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ㅣ산노래 작곡가 이정훈] 치과의사 이정훈씨 '설악가' 남기고 영원히 떠나다

2018. 11. 23. 09:29산 이야기



[추모ㅣ산노래 작곡가 이정훈] 치과의사 이정훈씨 '설악가' 남기고 영원히 떠나

입력 : 2014.07.08 13:08 [537호] 2014.07

'즐거운 산행길' 작사·작곡 등 주옥같은 산노래 만들어

   산노래 중에서 산악인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고 심금을 울렸던 ‘설악가’를 작사·작곡한 이정훈씨가 지난 5월 27일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굽이쳐 흰띠 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 있어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아름다우면서 조금은 애절한 ‘설악가’를 부르며 꿈같은 설악산행을 즐기던 시절이 눈에 선한데, 불귀의 객이 돼서 안타까운 여운만 이생에 남기고 ‘설악가’ 같이 ‘내 다시 오리니’를 기약하며 훌쩍 사라졌다.

그는 가는 길에도 끝까지 산악인이었다. 평소 즐겨 입던 등산복과 등산장비, 배낭 등 수십여 점을 후배들을 위해 한국대학산악연맹에 기증했다. 그의 긴 산악인생과 삶은 그로써 마침표를 찍었고, 산악계는 그가 남긴 산노래와 등산장비라는 흔적만 간직하게 됐다.

2006년 첫 암 수술 후 조금 차도를 보일 때 전두성씨(왼쪽)와 함께 산노래를 부르고 있다.
2006년 첫 암 수술 후 조금 차도를 보일 때 전두성씨(왼쪽)와 함께 산노래를 부르고 있다. / 사진 열린캠프 제공
중동고산악회·고령산악회 등 동시 활동

그의 산악인생은 중동고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965년 중동고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입학했다. 그는 3년 내내 산악생활을 즐겼지만 연세대 천문기상학과에 거뜬히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의사였다. 일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강권으로 다시 공부해서 경희대 치과대학에 입학, 1974년 졸업했다. 이후 치과의사 생활을 하면서 산악활동을 겸했다.

그는 중동고를 졸업하자마자 1968년 한국고령산악회에 가입했다. 1960년대 후반이 그가 산악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시기였다. ‘설악가’도 이 시기에 작사 작곡했다. 당시 그가 밝힌 설악가 작사 작곡 배경이다.

‘달빛 고요한 천불동을 홀로 걷다가 한국산악회 10동지가 죽음을 맞은 죽음의 계곡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한 격정이 끓어올랐고, 달빛에 반사되는 설릉을 바라보는 순간 즉흥적인 감흥으로 흥얼대다 보니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때의 감흥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 흰 띠를 두른 듯한 달빛 아래의 설릉을 떠올리며, 기타로 대강 선율을 그려본 후 피아노로 음을 확인하며 악보를 완성했다.’

그가 속한 고령산악회 후배인 지훈구씨는 “원래 1절은 겨울, 2절은 봄을 묘사한 데 이어 여름과 가을까지 4절까지 만들었으나 지금은 2절까지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인들 얘기로는 당시 산악계 선후배들이 너무 길게 가면 늘어지니 2절로 끝내는 것이 좋다고 해서 본인도 동의했다고 전한다.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는 이뿐만이 아니다. ‘즐거운 산행길’이란 노래도 있다. ‘즐거운 산행길’은 원래 그가 속한 고령산악회의 회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활기차고 아름다운 곡으로 산악인들 사이에 널리 불리게 되자, 당시 요들송으로 유명한 가수 김홍철이 자신의 음반에 취입하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김홍철은 진부령에 있는 알프스산장에서 이정훈씨의 노래를 직접 듣고 그의 양해를 얻어 음반에 취입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이미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구전되고 있을 때였다.

사실 산노래는 이정훈씨 이전과 이후 세대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전에는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지낸 고 김정태씨의 민요풍과 그에 조금 변형된 형태의 곡을 만들었고, 이어 경기고 라테르네 출신인 양천종씨가 ‘산으로, 또 산으로’, ‘스키어의 노래’ 등을 작곡하면서 산악인들에게 산노래를 알렸다. 이들이 한국 ‘산노래 1세대’인 셈이다.

1960년대 후반 들어 한국 산노래 2세대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창작곡들을 활발히 선보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정훈, 백경호, 김태호씨 등이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전두성, 정규현, 류문환, 이영수, 신현대씨 등이 계보를 잇는다. 현재까지 활발히 산노래 창작과 보급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전두성, 정규현, 신현대, 조일민씨 등이다. 그중에서 그가 작곡한 ‘설악가’와 ‘즐거운 산행길’은 산꾼들 사이에 가장 많이 불린 애창곡이다.

그의 작곡에 힘입어 그가 속한 중동고 산악부는 산노래 작곡의 산실이기도 했다. 후배들이 잇달아 산노래 작곡에 동참하면서 많은 곡을 쏟아내기도 했다. 61회인 이정훈씨에 이어 에베레스트 등반대원이었던 도창호씨(63회)의 ‘토왕골 찬가’, 조남일씨와 신명호씨(64회)의 ‘천불동 찬가’, 이동훈씨(65회)의 ‘정상가’ 등 10여 곡이나 발표했다. 이들은 산에서의 활동이 시적, 음악적 감성을 자극한다고 했다. 그만큼 산악활동을 많이 했다는 얘기였다.

그의 치과의사 생활과 산악생활은 순풍에 돛단 듯 활발했다. 많은 선후배들이 따랐고, 산악계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 후두암이 발병하면서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투병생활 중에서도 간간이 소식을 전하며 산악활동을 했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산노래 작곡가 이정훈씨 장례식 모습
산노래 ‘설악가’의 작곡가 이정훈씨가 지난 5월 27일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 모습.

투병 중이던 2006년 10월, 그가 남긴 글이다.

‘얼마 전 암 수술을 하고 나서 집안 식구, 친척, 친지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성원을 받았다. 수술 후 나는 내 자신이 해결해야 할 원초적인 문제로 무척 심약해져 있었다. (중략) 내가 걸린 암의 특성상 전이속도가 좀 느려서 이삼 년은 버틴다고 했는데, 벌써 일 년 사 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에게 문병을 오셨던 산악 선배 강호기 형께서 암으로 돌아가셨고, 문병 와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친구 하나가 교통사고로 먼저 갔다. 세상사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추석이 되니 내년 추석은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은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할 텐데…. 내가 수술 후 확실하게 바뀐 것은 꽃을 바라보아도 매우 예뻐하고, 모든 자연현상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공원에 산책하러 가면 돌멩이나 풀뿌리에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당시 마음이 여린 상태라 매우 감상적으로 일상을 적어 놓았다.

2010년 투병 중 대한민국 산악문화상 수상

산악계에 끼친 이정훈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9월 제11회 대한민국 산악상에서 산악문화상을 수상했다. 재발한 암으로 극심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여서 그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에 앞서 그해 7월에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의 제안으로 ‘이정훈 설악가 헌정 음악회’를 개최해 그의 공적을 기리는 행사를 벌였다. 당시 건강상태가 극도로 나빠서 그는 다른 사람의 면회를 아예 거절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이인정 회장과 고령산악회 송광진 회장, 이강호, 이해동씨가 그의 집을 직접 방문해 허락 받아 성사됐다. 이게 그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었다. 당시 그는 식도를 거의 잘라내 턱이 없어질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이제 산을 좋아했던, 산이 좋아 산노래를 남긴 그의 육신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 산노래는 영원히 산악인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저 멀리 능선 위에~/ 철쭉꽃 필 적에~/ 너와 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 길/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설악가 2절)
‘내 마음 울적해지면 산으로 올라가요/ 산등성이를 건너서 계곡 깊숙이/ 야~호 야~호 야~호 야야야 야~호/ 아름다운 골짜기와 맑은 시냇물/ 봉우리에 올라서면 야호 메아리~/ 야~호 야~호 야~호 야야야 야~호.’ (즐거운 산행길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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