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풍수[5]-무학대사와 풍수 -명당 서울도 만들어진 것이구나! / 삼각산 보현굴 外

2018. 11. 1. 02:19산 이야기



  

불교와 풍수[5]-무학대사와 풍수 

최원석 
  • 승인 2004.08.10 16:00
  • 댓글 0 

    명당 서울도 만들어진 것이구나!
       무학대사(1327∼1405)는 한국불교사에서 도선국사와 더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생애는 시간적으로 오백 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무학의 사상과 역사적 행적, 그리고 지리적인 자취를 비교해 보면 도선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혹시 도선의 후신이 아닌가하고 의심이 들  정도이다.

       도선무학은 각각 국사 혹은 왕사로서 고려 조선개국에 영향을 주었고, 산천 비보(裨補) 수도 전도(奠都) 등 당시의 국토계획에 사상적 기반을 제시하였거나 자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찰의 창건 및 중창과 관련한 두 사람의 행적 또한 같은 장소에서 반복되는 사례가 많다. 선(禪) 사상 역시 국토 산천의 숨결이 배여있다는 공통성이 있다.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는 같은 선상에서 취급되었으며, 심지어 민간에서는 동일한 인물로 겹쳐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무학은 도선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두 선승들에게 풍수의 인연이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일찍이 도선지리산의 구령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나 지리법을 전수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음양오행의 술법과 비결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무학의 경우, 18세 되던 해 지리산의 청학도인으로 부터 3년 동안 천문·지리·음양·도참의 술수을 배우고 비결을 물려받았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정감록》에도 도선비결〉〈무학비결〉은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무학은 서울이라는 땅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조선의 서울인 한양을 정하는데 자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한양을 중심으로 주변의 요소요소에 호국 비보사찰을 배치하였다. 태조 4년(1395)약사사(현 봉국사)를, 이듬해에는 자운암·호압사·사자암·영도사(현 개운사)를 새로 창건하였으며, 그 외에도 안정사(현 청련사)·보현사(현 일선사)·회룡사·불암사·백련사 등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이 글의 현장주제인 삼각산 보현굴보현봉 아래에 있으며 무학이 수도하였다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들 무학과 관련한 사찰들은 하나같이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중요한 지점에 들어서 있는 것이 주목된다. 안정사 백련사는 각각 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한양의 도성을 수호하는 비보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고, 자운암·호압사·사자암은 한양의 조산(朝山)에 들어서서 관악산의 역세(逆勢)를 다스리고 있으며, 회룡사·보현사·약사사는 서울의 주맥(主脈)에 입지하여 경복궁으로 들어오는 지맥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 바로 보현사 보현굴인 것이다.

       보현굴에 가려면 우선 일선사(一禪寺)를 찾아야 한다. 보현굴은 일선사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 무학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곳에 직접 칠성불(七星佛)을 조성하였다고도 한다. 보현굴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지금의 일선사의 전신(前身)인 보현사터가 있다고 하며, 이곳은 도선이 창건하고 무학이 중창하였다는 곳이다. 글머리에 살폈지만 두 사람의 묘한 인연은 이렇게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보현굴의 자리가 한양의 지세(地勢)에서 중요한 지점인지를 알기에는 서울의 풍수지리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다. 무릇 삶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길은 산에서 비롯한다고 풍수에서는 말한다. 한양을 이루는 주산(主山)은 백악(지금의 북악산)이요, 그 부모산은 삼각산(현 북한산)이다. 백운·만경·인수의 세뿔[三角]이 천지의 기운을 흠뻑 머금었다가 보현봉으로 응집되고, 이 보현봉이 힘차게 남쪽으로 맥을 뻗쳐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을 이루는 것이다.

       비유컨대, 삼각산 전체를 거대한 봉황새로 보자면, 세뿔은 봉황의 벼슬로, 펼쳐진 산자락은 봉황의 퍼득이는 날개로, 보현봉봉황의 부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인체로 비기자면, 한양을 배 혹은 자궁으로 상정할 때, 삼각산의 세 봉우리정수리이고, 보현봉콧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현굴은 정확히 몸의 인중혈(人中穴) 지점에 해당한다. 이렇듯 옛 선인(先人)들이 터를 보고 자리를 취하는 지혜는 놀람을 넘어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다만 현장을 찾는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당부하고 싶다. 이 곳은 알만한 어느 광신도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굴 안 벽면에는 산신도양각(陽刻)되어 있었고, 다시 오른편 위쪽의 바위 벽면에는 칠성도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지금은 철저히 문드러지져 흔적만 어슴히 남아있다. 보현굴의 감실은 파손되었고 벽면은 시멘트로 덧칠해 발라버려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지금 보현굴은 다만 이곳을 오고가는 등산객들이 비를 피하고 쉬어가는 장소일 뿐이다.

       필자는 이곳이 하루빨리 정성스럽게 보수되고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불교 문화 유적이 훼손되었기에 복원되어야 한다는 뜻 외에도, 앞서 살폈지만 이곳은 서울 산세의 정맥(正脈)에서 풍수적 요처(要處)일 뿐더러, 만다라의 도상(圖像)에 대비하여 보아도 불보살이 안존하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찍이 산천의 곳곳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음을 본 무학대사가 큰 소리로 우리들을 깨우쳐 주고 있음에랴.


    최원석 /성신여대 강사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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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일선사_삼각산 최고 기도도량
    2007년 10월 22일 (월) 14:04:00 관리자

       
      일선사 경내에서 바라본 서울시 전경은 말그대로 일망무제. 이렇게 마음이 시원할 수 있을까?



       절정에 오른 태양이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삼각산[북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현보살이 앉아 계신 봉우리[보현봉]을 향한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길이라곤 하지만, 나무나 돌로 만든 계단이 정연하게 놓인 까닭이다.

       산책로 같은 길을 따라 햇살에 반짝이는 낙엽,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청솔모 등은 ‘삿된 것이 범접할 수 없는 기도처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한 시간 남짓 쉬엄쉬엄 보현봉을 향해 올라가다 샛길과 마주쳤다. 그곳에는 일선사(一禪寺)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일선사는 삼각산 보현봉 바로 아래, 등산로와 인접한 곳에 앉아 있는 절이다. 그래서 불자 등산객들이 한숨 쉬어가고자 빈번하게 들리는 곳이다. 그들은 일선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포대화상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 한 바가지를 마시고, 경내에서 바라보는 ‘서울 전망’을 즐긴다.

       그리고 그들은 “선경과 다를 바 없다”며 “심신(心身)에 붙어 있는 티끌이 날아갈 듯 시원하다”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일까. “비구니 스님 도량인 일선사가 수행․기도처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진스런 웃음으로 불자를 제접하는 포대화상.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 맛은 일품이다.


       일선사는 90년대 말경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한 사찰이지만, 사실 그 역사의 시작에는 도선국사의 손길이 닿았던 ‘천년고찰’이다. 그래서 지금도 삼각산 제일의 수행․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선사 경내 초입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의 본래 사명(寺名)은 ‘보현사(普賢寺)’로, 신라 말 도선(道詵․827~898) 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절(보현사)은 일선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고려시대 탄연(坦然․1070~1159) 국사조선시대 무학(無學․1327~1405) 대사가 각각 중창했다고 한다.

       또한 안내판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됐지만, 1600년대 한양 수비 요충지로 주목받아 복원돼, 함허(涵虛․1376~1431) 대사 등의 고승들이 주석했다'고 게재되어 있었다.

       그 뒤 김만신행이라는 불자가 1940년 지금의 일선사 위치로 절을 옮긴 후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번경했으며, 불교정화 당시 고은(법명 일초) 선생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도선(道詵)‘선’자와 일초(一超)‘일’자를 따, 다시 절 이름을 일선사(一禪寺)로 바꿨다.




      삼각산 보현봉과 일선사 대웅전. 

    대웅전에 봉안된 부처님과 협시보살은 불상조각장 이진형(대전시 무형문화재)의 작품이다.


       지금의 사격은 정덕 스님(현재 해인사 자비원 주석)에 의해 1988년부터 10여년간 새롭게 중창한 모습이다. 이때 대웅전, 약사전, 요사 등이 들어섰는데, 전각 대부분 인간문화재 전흥수 대목장의 작품으로 주변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사찰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이밖에도 산신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1986년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해 전소됐다. 훼불 행위는 산신각에만 머물지 않았다. 절에서 30여미터 떨어진 보현굴(일명 다라니굴) 주변 바위에 새겨진 칠성도산신도 역시 방화로 크게 훼손됐다고 한다.
    존재란 무릇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처럼 작은 도량에 한때 고승 대덕이 주석하고, 한때 조선의 도읍을 지켜내고, 한때 비구니 스님이 원력을 펼치고 한때 이교도의 시샘을 받으며 얽힌 이야기의 무게가 육중하다.

       지금의 일선사에는 가야산문[해인사]의 가풍을 배운 4명의 스님들이 매월 초하루 불자들과 법회를 봉행하며 신심(信心)을 다잡고, 휴일마다 등산객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전법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있다. 


    ▲일선사 | 서울 종로구 평창동 산 6-1번지 | (02)379-8697


    일선사_삼각산 최고 기도도량

    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   불교저널 |




       ***  전재자 주(轉載者  註)  : 불교 관계 저널들은 불교에 국한된 기사를 싣기에 

    불교 전래 전 시기인 우리 삼한 선사(先史)에 대한 기록이 제한 또는 누락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김부식<삼국사기>일연<삼국유사>에는  한성백제시 도읍은 시기에 따라서 

    지금의 강북인 북한산 지역과  강남인 남한산 지역의 위례성에  번갈아 가면서 수도를 정하였고, 

    국가의 중대사나 세자의 책봉과 중요 대신들의 선정시에 삼각산에서 하늘에 고하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를 결정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의 한산주(漢山州) 설치시 소사(小祀)터로 활용되었음이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한 변한 마한 등 삼한시대 초기부터 소도(蘇塗)와 원시신앙 기도터로 활용되어 오던 곳을

    후대에 전래된 불교가 습합하여 국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만복을 빌던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보현굴과 마애칠성상은  삼한시대 초기에 조성된 풍류도(仙道)의 도량(道場)인 동시에 기도터로 비정되며,

    마애칠성상의 복식 등이 당시의 오사모와 복두(幞頭)를 쓴 관료의 모습으로 양각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보현굴의 산신상이라 알려지고 있는 환인상(桓因像)  또는 단군상(檀君像)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앞으로 사학계, 고고학계와 복식 전문가 등 전문가들의 심도있는 연구와 체계적인 고증작업이 필요하다.



    *** 소도(蘇塗)  :  삼한시대의 제의 장소.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통전(通典)』 등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인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서는 소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소도제의가 행해지는 신성 지역이며 별읍이 바로 성역이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읍락의 원시 경계표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신단(神壇)의 의미인 ‘수두’나 높은 지대의 의미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역으로서의 소도는 대마도(對馬島) 등에 일부 전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현존 민속에서는 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신간(神竿)으로 해석하였다.

    소도 ‘솟대’·‘솔대’·‘소줏대’ 등에서 온 말로, 여기의 ‘소’‘길게 또는 곧게 뻗은’이라는 의미이고,‘간(竿)’이므로, 소도입간(立竿)이라 한다. 혹은 소도는 고간(高竿)의 몽고어 발음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현재 우리 민족의 민속에 나타나는 세 종류의 장간(長竿)을 의미하는데, 첫째는 개인의 가정에서 경사나 기도를 드릴 때에 임시로 세우는 신간이요, 둘째는 마을의 동구에 건립하는 ‘솟대’·‘거릿대’·‘수살목(木)’ 등이고, 셋째는 등과자(登科者)가 자기 문전이나 산소 또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화주(華柱)이다.

    또한 이러한 의미의 소도만주 신간이나 몽고오보(鄂博), 인도찰주(刹柱)인타라주(因陀羅柱)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곧 소도는 종교적인 일정한 성역이며, 그 안에 긴 장대를 세웠고 그것을 중심으로 제의가 행해졌다.

    한편, 소도의 의례는 천군이 주재한 것으로 정설화되어 있지만, 소연맹국 안의 별읍소도여서 그 곳에서는 지신(地神)이나 토템 신(totem神) 등 귀신이 숭배되었고,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국읍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백제미술의 특징


       백제는 3세기 중엽 구려계 망명집단이 주축이 되어 세운 성읍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발전했으며, 4세기 중엽경 남쪽의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 고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초기의 수도는 한성漢城이며, 영토는 서울 강동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일대로 추정된다. 475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면서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겼으나 538년에는 금강으로 남하하여 사비泗布(부여)로 천도함으로써 산지(山地)로부터 강원-김제 평야로 진출하여 서해를 이용한 대외활동, 국내 통치의 효과를 더욱 증가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 웅진시대에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불교 및 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7세기 초엽 고구려가 수隋, 당唐과의 전쟁을 하는 틈에 신라의 방위선을 낙동강선으로 후퇴시켰으나,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660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친근성이 엿보이나, 중국 남조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미의식이 깃든 점차 우아하고 섬세한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고 특히 일본의 고대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건축 : 백제의 건축은 공주, 부여, 익산에 주로 남아있는 당시의 절터탑, 고분들을 통해 그 면모를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절터로는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군수리사지軍守里寺止〉 〈금강사지金剛寺止〉 〈동남리폐사지東南里廢寺止〉익산군 금마면金馬面〈미륵사지彌勒寺址〉 등이 있을 뿐이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절터는 대부분 중문(中門)과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을 남북 중심선상의 일직선위에 놓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로서 중국 육조의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배치는 일본의 소위 사천왕사식 가람배치의 근원이 백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은 처음에는 중국식의 목탑을 채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미륵사지의 석탑정림사지의 오층석탑 2기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600년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原樣式)을 이룬 최대의 유구이자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가치가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이른바 백제석탑양식을 완성한 것으로서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백제의 고분은 지역과 특성을 달리하며 분포되어 있다. 한강유역에는 고구려 고분과 유사적석분(積石墳)토광묘(土壙墓) 등이 주류를 이루며 서울 석촌동, 광장동 지역에 산재돼 있다. 웅진시대공주 지방에는 송산리宋山里 1~5호분에서 볼 수 있는 궁륭식 천장의 석실분송산리 6호분, 무녕왕릉과 같은 터널형 전축분(塼築墳)이 나타난다. 부여능산리陵山里 고분군古墳群으로 대표되는 사비시대백제 고분들은 전대의 영향이 이어지고, 특히 이 시대에는 장방형의 현실(玄室)을 화강암이나 대리석의 거대한 판석(板石)으로 조성하는 석실분이 성행했다. 이밖에 서울의 풍납동 토성몽촌토성夢村土城, 공주의 공산성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등이 백제시대의 성지(城址)로 남아 있다.

       불교조각 : 백제의 불교는 384년 동진東晉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를 통한 북조미술보다 남조南朝로부터의 영향이 더 크다. 현존하는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들이다. 6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부여 군수리 출토〈금동보살상〉을 보면, 몸 양쪽으로 지느러미처럼 뻗은 옷자락, 몸의 전반부만 표현되는 정면관 위주의 고식(古式)을 보여준다. 7세기로 들어가면, 반가사유상이 유행하고 마애석불이 출현하며 또한 육조불에서 수당불의 영향이 나타난다.

       공예 : 백제토기원삼국시대 회청색 경질토기의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낙랑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 금강 이남지역에는 가야토기의 요소도 보이고, 5세기에는 중국 육조(六朝)시대 토기의 영향도 보인다. 종류로는 항아리단지가 주류를 이루고 바리, 접시, 대접, 자배기, 잔, 합, 병, 시루 등이 있다. 이밖에 와당백제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웅진시대 이후 만들어졌다. 전돌에는 산수문, 도깨비, 봉황, 구름 등 도교적 요소가 간취되는 문양들이 회화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신구로는 관식이 대표적인 것인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 금꽃을 꽂은 오라관(烏羅冠; 검은 빛 비단으로 만든 관)을 썼고, 관리들은 은꽃을 꽂은 관을 착용하였다고 전한다. 무녕왕릉, 부여 능산리, 남원 척문리 등에서는 육조양식의 당초문이 표현된 금꽃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신촌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을 테두리에 꽂은 외관과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꽂은 내관 양식인데 기본적인 형태가 신라관과 비슷하다.

       회화 : 백제의 회화는 유적과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와 중국 남조, 특히 양梁의 영향을 받으면서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백제의 회화는 공주 송산리 6호분사신도와 신숙도神宿圖, 능산리 고분사신도와 연화문, 비운문飛雲文, 무녕왕릉 출토 주칠두침朱漆頭枕 및 다리받침에 그려진 어룡(魚龍)과 신수(神獸)문양 정도이며,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표현이 동적이고 날카로운 고구려의 회화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나 안정감이 있고 유연한 필치에서 백제 고유의 감각을 볼 수 있다. 무녕왕릉 출토 은탁잔 뚜껑의 산악문(山岳文)은 고구려 벽화의 삼산형의 산악도가 이미 6세기 전반 백제에서 유행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규암리 출토 산수문전山水文塼(7세기 전반)은 부조형태로 도안화된 공예의 수준이면서도, 나무가 덮인 삼산형의 부드러운 토산(土山)과 암산(岩山)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배치, 그리고 근경의 수면과 하늘의 구름, 누각과 승려의 표현 등 산수화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 산수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양서梁書》에는 백제와 양과의 회화교류를 나타내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작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제의 미술은 일본에 전해져 그곳 문화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백가白加아좌태자阿佐太子 등이 6세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로 알려져 있고, 인사라야因斯羅我하성河成 백제계의 화가로 이름이 전해진다. 특히 아좌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성덕태자급이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모사본은 백제시대 인물화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2006.05.23

    200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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