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0. 05:45ㆍ산 이야기
1968년 가톨릭의대 산악부 설악산 조난사고
1968년 10월, 9명의 가톨릭의대 산악부원들이 설악산을 등반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7명이 숨진 참사가 12선녀탕계곡에서 일어났다. 위기상황에서 판단을 잘못하고 무리한 하산을 시도해 죽음을 자초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이 참사는 조난시에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가을도 무르익어 푸른 하늘이 아득하던 1968년 10월22일 오후 가톨릭의대 산악부원인 김형옥, 김신철, 김한종, 민병주, 강형태, 박승호 등 남학생 6명과 홍정숙, 한명숙, 조나령 등 여학생 3명은 산악회 제3회 추계 설악산 등반을 위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다. 춘천에서 일박한 뒤 10월23일 4시30분 기상해 5시 20분 발 남교리행 버스를 탄다.
9시20분 남교리에 도착, 빵과 사과로 아침을 대신하고 12선녀탕계곡으로 출발했다. 키슬링, 군용 휘발유버너, 털쉐타, 망원경, 무전기 등 당시로선 갖출만한 건 다 갖춘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된 등반이었다. 오전 11시에 제1탕에서 점심을 지어먹고, 복숭아탕을 지나 막탕에 도착해 계획대로 야영에 들어갔다.
산악부원들이 첫 야영 직전 지난 복숭아탕. (사진 출처:한국의 산하)
10월 24일 아침 7시에 기상해 보니 밤새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서울대 의대생 5명이 그들을 지나 상류로 올라갔다.
9시가 조금 지나 이들도 짐을 챙겨 산행에 들어갔다. 얼마쯤 오르자 빗방울이 후드득 나뭇잎을 때린다. 지나가는 소나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판초를 꺼내 입고 산행을 계속한다. 대승령과 안산으로 빠지는 길목 초입에서 큰 바위 아래 얕은 동굴을 발견하고 비를 피해가기로 한다.
빗방울이 거세지자 민병주가 정찰을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 젖은 옷을 말린다. 그러는 새 동굴 안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찰 나갔던 민병주가 돌아와 짙은 안개로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길도 물에 잠겼으니 밥부터 해먹자고 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동굴 안이 흠뻑 젖어 불을 피우기가 어려워 모두 점심과 저녁을 굶은 상태에서 밤을 맞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온이 떨어지면서 비가 싸락눈으로 바뀌었다. 밤이 깊어지며 강풍이 불자 단풍 지던 가을산이 삽시간에 겨울산으로 돌변했다. 기온이 대략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자 버너 두 대를 피웠지만 추위를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운명의 10월 25일 여명 무렵인 새벽 6시, 설악산 12선녀탕계곡 막탕에서도 1킬로미터 정도 위 커다란 바위 아래의 틈에서 가톨릭의대 산악부원 9명은 점점 심해지는 비바람에 얼어붙은 몸으로 초조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24일 오전부터 폭우로 계곡길이 잠겨 하산길이 막혔고, 간밤에 진눈깨비에 기온 급강하하자 몸이 얼어 버너에 기름도 못넣을 정도로 다들 몸이 굳은 상태였다.
동굴 안에도 물이 질척할 정도로 고이자 리더 김신철이 12선녀탕계곡 입구인 남교리로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짐은 두고 자일, 판초 등만 챙겨 하산을 시도한다. 부리더인 김한종이 자일을 묶고 급류 속으로 들어갔다가 건너지 못하고 후퇴, 김신철이 시도했지만 급류에 쓸리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오전 8시 천둥 번개에 폭우가 계속된다. 리더인 김신철이 다시 하산을 결정한다. 계곡길을건너는 건 포기하고 산기슭을 따라 길을 뚫으며 하산한다. 빗물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비가 쏟아졌고 길내기도 어려워 암벽을 횡단해 가며 탈출로를 찾았다.
오전 11시 1킬로미터 정도를 3시간 걸려 복숭아탕(제8탕)에 도착한다. 낙오자 방지를 위해 일렬로 내려갔다. 비상식으로 빵을 나눠먹는데 김한종은 이미 탈진해 빵을 씹지 못할 정도였다.
리더인 김신철도 의식이 흐려져 김형옥이 자일을 매고 조나령이 김한종의 배낭을 맸다. 김형옥, 홍정순 등이 교대로 김신철, 김한종을 부축했다. 두 사람은 리더, 부리더로 책임감으로 앞장서 하산길을 찾다 체력이 먼저 다한 걸로 보인다. 얼마 뒤 김신철, 김한종이 졸린다며 쓰러져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뺨을 때려도 안 깨어나 모두 일단 정지했다.
12선녀탕계곡 등산로. 지금은 철계단과 다리 등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사고 당시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전이고 등산인구 자체가 적을 때라 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사진 출처:한국의 산하)
오전 11시30분 불을 피우려고 했지만 버너가 작동안돼 실패했다. 실신한두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마땅한 피신처도 없어 그들은 대열을 나누기로 한다. 김형옥, 민병주가 계속 하산해 구조요청을 하고 나머지는 쓰러진 두 사람을 지키기로 한다. 김형옥, 민병주는 필사의 노력으로 하산을 하던 와중에 서로 헤어지고 만다. 그러다 김형옥도 탈진해 판초를 뒤집어 쓴 채 의식을 잃었다.
이때 나머지 사람들은 쓰러진 두 사람을 데리고 느린 걸음으로 하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지친 사람들이 탈진해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해 내려가는 길, 파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명숙이 먼저 탈진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모두 판단력을 상실하고 해서는 안되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김신철, 김한종을 한명숙이 데리고 있기로 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구조대를 부르러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함께 붙어 체온을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세 팀으로 분산됐으니 점점 상황은 암울해져 갔다.
홍전순, 조나령, 강형태, 박승호 이 네 사람도 내려가는 중에 지쳐 떨어지기 시작한다. 먼저 강형태, 박승호가 고꾸라졌다. 홍정순, 조나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더 내려가서야 두 사람이 없는 걸 안다. 둘은 마음이 조급해져 산줄기를 버리고 물길 옆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한참을 가다 커다란 바위가 나오자 홍정순이 먼저 지나고 뒤이어 조나령이 지나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급류 속으로 사라진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홍정순은 산줄기로 올라붙어 길을 재촉한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자 홍정순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덮고 잠에 빠져든다.
10월 26일, 사흘 만에 날이 갰다. 햇살이 비치고 계곡물도 반이나 줄어 있었다. 눈을 뜬 홍정순은 간신히 일어나 하산을 계속했다. 도중에 판초를 뒤집어 쓴 채 자고 있는 김형옥을 발견하지만 그 자리에 두고 계속 하산한다.
얼마를 더 걷자 쓰러져 있는 민병주가 눈에 들어왔다. 홍정순은 맥을 짚어봤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민병주의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그곳에서 산기슭을 돌아 마을 쪽으로 내려가다가 3시 30분께 남교리 주민을 발견하고 구조요청을 한다.
마을 주민이 끓여준 미음을 먹고 홍정순은 횃불을 켜든 구조대 4명과 함께 악몽과도 같았던 계곡길을 다시 오른다. 오후 7시 의식을 회복해 있던 김형옥을 발견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기온이 내려가자 구조를 포기하고 하산한다.
27일 남교리에 도착해 있던 동국대산악부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수색에 들어갔다. 오전 11시30분께 제1선녀탕 밑에서 급류에 휘말려 사라졌던 조나령의 시신을 발견했다. 오후 3시 조금 넘어 제1선녀탕 밑 함지박골 부근에서 감형태, 박승호도 죽은채 발견됐다. 둘 다 물에 떠내려 온 듯 보였다. 이어 4시께 소나무에 기댄 채 숨져있는 한명숙을 발견했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듯했다.
가장 먼저 낙오했던 김신철, 김한종, 민병주는 28일에 시신이 수습되었다.
기습적인 가을 폭우에 꽃같은 젊음이 7명이나 스러져 간 것이다.
역시 12선녀탕계곡 등산로. 지금 보더라도 산행이 만만해 보이는 코스는 아니다. (사진 출처:한국의 산하)
세 명이 급류에 실족사하고 네 명이 저체온증으로 숨진 이때의 사고를 두고 당시 산악인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계곡에서 폭우로 조난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에 대해 큰 교훈을 남겼다는 것이다. 만약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면, 하산하지 않고 반대로 산을 치고 올라가 반대쪽 하산로를 찾았다면...
만약이란건 없지만 교훈은 남는 법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이 오래 전의 사고가 되새겨지는 건 막 산으로 가는 길에 발을 들인 젊은 대학생들이 그것도 7명씩이나 목숨을 잃은 비극이 뇌리에 파고든 때문일까. 비록 대학 산악부이긴 했지만 대부분이 경험이 부족해 비롯된 사건이고 보니, 내가 등산을 처음 시작했던 그 무렵과 흡사해 그때가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해서이다.
1970년을 전후한 몇년간 국내에선 굵직한 조난사고가 잇달았다. 1968년의 가톡릭의대 산악부 조난사고에 이어 1969년에는 히말라야 원정훈련을 하던 산악인들이 눈사태에 희생된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사고가 일어났다.
설악산으로 이어졌던 대규모 희생은 결국 2년뒤 북한산 인수봉으로 이어졌다. 1971년 1 1월 2 8일 인수봉에서 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동상 등 부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 났다.
이날 한파주의보를 무시하고 방풍이나 방한장비를 갖추지 않은채 해질 때까지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던 클라이머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 오후부터 몰아친 강풍과 한파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하강코스로 몰리는 바람에 하강이 늦어진 데다, 강풍으로 인해 오버행에서 자일이 엉키는 바람에 오버행 하단 테라스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크렉에 낀 자일에 매달린 채 사망하는 등 탈진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었다.
이때의 교훈을 되새기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자연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해줄려는 신의 뜻일까. 1983년 4월 3일 역시 북한산 인수봉에서 화창한 봄날씨에 암벽등반을 하던 산악인들이 진눈깨비가 날리고 기온이 급강하하는 등 돌변한 날씨에 한꺼번에 하강을 하다가 체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로프가 엉겨 저체온증으로 역시 7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암벽등반 중의 조난이나 설산에서의 눈사태로 인한 조난사고는 워킹 위주의 산꾼들은 딴나라 얘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산에 다니다 보면 무슨 일을 겪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출처: 그때그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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