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6 ~ 20>>

2018. 11. 19. 09:43잡주머니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6> 법 앞에 평등한 로마법 정신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2-01 17:41:26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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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생활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는 법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TV 사극을 보면 죄를 문초할 때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며 고문한다. 죄를 짓지 않았어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대부분 없는 죄도 있다고 자백할 수밖에 없다. 

 

   고대 사회에서 법을 만든다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스는 철학과 예술, 로마는 법”이라고 할 정도로 로마는 법을 만들고 법치주의를 실천한 좋은 모델이다. 로마의 법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발전되었을까? 

 

   로마 최초의 성문법기원전 449년에 제정된 ‘12표법’이다. 필립 마티작 『로마 공화정』에서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로마의 법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문화하기로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이 합의했다”며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과 내용을 소개한다. 법이 불문율로 되어 있으면 법을 말로 전하는 역할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 계급이 유리하다. 평민들의 힘이 강화되면서 평민들은 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했다. 법을 글로 표현하면 누구나 읽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평민의 권리가 신장되는 것은 흔히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에 로마의 지도층은 법치국가 선진국인 아테네에 시찰단을 1년간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시찰단의 보고를 토대로 ‘10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12표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을 동판에 새겨 포로 로마노 광장 한쪽에 발표했다. 이 법은 모두 12조였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불렀는데, 돈과 재산권, 가족과 상속, 공중의 행동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이 발표되었을 때 평민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귀족과 평민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법을 개정할 때 현행법을 고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법조문을 새로 제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므로 신법에 어긋나는 구법은 자동적으로 효력을 상실했다. 예를 들면 12표법이 발표된 지 4년 후에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후 로마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로마는 필요한 법을 제정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설명한 기원전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 법이다. 이 법을 통해 평민도 공화국 정부의 모든 요직에 진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이 갈등을 해소하고 구성원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법 제정은 필수적이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은 계속해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법을 통해 귀족과 평민은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고, 이를 기반으로 도시국가를 벗어나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로 나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귀족과 평민이 혼연일체가 되었기에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떠오를 수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로 등장하자 이해관계가 다른 주변 동맹시와의 갈등이 생겼다. 로마 시민권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대다수의 동맹시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동맹시와 로마 사이에 시민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기원전 91년에 터진 동맹시전쟁이다. 전쟁의 의미를 수용하여 로마는 기원전 90년 법을 제정하여 이탈리아반도의 동맹시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반도는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취득하여 명실공히 통일국가가 되었다. 이탈리아반도의 모든 자유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시민법과 만민법이 융합되었다. 시민법은 민족 내의 시민 상호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이고, 만민법은 민족과 민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법이기 때문이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 시민법과 만민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법이라는 것은 로마 건국 초기에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었던 시민법과 로마가 지배했던 이민족에 적용되었던 만민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성문화된 법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높여 로마 시민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함으로써 세계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가 제국을 건설했더라도 법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주를 관리할 때 로마법이 공통항이 되어 소통할 수 있었기에 로마가 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가 기원전에 법을 제정하고, 법의 이름은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고, 변호사가 있어서 법정에서 변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 법을 존중하는 사회가 형성되었기에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고 문화가 다른 나라에도 전파될 수 있었다. 

 

   로마가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전환한 뒤에는 로마법은 더욱 발전했다. 세계법이 되었다. 3세기 무렵까지 로마에는 위대한 법학자가 많이 탄생하여 법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동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로마법대전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그 후 로마법은 중세 유럽으로 계승되어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시민법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법은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법학자인 예링 “중세는 로마법의 계승에 의해 법을 통일했다”며 로마법이 후세에 미친 영향력을 평가했다. 

 

   로마법 역시 로마인의 개방성의 산물이다. 법이 없으면 민족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잣대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의식이 체화될 수 있었다. 로마의 법체계는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공통의 언어로서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몸젠은 『몸젠의 로마사』에서 로마 공동체를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 시민은 자유를 누리는 한 법에 복종할 줄 알았으며, 모든 미신을 단호히 거부했다. 법 앞에서, 그리고 그들 상호간에 무조건 평등이 보장되었으며, 외국에 대해서도 관대하고 개방적이었다. 이런 국가 체계는 만들어지거나 차용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 가운데 그들과 함께 성장한 것이었다.”






기사입력 2018-02-01 17:41:26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7> 노블레스 오블리주, 성장의 원동력이 되다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2-08 16:55:12 최종수정 2018-02-08 17:04:3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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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로마의 성공 요인을 논의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고, 리더십을 설명할 때도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졌다. 지도자가 평민과는 달리,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부를 사회에 환원할 때 존경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앞에서 소개한 많은 사례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이 출범할 때 브루투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되었다. 공화정을 반대하는 젊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추방된 왕을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자 음모에 가담한 두 아들을 냉정하게 신문한 후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최고 권력자가 아들을 법대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한 공화정 건설에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브루투스는 해외로 추방된 왕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자 전선으로 달려가 맨 앞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은 전쟁터에서 항상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공화정 500년 동안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집정관은 수없이 많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리더십 전통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차 포에니전쟁한니발과 싸운 17년 동안 최전선에 나가 싸운 집정관 25명 중 전사자 수만 해도 8명에 달했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귀족들이 수도 없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리더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지도자가 특권을 양보하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한 덕목이다. 귀족과 평민은 대립과 갈등을 겪은 후에 서로 타협하여 새로운 법을 탄생시키곤 했다. 기원전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 법은 모든 공직을 평민층에 개방했다.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은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국법으로 삼는다고 결정하여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로마가 가진 또 하나의 전통은 유력자가 공공건물을 자비로 건축하여 헌납함으로써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한 점이다. 전쟁터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될 정도의 인물은 공공건물을 지어서 국가에 기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로마의 공공건물은 이렇게 지어진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포로 로마노 북서쪽에 있는 아이밀리우스 회당은 기원전 179년에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를 물리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기증한 것이다. 그 맞은편에 있는 셈프로니우스 회당은 기원전 170년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기증했다. 기원전 80년 독재자 술라도 공문서 보관소인 타불라리움을 카피톨리노 언덕에 건설했다. 이처럼 유력자가 공공건물을 기증하는 전통은 공화정, 제정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로마 사회를 하나로 통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최초의 간선도로인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가 사유재산을 들여 건설한 도로다. 공화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와 후임 황제유력자에게도 전승되어 로마 지도자의 훌륭한 덕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 스스로 솔선수범했고 유력자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내가 물려받은 로마는 벽돌로 되어 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사재를 털어 공공건물을 지어 희사하는 데 앞장섰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경기장으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운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사재를 내놓아 공공건물을 건설하여 희사한 리더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무엇이었을까? 건물의 명칭에 가문의 이름을 새기거나 송덕비에 이름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지도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통해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기에 로마 시민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로마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 




기사입력 2018-02-08 16:55:12 최종수정 2018-02-08 17:04:33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8>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살생부 대결 (기원전 107~…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2-13 16:49:32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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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쿠스 형제(기원전 134~122)의 개혁 실패로, 로마 역사는 공화정 말기의 진영 싸움과 내란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호민관을 중심으로 한 민중파가 조직화된 양상으로 싸움이 전개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던 개혁의 바통은 민중파의 기수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

   마리우스이탈리아 중부 아르피눔의 부유한 기사 계급 가문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성공하여 로마의 정치 지도자로 등장했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당선된 이후 총 7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했다. 당시에 한번 집정관을 지내면 10년이 경과해야 다시 집정관에 출마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국가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마리우스가 그만큼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북아프리카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족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 같은 성취 덕분에 귀족이 아닌 시민이면서도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명문 가문과 혼인하여 귀족과의 유대 관계도 강화해나갔다. 마리우스의 부인이 훗날 등장하는 카이사르의 고모다. 

 

   마리우스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로마군의 모집 방법을 징집제뿐만 아니라 지원제를 도입하여 보완했다. 과거에는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은 아예 군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무산계급도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마리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군사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을 콜린 매컬로『로마의 일인자』에서 살펴보자. 

 

   “이제 이탈리아에는 최하층민이 바닥났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전부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죠. 원로원 의원 여러분, 이탈리아의 최하층민에게는 농지에서 노예로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임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형태의 군대를 조직할 수 없습니다. 군에 복무할 만큼 재산을 가진 남자들은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리고, 적당한 나이의 남자들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군에 복무할 수 있는 것은 최하층민뿐입니다.”

 

   마리우스는 군사 재원의 충원이 어려운 때 군사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군사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특히 용병의 고용 관계국가가 아닌 장군과 맺게 함으로써 장군들은 경쟁적으로 우수한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에서 직업으로 바뀌었다. 장군과 군사가 피호 관계가 되어 장군은 파트로네스가 되고 병사는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된 것이다. 

 

   동시에 군사 제도 개혁의 문제점도 나타났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불안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지휘관직의 가치가 높아졌고, 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해외에서 군사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유혹도 커졌다. 더 불길한 것은 실전 경험이 많고 개인적으로 충직한 군대의 뒷받침을 받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령관은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내전을 일으켜서라도 정적들을 누르고 일어설 만한 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마리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한 사람이 술라다. 그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속하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다. 하지만 쾌활한 성격에 대인관계가 좋았고, 주변 여인들을 통해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정계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집정관 마리우스의 부하로 아프리카 전쟁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술라는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정치 노선이 달라 결별하고 원로원파를 대변하는 정적으로 변했다. 기원전 82년, 술라는 민중파를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하자 살생부를 만들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90명의 원로원 의원, 15명의 전직 집정관, 2,600명의 기사 계급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 살생부에는 18세의 젊은이 카이사르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민중파의 대부인 마리우스의 처조카이며 킨나의 사위라는 이유로 인해 제거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라의 부하들이 카이사르가 아버지도 없는 집안의 후계자로서, 아직 나이가 젊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술라가 측근들에게 했던 말을 수에토니우스『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이렇게 전한다. 

   “기억하라. 그대들이 이토록 간절히 살려내고자 하는 이 젊은이가 언젠가는 우리가 진심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귀족 정치를 무너뜨릴 것이다. 카이사르 안에 여럿의 마리우스가 보인다.” 

 

   기원전 81년, 술라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어 전권을 가지고 호민관 및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 지배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각종의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술라는 기원전 79년 돌연 독재관을 사임하고 은퇴하여 이듬해 죽었다. 

 

   공화정 말기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두 주역 마리우스와 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마리우스는 기사계급 출신이고 술라는 귀족 출신이다. 또한 마리우스는 기사계급이라 경제력이 풍부했고 술라는 귀족이지만 돈이 없었다. 로마에서 정치로 성공하려면 재력이 중요하다. 젊었을 때 돈이 없어 고민하는 술라의 모습을 콜린 매컬로 『로마의 일인자』에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 내년에 감찰관 심사가 열리는 포로 로마노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연 1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의 화폐 단위)의 수입을 내는 자산을 가졌다고 입증할 수만 있다면! 이는 원로원 의원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재산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연 4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수입이라도! 이는 기사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자산이 전혀 없었다.” 

 

   로마 공화정의 후기 역사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술라를 거치면서 민중파가 권력을 잡으면 원로원파를 숙청하고 원로원파가 권력을 잡으면 민중파를 숙청하는 식으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혼미한 역사였다. 이와 같은 살생부로 이어지는 피의 보복을 중단해야 되겠다고 나선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 



기사입력 2018-02-13 16:49:32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9> 운명을 바꾼 『갈리아 전쟁기』 (기원전 58~51…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2-22 16:07:52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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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카이사르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역설적인 가정을 해보자.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카이사르가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갈리아전쟁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로마 시민 입장에서 갈리아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북방의 국경선에 접해 있는 까닭에 국가 안보상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국방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갈리아는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적임지였다.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는 이미 지중해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여 제해권을 장악했고, 소아시아와 동방을 정복하여 명성을 떨친 당대의 영웅이었다. 폼페이우스와 비교할 때 공적이 적었던 카이사르가 자신의 공적을 세울 목표물로 서북쪽의 갈리아 지역을 선택한 것은 전략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기』 첫 페이지에서 “갈리아족 중에서는 헬베티족이 가장 용감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게르만족을 물리치거나, 적의 영토로 쳐들어가 거의 날마다 게르만족과 교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방어 작전으로 시작된 갈리아 진입은 갈리아 지역의 여러 부족과 맞대결하면서 갈리아 지역 전체의 정복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가장 용맹하고 전투력이 강한 헬베티족을 제압하고, 다수의 부족을 회유하거나 무력으로써 전 지역을 평정해나갔다.

 

   그런데 갈리아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무려 8년이나 걸렸다. 왜 그랬을까? 보이지 않는 갈리아인들의 저항 정신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에게 최대의 위기의 순간은 전쟁의 막판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갈리아전쟁 7년째인 기원전 52년이었다. 갈리아 한 부족의 왕족 출신인 베르킨게토릭스가 나타나 탁월한 리더십을 보이며 로마에 대한 갈리아인들의 반감과 저항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갈리아인들에게 자유의 쟁취를 호소하며 놀라운 리더십으로 여러 부족을 설득하여 대다수 갈리아 부족의 군사력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에게 최대의 위기이자 도전이었다. 최후의 결전은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성채 도시 알레시아에서 일어났기에 ‘알레시아전투’로 이름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5만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성안 8만 명, 성 밖 26만 명을 합하여 무려 34만 명이나 되는 적을 무찔렀다. 앞뒤로 포위된 상태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역사적인 전투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군들은 창을 던져버리고 칼로 싸웠다. 갑자기 배후에 아군 기병대가 나타나고 더 많은 대대가 앞에서 다가오자 적군은 등을 돌려 도주했다. 그러자 아군 기병대가 추격하여 도주하는 적군을 도륙했다. 그 많던 군사들 가운데 무사히 진지로 돌아간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도시 안에 포위되어 있던 자들은 전우들이 도주하다가 도륙당하는 것을 보고 승산이 없다고 보고 방어 시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갈리아족이 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원군으로 와 있던 자들은 곧바로 진지를 떠났다.”

 

   갈리아의 젊은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는 최후의 결전인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항복함으로써 로마군을 축출하려던 갈리아인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는 후일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끝내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려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뛰어난 인재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인의 후손인 프랑스인들에게 특별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가 추구하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열망의 가치가 프랑스인들의 자유 정신과 맥이 닿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카이사르가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남다른 비책은 소통이었다. 부하들이 막연하게 적을 두려워할 때, 그는 연설을 통해 그 두려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규명하여 그 허상을 일깨워주었다. 나아가 로마군이 용감하게 난관을 극복한 사례를 상기시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용기를 북돋웠다.

 

   또 아군이 밀리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자신이 병사의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선으로 나섰고, 주변의 백인대장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을 독려했다. 카이사르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렸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런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기에 전투를 벌일 때마다 카이사르의 상징이 된 진홍색 망토가 휘날리면 장병의 사기가 올랐다.

 

   플루타르코스가 카이사르에 대해카이사르는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 호감을 사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지금껏 전투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군인들도 카이사르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저항할 수 없는 불패의 용사가 되었으며, 어떤 위험이든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카이사르는 첫해부터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기록해서 매년 본국에 보냈다. 현지의 출장 보고서인 셈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 기원전 52년에 『갈리아 전쟁기』 7권을 모아서 한 번에 발간했다.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 서부, 스위스)에서 벌어진 전투와 정복 상황,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적었다. 전쟁을 직접 수행한 장수가 실제 작전 상황과 전쟁 수행 과정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다. 이 책은 최고의 전쟁 회고록이고, 보고문학의 백미이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기』는 출판되자마자 당시 로마인들에게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모았다. 용감하지만 야만적인 갈리아인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게르만인에게서 용맹스럽게 로마를 구해낸 이야기, 알지 못했던 나라 브리타니아(영국)에 대한 호기심, 이국적인 나라와 신, 로마 정신의 승리담 등이 로마 시민들을 매혹시켰다. 로마 대중은 이 책에 푹 빠져 로마 시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기사입력 2018-02-22 16:07:52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0>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3-01 17:0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 만약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로마 근처에 있는 모든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전직 집정관은 공화국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원전 49년 1월 7일에 발동된 ‘원로원 최종 결의’의 내용이다. 원로원 최종 결의는 국가가 긴급한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할 경우 공포되는 비상사태 선언이다. 비상사태는 오늘날 계엄령과 같은 것으로, 원로원의 최종 결의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국가의 적인 반역자로 규정되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당시 갈리아 총독인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카이사르 반대파들이 칼을 빼든 것이다. 이미 카이사르의 후임도 결정되었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돌아와 직접 집정관 후보로 등록할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명령에 복종하여 귀국하면 사실상 그에게는 사형선고였고, 귀국하지 않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병사들을 집합시켜 자신의 반대파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부당한 행위에 대해 낱낱이 설명했다. 카이사르 『내전기』에서 원로원의 최종 결의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발동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카이사르의 명성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본인은 9년 동안 그대들의 총사령관이었다. 로마를 위한 그대들의 노고는 본인의 지휘와 하늘의 도움으로 빛나는 전과를 만들어냈다. 그대들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전 지역을 평정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카이사르의 명성을 지켜주고 적들의 공격을 물리쳐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연설을 마친 후 카이사르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카이사르의 운명과 함께 로마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가 결단을 내리기까지에는 많은 고뇌의 시간들이 있었다. 8년 동안 치른 갈리아전쟁은 이민족과의 싸움이었기에 명분이 있고 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싸움의 대상은 동족이었고, 이는 내전을 의미한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어도 원로원의 허가가 없으면 국경인 북쪽의 루비콘 강과 남쪽의 브린디시에서 군대를 이끌고 국내에 들어올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카이사르가 칼을 겨누는 대상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의원들, 로마 병사들이었다. 폼페이우스는 3두정치를 이끌었던 정치적 파트너였고, 자신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사별하긴 했지만 한때 사위이기도 했다. 원로원 의원은 카이사르의 동료이며, 로마 병사들은 얼마 전까지 갈리아전쟁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부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공화정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는 로마를 빠져나가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추적하여 남쪽의 국경선인 브린디시까지 내려갔다. 원로원 의원들은 폼페이우스를 믿고 원로원 최종 결의를 내렸지만, 폼페이우스는 우왕좌왕하면서 카이사르에게 기선을 제압당했다. 이때 공화정의 신봉자인 카토시칠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군대가 시칠리아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폼페이우스에게 배신당했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때에 불필요한 전쟁을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원로원의 여러 의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데도 전쟁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카이사르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교묘한 철수 작전과 기발한 전략으로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군은 5만 4,000명인 반면 카이사르군은 2만 3,000명에 불과했다. 절반도 안 되는 전력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내전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이집트 왕의 고문들은 상륙 허가를 해주었으나, 한 로마인 변절자가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사흘 후 카이사르가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선물로 제시하자,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리면서 정중히 매장하도록 지시하고 살해 가담자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기원전 48년 가을, 카이사르알렉산드리아에 머루를 때 이집트의 권좌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이 쥐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혹적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그녀에게 독단적으로 권좌를 돌려주었다. 남동생의 고문들은 국왕 군대를 동원하여 카이사르에게 도전했지만, 카이사르는 도착한 원군과 합류하여 이집트 군대를 격파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숱한 염문을 남긴 채 기원전 47년 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떠났다. 

 

   카이사르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지나 폰투스로 갔다. 그는 젤라(터키의 질레)에서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전투가 끝난 뒤 로마 원로원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간단히 보고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아프리카로 건너가 탑수스(오늘날의 튀니지)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류병들을 섬멸했다. 아프리카 탑수스에서 승리를 거둔 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로마에 도착한 후 오랫동안 기다려온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은 치렀으나 또 한 차례의 원정이 남아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섹스투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도피한 라비에누스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문다에서 폼페이우스파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했다. 문다 회전은 카이사르가 치렀던 가장 힘겨운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기사입력 2018-03-01 1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