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6 ~ 30>

2018. 11. 19. 23:05잡주머니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18세 애송이 옥타비아누스의 대담한 행동 (기원전 4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4-12 16:46:00 최종수정 2018-04-12 16:52:54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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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은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종조부, 즉 외할머니의 오빠였다. 영웅으로 생각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돌아가는 것이 자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지시로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 파견 나가 있었다. 앤서니 에버렛 『아우구스투스』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당차게 대처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지체 없이 로마로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카이사르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양자로 삼아 성까지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변에서는 로마에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우스가 살해할 수도 있으니 “로마로 가지 말고 기다리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가서 정면 돌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무명의 옥타비아누스순식간에 명문 귀족의 후계자로 끌어올렸다. 로마의 정치가들은 그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그리스에 처박혀 사태를 관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단시간에 귀국한 것이다. 국법을 지키기 위해 군대는 데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그리파를 비롯한 수행원들이 그와 함께 왔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키케로를 방문했다. 키케로가 이제는 아버지가 된 카이사르와 절친했고 존경하는 원로라는 이유로 찾아가 인사를 했던 것이다. 키케로는 자신을 존중해서 찾아온 옥타비아누스의 방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분이 좋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바로 부드러운 태도였다. 그는 인사성이 밝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주는 매력이 있었다. 

 

   예의 바른 옥타비아누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카이사르의 2인자인 안토니우스의 자택도 방문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쌀쌀하게 대했고 비협조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겠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돈이 필요했다. 로마에서는 존경받는 명사가 죽으면 그 후계자는 고인을 기리는 연극을 상연하고 경기 대회를 주최하는 것이 관례였다. 경기 대회는 무료로 초청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또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돈을 돌려주지 않자,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와 가까웠던 재력가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중에서도 명망이 있는 마티우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키케로가 훼방을 놓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를 계승하면 카이사르를 제거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마티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옥타비아누스의 부탁을 거절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5권에 실린 마티우스가 보낸 답장이 신선하다. 


   “키케로여, 당신은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경기 대회 자금을 내가 책임진다는 소문을 듣고 나한테 편지를 쓴 모양인데, 나는 이것을 개인의 의무로 받아들였을 뿐, 거기에 정치적인 의미는 전혀 없소. 위대한 인물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을 기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경의가 담긴 선물을 하는 것뿐이오. 나는 이 젊은이의 진지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소. 그 청년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소.”

 

   카이사르 추모 경기 대회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티우스경제계의 또 다른 거물 지원하면서 로마 경제계 전체가 지원하게 된 것이다. 대회는 카이사르가 태어난 7월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이 소식은 로마에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여겼던 옥타비아누스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추모 대회를 연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7일 동안 계속된 카이사르 추모 경기 대회에는 여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초대되었다. 참가한 시민들은 56회 생일을 앞두고 안타깝게 암살당한 카이사르를 그리워하며 암살자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불태웠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민들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나누어주었다. 상상하기 힘든 큰 대회를 애송이라고 생각한 젊은이가 성공적으로 해내자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로마 시내를 넘어 이탈리아반도 전체로, 그리고 속주에까지 알려졌다.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아들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다. 

 

   예상과 달리 옥타비아누스가 당차고 빠른 속도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혀나가자, 안토니우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원로원 8월 초에 회의를 열고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제안한 의제를 가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집정관 임기를 마치면 기원전 43년에 부임할 임지를 정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정안을 마무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결정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첫째,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를 의식하지 않고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둘째, 암살자들을 사실상 사면시켰다.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브루투스시리아 속주 총독이 된 카시우스가 공무를 띠고 이탈리아를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암살자들과도 손을 잡고 그들을 사면시켜서라도 옥타비아누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기사입력 2018-04-12 16:46:00 최종수정 2018-04-12 16:52:54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기원전…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4-19 17:30:51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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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투쟁에서 권력투쟁으로.”


   카이사르 암살에서 브루투스가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진행된 로마의 내전은 정치 투쟁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유지할 것인가, 한 개인이 통치하는 군주정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공화정과 군주정이라는 로마의 국가 시스템을 두고 싸운 정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투쟁에서 군주정이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순서는 누가 군주가 되느냐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앞으로 10여 년 동안 벌어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싸움권력투쟁인 동시에 정치 투쟁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카이사르가 설계해놓은 로마 세계의 청사진을 계승하느냐, 마느냐도 쟁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토니우스카이사르의 청사진의 전체 조감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야심 때문에 정치 투쟁의 성격도 포함하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5권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영욕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1인자가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격파한 필리피 회전이 끝난 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동쪽과 서쪽으로 영역을 분할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2년 동안 정치 투쟁으로 방치된 로마 세계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로마 세계의 동부는 안토니우스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한 결정은 안토니우스가 주도적으로 내렸다. 필리피 회전의 사실상 승자는 안토니우스였다. 허약한 체질의 옥타비아누스는 전쟁 기간 중 걸핏하면 앓아누워 전투에 지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승리한 까닭이다. 이런 역학 관계에 자신감을 얻은 안토니우스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다시 불태우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동부를 선택한 것은 파르티아 원정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인의 아킬레스건이다. 크라수스가 전쟁에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카이사르원정을 앞두고 암살당한 까닭에 미완의 숙제로 남겨진 땅이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다면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누리는 권위는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로마 세계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기에다 동부의 경제력이 서부보다 월등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속주세만 놓고 볼 때 동부의 징수액은 서부의 징수액보다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었던 것이다. 

 

   로마 세계의 명실상부한 1인자안토니우스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동쪽으로 가는 그 앞에 제후들은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동방의 제후들은 항상 승자 편에 서왔다. 경제력은 우월하지만 군사력에서 로마를 상대할 수 없는 그들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이제 안토니우스 앞에서 복종을 맹세했다. 동쪽으로 가는 안토니우스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다가 소아시아 남동부의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에 당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소환했다. 강요당했다고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연합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과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질책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가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 “독재자요, 깡패요, 주정뱅이요, 겁쟁이”라며 “몸이 건장하다는 것을 빼고는 아무 장점도, 교양도 없는 사람, 술에 취해 천박한 창녀와 시시덕거릴 줄밖에 모르는 검투사 같은 사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성격과 재능을 파악했다. 안토니우스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안토니우스를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승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대범하게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안토니우스기원전 41년 가을부터 기원전 40년 봄까지 이집트 궁정에서 여왕이 제공하는 호화로운 생활과 안락한 삶을 누렸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본국에서 악전고투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아내 풀비아군대를 모아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를 흔들기 위한 안토니우스의 책략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기원전 40년 2월 진압에 성공한 옥타비아누스는 반란 주모자인 풀비아루키우스를 그리스로 추방하는 것으로 반란을 마무리했다. 반란에 실패하자 안토니우스는 반란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해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아내는 도망간 그리스 땅에서 분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3두정치의 주역인 세 사람 브린디시에서 다시 만나 각자의 세력권을 3분하는 ‘브린디시협정’을 맺었다. 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안토니우스는 동부,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협정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홀로 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전처 폴비아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클로디아와 약혼했다.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이 약혼을 파혼하고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의 처고모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여기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가 태어났다. 

 

   재혼한 안토니우스는 아테네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로마 남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가정에 충실했다. 딸도 태어났다. 클레오파트라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토니우스가 오직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하기 위해 몰입하는 것처럼 보여 부하들도 안심할 정도였다. 

 

   기원전 37년 가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안토니우스는 둘째 아이의 해산을 앞둔 아내에게 로마로 돌아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떠났다.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티오키아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냈다. ​




기사입력 2018-04-19 17:30:51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클레오파트라 앞에만 서면 착해지는 남자(기원전 37~31)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4-26 18:08:16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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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달려왔다. 4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애인 관계를 청산하고 정식으로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클레오파트라 앞에만 서면 안토니우스는 순한 양처럼 착한 남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요구한 대로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식 결혼식을 올리고 두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다. 나아가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결혼 선물로 주었다. 그 대부분이 로마 속주이거나 로마가 동맹자로 인정한 제후의 영토였다. 안토니우스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헤롯 왕이 다스리는 유대뿐이었다. 여자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기가 막혔다. 로마법은 2중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로마의 패권 밑에 있는 많은 지역을 로마의 동맹국에 불과한 이집트에 넘겨버린 처사에 격분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런 비판도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만 하면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파르티아 원정기원전 36년 봄에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준비한 전력은 크라수스 때의 3배가 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병사만 해도 11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비해 파르티아군은 총병력이 4만 명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로마군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후들은 “원정의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 정복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집트 여왕이 로마군을 이용하여 야망을 달성하려 하는 것을 도와주기 싫어서 모두 파르티아 편에 섰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방어 전략인 경우에 제후들의 지위는 지켜지겠지만, 정복 전략이 성공하여 이집트의 영유권이 확립되면 자신들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여기서 전략의 차질이 빚어졌다. 로마는 로마 군단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원정지 주변의 제후나 부족을 로마 편으로 끌어들여 싸우는 방식을 채택해왔다. 카이사르도 늘 이러한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런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로마와 중동 연합군이 파르티아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파르티아와 중동 연합군이 로마와 대결하는 양상으로 바뀌어버렸다.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36년 3월에 출발하여 10월 말에 철수했다. 8개월 동안 로마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11월에 안티오키아퇴각했을 때 로마군의 상황은 처참했다. 로마군의 주력 군단병은 3분의 1을 잃어버렸다. 본격적인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전력 손실만 입고 무기력하게 퇴각해버린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 소식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로마에 알려졌다. 옥타비아누스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 지방이라고 불리는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일대를 평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안토니우스에게 지원군을 보낼 여력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는 달랐다. 지원 물자를 구입하고, 군자금을 마련하여 2,000명의 병사까지 고용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직접 안토니우스에게 갖다주려고 했다. 옥타비아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남편 안토니우스에게서 편지가 왔다. “군단병과 물자만 보내고, 당신은 로마로 돌아가라.” 아내는 이번에도 남편 말대로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동생 옥타비아누스는 크게 화를 내며 관계를 끊을 것을 종용했다. 누나를 걱정하는 동생의 분노와 충고도 현모양처인 옥타비아의 마음을 바꾸어놓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의 일반 민중들조차 분개하기 시작했다. 외국 여자인 클레오파트라를 좋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헌신하는 로마 여자를 무시하는 안토니우스의 처사를 보면서 마치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처럼 느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다시 시도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대신에 다음 원정지를 파르티아보다 쉬워 보이는 아르메니아왕국으로 정했다. 원정 시기는 1년 뒤인 기원전 34년 봄으로 결정했다. 아르메니아 원정은 저항 없이 싱겁게 끝났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과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개선식을 준비했다. 장소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였다. 

 

   이집트에서 치루어진 개선식은 로마인들을 또다시 격분시켰다. 개선식은 로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정서였다. 개선식이란 인간끼리는 축하하고 신들에게는 감사를 드리는 신성한 공식 행사였다. 따라서 로마 시민이 있고 그들을 보호하는 신들이 사는 땅인 로마에서 행해져야 했다. 다른 장소에서 실시한 개선식은 의미가 없었다. 

 

   곧바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세계 전체를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아내 옥타비아에게는 이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의결했다.

 

1. 기원전 43년에 결성되어 5년 뒤인 기원전 38년에 다시 5년 기한으로 경신된 ‘2차 3두정치’를 더 이상 경신하지 않는다.

2. 안토니우스가 결정한 사항들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로 간주한다. 

3. 로마 세계의 양분은 카이사르의 유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의제로 상정할 것도 없이 기각한다. 

 

   옥타비아누스일리리아전쟁을 끝내고 개선식도 로마의 전통을 따라 실행했다. 이제 안토니우스와의 싸움만이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저지른 실수와 과오를 모두 따져서 이 싸움을 개인 간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으로 몰고 갔다.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다.” 전쟁에서 명분은 중요하다. 권력투쟁이 아니라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자, 안토니우스 진영의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홍보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 






기사입력 2018-04-26 18:08:16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29> 옥타비아누스, 마침내 1인자가 되다(기원전 31~30)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5-03 17: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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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안토니우스가 머무르고 있는 그리스로 건너갔다. 마지막 운명의 결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던 안토니우스 역시 마지막 전투에 몰두했다. 클레오파트라 작전 회의에도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했다. 

 

   작전 회의가 거듭될수록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수들의 절망도 깊어갔다. “우리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집트 여왕의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다.” 이런 불만들이 쌓여가면서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진영을 이탈하는 장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장수가 이탈하면 그 휘하의 장병들도 함께 떠나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숙영지 하나가 텅 비는 일도 있었다. 격분한 안토니우스는 붙잡히는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지만, 이탈 행렬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토니우스 세력권에 있는 제후들 중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헤롯 왕이 다스리는 유대가 앞장섰다.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가장 먼저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의 뜻을 밝혔다. 안토니우스 진영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진영을 떠난 장교들은 “비록 안토니우스를 버렸지만, 그와 정면 대결하여 화살을 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는 휘하 부대에 배치하지 않고 귀국을 허락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탈영병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역사상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동쪽에서 미풍이 불어왔다. 프레베자 만에서 안토니우스군은 바람을 등지고 싸우게 되어 출발이 순조로웠다. 안토니우스의 전법은 해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을 포위하는 전략이다. 안토니우스군의 해상 전력은 520척이고, 옥타비아누스 400척이었다. 아그리파 프레베자 만의 좁은 어귀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전의 전반부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불던 동풍이 북풍으로 변한 것이다. 아비규환이 일어나면서 클레오파트라 “어서 돛을 올려라”고 소리치면서 도망가고 말았다. 도망가는 클레오파트라를 발견한 안토니우스도 돛을 올리고 뒤따라갔다. 그날 300척이 넘는 함대가 로마군에 붙잡혔다. 옥타비아누스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집트 선박은 전리품으로 뱃머리만 잘라내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파트라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상군은 8일 동안이나 사령관이 아무 소식도 없이 나타나지 않자,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속을 믿고 저항 없이 항복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가지 않고 오늘날 리비아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했다. 함께 따라왔던 수십 척의 군선과 6,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였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살고 싶으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둬달라”편지클레오파트라에게 보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계속 보내자, 안토니우스는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돌아왔다. 

 

   기원전 30년 봄,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서 각각 편지 한 통씩 받았다. 

“나는 자결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

“나는 퇴위할 테니 아들의 즉위를 인정해달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답장을 보냈다.

 

   7월 31일,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기병대와 안토니우스 기병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전투 중이던 안토니우스의 기병들이 갑자기 적진에 투항해버렸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죽었다고 안토니우스에게 거짓으로 알리게 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을 시도했다. 가슴을 찔러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투성이가 된 안토니우스는 부하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영묘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에서 초라하게 숨을 거두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영묘에 숨어 있는 그녀를 산 채로 잡아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궁으로 끌려왔다. 그곳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 3명은 살아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결심했다. 구차하게 한 여자로서 살아남기보다는 여왕으로서 죽고 싶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묻혀 있는 무덤에 술을 따라주고 싶다”영묘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말 없이 허락했다. 무덤 옆에는 독사가 숨겨진 무화과 열매를 가득 담은 바구니도 반입되었다. 독사는 야심으로 살아온 39세 여왕의 일생을 한순간에 마무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의 정장을 입고 여왕처럼 죽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30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집트는 동맹국에서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신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영지로 전락했다. 이집트에서는 신의 아들이 아니면 지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14년 동안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기사입력 2018-05-03 17:30:00



    • [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0> MBO의 원조, 철저한 목표 관리(기원전 29~서기 14) 본문듣기
      기사입력 2018-05-10 17:30:00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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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9년 8월,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사흘 동안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당시 개선식에서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이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오늘 승리했다고 개선식을 치르지만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생겨난 전통이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철부지라고 놀림받았던 옥타비아누스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로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섰다. 그 광경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카이사르가 기대한 대로 후계자로서 반석 위에 올라섰다. 만약에 후계자 선정이 잘못되었다면 카이사르는 역적으로 남아 불우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후계자가 성공했기에 카이사르의 역사도 성공한 역사가 된 것이다. 

화려한 개선식은 끝났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1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는 무엇일까?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야만족으로부터 로마 세계를 보호해야 하는 안전 보장의 문제다. 

제국 내에는 평화가 깃들었지만,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너머에서 부유하고 평화로운 제국 속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만족들로부터 변경 지역을 보호해야 했다. 

 

둘째, 50만 명의 군대를 적절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문제가 남았다. 

야만족들보다는 오히려 제국 군대가 내부의 평화와 안정에 훨씬 더 큰 잠재적 위협이었다. 야심차고 무자비한 장군들의 지휘하에 그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국가를 전복시키고 분열시킬 수 있었다. 악티움 해전 이후에 옥타비아누스는 70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에서 30개 군단은 유지하고 나머지 40개 군단은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군대 해산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역한 군인들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었다. 

 

셋째, 정치체제와 행정 개혁을 단행하는 문제다.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고, 카이사르가 약화시킨 원로원의 위신과 권위를 회복시키고, 국가의 수장으로서 군대를 장악하고, 제국 행정 체계를 수립하고, 속주의 공공 재정과 행정을 조절하고, 외교 문제를 감독하고, 자신의 적절한 후계자를 발굴하여 키우고, 고대의 도덕률을 되살리고, 국가 종교를 재건해야 했다. 

 

이처럼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MBO(Management by objective), 즉 목표 관리였다. MBO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MBO에는 장기 목표단기 목표가 있다. 장기 목표는 5년, 10년, 20년도 걸릴 수 있다. 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 목표, 중기 목표를 설정하여 목표를 달성해나가야 한다. 오늘날 경영에서 중시하는 MBO의 원조가 바로 옥타비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에 의한 평화를 정책의 방침으로 내걸었다. 카이사르클레멘티아에 이어 팍스 로마나를 제시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육신은 죽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기원전 30년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린다. 아니,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타도한 공화정 로마를 대신하는 제정 로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주의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모든 개혁을 구상하고 기반을 닦아놓았다.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가 깔아놓은 마스터플랜 위에서 카이사르가 꿈꾸었던 세계를 구현해나갔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비교할 때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회고주의자들이 내전이 계속된 14년 동안에 대부분 죽거나 노쇠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둘째,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라는 동년배의 협력자를 얻어 팍스 로마나를 기치로 신생 로마제국을 굳건하게 출발시킨 점이다. 


   카이사르“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보여주려 노력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보고 싶어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현실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 치밀한 목표 관리를 통해 목표를 달성해나갔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달하는 수단은 각각 달랐다. 왜 그랬을까? 옥타비아누스가 처한 환경이 카이사르와 달랐기 때문이다. 

 

첫째, 옥타비아누스신중한 성격을 타고났다. 그는 몸이 약했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매사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스타일이었다. 대신에 치밀하고 기획력이 뛰어났다. 

 

둘째, 카이사르의 암살을 통해 살해당하면 목표 자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교훈을 터득한 까닭에 카이사르처럼 급진적으로 개혁을 서두르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1세이고, 옥타비아누스는 33세였다. 카이사르는 55세에 암살당했고, 아우쿠스투스는 76세까지 장수했다. 

 

   2세기 초의 역사가 타키투스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비교한 내용이 흥미롭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정치가로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보다 적절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 




기사입력 2018-05-10 17: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