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훈남 컬렉터 - 안평대군

2018. 10. 1. 04:30美學 이야기



쿡! 조선시대 미술 컬렉터 등록일 | 2009.10.22 조회수 | 10,450

조선 최고의 훈남 컬렉터 - 안평대군

숨바꼭질 하듯 찾은 무계정사
 
8월의 무더운 어느 주말, 나는 달랑 번지수만 들고 그 곳을 찾았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9의 4번지 일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삶과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武溪精舍)터가 있다는 곳. 북악산 서북쪽에 위치한 부암동은 과거 조선의 권력 1번지,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던 동네다.  


‘무계정사 1길’이라는 좁은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난 고목


  부암동 주민센터 맞은 편, 예쁜 파스타 가게 앞에 ‘무계정사 1길’이라는 안내판이 손짓하듯 서 있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200미터쯤 올라갔을까. 오른 쪽에 아름드리 나무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이끌리듯 샛골목을 따라 몇 발짝 걸어가니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넓은 공터가 있었다. 잡풀 무성한 공터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한옥 한 채가 얼핏 보였고, 그 집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앞 대문에 육중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 집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앞 대문에 육중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매미 소리가 요란할 뿐, 한낮의 적막함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그 공간을 감돌았다. 과거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골목길이 끝나 큰 길과 만나는 지점에 ‘현진건 집터’라는 안내석이 있었다. 

고목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빈처’로 유명한 현대문학의 선구자 현진건 생가가 있었던 곳이기에 나는 다시 안평대군 집터를 찾기 시작했다. 대문 앞 번지수를 확인하며 329-4번지를 찾아 그 동네를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1시간여. 결국 부암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고 나서야, 처음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던 그 집이야말로 무계정사가 있던 곳이라는 걸 확인했다. 추측건대 현진건의 집터 역시 과거 안평대군 집터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고리로 된 자물쇠로 채워져 있기에 문을 밀어보았다. 사람 하나 비집고 들어설 만큼의 틈이 생겼다. 계단을 몇 칸 올라섰다. 꼭꼭 숨어 보이지 않던 ‘무계동(武溪洞)’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얼굴을 드러냈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라는 친절한(?)안내판과 함께. 그 곳엔 후대에 세워진 한옥 한 채가 있었다. 폐가이긴 하나 고관대작의 별장으로 쓰였을 것 같은 세련된 자태라서 안평대군 시절 정자의 모습을 잠시 상상케 했다. 


‘무계정사’를 증언해주는 ‘무계동’ 각자 바위


  허걱, 그런데 안내판에 새겨진 주소는 319-4번지가 아닌가. ‘안견(安堅)과 몽유도원도(夢游桃源圖)’ 관련 책에서 소개된 주소,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를 참고했는데, 그 번지수가 오기였던 것. 그러더라도 서울시에 잘 보이는 곳에 안내판 하나 세워 뒀더라면 이런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시민을 위한 행정이 아쉬웠다. 

하지만 숨바꼭질하듯 한 시간여 주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한 덕분에 마지막으로 보존된 서울의 비경을 훔쳐볼 수 있었다(이곳은 개발제한구역이다). 울울창창 소나무 숲과 송향을 실은 바람, 매미 소리도 삼킬 듯 기세 좋게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가 그것이었다. 

안평대군이 그 신비한 풍광에 홀렸다는 기분도 알 듯했다. 도심을 지척에 두고서도, 마치 수만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은일자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끼 낀 돌계단 위, 한옥 한 채가 세련된 자태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계정사… “내가 꿈에서 노닐었던 무릉이 이 곳이라네”
 

   몽유도원도를 알 것이다. 안평대군이 29세 때인 1447년, 꿈속에서 노닐었던 무릉도원의 풍경이 하도 기이해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했던 산수화다. 그 무릉도원 이상향이 현실 속에 있을까. 있다. 적어도 안평대군의 기준이긴 하지만. 부암동 무계정사 집터가 그 곳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두루마리 속 그림 부분 (비단에 먹,  120㎝ x 857㎝)


어느 날 도성 안 이 계곡 주변을 우연히 찾았던 안평대군은 흠칫 놀랐다. 꿈속에서 본 무릉의 풍경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아닌가.

“국화가 물에 떠서 흐르는 걸 보고, 넝쿨과 바위를 헤쳐서 이 곳에 이르렀다. 꿈에서 본 바와 맞추어 보니 삐뚤삐뚤한 풀숲의 모습과, 그윽한 물과 언덕의 자태가 거의 비슷했다. 이에 금년 몇 칸 집을 짓고 무계(武溪))의 뜻을 취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하였다.”

문종 1년(1450년), 무계정사가 완공된 뒤 안평대군은 시회를 갖고, 참여했던 문사들에게 이렇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박팽년(1417∼1456)이 사육신 문집에서 전하는 얘기다. 박팽년은 안평대군의 꿈 속에서 신숙주 최항과 함께 무릉도원을 거닐었다는, 총애 받은 문인 중의 한 명이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 때는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대나무가 집 주위를 둘러싸듯 했다. 또 안은 넓고 밖은 은밀하며 계곡물이 흐르고 골짜기 입구에는 폭포가 떨어져 도원의 기이한 모습과 흡사했다고 한다. 

무계정사는 몽유도원도 속 은자적인 풍경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최항 등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이 곳 시회 주요 멤버였다. 수양대군과의 정권 경쟁에서 그를 지지해 주었던 훈구 대신 김종서와 황보인, 참모 역할을 했던 이현노 등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 문인들과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던 예술적 공간이자, 형 수양대군과의 건곤일척 권력 투쟁을 벌였던 정치적 무대였던 것이다. 


방대한 컬렉션… 불멸의 명필가로 키우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태어나 문종 4년인 1453년 형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으로 사사되기까지, 만 35년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갔다.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 등. 만 11세(1429년)에 좌부대언(左副代言) 정연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서예로 일가를 이뤘으며 탁월한 학문적 소양과 재주를 바탕으로 당대 예단을 주도해갔다. 그런 면모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컬렉터 안평대군이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컬렉팅을 시작했다. 
 
안평대군의 컬렉션 내용은 그가 꾼 무릉도원 꿈 속에 등장할 정도로 막역한 관계였으나 결국 그를 배반하고 수양대군편에 섰던 신숙주가 전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신숙주는 ‘보한재집(保閑齋集)’ 14권 ‘화기(畵記)’편을 통해 안평대군이 수장했던 서화 200여 점을 소개한다. 만 17세경인 1435년부터 그 글이 쓰여진 만 27세 때인 1445년까지 10여 년간 모은 것만 정리한 것이다. 화기에 있는 리스트만 보더라도 안평대군 컬렉션은 방대하고 국제적이었다. 시쳇말로 특A급이다. 요즘으로 치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등에 있을 법한 거장들의 작품을 대거 소유했다고나 할까.  
 
당시는 세상 유일 선진국이 중국이었다. 안평대군은 중국 서화가의 작품을 동진에서부터 송나라, 당나라,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그것도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는 대가의 작품들만 소장하고 있었다. 중국 회화 사상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화가 고개지의 작품을 비롯해, 당나라의 오도자 왕유, 송나라의 곽충서 이공린 소동파 곽희 곽충서 문동, 원나라의 조맹부 선우추 유백희 나치천 마원…. 소장품 전체 174점 중 136점이 중국 그림이다. 시기상 가까운 원대 화가 작품이 많았지만, 화가 개인으로 치면 북송의 곽희 그림이 17점으로  가장 많았다. 조선 화가로는 안견의 작품이 유일했는데, 무려 30점이나 갖고 있어 안견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했다. 
 
서예가의 작품도 소식, 조맹부 등 중국 명필가 작품 일색이다. 그림에 미치지 않았다면 이만한 걸작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터. 그것도 스물 일곱 젊은이의 컬렉션이 아닌가.  
 
안평대군도 자신의 그림에 대한 사랑을 병적인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신숙주가 화기, 첫 머리에서 전하는 안평대군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자.
 
“비해당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다. 그 중에서 좋은 것은 골라 표구를 해 소장했다. 어느 날 이것들을 모두 꺼내 나(신숙주)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들을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병이오.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 년 한 후에 이만치 얻었소. 아하!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여지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
 
그런데 안평대군의 마지막 멘트가 자신과 소장품의 불길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우리는 안평대군을 글씨의 대가로 더 많이 기억한다. 그가 글씨로 득명하는 데는 컬렉션이 한 몫 했다. 알다시피 안평대군의 글씨체는 고려말에 들어온 원나라 말기 학자 조맹부(趙孟, 1254∼1322)의 송설체(서실 이름 송설재(松雪齋)에서 따온 것)를 토대로 자신의 서체를 개발한 것이다. 
 
조맹부는 당나라의 안진경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하던 서풍을 배격하고 왕희지의 글씨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안진경체는 ‘비후미’ 라고 얘기되듯 풍만하고 화려한 여인의 느낌을 준다. 반면 300년대 동진 사람인 왕희지의 글씨체는 굳건하고 우아하면서 마른 듯한 남성미의 글씨체다.
 
왕희지체를 이어받은 조맹부체는 조선 전기 사회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필법이었다. 개국의 젊은 기운이 넘쳐나며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문물을 정비하려는 시점이라 마르고 강건한 필치는 시대정신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이 필법을 가장 잘 구사한 이가 안평대군이었다. 몽유도원도에 쓴 글씨에서 그 맛을 보라. 



안견의 몽유도원도.  두루마리 맨 앞에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글씨체가 유려하면서도 힘차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사본)


화기 리스트를 보면, 안평대군은 조맹부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그림은 묵죽도 2점 뿐이고, 행서가 26점이나 됐다. 조맹부의 진적은 웬만한 양반도 갖기 어려운 귀한 것인데, 이를 무더기로 갖고 있었으니 이를 보고 필법을 터득해 당대 최고 서예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 황제도 극찬한 안평대군의 글씨

안평대군 글씨체는 중국 황제도 반했다. 세종 32년(1450년), 명나라 사신들이 왔을 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연회를 열었다.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은 안평대군에서 글씨를 써달라고 졸랐다. 이에 안평대군은 하룻밤 사이  해서, 행서, 초서 수백장을 써서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은 일필휘지 휘갈기는 솜씨에 놀라 눈에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 이 때 구해간 안평대군 글씨를 황제에게 바쳤다. “참으로 좋도다.  진정으로 이것은 조자앙(맹부) 서체로다” 
 
황제의 극찬, 어찌 안평대군의 글씨가 명의 조야에 널리 알려지지 않겠는가.  이후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 사신마다 달라고 하는 통에 궁중에서 동이 나고 말았다.
 
안평대군의 총애를 입었던 화가, 안견도 마찬가지다. 안견은 중국 이곽파(북송대 이성과 곽희를 추종했던 화가들) 화풍을 수용한 궁중 화가였다. 안견은 안평대군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를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개척할 수 있었다. 안평대군의 수장품에는 유독 이곽파 화가 작품이 많다. 곽희 작품만 17점이 있고, 이연(李衍), 유백희(劉伯熙) 등 이곽파로 분류되는 화가들의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이곽파는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산세 표현(운두준)과 게 발톱처럼 뾰족한 나뭇가지 표현(해조묘)이 특징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안평대군의 호는 비해당이다. 세종이 부지런히 공부해 타고난 재주를 충분히 펴라는 뜻에서 내려준 호다. 당호 ‘안평(安平)’이 안일하고 안이하다는 의미라 게으르지 않은, 즉 부지런하다는 의미의 ‘비해(匪懈)’로 바꾸도록 한 것. 그가 세예로 일가를 이룬 것은 비해당의 호를 삶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학문도 깊어 비해당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는 또한 풍류객이자 호쾌한 장부이기도 했다.
 
“비해당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더욱 시문에 뛰어났다. 서법은 뛰어나 천하 제일이 되었고 그림과 음악을 잘 하였다. 성격은 또한 호탕하였으며, 옛 것을 좋아하고 경치를 탐하였다. (중략)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12景詩를 짓고 또 48영(詠)을 지었다.  혹은 밤에 등불을 켜고, 얘기하고, 혹은 달이 뜰 때 뱃놀이를 하며, 혹은 도박을 하거나 음악을 계속하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희희덕거리기도 하였다. 명유(命儒)로서 그와 교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잡업에 종사하는 무뢰한 사람들도 또한 그에게 가까이 하였다. (중략)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이를 들어주었다.”(성현의 용재총화)
 
술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줄 아는 인간적인 면까지 갖췄으니 주변에 사람이 끓을만도 했다. 연못의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또 함경도에 육진이 설치되자, 다른 왕자들과 몸소 야인을 정벌하러 가기도 했던 대장부였다. 글씨는 사람을 닮는 법. 안평대군 글씨체에는 힘 있으면서 날렵하고, 아취 있으면서 여유가 있는 그의 풍모가 배어난다.  
 
안평대군은 1453년 형 수양대군의 난으로 만 35세에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세조(수양대군) 즉위 후에는 역사에서 이름조차 지워져야 했다. 소장한 서화도 가산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졌다. 후대에 전해진 것은, 몽유도원도 한 점 뿐. 그것도 지금의 소장자는 일본이다. 

역사는 그를 다시 불러냈다. 종친들의 문화 정치 활동이 활발해졌던 17세기, 종친 수장가의 첫 모델이었던 안평대군에 대한 관심이 오욕의 죽음으로부터 그를 되살려 낸 것이다. 선조의 손자이자 서화가 낭선군 이우(1637∼1693)는 안평대군의 행적과 연관된 글을 모아 ‘안평사적’ ‘안평유고’라는 제목으로 필사하기까지 했다. 안평대군 글씨에 빠졌던 성종은 안평체를 사숙했다. 그의 사후 주춤했던 조맹부체가 조선 중기까지를 풍미하게 된 배경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최근 대한민국은 ‘몽유도원도 신드롬’에 빠졌다. 일본 덴리대 소장의 몽유도원도가 13년 만에 고국나들이를 했던 것. 대학 측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개관 100주년 기념’ 행사에 빌려주었다. 하지만 겨우 열흘간이었다. 귀한 기회를 놓칠세라 관람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난 추석 연휴를 이용해 가족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관람 허용시간은 딱 1분. 무려 3시간여를 기다려 후다닥 보고 지나쳐야 했으나, 꿈처럼 흘러가는 두루마리 그림 앞에서 나는 잠시 황홀했다.
 
안평대군이 쓴 훤칠한 글씨체의 몽유도원도 제목, 안견의 그림, 그리고 이어지는 안평대군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산문 등의 발문 그림과 발문을 합쳐 20m나 되는 그 긴 두루마리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시절로 나를 싣고 가는 양탄자였다. 





2018.07.07 | 웹문서  http://news.bookdb.co.kr/bdb/Co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