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채의 역사와 특징 / 전주 한옥마을 부채박물관

2018. 9. 22. 14:25美學 이야기



       

부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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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채의 역사와 특징 
   ‘부채’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 바람을 쉽게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진 도구를 부르는 말로, 가는 대오리로 살을 만들어 넓적하게 벌려서 그 위에 종이나 헝겊을 바른 것을 말한다.

   부채의 기원은 인류가 넓은 활엽수의 나뭇잎을 이용한 데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프리카 산간 지대의 원주민들과 동남아시아의 산간 지대 원주민들의 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뭇잎은 시간이 지나면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이에 따라 좀 더 오래 보관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새의 깃털을 이용한 부채나 가죽 혹은 비단을 이용한 부채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종이가 발명된 이후 편리함으로 인해 종이부채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또한 부채는 형태상으로는 넓은 나뭇잎 모양을 그대로 사용한 방구부채(단선)의 형태에서 휴대하기 편한 쥘부채 형태가 나타났으며, 필요에 따라 혼용되면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부채의 어원
  부채는 한자어로 ‘선자(扇子)’로 표기되는데, 한자어 선(扇)은 ‘지게문 호(戶)'+‘깃털 우(羽)'로 파자 된다.지게문은 옛 가옥에서, 마루와 방 사이의 문이나 부엌의 바깥문 흔히 돌쩌귀를 달아 여닫는 문으로 안팎을 두꺼운 종이로 싸서 바른 문이다. 이는 부채의 모양이 지게문의 모양과 흡사한데서 붙여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여기에 ‘깃털 우(羽)'자가 합쳐진 것은 새의 깃털을 이용해 부채를 만들었다는 데서 초기 부채의 형성 과정을 알 수 있다. 즉 지게문 모양으로 깃털을 모아 만든 데서 ‘선(扇)'이라는 글자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부채’라는 말은 ‘부치-다'의 어간 ‘붗’에 명사형 접미사 ‘애’가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즉, ‘붗+애〉부채'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금성판 국어대사전》, 금성출판사, 1991.


   기록상 우리말 ‘부채'는 나라 사람 손목(孫穆)이 1103년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온 후 고려의 풍속 등과 함께 고려어(語) 약 360 어휘를 채록하여 편찬한 《계림유사(鷄林類事)》(1103(?)~110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부채는 발채이다(扇曰孛采)”라 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발(孛)은 현재 중국어에서 ‘뽀(Bo)'로 발음하는데, 현재의 우리 발음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부채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5세기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두시언해(杜詩諺解)≫에는 “고추수화선(高秋收畵扇)”을 “노그륜 부채를 초고”라고 번역하였으며, 같은 시대에 편찬된≪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도 “타선자(打扇子)”를 “부채질하였노라”로 번역하였다. 또 최세진(崔世珍)≪훈몽자회(訓蒙字會)≫와 16세기 조선 중종 때 사람 한석봉(韓石峯)≪천자문(千字文)≫에도 '선(扇)'을 '부체 션'이라 하고 있다. 이는 고려 및 조선시대에 부채라고 하는 우리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과 유물로 보는 우리부채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부채를 사용했음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황해도 안악군의 안악 3호분에서 깃털부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오회분 4호묘 에서는 방구부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357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안악 3호분 벽화의 주인공이 깃털부채를 들고 있어, 고구려 귀족사회에서 깃털부채가 사용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는 경상남도 의창군 다호리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채자루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유물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 유물이기도 한데, 기원전 3~4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채자루는 전체길이 33.6cm, 머리 부분은 폭이 9.6cm인데, 지름이 5mm, 깊이 1cm의 구멍 12개가 있어 새 깃털을 꽂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즉 기원전 3~4세기 경에도 국내에 깃털부채가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양식에 따라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을 네 벽에 그린 오회분 4호묘에는 방구부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쪽 벽면 귀갑문 속의 백라관을 쓴 인물은 소매가 넓은 대수포를 입고 왼손에 방구부채를 들고 있으며, 서쪽 벽면에 그려진 백호도 에도 귀인이 방구부채를 들고 있다. 또한 북쪽 벽면 귀갑문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소매가 넓은 대수포를 입고 왼손에 방구부채를 들고 있다. 옷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붉은 색 폐슬은 왕족 이상의 높은 신분만이 착용했던 것이고, 고두리 신발의 명칭은 역시 왕과 왕족만 신던 것이어서, 고구려시대 적어도 귀족사회 내에는 부채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는 부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 해 8월에 일길찬(一吉湌) 민극(閔筐)을 파견하여 이를 하례하고 드디어는 공작선(孔雀扇)지리산 죽전(竹箭)을 보냈다(《삼국사기》).


   이 기록은   ≪고려사≫에도 보이는데, 이 공작선은 공작의 깃털로 만든 깃털부채로 여겨진다. 이 공작선을 후백제에서 직접 제작한 것인지, 아니면 남방의 어떤 나라에서 수입해 보낸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공작이 당시 우리나라에 존재한 새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무역선들이 남방의 여러 나라까지 다녔기 때문에 공작선을 수입해서 보내줬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견훤이 지리산의 죽전(대나무로 만든 화살)과 함께 보냈다는 말을 참고할 때, 깃털부채도 후백제에서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 쪽에 무게가 실린다. 후백제에서 자기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부채가 발명된 이후 깃털부채는 의례용 혹은 장식용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에 부채는 현종 3년에 시장에서 비단 부채를 팔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귀족층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으로 금지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비단부채가 널리 사용되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부채의 특징으로는 쥘부채가 나타났다는 데 있다. 이 쥘부채는 당시 송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송나라 사람 곽약허(郭若虛)의 글을 보자.

   희령(熙寧) 병진년(1076, 문종 30) 겨울에 고려에서 최사훈(崔思訓)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사신이 혹 섭첩선을 사사로이 선물하기도 하였는데, 그 부채는 아청지(鵝靑紙)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고려의 고관들과 부인네들이 말을 타고서 물가에 임한 것을 그렸으며, 금사(金砂)로 시냇물 및 연꽃 화초, 나무, 물새 따위를 그렸는데, 점점이 이어진 것이 아주 정교하였다. 또 은니(銀泥)로 구름이나 달빛의 모양을 그렸는데, 아주 보기가 좋다《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


   고려 문종30년(1076)에 고려 사신 최사훈으로부터 섭첩선쥘부채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고려는 북방 민족인 거란의 와 여진의 금나라로 인해 과는 직접적인 국교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076년인 문종 30년에 이르러서야 국교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즉 이 시기 교류를 하게 되면서 부채를 선물로 줬고 이후 중국에 고려의 부채가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 시기 이전부터 쥘부채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우리부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완숙해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해 가는데, 중국․일본과도 교류가 지속된다. 중국과의 교류는 “명(明)의 성조(成祖)가 조선에서 진공한 접선(摺線)이 사용에 편리한 것을 보고 그대로 만들게 한 것이 중국에서의 접선 출현의 최초이며 처음에는 화중․화남지방의 기녀들이 사용하다가 명나라 말쯤이 되면 양가부녀들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한 기록을 통해서 쥘부채가 고려로부터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우리의 부채를 모방하여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부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우리 부채가 주위 다른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준다.



단오와 부채

   우리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 달력)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오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곧 여름철이 가까워지므로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단오 선물로 선사를 하는 풍속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정조(正祖) 17년 8월 기축조를 보면, “매년 단오 날 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監營)․통제영(統制營)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례이다”는 기록이 있어, 매년 단오에 부채를 조정 관원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오부채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진상한 것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외공장 선자장조에는 경상도에 6인, 전라도에 2인의 선자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오부채 중에서도 전주남평에서 만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도 공조와 전라도·경상도 두 감영통제영(統制營)에서는 단오 때가 되면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였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이를 시종관(侍從官)이상 세 영(營)에서 모두 전례에 따라 서로 차등을 주어 나누어주고, 부채를 얻은 사람은 다시 그것을 자기의 친척․친구․묘지기․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와 동일한 기록이《경도잡지(京都雜志)》《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나타난다.



쥘부채의 유래

   쥘부채는 고려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송나라 사람 곽약허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화계(畵繼)》에는 고려 쥘부채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나타난다.

   고려의 부채에는 종이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있다. 금광죽(琴光竹)으로 자루를 만들었는데, 마치 시정에서 만든 접첩선(摺疊扇)과 같으나, 정교하고 치밀하여 중국의 것이 미치지 못한다. 부채를 펴면 폭이 3․4척 가량 되고, 접으면 겨우 두 손가락 너비만 하다. 그려 넣은 그림은 대부분 사대부가의 여자들이 수레를 타거나 말을 타고서 답청(踏靑)을 하거나 습취(拾翠)를 하는 모양이다. 또 금가루와 은가루로 바탕을 꾸미고 은하수, 별, 달, 인물의 모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비슷한 형체만 대충 남아 있다. 이는 먼 고려에서 오는 도중에 마멸되어서 그런 것이다. 부채에 물들인 청록색이 아주 기이하여 중국에서 물들인 것과는 다른데, 오로지 공청(空靑)과 해록(海綠)을 물을 들인다(《화계(畵繼).》).


   금광죽으로 자루를 만드는데, 부채를 펴면 폭이 3․4척 정도 되고 접으면 겨우 두 손가락 너비만 하다고 하는데, 고려 쥘부채의 모습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쥘부채는 어떻게 해서 나타났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쥘부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일본의 학자들은《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회선(檜扇)이라는 부채가 있는데, 이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회선은 회나무 껍질 25개를 엮어 만든 것으로서 흰 종이로 바르고 그 위에 등꽃모양을 놓아 띠같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회선을 접는 부채로 보고 그 기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회선을 쥘부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약하다. 오히려 고려의 송선(松扇)과 더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송선에 대해《고려도경》에서는 소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를 가져다가 가늘게 깎아서 줄을 만들고, 그것을 두드려 실로 만든 후에 짜냈다고 하기도 하지만, 고려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기록한《계림지(鷄林志)》《화계》에서는 소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수류목(水柳木) 껍질로 만든 것으로 문양이 소나무나 잣나무와 아주 비슷하므로 송선이라고 한다고 한다. 고려 사람들이 말한 것을 기록했다는 점에서《계림지(鷄林志)》《화계》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며, 송선의 제작방식이 일본 회선의 제작방식과 매우 비슷해 보인다. 즉 회선은 쥘부채라기보다는 송선과 같이 나무를 짜서 만든 것으로 보는 게 더 옳을 듯 하고, 쥘부채의 기원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점은 송나라 사람들이 송선과 쥘부채를 따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도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즉 쥘부채의 기원을 일본의 회선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물론《고려도경》의 화탑선(畵榻扇)조“화탑선은 금은을 칠해서 장식하고 거기다 그 나라의 산림(山林), 인마(人馬), 여자의 형태를 그렸다. 고려인들은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 하는데, 거기에 그린 의복을 보니 정말 그러했다”라는 부분과《도화견문지》 접선에 대해 “왜선이라고 일컬으니 본래 왜국에서 났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왜국에 쥘부채가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쥘부채의 존재는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고려도경》이나《도화견문지》에서 일본을 언급하는 것은 금은으로 장식한 화탑선에 대한 부분임을 볼 필요가 있다.《고려도경》에는 백섭선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채에 대해서는 일본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도화견문지》에서도 은니(銀埿)로 운기월색지상(雲氣月色之狀)을 그린 부분에서만 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금은을 이용한 쥘부채는 고려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제작했을 가능성을 알 수 있긴 하다. 이에 대해 장동익(張東翼)왜국(倭國)이 고려에 신속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張東翼,《宋代麗史資料集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p.370).

하지만 이 점이 쥘부채가 일본에서 유래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린 쥘부채가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려도경》이나《도화견문지》외의 기록을 보면, 쥘부채의 유래에 대해 고려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쥘부채의 유래가 고려로부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학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영국인 조셉 니덤(Joseph Needham)《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이라는 책에서 쥘부채는 고려에서 처음 만들어져 중국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려의 쥘부채로 인해 중국에 쥘부채가 널리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쥘부채의 유래는 고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쥘부채가 일본에서 발명되고 유통되었다고 한다면 중국에서도 일본의 쥘부채가 널리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과연 쥘부채가 일본에서 유래했는가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또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한 쥘부채가 고려에서 제작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유래는 제쳐두더라도 고려 쥘부채의 질이 매우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원이 어느 나라인가 하는 점은 부차적이다. 어느 곳에서 발전되고 널리 이용되는데 영향을 주었느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고려의 쥘부채가 동아시아에 널리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쥘부채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쥘부채(합죽선)의 특징과 그 종류

   쥘부채는 접고 펴서 쓸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근대에 와서는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었지만 만드는 재료와 형태를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쥘부채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서 오랜 시간 사용한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의 부채는 몸채를 만드는 재료로 대나무를 주로 사용하고 그 외의 재료로 종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몸채로 되어있는 대나무를 가공한 모습과 종이를 붙이는 방법에는 크게 차이가 있다.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부채는 합죽(合竹), 즉 두 쪽의 대껍질 부위를 붙여서 만들지만 일본과 중국의 부채는 두께는 차이가 있지만 한 쪽의 대나무 속살을 사용해 부챗살을 만든 것을 볼 수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대나무와 중국과 일본 대나무의 특성의 차이이다. 우리나라의 대나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심한 기온차를 견뎌야 하며, 대나무의 북방한계점에 가까이 있어 중국이나 일본의 대나무에 비해 나무의 육질이 더 조밀하여 탄성이 뛰어나고 광택이 있어 대껍질을 붙여서 부챗살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에 비해 일본과 중국의 대나무는 육질이 물러서 합죽을 해도 우리나라의 대나무와 같은 탄력과 강도가 없어 대나무 껍질부분 만을 사용하여 부채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속살의 숫자 역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냥 봐도 중국과 일본 부채의 속살은 살 사이가 상당히 많이 벌어져 있어서 그 틈으로 반대편을 볼 수도 있지만, 한국의 합죽선은 살과 살 사이가 촘촘해서 틈을 볼 수 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살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만들고 있는 한국의 부채의 살수는 속살 38개에 겉살인 변죽 2개를 합해서 40개 내외인데 비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는 10개 내외의 살을 사용하고 있다.


   종이를 붙이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 부채의 종이는 앞면이나 뒷면이 그 차이가 없고 부챗살이 종이 사이에 묻혀 있어서 볼 수가 없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합죽선은 부챗살이 보이지 않는 앞면과 부챗살이 보이는 뒷면을 확연히 구분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부채는 종이가 헤지면 버리는 일회성 부채지만, 합죽선은 종이를 교환하여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부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각 나라의 기후와도 연관이 있다. 습도가 많은 일본은 부채에 올리는 종이로 기름을 먹인 것 같은 코팅된 종이를 사용하며, 또한 습기를 먹은 종이는 두꺼워져서 쉽게 접을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접어지게하기 위하여 살수를 적게 만드는 것이다. 종이를 올려붙이는 방법으로는 두 장의 종이를 붙이고 그 사이에 부챗살을 끼워서 만드는 일명 뀌지(종이 사이에 살을 끼워 넣는다 하여 뀌지 혹은 귀지 라 한다)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부챗살 하나하나의 모습이 고기와 야채를 번갈아 끼워서 만드는 음식인 산적의 꼬치와 같이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져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중국 역시 일본의 부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데 아마 종이 사이에 부챗살을 끼워서 종이를 올리는 방법이 접어서 붙이는 방법에 비해 훨씬 쉽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또한 부채를 잡는 손잡이 부분이 일본과 중국은 얄팍하며, 두툼하게 모여서 만든 우리나라 부채의 머리 부분과는 전혀 다르다. 부채를 접어서 옆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는 좁고 가느다란 모습이지만, 한국의 부채는 다분히 넓고 입체적인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두장의 대껍질을 붙여서 두꺼워진 윗부분을 사복으로 꽉 조여 사복의 윗부분은 사람의 머리같이 펴져있고 사복 아래 부분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듯 퍼지다가 한 장의 대껍질로 되어진 부분에서 다소곳이 모인모습이 마치 한복을 입은 옛 한국 여인네의 실루엣을 보는 듯하다.

   다른 예술 분야의 장인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넣어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표현하듯, 합죽선을 만드는 장인들이 여인네의 몸에서 나오는 선을 부채에 넣은 것은, 부채를 그냥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닌 자신의 또 다른 여인과 같이 취급했던 옛 우리 사대부들의 마음을 담은 듯하다. 웃어른이 쓰시던 죽부인과 부채를 후대에서 대를 물려 쓰지 않고 무덤에 함께 넣었던 부장풍습은, 웃어른이 처, 첩처럼 여기며 함께한 기물을 후대에서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합죽선은 주로 사대부 양반가의 남정네들만 사용하였고, 여자들은 주로 단선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양반네들이 항상 휴대하고 다녀서 의관(衣冠)의 마지막으로 인식했던 합죽선은 더운 여름만이 아닌 겨울에도 들고 다니며 사용했기에 손에서 느끼는 느낌이 상당히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 부분을 두툼하면서도 둥그스름하게 만들었고 전체적인 모습은 여인네의 몸매를 응용하여 입체적으로 만들어 손으로 쥐었을 때의 느낌을 좋게 하였다. 지금도 좋은 합죽선을 고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이 직접 손으로 쥐어 봐서 자기 손에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합죽선 장인들은 귀띔 해준다.
조선 영 ․ 정조 때 그 전성기를 누렸던 합죽선은 양반이라는 사대부 계급만이 사용했던 물건으로《조선왕조실록》에서 살수를 줄이고 겉대에 치장을 하는 등의 사치를 부리지 말라는 내용을 통해, 당시에 국가에서도 신경을 쓰던 사치품 이였음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사치를 부렸는지를 통해 부채의 이름이 정해지곤 했다.

   《만기요람》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50살 백첩선은 왕과 그 친계인 대비, 중전도 한 자루 씩 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대를 종잇장처럼 얇게 깎아 내기도 어렵고 종이를 접어서 붙이는 작업은 최고의 숙련된 장인도 작업하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채의 가장 큰 사치는 부챗살의 수였다. 속살 48개에 겉대 2개를 합해서 만드는 50살 부채는 왕이나 중전, 대비와 같은 왕실의 실세들이 사용했으며, 당상관 이상에게 단오선으로 선물로 주어져 사용되었던 것은 40살 부채였으며, 그 아래 계급의 사람들은 40개의 부챗살을 넘지 않았다.

   합죽선을 통해 부린 사치에는 살에 옻칠을 올리거나, 겉대인 변죽부분에 여러 다른 재료를 이용하여 붙이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임금이 사용했던 50살 백첩선은 부챗살에 검은 옻칠을 했고, 대비나 중전은 붉을 색으로 칠을 하고 종이 대신 붉은 비단을 올려서 사용했다. 이렇게 살에 옻칠을 한 것을 옻칠선 또는 칠첩(漆貼)이라 부르며, 옻칠을 한 위에 자개를 붙여서 무늬를 올린 것을 나전선(螺鈿扇)이라 하였다. 또한 귀하게 사용된 합죽선 변죽 바깥부분의 치장 재료로 전주의 특산이라는 금반죽(金班竹)의 껍질을 사용한 반죽선(班竹扇)과 얇게 켠 소뿔의 안쪽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화각(畵角) 기법을 사용한 채각선(彩角扇)등이 있는데, 채각기법은 화각장(畵角欌)이나 화각장도(畵角粧刀)와 같은 타 분야의 기법을 접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변죽의 바깥 편에 뿔을 대어 장식한 외각선(外角扇), 반대로 변죽 안쪽에 뿔을 댄 내각선(內角扇), 변죽을 대나무, 뿔, 나무 등 세 가지 재료로 세 곳에 접합해서 장식한 삼대선(三臺扇), 변죽의 두 곳을 접합한 이대선(二臺扇),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변죽에 마디가 있는 대나무를 붙여 만든 죽절선(竹節扇), 붉은 박달나무를 변죽에 붙여서 만드는 단목선(丹木扇) 등이 변죽의 장식으로 불려지는 합죽선의 이름이다.
또한 부채의 머리 부분인 군안의 모양이 승려의 머리를 닮은 듯 둥근 모습일 때는 승두선(僧頭扇), 머리 모양이 뱀 머리나 물고기 머리 모양으로 조금 뾰족한 모습일 때는 사두선(蛇頭扇), 어두선(魚頭扇)이라고 불렀다. 다른 합죽선의 이름에는 부채를 폈을 때 180도 이상 펴지는 부채를 광변선(廣邊扇), 펴진 부채의 각도가 180도 이하 일 때는 협변선(狹邊扇), 사복에 선추를 맬 수 있는 고리를 단 유환선(有環扇), 고리가 없는 무환선(無環扇) 등이 있다.

   현대에 남아있는 18세기 부채의 유물 중에는 주로 속살에 옻칠을 하고 변죽에 여러 장식을 하여 꾸몄는데, 나전 홍지 칠선, 화각 홍지 칠선, 대모 산수화 칠선, 반죽 칠선 등 앞서 설명한 화각으로 장식하거나 대모(玳瑁;바다거북 등껍질)를 올리는 것과 같은 사치를 부린 유물이 있으며, 만드는 방법도 지금의 합죽선과 다른 기법이 사용되어졌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합죽선이 단지 죽절선에 낙죽으로 장식한 한 종류만 남아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값싼 일본 부채의 대량 판매와 6.25 사변 등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면서 사치품의 수요자들이 적어지고 이로 인하여 만드는 기술자들의 기술력 하락과 기술 전승의 단절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옛 부채의 아름다움을 다시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당시 합죽선을 사용했던 선비들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사치를 누린 그 여유와, 그 여유를 합죽선이라는 기물을 통해 만들어낸 장인들의 정신세계가, 수많은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것을 잃어버렸지만, 다시 찾아 누려야할 우리의 문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高麗圖經, 五洲衍文長箋散稿, 熱河日記, 靑莊館全書, 京都雜志, 洌陽歲時記, 東國歲時記, 만기요람,韓國부채의 연구(崔常壽, 大成文化社, 1972).
인간문화재(예용해, 어문각 1962),한국의 민속 공예(맹인재,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1974)

근대 부채(합죽선)의 변화(1950-1980년)


   조선 말기까지 화려하게 만들어지던 합죽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제의 전통장인 말살정책과 저가(低價)의 일본부채로 인하여 침체일로를 걷게 된다. 이로 인해 당대의 장인들과 2대장인들이 작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기법들이 전수되지 못하게 된다. 극소수의 장인에 의해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던 합죽선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수요가 늘어 내공장(內工匠)의 맥을 이어온 장인(匠人)김씨와, 외공장(外工匠)의 맥을 이어온 장인(匠人)문씨에 의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의 작업형태는 일부자본가들이 재료를 공급하고 장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부근에서 분업화하여 작업을 이어가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하듯 이때의 합죽선은 작고(24-26Cm) 왜소하며, 몸통 부분의 곡선이 거의 사라진 형태로 작업되어졌다. 머리 부분(扇頭)은 대구 도축장에서 구매한 소의 다리뼈를 사용했으며, 사북(고리)은 50년대에는 거의 백동이 주류를 이루고, 60년대에 들어서면 양은과 백동이 같이 사용되어졌다. 이시대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격변의 시대 인만큼 작업방법과 사용되어지는 재료에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사진1 왼쪽부터 50-80년대 의 부채들


변화되어지는 작업방법과 도구들

  전기의 보급과 더불어 변화된 것은 제일먼저 낙죽작업을 들 수 있다. 속살에 박쥐나 구름, 학, 꽃무늬를 인두를 숯불에 달구어 직접 손으로 그리던 방법이 전기의 보급과 더불어 쇠도장에 열선을 감아 찍는 형태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겉대의 낙죽은 숯불에 달구는 커다란 인두에서 조그만 인두에 열선을 감아 사용하는 것으로 도구만 바뀌었을 뿐, 아직도 손으로 직접 그리고 있다.
합죽선을 고정하는 머리 부분의 구멍을 뚫는 방법도 비비활대와 송곳을 이용하여 수작업으로 진행되던 것이 전기드릴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바뀌게 되는데, 수(手)작업 시 깨지지 않던 속살이 쪼개지는 현상이 있어 이것을 수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회전수의 조정으로 정상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의 부채는 머리 부분이 깨진 상태로 완성된 부채도 상당수 있었다. 

 
 

사진2 비비활대와 송곳


   몸통부분의 마감 작업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된다. 이 변화로 인하여 수작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합죽선의 매력이 사라지고 대량작업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낫칼이란 칼을 사용하여 몸통부분을 부드럽고 수려한 곡선으로 다듬게 되는데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흐르는 듯 한 곡선까지도 깍아내었던 것이 작업방법이 실전(失傳)되면서 직선으로밖에 작업을 할 수 없는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났다.




사진3 곡선부채(위)와 직선부채(아래)


   또한 사포와 모터를 이용한 연마기가 만들어져 사용되면서 부터는 머리에서 목살부분까지를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쉽게 연마해 내 버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작업에 걸리던 시간이 거의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되고 작업방법이 수월해져 훨씬 많은 양의 부채가 생산되어지지만, 곡선이 사라진 직선화된 부채가 양산되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일부기계를 사용하면서의 변화는 속살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고정용 못에도 변화를 주었다. 이전에는 대나무를 깍아 암못과 숫못을 만들어 고정시키던 것이 철제로 된 볼트와 너트로 만들어진 못을 사용하게 된다. 그 이유는 사포기의 회전력이 대나무 못을 깍아 먹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진4 작업용 못(대나무못과 볼트와 너트로 된 못)


   또한 부레풀 작업 후 묶어서 고정시키는 끈도 이전에 삼줄을 사용하던 것이 나일론이 섞인 면줄로 바뀌고 볒집을 사용하던 부분도 잘라버릴 수 있는 나일론 끈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70, 80년대 신개념의 끈들이 저가에 공급되면서 순차적으로 바뀌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대장간의 변화에서 보여진다. 낫칼이나 초조용 칼은 버들잎칼이라 하여 상당한 제련 기술과 숙련된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장간이 기계화되고 사라지면서 칼을 만들어 줄 사람이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만든다 하여도 칼날이 너무 약하여 쉽게 무뎌져버려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인들은 톱을 실어 날을 세우는 톱줄을 사용하여 대체용 칼을 만들어 쓰는 실정이다.



사진5 작업용칼( 위쪽부터 낫칼1,2, 버들잎 칼, 톱줄로 만들어진 칼)


재료의 변화

   머리 부분(扇頭)에 사용하던 대구 도축장에서 구매한 소의 다리뼈가 곰탕 등의 식재료로 공급되면서 부족해지자 80년대 중반에 빽클라이트란 재료를 사용하여 머리 부분에 사용되는 뼈를 제작하게 된다. 이 신물질의 보급은 짜귀(짜구, 자귀)의 사용기법을 실전(失傳)시켰으며 연장자체도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만들어지는 합죽선의 대부분은 이 신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지고 있으며 일부작품에만 물소뿔을 비롯하여 먹감나무, 한우 뿔이나를 사용하고 있다.


사진6 머리 부분의 재료들 (위, 왼쪽부터 쇠뼈, 물소 뿔, 먹감나무, 아래 빽클라이터 로 만들어진 재료)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부채의 마디대(단절) 역시 거제도를 중심으로 재배되었던 맹종죽을 80년대부터 사용하면서 변화된 부분이다. 80년대 이전의 부채에는 마디대가 세 개, 다섯 개, 일곱 개를 넘지 않는 분죽대가 사용되어져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이 흩트러지지 않았으나, 무른 맹종죽이 사용되면서 부터는 마디는 아홉 개부터 수십개에 이르러 가격은 높아졌으나 그 형태가 쉽게 변형되어져 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심대 역할을 하는 변죽이 더 강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기에는 좋고 가격은 높으나 그 실용성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재료에서의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부채의 연대를 알 수 있는 키 역할을 해주는 사북을 들 수 있다. 부채의 머리를 고정시켜 중심점 역할을 하는 사북의 재료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백동, 황동, 은합금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어졌으나 1950년대에서 60년대 초까지는 백동이 주류를 이루고, 그 이후 70년대 말 까지는 백동양은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현재 사용되어지는 황동 고리는 70년대 말 부터 사용되어지고 80년대에는 황동만을 사용하게 된다.


사진7 사북 (왼쪽부터 백동, 양은, 황동)


   이 사북은 금속을 만지는 장인이 별도로 만들어 판매도 하면서 직접 부채에 장식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오다가 황동이 사용되면서 부터는 고리만을 구해서 부채 장인이 직접 작업을 하게 된다. 현재의 부채가 정착하기 까지는 격변기의 이러한 변화를 거쳐서 만들어지게 된다.
80년대부터 자리 잡히기 시작한 현대의 부채는 겉대 즉 마디의 숫자에 따라 그 가격이 결정되어진다. 앞에서 이야기된 대로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품질이 떨어지는 부채에 마디만 많은 걸 올려 가격만 높이는 경우가 있어 그 폐해가 많아지고 있다.

   부채는 먼저 견고하고 모양에 흐트러짐이 없어야하며, 손에 꼭 맞아야 오래 쥐고 다닐 수 있고 잘 펴지고 잘 개져야 한다. 그 모양새가 한복을 여미어 입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고, 옆모습을 봤을 때 머리모양은 크고 둥그러워야 손에 걸림새가 없고, 목 부분에서 가늘어져서 손에 쏙 들어와야 하며, 목살부분에서 다시커지는 형태가 손에 가장 잘 맞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양의 선은 오직 수작업으로만 만들어지는 조선시대의 부채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감에 있어서 갓피(변쪽의 양옆에 마감재로 붙이는 얇은 대껍질)가 부드럽고 견고하게 붙어 있어야 오래 사용 하여도 변함이 없는데, 최근의 부채들은 숙련되지 않은 솜씨가 많아 거칠게 작업 되어 지기도 한다.

   작업기법이 변하고 재료가 변하였어도 원래 부채의 모양과 기법을 찾아 재현하고, 화려했던 그 모습들을 복원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장인들이 해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이렇게 완성된 모습을 기반으로 현대와 미래에 어울리는 부채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재탄생시키는 것도 현대를 사는 장인들과 우리의 후손들이 만들어 가야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부채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