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21. 19:48ㆍ美學 이야기
檀園 金弘道 (1745∼1806?) 朝鮮 1796年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강세황(姜世晃)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0 × 35.8㎝
서울개인소장
이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쓰여 있듯이 1679년 에 만들어진 중국화보『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실린 심주(沈周, 호 石田, 1427-1509)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동자를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한 옆에는 나지막한 울타리가 보인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활달하면서도 깔끔한 필묵법, 그리고 먹과 조화를 이루는 담채의 적절한 사용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 화보 속의 심주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지만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화보 그림과는 반대인 화폭에 자유롭게 구성하고 변형하여 더욱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남종화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그림이기도 하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강세황(姜世晃)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87.2 × 38.5㎝
개인소장
이 그림은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강세황의 40대 후반, 맑고 문기 있는 독자적인 남종화풍을 구사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세로로 긴 두 벌의 산수대련 형식으로 사시팔경도 중 여름풍경이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강 양안을 표현한 원대(元代) 화가 예찬(倪瓚, 1303-1374)식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근경은 빈 정자로 인해 쓸쓸한 분위기가 나지만 물기 많은 먹으로 처리한 무성한 나무 몇 그루가 익숙한 솜씨로 그려져 있고 강 건너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까지 닿아 정감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주산 또한 습윤한 먹으로 안정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주산을 싸고 감도는 연운으로 인해 근경과 원경사이에 공간감이 형성되었으며, 맑고 부드러운 필치로 신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사인시음(士人詩吟)
강희언(姜熙彦)
후기(1740년대)
풍속
종이에 담채
22.7 × 15.5㎝
개인소장
<사인시음(士人詩吟)>은 글과, 활쏘기, 그림 등 선비들의 문(文), 무(武), 예(藝)의 모습을 담은 『사인삼경도첩(士人三景圖帖)』이라는 그림첩 가운데 시를 짓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름날 선비들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시음서화의 기량을 겨루는 장면이다. 이 『사인삼경도첩』에는 그림마다 강희언과 친분이 두터웠던 강세황의 화평과 발문이 적혀 있다.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희언 본인을 포함한 몇몇 젊은 선비들의 어떤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린 기록화적인 풍속화일 것이다. 즉 18세기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풍속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인(士人) 풍속화에 속하는 그림이다. 먼산을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젖어 있는 사람, 책을 펴서 글을 읽고 있는 사람, 등을 돌리고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 듯한 사람, 두루마리에 글을 쓰고 있는 사람 등 제각각의 여러 모습을 담았다. 이같은 그림은 자신의 생활 모습을 담은 것으로 인물표현이나 화면구성에 있어서는 어색함도 보이지만 그러한 상황을 포착해내는 시각은 진솔하여 당시 상황을 현실감 있게 전해준다.
기려도(騎驢圖)
김명국(金明國)
중기
산수
비단에 수묵
29.3 × 24.6㎝
서울개인소장
이 <기려도>는 소경산수인물도(小景山水人物圖)로 구분되며 그의 『산수인물화첩』 중의 한 폭이다. 오랜 여행길에 몹시 지쳐 보이는 나귀와 이와는 아랑곳없이 시상(詩想)에 잠겨 있는 선비의 모습이 김명국 특유의 재빠른 붓질로 묘사되었다. 배경의 산수는 절벽에 덩굴풀이 흘러내리도록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서 그림의 초점이 중앙의 나귀 탄 인물에 있음을 알려준다.
가고중류도(笳鼓中流圖)
김석신(金碩臣)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6.6 × 53.7㎝
개인소장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린 네 폭 중 하나이다. 차일을 친 두 척의 배에서 벌어진 연회장면으로, 한 쪽에서는 장고와 피리를 불고 또 한 쪽에서는 시문(詩文)을 읽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시대 후기에 상류층이 즐기던 한강 뱃놀이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산뜻한 담묵의 부벽준(斧劈皴)으로 강 건너 절벽을 표현하고, 농묵의 태점(苔點)을 가하여 변화를 주었다. 강 양안의 집들과 길 가는 사람들의 표현은 사경(寫景)의 현장감을 더해준다. 그림 오른쪽은 안개에 싸인 듯 생략하여 원근감과 함께 주제의 집약을 보여준다. 실경에 바탕을 둔 청담(淸淡)하고 산뜻한 느낌의 산수풍속화라 할 수 있다.
헐성루도(歇惺樓圖)
김응환(金應煥)
후기(1788년)
산수
비단에 담채
23 × 42.8㎝
개인소장
이 그림은 1788년에 정조(正祖)의 명을 받아 내외 금강산을 기행하고 명승을 그린 『금강산관동팔경도첩』의 하나이다. 강세황(姜世晃)의 『표암유고(豹菴遺稿)』에 의하면 이 명승도 제작을 위해 김응환과 김홍도가 동행했으며 강세황은 금강산에서 합류했다고 한다. 이 명승첩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에 그린 것으로 바위산의 수직준법(垂直皴法)과 미점(米點)을 혼용한 토산(土山)의 표현 등에서는 정선의 영향도 보이지만 겸재화풍으로부터 한층 벗어나 김응환 자신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면을 꽉 채운 구도나, 담채를 가한 갈필의 바위표현, 부드럽고 습윤한 근경의 수목 등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단원도(檀園圖)
김홍도(金弘道)
후기(1786년)
산수
종이에 담채
135 × 78.5㎝
개인소장
이 그림의 화제에 의하면 단원은 그의 나이 36세인 신축(辛丑,1781년) 청화절(淸和節)에 그의 집을 찾아온 창해옹(滄海翁) 정란(鄭瀾)과 평소 친교가 있던 강희언(姜熙彦)과 함께 진솔회(眞率會)라는 아회(雅會)를 가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후 강희언은 고인이 되었고 단원은 궁핍하여 산남의 객관(客館)에서 기식할 때 홀연히 창해옹을 만나게 되어 5년전 일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암벽으로 둘려진 돌담집 초려(草廬)의 사랑방 들마루에서 아회가 벌어지고 있다. 멀리 뒤로는 성벽이 보이고 암벽 아래는 석상이 놓여 있다. 뜰에는 연잎이 푸르른 연못과 그 옆에 수석이 놓여 있고, 미끈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앞마당에는 학이 노닐고 있는 매우 운치있는 곳이다. 김홍도는 거문고를 타고 있고, 큰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은 강희언이며, 앞쪽에서 시를 읊고 있는 사람이 창해옹이다. 인물의 의습선이며 자연스러운 자세가 그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며 뒷편의 바위는 그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나오는 바위와 비슷하다.
총석정도(叢石亭圖)
김홍도(金弘道)
후기(1795년)
산수
종이에 담채
23.2 × 27.3㎝
개인소장
김홍도는 정조(正祖)의 명을 받들어 1788년 금강산의 승경을 사생하였다. 해금강의 승경을 모사한 이 <총석정도>는 여행할 때 제작한 초본(草本)과 그때의 인상을 토대로 하여 을묘년, 즉 1795년에 제작한 『을묘년화첩』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화첩은 그가 50대에 막 들어서는 시기에 화풍이 무르익어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구사하던 때의 작품으로, 김홍도 화풍의 변천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에 적힌 관지(款識)에 의하면 1795년 그의 후원자인 염상(鹽商) 김경림(金景林)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회화 수요층이 양반 사대부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총석이나 소나무의 묘사에서 언뜻 정선의 수직준법(垂直皴法)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와는 다른 김홍도의 개성있는 필치 또한 뚜렷하다. 총석의 왼편 물결 위에 날고 있는 두 마리 작은 물새의 표현이 재치있다.
기로세연계도(耆老世聯稧圖)
김홍도(金弘道)
후기(1804년)
풍속
비단에 수묵담채
147.2 × 63.3㎝
개인소장
이 그림은 개성 송악산 기슭 옛 고려의 왕궁터인 만월대(滿月臺)에서 열린 경로잔치를 묘사한 일종의 기록화이다. 발문에 의하면 장준택(張俊宅) 등 칠순노인 64명이 그들 자손의 주선으로 평소의 숙원이었던 큰 잔치를 벌이고 이를 당시에 이름난 화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대규모의 잔치가 송악산을 배경으로 회경전(會慶殿) 터에서 펼쳐지고 있다. 차일을 치고 병풍이 둘려진 곳에 마련된 자리에 노인들이 빙 둘러 앉아 악사와 무동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한 사람씩 상을 받고 앉아 있는 주인공들과 주변의 친지 구경꾼까지 하여 250명이 넘는 인물들을 각기 다른 자세와 색으로 표현하여 세세한 묘사에까지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 최만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송악산 표면의 질감을 하엽준(荷葉皴)으로 묘사한 것이나 나무표현 등에서 김홍도 만년의 화풍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맨 아래에는 참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계회도라고 하는 기록화로서의 성격도 갖추고 있다.
묵란도(墨蘭圖)
민영익(閔泳翊)
말기(1904년)
사군자
종이에 수묵
132 × 58㎝
개인소장
이 <묵란>은 화면 하단에 한 무더기의 난을 그렸고, 왼쪽 상단에 소박한 분에 담긴 난을 포치하였다. 잎이 두꺼운 혜란(蕙蘭)으로, 이 난은 민영익 난의 특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잎은 끝이 잘린 듯 뭉툭하고, 담묵으로 처리한 꽃 중앙의 화심(花芯)은 농묵으로 큰 점을 찍어 특이하며, 긴 잎은 직각에 가까운 꺾임을 보여 매우 독특하다. 오른쪽 상단에 쓴 간기로 보아 1904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의암관수도(倚岩觀水圖)
박제가(朴齊家)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3.8 × 26.7㎝
개인소장
<의암관수도>는 『박제가 시화첩』에 나온 한 폭으로, 그림 가운데 솟은 바위에 기대어 폭포 소리를 듣고 있는 두 선비의 모습이 보이며 그 아래에 머리를 어깨에 파묻은 채 쪼그려 앉아 있는 동자 또한 열중하여 물소리를 듣는 듯하다. 오른쪽 벼랑에 매달린 고목(枯木)으로 폭포 윗부분은 가려졌지만 두 줄기 물이 떨어져 잔 바위를 치며 흩어지는 파문은 간결하게 잘 표현되었다. 선비들이 오른 바위나 오른쪽 벼랑을 세부 묘사에 구애되지 않고 시원스런 필치로 처리한 것이 문인화(文人畵)의 멋이라 하겠다. 그의 제시(題詩) “耳爲水而 身爲石 形則三而心則一”(귀는 물이요, 몸은 바위라 형태는 셋이지만 마음은 하나다)은 그림 속 인물들의 삼매경(三眛境)을 그대로 표현한 적절한 시라 하겠다. 이어서 수기(脩其)라는 관서(款書)가 있으니 이 또한 박제가의 아호이다.
선유도(船遊圖)
심사정(沈師正)
후기(1764년)
인물
종이에 담채
27.3 × 47㎝
개인소장
이 작품은 심사정의 몇 안되는 기년작 중 하나이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갑신신추사(甲申新秋寫)’라는 간기의 갑신은 1764년에 해당되어 그의 나이 57세때 그림임을 알 수 있다. 63세까지 살았던 그로서는 만년작에 해당한다. 바다에는 폭풍이 이는 듯 험한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하늘에는 세찬 파도를 반향하듯 굽이치는 먹구름이 덮여 있는데 이 작은 배는 이상하리 만큼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배에는 두 선비가 조금의 동요도 나타내지 않고 고즈너기 파도를 감상하며 뱃전에 기대어 있고 그 반대편 끝에서 노젓는 사공이 대단히 힘에 겨운 듯 몸을 기울여 힘쓰고 있다. 배 위에는 선비의 서재와 정원을 일부 옮겨 놓은 듯 몇 권의 책과 붉은 매화가 꽂힌 술병, 술잔 그리고 고목 위에 한 마리의 학도 앉아 있다. 실로 운치 넘치는 문인풍류(文人風流)의 선유(船遊)를 호방한 필치로 그렸다.
딱따구리
심사정(沈師正)
후기
영모
비단에 채색
25 × 18㎝
개인소장
이 <딱따구리>는 소폭의 화조화이지만 고아한 격을 갖춘 우수한 작품이다. 홍매화가 비스듬히 서 있는 가운데 머리와 배가 선홍색인 딱따구리가 이 매화 등걸에 달라붙어 쪼고 있다. 고목이 된 매화나무의 대담한 구성과 주저함 없이 자신있게 쓴 필법, 그리고 활짝 핀 매화에 쓰인 여유 있는 붓질이 매화의 화사함과 더불어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 매화나무와 새의 비례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막 떨어지는 꽃잎까지 묘사하여 더욱 생동감이 있다. 더구나 수묵을 위주로 하면서도 먹과 어울린 선명한 색채가 눈길을 끈다.
새(鳥)
안건영(安健榮)
말기
영모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이 <새> 그림은 네 마리의 새가 날개를 펴고 어울려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옹이진 고목 한 그루가 조금은 인위적으로 굽어져 화면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안에 화려한 채색의 새 네 마리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활짝 핀 분홍색 꽃에는 꽃술 하나 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며, 고목등걸에는 검은색 테두리를 한 초록색 태점을 찍어 장식효과를 더했다. 새들은 두 마리는 날개빛이 화려한 어미새이고 두 마리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들로, 어미새가 날개를 활짝 펴 새끼새를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화조화이다.
기녀도(妓女圖)
유운홍(劉運弘)
말기
풍속
종이에 채색
23.9 × 36.2㎝
개인소장
이 그림은 툇마루를 배경으로 기녀들의 일상 생활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담뱃대를 물고 앉은 여인, 작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는 여인, 그리고 앞가슴이 흩어져 한쪽 유방을 내민 채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 등의 표정이 한결같이 단조로우며, 여인들의 의습선은 너무 번잡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그림속 공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문창살과 툇마루의 직선들은 이 그림 전체에 기하학적 문양을 부여하여 매우 색다른 느낌을 준다. 왼쪽 빈 벽에는 시산(詩山)이란 관서와 음각으로 유운홍인(劉運弘印)이 찍혀 있다.
석매(石梅)
윤제홍(尹濟弘)
후기
사군자
종이에 수묵
25 × 48㎝
개인소장
오른쪽에는 괴석과 고목의 매화등걸이 어우러져 중심을 이루고, 왼편으로 꽃이 만발한 매화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 긴 서탁 위에는 선비의 고아한 취미를 보여주는 책과 생황(笙篁)이 화로, 차주전자와 함께 놓여 있다. 서탁 옆에는 한 마리의 학이 한쪽 다리로 서있다. 이처럼 매화와 학이 같이 등장하는 것은 북송(北宋)시대의 시인 임포(林逋)의 고사로부터 연유한다. 즉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나무를 가득 심은 곳에서 학과 더불어 은거 생활을 한 고고한 선비로 알려졌다. 이는 윤제홍의 호가 학산(鶴山)인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략한 형태로 묘사된 묵매화는 주제에 어울리는 고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설연음도(聽雪聯唫圖)
이용림(李用霖)
말기(1869년)
산수
종이에 담채
28.3 × 42.5㎝
개인소장
이 그림은 연농(硏農) 최성학(崔性學)의 위촉을 받아 기사년(己巳年, 1869) 늦가을에 그린 것이다.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로 운을 받으며 시를 읊는다는 뜻의 이 그림은 산아래 대숲에 싸인 소박한 집에서 세 명의 선비가 시를 읊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어두운 하늘과 차가운 느낌의 묵색이 눈 오는 날의 느낌을 전해준다. 섬세한 필치와 산뜻한 묵법이 돋보인다.
행정추상도(杏亭秋賞圖)
이유신(李維新)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0.2 × 35.5㎝
개인소장
이 <행정추상도>는 은행나무 아래 정자에서 여섯 명의 선비가 가을국화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다분히 문인화풍이지만 멀리 산에는 성벽이 보이고 산아래 마을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어느 면에서는 실경을 염두에 두고 어떤 모임을 기록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나 국화, 그리고 사립문 옆 단풍 또한 가을 빛으로 아름답다. 윤필(潤筆)의 점으로 큼직하게 찍은 자연스러운 필치가 소박하고 수수한 멋을 풍긴다.
고란사도(皐蘭寺圖)
이윤영(李胤永)
후기(1748년)
산수
종이에 담채
29.5 × 43.5㎝
서울개인소장
이 <고란사도>는 이윤영의 산수화 중 가장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에서 이름난 고란사와 낙화암을 그린 것으로 당시에 유행한 실경산수화이다. 이윤영은 이인상(李麟祥, 1710-1760)과도 가까운 사이였으며 이 그림에서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남종문인화 양식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고란사가 서 있는 바위를 비롯한 각이 진 바위의 표현에서는 절대준(折帶皴)을 써서 친구 이인상의 석법(石法)을 연상케 한다. 왼편의 화제에 의하면 무진년(戊辰年, 1748) 봄에 지리산 중에 있던 이인상을 만나 고란사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말로는 이것이 잘 전해지지 않을 듯하여 건묵(乾墨)을 사용하여 간략히 사생한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이인상은 지리산 사근역(沙斤驛)에서 찰방(察訪)을 하고 있었다. 까슬까슬한 갈필(渴筆)의 느낌이 나며, 백마강가 절벽 위에 있는 고란사의 소박한 모습이나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실제 모습을 보는 듯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산수도(山水圖)
이의양(李義養)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24 × 30㎝
개인소장
이 <산수도>는 모정에 앉아 한가로이 담소를 즐기는 문인들이 있는 강가 주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모정의 모습이나 인물들의 모습은 다분히 화보풍이며 배경의 산수도 수지법에 있어서는 화보적인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어느 특정 지역을 사생한 듯 강가를 따라 성벽과 성채가 있고 높다란 깃대에 깃발이 나부끼며 원산 위까지 뻗쳐있다. 원경에는 강물을 따라 겹겹이 산들이 멀어지며 공간의 깊이가 표현되어 있다.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이인문(李寅文)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23 × 45㎝
개인소장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본다는 제목의 이 그림은 이인문의 가장 잘 알려진 진경산수화이다. 단발령은 금강산 남쪽에서 금강산을 여행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넓게 금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이다. 단발령이라는 이름도 머리를 자른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르는 자마다 대자연에 압도되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그림은 여러 폭 전하지만, 이인문의 이 그림만큼 신선한 구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도 드물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마치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듯, 혹은 보석함을 열어 놓은 듯 안개 속에 아물거린다. 단발령은 진한 먹으로 세밀하게 그려졌다. 정선의 <금강전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암산(岩山)과 토산(土山)이 대조를 이루고 있고, 토산은 부드러운 미점(米點)으로 처리되었다. 고개 위에서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는 인물은 아마도 화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동작진(銅雀津)
정선(鄭敾)
후기
산수
비단에 담채
22 × 32.7㎝
개인소장
지금은 동작대교가 있는 동작나루를 건너편 현재의 이촌동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강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펼쳐진 풍광으로 멀리 원경에는 우뚝 솟은 관악산을 배경으로 국립묘지가 있는 삼태기 모양의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당시에는 마을이 있었는지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 앉아 있고, 나루 건너 먼길을 떠나는 사람, 나루를 막 건너려는 사람들로 한적한 나루는 생기를 찾고 있다. 물길 따라 유유히 떠 있는 배들이 무척이나 평화스러워 보인다.
마굿간
조영석(趙榮祏)
후기
영모
종이에 담채
22.5 × 40.5㎝
서울개인소장
영석의 『사제첩』에 있는 그림으로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스케치 풍으로 기둥과 여물통에 매어져 있는 세 마리 말들이 여물을 먹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아직 미완성인 듯 한쪽 기둥에는 채색이 되어 있지 않고 여물통도 먹선으로만 처리되어 있는데, 세 마리 말의 색깔은 갈색 조로 모두 다르게 표현하여 이채롭다. 또한 오른쪽 말은 엷은 갈색에 갈기와 털은 푸른색으로 칠하여 매우 독특하다. 옆으로 서있는 두 마리 말들은 자연스럽게 잘 그려냈지만 앞을 바라보고 있는 왼쪽의 말은 여러 차례 수정과 가필을 한 자국이 있어서 그리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짐작케 한다. 스케치 풍으로 간략하게 묘사하였으나 말의 갈기는 여러 번 붓질을 가하고 호분을 덧칠해 생동감을 강조하고 있다.
설중방우도(雪中訪友)
조영석(趙榮祏)
후기
풍속
종이에 담채
57 × 115㎝
개인소장
눈 덮인 추운 겨울 한 선비가 먼 곳에 있는 벗의 서재를 찾았다. 학창의를 갖춰 입은 선비의 고아한 풍모는 서재 주변에 세워진 매화나 소나무와 잘 어울려 더욱 기품 있어 보인다. 예의를 잘 갖춘 선비들의 모습과는 달리 시동들이 격의 없이 반기는 듯한 모습은 깊은 산 속에 모처럼 찾아온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설중방우>에 담뿍 담겨 있다.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솔잎이 늦게 시듦을 안다고 했던가, 눈 속의 푸른 솔잎이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않는 친구들의 우정을 상징하는 듯 더욱 푸르러 보인다.
새참
조영석(趙榮祏)
후기
풍속
종이에 담채
20.5 × 24.5㎝
개인소장
이 그림 <새참>은 한여름 농촌 들판에서 새참 먹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바느질과 마찬가지로 『사제첩』에 들어 있다. 화면을 길게 늘여 새참을 먹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밥 먹는 장면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자세도 다양하게 그려 여러 표정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크게 기교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생동감 있는 얼굴을 보면 그가 숙종의 어진(御眞)을 그리는데 감동(監董) 역할로 추천되었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러한 새참 먹는 장면을 통하여 서민의 생활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후대의 풍속화에 영향을 미쳐 비슷한 장면의 풍속화가 여러 폭 전한다.
표훈사도(表訓寺圖)
최북(崔北)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8.5 × 57.3㎝
개인소장
이 <표훈사도>에서는 정선(鄭敾) 진경산수화풍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최북을 이른바 겸재화파로 간주하기도 한다. 금강산의 표훈사를 중심으로 죽 늘어서 있는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표현하였다. 멀리 바위산의 수직준으로 죽죽 내리긋는 바위 모습이나 왼쪽 하단의 미점으로 처리된 토산의 모습은 정선의 금강산도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가람 뒷편의 나무들은 그의 다른 그림에서 많이 그려지던 간일한 나무의 특징을 보인다.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최북(崔北)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25.8 × 38.8㎝
개인소장
근경의 강안에는 눈 덮인 몇 그루의 키 큰 나무가 서 있고, 강에는 고요히 낚시를 드리운 배 한 척이 있는 고즈넉한 강가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강, 몇 그루의 나무, 낚시를 드리운 배 등 고전적인 평범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강물에 번지듯 선염된 푸른색과 하얗게 눈 덮인 나뭇가지에서 배어나듯 돋아있는 붉은 열매는 단아하면서도 산뜻한 분위기로 이끌어 준다. 고요한 자연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배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어부의 모습이 이 그림의 격조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묵죽도(墨竹圖)
신위(申緯)
후기
사군자
종이에 수묵
160.2 × 46.9㎝
고려대박물관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품격이 있으면서도 우아한 점이 특징이다. 그보다 약간 시대가 올라가는 유덕장(柳德章, 1694-1774)의 대나무그림이 보여주는 강인한 대나무의 모습과는 달리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올라 펼쳐지는 방식을 취하고, 댓잎은 길고 유연하게 뻗쳐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이 대그림은 이러한 유연함을 보충하려는 듯 절벽의 바위를 함께 그려 죽석도(竹石圖)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먹의 농담(濃淡)에 변화를 주어 원근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나 원근감보다는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무성하게 중첩된 댓잎이 신위의 대나무가 지닌 멋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김홍도(金弘道)
후기
인물
종이에 수묵담채
109 × 55㎝
고려대학교박물관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홍도는 산수나 인물 뿐 아니라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로도 일찍이 이름을 날렸다. 남아있는 그림 중 도교의 신선들을 주제로 한 그림이 상당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나무 아래에서 악기를 다루고 있는 선인(仙人)을 주제로 한 이 그림은 빼어난 구성력으로 인해 김홍도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작품이다. 기운차게 뻗은 소나무가 화면을 꽉 채우듯 수직으로 올라가고 그 아래 젊은 선인이 홀로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선인은 허리에 짧은 우의(羽衣)를 두르고 등에는 호리병을 차고 있다. 옷차림이나 얼굴 모습은 김홍도의 다른 선인도(仙人圖)에서의 모습과 흡사하다. 소나무는 농담을 달리한 구불구불한 선으로 인해 입체감을 느낄 수 있으며, 이 소나무와 선인과의 구도가 절묘하다. 소나무 아래 공간을 채운 두 구절의 시 “생황에 붙은 대쪽은 봉의 날개를 펼친 듯 하며 월당에서 들리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보다 드높다.(筠管參差排鳳翅 月堂凄切勝龍吟) ”는 시각적인 상상력과 함께 청각적 요소를 일깨워 음악적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난죽(蘭竹)
임희지(林熙之)
후기
사군자
종이에 수묵
160.2 × 49.9㎝
고려대학교박물관
이 <난죽도>는 임희지의 호방한 풍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스듬히 뻗어나온 각진 바위 위로는 농담을 살린 대나무를 그리고, 그 아래로는 난을 활달하고 힘찬 필선으로 자신있게 묘사하였다. 농담의 대비 역시 대담하여 호방하게 자신의 일기(逸氣)를 잘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의 화제(畵題)가 역시 활달한 필치로 왼쪽 여백에 적혀 있다.
“원장(元章:米芾)의 돌, 자유(子猷:王徽之)의 죽, 좌사(左史:屈原)의 난초, 이를 모두 일조(一朝)에 그대에게 주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보답을 하려는가? (元章之石 子猷之竹 左史之蘭 一朝贈君 何以報之)”
북송의 문인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은 괴석을 향해 절하며 경외로움을 표시한 것으로 잘 알려졌고,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 388卒)는 대나무를 군자(君子)로 지칭하며 하룻밤도 대나무가 없는 곳에는 묵을 수가 없다고 한 인물이며, 충성심의 표현으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자살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 343-277B.C.)은 아홉이랑(九畝)이나 되는 넓은 들에 난초를 심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고사(故事)를 모두 한 문장에 집어넣어서 석(石), 난(蘭), 죽(竹)을 일조(一朝)에 준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에서 일조는 각각 다른 조대(朝代)에 대비되는 한 조대(朝代)라는 뜻도 되고 단순히 하루 아침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목멱산도(木覓山圖)
정선(鄭敾)
후기
산수
비단에 담채
17 × 18㎝
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의 중심에 있는 남산의 모습이다. 여름 풍경인 듯 담묵(淡墨)으로 산의 형태를 엷게 그리고 거친 미점(米點)을 찍어 울창한 수풀을 표현하였다. 산허리를 휘감은 구름은 몇 개의 곡선만으로 표현하였으면서도 바탕을 남기면서 신비함이 감돌게 하는 능숙한 구성력을 보인다. 그의 화법이 농익은 만년 작품인 듯 간략하게 처리하였으면서도 붓 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남산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사직송도(社稷松圖)
정선(鄭敾)
후기
화조
종이에 채색
140 × 70㎝
고려대학교박물관
소나무는 높은 기개와 풍치를 지니고 있고, 또 사계절 내내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어 군자의 덕과 장수를 상징하는 수목(樹木)이다. 이 <사직송도>는 땅과 곡식의 신을 제사하는 곳인 사직단에 있던 소나무를 표현한 것으로 대폭의 화면 전체에 땅 위를 굽어져 기어가는 노송을 표현하였다. 고목이나 무성한 솔잎이 수목에 푸르스름한 담채로 표현되어 있고, 꼬여진 나무 둥치나 소나무 껍질의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특히 뻗어간 가지들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여기저기 세워진 나무기둥들의 묘사는 실제 자세한 관찰에 의하여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진경산수화가로서의 명성 만큼이나 사실감이 느껴진다.
관폭도(觀瀑圖)
윤덕희(尹德熙)
후기
산수
비단에 수묵
42.5 × 27.8㎝
국립광주박물관
이 <관폭도>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구도이다. 붓을 쓰는 법이나 나무를 그리는 법 등에서 당시 조선에 들어온 화보(畵譜)의 영향이 보인다. 여기서 그의 아버지인 윤두서의 영향도 볼 수 있지만 윤두서의 그림에 비해서는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폭포는 자연스러운 반면 인물들은 어딘지 세워 놓은 듯 딱딱해 보인다. 계곡에서의 특별한 모임인 듯 선비들과 시동(侍童)의 모습이 보인다.
솟대장이
김준근(金俊根)
말기
풍속
종이에 담채
28.5 × 35㎝
독일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솟대장이>는 간단한 반주에 맞추어 곡예를 하는 광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긴 막대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리는 사람, 나무컵처럼 생긴 그릇으로 공을 올리고 내리며 재주를 부리는 사람 등 광대들의 여러 모습을 담았다. 그의 풍속화는 민속적인 내용의 다양한 소재를 특징으로 하며 선염(渲染) 기법을 사용한 다채로운 색을 썼다. 그러나 표현된 인물의 모습은 얼굴윤곽을 뚜렷하게 표현하긴 하였으나 무표정한 얼굴에 모두 비슷한 형태를 지녀 김홍도 풍속화가 주는 생생함을 느낄 수 없다.
줄광대
김준근(金俊根)
말기
풍속
종이에 담채
28.5 × 35㎝
독일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이 <줄광대>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줄 위에 애띠게 보이는 광대가 붉은 부채를 들고 줄을 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래는 여섯 명의 악사가 각기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부채를 들고 흥을 맞추는 사람과 이를 구경하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다양한 악기의 모습이나 여러 사람의 동작 하나하나는 자세히 그렸으나 표정은 한결같이 무표정하다. 선염(渲染)을 한 의복의 화려한 색감이 또한 18세기 후반기의 풍속화와는 다른 개화기의 시대감각을 느끼게 한다.
들국화도
정조(正祖)
후기
화조
종이에 수묵
84.6 × 51.4㎝
동국대학교박물관
이 그림은 <파초도>와 쌍폭으로 생각되는데, 둥근 바위 위에 국화와 잡풀이 위아래로 펼쳐진 형태로 표현되었다. 한 줄기의 국화가 아래로 드리워져 있고 한 줄기는 위를 향해 올라가 있으며 그 사이에 한 무리의 국화 꽃송이들이 그려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배경설정이 없이 그려져 있어서 도장이나 메뚜기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위아래가 어디인지 언뜻 혼동이 되기도 한다. 막 피어난 꽃송이에서부터 활짝 핀 꽃까지 여러 모습을 그렸고 바위는 미점(米點)으로 음영을 나타내었다.
파초도(芭蕉圖)
정조(正祖)
후기
화조
종이에 담채
84.6 × 51.5㎝
동국대학교박물관
<파초도>는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묘사한 그림이다. 왼편 위쪽에 홍재(弘齋)라는 음각 도장은 이 그림이 정조의 작품임을 알려주고 있다. 파초는 열대성 식물로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해 그림과 시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비교적 단순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균형 잡힌 포치(布置)와 농담(濃淡)을 달리한 묵법이 어울려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미점(米點)을 사용해 바위의 괴량감(塊量感)을 나타내고 있다. 서화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국왕의 그림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강세황(姜世晃)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30 × 35.8㎝
서울개인소장
이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쓰여 있듯이 1679년 에 만들어진 중국화보『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실린 심주(沈周, 호 石田, 1427-1509)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동자를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한 옆에는 나지막한 울타리가 보인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활달하면서도 깔끔한 필묵법, 그리고 먹과 조화를 이루는 담채의 적절한 사용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 화보 속의 심주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지만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화보 그림과는 반대인 화폭에 자유롭게 구성하고 변형하여 더욱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남종화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그림이기도 하다.
수하한담(樹下閑談)
이인상(李麟祥)
후기
산수
종이에 수묵담채
33.7 × 59.7㎝
서울개인소장
이 그림은 이인상의 문인 풍류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그와 교유관계를 가졌던 몇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던 기록화이다. 오른쪽 위에는 이인상의 친구이자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로 이름 높았던 이윤영(李胤永, 1714-1756)이 예서로 쓴 예경(禮卿)이란 사람의 오언절구(五言絶句)가 있다. 왼쪽 아래는 능호관 자신이 해서(楷書)로 이 그림을 그린 연유를 썼다. 즉 “백현(伯玄) 임매(任邁)는 내 그림을 애써 그려 받고도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다른 이가 가져가도 상관하지 않아 내 그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백현이 내 소심함을 비웃을 것을 무릅쓰고 이를 쓴다.”고 하였다. 이 글로 보아 커다란 바위 사이 고목 아래의 편편한 바위에 앉아 한담을 나누는 세 선비는 이윤영과 임매와 이인상이며, 이 그림은 임매를 위해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엷은 먹점과 흐린 푸른색의 점들로 묘사된 나뭇잎은 풍성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 이어 두 개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1765년에 임매가 이 그림을 꺼내 보고 그 때 이미 고인이 된 이인상, 이윤영 등 벗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박연폭(朴淵瀑)
정선(鄭敾)
후기
산수
종이에 수묵
191 × 52㎝
서울개인소장
송도삼절(松都三節)의 하나로 알려진 박연폭포는 개성 북쪽 16km 지점에 있는 유명한 폭포로 경관이 뛰어나 일찍이 그림이나 시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었다. 이 폭포는 꼭대기와 아래쪽에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들어있는 못[淵]이 하나씩 있어 상박연(上朴淵), 하박연(下朴淵)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겸제의 그림에서와 같이 상하박연을 동시에 보기는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정선은 특유의 과장과 생략의 구도로 명승 박연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단순하면서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폭포수는 암벽 사이를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주변의 정자와 유람객을 유난히 작게 표현함으로써 이 폭포가 무한히 높음을 시사하고 있다. 암벽을 나타내는 대담하고 장쾌한 붓질과 벼랑에 서 있는 소나무 등에서 정선의 개성이 돋보인다.
대쾌도(大快圖)
유숙(劉淑)
말기
풍속
종이에 채색
105 × 54㎝
서울대박물관
이 <대쾌도>는 성벽과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씨름과 택견을 즐기고 있는 광경을 그린 풍속화이다. 놀이판은 타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구경하는 여러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이 흥미롭다. 화면은 크게 3등분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중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구경꾼에 둘러 싸여 씨름과 택견이 한창이며, 김홍도의 씨름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엿장수의 모습도 보인다. 맨 아래에는 구경도 좋지만 벌어진 술판에 더 관심이 있는 꼽추와 마지못해 돈을 꺼내는 인물의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화면의 윗부분에는 성벽에 몸을 살짝 감춘 채 소피를 보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놀이 장면을 향해 있는 소년의 모습 등이 매우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 아랫부분에 붉은 옷을 입은 관원을 비롯하여 화면 곳곳에 적절히 채색을 가해 놀이판의 흥겨움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성벽은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형태로 정조 때 쌓은 수원의 화성(華城) 이후 우리 나라에서 시도되었던 성 쌓기 법이다. 성벽이 갑자기 꺾여 들어 어색한 부분도 보인다. 조선 후기에 보여준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서와 같은 표현상의 함축적인 묘미는 적다. 그러나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풍속화로 볼거리가 풍부한 그림이다.
관월도(觀月圖)
이경윤(李慶胤)
중기(16세기 말엽)
산수
종이에 수묵
44.3 × 23.8㎝
서울대박물관
이경윤은 김시(金褆)와 비교될 만큼 조선 중기 화단에 있어서 비중있는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그의 명성 만큼이나 많은 작품이 그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이들 작품들에는 솜씨가 다른 것들도 섞여 있으나 한결같이 절파화풍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경윤이 절파화풍이 유행하던 중기화단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 <관월도>는 물가의 넓은 바위에 앉아 둥근 달을 쳐다보는 선비를 주제로 한 것이다. 한편으로 치우친 벼랑에는 덩굴풀이 드리워 있고 인물이 크게 부각된 절파풍의 전형적인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이다. 이 인물의 옷주름 묘사에 쓰인 선들은 매우 날카롭고 각이 심하다. 반면에 암벽은 농담을 달리하여 표현한 몇 겹의 겹쳐진 면으로 구획하고 예리한 부벽준(斧劈皴)으로 표면을 처리하였다.
다람쥐
정선(鄭敾)
후기
영모
종이에 담채
16.3 × 16㎝
서울대박물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정선은 많지는 않으나 꼼꼼하게 그린 세필의 화조, 영모화도 전해온다. <다람쥐>는 17세기 후반에 조선에 전래되었던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에 실린 명대(明代) 도성(陶成)의 그림을 방작한 것이다. 도성은 마른 솔방울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정선은 이를 약간 변형하여 푸른 솔방울을 까먹는 귀여운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대각선 구도의 소나무 등걸에 다람쥐가 꼬리를 세우며 솔방울을 향해 막 내려온 것처럼 표현하여 동감이 느껴진다. 소나무의 비늘이나 솔잎은 거친 듯 굵직하게 표현하였는데, 다람쥐의 털은 엷게 훈염한 후 가는 붓으로 결을 따라 표현하여 생동감이 느껴진다.
황우도(黃牛圖)
김시(金禔)
중기
영모
종이에 담채
26.7 × 14.9㎝
서울대학교박물관
걸어가는 소의 뒷모습을 포착한 이 그림은 소가 걸어가는 앞쪽에 절벽이 비스듬하게 솟아있고 절벽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다. 그 아래 음영으로 윤곽을 나타낸 듬직한 황소가 자리잡고 있다. 구도는 경물이 한쪽으로 치우친 전형적인 절파풍의 작품이다. 발굽의 방향이나 오른쪽 앞다리의 표현은 어색하나, 농묵과 담묵이 대조를 이루면서 적절히 구사되어 있다. 둔중한 소의 양감을 담묵의 몰골(沒骨)로 처리한 점 등은 그의 손자 김식(金埴)을 비롯한 소그림으로 유명한 여러 화가들에게도 나타나는 점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크다.
괴석초충(怪石草蟲)
심사정(沈師正)
후기
화조
종이에 채색
27.3 × 21.9㎝
서울대학교박물관
심사정은 산수, 인물, 화훼, 초충 등 여러 소재를 각기 여러 기법과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한 화가이다. 이 그림은 먹과 채색의 비율이 반반쯤 되고 바위의 윤곽선을 제외하고는 꽃, 풀, 곤충을 모두 몰골법으로 처리하였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태호석(太湖石)을 연상케 하는 바위는 풀과 꽃의 분위기에 맞추어 부드럽게 묘사되었다. 그 옆에 자란 붉은 나리꽃에는 색채의 농담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꽃잎의 질감과 꽃송이의 입체감을 잘 표현했으며 특히 세 개의 꽃봉오리는 물기 머금은 모습이 매우 감각적이다. 바위에 앉은 메뚜기도 얇은 날개, 가는 다리와 촉각을 그린 섬세한 필선과 함께 녹색과 황색의 변화있는 배합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묵포도도(墨葡萄圖)
심정주(沈廷胄)
후기
사군자
서울대학교박물관
이 <묵포도도>는 글씨를 쓰듯 힘차고 분방한 필획으로 포도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비백을 살린 몇 개의 선으로 묘사된 줄기와 함께 아래쪽의 진한 잎과 위쪽의 연한 잎 등 짙고 옅은 먹을 조화롭게 구사한 넓적한 포도잎, 농담의 묘를 살린 성글은 포도알 등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분야의 대가 황집중(黃執中)과 이계호(李繼祜)의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인다.
총석정(叢石亭)
이재관(李在寬)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27.3 × 35.2㎝
서울대학교박물관
이 <총석정도>는 그에게 있어서 진경산수화로서는 드문 작품으로 그가 직접 실경을 사경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에 그도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총석정은 해금강 명승지의 하나로 정선,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에 의해 묘사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승경이 되었다. 진경산수여서인지 그의 다른 남종화풍의 산수화와는 다른 면모로 겸재 정선에서 단원 김홍도로 이어지는 전통을 이어 받은 듯 총석의 필치나 소나무 표현, 동해바다의 수파묘 등에서 이들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총석은 한줄로 나란히 세워놓은 것처럼 밋밋하게 배열하여 구성의 묘가 떨어진다.
금강산만폭동(金剛山萬瀑洞)
정선(鄭敾)
후기
산수
비단에 수묵담채
33 × 22㎝
서울대학교박물관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가 정선의 특유한 필치로 죽죽 뻗어 서 있는 가운데, 짙은 연무에 싸인 양쪽 계곡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아래의 만폭백담에 일단 모였다가 다시 왼쪽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시원하게 묘사하였다. 율동감 있게 표현한 근경의 소나무와 산의 준은 산만해 보이기도 하나 그림 전체를 푸른색으로 선염하여 동적인 구도에서 오는 산만함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있다. 그림 가운데 있는 편편한 바위에 서서 이 장엄한 경치를 감상하는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선비들과 동자는 이 그림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그림 오른 쪽 위에 있는 제시는 중국 고개지(顧愷之, 344-404)가 절강성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의 경치를 읊은 시를 옮겨 놓은 것이다.
“수없는 봉우리들은 아름다움을 다투고 모든 골짜기에는 다투어 물이 흘러내린다. 초목은 몽롱하게 보이고 위에서는 구름이 일 듯 장엄한 광경이다.(千巖競秀 萬壑爭流 草木朦朧 上若雲興霞蔚)”
회계산에도 만폭동과 같은 곳이 있었는지 이 그림을 위하여 지은 시 같다.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
진재해(秦再奚)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100 × 56.7㎝
서울대학교박물관
진재해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월하취적도>는 달빛이 은은한 밤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굽어져 내려온 계곡의 바위에 앉아 피리를 부는 선비와 이를 감상하는 친구를 소재로 다루었다. 이들의 옆에서 술잔을 받쳐 든 동자도 피리소리에 빠져있는 듯하다. 인물들의 모습이나 꺾여진 소나무의 모습, 그리고 비스듬히 솟아오른 산의 형태와 그 표면처리 등이 전형적인 절파화풍을 보여준다. 이러한 화풍은 당시의 진경산수화풍과는 다른 보다 전통적인 화풍이다.
연꽃
김수철(金秀哲)
후기
화조
종이에 담채
96.5 × 43.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연꽃>은 김수철 특유의 색감과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여 여백을 살렸고, 담묵(淡墨)으로 재빠르게 윤곽을 그리고 엷은 채색을 더하였다. 꽃이나 잎의 모양이 실제로 본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기 보다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처럼 깔끔한 선과 담채(淡彩)가 어우러져 참신한 감각을 픙긴다.
포도도(葡萄圖)
이계호(李繼祜)
중기
사군자
종이에 수묵담채
80 × 47㎝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묵포도는 묵죽이나 묵매보다 좀 늦게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포도그림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원대의 이름높은 선승이며 서화가인 일관(日觀)의 작품으로 1291년의 연기(年記)를 보이는 것이다. 일관의 묵포도도는 그후 중국의 문인화가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사임당을 비롯하여 영곡(影谷) 황집중(黃執中, 1533-1593)이 유명하며, 이계호는 황집중을 이어 포도그림으로 이름이 났다. 이 <포도도>는 색채가 조금 가해졌으나 묵포도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왼쪽 옆으로부터 나온 가지는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퍼졌고 잎은 한결같이 정면을 향해 펼쳐져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잎과 포도송이의 자연스러운 농담(濃淡)은 이러한 느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다. 왼편에는 조선시대말기 학자인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쓴 휴휴당(休休堂) 이계호의 진적(眞跡)이라는 관기(觀記)가 있다.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
허필(許佖)
후기
산수
종이에 수묵담채
37.5 × 24.3㎝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이 그림은 그림의 제목과 같이 두보(712-770)의 시구를 소재로 이른 봄의 고요한 초정(草亭)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그림의 왼쪽에 쓰인 시와 허필의 제는 다음과 같다.
“讀杜家 春日鸎啼修竹裡 山家吠犬白雲間之句 參之草禪戲帖 不覺心期犁然”
두보의 시 “봄철이 되어 대숲에 꾀꼬리 울고 신선의 집에는 흰 구름 사이에 개가 짖는다.”는 구절을 읽고 나는 이를 참작하여 화첩에 묵희하였는데 이렇게 마음이 머뭇거리고 설레일 줄은 알지 못했다.
산밑에 아득하게 자리잡은 텅빈 초정(草亭)은 이 그림의 초점을 이루고 있으며 인기척이 없는 전체의 고요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초정 뒤의 산이나 근경의 토파는 짧은 피마준(披麻皴)을 써서 부드러운 흙의 질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명나라 오파(吳派)의 대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법이며 원나라 황공망이 많이 쓰던 마피준(麻披皴)의 변형이기도 하다. 특히 산꼭대기의 조그마한 臺地는 황공망이 즐겨 그린 것으로 오파화가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먼 산봉우리를 청색과 녹색으로 표현하여 신선한 봄의 분위기를 돋구어 준다.
산수도(山水圖)
서문보(徐文寶)
전기
산수
비단에 담채
39.6 × 60.1㎝
일본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낙산사도(洛山寺圖)
김유성(金有聲)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165.7 × 69.9㎝
일본청견사(日本淸見寺)
<낙산사도>는 김유성이 일본 시즈오카(靜岡)의 청견사(淸見寺)에 머물면서 그린 <산수화조병풍> 6폭 중 한 폭으로 각 폭마다 ‘갑신춘 조선 서암사(甲申春 朝鮮 西巖寫)’라는 관기와 ‘김유성(金有聲)’이라는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화면 하단에 몇 척의 배가 떠있는 바다가 있고 중앙에는 바닷가 산아래 위치한 낙산사를 그림으로써 그림이 중앙에 집중되고 위아래가 물과 하늘로 인해 툭 트인 구도를 취하고 있다. 실경은 어디선가 바라본 경치를 그리게 마련인데 바다 한복판에서 바라본 낙산사의 모습은 배를 타고 나가본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구도가 아닌가 한다. 낙산사의 뒷산은 안개와 부드러운 미점으로, 바닷가의 암벽은 부벽준(斧劈皴)의 강한 묵법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비를 이루며 회화효과를 높이고 있다.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이한복(李漢福)
말기
화조
창덕궁소장
<기명절지도>는 보배롭고 귀한 그릇과 꽃가지, 과일, 화초, 채소 등을 짜임새 있게 배치하여 그린 정물화의 일종이다. 기명도와 절지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진기한 옛날 그릇인 제기나 식기, 화기와 참외, 수박, 석류, 유자와 같은 길상(吉祥)적인 성격을 지닌 과물이나 꽃가지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린다. 담채(淡彩)로 그리기도 하지만 농채(濃彩)로 많이 그리는데, 각 기물의 입체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서양화적인 음영법을 쓰기도 한다. 또한 화면에서의 조화를 고려해 여러 방향에서 본 경물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창덕궁 소장의 이 <기명절지도>는 대련(對聯)으로 부귀옥당(富貴玉堂), 동리가경(東籬佳景)이라는 화제가 붙어 있다. 화병에는 절지화가 꽂혀 있고, 제기들과 꽃, 과일, 채소들이 보기좋게 배치되었다. 꽃들은 구륵법(句勒法)으로 잎들은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는데, 정성스럽게 색을 더해 사실적이면서도 장식적인 경향이 짙다.
무송관수도(撫松觀水圖)
윤두서(尹斗緖)
중기
산수
비단에 수묵
18.2 × 19㎝
해남녹우당
물이 흐르는 계곡에는 바위들이 서 있고, 바위 틈 사이에서 기이하게 솟아나온 소나무가 몸을 비틀고 솟아올라 있다. 바위에 기댄 채 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과, 좀 떨어진 바위 뒤에서 이를 바라보는 동자가 있다. 묵법(墨法)의 대조가 심한 바위들과 비틀린 소나무 표현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에서 절파화풍(浙派畵風)으로 이어지는 화원화의 전통이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바위 표현에 있어서 절파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부벽준은 보이지 않고 붓을 잇대어 사용하여 먹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뒷편의 구름에 쌓인 산들은 점차적으로 쌓여가면서 멀어지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
채애도(採艾圖)
윤두서(尹斗緖)
중기
풍속
비단에 수묵
30.2 × 25㎝
해남녹우당
<채애도>는 농가 여인들의 생활을 담은 윤두서의 풍속화이다. 비스듬히 흐르는 언덕에서 쑥을 캐는 여인들을 그렸다. 아래쪽의 여인은 망태기와 칼을 들고 캘 쑥을 찾는지 허리를 굽힌 모습이다. 위쪽의 여인은 서서 고개를 뒤로 젖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이 여인들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저고리에, 일하기 편하도록 치마를 걷어올려 묶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다. 지금도 시골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였지만 쑥 캐는 여인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인물은 비교적 사실적인 반면 가파른 산은 매우 생략적으로 묘사되어 실제로 본 산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화보에 나오는 관념적인 산의 모습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산수화가 당시 유행되기 시작한 진경산수화와는 달리 중기의 절파화풍을 띠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다. 산과 여인이 있는 건너편 허공에는 새 한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공간에 균형을 이루며, 화면의 크기를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18세기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풍속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그림이다.
산수도(山水圖)
최숙창(崔叔昌)
전기
산수
비단에 담채
39.6 × 60.1㎝
일본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이 <산수도>는 최숙창의 작품으로 전해오나 15세기에 최숙창과 함께 활동하였던 서문보, 이장손 등의 그림과 화풍이 너무나 흡사해 얼핏보면 거의 구분하기가 어렵다. 짙은 연운에 싸인 산천을 묘사한 이 그림들은 미법산수화풍(米法山水畵風)을 보여준다. 이는 북송 미불(米芾, 1051-1107)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 보다는 원대(元代) 고극공(高克恭, 1248-1310) 등에 의해 형성되었던 원대(元代) 미법산수화풍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러한 양식이 일찍이 유입되었음을 알려준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김수철(金秀哲)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114 × 46.5㎝
호암미술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이색화풍(異色畵風)의 화가 북산(北山) 김수철은 대담한 생략의 독창적인 구도와 청신한 감각의 설채로 주목받고 있다. 그 중 <하경산수도>는 그의 그림 중에서도 구도, 설채, 필선 모두 깔끔하고 격이 있는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근경에는 강가에 나무들에 둘러싸인 서재가 있고, 중경에는 갈대가 무성한 강가 마을에 몇 채의 집이 보인다. 그의 특유의 윤곽을 한 산에는 선염을 한 위에 태점(苔點)이 가해져 있다. 원산의 선염(宣染) 뿐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깔끔하다.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김시(金禔)
중기
산수
비단에 담채
111 × 64㎝
호암미술관
이 <동자견려도>는 김시의 작품 중에서 대작에 속하며 대표적인 작품이다. 긴 축으로 된 이 그림은 멀리는 산들이 보이고, 근경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가 중앙을 향해 뻗어 있는 가운데, 아래에는 개울을 건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나귀와 이 나귀를 끌어당기는 어린 동자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둘 사이에 당기는 팽팽한 힘이 느껴지며, 이들의 힘겨루기를 옆으로 뻗친 소나무 가지가 지켜보고 있는 듯 재미있게 구성하였다. 원산(遠山)은 안개에 싸인 듯 부드럽게 처리해 공간감을 주었으며, 한 편에 솟아 있는 절벽과 바위는 부벽준(斧劈皴)을 쓴 전형적인 절파 화풍을 보이는 작품이다. 나귀나 동자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산수 뿐 아니라 인물이나 동물화도 잘 그렸다는 그의 명성에 걸맞은 그림이다. 동자가 입은 흰 옷이 그림에 액센트를 주어 더욱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왼편 상단의 바위에는 ‘양송(養松)’이라는 관서가 있고, 그 아래에는 ‘김시계수(金禔季綬)’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 있다.
사인암(舍人岩)
김홍도(金弘道)
후기(1796년)
산수
종이에 담채
26.6 × 31.4㎝
호암미술관
단양팔경중의 하나인 사인암의 모습을 약간 서남쪽 옆에서 포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담긴 화첩은 1796년 그의 나이 52세에 제작된 것이다. 수직으로 갈라지는 돌기둥과 층층이 쌓인 돌들을 크게 강조해 중앙에 배치하고 실경에서 보이는 주변의 산들은 과감히 생략해 사인암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을묘년화첩』과 더불어 김홍도 진경산수화에서 남종화법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담묵 위에 초묵으로 윤곽을 강조하면서 곳곳에 소나무를 배치하였다. 바위표현은 절대준법(折帶皴法)을 썼고, 멀리 원산은 특유의 하엽준(荷葉皴)을 썼으며 하단에 배치된 나무도 단원 특유의 수지법(樹枝法)이다. 만년의 작품인 만큼 그의 변화있고 원숙한 필치의 조화가 극치에 달하고 있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金弘道)
후기
영모
비단에 담채
90.4.4 × 43.8㎝
호암미술관
이 그림은 김홍도와 강세황의 합작으로 소나무는 강세황이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되어있다. 호랑이는 정면관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 얼굴은 맹호(猛虎)의 권위와 위엄이 넘치며, 초상화를 그리듯 섬세하게 묘사된 털과 검은 줄무늬는 호랑이의 형태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소나무는 매우 호방한 필치로 능숙하게 묘사하였다. 민화나 다른 호랑이 그림에서도 한결같이 그러하듯이 여기에서도 정면관의 호랑이를 비교적 좁은 화폭에 압축적으로 담아 힘과 용맹, 벽사(辟邪)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 듯 하다.
화조도(花鳥圖)
신한평(申漢枰)
후기(1788년)
화조
종이에 채색
124 × 54.2㎝
호암미술관
깔끔하고 맑은 색채가 돋보이는 이 <화조도>는 수묵화조화(水墨花鳥畵)의 은은함과는 반대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화이다. 화면 오른쪽으로부터 꽃이 활짝 핀 벗꽃나무 가지가 위 아래로 유연하게 펼쳐져 있다. 아래가지에는 비교적 큰 새 한쌍이 앉아 있어 그 무게 때문인지 가지가 아래로 쳐져 다소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그 곳으로 꾀꼬리 한 쌍이 짝을 이루며 날아온다. 맨 윗가지에서는 파랑새 한 마리가 먼저 날아간 짝을 향해 소리하듯 밝게 지저귀고 있다. 날아오는 한 쌍의 새나 지저귀는 파랑새로 인해 공간은 한없이 넓게 펼쳐진 듯 하다. 나뭇잎이나 꽃, 새, 모두 공필화법(工筆畵法)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 왼편 상단의 ‘갑술유월일재사(甲戌流月望逸齋寫)’라는 간기로 보아 1788년 그의 나이 62세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원문진(桃源問津)
안중식(安中植)
말기(1913년)
산수
비단에 채색
164.4 × 170.4
호암미술관
이 <도원문진>은 안중식이 그린 청록산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초기의 대가 안견(安堅) 이래로 즐겨 그려졌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주제로 하였다. 안중식 특유의 각이 지고 심하게 주름이 잡힌 산이 겹겹이 포개져 올라가고, 청록색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채색이 궁중의 벽을 장식하는 장식화(裝飾畵)로서의 기능을 연상케 한다. 전경에는 진한 채색을 쓰고 원경에는 연한 채색을 써서 원근감(遠近感)을 나타내었으며, 청록색 바탕 위에 무수히 많은 태점(苔點)을 찍어 화려함을 더했다.
옥순봉도(玉筍峰圖)
윤제홍(尹濟弘)
후기
산수
종이에 수묵
67 × 45.5㎝
호암미술관
이 <옥순봉>은 그의 지두산수화첩(指頭山水畵帖) 8폭 중의 하나이다. 붓 대신 손가락 끝에 먹을 묻혀 그리는 지두화는 특이한 표현 감각을 보이며 18세기 후기 최북, 심사정 등 여러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화법이다. 이 그림의 화제에는 “나는 옥순봉 아래서 놀 때마다 모정(茅亭)이 하나 없는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근일에 이능호[이인상(李麟祥)]의 화첩을 방(倣)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그림이니 나는 홀연히 아쉬움을 씻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통해 윤제홍이 이인상 화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생략하고 압축시킨 간결한 구도로 그의 개성이 드러나 있다. 특히 연운에 싸여 마치 구름 속에 떠있는 것처럼 표현된 원경의 마을과 원산(遠山)이 이채롭다. 죽순처럼 생긴 옥순봉의 독특한 표현은 이인상의 바위 표현법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담박하면서도 간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이암(李巖)
중기
영모
종이에 담채
86 × 44.9㎝
호암미술관
이 <화조구자도>는 꽃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이면서도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고목이 된 꽃나무에 앉아 벌과 나비를 바라보고 있는 새들과 곤히 잠든 누렁 강아지,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검둥이, 그리고 풀벌레를 잡아 쥐고 있는 흰 강아지 등 꽃과 동물이 어우러진 뜰의 한가로운 모습을 화려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강아지들의 표정을 보면 화가 났다가도 저절로 풀릴 만큼 천진함이 뛰어난 작품이다. 강아지는 먹의 농담을 이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부드럽게 그린 반면 뒤의 꽃나무는 구륵법(鉤勒法)을 써서 잎 하나 하나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모견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솥 모양의 도장과 정중(靜中) 이라는 음각 도장이 찍혀 있다.
호취도(豪聚圖)
장승업(張承業)
말기
영모
종이에 담채
135.5 × 55㎝
호암미술관
<호취도>는 영모화(翎毛畵)에 있어서 장승업의 재능과 필묵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목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그렸는데, 살기 등등한 매의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발톱 등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여 마치 살아 있는 매를 보는 듯하다. 또한 고목은 진한 먹을 써 힘차게 표현한 반면 꽃과 풀 등은 연한 채색을 가미하여 가냘프게 묘사하여 서로 대비를 보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호방하고 활달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鄭敾)
후기(1751년)
산수
종이에 수묵
79.2 × 38.2㎝
호암미술관
<인왕제색도>는 비 갠 후의 인왕산(仁王山)의 모습을 직접 본 듯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은 바위가 흰빛에 가까운데, 이 바위는 진한 먹빛을 띠고 있다. 이처럼 정선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바위의 대조를 무색(無色)의 배경에 먹빛의 바위로 재해석하여 강렬한 인상을 창출하였다. 붓을 뉘어 쓸어내리듯 표현한 바위는 바위산인 인왕산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전경에는 진한 숲이 있고 사이사이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진한 숲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정상의 바위산과 만나게 된다. 75세의 만년에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필묵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정선 진경산수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이명기(李命基)
후기
산수
종이에 담채
103.8 × 49.5㎝
호암미술관
이명기는 인물화에 능한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남아있는 산수화도 당시에 유행하던 진경산수화보다는 화보(畵譜)의 구도를 방(倣)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그림도 그와 같은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그림으로, “글을 오래 읽다보니 소나무도 늙은 용비늘이 되었네” 라고 한 화제에서도 화보풍의 정형화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맑은 담채 처리가 돋보이며 초당 뒷산의 암벽과 초당 옆 바위의 표현에서 김홍도의 필법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볼 수 있다.
김정희의 세한도
갈필로 성글게 그려진 소나무와 잣나무, 그것은 빈틈과 미완성을 통해 보여지는 알참과 완성의 세계이다.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반이여’ 멀리 신라의 충담이 읊었던 노랫가락이 천년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
신잠의 탐매도
잔설이 분분한 첫봄에 몇 송이 피어난 매화, 세상의 어떤 예술가가 그 은은한 향기에 취하지 않으랴? 매화를 찾아나선 선비는 결국 인간의 깨끗한 본성을 발견하고 탐매의 길을 마감하리라. 하지만 그 길에 끝이 있을까?
이정의 산수도
저 돛단배는 물 위에 뜬 것인가, 하늘을 나는 것인가? 아무런 작위도 없이 바람과 물결에 몸을 내맡기니, 그 또한 신선이 아닌가! 우리도 그처럼 물같은 하늘, 하늘같은 물 위에 몸을 맡길 수 있다면…
정선의 동리채국도,유연견남산도
동쪽 울타리의 국화 송이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다 본다. 그 깊고 깊은 은일처사의 세계를 시인은 글로 쓰고, 화가는 붓으로 그려냈다.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어 감흥 또한 곱절이다.
김응환의 금강산 연주담도
죽장에 삿갓 쓰고 금강산에 오르니, 몸은 조용하고 마음은 한가롭다. 고개들어 올려다보는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 속에는 연주담 주변 풍경의 진면목이 담겨있을까?
전기의 계산포무도
짧게 삐친 점들과 굴곡있는 선들은 삽상한 건강미를 전해준다. 복잡한 듯 단순하고, 시끄러운 듯 고요한 포무의 세계, 그것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인 공간의 모습이 아닐까?
김수철의 송계한담도
송림 사이로 스치는 솔바람 소리, 악보도 없고 곡조도 없이 타는 줄없는 거문고 소리던가. “송풍아, 세상 기별 오거든 불어 도로 보내어라.” 세속이 멀어지면, 화두조차 솔바람 되리.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탁족이라니? 발을 씻는다는 말인데, 거기에 무에 그리 깊은 뜻이 들었단 말인가? 두 다리를 꼰 채 오른쪽 발바닥을 위로 제치고 있는 자세로 보아서는 분명히 더위를 피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윤두서의 송하관폭도
물의 본성은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곧은 데서는 곧게 흐르고, 굽은 데서는 굽이치고, 낭떠러지에서는 떨어지고, 웅덩이에서는 소용돌이치니, 그 변화가 자뭇 무궁하다. 그런 물의 본성을 닮고자 하는 것일까? 그림 속 선비의 시선이 그지없이 그윽하다.
이경윤의 수하취면도
술은 난잡과 주정을 부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의 덧없음을 바로 보고 자연의 섭리를 관조하게 하는 선약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 사람과 옛사람들이 술을 즐기는 차이일 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서 옛사람들의 주흥을 배워보자.
이경윤의 월하탄금도
홀로 앉아 거문고 타고 잔 들어 자주 마시니, 거문고소리 내 귀에 들리지 않고, 달빛만 사방에 요요하다. 지금 사람으론 어찌 그런 경지에서 노닐 수 있을까, 옛사람들이 즐기던 생활의 멋이 그립다.
함윤덕의 기려도
기려도란 당나귀를 타고 가는 그림을 말한다. 힘겨워 곧 쓰러질 것같은 당나귀는 아랑곳 없이, 올라앉은 선비는 그저 무심할 뿐인데… 왜일까? 그 무심한 속에 당나귀만큼이나 안쓰러운 욕망의 그림자가 배어있는 이유는?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허리춤에 도끼를 꽂고 장대를 빗겨 든 사람은 초부요, 왼손에 줄에 꿴 고기를 들고 있는 이가 어옹이다. 초부는 쉬운 말로 땔나무꾼이요 어옹은 고기잡이꾼이다. 이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연은 무엇일까?
정선의 조어도
흔히들 강태공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낚시를 물에 드리운 채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세상은 강태공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조어도》라는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강태공이란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은데…
김홍도의 선인기우도
머리엔 탕건 쓰고 호리병 술을 찬, 소 잔등에 저 사람, 노자인가 누구인가? 옛사람들은 혼자서 즐기는 풍류 중에 소를 타는 것[騎牛行]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서거정은 소를 타고 출퇴근했다 하니, 그런 풍류와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일까?
김홍도의 타작도
개상에 볏단을 내리쳐 알곡을 털어내는 소작 농민들의 입가에는 왠일인지 웃음이 감돈다. 반면 일을 감독하는 마름의 표정은 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묘한 대조에서 한국인의 삶과 해학을 읽는다.
신윤복의 월하정인도
인적이 끊긴 후미진 담모통이에서 두 남녀가 밀어를 나누는 에로틱한 장면이라니! 엄숙한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 땅에 어디 그런 일이 있을랴고? 그런데 신윤복의 에로틱한 그림 한 장은 우리의 선입견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조선이란 땅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조속의 조작도
흐릿한 안개가 감도는 아침나절에 보는 까치떼의 모습은 어딘지 스산하면서 삽상하다. 반복된 점으로 표현된 나뭇잎과 강직한 느낌의 나뭇가지, 그리고 다소 성글게 그려진 까치 두 마리를 그린 그림이 삽상한 바람을 몰고오는 듯하다.
허련의 괴석도
서양인들은 여인의 나체를, 동양에서는 바위를, 인생과 자연의 거짓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정제된 천지의 골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바위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단다.
필자 미상의 맹견도
서양화법으로 그린 개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배깔고 엎드린, 맹견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지치고 풀이 죽은 개의 모습. 서양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조선후기에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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