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1 ~ 45>회분

2018. 11. 26. 18:20잡주머니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1>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다 (서기 211~217)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7-26 17:40:00 최종수정 2018-07-26 14:31:43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형제간에 서로 뭉치고, 군인들을 후대하고, 나머지에게는 매섭게 대하라.” 

서기 211년, 아프리카 출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며 간절한 소망이었다. 황제는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공동 황위를 공평하게 물려주었다. 카라칼라 공중목욕탕을 지은 것으로 잘 알려진 형 카라칼라는 유럽과 서아프리카를 다스리고, 동생 게타는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기로 했다. 

 

이바르 리서너는 『로마 황제의 발견』에서 동생의 암살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 상세히 묘사했다. 두 황제는 로마에 살면서 황궁도 정확히 둘로 나누어 생활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항상 호위병을 대동하고 다녔다. 두 형제는 어머니가 있을 때나 공식 행사 외에는 한자리에 같이 있는 법이 없었다. 둘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누군가 한 사람은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어느 날, 카라칼라는 어머니를 찾아가 “형으로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싶으니 아우를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게타는 형의 말을 믿고 호위병을 물리치고 혼자서 어머니에게 갔다. 이때 매복해 있던 형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살해했다. 동생의 살해 현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훗날 카라칼라라 불린 형 비시아누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게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어머니의 품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형의 이름은 원래 비시아누스였는데 카라칼라로 불리었다. 카라칼라는 그가 즐겨 입던 긴 갈리아 망토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동생이 살해된 사건을 놓고 군인들 사이에서 퍼져가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50%나 인상해주었다. 

212년 카라칼라는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카라칼라는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만한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고, 모든 속주민의 로마 시민화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대외적으로는 인도주의적이고 카이사르가 생각했던 대로마제국의 실현이었다. 또한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오직 시민만이 상속세와 노예 해방 수수료를 내기 때문이다. 시민 인구의 증가는 세수 확대를 뜻하므로 재정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속주민들은 그렇게 바라던 시민권을 손에 넣었으니 처음에는 환영했다. 하지만 희소성이 없어진 시민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치가 떨어지고 말았다. 속주민이 로마 시민권을 얻으려면 군단의 보조병으로 25년간 근무해야 했다. 그 시민권은 자녀에게 세습이 되기 때문에 보조병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힘들게 취득하던 시민권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칙령으로 시민권은 노력해서 얻는 ‘취득권’이 아니라 공짜로 주어지는 ‘기득권’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카라칼라 칙령 이전에 로마 시민권은 본토인에겐 기득권이었지만 속주민에겐 취득권이었다.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도 시민권에 대한 자긍심이 사라졌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로마가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시민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권을 가지면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투표권, 공직 출마권, 고문받지 않을 권리, 재판 청구권, 소득의 10%인 속주세 면제권 등의 특권이 생겼다. 그래서 로마는 일부 속주민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속주 지도층이나 큰 공적을 세운 자, 장기 복무를 마친 속주 출신 군인·의사·교사, 로마제국 고위층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 등이 시민권을 어렵게 얻은 사람들이다. 취득권으로 얻게 된 시민권 정책이 가져온 효과는 놀라웠다. 국가의 책무인 인프라, 교육 등을 속주 출신 시민이 분담한 까닭에 로마는 최소의 비용으로 제국을 운영하면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속주의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인재 배출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속주화에 반발하는 이민족을 무마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카라칼라의 인기 영합주의는 곧바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으니, 먼저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속주민은 10%의 속주세를 부담했다. 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 물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를 부담하지만, 재정이 안정적으로 확충되지 못해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반면에 세원이 확실한 속주세를 걷지 못하니 재정이 악화되었고, 막대한 군사비 충당을 위해 특별세가 남발되니 사회 불만이 커졌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로마군은 정규군 15만 명, 보조병 1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민권을 획득한 속주민이 굳이 보조병으로 근무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넓어진 방어선에 징병 자원이 줄어들어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200년 동안 방위 전략으로 정착된 군사 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의 사회공헌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권 취득의 매력이 사라져버린 군인·의사·교사에 대한 지망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로마 사회의 장점인 계급 간 유동성이 사라지고 하층, 노예의 신분 상승 기회가 차단됐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포정치를 일삼던 카라칼라 역시 서기 217년 근위대장의 사주에 의해 살해되었다.

기사입력 2018-07-26 17:40:00 최종수정 2018-07-26 14:31:43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2> 군인황제시대 50년의 위기(서기 235~28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8-01 16: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자고 나면 황제가 바뀐다.” 

당시에 숨 가쁠 정도로 자주 바뀌는 황제 자리를 놓고 생겨난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살해된 후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드로스가 서기 235년 살해당함에 따라 군인황제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50년 동안에 26명의 황제가 교체되었고, 대부분의 황제들이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로마제국의 3세기는 무정부 상태였다. 군인황제들이 재임하다 암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흔들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정국 불안정이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이 기간을 무정부 상태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국경 지대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동시 다발로 이루어졌고, 세력을 회복한 페르시아의 사산왕국과 재앙에 가까운 전쟁을 벌였으며, 무수한 로마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속주들이 이탈한 데다, 20인 이상의 황제들이 폭력에 의해 급사했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위기의 늪에 빠져들었다. 군인황제시대가 지속됨에 따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하나뿐이었다. “군대를 호령할 수 있어야 하고, 충성하는 군대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황제가 자주 바뀐 이유 역시 물질적 보상에 대한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다. 

 

정국이 불안하고 민심이 사나워지자, 외적들이 동쪽과 북쪽 국경 지역에 빈번하게 쳐들어왔다. 이때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 벌어졌다. 페르시아 사산왕조(오늘날의 이란)의 샤푸르 1세 왕이 서기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샤푸르 왕은 과거 페르시아의 전성시대를 복원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서기 226년까지 외국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다가 사산왕조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샤푸르 왕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꿈을 가졌다. 이 꿈을 실현하려면 로마제국과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은 모두 과거에 페르시아가 지배했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샤푸르 왕은 먼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여 시리아의 도시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샤푸르 왕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본거지를 두고 페르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는 난공불락의 지역으로 알려진 에데사 요새가 있었다. 이바르 리스너는 『로마 황제의 발견』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샤푸르 왕은 자신의 아들 호르미즈드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군시켰다. 페르시아군은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과 흑사병이 로마에 재앙을 몰고 왔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군영에도 흑사병이 퍼졌다. 늙은 황제가 밤낮으로 하늘을 노하게 만든 로마의 실책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동안에 군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목을 조르듯 수천 명씩 죽어나갔다. 좌절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신들이 기독교들의 불경에 화가 나서 흑사병과 페르시아인들을 보낸다고 믿었다. 이 줏대 없는 노인은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을 막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푸르 왕이 에데사 앞에 나타났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이끌고 자신도 없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황제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스스로 힘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다. 영악한 샤푸르 왕은 협상을 계속해서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황제가 직접 협상장에 나올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회담장에 나온 발레리아누스는 생포되고 말았다. 

샤푸르 왕은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대했다. 황제의 망토를 입히고 쇠사슬을 채운 채 황제를 대중 앞에 끌어내어 창피를 주거나 산책을 시켰다. 왕이 말을 탈 때 황제를 엎드리게 한 다음 그의 등을 밟고 올랐다고도 한다. 심지어 황제가 죽자 박제로 만들어서 붉게 칠하여 로마의 영원한 수치로 전시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황제가 포로가 된 후 단독 황제가 되어 샤푸르 왕이 소아시아까지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샤푸르 왕은 후퇴하는 길에 로마의 피보호인이었던 시리아의 사막에 있는 팔미라의 추장 오데나투스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고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죽기 전에 제국이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개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놓았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중앙정부의 기강을 강화함으로써 군대의 기강을 바로세우고, 제위 찬탈자의 등장을 예방하는 일이었다. 

 

그가 취한 행정 개혁은 원로원 의원을 모든 군 고위 지휘관직에서 배제하고, 역량을 검증받은 기사 신분의 지휘관을 기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권력 찬탈을 노리는 원로원 출신 지휘관들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직업 장교들을 적절히 공급하여 군대의 기강을 확립하고 군대의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도 노렸다. 이처럼 개혁을 추진한 그였지만, 결국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군인황제시대는 서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렸다. ​ 


기사입력 2018-08-01 16:30:00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3>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서기 284~305)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8-08 17:51: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3세기 로마제국의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제국을 위기에서 구출한 인물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입신출세의 길을 걸었다. 황제의 기병 근위대장을 거쳐 서기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 황제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해결 과제를 이렇게 제시한다. 

“중앙정부의 권한과 권위를 강화하고, 국경 지대를 방어하고,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 속주들을 되찾고, 권좌를 찬탈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 유리한 발판이 되는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군대는 언제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소지가 있었다.” 

 

그가 취한 우선적인 조치는 서방과 동방의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군대의 오랜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세워 갈리아에 파견하여 서방을 책임지게 했다. 처음에는 부제(카이사르)의 칭호를 주고, 다음에는 정제(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부여했다. 공동 통치자가 된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또 신속한 육상 원정을 통해 게르만족을 갈리아에서 라인 강 동쪽으로 몰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서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진시켜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의 국경이 무척 길고 몰려드는 적도 많아서 황제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로마를 동서로 나눌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동쪽에 관심이 많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현재 터키의 이즈미트)에 궁전을 짓고 동방 황제가 되었다. 반면에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에 임명하여 밀라노를 중심으로 제국을 다스리게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서로 나뉜 대권을 다시 분할하여 두 사람의 유능한 장군을 부제로 임명하여 각각에게 동일한 권한을 주었다. 서기 293년, 네 사람이 분할하여 통치하는 ‘4분 체제’가 시작되었다. 두 황제는 각각 한 사람씩 부황제를 지명하고, 입양과 혼인을 통해 정치적인 결속을 강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갈레리우스를,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우스를 양자로 삼고, 지금까지 함께 살았던 아내를 이혼시키고 자신들의 딸과 결혼시켰다. 

 

광대한 영토는 4명이 분할하여 통치했다.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폰투스, 이집트, 소아시아를 맡았고,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는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 모이시아(불가리아), 트라키아를 위탁받았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했고,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은 사실상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었다.

4분 체제라고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선임 황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이는 제국을 넷으로 분할한 것이 아니라, 방위 책임 구역을 4곳으로 분리하여 담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사람 사이에는 서열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니어 아우구스투스로 최상위였고, 막시미아누스는 주니어 아우구스투스로서 두 번째 순위이며, 그다음으로 부제인 카이사르의 순위가 결정되었다. 

 

4분 체제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인격과 권위가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두 부황제는 두 분 정제를 지고의 권위자로 삼아 경의를 표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대해 젊은 세 동료 황제들은 공통의 은인으로서 감사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권력을 둘러싼 질시와 의심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결속은 세상에서 희한할 정도로 튼튼하였는 바, 그것을 음악으로 비유한다면 지휘자의 능숙한 리드에 의하여 오묘한 화음을 내는 4중창 바로 그것이었다.”

4분 체제가 신뢰와 조화를 이루면서 각종 개혁 조치도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조세 제도와 화폐 제도를 개선했다. 또한 동양의 전제국가의 의례를 도입하여 군주의 존엄성을 높이면서 황제 숭배를 강조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동양의 전제국가의 의례인 환관이 등장했다. 이는 황제와 신하 간의 거리 두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바로 환관이 맡게 된 것이다. 환관은 처음에는 관저의 집사 같은 사소한 위치에서 점점 역할이 중요해졌다. 3세기의 황제들은 병사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으면 살해당했다. 이제 환관의 역할은 환관정치로까지 발전하여 소위 ‘문고리 권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0년을 통치한 후 서기 305년에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여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주었다.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로마 멸망사』에서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권력 기반이 한창 탄탄하던 시점에 자발적으로 은퇴했다. 역사상 어떤 황제도 죽기 전에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온 적은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인물이 남달랐고, 그의 통치 방식도 남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4분 체제는 10여 년 동안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로마제국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국방을 재정비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서방에서 200년을 더 버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동방에서 비잔티움제국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로마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아우구스투스가 창안한 ‘원수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전제정(the Dominate)’으로 변화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제정은 주와 주인(lord and master)이란 뜻의 도미누스(domin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절대 군주정이나 독재정과 같은 의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전제정이란 말이 공문서에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입법 기능은 상실되었다.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황제가 집정관을 직접 임명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었다. 이를 보좌할 전문 관료 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문관과 무관의 분리는 더욱 심해졌으며, 관료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취한 조치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 및 행정 개혁은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군대 규모의 확대와 속주의 총독수의 증가, 4분 체제에 따른 4개의 제국 수도의 등장 등은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한 화폐 개혁과 세제 개혁을 단행했으나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력한 조치에 힘입어 제국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

기사입력 2018-08-08 17:51:00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4> 위대한 CEO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다 (서기 306~337)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8-15 17: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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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한 후 4분 체제는 주도권 싸움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런 20년 동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단일 체제로 만든 황제가 바로 콘스탄티누스다. 콘스탄티누스는 4분 체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서방의 부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분 체제의 모순을 막는 조치의 일환으로,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 인질 생활을 했지만, 개혁적인 황제를 가까이에서 따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는 배우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정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픽트족을 정벌하고자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병사하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방 정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방 부제의 지위만 인정했다. 그러는 사이 4분 체제는 서로의 영역 다툼으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영역을 점점 넓혀 서방을 지배하고 나중에는 동방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로마 전역을 평정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에 가져온 두 가지 큰 변화는 기독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다. 이 변화를 프리츠 하이켈라임은 『로마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 ‘밀라노칙령’을 선언하여 그동안 탄압받아온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받는다.” 

그리고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쟁점이었던 ‘아리우스파 논쟁’을 종식시켰다.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유사한 본질을 갖고 있는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다는 삼위일체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the Father)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지 않고 다른 본질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정통적인 신앙을 견지한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성자(the Son)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고, 삼위일체의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시간과 본질과 권능에서 한 분으로서 우주의 전능한 권능의 세 측면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이 양쪽을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라고 부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파를 공인하여 니케아신조를 선포했다. 이 신조는 삼위일체 교리를 재확인하고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그가 기독교를 이토록 부흥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기독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당시 이미 제국의 하층민뿐만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던 상황을 직시했다. 그래서 이미 힘을 잃어버린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심을 읽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또한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사제들에게 ‘신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황제권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후 기독교 군주들이 왕권의 근거로 들게 되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는 콘스탄티누스였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두 번째 획기적인 조치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그는 다신교가 지배하고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를 정했다. 서기 330년 5월 11일,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337년에 그가 죽은 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잔티움제국의 수도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사, 경제, 행정 개혁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제국을 안정 기조에 올려놓아 로마제국의 통일이 150년간 더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동시에 그는 박해받던 기독교를 공인하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로마를 정복한 야만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 직업 세습제를 실시하여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계승하도록 했다. 

나아가 기독교 제국을 위한 새 수도를 선택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비잔티움제국은 1,000년간 더 존속하면서 유럽과 근동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탠리 빙은 『로마처럼 경영하라』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위대한 CEO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는 주식회사 로마제국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그는 한창 세력을 뻗쳐가는 새 종교를 박해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의 본부를 옮겼다. 사실상 서로마에서의 영업 활동을 중단하고, 그곳을 비기독교인 유목민들의 손에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훌륭한 CEO였다. 그의 뒤를 이은 7명의 CEO도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누스로 명명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누렸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바람직한 승계 모델이기도 하다. 그가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부제를 떠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보고 배운 것들이 훗날 로마 전역을 통일하고 통치력을 발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알렉산드로스도, 앨프레드도, 샤를마뉴도, 예카테리나도, 프리드리히도, 그레고리우스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콘스탄티누스는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새로운 로마’를 세웠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주는 방파제가 되었으며, 그 영향은 로마가 사라진 이후에도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ifs POST>

 

기사입력 2018-08-15 17:30:00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5>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지다 (서기 378~395)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8-22 17:45:00 최종수정 2018-08-22 17:16:1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본문

 

“황제다운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서기 378년 황제에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이며 동서 양대 로마제국의 마지막 단독 황제였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수완을 발휘하여 4세기 말의 정치 안정에 기여했다. 그의 공적으로는 야만족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를 들 수 있다.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기에 야만족의 침공에 잘 대처했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자신감을 잃었던 로마군 병사들에게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또한 야만족의 정착을 원만하게 이끌었다. 

 

당시 훈족의 이동으로 발칸반도로 밀려오는 고트족을 더 이상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테오도시우스는 그들에게 도나우 강 남쪽에 영지를 주어서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렸다. 고트족의 승인은 이후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로마 군단에 게르만족 병사들이 많이 들어와 로마군이 게르만화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자영 농민이 사라지고 농노로 전환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평화적인 게르만화’라고 불리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로 진입하면서 로마제국의 붕괴 속도가 빨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또 다른 공적은 서기 392년에 정통파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점이다. 그는 로마의 전통 종교, 이교, 이단을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황제의 칙령에 의해 집회가 금지되었고, 많은 직업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언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3위 일체의 신앙에 입각하여 세례를 받은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정통파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로 공인함으로써 이후 중세로 이어지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라는 기독교의 양대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기독교 부흥 정책과 국교화 때문에 그는 기독교 역사가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서기 395년에 안타깝게 48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았다. 임종의 자리에서 총사령관 스틸리코에게 18세와 10세에 불과한 어린 두 아들을 부탁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고,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는 서방의 황제로서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었고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 통치하는 것은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분 체제에서 태동했다. 동로마와 서로마는 처한 정치적 상황도 달라서 갈라진 채 고착화되었다. 황제가 평범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로마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특히 서로마가 그랬다. 10세 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다. 유능한 총사령관 스틸리코가 있어 재위 초반은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스틸리코가 야만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스틸리코는 어머니가 로마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야만족인 반달족 출신이었는데,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스틸리코가 처형되면서 서로마는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나이가 들어서도 무능해서 자리만 지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서기 404년, 서로마의 수도를 로마 대신 라벤나로 옮겼다. 

 

불행하게도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어린이 황제 시대는 다음 대에도 계속되었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서기 408년에 사망했을 때 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서로마제국의 호노리우스 역시 서기 425년 6세밖에 안 된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제위를 계승시켰다. 6세, 7세에 불과한 어린이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세도 있는 대신들의 감독을 받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황제들이 장성한 후에도 독자적인 통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정국이 불안해졌다. 대신들 사이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가 계속되니, 제국 전체의 안녕이 신하들의 경쟁과 야심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다운 마지막 황제’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이 황제가 계속해서 제위를 유지하는 게 가능했을까? 군인들이 황제 암살을 밥 먹듯이 일삼던 3세기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현세의 최고 권력자는 신이 원했기 때문에 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독교와 동양식 전제군주가 가졌던 ‘왕권신수설’ 덕분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장례식에서 설교한 내용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에 잘 나타나 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지 않았습니다. 뒤에 남은 두 아들을 통해 살아 계십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도 지상에 남은 두 아들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장병 여러분도, 시민 여러분도 돌아가신 황제한테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젊은 두 후계자에게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군대를 장악한 사령관이 야만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야만족인 까닭에 이들이 황제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스틸리코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아들들을 부탁한 데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야만족 출신인 총사령관 자신이 스스로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고, 제국의 시민과 관리들도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어린이 황제의 제위 계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져 각각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소종파였던 기독교가 어떻게 400년 만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성장했고, 그 이후 줄곧 모든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정기문 교수는 『서양사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힘이다. 로마의 전통 종교는 공적으로 국가 종교의 형태였고, 사적으로는 현세의 기복에 머물렀다. 하지만 기독교가 현세의 삶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내세의 구원을 약속하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꼈다. 또 기독교는 형식주의나 의례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세상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고대인은 신분에 따라 사람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보편적인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기독교는 대단히 윤리적인 종교였다.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종교는 정의롭거나 윤리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고, 그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온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윤리적 삶을 권장했다. 모든 사람은 심판 받을 것이며, 그때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것 혹은 악하게 산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 신자들이 윤리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이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요인들 덕택에 탄압받던 기독교는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어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사입력 2018-08-22 17:45:00 최종수정 2018-08-22 17: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