선을 보는 것과 같이 하니, 우습다.
○ 궁실(宮室)의 제도는 극히 정하고 깨끗하기에 힘쓰고 단청(丹靑)을 하지 아니하고, 기둥과 들보는 섬세(纖細)하고 기와는 가벼우나 덮기를 빽빽이 하였고 지붕의 마루는 높고 처마는 낮게 하여 나무 조각을 덮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덮기도 하여 첩첩으로 비늘과 같이 하였는데, 치밀(緻密)하며 완고(完固)하고 초가(草家)도 높이 쌓아올려 지붕의 형상이 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아 40, 50년은 유지할 만하고, 목판으로 벽을 만들되 매 1면마다 반드시 장자(障子) 셋을 설치하여, 밀어서 열고 닫으며 지도리[樞]와 문고리[環]의 제도가 없다. 한 칸의 넓이가 모두 3보(步)로 되었는데 이것은 온 나라 안이 다 동일하여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고, 매칸(每間)에 자리(일본의 다다미) 석 장을 펴는 것도 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장자(障子)와 자리가 혹시 그 하나가 없어지는 때에는 비록 아무 데서나 구해다가 보충하더라도 모두 병부(兵符)를 합하는 것과 같으니, 국중에 통용되는 척도(尺度)의 정밀함을 알 수가 있다.
○ 집을 짓는 데는 복도(複道)와 부엌ㆍ욕실(浴室) 등이 모두 한 지붕 밑에 있어서 집 하나의 크기가 혹 수백 보에 이르기도 한다. 방에서 벗어나면 아담한 담이 그림과 같고, 연못은 거울과 같다. 또 돌아서 겹겹의 문턱을 지나면 괴석(恠石)ㆍ대[竹]ㆍ이름난 꽃이 뜰을 둘렀고, 또 깊고 으슥한 방에 들어가면 비단 장막, 붉은 담요며 문목(文木)으로 중방[楣]을 만들었고, 벽에 접하여 상을 만들어 기댈 수 있고 누울 수 있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로 들어올지 어디로 나갈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 처마 끝에는 긴 홈을 설치하여 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고, 집 머리에는 물통을 두어 화재를 방지하고, 뜰과 마당에는 가는 돌을 펴서 비올 때에 다녀도 진흙이 묻지 않게 하고, 복도에는 종이 등을 달아서 밤에 다녀도 어둡지 않았다. 이것은 도성(都城)과 지방에 부귀(富貴)한 사람들의 가옥이 대략 이와 같다. 비록 관백의 거처하는 궁전이라도 정결하고 치밀(緻密)한 것은 더할 나위가 없으나 굉장(宏壯)한 것은 부족하고, 장막이나 자리도 또한 주부(州府)의 관사(館舍)와 차별이 없으니, 대개 교묘한 것만을 숭상하고 예법에는 전혀 어두워서 임금의 거처에도 따로 제도를 세우지 아니하고 평민의 부호들도 또한 왕후(王侯)와 사치함을 다툴 수 있으니, 그 등급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국중에 왕궁(王宮)이나 민가에 모두 온돌로 불을 지피는 법이 없고, 다만 판자방(板子房) 위에 두터운 자리와 솜요[雪綿褥]를 깔고 잠자며, 솥이나 남비같은 밥 짓는 그릇은 모두 따로 부엌에 두어 연화(煙火)가 사람의 거처하는 방에는 서로 접하지 아니하고, 다만 지극히 추울 때에는 방 가운데 지로(地爐)를 설치하여 흙을 쌓아 숯불을 피우고 작은 평상을 그 위에 놓는데, 평상은 우리나라의 작은 창처럼 모든 구멍이 있어 불기운을 통하고 이불과 요로써 덮어서 거기에 올라 앉아 땀을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옆에 끼고 앉아 손발을 쪼이는 사람도 있다.
○ 여름날 더울 때에도 파리와 모기가 매우 드므니, 이것은 방 안이 정결하여 더러움이 없고, 어육(魚肉)의 부패한 것은 곧 땅에 묻고, 측간(厠間)에 냄새나고 더러운 것은 곧 밭으로 옮기므로 파리나 모기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모기가 한 번 생기면 푸른 실로 방장(方帳)을 만들어 네 귀의 나무에 걸었는데, 그 높이는 사람이 그 안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할 만하게 하고 한 사람의 잠자는 것을 용납할 만하였다. 속(俗)에 측간을 설은(雪隱)이라 하고, 설은의 옆에는 반드시 욕실(浴室)이 있고 욕실 가운데는 큰 통을 두어 물을 저장하고, 옆에는 한 상이 있고, 상 위에는 흰 저포(紵布) 두어 자를 두었다. 그 풍속이 측간에 간 다음에는 반드시 씻으므로 물통이 있고, 상이 있고, 수건이 있다. 남녀가 교합(交合)하는 방에도 또한 이것을 설치하였다 한다.
○ 사찰(寺刹)은 건축이 높고 크기가 왕궁(王宮)보다 배나 되어, 아름드리 나무로써 둥근 기둥을 만들고 황금으로써 입히고, 문과 창은 모두 문목(文木)이요, 문과 윗중방은 검은 칠이 선명하기 거울과 같은데, 다만 단청 채색만 하지 아니하였을 뿐이요, 벽 사이에 간혹 그림이 있다. 절이라 칭하는 것도 혹은 불상(佛像)을 모시거나 중을 두지도 않고, 천황(天皇)의 모든 아들인 법왕(法王)의 거처하는 곳 및 사신 행차의 머무는 관(館)이 되는 것이요, 정말 절도 또한 민간에 있어 중들이 민간인과 섞여 살아 혹 민간에 관세음보살의 금상(金像)을 모셔놓고 중들 두어 사람이 서서 경쇠[磬]를 치기도 하고, 또 높고 큰 금불(金佛)이 길 옆 노천(露天)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많은데, 조상(造像)의 교묘한 것이 우리나라만 못한 것 같았다.
○ 산수(山水)의 좋은 곳에는 반드시 정사(精舍)와 별관(別館)이 있어 깨끗하고 명랑하여 신선이나 도사(道士)의 거처하는 곳과 같은데, 그것은 반드시 관백 이하 각주 태수의 설치한 찻집[茶屋]이라 하니, 곧 그들이 왕래할 때에 쉬면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또 길 옆 좌우에 간간이 깨끗한 한두 칸 집을 아주 묘하게 지어 쉴 만한 곳이 있는데, 물은 즉, 그것은 곧 귀인(貴人)이 길가다가 쓰는 측간으로 설치한 것이라 했다.
○ 관제(官制)는 그 제도가 9품이 있는데, 품(品)이라 하지 않고 위(位)라 한다. 거기에도 정(正)ㆍ종(從)의 구별이 있다. 대집정(大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우집정(右執政)이란 것이 있으니, 옛적의 삼공(三公)과 같다. 대장군(大將軍)이 가장 귀하고, 대납언(大納言)은 아상(亞相)이 되고, 중납언(中納言)ㆍ소납언(小納言)은 옛적 황문(黃門)급사중(給事中)의 등속이다. 식부(式部)ㆍ치부(治部)ㆍ민부(民部)ㆍ병부(兵部)ㆍ형부(刑部)ㆍ궁내성(宮內省) 이것이 육관(六官)인데, 각각 경(卿)ㆍ대보(大輔)ㆍ소보(小輔)ㆍ대승(大丞)ㆍ소승(小丞) 등의 관(官)이 있고, 소부(掃部)ㆍ직부(織部)는 소제(掃除)와 직조(織造)를 맡은 관직이요, 대장(大藏)은 조세(租稅)를 맡고, 준인(準人)은 의장(儀仗)을 맡고, 선부(膳部)는 음식을 맡고, 전약(典藥)은 의약(醫藥)을 맡고, 채녀(采女)는 여관(女官)을 맡고, 태학료(太學寮)는 문학(文學)을 맡고, 탄정료(彈正寮)는 규찰(糾察)을 맡고, 중장(中將)ㆍ소장(小將)ㆍ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ㆍ좌병위(左兵衛)ㆍ우병위(右兵衛)ㆍ좌마료(左馬寮)ㆍ우마료(右馬寮)ㆍ병고료(兵庫寮)는 모두 숙위(宿衛)를 맡아 백관(百官)의 직책이 각기 관청이 있는데, 요(寮)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두(頭)ㆍ윤(允)ㆍ조(助)의 3등의 관(官)이 있고, 서(署)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수(首)ㆍ우(佑)ㆍ영(令)ㆍ사(使)라는 관이 있어서 각기 그 직책으로 육관(六官)의 속관(屬官)이 된다. 각주에는 수(守)ㆍ개(介)ㆍ목(目)ㆍ연(掾)이 있으니, 수는 자사(刺史)와 같고, 개는 별가(別駕)와 같고, 목은 주부(主簿)와 같고, 연은 사마(司馬)와 같다. 이것은 그들의 내외의 관직이다.
전대(前代)에는 천황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관명(官名)을 띤 자들이 각각 그 직책을 행하였었다. 그러나 천황이 권력 없이 헛 명칭만 가진 뒤에는 관백이 정이위(正二位) 대장군의 직으로서 60주(州)의 땅을 총괄하여 통치하고, 각주의 땅을 외[瓜]처럼 쪼개어 종실(宗室) 집정(執政) 등의 식읍(食邑)으로 삼고, 대소(大小)의 관사(官舍)는 한갓 빈 명칭만을 빌려서 사은(謝恩)하는 예식만 있는데, 천황의 육관(六官)과 삼공(三公)은 지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다.
○ 내가 일본의 관명(官名)과 그들이 띄고 있는 직책을 볼 때에 낱낱이 상관이 되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원정잠(源正岑)이 하내수(河內守)라 칭하는 것과 원충신(源忠辰)이 준하수(駿河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之)가 태화수(太和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治)가 근강수(近江守)라 칭하는 것은 모두 그 주(州)의 수(守)가 아니며, 원직유(源直惟)의 소부두(掃部頭)와 원계우(源繼友)의 중납언(中納言)과 원구충(源久忠)의 내선정(內膳正)과 평방성(平方誠)의 습유(拾遺)는 또 중앙정부의 관직을 실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통치하는 구역은 동도(東道)에 있으면서 서주(西州)의 태수라 칭하고, 몸은 지방의 수(守)로 있으면서 중앙정부의 관직에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관명(官名)과 직책이 거리가 천 리나 되고, 한 주(州)의 태수가 혹은 4, 5명이나 되므로 내 생각에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삼동에게 조용히 물으니, 우삼동은 다만 말하기를,
“일본의 관제(官制)가 귀국과는 매우 다르니 비록 말하더라도 공은 반드시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또한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천황이 관제를 만들 때에 본래 정한 명칭이 있어서 안으로는 삼공(三公)ㆍ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밖으로는 66주의 태수가 등급이 분명하여 큰 것 작은 것이 다 갖추어졌던 것인데,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로부터는 따로 관직을 만들지 않고 천황의 관직을 빌려가지고 그 대신을 거느려서, 임명은 비록 관백에게서 나오나 작첩(爵帖)에는 반드시 천황의 인장을 찍고 임명을 받은 뒤의 사은(謝恩)도 반드시 천황에게 하였다. 이것은 천황이 벼슬을 주는 형식이 되므로 옛 명칭대로 바꾸지 아니하고, 직책을 주는 것은 관백에게 있으므로 관할을 따라서 일을 맡기게 되니, 아무 주(州)의 태수, 아무 부(部)의 관(官)이란 것은 다 천황이 주는 것이요, 아무 성주(城主)라 하는 것은 곧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관백은 비록 국군(國君)이라 하나 천황의 앞에 가서는 정이위(正二位) 대장군(大將軍)의 반열이 되고, 황경(皇京)의 정일위(正一位)와 종일위(從一位)는 반드시 대납언(大納言)ㆍ우집정(右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대집정(大執政)의 등류로서, 관백 삼종실 집정(三宗室執政)이 되고, 세신(世臣)이란 것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정사위(正四位) 종사위(從四位)의 중장(中將) 중납언(中納言) 소부두(掃部頭)의 벼슬에 지나지 못하고, 대납언 이상의 칭호가 없는 것은 월존(越尊)하는 혐의가 있는 까닭이다. 관백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읍을 맡아 늠료(廩料)를 받아먹게 한 것도 치병(治兵)의 제도에서 나온 것이나, 백관의 의도(儀度)를 세우지 않았다. 읍을 맡은 자는 또 각각 섭정(攝政)ㆍ봉행(奉行)ㆍ기실(記室)의 신하가 60만 석을 먹는다는 것은, 그가 맡은 땅에서 1년에 받는 토지의 납세가 60만 석이라는 말인데, 군사 한 사람의 1년 봉급이 25석으로 치면 1백 석에 군사 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고, 1만 석에 군사 4백 명을 기르고, 10만 석에 군사 4천 명을 기르게 되니, 땅이 넓은 자는 받는 것이 많고, 받는 것이 많은 자는 군사가 많게 되는 것이다. 태수가 자기 먹는 것을 많이 떼어 군사를 잘 기르는 사람은 유능한 관이라 하여 상으로 더 주고, 사사로 저축하여 군사가 부족한 자는 어질지 못한 관이라 하여 벌로 땅을 깎는다. 관에 있는 사람들은 힘을 다하여 군사를 기르는 데에 힘써야 하므로, 읍을 맡은 자는 모두 무직(武職)이요, 소위 문학의 직책을 가진 임신독(林信篤) 같은 사람은 비록 그 재주가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을 겸하였더라도 능히 한 자, 한 치의 땅도 얻어 맡을 수가 없고, 다만 의관(醫官)ㆍ승도(僧徒)처럼 달마다 봉급을 받아서 먹을 뿐이다.
○ 오산집(烏山集)에 언급한 승상(丞相)ㆍ아상(亞相)ㆍ대종백(大宗伯) 등 여러 사람은 당시 천황의 대신 정일위와 종일위의 자급이 있으나 그는 군국(君國)의 큰일에는 전혀 참여한 일이 없다. 땅과 인민에게 정치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다만 빈 이름으로 위에 있기만 하니, 그 존귀(尊貴)할 것이 무엇인가. 또 일본의 고사(古史)를 보건대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글을 전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의 황태자가 고려왕이 보낸 글 중에 말이 거만스럽다 하여 노하여 그 글을 찢고서, 사신은 죄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조(我朝)와 통신사(通信使)는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에 있었으므로 관백에게 국서를 전하러 가는 길에 가마를 타고 군악을 울리면서 천황의 거처하는 옆을 거들거리고 지나갔으니, 관백의 위품(位品)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묘년에 우리 사신이 갔을 때에는 관백이 임금이라 자칭하였는데, 지금은 공순함을 지켜서 임금으로 자처하지 않아 회답하는 국서 중에 다만 일본국 원길종(源吉宗)이라 쓰고 위호(位號)를 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대장군이란 위호를 쓰게 되면 이웃 나라의 국왕과 대등(對等)의 예로써 국서를 주고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만약 귀국(貴國)에서 일본의 관품(官品)을 자세히 안다면 반드시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말을 다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 뜻은 아마 관백의 위호(位號)가 정이위(正二位)이어서 존귀하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하는 듯했다.
○ 각주의 섭정(攝政)ㆍ봉행도 또한 세습(世襲)으로 하고, 준인(準人)ㆍ채녀(采女)ㆍ병위(兵衛) 등의 칭호는 천황의 관명(官名)을 쓴 것인데, 품위(品位)는 또 태수의 계급보다도 아래에 있으니, 이것은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그 밖에 기실(記室)ㆍ의관(醫官)의 등속은 태수가 스스로 불러 쓴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접대해야 하기 때문에 사무가 가장 번다하므로 재판(裁判)이란 관직을 더 두었는데, 이것도 역시 태수가 임명한 바이므로 지위는 봉행의 아래에 있으나, 봉급은 기실(記室)보다 배나 된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조용히 우삼동에게 묻기를,
“내가 귀국의 제도를 보건대, 역시 중국을 모방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어느 시대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천자(天子)가 쇠미(衰微)하여 권력이 천자에게 있지 아니하므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천자의 빈 명의를 빌려서 제후에게 호령하였으며, 천승(千乘)의 나라에는 백승(百乘)의 대부(大夫)가 있고, 백승의 집에는 각각 재신(宰臣)이 있어 대부의 고을을 다스리니, 이른바, 재신이 대부를 섬기면 문득 군신(君臣)의 관계가 되어, 주인이 환란을 당할 때에 재신은 의리(義理)에 보면 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도 다 대부의 집에 벼슬하였습니다. 지금 본즉 귀국의 천황이 친히 정치를 하지 아니하고, 관백 이하가 다만 천황의 작명(爵名)만을 가지고서 군(君)이니, 후(侯)니, 대부(大夫)니 하여, 성읍(城邑)과 백관(百官)이 있어 모든 실무는 다 대부의 가신(家臣)에게 있고, 각주의 섭정ㆍ봉행 모든 사람은 또 태수에게 사사로 군신(君臣)의 분(分)을 맺어서 각기 능히 자기 일국의 정치를 행하니, 이와 같은 것은 전국의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놀라며 사례하기를,
“이는 진실로 정확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법이 다만 전국 시대에만 행하였는데, 일본은 오랫동안 폐단이 없으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지형과 민속이 중국과 같지 아니한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 말기에 열국(列國)이 나누어 경쟁하여 정치가 천자에게서 나오지 아니하므로 제후(諸侯)와 대부들이 나라를 집으로 삼아 전쟁을 일삼으니 백성이 견디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진 시황(秦始皇)이 나서 주(周) 나라를 삼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정치가 모두 황제(皇帝)에게서 결정된 후에 인재를 선택하여 관직을 주어 성적고사를 3년에 한정하는 법이 있었으며, 한(漢)ㆍ당(唐) 이하에 이 법을 썼는데 귀국은 바다 가운데 궁벽하게 있어 이웃 나라와 전쟁하는 화(禍)가 없으므로 모든 주(州)의 대부가 세습제도(世襲制度)에 습관이 되어 상하가 다른 뜻이 없으니, 이것이 나라의 운수가 다함이 없고 또한 변하지 아니하여 지금토록 폐단이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늘, 땅, 사람이 생긴 이래로 한 가지 일, 한 가지 물건도 억만 년 동안 고쳐지지 아니하는 것이 없는데, 이 뒤에 일본의 관제(官制)가 진(秦)ㆍ한(漢)과 같은 때가 다시 있을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탄식하기를,
“이는 곧 이치를 아는 말입니다.”
하였다.
○ 전제(田制)는 30보(步)가 1묘(畝)가 되고, 10묘가 1탄(畽)이 되는데, 1탄에 상등은 세(稅)가 8석이요, 중등은 세가 6석이요, 하등은 세가 5석이니, 1석은 곧 우리나라 25두(斗)에 해당된다. 시전(市廛)은 3보가 1칸(間)이 되고, 60칸이 1정(町)이 되고, 36정이 1리(里)가 되니, 5정은 곧 전(田)의 3묘에 해당된다. 가옥(家屋)에 대하여는 매칸에 은(銀) 5전을 세로 바치고, 공업ㆍ상업을 하는 자는 각각 그 물건의 10분의 1을 세로 바친다. 1정마다 이문(里門)을 두어서 5가(家)의 법을 시행한다. 한 시(市)에는 한 시의 수세(收稅)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좌(座)요, 한 이(里)에는 한 이의 수세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간전(肝煎)이다. 외방에는 한 촌에 한 촌의 일을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장옥(莊屋)이요, 각 주에는 관할하는 태수가 각자 수세를 하고, 왜경(倭京 경도(京都))ㆍ계빈(界濱)ㆍ병고(兵庫)ㆍ천하기(天河崎)ㆍ금수(今須)ㆍ묵가(墨街)ㆍ명해(鳴海)ㆍ적판(赤坂)ㆍ신거(新居)ㆍ견부(見付)ㆍ삼도(三島)ㆍ대의(大礒)ㆍ신내천(新奈川) 등지는 지방은 비록 각 주에 소속이 되었으나, 시여(市閭)의 수세는 모두 관백에게 직접 바치고 살마주(薩摩州)의 농도(籠島)와 비전주(肥前州)의 장기(長崎)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또한 관백의 별장(別藏)이 있다. 대저 국중에 인민이 많고 집들이 번성하며 시전(市廛)의 풍부한 곳은 흔히 큰길 옆에 있어 도읍(都邑)이 있는 지방, 바다의 배가 정박하는 곳에는 여행하는 자는 물건을 무역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익을 얻어서 농사짓고 길쌈하지 아니하고도 입고 먹는 것이 사치하고 높은 대문, 화려한 집들이 골목에 연하였다. 그러나 주(州)ㆍ국(國)의 세법(稅法)이 심히 각박하여 추호(秋毫)도 빠뜨리지 아니하므로 먼 촌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청에 바치고, 풍년에 콩죽으로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제 아내와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다. 가난하고 부유함이 고르지 못한 것은 모두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다만 인민들이 한번 세를 바치고 나면 달리 사역되는 일은 없다. 관백 이하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도 다 인부와 말이 증발되거나 참(站)이나 길에 공급하는 비용이 없으므로 통신사의 행차에 대하여 많이 사역되는 인부 및 공급하는 모든 물자가 날마다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모두 관(官)에서 돈을 주고 사서 쓴 것이므로 털끝 만큼도 백성에게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니, 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제(軍制)는 가장 정(精)하고 강하다. 각 주의 태수는 다 무관(武官)인데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다 군사를 육성하는 데 쓴다. 군사 한 사람의 연급(年給)이 25석으로써 다른 부담은 없고, 장관(將官) 1백 석 이상을 두고 또 땅을 떼 내어 주어서 백성 부리고 세금 받는 것을 그 자유에 맡기므로 장관된 자가 혹 원래의 정한 수량에 구애되지 않아 만 가지로 백성을 학대하고 빼앗아 몰수(沒數)로 수입하여 각기 그 맡은 땅으로 그 부하를 기른다. 그래서 평민의 기름과 피가 날로 다되어 군사가 되지 않고는 입고 먹을 것이 나올 데가 없다. 그러므로 백성이 모두 힘을 다하여 운동을 하여 장관들의 부하에 들어가려한다. 이미 군사가 되고나면 제 몸을 제 마음대로 못하고, 죽고 살고 배고프고 배부른 것이 모두 장관의 손에 달렸으므로 한 번 비겁(卑怯)하다고 이름이 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다. 칼이나 창에 맞은 흔적이 안면의 앞에 있으면 용감한 사내라 칭하여 녹을 받고, 그 흔적이 귀 뒤에 있으면 잘 달아나는 자라고 지목되어 배척을 받는다. 대개 그 법령이 사람을 몰아넣기를 이와 같이하고 의식(衣食)의 나올 데가 다른 길이 없으므로 그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처음부터 의(義)를 위해 그런 것도 아니요, 또 타고난 성질이 그런 것도 아니라, 실은 스스로 제 몸을 위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일에는 군사들이 훈련되고 익히기로 성질이 되었다가 일을 만나면 달아나는 이무기[蛟]나 충돌하는 멧돼지와 같고, 적병을 보면 등불에 덤비는 불나방이나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당랑(螳螂)과 같아서 장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재라도 군사의 죽음 바치는 힘을 얻고, 군사는 비록 나약하더라도 전장에 달려가는 데는 용감하다. 이것이 비록 오랑캐 종족의 본습(本習)이긴 하나 군사 기르는 방법을 얻었다 할 수 있다.
○ 군사의 재주 시험은 매월 여섯 차례 한다. 물에는 주사(舟師)가 있고 육지에는 보병이 있는데, 모두 포수(砲手)로써 상등을 삼는다. 갑비(甲斐)의 기병(騎兵)과 살마(薩摩)의 검사(劍士)가 가장 날래고 용감하여 당적할 수 없기로 이름이 났다 한다.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이 제일 정밀하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쌍칼을 차서 긴 것으로는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으로는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총은 대ㆍ중ㆍ소 세 가지가 있는데, 작은 것은 다닐 때에 쓰는 것이요, 중간 것은 그 몸이 조금 커서 녹로(轆轤)에 싣고 다니고, 큰 것은 길이가 한 발이나 되고 크기는 우리나라 천자총(天字銃)과 같아서 다만 성을 지키는 데에 쓴다. 창(鎗)은 간(竿)이 가늘고 긴데 또한 단지(單枝)와 3지(三枝)가 있고 위에는 검거나 흰 깃을 달았고, 간혹 붉은 담요로써 기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한 치 남짓하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하다. 활의 제도도 나무로 간(幹)을 만들고 대[竹]를 끼워 아교(阿膠)로 붙였고, 등(藤)으로 얽어서 칠을 하였는데, 그 길이가 한 발 남짓하며 힘이 약하여 능히 멀리 쏘지 못하고 화살도 또한 짧고 가늘며 깃[羽]이 넓어서 갑옷을 뚫기가 어려울 것 같다. 왜인이 우리나라 큰 활을 보고는 모두 놀라며 겁을 먹었다. 관백이 특히 힘센 사람을 선택하여 당겨도 능히 활줄을 버티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관(軍官) 양봉명(楊鳳鳴)으로 하여금 힘껏 당기어 화살을 쏘게 하니, 보고 있던 상하의 관리들이 모두 놀랬다.
○ 나라에 사민(四民)이 있으니, 병(兵)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다. 선비[士]는 그중에 속하지 않는다. 군사는 입고 먹는 것이 제일 편하고, 장사꾼은 비록 부(富)하나 세법(稅法)이 너무 중하고, 공(工)은 기술은 교묘하나 값이 헐하고, 농민이 제일 괴로우나 1년에 세를 바치는 외에는 다른 부담이 없다. 대개 사민(四民) 외에 따로 유학(儒學)과 승도(僧徒)와 의학(醫學)이 있다. 그러나 국속에 의학은 사람을 살리는 공이 있기 때문에 의학이 상(上)이 되고, 승도(僧徒)가 다음이 되고, 유(儒)는 말등이 된다. 소위 유(儒)라는 것은 시문(詩文)을 짓기를 배우나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할 길이 없으므로 명예를 얻어서 각주의 기실(記室)이 되면, 능히 수백 석의 봉급을 받으면서 평생을 바치고, 자리를 얻지 못하면 군사에 들기를 구하거나 또 의학에 붙어서 산다. 내가 지나가는 역로(驛路)ㆍ참(站)ㆍ관(館)에 자기가 지은 글을 보이며 만나기를 요청한 자가 있었는데 아무 지방의 의관(醫官)이라고 하고, 아무 성(城)의 무신(武臣)이라 하였다. 그 글이 간간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대개 문사(文士)로서 의관(醫官)이 되거나 군사가 되어 녹을 먹는 자들이었다.
○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는 좌우에 호위하는 자가 든 흑우기(黑羽旗)와 홍전기(紅氈旗)에 모두 뾰족한 창끝이 있고, 군사들은 조총(鳥銃)을 끼고 화승(火繩)에 불을 붙여 뜻밖의 사변을 예방하고, 봉행 이하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창과 기를 가지고 앞에 인도하고, 기실(記室) 등 여러 사람이 다 그러하여 그 의식(儀式)이 모두 무직(武職)에서 나온 것이요, 문구(文具)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각 주의 사람이 모두 표지(標識)가 있어서 그 장막 선범(船帆) 및 의복의 옷깃 뒤를 자세히 보면 반드시 검은 색으로 표(標)를 만들었는데, 표가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고 혹은 매화와 같고 혹은 나뭇잎 같고 혹은 태극도(太極圖)와 같고 혹은 품자(品字)와 같고 혹은 품자 위에 그림 하나를 덧붙여서 각기 지방에 따라 다르게 하였으니, 만약 미리 각 지방의 표를 알면 그 돛을 바라보아도 아무 지방의 배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사람을 보면 아무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도 또한 군제(軍制)를 위해 만들어서 부곡(部曲)이 서로 혼란되지 않게 한 것으로써 우리나라 각영(各營)ㆍ각초(各哨)의 복색(服色)ㆍ기색(旗色)의 구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백성을 옷깃에다 묶어서 평소 출입할 때에도 감히 서로 동서가 섞이지 않게 하였으니, 그 법이 준엄하고 각박함을 알 수가 있다.
○ 그 풍속이 본래 등급이 없어서, 가옥ㆍ가마ㆍ말ㆍ의복ㆍ기물은 참람되어 규제(規制)가 없으되, 명분이 한 번 정해지면 위아래의 차별이 엄하여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준행하고 받드는 것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신 행차의 왕래하는 길에 보면 접대하는 제관(諸官)으로, 태수ㆍ봉행 이하가 못나고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있는데 그 부하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명령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척촌(尺寸)도 잃지 아니하고, 칼을 차고 문을 지킬 때에는 문안에 오뚝하게 서서 밤새도록 나태함이 없고, 차(茶)를 끓여서 올리려고 할 때에는 화로를 끼고 숯불을 피우며 잠깐도 떠나지 아니하며, 무릇 부르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여 매질을 할 필요가 없이 일마다 잘 처리되고, 길을 끼고 관광하는 자는 모두 정로(正路) 밖에 앉되, 작은 사람은 앞에 있고, 조금 큰 사람은 제이의 열이 되고, 더 큰 사람은 뒤에 있어 차례로 대열(隊列)이 되어 엄숙하고 정돈되어 떠들지 아니하여 수천 리의 보는 바에 한 사람도 망동하여 길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 대개 인심과 습속이 모두 손무(孫武)와 양저(穰苴)의 군사와 같은 것이요, 예법과 교화로써 일제히 된 것이 아니었다. 관백과 각 주 태수의 정치가 한결같이 군제(軍制)에서 나왔으므로 대소(大小)의 백성이 보고 익혀서 한결같이 군법과 같이 된 것이다.
○ 국중에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예법이 없어서 남자가 장가들지 아니한 자는, 다만 중앙의 머리털을 깎고 정수리 앞과 머리 뒤의 털만 남겨 놓는다. 장가를 든 뒤에는 정수리 앞의 털까지 깎아버리고 머리 뒤의 한 줌의 털만을 길이 네 치쯤 남겨서 종이 끈으로 묶어서 구부려 위로 올린다. 이것이 결혼한 자의 표시이다. 혹은 앞머리도 깎지 아니하고 머리 뒤의 털을 틀어서 굴곡(屈曲)하게 한 자도 있다. 여자는 머리를 튼 것이 중국의 제도와 같이 정수리 위에 가르마도 가르지 아니하고 바로 머리 뒤에 틀어서 세 송이[朶]로 접어서 구불구불하게 아래도 드리우고 흰 실로써 매어 그 쪽을 느슨하게 하며, 정수리에는 대모(玳瑁)빗을 꽂는다. 이미 시집간 자는 이가 모두 검은 빛인데, 철액(鐵液)으로서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이빨이다. 혼인할 때에는 폐백을 쓰지 아니하고 다만 혼인날 저녁에 신부를 신랑의 집에 보내는데, 피차의 친척들이 성대하게 등촉(燈燭)과 위의(威儀)를 베풀어 보내고 맞이하는 예식을 하고, 두 집에서 각기 음식을 차려서 손님들에게 대접하여 즐겁게 연회를 한다. 초상과 제사는 임금과 부모의 초상에도 곡(哭)하거나 상복을 입는 법이 없고, 음식과 언어마저도 평소 때와 같이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통 가운데 앉혀서 돌을 쌓아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시를 한다. 귀인(貴人)의 집이라야 비석이 있고 붉은 문을 세워서 그 지점을 표시한다. 제사 지내는 예법은 쌀을 흩으며 술로 땅을 적시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또 연기(年忌), 월기(月忌), 일기(日忌)라는 설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정월 초하루 날에 죽었을 경우 11일, 21일을 다 기(忌)라 하고, 매년 정월 및 매월 초하루 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여 중을 청하여다가 재(齋)를 올리고 공양(供養)을 잘하니, 중들이 그 때문에 살아간다 한다.
○ 대마도의 통역 중 한 사람인 나이 젊고 민첩한 자가 나를 따라서 강호에까지 갔으므로 내가 자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는데, 홀연히 하루 걸러 보이지 아니하므로, 내가 다름 사람에게 묻기를,
“아무 통사(通事)는 어디 있는가?”
하였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는 어제 모친이 죽었다고 부고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 모친이 대마도에서 죽었는가?”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불쌍히 여겨서 그가 이미 분상(奔喪)하였거니 하고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 뒤 수 일 만에 그 사람이 와서 뵙는데 의복과 언어가 한결같이 평일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그저께 사람들이 전하기를 네가 애통하게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하기에 매우 놀라고 슬퍼하였다.……”
하니, 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제가 멀리 왔다가 이런 애통한 일을 당하였으니,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왕법에는 분상을 허락하는 예(例)가 없으므로 몸이 공역(公役)에 매어서 억지로 따라다니느라 몸에 입은 푸른 무늬의 옷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조선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조선이 상례(喪禮)를 중히 여기는 것은 저도 또한 들은 바이므로 부끄러운 줄 알아서 타고난 양심에서 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 것이다. 위정자들은 어찌 이런 백성들로 하여금 이 본심을 상실하게 한다는 말인가.
○ 그들의 풍속에 귀신을 말하기를,
“사람이 살았을 적에 남의 존경과 믿음을 받은 자는 죽어서 반드시 제사를 받는다.”
하여, 사당을 설립하여 매양 재계목욕(齋戒沐浴)하고 기도하는 일이 있고, 부모의 죽은 날에 혹 소식(素食)을 하며 신(神)이 기(忌)한다 하여 어육(魚肉)을 절금하고 신당(神堂)과 음사(淫祠)가 곳곳에 있다.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들의 시조(始祖) 여신(女神)을 모셨다. 웅야산 수신(熊野山守神)이란 서복(徐福)이며, 애탕산 수신(愛宕山守神)이란 신라(新羅) 사람이요, 춘일(春日)ㆍ팔번(八幡)ㆍ주길(住吉) 등은 가장 대명신(大明神)이 된다. 기타 소소한 신령, 사람, 죽은 귀신 및 나무나 돌에 붙은 요망한 신으로서, 속(俗)에 숭봉(崇奉)하는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무릇 맹약(盟約)이나 금계(禁戒)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신을 증명으로 맹세를 하고, 남녀가 장가들거나 시집갈 때에는 역시 받드는 신의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붓고 맹세를 한다.
○ 그 풍속이 색은 아롱진 것을 숭상하고, 맛은 단 것을 숭상한다. 찬은 고래 고기의 회를 상품으로 삼고, 자리는 붉은 담요를 상품으로 삼는다. 그 나머지 온갖 물건도 다 가볍고 간략한 것을 숭상한다. 심부름을 하는 자도 두 끼 세 끼 밥을 먹는 일이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들이겠다는 청이 없고 다만 배고플 때에 두어 개의 동전으로 유병(油甁) 한 개나 소우(燒芋) 두세 개를 사 먹어 요기를 하고 소위 관장(官長)의 음식하는 기구라는 것도 다만 반장(飯藏) 반궤(飯樻)라는 것이 있다. 반장이란 것은 나무궤로서 높이는 한 자가 안 되고 길이와 넓이는 두어 치요, 그 속에 붉고 검은 그릇과 나무숟갈 소반 등의 물건을 넣었는데 모두 가늘고 작고 모나고 둥글고 떡, 국수, 과일을 들이는 것도 다 1작(勺)에 차지 않는다. 비록 높은 벼슬아치가 윗사람의 명령을 받들고 여행하는 자라도 스스로 반장(飯藏)을 가지고 다니는 외에는 각 참(站)의 접대하는 비용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고 입는 의복도 두세 가지 외에는 머리에 관이나 모자도 없고, 발에 가죽신이 없고, 밥을 짓는 기구도 모두 가볍고 얇고 교묘하므로 반 묶음의 나무로 밥ㆍ국 모든 탕을 만들 수 있고, 또한 온돌에 불을 지피는 법이 없으니, 한 사람이 1일에 먹는 것이 두세 개의 동전과 반 묶음의 나무에 지나지 아니하고, 1년에 입는 것이 한 냥의 은자(銀子)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인구가 비록 번성하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이 비록 중하여도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지 않으며 땔나무[薪木]의 귀한 것도 또한 부족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 죄수를 문초하는 법은 매질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죄수로 하여금 드러눕게 하여 큰 주발에 물을 담아서 바로 입에다 들어부어서 자복하게 한 후에 중한 죄는 바로 그 목을 베는데 형을 받을 자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취하여 구덩이 속에 앉으면 친우 되는 자가 칼을 가지고 치는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다. 왜인의 큰 칼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 이름이 있으므로, 사형을 받을 죄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먼 데 가까운 데서 칼을 가지고 사람 죽이기 시험하려는 자가 장꾼처럼 다투어 모여드니, 풍속의 참혹하고 독함이 심하다. 죄가 감사(減死)에 해당될 경우에는 바다 위 외로운 섬, 사람 없는 곳에 귀양을 보내어 죄의 가볍고 중한 데에 따라서 그 연수(年數)를 한정하고,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두 번 범하면 사형을 한다. 역율(逆律)에 관계되는 자는 십자목(十字木)을 거리에 세워놓고 그 몸을 발가벗겨 그 손에 못을 쳐서 나무 위에 달아 놓고 왕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태우고 살을 깎게 하여 참혹하고 독한 짓을 극도로 한 후에 사형을 한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일본의 풍속이 자고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 성이 나면 반드시 스스로 목을 찌르고 스스로 배를 가르므로 관(官)에서 매질하여 문초하는 법이 없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니, 우삼동이 대답하기를,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일본 사람이라고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살마주(薩摩州)는 풍속이 특수하여 일을 당하여 걸핏하면 죽고 맙니다. 그리하여 큰 죄가 있는 자는 관(官)에서 잡아 가두지 아니하고 그에게 말하되, ‘네 죄는 마땅히 너의 집에서 죽어야 한다.’ 하면, 그 사람이 수긍하고 집에 돌아가 자살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관에서도 또한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니, 대저 일본 사람이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실로 살마주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것은 연조(燕趙)의 절사(節士) 협사(俠士)들과 풍속이 같은데, 그 가운데 혹 칭찬할 만한 기절(氣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옛글에 있는,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 함과,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함은 군자도 어렵게 여기는 바이어늘, 살마주에서는 사람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 기절이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그 지방의 풍속이 기괴한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여공(女工)은 비단과 베를 짜는 것이 정밀하고 가늘며, 온갖 물건이 가볍고 묘하여 두어 치의 그릇으로 능히 상용(常用)하는 모든 기구를 담아서 품속에 넣을 수가 있고, 화초(花草) 같은 식물에 이르러서도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없고, 반드시 가지와 잎을 펴거나 오므려서 교묘하게 모양을 만들어 둑[纛]과 같게 하고, 일산과 같게 하고 여러 층의 탑과 같이 하며 나무는 용이 서린 듯하며 봉이 나는 것과 같고 풀은 모난 상(床)과 둥근 독과 같은 모든 형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놀래며 웃게 하고, 조화(造花)가 꼭 참꽃과 같아서 참인지 만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으니, 대개 그 천성이 교묘하고 조작하여 진실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
○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어느 일이 조선과 서로 같습니까?”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경도(京都)에 이르러 길에서 물건을 파는 남녀가 외치는 음성을 들으니 우리 서울의 남녀와 흡사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는 모양을 보니 우리나라 중들이 모여 앉아 밥 먹는 모양과 흡사하고, 그 나머지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일이 중국과 서로 같은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나는 중국을 보지는 못하였는데 다만 책에서 전한 것으로 말한다면 일본에서 집집마다 차를 마시는 것과 여자의 머리를 쪽진 모양이 가장 비슷하고, 물건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어깨로 메는 것이 또한 중국 사람들의 삼태기를 메고 시루를 메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에는 세 가지 좋은 것이 있으니, 문둥이 악질(惡疾)이 없고, 저주 고독(蠱毒)으로 사람을 해치는 변이 없고, 백성이 관장(官長)을 죽이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에 음악이 없고 다만 부귀(富貴)한 집에서 손님에게 연회하고 신(神)에게 굿을 할 때에 약간 북, 피리, 비파(琵琶), 노래, 춤이 있을 뿐이다. 내가 대마도 태수의 경저(京邸)에서 음악을 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여러 문사(文士)와 필담(筆談)하기를,
“예(禮)와 악(樂)은 유가(儒家)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귀국(貴國)의 음악을 본 즉 노래는 범음(梵音)과 같고 춤추는 것은 창을 쓰는 형상이나 권법(拳法)과 같으니, 이것으로써 귀국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군사를 연마하는 풍습이 승하고 유교(儒敎)는 흥성하지 못함을 알겠습니다.”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답하기를,
“참으로 바른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는 비록 아주 없다고 하여도 옳습니다.”
하였다.
○ 풍속이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여 귀족의 집이나 민간에서 비록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도 반드시 중국 사람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보물로 삼는다. 내가 일본의 글씨체를 본 즉 모두 홍법대사(弘法大師)의 법첩(法帖)을 모방하고 간간이 홍무격(洪武格)을 쓰는데, 연약하여 뼈가 없고 그림은 무슨 체를 쓰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절묘하고 고와서 강산(江山), 초목(草木), 영모(翎毛) 등속은 절묘(絶妙)한 것이 있으나,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은 틀렸다.
○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詩)와 문(文)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貴賤) 현우(賢愚)를 묻지 아니하고 우러러 보기를 신명(神明)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珠玉)처럼 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들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楷書)나 초서(草書)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하며, 소위 문사(文士)라 하는 자는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와서 역(驛)이나 관(館)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 혹은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詩)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 줄의 필담(筆談)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사해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대개 그들이 정화(精華)로운 땅에 생장하였으므로 본래 문자(文字)를 귀중히 여길 줄 알기는 하나 중국과는 너무 멀어서 평생에 의관(衣冠)의 성한 의식(儀式)을 모르고, 평소에 조선을 높이 사모하는 이유로 그 대관(大官) 귀인은 우리의 글을 얻어서 자랑 거리로 삼고, 서생(書生)은 명예를 얻는 길로 삼고 낮고 천한 자는 구경거리로 삼아서 우리가 글을 써 준 뒤에는 반드시 도장(圖章)을 찍어 달라고 청하여, 진적(眞蹟)인 것을 증명하므로 매양 이름난 도회지나 큰 고을을 지날 때에는 그들을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 일본의 크고 작은 모든 관원(官員)은 인신(印信)이나 부절(符節)을 위에서 받는 규정이 없고 다만 사사로 새긴 도장을 가지고 공문서에 찍으므로, 모든 금령(禁令)을 반포하여 보일 때에는 또한 수압(手押)이 있으니, 모양은 항아리와 같고 획이 크고 정연(整然)하다. 관직이 없는 사람도 조금 글을 아는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字)나 호(號)가 있어서 각각 도장을 두어 개 만들어서 편지나 시편(詩篇)에 쓰되 주홍(朱紅)으로 가늘게 찍는데 전각(篆刻)의 묘함이 중국 사람에게 양보할 정도가 아니다.
○ 일본 사람이 글자를 읽는 음(音)은, 동(東)ㆍ동(冬)ㆍ양(陽)ㆍ경(庚)ㆍ청(靑)ㆍ증(蒸)의 글자를 읽는 것을 예로 들 경우 두 개의 음절로 발음하여 동(東)은 도우, 양(陽)은 요우, 청(靑)은 세이, 강(江)은 예이라 읽고, 진(眞)ㆍ문(文)ㆍ원(元)ㆍ선(先)ㆍ한(寒)ㆍ산(刪)의 글자를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와 대략 같다. 천(天)ㆍ천(千)ㆍ천(泉) 등의 글자는 모두 션[仙]이라 읽고, 기타 소(蕭)ㆍ호(豪)의 글자나 입성(入聲)의 ‘ㄱㆍㄹㆍㅂ’의 글자는 역시 두 개의 음으로 읽고 간혹 우리나라와 방불하다. 그러나 왜인의 혀를 놀리는 것이 본래 가볍고 부(浮)한 것이 많으며, 지껄이는 말이 새소리와 같으므로 전청(全淸)이요 탁음(濁音)이 없으며, 얕은 소리만 있고 무거운 소리가 없어서,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 전탁(全濁)을 내지 못함과 같다. 일찍이 우삼동으로 더불어 음역(音譯)의 같고 다름을 말하여 보았는데,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발음은 탁음이 많고, 조선의 발음은 청한 것이 많고, 일본의 발음은 순청(純靑)이요, 탁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음성이란 것은 각각 풍기(風氣)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선은 중국과 거리가 가깝고 일본은 또 조선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므로 내가 일찍이 말하되, ‘조선은 중국의 음을 그대로 배워서 잘못된 것이요, 일본은 또 귀국의 음을 배워서 잘못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또 말하기를,
“방음(方音)의 길고 짧은 것도 또한 구별이 있으니, 중국 사람은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여 문안(問安)을 하는데 다만 서너 말이면 족한데 조선말로 번역을 하면 그 길기가 배나 되고, 일본은 또 길기가 3배나 되고, 서양(西洋)ㆍ남만(南蠻) 사람들은 그 말의 길기가 일본에 비교하여 또 3배나 되니, 이것으로써 중국과 거리가 멀수록 말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일본의 국경에 들어온 이후로 매양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자기의 소회(所懷)를 말하고자 할 때에 먼저 통역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번역하여 전달하게 하는데, 그 말을 들을 적에는 매우 지루하여 천백(千百)의 곡절이나 있는 것 같다가, 통역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전하는 것을 들으면 두세 가지 일을 부탁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풍속에 문자를 쓰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산전(山田)을 전(畠)이라 쓰고, 십자가(十字街)를 십(辻)이라 쓰는 유인데, 모두 번역만 있고 음은 없으며, 또 글자를 달리 쓰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편지를 남에게 보낼 때에 아무 전(前)이라 할 것을 아무 양(樣)이라 쓰고, 물건을 서로 나눌 때에 아무 물건 얼마씩[式]이라 할 것을 식(式)이라 하지 않고 완(宛)이라 쓰고, 전(殿)자, 어(御)자는 보통 사람의 존대하는 말로 쓰고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에게는 그 아래 사람들이 부르기를 돈우사마(敦于沙麻)라 쓰는데 돈우는 전(殿)의 번역이요, 사마는 양(樣)의 번역이니, 곧 전양(殿樣)이 된다. 그 밖에 존경하는 자제에는 모두 오마이사마라고 부르는데, 오라는 것은 왜말에 어(御)자의 번역이요, 마이라는 것은 전(前)자의 번역이요, 사마라는 것은 양(樣)자의 번역이니, 곧 어전양(御前樣)이다. 내가 관(館)에 있을 때에 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적에는 대개 어선(御扇), 어필(御筆), 어용지(御用紙), 어과자(御菓子)라고 쓴 것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놀래어 퇴각시키려 하였더니, 역관(譯官)이 말하기를,
“왜인의 습속이 이와 같고 본래 참람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고쳐 쓰라 하면 이루 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웃고 그대로 두었다.
○ 일본국의 성(姓)은 본래 평(平)ㆍ원(源)ㆍ등(藤)ㆍ귤(橘) 사성(四姓)이 있었는데, 각기 식읍(食邑)으로써 나누어 씨족(氏族)으로 삼았으니, 두 자 성, 석 자 성은 다 지명(地名)으로써 된 것이다. 중국의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수회(隨會)ㆍ양설힐(羊舌肹)의 자손이 범(范)씨ㆍ양(楊)씨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름에 오랑(五郞)ㆍ삼랑(三郞)ㆍ육랑(六郞)ㆍ칠랑(七郞) 등이 있고, 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 등의 말은 모두 관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니, 마치 원(元) 나라에서 얼굴을 가지고 이름을 노화(魯花)ㆍ불화(不花)ㆍ첩목아(帖木兒)라 지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말로 번역하여 누루(縷縷)라 부르는데, 한 사람의 성명이 많은 것은 8, 9자에 이른다.
○ 왜인의 말에 뜻이 없는 것은 산(山)을 야마라 하고, 바다를 유미라 하고, 물[水]을 민주라 하고, 종이를 가미라 하고, 붓을 후데라 하고, 먹을 수미라 하고, 벼루를 수수리라 하고, 물건의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는 예이라 하고, 좋지 않은 것은 왈이라 하고, 배에 노를 젓는 자가 힘을 쓰는 소리를 낼 때에는 예사예사라 하고, 혹은 야사야사라 하고, 메는 사람은 앞에 사람이 고리와사하면 뒤에 있는 자가 응하기를 고리와시라 하고, 천천히 행할 때에는 소리를 늦추어 이직우이라 하고, 빨리 행할 때에는 급히 부르기를 소로소로라 하니, 대저 겹친말을 많이 쓴다.
○ 국중에 쓰는 언문(諺文)은 48자가 있는데, 자형(字形)은 모두 진서(眞書) 수미의 점과 획을 잘라 만들었고, 음만 있고 석(釋)은 없어 서로 붙여 소리를 이루는 것이 거의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았다. 그래서 그 방음(方音)으로써 방언(方言)에 맞추어 일반 사람이 익히기에 편리하고 통정(通情)하기에 적당한데, 그 언문의 초서가 기괴하여 떨어지는 꽃, 나는 새와 같아서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곧 홍법대사가 만든 것인데, 홍법은 특이한 중이었다. 국중에 간행(刊行)되어 두루 퍼진 그의 필적을 보건대, 살[肉]이 많고 뼈는 작으면서 색태(色態)가 무르익고 고왔다. 왜인의 필법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일본의 방언(方言) 역시 강호(江戶)와 지방의 구별이 있으니, 지방은 약간 느리면서 실(實)하고, 강호는 더욱 가볍고 간단하므로 대마도 사람이 강호에 와서 말로써 많이 말[缺] 조롱을 당하는 것이 곧 우리나라의 서울과 영남과의 사이와 같다. 내가 우삼동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본말을 배운다면 몇 달이면 될까요?”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말은 두어 달이면 되겠고, 조선말은 1년이면 되겠고, 일본말은 비록 총명이 남보다 뛰어난 자라도 3년이 아니면 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왕(百濟王)이 문사(文士)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보내어 비로소 문자를 가르쳐서 여러 해 강습을 시켜서 대략 전한 것이 있었다. 그 뒤에 당 나라 현종(玄宗) 때에 왜인 조형(鼂衡)이 중국에 들어가 이름이 있어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그가 본국에 돌아올 때에 왕마힐(王摩詰)이 시(詩)와 서(序)를 지어 그 일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중로에서 배가 전복되어 죽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천여 년에 일본 사람이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내가 보니 그 풍속이 글로써 사람을 쓰지 아니하고 또한 글로써 공사(公事)를 하지 아니하여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와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글을 아는 자가 없고 다만 언문(諺文) 48자에다가 약간 진서(眞書 한문(漢文))를 섞어서 장계(狀啓)와 교령(敎令)을 하고, 문부(文簿)와 편지를 만들어서 상하(上下)의 정을 통하니, 관백의 지도함이 이와 같다. 그 음역(音譯)을 들은 즉 산천, 지명, 육갑(六甲)이나 성명, 직호(職號)를 모두 방언으로 해석하여 부르고 그 자음(字音)이 또 청탁(淸濁)과 고저(高低)가 없으므로 시를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삼운(三韻)을 가지고 여러 해 동안 공부를 하여 능히 아무 글자는 높고 아무 글자는 낮은 것을 구별한 뒤에 억지로 맞추어 시를 만들고, 글을 읽을 때에는 선후(先後)를 거꾸로 맺는 법을 알지 못하고, 글자마다 애를 써서 그 손가락을 내렸다 올렸다 한 뒤에 겨우 그 뜻을 통하니, 당시(唐詩)에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라는 귀(句)를 읽을 적에는 봉(逢)을 한식(寒食) 밑에 읽고, ‘홀견맥두양류색(忽見陌頭楊柳色)’을 읽을 때에는 견(見)을 양류색의 뒤에 읽어서 문자를 학습하기 어려움이 또 이와 같으니, 비록 높은 재주와 통달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부지런하고 애씀이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마땅히 백 배나 될 것이니, 문인(文人) 운사(韻士)들이 대를 지나도 이름난 자가 없고 그중에 한 두 사람 붓을 잡는 무리도 또한 그 명성을 국중에 날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 원가선(源家宣)이 관백으로 있을 때에 조금 글을 알았는데, 일찍이 사저(私邸)에서 원여(源璵)와 공부를 하였으므로 관백이 된 뒤에 원여를 발탁하여 써서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여는 재주가 족히 고문(古文)을 알 만하고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운치(韻致)가 있어서 그의 저술인 백석집(白石集)이 세상에 행한다. 그의 스승 목하순암(木下順庵)이 또한 박식(博識)하고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므로 일시에 문학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차차 세상에 진출하여 쓰이게 되었는데, 그 문장이 간간이 칭도할 만한 것이 있어 지금까지 강호(江戶)와 지방의 모든 사람이 서림(書林) 예원(藝苑)에 힘을 쓰는 자가 있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대저 그 땅이 양명(陽明)의 구역이 되어 강산이 수려(秀麗)하고 초목이 겨울에도 꽃이 피어 북쪽 오랑캐 털옷 입은 자들과는 자질이 다르므로, 사람들이 대개 총명하고 민첩한 이가 많아서 그들과 필담이나 짧은 편지를 주고 받아 보면 창졸간의 수작에 기이하고 아름다운 말이 많다. 국중의 서적은 우리나라로부터 간 것이 백(百)으로 셀 수 있고, 남경(南京)의 상인들을 통하여 온 것이 천(千)으로 셀 정도이므로 고금의 기이한 글, 백가(百家)의 문집이 민간에서 간행된 것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십 배 뿐이 아니다. 그들 중에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본래 타고난 총민(聰敏)한 성질에다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표절(剽竊)하는 폐단이 없이 익숙히 익히고 오로지 하여 두어(蠹魚 책을 파먹는 좀)가 글자를 파먹어 눈이 밝음과 같으므로 옛글을 토론하여 능하고 못한 것을 평할 때에 ‘이 같은 것은 한(漢)이요, 이 같은 것은 당(唐)이요, 이 같은 것은 송(宋)이다’ 하여, 소견의 정확한 것이 혹 거의 글을 잘하는 선비와 같으나, 그로 하여금 고시(古詩)나 율시(律詩)를 짓게 하면 평측(平仄)이 많이 어긋나고 운치(韻致)가 전혀 상실되어 우리나라의 삼척동자(三尺童子)가 들어도 웃음거리가 될 만하고, 서문(序文)ㆍ기문(記文)ㆍ잡문(雜文)을 짓게 하면 눈먼 뱀이 갈대밭에 달리듯 하여 법도와 기운이 하나도 볼 것이 없으니, 이것은 어찌 인재가 정한 한도가 있어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 토풍(土風)과 정치 교화가 구애(拘礙)시킨 것이다. 내가 처음 대마도에 이르니,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에서 문장을 배우는 사람들은 귀국과 아주 달라서 노력은 엄청 하는데 성취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공이 지금 여기서부터 강호까지 가는 도중에 얻어 보는 시문(詩文)들이 반드시 졸(拙)하여 우스운 것이 많을 것이나 천신만고(千辛萬苦)하여 애를 써서 겨우 그들이 얻은 글들이니, 모름지기 더럽다고 버리지 말고 수용하여 칭찬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그 나라에서 걸출한 사람이다. 능히 3국의 음에 통하고 능히 백가(百家)의 글을 분별하여, 방언(方言) 번역의 같고 다른 것과 문자의 어렵고 쉬운 것에 대하여 가슴 속에 시비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이다.
○ 일본 사람은 글을 짓는 자들이 반드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를 가지고 읽고 익혀 오로지 숭상하므로 심정을 서술한 장서(長書)를 보면 논리가 풍부하고 말이 유창한 것이 있으나, 시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당시(唐詩)를 배우려 하면서도 한 구절도 옛사람의 것에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대저 해외에서 오랑캐의 말을 지껄이는 것이 되어 성률(聲律)이 전혀 어긋나므로 운문(韻文)을 짓는 것이 서술문(敍述文)보다 백 배나 되는 때문이다. 간혹 편지로써 묻기를,
“명 나라 왕감주(王弇州)ㆍ이우린(李于鱗) 등의 문장이 당 나라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나, 그들 중에 명 나라 사람의 문장을 배우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시나 문 가운데 그 땅의 산수를 두고 짓는 자가 쓰기를 진산(秦山)이니 초수(楚水)니 낙양(洛陽)이니 장안(長安)이니 오월(吳越)이니 연(燕)이니 촉(蜀)이니 하였으므로 그 글을 읽으면 일본인 줄을 모르게 된다. 그것은 지명(地名), 인명(人名)이 모두 이상하고 기괴하여 문장을 만들 수 없으므로 중국의 지명을 빌려서 문장을 만든 것이다. 그 땅에 꾀꼬리와 까치가 나지 않는데, 문장에는 꾀꼬리가 울며 까치가 지저귄다는 말이 있고, 음악에는 거문고와 비파를 쓰지 아니하면서도 문장에는 거문고를 타며 비파를 두드린다고 쓰고, 관(冠)이 없는데 또 건(巾)을 비스듬히 쓰고 있다는 문구가 있고, 띠가 없으면서도 금대(錦帶)니 옥패(玉佩)니 하는 문자를 써서 모두 헛된 이름을 쓰고 실지에 맞는 말을 짓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또한 간간이 범하는 일이다.
○ 일본 사람으로서 나와 마주 앉아 시를 지어 주고 받은 자는 대개 추솔하고 막혀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혹시 그가 내어 보이는 평소의 시고(詩稿)를 보면 간간이 한 구(句) 한 연(聯)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 있어서, 즉석에서 지은 그의 시에 비하면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수(特殊)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경(南京)의 해상(海商)들이 매양 서적을 싣고 와서 장기도(長崎島)에 팔기 때문에 순치(順治) 이후에 강남(江南)의 재자(才子)의 시집(詩集)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조선 사람으로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므로 저들이 가만히 호백구(狐白裘)를 도적질하여 진희(秦姬)에게 아첨한 것인가?
○ 임신지(林信智)는 신독(信篤)의 아들로서 그 가벌(家閥)이 글 잘하는 집이므로 매우 재주 있다는 명망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멀고 먼 숭악(崇岳 삼각산(三角山))에 / 邈矣神嵩嶽
풍운이 완연하구나 / 風雲竟宛然
물화는 만고요 / 物華惟萬古
인걸은 천년이네 / 人傑自千年
기린굴(麒麟窟)에 아름다운 구름이 일어나고 / 麟窟祥煙起
봉산에 상서로운 해가 달려있네 / 鳳山瑞日懸
동방에 도로가 두루 통하였고 / 東方通道里
남두성(南斗星)에 분야(分野)를 꼈네 / 南斗夾星躔
아름다운 신가의 선비는 / 濟濟申家子
당당한 한국의 어진 이로다 / 堂堂韓國賢
왕조에서 역사책을 편찬하고 / 王朝稽彼史
종묘에서는 제기(祭器)를 받드는 집사관(執事官)이네 / 宗廟執其籩
이름은 비서성(秘書省)에 높았고 / 名重文郞省
재주는 훌륭한 학사로세 / 才宏學士員
임금의 조칙을 대신 짓는 직무를 맡았으니 / 絲綸嘗屬務
문필에 이미 전권이 되었도다 / 翰墨已專權
비서성에서 임금의 글 초하는 데에 모셨고 / 侍制秘丘上
어좌(御座) 앞에서 은혜를 받았네 / 賜恩淸禁前
장열(張說)ㆍ소미도(蘇味道)가 당 나라 시대에 드러났으며 / 張蘇唐代顯
반고(班固)ㆍ채옹(蔡邕)이 한(漢) 나라에서 이름을 전했네 / 班蔡漢宮傳
문득 사신(使臣)의 임명을 띠고 / 忽見聘交事
예회의 자리에 올랐네 / 斯登禮會筵
장한 놀이가 어찌 쓸쓸하리요 / 壯遊何索落
높고 맑은 흥취가 다시 날리네 / 逸興更聯翩
붉은 기운에 관을 나가는 손이요 / 紫氣出關客
푸른 물결에 바다에 뜨는 신선이로다 / 蒼波浮海仙
옥피리를 불면서 새벽에 말을 먹이고 / 玉珂晨秣馬
비단 뱃줄로 밤에 배를 멈추네 / 錦纜夜留船
객지에서 한 해가 저물려 하는데 / 祗役歲云暮
고향을 바라보매 달이 몇 번이나 둥글었는고 / 望鄕月幾圓
구추(九秋)에 손의 꿈이 고요하고 / 九秋覉夢寂
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그네의 정서가 기네 / 一水旅情綿
역은 홍진의 땅이 닿았으며 / 驛接紅塵地
관은 흰 눈 내리는 하늘에 열렸네. / 館開白雪天
매화를 꺾은 들 어찌 서로 보낼 수 있으랴? / 折梅寧可寄
풀을 깔고 서로 모여 앉아 보세 / 藉草且相牽
칼을 뽑아 기특한 기절을 논하며 / 劍舄論奇節
술과 안주로 좋은 인연 말하네 / 盃盤說勝緣
또 대아의 곡조를 듣는데 / 還如開大雅
붉은 줄의 소리에 세 번 탄식함과 같도다. / 三嘆在朱絃
하였다. 그는 또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지어 주었는데, 시에 이르기를,
대동강 물이 천고의 빛인데 / 大同江水千古色
깊게 일렁거리며 빙둘러서 만 리에 떴네 / 奫淪靡迤萬里浮
높디 높은 저 은하수가 긴 하늘에 걸렸는데. / 倬彼銀河長天掛
서풍 하룻밤에 바다 동쪽 머리에 닿았구나 / 西風一夜東海頭
지금 손으로 무지개를 버티고 가니 / 方今手撑虹霓去
표연(瓢然)하기가 천지 밖에 선선이 된 것과도 같네 / 飄如八極作神遊
깃발이 나부끼며 어디메로 가는고 / 旌旆飄悠何處所
바라 뵈는 곳 구름 기운 단구에 둘렀구나 / 望中煙氣遶丹丘
사신으로 왕래하는 것이 원래 가장 성한 일이라 / 信聘由來最盛事
의관 옥백에 아름다운 계책을 우러르네 / 衣冠玉帛仰嘉謀
그대는 다시 문장을 잘하니 / 君復濛汜堪裁賦
채색 붓을 종횡으로 놀리어 쉬지를 아니하네 / 彩筆縱橫更不休
흰 이슬이 대나무에 스치고 / 白露更拂琅干樹
푸른 노을은 산호의 갈퀴에 가득 차네 / 蒼霞欲滿珊瑚鉤
관산의 한없는 길에 머리 돌이키며 / 回首關山無限路
나그네의 마음 왕찬의 누에 오래 올랐네 / 客心久登王粲樓
베 돛이 이로부터 돌아감이 응당 빠를 것이니 / 布帆從此歸應疾
대붕새 날개 바람 가운데 일월이 흐르리 / 鵬翼風中日月流
보배 피리로 만파식곡(萬波息曲)을 불러내니 / 寶管吹徹萬波息
한양성 위에 오색 구름이 배회하리 / 漢陽城上五雲留
성스러운 시대에 공명이 빛나리니 / 聖代功名終赫奕
두 나라에 명성을 뉘가 능히 짝할 수 있을까 / 兩邦聲譽是誰儔
나와 처음 잠깐 만나서 마음이 깊이 합했으니 / 慚我傾蓋得妙契
비단과 모시로 서로 주매 뜻이 간절함을 어찌하랴 / 縞紵難奈意綢繆
이별가 한 곡조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니 / 離歌一曲人不見
기러기 멀고 먼데 백 년의 가을이로다 / 鴻雁遙遙百年秋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뽕나무 활, 쑥대 화살은 남아의 일이라 / 君不聞桑弧矢男兒事
사방으로 다니는 본 뜻을 마침내 어찌 거두려는고 / 四方素志竟何收
또 듣지 못하였는가, 외국에 교제하는 높은 재주는 사신의 사업이라 / 又不聞專對高才使者業
부지런히 노력하여 조심하소 / 夙夜努力愼前修
하였다. 그 시를 자기로서는 잘된 것이라 이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고, 글씨는 홍무체(洪武體)를 모방한 것인 듯 하나 졸(拙)하고 약하여 가소로웠다. 그의 형 신충(信充)이 나에게 지어준 시도 또한 많은데, 더욱 보잘 것이 없었다.
○ 동계(東溪) 반전작(飯田綽)이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시월 바람이 붉은 비단 갖옷에 차가운데 / 十月風雲紫綺裘
이역(異域)에서 함께 세월 흐름을 슬퍼하네 / 共憐殊域歲華流
채색 무지개 늘어뜨린 그림자 삼천 길이요 / 彩虹落影三千丈
검은 학의 울음 소리 십이루에 들리네 / 玄鶴遺聲十二樓
구름 밖 종소리에 먼데 꿈이 놀라고 / 雲外霜鍾驚遠夢
역정의 밤비에는 맑은 시름이 맺혔네 / 驛程夜雨結淸愁
먼 길에 목과를 주었다고 혐의하지 마시고 / 莫嫌遠有木瓜贈
여주(驪珠) 만 곡을 받은 듯이 여기소서 / 賴把驪珠萬斛酧
하였다. 그 끝에 짧은 편지를 부기(附記)하기를,
“본월 재생명(哉生明 초3일)에 객관에서 만났으나 보름날에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나는 공의 풍채를 사모함이 꿈속에도 아른거립니다. 당일 석상(席上)에서 지어준 품격 높은 시를 가지고 한갓 안면을 대한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비루한 율시(律詩) 한 편을 기러기 날개에 부쳐서 아뢰오니, 그것이 홍교(洪喬)의 버림을 면하여 높은 눈에 접할 수 있다면 천행(天幸)이겠습니다.”
하였다.
○ 설계(雪溪) 정상유기(井上有基)가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이별곡을 파하고 손은 돌아가려 하는데 / 驪駒歌罷客將歸
새벽에 패교를 바라보니 눈물이 옷에 가득하네 / 曉望㶚橋淚滿衣
재택 천 년에 사람이 다 없어졌고 / 梓澤千年人盡去
평원의 열흘 동안 일이 이제는 틀렸네 / 平原十日事多非
부용산 밑에 안계(眼界)가 가이 없고 / 芙蓉山下眼無極
버드나무 나루터에 혼이 날고자 하네 / 楊柳渡頭魂欲飛
바닷물에 아침저녁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우니 / 海水難傳朝夕信
난간에 기대어 섭섭하게 사양(斜陽)을 대했네 / 憑欄怊悵對斜暉
하였다. 끝에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만나 뵌 뒤로 사신의 관(館)에는 영(令)이 엄하여 뜰 아래에 재배(再拜)할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 또 소개와 편지를 통할 수도 없어 헛되이 저문 구름, 봄나무[暮雲春樹]의 생각만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이미 기름칠을 하였다고 들으니, 섭섭하고 한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대개 군자의 벗은 그 마음이 후함과 박함에 있는 것이요, 같고 다름으로써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만난 동안이 지극히 짧은 것이 한이 되니, 어찌 평일에 품었던 바를 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간절한 정성을 꿈에다 의탁하겠습니다. 편지를 대하니 슬프고 섭섭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날씨가 추운 때에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소서.”
하였다.
○ 학정(鶴汀) 계산의수(桂山義樹)가 고풍체(古風體)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봉황루 밖에 금은 궁궐이요 / 鳳凰樓外金銀闕
오양성 위에 여러 신선이로다 / 五羊城上群仙人
어젯밤에 고리와 패로 하늘에서 내려오니 / 環佩昨夜降霄漢
무릉의 복숭아 꽃 일만 년 봄이로다 / 武陵桃花一萬春
나를 보자 흔연히 선약정(仙藥鼎)에 불을 피우게 하더니 / 見我欣然供鼎役
잠깐 사이 옥기린을 타고 갔네 / 頃刻爲御玉麒麟
부상의 푸른 물이 하늘에 넘치는데 / 扶桑碧水蹴天漲
인간에서 다시 길을 묻는 떼 배가 없었네 / 人間無復槎問津
하룻날에 여러분이 바람과 비를 몰아서 왔으매 / 一日諸公驅風雨
아름다운 기운이 도성에 가득한 것을 거듭 보겠네 / 重瞻佳氣滿城闉
남산의 야사는 성이 계인데 / 南山野士原姓桂
청전선(靑錢選)에 그릇 뽑혔으나 석상진(席上珍)은 아니로세 / 謬中銅選非席珍
삼동의 문사에 빙설을 씹었고 / 三冬文史嚼氷雪
한 자루의 보검(寶劍)에 정신을 의탁하였네 / 一把雄劍寄精神
푸른 눈알로 돌아보아 주매 언덕이나 산처럼 중한데 / 靑眸賜顧丘山重
한평생에 곽임종(郭林宗)의 건을 꿈에라도 생각하네 / 百年夢想鉢宗巾
다만 붉은 난새가 하늘을 향해 날까 걱정되어 / 只愁紫鸞慕天翥
북두성(北斗星) 밤마다 높은 자취를 바래네 / 北斗夜夜望後塵
속절없이 이별하는 한을 바람에 부쳐가니 / 空將離恨付風去
그대를 좇아 바로 한강 가에 떨어지리 / 逐君直落漢水濱
하였다.
○ 감곡(甘谷) 원방경(源芳敬)이 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이별시로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 동쪽 군자의 나라 / 海東君子國
덕이 이웃이요 아름다운 이름도 같도다 / 隣德美名均
통신사(通信使)의 내왕은 유래가 오래요 / 聘禮由來久
맹약(盟約)은 좋은 전례를 따랐도다 / 約盟令典循
여러 현인(賢人)의 비단 깃발이 빛나매 / 群賢輝繡節
사신으로 온 이는 사모 쓰고 큰 띠 매었네 / 專對見簪紳
비서의 명예를 흠앙하였는데 / 欽仰秘書譽
다시 옥당(玉堂)의 사람인 줄 알았네 / 更知玉府人
학식은 사고를 알았고 / 學識諳四庫
건필(健必)은 천 근(千斤)의 무거운 것을 당기네 / 毫健挽千匀
웅변은 박연폭포가 내리 쏟고 / 雄辯朴淵掛
높은 표격(標擊)은 백악산(白岳山)이 새롭네 / 高標白島新
신유는 장래를 아는 식견이 있고 / 申繻傳遠識
명도는 본래 온순(溫純)하네 / 明道本溫純
항상 도산의 깊은 데를 열람하였고 / 常閱道山奧
원래 석상진을 지녔네 / 元懷席上珍
들은 것이 많으매 옛 학업을 스승으로 하였고 / 多聞師古業
오절은 남륜을 대대로 하였네 / 五絶世南倫
돛대는 더운 기후(氣候)를 무릅썼는데 / 帆冒炎熱候
관에서 서리 내리는 새벽이 가까웠네 / 館近霜露晨
일산을 기울이니 서로 의기(意氣)가 합하였고 / 蓋傾投意氣
말씀이 높아서 나는 수작하기가 부끄러웠네 / 語高愧敷陳
널리 사랑하매 어리석고 못난 이를 용납하고 / 泛愛容愚劣
풍채는 한 점의 티끌도 없었네 / 丰儀絶點塵
새로 알았는데 사귀는 정이 절로 담박하고 / 新知交自淡
기이한 만남이 어찌 인연이 없으랴 / 奇遇豈無因
하필 혀끝을 움직이랴 / 何用舌端動
목격에 의하여 친해지네 / 情依目擊親
수레를 돌릴 기일이 이미 촉박한데 / 脂車期已促
학을 타고 또한 따라 왔네 / 駕鶴亦隨臻
이역에서 마음이 도리어 장하고 / 異域心還壯
하늘에 드리운 날개를 또한 폈네 / 垂天翼亦伸
돌아가는 길의 봉우리는 창과 같고 / 歸程峯似戟
큰 바다의 물결은 은빛 같네 / 溟渤浪如銀
내일은 그대가 떠난다는 말을 들으니 / 明日聞君去
저문 구름이 나의 마음 상하게 하네 / 暮雲傷我神
꿈에는 봉래산(蓬萊山)의 경치가 남았고 / 夢殘蓬島景
서기(瑞氣)는 부산 바닷가에 가득하리 / 瑞滿釜山濱
만 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생각하는 곳에 / 萬里相思處
누각에 올라 달을 바라보리 / 登樓望月輪
하였다.
○ 미장주 기실(尾張州記室) 목실문(木室聞) 선인편(仙人篇)을 지어 보내어 나에게 이별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옥경의 신선이 여섯 마리 용을 타고서 / 玉京仙人馭六龍
날아서 멀리 부상까지 오려 하였네 / 翶翔遠欲窮扶桑
밤중에 동남에서 태양이 뛰노니 / 夜半東南日毬躍
큰 바다가 솟구쳐 구슬을 부수는 듯 / 大海湧動碎琳琅
문득 고삐를 달려 천상에 올라가 / 倐忽騁轡凌紫虛
아침에는 석수를 먹고 저녁에는 경장을 마시네 / 朝餐石髓暮瓊漿
쌍쌍의 선녀가 봉황의 피리를 부는데 / 兩兩神女吹鳳簫
구름 사이에 흰 무지개 치마가 나부끼네 / 雲間飄颻素霓裳
봉래산을 굽어 보매 오색구름이 보였는데 / 俯觀蓬萊五雲簇
잠깐 동안 멍에를 멈추고 높은 당에 올랐네 / 少時停駕上高堂
산호의 패물이 대모(玳瑁)자리에 빛나는데 / 珊瑚寶玦耀玳筵
신선들이 웃으며 술잔을 함께 들었네 / 仙人解顔共壺觴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편에 지초(芝草)를 희롱하니 / 左把芙蓉右弄芝
가래침이 단약(丹藥)을 이루어 옥상에 가득하네 / 咳唾成丹滿玉床
구름의 모였다 흩어짐이 어찌 그리 쉬운고 / 雲氣聚散何容易
속절없이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니 마음만 미칠 것 같네 / 空望窈冥心欲狂
원컨대 우리로 하여금 날개가 돋쳐서 / 願使吾輩生羽翼
곤륜산(崑崙山)에 가서 길이 놀게 하소 / 翻跡長游崑崙岡
하였다.
○ 복창언(福昌言)이란 사람이 있어 호를 학저(鶴渚)라 하며, 자못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미장주(尾張州)에 숨어서 살았다. 내가 강호(江戶)로부터 돌아올 때에 본주(本州)를 지나는데, 그 사람이 와서 보지는 아니하고 기실(記室) 조문연(朝文淵)을 소개로 하여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편을 지어 떠나는 나에게 보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이웃 우호(友好) 천 년에 덕이 외롭지 아니하니 / 隣好千年德不孤
사절(使節)이 봉래산(蓬萊山) 찾아옴을 기쁘게 보네 / 喜看旌旆訪蓬壺
오색 구름이 자라머리의 경치를 물들여 / 五雲染出鼇頭景
시인(詩人)의 붓 아래 주옥(珠玉)으로 변화하네 / 化作騷人筆下珠
하고 또 이르기를,
만 리 긴 바람에 역마가 우는데 / 萬里長風驛馬嘶
오늘 밤에는 머물러 시를 써 주시오 / 今宵偏要爲留題
그대가 내일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 憶君明日遙歸去
다만 흰 구름이 물 서쪽에 나는 것만 보이네 / 徒見白雲生水西
하였다. 조문연이 그의 시가 보통의 조격(調格)이 아니라고 매우 칭찬하였다. 왜인의 칭하는 상등(上等)에 속한다는 사람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다.
○ 중들의 시가 비록 많으나 더욱 눈에 들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좌화성(佐和城)에서 용담사(龍潭寺) 중 소영(素盈)이란 자를 만났는데, 필담을 밤새도록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또 서로 만났는데 그 중이 자못 친하게 굴며 시로써 나에게 작별하기를,
이별한 뒤에 또 서로 보니 / 別後又相見
찬 매화가 백옥의 자태를 드러내네 / 寒梅逞玉姿
저문 구름 손을 만나는 날이요 / 暮雲逢客日
위수(渭水)의 나무 그대를 보내는 때로다 / 渭樹送君時
교칠을 먼저 서로 약속하였는데 / 膠漆先爲約
금란이 다시 누가 있을꼬 / 金蘭更有誰
비파호(琵琶湖)와 한강(漢江)에 / 琶江兼漢水
밝은 달이 마음 비쳐 아네 / 明月照心知
하였다. 시가 비록 고담스럽고 졸열하나 정경(情景)만은 사랑스러웠다.
○ 내가 우삼동과 시를 주고받은 것이 또한 많은데, 배가 일기도(壹岐島)에 멈추어 바람을 기다릴 때에 우삼동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가을바람이 편의를 빌려주지 않아서 / 秋風難借便
손의 배가 난초(蘭草) 나는 언덕에 매어 있네 / 客舸繫蘭汀
건너는 어구에 불 그림자가 차갑고 / 影冷渡間火
이슬 밖의 별은 빛이 희미하네 / 光微露外星
공연히 귀밑에 눈이 가득하고 / 漫將髩堆雪
다시 자취가 부평초(浮萍草) 따름을 깨달으리 / 仍覺跡隨萍
타루 밑에서 칼을 두드리노라면 / 擊劍柁樓底
이역(異域)의 노래 차마 듣지 못하리 / 吳歌不忍聽
하였다. 배가 남도(籃島)에 이르자 또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편을 지어 부치기를,
목란배가 큰 바다 언덕에 매었으니 / 木蘭舟繫大瀛隈
높은 누각에 이리저리 기대이매 서쪽으로 안계(眼界)가 열리네 / 徙倚高樓西望開
먼 포구에는 구름이 신녀묘를 막았고 / 極浦雲遮神女廟
웅장한 관문에는 달이 패가대에 비치네 / 雄關月照覇家臺
일천 숲의 귤과 유자에 가을 서리가 차고 / 千林橘柚秋霜冷
한 섬에 연기 안개는 저문 빛이 구슬프구나 / 一島煙霞暮色哀
고향 산천에 머리 돌리자 소식이 끊어졌으니 / 回首鄕山消息斷
꿈 가운데 변방의 피리를 서로 재촉하지 말라 / 夢中戍笛莫相催
하였다. 또 오언율시(五言律詩) 두 편을 지어 보냈는데, 그 첫 편에는,
늙어 병들었고 벼슬에 매었는데 / 衰病仍官繫
다시 만 리의 놀이를 하네 / 復成萬里遊
파도는 밤새도록 빗소리요 / 波濤終夜雨
솔과 계수나무 산에 가득한 가을이네 / 松桂滿山秋
기러기는 철 이르게 공중에 날아 지나가고 / 雁早書空度
반딧불 한가로이 물에 비치어 흐른다 / 螢閒照水流
누가 양춘곡(陽春曲)를 연주하여 / 陽春誰奏曲
노부의 시름을 풀어줄 수 있을까 / 能解老夫愁
하였다. 그 다음 편에는,
못난 자질로 희망을 버렸거늘 / 樗材甘自棄
이번에 함께 놀 줄을 어찌 헤아렸으리 / 何料此同遊
바다 구름의 새벽에 거문고 아뢰고 / 琴奏海雲曉
산장(山莊)의 가을에 술잔을 전하네 / 盞傳山榭秋
풍연은 좋은 경치를 제공하는데 / 風煙供勝槪
문장은 명류로세 / 詞藻屬名流
손을 잡고 뜻이 서로 합하니 / 握手意相得
고향 생각 시름이 반이나 감하리 / 鄕心半減愁
하였다. 배가 지도(地島)에 닿자 연일 비바람이 쳤는데, 그는 또 시를 지어 보내기를,
풍우는 언제나 개려는고 / 積陰何日已
나그네 회포 답답하여 트이지 못하리 / 覊抱鬱難開
배 안에서 자매 오랫동안 해안(海岸)에 의지하였고 / 舟宿長依岸
신기(蜃氣)를 뿜으매 곧 누대가 되네 / 蜃噓旋作臺
자주 사공을 불러 말하고 / 頻呼篙子語
때때로 기러기 소리 듣고 슬퍼하네 / 時聽旅鴻哀
술을 마셔도 마침내 소용이 없고 / 樽酒終無賴
가을 바람만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재촉하누나 / 秋風兩鬢催
하였다. 그 끝에 작은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
“연일 음천에 역풍(逆風)이 방해를 하므로 신선놀이의 기약은 아득하고, 또 여러 군자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여 담화하지 못하니,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들으니, 공은 동행한 여러분과 함께 주야로 서로 주고받아 좋은 시가 책상에 가득하다니, 바다 속에 늙은 용왕(龍王)이 필시 생각하기를, 강산의 기묘한 곳에서 공의 창자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시를 있는 대로 발설(發泄)시킨 뒤에야 한 자리 맑은 바람으로써 도와서 장문(長門)의 바다로 바로 보내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없는 학식과 다함없는 재주가 마침내 다할 때가 없을 것이니, 그러고 보면 늙은 용왕의 도모하는 바는 한갓 일 많은 것만 되고 말 것으로서 서로 밝게 알아주는 것이 도리어 나보다도 못하므로 가소롭습니다. 어제 하소(霞沼)와 더불어 시를 논하다가 인하여 말하되, ‘나의 시는 골동품점(骨董品店)과 같아서 집이 넓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기명(器皿)이 많지 아니한 것이 아니나, 한되는 것은 냄새나는 구리쇠와 깨어진 자기(磁器)에 재[灰]와 먼지가 쌓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嘔吐)를 하게만 할 뿐이요, 자네의 시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와 같아서 비록 웅위(雄偉)한 구경거리는 없으나 스스로 맑고 아담하여 사랑스러울 만하다.’고 하였으니, 공은 이 말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내 집안의 추한 것을 밖에 드러내는 것이 되므로 절로 얼굴이 붉어집니다마는 한편으로는 공으로 하여금 한번 웃게 하려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하소는 곧 송포의(松浦儀)의 호인데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재치(才致)와 정(情)은 있으나 기력이 미치지 못하여 고담(孤澹)한 것을 면하지 못하므로 우삼동이 그들끼리 서로 품평(品評)한 말을 기록하여 나의 평론을 듣고자 한 것이다. 내가 편지를 써서 답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편지를 받아보니, 하소와 더불어 시를 논평한 것은, 마치 왕장공(王長公 감주(弇州))의 시 가운데 자기의 시는 큰 바다 붉은 물결[大海紫瀾]로 자처(自處)하고, 이우린(李于鱗)의 시는, 눈속의 아미산[雪中峩眉]으로 평한 것이 지금까지 천하에 이가(二家)의 평이 된 것과 같습니다. 대저 큰 바다는 웅혼(雄渾)한데 비유한 것이요, 아미산은 맑고 높은 것을 말한 것이니, 공의 뜻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골동품점의 먼지 묻은 구리쇠는 정정(程鄭)의 집 물건 아님이 없으니, 곧 하루 아침에 갈고 닦으면 진주(眞珠)ㆍ월패(月貝)와 같게 할 수 있는 것이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도 역시 우로(雨露)의 덕택으로 자라는 가지와 잎이니, 저 자연이 배양(培養)하는 것이 세월이 더 간다면 다른 날에 향기가 산에 가득하여 풍부한 구경거리가 되지 아니할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일본은 좁은 땅이라, 공의 골동품도 일찍이 사람들에게 팔려 본 일이 없고, 하소의 말리화도 그 외롭게 고운 것을 상심할 것이 없습니다. 힘써서 스스로 아끼시오.
하였더니, 그뒤 수일 만에 두 사람이 와서 사례하기를,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권면함과 감탄함이 함께 지극하니, 감히 지기(知己)의 주는 말씀을 잊겠습니까.”
하였다.
○ 섭진주(攝津州)의 문인(文人) 삼택즙명(三宅緝明)은 호를 창명(滄溟)이라 하는데, 평수집(萍水集)이란 책을 가지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면서 편지로 말하기를,
“나의 아우 무충(茂忠)이 호를 석병(石屛)이라 하는데, 연고가 있어 공에게 가 뵙지 못하고, 근간에 대마도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지 및 평수집을 공에게 바치면서 공의 서문을 얻기를 요청하였더니, 그것이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고로 귀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이 올 때에는 과군(寡君)이 대대로 관반(館伴)의 일에 참여하였는데, 나는 곧 과군 휘하의 고구(故舊)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조고(祖考)와 선인(先人)이 모두 사신의 관(館)에 출입하면서 귀국의 여러 학사들과 시를 주고 받고 하였으니, 조고와 박나산(朴螺山), 선인과 성취허(成翠虛)의 관계를 평수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신묘년에 우리 형제가 과군을 모시고 사관(使館)에 출입하여 이동곽(李東郭) 등 여러분과 더불어 함께 놀면서 문묵(文墨)으로써 즐겼으므로 우리들은 스스로 한평생의 기이한 즐거움이요 두 번 있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뜻밖에 공을 만나 반겨주심을 받았으니 내가 귀국의 선생들에게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의 이른바, 전생의 인연이라 한 것이 있는 것입니까, 어찌 그리도 기이합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귀국의 여러 학사에게 교분을 가진 이가 심히 많으나 3대로 서로 계승하기를 우리 형제와 같은 이는 드뭅니다. 세상에 드문 풍류는 또한 손자(孫子)된 복을 볼 수가 있고, 추모(追慕)하는 마음은 더욱 슬픔이 간절합니다. 인하여 함께 선대의 사관(使館)에 출입하면서 지은 모든 작품을 편찬하여 가묘(家廟)에 간직하여 선대에 효도하는 한 도움이 되게 하고 또한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읽어서 두 나라의 성(盛)한 모임을 부러워하며 사모하여 선대의 남긴 덕택을 공경하고, 더욱 선대의 유업(遺業)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평수집(萍水集)을 만든 까닭입니다. 거기에 신묘년의 시를 붙여 편찬한 것도 또한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집이 있는데다 또 귀국의 훌륭한 선비의 글을 얻어서 서문으로 삼아서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더욱 이 문집을 더욱 높이고 믿어서 비단보에 열 겹으로 간직하여 영원토록 전하기를 원하니, 우리 형제가, 바라는 것이 마치 진인(秦人)이 조(趙) 나라 옥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방금 공이 여기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장차 우리로 하여금 오래 품고 있던 소원을 이루어 이 문집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이 하늘이 주는 기회에 맞추어 주는 여부(與否)는 오직 공 한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입니다. 신묘년에 이 학사(李學士) 등 여러 분에게 애란당기(愛蘭堂記)를 청하였더니, 여러 분이 거절하지 아니하고 흔연(欣然)히 붓을 들었는데, 지금 공의 도덕의 높음과 인혜(仁惠)의 두터움으로써 능히 이역(異域)의 사람을 친애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주고, 우리 형제가 또한 어진 이를 깊이 존경하고 덕을 숭상함이 간절하여 능히 다른 나라 군자의 버리는 바가 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 ‘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려고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건져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조선의 대학사(大學士)인데 이겠습니까. 감히 묻노니, 공은 승낙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석병(石屛)의 편지는 글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나 참으로 이른바, 형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 어렵다 할 수 있다. 창명(滄溟)이 시를 짓는 것은 문(文)보다는 못한 듯하나 간간이 운치가 있었다. 내가 처음 대판에 도착했을 때에 그가 곧 와서 서로 종일토록 필담을 하였다. 내가 한 절구(絶句)를 써서 주기를,
이역(異域)에서 같은 선성(先聖 공자(孔子))의 문하에 노니 / 異域同遊先聖門
유가(儒家)의 한 물줄기가 흘러 쉼이 없구나 / 儒流一派正源源
후생이 비로소 은(殷) 나라 예(禮)를 말할 만하니 / 後生始可言殷禮
다행히 기자(箕子)의 나라에 문헌이 있었네 / 幸有箕邦文獻存
하였다. 돌아갈 때에 또 한 절구를 지어 주기를,
돌아가는 배가 눈 속에 온 것이 산음(山陰)과 같으니 / 歸舟乘雪似山陰
흥이 다하고 사귐이 쉬어지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興盡交休淚滿襟
다른 날 높은 누각 머리 돌려 바라는 곳에 / 他日高樓回首處
뜬 구름이 오늘 이별하는 정만큼 깊지 못하리 / 浮雲不及別情深
하였다. 석병이 나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일본과 한(韓)이 지맥(地脈)이 통하였고 / 和韓通地脈
높은 뫼가 신을 두 번째 낳았구나 / 嵩岳再生申
오늘날 문장의 선비요 / 今日文章士
다른날 사직신이 되리 / 他年社稷臣
하였다. 그 형제가 대개 문학으로써 스스로 거벽(巨擘)이라 하여 대대로 천남(泉南)에서 이름이 있으므로 여러 왜인과 상대할 때에 말과 안색이 자못 교만하여 우삼동과 서로 친절하지 아니한 것 같았다.
○ 임신독(林信篤)이 일본 제일의 늙은 석학(碩學)이 되는데, 그의 문도(門徒)들이 나와 필담할 때에 모두 “학문의 순수함과 도덕의 깊기는 우리 정우(整宇)선생 한 분이다.” 하니, 그가 국중에 추앙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 얼굴을 본즉 근신하고 후함은 남음이 있으나 시문(詩文)은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편지로써 작별을 대신하였더니, 그의 회답 편지에 이르기를,
“금년 가을 겨울의 즈음에 조선국 세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 내가 공무의 여가에 두 아들을 이끌고 갔다가 제술관 청천(靑泉) 신 학사(申學士)를 만나 술 마시고 시 짓는 자리를 거듭하여 자못 망형(忘形), 내구(耐久)의 교분을 맺었더니, 얼마 안되어 병들어 누워서 두 사람 사이의 정을 다하지 못하여 자못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감에 다달아 간절하게 편지를 보내어 속 마음의 정곡을 토로(吐露)하여 주셨습니다. 무릇 이별이란 것은 인간에게서 중한 일이니, 처량하게 간장을 녹인다는 것은 장부의 정이요,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것은 아녀자(兒女子)의 정입니다. 옛적에 문절(文節)이 자고(子高)와 이별할 때에는 손을 쑥 빼어서 갔고, 범단(范丹)이 왕환(王奐)과 이별할 때에는 옷을 떨치고 간 것은 이별로써 정에 관계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멀어 두 번 모일 기약이 없으니 다른 날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고시(古詩)와 율시를 두 편 화답한 것은 두 아들이 기뻐하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례하는 시를 짓지 못함에 정은 길고 붓은 짧아 이렇게 초초히 올립니다.”
하였다. 오직 이 편지 한 장이 소박(素朴)하고 솔직한 데에 가까웠다.
○ 담 장로(湛長老)는 나와 더불어 교분이 가장 깊어서 서로 주고 받은 시편이 한 권 한 축(軸)이나 되나 시는 모두 졸(拙)하므로 다만 그 긴 편지 한 장을 기록한다. 편지에 이르기를,
“근일에 짧은 편지를 올려 겨우 안부를 묻고는 탈 배가 총총하여 이미 기양(岐陽)에 도착하자 회답한 글을 받았습니다. 공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지위에 있었으면서 우리 불문(佛門)의 경전(經典)에 유의하였으니, 젊은 학사가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박식하며, 운치가 있습니까? 내가 전일 풍도(風度)를 엿보고서 실로 운치 있는 분인 줄을 알았습니다. 깊이 흠앙하므로 말을 다 진술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서 한 절에 들어갔다가 한 절로 나와서 고생살이 하느라고 스스로 격려(激勵)하기 어려워 둔한 자질이 일찍이 불조(佛祖)의 울타리도 엿보지 못하고, 그럭저럭 20, 30년의 세월만 소비하고 다만 깊은 숲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무 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초목과 함께 썩으려고 도모할 따름이더니, 뜻밖에 외람되이 뽑혀서 관사(官寺)의 주지로 있다가 다시 왕명(王命)을 받들어 세 사신을 접반(接伴)하게 되어 인하여 학사 및 세 서기와 더불어 마음이 서로 통하여 후의(厚誼)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분수에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이 많을 뿐입니다. 주신 편지 가운데 ‘선가(禪家)의 정혜(定慧)는 그 요점이 다만 거짓의 마(魔)를 쫓아버리고 망상(妄想)을 막는 데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의 도리는 이상하고 요망한 술법이 아니며 또 아득하고 미묘하고 기특한 일이 아니라, 다만 뭇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자리를 발명하게 할 따름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옛적이나 지금이나 장래에도 관계가 없고 초연(超然)하여 견줄 데가 없는 것이요, 또 붓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매 그 도가 점차로 낮아지고 쇠퇴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양(梁) 나라 보통(普通) 연간에 우리 달마조사(達磨祖師)가 불(佛)의 심인(心印)을 차고 동방으로 와서 송산(菘山)에 이르러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不立文字直指人心]으로써 긴요한 것을 결단하여 갑자기 기틀을 바꾸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교 밖의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이라는 것입니다. 신광(神光)이 세 번 절하고 분명히 받아서 교 밖의 종(宗)이 천하에 두루 선포되어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잇따라 귀의(歸依)한 자가 많으니, 장상국(張相國 상영(商英)), 유자사(柳刺史 종원(宗元)), 황태사(黃太史 용(容)), 소한림(蘇翰林 식(軾)), 송문헌공(宋文憲公)같은 이는 벼슬과 공명(功名)과 과거(科擧), 결혼을 떠나지 아니하고도 바로 가리키는 도리[直指道]를 발명하여 기운이 불조(佛祖)를 삼키고 눈이 건곤(乾坤)에 높았습니다. 이것은 문자와 언어를 쓸어버리고 홀로 해탈(解脫)함을 증득(證得)한 것입니다. 비록 이와 같으나 또 문자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어찌 말세(末世)에 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사(祖師)가 육문(六門)의 문자가 있어서 아손(兒孫)들에게 남겨 주었으니, 또 문자반야(文字般若)의 힘이 아닙니까. 도는 본래 말이 없는 것이지만 말을 빙자하여 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것입니다. 도와 문자를 누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이른바, ‘자신을 극복하여 예(禮)를 회복하라’한 가르침도 공자의 뜻을 환히 통하면 어찌 반드시 문자 언어에 구애되겠습니까. 그런즉 유교와 불교가 그 근원이 같은 것임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유아풍류(儒雅風流)의 선비가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조를 시로 지을 때에 서로 화답하는 것도 역시 이에 있을 것입니다. 공은 제술관의 임무를 띠고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높은 풍류, 아담한 운치와 격앙(激昻)한 뜻과 절조로 명망이 더욱 높아지고 연령이 더 높아질수록 명성과 빛을 상국(上國 조선)에 떨치니, 비록 장상국, 유자사, 황태사, 소한림의 무리에게라도 혹 못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사절로 와서 멀리 창해를 건넜으니, 어찌 도의(道義)의 있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빌고 비나이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서기(書記) 삼군(三君)도 전단수(旃檀樹)의 수풀 가운데 전혀 잡목이 없는 격이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원컨대, 그들에게도 나의 이 성의를 같이 전달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 국중에 문장의 재주가 어린 아이들 중에 많이 있으니, 대판의 수족동자(水足童子)는 나이 14세요, 북산동자(北山童子)는 나이 15세요, 왜경(倭京)의 명석경봉(明石景鳳)은 나이 18세요, 강호의 하구호(河口皞)는 나이 17세인데, 읽고 짓는 것이 이미 풍부함은 물론이요, 모두 얼굴이 옥설(玉雪)과 같고 눈길이 단정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예법 속에서 자라난 사람과 같으니, 대개 그 자질의 청명한 것은 강산의 정기를 타고 난 것이나 마침내 정치 교화의 배양(培養)을 받지 못하고 명주(明珠)로 하여금 연석(燕石)이 되게 할 수가 있다.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장택학(長澤學)과 장택주(長澤主)형제가 있어 모두 눈이 멀었고 모두 능히 시를 배웠는데, 한번 보기를 원하므로 괴이히 여겨 불러 들여서 운(韻)을 내어 시험한즉, 운을 부르자 문득 대답하는데 지은 시가 모두 감개(感慨)한 생각이 있었다. 그 호를 물으니, 하나는 불원재(不怨齋)라 하고, 하나는 불우재(不尤齋)라 하였다. 내가 차운하여 주었다.
일본의 성리학(性理學)은 하나도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대개 그 정교(政敎)와 민풍(民風)이 군사가 아니면 불(佛)이므로 국내에 문묘(文廟)와 향교(鄕校)도 공자를 제사지내는 곳도 없고 또 임금과 부모의 상복(喪服)도 없으니, 그 인민이 착한 본성을 하늘에서 타고 났지만 어디로부터 도덕을 들어서 알겠는가. 회진후(會津侯) 원정지(源正之)는 귀공자(貴公子)로서 작(爵)을 받은 사람인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데에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교훈을 준수한다 하니, 또한 특이한 일이다. 호를 암재(闇齋)라 하는 산기씨(山崎氏)가 있어 또 정자와 주자의 학을 사모하여 소학(小學)의 목차(目次)에 의방하여 송유(宋儒)의 언행(言行)을 편찬하여 책을 만들어 세상에 전한다.
목하순암(木下順庵)은 이름이 정간(貞幹)이니, 학식이 넓고 행실을 닦았는데, 원여(源璵)ㆍ우삼동(雨森東)의 무리가 모두 그 문인(門人)이었다.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공정(恭靖)이라 하였다 한다. 근세에 경도(京都) 사람 이등유정(伊藤惟貞)이란 자가 있어 학문으로 국내에 이름이 나서 자기의 견해를 책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그의 설(說)은 성리존양(性理存養)과 같은 학설을 무익한 것이라 하고, 다만 일상(日常)에 실지로 도(道)를 행하는 것만을 힘쓰게 할 것이라 하고, 그가 저서(著書)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길 적에 항상 이르기를,
“무릇 사람은 효제충신(孝悌忠信)만이 일상(日常)의 몸에 절실한 공부이니, 학자는 성리(性理)가 어떠한 것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率性之謂道] 한 교훈은 도가 성리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요, 도를 행하는 자가 성리로써 공부를 삼으라 한 것은 아니다.”
하고, 그밖의 의논도 선유(先儒)에게 위배됨이 많은데, 일시의 선비들이 혹은 숭배하여 믿는 자도 있고 혹은 고집함을 나무라는 자도 있었다. 나는 그 문집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번 모든 문사와 담화할 때에 이등씨(伊藤氏)의 설을 들면서 그 옳고 그른 것을 묻는 이가 있을 때에 매번 말하기를,
“이것은 순경(筍卿)의 성악설(性惡說)과 죄가 같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따르는 자는 사람의 도리를 금수(禽獸)와 초목의 성(性)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혹은 나의 말을 옳다 하였다.
○ 세속에서 전하기를,
“일본 흠명천황(欽明天皇) 때에 백제(百濟)의 성명왕(聖明王)이 불경을 보냈으므로 일본에 불법이 있게 된 것이 이때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중국을 거쳐 인도에 들어가서 종법(宗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한다. 지금 보니, 일본의 풍속이 대저 불교를 숭상하나 평민이 중이 된 자는 열에 두셋이 못 되고, 능히 불경을 읽어 법사(法師)가 된 자는 셋에 한 사람도 못 되니, 그것은 국법이 심히 가혹하여 백성이 공정(空丁)이 없고 또 중이 먹고 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절은 민간에 있어서, 관광(觀光)할 때에 여자와 중들이 섞여 앉으니 모양이 추솔하고 행실이 없다. 혹은 고기를 먹고 음행(淫行)을 하면서 다만 중의 옷만 입고 칼을 차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경(經)을 말하고 불(佛)을 배우는 자가 매우 적다.
○ 천황(天皇)의 법은 불조(佛祖)와 같아서 모든 아들은 법친왕(法親王)이 되고, 모든 딸은 비구니(比丘尼)가 되고, 그 신하는 법인종(法印宗)이라 하는데, 모두 문서ㆍ역사ㆍ천문(天文)ㆍ역법(曆法)을 맡았다. 국중에 절이 오산(五山)이 있어 중을 주지관(住持官)으로 임명하여 칭호를 화상(和尙)이라 하고 또한 장로(長老)라고도 칭하는데, 모두 천황이 임명한다. 대마도의 이정암(以酊庵) 및 사신을 접반(接伴)하는 장로도 또한 오산 중에서 청하여 돌림 차례로 파견한 것이니, 용창(龍菖)은 제2산(第二山)의 주지요, 성담(性湛)은 제5산의 주지이다. 내가 사관(使館)에서 데리고 시를 지은 자로서 중 소영(素盈)ㆍ주염(周恬)ㆍ요혜(了慧)ㆍ시습(時習)ㆍ정간(貞侃)ㆍ선의(禪儀)ㆍ주경(周鏡) 등은 모두 관품(官品)이 없고, 그 시는 혹 우열이 있으나 족히 말할 것도 못되었다. 그 교리(敎理)는 조동종(曹洞宗)과 임제종(臨濟宗) 두 파가 있으나 도를 깨달은 자는 더욱 적다. 우리나라 송운대사 유정(松雲大師惟政)의 필적이 강호에 있는데 내가 보니, 묵은 종이가 색이 변하였으나 필적은 알아볼 수 있었다. 왜인들이 보물로 간직하여 백 년 동안 사모하고 귀중히 여기며 모든 중들이 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을 알고 그 시를 들려주기를 원하였다. 내가 서산집에 있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편을 써 주었더니, 그들은 곧 흠모해 마지않았다.
○ 의학(醫學)은 가장 숭상하는 바로서 천왕으로부터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가 모두 의관(醫官) 두어 사람씩을 두며 봉급도 매우 후하다. 그래서 의관은 모두 부자가 된다. 그 풍속이 글을 배운 자는 태반이 의원(醫員)이 되는데 그 복색은 중으로 더불어 대략 같으며, 다만 칼 한 자루를 차고 머리를 다 깎았다. 내가 축전주(筑前州)에서는 소야현림(小野玄林)을 보았고, 강호에 이르러서는 임태의(林太醫)의 부자와 즐겁게 사귀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문장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이 선량하였다. 북미춘포(北尾春圃)는 호를 당장암(當壯庵)이라 하는데, 저술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포부가 있는 것 같으므로 내가 서문을 지어 주었다. 제약법(製藥法)이 정묘(精妙)하여 수도(首都)와 지방의 거리 길가에 금패(金牌)가 총총하여 환(丸)ㆍ단(丹)ㆍ탕(湯)ㆍ산(散) 등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화중산(和中散)과 통성산(通聖散)이 가장 많았다. 그것은 아마 사람들의 성질이 조급하여 기뻐함과 성냄이 편벽되고 또 덥고 따뜻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병이 대부분 담(痰)ㆍ화(火)ㆍ체(滯)와 같은 울증(鬱症)에서 생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약방문이 통화 이중(通和理中)하는 화제(和劑)에 더욱 치중한 듯하다.
○ 여색은 요염하고 고운 것이 많아서 비록 연지와 분을 바르지 아니하여도 대개 부드럽고 희다. 분을 바르고 화장을 짙게 한 자도 살결이 부드럽고 미끈하므로 자연히 본색과 같으니, 눈썹을 그리고 불그스레한 안색, 검은 머리, 화잠(花簪)에 오색 무늬의 비단 옷을 입고, 띠로써 허리를 묶고 부채를 안고 선 자를 바라보니 사람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에는 동백 기름과 같은 향고(香膏)를 모두 써서 머리털 빛이 칠(漆)과 같았다. 관백 이하 각 주 태수의 비빈(妃嬪)의 칭호는 반드시 어내실(御內室)이라 하여 각각 풍랑(豐娘)ㆍ태랑(泰娘)ㆍ혜랑(惠娘)ㆍ익랑(翼娘)의 칭호가 있다. 귀가(貴家)의 여자는 출입할 때면 가마를 타고 관광할 때에는 비단 창에 기대어 주렴을 드리운다. 그 나머지 밖에 있는 자는 혹은 앉거나 설 때에 손에 그림 수건을 가지며,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맑았다.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는 좋아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혹은 손으로 부르는 형용을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이 젊은 왜남(倭男)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어루만지면서 서로 좋아하여 사람 많은 데나 넓은 길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국중에 인구가 매우 번성한데 여자가 남자에 비하여 더 많다. 결혼은 동성(同性)을 피하지 아니하여 사촌남매끼리도 서로 혼인을 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므로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禽獸)와 같다. 집집마다 반드시 목욕탕의 설비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을 한다. 대낮에 서로 정사(情事)를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 하는데, 각기 색정(色情)을 돋우는 기구를 사용하여 즐거움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곧 사람마다 춘화도(春畫圖)를 품속에 지녔는데,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각기 남녀의 교접하는 모습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묘사하였으며, 또 춘약(春藥) 몇 가지가 있어 그 색정을 돋운다고 한다.
○ 또 풍속에 각 지방에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을 설치하는 법이 없으므로 부상(富商)의 여행하는 자들이 모두 지내는 곳마다 사사로이 창녀(娼女)를 접하므로 이름난 도시의 큰 객점(客店)에는 모두 창루(娼樓)가 있는데, 대판(大坂)의 번화한 것은 가장 화류(花柳)로써 이름이 났다. 층층한 다락과 구불구불한 집이 길거리에 연하여 병풍ㆍ장막ㆍ이불ㆍ베개ㆍ술병ㆍ다당(茶鐺) 등 속이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되었고, 그 가운데 각각 한 미인을 두고 위에 금방(金?)을 달기를 상상창루(上上娼樓)라 하였는데, 호협한 남아들이 금을 싸가지고 온 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간다고 한다. 상상(上上)의 집이라도 하루의 화채(花債)가 백금(白金) 열 냥에 지나지 아니하고, 중ㆍ하는 차등이 있다고 한다. 내가 통역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웃으며 흉보기를,
“옛적부터 정(情)과 색(色) 가운데에 빠져서 혹한 남녀들이 있어, 남자는 인연을 기뻐하여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여자는 정에 감동되어 한 푼의 돈도 사랑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상상(上上)의 풍류스러운 일인데, 지금 너희들이 말하는 상상주(上上姝)라는 것은 추잡한 놈이나 이름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단지 돈만 보고 애교를 바친다 하니, 이것은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하품(下品)으로서 몇 푼어치도 못 된다.”
하였더니, 통역이 말하기를,
“나라의 풍속이 서로 다릅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일본의 호귀(豪貴)한 집에서 그런 특수한 미인을 사가지고 이익을 얻는 물건으로 삼기 때문에 소위 창루(娼樓)에 화려한 온갖 기구를 다 주인이 설비하여 놓고 문에 간판을 붙여서 그 값을 정하고는 매일 세(稅)를 받아가니, 저 미인들은 감히 제가 임의로 할 수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서러워하는 자도 있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억지로 몸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판에 이름 있는 창녀의 이름 및 나이가 얼마인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화자(花紫)는 22세요, 약자(若紫)는 20세요, 소자(小紫)는 15세요, 만주춘(滿州春)은 20세요, 보야향(保野香)은 25세요, 발지(發枝)는 20세요, 우영(友影)은 17세요, 촌춘(村春)은 16세요, 촌우(村雨)는 21세이니, 이들이 상상(上上)ㆍ상중(上中)의 미인입니다.”
하였다.
○ 일본에 남창(男娼)의 곱기가 여색보다 배나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혹하는 것이 또 여색보다 배나 된다. 국중의 사내아이가 나이 14, 15세(歲) 이상으로 용모가 특수하게 아름다운 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연지분을 바르고 채색 비단옷을 입히고, 향사(香麝)와 진기한 패물로 꾸며 그 가치가 천금에 해당한다. 관백 이하 부호(富豪)와 일반 백성이 다 그것을 사서 데리고 있어 앉으나 누우나 출입할 때에 반드시 딸려서 추행을 실컷 하고 혹은 밖의 사람과 통하면 질투하여 죽인다. 그들의 풍속이 남의 처나 첩을 몰래 통하는 것은 쉬운 일로 알아도 주인 있는 남창에게는 더불어 말도 웃지도 감히 못한다. 우삼동이 저술한 문고(文藁) 가운데 귀인들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한 글에 이르기를,
“왼쪽에는 붉은 치마요, 오른쪽에는 어여쁜 총각이다.”
라고 한 문구가 있었다. 내가 그 문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른바 어여쁜 총각이란, 소위 남창(男娼)을 말합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의 풍속이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천하가 동일한 바이나 오히려 음(淫)하고 혹(惑)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어찌 양(陽)만 있고 음(陰)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우삼동이 웃으며,
“학사(學士)는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였다. 우삼동과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도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보면 그 나라 풍속의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겠다.
○ 장기도(長岐島)는 비전주(肥前州)에 속하는데, 사신 행차의 경과하는 곳이 아니므로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실로 해외 여러 나라가 모이는 구역으로써 남경의 장사꾼들이 항해(航海)하여 온 자가 혹 왜녀를 관계하여 자식을 낳고 왕래하는 때문에 왜인이 그로 인하여 중국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혹은 중국말도 통한다. 그러나 배운 바 어음(語音)이 소주(蘇州)ㆍ항주(杭州)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 이하의 지역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배운 북경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또 남만(南蠻)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역을 하는데 들으니, 그 복장(服裝)이 머리털을 뭉쳐 매었으며, 걸터앉아 아직도 위타(尉佗)의 옛 풍속이 있고 아란타국(阿蘭陀國) 사람들은 가장 이상하여 머리털이 길지도 않은데, 뒤에서부터 얽어 매었으며, 붉은 비단 전립(氈笠)을 쓰고 구슬 신이며, 옷은 모두 기이한 비단인데, 좁아서 겨우 몸을 용납할 만하고 바지도 또한 겨우 두 다리를 꿸 수 있어 굴신(屈伸)을 할 수 없어서 사람마다 호상(胡床) 한 개씩을 끼고 다니다가 앉을 일이 있으면 문득 걸터앉아 발을 편다. 풍속이 문서가 없고 길고 짧고 느리고 급한 획(畫)으로써 모든 일의 더디고 속한 부호(符號)로 삼고, 온갖 물건이 사치하여 옷에 한 점의 더러움도 없고, 성정이 탐하고 음란하여 오기만 하면 반드시 왜녀와 서로 사귀어 밤낮으로 희롱하여 즐기므로 장기(長崎)의 창루(娼樓)에서는 매양 외국인을 접하여 진기한 보물을 얻는다 한다. 내가 묻기를,
“일본의 국법에 이미 외국인과 교통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니, 외국인이 좋아하는 여자를 혹 싣고 갈 수도 있는가?”
하였더니, 통사가 말하기를,
“교통하는 것은 비록 금하지 않으나 다만 싣고 가지는 못하게 하고, 그들이 낳은 자녀는 마침내 일본 사람이 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양국 사람 이마두(利瑪竇)는 아마 이상한 사람인 모양인데, 그의 경력과 기록한 바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천지가 생긴 이래로 그런 설(說)을 하는 사람은 홀로 이마두 만이 있을 뿐이므로 내가 본래 기이하게 여겼다. 지금 들은즉 서양국 사람도 또한 장기도와 교통한다 하니, 혹시 그 사람의 행적을 전한 바가 있었는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장기에 와서 무역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라 무식하여, 별로 신빙(信憑)할 만한 문답도 없으나 다만 들은즉 전년에 배 한 척이 일본의 남해에 와서 닿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서양국의 교주(敎主)라 칭하면서 그 임금의 명령으로 만국을 교도(敎導)한다 하는데, 그의 소위 교(敎)란 것은 이마두를 성이라 하고 말이 황당하고 해괴하므로 국가에서 그를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금지하니, 그들이 노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은 대소(大小)의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일본의 서남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작은 것은 중산주(中山主)라 하는데, 옛적부터 일본에 조공(朝貢)하였다. 들으니 그 의복과 언어가 왜인과 대략 같으나, 사신으로 온 관직이 있는 자의 쓴 사모(紗帽)가 우리나라의 사모와 같으면서 작고, 공복(公服)도 또한 단령(團領)의 제도가 있는데 3년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러 와서 살마주(薩摩州)로부터 상륙(上陸)하여 강호에 이르러 예(禮)를 행하고 간다한다. 내가 우삼동에게 유구국의 풍속과 인물에 대해 물었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옛적에 명 태조(明太祖)가 명령하여 중국의 24성(姓)을 보내어 유구(琉球)에 살게 하였는데, 그 자손이 지금 10여 성이 있어 대대로 문학을 하여 관인(官人)이 되었으므로 관인의 의복은 아직도 중국의 옛 풍속을 보존하였고, 평민은 일본과 다름이 없어 다만 긴 옷만 입고 바지는 없으며,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모든 공인(工人)들이 모두 한 구역에 모여 서로 섞여 살지 아니하며 그 만든 물건이 반드시 정묘(精妙)하여 일본에서 쓰는 대모빗[玳瑁梳] 및 겹돗자리[重茅席]가 모두 유구국에서 나옵니다.”
하고, 인하여 사관(使館)에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유구 사람의 손으로 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제도를 본즉, 왜국 자리와 길고 짧은 것은 차별이 없으면서 띠[茅] 빛이 매우 누렇고 부드럽고 질기고 단단하고 빽빽하여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게 생겼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서울에 한 천인(賤人)이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제주(濟州) 바다에서 풍파에 표류하여 유구국에 이르렀더니, 온갖 공인의 사는 곳이 각각 부락이 있는데, 저는 피혁공(皮革工)의 구역에서 1년을 머물렀습니다. 남녀의 의복, 음식, 언어는 한결같이 일본과 같았으며, 그 나라에서 일본에 조공(朝貢)하므로 임금이 저를 일본에 보내주어 다시 동래로 왔습니다.”
하던 말이 기억이 났다. 지금 우삼동의 말한 바와 서로 부합하였다. 또 우삼동에게 묻기를,
“유구 관인(官人)의 글을 아는 사람이 혹 전한 바 시문(詩文)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정총예(程寵乂)란 자가 있어 중국 서호(西湖)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서자호 머리에서 죽지사를 부르니 / 西子湖頭唱竹枝
지나간 옛 일이 사람의 관심을 끄는구나 / 不堪往事繫人思
대낮에 파도는 전왕의 쇠뇌요 / 波濤白晝錢王弩
푸른 산 바람 비는 육수부(陸秀夫)의 사당이네 / 風雨蒼山陸相祠
옷에는 천축사(天竺寺) 길의 구름 향기가 젖었고 / 衣濕雲香三竺路
행장에는 버들 푸른 육교(六橋) 시(詩)가 남았네 / 囊餘柳色六橋詩
동해에서 온 사신의 뜻을 가지고 / 難將東海勞臣意
매화 심던 처사에게 말하기 어렵구나 / 說與栽梅處士知
하였는데, 《설당연유초(雪堂燕遊草)》 한 권이 세상에 전합니다.”
하였다.
○ 우삼동이 일찍이 강호 객관(客館)에서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회(所懷)가 있는데 틈을 타서 말하고자 합니다. 일본과 귀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의(信義)가 서로 맞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조선 국왕이 과군(寡君)과 서로 공경하는 예의(禮儀)로 국서를 통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사(公私)의 문서에 반드시 극히 높이는데, 귀국 사람의 저술한 문집을 보면 그중에 말이 우리나라에 관한 것은 반드시 왜적(倭賊)이니 만추(蠻酋)니 하여 추하게 여기고 멸시함을 함부로 한 것이 차마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우리 문소왕(文昭王) 말년에 우연히 조선의 문집을 보고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어찌 조선이 우리를 모욕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하면서, 평생토록 한을 품었는데, 오늘날 여러분이 과연 이 뜻을 아시오?”
하면서, 말과 기색이 심히 불평하여 성내는 심정이 점점 드러났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알기 쉬운 것인데, 귀국이 양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이 본 우리나라 문집이 어느 사람이 저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임진란(壬辰亂) 뒤에 간행(刊行)된 글들입니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철천한 원수가 되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수치와 욕됨과 생령이 피를 흘린 것은 실로 만고에 있지 않던 변이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으로서 누가 그의 고기를 찢어서 먹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로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노(奴)와 적(賊)이라 말을 함부로 하고 글에 나타난 것이 진실로 마땅히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성조(聖朝)에서 생민(生民)을 인애(仁愛)하여 해관(海關)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서로 통하고 또 일본의 국토에 이미 수길의 남은 종자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친목을 도모하여 국서가 서로 연달아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덕의(德意)를 우러르니, 어찌 감히 다시 묵은 원한을 끄집어 내어 말에 나타내겠습니까. 근자에 대판에 이르러 평가(平家)의 옛터를 보니, 머리털이 오히려 쭈삣쭈삣 하였습니다.”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여러 종자(從者)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왜인이라 칭하니, 또한 평소에 바란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군이 무슨 유감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미 이르기를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 뒤에는 원컨대 하인들에게 신칙하여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筆帖)에 쓰기를 당인의 필첩이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民俗)이 옛적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한 때문에 당인이라 칭하니,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수길이 이미 귀국의 옛적 임금이 되었으니, 군도 또한 그의 이름자를 휘(諱)하고 그의 악한 것을 숨기는 뜻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는 시랑(豺狼)의 성품이 인간의 액운(厄運)에 응하여 태어난 자이므로 참혹히 도륙(屠戮)한 것이 귀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전 가족을 죽여 종자도 없게 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의 고조ㆍ증조 이상이 대대로 우삼(雨森)의 수(守)가 되어 성을 우삼이라 하였더니, 또한 그에게 멸족(滅族)을 당하였는데, 한두 사람 잔약한 자손이 민간에 숨어 죽음을 면하여 요행으로 종자가 남았습니다. 매양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실로 이가 갈리는 통분함이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러면 수길이 일본에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공덕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수길 이전에는 일본 66주(州)가 각각 나라를 세워 서로 공격함이 많이 있었으므로 명 나라 때에 일본 여러 섬에서 중국을 침노한 것이 종종 끊이지 않은 것은 여러 분이 반드시 명사(明史)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수길이 전쟁을 극도로 일삼아서 그것을 모두 평정하여 통일하였으니,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이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할 때에 청정(淸正)이 가장 흉악하고 독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원수로는 반드시 그를 첫 손가락으로 꼽는데, 만약 그의 자손이 관(官)이나 민(民)이 되어 우리 사신 행차와 접촉하는 사이에 끼었다면 대면하여 담화할 수 없으니, 군은 우리를 위하여 분명히 그 사람을 가리켜 주시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천도(天道)가 심히 밝아서 당시의 모든 장수 중에 사람을 많이 죽인 자는 다 자손이 없는데, 청정이 어찌 후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들은 바에 의하면, 원여(源璵)란 자는 본래 미천(微賤)한 가문에 났으면서 전 관백(關白) 가선(家宣)의 총애를 받아서 벼슬이 축후 수(筑後守)에 이르렀는데, 재주를 믿고서 제도를 변경하였다. 신묘년에 우리 국서에 회답할 때에 우리 어휘(御諱)에 범한 것이 있어 서로 다툴 때에 원여가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신독(林信篤)이란 자가 그른 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 무릇 그의 주장하는 것이 많이 이의(異議)를 고집하므로 종실(宗室)ㆍ대신(大臣)이 모두 원망하였다. 지금의 관백이 계승한 뒤에 곧 원여를 내쫓고 임신독을 친근히 하므로 원여의 당은 모두 벼슬길이 막혀서 감히 유관(儒官)이 사신과 교제하는 자리에 참예하지를 못하고 우삼동도 원여의 동학(同學)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마도의 기실(記室)로 있었다. 우삼동이 일찍이 말하기를,
“백석공(白石公 원여의 호)이 만약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더라면 우리 무리도 또한 길이 트일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백석은 왜 벼슬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늙고 병들었다고 답하였다. 어느 곳에 사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집은 강호에 있는데 문을 닫고 일을 사절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일이 관백의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기휘(忌諱)하는 것이나 그 기색을 본즉 스스로 불평하였다. 국서를 전한 뒤에 나와서 우삼동에게 이르기를,
“귀대군(貴大君 관백(關白))이 검소하고 간솔(簡率)하여 매우 임금의 도량이 있으니, 태평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덕은 그러합니다마는 자고로 어진 신하를 쓰면 다스려지고 간사한 신하를 쓰면 어지러운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뜻이 가리키는 바가 있는 듯하면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역참(驛站)으로 한 문사가 찾아와서 보고 필담으로 말하기를,
“공이 강호에 있을 때에 몇 사람의 문사(文士)를 보았습니까?”
하여, 답하기를,
“임봉강(林鳳岡)의 제자 수십 명을 보았습니다.”
하니, 그 손은 또 써서 보이기를,
“내가 듣기로는 임봉강은 시문(詩文)이 치졸하다고 하던데 제자가 어찌 그리 많답니까?”
하였다. 나는 이미 그 눈치를 알고 곧 종이 끝에다 쓰기를,
“말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그 손은 앉은 자리 끝에다 직접 글자를 쓰기를,
“그들은 가소롭고 가소로운 자들입니다.”
하고, 스스로 필담한 종이를 찢어가지고 갔다. 아마 그도 역시 원여의 당으로써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인 듯 싶었다.
○ 내가 일본의 인물을 본 것이 관백 이하 대관(大官)ㆍ서료(庶僚)로부터 각종의 사람이 여러 천 명, 만 명만이 아닌데, 대저 그 인물들이 모두 정한(精悍)하고 긴착하고 민첩하고 몸은 짧고 작으며, 아이들은 살빛이 흰 것이 많고, 기품은 연약한 것이 많고, 말과 행동은 추솔하고 얕은 것이 많고, 한 사람도 걸출하고 웅장하여 바라보아 두려워할 만한 형상을 가진 자라곤 없었다. 그 지위가 집정(執政)에 이르고 부(富)로써 식읍(食邑)을 가져서 수천 석, 수만 석의 녹을 자손에게 전하는 자라면 비록 상법(相法)을 논하더라도 반드시 그 천창(天倉)의 명록궁(命祿宮)이 높고 후하고 광명(光明)하여, 한번 보면 곧 알만한 것이 있는 것인데 지금 본즉 그들이 천박(淺薄)하고 못나고 누(陋)하게 생긴 것이 열에 팔구가 되고 또 그 성정(性情)을 논하면 대개 속은 조급하고 밖은 박한 것이 많아서 자기에게 이익이 있으면 기뻐서 참새처럼 뛰어 폐간(肺肝)이 다 드러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떠들며 날뛰어 생사를 모른다. 대하여 말할 적에는 여우가 얼음 밑 물소리를 듣는 것 같고, 일을 만날 때에는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항거함과 같아서, 모두 새나 쥐의 창자로써 사람 쏘는 벌[蜂]떼의 성을 분발(奮發)하고 한 사람도 넓은 도량으로 중한 인망을 지닌 자가 없다. 그들이 가강(家康) 이후로 국토가 완전하고 군사가 정강(精强)하여 국중에 변란이 없어 인구의 많음과 국고의 풍부함이 근일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으므로 비록 젖내나는 작은 아이라도 태연히 높은 지위에 있어 높고 화려한 궁궐과 비단 장막, 좋은 음식의 안일함을 대대로 전하여 끊이지 아니하여 그 마음이 안락한 생활에 익어서 혹 사변이 있을 것만 두려워하는데, 무슨 다른 계책을 도모하겠는가. 내가 추측하건대, 인간에 액운이 닥쳐서 수길ㆍ청정과 같은 적이 다시 그 땅에 나지 아니한다면 우리 국가 변방의 걱정은 만(萬)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관시(關市)를 통한 이래로 대마도의 교활하고 간사한 것이 한이 없어 관역(館驛)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많은데도 조정에서는 매양 은혜로 후하게 대접하여 조그마한 섬의 장(長)으로 하여금 반드시 호리(毫釐)를 다투어 이기고야 말도록 만들었으니, 실무(實務)를 아는 이는 마땅히 보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사신이 기해년 4월 11일에 조정에 하직하여 9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2일(신유)에 배를 타고 떠나서 9월 4일(계유)에 대판성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라 27일에 강호에 도착하였고, 11월 4일에 도로 대판성에 당도하여 다시 배를 타고 경자년 정월 6일(계유)에 부산에 돌아와 닿았고, 24일에 복명(復命) 하였다. 내왕을 통틀어 계산하면 수로(水路)가 5천 2백 10리고, 육로가 1천 3백 50리요, 왕복한 날수는 2백 61일이 되는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의 병든 자도 없었으며, 하루 동안의 풍파의 액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처음에 내가 영가대(永嘉臺)에 바람을 빌 때에 재계하고 목욕하던 밤 꿈에 한 휼륭한 장부가 유(酉)라는 한 글자를 크게 써서 나에게 보이므로 깨어서 괴이히 여겨서 나의 본명(本命)이 신유(辛酉)이므로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신유일에 순풍을 만나 배를 출발시켰고, 계유일에 대판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랐으므로 마음으로 다행히 여겼다. 돌아올 때에 대마도에 당도하여서는 미리 동료(同僚)에게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는 마땅히 정월 6일이라야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
하였더니, 과연 6일 계유일에 서박포(西泊浦)로부터 문득 순풍을 만나서 돛을 걸고 바로 왔다. 모든 동료들이 놀라며 기뻐하여 나에게 돌아보고 말하기를,
“군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
하였다. 사신이 또한 듣고 괴이히 여겼다. 대개 영가대 위의 꿈에 유자(酉字)를 얻어서 배가 출발하였으며, 대판에서 육지에 오른 것과 부산에 돌아와 댄 것이 모두 유일(酉日)이니, 이것은 용부(龍府)의 어른이 글자를 써서 나에게 고한 때문인가, 또한 한 가지 특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