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사고 반으로 줄입시다!

2018. 10. 31. 10:33산 이야기



[스크랩] 환희와 비극은 같은 배낭안에 있다| │  행  │ 산행 상식
사과나무(경미)|조회 84|추천 0|2013.02.23. 22:47


등산사고 반으로 줄입시다!

 

글 사진 | 이규태(한국등산안전협회 부회장)

 


 


  1953년 영국등반대가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 각국의 언론은 영국인의 끈질긴 투혼에 경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를“ 인류의 20세기 위대한 업적” 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초등정 ‘ 끈질긴 영국인의 투혼...’ 하는 평가보다는 인간의 본원적인 도전정신에서 그 동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능력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상황을 스스로 선택하여 위험과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본원적인 욕구가 강한 부류가 있다. 그러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들의 모험정신, 개척정신 즉,‘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가 에베레스트 초등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에베레스트는 1852년 영국의 한 측량기사에 의해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졌고 당시 이 발견에 공이 컸던 전임 측량장관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명명된 것이다. 그때까지 이 봉우리는 티베트에서는‘ 초모롱마’로,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로 불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세계최고봉인 것까지는 몰랐다. 에베레스트가 세계최고봉이 되자 올라가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도전정신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1907년 영국산악회창립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이 거론되었지만 당시의 복잡했던 외교상 문제로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발족시키고 1921년 마침내 1차 에베레스트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했지만 실패했다.

 

   1차원정대에 참가했던 불세출의 영국산악인 말로리는 다음해인 1922년 2차원정대에도 참가하여 8225미터에 도달함으로서‘ 인류최초로 8천미터 높이에 도달’ 이라는 신기원을 세웠지만 등정에는 실패했다. 2년 후인 1924년, 야심차게 출발한 3차원정대는 기필코 정상에 서겠다는 투혼을 불사르며 히말라야로 향했다.

 

   당시 네팔왕국의 쇄국정책으로 네팔쪽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국원정대는 계속해서 티베트 쪽으로 어프로치 했다. 셀파 7명이 사망하는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강한 집념과 의지로 8220미터에 캠프6을 설치했다.

 

   며칠 후 캠브리지대 출신 38세의 베테랑‘ 말로리’옥스퍼드대 재학생인 22세의 신예‘ 어빙’은 새벽어둠을 뚫고 캠프6을 출발,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망원경으로 8500미터 지점을 오르는 것이 관측되었고 그들의 모습은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 갔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영원히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말로리는 75년 후인 1999년, 8천미터 위에서 하얀 두개골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참석하여 국장으로 치러진 말로리와 어빙의 슬픔을 딛고 9년 후인 1933년, 에베레스트 4차원정대가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였다. 다만 말로리와 어빙의 유품 일부를 8400미터 부근에서 수습했을 뿐이다. 2년 후인 1935년, 영국산악회 5차 에베레스트원정대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제6차원정대, 1938년에 제7차원정대가 에베레스트로 향했으나 결과는 비참하기만 했다. 1951년 네팔왕국의 문호가 열리면서 8차원정대는 비로소 네팔쪽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지금의 가장 일반적인 루트인 쿰부빙하를 거슬러 올라 남동릉 사우스콜을 경유 정상등정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크고 작은 사고로 현지 셀파나 포터 그리고 대원들의 안타까운 희생만이 계속되었다.

 

 


   2년 후인 1953년, 헌트 대장이 이끈 9차원정대가 다시 네팔쪽으로 입국하여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고 등반시작 47일인 5월29일, 마침내 인간의 발자국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찍혔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침내 인류가 오른 것이다. 그곳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것을 규명한지 100년, 그리고 그곳에 <올라가봐야겠다!>고 맘먹고 도전한지 32년만에 마침내 올라선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죽지 않고 오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했는지, 인간의 신체조건으로 과연 오를 수 있는 곳인지를 따지지 않고“ 그래!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한번 올라가보자! 설사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하고 부딪혔던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본원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분출시켰을 뿐이었다. 인류문명이 도전과 시련을 딛고 발전해온 역사적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등산의 역사를 잘 음미해보면 장구한 인류문명의 발전사가 짧은 기간으로 압축되어 보이는 듯하다.

 

   등산은 산이라는 현장에서 행해진다. 실험실이나 강의실이 아닌 산이라는 위험한 공간, 때론 그곳이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일 수도 있다. 문명의 역사가 그렇듯 등산의 역사 또한 조난의 비극을 딛고 발전해왔다. 하나의 위험인자를 해결하면 새로운 위험인자가 나타나 해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등산조난의 역사는 바로 등산발전의 역사다.

 

   등산을 통한 육체적 정신적 건강증진효과를 부정할 사람을 없을 것이다. 불편하고 위험했던 직, 간접 경험을 거울삼아 새로운 안전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더 안전하고 감동적인 산행을 즐긴다.

 

 

 

우리나라 등산형태별 사고 1호

 

   산에 갈 때 메는 배낭에는 먹을 것과 비상시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있다. 그런데 배낭 안에는 이런 거 말고 정말 중요한 두 가지가 더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큰‘ 감동’과 비극적인‘ 위험’이다.‘ 감동’을 추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대가로 지불해야한다. 등산이란, 위험이 클수록 감동도 커지는 묘한 역학관계가 있다.


 

 


   서울 북한산은 우리나라 현대등반의 원점이며 현주소다. 지리산의 장쾌한 능선, 설악산의 계곡과 암릉, 한라산의 설벽, 그리고 북한산의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 등에서 시작된 현대등반은 히말라야를 비롯한 6대주 최고봉으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바로 이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에서 가장 많은 등산사고가 발생한다. 감동이 큰 곳에 위험 또한 있다는 증거다. 특히 북한산 인수봉은 우리나라에서 조난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봉우리다. 어쩌면 1000미터 이하 독립봉 기준으로 조난사고 세계1위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에 현대등산이 도래된 1920년대 이후 기록상으로 확인된 등산사고 역사를 잠시 뒤돌아보자. 손경석 선생‘ 한국등산사’(2010년 발행)에 의하면 우리나라 현대등산 사고1호는 1936년 1월 경성제대산악부 한라산등반 대원 1명이 탐라계곡으로 하산도중 실종 사망한 것이다.

   암벽등반 사고1호1939년 4월, 도봉산 주봉에서 양정고보 산악부원 1명이 등반중 추락사한 것이고, 인수봉 사고1호 46년 1월, 후면코스를 등반중이던 23세 소방대원의 추락사다. 백운대 사고1호47년, 23세의 여성이 정상부 철책난간을 잡고 올라가다 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스커트를 감싸잡으려는 순간 와이어로프를 놓친 추락사다. 등산복이 따로 없었던 당시 이 여성은 스커트를 입고 백운대 등산길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빙벽등반 사고1호1973년 1월, 설악산 토왕성 하단빙폭 초등을 노리고 등반 중이던 요델클럽회원 1명의 추락사였다. 이 사고 후 76년 1월 토왕성 하단빙폭이 동국대산악부에 의해 초등되었고, 상단빙폭은 77년 1월 크로니산악회가 초등에 성공했다. 크로니산악회 등반팀은 사투를 벌리며 야간까지 극한등반을 감행한 결과 선등자가 마침내 상단빙폭 초등에 성공하고 우리나라 빙벽등반사에 획을 긋는 순간, 로프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선등자를 확보하던 후등자는 빙폭 중간에 홀로 매달려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공포의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히말라야등반 사고1호1971년 5월, 마나슬루에서 김기섭 대원이 크레바스에 추락사한 것이다. 그는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던 김정섭 대장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김정섭 대장은 마나슬루에 동생을 묻은 이듬해 72년 4월, 다시 마나슬루에 도전했으나 대원 5명과 셀파와 쿡 10명 등 총 15명이 사망하는 이른바‘ 마나슬루의 비극’이라는 대참사를 당했다. 4년 후인 76년 봄, 김 대장은 비극을 딛고 일어서 세 번째로 마나슬루에 도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이 세 차례의 원정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산악인의 히말라야 도전정신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집념의 마나슬루’라는 말이 한동안 사회전반에 회자되었다.

 

   유럽알프스등반 사고1호 1977년 7월 몽불랑산군 최난코스의 하나인 프테레이 남서벽에서 발생했다.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리더 유재원(32세) 씨는 악천후를 만나 벽에 매달려 비박하던 중 동행했던 일본인 1명과 함께 눈사태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이거북벽 단독등반을 계획하고 훈련 중이었다. 사고 2주일이 경과한 8월 8일, 유 씨는 일본인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알프스 산자락 샤모니에 있는 가이드묘지에 안장되었다.

 

   유 씨는 당시 우리나라 최정상급 등반가였다. 72년에 한국산악회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국립스키등산학교에 파견했던 2차훈련대의 일원이었다. 알프스의 매력에 흠뻑 매료된 유 씨는 30여 일의 교육이 끝나자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체류하면서 알프스등반에 몰입했다. 현지 등산장비회사와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만 나면 알프스의 빙설암벽에 매달렸다. 그가 샤모니 따뀔봉에서 기록한 초등정프랑스산악회의 공인을 받아‘ 코리안 필라코스’로 명명되었고, 신들린 듯한 그의 등반은 계속되었다. 72년~77년까지 5년 동안 마터호른 북벽, 드류 북벽 등 23개봉을 오르면서 단독등반 15개, 초등루트로 4개나 올랐었다.

 

 


   프랑스 가이드자격은 전 세계 산악인들 최고의 영예로 외국인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이다. 유 씨는 프랑스 산악회에서‘ 가이드자격’을 74년에 획득했다. 우리나라 산악인으로 처음이었다. <대한민국 산악인으로서 명예를 위해 청춘을 알프스에 바치겠다. 끝까지 흔들림 없이-> 라는 유서 같은 편지를 남기고 간 그는 우리들을 향해 인간이 자신의 능력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상황을 스스로 선택하여, 위험과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본원적인 욕구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행동으로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안타까운 대형사고- 배낭엔 감동도, 위험도 함께 들어있었다

 

   1965년 7월9일, 기상청은 폭풍주의보를 발령했다. 고려대학교 불교연구회 학생 12명오대산 상원를 방문하고 10일 봉피골로 하산하던 중, 물이 불어난 계곡을 만났다. 일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계곡을 건너기로하고 스크럼을 짜고 계곡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 사람이 넘어지면서 모두가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 사고로 10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지리산 만복대에서 고등학생 1명이 강풍에 무너진 캠프에 압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역시 같은 날 설악산 천불동계곡 비선대에서는 에코클럽 대원 1명이 몸에 로프를 묶고(당시에는 안전벨트가 대중화 되지 않아 로프를 몸에 직접 묶는 보울라인 매듭법을 주로 사용했음) 계곡을 횡단하던 중 로프가 풀리면서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전문산악인 모임인 에코클럽은 일단 사고를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후, 곧바로 사고가 발생했던 비선대로 다시 올라갔다.“ 단단히 묶은 로프가 왜 풀렸을까?” 하는 의문을 규명하고 싶었다.

 

   계곡물은 사고 당시보다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사고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 보울라인 매듭으로 몸에 로프를 묶고 한 사람이 계곡에 들어섰다. 계곡을 건너던 중 몸의 균형을 잃으면서 사고 당시와 똑같이 급류에 휩쓸렸다. 확보자가 즉시 로프를 당기며 확보에 들어갔다. 그런데...?! 급류에 휩쓸린 그의 매듭이 또다시 풀리면서 설악동까지 떠내려가는 제2의 사망사고가 발생해버렸다. 에코클럽 회원들은 모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고는‘ 모든 매듭은 끝가닥으로 되감기 옭매듭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물에 젖은 보울라인 매듭은 로프가 약간 굳어지면서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급류에 휩쓸린 체중은 그 순간 충격량이 대략 3배로 증가한다. 젖은 로프에 3배로 증가된 충격량이 순간적으로 걸리면서 <옭매듭이 되어 있지 않은> 보울라인 매듭이 풀려버린 것이다. 안타까웠던 이 사고는 등반시 안전벨트 착용과 정확한 매듭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확인시켜주었다.

 

  1967년 5월, 지리산을 등산하던 진주교육대학생 3명이 산나물이라 생각하고 캐먹은 독초 때문에 한꺼번에 3명이 사망했다. 독초로 인한 사고는 요즘엔 많이 줄었지만 역시 반복되는 사고다.1968년 10월, 카톨릭의대산악부 9명(남6명, 여3명)은 설악산 12선녀탕계곡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비, 진눈깨비 그리고 강풍과 함께 찾아온 영하8도의 첫추위를 만나, 계곡상부 바위굴에서 비박을 하기로 결정하고 대장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남교리하산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가 올라오지 않자 이번엔 부대장하산했으나 역시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남아 있던 대원들 중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이 생겼다. 체력이 남은 대원들은 당황하여 각자 하산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신은 바위굴과 계곡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1969년 2월, 한국산악회는 히말라야등반에 대비한 20명의 훈련대를 설악산으로 보냈다. 2월6일 설악동에 도착한 훈련대는 조별로 다양한 훈련을 실시하면서 본대는 11일 건폭골(이 사고 후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기도 함) 100미터폭포 하단베이스캠프구축했다. 13일 새벽, 기상청은 폭풍설주의보를 발령했고 이후 일주일 동안 많은 곳은 5미터의 적설량을 보일 정도로 50년만의 대폭설이 내렸다. 설악동 여관과 상가건물이 주저앉고 배낭을 메고 걸으면 눈이 목까지 차올라 그야말로 눈속을 헤엄칠 정도였다. 대원 20명 중 대장단 3명(대장 및 부대장 2명)을 포함한 10명은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나머지 대원은 대청봉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뚫린 듯 하염없이 내린 폭설은 이날 밤 마침내 베이스캠프를 덮치고 말았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10명 전원은 손쓸 겨를도 없이 눈사태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희생자 모두 우리나라 산악계의 지도급 산악인이거나 젊고 실력 있는 신예들이어서 더욱 안타까운 조난사였다.

 

   1971년 11월,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 오른 각 등반 팀은 로프가 수평으로 휘날릴 정도의 차가운 강풍속에서 하강을 서두르고 있었다. 서면 오버행 하강지점은 특히 바람을 많이 맞는 하강코스다. 여러 팀들이 차례로 하강을 하던 중, 먼저 내려간 팀의 로프가 강풍으로 인해 잘 회수되지 않고 여러 팀의 로프가 서로 꼬이면서 휘날린 로프는 다른 팀의 로프를 얽어버렸다. 로프에 매달린 사람은 거미줄에 걸린 듯 그대로 매달린 채 죽어갔다. 젊은 클라이머 7명이 사망한 참극이었다.

 

   1976년 2월, 대한산악연맹은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비한 훈련대를 설악산에 보냈다. 공룡능선에서 훈련하던 B조 6명은 폭설로 훈련을 중단하고 1275봉 동쪽 설악좌골 하산을 하고 있었다. 계곡 상부에 위치한 좁은 협곡을 내려설 때 두 차례의 눈사태가 연속적으로 그들을 덮쳤다. B조 6명중 조장을 포함한 3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대한 산악연맹은 시련을 딛고 다음해에 ’77에베 레스트원정대'를 파견, 고상돈 씨가 한국인으로 첫 발자국을 남겼다. 에베레스트의 영웅이었던 고상돈 씨는 2년 후인 79년 5월, 북미 최고봉 매킨리 정상등정 후 하산하던 도중 추락사하고 말았다.

 

   사고의 위험은 경험자와 초보자를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적용된다.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하는 순간, 큰 감동과 위험을 함께 메고 가는 것이다. 어떻게 대비하고 무엇을 간직하고 건강하게 돌아올 것인가는 각자의 못이다.

 

 


   완연한 봄기운이 무르익어가던 1983년 4월, 북한산 인수봉은 수많은 클라이머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날씨가 돌변하여 강풍과 진눈깨비를 동반한 한파가 인수봉을 덮쳤다. 정상에 빨리 도착한 팀은 서둘러 하강했고, 흰 눈이 쌓이기 시작한 인수봉 각 코스에서 등반 중이던 클라이머들은 전반적으로 조난상태가 되었다. 특히, 비가 온 후 눈이 내리며 한파가 엄습했다. 당시 방풍, 보온의류가 변변치 못했던 대학산악부원 5명젊은 클라이머 7명이 짧은 시간에 동사하거나 추락사하고 말았다. 71년 7명의 사망이후 12년 만에 또다시 7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등산사고는 비슷한 유형이 반복된다

 

   인류 최초로 8000미터에 도달했던 말로리에게“ 당신은 왜 위험한 히말라야로 가는가?” 라고 기자들이 묻자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최초로 올라간 힐러리에게“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곳을 어떻게 올랐느냐?”고 묻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올랐다.”고 했다.

 

   모름지기 등산이란 에베레스트를 올라갈 때나,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때나 거기 그대로 있는 산을 한 걸음, 한걸음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다. 잘 다듬어진 사람 사는 마을보다 야생의 산악에는 당연히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위험상황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가 있다. 산 자의 배낭엔 감동을 담아오지만 죽은 자의 배낭엔 비극을 담아온다.

 

   위험은 산의 높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예방은 위험을 예측하는 마음가짐과 기상변화에 대응하는 철저한 준비에 달려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당연히 사고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규명을 해본다. 등산사고는 비슷한 유형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것은 대책을 세우고 예방할 수 있다. 대형사고가 발생한 다음“ 텐트를 왜 그곳에 쳤을까?”“, 눈이 그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 왜 무리하게 행동했을까?”“, 그런 날씨였는데 왜 움직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등산은 기본적으로 단체행동이다. 그래서 대형사고가 많다. 단체행동 일수록 리더의 판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산 시 대장이나 리더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고, 대원들은 대장이나 리더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등산관례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리더의 자질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경험과 자질을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리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는 전문산악인들의 모험적 행위에 의한 사고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작고 사소한 생활형 사고가 증가하고 있다. 정부관리 23개 재난분야 중 등산사고<인적재난 2위>, <사고건수 3위>에 올라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등산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나 국가자격증제도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회안전망 구축이 시급한 시점이다.

 

 

 

[ 출처 : 월간 사람과 산  이규태의 산악안전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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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와 비극은 같은 배낭안에 있다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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