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동아시아 북방도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2018. 11. 26. 19:48차 이야기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역사와 담론

樂民(장달수) | 조회 222 |추천 0 | 2017.12.05. 12:36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동아시아 북방도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장 남 원**


Ⅰ. 문제의 제기
Ⅱ. 10세기말~12세기초 동북아시아와 고려
1. 중국 북방지역과 고려의 관계
2. 공예와 도자의 제작환경
Ⅲ. 고려자기 해무리굽완의 지속현상
1. 고려 해무리굽 완의 제작 현황
2. 해무리굽 완의 지속현상과 중국 北方窯場
Ⅳ. 맺음말


Ⅰ. 문제의 제기
瓷器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본격 제작되기 시작하고 정착하는 과정
에서 중국지역과의 제작기술 및 조형에 상호 연관성이 있었음은 주지


* 이 글은 2007년 12월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인천의 도자와 문
화" 학술대회의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몇 가지
생각―동아시아 북방도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라는 발표를 토대로 토론
과 질문으로 제기된 제안을 반영하여 전면 改稿한 것이다.
**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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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바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업의 연원과 계통에 관한 것
이고, 나아가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수용 변화되어 가는지가 또한 주
요 논제이다. 현재까지의 연구경향을 보면, 주로 초기 시작단계에 대한
(이른바 ‘초기청자’ 제작시기) 탐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고
려시기 한국청자의 초기 제작단계에는 중국 남방의 최대 청자요장이
었던 越州窯의 제작기술 및 조형적 연관성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면
서 그 관계의 긴밀함이 증명된 바 있다. 특히 초기청자의 제작기종 가
운데 중국의 玉璧底系 碗인 해무리굽완은 대표적인 월주요계 기종으
로 부각되었고, 월주요 청자완의 굽 형식과 비교하여 그 변천과정을
밝히는 작업이 여러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청자 제작기부터 작업조건과 공정이 다른
청자와 백자가 竝産된 점, 花形접시 등 일부 기종이 중국 남방계와는
다른 조형전통을 보이고 있는 점, 또 해무리굽[옥벽저계] 완의 제작과
변화과정이 중국의 그것과 많이 다른점 등이 의문시되어 왔다.2)
본 고는 이같은 물음에서 출발하여 당대에 유행했던 옥벽저계 완이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고려에서 보이는 지속현상에 대해 다시 생
각해보고자 한다. 이같은 현상은 중국의 중원지역에서 나타나는 것과
시차가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려초기 요업의 다변적인 측면과 동아시아


1) 최 건, 「청자요지의 계보와 전개」, 미술사연구12, 미술사연구회, 1998,
pp.3-20 ; 이희관․최 건, 「고려초기 청자생산체제의 변동과 그 배경」, 미술사
학연구232, 한국미술사학회, 2001, pp.21-55 ; 최건, 「라말여초 한국자기의
계열과 변천―특히, 9~10세기 자기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제2회 용인
시사학술대회 용인서리 고려백자요지의 재조명 발표논문집, 용인시․용인문
화원, 2000, pp.47-56 ; 李鍾玟, 「시흥 방산동 초기청자 요지 출토품을 통해
본 중부지역 전축요의 운영시기」, 미술사학연구 228․229, 한국미술사학회,
2001․3, pp.65-97 ; 이희관, 「한국 초기청자에 있어서 해무리굽완 문제의 재
검토-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술사학연구237,
한국미술사학회, 2003, 3, pp.5-48 ; 강경숙, 「고려전기 도자의 대중교섭」, 
高麗 美術의 對外交涉, 예경, 2004, pp.193-248.
2) 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혜안, 2006,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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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지역의 요업현상, 제작경향의 공통점에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현재로서 새로운 제안에 머물 수밖에 없으므로 향후
지속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중국에서 제작된 굽 접지면이 넓은 것에 대해서
“玉璧底”라고 하고 좁은 것은 “玉環底”로 부른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서 생산된 굽 접지면이 넓은 것들에 대해서는 “해무리굽”이라는 용어
로 別稱하고 있다. 물론 이들 굽의 형태와 그릇의 높이, 측면의 형태
등은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며, 중국과 한국의 제작품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본고는 이들 굽형식의 세부속성 보다는 동북아시아 도자에 나
타나는 현상에 중심을 두고자 하므로 굽 접지면이 좁은 玉環底系에 대
한 상대적 의미에서 廣義로 “해무리굽[玉璧底系]”라는 용어을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Ⅱ. 10세기말~12세기초 동북아시아와 고려
1. 중국 북방지역과 고려의 관계
고려와 거란, 송이 공존하던 시기, 동아시아는 이들 국가의 정치, 외
교적 상황에 따라 상호 관계에 변화를 보인다. 907년 거란이, 918년에
는 고려가, 960년에 宋이 건국하면서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
는다. 송이 건국되자 고려와 국교를 맺기 위해 양국관계가 시작되었다.
고려는 대개 1년 8개월에 한 번씩 송에 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거란이 993년 고려를 침공하고, 994년부터 거란과 조공․
책봉관계를 수립하고 강화를 맺으면서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가 가까
워졌다. 이 사이에 고려는 宋과도 사신교류를 지속하였으나 적어도 남
송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와 송, 거란의 관계로 보면 고려↔거란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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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려↔송 보다 빈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더욱이 11세기초 宋
과 공식적 외교관계가 중지되면서 遼와의 공식관계가 주를 이루었다.4)
이후 1071~1126년(외교관계 재개~북송멸망 : 55년간)경까지 고려
입장에서는 중국의 왕조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송의 우수한 문화를 받
아들이려는 노력하였다. 즉, 고려와 북방왕조 가운데 遼와는 적어도 12
세기 초반경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송과 고려가 주로 무역사행을 비롯한 물자의 교류와, 수도 卞京이 아
닌 明州지역 관할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예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거란과의 경우 중앙 정부간의 교류가 중심이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우
수한 문화를 지녔던 송은 고려와의 통교를 통해 북방 민족의 정세를
탐지 하거나 견재하려는 정략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한 목표
달성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使行에 따른 경제적 손실 및 고
려측의 양면 외교에 대한 불신 등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
로 파악된다.


2. 공예와 도자의 제작환경5)
이 시기는 동북아에서 거란 遼의 힘이 가장 강성했고 11세기의 공식
관계와 거란장인 귀화를 통한 遼文化의 流入도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
다. 물론 송과도 50여 년 동안 公式 使行은 단절되었지만 상업교류는


3) 정신옥,「11세기말~12세기전반 고려청자에 보이는 중국도자의 영향」, 美術史
學21,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7, p.43.
4) 그러나 송과의 관계에서 私的인 貿易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동안 고려와 송과의 대외관계에 따른 관계 단절을 ‘국교단절’로 표현했으
나, 아직까지 송과 고려간에 조공은 있었으나 책봉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으므
로 ‘국교’라는 표현보다 ‘외교관계’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5) 이 장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은 안귀숙, 「고려시대 金屬工藝의 대외교섭」, 고
려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4. 참조.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25


지속되었으므로 對遼, 對宋의 시대상황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지 않다.6) 중국 唐末부터 遼代初에 거란이 남하하면서 특히 북방
지역에서 인구의 이동이 있었고, 그 과정에 唐의 공예전통을 보유한
장인들이 遼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그 전통을 遼가 계승하게 되었을 것
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936년 燕雲十六州가 遼에 속하게 되면서 많
은 거란인이 燕雲(河北, 山西北部)지역에 들어오게 되었고 특히 10세
기초에는 여러 차례 定州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끌고 갔다. 947년에
는 太宗이 后晉을 멸할 때, 卞州[開封] 城內의 각종 手工業에 종사하
는 “百工” 등을 전부 遼 上京城內로 이주케 했다고 한다.
안사의 난 이후 河北은 번진들과 거란이 할거하였지만 澶淵의 盟
(1005) 이후 정치적 안정으로 定州지역의 공예가 발전할 수 있었다. 북
송때의 定州工藝는 製瓷, 絲織[契丹絲], 金工 부문에서 전성기를 맞았
는데, 북방의 遼墓나 遼塔의 天宮과 地宮에 內藏된 수많은 定瓷가 이
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정착생활에 필요한 산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
었기 그들은 定州지역이 본래 銅鐵이 풍부해 금속공예가 발달했고 定
瓷와 직물의 산지였으며, 교통상 중원과 북방을 잇는 요지였기 때문이
다.7) 따라서 복속된 漢族의 수공업자 기술자들은 거란인 다음 가는 대
우를 받으며 遼의 工藝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려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徐兢의 高麗圖經
에는 “듣자니 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 공예기술을 가진 사람들
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열에 한 명은 정교한 솜씨를 가진 工匠이어서
王府에 머물게 하였다. 요즈음 器服이 더욱 공교하여, 부화스럽고 거
짓스러운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는


6) 이같은 정황에 대해 안귀숙은 주7)논문에서 ‘북송 문화의 제한적 수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7) 宿 白, 「定州工藝與靜志, 淨衆兩塔地宮文物」, 文物, 文物出版社, 1997년
第10期, pp.36-47. 안귀숙, 앞글, 재인용 ; 任眞娥, 「高麗靑磁에 보이는 北宋,
遼代 磁器의 影響」,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한국미술사전공, 200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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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8) 거란의 공예기술자들이 고려의 중심부 공예에 어느 정도 기
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거란의 공예기술이 전해지면서 기존에
고려가 지향했던 조형미에 변화가 생겨났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세기초 고려에는 거란인의 집단촌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고려사의 예종 12년(1116) 기록을 보면, “왕이 南京에 이
르자 거란에서 투화하여 근처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거란의 가무와 각
종 유희를 연출하여 행차를 맞이하였고, 이에 왕은 수레를 멈추고 구
경하였다”고 하였다.9)
물론 거란과의 관계가 밀접한 가운데 북송과도 끊임없는 교역이 이
루어진다. 북방의 거란을 피해 남방해로를 통해 왕래했다고 하는데, 高
麗使行團은 항주에서 개봉에 이르는 루트를 통과하면서 필요한 물건
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宋史․宋會要등에 따르면, 고려의
41회 入貢에서 貢賜貿易 물품으로는 金․銀器를 비롯한 兵器, 馬具, 佛
像 등이었고, 宋이 回賜하거나 贈送한 물품은 銀, 瓷, 錦, 馬具등이었
다. 宋商의 왕래로 泉州․福州등지에서 상인들이 고려에 들어왔고, 이
들은 결국 중국 남북방의 물품을 고려와 교류하게 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게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가 회복된
1071년 이후 寧波[明州]에는 고려와의 무역을 촉진시키기 위한 高麗使
館이 세워졌고 高麗司를 두었다.11)


8) “高麗工技至巧, 其絶藝, 悉歸于公. 如幞頭所將作監, 乃其所也. 常服白紵袍皂巾. 唯執役趨事, 則官給紫袍. 亦聞契丹降虜數萬人, 其工技十有一擇其精
巧者, 留於王府. 比年器服益工弟浮僞頗多, 不復全日純質耳.”, 徐 兢, 高麗
圖經 第19卷, 「民庶」, <工技>條.
9) 高麗史, 卷13, 世家13, 睿宗12年 8月 戊午 ; 최혜숙 지음, 高麗時代 南京
硏究, 景仁文化社, 2004, p.107.
10) 실제로 11세기말부터 12세기초에 걸친 시기에 규모가 상당히 큰 몇차례의 사
행이 있는데, 이는 당시 원하는 물품을 교환하고자 하는 무역사행의 성격이
강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북송의 문물이 고려에 전해지는 중요한 계기
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27


그러나 고려사의 내용에서 중국과 고려의 도자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은 거의 없다. 다만 공식적인 사신왕래나 상인들의 사적
인 교류 등을 통해 교류는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송
의 수도는 북방의 하남성에 있었으므로 북방지역 도자의 유입은 遼를
통한 河北․山西등지의 도자전통과 북송을 통한 陝西․河南 지역의 도자
전통이 전해질 개연성이 모두 있다.
10세기초 발해를 滅한 거란은 12세기 초까지 약 1세기 동안 요동지
역의 가장 강력한 주인이 된다. 주변국들을 통일하고 중국으로 진출하
여 중국의 동북지방을 아우르게 된 것이다.12) 이 때 遼의 對高麗 전담
지역은 東京 즉, 遼陽이었다. 고려와의 전쟁에서도 요양에서 서경, 개
경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루트가 사용되었으므로13) 거란의 문물이 요
녕지역을 통해 고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한편, 이 과정에서 특히 상인들의 동북아 지역을 넘나드는 활동에
의한 간접 전래도 추정이 가능하다. 한 예로 蘇東坡(1036~1101)의 蘇
東坡全集에 고려 관련 기록을 보면 송의 조정이 거란과의 외교를 위
해 고려와 통교를 해야한다고 하는 新法派의 입장에 대해 부정적 견해
를 가지고 있었다.14) 그는 고려가 송과 외교를 하려는 목적이 厚利를
구하는데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고려인들은 泉州 출신
상인을 매개로 송에 들어갔었으므로, 禮賓省의 패첩을 소지하고 불법


11) 麗宋간의 航線은 熙寧7年(1074)이후 北路가 遼의 방해로 변경되었다. 고려사
신의 요구에 따라 북송은 南路의 기착지인 明州로 오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明州는 고려무역의 중요 항구로서 번성하게 되었으며, 北宋 末年까지 55년
동안 明州商人들이 고려에 와서 商行爲를 한 횟수는 120여 차례나 된다. 樂
承耀, 寧波古代史綱(寧波出版社, 1999(2版)), pp.139-140 ; 한편 이들은
매번 적게는 20~30人, 많게는 300人이 와서 土物을 헌납한 후 商行爲를 하
였는데, 高麗史에는 횟수가 적게 기록되어 있다.
12) 김한규, 요동사서남동양학술총서, 문학과 지성사, 2004, pp.450-457.
13) 안주섭 지음,고려 거란전쟁, 경인문화사, 2003.
14) 소동파는 知杭州를 지냈으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328 湖西史學 第50輯


을 배우러 왔다는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인세력과 연결하여
송에 들어온 것을 두고 좋지 않게 여겼던 것인데, 특히 고려 일행을 송
에 연결시켜주었던 천주상인 徐戩이 불법으로 고려에 왕래하면서 동
시에 거란 땅에도 드나들었던 혐의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15)
실제로 太平興國2년(997)의 河北省 定縣 靜志寺 舍利塔 地宮에서
출토된 월주요산 靑瓷盒이나 內蒙古 哲里木盟 奈曼旗에 있는 陳國公
主墓(遼 開泰7년, 1018) 출토 월주요산 청자접시 등은 거란지역내 주
요 유적에서 남방의 월주요 청자가 발견되는 예이며, 남방의 획화기법
을 응용하여 백토분장한 위에 가는 획선으로 문양을 그리는 장식이 河
南省 登封 曲下窯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월주요의 제품과 기술이
중국북방의 소비지와 요장으로 꾸준이 전래되었음을 볼 수 있다.16)
또 남방에서도 북방요장의 기법이 시도되기도 하는데, 절강성 寺龍
口 越窯址에서 靑瓷長鼓에 철화로 시문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나, 요대
가마터에서 白瓷나 三彩 등으로 즐겨 만들어졌던 皮囊壺가 월주요에
서 청자로 번안되기도 한 예가 그것이다.17)


Ⅲ. 고려자기 해무리굽[玉璧底系] 완의 지속현상
그러면 위와같은 정세 아래, 고려의 요업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
보자. 10세기 이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자기요업이 시작되었고, 서해안
지역, 특히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남북편에 몇몇 요장이 활동을 시작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는 이 과정에서 제작품의 상당수가 玉璧
底系 완이었음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층위조사를 거쳐, 이


15) 蘇軾, 蘇東坡全集奏議集8.
16) 劉濤 著,宋遼金紀年瓷器, 文物出版社, 北京, 2004.
17)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29


<그림1> 시흥 방산동 요지출토 청자,백


자완, 해강도자미술관 발굴
들의 발전과정이 玉環底→玉璧底의 순으로 변화하고 있음이 밝혀져
중국 당대이후 碗에서 볼 수 있는 기종의 변천과정과는 다른 고려만의
특수한 정황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18) 그러면 해무리굽완을
제작했던 요장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고, 그 요업이 어떤 양상이었
는지 살펴보자.


1. 해무리굽 완의 제작지와 현황
(1)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요지19) : 1997~1998, 2002년에 해강도자
미술관이 발굴 조사한 곳으로 벽돌로 축조된 청자가마 1기와 지하굴식
陶器가마 1기가 확인되었다. 청자가마는 가마 개축에 따라 그 길이가
39.1m→35.8m, 폭은 225cm→95cm로 축소되어 가면서 3개의 퇴적층
을 형성하였다. 최하층에서는 극소량의 백자와 갈녹색의 청자가 주를
이루는데 玉環底 碗이 많은 비율로 생산되었고 중간층에서는 청자외
에 질이 좋은 백자를 생산하고 있으며<그림1> 최상층에서는 청자보다
백자의 생산비율이 많아지며
청자는 그 질이 이전보다 떨어
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3개 층
위의 생산품 중 완 54.19%, 발
9.41%, 접시 6.52%, 잔탁
4.65%, 주자․호․병 10.88%로
전체 생산에서 완이 전체 생산
량의 절반을 넘었다.


18) 芳山大窯, 海剛陶磁美術館․京畿道始興市, 2001 ; 龍仁西里白磁窯 發掘
調査報告書Ⅱ(湖巖美術館, 2003) ; 李鍾玟, 「始興 芳山洞 初期靑磁 窯址
出土品을 통해 본 中部地域 塼築窯의 運營時期」, 美術史學硏究 228․229,
韓國美術史學會, 2001, pp.65-98.
19) 芳山大窯, 海剛陶磁美術館․京畿道始興市, 2001 ; 李鍾玟, 앞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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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기도 용인시 서리 中德요지20) : 1984, 1987, 1988년의 3차에
걸쳐 호암미술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결과 4개의 시기별 층위로
나눌 수 있었으며, 주 생산품종은 백자이다. 발굴조사보고자의 분류에
의하면 가장 이른 시기 유형으로 판단되는Ⅰ類型의 경우 碗의 출토비
율이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늦은 Ⅱ가 유
형에서는 접시비율이 가장 많아 28%에 가까운 반면 완은 16.64%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Ⅱ나 유형에서는 접시가 더욱 증가하여
33.12%였으며 대접비율이 23.42%로 늘어나고 완은 6.33%로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21) 초기 제작 단계에서 차지하던 碗의 비중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줄어들고 용량이 큰 鉢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다른
요장과 비슷한 현상이다. 퇴적층의 양상에 따라 4개의 층위로 구분되
는데 대표 생산품인 碗의 경우 玉環底→ 玉璧底→ 輪形底 형식으로
변화하며 초기에는 청자와 백자를 동반생산하지만 Ⅱ기층 이후로는
백자가 증가하고, Ⅲ기층부터는 요업중심이 백자생산으로 바뀌고 있음
이 확인되었다.
(3) 경기도 용인시 서리 上盤요지22) : 2001년이래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퇴적층과 표토에 나타난 築窯用 벽돌로 보아 용인 서리
나 여주 중암리처럼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전환된 요장으로 추정
된다. 1, 2, 3차를 통해 유물은 총 20여 기종이 확인되었고 생활용기
외에 제사용기도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생산품으로는 청자와 백자
가 함께 보이나 용인 서리 中德요지 처럼 조질의 백자로 전환하는 것


20) 龍仁西里白磁窯 發掘調査報告書Ⅱ, 湖巖美術館, 2003.
14) 전승창, 「용인서리요지 출토유물 고찰」 龍仁 西里 高麗白磁 窯址의 再照明,
龍仁文化院, 2001, pp.15-32.
22) 「용인 이동 서리상반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자료」, 기전문화재연
구원, 2001. 11. 6 ; 「용인 서리상반 고려백자요지 2차발굴조사 지도위원회자
료」,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2 ;「용인 서리상반 고려백자요지 3차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 畿甸文化財硏究院, 2004, 1. 27.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31


<그림2> 용인 서리 상반요지 출토 백
자완,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


<그림3> 여주 중암리 출토 백자완, 경
기도박물관 발굴


으로 파악되며 전반적으로 서리
중덕요지 Ⅳ기층에서 양상과 가
장 유사하다.<그림2>


(4) 경기도 여주시 중암리 요
지23) : 2002, 2003년에 발굴조사
되었다. 고려시대 백자가마 1기
와 퇴적층이 조사되었으며, 작업
장으로 추정되는 적석유구도 함
께 노출되었다. 퇴적층에서는 축
요재로 사용했던 벽돌들이 발굴
되었으나 발굴시 최종 가마는 길이 20.4m에 칸 넓이 100~170cm 가
량이며 토축요였다. 따라서 용인서리 상반 요지와 비슷하게 塼築窯→
土築窯로 전환하는 가마로 알려져 있다. 퇴적층은 층위에 따라 5개 그
룹으로 나뉘는데24)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일수록 기벽이 얇고 태토․유
약이 정선되었으며 광택이 강한 담청색 釉調를 띤 것이 많고 제작시기
가 늦을수록 태토가 거칠고 유층이 일정치 않으며 대형기종들이 함께
생산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번조
에는 고운 백색의 내화토나 황
갈색 내화토를 받쳤다. 출토 유
물은 碗이 중심으로 총 생산품
의 50%를 차지하며 鉢, 楪匙, 盞
이 그 다음이고 壺, 甁, 大鉢, 뚜
껑, 大盤, 盞托, 祭器, 杖鼓, 窯道
具 등이 동반되었다.<그림3>


23) 京畿道博物館․驪州郡,驪州 中岩里 高麗白瓷窯址, 경기도박물관, 2004.
24) 장남원,「高麗時代 京畿地域 窯業의 性格」,古文化63,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04, pp.83-108.
332 湖西史學 第50輯


<그림4> 경기도 양주 부곡리 출토
완, 지표수습


(5)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요지25) : 정식으로 조사되지는 않았고, 약
5곳의 가마터가 알려져 있다. 녹갈색을 띠는 玉環底 계통의 碗, 대접,
접시, 壺 등이 주 생산품이다. 유층이 얇고 굽에는 백색의 내화토를 받
쳐구웠다. 양주 부곡리 등지와 비슷한 시기에 조업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원흥리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의 高陽郡 古跡條에 기재
된 “巾子山 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개경 인근지역 초기청자 요업
의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26) 초기청자 가마터이지만 아
직까지 백자나 옥벽저완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6) 경기도 양주시 부곡리 요지27) :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으
므로 지표 수집품을 통해 그 특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부곡리는 인근
의 원흥리나 원산리, 시흥 방산동 등과 함께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요
장이다. 벽돌을 사용하여 가마를 축조하였으며 표토의 수습상황으로
보아 碗이 주종을 이루고 그밖에 접시와 기타 기종 등이 있다. 태토는
매우 치밀하며 유약도 얇고 고르게 시유되었으며 연녹색, 청회색, 갈색
등 다양한 색으로 나타나지만 주류는 연갈색 계통이다. 얇은 원통형
갑발에는 구멍이나 기호가 없으며 이와 함께 鉢形 갑발도 사용되며 갑
발받침과 함께 번조시에 받침으로
사용한 墊環도 수습되었다. 접시나
완 가운데는 하나의 갑발 안에 여
러점을 함께 포개서 재임한 것들이
있다. 또한 인근에서 도기편들이 수
집되는데 특히 頸部에 음각의 波狀
線紋帶를 넣은 항아리 구연편등이


25)한국의 청자요지, 韓國情神文化硏究院, 1992.
26) 朴宗基,「京畿 北部地域 中世 郡縣 治所와 特殊村落 變化硏究」,北岳史學
第8集, 北岳史學會, 2001, pp.144-149.
27) 全榮京,「楊州 釜谷里 靑磁碗 硏究」, 弘益大學校大學院 韓國美術史專攻 碩
士學位請求論文, 1993.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33


수집되었다. 원흥동과 마찬가지로 백자나 옥벽저완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그림4>
(7) 황해남도 배천 원산리 요지28) : 개성에 인접하며 경기도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는 초기청자 요장과 유사한 제품을 생산했 곳
이다. 1989~19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基의 도기가마와 3基의 청자가마가 드러났다. 廢窯직전
의 2호가마 최상층에서 ‘淳化三年(992년)……’, ‘淳化四年(993)……’의
명문이 음각된 ‘靑瓷豆形器’ 파편들이 출토됨에 따라 제작시기와 용
도, 요지의 활동시기 추정을 가능케 해 주었다. 가마의 전모가 드러난
2호가마는 축조당시 38.9m에서 22.4m로 축소되었고 가마폭도 1.9m에
서 0.8~1.0m로 좁아질 때까지 보축하여 사용한 것을 확인하였다. 3호
와 4호가마의 양상도 유사했다고 보고 되어 있으므로 원산리의 下限은
대개 10세기 말로 추정된다. 백자나 옥벽저완의 출토예가 보고된 바는
없다.
이밖에 평안남도 남포시에도 원산리 요지와 유사한 성격의 태성 1
호요지가 발굴조사 되어 알려져 있다.29)
(8) 황해남도 봉천군 봉암리 요지30) : 5기의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청자를 생산한 1호가마는 전축요로서 가마길이 약 44m, 폭은 평균
85cm 정도이다. 원통형과 발형의 갑발이 출토되었으며 갑발받침도 함
께 출토된다. 그 외의 4기는 도기요지로 단실의 전형적 도기 가마이다.
원산리 1호요지와 같은 성격의 도기를 생산하였다.


28) 김영진,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기가마터 발굴간략보고」, 조선고고연
구2호, 사회과학출판사, 1991, pp.2-9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봉천
군 원산리 자기가마터」, 조선유적유물도감12, 평양, 1992, pp.306-321.
29) 김영진, 도자기가마터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2002.
30) 김영진, 앞 주, pp.33-78. 한편 봉암리와 원산리의 도기가마에 대해 김영진은
같은 책에서 7세기 고구려 토기로 파악하였으나 남한지역 학자들은 대체로
초기 청자와 같은 시기에 조업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334 湖西史學 第50輯


<그림5> 안양 무내리 요지출토 완,


지표수습
(9) 경기도 안양시 무내리 요지31) : 관악산에 형성된 가마로 대접․접
시류가 주종을 이룬다. 대개가 포개구운 조질품으로 굽과 내저의 4~5
곳에 모래빚음 받침을 사용하였다. 내면에 원각이 있는 대접류나 내면
이 편평하고 측선이 꺾이듯 올라
서서 외반되는 접시류 등은 전형
적인 고려 중기 청자의 동반관계
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가
마의 수습품 가운데 해무리굽 碗
片이 있다.<그림5>
(10) 전남 강진 용운리 10호 요지32) : 용운리 10호 요지는 시간적인
층위가 확인되어 기종간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편년상 약 11세기경에 해당한다고 추정되는 용운리 10-1층에서는 개
체량 분석대상 총 2,483점 가운데 발 466점(19%), 완 1,066점(43%),
접시 572점(23%), 잔 59점(2.4%), 잔탁 15점(0.6%), 뚜껑 98점(3.9%),
호 53점(2.1%), 병 134점(5.4%) 등으로 나타났다. 碗의 점유율이 40%
가 넘으며 이 가운데 해무리굽 완은 1,099점으로 전체 완 가운데 95%
를 점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중부지방 초기청자 요지에서 보여 준
완의 점유비율과 흡사하지만 같은 용운리 10호 퇴적층에서 시기가 늦
은 10-Ⅱ층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碗의 경우, 용운리 10-Ⅰ층에서 碗은 2,368점 가운데 45%에 달하는
1,066점이었던데 반해 시기가 늦은 용운리 10-Ⅱ층 생산품 가운데 碗
이 차지하는 비율은 총 973편으로 8,527점 가운데 11.4%에 해당한다.
이는 10-Ⅱ층과 비교할 때 무려 33.6%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 제작


31) 鄭良謨, 韓國의 陶磁器, 文藝出版社, 1992, pp.320-323 ; 시흥군지편찬위
원회, 始興郡誌, 시흥군, pp.554-580.
32) 康津龍雲里靑磁窯址發掘調査報告書圖版編, 國立中央博物館, 1996; 康
津龍雲里靑磁窯址發掘調査報告書本文編, 國立中央博物館, 1997.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35


<그림6> 강진 용운리 10호 출토
완, 국립중앙박물관 발굴
수량의 감소가 급격히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10-Ⅰ층의 碗 1,066점 중
94.6%인 1,009점이 모두 내저면에
원각이 있는 한국식 해무리굽 碗인
데 반해 10-Ⅱ층에서는 한국식 해
무리굽 완류가 발견되지 않는다.<그
림6>
(11) 전남 강진 삼흥리요지33) : 강진 칠량면 심흥리 일대에 저수지
숭상사업이 시행되면서 그 일환으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A~H까
지 8개 구역에서 요지가 확인되었다. 2000년대 초에는 이 가운데 수몰
되지 않는 G, H 지역을 제외한 6개 구역이 국립광주박물관과 호남문
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A∼D지구에서는 A지구 3기, B
지구 2기, C지구 1기, D지구 6기 등 모두 12기가 확인되었는데 도기
가마 8기, 청자가마 3기, 기타 1기이다. 또 E, F지구에서는 가마 5기
와 토취장 6기가 확인되었다. 결국 A~F까지 발굴대상 구역에서 총
16기의 청자․도기가마, 토취장을 포함한 기타유구 7기가 확인된 셈이
다. 강진의 칠량면 삼흥리 요장은 대구면 용운리 지역과 조업시기가
가장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무리굽 청자완을 중심으로 생산하
던 시기의 요지가 중심을 이룬다. 생산품 가운데 碗의 경우 D지구에서
는 내저원각이 없는 ‘내저 곡면식’ 해무리굽 완과 ‘내저 원각식’ 해무
리굽 완이 비슷한 비율로 출토된다. 이들은 대개 기벽의 측면이 사선
으로 벌어져 뻗어 나가는 형식을 보이는데, 내저면에 원각이 없는 경
우는 초기청자 시기 玉璧底 및 玉環底 碗의 특징이자, 강진지역에서는
용운리 63호를 비롯하여 상대적으로 조업 개시 시기가 이른 가마에서


33) 康津 三興里窯址Ⅰ, 湖南文化財硏究院, 2004 ; 康津 三興里窯址 Ⅱ,
國立光州博物館, 2004.
336 湖西史學 第50輯


<그림7> 강진 삼흥리 출토 완,
국립광주박물관 발굴
<그림8> 해남 신덕리 출토 청자
완, 국립광주박물관 수집
수습되고 있다. 따라서 삼흥리 D지구
에서 이같은 완이 출토되는 것을 볼 때
삼흥리 지역의 개시시기가 강진에서도
상대적으로 빠르다고 볼 수 있다.<그림
7>
(12) 전남 고흥 운대리34) : 청자요지
에 대한 발굴은 안되었으나 지표조사
로 알려졌다. 완은 옥환저계부터 이행
하는 과정이 나타나 한국식 퇴화 해무
리굽완도 보인다.
(13) 전남 해남 신덕리35) : 1990년대
이후 지표조사로 알려진 가마터이다. 추정되는 가마까지 합하면 약 8
0~90개 정도의 요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와 간혹 흑유가 동
반되나 대체로 청자이며, 완, 발, 접
시, 병, 항아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완은 내저가 곡면인 옥환저계완부터
한국식 해무리굽완까지 수습되었다.
다른 유물에 비해 碗이 질적으로 양
호한 것으로 파악되었다.<그림8>
(14) 전북 고창 용계리 요지36)
전북 고창 용계리 소재. 1983년 원광대박물관이 발굴하였다. 토축요
로 3기의 가마가 노출되었다. 주 생산품으로는 발, 완, 접시, 잔탁 외에
장고, 향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해무리굽 완은 굽 접지면이 넓은 형
식이며, 외면을 강하게 누른 화형접시들이 동반되었다.
34) 全南地方陶窯址 調査報告(Ⅲ)-고흥 운대리, 國立光州博物館, 1991.
35) 海南 新德里 靑磁陶窯址 精密地表調査 報告書, 國立光州博物館, 2000.
36) 高敞雅山댐水沒地區發掘調査報告書,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85.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37
<그림9> 인천 경서동 출토 조질
청자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15) 인천광역시 경서동 요지37)
지방 수요를 위한 粗質靑磁[綠靑瓷] 제작지로 알려져 있다. 잔존 가
마는 길이 7.3m, 폭 120cm 내외로 토축요이다. 대접, 완, 접시 등이 주
류를 이루며 자배기, 반구형장경병,
항아리 등이 있다. 녹갈․암록색의 유
조를 띠며 갑발은 사용하지 않고 가마
바닥에 경사진 陶枕을 받쳐 재임하였
다. 출토품 가운데 흐릿하지만, 분명
굽을 옥벽저형으로 깎은 것이 있다.
<그림9> 이외에도 대구 진인동 일대에서는 벽돌가마 벽편과 갑발, 갑발받침,
도침 등이 출토되었다. 주요 기종은 완과 발이고, 항아리, 반구병, 화형
접시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완들은 주로 옥환저계이다.38)
지금까지 살펴본 바, 국내 가마터의 해무리굽 완의 생산은 대체로
시흥방산동의 2기층, 용인서리 2기층 정도부터 나타난다. 즉, 玉環底
다음단계 부터이다. 중국에서 당대이래 완의 굽깎음 형식이 옥벽저→
옥환저로 변화했던 것에 비하면, 국내 경우는 다르게 나타났다.
즉, 전형적인 전축요에서는 그릇내면이 원만하고 굽 접지면이 좁은
A형식(옥환저 완, 일명 선해무리굽 완)에서 굽 접지면이 넓고 내면이
원만한 B형식(옥벽저 완, 중국식해무리굽 완)으로, 그 후 굽접지면이
넓고 내저에 원각이 있는 C형식(한국식해무리굽 완)으로, 다시 내저에
원각이 있으나 굽접지면이 좁고 굽직경도 작아지는 D형식(한국식퇴화
해무리굽 완)으로 변화해 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39)
37) 정양모․김영원․구일회, 仁川 景西洞 綠靑磁 窯址, 國立中央博物館․仁川市
立博物館, 1990.
38) 김구군, 「大邱近郊의 初期靑磁窯址에 대하여」, 벽돌가마와 초기청자, 해강
도자미술관, 2000.
39) 이종민, 고려 초기청자 연구, 백산자료원, 2004.
338 湖西史學 第50輯
그런데 굽 접지면이 넓고 굽직경이 큰 이른바 옥벽저완(중국식 해무
리굽완)들은 청자와 더불어 白瓷를 竝山했거나 처음부터 백자를 주로
생산했던 요장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경향이 농후하여 흥미롭다. 즉, 시
흥방산동, 용인 서리, 여주 중암리 처럼 일찍부터 청자와 함께 백자가
생산되거나 등이 비슷한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배천
원산리, 양주 부곡리, 원당 원흥동 등지에서는 백자의 생산례가 아직까
지 보고된 바 없으며, 옥환저계완은 나타나지만 옥벽저계완은 확인되
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는 백자를 竝産했거나 백자 위주로 요업이 이
루어진 가마와 청자전용 요장간에는 시간적으로는 중복되지만 요업이
상대적으로 일찍 끝났거나 또는 요업의 계통이나 요업기술의 전파 등
에서 서로 다른 환경 아래 놓여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같은 차이는 지금까지 초기청자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없으며, 필자 역시 고려초 ‘백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갖게된 의문
이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동시대 중국의 현황을 살펴보자.
2. 해무리굽 완의 지속현상과 중국 북방요장
唐代이후 옥벽저 완을 제작하던 중국 남방의 월주요나 북방의 형요
등지에서 이미 단종되었다고 알려진 기종들이 새삼스럽게 10세기 이
후 고려의 요장에서 상당기간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으로서
는 문제 제기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遼의 지배 지역내 요업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이미
10세기부터 12세기초에 이르는 시기 중국북방에서 거란의 정치적 역
할과 공예분야의 활동상을 통해 고려와의 관련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遼의 건국으로 직접적인 지배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河北, 山
西, 內蒙古 등지에서는 그 초기에는 중국 본토의 도자들을 수입하는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39
양상을 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국내 생산에 주력하여 그 사용
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白瓷, 黑釉, 三彩 등은 대표적인
생산품이었다.40)
현재까지 알려진 遼․金代 요장으로는 內蒙古 赤峰의 缸瓦窯와 乾瓦
窯,41) 內蒙古 上京 臨潢府의 林東窯,42) 南山窯, 白音高洛窯, 遼寧省
遼陽市의 冮官屯窯, 河北省의 龍泉務窯43) 등이 있다. 특히 하북성의
定州를 포함한 주변지역의 우수한 백자제작 기술은 遼지역 도자 발달
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일정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위의 요장들은 대체로 10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존속했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官窯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실제로 고려초기 자기요지에서는 초기 제작기술이 중국 남방과의
강한 연관성 아래 있었다고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중국과는 달리 백자
가 청자가마에서 함께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의 도읍과 주변지역에서는 이미 10세기경부터 백자가 만들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경기도 시흥의 방산동과
용인 서리요장이다. 이들 가마에서는 청자와 함께 상당 비율로 백자가
생산되었다. 백자와 청자는 재료가 다르고 번조기술에서도 차이를 보
이므로 같은 요장에서 서로 다른 질의 도자를 함께 제작하고 동시에
번조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 가마에서는
엄연히 청자와는 계통이 다른 태토와 유약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백
자를 제작하였다.44)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왜 그래야 했을까. 남방의
기술을 실현했던 장인들이 어떤 이유로 북방적인 백자를 함께 제작하
40) 이하 遼代窯場에 대한 자료는 路 菁, 遼代陶瓷, 遼寧畵報出版社, 2003 참조.
41) 조질의 백자와 저화도 연유도기를 주로 생산함.
42) 臨潢府 옛 황궁터 인접지역에 위치, 遼의 관요로 추정.
43) 백자, 연유 삼채기 등을 생산.
44) 용인시․용인문화원․여주대학,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지 도편분석 연구보고서,
2004.
340 湖西史學 第50輯
게 된 것일까. 백자의 조형과 기술의 원천은 어디일까. 이와 같은 의문
을 가지고 접근하다 보면, 고려전기의 요업발달이 중국 남방 일변도가
아닌 거란을 통한 북방요업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중국 북방의 간접적인 백자 유행이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또 북방장인의 직접적인 도래를 상정해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청자와 함께 백자가 생산되는 요장에서는 대체로 맨 처음 단
계에는 월주요식 옥환저계 청자완이 제작되다가 곧 이어 백자제작이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 때 굽의 접지면 폭이 넓고 그릇 내면에 원각이
없는 중국식 玉璧底 碗의 기본을 띤다. 이같은 형태는 시간적으로 앞
선 唐代에 유행했던 타입인데 왜 이 시기 고려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특히 중국식 옥벽저의 제작단계가 국내 청자요에 백자가 출현하는 시
점과 맞물리는 것으로 본다면, 이들의 조형 및 기술원천은 어디일까?
시흥방산동이나 용인서리, 여주중암리 등 백자가 함께 생산되거나
백자요장으로 전환하는 곳에서는 옥벽저완들이 일시적이나마 많이 제
작되고 그 변화과정을 보이는데 반해, 배천 원산리, 원당 원흥리, 양주
부곡리 같은 청자생산을 주로했던 가마에서는 옥환저계 완들이 중심
을 이루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10~11세기 송 지배지역내 청자 생산 가마로 북송의 官窯와 汝窯, 백
자를 생산한 가마로는 定窯, 景德鎭窯 등이 유명하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처럼 새로운 청자류보다 당대의 전통이 강한 옥벽저계 굽을
가진 해무리굽 청자들이 다시 생산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고려에 유입
된 禪宗과 그로 인한 飮茶 풍습이 원인이라는데 대부분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고려의 匠人들이 飮茶器로서 唐代에 유행한
해무리굽 완을 제작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45)
그러나 비록 민간 부문에서 물자교류가 꾸준히 이어졌다 하더라도
45) 金英美, 「越窯硏究」, 北京大學 博士硏究生學位論文, 2002.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41
<그림10-1> 내몽고 적봉 항와요 출토
백자 완, 지표수습
<그림10-2> 내몽고 적봉 항와
요 출토 백자 완, 지표수습
窯業 공정을 통해 직접 생산 하는 것은 물품의 매매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서적이나 그림, 공예품 등의 유
입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도자기의 디자인이 번안되고 실현되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私的 교류가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술이나 디자
인이 국내 생산에 영향을 줄만큼 본격적으로 도입되기에는 어려울 것
이라는 생각이다. 더욱이 여러 기종들 가운데 한 두가지라면 모를까
동시대에 함께 생산되는 생산품의 전체 양상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100여년 전에 유행했던 唐代 옥벽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재
현했다고 보기는 오히려 어렵다. 왜냐하면 10세기 고려에서는 天福 4
년(939년)의 馬氏皇后 江陵 출토 옥환저완 같은 타입에 더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6)
그런데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크기와 비례에는 차이가 있지만 형태
가 뚜렷한 옥벽저완들을 적지 아니 발견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바로
요, 금의 요장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 가운데 11세기 전후로 융성했던
赤峰 缸瓦窯<그림10-1><그림10-2>나 上京의 林東窯<그림11> 등지에서는
옥벽저 완들이 제작되었다. 이 가마들은 아직 발굴보고가 이루어지지
46)浙江紀年瓷, 文物出版社, 2000, 사진 191.
342 湖西史學 第50輯
<그림11> 上京 林東窯.수집
백자완, 1944년 고야마후지오
수습
<그림12-1> 遼 慶陵 東
陵 건물지 출토 도자기
<그림12-2> 遼 慶陵 中
陵 건물지 출토 도자기
않았지만, 1940년대이후 일본에 의한 지
표조사와 이후 1990년대 중국에 의한 발
굴을 통해 어느 정도 특징이 알려졌
다.47) 실제로 內蒙古自治區의 巴林左旗
에 있는 慶陵48)의 東陵49) 건물지에서는
임동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
자들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굽 바닥
접지면이 넓고 평평한 것이 일부 보인다.
또 그보다 더 늦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
되는 中陵50) 건물지에서도 북방지역 청
자와 함께 옥벽
저로 추정되는
백자파편이 발견
되어, 위 가마들
의 활동년대를
추정하는데 도움
을 준다. <그림
12-1> <그림12-2> 또 中原의 安
徽省 繁昌窯 등
지에서도 청자
47) 路 菁,遼代陶瓷, 遼寧畵報出版社, 2003 ; 弓場紀知,「遼上京府林東窯址再
檢討」,出光美術館硏究紀要第6號, 2000, pp.115-146.
48) 慶陵은 요나라 成宗, 興宗, 道宗 등 3황제의 永慶, 永興, 永福 陵으로 추정.
이들 능과 주인공에 대한 추정 및 출토품은 田村實造․小林行雄, 慶陵,
1953, 日本, 京都大學文學部. 참조.
49) 東陵은 遼 成宗(982-1031재위)의 능으로 추정.
50) 中陵은 遼 興宗(1031-1055재위)의 능으로 추정.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43
<그림13> 廣西 桂平의 宋代 杜步寧江窯 수집
청자 완
옥벽저계 碗이 거의 11세기 후반까지도 제작되고 있다고 전하며51) 廣
西 桂平의 宋代 杜步寧江窯<그림13>에서도 청자질의 옥벽저완에 가까
운 굽을 가진 도편이 수습
되고 있어52), 청자 옥벽저
완도 존속시기가 예상보다
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왜 백자인가?
백자 옥벽저완은 당대에
하북성 邢窯가 그 중심 제
작지였다. 대략 오대를 전후하여 요업이 중단되었고 그 중심이 定窯로
옮겨가면서 북방백자의 전통을 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
근 형요가 있었던 邢台지역 송대 무덤과 금대요지 등에서 기존에 정요
에서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官’, 이나 ‘盈’字가 새겨진 치밀하고
질 좋은 백자들이 여러 점 알려지면서 형요의 하한에 재고를 요하게
되었고, 10~11세기를 거치면서 金代까지도 북방의 여러 요장에서 그
조형과 기술을 이어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3) 따라서 중국
북방지역을 遼가 통치하게 되고, 도자 사용에서 백자의 비중이 높아져
영내의 가마들이 백자생산에 주력하게 되면서, 정요는 물론이지만 옥
벽저의 전통이 강한 형요계 기술이 전파되어 요대 북방백자의 제작이
다양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국내에서는 고려와 遼가 강화를 맺고 사신관계를 시작한 939년경
51) 이에 대한 정보는 南開大學 劉毅 교수의 전언에 따른 것이다.
52) 陳小波, 「廣西桂平古窯址調査」, 中國古代窯址調査發掘報告集, 文物出版
社, 1984, pp.195-200.
53) 楊文山,「論宋金時期邢窯白瓷的持續生産」, 邢窯遺址硏究, 邢台市文物官
理處․臨城縣文物保管所 編著, 科學出版社, 2007, pp.330-340 ; 河北省文物
硏究所․臨城縣文物保管所,「臨城山下金代瓷窯遺址試掘簡報」, 邢窯硏究,
文物出版社, 2007, pp.55-63.
344 湖西史學 第50輯
<그림15> 遼寧省 赤峰市 衛
國王 駙馬墓(959) 출토 백자주
자, 요녕성박물관 소장
<그림14> 시흥 방산동 요지 출토 靑
瓷有蓋注子, 해강도자미술관 발굴
이후부터 기존의 월주요계 청자 요
장에 백자기술 내지 북방계 장인이
합류하면서 그 과정에서 옥벽저의
전통이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54) 특히 방산동요지에서 옥
벽저계완들과 동반되는 靑瓷有蓋注
子<그림14>의 경우도 遼寧省 赤峰市
衛國王 駙馬墓(959)에서 출토된 백
자주자와 흡사하여<그림15> 그 연관
성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1029년 遼가 요청한 援
兵을 거절하여 북측으로 통하는 통로가
차단되고, 1030년에는 송과 교류를 시도
하려 하지만 고려 내부에서 거란의 눈치
를 보느라 내사문하성에서 宋과의 통교
를 반대함에 따라 遼지역 및 宋과의 소
통이 불편하게 되었다. 따라서 11세기
전반부터 11세기 후반에 이르는 50여
년간은 자기 생산에서 오히려 외부의 영
향보다는 고려의 자체적인 정비 및 변화
54) 이와 관련하여 이희관은 한국의 청자제작 개시는 한반도 중서부와 남부지역
이 월주요의 서로다른 계통 청자의 기술영향 아래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달
하여 그 시기를 10세기 2/4분기로 보았다.(이희관, 「한국 초기청자에 있어서
해무리굽완 문제의 재검토―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 문제의 해결을 위하
여」, 미술사학연구237, 2003, pp.5-48). 그러나 필자는 중서부지방과 남부
지방은 조형과 기술에서 선후의 시간차이를 두고 이어지는 것으로 보며, 오
히려 중서부 지역 가마들간에 중국 북방백자의 영향을 받은 요장과 그렇지
않은 요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45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한반도의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초기청자 가마에서 보여주는 생산품과 제작유형은 그보
다 시간적으로 늦게 발달한다고 추정되는 한반도의 남서부지역 가마
제작품에 점진적으로 전파되고 있음이 기종 및 구성에서 확인된다.
이같은 양상은 11세기말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고, 고려가
中華의 문물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12세기 전반경이 되면 달라져
청자에서도 조형과 질, 제작방법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10
세기말부터 11세기초에 중국 북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옥벽저 양식의
완들은 12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생산되면서 자체적인 변화를 보
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11세기 유형으
로 알려진 高麗式 玉璧底系 碗(소위 ‘한국식 해무리굽 완’)이 생산되
는 시기의 동반유형 청자들 즉 외반구연의 대형접시, 잔탁, 罐, 油甁,
반구병, 弧形접시 등 대부분의 기종과 세부기형에서 중부지방 초기청
자에 그 祖形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55)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12세기 전반 이후 기록에서 비로소 고려의 청
자 관련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신라말~고
려초에 걸쳐 많은 승려들이 중국의 강남지방 특히 절강성 지역에 진출
하여 求法活動을 폈고, 고려 광종때에는 승려를 파견하여 수학케 하거
나 사신을 보내는 등 오월국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
실이다. 그럼에도 당․오대이래 仁宗12년(1134, 昭興4)까지 고려가 송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함께 보낸 貢物 관련 내용을 보면 아직까지 청자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56) 이는 아마도 당시 중국의
55) 해무리굽 완 뿐만아니라 다른 기종에서도 시흥방산동이나 용인 서리 3,4층과
같은 초기유형 청자들 가운데 잔탁, 접시, 향완등 여러 기종에서 그 조형의
맥이 연결되고 있음은 청자제작 계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李鍾玟, 「시흥 방산동 초기청자 요지 출토품을 통해 본 중부지역 전축
요의 운영시기」, 미술사학연구 228․229, 한국미술사학회, 2001, pp.65-97.
56) 王應麟, 玉海154, 朝貢 獻方物
346 湖西史學 第50輯
그것과 비교할 때 고려의 청자가 새롭거나 중국에 견주어지는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비해 국내에서는 청자에 오래 동안 옥벽저계 굽양
식이 잔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가
가장 선명한 강진요지의 경우 해무리굽완을 동반하는 층위(용운10-Ⅰ
층)의 유물과 해무리굽 완이 사라지는 층위(10-Ⅱ-가)의 동반유물간에
보이는 급격한 변화에서 추측할 수 있다. 즉, 용운리 ‘10-Ⅱ-가’ 유형의
시작점이라고 추정되는 12세기 2/4분기~3/4분기사이까지는 해무리굽
완들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안양 무내리 지표조사에서 해무리굽 저부편이 전형적인 강
진 용운리 10-Ⅱ유형 자기들과 함께 수습된 바 있다. 이 가마가 고려초
기부터 자기를 생산했던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지방
의 질낮은 도자를 생산하던 요장에서는 더 늦은 시기까지 해무리굽 양
식의 완들을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비유적 가운데서 이같은 정황을 뒷받침 해주는 곳으로는 파주 惠
陰院址가 있다. 알려진 바 혜음원은 睿宗 15(1120)년 2월에 공사를 시
작하여 1122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1144년 인종과 왕비의 후원이 이루
어지면서 12세기 중반경 혜음원은 가장 융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
선초까지도 院의 기능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곳에서는
완, 대접, 접시, 鉢, 잔, 뚜껑, 枕 등 50여 점 이상의 고급 청자가 발굴
되었다.57) 주로 완, 대접, 접시가 많다. 강진 도요지 출토품을 지표조사
를 기준으로 보면 주로 기벽이 얇고 유색이 투명하며 섬세하게 규석을
받친 Ⅳ유형이 이에 해당한다. 강진 용운리 10호요지 발굴품을 기준으
로 보면, 10-Ⅱ-다 유형에 속하는 것 가운데 가장 고급에 속하는 것들
57)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파주시, 「파주 혜음원지 발굴조사보고서―1
차~4차」, 2006 ; 姜京男,「坡州 惠陰院址 出土 高麗靑磁 硏究―편년과 성
격을 중심으로」, 문화사학21, 2004, pp.741-763.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47
<그림16> 파주 혜음원지 출토
백자 완, 단국대학교 발굴
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르면 12세기 타입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청자가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 청자들 가운데 굽 직경이 좁고 그릇 내저에 원각이 있으
나 굽 접지면이 작아진 소위 ‘한국식 퇴화해무리굽’에 해당하는 청자
완과 조질의 백자완이 포함되어 있
다.58)<그림16> 발굴자에 따르면, 이들
한국식 해무리굽 완들은 특별히 층위
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傳世되거나 앞
시기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청자
들과 함께 출토되어 거의 12세기에 사
용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필자도 이들
백자와 청자가 다른 청자들에 비해 질이 떨어지고 퇴화된 양식을 보이
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거의 혜음원 설립 초창기에 사용되던 것일 가
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밖에 연세대박물관 소장의 청자호 일괄유물도 주목할 만하다.59)
傳 全州 출토품인 유물은 대형의 陶器盒 내부에 靑瓷壺와 소형의 도기
합이 함께 매납된 부장품이다. 연세대박물관에 따르면 수장 당시 그
내용물이 개봉되지 않은채 입수되었으므로 내용물이 교란되었을 가능
성은 거의 없다. 대형 도기합 내부의 중심에는 靑瓷瓜形壺가 놓여 있
고 그 둘레에 9개의 소형 도기합 배치되어 있었다. 중심에 놓였던 청자
호에는 도기 뚜껑이 덮여 있었고, 뚜껑 위에는 海東通寶(1097~1105)가
놓여 있었다. 중앙의 청자호에는 화장 후 뼈를 담고 주위의 도기합에
는 벼, 보리 등 곡식을 담았던 것이다. 해동통보의 동반으로 이 도자기
들은 적어도 1097년 이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청자
58)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파주시, 「파주 혜음원지 발굴조사보고서--1차~
4차」-탑본․도판․사진편, <사진279>, <사진280>, 2006.
59) 연세대학교박물관, 고려시대 질그릇, 1991, pp.10-11. 도판1.
348 湖西史學 第50輯
<그림17> 傳 全州 출토 靑
瓷瓜形壺, 연세대학교 소장
<그림18> 대구 진인동
요지출토 黑釉瓜形壺, 해
강도자미술관 조사
의 형태와 유색을 보면 특이하다. 황갈색으로 동체는 둥그름한데 세로
로 눌러 瓜形을 만들었다. 청자의 질과 유색
등으로 보면 중서부지방 초기청자들과 흡사
하지만 외반된 구연과 동체 8곳을 세로로
눌러 瓜形을 만든 예는 중서부는 지방에서
는 보이지 않았던 기형이다.<그림17> 그런데
한편, 근래에 알려진 경북 대구 진인동 요지
에서 黑釉가 입혀진 둥근 형태의 외반구연
호片이 수습되어 주목된다.60)<그림18>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黑釉壺와 함께 수습된 청
자들은 대부분 내저에 원각이 있는 한국식
해무리굽碗들이며 퇴적에서는 가마를 축조
했던 벽돌편들과 구멍 뚫린 갑발이 동반되었
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경상도 지
역에서 확인된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이
행하는 단계의 가마로 추정된다. 또 구멍 뚫
린 갑발도 중서부지역과 남부지역에서는 전
축요계 요업이 끝나고 토축요로 전환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요도구
이다.61) 따라서 이같은 표식들과 함께 해무리굽완들이 수습되고 또 이
들과 함께 과형의 둥근항아리가 발견된 점은 한국식 해무리굽 완류의
제작 하한이 12세기 초반까지도 충분이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강릉 관아지에서는 청자 옥환저완과 함께<그림19> 원향사
지에서는 다양한 청자 및 백자들과 함께 회청색의 陶器 해무리굽완이
60) 김구군, 「大邱近郊의 初期靑磁窯址에 대하여」, 벽돌가마와 초기청자, 해강
도자미술관, 2000, p.53, 사진22.
61) 張起熏, 「窯道具를 통해 본 初期靑磁 窯業의 變遷」, 미술사연구제16호,
2002, pp.229-253.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49
출토되어,<그림20> 자기질 완이 토기로 번안되는 과정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림19> 강릉 관아지 출토 도기
완과 청자옥환저 완, 강원문화재연
구소 조사
<그림20> 여주 원향사지 출토
도기 완,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
Ⅳ. 맺음말
지금까지 고려전기 가마터에서 중국 옥벽저계 완인 해무리굽완이
나타나는 현상과 그 이유에 대해 문제를 제기와 함께 몇 가지 이유를
추론 해보았다. 그동안 한국의 초기청자 제작과 연관하여 월주요로 대
표되는 중국 남방요업 중심의 시각에서 확장하여 중국북방 지역과의
연관성을 상정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청자가 제
작되는 시기, 작업조건과 공정이 다른 백자가 함께 제작되고 있었던
점과 이미 중국 남방의 청자요장에서는 거의 제작이 소멸된 옥벽저계
완의 한국내 부활은, 고려초 자기제작이 계통이 다른 기술이 전래되었
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청자와 함께 백자를 만들게 되는 초기요장으로는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등이었으며 이들 요지에서는 옥환저계 완의 제작 다음단계에서
중국식 玉璧底 碗의 기본을 띤 완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단계는 국내 청자요에 백자가 출현하는 시점과도 어느정도 맞물리
는 것으로 보이며, 이같은 현상의 이유를 요녕 赤峰 缸瓦窯나 上京의
350 湖西史學 第50輯
臨東窯 같은 遼代 요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초
기청자 요장 가운데 배천 원산리나 양주 부곡리, 원당 원흥리 등처럼
백자를 함께 제작하지 않았던 가마에서는 아직까지 청자와 백자에서
옥벽저 형식을 띠는 해무리굽 완이 제작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따라서 중국 북방지역을 遼가 통치하게 되고, 도자 사용에서 백자의
비중이 높아져 영내의 가마들이 백자생산에 주력하게 되면서, 정요 및
옥벽저의 전통이 강한 형요계 기술이 전파되어 요대 북방백자의 제작
이 다양해졌을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환경 아래, 국내에서는 고려와
遼가 강화를 맺고 사신관계를 시작한 939년경 이후부터 기존의 월주
요계 청자 요장에 백자기술 내지 북방계 장인이 합류하면서 그 과정에
서 옥벽저의 전통이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특히 방산동
요지에서 옥벽저계완들과 동반되는 靑瓷有蓋注子의 경우, 요녕성 적
봉시 衛國王 駙馬墓(959)에서 출토된 백자주자와 흡사하여 그 연관성
과 제작시기 등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1029년 요나라의 원병요청을 고려가 거절하면서 통로는 차단되고
이전과 같은 통교는 어려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0세기말부
터 11세기초에 중국 북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옥벽저양식의 완들은 지
속적으로 생산되면서 자체적인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내
요장에서는 새로운 중국 중원의 양식보다는 초기청자 및 백자요지에
서 보여주었던 조형과 기종의 조합을 비교적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
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종 조합과 장식기법에 변화가 두
드러지는 것은 북송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12세기 1/2분기 이후인 것
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중국 본토에서 비교적 일찍 단종되어 극히 일부 가마에서
발견되며, 오히려 遼 영내의 가마에서 활성화되는 옥벽저 형식의 완들
은 그 크기와 비례 등에서 차이는 있지만 동북아시에서는 드물게 고려
지역에서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내의 해무리굽완 유행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51
시기는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12세기 전반에 건립되어 12세기 중반경에 전성을 맞는 파주
의 혜음원지에서는 비색의 전형적인 강진․부안산 청자들과 함께 퇴화
된 해무리굽을 가진 백자와 청자가 발견되었고, 고려중기 지방자기가
제작되었던 안양의 무내리 가마에서도 해무리굽 완이 극소량이지만
수습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초기 자기 발달에 대한 탐구는 그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중국 북방요업과의 직․간접적 관련을 증명하려면, 기종 및 기
형, 번조법, 가마 및 동반제작 기물들에 대한 수평적 비교연구가 심층
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남방 중심의 관점
에서 국내요업의 도입과 발전을 해석하기에는 여러가지 의문이 있었
으므로 시야를 더 넓혀 연구의 영역을 확장해야한다는 문제를 제기하
는 것으로 본고의 의의를 삼고자 한다.
본문에서 언급했지만 사실 중국 북방요장의 백자들 외에도 廣西省
이나 安徽省등지에는 청자 옥벽저완이 송대까지 생산되고 있었을 가
능성이 있으므로 이 문제 또한 향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 고
려가 청자외에 백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이고 청자와 구별되는 자기로
서 백자를 인식하여 그 사용을 확대해가는 현상 역시, 거시적으로는
북방도자 유물의 직접 내지 기술적 수용과 연관선상에 놓여 있을 것으
로 보고 차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논문접수: 2008. 7. 18, 심사시작: 2008. 7. 19, 심사완료: 2008. 8. 28.]
주제어: 고려전기, 玉璧底 碗, 遼, 북방도자, 백자
352 湖西史學 第50輯
<Abstract>
Inference upon the continuous presentation of Yübi-di
styled bowls in the early Goryeo Dynasty
―As for the relations with the East Asian Northern ceramic wares
Jang, Nam-won
This paper is to deduce the reason why chinese styled, Yübi-di styled
bowls, were excavated in kilns of the early Goryeo Dynasty. So far,
it has been studied upon the relations with the ceramic industry in the
southern as well as the northern China in the matter of the link with
the production of early Korean ceramics. In particular, there is the strong
evidence that new techniques were introduced for producing porcelains
that was revealed through the period when they were produced in the
Korean Peninsula at first, the thing that white porcelains, in different
condition, were seen at the same time as well as presentation of Yübi-di
styled bowls in Korea, which had been disappeared in the southern China.
The period that Yübi-di styled bowls in BangSang-dong kiln and Suh-ri
kiln where white porcelains as well as celadons were made were presented
is similar with that of introduction of white porcelains in Korea. The reason
is to be found at this study upon the relations with the ceramic industry
of Liao Dynasty such as Chi-feng Gang-wa -Yao and Lin-Dong Yao.
That is to say, when Liao Dynasty was dominated in the northern
China and white porcelains were mainly used and produced, the northern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 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353
styled white porcelains in Liao Dynasty was mostly presented with the
techniques of Xing-Yao style, strongly influenced by Ding-Yao and Yübi-di
style. Since 939 when Goryeo and Liao Dynasty had been closely
connected, the representation upon the tradition of Yübi-di styled bowls
had been likely due to link the previous Yuè Yao styled porcelains and
the white porcelains or the northern ceramists.
It has been known that since the request for sending reinforcements
by Liao Dyansty in 1029 was refused by Goryeo Dynasty, the trade
had been isolated. Therefore, Yübi-di styled bowls adopted from the
northern China in the late 10th and the early 11th centuries had changed
in its own ways. In short, It has been shown that the original forms
and styles were kept well in Korean more than China which had had
many changes since then.
That is to say, Yübi-di styled bowls has kept its tradition only in Korea
of the North East Asia in spite of the differences upon its size and
proportion, which was disappeared in China and was yet vividly produced
in Yo dynasty. Therefore, it is shown that Yübi-di styled bowls had
been popular for a while.
Yübi-di styled bowls white porcelains and celadons were excavated
in Hye Eum Won with the traditional Gang Jin and Bu-An styled celadons
in the early 12th century. Furthermore, they were discovered as well
in the kiln in Moo Nae-ri in An Yang where local porcelains were produced
in the middle Goryeo Dynasy. In addition, Yübi-di styled bowls in Gwang
Xi and An Hui besides white porcelains in the northern China had been
likely to be produced even in Sung Dynasty.
key words : early Goryeo Dynasty, Yübi-di styled bowls, Liao Dynasty,
East Asian Northern ceramic wares, white porcelain

2017.12.05

cafe.daum.net/jangdalsoo/iut0/73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