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한국문화유산연구원)의 강진과 고려청자

2018. 11. 26. 19:56차 이야기



한성욱(한국문화유산연구원)의 강진과 고려청자(2008년도 강진 수련회 발표 논문)| 중앙회수련회
김득환|조회 60|추천 0|2008.08.04. 10:50

康津과 高麗靑瓷
                                  韓盛旭(한국문화유산연구원)


  1. 머 리 말
  도자기는 점력을 가지고 있는 바탕 흙[胎土]으로 형태를 만들고 이것을 높은 온도로 구워낸 것이다. 그리고 바탕 흙의 종류와 만드는 과정, 굽는 과정[燔法], 굽는 온도, 유약 종류, 무늬[文樣]와 장식 기법, 제작지, 용도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굽는 온도와 유약의 유무 등으로 土器, 陶器, 火石器, 瓷器 등으로 나눈다.
  초보적인 陶器(Clay Ware)는 세계 각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기원전 1만년에서 6천년경 사이에 만들고 점점 기술을 개발하면서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기원전 6,000∼5,000년)부터 도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자연 상태의 태토를 그대로 사용하여 600  정도의 온도로 구웠으나,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년)가 되면서 태토를 인위적으로 혼합하여 700∼900 로 구운 軟質陶器(Earthen Ware)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조금 더 단단하고 실용적인 그릇에 대한 요구는 끊임 없는 기술발전을 촉진시켰으며, 그 결과 삼국시대에는 還元焰燔造에 의한 硬質陶器(Stone Ware)가 보편화되고 곧 이어 灰釉陶器가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낮은 온도에서 구웠기 때문에 가마도 없었으나 기술이 발달하면서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태토를 찾아내고 가마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은 도자문화의 중심을 陶器에서 瓷器로 순조롭게 이행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중국은 六朝時代(3∼6세기)에 회유도기 단계에서 초기 자기로 발전하고 唐 후기(7세기 중기∼907년)에 세련되어 五代(907∼10세기 중기)에 와서 완벽한 자기를 만들었다. 특히 청자의 발생은 玉과 관계되어 있다. 중국에서 옥은 君子를 상징하고 부귀와 사후 세계를 보장해주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중국인들이 옥을 소유하고자 하였으나 옥의 생산은 한정되어 있었다. 청자는 이처럼 한정 생산되는 高價의 옥을 대체하기 위한 도자 장인들의 각고의 실험과 노력으로 생산되었다. 우리 나라는 자체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자기를 완성함으로써 중국에 이은 두 번째 자기 생산국이 되었으며, 이후 베트남에서도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 때 데려간 조선 沙器匠에 의해 17세기부터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多種 多量의 용품을 多樣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매우 편리한 고급 공예품이다. 따라서 청자의 발생은 금속기와 목칠기, 옥석기로 한정되어 있던 일상생활용 공예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한반도에서 청자가 제작된 것은 신라 통일기의 2가지 혁신적인 변화에 그 배경이 있다. 첫째 삼국시대부터 도입되었던 중국청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증가되었으며, 둘째 高火度 灰釉陶器가 자기 제작기술 직전 단계까지 발전해 있었다. 특히 9세기경부터는 張保皐 大使의 해상활동과 유학 등을 통한 중국과의 폭 넓은 교역으로 浙江省 越州窯와 廣東省 銅管窯 靑瓷, 河北省 邢窯와 定窯 白瓷가 경주(황룡사, 안압지 등)를 비롯하여 서남해안지역(보령 성주사, 부여 부소산성, 익산 미륵사, 남원 실상사, 완도 청해진, 광양 옥룡사 등)에 많은 량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런 문화적 자극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던 회유도기의 기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청자를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자도 함께 제작되었다. 청자는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로 만든 형태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 유약을 입혀 환원염으로 구워낸 것으로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약과 태토가 안정되고 무늬가 시문되면서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청자는 고려의 창건과 비슷한 시기에 생성되어 고려의 성장과 함께 발전하며 고려의 쇠망에 맞추어 퇴락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의 흥망성쇠와 그 궤를 같이하는 특징적 공예품으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어 고려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강진은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 기술이 유입되어 퇴장하는 시기까지 청자를 생산하고 발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고려청자 窯場이다. 특히 강진은 도기를 만들던 전통적인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도자 기술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翡色靑瓷와 象嵌靑瓷를 완성하였던 곳으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또한 강진은 국가 재정과 물품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운영되었던 "所" 가운데 청자 생산을 담당하였던 大口所와 七良所가 운영되어 청자를 공급하였던 곳으로 국가의 관리하에 엄격하게 품질이 관리되었다. 따라서 강진청자와 고려청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脣亡齒寒의 관계로 강진청자의 변천사가 고려청자의 변천사이며, 고려청자의 변천사가 강진청자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2. 歷史 文化的 背景
  1) 全南의 陶瓷史的 背景
  전남지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 자기 생산의 핵심지역으로 수많은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다. 특히 고려 청자의 중심지로 그 기원과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은 강진군 대구면의 용운리(75기)·계율리(59기)·사당리(43기)·수동리(6기)와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5기),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54기)·금평리(2기),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80기)·초송리(24기)·구성리(2기) 가마터 등이 있다. 이들은 산과 계곡, 구릉의 경사지에 분포하며, 자기 제작이 시작된 시기부터 운영되어 청자의 기원을 간직하고 있다. 수량에 있어서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가마가 이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한편 초기 청자 가마터는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와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남해안을 따라 가마가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초기 가마터들은 기술 미숙으로 인한 청자 제작의 실패로 많은 갑발편과 자기편, 가마벽편 등으로 거대한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전남지역에 청자 생산 기술이 왕성하게 유입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서해를 통한 해상 활동으로 성장한 호족들과 중국에 다녀온 유학생 등 새로운 지배세력이 당·오대의 중국 문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禪僧들에 의한 飮茶 보급과 함께 茶器文化가 확산되었던 것도 그 배경의 하나이다. 이들은 처음 중국 자기를 구해 욕구를 충족하였으나 점차 지배층이 확충되면서 수입 자기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즉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게 되자 그와 비슷한 제품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으로 새로운 수도인 개경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갖꾸기 위해 궁궐과 관청, 사찰 등 많은 건물이 신축되면서 이곳에 사용할 고급 기물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전남지방은 일찍부터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을 통해 중국 도자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풍족한 물산과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자기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새로운 器物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자기 제작은 필수적이었으며 그 중심적 역할을 전남지방이 담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 청자 가마터는 당시 새로운 지배세력과 관계가 깊은 서남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는 이들 세력들이 중국과의 교류로 선진 기술인 청자 제작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들 가마들은 처음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해안에 분포하였으나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11세기대 강진과 해남으로 집약되기 시작하며 이외의 지역은 소규모로 운영된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가마가 강진과 해남에 집약됨에 따라 강진은 최대의 청자 생산지가 되었고 수도인 개경과 연결되어 수많은 명품을 만들었다.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는 양질의 고급품으로 왕실과 귀족층, 대형 사찰 등이 소비 대상이었다. 해남지역 청자 가마터는 강진과 구별되는 조질 청자 중심지이다. 이곳은 강진에 비해 거친 바탕 흙을 사용하고 유약도 녹갈색를 띠며 유면이 고르지 못하다. 따라서 해남 청자는 지방과 하급 관청 등의 수요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83∼84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섬 앞 바다에서 발굴된 32,000여점의 청자 제작지가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일대로 밝혀져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이처럼 전남지역은 고려 도자의 기원에서 발전에 이르는 초기 청자와 흑자 등을 제작하였던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일부 서남해안에 있는 다른 초기 가마들과 함께, 고려 도자의 모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질적으로는 왕실 소용의 양질에서부터 지방 수요의 조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 문화를 이끌어 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고려 청자의 우수성은 1123년 개경에 왔던 北宋 사신 徐兢이 지은 {宣和奉使 高麗圖經}과 북송 말 太平老人이 지은 {袖中錦}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 귀족문화의 황금기인 12세기 전반경에 고려 청자는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감탄하는 뛰어난 翡色靑瓷를 완성하고 있는데 이시기 강진 사당리 당전마을 가마터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가 되면 장기간의 대몽항쟁과 홍건족의 난, 왜구의 침입 등 외적요인과 내적으로는 무인집권층과 권문세족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매우 심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수공업품 등을 생산화였던 "所"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도자 장인들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와 전문적 분업화로 제작되던 도자 생산은 점차 그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자 장인의 전국적인 확산은 청자의 대량 생산을 가져와 자기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으며 조선시대 도자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후기에 확산된 도자 문화를 계승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많은 가마에서 도자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전남지방은 조선시대에도 많은 가마가 운영되어 도자 제작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가 폭 넓게 분포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년간 分院이 확립되면서 지방에는 外工匠 가운데 沙器匠이 배치되는데 전남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많은 23명이 배치되고 있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많은 도자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전남지역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왕성한 도자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世宗實錄地理志}와 {經國大典}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던 강진과 해남 지역이 조선시대에는 도자 산업이 쇠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남지역에 오랜 시기 많은 가마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 이를 수용할 수 있었던 우수한 문화와 기술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타지역에 대한 공급도 담당하였으나 무엇보다 이 지역에 이를 소비할 수 있는 충분한 경제력과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가능하였다. 그리고 따뜻한 기후, 질 좋은 바탕 흙, 풍부한 땔감 등 자연적인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어 운영할 수 있었다. 특히 고려 자기의 발전은 서해안을 통한 중국과의 교류와 바닷길을 이용한 운송의 편리함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

  2) 康津 靑瓷文化의 性格
  강진지역의 고려청자 가마터는 대구면(사적 제68호)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기념물 제81호)와 명주리 일대에 분포한다. 이중 핵심은 대구면 일대로 특히 龍門川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곳은 1914년 처음 알려지면서부터 지금까지 한국 도자사 연구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제작된 청자들은 한국 도자를 대표하는 명품들로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면 가마터는 크게 龍雲里와 桂栗里, 沙堂里, 水洞里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가마는 용문천 상류인 용운리에서 발생하여 용문천을 따라 바닷가인 사당리까지 매우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가마터는 현재 183기로 우리나라 청자 가마터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자기 발생기부터 14세기 쇠퇴 소멸기까지 고려시대 전 기간 동안의 가마가 조사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청자 발생과 세련기, 절정기, 확산기의 전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바다와 접해 있어 바닷길을 이용한 운송 공급이 매우 편리했던 곳으로 국가에서 자기 제작을 통제하였던 瓷器所가 있던 곳이다.
  용운리는 용문천 상류지역으로 雲谷, 巷洞, 龍門마을로 이루어졌으며 75기의 가마터가 있다. 이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가마터들이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이곳 가마는 대부분 청자 발생기 가마들로 청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선해무리굽 완부터 변형해무리굽 완까지 초기 청자의 특징과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越州窯와 汝窯 등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그릇 형태와 무늬 등을 볼 수 있다. 그릇의 종류는 일상 생활용 식기가 대부분으로 회백색 내화토 받침을 받쳐 포개 구웠으나 飮茶에 필수적인 완은 1점씩 구웠다. 무늬는 蓮瓣文과 菊唐草文 등이 있으며 변형 해무리굽이 출토되는 가마에서는 鐵畵와 堆花 기법이 약간씩 나타난다. 그리고 원통형 갑발과 갑발 받침이 많이 발견되는데, 갑발 측면에는 다양한 음각 기호가 있어 주목된다.
  용문천 중류인 계율리는 桂峙와 靑龍, 卵山, 栗村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59기의 가마터가 있다. 이곳은 초기 가마도 일부 있으나 대체로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의 것이다. 가마터 일부가 계치 동쪽 골짜기에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수몰되거나 논으로 변한 곳이 있으나 산기슭에 위치하여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지역은 용운리처럼 초기 청자가마도 있으나 해무리굽 다음 시기인 평저접시가 출토되는 가마가 중심을 이룬다. 무늬는 음·양각과 퇴화 기법 등이 보이며 기벽이 얇고 유약도 얇게 씌워져 있다. 이외에 13∼14세기 상감청자 가마가 일부 있어 이곳 저곳으로 옮겨가면서 청자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은 11세기 세련기 청자와 14세기 쇠퇴 확산기 청자를 함께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청자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문천 하류의 비교적 넓은 들을 지나면 사당리가 위치하는데 이곳이 고려 청자의 절정기를 구사하였던 지역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가장 양질의 청자를 제작하였던 곳으로 국립박물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靑瓷瓦 등 다양한 청자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당리는 堂前과 尾山, 白沙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43기의 가마터가 있다. 그러나 용문천의 침식으로 형성된 비교적 넓은 들판에 위치하고 있어 오래 전부터 논밭으로 개간되어 훼손된 곳이 많다. 사당리는 강진 청자의 핵심 지역으로 1914년 조사 이래 가장 관심이 높았던 지역이다. 이 중 당전마을 가마터는 전성기 청자들로 翡色의 완성과 상감청자가 세련 발달되던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에 만들어진 절정기 청자가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해무리굽이 출토되는 가마도 일부 있으며 14세기 가마가 상당수 발견된다. 당전마을 가마는 바닷가에 위치한 이웃 미산마을로 연결되어 청자가 쇠퇴 확산되는 14세기까지 운영된다. 미산마을 가마는 12세기에서 13세기에 이어 14세기 쇠퇴 확산기 청자를 집중적으로 제작한 곳이다. 후기 청자들은 무늬를 넣은 기법과 그릇의 종류가 다양해지며, 상감청자가 널리 보편화됨에 따라 문양이 도식화 간략화 된다. 그리고 1964년부터 8차례 실시한 당전마을 117번지 일대에 대한 국립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청자 기와가 다수 발견되어 {高麗史}에 養怡亭과 觀瀾亭을 靑瓷瓦로 덮었다는 기록과 부합되어 그 의미를 더욱 높였다. 발굴 조사된 사당리 41호 가마터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한 반지하식 오름가마로 천정은 궁륭형이다. 가마의 특징은 봉통 앞과 마름칸 옆에 작은 구덩이를 파놓은 것이다.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 들판에 있는 마을로 6개의 가마터가 있다. 가마터는 논밭으로 개간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이곳은 미산마을과 마찬가지로 쇠퇴 확산기인 13세기부터 14세기대의 후기 상감청자를 주로 만들었던 곳이다.
  칠량면 삼흥리 가마터는 삼흥저수지 주변과 저수지 동남쪽 남산마을 주변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강진 대구면 가마터와는 天台山을 경계로 바로 인접하여 있다. 칠량면 지역 역시 국가 통제의 磁器所가 있었던 곳으로 고려 청자 가마터와 조선초의 분청자 가마터 등이 함께 확인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도기 가마터도 함께 확인되고 있어 당시 자기와 도기를 함께 사용하였던 도자 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이처럼 많은 가마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바닷길을 통한 해상 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한 선진 기술의 빠른 도입과 따뜻한 기후, 질 좋은 바탕 흙, 풍부한 땔감, 편리한 공급로 등 자연적인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선진 기술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전문 기술과 우수한 문화, 그리고 이를 통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세력집단과 고급 도자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자연적 조건과 정치 문화 경제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깊게 이루어져야 하겠다.

  3. 高麗靑瓷의 變遷
  1) 高麗前期-靑瓷의 發生과 發展-
  고려전기 청자는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는 순청자와 음각청자, 堆花靑瓷가 주로 생산되던 시기로 발생에 대해서는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다양한 논란이 있으나 하한은 국가적 안정기인 11세기까지이다. 한반도의 청자발생에 대한 학계의 주장은 신라통일기 발생설(9세기설)과 고려초기 발생설(10세기설)로 크게 구분된다. 9세기 발생설은 7세기경부터 鉛釉系 施釉陶器와 灰釉系 硬質施釉陶器가 제작되었으며, 그 전통을 계승하고 중국의 신기술을 수용하여 이 시기에 청자를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이 시기 중국은 唐이 멸망하고 五代十國의 혼란기로 浙江省 越州窯의 장인들이 고려에 渡來하여 기술을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9세기설은 초기청자의 표식적 기형인 해무리굽완을 주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해무리굽완은 중국 唐代인 8∼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 유형의 해무리굽완이 9세기대 한반도 서남해안과 경기도 내륙 일부에서 생산되었다는 견해이다. 서남해안은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로 張保皐를 대표로 하는 신라통일기말 해상활동의 영향으로 청자가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이 시기는 당과 활발한 해상무역이 전개되었으며, 渡唐 유학생과 禪僧들의 귀국으로 당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다. 또한 신라통일기 유적인 경주 雁鴨池에서 중국과 한반도산 해무리굽완이 出土되었으며, 龍仁 西里의 가마 구조와 서리에서 출토된 해무리굽완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9세기 발생설은 해무리굽완을 주요 근거로 중국 越州窯 청자와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그 제작시기를 9세기 전반과 9세기 후반, 10세기 전반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9세기설은 아직까지 정확한 편년을 갖는 청자요지와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의 예가 없어 객관적·실증적 자료가 빈약한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0세기 발생설은 해무리굽 완을 근거로 한 10세기 전반설과 [淳化三年]·[淳化四年]銘靑瓷가 출토된 峰泉 圓山里 窯址, [大平壬戊二年(1022년)]銘 기와편이 출토된 高敞 龍溪里 窯址, 龍仁 西里 窯址의 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 10세기 후반설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10세기 후반설은 고려 光宗·成宗 년간에 고려 지배층의 요청으로 중국 越州窯의 기술을 도입하여 제작하였으며, 해무리굽완은 茶 의 하나로 차의 보급이 보편화되는 11세기 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였다는 견해이다. 또한 10세기 후반설은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소장의 [淳化四年]銘靑瓷壺(993년; 보물 제237호)와 黃海南道 峰泉郡 圓山里 2호 요지에서 출토된 [淳化三年]銘豆(992년)를 중요한 근거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峰泉 圓山里 출토 [淳化三年]銘靑瓷 이전인 9세기경에 이미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10세기는 발전 단계라는 自生說을 주장하고 있다. 즉, 자생설은 신라통일기 후기의 도기에서 청자의 전통을 찾고 있다. 그러나 남한 학계는 일반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을 인정하고, 기술 도입의 시기와 유입경로, 전통도기와 중국자기와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청자의 발생은 도기에서 자기로의 이행과정을 규명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은 粗質靑瓷(綠靑瓷)이다. 조질청자는 태토와 유약, 색상 등 품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청자로 대부분 서남해안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가마터는 海南郡 山二面 珍山里 일대에 분포한다. 조질청자는 도기에서 청자로 이행하면서 만들어진 원시적 또는 과도기적 청자로 보는 견해와 초기청자의 발생시기부터 상감청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이전인 11세기경까지 양질청자와 공존한 유형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고려의 건국(918년)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청자의 생성과 발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된다. 고려의 건국과 안정, 그리고 발전과 변화는 청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은 신라의 眞骨 중심적인 폐쇄적 정치체제를 극복하려는 지방세력 즉, 호족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태조 王建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배세력은 渡唐 유학생과 禪僧, 서해안을 통해 중국문물에 친숙한 호족들로 唐·五代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세력은 이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의 하나인 자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호족층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禪宗思想이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차문화와 함께 자기문화가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고려의 지식인들도 중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욕구가 강하였으며, 왕실과 귀족사회에서도 중국청자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여 중국도자를 대신할 고려청자의 생산이 절실하였다. 그리고 초기 청자는 중국의 제작기술과 기형, 운영방식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중국 청자와 유사한 것이 많다. 이 시기 청자의 생산은 40m 크기의 중국식 대형 벽돌 가마(塼築窯)를 운영하는 중서부지역과 20여m 크기의 고려식 소형 진흙 가마(土築窯)를 운영하는 남서부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러한 2유형의 가마는 일정기간 공존의 시기를 거쳐 진흙 가마로 정착된다.
  11세기대 고려의 대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면, 宋과 일시적으로 교류가 단절되기도 하였으나 11세기 말에는 다시 공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그리고 단절시기에도 중국의 민간 상선이 100회 이상 고려에 래왕하여 많은 물자를 교역하였으며, 1회에 수 십명에서 수 백명, 1056년에는 240여명의 대규모 상인들이 교역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송의 사신과 상인이 고려에 귀화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고려에서 송에 귀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귀족정치가 확립되는 때로 왕권의 안정과 학문의 발달, 북송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문화적 자극과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契丹(遼)과도 평화정책을 유지하여 왕래가 계속되었으며 문물교역이 활발히 실시되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안정과 대외교류는 11세기대 고려청자의 급속한 발전과 생산에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며 기형과 문양, 燔法 등이 고려화되면서 세련되었다. 이 시기 청자의 품질은 이미 중국청자에 근접하고 있었으며, 청자를 비롯하여 백자와 흑자가 함께 제작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안정 속에 귀족문화의 일환으로 청자 제작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한정적이지만 가마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품질이 분화되어 양질청자는 康津과 扶安을 중심으로 대규모 官窯形態로 발전하였으며, 조질청자는 海南 山二面 珍山里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康津과 扶安이 開京 중심의 왕실을 비롯한 중앙의 요구에 따라 제작되었다면, 海南에서 생산된 조질청자는 지방의 사찰과 관청, 토호들의 요구에 따라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기는 고려의 식문화에 맞는 기형 등이 등장하여 발전한다. 초기에 등장하였던 완 종류는 작아지거나 사라지고 대신 잔 종류가 많아지면서 완 기능을 대신하며, 각종 접시가 증가한다. 특히 이 시기에 들어서면 양질청자는 무문 중심에서 벗어나 음각문양이 등장되며 중국 북방에 위치한 耀州窯의 영향으로 壓出陽刻技法을 받아들여 생산량 증가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한편 산화철을 이용한 철화청자가 등장하며 그릇 표면에 白土와 흑토[ 土]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간단하게 점을 찍어 표현한 堆花靑瓷가 제작된다. 이런 양상은 12세기 전반까지 계속되며, 가마 구조와 제작방법도 13세기까지 이어진다.

  2) 高麗中期-靑瓷의 絶頂과 翡色-
  12세기부터 13세기 전반에 이르는 고려중기 청자는 중국에서도 인정할 만큼 그 기량이 절정을 이룬다. 기형과 문양, 조형, 성형, 번법 등에서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사라지고 고려화되고 있다. 백자와 흑자의 제작이 활발해지고, 청자에서도 비색의 음·양각청자를 비롯한 純靑瓷와 象嵌靑瓷, 辰砂彩靑瓷, 象形靑瓷, 鐵畵靑瓷 등 다양한 청자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직접적인 사료나 편년자료가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고려 중기는 무신정권이 권력의 중심을 이루는 시기(1170∼1270年)이다. 귀족사회의 전성기였던 文宗(1046∼1083년) 이후, 귀족정치는 점차 내부 모순이 누적되어 갔다. 문벌귀족은 과거와 蔭敍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 소유 등을 통해 막대한 私田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치권력과 경제력 등 특권의 확대는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표출된 지배세력의 내부분열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 신진 관료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지방에서는 郡縣制下의 屬縣과 鄕·部曲·所民들이 유망하거나 저항하였다. 이러한 지배계층 사이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하여 李資謙의 난(1126년)과 妙淸의 난(1135∼1136년)이 발발하였다. 고려전기 최고의 문벌귀족이었던 이자겸은 신진세력을 제거하고 왕위까지 찬탈하려 하였으나 拓俊京에 의해 축출된다. 이자겸이 제거되면서 仁州 이씨는 몰락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西京(平壤) 출신의 승려 묘청 등이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가 중흥을 이룰 수 있다는 風水圖讖說을 유포하여 서경 천도를 성사시키고,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는 開京(開城)을 중심으로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한다.
  仁宗代에 발생한 이들 이자겸과 묘청의 난은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사회가 동요되는 발단을 마련하였으며, 1170년 武臣政變에 의해 붕괴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1174년 西京留守 趙位寵의 난, 1176년 公州 鳴鶴所의 亡伊·亡所伊의 난, 1198년 萬積의 난 등 농민과 천민의 난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崔瑀 정권 때는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江華島로 천도하여 對蒙抗爭을 전개하였으나 1258년 최씨 무인정권의 붕괴로 몽고(元)와 화의를 맺게 된다. 1270년 裵仲孫을 비롯한 三別抄 세력이 珍島와 南海, 莞島, 濟州 등의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대몽항쟁을 계속 전개하지만 1273년 모두 진압되고 이후 권문세족과 附元勢力이 집권하면서 고려후기가 전개된다.
  한편, 고려 문화는 12세기 전반의 睿宗代(1106∼1122년)와 仁宗代(1122∼1146년)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게 된다. 또한 지방 호족세력들은 중앙 귀족정치에 진출하면서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유교를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채용하여 정치이념으로 확립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유학과 한문학이 발달하였고, 개인 문집과 實錄 등의 편찬이 활발하였다.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융성하는데, 고려 중기에는 義天에 의해 天台宗이 성행하였으며, 후기에는 知訥에 의해 曹溪宗이 크게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고려 중기의 사회적 배경과 사상적 조화는 문화에 직접 반영되어, 고려청자가 기술적·예술적 정점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다양한 施文技法과 제작기술의 축적은 12세기 전반에 이르러 翡色靑瓷가 완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이전과는 달리 청자의 표면을 두텁게 시유하여 태토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기벽을 얇게 깎아 가볍고 날씬한 느낌을 주며, 全面 施釉 후 굽 안바닥 3∼4곳에 작은 규석을 받쳐 단정함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12세기에 들어와 고려청자가 급격히 발전하게 된 배경은 11세기 후반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고려의 귀족정치가 睿宗과 仁宗代에 이르러 완성되며, 문화 또한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비색청자로 대표되는 절정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양질청자의 생산은 康津 沙堂里와 扶安 柳川里 가마로 집약되어 14세기 전반까지 중심적 역할은 한다. 따라서 12세기 이후 도자의 전반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가마는 강진과 부안 이외에는 매우 한정되어 분포한다. 강진과 부안 이외의 지방 가마에서는 飯床容器를 중심으로 생산하였으며 기형은 부분적으로 양질청자를 모방하고 있으나 대부분 품질이 떨어지는 지방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는 고려 사회가 중앙 집권화되면서 강진과 부안을 집중적으로 관리·육성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도자는 조운을 통해 선박으로 개경 등 수요처로 운반되어 왕실과 관청, 귀족들의 용기로 사용되었으며, 이들 가마들은 모두 漕倉이 있는 해안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태토와 물, 땔감이 풍부한 곳을 배경으로 운영하였다.
  이 시기는 무문을 비롯하여 음각과 押出陽刻, 鐵畵, 堆花技法 등이 정착되어 모란문과 연판문, 앵무문, 당초문 등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는데, 주류를 이루는 문양은 모란문과 연판문이다. 기벽은 이전 시기보다 얇고, 대부분 거친 耐火土 비짐과 硅石 받침을 놓고 燔造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翡色靑瓷는 1146년에 축조된 仁宗 長陵에서 출토된 靑瓷瓜形甁(국보 제94호) 등이 있다. 또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北宋의 사신 徐兢이 저술한 {宣和奉使高麗圖經}과 북송 말의 太平老人이 저술한 {袖中錦} 등에 고려의 비색청자를 천하제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는 象嵌技法을 이용한 독창적 시문기법을 다양하게 응용하였다. 상감청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仁宗代(1123∼1146년)설과 12세기 중엽인 1157년(毅宗 11년) 전후설, 12세기 후반설 등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10세기설도 제시되었다. 최근에는 초기 청자요지에서 원시적인 상감문양이 확인되고 있어 11세기 또는 10세기설이 언급되고 있다. 상감청자 발생에 대한 논쟁은 상감기법이 고려에서 발전된 독창적인 것으로 시문기법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12세기 후반은 毅宗代(1147∼1170년)와 明宗代(1171∼1197년)로 이어지는 귀족사회의 전환기로 귀족사회의 절정기이며 몰락기였고, 고려도자에 많은 영향을 끼친 변화의 시기이다. 이 시기 상감청자는 다양하게 발전되어 13∼14세기대에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양식이 된다. 12세기 후반의 고려청자는 음각과 양각, 투각기법이 상감기법과 함께 널리 사용되며, 鐵畵와 鐵彩, 堆花, 辰砂彩, 練理文 등이 고루 등장한다. 승려·어린이 등의 인물상, 거북·기린·사자·용·원숭이·오리 등의 동물상, 석류·복숭아 등의 식물상을 소재로 한 象形靑瓷도 매우 활발하게 제작되어 왕실 등 고급 수요층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白瓷·黑瓷와 함께 다양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도자문화로 발전하여 그야말로 고려청자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12세기 후반의 양상은 13세기로 이어져 확대 발전하는데, 특히 상감청자의 발전은 청자의 주류를 순청자에서 상감청자로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상감청자는 繪畵的인 시문과 圖案的인 시문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시문의 간편성으로 도안적 문양이 더욱 많이 제작되고 있다. 또한 상감청자는 주문양과 종속문양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동물문과 식물문, 인물문 등 다양한 문양들이 조합되어 화려하게 시문되고 있다.

  3) 高麗後期-靑瓷의 量的擴散과 質的衰退-
  고려후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총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13세기 중반부터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14세기 말(1392년)까지이다. 고려후기는 혼란했던 시기를 반영하듯 청자도 질적 하락이 지속되어 조선의 분청자로 이행한다. 고려후기는 對蒙抗爭(1231∼1273년)과 元 간섭기, 紅巾賊의 난, 잦은 왜구의 침입, 元明 교체기에 의한 국경분쟁 등 대외적 요인과 내적으로는 무인집권층과 권문세족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심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파행적 정치가 계속되어 사회경제적 모순이 매우 심화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所"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전문적 분업화로 제작되던 도자생산은 점차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앙통제에 의해 제작되던 청자생산은 통제의 해이와 함께 수요층의 증가로 생산과 공급이 확대되면서 점차 그 질이 쇠퇴하여 분청자로 移行된다. 한편 대몽항쟁 중 전라도 지역은 武臣政權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곳으로 비교적 피해가 적었으며, 大口所(康津郡 大口面)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자제작 역시 급격한 하락이 아닌 점진적 쇠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대몽항쟁은 청자 쇠퇴의 원인은 되었으나 이것이 곧바로 청자의 질적 하락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며 이후 元 간섭기와 왜구의 잦은 침입 등 고려 사회의 침체와 함께 점차 쇠퇴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해안에 많은 피해를 주었던 왜구의 잦은 침입은 대구소 지역 도자 생산의 질을 더욱 하락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오랜 전란으로 인한 신분제도의 해이와 소의 해체, 신진세력의 등장, 수취체제의 혼란, 인구 증가 등으로 도자를 필요로 하는 신분층이 두터워져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도자 장인들의 유리에 의한 도자 생산의 확산을 더욱 증가시켰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실용성이 강조되는 도자의 대량생산을 촉진시켜 청자의 질적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13세기대 청자는 12세기대 전성기 청자에 비해 기형과 문양 등에 있어 부분적으로 圖式化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은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단정하면서도 사실적인 자연스러움이 있다. 받침은 硅石 받침을 중심으로 耐火土 받침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유약도 翡色에 비해 떨어지지만 전성기 비색의 여운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明宗 智陵과 崔沆 墓, 坡州 惠陰院, 熙宗 碩陵, 元德太后 坤陵, 珍島 龍藏城, 莞島 法華寺, 濟州 法華寺 출토품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생활유적 출토품을 보면 12세기처럼 순청자의 비중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3세기대 청자는 12세기대 절정을 이루었던 전성기 비색청자의 여운을 간직하면서 대몽항쟁 등의 사회적 여건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14세기가 되면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질적으로는 더욱 퇴화되어 기형은 매우 두터워져 대형화되면서 둔중해지며, 구연은 대접의 경우 대부분 내만되며, 굽도 13세기대 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어진다. 문양은 간략화되거나 집단문양이 반복되는 등 더욱 도식화 양식화되고 있다. 유약도 황색조와 갈색조를 띠는 점차 어두운 색조로 변해가고 있어 매우 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토도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거칠어지고 있다. 또한 순청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유색 퇴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14세기가 되면 새로운 양식의 口緣外反鉢과 突帶盞, 高足杯, 扁甁, 內底曲面式 匙 등이 등장하여 분청자로 이행되며, 대접의 대형화와 구연외반발의 등장으로 그 기능이 상실된  形大 과 口緣內彎形鉢은 점차 소멸된다. 또한 馬上杯도 13세기대 유적에서만 확인되며 분청자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14세기대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상배는 보다 실용적인 고족배로 전환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후기 역시 元(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구연외반발과 돌대잔, 고족배, 편병 등 새로운 기형과 문양을 수용하고 있으나 고려청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청자의 쇠퇴는 이를 억제하려는 수단에 의해 14세기가 되면 干支銘 청자를 비롯한 [公須]銘, [德泉]銘, [至正]銘, [正陵]銘 등의 銘文靑瓷를 등장시켰다. 간지명청자는 제작지인 大口所(康津) 지역의 정세, 유적 출토 청자, 중국도자와의 기형·문양 비교 등을 통해 14세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간지명 청자는 [己巳]銘靑瓷(1329년)∼[甲戌]銘靑瓷(1334년)와 [辛巳]銘靑瓷(1341년)∼[乙未]銘靑瓷(1355년) 시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자는 硅石 받침을 중심으로 全面 施釉하고 있으나, 후자는 도자의 질이 더욱 떨어져 모래와 胎土 받침이 중심을 이루며 굽바닥과 굽안바닥의 유약을 닦아낸 후 燔造하고 있다. 기형은 보다 커지면서 둔중해지고 유색도 더욱 어두운 색조로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고려 후기의 변화는 왕실용으로 제작된 靑瓷象嵌蓮唐草文[正陵]銘大 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正陵은 1365년 돌아가신 恭愍王妃 魯國大長公主의 陵號로 이곳에서 祭禮 때 사용하기 위한 왕실용이지만 匣鉢을 사용하지 않아 그릇 표면에 잡티가 있으며 문양과 기형의 완성도가 떨어져 당시 도자 제작 상황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쇠퇴 과정은 務安 道里浦로 대표되는 말기청자로 이어지는데 이때가 되면 문양은 생략되거나 간략화된 반복문양이 듬성듬성 거칠게 시문된다. 기형도 [己巳]銘象嵌靑瓷 이후의 대형화 둔중화된 형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燔法은 모래 받침보다 태토 받침의 비중이 높아지며 굽바닥의 유는 시유 후 모두 닦아낸 후 대부분 포개 번조하고 있다. 무안 도리포 해저유적 단계를 지나면 고려 청자는 왕조의 교체와 함께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도자 전통인 분청자로 이행 발전되면서 소멸한다.

  4. 高麗 陶瓷의 種類
  청자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성과 정밀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청자 제작은 대부분 유사한 작업 과정을 거치는데 製土(水飛와 練土), 成形, 整形, 彫刻(문양 장식), 초벌구이(初燔), 施釉, 재벌구이(再燔) 등 완성품이 되기까지는 60∼70여일의 시간과 24∼25단계의 공정을 거친다.
  제토는 흙을 채취하여 粗惡粘土와 白土를 배합한 후 水飛(태토 내에 있는 모래 등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공정) 후 鍊土 과정을 거쳐 태토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완성된 태토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켜 의도하는 기형으로 성형한 후 이를 건조한다. 건조가 끝나면 이를 뒤로 엎어 굽 깍기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整形이라 한다. 정형이 완료되면 조각실에 들어가 도구를 이용하여 각종 문양을 시문한다. 조각이 완료되면 초벌구이를 하고 釉藥을 施釉하여 재벌구이를 실시하면 작품이 완성된다.
  유약은 기본 성분에 풀과 나무를 태운 灰釉(재유)를 첨가하여 제작한다. 유색은 유약 성분 뿐만 아니라 태토 성분, 燔造 온도, 번조 방법, 연료 종류(樹種) 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燔造時 땔감은 주로 소나무를 이용하는데 이는 불꽃이 깨끗하고 불길이 멀리가기 때문이다. 또한 온도는 초벌은 800∼850 이며 재벌은 1,300  내외이며 還元焰으로 번조하는데 이틀 이상 계속 불을 지펴야 한다. 번조할 때는 땔감의 선택과 기압, 풍향, 풍속, 습도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질의 청자를 얻기 위해서는 불과 물, 태토, 유약 등의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가마 구조와 기상 조건에 따라 변화 무쌍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제작에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만들어진 모든 器物이 뜻대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도 명품은 10%에 머물 정도로 매우 어려운 것이 청자 제작이다.
  청자의 품질은 태토·유약 등 재질상태, 기형·문양·성형 등 장식기법, 번법·窯床 경사도·燃燒室(봉통부)의 깊이 등 제작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施文技法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구분할 수도 있다. 시문기법은 사용 도구에 따라 크게 2유형으로 구분된다. 조각칼로 문양을 새기는 刻技法과 붓으로 문양을 그리는 畵技法이다. 화기법 청자는 각기법 청자보다 대부분 粗質이다. 화기법의 철화청자와 퇴화청자는 태토가 거칠고 기술이 숙련되지 않더라도 시문 등 제작에 큰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시문기법에 따라 품질에 차이가 있으며, 소비층도 분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자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색깔과 재질을 기준으로 먼저 청자와 백자 등의 종류를 구분한 후 문양을 장식하는 시문기법을 확인한다. 이후 문양의 종류를 살피며, 形像이 있으면 이를 반영한 후 마지막으로 그릇의 기종을 정리한다. 그리고 도자의 변천은 문양과 시문기법, 기형 등 다양한 속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굽 형태와 받침의 변화가 전체적인 시대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속성이다.

  1) 純靑瓷; 아름다운 翡色과 선이 특징인 순청자는 성형한 다음 유약만 바른 후 번조한 청자를 말한다. 여기에는 무늬가 전혀 없는 素文靑瓷와 음각과 양각 기법으로 무늬를 시문한 음·양각청자, 透刻靑瓷, 인물·동물·식물 등의 모양을 한 象形靑瓷 등이 있는데 그 무늬는 매우 간결하다. 순청자는 상감청자가 정착 발전하는 12세기 중엽 또는 13세기 전반까지 발전하며 14세기가 되면 쇠퇴한다.
  2) 象嵌靑瓷; 나전칠기와 금속공예에 문양을 새겨 넣는 기법을 계승한 것으로 그릇 바탕 위에 무늬를 새긴 다음 그 부분에 붉은 흙[ 土]이나 하얀 흙[白土]으로 메꾸는 방법이다. 상감문양은 고려에서 독창적인 발전을 이룬 시문기법으로 12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13세기 중반 이후 고려청자의 중심적 문양으로 정착된다.
  3) 鐵畵靑瓷; 그릇 바탕 위에 酸化鐵이 8∼10% 포함된 黑土를 물에 개어 붓으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청자유를 입혀 번조한다. 무늬를 그릴 때 붓을 사용하기 때문에 선이 짧고 굵지만 대담하고 율동감이 있는데 이것이 철화청자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무늬는 모란과 寶相華를 그리거나 단순한 草葉文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며 매우 드물게 연꽃, 버드나무, 나비, 학, 구름 등을 그리고 있다. 주문양의 위 아래에 배치하는 종속문양도 특수한 형태의 菊瓣文이 대부분이다. 철화청자는 10세기 후반 또는 11세기에 발생하여 상감청자가 성행하면서 점차 소멸되는데, 이후 조선시대 철화분청자와 철화백자로 이어지고 있다.
  4) 畵金靑瓷; 金彩瓷라고도 하며 순청자에 금채한 것과 상감청자에 금채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상감청자의 경우 무늬 주위를 약간 판 후 金泥로 메워 화려함을 시도하고 있는데 극히 소량 만들었다.
  5) 堆花靑瓷; 백토물[白土泥] 또는 자토물[ 土泥]을 붓으로 점이나 선을 그려 무늬를 나타내거나 새기는 기법이다. 상형청자와 상감기법, 진사기법, 철채기법 등과 함께 사용한 것들도 있다. 퇴화청자는 양질과 조질에 따라 시문 방법이 구분된다. 양질청자의 경우 주문양은 음·양각기법과 상형기법, 상감기법으로 시문하며, 퇴화기법은 종속문양으로 단순하게 선과 점을 시문하고 있다 조질청자는 주로 백토를 사용하여 국화와 모란, 버들, 초화, 운학, 나비 등을 주문양으로 간략하게 시문한다. 퇴화청자는 11세기 이후 생산되고 있으나 양과 질에서 소극적인 발전을 보여 특징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상감청자가 성행하면서 점차 소멸되는데, 이후 조선시대 분청자의 剝地技法에 전승되고 있다.
  6) 辰砂彩靑瓷; 초벌구이 후 그릇에 진사[酸化銅]를 바르고 그 위에 청자유를 시유하여 재벌구이를 하여 밝은 적갈색을 띠는 것을 말한다. 꽃잎이나 포도송이를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극히 부분적으로 사용하였다.
  7) 練理文靑瓷; 철분의 함량이 다른 점토와 백토, 흑토[ 土]를 함께 반죽하여 성형한 것으로 燔造하면 각각의 흙이 회색, 백색, 흑색으로 나타나 마치 대리석 무늬 또는 나무결 같은 무늬가 나타나는 청자이다. 흙의 특성이 각각 달라 구울 때 터지거나 주저앉을 가능성이 많은 기법으로 매우 소량 남아 있다. 전성기인 12세기에 잔과 盒처럼 소형 기종을 중심으로 소량 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唐代부터 제작되었는데 고려청자와는 느낌이 다르다.
  8) 鐵彩靑瓷; 청자 태토로 만든 그릇 전면에 鐵砂 안료를 바르고 그 위에 청자 유약을 씌운 것으로 마치 흑유를 입힌 것처럼 검게 발색한 그릇을 말한다. 분장된 흑토를 긁어내어 바탕의 청자색이 드러나게 문양을 새기는 鐵彩剝地技法과 문양 부분에 백토를 두껍게 칠하는 鐵彩堆花技法 등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9) 黑釉瓷; 청자 발생과 함께 제작되었는데 특히 진흙 가마에서 특징적으로 생산되었다. 유약 자체에 청자유보다 철분이 많아 갈색 또는 흑갈색을 띠는 것이다. 철채청자보다 더 붉으며 상감기법과 퇴화기법을 함께 시문한 것도 있다. 灰釉의 원류를 파악하는데 중요하며 양은 많지 않지만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10) 白瓷; 청자와 함께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백자만의 특징적인 소요는 없다. 청자와 유사한 기형과 문양 등을 갖추고 있으나 태토만 백색이며 소량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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