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6

2018. 11. 26. 19:58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6|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조회 30|추천 0|2006.11.03. 00:49                                        http://cafe.daum.net/cjwhc/1nxV/7931 

 




4) 加耶의 茶文化

 
  앞서 한반도 남부의 자생차에 대해 알아봤는데 그럼 외래에서 수입된 차종은 어떠할까? 외래차로서 한반도 남부차의 시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허황옥이 갖고 왔다고 전하는 인도차. 『삼국유사』661년 신라 문무왕 김수로왕이 자신의 15대조이므로 그 나라의 제사를 계속 지내게 했는데 이때 차가 차례상에 매년 올라갔다 기록이 등장한다1). 이는 분명 828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얻어와 지리산에 심었다『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무려 160여년이나 앞서는 기록인데 그렇다고 했을 때 김수로왕의 차례상에 올라갔던 차는 최소한 중화문화권의 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자생하던 차 혹은 고구려에서 수입된 차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하지만 이능화는 이보다 앞서 이미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가져온 차씨가 심어졌고 그것이 바로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金海白月山有 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自印度 持來之茶種)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인도차가 한국에 전해진,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2). 그렇지만 인도에서 그 먼 거리를 배에 차나무를 싣고 한반도 남부로 오는 것은 불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허황옥은 인도인이 아니라 중국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3) 이는 한국 차문화 시원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 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단, 이능화의 발언은 주의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설령 허황옥이 48년 인도산 차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만큼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는 차나무를 재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삼국유사』를 보면 허황옥을 따라온 잉신(媵臣)들을 각 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난액(蘭液)과 혜서(蕙醑)를 주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4). 난액과 혜서 모두 향기가 좋은 음료와 술을 의미하는데 이때 향기가 좋은 음료의 정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경남 김해, 밀양, 사천 등지에서 자라는 대엽종의 차나무 장군차, 황차 등으로 불리는 차상품이 생산되고 있어 이를 두고 가야의 차문화의 기원을 인도로 추정하는 연구도 적지 않다5). 하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 시기, 그 먼거리를 항해했다는 근거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 인도보다는 중국 남부의 해상세력일 것이라는 견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속단할 수가 없을 것 같다6).

  그보다는 이미 14~40년 사이에 쓰였던 신(新)의 화천(貨泉)김해 봉황동유적에서 출토 바 있고 그보다 이른 진(秦)의 반량전(半兩錢)이 사천 늑도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기원전부터 중화문화권과 한반도 남부가 해상으로 교통했음을 알 수가 있겠다. 고로 허황옥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난액이라는 것이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차나무가 아니라 한다면, 당시 중화문화권과 꾸준히 교류하던 과정에서 한반도 남부로 장강 일대의 차문화가 전래되었을 가능성 언급할 수 있을지언정 인도에서의 차문화 전래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 듯 싶다.


  해상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달리 문화의 전파에 있어서 규모나 속도면에서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에서의 바닷길은 그야말로 문화의 바닷길이었다7). 그렇게 봤을 때 일단, 가야 지역에서 이른 시기의 한국 차나무 재배전혀 근거없는 기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이 시기는 중화문화권에서도 차재배가 체계화되지 못 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 차문화나 차씨가 한반도 남부라고 하는 먼 타국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은 적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당시 가야 지역에서 재배되었을, 혹은 활용되었을 차는 역시 토산차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가야에 대한 열전『남제서』에 유일하게 실려있는데 건원 원년(479), 남제와 가야의 교역 사실알려주고 있다8). 또한 이 시기는 아직「신라전」도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신라보다 가야가 활발한 국제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시 남제의 무제차를 제물(祭物)로 올리라는 명을 내렸던만큼 당시 남방문화권에서 폭넓게 차문화가 수용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무렵, 남제와 교역했던 가야에서 남방문화권의 차문화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봤을 때 가야의 차문화 신라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일찍부터 중화문화권과 해양교섭빈번히 시행했던 나라였던만큼 외래차문화의 수용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야차의 시원 자체가 외래차의 수용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만큼 외래차문화의 전파 ․ 보급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반도 남부의 지질학적 특징, 지리산 등지에서의 토산차 생산 등과 맞물려 봤을 때 가야에서 토산차를 자체생산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한다9). 고로 가야에서도 역시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다고 보이며 이런 가야의 차문화는 이후 신라의 가야지역 병합으로 그대로 계승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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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國遺事』券2「紀異」第2〈駕洛國記〉,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衡}<三>{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匝干之女, 文明皇后, 寔生我<玆>者, <玆>故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祧,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址}>,<納,取>近廟上上田三十<項{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 祗禀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醪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其祭日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降及, 仇衝{衡}朝<未{末},來>,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典}>, 永無<遠,違>者, 其乃仇衡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紙,是>廟禮, 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2) 이기윤, 전게서, p.48. 그는 이 수로왕과 허황옥이 엄연한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서처럼 인도에서 차나무가 전래했다는 설은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3)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1, 푸른역사, p.101~102. 저자는 공주와 후견인 잉신들의 이름이 인도풍이 아닌 중국식이며 그들이 갖고 온 물건이 漢肆雜物, 즉, 중국 점포의 여러 가지 물건이었던 점,짐을 싣고 왔던 배의 선원 15인에게 쌀과 포목 등을 주고 돌려보낸 점에 있어서 이는 단순한 혼인설화가 아니라 해상 교통로를 이용한 가야와 중국 계통 문물을 교역하던 낙랑 상선의 도래와 관련된 염문이 모태가 된 후대에 윤색된 이야기라 하였다.

     김성호, 1996,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2, 맑은소리, p.76~82. 그 역시 허황옥과 잉신들이 중국식 이름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도 한나라 관영공장(肆)에서 만든 것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장강 하류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류백제인이었고 B.C 2세기 무렵에 이미 중국 남부 광주-양주를 빈번히 내왕하던 南蠻賈船에 의해 전래된 남방불교가 허황옥과 수로왕의 결혼 등을 통해 한반도 남부로 전해졌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상황들을 살펴봤을 때, 비록 허황옥이 가져온 것이 인도의 차나무가 아니더라도 사천성 일대에서 나는 차씨가 장강 하류에 전해져 허황옥을 통해 한반도 남부에 심어졌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4)『三國遺事』券2「紀異」第2〈駕洛國記〉,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5) 정동주, 전게서, p.99.

 

6) 심경순, 2001, 「6세기 전반 겸익의 구법활동과 그 의의」 『이대사원』33 ․ 34, 이화여자대학교 사학회. 필자는 개인적으로 옛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대엽종 차나무는 훗날 인도 등지까지 교역했던 백제의 영향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백제의 경우 6세기 전반 중국화된 불교 수입에 그치지 않고 인도로 떠난 구법승 겸익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백제에게 있어 당시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지는 교류할 수 없는 먼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로 이 부분은 가야보다는 백제쪽에 더 집중해서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7) 윤명철, 2000,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 사계절.

 

8) 『南齊書』券58「列傳」第39〈加羅國〉,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本國王.」”

 

9) 전 ․ 후기기가야연맹의 몇몇 중심지였던 김해, 고성, 함양 등은 모두 차산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들 지역에서 외래차종이든, 토산차종이든 차가 생산되었고 풍부한 해운을 이용해 타지역과 활발히 교역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5) 外來 宗敎와 茶文化


  이상으로 삼국시대 각국의 차문화에 대해 알아봤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이전 시기부터 전해져온 독자적인 차문화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북방의 백두산 일대는 갖가지 차대용 식물 자라는 곳으로 이를 이용한 독자적인 차문화가 폭넓게 수용되었고, 남방의 지리산 일대는 토산차의 자생지로서 남방문화권의 차와는 다른 차종이 일찍부터 자라고 있어 이를 이용한 독자적인 차문화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다.

  그런 독자적인 차문화 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중화문화권과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외래 차문화주체적으로 수용 ․ 보급했다고 보이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각국은 인삼의 재배환경과 차의 재배환경이 비슷하다 사실을 인지하고 중화문화권의 차를 가져와 심었을 가능성도 상정해볼 수 있었다. 특히 백제의 경우는 화려한 남방문화권의 도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도자문화와 공반된 차문화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차문화는 오랜시간 이들의 통제를 받았던 신라로 유입되어 신라의 독자적인 차문화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신라는 낙동강 좌안의 가야 지역을 합병함으로써 가야의 독자적인 차문화마저 흡수함으로써 이후 고려로 계승될 독자적인 동방문화권의 차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차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이는 신라의 차문화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문헌이 가장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화랑 혹은 불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차문화는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봤을 때 한국의 불교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불교의 시원『삼국사기』각국 본기에 기록된 기록에 근거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1),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2), 법흥왕 15년(528)3)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불교 도입에 대한 기록이므로 민간 차원의 불교 전래, 공식기록에 남지 않은 것까지 파악한다면 이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동방문화권의 경우, 불교 전파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직접 전해지기보다는 대개 중화(中和)한 중화문화권의 불교가 전해진 점을 봤을 때 먼저 중화문화권에 언제쯤 불교가 초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듯 싶다. 


 『위략』을 보면 전한 애제 원수 원년(B.C 2) 박사 제자 경로대월지왕의 사신인 이존으로부터 부도경을 구수받았다는 기사가 있어 이를 불교의 사전(私傳)으로 볼 수 있다 하겠다. 또한『후한서』를 보면 광무제 건무 15년(39), 명제의 이복동생인 초왕 영(英)이 초공(楚公)으로 봉해지고 이어 초왕이 되는데 그가 부도의 인사를 모시고 받들며 우바새(優婆塞 : 재가의 남자 신도)와 상문(桑門 : 승려)에게 공양했다 것을 두고 불교의 공전(公傳) 기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4). 그렇게 봤을 때 전한 후기부터 불교의 사전이 시작되어 후한 중기에는 공전으로 이어지게 되고 후한 말엽에는 비로소 불교다운 모습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겠다.

  기원전후에 불교가 전해져 2세기 말엽에는 중화문화권 전체적으로 불교가 확산된 것을 살펴봤을 때 중화문화권과 인접한 고구려 역시 늦어도 중국보다 한세기 뒤쯤에는 불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게다가 백제 역시 해양교통로를 따라 일찍부터 중화문화권과 교류해왔고, 한강변 뚝섬에서 인도 간다가 양식의 영향을 받은 중화문화권의 불상인 건무 4년(338)명 금동불좌상이 출토된 것을 본다면 일찍부터 고구려와 중화문화권 등과 교류하면서 불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가야의 경우는 일찍부터 허황옥과 관련된 인도와의 교류 사실이 문헌에 확인되는 만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렇게 봤을 때 허황옥이 중국 남부에서 한반도 남부로 건너온 집단을 대표한다고 했을 때 당시, 중국 남부와 인도 등지를 오고가는 해양세력에 의해 불교가 초전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때의 불교 전래는 극히 소규모로 사전된 것들이기 때문에 한국 불교사의 시작으로 꼽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고로 동방문화권으로의 불교 전래는 3~4세기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실제 이 시기 중화문화권은 이전보다 불교발전에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서역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온 승려가 하나둘씩 늘어남으로써 번역된 경전의 숫자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20년까지 연평균 2.5권이었던 번역서는 265~317년 기간에 9.4권으로 증가했고 이 무렵 총 번역된 경전은 491권이나 되었다. 초기 번역의 대상은 제한적으로 편향적이었지만 3세기 말까지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다양한 원전들이 번역되다. 특히 훗날 정토사상의 기본원전이 된『반야경(般若經)』이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기본적인 계율과 수도 생활의 규범이 중화문화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불교는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이 시기가 끝날 즈음 기존의 북중국 중심지뿐만 아니라 양자강 중류지역에서도 굳건히 뿌리내리기에 이른다. 대략 300년 경까지 화북에 있는 2개의 수도인 장안(長安)과 낙양(落陽)에는 180개의 불교사찰이 세워졌고 3,700명의 승려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인도 불탑양식을 본딴 중화문화풍의 탑이 세워지는 등 불교문화 역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5). 고로 이 시기,  동방문화권의 불교문화는 이와 같은 중화문화권에서의 불교문화 융성과 연결지어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전파와 차문화가 깊은 관련이 있음을 필자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차의 기원과 연관되어 달마대사가 거론되는 것 또한 모두 불교가 차와 깊은 관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문화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불교의 전파 경로를 통해봤을 때 오히려 인도에서 전해진 불교가 중화문화권에서 중화하면서 변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불교와 차문화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불교 중에서, 특히 선교(禪敎)6) 신자들의 수양 생활의 중요한 일환이 바로 좌선(坐禪)인데 이는 정좌를 하고 마음을 수습하고 생각을 집중시켜 심신이 가볍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한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수련 과정인 셈이다. 이 때문에 좌선의 자세는 반드시 단정하게 머리와 등을 똑바로 하고 흔들거리거나 구부리거나 의지해서도 안 되고 더욱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통상적으로 좌선을 한지 3개월이 지나면 매우 피곤하고 어질어질해지고 수면을 취하고 싶다고 한다.

  이처럼 정신 진작, 수마 퇴치, 타액이나 체액 분비 촉진, 갈증 해소, 피로 제거 등에 효과가 있는 찻잎은 불교 신자들의 이상적인 음료가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동진 시대 승려였던 단도개(單道開)업성의 소덕사에서 좌선 수행했는데 그는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야에도 눕지 않고 매일 몇 개의 환약을 먹고 거기에 다소(茶蘇)를 한두잔 마셨을 뿐이라고 한다. 다소는 바로 차, 생강, 계피, 도라지, 대추 등을 같이 넣고 끓인 음료를 의미하는 것이니 당대 육우에 의해 정립된 차문화 이전의 보편적인 차를 말하는 것이다7).

  즉, 불교의 전래와 함께 자연스럽게 차가 전래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불교가 동방문화권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3세기경, 차문화와 함께 불교문화는 자연스럽게 동방문화권에 전해져 서서히 토착화되었다 생각한다. 이후 외래 종교인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토착문화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고 생각하는데 필자는 차문화 또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고구려의 경우를 살펴보면 5세기 전후, 불교가 왕권 중심의 정치권력과 밀착하면서 크게 번성하게 되지만 6세기부터는 국가 차원의 불교 후원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고구려 사회 저변의 재래적 관념과 신앙상의 흐름이 기본 줄기를 유지하다가 사회 인식의 흐름을 타고 새로이 대두하면서 불교와 상호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불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사상체계가 고구려의 재래적 관념, 예를 들면 주몽 신앙 등에 영향을 주었고 주몽 신앙은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와 같은 체계적인 신앙 체계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8).

  이런 현상은 외국에서도 확인되는데 라틴아메리카에 정착한 그리스도교와 토착신앙이 혼합된 신크레티즘(Syncretism)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인디오 장인들은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성인상이나 기타 종교적 모티브를 받아서 교회 내에 그것들을 복원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장인들은 단순한 복제 이상의 것을 남기길 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신들과 함께 그들의 옛 신들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연에 대한 찬미와 신에 대한 찬미를 뒤섞어 버렸고, 종래에는 그 2개를 서로 구별할 수 없게끔 융합시킴으로써 그들의 의도를 교묘히 숨겼던 것이다. 즉, 종교의 혼합을 통해 인디오 원주민들은 그들을 정복한 정복자들을 정복했던 것이다9).


  이처럼 외래 종교인 불교가 차문화를 동반함으로써, 동방문화권의 토착 차문화가 그런 불교와 쉽게 융합하여 독특한 동방문화권만의 차문화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서 누누이 언급하지만 당대 차문화가 새롭게 정립되기 이전의 차문화는 동방문화권이나 중화문화권이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큰 차이가 있다면 차나무에서 나는 찻잎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차대용 식물을 이용하느냐 정도의 차이였을텐데 그런 상황에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매개물로 작용함으로써 양 문화권의 차문화는 쉽게 융합 ․ 발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는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에서도 선호하던 음료로서 신선이 되는 비결 중의 하나로 음다(飮茶)를 거론할 정도다. 『진고(眞誥)』20권,『등진은결(登眞隱訣)』3권,『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등의 도교 경전을 저술하기도 했던 도홍경은 당시 유불도 3교에 통달하였는데 그 역시 이미 차의 효능에 대해서 저술 바 있었으며『다경』에도 차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데 있어 신선과 차를 연관시키고 있음을 앞서 확인한 바 있다.

  특히 도교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 8자로 집약될 수가 있다. ‘延年益壽 羽化登仙’ 바로 그것인데 연년익수(延年益壽)는 현실세계 중의 생명 연장에 대한 것이고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수양양식을 통해 기질(氣質)을 변화시켜 수행자로 하여금 ‘장생구시(長生久視)’ 즉, 늙어도 죽지 않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전자는 사람의 측면에서의 교의이고, 후자는 인간의 변화의 측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이 도교의 본질적 본체에 대한 차원에 관한 것이다10).

  그리고 이런 도교의 본체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가 바로 금단(金丹)인데 금단은 주요 방술의 하나로 외단(外丹)과 내단(內丹)으로 나눌 수 있다. 도교의 금단가들은 금을 화학적으로 제조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자연 진화의 과정이 너무 긴데 반해 금단가들은 인위적으로 이 과정을 조절을 가하여 우주자연 환경과 유사한 소우주에서 강화 수단을 채택하여 이 자연 과정의 시간을 단축해내려 했다는 것이다. 금을 복용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온 몸이 황금색이 된다는 식의 개념이 그러한데 앞에서 살펴봤듯이 고구려의 의약학 역시 이러한 도교적 사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도교는 250년경 이후부터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는 이 몰락한 이후 등장한 많은 사상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지난 세대 동안 지식인들은 유교의 사회논리와 신분개념을 도가사상에서 재발견한 사상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기에 이르렀으나 혼란기가 지속될수록 지식인들의 관심은 아예 철학적인 도가사상에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총체적인 박탈감에 대한 실마리를, 문명회복에 대한 대답을, 그리고 어렵고도 암울한 시기의 삶의 방향을 도교의 경전에서 찾았고 그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발전시켰던 개념은 바로 ‘자연(自然)이었다.

  이러한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하였는데 가장 지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삶의 본질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 개인적 모순에 대해 깊이 성찰하였다. 그들은 ‘청담(淸談)이라고 알려진 대화의 형식으로 이를 진행시켰는데 논쟁거리인 단어와 은유에 대한 정의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인『장자』,『노자』,『역경』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지만 급속히 전파된 신도교를 갖고 생명력있는 사회를 재건할 수는 없었고 240~260년 사이에 번성했던 신도교는 소멸해 버렸다. 그러한 사상적 배경은 외래 종교의 수월한 유입을 제공했으며 불교는 점차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11).


  즉, 도교의 가치론은 도교가 교의 등으로 중시하는 가치체계로서 도가에서 주로 정신적인 영감을 얻었지만 그 사상 윤리의 기초 교의는 유가 사상에서 빌려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교의 기반 위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터를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도교의 금단술과 같은 분야는 불교에도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일종의 신선사상과도 연계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불교가 차 문화와 밀착하면서 이후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된 것에는 이처럼 도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2).

  또한 도교가 갖고 있는 이런 신선사상 등은 중국 고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동방문화권의 사상적 요소가 유입되어 형성된 것들이 많은데『산해경』등에서 확인되는 괴이한 요소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13). 이미 진시황과 한무제열렬하게 불로장생(不老長生)을 목적으로 신선을 구하려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 등으로 불리던 백두산(白頭山)으로 대표되는 동방문화권은 오래전부터 삼신산과 불사약이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다14).

  실제 동방문화권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화된 사상체계라 할 수 있는, 단군신화 안에는 하늘사상, 선약관념, 정진관념, 방술관념, 장생불사관념 신선사상의 원형이라 불릴만한 요소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15). 아마도 이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춘추전국시대 동방문화권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인 교류도 잦았던 연(燕) ․ 제(濟)를 통하여 중화문화권에도 신선사상이 발흥하여 이후 동방문화권을 삼신산과 불사약의 고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로 외래종교인 불교가 고대 동방문화권에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동방문화권은 나름의 신앙체계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중화문화권의 도교에 많은 영향을 준 신선사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16).

  이상의 사실들을 정리해보면, 동방문화권은 이미 중화문화권에서 차문화와 연관된 사상 체계가 확립되기 이전에 독자적인 사상 체계와 그와 관련된 차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부터 시작해 히브리인, 이집트인, 아리아인, 아시아인 등 전세계에서 풀잎과 나뭇잎, 혹은 열매에서 짜낸 즙이나 물을 이용해 우주의 신들과 교감하는 의식을 행하였는데 그렇게 봤을 때 위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B.C 6세기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이란에서 창시된 조로아스터교에는 신성한 식물 또는 이것으로 만든 음료 이용해 치르는 종교의식인 하오마(haoma) 의식이 있었고 인도유럽어족의 경전인『리그베다Regveda』에 적혀 있듯이 B.C 15세기 무렵, 고대 인도인들은 이란 지역에서 유입된 의식을 본뜬 소마(Soma) 의식 행하고 있었다. 베다교의 종교의식에서 신에게 바쳤던 제물이 소마라고 불리는 식물의 즙인데 이러한 의식은 B.C 5세기 무렵, 베다교를 대신해 인도를 지배한 힌두교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베다교와 힌두교의 소마의식은 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불교에서는 부정되었는데 소마가 사람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성분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제사에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소마 대신에 사용된 것이 알가(閼伽, argha)였으니 이는 부처에게 바치는 물, 즉 공수(供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7).


  특히 신선사상의 원형적인 문화동방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확인되고 있고 그러한 문화적 요소가 훗날 중화문화권에서 도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도교는 재래 사상인 유교와 결합하여 발전하고 이후 외래 종교인 불교가 수입 ․ 확산되기에 적절한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도교와 불교는 차라고 하는 독특한 음료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기에 이르니 훗날 동방문화권으로 도교 ․ 불교와 중화문화권의 차문화가 전래되어 무리없이 융합되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외래 음료문화인 차문화가 동방문화권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계승된 것은 이미 동방문화권에 그러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봐야만 할 것이며 그것은 바로 고유의 신선사상을 비롯한 독창적인 신앙 체계와 결합되어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었기 때문으로 밖에 볼 수 없겠다. 이처럼 삼국시대는 동방문화권과 중화문화권의 사상적인 교류와 그에 수반된 물질문화의 교류가 번성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속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교류를 행한 동방문화권과 중화문화권은 이후 동방문화권의 세력 구도가 중화문화권인 당(唐)에 의해 재편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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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國史記』券18「高句麗本紀」第6〈小獸林王〉,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苻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2) 『三國史記』券24「百濟本紀」第2〈枕流王〉, “<枕流王>, <近仇首王>之元子, 母曰<阿尒>夫人, 繼父卽位.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 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3) 『三國史記』券4「新羅本紀」第4〈法興王〉,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王{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 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古)辜,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 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 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問> 『雞林雜傳』所記書之. {與}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 殊異.]”

 

4) 정수일, 2001, 전게서, p.489~501. 그는 불교의 중국 초전에 대한 14가지 설을 거론하면서 이를 고증 ․ 비판함으로 불교의 초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5) Arthur F. wright 著 / 梁必承 譯, 1997, 『中國史와 佛敎』, 신서원, p.66~67.

 

6) 정동주, 전게서, p.61~62. 오랜 남북조 시대를 거쳐 인도 불교를 능가할만큼 정교하고 포괄적인 중국적 불교철학이 체계화되었지만 이는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 했고 결국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실천적 성격이 강한 禪敎와 대중적 성격이 강한 淨土信仰 뿐이었다. 이 선교가 바로 5세기 말, 인도에서 온 승려 보리달마(Bodhidharma)에 의해 시작되었으니 불교와 차와의 관계, 차와 달마와의 관계가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선교가 바로 인도의 空 사상, 佛性사상, 노장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원숙한 중국적 불교라 할 수 있으니 불교와 도교의 연관성이 차문화와 함께 거론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할 수 있다.

 

7) 王從仁 箸 / 김하림 ․ 이상호 譯, 전게서, p.343~344.

 

8) 전호태, 2000, 전게서, p.352~354.

 

9) Carlos Fuentes 著  / 서성철 譯, 2005,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까치글방, p.179~180.

 

10) 이상옥, 2005, 「道敎의 철학적 이해」 『인문과학연구』10, 전주대학교 인문과학종합연구소, p.10~13.

 

11) Arthur F. wright 著 / 梁必承 譯, 전게서, p.52~59.

 

12) 『喫茶養生記』 卷下, “仙人有二種仙人 一行仙 二服藥仙也 苦行仙者斷食味 服一米 一栗等 久活命 服藥仙者 服種種藥 以久保命 基中服桑木仙 能久保也 …… 先服桑煎 後復諸仙藥 以知桑是又仙藥之上首乎 茶與桑竝服 貴重無高下 二俱仙藥之桑首也 養生之術也而已.” 12세기 일본 임제종의 개조로 천광국사라 불린 영서선사는『喫茶養生記』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선인에는 두 종류의 선인이 있으니 苦行仙과 服藥仙을 꼽고 있다. 전자는 음식의 맛을 끊고 한 알의 쌀이나 한 알의 좁쌀 따위를 먹으면서 오래도록 목숨을 살리는 것이며 후자는 이런 저런 약을 복용하여 오래도록 목숨을 보존하는 것인데 그 중에서 최고의 仙藥으로 뽕나무(桑)를 꼽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책은 앞서 언급했던 차대용 식물인 뽕나무와 연관된 당시의 차문화 확인함은 물론, 도교적 사상과 연관이 깊은 일본 불교의 한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3) 徐敬浩, 1997, 『山海經 硏究』 , 서울대학교출판부, p.92~93. 그는『山海經』의 지리적 ․ 문화적 배경에 대해 최근에는 절충적인 견해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적고 있다. 즉, 어느 특정 시기 ․ 국가 ․ 지리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기, 북방과 남방에서 유래한 지식이 반영된 것이며 어떤 형태의 사상적 통합의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山海經』의 배경으로서 소위 중원이라고 불리는 곳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모두 중화문화권 이외의 문화적 요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도교의 흥망성쇠와 연결시켜 본다면 그 안에 표현된 각종 기록들은 중화문화권에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주변 문화권에서 중화문화권이 수입한 문화적 요소들이 집성된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14) 안호상, 1979,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 , 사림원, p.226~227.

 

15) 김용덕, 1984, 「단군신화와 신선사상의 연원」 『한국민속학』17, 한국민속학회, p.45. 그는 단군신화에서 하느님(玉皇上帝), 선약관념, 정진관념, 방술관념, 장생불사관념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도선사상 중에서 도참사상, 星宿思想 등이 있지만 이런 것들은 중화한 도교적 관념이며 도선사상의 정수인 불로장생관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적고 있다.

 

16) 오종근, 1991, 「한국 신선사상의 근원연구」 『역사와 사회』1권 6호, 국제문화학회, p.263~267. 그는 고대 삼국은 이미 단군신화에서 확인 가능한 신선사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비슷한 중화문화권의 도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불교보다 더 수월했다보고 있다. 그와 더불어 고구려도교를 개인적인 수련 위주의 도교이기 보다는 왕실 중심의 양재기복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진호하는 호국연기 및 연년익수를 비는 제초중심의 도교였다보고 이에 반해 백제와 신라민간신앙으로서 제천의식의 중시와 함께 본래 발전했다 보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최치원이 말하는 신라의 風流道 이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7) 정동주, 전게서, p.37~45.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4. 南北國時代의 茶文化

 
  남북국시대가 되면서 한반도 중부 이남은 신라가, 그 이북부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는 발해가 자리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던 때였다. 그와 동시에 예전 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의 문화가 국제적인 교역 루트를 따라 각지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동방문화권의 발해,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동시대 당에서는 차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산 ․ 보편화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문화가 다른 문화권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 당에서『다경』이 편찬되는 등 차문화가 폭넓게 확산 ․ 발전된 것만 확인하더라도 당연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기 남북국의 차문화와 관련된 자료는 너무나 소략하다. 그나마 신라의 경우는 앞서 살펴봤듯이 당나라로부터 각종 문물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차씨앗은 물론 차문화까지도 가져갔음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전해진 당의 차문화는 신라 고유의 토산차 문화와 함께 신라의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서 융합되었으며 특히 불교와 연관된 차에 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사원차(寺院茶)로서 발전 거듭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동시기 발해의 경우는 차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앞서 살펴봤던『발해국지장편』차에 대한 문구가 등장하지만 이것 역시 발해 당시의 내용이 아니라 동단국(東丹國)에 대한 내용이다. 동단국의 땅이 너무 추워서 차를 재배할 수가 없다는 기록인데1) 동단국은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나서 태자였던 야율배(耶律倍)를 파견하여 발해의 옛 지역을 다스리고자 세운 나라이다. 이로써 발해의 상경이었던 홀한성(忽汗城)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꿔 불리게 되었고 야율배인황왕(人皇王)으로서 발해고지에 세워진 동단국(동쪽의 거란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2).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세상을 뜨게 되자 야율덕광(耶律德光)이 뒤를 이었고 곧 야율배와 발해인견제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발해인들은 동단국으로부터 요양 지구옮겨지게 되었고 930년 정권 다툼에서 패하게 된 야율배는 후당(後唐)으로 망명하게 된다3). 이후 982년 요(遼)동경의 중대성(中臺省)을 철폐함 따라 명목상으로만 남아있던 동단국은 이름마저 사라지게 되었으니 57년간의 짧은 역사를 끝마치게 된 것이다4).

  그렇게 봤을 때 발해 멸망 이후 불과 반세기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으므로『발해국지장편』의 기록은 발해 당시의 상황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앞에서 필자는 고구려때부터 차대용 식물을 이용한 차 생산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했으며 뛰어난 수준의 의약학 발전도를 봤을 때 중화문화권에서 약용하던 차를 수입해 이를 연구하고 사용했으리라는 언급도 한 바 있다. 그런데『발해국지장편』에서는 발해, 아니 그보다 약간 뒤늦은 시기에 존재했던 동단국에서 차가 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니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발해의 농산품 중 유명한 것을 꼽자면 ‘책성의 된장’ 5)과 함께 ‘노성(盧城)의 벼’ 있겠다. 발해의 동경용원부있던 책성은 좋은 된장을 생산하기 위한 좋은 콩이 나는 지역으로서 오늘의 훈춘일대에서도 좋은 콩이 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노성의 벼’를 보자면 이 지역은 대체로 오늘의 돈화를 중심으로 모단강 상류지방과 다시 그 서쪽 화전현을 중심으로 한 송화강 상류지방, 길림 부근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그렇게 봤을 때 전반적인 지형이 벼농사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성이라고 하는 특정 지역의 벼가 발해의 특산품으로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특정 지형이 벼농사에 적합하였으며 또한 발해의 벼농사 기술이 그만큼 진보한 것임을 알려준다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발해의 벼농사를 비롯한 각종 농업 수준 이미『일본서기』『류취국사(類聚國史)』등에 잘 나와 있으며 각종 특산품이 풍부하게 산출된 것으로 봐서 발해에서 차가 생산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오히려 차가 날 수 없는 지형이라기보다는 차를 재배할 줄 아는 기술(인적 ․ 물적자원)의 부재로 인하여 동단국 시절에는 더 이상 차가 나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일 듯 싶다.

  실제, 발해 멸망 이후 노성을 비롯한 길림성 일대에서 다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인데6) 이는 그 지역의 기후가 그간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게 변했다기보다는 벼농사를 지을 사람과 물자의 부재 때문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발해국지장편』에서 동단국에는 차가 나지 않는다고 적은 것은 발해 멸망 이후 고구려 ․ 발해에서 전통차와 외래차를 재배하던 차 재배집단이 부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러한 기록이 남은 것뿐이지, 애초에 그 지역에서 차 재배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전량(全量) 수입해서 충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발해에 대한 우리측 사료는 삼국시대보다 더 소략하며7) 중국측 문헌 또한 차에 대한 동방문화권과의 교역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발해의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이전 시기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이다. 발해와 당나라 간의 국제교역에 대해 많은 연구성과를 남긴 윤재운의 자료들 참고한다 하더라도 발해와 당, 혹은 그 밖의 국가들과 차를 거래했다는 사실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발해와 당 간의 교역품을 살펴보면 당에서 수입되는 물품이나 발해에서 수출되는 물품에서 차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단지 발해에서 인삼, 백부자(白附子) 등이 수출된 것으로 봐서 차대용 식물이 약용 혹은 차상품으로서 당으로 수출된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8).


  분명히 당시 당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차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는데 그런 당나라와 공식적인 사절단만 100회 이상 교류했던 발해와 당나라간의 차 무역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지는 확실히 의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신라의 경우, 신라와 당나라의 공무역은 6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당나라로부터의 수입품인 빙답품 중에는 차도 들어 있었다 한다9). 그렇게 봤을 때 신라는 분명히 그러한 당으로부터 각종 문화를 수입했을 때 차문화도 수입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지만 역시 발해의 경우는 차문화의 전파 ․ 확산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바가 거의 없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다만 확인 가능한 발해의 차 교역 기록은 발해가 아닌 동단국의 차 교역 기록있을 뿐인데 동단국의 발해 출신의 사신 고도환(高徒煥)은 958년 남당에 파견되어 남당에 양 3만필, 말 2백필을 팔고 그 가격으로 비단과 약, 차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한다10). 앞에서 언급했듯이 육식을 위주로 하는 거란과 같은 유목민족에게 있어 차는 소화촉진제이자 삶의 중요한 식음료로 그 수요가 갈수록 급증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역시 발해가 멸망한지 대략 30여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기 때문에 발해 역시 중화문화권에서 차를 수입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됐다.

  그럼 이 시점에서 당의 차문화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앞서 필자는『봉씨견문기』의 내용을 토대로 8세기에 이미 당에서는 차문화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으며 그러한 차문화가 주변 국가들로 확산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추(鄒), 제(濟), 창(滄), 체주(棣州)에서 장안에 이르기까지 각 도시에는 많은 점포가 개설되어 차를 끓여 팔고 있었고 된과 속인을 불문하고 전을 내고 차를 사서 마셨다고 하니 차문화가 이제는 귀족이나 승려와 같은 특정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저자에서 돈만 내면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식음료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1).

  여기서 주목되는 곳이 바로 제(濟) 지방이다. 이 곳은 산동지방으로서 훗날 산동지방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일가(一家)가 독자적인 군벌로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3대 55년간 터를 잡고 주변 국가와 교류하던 이정기 일가는 발해와도 교류했었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발해는 분명 제 지방의 이와 같은 보편화된 차문화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중화문화권과 북방문화권이 차마무역(茶馬貿易)을 성립해 차와 말을 거래했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발해와 이정기 일가 역시 그러한 거래를 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2).


  당대 차의 광대한 소비 증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있다. 바로『신당서』의 기록인데 산택지리(山澤地利)가 한 현의 차세(茶稅)에도 미치지 못 한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3). 개원 15년(727) 이래 중앙에 귀속되었던 금속광산에서 나오는 산택지리가 지방 주현에 귀속되자 제주(諸州)에서는 이를 통한 이익 증대에 몰두하였고 그렇게 해서 무려 7만여민(緡)에 달하는 수입이 있었지만 그것이 1개 현의 차세보다 못 했고 하니 당시 차의 생산과 소비가 어느 정도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당 후기로 가면 이러한 차 재배를 전업(專業)으로 삼는 농가 더 많아지는데 앞서 언급했던 장수규의 차원에는 남녀 노동자 100여명이 고용되어 차를 수확하고 있었고 고저산(顧渚山)의 차원에서는 진공차(進貢茶)의 생산과 제조를 위해 3만명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0명 내지 3만명까지 동원되어 차가 생산 ․ 재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차가 상품작물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는데 자연조건이 맞는 지역 도처에서 차가 재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판매 가치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14).


  이와 함께 차의 제조과정이 전문화된 모습도 나타났는데『태평광기』의 다음 기록은 당시 차를 생산하는 집단이 그에서 그치지 않고 제조 또는 판매도 담당함으로써 차의 생산과 제조, 판매과정이 전문화된 모습이 이미 당 중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15). 이때의 제다기술자(製茶技術者)에 대한 견해는 크게 2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유청진 등 20여인 차 판매에 종사하는 집단으로 수주에서 찻잎을 구입하여 직접 말려 각각 1태씩 짐으로 만든 다음 운반하여 판매하려 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견해는 유청진 등 20여인은 수주인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제다기술자로서 수주의 다원에 고용되었는데 임금을 차로 받아 이를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두 견해는 모두 차의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며16) 당시 차 유통에 있어 전문화가 상당할 정도로 이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봤을 때 당 중기와 후기의 이와 같은 차문화의 번성은 당연히 다른 문화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앞서 살펴봤던 신라는 물론이고 그와 동시대 발해에서도 당의 차문화 번성과 더불어 차문화가 융성했을 것이다. 당시 당은 세계 최강대국이었으며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들어선 신라는 대국이 아닌 자국의 안전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소국의 길을 선택했었다17). 그리고 그 북쪽에는 발해가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발해는 이전의 고구려처럼 동방문화권의 패자(覇者)로서 중화문화권과 쌍벽을 이루며 군림하지는 못 했다18).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리며 번창일로에 있던 발해 역시 당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문화권의 여러 기둥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이런 당시의 시대적인 천하관은 발해의 차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고구려의 경우 이전 시기부터 전래되어왔던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물이용한 각종 차가 생산 ․ 유통되는 상황 속에서 뛰어난 의약학 수준을 바탕으로 외래 차문화, 즉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를 수입했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당시 남북조 시대만 하더라도 장강 이남에 비해 화북 지방에서는 차문화가 보편적인 음료 문화가 아니었지만 남북조 모두와 꾸준히 교류했던 고구려는 약용이든지, 음료이든지 외래 차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상당히 많은 인적 ․ 물적 자원이 각지로 흩어졌고, 비록 발해가 건국되어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을 계승하는 등의 노력을 하면서 해동성국으로서 번성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동방문화권이라는 독자적인 천하는 사라진 상태에서 발해는 이전 시기에 전해져왔던 고유의 문화적 요소 중 상당수를 상실했다고 생각된다19). 그 중에는 오래도록 전해져왔던 고구려의 차생산 관련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을텐데 고구려에서 차를 재배하던 집단 역시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각지로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후 발해에서는 차재배 집단의 부재와 맞물려 당에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 불어난 외래 차문화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기존 차문화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발해와 달리 신라기존의 차문화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신라가 소국의 길을 자임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신라 역시 발해 못지 않게 당 문화가 폭발적으로 유입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 문화가 유입되기 이전의 전통문화가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소멸될 위기에 처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치원신라에는 ‘풍류도라는 독자적인 사상이 있다고 언급한 것이나 신라에는 ‘신국(神國)의 도’ 있어 문화적 ․ 사상적 바탕이 중화문화권과 많이 달랐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동방문화권에 정착한, 아니 신라에 정착한 불교의 성격이 중화문화권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는 점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신라는 당의 천하를 인정하면서 소국이 되길 원했지만 그렇다고 고유의 문화를 상실하고 외래 문화로 이를 대체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신라가 당의 침공에 대해 국토를 보존하고 그 안의 인적 ․ 물적자원을 보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한다.

  이에 반해 발해는 한번 당에 의해 황폐화된 고구려 고지(古地) 위에 새로 들어선 나라였으며 고로 신라에 비해 기간산업이라든가, 국가의 기반이 될만한 자원의 부족을 경험했을 것이다. 비록 빠르게 국력이 신장되어 이후 해동성국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지만 그 성장의 밑바탕에는 과거 고구려의 문화적 요소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이 파괴된 상태였을 이기 때문에 신라에 비했을 때 이전 시대의 문화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발해는 한층 불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20).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발해의 차문화는 신라의 차문화와 길을 달리 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전 시기부터 전해져왔던 토산차 생산과 유통보다는 외래차의 수입과 소비의 비율이 더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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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渤海國志長編』券17「食貨考」第4〈渤海國志〉15, “: 謹案本草綱目 拾遺載茶二十餘種 皆産中國南部 東丹地 早寒不産茶 故至南唐以物市易之.”

 

2) 『遼史』券2「本紀」第2〈太祖〉上, “丙午, 改渤海國為東丹, 忽汗城為天福. 冊皇太子倍為人皇王以主之.”

 

3) 『契丹國志』券14「諸王傳」〈東丹王〉, “唐明宗長興元年, 突欲自以失職, 帥部曲四十人, 越海自登州奔唐.”

 

4) 王承禮 著 / 宋基豪 譯, 1987, 『발해의 역사』 , 翰林大學 아시아文化硏究所, p.215.

 

5) 박시형 저 / 송기호 편, 1979, 『발해사』 , 이론과 실천, p.222~223. 저자는『新唐書』 「渤海傳」의 원문은 柵城之豉라 쓰여있으며 이때의 시(豉)는 단순히 ‘메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메주에 다시 소금 및 기타 조미료들을 합쳐서 만든 오늘의 된장에 가까운 것을 가리킨다고 적고 있다.

 

6) 김기훈, 2005,「조선인은 왜 만주로 갔을까」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 , 고구려연구재단, p.183~184. 조선과 청은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선포하였고 이는 17세기 중엽~19세기 중엽까지 근 200년간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북부지방의 사람들은 몰래 월강하여 인삼, 약재 등을 캐거나 사냥을 하고 밭을 일구는 등 이 지역으로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 청나라는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족들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는 移民實邊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1875년 요령성 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한 것을 필두로 1880년대에는 거의 모든 만주 지역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봉금정책의 해제는 한족뿐만 아니라 조선족에게도 적용되어 적극적으로 조선인들로 하여금 만주 일대를 개간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까지 했다.

 

7) 유득공 著 / 송기호 譯, 2002, 『발해고』 , 홍익출판사. 발해에 대한 우리측 문헌으로는 유득공의『발해고』가 유일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인물, 지리 중심이며 정치사 위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茶를 비롯한 토산물이라든가, 경제나 문화 관련된 내용은 많이 없다.

 

8) 尹載云, 2002, 「南北國時代 貿易硏究」 ,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p.169.

 

9) 『海東歷史』 券25,「食貨條」

 

10) 서병국, 1990,『발해 발해인』, 도서출판 一念, p.145.

 

11) 『封氏見聞記』 券6「飮多」, “開元中(713~741)……自鄒濟滄棣 漸至京邑城市 多開店鋪煎茶賣之 不問道俗 投錢取飮.

 

12) 鄭炳俊, 2004, 「李正己 一家의 交易活動과 張保皐」 『동국사학』40, 동국사학회, p.533~534. 이정기 일가가 대대적으로 상인을 유치하고 보호한 이유는 그들이 번진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대부분의 번진들이 상인들로부터 通過稅(關稅)와 交易稅(市稅)를 거두었는데 군비 부담을 위해서 세금을 무겁게 내렸던지 많은 상인들이 파산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번진의 商稅 징수는 관행이 되었는데 그렇게 봤을 때 이정기 일가는 발해와 신라 등과의 활발한 교역을 적극적으로 유치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과정에서 당의 차문화가 발해로 유입되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13) 『新唐書』 券16「志」第44〈食貨〉4, “開成元年, 複以山澤之利歸州縣, 刺史選吏主之. 其後諸州牟利以自殖, 舉天下不過七萬餘緡, 不能當一縣之茶稅.”

 

14) 徐銀美, 전게서, p.35~36.

 

15) 『太平廣記』 券24「神仙」第24, “唐天寶中,有劉淸眞者,與其徒二十人于壽州作茶,人致一馱爲貨。至陳留遇賊.” 해석하자면 “당 천보(742~756) 중, 유청진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무리 20인과 수주에서 차를 제조하여 사람마다 1태씩 짐을 맡아 운반하였는데 진유에 이르러 도적을 만났다.”라는 의미다.

 

16) 金貞姬, 1993, 「唐代 後期 商人의 成長에 관한 硏究」 ,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62.

 

17) 김용만, 2003, 『새로 쓰는 연개소문傳』 , 바다출판사, p.306. 신라는 고구려의 패망을 지켜보면서 자기 생존을 위한 유일한 대안을 선택했었다. 그 결과, 신라와 당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신라는 당의 요구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천하의 중심이 신라가 아닌 당임을 인정해야 했고, 신라는 해동의 변방임을 자처해야 했다. 신라의 이같은 선택은 이후 우리 역사가 천년 이상을 중국화의 길을 걷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18) 박시형 저 / 송기호 편, 전게서, p.110~111. 저자는 고구려의 경우 관리들의 위계제도, 관직명 등이 기본적으로 순전히 고구려식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국가체제 전체도 물론 고구려식으로 되어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발해는 고구려와는 형식상 많이 변화되었는데 이처럼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동방문화권 고유의 것보다 당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다수 전파 ․ 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 徐榮洙, 2004, 「동아교섭사에서 본 渤海의 국제적 위상」 『문화사학』21, 한국문화사학회, p.559. 그는 발해의 건국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원왕조 당과 돌궐을 중심으로 한 막북 세력 및 신라와 발해를 축으로 한 동방세력의 삼각체제로 힘의 균형 이루게 되었으며 이후 책봉체제로 표현되는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을 규정짓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박원길, 전게서, p.44~47. 제 2돌궐제국은 744년 멸망하게 되고 이후 막북에 들어선 위구르[回鶻]제국 여타 유목제국과 달리 국초부터 唐과 우호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우호관게는 840년 키르키즈족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막북은 중화문화권과 대등한 수준의 천하라고 부를 수 없는 지역이었다. 마찬가지로 동방문화권 역시 신라는 이미 소국으로의 길을 자임했으며 발해 역시 당을 제치고 주변 세력을 휘하에 두고 동방문화권 전체에 독자적인 천하관을 관철시킬 정도의 능력이 되질 못 했다. 고로 당시 국제사회를 삼각체제라고 표현한 서영수의 견해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20) 이남석, 2005, 「유적으로 본 계승관계」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고구려연구재단, p.251.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발해국이 존재할 시기 동아시아 문화권의 움직임은 당으로 통일된 중국이란 거대한 단위 속에서 여기에서 생산된 문화가 주변으로 파급되어 크게 영향을 미치던 시기이다. 발해도 동아시아의 동북 방면에 자리하여 그 위용을 전개하지만 거대한 중국의 문화흐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후, 그 유민에 의해 건국된 국가지만, 새롭게 터전한 국가의 중흥을 위해서는 보다 선진문물에 대한 욕구가 남달랐을 것이고, 더욱이 지속적 발전을 거듭하여 아시아의 찬란한 무명을 꽃피우는 당의 문화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흔적은 발해 문화의 모든 부분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하며 당시 발해의 이와 같은 결정은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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