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4

2018. 11. 26. 20:00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4|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조회 31|추천 0|2006.11.03. 00:44http://cafe.daum.net/cjwhc/1nxV/7929  



Ⅲ. 獨自的인 韓國 茶文化의 起源과 文化

 


   앞서 본고에서는 차의 기원지와 그 전파 경로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봤다. 그리고 차문화라는 것이 정통(正統) 중화문화권이 아닌 이른 시기 남방문화권의 문화적 요소였으며 이후 중화문화권의 지배범위가 확대되어 남방문화권이 중화문화권에 편입됨에 따라 중화문화권의 문화적 요소로서 자리매김했음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사료가 중국측보다 더 적은 우리로서는 앞서 행했던 것처럼 문명교류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차문화를 비교해보는 수 밖에 없다. 먼저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1) 혹은 그 이전의 동방문화권과 중화문화권 혹은 남방문화권 간의 교류 사실을 찾아보고 이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가 도입한 방법론은 인삼 재배와의 비교 고찰이다. 인삼 또한 영약으로 알려져 있는 귀한 작물이며 오래전부터 인간이 복용해온 약재(藥材)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인삼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은 한국산 고려인삼이며 그 효능 또한 대단히 뛰어난데, 이 인삼의 효능과 생육 환경 등에 주목하여 차와 인삼 재배 간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로 인해 동방문화권에서 독자적인 차 재배가 이뤄졌으며문화권과는 다른, 혹은 비슷한 차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거론하고자 하겠다.

  이후 각 시대별로 차문화의 변화상다른 문화권과의 교류 현황을 통해 고대 한국의 차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볼 생각이다. 특히 본고에서 주목해서 살펴볼 부분은 백두산 근처에서의 차재배와 관련된 구다국에 대한 부분과 중화문화권에서 ‘차의 전성시대’를 연 당나라와 동시대 존재했던 남북국시대, 특히 상대적으로 차와 관련된 사료가 극히 적은 발해의 차문화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고대 한국 차문화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임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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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내현, 1999,『고조선 연구』, 일지사, p.15. 저자는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조선이라는 명칭에 衛滿朝鮮漢四郡을 포함시켜 서술하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檀君朝鮮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위치해 있었던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며『三國遺事』에서도 단군조선만을 古朝鮮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한국사 체계상에 큰 오류가 있다고 하였다. 고로 본고에서는 애초부터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등을 구분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1. 上古時代의 茶文化

 


  이미 단군조선 때부터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차가 있어 이용되었으나 당나라때 가 들어옴으로써 대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 이를 두고 김운학단군시조가 백두산에 개국한 이래 차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초의선사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장백산에 백산차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2). 하지만 초의선사『동다송(東茶頌)』이나『다신전(茶神傳)』어디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오히려 그 이야기는 이능화『조선불교통사』에 나와 있는데 그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갖고 온 종자가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이며 한편으로 장백산에 백산차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3). 즉, 문헌상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차문화는 가락국 이전으로 소급되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 과연 산차(白山茶)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실제 백두산의 희귀생물로서 백산차(Ledum palustre var. dilatatum)와 좀백산차(Ledum palustre var. dilatatum E. Busch)가 있다.

  먼저 백산차는 진달래과로서 상록 소관목이며 개화기는 6~7월, 결실기는 7~8월이다. 가지끝에 흰색의 우산모양 꽃차례가 달리고 흔히 백두산의 해발 800~2,000m 되는 침엽수림 속이나 소택지 주변, 습한 산기슭에서 자란다. 잎, 어린 가지, 열매에서 정유를 추출하여 가지와 잎은 만성기관지염 치료에 효능이 있으며 관상수로도 적합하다고 한다. 좀백산차 역시 진달래과로서 백두산의 희귀식물이며 개화기와 결실기는 백산차와 같고 역시 흰색 꽃이 핀다. 해발 700~1,500m 되는 이탄지 또는 낙엽송림 근처의 습한 곳에서 자라며 가지와 잎을 약용으로 쓴다4).


  백산차는 아마도 ‘백두산에서 나는 차’라는 의미일 것이며 이 밖에도 왕백산차(Ledum palustre var. maximum)라는 종도 있다. 개화기는 5월, 결실기는 9~10월로 다른 백산차들과 약간 다르지만 역시 흰꽃이 피며 해발고도 1,600m 되는 지역의 낙엽송 숲에서 야생한다5). 이능화가 차라고 말했던 백산차류(類)는 이처럼 동백나무과가 아닌 진달래과의 상록활엽 관목으로서 흔히들 차대용(茶代用)이라고 불리는 작물들이다. 즉, 효당스님이나 응송스님이 말한 것처럼 백산차가 생강나무나 철쭉꽃 종류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백두산에는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물뿐만 아니라 오미자, 수염종덩굴, 애기금매화, 물싸리, 민물싸리, 牛皮茶라고도 불리는 만병초, 월귤나무, 구기자나무, 꽃밥알풀, 아귀꽃나무, 가시오갈피, 각종 까치밥나무 등 차대용으로 쓰이는 식물이 무수히 많다6). 이들은 하나같이 어린 잎 혹은 다 자란 잎을 차로 우려먹거나 열매 혹은 뿌리 등을 달여 차로 마실 수 있는 식물들로서 차로 끓여먹을 수 있는 차대용 식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백산차류의 차를 비롯한 각종 차대용 식물을 중심으로 고대 한국의 독자적인 차문화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려준다 하겠다.


  예로부터 백두산은 온전하게 보존된 원시림(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과 침엽림)을 이루고 있으며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수직분포가 뚜렷하여 흔히 ‘입체 식물원’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있고 기후와 지형의 영향으로 기온은 해발고도의 높이에 따라 단계적으로 낮아져 식물은 산의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뚜렷하게 구분되어 5단계의 수직 분포대로 나타난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하고 푸르른 식물의 가지와 잎, 싱싱한 활엽림,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 침엽림의 산림대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1,800~2,00m 이상은 유라시아 대륙 산지 이끼 들판의 남쪽 지대로서 동북아시아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고산지대인 셈이다7).

  그렇기에 대 ․ 소흥안령과 백두산지의 한온대림과 온대림 지대가 오늘날 중국의 주요 삼림 지대로 손꼽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대흥안령 북단의 한온대림은 시베리아의 대삼림이 중국에까지 연속된 것으로서 울창한 삼림 때문에 18~19세기에도 낮에 해를 볼 수 없을 정도라는 문헌이 확인된다. 소흥안령과 백두산 일대의 화분 분석에 의하면 이 곳은 전신세(Holocene)8)의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이 우거져 있었는데 이후 기후가 온난하여 소나무와 활엽수종이 공동으로 우점종이 되었지만 후기부터는 기후가 다시 한랭해지면서 활엽수가 감소하여 소나무만이 우점종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9). 그렇게 봤을 때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백산차류의 식물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 곳에 터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하상연차나무의 생장 적지로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배수가 잘 되고 가뭄을 잘 이겨내는 화강암 마사토와 자갈이 섞인 땅을 꼽고 있다. 이는『다경』에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이런 토질은 중생대(中生代: B.C 2억 5,000만~6,500만년) 이전의 부식질 토양에 해당한다. 즉, B.C 6,500만년 이후의 화산회토와 진흙땅에서 차의 생장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쉽게 관찰되는 토양으로는 갈색삼림토, 적색토, 부식질 회색토, 유기질토, 간석지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갈색삼림토는 산록 밑 낙엽이 많이 쌓이는 산지에 분포하며 토양의 모재는 화강편마암에서 유리하며 산도가 약간 강한 편이다. 적색토는 우리나라 서부 및 남부지방의 평야와 구릉지에 널리 분포하는데 산화철, 알미늄이 토양단면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비옥도는 갈색삼림토에 비해 떨어진다. 그 밖에 부식질 회색토는 서해안, 남해안의 하성(河成) 혹은 해성(海成) 충적지(沖積地)에 많이 분포하며 우리나라 논의 토양이 대체로 이에 속한고 약산성이라고 한다. 즉, 우리나라 토양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10)


  또 차나무는 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보는 실화상봉의 중생대 식물이고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고생대 이전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 대륙의 경우 고생대 지층은 우랄산맥, 천산산맥, 대 ․ 소흥안령, 그리고 백두대간(白頭大幹) 등과 그 지맥들 뿐인데 우리나라는 백두산 분화구 일대와 제주도, 울릉도 등 화산지대와 일부 해안선의 수성암 지대를 제외하면 국토의 90% 이상이 중생대 이전에서 신생대에 이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 지대라는 것이다11). 이와 관련된 고대 한국의 차나무 자생설은 뒤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암튼 문헌상으로 차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는 것은 물론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물약용 혹은 음용했다는 기록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현 학계에서도 이능화의 견해를 좇아 ‘예로부터 백산차가 있었다.’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상고시대 동방문화권에서의 음다 풍속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동방문화권만의 독특한 문화권들과 타 문화권과의 교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접근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신석기시대때부터 동방문화권은 다양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먼저 요서 북부 일대에는 중화문화권의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앞선 홍산문화(紅山文化)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 만주 심양 지역의 신락문화(新樂文化), 요동반도 남부의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압록강 하구의 후와문화(后洼文化), 송화강 유역의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눈강 지역의 앙앙계문화(昻昻溪文化), 상감평원의 소남산(小南山) ․ 신개류문화(新開流文化), 목단강 유역의 앵가령문화(鶯歌嶺文化)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문화권은 이후 청동기시대에도 문화적 단절 없이 지속되는데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이어지고, 뒤이은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 길림지역의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 산동반도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뒤이은 악산문화(岳山文化) 등이 모두 다양한 동방문화권을 형성한 것들이다12)


  이들 문화권과 문헌상 비교 검토해볼 수 있는 부분이 단군조선에 대한 부분인데 B.C 2,333년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는 단군조선의 영역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지금의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를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구분하는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미송리식토기(美松里式土器) 혹은 팽이형토기라 부르는 것이다.

  납작밑항아리 양쪽에 파수부가 하나씩 달려있고 목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가볍게 오므라지는 것이 특징적인데 그 분포범위는 청천강 이북 일대와 길림, 요령 지방 일대가 중심적이다13). 하지만 서울 암사동이나 하남 미사리, 강화도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대체로 한강 중류와 상류, 임진강 유역, 강화도까지를 남방 한계로 분류할 수가 있다14).

  신용하는 이런 미송리식토기(팽이형토기)가 산동 대문구문화 말기층에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중국에 실재했던 소호족(少昊族)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15). 그러면서 이 토기가 초기 고조선문명권(古朝鮮文明圈)의 범위를 측정하는 지표의 하나가 되는 토기이기 때문에 산동 대문구문화는 동이 계열의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그는 고조선이 한반도에서 건국된 후 북으로는 요동 ․ 요서 방면으로, 서로는 발해와 서해를 건너 산동, 하북, 하남 방면으로, 남으로는 한강을 건너 한반도 남해안으로 확산되어 단일한 고조선문명권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6).


  그렇게 봤을 때 단군조선이 건국했다고 하는 대략 B.C 24세기 전후『다경』에서 최초로 차를 마셨다는 신농씨의 시기와 비슷한 때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신농씨의 음다 기록 자체에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단군조선에서의 음다 풍속 또한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서 외래에서 전래된 차문화도 있지만 독자적으로 자생한 차문화 역시 있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이미 전신세에 백두산의 원시림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면 인류가 그 지역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이후에는 비단 백산차류 뿐만이 아닌 다른 식물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동방문화권에서 마셨을 차는 동백나무과에 속하는 차나무의 찻잎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겠다. 실제『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선조 31년(1582) 6월 23일, 대신들과 함께 양 경리가 참소당한 사정과 중국에 보낼 자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우리들이 마시는 인삼차는 탕(湯)이지 차(茶)가 아니라면서 탕과 차를 혼동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웃은 일이 있었다17).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라는 것은 본래가 초목의 이름이지 음료의 이름이 아니건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라를 글자를 탕(湯), 환(丸), 고(膏)처럼 마실거리로 인식하여 강차, 귤피차, 모과차 등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였다18).

  하지만 이때가 조선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명나라의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랐던 정약용의 생각은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달리 독특한 차문화가 존재했다고 볼 여지가 높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 시원(始原)은 언제부터일까? 


  사천성 일대의 차문화중화문화권으로 전파되는 데에도 하상주 삼대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진 ․ 한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기까지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남북조시기까지도 여전히 차의 생산과 음차의 풍속은 강남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북방에서의 음다 문화는 많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19) 단순히 중화문화권에서의 차문화 전래만 갖고는 동방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동방문화권의 독자적인 차문화에 대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럼 단군조선 혹은 그 이전에 차 혹은 다른 식물을 약용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까? 관련 문헌이 소략한 가운데에서도『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쑥(艾)과 마늘(蒜)이 있어 참고할만 하다20). 그 당시 아시아 서부 일대가 원산지인 마늘이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보고 이 마늘을 달래21)로 보기도 하는데『동의보감(東醫寶鑑)』을 보면 ‘대산(大蒜)을 마늘, 소산(小蒜)을 족지, 야산(野蒜)을 달랑괴’로 구분하고 있어 단군설화에 나오는 마늘을 대산이 아닌 소산 혹은 야산일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통을 치료하고, 종기와 벌레에 물렸을 때 혹은 협심통에 식초를 넣고 끓여서 달래를 복용하는 등 그 효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 당시 마늘이 아닌 달래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또한 복통 · 토사(吐瀉) · 지혈제로 쓰고, 냉(冷)으로 인한 생리불순이나 자궁출혈 등에도 사용하지만 여름에는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는 재료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아마 굴 안에서 불을 피워 해충(害蟲)을 쫓아내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22)


  그 밖에 쑥과 마늘은 일종의 제례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적인 매개체로 보여지며23) 미개한 문명에 대한 문화 전파의 흔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늘과 쑥이 동북방 일대에서 나는 식물이며 그 효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채취하고 이용할 줄 아는 집단은회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제례 집단이나 혹은 특수한 세력을 형성한 집단으로 추정이 가능한데 그렇다고 봤을때 곰으로 대표되는 집단과 환웅으로 대표되는 집단 사이에 계약적인 주종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자고로 의학(醫學) 지식이란 오랜 시간동안 쌓여져 내려온, 축적된 노하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외래 집단과 그 지역의 특수한 토착 집단간의 계약적인 융합은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된다.

  이는 이미 쑥과 달래 따위를 오래전부터 복용해 왔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 당시의 식물 활용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분명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동방문화권에는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야생 식물성 줄기섬유를 다루던 찍개나 찌르개 등이 발견된 바 있었고24) 구석기 후기의 동굴벽화에는 그물을 치고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성 재료로 그물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25). 이는 곧 이른 시기부터 여러 종류의 마섬유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들이 재배되었고 이들을 활용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26).

  박선희는 그의 저서『한국 고대 복식』에서 고고학적 현황을 살펴봤을 때 마직물, 면직물, 사직물 생산에 있어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동방문화권의 문화적 수준은 동시기 중화문화권 및 남방문화권의 그것보다 우수하다고 적고 있다. 특히 쉽게 썩어버리고 관리하기 힘든 식물성 섬유로 이뤄진 마직물이라든가, 누에에서 고치실을 뽑아 만든 사직물의 경우 이미 중화문화권과 남방문화권에서도 폭넓게 생산되었지만 동방문화권의 그것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고 생산하기 시작한 기간도 우리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봤을 때 각종 식물의 활용도에 있어서 꼭 중화문화권을 기준으로 모든 편년을 수립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라고 부르던 대상 자체가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문화권들 사이에서 반드시 남방문화권 혹은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를 기준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차라는 문자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당대 육우『다경』을 저술할 무렵부터이며 이전에는 고로(皐蘆), 가(檟), 도(荼), 설(蔎), 명(茗), 천(荈) 등 10여개의 글자가 있었는데 점차 시간이 흘러 도(荼)가 그것들을 대신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한 획이 빠지면서 현재의 차(茶)가 되었으니 이때가 8세기 무렵이다27)


  고로(皐蘆)고채(苦菜), ‘쓴 나물’이라는 뜻의 회역음자(回譯音字)로서 중국 대엽동청(大葉冬靑)이라고 불리는 감탕나무과의 다라엽(Ilex latifolia)을 지칭한다. 즉, 엄밀히 말하면 고로는 동백나무과의 차가 아니라는 소리다. 오늘날 고정차(苦丁茶)라고 불리는 상품이 바로 이 고로로 만든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없으며 일본에서는 당차(唐茶), 고차(苦茶), 춘차(椿茶) 등으로 불리고 있다.

  고로종 나무의 특징은 잎은 타원형으로 크고 옆장은 엽폭보다 3배가 더 길며 줄기는 곧고 바르게 자란다. 차나무와 매우 유사하지만 가지와 잎이 엉성하고 잎은 두껍고 비대하며 외형은 차나무와 비슷하지만 줄기나 가지가 엉성하며 잎은 상당히 큰 것과 아주 작은 것도 있다28). 실제『다경』에서도 ‘차나무의 모양이 과로(瓜蘆)와 닮았다,’29)고 하여 양자가 서로 다른 종자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가(檟)는 한자 그대로 ‘개오동나무’를 의미하는데『설문해자』에는 이 사실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또한『이아의소(爾雅義疏)』에는 ‘개오동나무 가(榎)와 가(檟)가 같은 글자의 다른 체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어『이아(而雅)』에서 ‘가는 곧 쓴 차다.’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30). 즉, 능소화과의 낙엽교목으로서 차와 엄연히 다른 식물인 개오동나무31)차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도(荼)라는 글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씀바귀’를 말하는 것으로서 씀바귀 또한 국화과의 다년초로 동백나무과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중에는 흰꽃이 피는 흰씀바귀 같은 종류도 있고 갯씀바귀, 벋음씀바귀, 좀씀바귀 등 많은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은 모양이나 개화기, 결실기가 모두 차나무와 다른 종임을 알 수 있다32).

  즉, 당대(唐代)에 차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차문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즉, 차나무의 찻잎을 마시는 차문화와 함께 열매나 뿌리, 가지 혹은 다른 식물을 차처럼 마시는 차문화가 공존(共存)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화문화권과 남방문화권 내에서도 각각 차문화가 달랐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다경』을 보면『광아』의 예를 들어 당시 형주와 파주 등 남방문화권의 음다 풍속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광아』를 쓴 장즙형주와 파주 사이의 사람들은 단순히 찻잎을 채취해서 병차를 만들어 먹을 뿐만 아니라 파(葱), 생강(薑), 귤(橘)을 같이 넣어 끓여 먹었다고 쓰고 있다33). 그가 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기록의 연대는 220~265년 즈음이며 3세기 이전부터 남방문화권에서는 차나무에서 채취한 것만 차로 마신 것이 아니라 파, 생강, 귤과 같은 그 지역 특산품들을 같이 넣어 약차(藥茶)로서 마셨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 역시 오늘날의 음다 풍속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또한 3세기 무렵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차문화가 이때까지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나다를까, 육우는 이런 행태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파, 생강, 대추, 귤껍질, 수유, 박하 등을 넣고 오랫동안 끓인 후 혹은 차탕을 떠내어 매끄럽게 하거나 혹은 끓여서 거품을 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도랑에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인데도 세상에는 이런 습속이 그치지 않고 있다. 아! 하늘이 만물을 낳아기르는 데에는 모두 지극히 오묘한 이치가 들어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만 얄팍하고 하기 쉬운 것만을 취하려 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34).

  즉, 육우가 생각하는 진정한 차문화라는 것은 기존의 차라고 끓여먹었던 식음료를 전면 부정하는 일대 식문화의 변혁(變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8세기 무렵, 당대의 차문화는 크게 변화하였고 이전에 비할데 없이 큰 번영을 불러일으켰다. 당대에 이르러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없고 차를 생산하지 않는 지역이 없으며 국가에서 차를 전매하여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걷어들이게 된 것도 다 이와 같은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고로 동방문화권의 차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받드시 중화문화권의 음다 풍속, 특히 현재 관련 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으면서 차문화에 대해 새롭게 재편된 이후인 당대의 음다 풍속과 비교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크다 하겠다. 즉, 고대의 차문화는 각 문화권이 독특하게 갖고 있었던만큼 중화문화권이 결코 차문화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고로 백두산 일대에서 생장(生長)하던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물들이 얼마든지 이른 시기부터 음용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고로 이능화장백산의 백산차를 언급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주장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미 동방문화권이 신석기시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다른 지역과 접촉 ․ 교류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동방문화권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다른 문화권에 비해 낮지 않았던 점을 상기했을 때 식문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시각이라고도 생각한다.


  더불어 차문화는 이 시기의 중화문화권을 비롯한 타문화권과의 문명교류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할 필요가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청동기시대가 되면 요동지역에는 비파형동검문화가 형성되고 종래에는 요령성(遼寧省) 일대의 청동기로만 인식되었던 비파형동검이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출토되고35) 세형동검이 비파형동검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단군조선과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고로 산동성 일 대문구문화 고조선문명권으로 인식하든, 요령성 일대의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한 비파형동검문화단군조선의 문화로 인식하든 중화문화권의 동부와 동북부 일대에 중화문화권과 분명히 다른 문화권이 존재했고, 그들이 오히려 동방문화권의 한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36). 윤내현 부여, 고죽, 고구려, 추, 진번, 낙랑, 숙신, 청구, 발, 옥저, 개마, 구다 등등 열국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모든 집단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으로 설정하였는데37) 비단 그의 주장이 틀리다 하더라도 고고학적으로 이들 집단이 비록 서로 다른 문화권을 계승해 발전했지만 서로 비슷한 문화적 양상을 공유한채 존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미 하상주 삼대에 걸쳐 중화문화권동방문화권에 자신들과 다른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상서(商書)』『주례(周禮)』,『예기(禮記)』등에서 만(蠻), 맥(貊), 이(夷), 민(閩), 융(戎), 적(狄), 호(胡), 파(巴), 월(越) 등의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쳐 주대에 이르러 중국(中國)과 구분되는 다른 집단들을 중화문화권에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 ․ 서 ․ 남 ․ 북방문화권의 여러 집단들은 정치체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니 동방문화권에서는 단군조선이 그러했다38). 단군조선이 중국측 문헌에 제일 먼저 등장한 때는『관자(菅子)』이다. B.C 7세기 무렵, 제나라의 정치가 관중(菅仲)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온 이 문헌에서 ‘해내의 옥폐(玉幣: 귀한 물건)를 얻는 7가지 방책’을 묻는 제 환공(桓公)의 질문에 관중 ‘발(發) 조선(朝鮮)의 무늬가죽을 얻는 것’을 그 하나로 대답한 것이다. 이는 B.C 7세기 이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정치체의 무늬가죽이 중화문화권에서도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강회 지역의 제후국 36국을 복종시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주왕이 두려워했다는 서국(徐國)이다39). B.C 10세기 경, 강회지역을 장악하고 초나라와 대립하던 서국의 역사를 본다면 장강 하류 일대에서 중화문화권의 각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박물지(博物志)』40)에는 그의 탄생에 대해서 자세히 적고 있는데 김상기그의 탄생설화가 주몽설화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동이계 설화로서 서언왕을 동이계로 파악하고 있다41). 이와 같은 사실을 봤을 때 서국장강 상류의 차문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차문화가 동방문화권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당시 중국은 소빙하기가 찾아와 극히 한랭하였고 결국 이 때문에 서주가 멸망을 당하였고 차의 원산지였던 고촉국 역시 쇠퇴를 겪게 된다. 하지만 앞서 누누이 언급했듯이 차나무 자체가 겨울에 생장하는 식물인만큼 그 생산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서국에서 그런 차문화를 인지했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이후 B.C 5~6세기불리지(弗離支)라는 자가 산서성, 산동성 등을 정복하여 불리지국을 세우기도 하였다42). 이후 B.C 7세기 말 제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지만 불리지국 역시 서국처럼 중화문화권 각지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봤을 때 제나라의 안자차를 마셨다는 기록에서처럼 불리지국에서도 음다의 풍속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산동성 일대는 차가 생장하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안자가 마셨을 차 촉 지방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불리지국 역시 이와 비슷한 경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낙양 부근에 양거(揚拒), 이낙(伊洛), 육혼(陸渾) 등의 융족(戎族)들이 화하족(華夏族)과 뒤섞여 살고 있었고 그들은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주대까지만 해도 중심지인 낙양 일대에서조차 반농반목의 형태로 토지가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가 되면 각 국가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업을 지원하기 때문에 융족과 적족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새롭게 토지를 개간하고 운하를 파는 등 중국 대륙 전체적으로 농경이 크게 발전하기에 이른다43). 마침 이 시기는 온난다습한 시기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중국 동해안에서 동이족이라 불리던 집단이 거대한 정치체를 형성하지는 못 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중화문화권과 다른 식문화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봤을 때 상고시대 동방문화권의 차문화는 크게 2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겠다. 하나는 동방문화권의 유일한 삼림지대인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백산차류를 비롯한 기타 차대용 식물을 음용했을 가능성이며 또 하나는 사천성 일대에서 각지로 뻗어나간 중국 남부의 차문화가 단군조선의 영역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이다. 그렇게 봤을 때 비록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전형적인 화강암 대지로서 오래전부터 백산차류를 중심으로 한 차문화가 상고시대때 이미 존재했으리라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국 동해안 일대가 오래도록 동이계라 불리던 집단의 활동무대였으며 이들과 교류하던 장강 일대의 집단들 역시 남만(南蠻), 백월(白越) 등으로 불리던 집단들로서 중화문화권과는 엄연히 다른 문화권을 형성했던 존재였다. 고로 신석기시대부터 이들과 교류하던 동방문화권에서 이후 단군조선이 형성된 뒤에도 장강을 따라 촉 지방의 차문화를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 등지는 해양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렇게 황해문화권을 따라 도작농경(稻作農耕)이 전래되었으며 이런 해양교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44). 그리고 이처럼 2가지 계통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고대 한국의 차문화는 열국시대에 이르면 보다 체계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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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相明, 전게서, p.39~40. 하지만 그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확실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의아하다.

 

2) 김운학, 2004,『한국의 차문화』, 이른아침, p.14~15. 그는 白山茶에 대해 효당스님은 생강나무로, 응송스님은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꽃일 것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백산차와 같은 이러한 차들이 변해 소위 우리의 순수한 생강차, 구기자차, 산수유, 당귀, 감초, 마가목, 오미자차, 인삼차 등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3) 이기윤, 전게서, p.48. 그는 인도에서 차나무가 전래했다는 설은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엄연한 실존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허황옥의 출자지에 대해서 인도가 아닌 중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그 설이 일견 타당하기에 B.C 1세기때 인도차의 직접적인 전래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4)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2005,『백두산 식물도감』, 일진사, p.323~324.

 

5) 고경식 ․ 전의식, 2005,『한국의 야생식물』, 일진사, p.511.

 

6)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전게서, 백두산에는 차대용 식물뿐만 아니라 약재로 쓰이는 개암나무, 뽕나무, 가는잎쐐기풀, 호대황, 복수초, 삼지구엽초, 백선, 두릅나무, 들메나무 등 수많은 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개중의 대부분은 동북아시아 혹은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종들이다. 즉, 백두산의 이러한 수많은 식용 작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7) 祝廷成 외 2인 著 / 고경식 譯, 전게서, p.10~11. 해발고도 720m 이하는 온대 활엽림, 720~1,100m 사이는 혼안대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 1,100~1,700m 사이는 아한대 침엽림, 1,700~2,000m는 한대 아고산 왜곡림, 2,000~2,700m는 북극권의 고산 이끼 들판으로서 대부분의 백산차류는 2층과 3층 사이에서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8) 지질시대의 최후인 충적세(沖積世)라고 부르는 시기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략 B.C 1만 3백년 전을 경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백산차류가 백두산에 자생한 시점은 인류가 가늠하기 어려운 오랜 옛날이라 할 수 있겠다.

 

9) 루제헌, 전게서, p.54.

 

10) 邢基柱, 2000,『農業地理學』, 法文社, p.52.

 

11) 김대성, 2006, 전게서, p.318. 하상연은 차나무는 냉해에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 생산되며 본래 小葉灌木이지 大葉喬木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荼에서 茶로 그 명칭이 바뀔 때 禾를 제거하고 나무 木을 집어넣은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덧붙여 차는 항상 지방질이 많은 음식을 먹는 유목민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중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중국 남부가 차나무 원산지로 추정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로 차가 여러 가지 기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오히려 적합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중화문화권이 아닌 남방문화권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정통적으로 황하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마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으며 禪 ․ 佛敎 혹은 古代 醫學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도 후대의 중화문화권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상연의 견해는 또 다른 한국 차문화의 계통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겠다.

 

12) 김용만 ․ 김준수, 2004,『지도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p.24~27.

 

13) 金元龍, 1999,『韓國考古學槪說』, 일지사, p.76~77.

 

14) 金元龍, 1998,「新石器文化: 各地方의 土器 ․ 石器 ․ 骨角器」『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p.100~160.

 

15) 愼鏞廈, 2001,「古朝鮮文明圈의 三足烏太陽 상징과 朝陽 袁台子壁畵墓의 三足烏太陽」『韓國學報』105, 一志社

 

16) 愼鏞廈, 2001,「古朝鮮 ‘아사달’ 紋樣이 새겨진 山東 大汶口文化 遺物」『韓國學報』102, 一志社

 

17)『朝鮮王朝實錄』券101「宣祖實錄」23輯 452面, “前日言於予曰: ‘貴國有茶, 何不採取?’ 使左右, 取茶來示曰: ‘此南原所産也 厥品甚好 貴邦人何不喫了?’ 予曰: ‘小邦習俗, 不喫茶矣’ 此茶採取, 賣諸遼東, 則十斤當銀一錢, 可以資生 西蕃人喜喫膏油, 一日不喫茶則死矣 中國採茶賣之, 一年得戰馬萬餘匹矣’ 予曰: ‘此非六安茶之流, 乃鵲舌茶也’ 對曰: ‘此一般也 貴國啜人參茶, 此湯也 非茶也 啜之中心煩熱, 不如啜之爽快矣 使貴國陪臣喫茶, 則心開氣擧, 而百事能做矣 仍贈予茶二包, 似是爾若喫茶, 則或可做事, 以(驚)〔警〕之之意也 此非爲茶言之, 專爲不做事而發, 設辭言之也 鄭琢曰: “此直戲侮之言也 怠慢之氣, 豈喫茶所能療也?””, 해석하자면 “그리고 지난번 나에게 ‘귀국에는 가 있는데 왜 채취하지 않는가?’ 하고는, 좌우를 시켜 를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며 ‘이것은 南原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 품질이 매우 좋다. 그런데 귀국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마시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우리 나라는 풍습이 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이 를 채취해서 遼東에 내다 판다면 10근에 1錢은 받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西蕃人들은 기름기를 즐겨 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를 채취하여 팔아서 1년에 戰馬 1만여 필씩을 사고 있다.’ 하기에, 내가 ‘이것은 六安茶의 종류가 아니고 鵲舌茶이다.’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귀국에서는 인삼차를 마시는데 이것은 湯이지 차가 아니다. 그것을 마시면 마음에 번열이 생기므로 마음이 상쾌해지는 차를 마시는 것만 못하다. 귀국의 陪臣들이 차를 마신다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솟아나서 온갖 일들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나에게 차 두 봉지를 주었는데, 이는 당신도 차를 마시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또 차를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꺼낸 말이니, 계획적으로 한 말이다.” 하자, 정탁이 아뢰기를, “이것은 단지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말일 뿐입니다. 태만스런 기운이 어떻게 차를 마신다고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하였다.”라는 의미다. 즉, 명장 양호는 조선의 차문화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난했던 셈이다.

 

18) 諸岡 存 ․ 家入一雄 著 / 金明培 譯, 1991,『朝鮮의 茶와 禪』, 保林社, p.65~66.

 

19) 陳宗懋 主編, 1992,『中國茶經』, 上海文化出版社, p.11~15.

 

20)『三國遺事』券1「紀異」第1〈古朝鮮〉,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21) 달래는 소산(小蒜), 야산(野蒜), 산산(山蒜) 등이라고도 불리며 한국(충남, 강원, 경기, 황해, 함남) · 일본 · 중국 동북부 ·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기 때문에 지역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가진 식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봤을때 그 당시 마늘이 아닌 달래를 복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원문의 글자 역시 달래를 의미하는 蒜자를 쓰고 있다.

 

22) 이성동 외 3인, 2000,「쑥(艾)의 생리활성 물질과 이용」『한국식품영양학회지』제13집 5호, 한국식품영양학회, p.493~494. 표2) 쑥의 민속적 이용와 효능과 표3) 적용 부위별 쑥의 효능을 참고하면 실로 광범위한 분야에 있어서 쑥의 활용도를 확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달인물(즙)로는 복통이나 출혈, 두통, 토사 등에 효과가 있고 차로 만들어 마시면 감기, 기침, 두통 등에 효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식물로 취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3) 박성규 ․ 박종철, 1994,「쑥의 추출물 및 coumaric acid의 항균 활성」『한국생물공학회지』제9집 5호, 한국생물공학회, p.506~511. 실제 단오날이면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잡귀를 물리치고자 한 것과 민간에서도 쑥을 다발로 묶어 대문 옆이나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쑥의 냄새가 주술적 효과의 주체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때의 쑥은 단오날 채취한 것을 특별하게 쳤는데 지금도 상당수의 약쑥을 단오때 채취한 것이 약효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24) 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1997,『조선기술발전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p.58.

 

25) 황기덕, 1997,『조선 원시 및 고대 사회의 기술발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166.

 

26) 박선희, 전게서, p.89~93. 저자는 한반도의 경우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제1기층(B.C 6000년)에서 이미 뼈바늘과 가락바퀴가 출토되었고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유적 1기층(B.C 4,500년)에서는 베실이 꿰어져 있는 뼈바늘이 출토된데 반해 중국은 장강 하류 하모도유적 제4층(B.C 5,010년)에서 繩文이 새겨진 질그릇이 발굴되었고, 섬서성 서안시 반파촌 앙소문화층의 반파유적(B.C 4,210~4,840)에서 포의 흔적이 나타난 질그릇 등이 출토된 것을 봐서 마직물 생산의 역사는 동방문화권이 더 빠르다는 견해를 내보였다.

 

27) 賈大泉 ․ 陳一石, 1988,『四川茶業史』, 巴蜀書社, p.4.

 

28) (사)한국차문화협회 수원지회(http://www.suwontea.co.kr/index.html)

 

29)『茶經』上「一之源」, “其樹如瓜蘆.”

 

30) 치우치핑 著 / 감봉건 譯, 전게서, p.222.

 

31) 이창복, 2006,『원색 대한식물도감』2, 향문사, p.195.

 

32) 이창복, 2006, 전게서, p.395.

 

33)『茶經』下「七之事」, “廣雅云 荊巴間採葉作餠 葉老者 餠成以米膏出之. 欲煮茗飮 先炙令赤色 搗末置瓷器中 以湯澆覆之 用葱薑橘子芼之. 其飮醒酒 令人不眠”

 

34)『茶經』下「六之飮」, “或用葱薑棗橘皮茱萸薄荷之等 煮之百沸 或揚令滑 或煮去沫 斯溝渠間棄水耳 而習俗不已. 於戲! 天育萬物 皆有至妙 人之所工 但獵淺易.”

 

35) 이영문, 1992,「韓半島 出土 琵琶形銅劍 形式分類 試論」『博物館紀要』7, 檀國大學校 中央博物館, p.85.

 

36) 申采浩 著 / 李萬烈 譯, 1999,『註譯 朝鮮上古史』上, 丹齊 申采浩先生 記念事業會, p.121~123. 신채호는 B.C 10세기경부터 그 후 대략 5~6백년 동안을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徐 偃王의 국가라든가, 弗離之國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국 대륙 동쪽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정치집단들이다.

 

37) 윤내현, 1992,「고조선의 국가구조」『겨레문화』6, 한국겨레문화연구원, p.67~112.

 

38) 김한규, 2005,『천하국가天下國家』, 소나무, p.433. 저자는『說文』에서 말하는 貊國을 중국도, 한국도 아닌 제3의 역사공동체로 인식하고 이 맥인이 건립한 국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곧 조선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역사를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요동지역의 역사는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포함되지 않은 독립적인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39)『後漢書』券85「東夷列傳」第75〈前言〉,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 <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按:《校補》引<柳從辰>說, 謂[持]乃[得]之 , 《博物志》《卿覽》九百四引《徐偃王志》可證, 各本注失正. 今據改.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후한서』에도 서언왕에 대한 언급이 고스란히 나와있으니 육지의 36국이 서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할 정도로 서국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40)『博物志』券7「異聞」第251〈徐偃王〉, “徐偃王志云: 徐君宮人姙而生卵. 而爲不祥 棄之水濱. 獨孤母有犬名鵠蒼 獵於水濱. 得所棄卵 … 生時正偃 故以爲名. 徐君宮中聞之 及更錄取. 長而仁智. 襲君徐國.” 해석하자면, “『서언왕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서군의 궁녀가 임신 끝에 알을 낳았다. 이를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 물가에 버리고 말았다. 한편 자식도 남편도 없는 늙은 노파가 곡창이라는 개를 기르고 있었다. 이 개가 물가에 사냥을 나갔다가 그 버려진 알을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 태어날 때 구부려 누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偃이라 이름지었다. 서나라 임금의 궁중에서 이 소문을 듣고 다시 그 아이를 찾아 데려갔다. 그 아이는 자라나 어질고 지혜로워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서나라 군주가 되었다.” 라는 의미다. 동명, 주몽설화와 상당히 흡사한 내용이며 역시 마찬가지로 활과 화살에 관련된 모티브도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41) 김상기, 1955,「東夷와 淮夷, 徐戎에 대하여(속완)」『東方學志』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p.16~18.

 

42) 申采浩 著 / 李萬烈 譯, 전게서, p.122. 저자는 불리지단군조선 본국과 연관이 깊은 인물로서 그가 단군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 동해안을 정복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두고 단군조선의 초기 건국지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후 불리지국은 제나라 환공 시절, 멸망당하고 단군조선은 중국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던 모든 고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43) 류제헌, 전게서, p.122~124.

 

44) 윤명철, 2004,『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p.24~30. 이미 절강성의 하모도유적에서 B.P 7960±100년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노가 발견되었고 산동반도의 대장산도 유적지에서는 B.C 6,600년의 것으로 보이는 선박 유물이 발견되는 등 지금으로부터 6~7,000년 전인 신석기 중기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오가는 沿岸航海가 이뤄졌을 것이며 장립미의 본산인 양자강 일대의 하마도유적을 통해봤을 때 해류의 흐름, 계절풍 등을 감안한다면 역시 양자강 일대와 한반도 서해안 사이의 해양교류 역시 가능했을 것이라 한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2. 列國時代의 茶文化

 


  단군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는 시점의 상황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하나의 계승선상에서 이해하거나1) 기자조선을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이해하여 위만조선과 연결시키는가2) 하면 단군조선 붕괴 이후 바로 열국시대가 도래했다는 식으로3) 설명했었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고찰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닐뿐더러 당시의 정치적 변동이 차문화 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기에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B.C 108년,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면서 한나라는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통치기반을 마련한다. 이로써 오랜 기간 대등한 존재로 교류하던 동방문화권과 중화문화권 사이에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B.C 112년, 한 무제노박덕 복파장군으로 삼고 양복누선장군으로 삼아 남월을 공격하게 하고 정엄과 전갑, 하유 등에게 따로 군대를 주어 남월을 공격하게 하였다4). 이렇게 5갈래 길로 쳐들어간 한나라 군대 10만은 1년여만에 남월국을 멸망시켰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는 흉노를 이미 격퇴한 뒤였다. B.C 133년부터 시작된 대흉노전(代匈奴戰)은 크게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하남지전의 경우 B.C 123년까지 근 10년간의 전투로 인해 ‘사막 이남에 흉노 선우의 거처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첫 번째 전쟁은 한나라측의 승리로 마감하였다5).

  이후 하서지전에서도 한나라는 승리하였지만 막북지전에서는 양측 모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전선은 소강상태에 이른다6). B.C 129~119년의 10여년 사이에 흉노와 한 사이에는 여섯 차례나 격전이 벌어졌으며 B.C 119년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위청과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병 10만, 치중부대 수십만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하고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한나라측의 말이 총 14만필 중 3만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확실히 막북지전은 무승부로 봐야 옳을 것이다7). 하지만 이로 인해 흉노의 인구는 15~20%가 감소하였고 경제의 근간인 가축 수천만 마리가 손실되었는가 하면 광대한 영토가 한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붕괴일로를 걷게 되었다8).


  더불어 B.C 138~115년간 23년 동안 장건(張騫)이라는 인물이 서역 경영에 착수 한나라는 북방문화권과 남방문화권에 이어 서방문화권까지 단일화된 중화문화권 안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B.C 109, 좌장군 순체와 앞서 남월국 정벌의 공을 세운 누선장군 양복 등으로 하여금 5만 7천의 병력을 주어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이미 능기선사(能騎善射)의 정예병 100만을 보유하고 있던 흉노 정벌에 수십만의 인력을 쏟아부었고 강병 100만에 사방 1만리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남월국 정벌에도 10만 이상의 병력을 쏟아부었는데 이번에 다시 위만조선 정벌에 6만에 가까운 대군을 투입시킨 셈이다.

  위만조선을 과소평가했는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투입한 한나라는 곧 쓰디쓴 패배를 당한다. 이때 한나라는 과거 남월국 정벌에 촉 출신의 죄수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역시 죄수들을 동원했었는데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갑주(甲冑)가 지급되지 않았을 뿐더러 급히 원정길에 나서느라 급조(急造)되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위만조선군은 이미 철제갑주를 보유하고 피혁(皮革)을 입은 한나라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서전(緖戰)은 위만조선의 승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배층의 내분과 붕괴로 인해 결국 위만조선은 멸망당했으며 그 자리에는 한사군(漢四郡)이라 불리는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9).


  본고에서는 단군조선과 위만조선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한 그 당시의 정치적인 변화가 당시의 차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사군 설치 이후 삼국시대가 도래하는 B.C 57년(신라의 건국시기)까지의 50여년을 열국시대라 언급하도록 하겠다. 50여년이면 극히 짧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굳이 이 시기를 분류한 이유는 구다국(句茶國)에 대한 부분 때문이다.

  구다국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뚜렷한 연구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 이는 관련 사료가 극히 소략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구다국이 대무신왕 9년(26) 겨울 12월에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써 그 왕조가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이다10). 구다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백두산 일대로 파악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연구서에서 구다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채 한 줄도 되지 않는다11).

  당시 고구려는 주변 지역에 대해 강력한 확장정책(擴張政策)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구다국이 항복하기 4년 전에 이미 고구려는 부여를 공격하여 비록 전투에서 패했지만 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으며 부여에 대해 강경책(强硬策)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부여왕의 아우는 갈사국을 세워 자립하고 부여왕의 종제가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부여는 풍지박산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12).

  그리고 얼마 뒤에 개마국을 공격하는데 이는 부여라고 하는 맹주국(孟主國)이 사라지자 고구려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13). 이때 주목할만한 사실은 대무신왕이 직접 참전하여 개마국왕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위로하였으며 약탈을 금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마국 정벌전에 있어 대무신왕이 일종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걸고 전쟁을 치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해 준다. 그렇기에 직접 그 왕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위로하는 등의 제스처(gesture)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마국이 멸망하자 곧 구다국이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고구려에 항복했다는 것으로 봐서 구다국은 대고구려(對高句麗) 정책에 있어서 개마국과 같은 노선을 걸었거나 아니면 양자 사이에서 미온적(微溫的)인 태도를 보이다가 정세에 맞춰 고구려에 항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뤄봤을 때 문헌에서 당시의 상황을 추측할만한 부분이 극히 적지만 그래도 추론해 보자면 아마 개마국이 주동(主動)이 되어 주변 집단들을 책동해서 고구려에 반(反)하는 행위를 했을 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겠다. 부여와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득(得)도 있었지만 실(失)도 컸기에 대무신왕은 재위 8년(25)을두지(乙豆智)우보(右輔)로 임명해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기는 등 재위 5년(22) 여름 3월~9년(26) 겨울 9월까지 4년 6개월 가량을 내치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던 고구려측에서 갑자기 대무신왕이 친정(親征)하여 개마국 일대를 정복한 것으로 보면 장수태왕의 한성 공함때처럼 기습에 가까운 전격전(電擊戰)이 이뤄졌던 듯 하다14). 개마국을 위시한 그 지역 정치체들이 고구려 동남부에 웅거하면서 충분히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었기에 고구려는 그 위험을 초반에 제거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마국과 구다국의 흡수 통합으로 인하여 새로 개척한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고 한 점, 얼마 뒤 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가 군사를 되물린 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와 그 일족이 의탁해온 일 등을 추정해 본다면 부여와의 전쟁 이후, 4년이 넘는 기간동안 내치에 힘쓴 고구려가 재차 확장정책을 고수하며 주변 지역으로 세를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한나라와도 충돌했고, 주변의 여러 집단이 고구려로 귀부(歸附)했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어쨌든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남부 지역의 중심지인 이 곳에 웅거하고 있던 개마국을 친히 정벌하고 그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어 고구려의 직할통치구역으로 만들었던 듯 싶다. 이는 앞서 정벌당한 행인국(荇人國), 북옥저(北沃沮) 등을 성읍으로 삼아 반독립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던 것에 비해 점령지에 대해서 보다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된다15).

  물론 이 지역이 앞서 성읍으로 편입되었던 지역들처럼 개마고원 일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보다 강력한 지방통치방식이기는 하지만 성읍통치와 같은 간접적인 통치의 형태를 빌렸을 가능성은 높다16). 하지만 필자는 왜 고구려가 이 곳에 보다 강력한 통치방식인 군현을 설치했는지 의문을 가졌으며 결국 전략적인 특성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지역의 특산품 확보라는 측면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7세기 중엽 쓰여진『한원(翰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高麗記曰. 馬多山在國北. 高麗之中. 此山最大. 卅里間. 唯通四馬. 雲霧歊蒸. 終日不霽. 其中多生人參, 自附子, 防風, 細辛. 山中有南北路. 路東有石壁. 其高數仭. 下有石室. 可[容]千人. 室中有二穴. 莫測[深]淺. 夷人長老相傳[云]. 高麗先祖朱蒙. 從夫餘至此. 初末有馬. 行至此山. 忽見群馬出穴中. 形小[疆駿]. 因號馬多山也. 子有以下原闕.17)

 


 『고려기』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산 속에 남북을 지르는 길이 있고 길 동쪽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 깊이가 깊고 그 아래에 있는 석실은 1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역 장로(長老)에게 물어보니 고구려가 아직 부여를 따를 때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게 아직 말이 없었는데 그 굴에서 말떼가 나와 마다산(馬多山)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아마도 각종 중국측 문헌이 전하고 있는 과하마(果下馬)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과 개마국(蓋馬國)의 국명을 대입해 본다면 이는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헌상 그 지역의 특산품 혹은 그 지역의 특징을 지명(地名)으로 삼는 예를 찾기가 어려운데 그나마『삼국사기』에서 그 흔적을 추적할 수가 있다. 삼국시대의 지명만 있고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지역들이 주욱 거론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이 북해통, 염지통, 동해통, 해남통, 북요통, 주통촌 등인데18) 통(通)이 들어간 지명으로 봐서 교통로상에 위치한 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구려에서는 수레가 보편적으로 쓰였고 그에 따른 도로가 발달해있었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 등에는 이런 지명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9).


  특히 염지통(鹽池通)의 경우 ‘소금 못’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염전업(鹽田業)과 관련된 지명이 아닐까 하며 북요통(北傜通)의 경우는 ‘북쪽의 노역’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특정 요역을 담당하는 집단이 거주하는 곳, 혹은 그들과 관련된 지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주통촌(酒桶村)의 경우는 ‘술통’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양주업(釀酒業)과 연관된 지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20). 더불어 후한과 고구려가 교역의 장(場)으로 삼았던 책구루(幘溝鷺)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겠다21).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며 관련 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깊게 살펴볼 수는 없다.

  덧붙여 캉글리 부족22)의 경우는 다른 부족과 달리 수레를 잘 활용할 줄 알아서 그 명칭이 붙었는데 문헌상의 고차(高車)가 이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즉, 캉글리 부족은 다른 부족이 없는 수레가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며 이 역시 그 집단이 갖고 있는 특징이 지명화된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특징은 키야트 부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프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뜻하는 ‘키얀’에 살고 있었고 차츰 그 산과 숲 사이에 살 곳이 줄어들자 이를 타개할 방책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을 찾아냈는데 마침 거기서 철광(鐵鑛)을 발견했고 항상 거기서 쇠를 녹였다고 한다. 이처럼 키얀에 속하는 부족과 네쿠즈, 우량카트라고 불리는 몇몇 몽골 부족들 풀무를 불며 철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으며23) 여기서 키야트는 거주지역의 환경이 지명화된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그 지역의 위치, 자연환경의 특징, 그 지역의 산업 등과 연관되어 지명화된 사례를 몇몇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봤을 때 필자는 말이 많이 산출되었기 때문에 ‘말이 (대지를) 뒤덮은 나라’라는 의미로서 그 국명이 개마국(蓋馬國)이 되었다는 추정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24). 그리고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파(攻破)한 이후, 동북방의 말산지였던 그 지역을 강력하게 통치하기 위해 군현을 설치해 어느 정도 직할통치를 실시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다국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구다국은 국명에 차(茶)라는 명칭이 들어간 한국사상 최초의 지명이자 국명이다. 그렇게 봤을 때 앞서 살펴본 바대로 전형적인 중생대 화강암 지대인 백두산 일대에서 백산차류의 차가 음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물론 차와 연관된 지명이라 하여 반드시 차를 생산했을 것이라 연관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몇가지 가능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는 기본적으로 구다국에서 차가 생산되었을 가능성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백산차류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차대용 식물이 백두산 일대에서 살아왔음을 앞서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백산차류의 차는 약용으로도 쓰였지만 약차(藥茶), 즉 기호품(嗜好品)으로서 음용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북방문화권이나 티베트25) 등지로 차가 전파된 시기를 당대로 보고 있으며 실제 8세기 무렵은 중화문화권 바깥쪽으로 차가 전파될 정도로 내적으로 차 산업이 크게 발전해있는 상태였다26). 그에 따라 북방문화권에서 자신들의 특산품인 말(馬)을 주는 대신, 차를 사가는 식의 차마교역(茶馬交易)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대 차마교역이 이뤄지기 이전의 북방문화권에서의 음다 풍속에 대해서는 추정할 수 있는 방도는 현재 없다.


  다만 명나라 장군 양호가 말한 바 있듯이 서방문화권 혹은 북방문화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을 즐겨 먹는데다가 거친 자연환경으로 인해 를 늘 마셔야만 한다고 했는데 8세기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화문화권과 차마교역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비상식적인 논지 전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차나무를 활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약초나 식물이든지 그것을 제조하여 차를 마시는 음다의 풍속은 이른 시기부터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며 구다국 역시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차대용 식물을 갖고 차를 생산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동방문화권에서 차가 날만한 지역으로는 한반도 남부 지리산 일대를 아우르는 삼림지대와 함께 백두대간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울창한 삼림지대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다국에 음다의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을 가능성이다. 만약 구다국에서만 독특하게 차를 마시는 풍속이 있었고 주변의 다른 열국들은 그런 문화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히 구다국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석기시대 때부터 주변에서 나는 다양한 식물들을 활용했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있는데 식물을 이용한 의약학(醫藥學) 분야의 발전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겠다. 고로 이미 상고시대 때부터 음다의 풍속은 있었으며 구다국에서만 음다의 풍속이 독특하게 남아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셋째는 구다국에서 차 관련 교역을 대행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붙어졌을 가능성이다. 단, 이는 구다국이 자생된 차가 아니라 타 지역의 차를 교역했을 경우에만 해당하는 경우이다. 실크로드(Silk-read)에서처럼 일종의 교통로를 따라 교역되는 대표 상품을 갖고 상로(商路)의 명칭을 붙이는 것처럼 구다국에서도 타지에서 생산된 차를 교역하는 임무를 담당했기에 그러한 명칭이 붙었을 가능성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봤을 때 먼저 구다국 이외의 타지역에서 차를 생산할만한 지역을 찾아봐야 하는데 현재까지도 는 한반도 남부에서만 자생하고 있다.『삼국사기』를 보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대렴의 경우와 화왕가(花王歌)를 부른 설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차(茶) 혹은 다(茶)라는 글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삼국유사』역시 불교와 관련된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삼국사기』의 경우에도 차 재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문헌상으로 고대의 차재배지를 추정할만한 자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한대(北限帶)에 대해서는 평안도 남부에서도 야생차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믿을만한 것이 못 되며27) 북 익산군 웅포면 봉화산 남서쪽 계곡의 임해사터 200여평 정도 되는 야생차 나무를 거론할 수 있다 하겠다28). 


  문헌상 확인 가능한 것으로는「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경상도 6개소, 전라도 28개소가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전 재배지가 통폐합을 겪은 뒤인 경상도 10개소와 전라도 35개소가 있다29). 즉, 아무리 온난다습한 기후가 찾아온 시기라 하더라도 고대 동방문화권 북부에서 차나무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면 차가 아닌 차대용 식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문화권과 차 교역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 시기는 서한 말기에 해당하는데 앞에서 살펴봤듯이 서한 시기에 이미 중화문화권에서는 차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음다의 풍속도 자리잡고 있었다. 사마상여마왕퇴 목간의 경우 분명히 차는 약초로서 인식되어 중요하게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고, 왕포의 경우에서 차를 파는 시장이 있었고 차를 정기적으로 마시는 소비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서한 시대에 적어도 국내적으로는 차가 상품화되어 유통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한대에 이미 실크로드를 따라 동 ․ 서양 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진행됐음에도 차에 대한 언급은 보이질 않고 있다. 현 학계에서 가장 많은 실크로드 관련 자료들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수일『씰크로드학』30)에서도 차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 또한 14세기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저작인『동방견문록』31)에서도 역시 차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미 당-송대를 거쳐 차문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당시 상황을 살펴봤을 때 이는 분명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아마도 차가 그저 식생활 중의 하나로 비단이나 도자기처럼 주목받지 못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차의 저장가공의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한번에 서양까지 가져갈 수 없었거나 또는 그 당시 동서 교통로를 왕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이름없는 일반인들이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32).

  이와 같은 시점에서 과연 동방문화권에서 사천성 일대의 차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을 교역의 대상품으로 삼았을지는 의문이다. 교역이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있어야 이뤄지는 것인데 구다국에서 전한과 차를 교역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설령 차 교역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음다의 풍속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또한 차라는 것에 익숙한 상태라는 의미가 될 텐데 그렇게 본다면 구다국에서 차를 생산했고 음다의 역사가 오래 됐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구다국에서 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백두산 일대에서 차대용 식물로 만든 차가 특산품으로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던 것이 이후 열국시대 도래와 함께 구다국이 어느 시점에 국가로서 자립하게 되면서 차산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구다국에서 생산된 는 개마국의과 함께 고구려의 특산품 중 하나로 취급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열국시대, 부여의 경우만 보더라도 북방문화권과 활발한 교역으로 인해 유목국가의 특징이 많이 확인되며 일찍부터 위만조선 혹은 한나라와 교역해왔던 점을 상기했을 때 부여에서도 음다의 풍속은 전해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동북 연해주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주하고 있던 읍루(挹婁)와 같은 집단들 역시 음다와 관련된 차문화가 있었을 것이며 이는 한반도 남부라고 해서 큰 차이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차이라면 한반도 남부에는 구다국의 차대용 상품뿐만 아니라 실제 차나무로 만든 차 상품이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고로 필자는 구다국의 국명이 차산업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등장한 명칭이며 이는 구다국 이전부터 그 지역에서 차 생산이 지속적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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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영수, 1997,「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古朝鮮과 夫餘의 諸問題』, 신서원.

 

2) 윤내현, 1999,『고조선 연구』, 일지사

 

3) 李景植, 2005,『韓國 古代 ․ 中世時期 土地製圖士』, 서울대학교출판부, p.54.

 

4)『史記』券113「南越列傳」第53, “元鼎五年秋,衛尉路博徳為伏波將軍,出桂陽,下匯水;主爵都尉楊僕為樓船將軍,出予章,下橫浦;故帰義越侯二人為戈船、下厲將軍,出零陵,或下離水,或柢蒼梧;使馳義侯因巴蜀罪人,発夜郎兵,下牂柯江:鹹會番禺.”

 

5)『漢書』券94「匈奴傳」第64, “是後匈奴遠遁, 而漠南無王庭..”

 

6) 박원길, 2003,『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민속원, p.21~22.

 

7)『史記』,券111,「衛將軍驃騎列傳」第51,“元狩四年春,上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將各五萬騎,歩兵転者踵軍數十萬,而敢力戦深入之士皆屬驃騎. … 両軍之出塞,塞閲官及私馬凡十四萬匹,而複入塞者不満三萬匹.”

 

8) 정수일, 2001, 전게서, p.262~263.

 

9) 김성남, 2005,『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p.31~34.

 

10)『三國史記』券14「高句麗本紀」第2〈大武神王〉,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禁}虜掠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11) 金賢淑, 2005,『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p.103~104.

      여호규, 2005,「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한국고대사연구』38, 한국고대사학회, p.75~76.

    김현숙은 개마국과 구다국의 위치를 두고 백두산 일대로 보는 설과 낭림산맥 일대로 보는 설 중에서 후자쪽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병합함으로써 동옥저의 서쪽 방면에 하나의 전진기지를 마련하여 이를 기반으로 동옥저와 낙랑국을 압박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규는 후한의 소극적인 동방정책과 맞물려 동해안 방면이 힘의 공백지가 되었으며 이틈을 타 한과의 정치적인 관계 개선, 도성 주변의 방어체계 확보, 동옥저 진출 등의 이유로 국내성 천도가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집안의 국내성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정책이 실시되었을 것이며 개마국과 구다국의 위치는 고구려와 동옥저 사이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로 낭림산맥에 개마국과 구다국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이는 동옥저의 서쪽 방면으로서 동옥저 지배의 전진기지라기보다는 낙랑국을 동쪽 방면에서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이해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낭림산맥에서 개마고원에 이르는 고원지대보다는 백두산 주변의 허천강 혹은 두만강 일대에 개마국과 구다국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며 국내성에서의 공격 루트상 백두산 일대를 거쳐 동옥저를 복속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12)『三國史記』券14「高句麗本紀」第2〈大武神王〉, “五年,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淥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13)『魏書』券100「列傳」第88〈高句麗傳〉,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위서』는 막래, 즉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하여 이를 대패시키자 부여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어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는 부여와의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부여를 대신하여 覇權을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14) 서영일, 2002,「경기북부지역 고구려 보루 고찰」『문화사학』17, 한국문화사학회.

      최장열, 2002,「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한국사론』4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그는 고구려 보루에서 출토되는 장동호류가 5세기 후반~6세기에 걸친 것으로 고구려 보루의 축조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소급하려는 최장열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5세기 유물은 소수일 뿐더러 토기의 상대편년이 사용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점, 또한 발굴조사시 토층을 통해 검증된 것이 아니므로 그 유물을 유적의 축조시기와 일치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축조시기를 장수태왕이 전격전으로 백제 한성을 공함한 이후인 6세기 이후로 파악하고 있다.

 

15) 琴京淑, 2004,『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員, p.135~143.

 

16) 李鍾旭, 1982,「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歷史學報』94 ․ 95, 歷史學會, p.127. 그는 이 기록에 의문을 갖고 앞서와 같이 성읍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라 주장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양자를 동일한 단어로 표기하지 않은 것에 의문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든 양자는 통치력의 강도나 제도면에서 차이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17)『翰苑』「蕃夷」〈高句麗傳〉

 

18)『三國史記』券37「雜志」第6〈地理〉4, “三國有名未詳地分. … <北海通>.<鹽池通>.<東海通>.<海南通>.<北傜通> … <酒桶村>.”

 

19) 김진광, 2004,「발해 건국초기의 강역」『선사와 고대』21, 한국고대학회, p.16. 그는 이들 지명을 신라의 교통로로 이해하고 있으며 특히 북해통은 경주에서 고성에 이르는 노선으로서 책성부에서 정천군까지 이르고 난 후 그 곳의 관문인 탄항관문을 지나면 곧 渤海의 新羅道와 연결된다고 적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북해통이라는 명칭은 신라가 발해를 北國 등으로 불렀던 전례로 봤을 때 특정 국가를 지명으로 삼은 역시 특수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20) 김용만, 전게서, p.129.

 

21)『三國志』券30「烏丸鮮卑東夷傳」第30〈高句麗傳〉,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해석하자면, “한나라때 북치고 피리 부는 재주꾼을 주었다. 그들은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머리에 쓰는 책을 받아갔고 그에 따른 문서는 고구려가 하도록 하였다. 후에 조금씩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 뵙지 않았다. 그 동쪽 경계에 조그만 성을 쌓고 조복과 책을 그 곳에 두면 해마다 와서 이를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호족(고구려인을 지칭한 듯)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고 한다. 구루란 고구려말로 성이다.” 인데 여기에서 책구루의 구루가 성이라고 하면, 책구루는 다른 말로 幘城이라고도 부를 수가 있다. 즉, 그들이 교역하던 교역품 중 대표적인 물품이었던 幘이 그대로 지명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22) Rashîd ad-Dîn 著 / 김호동 譯, 2002,『부족지』, 사계절, p.110. “캉글리(Qangqli)는 다른 사람들이 노략물과 약탈물을 가축 위에 싣고 있을때 이 종족은 자기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여 수레를 만들어서 자기네 노략물과 약탈물과 재물을 그 위에 실었다. 이런 연유로 그 종족에게 캉글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캉글리인의 모든 지파는 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알라께서 가장 잘 아신다!”라고 하여 캉글리 부족의 명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3) Rashîd ad-Dîn 著 / 김호동 譯, 전게서, p.253~255. 키야트는 숲에서 장작과 석탄을 엄청나게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거기서 껍질을 모두 벗겨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쇠가 거기서 끝도 없이 흘러나왔고 길이 생겼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 협곡을 벗어나 초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계보가 칭기즈칸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그 산과 쇠를 녹인 것과 대장장이의 일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고로 새해를 맞는 첫날 밤(섣달 그믐밤)이 되면 칭기즈칸 일족의 관습과 의례는 대장장이의 풀무와 화로와 석탄을 준비하고 얼마간의 쇠를 달군 뒤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때려서 길게 늘이고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元史』券72~75,「志」제23~27下에도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황실일족들만 행했던 비밀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24) 金赫濟, 1991,『明文 新玉篇』, 明文堂. 마찬가지로 句茶國 경우도 그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겠다. 句는 일반적으로 글귀, 구절, 굽다, 막다, 세다, 당기다, 꼬이다 등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땅이름’ 혹은 ‘담당하다’, ‘맡아보다’ 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굳이 구다국도 개마국처럼 해석한다면 ‘차가 지명이 된 나라’ ‘차를 담당하는 나라’ ‘차를 맡아보는 나라’ 라는 식으로 볼 수 있다 하겠다. 즉, 구다국이 동방문화권에서 거의 유일한 차 생산 ․ 유통을 담당하던 나라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25) 김대성, 2006, 전게서, p.280~284. 티베트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채소류를 제대로 섭취할 수 없는 데다가 살인적인 건조 기후와 격심한 일교차 때문에 기름진 마실거리를 마셔주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야크의 젖으로 만든 버터를 빚어 넣고 그 위에 끓는 차를 붓고 소금과 입맛에 맞는 향료를 또 넣어 마시는 수유차(Tibetan butter tea)를 늘 마시는 것이다. 이 수유차는 642년 唐朝 文成公主가 티베트의 王 송쓰엔감포[松贊干布]에게 시집와 손님들에게 대접한 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봤을 때 그 이전에 티베트인들이 어떤 음료를 마시고 지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26)『封氏聞見記』券6「飮茶」, “古人亦飮茶耳 但不如今人溺之甚. 窮日盡夜 殆成風俗 始自中地 流於塞外. 往年回鶻入朝 大駏名馬 市茶而歸” 해석하자면 “옛날 사람들도 를 마셨지만 지금(唐代) 사람들처럼 탐닉이 심하지는 않았다. 밤낮으로 온통 음차가 풍속으로 자리잡았고 중국 내지에서 시작해서 새외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다. 지난해 회골이 입조하였는데 명마를 대거 몰고 와 차를 사가지고 돌아갔다.”라는 의미이다. 당대의 번영했던 차문화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27) 露國大藏省 編, 1905,『韓國誌』, 日本 農商務省, p.19, 228, 235.

 

28) 李炳石, 1985,「우리 나라 茶 나무 분포지」『茶와 茶道敎育』, 한국교육가족산우회, p.33.

 

29) 金明培, 1999,『茶道學論考』, 大光文化史, p.86.

 

30) 정수일, 2005, 전게서.

 

31) Marco Polo 著 / 김호동 譯, 2000,『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32) 橋本 實 著 / 朴龍求 譯, 전게서, p.128~129. 그는 낙양, 장안에서 돈황, 카쉬가르, 사마르칸트, 테헤란을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이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교통로로 발전했으며 중국에서는 그 길을 사다지로(絲茶之路: scharu), 즉 비단과 차의 길이라고 불렀는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독일의 지리학자 Richthofen이나 영국의 고고학자 Stein 등이 이 무역로를 조사한 후 출판한 보고서에서 사주지로(絲綢之路: steru), 즉 비단과 명주의 길로 표현하면서 차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차의 명칭 계통을 근거로 비단길과 마찬가지로 육로와 수로로 이뤄진 차의 길도 존재했을 것이라 말한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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