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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 조선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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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글 | 창덕궁(昌德宮) | |
영어 |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 ||
프랑스어 | Ensemble du palais de Changdeokgung | ||
국가·위치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
등재기준 | |||
지정번호 | 816 |
창덕궁 전경.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4]
순조 때 그려진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당시 모습을 그렸다.
1. 개요[편집]
昌德宮 / Changdeokgung(Palace)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 대한제국시대 궁궐 중 하나.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5]
1404년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다.[6] 조선 전기에는 정궁 경복궁에 이은 제2의 궁궐 역할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정궁의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 못지 않게 쓰임새가 잦았던 궁궐이었고, 반대로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용하느라 창덕궁을 떠나 있었을 때도 많았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이어하면서 다시 황궁이 되어 마지막 순간의 대한제국과 그 운명을 함께 했던 궁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며, 조선시대 내내 양궐 체제하에서의 실질적인 두 법궁의 지위를 유지한 유일한 궁궐이다. 또한 가장 오랜 기간 조선시대의 정궁이었다.[7]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들이 거주하였고 조선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궁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이 꼽혀야한다는 말이 실로 과언이 아니다.
2. 역사[편집]
조선 태조는 건국 3년차인 1394년 한양(서울)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405년에 완공되었고 그것이 창덕궁이다. 태종은 창덕궁이 완공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8] 140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9]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춰진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된 이후에도 창덕궁은 계속 증축되었다. 14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이 세워졌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이 완공된 후 1406년부터 태종은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데다가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 위주로 지어졌다. 때문에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은 매우 조촐하게 지어졌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은 3칸 규모의 작은 것이었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해야겠다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면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는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의 공사로 인정전이 5칸 규모로 재건축되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존중해서 지어져 있지만,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심지어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창덕궁의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고자 했으며, 특히 창덕궁 내에 위치한 종묘를 묘로 봤을 때 주변의 언덕은 풍수지리상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동양의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며,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밀어내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 영향이 크다.
이렇게 과감한 배치를 한 인물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이다. 그는 출신이 미천하지만, 재주가 뛰어남을 인정받아 일찍 발탁되어 오늘날의 장관급인 공조판서까지 오른 사람이다. 아무튼 창덕궁의 배치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심지어 1419년(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하였다는 명목으로 하옥시키고 상량까지 한 행각(복도로 쓰이는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 곳에는 담만 쌓게 하였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사면되어 이후로도 계속 이 공사 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후에 창덕궁 역시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
박자청이 설계했던 당시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1560-1561년)의 창덕궁. 당시에는 인정문이 중층이었고 좌우 행랑에 현재는 없는 중층 십자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태종은 일단 세종에게 양위한 후 창덕궁 바로 동쪽에 수강궁(현재의 창경궁)을 지어 그곳에 거처를 옮겼다. 일단 태종이 창덕궁 증축 공사를 벌였지만, 실질적인 공사 관리는 새로 주상이 된 세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만 박자청 하옥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배후에서 태종이 항상 매의 눈으로 공사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창덕궁 공사 관리 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세종을 가까운 창덕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세종은 창덕궁 보다 경복궁을 훨씬 선호했다. 세종은 태종의 승하 직후 경복궁 개축 공사를 명했고, 집권 중기 이후 경복궁을 치세의 중심지로 삼았다. 세종은 자신의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널찍한 경복궁이 보다 적합하다고 여긴 듯 하다. 특히 세종이 자신의 정치의 핵심으로 삼았던 집현전을 활용하기에 경복궁이 더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경복궁에다가 커다란 집현전 건물을 지었는데, 이는 비좁은 창덕궁의 집현전보다 훨씬 컸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가 다시한번 증개축되었다. 이후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였다. 이를 위해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의 세배 정도로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하였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10] 또한 경복궁에서 피비린내 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꺼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초기 한양에 있던 궁궐이 모두 전소되었다(1592년). 1593년 한양으로 환궁한 선조는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고 이에 1605년부터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완공되었다.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고, 1년 후인 1610년에야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법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하였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조 시절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인조 25년인 1647년에야 준공되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궁의 궁궐병이었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다만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버릴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조는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경희궁은 인조가 실사용을 했는데, 당시 거처할 곳도 없었거니와, 경희궁이 자신의 아버지 저택을 강제로 헐고 지어진데다가 그곳에 왕기가 흐른다는 소문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진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어버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의 정치적 사건의 다수가 창덕궁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11]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의 상당부분이 다시 한번 전소되었다. 소실되기 전 창덕궁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소실되고 말았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황궁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 이왕으로서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 짓기도 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1947년 미군정에 의해 정부에 몰수되었다.
돈화문, 인정전, 선정전 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의 가치도 높다.
3. 기타[편집]
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분리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3곳을 분리하는 담장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현재 창덕궁 쪽에서 관람하는 낙선재도 지어질 때에는 창경궁의 부속 건물이었고, 후원은 창경궁 쪽과 한 공간으로 공유하듯이 사용했다고 한다.[12] 종묘는 일제 강점기에 율곡로를 뚫으면서 강제로 분리됐다.[13]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데, 순정효황후는 1966년까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까지 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영친왕과 그 아들 이구의 장례식은 각각 1970년, 2005년에 거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조선왕조의 최후를 장식한 궁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곳.
2010년 5월 1일자로 후원 등 일부를 제외하고 전면 자유 관람으로 바뀌었다.[14] 후원(금원)의 경우 정해진 시간마다 해설사를 동행하여 약 100여 명의 일정한 인원만이 입장 가능하며 관람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다. 사실상 창덕궁의 명소로 꼽히는 곳은 후원이기 때문에 창덕궁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자유 관람뿐만 아니라 해설사와 같이 들어가는 코스도 가봐야 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제한을 둬서 출입을 통제시키는 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출입이 통제된 만큼 내부 환경, 특히 자연경관의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동식물 너구리는 기본이고 멧돼지가 와서 관람 통제가 된 것은 흑역사들이 서식하고 있다. 내부로 간단한 음료 이외의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후원 내에도 매점이 있기는 하나, 단가가 바가지 높은 편이므로 음료는 미리 준비해 가는 편이 좋다. 특히 여름에 매점에서 판매하는 부채의 경우, 같은 물건을 바로 밑의 인사동에서 반값에 팔고 있다.[15] 기념품이 필요하다면 인사동이나, 후원 입장 전의 기념품관에서 구입할 것.
후원은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후원 특별 관람 예약을 하고 가는 게 기본이다. 특히 단풍철인 11월은 후원 관람의 극성수기에 해당해서 인터넷으로 예매하려면 광클은 필수다. 예약 취소분은 현장에서 판매하지만 봄가을 날씨 좋은 철에는 예매 경쟁이 치열해서 떨렁떨렁 가면 빈자리가 안 난다. 실제로 노쇼를 기대하고 왔다가 피 본 관람객을 현장에서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돈화문에서 후원 입구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기 때문에 관람 공지에서도 출발 20분 전까지는 도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매 표에서는 시간을 초과하면 취소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거 없고, 예매 표만 인터넷에서 출력해가면 판매는 한다. 단 해설사는 지각자를 기다려주지 않으므로... 최소한 출발 정각까지는 가야 따라 들어갈 수 있다.
야간관람으로는 "창덕궁 달빛기행" 이란 테마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달정도 티켓 사전예매 식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티켓가는 3만원이다.
한동안 특별관람으로 개방하다가 2011년 이후로 개방하지않는 낙선재의 뒷뜰 (상량정 부분) 도 짤막하게나마 들어갈 수 있으니 관심이 있고 아름다운 창덕궁의 야간경관을 즐기고픈 사람이라면 참고하여 다녀오도록 하자.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내국인은 한국어 이외의 코스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괜히 예약하고 헛수고하지 말자.[16]
참고로 덕수궁, 경복궁과 함께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 덕수궁과 함께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궐 내부에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일부 주요 전각들이나 내부는 서양식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는 전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 내부에 개인 소유 2층 주택[17]이 있고 그로 인해 일부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였다고 한다. 나라의 문화재가 사유지로 팔렸다는 것도 황당한데 담장을 헐고 철문을 짓는 등의 훼손이 이루어졌음에도 법적으로 해결 할 방안이 없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15억의 매매가를 제시했으나 건물 소유주 측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바라는 듯.
2015년 7월, 문화재청이 낙선재 권역을 외국인을 위한 고가(1박에 300만 원)의 숙박시설로 개방하는 ‘궁 스테이’를 추진해 논란이 일어났다.
대중교통으로는 정문인 돈화문 인근에 서울 버스 109, 151, 162, 171, 172, 272, 710 등이 정차한다. 전철은 3호선 안국역이 가장 가깝다.
2018년 9월 10일에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맞이하는 국빈행사가 열렸다. # 창덕궁에서 국빈 환영식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앞으로도 자주 쓰일 듯하다.
4. 주요 건축[편집]
4.1. 궁문[편집]
사진 | 설명 |
돈화문(敦化門) | |
금호문(金虎門) 창덕궁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인 돈화문이 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이용되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올 때 금호문을 이용했다. 건립 이후 성종 이전까지 명칭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좌찬성이였던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액호를 지었고 이때 성종이 금호라는 액호를 낙점해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 |
단봉문(丹鳳門) | |
요금문(曜金門) | |
http://www.ocp.go.kr/file_data/vrdata/010101/img/d1-01se00166135.jpg | 경추문(景秋門) |
4.2. 외조[편집]
4.2.1. 외전[편집]
사진 | 설명 |
진선문(進善門) | |
숙장문(肅章門) | |
인정문(仁政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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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 | |
4.2.2. 궐내각사 [18][편집]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우리나라 5대궁 중에서 특히나 우리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궐내각사는 복원된 인정전 서편의 궐내각사 건물군들이다.
사진 | 설명 |
이문원(摛文院) | |
검서청(檢書廳) | |
책고(冊庫) | |
봉모당(奉謨堂) | |
예문관(藝文館)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제찬(制撰)과 사명(詞命 : 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예문관(예조 산하)의 관사로, 국조오례에 의한 각종 궁중의식의 규율을 관장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도 있었다. 향실과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 |
홍문관(弘文館) | |
내의원(內醫院) | |
억석루(憶昔樓) | |
영의사(永依舍) |
4.3. 내조[편집]
4.3.1. 내전[편집]
사진 | 설명 |
희정당(熙政堂) | |
대조전(大造殿) | |
경훈각(景薰閣) | |
4.3.2. 동궁[편집]
사진 | 설명 |
성정각(誠正閣) | |
관물헌(觀物軒) | |
중희당 터 | |
승화루&삼삼와,칠분서 |
4.4. 후원[편집]
4.4.1. 부용지 일대[편집]
사진 | 설명 |
부용정(芙蓉亭) | |
영화당(暎花堂) | |
주합루(宙合樓)[27] | |
서향각(書香閣) | |
희우정(喜雨亭) | |
천석정(千石亭) | |
4.4.2. 연경당 권역[편집]
사진 | 설명 |
연경당(演慶堂) | |
선향재(善香齋) | |
농수정(濃繡亭) | |
4.4.3. 옥류천 일대[편집]
사진 | 설명 |
소요정(逍遙亭) | |
청의정(淸漪亭) | |
태극정(太極亭) | |
취규정(聚奎亭) | |
취한정(翠寒亭) | |
http://blog.joinsmsn.com/usr/m/u/mulim1672/9/%EB%86%8D%EC%82%B0%EC%A0%95.jpg | 농산정(籠山亭) |
4.4.4. 애련정 권역[편집]
사진 | 설명 |
기오헌(寄傲軒) | |
운경거(韻磬居) | |
애련정(愛蓮亭) | |
4.4.5. 관람정 권역[편집]
사진 | 설명 |
관람정(觀纜亭) | |
폄우사(砭愚榭) | |
승재정(勝在亭) | |
존덕정(尊德亭) | |
4.4.6. 그 외[편집]
사진 | 설명 |
가정당(嘉靖堂) | |
능허정(凌虛亭 ) | |
청심정(淸心亭) | |
4.5. 낙선재 권역[편집]
사진 | 설명 |
낙선재(樂善齋) | |
석복헌(錫福軒) | |
수강재(壽康齋) | |
상량정(上凉亭) | |
한정당(閒靜堂) | |
http://blog.chosun.com/web_file/blog/232/68232/4/IMG_2306.JPG | 취운정(翠雲亭) |
4.6. 구 선원전 권역[편집]
사진 | 설명 |
선원전(璿源殿) | |
진설청(陳設廳) | |
내찰당(內察堂) | |
의풍각(儀豊閣) | |
양지당(養志堂) | |
4.7. 신 선원전 권역[편집]
신 선원전 | |
의효전(懿孝殿) | |
재실(齋室) | |
4.8. 기타 권역[편집]
괘궁정과 몽답정은 현재는 신선원전 권역 내에 있는 정자들이나, 건립당시에는 창덕궁의 궁역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므로 기타 권역에서 설명한다.
사진 | 설명 |
빈청(賓廳) | |
괘궁정 | |
몽답정(夢踏亭) | |
21시간전
namu.wiki/w/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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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람정觀纜亭 권역
11-h-1 관람정觀纜亭
위치와 연혁 : 일명 반도지(半島池) 가에 놓인 부채꼴 모양의 정자이다. 『궁궐지』에는 선자정(扇子亭)이라고 나와 있다.
『동궐도』에는 관람정이 보이지 않고, 반도지 또한 두 개의 방형 연못과 한 개의 원형 연못으로 나뉘어 있다. 한편 순종 때 그려진 『동궐도형』에는 연못이 호리병 모양으로 합해져 있다. 아마 이때에도 배를 띄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궐도형』이 그려진 이후, 즉 순종 때 일제 강점기에 반도 형태의 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 ‘관람(觀纜)’은 ‘닻줄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뱃놀이를 구경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다. 람(纜)은 닻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뱃놀이를 의미한다.
제작 정보 : 서체는 행서이다.
11-j-2 존덕정尊德亭의 주련
위치와 연혁 : 관람정이 있는 연못을 내려다 보는 언덕에 있으며 1644(인조 22)년에 세웠다. 『궁궐지』에 의하면 존덕정 옆에 반월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반월지가 지금의 반도지로 변형된 듯하다. 원래는 육면정으로 불렀으나 나중에 존덕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종이 존덕정과 관련한 친필 시 등을 여기에 걸기도 했으며, 선조와 인조의 어필도 이곳 존덕정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헌종 연간의 존덕정 현판은 헌종의 어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존덕정의 내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육모정의 가운데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희롱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정자의 격식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 준다.
존덕정 북쪽 창방에는 정조(1752~1800년)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가 나무판에 새겨져 있다. 1)
뜻풀이 :
(1) 盛世娛遊化日長(성세오유화일장)
태평성세에 즐겁게 놀며 덕화(德化)의 날은 기니,
(2) ?生咸若春風暢(군생함약춘풍창)
온갖 백성 교화되어 봄바람 화창하네.
임금의 교화가 잘 이루어진 세상에서 백성들이 태평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덕화는 옳지 못한 사람을 덕으로 감화시키는 것이고, 함약(咸若)은 제왕의 교화(敎化)를 칭송하는 말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서 “?, 咸若時, 惟帝其難之(아, 너의 말이 옳으나 다 이와 같이 함은 요 임금도 어렵게 여기셨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뜻풀이 :
(3) 庶俗一令趨壽域(서속일령추수역)
뭇 백성들 한결같이 태평성대로 나아가게 하고,
(4) 從官皆許宴蓬山(종관개허연봉산)
근신(近臣)들도 모두가 봉래산 잔치에 허락 받았네.
정치가 잘 이루어져 백성들이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수역(壽域)은 태평한 세상을 뜻한다.
뜻풀이 :
(5) 艶日綺羅香上苑(염일기라향상원)
고운 봄날 비단 치마는 상림원(上林苑)에 향그럽고,
(6) 沸天簫鼓動瑤臺(비천소고동요대)
하늘까지 치솟는 피리소리·북소리는 요대(瑤臺)를 뒤흔드네.
궁궐 후원에서 즐겁게 놀이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상림원은 한나라 때 임금의 동산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궁궐의 후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상림원은 원래 진(秦)나라 때도 있었으나 황폐해진 것을 한 무제(武帝)가 수복하여 확장시켰으므로 상림원은 주로 한나라 궁궐을 일컫는다. 요대는 전설 속의 신녀(神女)가 산다는 누대로 아름다운 누대를 뜻한다. 비단 치마는 궁녀들이 입고 있는 실제의 치마일 수도 있고, 후원에 난만하게 피어 있는 꽃잎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송나라 왕조(王操)의 「낙양춘(洛陽春)」<원전 1> 중 경련(頸聯)에서 따 온 구절이다. 왕조는 송나라 때 강남의 문인으로 자는 정미(正美)이다.
11-h-3 승재정勝在亭
위치와 연혁 : 폄우사(砭愚榭) 남쪽의 가파른 언덕 위에서 관람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이다. 연경당 뒤편에 있는 농수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1907년 8월에 순종이 즉위하고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그 해 10월부터 창덕궁 수리에 들어갔는데 이 때 관람정 등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뜻풀이 : ‘승재(勝在)’는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이다. ‘승(勝)’은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나 고적(古跡)’을 가리킨다.
11-j-3 승재정勝在亭의 주련
뜻풀이 :
(1) 龍蛇亂?千章木(용사난획천장목)
용과 뱀은 천 그루 거목(巨木)을 어지러이 휘감았고,
(2) 環?爭鳴百道泉(환패쟁명백도천)
패옥(?玉)들은 백 갈래 샘물을 울리는구나.
용과 뱀처럼 구불구불 감고 올라간 넝쿨이 수많은 거목들을 마구 휘감고, 여러줄기의 샘물이 옥으로 만든 보물들이 울리는 듯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정경을 묘사했다. ‘천장목(千章木)’은 ‘천 그루의 나무’, 즉 수많은 나무를 뜻한다.
장(章)은 큰 나무를 세는 단위이다. 임천(林泉)의 승경(勝景)을 묘사한 것이다.
(3) 披香殿上留朱輦(피향전상류주련)
피향전(披香殿) 위에서 임금 수레 머무니,
(4) 太液池邊送玉杯(태액지변송옥배)
태액지(太液池) 연못가에 옥 술잔을 보내오네.
연 못가의 전각에 임금의 수레가 행차하여 주연(酒宴)을 베푸는 모습을 그렸다. 왕안석(王安石, 1021~1086년) 2)의 「화어제상화조어(和御製賞花釣魚: 임금이 지은 「상화조어」에 화답하다)」<원전 2> 중 함련(含聯)에서 따 왔다. ‘피향전’과 ‘태액지’는 원래 한나라의 궁전과 연못 이름인데, 후대에 관습적으로 궁궐안의 전각과 연못을 일컬을 때 두루 쓰였다. 3) ‘피향(披香)’은 향기가 무럭무럭 풍긴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 존덕정의 서남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정자다. 효명세자가 들러서 독서하던 곳이다. 건립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궁궐지』에 정조가 지은 「폄우사사영(砭愚榭四詠)」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8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궐도」에는 폄우사 정면 1칸에 직각 방향으로 담장이 이어져 맞배지붕의 세 칸짜리 건물이 있다.
뜻풀이 : ‘폄우(砭愚)’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말로 쓰인다. ‘폄(?)’은 ‘돌침’인데, ‘돌침을 놓아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북송의 성리학자인 장재(張載, 1020~1077년) 4)가 글을 가르치던 서원(書院)의 동쪽 창문에 「폄우(砭愚)」라는 제목의 글을, 서쪽 창문에 「정완(訂頑)」5)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붙여 경계의 지침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으로 바꾸었다.
‘사(사)’자를 ‘활터에 세운 정자’로 풀이하고 폄우사를 사정(射亭), 즉 활터에 세운 정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글자는 높은 터에 지은 목재 건물을 뜻한다. 『서경』에서부터 용례가 보이는데 『서경』의 주석에 의하 면 흙이 높은 곳을 ‘臺(대)’라고 하고 나무가 있는 곳을 ‘?(사)’라고 한다고 하였다.<원전 3> 그러나 후대에는 그런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누각이나 누대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글자에서 오른쪽 ‘射(사)’는 형성(形聲) 문자에서 단순히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며 ‘활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1-j-4 폄우사의 주련
뜻풀이 :
(1) 南苑草芳眠錦雉(남원초방면금치)
남쪽 동산에 풀 고우니 아름다운 꿩이 졸고 있고,
(2) 夾城雲下霓?(협성운난하예모)
협성(夾城)에 구름 따뜻하니 무지개가 내려오네.
고운 풀밭 위에서 아름다운 꿩이 한가롭게 졸고 있는 풍경과 따뜻한 봄날 피어 오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무지개가 걸린 성곽의 모습을 묘사했다. 협성은 양변을 높은 담장으로 쌓아 그 사이로 통행하게 만든 길, 또는 성곽의 바깥 둘레에 다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예모(霓?)’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 6)이 지은 「장안잡제장구(長安雜題長句)」 육수(六首) 중 제 3수<원전 4>의 함련(?聯)에서 따왔다.
(3) 絶壁過雲開錦繡(절벽과운개금수)
절벽에 구름이 지나가니 수 놓은 비단이 펼쳐지고,
(4) ?松隔水奏笙簧(소송격수주생황)
성긴 솔이 물 건너 편에서 생황을 연주하네.
자연이 만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과, 생황 소리처럼 들리는 운치 있는 솔바람 소리를 묘사하였다. 두보 7)의 시 「칠월일일제종명부수루(七月一日題終明府水樓)」<원전 5> 중 제 1수의 경련(頸聯)에서 따온 구절이다.
(5) 林下水聲喧笑語(임하수성훤소어)
숲 속 아래 물 소리는 웃음 소리인 양 떠들썩하고,
(6) 巖間樹色隱房?(암간수색은방롱)
바위 사이 나무 빛깔은 방 창살을 숨기고 있네.
물 소리가 웃음 소리처럼 즐겁게 들리고, 바위 사이에 자라난 나무들 속에 거처하는 집이 보일락말락 숨어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숲 속의 즐겁고도 그윽한 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당나라 문인 왕유 8)의 작품으로, 「칙차기왕구성궁피서응교(?借岐王九成宮避暑應敎)」<원전 6> 중 경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앞 구절의 ‘笑語(소어)’가 ‘語笑(어소)’로, 뒤 구절의 ‘巖間(암간)’이 ‘巖前(암전)’으로 된 곳도 많다.
(7) ?閣條風初拂柳(화각조풍초불류)
아름다운 누각에 한 줄기 바람은 버들을 막 스치고,
(8) 銀塘曲水半含苔(은당곡수반함태)
은빛 연못 물굽이에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묘사한 시구이다. 화각(?閣)은 단청을 칠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을 뜻한다. 이는 당나라 시인 무평일(武平一, ?~741년) 9)의 「봉화입춘내출채화수응제(奉和立春內出綵花樹應制)」<원전 7> 중 경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11-h-5 빙옥지氷玉池
위치와 연혁 : 1688(숙종 14)년에 천수정(淺愁亭)의 터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그 앞의 바위를 파서 조그마한 돌 연못을 만들었다. 이것을 빙옥지라 한다. 현재 청심정의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뜻풀이 : ‘빙옥(氷玉)’은 ‘얼음과 옥’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또 ‘빙옥’은 고상하고 정결한 인품을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빙자옥질(氷姿玉質)’은 얼음이나 옥같이 맑고 깨끗한 자질, ‘빙기옥골(氷肌玉骨)’은 얼음같이 깨끗한 살결과 옥같은 뼈대라는 뜻으로 미인 또는 매화를 형용한다.
제작 정보 : 청심정 앞에는 돌 연못을 바라보는 거북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거북의 등에 새겨진 금석문이다. 윗부분에 작은 글씨로 ‘御筆(어필)’이라고 되어있어 임금의 글씨임을 나타낸다.
위치와 연혁 : 존덕정 뒤쪽 산 중턱에 지은 네모난 정자이다. 1688(숙종 14)년에 천수정 터에 청심정을 짓고, 그 앞의 바위를 네모나게 파서 빙옥지를 만들어 두었다. 현재 청심정에는 현판은 걸려 있지 않고 네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1) 松排山面千重翠(송배산면천중취)
산허리에 늘어선 솔은 천 겹으로 푸르고
(2) 月點波心一顆珠(월점파심일과주)
물 속에 비친 달은 한 덩이 구슬이로다.
청심정이 위치한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위 구절은 청심정이 있는 산중턱에 소나무가 무성함을 설명했고, 아래 구절은 정자 앞에 있는 네모난 돌 연못인 빙옥지에 달이 비치는 정경을 표현하였다.
이 구절은 본래 당나라 백거이 10)의 칠언율시 「춘제호상(春題湖上)」<원전 8>의 함련 두 구절을 딴 것이다.
11-j-6 淸심정청心亭의 주련 위치
(3) 巖桂高凝仙掌露(암계고응선장로)
바위의 계수나무에는 높이 선장(仙掌)의 이슬이 맺히고
(4) ?蘭淸暎玉壺氷(원란청영옥호빙)
동산의 난초엔 맑게 옥병의 얼음이 비치네.
위 구절은 청심정 주위 바위에 자라는 계수나무에 신선의 이슬이 맺혀, 이 이슬을 먹으면 정자의 주인 또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한 것이다. 선장은 신선의 손바닥을 뜻한다. 아래 구절은 정자 주인의 정신 세계가 높고 맑음을 ‘난(蘭)’과 ‘옥호빙(玉壺氷)’이란 시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옥호빙이란 옥병 속의 얼음이란 뜻으로 정신 세계가 깨끗함을 상징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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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과 번역은 서향각의 편액 참조.
2) 왕안석은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자는 개보(介甫),호는 반산(半山)이다. 부국강병을 위한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실시하였고,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3) 창덕궁에서는 애련지 연못 가에‘태액’이라는 전서가 있다. 태액의 자세한 풀이는 9-h-8 태액 참조.
4) 장재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에 대한 일원론적 시야를 설파하였다.
5) 정완은 어리석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6) 두목에 대해서는 10-j-1 연경당의 주련 참조.
7) 두보에 대해서는 11-h-1 관람정 참조.
8) 왕유에 대해서는 7-j-10 한정당 기둥의 주련 참조.
9) 무평일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원래의 이름은 견(甄)인데 평일(平一)이라는 자로 더 유명하다.
10) 백거이에 대해서는 9-h-8 태액 참조.
<원전 1> 왕조, 「낙양춘」, “帝里山河景莫裁 就中春色似先來 暖融殘雪當時盡 花得東風一夜開?日綺羅香上苑 沸天簫?動瑤臺 芳心只恐煙花暮 閒立高樓望幾回”
<원전 2> 왕안석, 「화어제상화조어」, “ 幄晴雲拂曉開 傳呼仙仗九天來 披香殿上留朱輦 太液池邊送玉杯 宿蘂暖含風浩蕩 ?鱗淸映日徘徊宸章獨與春爭麗 恩許?歌豈易陪.”
<원전 3> 『서경』 「태서(泰誓) 상」, “惟宮室臺榭陂池侈服, 以殘害于爾萬姓”; 이에 대한 채침의주(註), “土高曰臺, 有木曰榭.”* 이덕수, 『新궁궐기행』(대원사, 2004), 345쪽.
<원전 4> 두목, 「장안잡제장구」(제 3수) “雨晴九陌鋪江練 嵐嫩千峰疊海濤 南苑草芳眠錦雉 夾城雲暖下霓? 少年羈絡靑紋玉 遊女花簪紫?桃江碧柳深人盡醉 一瓢顔巷日空高.”
<원전 5> 두보, 「칠월일일제종명부수루」(제 1수) “高棟曾軒已自?, 秋風此日灑衣裳. ?然欲下陰山雪, 不去非無漢署香. 絶壁過雲開錦繡,疏松夾水奏笙簧. 看君宜著王喬履, 眞賜還疑出尙方.”
<원전 6> 왕유, 「칙차기왕구성궁피서응교」 “帝子遠辭丹鳳闕 天書遙借翠微宮 隔窓雲霧生衣上卷?山泉入鏡中 林下水聲喧笑語 巖間樹色隱房? 仙家未必能勝此 何事吹笙向碧空.”
<원전 7> 무평일, 「봉화입춘내출채화수응제」,“?輅靑?下帝臺 東郊上苑望春來 黃鶯未解林間? 紅蘂先從殿裏開 ?閣條風初變柳 銀塘曲水半含苔 欣?睿藻光韶律 更促霞觴畏景催.”
<원전 8> 백거이, 「춘제호상」, “湖上春來似?圖, 亂峯圍繞水平鋪. 松排山面千重翠, 月點波心一顆珠. 碧?線頭抽早稻, ?羅裙帶展新蒲. 未能抛得杭州去, 一半勾留是此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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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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