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가마쿠라 무사들, 고려청자 '장엄ㆍ권위' 위세품 활용

2018. 11. 26. 19:50차 이야기



日 가마쿠라 무사들, 고려청자 '장엄ㆍ권위' 위세품 활용| 무등산분청사기

무등산자락길잡이협동조합 | 조회 20 |추천 0 | 2018.04.10. 07:52


쓰시마 출토 청자 해치형 연적. 쓰시마시 교육위원회 제공


미(美)에 대한 관념과 조형은 지역과 시대, 문화, 환경, 종교 등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생성ㆍ발전하며 소멸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나라와 교류를 통해 새 양식이 만들어지며 삶을 살찌우는 역할을 한다. '자기 문화'도 중국에서 진정한 자기가 탄생한 후 주변국으로 확산됐는데 고려가 이를 가장 먼저 수용하며 독창적인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로 발전시켰다. 자기 생산을 갈망하던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장인의 힘을 빌려 열망하던 자기 생산국 대열에 마침내 편입된다. 자기생산 이전은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한 청자 등으로 상류층 욕구 충족을 대신했다. 12세기 이후 해양교류는 '도자기의 길'로 명명될 정도로 세계 교역의 중심에 도자기가 자리잡았다. 일본 역시 이 시기 많은 자기가 유입됐으며 고려청자도 수량의 차이는 있지만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확산됐다.



중국과 함께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교역은 다자이후(大宰府)를 통한 제한적인 공무역(公貿易)이 중심을 이루며 중국 도자보다 고려청자 비율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 수량은 많지 않다. 정치ㆍ경제ㆍ문화와 대외교역 핵심지역인 쿄토(京都)와 하카타(博多), 가마쿠라(鎌倉)는 물론 한반도 교역 중계지 역할을 하던 쓰시마(對馬島) 지역 등에서 집중 출토돼면서 고려청자가 일본 도자문화에 끼친 영향이 막대했음을 알 수있다. 쿄토는 정치ㆍ문화 수도로 일반 지역에 비해 많은 고려청자가 출토돼고 있지만 하카타와 가마쿠라에 비하면 많은 수량은 아니다. 수도로서 대외교류가 많았음을 감안한다해도 고려시대 기간동안 유입된 수량이 많지 않은 것으로 미뤄볼 때 고려청자 소비에는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신라의 큐슈(九州)지역 침략에 대한 반감으로 이후 한반도에 적대적 이며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했던 쿄토 귀족층들의 고려청자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초기~후기 청자가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나 초기청자 보다 중기청자 이후가 많으며 순청자에 비해 상감청자의 비율이 많다. 순청자는 굽이 없으면 중국 청자와 쉽게 구분되지 않아 그 수량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상감청자는 고려만의 독특한 문양기법으로 중국청자와 쉽게 구분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중기 이후 고려청자가 많이 확인될 수도 있다. 현재로는 고려 중기 이후 생산된 상감청자 수량이 많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전에 비해 고려청자가 활발하게 유입됐음을 알려준다.



하카타는 일본 대외교류 창구역할을 했던 지역으로 다종 다양한 외래문물이 유입돼 사용됐다. 고려청자 역시 초기청자부터 말기청자까지 다양한 청자가 유입됐으며 일본에서 많은 수량이 확인되고 있다. 대외교류 창구로 고려와 사신왕래 등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요인 등이 작용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하카타 사람들이 고려청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추정된다. 하카타에서 고려청자 유입 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전기인 11세기~12세기 전반은 다자이후와 하카타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12세기가 되면 해남 유형의 품질이 떨어지는 조질청자가 증가하는데 이후 조질청자와 철화청자는 수량의 차이는 있으나 계속 출토된다. 12세기 중반~14세기 전반 일정한 수량의 고려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나 전기에 비해 수량이 적다. 이 시기는 가마쿠라 막부가 다자이후로부터 큐슈지배와 무역관리 권한을 접수해 직접 이 지역을 관할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청자를 선호하던 막부에서 외교적 선물과 교역품을 직접 관리하면서 이를 가마쿠라로 이송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려청자 유입이 급증하는데 이 시기는 중국 도자가 감소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청자가 증가하며 점유율도 20~30%까지 치솟았다. 가마쿠라 시대에 소량 유입되던 것에 비하면 특징적 현상으로 이전 정상적인 교역에서는 찾아 볼 수없는 사례다. 이 시기에 많은 청자가 유입된 배경은 1350년부터 본격 시작되는 왜구의 한반도 등장과 일치한다. 이 시기는 원(元)과 명(明)이 교체되는 혼란의 시기이며 왜구의 등장으로 중국과 무역이 제한됨에 따라 고려에서 도자유입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였다. 왜구의 금지와 소탕을 요청하기 위한 고려 사신과, 고려 포로송환을 위한 일본 사절 등 왕래 등으로 다양한 외교선물이 유입되면서 고려청자도 함께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고려청자는 대부분 상감청자로 하카타 출토 고려청자의 특징은 고려 후기 상감청자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마쿠라는 가마쿠라 막부의 핵심지역으로 가마쿠라 시기에 한정해 고려청자가 집중 유입되는데, 이는 새로운 무가(武家) 정권을 수립한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구축하려했던 가마쿠라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에 따른 결과물로 추정된다.



13세기는 원(元)의 일본을 원정하려는 야욕으로 대립과 반목의 시기였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신 방문으로 고려청자가 가마쿠라 막부에 유입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가마쿠라 막부는 다자이후로부터 큐슈지배와 무역관리 권한을 접수해 적극적으로 대외교류를 실시하며 많은 외래문물이 수입됐는데 고려청자도 그 중 하나였다. 이 때 일본의 대외교역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무역선이 바로 '신안선'이다. 가마쿠라 출토 고려청자는 13세기대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문으로 양국 교류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던 쓰시마에서도 많은 고려청자가 출토되거나 전래되고 있다. 쓰시마의 고려청자는 한국과 가까운 거리를 반영하듯 매병과 주전자, 연적 등 다종 다양한 청자가 출토됐다. '청자해치형연적'은 신안선에 실렸던 연적과 비슷해 활발하던 교역의 실상을 뒷받침 한다. 쓰시마에서는 신사(神社)에 많은 고려청자가 전래되고 있는데 해신신사(海神神社)에 남아 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자상감버들문매병' '청자상감당초문표형주자' '청자음각연화문매병' '청자음각여의두문매병' '청자퇴화문봉황형주자' 등이 대표적이다. 쓰시마에 남아 있는 고려청자는 고려 상감청자의 우수성을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다.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고려청자가 많이 출토되는 이들 지역의 출토 청자 종류는 쿄토와 가마쿠라, 쓰시마의 경우 대부분 품질좋은 양질의 병과 호 등 장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특수 기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카타는 일상생활 용기인 발과 접시가 출토품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다. 쿄토와 하카타는 조질청자와 철화청자가 출토되고 있는데 조질청자는 일본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고려청자가 장기간 유입된 쿄토와 하카타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 무늬는 쿄토와 하카타의 경우 다양하지만 특징적인 문양은 확인되지 않는다. 가마쿠라는 그릇 종류에 따라 특정 문양이 중심을 이루는데 순청자 매병은 음각연화문을 선호했으며 상감청자 매병은 운학문 유형을 중심으로 포도동자문이 일부 유입됐다. 주전자는 상감포도동자문을 선호했는데, 이는 국내서도 출토 사례가 희소한 특징적인 유물로 가마쿠라에서 출토됐다는 점에 의미를 둬야 한다. 특징적 무늬가 확인된 것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가마쿠라 무사 계층의 취향이 남달랐음을 말해준다.



하카타와 가마쿠라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는 생산과 폐기 시기가 대부분 비슷하며 쿄토 출토품은 생산 시기보다 늦은 시기의 후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소량 유입된 고려청자를 오랫동안 사용한 뒤 폐기했음을 의미한다. 쿄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려청자를 선호하지 않았으나, 고려청자를 선호한 소수 귀족층이 잘 관리한 뒤 오랜 기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는 중국청자에 비해 수량은 많지 않지만 오랫동안 일본 사람들의 도자문화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의 미의식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부진하며 지원도 미약한 형편이다. 일본에서 출토된 고려청자에 대한 조사ㆍ연구가 강화된다면 고려청자의 대외교류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자기를 모방하는 데서 시작한 일본인들의 자기 생산에 대한 욕구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데려간 조선 장인들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문명의 교류는 모방성과 함께 독자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발전하는데 일본은 이런 모방과 변천을 거듭한 결과 현재 세계 최고 도자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 화려함을 밝히는 것도 좋지만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의 풍요로운 도자문화를 개척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음각연화문ㆍ상감포도동자문 등 특정문향 선호

日 가마쿠라 지역 출토 청자


일본에 유입된 고려청자 중 가마쿠라 지역 출토품은 가마쿠라 시기(1185~1338년)한정된 기간 동안에 많은 수량이 유입됐다. 그동안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져 고려청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청자는 대부분 전성기 비색청자의 여운을 간직한 양질품들로 수도인 교토(京都)와는 다른 신문화를 창조하려는 가마쿠라 사람들의 선호 따라 유입됐다. 그릇 종류는 병과 주자, 호, 항 등 주연(酒宴)과 다례(茶禮)를 위한 용기거나 실내 장식 에 사용되는 특수 기종이 중심을 이룬다. 장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 성격의 그릇이 선호됐음을 알 수 있다.

확인된 무늬도 음각연화문과 상감운학문, 상감운학모란문, 상감운학모란국화문 등으로 한정돼 있다. 기종과 문양의 관계는 살펴보면 순청자매병은 음각연화문을 선호 했으며 상감매병은 운학문 유형을 중심으로 포도동자문이 일부 사용됐다. 주자는 청자상감포도동자문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확인됐다.

가마쿠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는 대부분 13세기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 전성기 비색청자 유형이 계속 생산 유통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마쿠라의 출토 상황은 기존 12세기로 한정됐던 비색청자가 13세기에도 생산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최근 국내 고고학적 성과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마쿠라에서는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생산하던 음각 '○'문연판문병이 확인됐다. 양질청자를 전담 생산하던 강진청자가 머나먼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 유입됐음을 실증적으로 정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신안선의 사례로 짐작해 볼 때 고려청자 중 일부는 고려에서 중국으로 수출됐다가 일부는 다시 일본으로 재수출 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20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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