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6 ~ 40> 회분

2018. 11. 25. 18:28잡주머니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6> 폭군의 대명사가 된 네로(서기 64~68)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6-21 18:32:16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네로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발생했다. 서기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다. 대경기장 관중석 밑의 가게에서 불이 발화되어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으로 번졌다. 로마의 14개 행정구 가운데 3개 행정구가 모두 타버리고, 7개 행정구는 절반 정도 타버리는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이재민의 주택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시에 자신의 궁전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 궁전)’라고 명명하고 재건을 추진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 예정지와 거의 일치한 까닭이다. 시민들 사이에 네로가 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불길처럼 퍼졌다. 타키투스가 전하는 소문의 내용이다.

“수도가 한창 불타고 있을 때 네로가 대저택 내의 사설 무대에 올라서서 눈앞의 화재를 구경하면서, 이것을 태곳적의 불행과 비교하며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고 있었다.”

 

  27세의 젊은 네로는 시민들의 반감과 적개심에 무척 당황했다. 이 소문을 진화하지 않으면 자신이 화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네로는 희생양을 찾았다. 마침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이라고 지목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대화재 때 절반 정도 불탔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미사 양식이 증오심에 기름을 부었다. 미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제공되는데,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 그런데 로마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져나가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또한 당시에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많지 않아 영향력이 약한 까닭에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적합한 상대였다. 

 

   네로기독교도들을 ‘방화죄 및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 등으로 체포하여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네로는 이들을 단순히 처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경거리로 삼아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했다. 일부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하고,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 씌워 들개 떼에게 물려 죽도록 했다. 일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져, 땅에 말뚝을 박고 한 사람씩 산 채로 불을 붙여 처형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의 잔혹한 죽음은 네로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더욱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것이다. 타키투스가 기록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서기 65년피소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피소와 네로와 가까운 사람들이 음모에 가담하여 측근에서 네로를 암살할 계획이었다. 이때 세네카도 가담자로 몰려 죽음을 맞았다. 피소의 음모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네로는 더욱 마음을 닫고 의심이 나면 처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서기 66년, 네로는 가수로서의 역량을 시험하고 과시하기 위해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3명의 사령관을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라인 강 방위선을 책임지고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과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스크리보니우스 형제였다. 또 한 사람은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는 코르불로였다. 

네로는 이들에게 죽음을 통고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군대에서 존경받는 베테랑 장수 3명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네로는 3명의 사령관을 명분 없이 죽임으로써 로마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에스파냐 갈바 총독네로반대하며 나섰다. 그는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선언하면서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갈바‘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식량 문제에 불만을 품고 네로에게 등을 돌렸다.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원로원과 시민은 갈바를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네로가 믿었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도 도망쳐버렸다. 급기야 원로원은 네로‘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근위대 역시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사람이 네로를 떠나가고 4명의 하인만이 곁에 있었다. 네로는 하인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교외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서기 68년, 5대 황제 네로는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네로의 죽음은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몰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로마의 제정은 세습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견제 기능이 있었다. 로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황제의 실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로마인은 실력을 중시했다. 황제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 권력은 실력이 있을 때 유효했다.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권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로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로원에서 권력 위임을 철회하고 군단에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 어제의 황제도 보통 시민이 되고 마는 것이다. <ifs POST>



기사입력 2018-06-21 18:32:16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7> 로마의 전성기, 5현제(賢帝) 시대가 열리다(서기 96~98)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6-28 17:46:5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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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원은 서기 96년네르바 황제로 승인했다. 네르바 이후 로마는 100년 동안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 로마를 통치했던 5명의 현명한 황제, 즉 네르바(96~98), 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를 5현제라고 부른다. 이 시대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여러 곳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졌고, 속주민도 로마 문화의 혜택을 입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5현제 중 네르바를 제외하고 4명이 속주 출신 황제라는 사실이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스파냐계 로마인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갈리아계 로마인이다. 5현제 시대에 대한 내용은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5현제 시대를 연 네르바서기 96년에 66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고령이고 아들이 없었으며 명문 귀족이었다. 더욱이 그는 군 출신이 아니고 원로원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기 69년에 일어난 사태처럼 군인들 간의 경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원로원이 그를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이런 네르바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15년 동안이나 재위하다가 궁중 측근에 의해 갑자기 살해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근위대와 군단의 압력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근위대의 신망이 높았다. 병사들 역시 봉급을 인상시켜주고 전선을 자주 찾아와 위문해준 도미티아누스를 그리워했다. 근위대와 군단은 황제 암살의 배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강하게 요구했다. 

 

   네르바가 1년이 넘도록 주모자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근위대는 황제를 감금시키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네르바는 결단을 내렸다.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트라야누스후계자로 삼아 공동 황제로 지명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의 탄생을 의미한다. 트라야누스 에스파냐 남부의 베티카 속주에 있는 이탈리카에서 출생했다. 네르바는 군단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고 민간 경력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신망이 높은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이다. 

 

   공동 황제로 지명된 트라야누스는 곧바로 수도인 로마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에 근위대장과 황제 감금에 책임이 있는 동조자 몇 명만 쾰른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살해되었다. 트라야누스는 근위대가 현직 황제를 감금하는 사태를 간과해서는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도에 남아 있던 1만 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네르바에게는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의 엄격한 조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주 출신인 트라야누스가 황제로 지명된 것은 실력과 인품 덕이었다. 그는 로마 사회가 요구하는 경력을 사다리를 오르듯 차근차근 밟아 올라갔고, 회계감사관, 원로원 의원, 법무관, 군단장, 집정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및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 후계자 지명, 공동 황제 등을 거쳐 황제에 취임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 황제로 선택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타키투스네르바가 과거에는 양립할 수 없던 두 가지, 즉 원수정과 자유를 융합했다”고 말한다. 자유란 원로원의 자유를 뜻한다. 네르바는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밀고죄를 없앴으며, 로마와 이탈리아의 이익에 최우선의 가치를 매겼다. 그러나 행정력이 약했고, 군대 경험이 없었다. 그로 인한 심각한 어려움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인사를 단행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인사 관리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다.

 

   도널드 R. 더들리『로마문명사』에서 5현제 시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했다. “네르바의 선택트라야누스라는 인물은 그 중요성이 적지 않았다. 소수의 광적 분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원수정의 필요를 받아들였다. 정계의 제1현안은 어떻게 하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등장하여 프린켑스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양자 선택이란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은 특히 스토아파 사상가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방법이 로마에게 가장 긴 기간의 선정을 가져다주었다.” ​<ifs POST> 



기사입력 2018-06-28 17:46:53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8> 속주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가 등장하다(서기 98~117)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7-05 17:36:1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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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르바가 사망하자, 트라야누스는 45세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의 신흥 가문 출신으로서 첫 번째 속주민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가 된 후에 곧장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게르마니아 방위 체제를 완비하는 일에 매달렸다. 동시에 군단 기지를 잇는 도로와 교량을 정비했다. 네로 황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고 말했다. 로마군에는 공병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단병 전원이 토목기사이자 근로자였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후 1년 반 만에 수도 로마에 입성했다. 그가 오는 날 황제를 보기 위해 로마 시내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일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고서도 1년 반 동안이나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신임 황제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졌다. 더욱이 그는 경력의 대부분을 속주에서 보낸 까닭에 수도 로마에는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황제는 성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말을 탄 채 입성할 거라는 예상을 깬 행동이었다. 그는 장군 출신답게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해서 엄청난 인파 속에서도 머리가 우뚝 솟아 빛나 보였다. 로마에 입성한 후 트라야누스의 검소한 생활도 화제가 되었다.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원로원 의원들도 그 소박함에 놀랄 정도였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서 “국가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족에 대한 전쟁 재개를 결심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체결한 강화조약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때 붙잡힌 포로들을 교환하기 위해 1인당 1년에 2아세스를 지불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공중목욕탕 입장료의 4배에 불과하다. 도미티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혀 있는 로마군을 데려오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액수가 미미하더라도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로마의 전통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패자가 승자에게 받치는 연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1차 다키아 전쟁은 서기 101년에 일어났다.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도나우 강 연안에 도착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다키아 왕은 바짝 다가온 로마군의 창끝을 피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참패했다. 다키아 왕이 강화 사절을 보냈고,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2차 다키아 전쟁은 서기 105년 다키아가 강화를 파기하고 로마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수도 로마를 떠나 전쟁터로 다시 달려갔다. 다키아 왕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워서 완전히 이기려 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켜 도미티아누스 시대처럼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어 도나우 강 이북에 일대 왕국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다키아군 가도 공사를 하고 있는 7군단을 습격하여 군단장과 일부 로마 병사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포로들을 이용하여 강화를 제의했다. 트라야누스는 강화 제의를 일축했다. 다키아군은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다키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데케발루스 왕은 자결하고 그의 목은 로마 황제에게 바쳐졌다. 로마제국과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데케발루스의 야망은 20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서기 106년 여름, 다키아전쟁이 끝났다. 트라야누스의 개선식은 수도 로마를 흥분과 열광과 승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5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막대한 왕실 보물은 오랜만에 로마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게 만들었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삼는다고 공포함으로써 다키아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다키아의 합병으로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고, 로마군은 최강이 되었다. 다키아 정복에 관한 사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트라야누스가 집필한 『다키아전쟁기』는 내용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원기둥’으로 불리는 승전 기념에 새겨진 부조가 있다. 도널드 R. 더들리『로마문명사』에서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그 기둥에는 야전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모습이 그 상세한 전술과 장비와 함께, 지휘관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조하여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울러 다키아인들의 격렬한 항전과 갑옷과 무기,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들, 그들의 위대한 왕이자 트라야누스의 호적수 데케발루스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둥의 부조들에서 연속된 원정의 역사를 구성해내려는 학자들의 시도는 변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106년에 데케발루스가 죽고 다키아가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서기 113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를 떠났다. 로마군의 공격으로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오늘날의 바그다드 근처)이 함락되었다. 파르티아 왕은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쳤다. 트라야누스는 크테시폰에서 가까운 고도 바빌론을 방문해서 “내가 젊었다면 인도까지 진격했을 텐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페르시안 만에 도착한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겨울을 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반란의 불길이 솟았다. 제패한 땅에 남아 있던 로마군에 대해 파르티아 진영은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유대 지방에서도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기 117년, 봄이 왔으나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지 않고 돌연히 로마로 향했다. 트라야누스가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신 파르티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임명했다.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서기 117년 8월 트라야누스 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원정군 총사령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ifs POST> 




기사입력 2018-07-05 17:36:13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9> 가장 위대한 황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61~180)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7-12 17:43:00 최종수정 2018-07-12 13:58:35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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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탁월하고 가장 고결한 황제.”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붙여진 평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현장 제일주의를 실천 하드리아누스(서기 117~138)와 가장 평온한 시대를 선물안토니누스(서기 138~161)를 뒤이어 등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21년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인 덕택에 제공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 혜택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수사학과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다. 학자적 소질로 가득 찬 그는 문법과 문학, 과학, 수학, 음악, 춤, 운동, 로마법 등 다양한 교육을 받고 탁월하게 소화해냈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성실한 태도와 온화한 성격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서기 145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했고, 서기 161년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의 전성기에 통치함으로써 철학자 플라톤이 꿈꾸던 ‘철인 황제’를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통치 초반에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닥쳐서 철인 황제는 당장 현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의 재위 첫 2년은 위기로 가득했다. 테베레 강에서 대홍수가 났고, 시지쿠스에서 지진이 발생했으며, 갈라티아에는 가뭄이, 브리타니아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또 게르만족이 라인 강을 건너왔고, 젊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게세스 3세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했다. 이렇게 많은 사건과 사고가 서방과 동방에서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서,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공동 황제로 임명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제위 초기에 역할을 분담하여 베루스는 파르티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방으로 갔고, 아우렐리우스는 서방의 긴박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베루스는 유능한 장군들을 활용하여 시리아 주둔군을 강하게 만들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파르티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가졌지만, 생각지도 못한 두 가지 재난이 닥쳐왔다. 

 

   하나는 파르티아에서 돌아올 때 페스트 전염병을 가지고 온 것이다.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소아시아,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에 옮겨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는 결국 라인 강과 도나우 강 국경선을 지키던 군인들의 수마저 격감시켰다. 

또 하나는 도나우 강 유역의 국방은 대규모 병력이 동방으로 차출된 까닭에 이미 약화된 상태였는데, 게르만족이 이 틈을 노려 대규모로 침입해 온 것이다. 이들은 도나우 강 유역 속주들을 짓밟고 이탈리아 북부까지 쳐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두 황제는 지체 없이 북부 국경 지대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동 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쓰러져 사망했다. 

 

   파르티아 왕이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라인 강 상류에서 다시 게르만족이 침공했으며, 모로코의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프리카와 에스파냐 해안 지대를 괴롭혔다. 서방과 동방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로마제국은 방위의 허점을 드러냈다. 서방과 동방을 동시에 방어하는 데 취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로마가 강력할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약해진 틈만 보이면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고 나서 서방과 동방의 계속된 전쟁뿐 아니라, 기근과 전염병이 잇따라 발생하는 등 군사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재위 19년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윤리 회복에 고심하며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여러 재난과 13년에 걸친 게르만족과의 지리멸렬한 전쟁과 반란 속에서도 내정과 국방을 잘 다스리며 통치한 덕택에 5현제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남긴 『명상록』 전쟁터에서 낮에는 싸우고 밤에 틈을 내서 기록한 자기 성찰에 관한 고백록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고서 중 가장 지혜롭고 지성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아 역사상 위대한 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읽히고 있다. 

 

   그는 검소한 삶을 살면서 철학으로 영혼을 돌보았으며, 무서운 죽음 앞에 단단하게 자신을 다지며 선한 마음으로 로마제국을 이끌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일컬어 “가장 고귀한 로마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가 쓴 『명상록』 다윈과 니체, 쇼펜하우어, 존 스튜어트 밀여러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영감을 선물했다. 

“온 마음으로 옳은 것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인생의 구원이 달려 있다.” 

“누가 너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갑자기 물어도 ‘이것과 이것’이라고 지체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일들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네 마음은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이란 자연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여라.”

 

   천하제일의 권력자인데도 자기반성과 성찰의 폭이 넓었으니 그 겸손한 인격에 감명 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게 남긴 일기이자 기록인데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삶의 아름다운 교훈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깊은 사색과 성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대하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적 철학자인 그는 정책상 기독교를 박해했다. 또한 현명한 사람을 선택해 양자로 삼아 후계자를 삼는 선임 황제들의 관례를 어겨가면서 방탕한 아들 콤모두스후계자로 삼은 것은 실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 <ifs POST>

 




기사입력 2018-07-12 17:43:00 최종수정 2018-07-12 13:58:35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0> 철학자 황제는 왜 후계자 양성에 실패했을까?(서기 180~192)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7-19 17:4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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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황제와 가장 악랄한 황제.”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아들 콤모두스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다.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화려한 5현제 시대는 마지막 왕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에 의해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아우렐리우스는 전임 황제들과는 달리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들을 망치고 로마를 쇠락의 길로 이끄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들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금욕주의적인 성격과는 달리 무능하고 잔인하고 과대망상적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18세에 불과해서, 대제국의 황제 자리를 맡기에는 너무 어렸을 뿐만 아니라 자질도, 역량도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되자마자 아버지가 벌여놓은 정복 사업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면서 음행과 기행의 길을 걸었다. 그는 여첩과 남첩을 300여 명씩 거느리고 갖가지 음행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검투 경기에 빠져서 스스로 검투사 복장을 하고 검투사들이나 맹수들과 결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황제가 점점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자 애첩 마르키아가 시종들과 음모를 꾸며 살해하고 만다. 

 

   로마 멸망의 단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 지명에 실패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우렐리우스가 실패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5현제시대에 전임 황제 4명은 아들이 없었고,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선택하여 양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친아들이 있었다.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했다. 그토록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거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도널드 R. 더들리 『로마문명사』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간적인 결정이 가져온 결과를 냉정하게 설명했다. 마르쿠스는 2세기의 황제들 중 자신의 아들을 낳은 최초의 황제로서, 양자 상속제를 파기하고 싶은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통치를 실험했다가 쓴맛을 보고서도, 아들 콤모두스를 177년에 아우구스투스로 만들고는 다시 그와 공동 통치에 들어갔다. 콤모두스는 역사에서 선한 사람에게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콤모두스의 재위기간은 모든 면에서 제국에 재앙이었다. 그 재앙은 마르쿠스가 벌여놓은 정복 사업을 포기하고(그의 아버지는 이 점을 우려했다) 로마에서 방탕하게 소일했다. 번갈아 기용된 쓸모없는 측근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중 가장 유력한 자가 친위대의 지휘관이 되어 관직을 매매하는 부끄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콤모두스가 걸었던 길은 칼리굴라네로흡사하다. 핏줄 덕에 칼리굴라는 25세, 네로는 16세, 콤모두스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인기 영합주의에 편승하여 인기를 모았지만, 이는 오래갈 수 없었다. 무모한 재정 집행이 경제적인 압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재정 파탄으로 재정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의 인기를 잃으면서 공포정치로 돌변한다. 공포정치의 결과, 측근들의 신뢰마저 잃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불행한 황제들은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비극적인 종말을 맛보았다. 도널드 R. 더들리콤모두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로마의 군중에 관한 한 콤모두스는 그들의 저급한 취향을 같이 누리는 자로서 일정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192년에 가서야 비로소 암살당했는데, 그해 첫날을 한 번은 집정관으로, 그리고 다시 검투사로서 공개 석상에 나서는 것으로 장식했다. 상황이 69년과 비슷했고, 거기다가 연속된 내전이라는 또 다른 재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계에 선정을 회복시켜줄 베스파시아누스(네로 황제 이후의 혼란을 극복했던 황제) 같은 인물이 없었다.”

 

   여기서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콤모두스의 검투사 활동과 관련하여 ‘빵과 서커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빵과 서커스’는 2세기 로마제국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는 민중들이 먹는 것과 오락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문제에 눈을 감는 현상을 안타까워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빵의 제공은 그라쿠스 형제의 곡물법이 제정된 후 저소득자에게 싼값으로 밀을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정시대에는 황제가 빈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의 곡물을 무료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서커스권력자가 검투 시합, 전차 경기 등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검투 시합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검투사 시합은 원래 장례 의식의 일부로 시작됐다. 지도층 인사들이 돌아가신 부모나 집안 어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열었으나 인기가 높아지면서 오락으로 발전했다. 

 

   검투사는 주로 사형수, 노예, 포로 등으로 구성되었다. 검투사 시합은 공화정 때부터 인기를 누렸으나,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까지 일으켰다. 제정시대에도 시민들에게 더욱 인기를 누렸다. 아우구스투스도 검투사 시합을 제공했는데, 제한을 두고 국고로 지원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검투사 시합을 금지했지만, 후임 황제들은 시민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검투사 시합에 적극적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을 착공하도록 하고 검투사 시합과 각종 오락 행사를 지원했다. 

 

검투사는 목숨을 내놓고 경기에 나서지만, 이기면 엄청난 명예와 돈 그리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유인 중에서 자진하여 검투사로 경기에 나서는 사람도 생겨났다. 검투사를 자청한 사람 중에는 콤모두스 황제도 있었다. ​

 



기사입력 2018-07-19 17: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