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역사 - 한국사 속의 광장문화

2018. 12. 3. 01:05잡주머니



[스크랩] 광장의 역사 - 한국사 속의 광장문화| 문화유산답사
무심재|조회 92|추천 0|2012.06.30. 08:05

광장(廣場)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넓게 비어 있는 공간이다. 비워진 공간이지만, 광장은 숱한 사건이 벌어졌던 역사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광장의 탄생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 만들어진 가로 90m, 세로 109m의 넓이를 한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로 대관식과 무도회 등 각종 축하 행사와 종교 의식, 종교 재판과 정치적 처형 등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출처: gettyimages>

 

 

서양에서 광장은 그리스 Agora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Forum, 중세도시의 Place로 계승되어 왔으며, 지금도 도시 공간의 핵심에 위치한다. 광장은 종교, 정치, 사법, 상업, 사교 등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시민들의 사회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시민의 편의에 의해서 특별하게 조성된 광장이 없었다. 단지 넓은 공터와 길이 광장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시에는 길은 있으되 광장은 없었다고 말해질 정도다. 하지만 형태와 기능은 달랐지만, 광장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장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광장


청동기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마을을 만들고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고인돌을 만드는 등 공동 작업을 함께 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마을 공동의 행사를 통해 서로간의 일체감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고, 내부 갈등과 이웃 간의 분쟁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주거 유적지인 부여 송국리 주거 유적지(기원전 8~7세기경)를 비롯해 울산 천상리, 울산 교동리 등 다수의 유적지에서 마을 광장을 볼 수 있다. 제주도 최대의 마을 유적지인 삼양동 선사유적지(기원전 1세기경)의 경우는 집회용 화덕시설을 중심으로 작은 광장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많은 움집들이 둥그렇게 들어서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집집마다 취사를 하기 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모여 공동의 노동을 하고, 생산물을 분배하고, 의식(儀式)을 치르는 곳으로, 공동으로 이용하는 땅인 광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의 광장


신라의 제 3대 임금인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 5년(서기 28년) 신라에서는 왕녀 2사람으로 하여금 6부의 여성을 둘로 나눈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 짜기 경기를 주관하게 했다. 이때 여성들은 매일 아침 큰 부(部)의 마당(廣場)에 모여 밤 10시까지 공동으로 노동을 하며 길쌈을 짰다. 길쌈 짜기 경기가 끝난 후에는 함께 노동의 기쁨을 만끽하며 온갖 놀이를 즐기는 행사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추석(秋夕)의 기원이 되는 가배(嘉俳)였다.

 

삼한(三韓)의 각국은 5월 씨뿌리기를 시작으로 10월에 모든 농사일을 마친 후에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떼를 지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즐기며 놀았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천(祭天)행사는 누구나 함께 참여하는 행사였다. 고구려의 제천행사 동맹(東盟)은 국중대회(國中大會) 즉 나라의 큰 모임이었다. 제천행사에는 왕과 귀족, 백성들이 모두 참석하여 신분에 관계 없이 함께 술을 마시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제천행사가 벌어지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었다. 제천 행사가 끝나면, 전쟁, 외교, 왕위 계승 등 국가의 중대사가 이 자리에서 함께 의논되기도 했다.

 

이처럼 삼국시대 초기의 광장은 공동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기는 곳,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고대의 도시 설계와 광장

신라 왕경도. 신라 월성 북쪽의 넓은 길이 주작대로로, 이 길이 신라시대에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차츰 왕권이 강해지면서, 광장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차츰 백성들로부터 멀어졌다. 왕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귀족에 한정되었고, 백성들은 지배의 대상일 뿐 그들의 소리 하나 하나에 주목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왕이 사는 도성을 건설하는 데 있어 더 이상 광장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할 공간이 아니었다.

 

중국과 조선의 도시 설계에서 중요한 원칙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로 궁(宮)을 기준으로 왼쪽(동쪽)에 종묘, 오른쪽에서 사직, 그리고 앞쪽에 관청거리, 뒤쪽에 시장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통치자를 위한 도시 설계였을 뿐이었다. 도시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는 궁(宮)의 남문과 외성(外城)의 남문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주작대로(朱雀大路) 정도였다. 주작대로를 기준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나누는 도시 설계 방식이 고대 중국 도성제도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발해(渤海)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만, 이 보다 앞서 5~6세기경 고구려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앞 시가지, 백제 사비성, 7세기 이후 신라 금성에서도 확인이 된다. 고대 국가에서는 궁궐 문 앞과 주작대로가 곧 거리광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볼거리가 행해지다


신라의 수도 금성은 궁성인 월성 남쪽이 남천(南川)과 남산(南山)으로 가로막혀 북쪽으로 도시가 발전했는데, 월성의 북문에서 북쪽 방향으로 주작대로가 들어서고 좌우에 관청을 배치하는 형태였다.

 

681년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왕위에 오른 직후,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을 반란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 죽이고 부인을 궁에서 내쫓았다. 다음해 새롭게 김흠운(金欽運)의 딸의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신문왕은 왕비를 맞이하는 의식을 거대한 볼거리로 만들었다. 왕비는 화려한 수레를 타고 시종하는 관리들과 여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대하게 행차를 했다. 그리고 왕궁의 북문에 이르자 수레에서 내려서 궁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작대로 좌우를 가득 메운 백성들은 왕비를 맞이하는 행사를 관람했다. 왕은 1년 전 왕비를 몰아내면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셈이었다. 로마시대에 로마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적군을 물리친 장군들의 개선(凱旋) 행차를 로마시내 광장에서 행하였듯이, 신라 역시 왕실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결혼식 행사를 왕궁 북문 앞 광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궁문 앞 광장


고려시대 최고의 축제는 2월에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10월 15일 서경(西京), 11월 15일 개경(開京)에서 열리는 팔관회(八關會)였다. 개경에서 열리는 팔관회는 구정(毬庭- 궁중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큰 집에 있던 넓은 격구장)에서 열렸는데, 구정은 고려시대에 국가의 중요행사가 열리는 광장 역할을 담당했다. 구정에는 윤등(輪燈- 바퀴 모양의 등)을 설치하여 밤새도록 훤하게 불을 밝혔다. 오장(五丈-15미터) 높이의 비단시렁(綵棚) 2개가 설치된 곳 앞에서는 여러 놀이(百戱)와 춤과 노래 공연이 벌어졌다. 신선의 옷을 입은 악단(四仙樂部)과 용과 봉황, 코끼리, 말 등을 장식한 수레 배(龍鳳象馬車船)가 등장하는 등 화려한 축제가 벌어졌다. 그런데 구정 옆에는 궁궐의 전각 가운데 하나인 위봉루(威鳳樓) 또는 신봉루(神鳳樓)라 불리는 2층 누각이 있었다. 고려의 왕들은 이곳에 나가 팔관회를 관람했다. 또한 팔관회를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었다. 매년 열리는 팔관회는 왕과 귀족, 백성들이 모두 모여 즐기는 축제였다.

 

축제는 구정에서만 열리지 않았다. 1170년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여러 종친들에게 명하여 궁궐의 동쪽 문인 광화문(廣化門) 좌우편 행랑에 비단 장막을 치게 하고, 금은, 주옥, 실크, 산호, 대모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비단시렁을 세우고 여러 놀이를 구경하게 했다. 궁궐 문 앞이 곧 행사장이 된 셈이다.

 

 

명령을 전하는 광장


궁궐 문 앞 광장은 왕이 백성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는 위봉루에 거동하여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축하 인사(朝賀)를 받았다. 위봉루는 궁궐 안에 위치한 누각이면서도 궁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은 즉위 직후 위봉루에서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려 자신이 새로운 정치를 할 것임을 보여주며,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내었다.
 
광장은 임금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궐 문에는 ‘상위(象魏)’라고 하여 법조문을 내걸어 두는 관례(慣例)가 있었다. 이는 백성들이 법을 몰라 죄를 위반하는 경우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각종 법령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 방(榜)을 내걸어 알리기도 했다. 반면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사람들이 지켜보도록 하기 위해서 궁문 앞에서 매를 치기도 했다.

 

 

귀족들만이 목소리를 내는 광장

165년 10월 고구려 7대 차대왕(次大王, 재위: 146~165)이 재상인 명림답부에 의해 시해되고,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이 왕위에 올랐다. 다음 해 2월 차대왕의 아들인 추안은 도망갔다가, 사면령이 내리자 이를 듣고 왕문(王門) 즉 궁궐 문 앞에 나가 자신의 죄를 말하고 이를 용서해준 것에 감사함을 고했다. 763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풍악(風樂)을 너무 즐기자, 대나마(大奈麻- 신라 10위 관등) 이순(李純)이란 자가 궁문 앞에 나가가 이를 그만둘 것을 아뢰었다. 이러한 사례처럼 궁궐 앞 광장은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설상의 인물인 요(堯)임금은 궁문(宮門)에 북을 설치하여 놓고, 용건이 있는 자는 직접 이 북을 쳐서 왕에게 아뢸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를 따라 조선에서는 1401년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달아 두었다. 이렇게 백성의 뜻을 위에 전달하는(民意上達) 제도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사소한 사건에도 신문고를 이용하는 무질서 현상이 초래되자,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여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부 관리들에 불과했다. 문종(文宗, 재위: 1450~1452) 대까지는 신문고 제도가 활발히 운영되었지만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1771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에 의해 다시 부활하기는 했으나, 신문고를 창덕궁의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설치하는데 그쳤다. 백성들이 궁궐 안에 들어가 감히 신문고를 울릴 수는 없었으니, 백성의 뜻이 임금에게 직접 전달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광화문광장 설계시 조감도. 광화문광장이 들어선 태평로 일대는 조선시대에도 광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궁문 앞 거리였다.

 

 

정변(政變)이 벌어진 광장

545년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은 와병 중에 죽고 말았다. 다음 왕위를 두고 그의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의 외척 세력간의 다툼이 벌어져 궁문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2천여 명이나 죽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660년경 당나라 사람 장초금(張楚金)이 편찬한 [한원(翰苑)]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신하들 가운데 최고 직위인 대대로(大對盧) 직위를 놓고 귀족들이 무력 대결을 펼쳐 선정하였는데, 왕은 궁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는데 급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말기 왕권이 약해졌을 당시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귀족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궁문 앞 광장에서 무력 대결을 일삼았음을 볼 수 있다.

 

궁궐 앞 광장을 장악하는 자가 곧 권력을 쥘 수 있음은, 918년 6월 태봉의 궁예(弓裔) 왕을 몰아내기 위해 왕건(王建)을 비롯한 무리 1만여 명이 궁문 앞으로 모여들자 궁예가 자신의 왕위가 무사하지 못함을 알고 북문으로 도망간 사례를 통해서도 볼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잡상인 등 많은 이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여, 궁문 앞이 마치 시장처럼 혼잡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수문장에게 명해 궁문 관리를 보다 철저히 시키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궁문 앞에서의 이상한 움직임은 궁궐 호위부대가 철저히 막았다. 광장을 장악하는 자가 곧 권력을 쥘 수도 있었기에, 광장은 권력자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 받는 곳이었다.

 

 

권력자의 광장, 대중의 광장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북경을 상징하는 천안문광장. 하지만 유럽의 광장과는 달리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고 관리되는 광장이다.

서울 시청 앞의 서울광장.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광장 조성 계획이 세워져 차도를 없애고 잔디광장을 만들었다. 잔디광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삼일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 숱한 사건들이 벌어진 곳이었다.
<출처: (cc) pcamp at Wikipedia.org>

 

 

광장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광장이 대화와 토론의 마당이자 화합의 장소로서 기능하여, 도시 생활의 중심으로 고대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터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부터, 광장이 대화와 토론 마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권력자는 대중에게 공연이나 축제를 보여주거나,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는 장소로 광장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광장은 무력을 가진 자의 투쟁의 장소였고, 제한된 신분을 가진 자들만 자신의 의견을 권력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뿐, 일반 대중들의 의견이 소통되는 공간은 되지 못했다. 광장에서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제대로 모아진 적도 없었다. 1898년 종로 거리 광장에서 열린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처음으로 민의(民意)가 모아진 사례로 언급될 수 있는 정도였다.

 

20세기 후반 우리 역사에서는 광장 문화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71년 12만평 규모로 여의도에 만들어진 5.16광장은 100만 명을 동원해 행사를 치룰 수 있는 거대한 광장으로, 권력자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탄생했다. 이후 서양의 도시를 본 따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마다 광장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 문화는 관(官)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이 광장에 모여 정치적 요구를 밝히면 정부에서는 이를 막는 것에 급급해 광장 사용을 원천 봉쇄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에서 등장한 길거리 응원문화는 광장 사용의 주도권이 권력자에서 대중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광장문화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할 따름이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시대 마을 풍경], 2010;최종규, [광장에 대한 인식], [역사교육논집] 13-14집, 1990;이도학, [고구려의 내분과 내전], [고구려연구] 24집, 2006;장태현, [중국광장의 형성과 변천과정에서의 현상], [산업과학연구] 21-2호, 청주대학교, 2004;주종원, [도시공간요소로서의 광장], [도시문제] 12-4, 1977;안설, [광장문화에 대한 담론연구], 서강대 석사논문, 2007.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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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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