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高麗의 寺院茶와 大覺國師 義天의 飮茶 - 김상현

2018. 7. 10. 03:22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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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寺院茶와 大覺國師 義天의 飮茶

 

 

金 相 鉉(동국대 교수)

 

 

1. 寺院의 飮茶風

신라 이래로 우리의 차 문화는 승려들과 귀족들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부 승려들이 차를 마셨다. 蛇福이 元曉에게 차를 공양했고, 8세기의 寶川․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으며, 경덕왕 때의 승려 忠談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三花嶺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다. 경덕왕이 승려 月明에게 차를 예물로 주었고, 眞鑑禪師․無染國師 등이 차를 마셨다. 이로써 이 시대 사원에서는 飮茶의 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사원에서는 즐겨 차를 마셨다. 승려들은 부처님에게 차를 공양할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 차를 즐겼다. 잠을 쫓아주는 차의 효능이 수행에 도움을 주었고, 차는 곧 禪과 통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사원에서는 茗戰會가 행해지기도 했고, 品泉이나 品茶에 밝은 승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차를 귀한 선물로 주고받았고, 차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

毅宗이 그 13년(1159) 3월에 玄化寺에 거둥했을 때 동․서 兩院의 승려들은 茶亭을 마련하고 서로 어가를 맞이하기 위해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경쟁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시 사원에서 차를 소중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무인집권 시기의 대표적인 문사인 金克己의 시에도 차가 있는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安和寺詩에는, 그곳의 선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기 전에 찾았던 皇龍寺에서도 그는 차를 얻어 마셨는데, 그것은 황룡사시 중의 다음 구절로 알 수 있다.

 

活火試芳茶 불피워 향기로운 차 시험해 달이니,

花瓷浮白乳 꽃무늬 자기에 흰 젖이 뜨네,

香甛味尤永 감미롭고 달아서 맛 더욱 좋구나,

一啜空百慮 한 번 마심에 백 가지 생각 비어지네

 

승려들 중에는 물을 평하는 品泉이나 차의 품질을 평하는 品茶를 즐겼다. 李奎報(1168~1241)의 시중에 “노승들 일도 많다오. 차 맛도 물맛도 평하려니”라고 한 구절이 이를 말해 준다. 실제로 品茶에 뛰어난 승려도 있었다. 이규보가 개경의 安和寺에 들렸을 때 어떤 스님이 차를 달여주며 향기도 빛도 갖추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品茶에 밝은 승려였을 것이다. 안화사에는 달고도 맑은 좋은 샘물이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이 샘물 곁에는 安和泉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갖가지 꽃과 괴석 등으로 꾸민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고려 말의 李崇仁(1349~1392)이 안화사의 샘물을 鄭道傳에게 보내면서 차를 끓여 마시기를 권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샘물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林椿(~1170~)은 당시의 고승 志謙과 교유했다. 지겸은 뛰어난 선승이었을 뿐 아니라, 유학과 시문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승려였다. 임춘은 지겸의 처소에 나아가 참선도 하고 點茶三昧手도 익혔다. 「志謙上人의 方丈에서 희롱으로 쓴다」는 제목의 시중에도 두 사람이 차를 달이며 앉은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西堂에서는 점다삼매수를 자랑했었지, 돌솥에서는 지렁이 소리를 내는데, 水厄만난 손님을 누가 구하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임춘의 「寄茶餉謙上人」라는 다음의 시는 그와 지겸이 진정 차 맛을 알았음을 알게 해 준다.

 

近得夢山一掬春 요즘 몽산에서 얻은 한 움큼의 봄

白泥赤印色香新 白泥赤印의 색과 향 새롭네

澄心堂老知名品 澄心堂 노승 名品을 아시기에

寄與尤奇紫筍珍 紫筍보다도 더 귀한 진품을 보냅니다.

임춘은 몽정차에 비길 만한, 자순차 보다도 더 좋은 차를 구하여 지겸에게 보냈다. 증심당의 노승 지겸은 차의 진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던 茶僧으로 유명했던 것 같다.

14세기 전반쯤의 일이긴 하지만, 영남의 어느 사원에는 茗戰會가 열리기도 했다. 명전은 鬪茶라고도 하는데,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차를 누가 더 잘 낼 수 있는가를 겨루는 풍속이었다. 고려 승려들 중에는 차 끓이는 익숙한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고 생각된다. 恥庵으로부터 햇차를 선물 받은 李衍宗(~1352~)이 그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썼던 「謝朴恥庵惠茶」에는 명전회에 참석했던 소년시절의 추억이 다음과 같이 회상되었다.

 

少年爲客嶺南寺 소년시절 영남의 절간에서 손님 되어

茗戰屢從方外戱 茗戰, 신선놀이 여러 번 참여했지

龍巖巖畔鳳山麓 龍巖의 바위가 鳳山의 기슭

竹裏隨僧摘鷹觜 대숲에서 스님 따라 매부리 같은 차 잎을 땄었다

火前試焙云最佳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는데

況有龍泉鳳井水 龍泉鳳井의 물까지 있음에라

沙彌自快三昧手 沙彌僧 시원스런 삼매의 손

雪乳飜甌點不已 찻잔 속에 설유를 쉬지 않고 따루었지

 

고려 사원에도 가끔 차와 좋은 물로써 차내는 솜씨를 겨루는 명전이 열리곤 했던 모양이다. 이연종은 익숙한 솜씨를 간직한 스님들을 따라 차 맛을 익혔지만 그 때는 어린 시절이라 차의 참 맛을 음미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李仁老(1152~1220의 「僧院茶磨」라는 다음의 시는 사원에서 말차를 만들던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風輪不管蟻行遲 풍경도 울리지 않고, 개미행렬 느릿느릿

月斧初揮玉屑飛 月斧 휘두르니 옥색가루 나르네

法戱從來眞自在 法戱는 참다운 自在로부터 오고

晴天電吼電霏霏 맑은 하늘에 우레 소리, 눈발도 휘날리네

풍경마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는 어느 날, 개미떼가 줄을 지어 느릿느릿 움직이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산사에서 스님이 맷돌을 돌리면서 차를 갈고 있다.

남녘의 절에서는 스님들에 의해 차가 법제되고 있었던 것 같다. 운봉의 노규선사가 이규보에게, 송광사의 스님이 이제현에게, 가지산문의 英公이 이색에게, 嚴光대선사가 한수에게, 謙上人이 임춘에게 각각 차를 선물했던 사실은 당시 사원에서 토산차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송광산에는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이 곳의 차는 개경에 있는 귀족들에게까지 귀한 선물로 보내지곤 했다. 송광산의 景瑚선사는 李齊賢(?~1398)에게 해마다 차를 보냈는데, 이제현은 그 스님의 고마운 뜻을 시로써 보답하곤 했다. 「松廣和尙寄惠新茗順筆亂道寄呈丈下」라는 시도 그 중의 하나다. 東菴은 이제현의 아버지인 李瑱(1244~1321)의 호다. 그리고 慧鑑은 송광산 정혜사의 제10세인 萬恒(1249~1319)의 시호다. 혜감국사 만항은 1313년(충선왕 13)을 전후한 시기에 정혜사의 法主로 있었고, 학문과 시문으로 뛰어났던 동암은 이 때쯤 과거를 맡아보고 있었다. 정혜사의 혜감국사는 해마다 좋은 차를 동암에게 보내면서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시로써 이에 답하고 했다. 차와 시로 맺은 유불의 교유였다. 이처럼 차와 시로 맺은 깊은 인연은 대를 이어 전해졌으니, 동암의 아들 이제현과 혜감의 제자 景瑚 사이에도 차와 시가 오고 갔던 것이다. 이제현의 이 시에는 대를 이어 전해진 이와 같은 풍류를 무척이나 흐뭇해하고 있음이 엿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 “아버님의 일을 계승한다”고 한 것이나, “향화의 인연이 대를 이어 전한다”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제현에게 차를 보내준 송광화상은 혜감국사의 뒤를 이어 정혜사의 제11세 법주가 되었던 大禪師 경호임이 확실하다. 경호는 당시의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대를 이어 전해진 인연이기에 경호선사는 이제현에게 봄이면 봄마다 차를 선물하기를 연례적으로 했던 것이다. 李穡(1328~1396)은 송광화상이 보내준 차와 부채에 화답하여 「奉答松廣和尙惠茶及扇」이라는 차시를 보냈다. 송광화상은 송광사의 夫目화상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추측해 본다. 그 스님과 목은은 오랜 세월 동안 교분을 가진 사이였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했듯이, 목은이 차 생각을 하자 스님이 차를 보내주었는데, 이는 스님의 수행의 덕이라고 찬양한다.

韓脩(1333~1384)의 「嚴光大禪師寄惠芽茶」는 대선사 엄광이 멀리서 차를 보내줌에 그 고마움에 감사하면서 쓴 차시다. 엄광대선사는 차를 법제하는 뛰어난 솜씨를 가졌던 스님인 듯 하다.

採茶誰復海邊皆 뉘라서 차 따러 해변을 두루 다니나

惟有嚴光品最佳 오직 엄광의 솜씨가 가장 좋다오

我自妙蓮知此味 나는 묘련사에서 이 맛 알았더니

煩師遠寄慰予懷 대사가 멀리 보내어 나의 회포 위로하네

 

通度寺에는 이 절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茶村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통도사 북쪽 경계인 冬乙山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절에 바치던 茶田과 茶泉이 지금까지도 오히려 남아 민멸하지 않으니 후세사람들이 茶所村이라고 했다. 많은 寺院田을 소유하고 있던 고려시대에 절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이 있었다고 헤서 이상할 것이 없다. 일찍이 文一平은 동을산 다촌이 彦陽이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그는 통도사 사적에 北茶村坪郊乃居火郡之境也라는 기록과 居火는 언양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했던 것이다. 지금 그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다촌이 언양 쯤에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물론 승려들 중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차를 마셨던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고려의 옛 탑 속에서 네 덩이의 龍團勝雪이 대원군 李昰應에 의해 발견되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탑 속에 차를 넣었던 것은 광종이나 성종이 공덕재에 공양할 차를 손수 맷돌에 갈았고, 崔精安이 왕륜사의 법당에 차를 공양했던 사실과 더불어 당시 사원에서의 차는 佛前에 올리는 공양물로도 쓰이고 있었던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圓鑑國師 冲止(1226~1292)는 수선사의 제6세로 지눌의 선풍을 계승했던 고승이다. 그의 󰡔圓鑑集󰡕에는 崔怡와 金藏大禪師로부터 차를 받고 화답한 시가 있고, 또한 “陶潛으로 茶侶를 삼음이 이미 오래”라고 한 것이나, “날마다 시자가 차를 내온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차를 즐기던 茶僧이기도 했다. 李崇仁(1349~1392)이 神孝寺를 방문했을 때도 그 곳의 스님들은 차를 대접한 뒤 시를 청했고, 이에 그는 신효사의 祖師房에서 시를 쓰기도 했다. “선탑에 꽃이 지니 봄은 적적하고, 茶甁에서는 솔바람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지네”라는 구절은 신효사 湛師房에서 읊었던 것이다. 그는 隱峯禪師와도 사귀었는데, 차를 마시며 담론하곤 했던 것이다.

 

2. 天台宗 義天․天頙․義旋의 飮茶와 茶詩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기란 쉽지 않고, 설사 그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라도 진정으로 구도자의 길을 가기란 어렵다. 그런데 왕자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고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오직 求法과 傳燈을 발원하며 끊임없는 수행과 학문과 講學으로 일생을 살았던 大覺國師 義天(1055~1101), 그는 참다운 구도자였다. 그는 구법을 위해서 밀항도 주저하지 않았고, 학문을 위해서는 침식을 잊고 촌음을 아꼈다. 그리하여 그는 고려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敎觀幷修를 주장하며 불교개혁을 주도하기도 했고, 鑄錢論을 써서 用錢의 편리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敎藏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창설하기도 했으며,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과 업적은 우리 나라 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불교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사가 이룩했던 수행과 학문은 끊임없는 정진으로 도달한 것일 뿐, 그의 왕자 신분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권력이나 돈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수행과 학문이기 때문이다. 국사는 그 명성이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일본에도 퍼질 정도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주목받는 고승이었다. 그의 교장 간행은 그 어떤 업적보다도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불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또한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서 그것이 고려불교계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우리나라 불교사에 준 영향도 대단히 큰 것이었다.

국사는 서른 살이 되던 1085년(선종 2) 4월 8일에 송나라로 향했다. 국사가 송에 도착하자 송의 哲宗은 국사를 따뜻이 맞이해 주었고,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龍鳳茶 하사에 감사드리는 글과 차와 과일을 내려주심에 감사드리는 글 등을 썼던 것으로 보아 철종으로부터 용봉차와 같은 좋은 차를 하사받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차와 약을 내려주신 데 대해서 사례하는 표는 차를 하사 받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승 의천은 아룁니다. 금월 13일에 중사가 이르러 칙지를 받들어 전하였습니다. 聖慈께서 특별 히 차 20 角과 약 1 銀合을 내려주시며, 의관을 단정히 하시고 대하시니 특별히 성서러운 사랑에 위로되며 부드러운 싻과 신령스러운 약은 사사로운 은총에서 충분히 보였으니 공경히 받들어 돌 아옴에 영화롭고 부끄러움이 함께 쌓였습니다.

국사는 송나라에 체류하던 14개월 동안에 고승 50여 명을 만나 불법을 묻거나 교류했다. 특히 국사는 항주에서 淨源(1011~1088)에게 약 반년을 사사하고 화엄교를 전수받았다. 이듬해에 정원은 慧因敎院으로 옮겼고, 이 절을 화엄종의 중흥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훗날 이 절은 국사와의 인연 때문에 高麗寺로 이름을 바꾸어 의천의 공덕을 기렸다. 고려로 귀국한 뒤에도 정원과는 자주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좋은 차를 주고받았다. 淨源의 편지 중에는 “지난번에 徐都綱이 돌아와서 편지와 은합에 가득 찬 차와 수정구슬 3개 등을 전해 받았습니다”라고 한 내용도 있고, “차 律溪臘茗과 天童山茗 각각 1통씩을 붙입니다”라고 한 경우도 있다. 이로써 의천과 정원은 좋은 차를 서로 선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사는 「和人謝茶」라는 시를 남겼는데, 곧 다음이 그것이다.

 

露苑春峰底事求 이슬 내린 봄 동산에서 무엇을 구할 건가

煮花烹月洗塵愁 달밤에 차 끓이며 속세 근심 잊을까나

身輕不役遊三洞 가벼워진 몸은 三洞 유람도 힘들지 않고

骨爽俄驚入九秋 상쾌한 골격 잠깐 사이 가을 구월 되었네

仙品更宜鍾梵上 좋은 품격은 절에서도 합당하고

淸香偏許酒詩流 맑은 향기는 술 마시고 시 읊는 류도 허락하네

靈丹誰見長生驗 누가 보았는가 靈丹이 오래 산다는 증거를

休向塊臺問事由 저승 향하여 그 사유 묻지를 말게

누군가로부터 차를 선물 받은 국사는 고마운 뜻을 한 수의 시로써 답했던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이슬 내린 봄 동산에 무엇을 구할 건가, 달밤에 차 끓이며 세속 근심을 잊겠다”고 하면서, 仙品인 차는 수행하는 절간에 어울린다고 했다. 조용한 사원에서 맛보는 한 잔 차는 분명 세속의 근심을 잊게 해 줄 것이다.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 또한 가을인양 상쾌해질 것이기에. 신선의 품격을 가진 차는 분명 수행하는 절간에 어울리고, 술이 아닌 차의 향기에 취해도 시를 읊는 풍류는 있다. 차를 두고 굳이 신선들이 먹는다는 靈丹으로 오래 살기를 기약할 필요야 있겠는가. 국사의 이 차시에는 신선의 경계가 어른거리고 있다. 국사는 「和人以茶贈僧」이라는 다음의 차시를 남기기도 했다.

北苑移新焙 북쪽 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

東林贈進僧 동림에 계신 스님에게 선물했네.

預知閑煮日 한가히 차 다릴 날을 미리 알고

泉脈冷敲氷 찬 얼음 깨고 샘 줄기 찾네

 

北苑은 복건성 건안현을 東林은 혜원이 주석하던 동림사를 각각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이 시는 국사가 송나라에 체류하고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차를 선물 받고 쓴 시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眞靜國師 天頙(1206~?)은 禮部試에 합격한 유학자였지만 23세에 출가하여 圓妙國師 了世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 白蓮社의 제4세가 되었던 천태종의 고승이다. 그는 덕망 높은 선사였지만, 문장으로도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茶山에 의하면, 천책은 최치원과 이규보와 더불어 신라 및 고려시대의 손꼽히는 문장가였다. 그의 시문집으로 󰡔湖山錄󰡕이 전하고, 여기에 「謝禪師惠茶」라는 茶詩가 수록되어 있다.

 

 

貴茗承夢嶺 고귀한 차는 몽정산에서 받았고

名泉汲惠山 좋은 물 惠山에서 길었네

掃魔能却睡 졸음 깨끗이 쓸어 물리치고

對客更圖閑 손님 맞아 한가함 도모하오

甘露津毛孔 감로는 털구멍에서 넘쳐나고

淸風鼓腋間 많은 바람 겨드랑 사이에서 풀무질하네

何須飮靈藥 어찌 영약을 반드시 마시고야

然後駐童顔 어린아이 얼굴을 지탱할 수 있으리요.

그는 “맑은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풀무질한다”고, 차 한 잔에 신선의 경지를 맛보면서 盧仝이 읊었던 그 仙境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털구멍에는 감로의 맛이 생겨나고 겨드랑이에는 청풍이 풀무질한다고. 이처럼 한 잔의 차를 통해 신선의 경지를 맛볼 때, 다시 신령스러운 약을 구하여 신선 같은 童顔을 꿈꿀 필요는 없게 되는 것이다.

順庵法師 義旋은 14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천태종의 고승이다. 의선은 당시의 권문세족 趙仁規의 넷째 아들로 圓慧國統 景宜의 제자로 원 황실로부터 三藏法師의 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비록 승려였지만 원 황실을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크게 취할 때도 있고, 차를 즐기기도 하면서 호사스럽게 생활했다. 그는 개경의 묘련사를 중창하기도 했는데, 1337년(충숙왕 복위 6)경에는 이 절의 수풀 속에서 石池竈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석지조를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차를 끓였다. 그 중의 하나는 사방을 말[斗]처럼 모나게 다듬고, 가운데를 확처럼 둥글게 팠으니 이는 샘물을 담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을 벌린 것 같으니, 이는 열고 다시 막아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움푹한데, 둥근 데는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인 데는 그릇을 씻는 곳이며, 또한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 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하였다. 이 묘련사의 석지조는 寒松亭에 전해오던 신라 四仙의 석지조와 같은 모양이었다.

 

3. 茶禪一味思想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음다의 풍습이 성행한 곳은 주로 禪家였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졸음을 쫓아주는 차의 약리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다도의 정신과 선의 정신이 서로 결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茶禪一味思想의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상은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차”라고 하였던 陸羽로부터 비롯되었고, 百丈․趙州 등의 선사에 이르러 그 깊이를 더하였다. 특히 조주의 「喫茶去」는 선가의 유명한 話頭가 되기도 하였다. 茶禪一味思想은 고려 이후로 우리나라의 선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승려들은 차를 즐겼고, 차를 마시는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려 하였다. 知訥이 “佛法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다음은 이규보의 「訪嚴師」라는 제목의 시다.

 

我今訪山家 내 지금 산사를 찾은 것

飮酒本非意 술을 마시고자 하는 것 아닙니다

每來設陰筵 올 때마다 술자리 베푸니

顔厚得無泚 얼굴 두꺼운들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僧格所自高 스님의 인품 높은 것은

唯是茗飮耳 오직 향기로운 차 마시기 때문이라오

好將蒙頂芽 몽정의 차 잎을 따다가

煎却惠山水 혜산의 물로 달인 것 제 맛이지

一甌輒一話 차 한잔에 이야기 한마디

漸人玄玄旨 점점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네

此樂信淸淡 이 즐거움 참으로 淸談하니

何必昏昏醉 굳이 술에 취할 게 있겠오

 

 

어느 날 이규보는 嚴師를 방문했다. 여간해서 손님에게 술을 대접하지 않는 스님이었지만 주객 이규보에게만은 반드시 술을 대접하곤 했다. 그 날도 스님은 술을 내어놓았는데, 이규보는 앞의 시로써 술을 사양했다. 차 한 잔에 이야기 한 마디, 점점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는 淸談한 즐거움이 있으니, 굳이 수에 취할 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眞覺國師 慧諶(1178~1234)은 스스로 無衣子라고 호했다. 그는 知訥의 후계자일 뿐 아니라 修禪社의 제2세로서 선풍을 진작시켰던 고승이었다. 혜심이 지눌을 계승, 수선사를 주지하고 있을 때, 康宗과 崔瑀 등이 보낸 예물 중에 차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그가 차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무의자는 누군가로부터 차를 선물 받고 다음의 시를 썼다.

 

久坐成勞永夜中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 밤

煮茶備感惠無窮 차 끓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

一盃卷却昏雲盡 한 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徹骨淸寒萬慮空 뼈에 사무치는 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

깊은 밤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은 참선 때문이었으리라. 잠을 쫓아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야말로 수행인에게는 더없이 은혜로운 것. 한 잔 차로 마음의 먹구름을 쫓아버릴 때, 그 마음의 하늘은 만 가지 번뇌의 구름이 걷힌 푸른 하늘인 것을. 大昏子 無已가 혜심에게 차를 구했던 일이 있다. 이에 혜심은 다음의 「大昏上人因焉茶求時」라는 시로써 대답했다.

 

大昏昏處恐成眼 크게 혼혼한 곳에 잠 이룰까 두려우니

須要香茶數數煎 향기로운 차 자주자주 끓여야지

當日香嚴原睡夢 오늘 차 마시는 시간은 원래 꿈속에 있었고

神通分付汝相傳 신통의 분부를 네가 전하라

 

대혼자는 30년을 지리산에 숨어 장삼 한 벌로 생활하던, 마치 寒山이나 拾得에 비길만한 선승이었다. 겨울이나 여름에는 언제나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봄과 가을이면 산을 두루 유람하며, 서너 말의 식사를 하던, 그리고 한 곳에 앉아 참선을 할 때면 반드시 열흘을 넘기고, 떠날 때면 큰 소리로 노래를 했던, 특이한 모습의 선승이었다. 혜심은 대혼자에게 차와 시를 보내면서, 혼미한 정신을 일깨워 주는 성품을 무이의 호 大昏에 비겨 강조했다. “크게 혼혼하면 잠을 이루려니, 향기로운 차 자주 끓여 마심이 좋다”고.

원감국사 冲止(1226~1292)는 修禪社의 제6세로 知訥의 선풍을 계승했던 고승이다. 그는 당대에 문장과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시문집 󰡔圓鑑錄󰡕이 현존하고 있다. 崔怡와 金藏大禪師가 그에게 차를 선물한 적이 있고, 또한 “陶潛으로 茶侶를 삼음이 이미 오래”라고 한 것이나, “날마다 시자가 차를 내온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차를 즐기던 茶僧이기도 했다. 다음은 금장대선사가 보내준 새차에 감사하면서 썼던「謝金藏大禪師惠新茶」라는 제목의 차시다.

 

慈貺初驚試焙新 은혜로운 선물에 놀라면서 불에 말려보나니

芽生爛石品尤珍 따뜻한 돌에서 나는 새싹 품질 더욱 보배롭네

平生只見膏油面 평생에 다만 해 묵어 변한 차만 보았더니

喜得曾坑一掬春 묻혔던 한 움큼의 봄 얻은 것을 기뻐하네

차는 오래되면 그 색과 향과 맛이 변한다. 때문에 차인들은 봄에 만든 새차 구하기를 원한다. 오래 오래 해묵어 변질된 차만 대하던 충지에게 금장대선사가 보내준 새차는 놀라울 정도로 은혜로운 선물이었다. 봄에 만든 한 움큼의 차를 통해 봄을 얻은 기쁨을 맛보는 한 다인의 모습이 엿보이는 담담하고 소박한 시다. 충지의 시에는, 차를 주제로 하지 않은 경우에도, 石鼎, 竹火爐, 茗椀, 淸香, 茗席, 茶乳, 茶畑, 紫筍茶, 茶七甌, 石銚 등의 차와 관련된 시어들이 상당히 쓰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이 단순한 시어로 쓰여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랜 차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충지의 禪세계는 無事한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있었다.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 더욱 좋고, 자고 일어나 차 마시니 그 맛 더욱 좋다」는 식이다. 그의 시중에 「茶畑禪榻」이란 구절이 보이듯, 그에게 차와 선은 곧 한 맛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나물 삶고 차 끓이는」 하찮은 일상사에서 「넉넉한 즐거움」과 「깊은 맛」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기에. 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의 禪僧들 또한 조주차를 맛보려고 했다. 혜심의 시 「茶泉」은 그 한 예다.

松根去古蘇 소나무 뿌리는 古蘇를 지났는데

石眼迸靈泉 돌의 단꿈 靈泉이 깨우노라

快便不易得 상쾌함 쉽게 터득하기 어려운데

親提趙老禪 스스로 趙州禪을 알 듯도 하다

 

샘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에 돌도 잠을 깬다. 마음속 상쾌한 경지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맑은 샘물 길어 한 잔 차 끓여 마시면 조주의 喫茶去라는 화두의 의미도 알만하다는 경지다. 趙州(778~897)는 禪宗史에 우뚝 솟은 한 봉우리. 그의 法名은 從諗. 그러나 그가 조주 지방의 觀音院에 오래 살았기에 오히려 조주로 더 알려졌던, 그래서 그가 몸 붙여 살던 지방의 은혜까지도 갚았던 禪僧이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조주선사를 방문했다. 조주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왔던 일이 있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왔었습니다”. 조주 말하기를 “차나 마시고 가보게”. 또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왔던 일이 있는가?”. 그 스님의 대답은 “왔던 적이 없습니다”. 조주 말하기를 “차나 마시고 가게”. 이에 옆에 있던 院主가 물었다. “어찌하여 일찍이 왔던 이도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고, 온 적이 없는 이도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십니까?” 조주 “원주야!” 하고 불러, 원주가 대답하자 “차나 마시고 가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話頭다. 예전에 왔던 적이 있는 이나 처음 온 사람이나 함께 살던 원주승에게나 똑같이 권한 한 잔 차. 佛法이 무엇인지 禪이 어떠한 것인지 묻기 위해 먼길을 찾아온 젊은 구도자들에게 느닷없이 차나 한 잔 들고 가라는 엉뚱한 짓.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동문서답은 아니었다. 같은 차였지만 그 세 사람에게 각각 그 맛과 향기가 달리 느껴졌듯이 근기를 따라 걸림 없이 행한 교화의 방편이었다. 침침한 눈을 번득 뜨게 하고 그 문에 끌어들이려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 차의 향기를 맛보고, 그 말뜻을 알아듣는 이는 적었다. 그 차 맛을 아는 자 趙州家風의 禪味에 접했을 것이지만, 훗날 그 차 맛을 맛보려는 이들은 「喫茶去」를 화두로 삼았고, 조주차는 禪家茶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 HWP>

 


출처; 동국대학교

 

 

출처 : 감로수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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