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5

2018. 11. 26. 19:59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5| 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조회 44|추천 0|2006.11.03. 00:46




3. 三國時代의 茶文化

 

  삼국시대가 되면 동방문화권에서는 이전 시기에 등장하던 열국들이 서로 난립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타국보다 빠르게 성장한 몇몇 정치체로 통합하는 과정이 확인된다.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러한데 B.C 57년 신라가, B.C 37년 고구려가, B.C 18년에 백제가 건국함으로써 본격적인 삼국 정립기가 시작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동방문화권은 오래전부터 차문화가 전해져온 곳이었으며 이런 차문화는 중화문화권이나 남방문화권의 차문화와는 다른 계통의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삼국이 난립하게 되면서 중국에서도 차가 점점 보편화되고 화북 일대까지 차문화가 전파되기 때문에 삼국시대 차문화 독자적인 차문화 이외에도 본격적인 외래 차문화가 전래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 고구려, 백제, 신라중화문화권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그 사이 차문화 또한 지속적인 교류를 했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며 이후 본고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중화문화권과의 교류 속에서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한 맥락을 짚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현재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관련문헌이 너무 소략하며 또한 차와 관련된 고고학적 근거가 빈약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처럼 문헌 기록에 치중한 일관된 접근방법으로는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고로 각각 그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할 생각이다. 일단, 고구려의 경우는 유일하게 차와 관련된 실물자료가 발견되었으며 또한 고분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는데다가 앞서 살펴본 백두산 일대의 차산지와 구다국의 사례를 통해 일찍부터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더불어 고려인삼의 재배, 의약학의 발전 등 당시 시대상황을 통해 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백제의 경우오늘날 차산지가 가장 많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와 관련된 문헌이나 실물 자료가 전무하다. 고로 백제는 중화문화권, 특히 장강 이남 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 각국과 폭넓게 교류했음을 근거로 차문화 교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으며 그 근거로 고구려, 신라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출토되고 있는 중국자기(中國磁器)를 살펴보고자 한다. 차문화와 함께 도자문화(陶瓷文化)가 발전했음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백제 차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신라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알아볼 생각이며 추가적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자생했을 차문화에 대해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각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고찰한 다음에는 불교 ․ 도교의 전래 등 외래 종교의 전래와 함께 그와 수반된 사상적 기반에 대해 알아보고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삼국시대의 차문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1) 高句麗의 茶文化

 

  차와 관련된 실물자료가 발견된 예는 고구려의 경우가 유일한데 일본 학자 아오끼[靑木正兒]‘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나왔다는 작고 얇은 떡차를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지름 4㎝ 남짓의 엽전 모양이며 무게는 닷 푼 가량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1). 병차(餠茶) 형태의 고구려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어떤 무덤에서 나왔는지 알 길이 없으니 연대편년이 불가능한 상태2).

  다만, 아오끼의 생존연대1887~1964년이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그 시기, 발굴된 고구려 고분들을 살펴보면 뭔가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싶다. 1936년, 고구려 쌍영총에 대해『동아일보』에 쓴 고유섭의 글을 보면 그 당시까지 발굴된 고분은 총 9기에 불과했다3). 그 후 2년 뒤인 1938년에 집안 지역을 답사했을 때에는 양실총, 열좌제액총, 용호상박총 등이 추가로 발굴된 상태였다.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1907~1945년을 1기로 정하여 일본에 의해 고분벽화가 연구된 때로 정의하고 2기를 1946~1961년까지로 하여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북한에 의해 고분벽화 연구가 진행된 때로 정의하였다. 그렇게 봤을 때 아오끼가 전차(錢茶)4)를 얻었을 고분은 10여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제 1기에는 일본 학자의 저서가 5권, 논문이 48편이었던 것에 반해 2기에는 논문만 3편이 나왔을 뿐이다5).

  또한 최근 고구려 왕릉으로 지목받은 13기의 적석총은 모두 그 연대가 5세기 중반을 넘지 않은 것들로서6) 역시 여기에서도 전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게 봤을 때 나머지 고분들 중 하나에서 전차가 출토되었을텐데 그 시대가 언제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일제강점기때 조사된 고분이 상당수 있는데 그 중에는 왕릉도 있을테고 귀족의 무덤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전차를 부장품으로 넣었을 고분은 과연 어느 고분이었을까, 하는 부분을 고심해봐야 하겠다.


  중국의 경우 B.C 2~1세기 마왕퇴에서 이미 차에 대해 기록한 실물자료가 나왔는데 중요한 것은 B.C 160년으로 추정되는 1호묘 목간무덤의 부장품을 기록한 목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차 상자가 적혀 있었다. 실물은 썩어 없어졌겠지만 당시 가 부장품으로 묻혔다는 근거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왕퇴는 왕릉이 아니라 지방 권력층의 무덤이다. 당시 차문화가 중화문화권에서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가 아니라는 점과 마왕퇴가 위치한 장강 하류 일대에서도 당시까지는 차문화가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차가 당시 귀중품으로서 취급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그렇게 봤을 때 아오끼 집안이든, 평양이든 고분에서 난 고구려 전차의 표본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 전차는 귀중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단, 이때 살펴볼 부분은 과연 그 전차중화문화권에서 가져왔는가, 아니면 백두산 일대에서 생산된 차대용 상품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그 전차가 독자적인 우리차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전차라고 하는 것이 사라졌었고7), 그나마 전차가 존재했을 무렵에도다의 풍속이 우리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8)


  실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음다 풍속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이 없지만은 않다9). 우선, 각저총을 보면 묘주도(墓主圖)에서 부부가 앉아있고 그 뒤의 탁자 위로 여러 그릇들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남편으로 추정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여인은 그의 두 부인으로 생각되는 이 그림에서 특이하게도 똑같은 그릇 3개가 놓여있는 탁자가 각각 부인들 앞에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남편의 뒤에는 주전자가 놓여있는 탁자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부인들이 앉아있는 반대편에도 한 사람이 앉아있고 그 앞에 지워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놓여져있던 탁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게 봤을 때 부인들 앞에만 일정한 크기의 그릇 3개가 놓여있는 탁자가 있다는 것은 남편 주도하에 어떤 음식을 먹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게다가 그 주변으로는 4명의 시종이 서 있는데 두 부인쪽 장방 바깥의 시녀는 소반을 들고 있어 무엇인가 작은 음식 종류를 나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 수저가 보이지 않는 점, 3명 중 남편의 앞에 탁자가 없는 점, 식사를 하는 식탁 치고 너무 작은데다가 남편의 옆에는 주전자가 놓인 탁자가 있는 점 등으로 미뤄봤을 때 필자는 이것이 남편이 부인들에게 를 주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즉, 이 벽화가 당시 고구려의 음다 풍속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또한 안악 3호분묘주도 중에서도 부인을 그린 부분을 보면 부인 옆에 향로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시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두고 향로라고 파악할 소지도 있지만11) 뚜껑이 덮인 그릇으로도 볼 수 있다 하겠다12). 처음에는 시녀가 그 그릇에 받침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안에 들은 열(熱) 때문이라고 여겨 뜨거운 액체가 들어있을 가능성을 상정해봤지만 산동성 비성(肥城)에서 출토된 것으로 518년 손보희가 만든 삼존불좌의 기단에 새겨진 향로를 보면 이 역시 향로 바닥에 커다란 받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꼭 향로 바닥에 받침이 없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하겠다13).

  하지만 고구려 향로 실물자료가 확인되지 않은 이상, 안악 3호분의 그릇을 두고 향로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크다 하겠다14). 또한 안악 3호분은 생활풍속도가 잘 남아있어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를 통해 고구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방과 육고, 차고, 방앗간과 우물을 묘사해놓은 것들인데 이 장면들이 일련의 상관성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벽화라고 가정했을 때,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또 하나의 벽화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15).

  주영하 안악 3호분의 부엌을 묘사한 그림을 두고 마치 떡을 고이는 장면이라고 적으면서 이는 오늘날의 시루떡과 같다고 말한다16). 그렇지만 떡이라는 고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긴 막대기로 시루 안을 휘젓고 국물을 뜨는데 적합한 국자로 무언가를 뜨려고 한다고는 생각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보다는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한데 벽화 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옆의 방앗간을 묘사한 곳에서는 두 여인이 무언가를 방아로 빻고 있고, 그 옆에서 우물물을 길러내는 것을 본다면 어떤 곡물을 빻아서 물을 붓고 끓여내고 있다는 추정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게 가공한 것이 죽이든, 떡이든, 차이든지 간에 당시의 곡물 가공 방법을 살펴봤을 때17) 떡차, 즉 병차(餠茶) 형태의 차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고로,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가지 부분에서 어느 것 하나 고구려의 차문화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은 ‘차’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않은 채,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 언급이 없었지만 글이 아닌 그림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해야만 하는 현시점에서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의 식음료 문화는 중요한 연구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18).

  하지만 고구려와 중화문화권 사이에서 를 매개로 교역을 했다는 자료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에서는 중화문화권의 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차가 교역이 되었어도 그것이 다른 귀중품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전차는 그 시대가 언제로 편년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문화적 교류 상황과 고구려 내의 음식문화 등을 통해 살펴봤을 때 적어도 중화문화권에서 유입된 전차일 가능성보다는 자체적으로 생산한 전차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고구려의 의약학 혹은 연금술(鍊金術) 수준이 뛰어나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기록된 365종의 약초 중 11종이 고구려에서 난 의약재이며 이 중 인삼과 함께 고구려의 금(金)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구려는 특히 금을 잘 제련하여 능히 복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인삼과 뛰어난 침술과 함께 고구려의 의약학, 연금술 수준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19). 즉, 당대 고구려의 의약학 수준을 봤을 때 고구려에서 차대용 식물의 효능을 알고 약차로 마셨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대 중화문화권에서 차에 대해 체계적인 음다 풍속이 성립되지 않았었고 또한 화북 지방에서는 차문화가 거의 보급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고구려가 장강 상류에서 나는 차나무에서 만든 차를 입수해 그 특징을 알아내어 약용(藥用)하였다 하더라도 중화문화권에서는 오히려 그 수준을 못 따라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약재에서는 이런 현상이 실제 일어났으니 바로 인삼(人蔘)이 그 주인공이다.

  예로부터 영약으로 취급받았던 인삼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및 북미 대륙에서도 자라고 있다. 그 중에서 고려인삼은 PanaX ginseng Mey, 중국 전칠삼(田七蔘)은 Panax notoginseng F.H. Chen, 일본 죽절삼(竹節蔘)은 Panax japonicus C.A. Meyer, 북미삼은 Panax quinquefolius L 등으로 명명되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인삼(ginseng)이라는 학명이 붙은 것은 오직 고려인삼 뿐이다. 이는 그만큼 고려인삼만이 진짜 인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효능 또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20).


  인삼의 우리 고유어는 원래 ‘심’이다. 심마니들 ‘심 봤다.’라고 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본래 삼(參)을 썼는데 수대 육법언(陸法言)이 저술한『광운(廣韻)』에 처음 삼(蔘)이라고 기록되면서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도 모두 그렇게 따라 쓰게 되었다. 이렇듯 중국측 문헌에 인삼에 대한 기록이 일찍부터 등장한다 하여 인삼의 기원지가 중국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중국에서 인삼의 자생지로 기록하고 있는 중국 산서성 태행산맥의 상당지방기후와 지질학적으로 인삼의 자생지로는 많은 논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21). 하물며 오늘날에도 고려인삼의 효능이 세계 제일인데 그런 한반도가 인삼 기원지로 거론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이다22).

  앞서 언급한 중국의 상담삼천당삼(川黨蔘)이라고 하는데 인삼이 아닌 만삼(墁蔘)으로서 만삼은 도라지과 초롱꽃과의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뿌리가 인삼과 비슷하고 줄기는 넝쿨져서 이를 만삼이라 하는데 말초혈관을 확장하고 혈압을 낮쳐주며 적혈구를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23).

  애초에 중국인들은 만삼을 진짜 인삼인 줄 알고 사용했기 때문에 고려인삼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았던 듯 싶다. 6세기 초엽, 양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교정한『신농본초경』에도 상당삼을 최고로 치고, 그 다음으로 백제, 고구려 것을 언급하였으니 남북조 시기 중국인들의 인삼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4).


  하지만 점차 고려인삼에 대해 인지를 하게 되었는지 도홍경보다 조금 늦은 시기 양나라의 소자현(蕭子顯)이 쓴『南濟書』에는 고구려의 인삼이 특산품으로서 언급되고 있으며25) 7세기 중엽, 당나라 장초금(張楚金)이 쓴『翰苑』에는 고구려의 인삼마다산, 즉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특산품이라고 하면서 그 출산지(出産地)까지 거론되고 있다26). 그만큼 1세기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중국인들의, 고려인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는 반증이 되겠다27).

  실제『다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28) 다만 다른 점이라면 백제 인삼과 함께 신라 인삼이 추가적으로 중품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여전히 고구려 인삼은 최하품으로 취급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8세기 중엽에 편찬된『다경』에서 이러한 언급이 나왔다는 것은 당대 중국인들이 이미 고려인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의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20세기 초 김육불이 저술한『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도 역시 상당삼이 거론되고 있으니29) 이는 중국인들이 의도적으로 상담삼인삼으로 기록하면서 고려인삼의 기원이 상당삼인 것처럼 왜곡하려는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7세기 무렵까지 인삼에 대해서 무지했고 이후로도 상당삼에 미련을 버리지 못 했던 중화문화권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차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대『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책을 보면 고구려인 손님침(針)을 잘 사용하여 한 치의 머리털을 갈라 10가닥으로 만들고는 그 곳에 보이는 빈틈까지 찌를 정도로 기술이 절묘했다고 하여 그 의술이 뛰어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의술은 백제에 귀화했다가 후에 왜국에 파견되어 백제 의술을 전해준 덕래(德來)왜왕의 주치의가 된 고구려의 모치(毛治)의 경우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의술이 손꼽혔음을 알려준다30).

  이처럼 침술에 있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고구려 의술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삼과 을 이용한 연금술에도 뛰어났는데 이러한 고구려의 의술을 전수받은 백제약재의 분량과 약을 달이고 복용하는 방법 등의 의료지식과 경험을 정리하여『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이라는 의약서를 만들었고31) 신라 또한『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이라는 의약서를 만들었는데 신라가 백제 혹은 고구려의 보호국(保護國)으로 존속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구려 의학의 영향을 받아서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구려에서도 이와 같은 의약서가 있었을 테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 추정만 하는 실정이다32).

  이처럼 뛰어난 의약학의 수준을 보면 만삼이나 오가피과의 자삼(紫蔘)인삼으로 알고 오용(誤用)하던 중화문화권에 비해 고구려를 비롯한 동방문화권에서 오히려 차에 대해 인지하고 음용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하겠다. 실제 고구려에서는 이미 전차를 만들어서 고분에 부장할만큼 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이는 곧 구다국의 구토(舊土)에서 생산되는 각종 차대용 식물로 만든 차상품이 고구려 내지에서 유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거론해볼 수 있는 것이 장강 일대의 차를 수입해서 고구려 자체적으로 생산했을 가능성이다. 이미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물들에 대한 차 생산이 열국시대때부터 이뤄졌었고 그러한 노하우를 고구려가 고스란히 전수(傳受)받았다고 한다면, 당대 고구려에서 외래 차종 생산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물며 인삼을 비롯한 각종 약재 활용과 인지에 있어 중화문화권을 앞서는 의약학 수준을 보여줬던 고구려였던만큼 이미 B.C 1세기대에 성의학 관련 약재로서 중화문화권에서 차가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비롯한, 차의 약학적 효능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 때 과연 고구려 경내(境內)에서, 장강 하류에서 주로 자라는 차가 자랄만한 지역이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일단 최고의 영약으로 꼽히는 고려인삼이 자라는 백두산 일대에 주목했다. 인삼은 일반작물과 달리 그 생육에 비교적 낮은 광도의 빛만을 필요로 하는 반음지성(半陰地性) 식물이어서 오히려 높은 광도에서는 잎의 광합성이 저해되고 엽록소가 감소되며 심하면 잎 조직이 파괴되어 엽소현상(葉燒現狀)이 나타나기까지 한다.

  현재 고려인삼의 재배는 북위 34°의 한반도 남단에서 북위 48°의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인삼재배지 중에 가장 위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 만주 집안현의 연평균 기온은 4.7℃이며 연중 최저 기온을 나타내는 1월의 평균기온은 -25.7℃에 달한다. 그렇지만 인삼의 생육기인 5~8월의 평균기온인 21.0℃로서 인삼 재배지 중 가장 따뜻한 금산(22.6℃)와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고려인삼은 남과 북의 기온차가 심한 지역상에서도 큰 차이 없이 생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삼은 가을 경엽이 고사하는 시기부터 이듬해 봄에 다시 출아 전엽하는 기간 동안은 지하경과 뿌리는 물질의 축적은 전혀 없어 뿌리의 저장 양분만으로 호흡한다. 따라서 이 기간 중에 지온(地溫)이 높으면 호흡이 증가되어 저장양분의 소모가 많아지므로 기온이 높은 남부보다는 기온이 낮은 북부지방이, 기온의 교차가 적은 해안보다는 기온의 일교차가 큰 내륙지방이나 지대가 높고 찬 고랭지(高冷地)가 인삼 재배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인삼의 뿌리 및 뇌두는 극히 내한성이 강하여 -40℃의 기온에서도 동해(凍害)를 받지 않는다.

  한편 강우량은 기타 생장환경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인삼 재배에 있어 결정적인 제한적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 밖에 토양 역시 재배지마다 다른데 인삼재배지로서의 최적지세는 대개 북향 내지 북동향이며 경사도 15° 이내의 완경사지로서 전면이 넓게 트인 곳이거나 배수가 잘 되는 평탄지이다. 남향 경사지의 경우 해가림 내에 직사일광이 많이 들어오게 되며 가뭄을 타기가 쉽고 서향 경사지는 여름철의 오후 석양의 뜨거운 광선을 많이 받게 되므로 인삼포의 온도가 높아지게 되어 아주 좋지 않다. 더불어 인삼은 삼림 중의 낙엽이 쌓여서 썩은 산성의 부식토양에서 자생하는 식물로서 산성 토양에서도 잘 자라 pH 4.5~5.8 범위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

  그리고 양자를 비교해보면 차와 인삼의 생육환경연평균기온과 연강우량, 토양의 산성도, 토양내 포함된 각종 유기질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토양 역시 화산회토 혹은 화강암을 모암으로 하는 토양 등지에서 차가 잘 자라는 것처럼 인삼 역시 현무암을 주로 하는 화산회토에서 잘 자라고 있다. 특히 운모편암의 경우 점질을 띠면서도 그 안에 모래와 자갈이 포함되어 있어 배수가 양호하고 통기성이 높으며 보수력이 좋아 인삼과 차 재배에 모두 적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최적재배지의 지세인데 차는 남향, 인삼은 북향이라는 것만 다르다 할 수 있다. 


  이처럼 간단하게 알아본 차와 인삼의 생육환경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33).

 

표 1) 茶와 人蔘의 生育環境 비교

 

茶의 生育環境

人蔘의 生育環境

연평균기온

13~18℃

11~14℃

적정햇빛량

0.5~0.6cal/㎤

10~15klux

연강우량

1,500㎜ 이상(최처 1,300㎜)

1,200~1,300㎜

적정산성도

pH 4.5~5.5

pH 4.5~5.8

차재배 북한한계

42~43°

48°

차재배 남한한계

23° 27′

34°

토양

화강암 마사토 혹은 화산회토

현무암을 모암으로 하는 식양토

토양내 인산

70~200ppm

70~200ppm

토양내 칼륨

0.2~0.5me/100g

0.2~0.5me/100g

토양내 마그네슘

1.0~3.0me/100g

1.0~3.0me/100g

지세

남향의 산기슭에 수목으로 그늘진 곳이 재배적지인데 이는 겨울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고 여름에는 큰 나무들의 그늘로 햇볕을 가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탄지 또는 북향이나 동북향의 완경사지가 좋으며 평탄지라도 배수가 잘되면 무방하고 북쪽에 높은 산이나 방풍물이 없이 넓게 트인 곳이 재배적지다

 


지세
   남향의 산기슭에 수목으로 그늘진 곳이 재배적지인데 이는 겨울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고 여름에는 큰 나무들의 그늘로 햇볕을 가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탄지 또는 북향이나 동북향의 완경사지가 좋으며 평탄지라도 배수가 잘되면 무방하고 북쪽에 높은 산이나 방풍물이 없이 넓게 트인 곳이 재배적지다.
 


  고로 차와 인삼남쪽을 바라보고 재배하느냐, 북쪽을 바라보고 재배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생육환경이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특히 햇빛이 필요는 하지만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자연적으로 그늘진 곳에서 자란다거나 아니면 해가림을 반드시 해준다는 점이 비슷하며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비단 점성이 강한 토양보다는 현무암이나 화강암, 운모편암 등의 토양이나 화산회토와 같은 곳이 재배지로서 적합하다는 사실이다34).

  강우량 역시 차가 보다 많은 물을 원하지만 차의 생육기간인 봄~여름에 비의 60%가 집중하는 것처럼 인삼 역시 생육기간인 봄~여름에 강우량이 집중하고 있어 양자의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모두 약산성의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한국 지질에 생육환경이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봤을 때 이미 인삼에 대해 중화문화권보다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고구려로서35) 차의 이러한 특성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연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오늘날까지 고려인삼의 재배지한반도 대부분과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요양 일대로 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백두산 일대에서 산삼, 장뇌삼, 인삼 등을 생산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구려인들은 차 재배와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장강 일대의 남조 정권과 교역을 하면서 고구려인들은 장강 상류에서부터 점점 전파된 차문화에 대해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차씨앗을 갖고 왔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그렇게 가져온 차씨앗은 고려인삼의 재배적지인 동방문화권에서 심어졌을 수 있는데 그렇다 했을 때 백두산 일대에서 차가 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양자의 생육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에 인삼이 재배되었던 지역과 비슷한 환경에서 차를 재배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단, 고구려가 중화문화권에서 수입한 차를 가져와 어느 정도로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물론 그 이전부터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품이 있었기 때문에 중화문화권에서 수입한 차 역시 그처럼 활용했겠지만 고구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수요 비율이 어떠했고, 어떤 식으로 재배되어 상품화되었는지는 보다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다만,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듯이 중화문화권의 차가 동방문화권에 전해졌다면 본래의 것과 성능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일반작물들 역시 특산지가 따로 있는만큼 같은 식물이라 하더라도 토양, 일조량, 온도 등에 따라 지역마다 그 품질이 다르기 마련인데 차 역시 그러함은 이미『다경』에서 밝힌 바 있었다. 그렇게 봤을 때 동방문화권에 전해진 중화문화권의 차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고, 어느 정도로 활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겠다.

  다만, 고구려뛰어난 의약학 지식을 통해 중화문화권과의 교류 과정에서 입수한 차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미 차대용 식물을 오래전부터 활용해왔던 점을 상기한다면 고구려가 중화문화권의 차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미 고구려는 동방문화권에서 유일하게 차대용 식물로 가공한 차를 생산 ․ 유통했던 구다국을 흡수하여 음다의 풍속이 전해진 나라였다. 비록 고구려 고분에서 전차 형태의 차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음다의 풍속이 상류층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에게도 전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 내에서 음다의 풍속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 싶다. 그런 상황에서 중화문화권과의 교류가 지속되면서 외래 차문화가 전래되었을 것이며 고구려의 의약학 수준을 가늠했을 때 그러한 외래 차종에 대한 임상실험(臨床實驗) 혹은 재배(栽培)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명약으로 취급받던 인삼에 대해서 고구려인은 분명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이는 동시대 중화문화권의 의약학 수준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씩이나마 확인되는 고구려의 연금술과 침술은 당대 고구려가 어느 정도로 의약학이 발달한 나라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사실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한대에 성의학(방중술)과 관련되어 약재로 취급받던 차에 대해서 고구려인들이 몰랐을리 없으며 오히려 중화문화권에서 모르는 동방문화권의 차대용 식물들을 폭넓게 활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36).

  고로 고구려는 독자적인 차문화에 외래 차문화까지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외래 차를 수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차씨앗을 가져와 재배했을 가능성도 언급할 수 있다 하겠다. 이후 수대에 남북조가 통일되고 운하의 건설을 통해서 전국유통망이 확충됨은 물론, 남북간의 물자가 활발히 교류되어 상업이 융성해지는데 이 시기, 고구려가 조양 일대에서 고려무역(高麗貿易)을 행하고 있다거나 혹은 고려시장(高麗市場)37)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중국측 문헌을 상기한다면 고구려에서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간에 차와 관련된 교역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중국의 차문화에 대해 마르코 폴로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점, 실크로드를 통해 동 ․ 서 교류가 융성했음에도 차가 등장하지 않은 점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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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靑木正兒, 1983,『靑木正兒全集』第8券, 春秋社, p.262.

 

2) 이번에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어째서 이런 기록들이 정작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一言半句 언급이 안 되있느냐 하는 점이다. 필자 역시 차를 공부하지 않았으면 고구려에서 차를 마셨다는 근거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텐데 최근 나온 고구려 생활사 관련 서적 어디를 봐도 차와 연관된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고구려 고분을 연구한 서적들 중에서 고분의 형식분류 혹은 벽화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그 안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으니 이는 분명 자료 수집과 연구방법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필자가 확인한 생활사, 고분 관련 서적은 다음과 같다.

     김용만, 1998,『고구려의 발견: 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

     ______, 2000,『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전호태, 2000,『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

     ______, 2002,『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풀빛.

     ______, 2004,『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2001,『한국생활사박물관』3券, 사계절.

     한국역사연구회, 2005,『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3) 고유섭 著 / 진홍섭 編, 2005,『구수한 큰 맛』, 다할미디어, p.221~228. 현재 순천 지역에는 천왕지신총, 요동성총, 용봉리벽화분, 동암리벽화분 등 4기, 남포 ․ 강서 지역에는 성총, 감신총, 수렵총, 우산리 1호분, 우산리 2호분, 우산리 3호분, 용흥리 1호분, 용강대묘, 쌍영총, 대안리 1호분, 대안리 2호분, 보산리 벽화분, 연화총, 태성리 1호분, 태성리 2호분, 수산리 벽화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덕흥리 벽화분, 약수리 벽화분 등 총 20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936년 당시에는 순천 지역의 천왕지신총 1기, 남포 ․ 강서 지역의 성총, 감신총, 수렵총(매산리 사신총), 용강대묘(안성동 대총), 쌍영총, 연화총(간성리 연화총), 강서대묘(삼묘리대총), 강서중묘(삼묘리중총) 8기 합쳐서 총 9기만이 발굴된 상태였다.

 

4) 김운학, 전게서, p.146~147. 일반적으로 餠茶나 片茶라고도 하며 찻잎을 시루나 가마에 쪄 절구에 넣고 진이 나게 찧은 후 이것을 茶食板 같은 모형판에 넣어 눌러 햇볕에 말려 고형화한 것을 團茶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단차류로는 전차가 있는데 이것은 茶葉을 시루에 쪄 절구로 찧은 후 주물러 다엽을 돈처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 다음 노끈으로 꿰어두었다가 구워 갈아 마시기 때문에 串茶라고도 하고 그 차에 綠色 곰팡이가 생기기 때문에 靑苔錢이라고도 한다. 한편으로 그 모양이 벽돌처럼 모나게 됐을 때 이를 磚茶라고도 한다.

 

5) 全虎兌, 1997,「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사」『고구려연구』4, 고구려연구회, p.46~49.

 

6) 崔鐘澤, 2006,「集安 ‘高句麗 王陵’ 出土遺物의 諸 問題」『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p.166. 그는 중국고고학계에서 1만 2천기에 달하는 집안 일대 고구려 고분 중 왕릉으로 추정하는 13기에 대하여 편년을 수립했다. ‘마선2378호 ․ 전창36호 ․ 마선626호 ․ 칠선산871호 → 우산2110 ․ 임강묘 ․ 칠성산211호 → 서대묘 → 우산992호 ․ 마선2100 → 천추묘 → 태왕릉 → 장군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와당 등의 출토사례로 봤을 때 태왕릉의 중심연대는 4세기 후엽(적어도 5세기 초)이며 장군총 역시 태왕릉과 시차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7) 細谷 淸, 1940,『茶事神話』, 滿蒙社, p.36. 전차 연구에 정력을 쏟았던 그는 ‘본 고장인 중국에서 이러한 전차는 먼 옛날에 없어져 버리고 지금은 남조선의 한 지방에만 남아있다. 차를 싫어하는 것으로 통하는 조선에 그 잔영이 보인다는 것은 재미있는 얘기다.’라고 적고 있다.

 

8) 諸岡 存, 1943,『茶經評譯』, 茶業組合中央會議所, p.14. 그는 ‘조선의 전차 제법은 처음에 이것을 찌고 절구질하여 틀에 넣고 박아내어 그 복판에 구멍을 뚫고 焙爐에서 말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복판의 구멍에는 볏짚으로 꿰어 둔다. 그 모양은 영낙없이 당나라 육우의 단차 그대로이다. 그러나 마시는 법은 이 단차를 불에 쬐어서 土甁에 넣고 달여서 그 빛깔이 홍차처럼 된 것을 알맞은 정도로 삶는 것이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다경』의 처방에 의한 단차 마시는 법과는 상당히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곧 예로부터 전해져온 음다 문화가 중화문화권의 음다 문화 영향을 받았음에도 보존되어 전해졌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9) 김일권, 2000,「서평 고구려 고분벽화의 내세관 변천에 대한 논의」『역사와 현실』37, 한국역사연구회. 그는 전호태의『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읽고 쓴 서평에서 이 책을 ‘부록의 값어치가 빛나는 책’이라고 불렀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연구성과를 분야별로 세밀하게 정리한 탓인데 그 다양한 연구 성과 중에서 문화 ․ 예술사 분야의 연구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차와 관련된 식음료라든가, 음식과 관련된 분야에 대해서는 연구가 전무했다.

 

10) 전호태, 2000, 전게서, p.52~54. 그는 이를 두고 珍饌圖,‘반찬(식사)을 진상하는 그림’이라 명명했지만 벽화 안의 탁자 위에는 수저라든가, 여타 음식이 담긴 그릇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식탁과 그릇이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남편의 앞에 왜 식탁이 따로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가능해야만 할 것이다. 즉, 이것은 세 부부가 나란히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라기보다는 남편이 두 부인들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전해주는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11) 김명배, 2001,「茶筵席의 燒香에 關한 東洋三國의 比較硏究」『韓國茶學會誌』7권 1호, 韓國茶學會, p.57~58. 그는 茶禮와 함께 香禮, 즉 향 사르기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 보면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향로가 차를 마실 때 쓰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아랍에서 신라의 사향, 침향을 수입하기도 했었고 신라에서 외국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을 제한한 품목 중 南洋諸地方에서 수입되는 외래 침향이 있었던 점을 근거로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역시 다례와 함께 향 사르기가 이뤄졌을 것이라 추정한 것인데 이는 충분히 참고할만 하다 하겠다.

 

12) 이태호, 2004,「벽화로 본 고구려」『대고구려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p.83. 그는 부인상 좌우에 있는 시녀를 두고 찻잔과 깃발을 들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 갖고 그것이 찻잔인지, 아닌지 판명해낼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13) 서정록, 2001,『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p.239. 비성에서 출토된〈손보희명석조삼존불좌〉에 새겨진 향로를 보면 거인이 커다란 받침을 들고 그 위에 향로를 얹어놓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필드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박산향로라든가, 유승의 부인 두관의 무덤에서 출토된 박산향로를 보면 이 역시 향로 밑에 받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향로는 처음부터 바닥 부분을 받침 형태로 만든 것들이지 향로 밑에 따로 받침을 댈 필요는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안악3호분의 경우는 시녀가 들고 있는 받침과 그 위의 그릇이 일체형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는 더 두고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4) 김용준, 1957,「안악 제3호분(하무덤)의 년대와 그 주인공에 대하여」『文化遺産』6, 북한에서도 안악 3호분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묘주인이 누구인가, 혹은 고분의 연대편년에만 집중했을 뿐, 그 주변의 세밀한 부분까지는 진행되지 않은 듯 싶다. 또한 북한의 대표적인 고고학 정기간행물인『조선고고연구』에서도 1986~2005년까지 수많은 연구성과들이 나와있지만 안악 3호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있어 시녀와 그 시녀가 들고 있는 그릇 등에 대해서 알기는 힘든 실정이다. 고로, 단순히 전체적인 형태가 향로와 비슷하다 하여 그것을 향로라고 단정짓기는 힘들 듯 싶다.

 

15) 李盛雨, 1978,『高麗以前의 韓國食生活硏究』, 鄕文社, p.84~85.

      周永河, 2003,「壁畵를 通해서 본 高句麗의 飮食風俗」『고구려연구』17, 고구려연구회.

    이성우는 한국 음식문화에 대한 방대한 연구저서를 남기고 있지만 기원후 300년 이전의 것들은 신화적인 것이 많다고 하면서 오히려『三國志』「魏志東夷傳」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시대 음식문화에 대해 복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안악 3호분의 벽화를 유기적으로 해석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주영하 역시 그의 논문에서 일상식사와 연회식사로 구분하여 고구려의 음식문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식음료에 대한 부분은 曲阿酒에 대한 내용 약간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문화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 이는 곧 거시적인 안목에서 고구려의 음식문화를 살펴볼 때 고분벽화를 활용하지만 정작 벽화 자체에 대한 분석은 시도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16) 주영하, 전게서, p.122.

 

17) 윤서석 외 9인, 1991,「齊民要術에 수록된 식품조리가공법 연구보고(6)」『한국조리과학회지』7, 한국조리과학회, p.82~83, 6세기 후반, 화북 지방의 곡물 가공 방법이 소개되어 있고 그 중 餠의 요리방법은 총 16개가 소개되고 있다. 이런 요리 방법은 이미 문헌으로 정리되기 오래전부터 실행되던 방법들이었을 것이다.

 

18) 李殿福 著 / 徐日範 驛, 1997,「通過高句麗古墓壁畵看高句麗社會生活習俗的硏究 :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사회생활풍속에 대한 연구」『고구려연구』4, 고구려연구회, p.475.

     고구려연구재단, 2005,『평양일대 고구려유적』

    이전복은 논문에서 고구려의 음식문화를 단순히 검소하고 소박하다, 고만 표현했을 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최근에 나온『평양일대 고구려유적』에서도 고구려의 음식문화와 관련된 내용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안악 3호분 부인상 양옆의 시녀들 중에서 왼편에 서 있는 2명의 시녀는 따로 도판을 참고하면서도 정작 오른편의 향로와 같은 그릇을 들고 서 있는 시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 중 역사학자들의 관심분야에서 고구려의 음식문화는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19) 김용만, 1998, 전게서, p.417.

 

20) 유태종, 2005,『우리 몸에 좋은 인삼과 홍삼』, 아카데미북, p.45~46.

 

21) 옥순종, 2005,『교양으로 읽는 인삼이야기』, 이가서, p.14~19.

 

22) 신영일 ․ 박찬국, 1989,「삼국시대 의학에 관한 문헌적 고찰」『대한원전의사학회지』3, 대한원전의사학회, p.465. 그는 삼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보다 나은 약학서 및 약재의 유입으로 의학이론과 질병치료에 있어 향상을 꾀하였으며 삼국이 우수한 약재 산출로 중국의 질병치료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이 확인된다고 하였다.

 

23) 허창걸, 2003,『북한 동의보감 국규처방전』, 창조문화, p.95. 북한에서는 만삼과 인삼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24) 옥순종, 전게서, p.44~45. 도홍경은『名醫別錄』에서도 백제, 고구려의 인삼에 대한 서술을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히 여기는데 형체가 가늘고 단단하며 희다. 기운과 맛은 상당에서 나는 것보다 薄하다. 다음으로 고려의 것을 쓰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으로 형체가 크며 허하고 연해 백제의 인삼만 못 하다. 백제는 지금 고려에 신속되었는 바 고려에서 바치는 인삼에는 두 가지 종류가 겸해서 있으니 어느 것을 취해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역시 고려인삼을 하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25)『南齊書』券58「列傳」第39〈東南夷傳〉, “國有銀山, 採為貨, 並人參貂皮. 重中國綵纈, 丈夫衣之. 亦重虎皮.”

 

26)『翰苑』「蕃夷」〈高句麗傳〉, “高麗記曰. 多山在國北. 高麗之中. 此山最大. 卅里間. 唯通四馬. 雲霧歊蒸. 終日不霽. 其中多生人參, 自附子, 防風, 細辛. 山中有南北路. 路東有石壁. 其高數仭. 下有石室. 可[容]千人. 室中有二穴. 莫測[深]淺. 夷人長老相傳[云]. 高麗先祖朱蒙. 從夫餘至此. 初末有馬. 行至此山. 忽見群馬出穴中. 形小[疆駿]. 因號馬多山也. 子有以下原闕.”

 

27) 옥순종, 전게서, 44~49.『名醫別錄』을 보면 백제의 경우는 무령왕 12년(513) 양 무제에게 인삼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冊府元龜』에는 신라 진평왕이 당 고조 무덕 10년(627)에 왕사를 통하여 인삼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지만 특이하게 최고의 고려인삼을 생산하던 고구려는 타문화권과 인삼을 교류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인식하기에 동북방에서 나는 고려인삼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야생종 고려인삼의 경우만 하더라도 재배종에 비해 줄기가 가늘며 지하경이 비대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삼에 익숙한 사람들이 몰라봤을 경우가 없지 않다. 한편, 고구려에서 자체적으로 인삼 생산 ․ 유통을 철저하게 통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인삼의 존재에 대해서 타국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고려인삼이 타국과 활발한 교류 속에서 거래되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강계 인삼이 최고로 손꼽힌 점, 오늘날 고려인삼이 세계 최고로 취급받는 것을 상기했을 때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28)『茶經』上「一之源」, “採不時造不精 雜以卉莽飮之 成疾茶位累也 亦猶人參上者生上黨 中者生百濟新羅 下者生高麗.

 

29)『渤海國志長編』券17「食貨考」第4〈渤海國志〉15, “人蔘. 謹案契丹國志及金史地理志 俱謂女眞地饒山林土産人蔘 寧江州榷場人蔘爲市 本草綱目引名醫別錄云 人蔘上黨山遼東人形者有神.” 이 시기는 이미 고려인삼의 효능이 널리 알려진 시기임에도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고려인삼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중국 상당삼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조치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30)『日本書紀』券25「第三十六世孝德天皇」, “白雉元年, 二月甲申《十五》甲寅. 朝庭隊仗如元會儀. 左右大臣. 百官人等. 爲四列於紫門外. 以粟田臣飯中等四人使執雉輿. 而在前去. 左右大臣乃率百官及百濟君豐璋. 其弟塞城忠勝. 高麗侍醫毛治. 新羅侍學士等而至中庭.” 해석하자면, “백치 원년 2월 갑신(15일), 조정의 의장대가 元旦의 의식처럼 차렸다. 좌우대신, 백관인 들이 4열로 자궁문 밖에 모였다. 속전신반중 등 4인을 꿩의 가마를 메게 하고 앞서서 나왔다. 좌우대신, 백관 및 백제의 왕족 풍장, 그 아우 새성, 충승, 고구려의 의사 모치, 신라의 시박사 들을 거느리고 뜰에 나왔다.”는 의미다. 당시 고구려 출신의 모치가 효덕천황의 侍醫(주치의)로서 활동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31) 김용만, 1998, 전게서, p.417.

 

32) 曺在星 외 2인, 1998,『人蔘栽培』, 先進文化社, p.16. 고구려 평원태왕 3년(561), 吳人 知聰이 중국의 의서인 內外典, 藥書, 明堂圖 등 16권의 서책을 갖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에 귀화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이를 중국의 의서가 유입된 최초의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마 이런 중국의 의서가 고구려에 전해졌다는 의미는 그와 비등한 고구려의 의서도 존재했기에 양자를 비교검토할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三國史記』는 이때 평원태왕이 陳과 사신을 주고받았다는 기록 뿐인데 아마 공식적인 교류가 아니었던 듯 싶다. 한편『日本書紀』에 의하면 지총은 효덕천황 백치 4년(653) 5월, 당나라로 갈 학승 121명 중에 그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이듬해 돌아오지 못하고 바다에서 빠져 죽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왜와 대륙백제(吳: 越州百濟) 사이에서 활동하던 백제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33) 曺在星 외 2인, 전게서, p.81~97. 인삼의 생육환경에 대해 참고하였다.

 

34) 任良宰 ․ 沈載國, 1998,「白頭山의 植生帶에 關하여」『한국생태학회지』21권 5호, 한국생태학회, p.504~505. 백두산은 최초의 화산활동이 시작된 新第3期(약 2,840만년전)로부터 現世(약 200만년전)까지 수십회에 달하는 일련의 화산활동이 일어난 곳이다. 起伏이 적은 고위의 노년기 지형을 비교적 새로운 지질시대에 분출한 현무암이 다시 平底化시킴으로써 현무암의 용암에 의해 臺地形成이 된 셈이다.

 

35)『名醫別錄』에는 고구려인이 지었다는「高麗人蔘讚」이라는 시가 전해진다. 원문은 다음과 같으며 三柯五葉, 背陽同陰, 欲來求我, 柯樹相尋 그 의미는 ‘세 가지에 다섯 잎으로 빛을 등지고 그늘을 향하여 이를 구하고자 하면 피나무 우거진 곳으로 가야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당대 고구려인들은 이미 인삼의 모양은 물론이고, 생육환경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상당삼을 진짜 인삼인줄 알고 활용했던 중화문화권의 사례들을 살펴본다면 일반적인 의약학 수준까지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6)『東茶頌』第10節, “開皇醫腦傳異事.” 해석하자면 ‘수 문제의 아픈 머리 낫게 한 것이 신이한 일로 전해오고’ 라는 의미다. 즉, 수 문제가 앓던 두통이 차를 마시면서 깨긋이 나았다는 뜻인데 초의선사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隋文帝 微時 夢神易其腦骨 自爾而痛 忽遇一僧 云山中茗草可治 帝服之有效 於是 天下 始知飮茶.” 그 의미는 ‘수 문제가 등극하기 전에 꿈을 꾸었다. 귀신이 나타나 그의 뇌골을 바꾸어 버렸다. 그 후로 두통을 앓게 되었다. 어느날 한 스님을 만났는데 “산중에 있는 차나무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이를 달여 마셔 효험을 보았다. 이로부터 천하의 차 마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 이 이야기는 명나라 진인석『潛確居類書』에도 나와 있는데 수대까지도 차가 飮用이 아닌 藥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대의 폭발적인 차문화 확산은 이처럼 수대에 이미 그 기운이 엿보였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런 수 ․ 당과 대립하면서 교류하던 고구려에서 중화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 몰랐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하겠다.

 

37)『舊唐書』券75「列傳」第25〈韋雲起傳〉, “會契丹入抄營州, 詔雲起護突厥兵 往討契丹部落 啓民可汗發騎 … 雲起旣入其界, 使突厥詐云向柳城郡 欲共高麗貿易. 勿言營中有隋使, 敢漏泄者斬之. 契丹不備.”

   『新唐書』券116「列傳」第28〈韋雲起傳〉, “於是突厥酋長入謁者, 皆膝而進, 莫敢仰視. 始, 契丹突厥無間, 且不虞雲起至. 既入境, 使突厥紿雲詣柳城與高麗市易, 敢言有隋使在者斬. 契丹不疑. 因引而南, 過賊營百裏, 夜還陣, 以遲明掩擊之, 獲契丹男女四萬, 以女子及畜產半賜突厥, 男子悉殺之, 以餘眾還. 帝大喜, 會百官於廷.”

    조양이 당시 북방문화권, 고구려, 중화문화권이 모두 만나는 文化接變地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곳에서 고구려 주도하에 행해진 상거래 또한 고구려 상인집단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때 수나라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돌궐병 2만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이곳을 지나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당시 조양의 고려시장에서는 2만명 정도의 상인단이 움직이는 정도는 별로 의심을 받지 않는 행동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2) 百濟의 茶文化

 


  차와 관련된 실물자료가 발견된 예는 고구려밖에 없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럼 해상왕국이었던 백제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백제의 차문화에 대해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없다. 다만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이만부(李萬敷)가 지은『식산별집(息山別集)』「지리산의 옛일(智異古事)」에 보면 “내가 마음으로 따르던 뛰어난 남쪽 기슭에 들어갔더니 지치와 절(강)차가 산출되었다. 백제의 전쟁 때 소정방절강차씨를 지리산에 뿌린 것이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우리 나라 사람의 기록에 있다.”고 적고 있어1) 백제의 차문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앞에서도 확인했지만 조선시대 한반도 남부의 차산지 중 백제의 영역이었던 전라도 일대의 차산지는 경상도에 비해 3배 가까이 많은 분포도를 보여주고 있다2). 즉, 그만큼 과거 백제 영토였던 지역이 차재배에 최적합한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봤듯이 백제에서의 차재배와 관련된 근거는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차구(茶具) 중에서 차기(茶器)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백제의 차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이후 인삼의 재배환경과 비교해 백제에서도 차재배가 이뤄졌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백제 지역에서는 공주 무령왕릉과 원주 법천리 2호분에서 중국 자기가 보고된 이래 100여 개체가 넘는 많은 양의 중국 도자가 출토되고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나 신라, 왜 지역의 중국 물품 유입현황과는 큰 차이가 있어, 백제인의 중국 고급문화에 대한 향유욕과 경사도를 잘 엿볼 수 있다. 당대 신라의 경우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흑유호(黑釉壺) 1점만이 출토되었으며 5세기대 남조의 송(宋)과 빈번한 교섭을 가졌던 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단 1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 역시 전반적인 양상이 어떠한지 확실치는 않지만 집안 우산하고분군 3319호묘에서 출토된 양이부(兩耳附) 청자반구호(靑磁盤口壺)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당시 중화문화권과 동방문화권 사이에 도자가 수반(隨班)되는 교섭의 성격이나 사회적 배경, 외래 문물에 대한 수용 태도 등이 달랐음을 시사하는데3) 그럼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당시 한반도 중남부의 백제와 중화문화권이 어떤 통로를 따라 교통했는지 확실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남북국시대때 신라의 교통로를 통해서 역추적할 수는 있다. 양국간의 해로는 우선 서해안의 당은포(唐恩浦)에서 덕물도(德物島), 패강(浿江) 입구, 압록강 입구, 요동반도의 비사성(卑沙城),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로 이어지는 소위 노철산수도(老鐵山水道) 항로라고 하는 북로가 있고, 그 다음으로 서해안에서 바로 중국 양자강 하류지역에 이르는 남로의 두 무역로가 있었다. 그러나 서해에 면한 경기 ․ 충청 해안에서 가장 짧은 거리로 중국 대륙에 닿을 수 있는 항로는 백제에 의해 한층 발달하게 된다4). 특히 북로의 경우 고구려의 방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백제와 중국과의 교역은 주로 남로에 의해서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남로는 첫째, 전남 영암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 동남해안의 장강 입구에 이르는 길이 있었고5) 둘째로 서해안 당은포에서 백령도를 거쳐 산동반도 적산(赤山)에 이르는 항로로 백제에서 남조에 입국할 때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뒤 내륙으로 들어갔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의 소정방이 신라의 요청으로 백제 원정시 이용한 항로로서 산동성 영성시에서 서해 덕물도를 거쳐 금강 하구로 진입하였다고 한다. 서해를 횡단하는 이 항로는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에 의해 이용되었으나 신라의 한강 점유 이후, 6세기 후반부터는 신라에서 애용하는 길이 되었다 한다6).

  즉, 백제는 북로를 장악하고 서해안을 내해로 삼아 경영하던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남로를 개척, 이후 신라에게 그 주도권을 뺏길 때까지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백제는 남로를 통하여 장강 일대의 남조 정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고 중국 남조의 문화는 대량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백제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남로를 장악하고 대외교섭을 주도했던 백제였기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 왜와는 달리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도자를 폭넓게 수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중국 도자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중화문화권 B.C 8,000년경부터 조도(粗陶), 즉 거친 태토의 토기를 생산하였으며 여기에서 홍도(紅陶)와 채도(彩陶)가 발전하고 이어 흑도(黑陶)와 회도(灰陶)로, 다시 회유도(灰釉陶)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이미 상대에 고화도 환원번조 도기가 발전하고 다시 잿물유약이 시유된 회유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고화도 환원번조의 유도(釉陶)이며 자기요업(磁器窯業)의 시발점이라 할수 있겠다. 중화문화권은 상대에 이미 백도(白陶)를 만들었으며 최근 중국 학자들의 분석 결과, 후한대에는 청자(靑磁)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7).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음다의 풍속이 전해졌지만 중국인들이 차를 그릇에 담아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위진(魏晋) 시대로 볼 수 있겠다. 특히 진나라의 청유계수호(靑釉鷄首壺)를 꼽을 수 있는데 이런 형태의 자기는 이후 당대까지 사용했을 만큼 유행했던 제품이었다. 특히 청주에서 출토된 청유계수호의 경우 남경 상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동진의 월주청자 가운데 왕민지묘 출토 청유계수호와 매우 유사하여 편년상 4세기 중반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8).

  위진시대에 등장한 차와 그릇의 만남을 한층 깊게 만든 시기는 짧은 통일시기를 거치고 다시 분열의 시기로 들어간 남조였는데 중화문화권의 남조는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지 36년 만에 북방문화권 혹은 서방문화권에서 거주하고 있던 선비(鮮卑), 흉노(匈奴), 강(羌), 갈(羯), 저(氐) 등 오호(五胡)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남쪽으로 쫓겨가 새로운 왕조를 세운 5개 왕조를 의미한다. 즉, 동진(東晋 : 317~420), 송(宋 : 420~479), 제(齊 : 479~502), 양(梁 : 502~557), 진(陳 : 557~589) 등 5개 왕조인데 이 시기는 중국 도자가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회유도 기법은 동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장강 하류 지역에서 성숙하는데 이를 가리켜 고월주요(古越州窯) 청자라고 한다. 이것은 재에다 장석(長石)과 같은 규산분(硅酸分)이 있는 물질을 첨가하여 안정된 고화도 유약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약에 포함된 극히 적은 양의 철분으로 인하여 청록색의 색조가 생긴다. 유약은 그 층이 두텁고 매끈하게 용해되어 있어 아름다운 점에서도 회유도와는 그 격이 다르다. 이를 곧 자기의 단계로 들어서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고월주요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예로는 3세기 중엽의 것으로 대개 그 무렵에 기법이 완성된 것으로 본다. 오늘날 강소성 의흥 부근이나 절강성 항주 및 소흥 부근에서 가마터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오(吳) ․ 진(晋) 초기의 이러한 자기들은 한대의 단단하고 강한 느낌보다는 한층 부드러워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남조 초기의 자기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점점 유약의 상태에 농담의 변화가 나타나고 산화하여 누렇게 된 예가 점차로 많아지게 된다. 제작 지역도 점차 확장되어 절강성, 복건성, 광도성의 각 성뿐만 아니라 호남성과 사천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수많은 가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9).

  특히 이 시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청자계수호 뿐만 아니라 완(碗 ․ 椀), 즉 작은 식기 등을 의미하는 주발(周주鉢)과 잔탁(盞托), 즉 잔과 받침이 대량 생산기 시작하기도 하였다10). 절강성 소흥, 상우, 여요 등지의 가마, 즉 월주요에서 나온 주발은 연꽃무늬를 띤 월요연화문완(越窯蓮花紋碗)의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릇의 또 다른 특징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화려하게 시문되어 있다는 점인데 불교와 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술(後述)하도록 하겠다. 


  1979년, 강서성 청강에서는 제나라 홍주요(洪州窯)에서 만든 하나의 받침에 다섯 개의 잔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오충반(五盅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조시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차기 세트가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특히 강남과 공동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기에 이른다. 이 그릇이야말로 차와 그릇의 만남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차는 약용(藥用)에서 기호음료(嗜好飮料)로서 인식 전환에 성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11).


  이처럼 백제가 초창기 월주청자를 비롯한 남조 정권의 청자를 폭넓게 수입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남로를 장악하고 북로를 장악한 고구려와의 대치 관계 속에서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교역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12). 또한 백제 지역의 중국 도자의 분포범위를 보면 심지인 풍납토성 혹은 부여나 공주 이외에도 내륙의 강원도 원주(原州), 충북 청주(淸州), 충남 홍성(洪城)과 천원(天原), 그리고 전북 부안(扶安) 등지에서 다수가 발견되고 있어 중심지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와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당시 수도권의 중앙 세력권에 의해 직접 교역된 중국도자가 지방 세력을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초두(鐎斗)와 같은 물품과 함께 지방 세력에 대한 분여품(分與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13).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당시 백제의 지방통치방식은 담로(擔魯)에 의한 지방분권적 통치방식이었는데 그 안에서 백제의 최고 권력자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최고 권력자는 장강 일대의 남조 정권과의 단일화된 무역 루트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품에 대한 전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채, 부의 재분배를 통해 예속 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나갔던 것이다. 


  이는 마치 북방문화권의 상황과 비슷한데 당시 유목국가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서역의 교통로를 장악하고 중화문화권 및 서방문화권과 교류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중화문화권에서 받은 물건이나 약탈품이 중요한 자본으로 쓰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북방문화권의 유목국가는 풍부한 재물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재물들을 소비할 수는 있어도 북방에 투자하여 재창출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국가는 끊임없이 중화문화권을 공격해 재화를 획득해야만 경제활동이 이뤄질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주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14). 물론 백제의 상황이 유목국가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백제가 중국도자를 통한 군주권 유지는 유목국가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15).

  그렇다 했을 때 과연 중국도자와 함께 차문화는 같이 전파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앞서 필자는 동방문화권 북부의 경우, 백두산 근방의 산림지대에서 나는 다양한 차대용 식물을 이용한 음다 풍속이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졌을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고 했을 때 고구려에서 이탈한 집단이 건국한 백제이기에 그러한 음다 풍속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한반도 남부가 독자적인 한국 야생차의 자생지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만큼, 백제의 차문화 역시 고구려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다16).


  특히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은 중화문화권에서도 오호십육국을 거쳐 남북조 시절에는 북조에 비해 남조 정권하의 사람들이 차문화를 보다 폭넓게 수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만큼 남방문화권의 문화적 요소였던 차문화가 오랜 시간을 거쳐 중화문화권으로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화문화권에서는 차문화가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로 자리잡지 못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오호십육국 시대의 도래와 함께 황하 일대에 터전을 두었던 북방의 사람들이 대거 장강 일대로 남하하게 되었고 그들이 장강 일대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 음다의 풍속을 두고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났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문화충돌(文化衝突)의 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 남조 정권을 중심으로 자기 생산에 일대 혁신을 꾀해 뛰어난 발전을 이뤘다는 점, 그리고 요업(窯業)의 발전과 맞물려 차문화가 일반 대중들에게도 급속하게 전파됨으로써 차가 보편적인 기호음료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외래 종교인 불교, 특히 선종(禪宗)이 중국화되어 번성했던 사실을 상기했을 때 불교와 차가 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당시 장강 일대에서는 오나라 위요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삼국시대때 차가 궁정 음료로 자리잡았음을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한 장강 일대 고유의 차문화는 이후 유목민의 침입을 피해 화북 지대에서 남하해온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질적이었음이 분명했다. 


  당시 북벌을 주장했던 유곤(劉琨)이라는 인물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에 안주(安州)에서 마른 생강 2근, 계피 1근을 얻었는데 모두 필요했던 것들이었다. 내가 번민하면서 항상 진짜 차를 얻기 바랬는데 너는 그것을 구할 수 있으리라.” 라는 말을 쓰고 있다. 화북의 사대부였던 유곤이 차를 의약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분명 차가 기호음료로서 자리잡고 있던 장강 일대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세설신어(世設新語) ․ 경저(輕詆)』에는 와 관련된 북방과 남방 사람들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진나라 강제(康帝)가 중시했던 북벌 대장군 직위로 명성을 빛냈던 저부(褚裒)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저부가 강소 지역에 머물렀을 때 그 지역의 권문세족들은 그가 저부인 줄 모르고 그를 대접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들은 그 북방 사나이를 놀려 주기 위해서 저부에게 다즙(茶汁)을 많이 따라주고 설탕에 잰 과일을 적게 주게 했으며 저부가 차를 다 마시면 바로 가득 채워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음식을 다 먹자 저부는 침착하게 일어나 자신이 저부임을 알리자 주변 사람들은 놀라서 흩어지고 허둥대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화북 지방의 진이 오호(五胡)의 세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밀려났을 무렵, 북방과 남방 사람들 사이의 차문화에 대한 자존심 대결을 기록한 일화로 볼 수 있어 상당히 주목된다. 그리고 이들의 자존심 대결에서 저부는 묵묵히 그들의 차 대접을 받아줌으로써 승리했던 것이다. 남방의 권문세족들이 그들의 고유한 차문화를 갖고 거드름을 피우려다가 보기좋게 당한 셈이다. 그러나 저부와 달리 추태를 보인 사람이 있으니 바로 당대 북방에서 유명했던 문사 임첨(任瞻)이 그 주인공이다.

   이 역시 동진이 장강 일대에 막 터를 잡을 무렵인데, 그가 지금의 강소성 남경에 이르자 성대한 환영회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때 임첨은 준비된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이것이 차(茶)입니까? 아니면 명(茗)입니까?”라고 물었다.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차에 대한 명칭은 10여 가지가 있었는데 당대 이전에는 이들이 모두 공용(共用)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와 명은 엄밀히 말하면 같은 것이었는데 임첨이 그렇게 말하자 남방의 권문세족들은 그가 차문화에 대해 문외한임을 알고 매우 가소롭게 여겼다. 그러자 임첨은 상황이 여의치않자 황급히 말을 바꿔 “아닙니다. 아니예요. 제가 금방 물었던 것은 마신 것이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이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 실언은 임첨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켜 ‘스스로 강을 건너 위신을 잃었다.’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북방에서 차문화에 대해 얼핏 알고 있었던 임첨이 아는 척을 했다가 호되게 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차문화가 당대까지 화북 지방에서는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 동진의 사도장사였던 왕몽(王濛)의 경우, 차 마시는 것을 너무 좋아해 사람이 오면 번번히 차 마실 것을 명령하자 사대부들이 모두 그것을 걱정하였고 차 마시는 것을 두고 수재(水災)라고 일컬을 정도로 남방의 차문화는 화북 지방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장강 일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화북 지방과 달리 고유의 차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당시 화북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북위에서는 그러한 남방의 차문화를 경시하고 억제하기도 했으니 북조 정권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고구려보다는 상대적으로 남조 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백제에서 자연스레 차문화가 형성 ․ 발달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당시 남제의 비서승 왕숙(王肅)은 부친이 죄를 얻어 피살되자 북위로 투항해 진남장군이 되었는데 그는 처음에 북위로 갔을 때 양고기 및 유락(乳酪)을 먹지 않고 늘 붕어국을 먹고 차를 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 후 왕숙이 효문제가 여는 조정 연회에 참가했을 때는 오히려 양고기를 많이 먹고 유락죽을 마시니 효문제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화하의 구미 중 양고기와 생선국, 차, 유락 중 어떤 것이 으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그는 명(茗), 즉 차가 가장 쓸모가 없어 단지 유락의 노비로 어울린다고 대답했고 효문제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후 북위의 사대부들은 차를 두고 낙노(酪奴)라 부르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희롱하였고, 조정 연회에서 차를 준비해도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17).

  효문제 재위 기간(467~499)이라면 5세기 중후엽인데 이처럼 남방과 북방의 차문화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남제 영명(永明) 11년(493), 무제자기가 죽은 후 영전에 제사를 지낼 때 살생을 하지 말고 단지 떡, 과일, , 밥, 술과 육포를 올리면 되고 천하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이 제도를 따라야 한다18)는 유지를 내린 것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차에 대한 인식이 천지차이라 할 수 있겠다. 


  덧붙여 백제의 차문화를 알려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앞서 언급한 중국도자 외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이 있다 하겠다. 현재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녹유탁잔(綠油托盞)이 찻잔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형태 면에서 매우 비슷한 동탁은잔 역시 찻잔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같이 출토되었던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紋鏡)’의 경우도 백제의 차문화와 관련된 사실을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동경의 앞면에 있는 짐승의 꼬리 부분 테 안에 새겨진 글자의 내용이 그것인데 山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이 바로 그 부분이다. 해석하면 ‘산에 사는 신선은 늙을 줄을 모르니, 목 마르면 옥천을 마시고’라는 의미인데 이때의 옥천은 단순한 맑은 샘물이 아닐 것이다. 이 동경이 도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했을 때 그때의 옥은 도교의 금단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가 있으므로 단순한 물이 아닌 찻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9)


  앞서 필자는 고구려의 경우, 인삼에 대한 의약학 수준이 이미 상당한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차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이를 음용했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뛰어난 고려 인삼을 수출하던 국가였으며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백두산 일대의 인삼보다는 백제의 인삼이 더 호평을 받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를 인지했을 것이며 그 차를 가져와 재배했을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하물며 현재 백제 지역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중국 도자들을 살펴본다면 오히려 고구려보다는 백제에서 중화문화권의 차문화 수입에 더 적극적이었고, 그런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는 백제 차문화의 한축을 담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봤을 때 백제의 차문화는 고구려의 차문화와는 약간 달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구려의 차문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구다국의 차대용 식물을 이용한 차 유통이 보편화되면서 진행된 독자적인 차문화를 바탕으로, 외래 차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 ․ 보급하면서 형성된 것이라 한다면 백제의 차문화는 물론 자생차 활용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차문화의 주류를 형성하지는 못 했다고 생각한다. 즉,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와 달리 남방문화권과 오래전부터 지속적인 교류를 해왔던 점을 상기했을 때 외래 차문화가 유입되어 그것이 차문화의 주류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당대 이전에는 남방문화권의 차문화 역시 독자적인 한국의 차문화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찻잎만을 우려먹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고구려 이전부터 전해져 온 독자적인 차문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을 백제에서도 외래 차문화라 할 남방문화권의 차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 큰 이질감(異質感)을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남방문화권의 화려한 도자문화를 접하고 이에 대한 수용 의지가 강했던 백제였다면 그런 도자문화와 결합한 차문화의 수용은 지극히 당연한 문화전파 현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봤을 때 백제는 중화문화권의 도자문화가 활발히 수용되었고 문헌에는 비록 차 교역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지만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수많은 중국도자를 통해서 충분히 외래 차문화가 폭넓게 수입 ․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문화권의 차문화는 백제 고유의 음다 풍속과 섞여 백제만의 독특한 차문화를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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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明培, 전게서, p.440.

 

2) 금당 최규용, 전게서, p.84~86.『東國輿地勝覽』을 토대로 봤을 때 경상도의 차산지는 울주군, 양산군, 동래군, 밀양군, 진양군, 곤양군, 하동군, 산음군, 단성군, 고성군, 진해 등이 있는데 반해 전라도는 전주부, 나주부, 광산현, 영광현, 함평현, 고창현, 장성현, 진원군, 무장군, 흥덕군, 부안군, 옥구군, 태인군, 남평군, 무안군, 강진군, 해남군, 남원군, 담양군, 순창군, 순천군, 낙안군, 보성군, 능성군, 광양군, 흥양군, 동복현, 화순군 등이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전라도 일대는 차재배의 최적지로서 백제에서 신라나 가야보다 차를 더 많이 재배 ․ 음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3) 成正鏞, 2003,「百濟와 中國의 貿易陶磁」『百濟硏究』38,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p.26.

 

4) 김정호, 1996,「신라시대 한 ․ 중항로」『장보고와 청해진』, 도서출판 혜안, p.145~179.

 

5) 申灐植, 1989,「韓國古代의 西海交涉史」『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p.1~40.

 

6) 김영원, 1997,「百濟時代 中國陶磁의 輸入과 倣製」『百濟硏究』27,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p.54~55.

 

7) 정양모, 2005,「韓國靑磁와 中國靑磁의 特徵」『청자(靑磁)의 색형(色形)』, 조선관요박물관, p.300.

 

8) 公州大學校博物館 ․ 天安溫泉開發 ․ 高麗開發, 2000,『龍院里古墳群』. 같은 형태의 흑유계수호충남 천안 용원리 고분군 중 9호 석곽묘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 흑유주자는 흑갈유가 저부를 제외한 전면에 매우 두텁고 고르게 시유되었다. 위아래가 납작하게 눌린 球形으로서 동진 청자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겠다.

 

9) 마츠바라 사브로 編 / 최성은 외 5인 譯, 2000,『東洋美術史』, 도서출판 예경, p.193~194.

 

10) 김영원, 2001,「한국 유적 출토의 중국 도자기」『동북아도자교류전(東北亞陶磁交流展)』, 조선관요박물관, p.264. 고구려에서 발견되는 중국 도자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서 집안산성하 분묘에서 출토된 것이 4세기 중엽 월주요에서 생산된 청자이며,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동물형태의 청자호자가 삼국시대 오의 강소성 남경시 조사강에서 출토된 赤烏 14년(251)명 호자와 비교해 봤을 때, 3~4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당시 남조 정권에서 생산된 차기가 고구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그러한 남조 정권의 도자를 飜案하여 독창적인 고구려식 차기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고 본다. 실제 안악3호분에서 부인상 오른편 시녀가 들고 있는 뚜껑이 있는 그릇의 경우는 남조 정권과의 문화적 교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1) 강판권, 전게서, p.90~91.

 

12) 강봉룡, 2006,『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한얼미디어, p.50~77. 저자는 백제와 고구려가 연안항로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그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오랜 시간 대립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특히 백제와 동진 등 남조 정권과의 관계가 각별함을 들었는데 이러한 백제의 해양교섭 주도권 장악은 이미 서진대부터 시작해서 이후 진평군을 통한 백제와 동진 사이의 문물 교류가 지속되면서 유지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전성기때 고구려가 장악한 해양에서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백제를 주축으로 하는 ‘반고구려 국제연대’ 움직임이 개로왕때부터 꾸준히 진행되었고 결국 무령왕 시절 백제는 고구려를 제치고 북방의 연안항로까지 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백제의 일련의 세력확대와 맞물려 장강 일대의 남조 정권의 문화는 폭넓게 백제로 수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차문화와 도자문화 역시 전해졌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3) 權五榮, 1995,「4세기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의 일례」『韓國史論』18,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p.64.

 

14) 金浩東, 1993, 「北아시아 遊牧國家의 君主權」 『東亞史上의 王權』, 한울아카데미, p.137~152.

 

15) 小松 久男 외 7인 著 / 이평래 譯, 2005,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 소나무, p.56~57. 흉노의 경우, 1년에 2차례(봄과 여름, 나중에 정월도 추가) 농성에 모여 犧牲을 바치고 번영을 기원하고 경마와 씨름을 즐기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 제사 때에는 여러 부족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국사를 토의했으며 과세의 기초인 인구와 가축 수를 헤아렸는데 아마 새로운 선우의 선출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묵특선우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지닌 군주가 등극하면 그 세력이 워낙 강대해 이런 식의 족장회의는 형식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처럼 유목국가의 군주라 하여 항상 그 군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재투자를 한 것이 아니며 여타 정착문명의 군주들처럼 나름의 행정조직과 관료조직 등에 의한 체계적인 권력 장악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양자의 군주권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서 백제와 비교를 한 이유는 유목국가 군주의 권력 유지 방법과 유사한 점을 들어 예속 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는 점을 언급하기 위해서다.

 

16) 이기윤, 전게서, p.32. 조선 중기 서울 남산의 양지바른 곳에 차나무가 무성했는데 이타방(이태원)의 중국인들이 이를 소중히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차나무가 자생차인지 아니면 토착화에 성공한 외래종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중부에서도 차가 재배되었으며 그 차나무가 폭넓게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렇게 봤을 때, 초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에서의 음다 풍속에 대해서도 이른 시기에 이미 인식되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17) 王從仁 箸 / 김하림 ․ 이상호 譯, 전게서, p.39~43.

 

18) 『南齊書』券3「本紀」第3〈武帝〉, “我靈上慎勿以牲為祭, 唯設餅、茶飲、幹飯、酒脯而已. 天下貴賤, 鹹同此制.”

 

19) 정동주, 2005, 『한국인과 차 : 그 사색의 열린 공간』 , 다른세상, p.100~101.

 

20) 이기윤, 전게서, p.64. 저자는 가야의 차문화가 신라로 이어진 것과 달리 유독 백제의 다풍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를 비류백제와 일본 열도 내 정권의 성립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즉, 비류백제가 광개토호태왕에게 패하면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웠으며 그와 동시에 백제의 차문화 역시 일본 열도로 넘어갔으며 온조백제에 의해 비류백제의 역사가 사라짐으로써 그 차문화 역시 흔적을 남기지 못 했으며 그로 인해 일본의 차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3) 新羅의 茶文化


  신라의 경우는 오늘날 한국차(韓國茶)기원으로 삼는 시기인만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연구 성과들이 나와있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차문화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면서 고구려, 백제의 차문화와 비교 ․ 서술하도록 하겠다.

  삼국시대가 되면 한반도 남부에서 자생했으리라 여겨지는 차나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지리산 일대가 풍부한 차산지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보다 심도있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1). 한반도 남부가 대부분 차산지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과거 백제, 가야,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들이 모두 차재배의 기원지로서 언급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고구려의 경우, 백산차류를 비롯한 차대용 식물을 상품화했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는 실제 차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그 차가 과연 자생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중화문화권에서 전래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삼국사기』를 보면 흥덕왕 3년(828), 당나라를 갔다온 사신 대렴(大廉)이 찻씨를 갖고와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불어 차는 이미 선덕왕(632~646)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같이 나온다2). 이를 통해 봤을 때 분명히 7세기 초중반에 신라에는 차문화가 있었으며 그로부터 2세기 뒤인 9세기 초반에 당으로부터 중화문화권의 차문화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선덕왕때부터 있었다고 하는 차문화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선덕왕때부터 있었다는 신라의 차문화가 신라 고유의 자생차문화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시기 중화문화권에서 전해진 차문화의 산물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먼저 신라 고유의 자생차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를 한번 살펴보자. 가장 흔히 알려져있는 신라의 차문화로는 신라 경덕왕 때의 충담사(忠談師)나 월명(月明)스님과의 차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경덕왕 24년(765), 당대의 국선이자 다인이었던 충담사와 경덕왕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충담사가 차를 달여 부처께 공양하고 또한 경덕왕에게도 달여드렸다는 내용이 그것이다3). 이는 분명 대렴이 당에서 차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는 일로써 신라 토산차가 자생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한 음다 풍속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밖에 원효(元曉) 스님과 설총(薛聰) 역시 차와 관련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원효(617~686)의 경우는 그가 화랑 출신으로 화랑 시절 다사(茶事)를 겪었으리라는 점, 한송정에 있는 사화랑(四花郞)의 차의 유적이나 충담사, 월명과 같은 국선 다승들과 교류했던 점, 그의 아들 설총이 차를 논하고 있다는 점, 전라북도 부안 변산(邊山)에 있는 원효방(元曉房)의 설화를 들으면 분명히 차와 연관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4).


  그리고 설총 또한 차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할 수 있는데『삼국사기』에는 설총과 신문왕의 대화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신문왕(681~692)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설총은「花王歌」를 들려주었고 그 안에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5).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준 우화에 차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설총이 음다 풍속을 알고 있었고 그걸 듣고 깨우침을 얻은 신문왕 역시 음다 풍속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곧 이 시기, 신라에 독자적인 차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인 셈이다.

  게다가 진흥왕(540~576)때는 화랑들이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에서 차를 마셨다고 전해지는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영랑, 술랑, 남랑, 안랑 등 네 선인의 차 유적으로 알려져있는 한송정이곡「동유기」에도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화랑들과 신라의 차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6).


  덧붙여 신라 왕자인 김교각(金喬覺 : 689~789) 성덕왕 27년(728), 신라에서 흰개, 볍씨[黃粒稻], 차의 종를 가지고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으로 가서 오늘날 저 유명한 금지차(金地茶)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7). 김교각은 특이하게도 우리측 기록에는 전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중국측 문헌을 보면 지장법사로서 중국 불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인물이다. 청나라 유원장『다사(茶史)』와 청나라 육정찬『속다경(續茶經)』에도 김지장(김교각)과 금지차 거론되고 있는만큼 이는 분명한 신라 토산차의 흔적으로 봐야만 할 것이다8).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것이 백화차(白樺茶)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화(白樺)는 자작나무의 다른 이름으로 백화차는 자작나무 어린잎으로 만든 차말한다. 시베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샤먼은 씨족이나 부족, 나아가 민족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할 때 제사의식과 집단 구성원의 질병이나 재앙을 물리치는 한 방편으로 백화차를 사용해왔는데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백화차를 마시게 하거나 백화로 만든 향불을 피웠고, 샤먼이 되기 위한 입무식 때에도 차를 마시고 피웠다고 한다9).

  그러한 샤먼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던 나라가 바로 신라인데 오늘날 확인되는 수많은 신라의 금관과 샤먼이 연결되어 이해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국보 제 207호인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보면 이것이 백화수피(白樺樹皮)를 여러 겹으로 겹치고 그 위에 다시 고운 백화수피를 입혀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4줄의 사선으로 누벼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10). 즉,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자라고 있는 자작나무가 샤머니즘과 연관되어 신라에서 폭넓게 활용되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봤을 때 신라에서 차대용 식물을 이용한 차와 자생하고 있던 차나무를 이용한 차가 모두 만들어져 음용되었으리라는 추정 또한 가능하다 하겠다.


  이상의 사실들만 살펴본다 하더라도 신라에서는 이미 화랑과 차와의 관계가 중요하게 취급되면서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인 차문화자리잡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처럼 확인된 것만 봐도 6~8세기에 신라에는 독자적인 차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는 앞서 살펴봤던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신라의 경우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중화문화권과 독자적인 통교를 하지 못 했던 점을 상기했을 때 신라의 차문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고구려의 보호국으로서 힘을 키울 무렵에는11)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품이 신라에서 널리 유통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이후 백제의 통제를 받았을 때에는12)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토산차는 물론 중국도자와 함께 전해진 중화문화권의 차문화가 폭넓게 신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신라의 차문화는 고구려, 백제의 차문화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나는 토산차와 함께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차대용 식물을 이용한 차상품이 전해졌음은 물론 백제를 통해 유입된 남방문화권의 외래차수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렴이 가져온 차씨앗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흥덕왕의 조치 자체가 이미 당시 지리산이 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임을 알고 그렇게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던 지리산 일대에서 나는 토산차는 백제와 신라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고 보며 이 지리산이 고구려의 백두산과 함께 양대 차산지로서 주목받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신라의 화랑을 다동(茶童)으로 인지하고 차와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나 백제 역시 청소년을 교육하는 기관과 조직이 있었던만큼 다동이라 불릴만한 존재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는 차가 수련의 한 과정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요시 여겨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연구주제라 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로는 이를 확인할만한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단순히 추정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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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형국 외 3인, 1998, 『國産茶 優良 品種 育成 硏究』, 全南 農業技術院, p.709~714. 본래 차는 아열대지역을 원산지로 한 식물이지만 우리나라 남방지역의 250여 지역에서 1,000년 이상 자생하는 동안 자연교배로 인해 우리 풍토에 잘 적응한 종자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남방문화권의 차 이외의 토산차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과의 자연교배로 인한 독특한 차가 생산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

 

2) 『三國史記』券10「新羅本紀」第10〈興德王〉, “三年, 冬十二日{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3) 『三國遺事』券2「紀異」第2〈忠談師〉,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4) 김운학, 전게서, p.49~51.

 

5) 『三國史記』券46「列傳」第6〈薛聰〉, “<神文大王>以仲夏之月, 處高明之室, 顧謂<聰>曰: “今日, 宿雨初歇, 薰風微凉, 雖有珍饌哀音, 不如高談善謔, 以舒伊鬱. 吾子必有異聞, 盍爲我陳之?” <聰>曰: “唯,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而{面}沐春雨以去{垢}, 快{袂}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雖有絲麻, 無棄管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 王亦有意乎?’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倿{侫}, 疎遠正直, 是以,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於是, 王愀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謂{爲}王者之戒.” 遂擢<聰>以高秩.”

 

6) 김명배, 1995, 「韓國의 茶童小考」 『韓國茶學會誌』1권 1호, 韓國茶學會, p.65. 그는 화랑을 茶童으로 인식했으며 화랑, 불교와 차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화랑과 차문화의 밀접한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라 사회 내에서 형성되어왔던 차문화의 존재에 대해 상정하게끔 한다.

 

7) 다헌정(http://www.dahunjung.com/)

 

8) 김명배, 전게서, p.438~439. 단, 『茶史』에는 김교각이 심은 차가 금지차가 아닌 空梗茶로 적혀 있으며『續茶經』에는 김교각이 서역 스님으로 적혀 있는데다가 차이름은 枝梗空筒茶적혀있다. 이는 傳寫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 같으며, 분명한 것은 김교각이 심은 차가 당시 중화문화권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차가 아닌 외래차종이라는 사실이다.

 

9) 니오라쩨, 1976, 『시베리아 제민족의 원시종교』 , 신구문화사. 러시아의 극동 지역인 아무르주 숲 속이나 아무르강 기슭에서 사냥과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는 나나이족의 샤먼에게서도 이러한 백화차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시베리아 제민족에게서 광범위한 백화차 활용 사례는 예전부터 지속된 전통으로 볼 수 있겠다.

 

10) 이송란, 2004, 『신라 금속공예 연구』 , 일지사, p.264.

 

11) 정운용, 2004, 「고구려의 그릇이 신라 무덤에 묻힌 까닭은?」 『다시 보는 고구려사』, 고구려연구재단, p.102~103. 고구려가 강한 국가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던 신라는 왕족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이를 계기로 5세기 전반, 고구려가 우월한 입장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광개토호태왕비〉〈중원고구려비〉에 적혀있는 고구려와 신라간의 관계가 이를 잘 나타내주며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의 벽화 고분 역시 고구려 당주와 관련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 계승권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만큼, 이 시기 고구려의 차문화가 신라로 대거 유입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12) 『南史』券79「列傳」第69〈新羅傳〉,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중략)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중략) 語言待<百濟>而後通焉.”『南史』에 의하면 신라는 그 나라가 작아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으며 양나라 보통 2년(521), 백제를 따라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한 이후 백제의 통역을 통해야 의사소통이 되었다는 기록을 본다면 이 즈음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의 통제를 받던 신라가 백제의 통제 하에 들어갔음을 알 수가 있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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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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