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1 ~ 35> 회분

2018. 11. 22. 15:52잡주머니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1> 권한 위임의 달인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5-17 17:30:00 최종수정 2018-05-17 13:28:1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그리파 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운명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아그리파 충실한 부하로서, 때로는 미더운 동역자로서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제정 체제를 확립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아그리파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12년에 사망했다. 17세 때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동갑아우구스투스의 협력자가 되었다. 군사적인 재능이 부족 아우구스투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카이사르의 배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거둔 군사적인 승리는 모두 아그리파의 전략과 지휘 덕택에 가능했다. 

 

   아그리파는 일생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군사뿐만 아니라 건설에서도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환상적이었다. 로마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 일대아우구스투스가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생각을 이어받아 정비했다. 반면에 그 북쪽에 있는 ‘마르스 광장’은 아그리파가 맡았다. 카이사르는 이 일대를 도심화하는 핵으로서 ‘사이프타 율리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그리파‘사이프타 율리아’ 서쪽에 신전을 세웠다. 이 신전은 모든 신들에게 바쳐졌다는 뜻을 담아 ‘판테온’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아그리파는 판테온 남쪽에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 ‘아그리파 목욕탕’도 만들었다. 이 목욕탕은 욕실, 마사지 시설, 체육장, 독서실, 오락장까지 갖추었다. 

 

   아그리파가 세운 공공건축물 이탈리아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 널려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프랑스의 님에는 ‘퐁 뒤 가르(가르 다리)’가 남아 있다. 이 다리는 길이가 370미터, 높이가 48미터나 되는 수도교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보도가 딸려 있다. 주민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아그리파공공 봉사 정신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 죽을 때는 개인 재산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남기고 공공을 위해 써줄 것을 부탁했다. 아그리파는 공공사업에 정열을 바쳤고, 그 방면에 숙달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예도 상관하지 않고 우수한 기술자 집단을 구성했다. 아우구스투스아그리파가 죽은 뒤 기술자 집단에 속한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기사 계급으로 승격시켜주었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로마의 ‘공공사업청’을 창설했다. 

 

   아우구스투스외동딸 율리아의 남편이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자, 재혼 상대로 아그리파를 택했다. 아그리파아우구스투스의 요청을 받고 이혼까지 하면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재혼한 아그리파와 율리아는 3남 2녀를 두었다. 외손자를 5명이나 얻은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기뻐한 나머지 두 외손자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양자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아내 리비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유일한 혈육인 외손자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외손자와 아우구스투스와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아그리파를 중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아그리파는 병을 모르는 건장한 체질이어서 자신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동갑인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 51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구도도 함께 무너져버렸다.

 

   아우구스투스에게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외교와 문화 홍보를 담당한 마이케나스다.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지에서 도왔다면, 마이케나스는 음지에서 도운 사람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아그리파, 왼팔 마이케나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오늘날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고 한다.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가 바로 마이케나스다. 그는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기사 계급에 속해 있었다. 나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많았는데, 전쟁터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아그리파카이사르가 맺어주었지만, 마이케나스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선택한 사람이었다. 아우구스투스전쟁터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외교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했다. 

 

   마이케나스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베르길리우스, 『서정시집』과 『서간시』를 남긴 호라티우스, 서사시로 간주되는 리비우스『로마사』 등이 탄생했다. 마이케나스가 문학인들을 어떻게 지원했을까? 프리츠 하이켈하임시인 호라티우스 지원한 구체적인 사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에 마이케나스호라티우스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거리를 다니면서 대도시의 삶을 관찰하며 지낼 수 있도록 충분한 수입을 제공했다. 나중에는 그 시인에게 티볼리 근처의 사비니 시골에 방이 24개 딸린 집과 노예 8명과 소작농 5가구를 둔 드넓은 사유지를 제공했다. 이곳에서 호라티우스는 빈둥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시골의 한적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에 힘입어 라틴어는 시의 매체로 완벽하게 확립되었고, 라틴 문학은 세계의 위대한 문학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의 메세나 운동은 문화예술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아 라틴 문학을 꽃피우게 한 정치가 마이케나스에서 유래했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각국의 기업인들이 ‘메세나협의회’를 설립하면서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메세나의 대표적 예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대예술가들을 지원한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꼽힌다. 후대에 와서 메세나는 기업의 문화 예술 및 스포츠 지원, 사회적 인도적 입장에서의 공식적인 예술 후원 사업을 뜻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카네기 홀, 록펠러 재단 등은 대표적인 메세나 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기사입력 2018-05-17 17:30:00 최종수정 2018-05-17 13:28:13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32>죽음까지 철저히 준비한 사람(서기 1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5-24 14:27:44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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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죽기 1년 전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최고 통수권을 주어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했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내전의 위험이 따른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로마가 14년 동안 후유증을 앓았듯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동 통치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여 후계 구도를 성립했다.

 

   서기 14년 초, 아우구스투스자신이 후세에 남기고 싶은 내용을 담은 『업적록』도 마무리했다. 『업적록』은 역사가 몸젠 ‘비문들 중의 여왕’이라고 명명할 만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료다. 꼼꼼한 성격의 아우구스투스답게 장례식 절차에 대한 내용도 문서로 만들어놓았고, 후계자 지명을 포함한 유언장 역시 완성된 상태였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리고 서기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 놀라(Nola)에서 76세의 나이로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허약한 체질의 아우구스투스가 76세까지 장수한 것은 로마제국의 축복이었다. 장수한 덕택에 로마의 시스템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제국 통치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여제사장에게 맡겨진 유언장이 원로원에서 개봉되었다.

 

   유언장에는 군사력과 세금을 비롯하여 제국 전체의 현재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과 군단 주둔지,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 총액, 각종 간접세 중에서 아직 납부되지 않은 액수까지 적혀 있다. 심지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물어볼 수 있는 담당자 이름까지 기록해놓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유언장에도 그대로 묻어난 것이다.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상속인 가운데 맨 위에 적혀 있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유산의 3분의 2를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내 리비아에게 주었다. 상속 서열 2위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수도의 모든 시민들에게 총액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 밖에 근위대 병사, 수도 경찰의 경찰관, 군단병 개인에게 지급하는 액수를 정하고 유증했다. 또한 유언장에는 지금까지 기증받은 액수가 14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지만 국민과 국가를 위해 다 써버리고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유배된 딸과 손녀는 영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며 유언장을 마무리했다.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하고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에드워드 기번“공화정시대는 존경할 만하지만 제정시대에 접어들자마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토인비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늦추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성자필쇠(盛者必衰)는 역사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설령 토인비의 말이 옳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늦춘 세월이 수백 년에 이르렀다면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역사가들이 제정 로마를 멸시하는 이유로 자유가 사라진 점을 드는데, 그 자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국경을 결정하는 자유다. 그렇다면 공화정시대의 로마에서는 누구나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까?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는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정이 아니었다. 민회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로원이 국정을 결정하는 소수 지도 체제였다. 역사상으로는 과두정이라고 부른다. 술라의 개혁 이전에는 300명, 이후에는 600명의 원로원 의원만이 국정을 결정할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셈이다. 제정시대에 이 자유를 잃은 것은 이 600명뿐이다. 로마제국의 전체 인구는 6천만 명이었다.”

 

   공화정 체제제정 체제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다. 공화주의자였던 타키투스“최악의 공화정이 최선의 제정(帝政)보다 낫다”며 공화정을 극찬했다. 그러나 “속주에서는 제정에 대한 평판이 더 좋았다”고 평가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때 자기 친구들에게 그리스 희곡의 대사를 인용하여 “어떤가, 내 배역을 잘 수행했지? 그렇다면 박수를 쳐서 나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주게”라고 말하면서 평온하고 유쾌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의 재위 기간 중 로마 사회의 모든 구석에 미치는 개혁들을 단행했다. 조급하게 많은 것을 이루려고 덤비지 않고 점진적인 조치와 선례에 입각한 체계적인 작업에 의해 개혁에 성공했다. 복합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어 역동적인 조직문화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옛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최상급 신분의 지위들을 많이 만들어 원로원 의원들을 인재로 활용했다. 경제계 인사인 기사 계급을 실세의 지위들로 끌어들여 체제의 충직한 집단으로 만들었고, 신인들로서 원로원 신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노예도 해방노예로 신분 변화의 기회를 열어주어 전문화해가던 행정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존중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관리했다. 그가 후계 시스템을 원수정 체제로 만든 이유도 바로 원로원과 시민을 존중하면서 통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자신이 솔선수범하면서 후계자들이 실천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기사입력 2018-05-24 14:27:44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3> 3번 타자에 딱 알맞은 티베리우스(서기 14~37)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5-31 17:42:43 최종수정 2018-05-31 17:42:57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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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반석처럼 견고해진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이렇게 시작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창기 3세대가 절묘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다한 덕택이다. 3대에 걸쳐 설계되고 구축된 로마제국은 이후 안전 궤도를 달리는 기차처럼 굴러갈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역할 수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일이다. 그는 3번 타자에 적합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경제와 사회 정책을 탁월하게 집행하여 로마를 안정 궤도에 올려놓았다. 나아가 인사관리를 비롯한 나머지 정책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 탁월한 인사 능력이다. 

   티베리우스인사에 관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발탁하고 활용했다. 군단장에는 군사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고, 행정관에는 행정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발탁했다. 속주 총독에는 공화정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을 등용했다. 속주 출신이라도 로마 시민이 된 이상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를 싫어한 역사가 타키투스조차도 “어떤 황제라도 티베리우스만큼 교묘하게 인선을 해낼 수는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에게 엄격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기 25년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여 신전을 세우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둘째, 카프리 섬의 은둔 정치를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서기 27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권력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고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은둔한다. 그가 은둔한 이유는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한 불편한 마음, 원로원에 대한 실망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타키투스“잔인하고 방탕한 본성을 숨기기 위해, 늙은 외견상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그의 어머니의 오만한 기질이 싫어서” 은둔했다고 설명한다. 

 

   은둔했다고 해서 정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측근 정치를 하고, 필요할 때는 서신을 통해 통치를 했다. 로마는 당시 로마가도가 발달하여 정보 수집이 가능했고, 명령 전달 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다. 

그가 은둔한 직후, 큰 사건이 2건이나 발생했다. 로마 근교의 경기장이 붕괴되어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 로마의 일곱 언덕의 하나인 첼리오 언덕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대형 사고를 원만하게 수습한 티베리우스은둔 정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은둔을 계속하면서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의 측근 정치가 지속되었다. 서기 29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을 원로원에 보냈다. 편지에는 고인의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르고, 사후에 주어지는 많은 명예도 가능하면 줄이며, 특히 어머니를 신격화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티베리우스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인 아그리피나 일파를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성격인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제국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외손녀다. 피를 물려받지 않은 티베리우스는 찬탈자다. 뿐만 아니라 피소를 시켜서 남편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살인 교사범이다.”

   티베리우스는 틈만 나면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내세워 주제넘게 나서는 아그리피나를 싫어했다. 그동안의 분노가 쌓인 황제는 세야누스를 통해 아그리피나 가족을 국가반역죄와 간통죄로 처벌할 것을 지시했다. 아그리피나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씩 배제되었다.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서기 29년, 아그리피나 모자에게 유배형이 확정되었다. 아그리피나 판다타리아 섬(오늘날 벤토테네), 아들 네로 카이사르 폰티아이 섬(오늘날 폰차)에 각각 유배되었다. 

 

   서기 31년, 세야누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세야누스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후계자의 욕심까지 생긴 것을 안 티베리우스세야누스를 제거하고 사형에 처했다. 

티베리우스는 승계를 염두에 두고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훗날 칼리굴라 황제)카프리 섬에서 함께 살도록 했다. 세야누스의 궁중 음모 전략에 걸리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타키투스가이우스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 영악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하면서 가이우스만큼 훌륭한 노예도 없었지만, 그만큼 무서운 주인도 없었다”는 말이 생겼다고 소개했다. 

 

   티베리우스서기 37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그는 원로원이 자신에게 주려고 했던 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는 겸손함을 지녔다.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청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공화정과 민주 원리를 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었다. 몸젠티베리우스는 로마가 가졌던 가장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제거, 궁정 음모 사건, 측근 세야누스의 권력 남용, 카프리 섬 은둔 기간에 나돌던 무절제한 성적 타락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 등으로 인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등 고대 역사가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기사입력 2018-05-31 17:42:43 최종수정 2018-05-31 17:42:57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34>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처형(기원전 4~서기 30)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6-07 17: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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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년, 예수가 시리아 속주 유대에서 탄생했다. 예수의 탄생과 기독교의 등장은 로마 역사와 세계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인류 역사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과 서기(AD)로 갈리기 때문이다. BC는 영어로 그리스도 이전을 뜻하는 ‘Before Christ’의 약칭으로,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 AD(Anno Domini)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으로, 기원후를 의미한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기독교의 전파는 로마의 역사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지만, 로마제국 후반기에는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로까지 인정받는다. 예수의 탄생을 『신약성경』‘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예수 탄생은 기원전 4년이니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났다. 『신약성경』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호적하러 갈 때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나온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예수는 처형당하기 전 3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복음을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나병 환자의 병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복음서의 3분의 1 정도가 예수가 행한 기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의 출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 지도자인 사두개파와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파의 반발을 사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다는 신성 모독죄로 서기 30년에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처형당한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정치적 선동가, 해적, 노예 등 사형에 처할 중죄인을 다스릴 때 주로 사용되었다. 사형수는 대개 매질을 당한 다음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매달려 죽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는 과정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에 잘 나타나 있다. 

 

   십자가 사건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있을 때에 일어났다.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될 때 빌라도는 유대 속주를 관장하는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빌라도는 처음에 예수의 사건 전체를 자신과 무관한 ‘유대인의 문제’이고 종교적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가 로마에 정치적 위협이 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유대인들의 고발이 없었다면 그를 석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강하게 요청하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선고했다. 처형된 예수의 시체는 바위 안의 묘에 매장되었는데, 죽은 지 3일 만에 본인의 예언대로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40일 뒤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 역시 인간의 사랑의 실천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4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재림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등장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바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이며 로마 시민권자로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선봉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던 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박해자에서 돌아선 바울은 기독교를 이스라엘 밖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여 로마까지 전파하게 되었다. 바울 『신약성경』 27편 중에서 13편의 편지를 써 『신약성경』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토머스 R. 마틴『고대 로마사』에서 바울 기독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점을 이렇게 평가했다. 

 

   “바울은 윤리적 행동, 특히 성적 부도덕을 피하고 그리스·로마 신들을 예배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나, 유대인 율법의 모든 조문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가르쳤다. 기독교를 유대인 공동체 밖으로 전파하려 했던 그는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의 비유대인들을 겨냥하여 전도 사업을 펼쳤다. 그는 이교도들의 개종을 한결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이 종교에 들어온 남자들은 유대교의 성인식인 할례 의식을 치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울이 제국의 동부에 있는 여러 속주에 나타나서 논쟁과 소란을 일으키자, 로마 당국은 소요를 일으키는 범죄자로 보고 체포하여 기원후 65년경에 처형했다.

사도행전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 등 사도들이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널리 전파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사도들은 처음에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시작했으나, 이내 로마제국 전역의 비유대인들에게 신앙을 확산시켰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그 출발은 미미했으나 서기 64년 대화재 사건 때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로마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 

 



기사입력 2018-06-07 17:30:00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35> 처음에 선정을 베푼 네로(서기 54~6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6-14 17: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인류의 파괴자” “세상의 독” “사악한 인간”.

   폭군 네로에게 붙여진 수식어다. 5대 황제 네로는 천년제국 로마에서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몰라도 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까. 

서기 54년에 황제로 즉위했을 때 네로의 나이는 16세였다. 철부지에 불과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전임 클라우디우스 황제 체제에서 해방노예들이 설치는 모습에 신물을 느낀 나머지, 비서관 정치가 폐지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갑이 넘은 역사가 출신의 황제는 무미건조하고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발랄한 10대 소년의 등장은 신선한 느낌을 주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3대 칼리굴라 황제가 젊음을 무기로 티베리우스 황제 사후에 등장할 때와 비슷했다. 

 

   네로가 황제가 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아그리파나의 야망과 집념이 낳은 결과였다. 아그리피나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겨우 3살이었다. 그녀는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미움을 사 판다타리아 섬에 유배되었지만, 친오빠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폰티아이 섬에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의 희생양이 된 그녀는 역설적으로 권력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반드시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는 목표와 집념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가 되어 네로를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그리피나 아들을 위한 교육에도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제왕 교육을 위해 유명한 철학자를 선생으로 모셔야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미움을 받아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아그리피나는 황제를 설득하여 세네카에게 추방 해제령을 내리도록 하여 자유롭게 만든 후 아들의 스승으로 모셔와 제왕 교육을 시켰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를 도와 출범 초기 5년 동안 선정을 베푸는 데 기여했다. 네로의 연설은 세네카의 도움으로 원로원의 큰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정부를 매우 안정되게 운영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고 전한다. “나는 통치권을 아무 탈 없이 행사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조언자와 모범적인 인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서기 59년, 네로가 어머니를 살해한 후부터 폭정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세네카는 폭군을 선도하려는 이상과 폭군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부단히 갈등했다. 서기 62년에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하고, 네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64년부터는 궁정에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품었던 네로는 서기 65년에 발각된 암살 음모세네카의 조카인 루카누스가 연루되자, 세네카와 그의 가족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네카는 위대한 철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인생이 왜 짧은가』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권리”라고 했다. 그는 “현자는 자신의 생명이 지속 가능한 시간까지가 아니라 자기가 생존하려고 할 때까지만 생존하는 것”이라며 자살을 자유로 통하는 통로라고 변호했다.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명령받은 그는 그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네로어머니를 암살하고 세네카가 떠난 후로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가기 시작했다. 네로는 원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옆에서 충고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수에토니우스『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네로의 주된 성격적 특징은 인기에 대한 억누르기 힘든 욕망과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눈을 사로잡은 사람들에 대한 불타는 질투”라고 설명했다. 네로는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사는 대중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는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를 인용하고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으며, 세네카의 도움으로 알찬 연설문을 만들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네로는 대중 앞에서 직접 류트나 리라 같은 악기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의 박수 소리에 만족하면서 거액의 돈을 뿌렸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타키투스“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서기 60년, 그리스의 올림픽을 모방하여 ‘네로 제전’ 축제를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었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를 연주하고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서는 언제나 네로가 직접 출전했다. 물론 우승은 항상 네로의 몫이었다. 

 

   네로는 이 축제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민에게 뿌렸다.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고, 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원로원과 귀족들은 ‘철부지 황제’라며 싫어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다. 네로는 유능한 장수인 코르불로동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르티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를 로마로 초대하여 양국 사이에 평화가 이어지게 했다. 파르티아에서는 네로에게 큰 호감을 품은 나머지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경의를 표시했을 정도였다. 




기사입력 2018-06-14 17: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