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6. 02:13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장수왕릉
? 장군총 곧 장수왕릉은 집안시(국내성) 국내성에서 4.5km쯤 떨어진 龍山기슭 寓山下 무덤떼에 있다. 우산하무덤떼는 집안시 태왕향 우산촌에 있다. 이 일대에는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등 3,900여 기가 있다. 왕릉으로 확인된 우산 2110호, 992호, 호태왕릉, 장수왕릉(장군총), 춤무덤, 씨름무덤, 세칸무덤, 五?墳 제5호묘(해와 달의 신이 만남, 4, 5호분 중 5호분만 공개) 등은 모두 통구고분떼에 있다. 이 가운데 임강묘를 비롯하여 사신총, 무용총, 각저총 등은 벽화무덤이다.
통구고분떼는 압록강변에 있는 총길이 791km의 5C~7C의 고분군으로 12,000여기의 적석총이 있다. 긴 직사각형의 석재로 네모난 테두리를 먼저 쌓고 막돌로 채워 쌓아올렸다. 각 단은 안으로 조금씩 쌓아 들였으며 무덤의 맨 꼭대기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려있는 구멍이 20여 개 발견되면서 건물을 세웠던 건물기둥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수왕릉은 5C에 축조한 것으로 밑변 32m, 높이 12.5m이다. 돌 한개 길이가 5m, 높이 80cm 무게 15t쯤 되는 화강암 1,100개로 쌓았다. 화강암 전체 무게는 19,000t 정도, 사용된 흙은 12,500t쯤 될 것으로 추측된다. 22단으로 쌓았다.
기단 둘레에 너비 4m 범위에 걸쳐 돌을 깔아 능역을 만들었다. 무덤 네 변에는 각 변마다 3~5m, 무게 30t쯤 되는 자연석 세 개씩 기대 세워놓았다. 본디 12개였는데, 북쪽 맨 위에 있던 하나가 깨져 지금은 11개만 남아있다. 11개 가운데 가장 적은 것이 15톤이나 된다고 한다. 동남 모서리 가까운 곳에 세운 돌의 뒷면에는 돌을 두어 개 괴어 뒷받침해 놓았다.
이 돌들은 커다란 능의 밑 기단돌이 실려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받쳐놓은 받침돌[護石]이라는 설도 있고, 12지를 나타내는 수호석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돌들은 서 있는 각도가8도여서 버팀돌 역할은 하지 못한다. 12지신도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12지신은 8~9C에 많이 조성된다. 웅장하게 보이기 위한 상징물로 생각된다.
기단부와 6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두 7층이다.
4층 한가운데 널방을 만들고, 5층 한가운데 널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었는데 무덤은 서남향이다. 널방은 한 변이 5,m, 높이 5.5m이다. 널방의 입구는 세 번 째 단에 마련하였다. 꼭대기 끝에 큰 돌로 각각 대들보를 설치하고 6층으로 석재를 쌓아올렸다. 그 위에 평면 넓이가 60㎡에 무게도 50여 톤이나 되는 석판을 덮어 널방을 만들었다. 널방 안에는 나무널을 올려놓기 위한 2개의 널받침이 동서로 마련되어 있다.
장수왕릉을 참배하고 예를 올리다가 중국 ?안에게 쫓겨났다. 두 번째 시도로 성공하였다.
장수왕릉 널방의 구조
무덤 꼭대기 가장자리를 쌓은 돌에는 직경 9cm의 둥근 구멍20여 개가 남아있다. 구멍과 구멍 사이의 거리는 50cm이다. 원래는 같은 간격으로 온 둘레에 배열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구멍은 보호용 난간이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정상 가운데 사방 13m의 안에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1905년 중국학계에 보고될 때 무덤 꼭대기에서 고구려식 막새기와와 연화문 수막새, 비교적 많은 와당이 남아있었고 1964년 무덤 남쪽 땅 속에서도 쇠사슬, 기와장, 연꽃무늬 와당 등 건축자재들이 출토되어 무덤 꼭대기에 제사를 지내던 향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향당은 높이 4m 50cm, 바닥은 사방 7m의 전각이었을 것이다. 지붕은 조형미를 완성하기 위한 상징적인 건물이었을 것이다.
장수왕릉 향당-유문용선생이 실측을 통해 그린 재현도이다.
사진은 신영훈, 김대벽, 고구려, 조선일보사, 2004.
장수왕릉 뒤에 작은 陪?이 있다. 배총은 돌아가신 분과 관계있는 사람의 무덤이다. 장군총에 딸린무덤은 모두 5기였는데 지금 1기만 남아있다.
외곽에 다듬어 쌓은 무사석은 무너지고, 앞부분에 설치하였던 壁石도 없어져 묘실은 앞은 열린 채 있다. 묘실은 거대한 지붕돌을 얹어 마감했는데, 3면만 남은 묘실로 인해 고인돌같이 보인다. 고인돌 같은 곳은 바로 널방인데, 주위가 무너져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딸린 무덤의 주인공들은 왕의 첩들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다. 축조법은 기본적으로 장수왕릉과 같다.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3기의 딸린무덤이 있다.
장수왕릉이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견고한 이유는,
1. 왕릉 주위 바닥은 1.5m 전후의 큰 돌을 3m 정도의 넓이로 깔고 그 사이를 다시 강돌로 다져 넣어 엄청난 왕릉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하였다. 1층의 돌은 하나의 길이가 5.5m 되는 돌을 잘 다듬어 1,100개를 쌓아올렸다. 이같은 받침 공사는 각 층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2. 퇴물림 쌓기와 홈파기 공법을 썼다. 각 층마다 45도로 조금씩 들여쌓는 퇴물려 쌓기를 하였다. 들여쌓기는 측압(안쪽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힘)을 없앤다. 또 밑돌은 가장자리가 조금씩 올라오도록 홈을 파고 그 홈에 맞추어 윗돌을 맞물리게 놓아 위에서 압력이 가해져도 밀려나지 않게 하였다.
3. 그랭이 공법을 사용하였다. 그랭이 공법은 고구려에서 시작하였다. 불국사의 축대, 사찰의 기둥들에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정창원을 비롯한 수많은 신사 건물에 히키리크케라는 이름으로 실용화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큰 피라미드 옆에 4개의 3층 피라미드가 있었는데, 지금 두 개만 남아있다. 슈메르의 지구라트도 그렇게 생겼고, 장군총도 피라미드와 같이 생겼다. 안동시 북후면 석탑동의 학가산 석탑은 이집트의 조세르왕(BC 2,700년경)과 모양이 똑같다. 일본 큐수에도 같은 형식의 분묘가 있다.
서북쪽으로 16km 떨어진 우산에 고구려 채석장이 있다. 겨울에 개울 얼음 위로 스케이트를 태워 운반하였고 땅에서는 고인돌처럼 통나무를 깔고 운반하였을 것이다.
※ 고구려 제20대 장수왕(394~491, 재위 413~491)은 중국이 남북조(439~589)로 분열된 형세를 이용해 남북 양조와 각각 교통하여 대립되는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정책을 썼다. 북위(돈황)과 문화교류를 했고, 유연과 농산물을 거래하여 북위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다. 평양 천도는 광개토대왕때부터 계획하고 착실히 준비하였다.
집안은 산악지대로 군사방어시설의 성격이 짙던 산골짜기 야영도시이다. 군사적으로는 좋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족하다. 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평양은 정치, 경제, 문화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목민에서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근거로 하여 농경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은 넓은 평야지대이고, 바다에 면해 있어서 외국과의 교역에도 유리하다. 또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 나라의 외적 팽창에 걸맞는 왕권의 강화가 필요하였다. 전통이 강한 국내성에서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평양에 새 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옮기고 왕실 중심의 지배질서를 재편하려고 하였다.
그 준비작업으로 평양을 불교적인 분위기로 만든다.
1. 393년 광개토호태왕은 평양에 9寺를 짓는다. 지금 룡악산 기슭에 법운암이 있다. 법운암은 9사 중 영명사의 암자이다. 조선 중기에 재건하였다.
2. 동명왕릉(력포구역 룡산리)을 옮겨온다. 동명왕릉은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의 기단식 봉토석실분이다. 곧 427년 평양 천도와 같은 시기에 옮겨 조성하였다. 시조의 묘를 옮겨온 것은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조하여 귀족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또 시조의 음덕을 얻으려는 주술적 의미와 조상숭배 신앙도 있다.
통구에서는 적석총이 주류를 이루었다. 평양으로 옮기면서 기단식석실묘가 주류를 이룬다. 동명왕릉은 이 둘의 중간 단계인 기단식봉토석실묘이다. 동명왕릉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전통 방식의 기단에 봉토를 올린 것이다.
내부에는 645여 개의 연꽃무늬를 그렸다. 그래서 연꽃무늬벽화분이라고도 한다. 시조와 불교를 강화함으로 王則佛 사상을 고취시켜 귀족 세력들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1974년에 발굴하였는데, 부장품은 도굴되었다. 왕릉에서만 나오는 금동장식 유물이 나왔다.
3. 왕릉 근처에 定陵寺를 창건하였다. 절터를 발굴할 때 질그릇에서 정릉사란 명문이 있었다. 능을 위한 절이라는 뜻이다. 왕릉을 옮겨올 때 창건하였다.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4. 5세기 중국은 남북조로 정립되었고, 내륙 아시아는 유연이 통일하였다. 동북아시아는 고구려가 패권을 잡아 4강체제라 한다. 남북조는 불교를 중심으로 통합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듯 고구려도 불교를 국가 통합 이념으로 삼아, 귀족을 왕권 아래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국가 통합과 문화발전을 동시에 이루고자 하였다.
왕 63년(475)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을 죽이자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다.
평양에서 사망한다. 그래서 장수왕 무덤이 평양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장수왕이 국내성에 있을 때, 태어난 국내성에 이미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 위서에 장수왕이 죽으니 중국 황제가 흰 옷을 입고 눈물을 흘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 集安은 길림성의 최남단으로 북한의 만포와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에 면한 도시이다. 북경에서 열차로 25시간, 심양에서 11시간, 장춘에서 10시간, 백하에서 8시간 30분, 통화에서 120km, 3시간 반, 단동에서 8시간 반이 걸린다.
집안과 만포를 가로지르는 압록강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른다. 집안시내 뒤로는 禹山, 우산 서쪽으로 丸都山과 칠성산이 둘러있고, 그 사이에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通溝河(환도산성 앞으로 흘러 국내성 옆에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개천이다. 개짓골이라 불렀다. 강아지골이라는 뜻이다. 통구하는 위나암성의 천연 해자이다)가 있다.
그래서 집안의 고분군을 통구고분군이라 한다. 집안시 일대에는 현재 11,300기의 고분이 있다.
집안시 고구려 고분 분포도
제2대 유리왕(BC 19~18) 22년 (서기 3년)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지 40년 만이다. 유리왕 21년에 郊祭(하늘에 제사) 때 희생으로 바칠 돼지가 도망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희생동물을 관리하는 薛支가 압록강 尉那巖까지 쫓아가 잡아왔다. 설지가 돌아와서 왕에게 “압록강변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보니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땅은 肥美하여 곡식이 풍부하고 짐승과 물고기가 넉넉합니다. 만일 임금님께서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신다면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될뿐 아니라 외적을 방어하는 일에도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9월에 왕이 직접 국내성으로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산물을 점검하여, 왕 22년 10월 서울을 국내로 옮기고 성을 쌓았다.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애초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던 옛 고구려 땅의 주민을 다시 모아 고구려 연맹의 맹주가 되는 것이었다. 옛 고구려의 땅과 주민을 차지하게 되자 그곳의 옛 이름을 다시 써서 고구려라 했을 것이다. 연맹 안에서는 계루부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국내성(압록강 북안)은 오늘날 길림성 輯安(지금은 集安)이다. 흘승골성이 부여에 가까운 초입인데 비하여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국내는 본디 수도지역을 일컫던 보통명사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천도한 뒤 국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나중에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별도로 삼았다. 이때도 국내성이라는 지명이 계속 사용되었다. 나중에 고유명사로 변했다.
국내성은 동가강 하류가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환인과 집안은 거리상으로 멀지 않지만 기온의 차이가 뚜렷하다. 집안은 길림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 한다. 집안시는 사계절이 분명하고 강수량 947mm로 그 주변에 비해 가장 풍부하며 연평균 온도가 6℃로 위도에 비해 따뜻한 곳이다. 이는 장백산맥이나 노령산맥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랭기류를 막아주고 남쪽에서는 압록강이 온대 계절풍을 실어다 주기 때문이라 한다. 서리는 연 150일 정도로 농사에 알맞고, 노령산맥은 사냥감이 많다. 수산물 역시 渾江(?佳江)보다 압록강이 풍부하며 압록강을 이용한 강상 교통도 또한 편리하다.
국내로 도읍한 후 농업생산력이 풍부해지고, 중국 위협에서 벗어난다. 국력이 강성해져 북부여를 멸하고 현토와 낙랑을 병탄한다.
국내성은 집안 중심부에 있다. 지금 시청터 일대로 추정된다. 북, 서쪽에 성벽 일부가 남아있다. 2003년에 정비, 복원하였다. 국내성 동서 10km, 남북 5km 충적평야를 끼고있다.
국내성은 총둘레 2.7km이며, 서 · 남문에 6개의 옹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당대까지 옹성이 없다. 북위 중기 낙양에서 치가 나왔다. 치와 옹성은 고구려가 발명한 것이다.
돌로 성을 쌓기 전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다. 돌도끼, 돌칼, 원형석기 등을 발굴하였는데, 이들은 BC 5~3C의 유물이다. 중국학자들은 전국시대 성이라고 주장한다. 전국시대와 같은 시대이지 전국시대 중국땅이라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한 학자는 駒麗국의 성터라 주장한다.
지금 남아있는 국내성은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관구검이 함락하여 파괴한 것을 고국원왕 12년(342)에 수리하였다. 전연의 모용황이 침략하여 대파한 것을 다시 수리한 것이다.
국내성의 구조
그리고 위나암에 거대한 성 丸都山城을 쌓았다[王遷都於國內築尉那巖]. 위나암성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운 성이다. 오늘날의 집안시 후산(676m)의 산성자산성이다. 위나암은 국내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처음에는 국내성의 방위성으로 건설했으나 제10대 산상왕 13년(209)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37년간 도성 역할을 했다.
국내성은 평지성이므로 군사적 방어에 취약하다. 산성으로 약점을 보충한다. 대무신왕 11년 한나라가 침공하여 위나암성에서 한나라 군과 공방전을 벌일 때 왕이 위나암성에 들어가 농성했다. 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 평상시 살았던 것 같지는 않고, 적병이 쳐들어오면 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위나암성은 유사기를 대비한 군사방어시설이다.
※ 환도산성은 백두산계 老嶺산맥에 속하며 동북에서 서남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집안 시내를 거쳐 압록강 우측에 우뚝 서있다. 둘레는 6km쯤 된다. 환도산은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강(일명 鷄兒강) 하류 우측에 언덕을 이루며 둥그런 모양을 한 연봉으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676m이다. 성에서 동쪽으로 6km 가면 山城子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현지 주민들은 이 산을 산성자산이라고도 하며 환도산성은 산성지산성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집안시 산성자산의 산성으로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2.5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남쪽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앞으로 통구하가 흐른다. 676m 주봉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6.5km 길이의 성을 쌓았다. 지금 남아있는 성은 높이가 4~5m쯤 된다.
산성은 유리왕 때 쌓기 시작하여 제10대 산상왕 때 완성하였다. 산상왕 13년(209)에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11대 동천왕 20년(246) 11월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처음 비류수와 양맥에서 크게 이겼지만 자만한 나머지 환도성이 함락된다. 동천왕 21년 2월 환도성은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평양성을 쌓아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여기서 평양성이 어디인가는 의문이다. 환도성에서 가까운 곳일 것이다.
16대 고국원왕 12년(342) 봄 환도성을 보수하여 국내성을 쌓았다. 그해 가을 수도를 다시 환도성으로 옮겼다. 이때 고국원왕은 환도성에 살고 있었다. 그해 11월 연나라 모용황이 환도산성까지 쳐들어와 동천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과 대궐 창고에 있던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전투 도중 한때 점령당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았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계속 전략적 요충지로 남았다. 양원왕4년 환도성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왕 13년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하여 처형하였다.
※ 국내성, 위나암성, 환도산성, 산성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① 이이화는 위나암성 = 환도성 = 산성자산성이라 했다.
“환도성은 유리왕 때 시작하여 산상왕 13년(209)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환도성은 집안시 산성자산성으로 집안 북쪽 2.5km떨어진 곳에 북쪽에서 국내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곁으로 통구하가 흐른다. 있다. 환도성의 동서북 3면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남쪽은 분지를 이루고 있고, 그 앞으로 통구하가 흐른다. 680m쯤 되는 주봉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65km의 성을 쌓았다. 지금 남아있는 성은 4~5m쯤 된다. 이 산성은 처음 국내성의 방위성으로 쌓았으나 37년 동안 도성 역할도 했다. 이 성의 동남쪽과 서남쪽에는 각각 1천여 기의 고분군이 있다. ”
②
③서길수는 “국내성 = 위나암성 = 환도성이 되어 모순이므로 위나암성은 국내성이다.”고 하였다.
※ 집안 도굴
1. 645년 당태종이 백암성을 쳐 항복받으려 할 때 이세적이 “군사들이 싸움에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조차 돌아보지 않은 것은 오로지 노획을 탐내서 그런 것인데,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어찌하여 항복을 받아 군사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십니까”라 했다. 항복을 받으면 전투가 필요없고 그렇게 되면 군사들이 죽이고 빼앗는 재미가 없어져 외로워진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장군들이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노략질을 부추겼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당나라 군사들이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을 고구려 무덤들을 그냥 두었을 리 없다.
2. 고구려가 망한 뒤 국내성은 각광받지 못했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200년동안 봉금지역으로 무인지경이 되었다. 폐허가 된 이곳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산동반도 사람들이었다. 산동지방에 큰 재해가 들면 산동사람들은 기름진 땅이 있고, 사람이 없는 봉급지역으로 몰려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이들이 도굴을 많이 하였다.
3. 1953년 초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 한국에 투입되기 전에 집안에 주둔했다. 이때 군인들이 도굴했을 것이다.
4.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은 역사적 유물은 모두 파괴 대상이었다. 특히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이 많이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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