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8. 01:19ㆍ차 이야기
폄우(砭愚)와 정완(訂頑)
ㅡ 東銘과 西銘 / 張載
동쪽(왼쪽)자리에 써 붙인 글 : 東銘 폄우(砭愚)
장난스런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장난스런 행동은 꾀에서 만들어진다.
소리에서 나오고, 사지에서 나타나는데 자기의 마음이 아니라고 하면
현명하지 않는 짓이고, 남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들 될 수 없는 일이다.
잘못된 말은 진심이 아니며, 잘못된 행동은 성심이 아니다.
소리에서 실수하고 사체를 그르치고 잘못하고서 자기가 당연하다고 한다면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남이 자기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남을 속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허물이 되는 데도 자기의 장난 쯤으로 여기고
생각에서 잘못된 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데도 자기의 정성으로 여긴다.
너에게서 나온 것을 경계할 줄 모르고, 너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에 허물을 돌리면
오만함을 자라게 하고 또 잘못됨을 이루니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한 잘못인지 알 수 없도다.
[출처] 동명 東銘 (폄우:어리석음을 그침) - 장재(장횡거)|작성자 꿈쩍않다함없는밑둥
서명 - 서쪽(오른쪽) 자리에 써 붙인 글 : 西銘 정완(訂頑)
하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르니,
나는 여기에서 조그만 모습(小子)으로 뒤섞여 그 가운데 처한다.
그러므로 천지가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나는 몸으로 삼고,
천지가 거느리고 있는 것을 性(바탕)으로 삼으니,
백성들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동료이다.
군주는 내 부모의 宗子이고, 대신은 종자의 家臣이다.
연세가 높은 분을 존경함은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것이고,
고아나 약한 자를 자애롭게 대하는 것은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인은 천지와 덕이 합하고, 현인을 그 빼어난 자이며,
천하의 모든 지치고 쇠약하며 질병이 있는 자와,
외로운 자, 홀아비, 과부는 모두 우리 형제 중에
곤란과 고통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자들이다.
이에 잘 보전함은 자식이 공경함이요.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음은 효도에 지순한 자이다.
이것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 이라 하고, 仁을 해치는 것을 적賊(도둑)이라 하며
악을 이루는 자는 훌륭한 인재가 아니며, 형체를 잘 실천함이 오직 어진 자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일을 잘 잇고, 신을 궁구하면 그 뜻을 잘 계승할 것이니
방의 귀퉁이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함이 부모에게 욕되지 않는 것이요.
마음을 보전하여 性(바탕)을 기름은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맛있는 술을 싫어함은 숭백崇伯의 아들이 부모의 봉양을 돌아봄이요.
영재를 기름은 영봉인穎封人이 선을 남에게 준 것이다.
수고로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기쁨을 이룬 것은 순임금의 공이요.
도망치지 않고 팽형(烹刑 : 삶아 죽이는 형벌)을 기다린 것은 신생 申生의 공손함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간 자는 증삼 曾參이며,
부모의 뜻을 따름에 용감하고 명령에 순종한 자는 백기 伯奇이다.
부유하고 귀하며 복스럽고 윤택함은 장차 나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고,
가난하고 천하며 근심하고 걱정함은 그대를 옥玉처럼 갈고 연마하여 완성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으면 나 하늘을 순종하여 섬길 것이요. 죽으면 나 편안하리라.
存吾順事 沒吾寧也
[출처] 서명 西銘 (정완 訂頑) - 장재 (장횡거) |작성자 꿈쩍않다함없는밑둥
좌우명(座右銘)
- 승인 2013.08.08 18:40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사람마다 좌우명이 있다. 앞에 붙여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는 글을 말한다. 주로 자기를 경계하고 독려하는 문구를 붙여놓는다. 학생들이 붙여놓은 것을 보면 재밌다. ‘오늘 자면 내일 추녀, 오늘 깨면 내일 미녀!’ 고전이나 명언에서 뽑아내기도 한다.
사실 좌우명은 왼쪽 오른쪽을 말하는 ‘좌우명’(左右銘)이 아니라 자리 오른쪽을 뜻하는 ‘좌우명’(座右銘)이다.
한나라 때 최원(崔援)이 그 주인공으로 앉은 자리 오른쪽에 글을 적어놓아 그렇게 부른다.
좌우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송나라 때 장재(張載: 1020-77)의 ‘서명’(西銘)이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그의 글도 서쪽 곧 오른쪽에 있었다.
장재는 서재의 동쪽과 서쪽에 글을 써놓고 있었는데 동쪽에 붙어있었던 ‘동명’(東銘)은 유명하지 않다. 그는 본디 왼편 동쪽 글을 ‘폄우’(貶愚), 오른편 서쪽 글을 ‘정완’(訂頑)이라고 불렀다. 폄우는 ‘둔함을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정완은 ‘어리석음을 물리친다’는 뜻인데, 당시 정이가 그냥 동서로 하라고 해서 동명, 서명으로 남게 되었다. 정이의 제자인 주희(朱熹) 곧 주자가 이 서명에 해설을 달면서 이후 많은 유학자들이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황도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라는 글을 남겼으니 그 영향력은 대단했던 셈이다. 그는 이를 임금에게 진강하기도 했다. 이후 송시열(宋時烈)도 ‘서명의 주제는 어짐(仁)이다. 동서명이 된 까닭은 정이가 폄우, 정완이라고 하면 싸움거리가 되니 그냥 동서로 하라고 했다’(실록 숙종6년)면서 서명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서명의 내용인데, 송시열이 말했듯이, 사해동포와 물아일체의 정신(民吾同胞, 物吾與也)을 바탕으로 한 인간애가 그 핵심내용이었다. ‘살아서 제대로 살고, 죽어서는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는 말로 그 글은 마치고 있다.
나는 한 동안 독립기념관에서 구한 삼균(三均)주의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글을 걸어놓고 있었다. 붙일 자리가 북쪽 밖에 없어 북명이었던 셈이다.
‘천하의 교육, 경제, 정치를 균등히 하라.’(均天下之智富權.)
내용도 좋았지만, 그의 필묵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내 판단에는 그가 임시정부요인 가운데 가장 유려한 필체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한다. 사상도 좌우를 통틀어 그만한 주체적인 사상가는 드물다. 특히 교육의 권리를 먼저 내세운 것은 정치와 경제의 밑바탕에 바로 교육의 문제가 깔려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서, 나같이 학교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이념이면 좌우를 넘나들어, 중국혁명의 지도자인 쑨원의 삼민(三民)주의처럼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에게 모두 존경받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최근에는 도산서원에서 구한 이황의 필묵을 서쪽을 향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있다. 세 글자씩 아래로 쓴 모두 여섯 자의 목판 탁본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고, 남을 섬기지 않음이 없어라.’
하나는 개인윤리고, 하나는 사회윤리다. 그런데 이글은 이렇게 쓰였다. ‘母自欺, 母不敬.’ 어찌된 일인지 ‘하지 말라’는 뜻으로 ‘무’(毋: 무자기, 무불경)라고 써야 하는데, 퇴계 선생은 그냥 어미 ‘모’(母)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어머니는 스스로 속이시네, 어머니는 아무도 섬기지 않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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폄우정완( 砭愚訂頑) 돌침 폄, 어리석을 우, 바로잡을 정, 아둔할(완고할) 완
앞의 두 자 ‘폄우(砭愚)’는 “돌침을 놓아 어리석음을 깨뜨린다”는 말이고, 뒤의 ‘정완(訂頑)’은 “아둔한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합쳐서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아둔함을 바로잡는다’는 사자성어가 되었다.
성리학 태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중국 북송 시대의 대유학자 장재(張載)는 만년에 고향인 횡거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서원 동쪽 창에 걸어놓은 글의 제목이 폄우이고, 서쪽 창에 건 글의 제목이 정완이었다. 그래서 폄우는 동명(東銘), 정완은 서명(西銘)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서명은 후대 주자학자들이 성리학의 요체를 담았다며 경전으로 받들 만큼 유명하나 난해한 편이고, 동명은 공부하는 자의 자기 수양을 독려하는 글인 만큼 그리 어렵지 않아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창덕궁 후원에 가보면 존덕정 옆에 있는 정자 이름이 폄우사이다. 요절하지 않고 즉위했다면 영명한 군주가 되었을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가 즐겨 머물며 책을 읽던 곳이다. 폄우는 왕자들도 자계(自戒,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함)로 삼는 글이었던 것이다. <고문진보>에 실려 있는 동명편을 알기 쉽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농담으로 하는 말도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고, 장난질도 자기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로 나오고 몸으로 드러났는데 본심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것이) 밝혀지지도 않을 일이고, 남들이 의심하지 않기를 바래 본들,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진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잘못 나온 말, 잘못 이뤄진 행동을 자기가 당연히 할 것을 한 것이라 말하면 자기를 속이는 짓이며, 남들에게도 이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마저 속이는 짓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말을 농담이었다고 그 허물을 돌리거나, 자기의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행동을 자기의 진정인 양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너에게서 나오는 것을 경계할 줄 모르고, 도리어 그 허물을 너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 돌리는 것은, 오만을 자라게 하고 비행(非行,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을 이루게 하는 짓이다. 그릇됨이 누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느냐.”
ㅡ 하략
ㅡ 자료 출처 :
2016.12.22 한겨레 다음뉴스
뜻풀이 : ‘폄우(砭愚)’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말로 쓰인다. ‘폄(砭)’은 ‘돌침’인데, ‘돌침을 놓아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북송의 성리학자인 장재(張載, 1020~1077년) 4)가 글을 가르치던 서원(書院)의 동쪽 창문에 「폄우(砭愚)」라는 제목의 글을, 서쪽 창문에 「정완(訂頑)」5)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붙여 경계의 지침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으로 바꾸었다.
‘사(榭)’자를 ‘활터에 세운 정자’로 풀이하고 폄우사를 사정(射亭), 즉 활터에 세운 정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글자는 높은 터에 지은 목재 건물을 뜻한다. 『서경』에서부터 용례가 보이는데 『서경』의 주석에 의하면 흙이 높은 곳을 ‘臺(대)’라고 하고 나무가 있는 곳을 ‘榭(사)’라고 한다고 하였다.<원전 3> 그러나 후대에는 그런 구분없이 일반적으로 누각이나 누대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글자에서 오른쪽 ‘射(사)’는 형성(形聲) 문자에서 단순히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며 ‘활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4) 장재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에 대한 일원론적 시야를 설파하였다.
5) 정완(訂頑)은 어리석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ㅡ 자료출처: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관람정 권역]
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3835&bbsId=BB.. 문화재청
출처 :典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晩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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