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1 ~ 25>

2018. 11. 19. 16:42잡주머니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1> 1년 365일의 태양력 달력을 만들다 (기원전 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3-08 17:40:00 최종수정 2018-03-15 16:29:51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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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가 사용한 달력왕정시대 2대 왕 누마가 만든 태음력으로, 1년이 355일이었다. 남는 날수는 몇 년마다 한 달을 늘리는 방법으로 조정했다. 이렇게 조정하다 보니 때로는 달력상의 계절과 실제 계절 사이에 3개월 가깝게 차이가 나기도 했다. 필립 프리먼『카이사르』에서 “어느 해는 추수 감사제가 곡식이 여물기도 전에 시작되었고, 카이사르가 내전을 벌일 당시에는 미처 날짜를 추가하지 않아 계절과 달력이 두 달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다”면서 불편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정확한 달력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로마의 속주에서도 동일한 달력을 사용하면 생활 리듬이 어디에서나 같아지리라고 믿었다. “로마 세계는 문화는 다양해도 문명은 공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카이사르에게 달력을 공유하는 것은 문명 통합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달력을 태양력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력 개정 작업은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알게 된 이집트의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에게 맡겼다. 로마에 온 과학자들은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해냈다. 이렇게 해서 365일은 1년이 되고, 1년은 열두 달로 나뉘었다. 1년마다 생기는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는 방식으로 윤년을 만들어 2월이 29일이 되도록 했다. 마침내 기원전 45년,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태양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렸다. 

 

   율리우스력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 1582년에 다시 개량하여 ‘그레고리우스력’이 탄생할 때까지 무려 1,600년 이상 지중해 세계와 유럽 및 중근동에서 사용되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달력을 개량한 것은 지구의 공전에 정확하게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력이 1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한 것과 비교할 때 11분 14초의 오차밖에 생기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력은 시간만 정확해졌을 뿐 달력의 개념은 율리우스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 카이사르 때 만들어졌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로마 세계의 통합을 위해 통화를 개혁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 전체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어디서나 통용이 가능한 기축통화를 구상했다. 이를 위해 국립조폐소를 신설했다. 국립조폐소는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권을 넘겨받아 금화, 은화, 동화를 주조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민족이 자신들의 화폐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로마 화폐와 지방 화폐를 병용하도록 했다. 이러다 보니 환전상이 생겼다. 

 

   카이사르 해방노예에게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국립조폐소의 소장에 해당되는 ‘조폐 3인 위원회초대 위원은 3명 모두 카이사르 집안에서 경제통으로 소문난 노예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노예에서 해방노예로 신분을 바꾼 후 임명했다. 이로써 해방노예가 행정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해방노예가 지방의회 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자 행정 분야에 대거 등용되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교사와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수도 로마에서 교양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와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에게 일괄적으로 시민권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종, 피부색, 민족, 종교도 따지지 않고 로마에서 교사나 의사로 일하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항소권배심원 문제는 로마의 사법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셈프로니우스 법’항소권을 보장한 법이다. 즉, 어떤 죄를 지었든 재판을 하지 않고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했다. 카이사르는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킴으로써 원로원 최종 결의라는 무기를 원로원으로부터 회수해버렸다. 카이사르 자신이 원로원 최종 결의의 희생자였기에 그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제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누구든지 재판도 받지 않고 항소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사형당하는 일은 없었다. 

 

   이 법의 혜택을 본 대표적인 사람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상소해서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재판 받으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가이사(카이사르)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나아가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배심원 구성이 중요하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배심원 구성 비율 문제를 가지고 원로원파와 민중파가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카이사르는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며 권력에 따라 바뀌는 배심원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안으로 배심원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정했다. 자격 요건은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로마 시민이다. 이 정도면 중산층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 노예였던 사람도 배심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배심원 구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제기된 계급투쟁을 마무리했다. 

카이사르로마법의 집대성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은 성문법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 많은 법이 만들어졌지만, 오랫동안 쓰이지 않으면 잊혀지는 법도 많았다. 제정된 법을 집대성해놓으면 만들어진 법이 사장되지 않고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로마법 역시 로마 세계를 통치하는 데 기준이 되기 때문에 로마법을 집대성할 필요가 있었다. 

 

   광활한 제국다인종·다민족·다문화·다종교·다언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모두에 통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보급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제국을 관통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로마 달력, 로마 통화, 로마법, 로마가도를 구상하고 실천해 나갔다. 

 




기사입력 2018-03-08 17:40:00 최종수정 2018-03-15 16:29:51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2> 퍼주는 복지에서 엄격한 복지로 전환하다 (기원전 …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3-15 16:31:21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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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이슈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기반민중파였지만,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위한 편협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국가 전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면서 정책을 펼쳐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지 정책이다. 

 

   기원전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곡물법을 만들어 국가가 밀을 사들인 후 빈민층에 곡물을 싼값으로 배급하는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 원로원파술라는 이 제도를 폐지했으나, 아우렐리우스 코타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 카이사르 당시에도 곡물법을 둘러싸고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원로원파 카토빈민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배급 인구의 상한선을 철폐하고 밀을 값싸게 공급했다. 이에 자극받은 민중파 출신 호민관 클로디우스빈민층에게 밀을 무상으로 공급하여 가난한 유권자들의 표를 겨냥했다. 원로원파와 민중파 사이에 복지 경쟁이 불붙자, 공짜로 밀을 배급받는 사람의 숫자가 32만 명까지 증가하면서 국가의 재정 압박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필립 프리먼 『카이사르』에서 카이사르가 도시의 총인구조사를 실시한 내용을 소개한다. 카이사르는 정확한 조사를 위해 집집마다 조사원을 파견했다. 인구조사가 모두 끝나자, 도시에서 식량 배급을 받을 사람은 32만 명이 아니라 절반 수준인 15만 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짜로 배급받는 수혜자수를 15만 명으로 줄이고, 이를 상한선으로 정하고 증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정한 자격 심사를 위해 이 일만 전담하는 2명의 관리관을 두었다. 

 

   카이사르“복지는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곡물법을 정치 투쟁에서 지키고 진정한 복지를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민중파의 이익에 끌려가지 않고 원칙을 가지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응했다. 


 

   실업 문제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실업 문제는 복지로 해결할 수 없으며, 일자리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카이사르농지법을 개혁한 것도 실업 대책의 일환이었다. 로마 군단은 실업 문제를 흡수하는 좋은 창구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이사르는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속주에 신도시를 개발하여 실업자나 제대 군인을 이주시켰다. 그러면 이탈리아 안에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로 골치 아플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로마 시민인 이들이 속주 전역에 이주하여 정착하면 로마화의 선봉에 설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심지어 카이사르포에니전쟁이 끝난 후 로마가 소금을 뿌려서 폐허로 만들었던 카르타고코린트까지도 다시 개발하여 도시로 회생시켰다. 카르타고 북아프리카의 수도였고, 코린트는 그리스의 수도였다. 카이사르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도시를 과거의 감정만으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46년에 멸망한 뒤 폐허가 되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트는 100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카이사르가 카르타고와 코린트를 포함하여 속주에 이주시킨 로마인은 세대주 기준으로 8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에 수도 로마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연구자들은 여자, 어린이, 노예, 외국인까지 합쳐서 약 100만 명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00만 명을 수용한 로마에는 치안과 교통, 청소와 상하수도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어떻게 대처했을까?

 

   카이사르는 수도 경찰을 창설하여 치안 유지에 정성을 쏟았다. 치안 유지는 세계의 수도가 된 로마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통은 어떠했을까? 2,000여 년 전에 100만 명이라면 정말 많은 인구였으므로, 도심인 포로 로마노나 시장이 들어서는 테베레 강 일대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교통규제가 뒤따랐다. 낮에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들은 기혼 부인과 여사제로 제한한 것이다. 짐수레도 교통 혼잡의 주범이기 때문에 야간에만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카이사르도 시내에서는 수레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의 수도인 까닭에 도로포장, 상하수도 등에 있어서 기능뿐만 아니라 운영 면에서도 쾌적함을 갖추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재설계했다. 시오노 나나미소아시아 태생인 인문지리학의 선구자 스트라보를 인용하여 수도 로마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인은 아름답고 안전하며 수출입에 필요한 항구까지 갖춘 도시를 건설하면, 그것으로 도시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소홀히 한 것까지 정비하지 않으면 도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도로포장과 상하수도 설비 등이 그렇다. 특히 로마인의 하수도는 훌륭해서 로마 시가지의 지하에 그물처럼 뻗어 있다. 아치 모양의 석조 하수도이기 때문에 하수도 위는 그대로 도로로 쓰이고 있다. 도시 전체에서 나오는 하수는 모두 테베레 강으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도로포장도 선진화되어 있어서, 시내 도로만이 아니라 모든 지방을 연결하는 가도까지 포장되어 있다. 로마가도는 언덕을 깎아내어 지형의 높낮이를 고르게 만든 뒤에 건설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마가도는 평탄하기 때문에 짐수레에 짐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다. 상수도 설비도 완벽해서 어느 집이든 음료수가 부족하지 않다. 저수조를 갖추고 있는 집도 많고, 개중에는 온종일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까지 갖춘 집도 있다.”

 

   카이사르 복지 정책, 실업 대책, 치안 유지, 상하수도 관리 등 사회복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카이사르가 자신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민중파에 끌려다니지 않고, 포퓰리즘을 배격하면서 엄격한 복지 정책을 실시한 점은 오늘날 복지 정책을 추진할 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사입력 2018-03-15 16:31:21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3> 브루투스 너마저!카이사르의 암살 (기원전 4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3-22 16:27:2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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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공화정시대의 로마사를 쓴 몸젠이 카이사르를 평가한 말이다.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자가 되고 5년 동안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개혁을 거듭했다. 앞에서 소개한 개혁 내용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는 마치 최고 권력자의 임기가 5년 단임제인 것처럼 개혁을 추진했다. 급진적인 개혁은 원로원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공화정은 끝난다. 왕정이 시작된다”고 믿었던 보수적인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숨 가쁘게 몰아치는 개혁의 광풍과 함께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특권은 점점 늘어만 갔다. 도널드 R. 더들리 『로마문명사』에서 “국가의 모든 유효한 권한들이 카이사르 개인에게 집중되었다”면서 그가 받은 특권을 소개했다. 

   “가장 큰 특권은 독재관이다. 기원전 49년에 독재관직이 주어졌고, 기원전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 기원전 44년 1월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호민관에게만 인정되는 거부권신성불가침권의 권리도 받았다. 개선장군에게만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임페라토르 칭호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개선장군이 입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권리, 원로원에서 먼저 투표할 권리,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권리, 달력에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을 기념하여 명칭을 율리우스(July)로 바꾸는 권리 등이 파격적으로 주어졌다.” 

   카이사르가 가진 중요한 특권들을 보면 이미 황제의 위치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제정이 시작된 셈이다. 군중 속에서 카이사르를 향해 “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인사하자 “나는 카이사르이지 왕이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로마 시내에는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 원정을 발표하고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에 대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수에토니우스는 운명의 날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다. 원로원 회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전 10시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점술가가 가로막고카이사르여, 3월 보름을 조심하시오” 하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무기를 가지고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경호도 무방비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와 게르만 병사로 이루어진 호위대를 원로원 의원들의 서약을 받은 후 해산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재관은 24명의 수행원이 같이 행동하지만, 무기를 든 경호원은 아니었다. 더욱이 회의 중에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암살 음모에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이들은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 무려 23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총애했던 브루투스를 보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곳은 오랜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발치였다. 
암살에는 주동자와 얼굴마담이 있는 법이다. 주동자 카시우스 롱기누스이고, 얼굴마담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카시우스기원전 54년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회계감사관으로 종군했다. 이 전투에서 카시우스는 총사령관 크라수스를 버리고 500명의 기병과 함께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했다가 카이사르에게 투항했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충성파로 여겨지던 브루투스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기원전 44년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동시에 법무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카시우스에게 불만이 생겼다. 브루투스는 수도 담당 법무관으로서 수석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반면에 카시우스는 본국 로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담당 법무관에 임명된 것이다. 카시우스는 자신보다 경력이 떨어지는 브루투스를 오히려 좋은 자리에 앉힌 것이 불만이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카시우스가 암살을 주도하면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그는 로마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브루투스의 후손이다. 더욱이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알려진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세르빌리아는 미망인은 재혼하는 것이 관례였던 시대에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카이사르를 일편단심 사랑했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아들인 브루투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내전 때 브루투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은 카이사르브루투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명령한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석방될 수 있었다. 

   카시우스브루투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때 어떻게 설득했을까? 아마도 남자의 자존심에 호소했을 것이다. 필립 프리먼『카이사르』에서 그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카시우스와 불만 가득한 원로원 의원들은 수백 년 전 브루투스 가문의 조상이 로마의 마지막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듯이, 지금의 브루투스 역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매일 밤 로마의 옛 영웅 브루투스의 조각상에는 선동적인 내용의 낙서가 등장하곤 했다. 
오!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당신의 후손은 기대를 저버렸다오. 우리는 새로운 브루투스가 필요하오.” 


   브루투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카이사르가 지금껏 베풀어준 호의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살해 음모를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브루투스가 일을 저질러 카이사르가 쓰러졌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외마디비명과 함께.​

 

 


















기사입력 2018-03-22 16:27:23






    •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4> 역사를 바꾼 카이사르의 유언장 (기원전 4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3-29 18:14:05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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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모든 로마인은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다음 날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암살의 정당성을 알리려 한 것이었지만, 군중의 싸늘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다른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비난하자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암살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중의 분노는 “당신들은 애국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살인적인 행동을 했다”는 응답이었다. 


 

   이 무렵 카이사르의 유언장유족과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5권에서 암살되기 6개월 전에 작성된 유언장의 내용을 소개했다.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2.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3.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4.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데키우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5.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도대체 옥타비아누스가 누구인가?”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제일 먼저 터져 나온 질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냈고, 어머니 아티아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누이의 외손자다. 

유언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성을 주어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반면에 유언장을 보고 실망한 사람이 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나, 카이사르는 야속하게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낳은 아들이 없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당시 로마에 머물던 클레오파트라는 유언장이 공개되자 크게 낙담한 나머지 아들을 데리고 서둘러 로마를 빠져나갔다. 

 

   안토니우스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한 그는 후계자는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더욱이 그는 현직 집정관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전쟁터에서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물로 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배경은 무엇일까?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 카이사르는 암살당하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8세인 옥타비아누스가 정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30세가 될 때까지 개혁을 단행하여 로마 세계를 반석 위에 올려 안정된 정치 체제를 만든 후 후계자로서 물려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누이의 외손자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살았기에 성격과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는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 후 곧 재혼했다. 로마에서는 재혼하면 자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 관례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와 함께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외할머니 율리아는 과부가 되자 친정으로 돌아와 카이사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렇게 해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자질과 능력을 꿰뚫어본 카이사르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가 전쟁 수행 능력은 떨어지지만, 평화 시에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전쟁 수행 능력은 있지만, 평화 시의 통치 능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전쟁 수행 능력이 부족한 부분은 동갑내기인 군사적인 천재 아그리파를 붙여 보완하도록 했다. 실제로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아그리파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군이 집결해 있는 그리스 아폴로니아로 보냈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없었다. 

 

   한편 카이사르가 미리 유언장을 작성한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최고 권력자로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상황인데도 유언장을 남겨 후계자를 밝혀둔 것이다. 암살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택에 14년간의 권력투쟁을 거쳐 훗날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니, 카이사르의 안목이 돋보인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는 역사상 창업과 승계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다. 창업자의 리더십과 수성자의 리더십은 다르다. 산에 오르는 리더십과 내려오는 리더십은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창업과 승계는 중요한 과제다. 우리가 2,000년 전의 로마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 역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많은 까닭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4년에 암살을 당해 55세로 삶을 마감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14년 동안 권력투쟁을 거쳐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어 서기 14년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활동하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김부식『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국가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전쟁을 시작한 해가 기원전 58년, 루비콘 강을 건넌 해가 기원전 49년, 암살당한 것은 기원전 44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것은 기원전 27년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를 창건한 박혁거세와 주몽과 온조카이사르 및 아우구스투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또 서로마가 쇠망하는 5세기한반도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만주벌판을 휘저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처럼 로마와 한반도를 비교해본다면 역사를 공부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더욱 배가되리라.​ 









기사입력 2018-03-29 18:14:05





본문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15권 중에서 카이사르에 관한 내용을 두 권에 걸쳐 집필했는데, 4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5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로 이름 붙였다. 그는 카이사르에 대해 이탈리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서 100점 만점을 주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5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녀는 카이사르에 심취하여 카이사르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카이사르 “인류에게 가져다줄 재앙”이었다고 가혹하게 평가한다.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벌인 전쟁에서 카이사르저항하던 로마 군인 3만 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후 거창한 개선식을 올렸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카이사르를 몰염치하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카이사르가 벌인 마지막 전쟁이다. 이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개선행진은 로마인들을 그 어느 때보다 불쾌하게 만들었다. 타국의 장군이나 이방 민족의 왕과 싸워 얻은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가 아닌, 로마 최강 집안의 아들들과 혈육들이 불행을 만나 처참히 절멸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재앙을 축하하며 개선행진을 한 행위는 카이사르답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핑계를 대는 것 외에 신들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나 도저히 항변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고도 카이사르는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카이사르의 관용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면 불구대천의 원수라 하더라도 기꺼이 화해를 청했다.” “카이사르는 천성적으로 원한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공화국 편에서 카이사르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자는 모두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한 반면,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편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실었다. “그가 암살될 만했다는 주장도 이런 말과 행동에 따라 정당화되고 있다”카이사르에게 주어진 영예와 특권을 나열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영예나 특권을 사양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마무리했다. 결국 카이사르의 교만이 불행을 자초했다는 뜻이다. 

 

   카이사르에 관한 ‘빚쟁이 에피소드’도 카이사르 평가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법무관 임기를 끝내고 에스파냐 총독으로 떠나려는 카이사르에게 불상사가 생겼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빚을 갚지 않으면 못 떠난다”며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임지로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이미 30세 때부터 빚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카이사르가 회계감사관에 취임할 때까지 진 부채 총액이 1,300달란트나 되었다고 한다. 이 돈은 11만 명 이상의 병력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때부터 빚쟁이로 유명했던 카이사르는 계속해서 빚을 지고 있었고, 그러다가 총독으로 부임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다행히 그 시절 최고 부자인 크라수스가 빚을 갚아야 할 기한을 연장해주고, 다른 빚에 대한 보증까지 서줘서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 

 

   빚이 소액일 때는 채권자가 강자이지만, 그 액수가 많아지면 관계가 역전되는 법이다. 하기야 우리 속담에도 “돈은 앉아서 빌려주고 서서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준 크라수스채권자에서 재정 후원자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러면 카이사르는 왜 이렇게 많은 빚을 졌을까? 우선 책을 사느라 빚을 졌다. 또 친구들한테 아낌없이 돈을 썼고, 애인들에게 빚을 져서 선물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자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카이사르 평가의 상반된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과거사를 연구할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지니도록 훈련받는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 거의 대부분은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해 강한 개인적 견해를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숭배했으며, 공화정이 직면한 거대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 통찰력 있는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에게 지극히 비판적이었으며, 법률과 관습을 무시하고라도 권좌에 오르려 했고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도 없었던 일개 귀족에 불과했다고 평했다. 그런 평론가들은 그가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권력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사르에게는 분명 기회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성공한 정치인들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천년제국 로마의 초석을 깔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와 민중파 간에 피비린내로 얼룩진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키고 클레멘티아(clementia), 관용을 외치며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기사입력 2018-04-06 09:5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