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2018. 11. 26. 19:43차 이야기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고려도경(高麗圖經)
낙민|조회 127|추천 0|2016.06.06. 20:00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1) 방 병 선 *

 

 


Ⅰ. 머리말
Ⅱ. 중국 출토 고려청자의 현황
Ⅲ. 중국 출토 고려청자의 성격
Ⅳ. 중국 청자에 미친 고려청자의 영향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천하제일 고려청자의 제작 배경으로 중국의 청자 제작 기술 이전을 빼놓을 수 없다. 유약 제조
와 가마 축조, 기형과 장식에 이르기까지 고려청자의 제작 개시부터 발전 과정 내내 중국 청자의
영향이 지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중국 청자를 포함한 백자,
흑자 등이 전 시기에 걸쳐 출토되었고, 고려청자의 기형과 장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중국 자기
와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11세기 이후 고려청자는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장인들은 12세기
비색과 상형청자에 이어 상감기법을 청자에 응용하면서 독특한 미감의 청자를 창출하였다. 이러
한 독창성과 우수성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고려청자는 애장품의 대상으로 부상하여 중국으로 수출
되었다. 중국의 송, 원대 황족은 물론 일반 귀족과 민가에 널리 사용되었음은 최근 출토 양상을 통
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한중 양국의 도자교류사에서 고려와 송, 원대 도자교류를 언급할 때 가장 주목을 받았
던 것은 신안침몰선 같은 주로 한국 출토 중국청자들이었다. 신안 해저선에서 엄청난 양의 중국도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이 논문은 2012년도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특성화연구비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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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인양, 보고되면서 국내외 학자들에게 한중 도자교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한국내 출토 현황이 분명한 중국 송, 원대 자기들은 기술적, 교류사적, 도자사적 파급효과가
커서 교류사에서도 중국에서 고려로의 영향 관계에 연구의 비중이 높았다.1) 그러나 최근 중국내
에서 고려청자의 출토가 급증하면서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확산되었다.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고려청자의 대외무역에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고고학적 자료 소개에 그치
지 않고 점차 고려청자를 주목하고 고려청자 자체의 양식이나 기술 뿐 아니라 중국 도자에 어떤 영
향이 있을까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2)
본 논문도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그간 중국 출토 고려청자에 대해서는 중국과 한국 학자
들 사이에서 이미 몇 차례 언급이 되었고 고려와 중국의 도자 교섭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

 

1) 김영원,「고려자기와 중국자기의 비교연구」, ?고고미술?171․172, 한국미술사학회, 1986, 「통일신라시
대 한․중교역과 자기의 출현」,?장보고와 21세기?張保皐 대사 해양경영사연구시리즈3, 혜안, 1999, 「한반도 출토 중국도자」,?우리 문화속의 中國 陶磁器?, 대구박물관, 2004; 김윤정, 「高麗後期에서
朝鮮初期 象嵌靑磁에 나타난 元代 磁器의 影響」,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김인규, ?월주요
청자와 한국 초기청자?, 일지사, 2007; 김재열,「고려도자의 상감기법 발생에 관한 일고찰」,?호암미술
관 연구논문집?2, 삼성문화재단, 1997; 김홍남,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소장 扶安 柳川里 출토 高麗
象嵌靑瓷 人物畵紋의 주제 ‘趙孟頫·菅道昇四樂圖’-麗·元 문화교류의 産物로서」,?美術史論壇?16, 한
국미술연구소, 2003;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新案海底遺物?Ⅰ,Ⅱ,Ⅲ(1983-1984); 방병선, 「나말여
초 청자 제작과 전통기술」,?선사와 고대?30, 한국고대학회, 2009, 「오대 북송 요주요 청자 제작기술
의 혁신과 전파」,?강좌 미술사?35,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이종민, 「14世紀 後半 高麗象嵌靑磁의
新傾向」, ?美術史學硏究?201호, 한국미술사학회, 1994, 「고려시대 靑磁 梅甁 연구」,?講座美術史?27,
한국미술사연구소, 2006; 이희관,「高麗後期己巳銘象嵌靑磁의 製作年代問題에 대한 새로운 접근」,?미
술사학연구?217·218, 한국미술사학회, 1998, 「高麗翡色靑磁의 출현과 초벌구이」,?對外交涉으로 본
고려청자?, 강진청자자료박물관, 2003,「韓國 靑磁製作의 開始時期問題에 대한 諸說의 檢討」,?白山學
報?, 白山學會, 2004; 임진아, 「고려청자에 보이는 북송 ․ 요대 자기의 경향」,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
사논문, 2005; 장남원,「高麗中期 靑瓷의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논문, 2003; 鄭信玉,「고려 전반
기 자기에 나타난 중국 북방 자기의 경향」,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2005; 한성욱, 「新安
船 出土 高麗靑磁의 性格」, ?(신안선 발굴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14세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유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6; 禚振西, 「耀州窯와 高麗靑瓷의 관계에 대하여」?미술사논
단?제 7호, 한국미술연구소, 1998; 秦大樹, 「宋․金代 북방지역 瓷器의 象嵌工藝와 高麗 象嵌靑瓷의
관계」?미술사논단?, 제 7호, 한국미술연구소, 1998.
2) 金載悅,「중국으로 건너간 고려자기」,?湖巖美術館硏究論文集?4, 1999; 장남원,「중국 元代유적 출토 고
려청자의 제작시기 검토-內蒙古 集寧路 窖藏 출토 龜龍形靑瓷硯滴을 중심으로」,?湖西史學?第48輯,
호서사학회, 2007; 최건,「중국 원대묘 출토 청자상감모란운학문매병」,?고미술?43(사단법인한국고미술
협회, 1997; 耿寶昌,「閑話朝鮮高麗靑瓷」,?博物館硏究?, 1985年 3期; 馮先銘,「中國出土朝鮮, 伊朗古代
陶瓷」,?馮先銘中國古陶瓷論文集?, 北京: 紫禁城出版社, 1987年; 陸明華,「略談上海博物館所藏高麗
瓷」,?文物?, 1988年 6期; 林士民,「北洋航路拓展與朝鮮半島制瓷文化交流」,?浙東文化論叢?, 中央編譯出
版社, 1995年; 金立言,「略論高麗靑瓷」,?收藏家?, 1996年 4期; 馬爭鳴,「高麗靑瓷與浙江靑瓷淵源析」,?中
國文物報?, 2000年 4月; 劉毅,「中國發現的高麗靑瓷硏究」,?中原文物?, 2001年 3期; 李仲謀,「汝窯與高
麗靑瓷-兼論高麗靑瓷的傳世器物推斷汝窯瓷器的部分造型」,?文化遺産硏究集刊?二緝, 上海古籍出版社,
2001年; 陳杰,「宋元時期東北亞海上交流的考古學觀察」,?北方文物?, 2008年 1期; 小林仁,「中國出土高麗
靑瓷考」,?中國古陶瓷硏究?14輯, 北京: 200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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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의 경우 출토 상황만을 고고학적으로 소개하는데 그치거나 중국청자와의
접점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에서도 중국 출토 고려청자 연구가 이루
어졌으나, 일부 유물에 한해서만 언급되어왔다.
이에 본고는 최근까지 중국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를 파악하고, 고려청자의 유색과 장식 기법이
실제 중국청자에 응용된 사례와 중국 청자에 미친 고려청자의 영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최근까지 중국에서 간행된 발굴보고서와 관련 논저 등을 살펴보고 실제 중국 현지 박
물관을 답사, 조사한 자료 등을 종합해서 중국 출토 혹은 전세된 고려청자를 정리하고자 한다. 또
한 고려청자가 중국청자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관련 문헌을 분석하고 중국과 고려청자의
제작기술을 중심으로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고려시대 중국과의 도자교류사에서
중국 중심의 일방적인 연구 시각을 보다 상호보완적이고 다양하게 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Ⅱ. 중국 출토 고려청자의 현황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중국 출토 고려청자는 정식 발굴은 적은 편이고 그 수량 역시 국내에서
출토된 동시기 중국자기의 수량에 비하면 적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고려청자의 전성기에 해당하
는 12세기 비색청자와 고려청자의 독특한 기술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고려 후기 상감청자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고려청자의 출토 범위는 화북의 북경과 내몽고 지역, 하북성 석가장
시, 요녕성 요양시 등지를 포함해서 화남으로는 송·원 시대 주요 수출 항구였던 절강성 항주, 영
파 일대를 비롯하여 중국 전역에 이른다.

 

1. 화북 지역
① 요녕성 일대
요녕성에서 출토된 고려청자 대부분은 상감청자로, 주로 원대의 교장(窖藏)과 묘장에서 출토되
었다. 묘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한, 두 점으로 그 수량은 많지 않으며, 조질로 다소 질이 떨어진
다.
(1) 요령성 낙양시 소남문 원대묘에서 상감청자완(도 1)과 접시 2점이 출토되었다.3) 한 점은 사

 

3) 丁麗, 「遼陽出土的高麗青瓷」, ?遼海文物學刊? 第2期(瀋陽: 辽宁省考古博物馆学会·遼寧省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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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청자상감국화문베개, 遼寧省 洛陽縣 蘭家鄉石灰窯출토, 13세기, 遼寧省博物館
도1-1, 2. 청자상감국화문완, 13-14세기, 遼寧省 洛陽市 小南門 元墓 출토
도2-1, 2 청자상감국화문팔각접시, 경상남도 밀양시 瑩源寺址 출토, 높이 4.9cm.
구경 12.1cm, 국립중앙박물관
발 기형으로 굽의 저부
부터 구연까지 반원형의
곡선을 이루고 구연부와
저부 가까이에 각 두 줄
의 선이 백상감되었다.
상하 선상감 안쪽으로 4
군데 쌍권 내에 국화문
이 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면에는 여지문
이 상감으로 시문되었
다. 굽바닥에는 3개의
규석 받침 흔적이 있다.
또 다른 출토품은 팔각
접시로 각 면마다 두 송
이의 국화문이 횡으로
상감 시문되었다. 태토
는 비교적 두꺼운 편이며 이와 유사한 유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영원사지에서 출토된 국화문 팔
각접시(도 2)가 있다. 이 두 유물들은 모두 고려 후기 14세기의 유물로 추정되며, 또한 팔각완의 구
연이 약간 파손된 것 외에 비교적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2) 요령성 낙양현 난가향 석회요에서 1964년 청
자상감국화문베개(도 3)이 1점 출토되었다.4) 장방형
으로 각 변이 내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었으며, 각 면마
다 쌍권 내에 국화문 혹은 당초문이 상감으로 장식되
었다. 완형으로 출토되었으며 중국 내에서 출토된 고
려 상감청자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예로 이와 비슷
한 유물이 일본 교토시 헤이안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5)


(3) 요령성 낙양시 북원5·6호묘에서 출토된
1999); 戴鴻文, 「高麗青瓷及其真偽鑒定舉要」, ?收藏家? 第04期(北京: 收藏家雜誌社, 1999), p. 17.
4) 馬爭鳴, 「中國出土的高麗青瓷」, ?東方博物?04期(杭州: 浙江大學出版社, 2009), pp. 59-60.
5) 高正龍, 「京都出土の高麗青瓷象嵌方枕」, ?硏究紀要第2號?, 財團法人京都市埋藏文化財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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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청자상감국화당초문완, 遼寧省 洛陽市 龐夾
河1號墓 출토, 13세기
도7 청자상감화훼문완 도면, 哈爾
濱市郊 元代 窖藏 출토, 13세기,
구경 19.2cm, 저경 6.6cm, 높이
7cm(田華等, 「黑龍江省哈爾濱市郊
發現元代瓷器窖藏」, ?考古? 1999
年5期에서 재인용)
도4 청자상감국화문합, 遼寧省 洛陽市 北園5號墓
출토, 13세기
도5 청자상감국화문완, 遼寧省 洛陽
市北園6號墓 출토, 13세기
고려청자는 각기
1971·1972년에
차례대로 발견되
었다. 5호묘에서
는 상감청자국화
문원형합(도 4)가
1점, 6호묘에서는
상감청자국화문
발(도 5)가 1점 출
토되었다. 전자는 뚜껑 전면에 국화문이 시문되었으
며, 이 국화문을 둥그렇게 백상감으로 상감된 연주
문으로 에워쌓았다. 후자는 저부에서 구연부로 반원
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구연부로 갈수록 안쪽
으로 오므라드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외면에는 국
화문이 상감으로 시문되었으며, 구연부 가까이에 현
문 띠가 상감되었다. 바닥은 3개의 받침 흔적이 있으
며, 시유가 고르게 되지 않아 군데군데 유약이 말리
는 현상을 보인다.


(4) 요령성 낙양시 방협하1호묘에서도 청자상감국화당초문
완(도 6)이 1점 발견되었다. 외측 기면 전체에 당초문 종속문대를
두르고 그 아래 이중 원문 안에 국화문을 4곳에 배치하고 원 밖에
는 당초문을 상감한 양식이며, 내면에는 구연부에 종속문대를 상
감하고 가운데 여지문을 상감하였다. 기형은 구연 부분이 직립하
며 굽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좁아져서 굽에 이르
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런 형태는 14세기 전반 고려청자 완의
특징이다.

② 흑룡강성 일대
러시아 인근 연해주의 흑룡강성 금대 여진 유적지에서 상감청
자편이 출토된 바 있다. 또한 하얼빈시 교외 원대 교장에서도 상
감청자화훼문완(도 7) 1점이 출토되었다.6) 유물 사진은 공개가
되지 않았으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구연부가 외반된 완으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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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8 청자神龜形연적, 內蒙古 元代 集寧路
遺址 출토, 12세기 후반, 높이 7.2cm, 길
이 10.6cm, 內蒙古自治區文物硏究所
도9 청자상감국화문고족배, 內蒙古 敖
漢旗 瑪尼罕鄉 五十家子村 寧昌路 遺址
출토, 13세기
측면에는 4개의 국화
문이 상감되었으며, 내
측면은 바닥 저부 중심
에 쌍권 안에 국화문이
시문되었다. 구연부 주
변에 3줄의 현문과 기
벽에 4개의 국화문이
상감으로 시문되었다
고 한다. 굽 안쪽에는 3
개의 받침 흔적이 확인
된다.

 

③ 내몽고 일대

(1) 내몽고 원대 집녕로 유적지에서는 2003년 청자신구형연적(도 8)이 1점 발견되었다.7) 상
형청자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등장하는 비색자기의 전형적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으로 이와 유사한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서도 확인되고 있다.
(2) 내몽고 오한기 마니한향 오십가자촌 영창로 유적지에서도 청자상감고족배(도 9) 1점이 발
견되었다.8) 잔의 태질은 조질이며 구연부는 외반되었고 굽다리는 심하게 외반된 형태이다. 잔과
고족 기면 전체에 쌍권의 국화문과 현문이 장식되어 있다. 구연부 일부가 파손된 것 외에는 완형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 밖에 요 중경 대명성 유적과 적봉 하와자토성 유지에서도 고려 상감청자 파편이 발견되었다
고 하나 출토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④ 북경시
1980년 북경 풍대구 금 대정24년(1184)의 편년을 가진 오고론와론묘에서 완전한 청자호로형
6) 田華, 胡秀傑, 李桂芹, 賈鳳致, 王秀文, 「黑龍江哈爾濱市郊發現元代瓷器窖藏」, ?考古? 第05期 (北京: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99), p. 95.
7) 陳永志主編,?內蒙古集寧路古城遺址出土瓷器?, 北京: 內蒙古自治區文物考古硏 2004; 孫永誌, ?內蒙古
集寧路古城遺址出土瓷器?(北京: 文物出版社, 2004), p. 89.
8) 邵國田, ?敖漢文物精華?(內蒙古市: 內蒙古文化出版社, 2004), p. 193.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19
도11 청자상감완편, 蓬萊市 인양 원대 3
호 침몰선, 14세기
도12 청자상감국화문완편, 蓬萊市
인양 원대 3호 침몰선, 14세기
도10 청자호로형수주, 北京 豐
臺區 金 大定24年(1184) 烏古
論窩論墓 출토, 높이 28.3cm,
北京首都博物館
수주(도 10)이 발견된 바 있다.9) 당시 발굴 보고서에는 이 유물을 하
남성 림여요(臨汝窯)의 생산품으로 판단하였다가 이후 풍선명(馮先
銘)에 의해 고려청자로 밝혀졌다.10) 또한 고려 특유의 비색을 띠고
있는데다가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⑤ 산동성
2005년 산동성 봉래시에서 인양된 여러 척의 원대 침몰선 중 3호
선박에서 2점의 고려청자완이 확인되었다.11) 이 3호 선박은 지금까
지 중국에서 발견된 고려선박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3호선 4번째 선창에서 발견된 청자 편(도 11)은 이미 파손되어 일부
만 확인되나 외벽에는 수파문과 연주문이 상감으로 시문되었다. 굽
저부에는 역시 규석받침 흔적 3개가 확인된다. 또 다른 하나는 6번
째 선창에서 발견된 청자상감국화문완(도 12)로 완 내부에는 12엽의 국화문이 시문되었으며 그 주
변으로 다시 연판문이 둘러싸여 있다. 발굴 보고자는 이를 조선 초의 유물 즉 분청사기로 인식하고
있으나12) 양식적으로 고려
후기 청자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이 선박이
발견된 봉래는 과거 고려와
무역에서 중요 항구였던 등
주항이었다. 북송 대중상부
8년(1015)에 등주항에 고려
관을 설치하였으며, 이러한
교역은 원대 이후에도 지속
되었다.

 

⑥ 하북성
9) 孫猛, 「北京金墓出土瓷器綜述」, ?絲綢之路?04期(蘭州: 西北師範大學, 2012), p. 25.
10) 馮先銘, 「中國出土朝鮮·伊朗古代陶瓷」,?中國古陶瓷論文集?(北京: 紫禁城出版社·兩木出版社, 1987),
p. 330.
11) 袁曉春, 「蓬萊發現高麗鑲嵌青瓷探析」, ?當代韓國? 01期(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 pp. 77-80.
12) 袁曉春, 앞의 논문, p. 79.
20 • 강좌미술사 40호
도13 청자상감모란운학문매병, 河
北省 石家莊市 後太保 元代 史天澤
(1202-1275) 墓(M1) 출토, 높이
46cm, 구경 6.7cm, 저경 17.2cm,
河北省文物硏究所
하북성 석가장시 후태보 원대 사천택(史天澤:1202- 1275)묘
(M1)에서 출토된 대형 고려청자상감모란운학문매병(도 13)은 국
내는 물론 중국 도자사학계에서 매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대
표적 유물이다.13) 사천택 가족묘 중에서도 유물이 발견된 묘는 기
타 7개의 묘군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며 부장품 역시 매우 풍부하
다. 이에 발굴자는 여러 사실들을 종합 분석한 결과 사천택묘로
추정한 바 있다. 여기서 출토된 고려청자 외에도 중국의 가요(哥
窯)와 용천요계의 청자도 같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청자상감모란
운학문매병은 상당히 양질의 유물로 이와 비슷한 유물로, 기형과
문양 구도에서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국화문
의 형식에서는 삼성 리움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국화문매병을
들 수 있다.14) 사천택묘 출토 청자상감매병의 제작 연대는 사천택
묘가 3인 합장묘임을 감안한다면 마지막 합장 시기인 사천택 사
후 2~30년 후인 1300년을 하한 연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15)

 

2. 화남 지역
  
① 강소성
(1) 1950년 강소성 동리진에서 청자상감매죽유조문매병(도 14) 1점이 출토되었다.16) 황색이
도는 짙은 회갈색을 띠는 이 유물은 흑백상감 기법으로 문양을 시문하였다. 주문양으로 대나무, 버
들나무, 매화를 차례로 시문하였으며, 당대 회화에서 유행한 버드나무 위에 새가 앉아 있는 화조화
의 형식을 차용하였다. 견부와 저부에 각기 연판문의 종속문을 배치하여 3단의 문양대를 형성하
였다. 짧고 외반된 경부와 풍만한 견부를 가지고 있으며 저부까지 갈수록 급격하게 오므라드는 S
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문양과 기형적 특징은 대략 14세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2) 강소성 남경시 남교 우수산에서도 1951년 청자상감유련문매병(도 15) 1점이 출토되었

 

13) 彭善國, 「宋元時期中國與朝鮮半島的瓷器交流」, ?中原文物? 02期(鄭州: 河南博物院, 2001), p. 79.
14) 謝明良,「對於史天澤墓的一點意見-兼評<石家莊後太保村史氏家族墓發掘報告>」, ?中國陶瓷史論集?(臺北:
允晨文化, 2007), pp. 191-214.
15) 劉毅, 「幾件中國出土高麗青瓷的年代分析」, ?收藏家? 06期(北京: 收藏家雜誌社, 2010), p. 24.
16) 이 작품은 용인대 김윤정 교수의 주선으로 필자와 김교수, 석사졸업생 송영은 등이 2009년 2월 남
경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실견, 조사한 바 있으며 크기와 외형, 청자 유색 등에서 청자상감연화유
문매병과 매우 유사하다.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21

 

도16 청자상감용문관, 安徽省 滁縣 元代
墓葬 출토, 14-15세기, 높이 23cm, 구경
9.5cm, 저경 9.3cm, 安徽省博物館
도14 청자상감매죽유조문매병, 江蘇
省 同里鎮 출토, 14세기, 높이
28.5cm, 구경 3.5cm, 저경 11.8cm,
南京博物館
도15 청자상감유련문매병, 江蘇省 南
京市 南郊 牛首山 출토, 14세기, 높이
30.5cm, 구경 5cm, 저경 11cm, 南
京博物館
다.17) 유색은 탁한 회청색을
띠며 버드나무와 연화문이 흑
백 상감으로 시문되었다. 외
반 된 짧은 구연부와 풍만한
어깨에서 S자형으로 저부로
갈수록 오므라들다가 다시 바
닥 부분에서 외반하는 기형을
지녀 고려 후기 14세기 매병
의 특징을 보인다. 문양은 커
다란 연꽃과 축 늘어진 버드
나무를 크고 엉성하게 상감하
였고 모래받침 번조를 한 것
으로 보인다. 현재 이 유물은
남경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② 안휘성
1960년 안휘성 저현 원대 묘장에서 청자상감용문관
(도 16) 1점이 출토되었다. 구연에 비해 저부가 좁은데다
가 견부가 상당히 풍만하게 퍼져있어 역삼각형의 형상이
다. 기면에는 상, 중, 하 3단 구성으로 견부에는 화훼문이
저부에는 연판문이 시문되었고 중간에는 흑백상감으로
처리된 S자형의 기형에 4조 용문이 기면 전체를 가득 채
우고 있다. 기형이나 문양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대략 14
세기 말에서 15세기 전반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 초기 분청사기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③ 절강성
(1) 항주시 남송 황성 유지 발굴이 1980년대 진행되면서 성벽은 물론 성벽 주변의 태묘, 림안부
17) 이 작품 역시 2009년 2월 현지 방문 조사한 바 있으며 연화와 유문이 큼직하고 대담하게 상감되어
있다. 두 매병은 번조방식과 상감기법, 기형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 크기는 유련문매병이 약간 크
지만 제작 시기는 매죽유조문매병이 약간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22 • 강좌미술사 40호
도17-1. 2 청자화형완편, 12세기, 杭州市 半山 宋代墓 출토 도18 청자용문편, 12세기, 南宋 皇城 遺
址卷煙廠출토
치, 공성인렬황후댁, 노호동관요 등 남송 시기의 중요 유적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다
량의 남송 관요 자기는 물론 고려청자도 일부 출토되었다.18)
(2) 1967년 진행된 항주시 반산 송대 묘 발굴에서 고려청자화형완편(도 17) 1점이 확인됐다.19)
현재 절강성 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유물은 구연이 넓고 바닥이 깊은 형태로 굽 안쪽에는 3개의 규
석 받침 흔적이 있다. 완의 외벽에는 문양이 없으며 내벽에는 음각으로 모란문이 시문되었다. 이
묘에서는 '紹興十九年(1149)' 명의 동도금관인이 발견되기도 하여 고려청자의 편년에 중요한 자료
를 제공한다.
(3) 1980~90년대까지 이루어진 남송 황성 유지 주변 발굴에서 망강문, 태묘항, 성두항, 주보항,
고사방항 등지에서 고려청자편이 발견되었다.20) 이 외에도 현재 항주의 권연창은 문헌 기록 및 고
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남송 시기의 3성6부의 국가 기구가 위치했던 곳이다. 또한 1988년 '香糕
磚'이라고 새겨진 남송 어도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도 음각으로 용문(도 18), 모란
문, 하화문 등이 장식된 고려청자편이 발견되었으며 질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다.
(4) 2004년 항주시문물고고소에 의해 발굴된 남송 공성인렬황후(1162—1233)댁 유지에서 고
려청자편 14점이 확인되었다.21) 이 유적은 항주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발견된 첫 번
째 남송시기 고대 유적으로 황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출토된 고려청자는 비색청자(도 19)와 상
감청자(도 20) 두 종류로, 발견 당시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상당 부분 파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표본 대부분 태질이 견고하고 유색과 상감 기법 모두 양질에 속한다. 특히 출토 장

 

18) 鄧禾穎, 「南宋早期宮廷用瓷及相關問題探析-從原杭州東南化工廠出土瓷器談起」, ?東方博物?01期(杭州
: 浙江大學出版社, 2012), pp. 16-24.
19) 馬爭鳴, 「杭州出土的高麗青瓷」, ?東方博物?04期 (杭州 : 浙江大學出版社, 2008), p. 109.
20) 馬爭鳴, 앞의 논문, p. 111.
21) 馬爭鳴, 앞의 논문, p. 111.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23

 

도19 비색청자편, 杭州市 南宋恭聖仁烈皇後
(1162—1233)宅 遺址 출토, 杭州市文物考古硏
究所
도20 청자상감편, 杭州市 南宋恭聖仁烈
皇後(1162—1233)宅 遺址 출토, 杭州市
文物考古硏究所
소인 남송 공성인렬
황후 유지는 송 영
종 가태 2년(1202)
황후로 즉위된 공성
인렬황후 양씨의 가
택으로 건물주의 신
분이 확실한 만큼
이 곳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5) 송·원 시대에 국제 무역항으로서 매우 중요한 항구였던 영파에서도 여러 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었다. 먼저 영파는 아니지만 영파에서 출발한 한국 신안해저에서 발견된 신안선에서 고려청
자가 발견되었다. 신안선은 당시 이곳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침몰된 원대 선박으로
여기에서 발견된 7점의 고려청자는 발견 당시 선창의 하부에 선적된 상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선적되어 출항하였을 가능성이 높다.22) 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안선 출토 7점의 고려청자
역시 중국에서 출토된 고려청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원대 부두인 동도로 유적에서 고려
상감청자편(도 21) 2점, 고려사관 유지에서 수 점의 고려청자가 보고된 바 있다. 또한 영파 시내에
서도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그 중에는 상당수의 고려청자도 포함되어 있다. 가령 1993년 영
파시 동도로 원대층에서 청자상감화훼문 표본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23) 남겨진 파편 조각에는 백
상감, 흑백상감 등으로 모란, 호접, 권초문 등이 시문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도로 '시박사
(舶司)' 유지에서도 청자상감국화문합의 뚜껑(도 22)이 발견되었다.24) 합의 중간에 시계 방향으로
영희문이 흑백상감으로 시문되었고, 그 주변을 둘러싸는 국화문이 육각형태의 연주문 안에 흑백상
감으로 장식되었다. 매우 정교한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상당한 양질의 유물에 속한다.

 

3. 대만
대만의 동쪽 해상에 있는 섬인 란서 지역 옹관장에서 고려청자편 7점(도 23)이 출토되었다.25)

 

22) 한성욱, 「新安船 出土 高麗青瓷의 性格」, ?신안선 발굴 30주년 기념 -14세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유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6), pp. 346-347.
23) 馬爭鳴, 「中國出土的高麗青瓷」, ?東方博物?04期(杭州: 浙江大學出版社, 2009), pp. 59-60.
24) 馬爭鳴의 앞의 논문에서는 이 유물을 罐의 뚜껑으로 보았으나 한국 출토 혹은 전세품으로 보아 합
의 뚜껑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주석 19와 동일.
24 • 강좌미술사 40호

 

도21 청자상감편, 12-13세기, 寧波市 東渡路元代層 출토 도22 청자상감국화문합 뚜껑, 13세기, 영
파시 東渡路'市舶司' 遺址출토
대략 12-13세기에 해당하는 유물로 알려져 있으며 태질이 두껍고 조질의 청자이다. 이와 관련하
여 대만대 사명양(謝明良) 교수는 고려가 직접적으로 란서에 고려청자를 수출할 가능성은 매우 낮
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았다.26) 또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도 조질
의 고려청자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중국 전세 고려청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중국 대륙은 물론 중국 인근 지역에서도 고려청자 출토는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는 상
황이다. 또한 현재 중국의 활발한 고고학 발굴 활동으로 보건데 중국 출토 고려청자는 앞으로도 충
분히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보고된 자료를 토대로 정리를 해보자면, 중국 출토 고려청자는 시기적으로
12-14세기에 해당하며, 그 중에서도 13-14세기 즉, 고려후기 상감청자 전성시기가 주를 이룬다.
출토된 지역의 양상을 보면 크게 정치 집권지·상업 중심지 등의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집권지라면 송대의 수도가 위치했던 개봉이나 항주 황궁 일대로, 비색청자류가 주로 출토되
는가 하면, 원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원 대도인 북경을 비롯한 북방 일대에서는 상감청자류가 집중
적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송·원대의 상업 중심지였던 산동의 봉래, 항주 영파에서도 이 시기를 아
우르는 고려청자들이 발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발굴 보고는 없지만 박물관과 개인 소
장의 항주 일원 출토 고려청자도 근년 들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항주 남송관요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운문병편(도 24)의 구름 문양은 12세기 후반 전형적인 상감 장식의 구름의 형태를 보여

 

25) 徐韶韺, 「蘭嶼椰油村Rusarsol遺址調查報告」, ?南島研究學報? 第二卷 第一期 (臺東縣 : 國立臺灣史
前文化博物館, 2008), pp. 55-84.
26) 謝明良, 「有關蘭嶼甕棺葬出土瓷器年代的討論」, ?臺灣史研究? 第19卷 2期 (臺北:中央研究院臺灣史研究所,2012), p. 201.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25

 

도23 청자 일괄편, 대만 蘭嶼 지역 甕棺葬 출토 도24 청자상감운문병편, 12세기 후반, 南宋官
窯博物館
준다. 또한 귀비(貴妃)명 청자뚜껑편과 탁잔편 등이 현재 남송관요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27)
Ⅲ. 중국 출토 고려청자의 성격
고려는 500여 년간 단일 왕조로 존속한 반면 중국은 남북방에 걸쳐 다양한 국가가 성쇠를 거듭
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동일 기간 동안 북방의 송과 요, 금을 비롯해서 남방의 남송과 후대 원에 이
르기까지 다양하게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하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크게 남송을 포함하여 송대
와 원대로 구분할 수 있다. 교류 활동에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중국의 국제질서 하에 이루어진 소위
'조공무역' 외에도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 역시 각종 문헌과 고고학 발굴 성과에서 이미 여
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도자 무역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무역 활동으로 분명 '조공무역' 및 '사
무역'의 형태로 이루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에서는 적지 않은 수량의 고려청자가 확인되고 있고, 품질에 있어서
도 양질부터 조질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또한 장식이나 종류 역시 대체적으로 고른 편이
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으로 유입된 고려청자는 어떠한 경로로 어떻게 소비되었을까? 또한 중국
청자의 조형과 장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앞서 소개했던 중국 출토 고
려청자를 중심으로 송대와 원대로 나누어 그 성격을 각각 고찰하고자 한다.

 

27) 南宋官窯博物館編,?南宋瓷器精品 淸·雅?(北京: 中華書局, 2010), pp. 166-167.
26 • 강좌미술사 40호

 

1. 송대 유적 출토 고려청자
11-12세기 고려와 송과의 무역 왕래는 비교적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962년 고려는 처음으로
960년에 건국된 동아시아의 새로운 나라인 송나라에 사절을 파견하고 토산물을 바쳤다.28) 이것
이 송과 고려의 첫 외교 관계의 시작이자 첫 무역이었다. 두 나라간의 무역 규모는 이후 날로 커져
갔고 1030년에 이르러서는 고려에서 293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사절단을 송에 파견하여 금은
동기를 비롯하여 말, 향유, 인삼, 세포, 유황 등 여러 물품을 바쳤다.29) 그러나 거란의 고려 침공 이
후 송과 관계가 단절되면서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고려는 줄곧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로서 정기적
인 사절의 왕래와 교류에 집중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 송과의 교류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
며, 1030년 이후 대송 외교가 단절과 회복을 거듭하다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원래 고려는 민간에
의한 요 및 금과의 국경무역은 물론 해상무역도 원칙적으로는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 상인
에 의한 무역은 점차 시들한 반면 송상(宋商)에 의한 해상무역은 꾸준히 존속해 오다가 1030년 이
후는 더욱 활기를 띠어 무신정권기까지도 이어졌다.30)
이후 1071년부터는 양국 간에 우호적 분위기와 함께 적극적인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국교가 재개되고 난 이후 송의 고려에 대한 대우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가령 수도인 변경에서
는 동문관에서 고려를 접대하였고, 신종 원풍 년간에는 ‘고려사를 대우하는 것이 최고로 후했으며,
연변의 정자도 모두 일신하여 ‘고려정’이라 불렀다’고 한다.31) 특히 고려정관(高麗亭館)은 규모가
매우 장대하고 아름다워 이를 짓기 위해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다가 그 괴로움에 도망가는 자가 있
을 정도였다고 한다.32) 그러나 금의 흥기와 이로 인한 요의 멸망, 뒤이은 북송의 멸망은 양국관계
전개의 결정적 변수가 되었다. 당시 고려는 현실적으로 새로이 강대국으로 등장한 금에 대해 신중
한 입장을 보이다가 결국 칭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간
절하게 원병을 요구하던 송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양국 관계는 소원해지면서 남송 고종시기에 이
르러서는 공식적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된다. 이후 효종 융흥 2년(1164)에 고려의 사신이 왔다는
사실이 전해지지만 사서에 구체적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33)

 

28) ?高麗史?권 2, 光宗13년조.
29) 朴眞奭, 「宋과 高麗의 무역에 관한 몇 개 문제」, ?白山學報?제 68호(백산학회, 2004), p. 268.
30) 송상에 관해서는 다음 논저 참조. 이진한,?高麗時代 宋商往來 硏究?, 경인문화사, 2011.
31) 朱彧, ?萍州可談?(四庫全書本) 卷2, “元豐待髙麗最厚, 沿路亭館皆名髙麗亭.”; 李錫炫, 「宋 高麗의 外交
交涉과 認識, 對應 - 北宋末 南宋初를 중심으로」, ?中國史研究? 제39집(중국사학회, 2005), p. 126에서
재인용.
32) ?東坡全集? 巻15, “元豐七年, 有詔京東淮南築髙麗亭館, 宻海二州騷然有逃亡者. 明年軾過之, 歎其壯麗留
一絶云.” ; 李錫炫, 앞의 논문, p. 127.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27

 

이처럼 고려와 송과의 공식적 관계는 통시적으로 우호와 단절을 거듭하며 진행되었고, 공식적
인 조공무역은 양국 간의 관계에 의해 행해졌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간에서 이루어진 사무역은
국교가 단절되었을 때에도 상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송의 입장
에서는 국가재정수입의 증가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 무역에 임했으며 이는 고려와의 관계
에서도 마찬가지였다.34) 고려와 남송과의 무역 주도는 주로 송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송상은 현종
3년(1012)에서 충렬왕 4년(1278년)까지 약 260여 년간, 130회에 걸쳐 고려에 입국하였다. 130
회의 입국 가운데 문종대가 43회, 의종대가 21회, 현종대 13회, 숙종대가 12회로 나타나 있다.
송상은 11․12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고려와 교역하였던 것이다.35) 고려는 2백 년에 걸친 송의 관
계에서 고려측이 송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60회 안팎이며, 송에서 고려에 보낸 사신의 횟수는
30여 회 정도였다. 그러나 송상이 고려에 입국한 횟수가 130회에 이르는 것은 물론 국교 단절 시
기에도 송상의 고려 입국은 고려와 송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가 매우 긴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36)
이러한 배경 탓에 송대 유적에서 출토된 고려청자 역시 송상들에 의한 사무역으로 중국에 유입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수량은 많지 않으나 그 품질에 있어 양질과 조질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일부 발견된 지점에 따라 고려청자 소용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송대 유적 출토 고려청자 중 주목되는 유물은 남송시기 황궁 주변이나 남송 공성인렬황후댁 유
지에서 발견된 청자(도 19, 20) 일괄이다. 이곳은 국가 기구 및 황족의 주거지로 비교적 양질의 고
려청자가 발견되었다. 상술한 것처럼 남송과 고려의 관계는 금나라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였고, 송상을 통한 교역만이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남송 황실 소용 고려자
기도 이들을 통해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남송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袖中錦)?에
는 ‘고려비색’이 천하제일이라 평가하였는데 이는 최상급의 고려청자가 상당수 유통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고려와 금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북경 풍대구에서 출토된 금 대정24년(1184)의
편년을 가진 오고론와론묘 출토 청자호로형수주(도 10)도 눈여겨 볼만하다. 당시 고려는 금과의
책봉 관계 때문에 남송과의 사이가 상당 소원했었다. 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남송보다는

 

33) ?宋史? 卷487, 高麗傳, p.14052.
34) 姜吉仲, 「南宋과 高麗의 政治外交와 貿易關係에 대한 考察 : 남송과 고려의 정치외교와 무역관계에
대한 고찰」, ?慶熙史學?16·17호(경희대학교사학회,1991), p. 180.
35) 宋商의 고려 입국 횟수에 관한 자료는 다음 논문을 참조; 김철웅, 「高麗와 宋의 海上交易路와 交易
港」, ?中國史研究? 제28집(중국사학회,2004), pp. 105-106.
36) 김철웅, 앞의 논문, p. 106.
28 • 강좌미술사 40호

 

금의 영향력이 더욱 지배적이었고, 또한 고려 입장에서는 국경을 맞닿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남
송보다는 금이 더욱 두려웠던 존재였다. 고려는 1126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고 금에게 조공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오고론와론(烏古論窩論)묘 출토 청자수주가 이런 외교 활동의 결과물일 것이다. 묘주
오고론와론은 금 태조를 따라 출병하여 요를 멸하는데 협력한 것은 물론 금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
운 소위 금의 개국공신이기 때문이다. 오고론은 금대 중요 부족 중 하나의 명칭이며, 와론은 이름
을 뜻한다. 그는 태조의 2녀 필국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오고론와론묘 주변에는 부부합
장묘와 피장자를 알 수 없는 무덤 2기 등으로 보아 아마도 가족묘군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의 가족
묘의 규모는 상당히 큰데 이는 아마도 본인도 황가였고, 그의 아들 오고론원충(1139-1201)역시 금
태조의 손자인 세종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자라 세종의 장녀인 노국공주와 결혼한 황가이기 때문
일 것이다. 오고론와론의 생몰년은 사서나 묘지에도 적혀 있지 않으나, 중국 학계에서는 ?와론
지?에 그가 중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대략 천권원년(1138)경으로 추정하고 있다.37)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항주의 황궁 유적이나 북경의 금대 황족묘 유적 모두 상급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었지만, 유통 경로와 과정은 당시 고려의 두 나라에 대한 외교적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
문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대에는 주로 송상에 의해 자기 수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
이며, 금의 경우 사신 교류를 통한 조공에 의해 고려청자를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원대 유적 출토 고려청자
징키스칸에 의해 건국된 몽고는 1279년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복잡했던 12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지나 원의 중국 통일로 인해 13세기 후반은 비교적 안정화된 국제질서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고려 역시 전쟁이후 원과의 우호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고려와 원의 관계에서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바로 원나라의 대외 무역에 대한 적극적 태도이다.
원나라는 대외무역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비교적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원대 대외무
역은 육로와 해상무역이 있었는데, 모두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원은 해상무역을 대단히 중
요시 여겨 해상무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시박법'을 제정하고, '
번방'을 설치하고 중국으로 오는 외국인과 외국 상인을 우대하였다. 또한 해상무역에 대한 통제와
독점을 강화하고 재정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관상무역을 실행하기도 하였다.38) 원은

 

37) 馬爭鳴, 「中國出土的高麗青瓷」, ?東方博物?04期 (杭州 : 浙江大學出版社, 2009), p. 61.
38) 楊照全, 「14世紀 아시아 船運과 文化交流-韓中關係를 中心으로」, ?신안선 발굴 30주년 기념 –14세
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유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6), pp. 115-116.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29

 

동방과 서방 등 100여개 국가들과 무역을 실시하였고, 이 중에는 고려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원과 고려와의 무역은 원이 멸망하는 1368년까지도 무역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교류
를 하였다. 철학, 불교, 문학, 언어, 희곡, 면화, 의학, 역법, 건축, 서예, 회화 등 광범위한 문화적 교
류는 양국 사회의 정치·정치·경제·문화 발전에 매우 중요한 촉매 작용을 하였다.39)
대외 교섭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원의 대외 정책은 실제로 중국 출토 고려청자를 통해서도 어
느 정도 짐작이 된다. 중국 출토 고려청자의 대부분은 원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북방 지역과 대외
무역 항구였던 영파항에 집중되었으며, 시기적으로도 13-14세기에 속해있다. 출토품의 종류는 초
기 상감청자부터 쇠퇴기 조질청자까지 다양하다.
원대 유적의 고려청자는 분묘, 소비지, 상업지(항구)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분묘 출토품 중에
서는 가장 잘 알려진 하북성 석가장시 후태보 원대 사천택묘 출토 청자상감모란운학문매병(도 13)
을 들 수 있다. 사천택 및 그 가족들은 원대 초기 하북지역에서 가장 큰 지방 세력이었다. 몽골 정
권하의 세후(봉건영주)의 한 사람으로 후에 쿠빌라이가 원나라의 정권을 잡자, 등용되어 재상이
되었다. 또한 쿠빌라이의 한인영주 해체정책의 주요 대신 중 한 명으로 그의 자손 역시 원나라 훈
신 집안으로 오래 번영하였다. 그의 무덤에서는 고려 상감청자 외에도 정치한 관요 청자와 용천요
청자가 동반 출토되기도 하여 그의 권세를 실감케 한다. 이러한 그의 묘에서 고려 후기 대표적인
청자상감매병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원대 귀족들에게 고려 상감청자의 지위가 당대 최고의 중국도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이상으로 여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외 북방 지역과 남방 항구 지역에서 13-14세기의 고려 상감청자가 발견되었다. 사천택묘와
같은 최고 권세가의 묘는 아니지만 다양한 성격의 유적에서 발견된 상감청자는 원대에 들어서 이
미 다양한 계층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3세기 후반 원으로 공납되는 고려의 조
공품에는 고려의 자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대표적으로 화금청자가 있다. ?고려사? 조인규전의 '화
금자기'와40) 역시 ?고려사? 충렬왕 23년(1297) 기록 중 '금화옹기'를 원에 바쳤다는 기록이 그것
들이다.41) 황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소용되던 고려상감청자는, 1342년 편찬된 ?지정사명지?에서
고려의 고급 무역품으로 고려청자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원에서 상감청자가 고급품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2)
원대 유적 출토 상감청자의 발견 수량은 송대 유적과는 달리 상당수인데, 중국인의 고려에 대한

 


39) 楊照全, 앞의 논문, pp. 120-125.
40) ?高麗史?第105卷, 列傳, 趙仁規傳.
41) ?高麗史?世家 第31卷, 忠烈王 23年.
42) 김윤정, 「高麗後期 象嵌靑磁에 보이는 元代 磁器의 영향」, ?美術史學硏究?249(한국미술사학회, 2006),
p. 169.
30 • 강좌미술사 40호

 

새로운 인식과 이에 대한 이국적 취향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송대의 월주요와 정요, 요주요, 용
천요계 청자의 장식 기법과 유사했던 이전의 고려청자에 비해 상감청자는 확실히 중국의 청자와
는 다른 장식 기법을 사용한 독특한 청자였다. 특히 상감 위에 금채를 한 화금청자의 경우 중국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미감으로 원의 황제에게 조공으로 바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사천택묘를 위시하여 북방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고려청자는 과연 어떤 경
로를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을까? 원대의 교역을 보면 원 세조초 수개월간 고려와의 교역을 허용
하였다는 자료는 있으나 공인 민간무역이 있었다는 명백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송 이래
무역 방식은 별다른 차이 없이 행해져서 원과의 무역 역시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43) 이와
관련하여 발견 지역 대부분이 고려 입장에서 볼 때 육상루트를 이용한 유입이 유리하고 또한 충혜
왕(재위1330-1332, 복위1339-1344) 당시 원에서 행해진 해로 금칙 때문에 해로보다 육로를 선택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북방 지역 출토 유물들이 육로를 통한 유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44)
반면 문헌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 하카다항이 목적지였던 신안선(1323년 침몰)을 통해
14세기 전반 강소, 절강 등의 해로를 통한 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최근 봉래시에서 발견
된 고려선박과 여기에서 발견된 고려청자(도 11, 12) 역시 이러한 무역 상황을 잘 말해준다. 선박
이나 출토 유물 양상으로 봐서는 원말명초(1350-1380)에 해당되어 14세기 중반 산동반도의 등주
고항(현 봉래)를 통한 고려와 원의 해상무역을 확인할 수 있다.45) 원말 산동반도는 고려는 물론 일
본과의 교역에 있어서도 중요한 항구였다. 등주고항은 수대(隋代) 이래로 중국 4대 통상 항구이며
중국 최고의 군항이었다. 이처럼 고려청자의 중국으로의 유통 경로는 각 시기별로 육로와 해로, 그
리고 사신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에서 폭 넓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Ⅳ. 중국 청자에 미친 고려청자의 영향
고려청자와 중국청자와의 양식적 유사성은 오랜 기간 논의되어 왔다. 유색이나 장식에 있어 경

 

43) 김병근, 「신안선과 동아시아 13-14세기 국제무역」, ?수중고고학에 의한 동아시아 무역관계 연구?
(국학자료원, 2004), p. 291.
44) 이종민, 「고려 후기 대원도자교류(對元陶磁交流)의 유형과 성격」, ?震檀學報? 114호(진단학회, 2012),
p. 320.
45) 周霞, 「元朝時期的山東半島在與高麗海上商貿交往中的重要作用」, ?魯東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05
期 (煙臺 : 魯東大學, 2010), p. 45.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31

 

우에 따라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 유사성은 최고의 전성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특
히 12세기 중국 최고의 청자로 불리는 여요와 고려 비색청자가 그것이다. 기형은 물론 아무런 문
양이 없는 장식 의도까지 두 청자는 마치 한 가마에서 제작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논의는 중국이 먼저였고 고려가 나중에 이를 모방하거나 중국의 영향 하
에 제작된 경우로 결론이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46)
그러나 중국내 출토되거나 전세된 고려청자의 수가 급증하고 유사성에서 일방적인 모방이 아닌
상호적인 면이 보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게 되었다. 고려의 도공들이 항상 중국청자를 모델로 삼
아 제작했을까? 중국의 도공들은 중국에 전래된 고려청자에서 아무런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을까?
현실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지 않다. 고려청자나 중국청자 모두 편년이 확실한 유물
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청자의 경우 전 시기에 걸쳐 편년작이 손꼽을 정도여서 정확한
편년자료를 바탕으로 선후 관계를 논하는 것이 어렵다. 단지 중국이 지속적으로 남북으로 정권이
바뀌어서 송과 남송, 서하,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경계가 뚜렷한 탓에 편년이 상대적으로
쉬운 경향은 있다.
그럼에도 고려청자가 양식적으로 송 청자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
려 비색, 청록색 청자의 유색이다. 중국 청자에서 비색으로 비유되는 것은 당나라 시기 법문사지
출토 청자들이었다. 874년으로 편년된 법문사지 출토 청자들은 청록색의 유색에 별다른 문양이
없는 오직 기형과 색상만으로 아름다움을 과시하였다.47) 이들 법문사 비색청자는 오대 들어 월주
요를 거쳐 북송 초기 요주요에서 재현되었으나 곧 사라졌다.
반면 고려청자는 초기 해무리굽 완이나 가마 구조 등에서 월주요 영향을 받았고 조형에서도 앵
무문이나 과형, 철화나 퇴화 같은 장식에서 월주요 청자와 더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11세
기 이후 색상에서는 회청색이나 녹청색이 주를 이루어 월주요와 다른 독자적 성향을 나타냈다. 단
지 당시 아시아 전체에서 월주요 청자는 모방의 대상이었기에 고려청자와의 상호 양자간 영향 관
계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고려청자와 북방 요주요와의 연관성도 뚜렷해서 몰드를 사용하는
양각청자와 문양 장식은 영향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단지 색상은 요주요가 초기 청록색에서
유백색이나 녹청색으로 변하는 반면 고려청자는 청록색으로 발전해 나갔다.

 

46) 李仲謀,「青出於藍─十二世紀高麗青瓷與北宋」,?故宮文物月刊?第286期(台北:國立故宮博物院, 2007年
1月), pp. 54-65; 尹龍二,「高麗青瓷與汝窯」,?開創典範:北宋藝術與文化研討會論文集?(台北:國立故
宮博物院, 2008), pp. 689-704; Itoh Ikutaro, Northern Sung Kuan Ware: The relationship
between Chang-kung-hsiang Ware and Goryeo Celadons , ?開創典範:北宋藝術與文化研討會論
文集?(台北:國立故宮博物院, 2008), pp. 111-128.
47) 王倉西, 「法門寺塔地宫出土秘色瓷几个问题的探討」 ?文博?(北京: 1995年6期), pp. 18-26; 法門寺博
物館,?法門寺?, 西安: 陝西旅遊出版社, 1994.
32 • 강좌미술사 40호

 

북송 말기 12세기 전반 여요와 고려 최고의 비색청자가 제작되면서 양자의 유사성은 극에 달했
다. 당시 중국의 요주요 청자는 색상에서 분명 여요와 다른 길을 들어서고 있었기에 요주요에서 여
요로의 영향관계를 논하기는 어려운 반면 고려청자와의 유사성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럼 여요의
청자색상 모델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시기 두 청자의 연관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자료는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1123년에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문한 서긍에 의해 작성된 이 도경에는 고려청자의 비색이 옛 월주
요 청자의 비색과 새롭게 문을 연 여주의 신요기와 유사하다고 기록되어 있다.48) 여기서 여주의
청자는 아마도 여요 청자로 새로운 북송 관요의 하나로 보인다.49) 분명한 것은 1123년 이미 고려
청자는 최고의 색상을 지니고 있었고 여요 청자와 비견되었다는 점이다. 여요 청자는 현재 세계적
으로 100여 점도 채 남아 있지 않는 희귀한 것이다. 대부분의 중국청자들이 주변의 가마들에서 모
방 제작되는 것과 달리 여요는 동 시기에는 그러한 예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요는 극소수만이
제작되었고 황실에서 보존을 도맡아 하였다.50) 후대 남송의 관요와 청 옹정대 경덕진 어요창에서
만 집중적으로 모방 제작이 논의될 정도로 그 실례와 모방 제작이 드물어서 해외에서 보고된 예도
거의 없다.
또한 중국 청자 유약의 변천 과정에서 보면 여요의 색상은 전후 연결이 어색한 매우 이례적인 것
이다. 중국 청자 색상은 청록색을 띠는 9세기 당대 월주요 비색청자의 전통을 북송 초기 요주요 청
자에서 이어 받았으나 바로 회청색으로 바뀌었고 월주요 색상도 회청색이나 회록색 등 다른 색상
을 줄곧 보였다. 이후 남송관요와 용천요에서는 천청색이나 짙은 청색을 보인다. 오직 12세기 여
요 청자에서만 갑자기 청록색을 보인 것이다.
반면 고려청자는 11세기 후반부터 색상 변화가 일어나 비색이라 불리는 회청이나 청록색으로
바뀌어 12세기 전반기에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 청자의 색상과 기형, 장식이 유
사한 것은 고려청자가 여요의 색상과 조형을 모방했다기보다는 역으로 여요에서 고려청자의 양식
을 따라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51) 동 시기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유색의 청자를

 

48) 徐兢, ?宣和奉使高麗圖經? 32卷, 器皿3, 陶爐 “狻猊出香 亦翡色也 上爲蹲獸 下有仰蓮 以承之 諸器
惟此物 最精絶 其餘則 越州古秘色 汝州新窯器 大槩相類”
49) 謝明良, 「北宋官窯硏究現狀的省思」,?陶瓷手記?2(臺北: 石頭出版, 2012), pp. 189-214. 또한 謝明良교
수는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리앤원 재단 주최 외국학자 초청 심포지움에서 여요청자의 기형
은 ?宣化博古圖?에 실린 禮器뿐 아니라 유리기를 모방하였고 이 밖에 수선분 같은 새로운 기형이
어우러진 것으로 보았다.
50) 청대 옹정제가 여요 방제를 명한 것이나 건륭제가 여요로 생각되던 청자들만 골라 어제시를 새긴
것은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건륭어제시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방병선, ?중국도자
사 연구?(경인문화사, 2012), pp. 498-499.
51) Regina Krahl, "Stylistic Analogies: Song and Goryeo Stonewares",『리앤원초청강연집』, 2011.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33

 

도25 청자淳祐十年(1250)명 묘지명, 가로

 

33, 세로 24.2 두께 3.8cm, 溫州博物館.
생산한 곳이 없었고 오직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은 고려청자
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색상 이외 조형이나 문양 장식은 고려청자
가 아닌 이슬람의 유리나 금속기에서 차용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남송 시기 항주 일
대에서 많은 고려청자가 발견되고 출토되었지만 이를 남송
관요에서 모방한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인다.
유색 이외에 고려청자의 독특한 특징인 상감기법을 차용
한 예는 용천요에서 보인다. 온주박물관 소장의 청자순우
십년(淳祐十年; 1250)명 묘지명(도 25)은 전서로 <대송이
부시랑엽문정공지묘순우십년길립(大宋吏部侍郞葉文正公
之墓淳祐十年吉立)>이라는 열여덟 자가 흑상감으로 새겨
져 있다. 가로, 세로 각각 33cm, 24.2cm에 두께 3.8cm로
글자를 음각하고 그 위에 상감토와 같은 채색을 더한 기법은 고려청자 상감 기법과 유사하다. 단지
한 점만이 발견되었고 상감이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아 영향 관계를 논하기는 어렵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고려와 중국은 다양한 도자 교류를 진행해왔으며 중국에서 고려로의 일방통행이 아닌
고려에서 중국으로의 청자 양식 전파와 교류도 발생하였음을 살펴보았다.
먼저 이러한 논의의 바탕이 되는 중국 출토 고려청자에 대해 각종 보고서와 논저를 통해 고찰하
였다. 중국 남북방 전역의 유적에서 12-14세기 고려비색, 상감청자가 발견되었고, 북송보다는 남
송과 원대 유적에서 더 많은 수가 보고되었다. 송대에는 고려와 송을 빈번히 오가던 송상에 의한
해상 무역이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원대에는 황실 공물이나 무역품으로 해상과 육
상으로 중국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원대 들어 여러 무덤과 항주와 등주 등지의 상업
항구 등지에서 더 많은 수의 고려청자가 발견된 것은 기술적이든, 양식적이든 중국 내 고려청자에
대한 수요와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고찰하였다.
문헌기록인 북송대 ?선화봉사고려도경?이나 남송의 ?수중금?에서 고려청자를 중국청자와 다
른 별개의 청자로 인정하거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도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52)
또한 원대 황제에게 금채청자가 상납될 정도로 중국 상류층 사이에서 고려청자의 위치는 상당한
34 • 강좌미술사 40호
고급품 혹은 사치품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53)
중국 도자에 미친 고려청자의 영향으로 여유의 유색을 들었다. 여요의 유색은 중국 청자 유약
변천의 과정에서 중국 내 다른 청자 유약과의 연관을 찾기 어려웠다. 반면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기록과 시기적으로 앞서 나타난 고려 비색청자의 영향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남송과 원대 고려 상감청자가 많이 발견되었지만 실제 상감기법을 사용한 중국 청자
는 원대 용천요 청자묘지명 한 점의 예만 남아있어서 영향 관계를 논하기는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중국 월주요에서 파생된 청자 제작기법과 장식은 고려에서 새로운 변형을 이루고
이를 다시 청자의 본고장인 중국에 전파하여 양국의 도자 교류가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었음을 파악하였다.
주제어(Key Words)
중국청자(Chinese celadon), 고려청자(Koryo celadon), 도자교류(Ceramic exchange),
상감청자(Inlay celadon), 비색청자(Jade-green celadon), 여요(Ru kiln),
월주요(Yue kiln), 고려도경(Gaoritu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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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 방병선 • 37
| 국문초록 |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방 병 선
이 논문의 주제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출토되거나 전세된 고려청자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인들이 고려청자에 대해 언급한 문헌자료를 검토하고 중국 청자에 나타난 고려청자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중국과의 도자교류가 상호 양방향으
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먼저 중국 출토 고려청자는 중국 남북방 전역의 유적에서 12-14세기 고려청자가 발견된 상황을
발굴보고서와 공사 기록들을 통해 정리하였다. 특히 봉래와 항주, 그 인근을 중심으로 송대보다는
남송과 원대 유적에서 더 많은 비색청자와 상감청자편들이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으로는 북송대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나 남송의 ?수중금?은 고려청자에 대한
기술과 평가에서 다른 것을 인정하거나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원명대 이후 문헌
에서 평가의 내용이 바뀌긴 했어도 원대 황제에게 금채청자가 상납될 정도로 중국 상류층 사이에
서 고려청자의 위치는 상당한 고급품 혹은 사치품으로 인식되었음을 상기하였다.
중국청자에 미친 영향으로는 도자의 기술과 장식에서 여요의 비색인 청록색 유약을 예로 들었
다. 여요의 유색은 중국 청자 유약 변천의 과정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반면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기록과 고려 비색청자의 유색 형성이 선행한 점을 들어 그 영향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
였다. 또한 남송과 원대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려상감청자의 상감 기법은 원대 용천요 청자
묘지명 한 점의 예만 남아있어 영향 관계를 논하기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중국 월주요에서 파생된 청자 제작기법과 장식은 중국과 고려 양국의 청자 발전 과
정에서 새롭게 탄생하여 양국 도자 교류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급증하는 중국내 고려청
자 출토품과 문헌기록, 여요의 청록색 유색, 상감청자 기법의 시도 등은 양국의 도자 교류가 다양
하고 복잡하며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교류적인 성격임을 제시하였다.
38 • 강좌미술사 40호

 


| Abstract |
Introduction of Koryo Celadons into China and its Influence
Bang Byungsun(Professor of Korea University)
This paper aims to research the Koryo celadons excavated or found in China and survey the
Chinese documents contained the contents of Koryo celadons and prove the influence of
Koryo celadon on the Chinese ceramics.
Firstly, I classified and arranged the Koryo celadons excavated or found in the Northern and
Southern China from the 12th to the 14th centuries. More shards of Koryo celadons, jade green
and inlayed, were found near Hangzhou and Fenglai during the Southern Sung(1127-1279) and
the Yuan(1279-1368) than Northern Sung.
Secondly, I investigated some documents such as Xu Jing’s “Gaorituzing”(1123) and
“Xuzungjin” in the Southern Sung and assessed that Koryo celadons were praised as the high
quality ceramics by the Chinese consumers. Afterwards the gold-painted Koryo celadon was
presented to the emperor of Yuan as tribute.
Finally, I analyzed the influences of Koryo celadons on the Chinese ceramics and supposed
that Northern Sung imperial Ru wares had the closest connection to Koryo jade green celadons.
Because the blue green glaze of Ru ware appeared abruptly and there was no similar glaze
color except Koryo mise celadon around the 12th century. And uncharacteristic attempt at
some kind of inlay technique on a tomb tablet dated in accordance with 1250.
투고일_ 2013. 2. 15. 심사완료일_ 2013. 3.22

    

                                           고려청자의 중국 전래와 도자사적 영향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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