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3

2018. 11. 26. 20:02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3|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조회 57|추천 0|2006.11.03. 00:40                                     http://cafe.daum.net/cjwhc/1nxV/7928 



 1. 夏商周 三代의 茶文化와 傳播 經路

 

   B.C 2세기 때 쓰였다고 전해지는『이아(爾雅)』를 보면 이미 는 쓴다(檟苦荼也)’라는 문구가 등장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가(檟)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이아주소(爾雅住疏)』에는 ‘촉인들이 고도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어 촉인(蜀人)이라 하는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촉(蜀)이 바로 오늘날 사천성 지역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또한『다경』에는 양집극 ‘촉의 서남쪽 사람들은 를 일러 설(蔎)이라고 부른다.’1)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어 촉 지방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차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로 불릴 정도로 차에 대한 정보도 많았고, 나름의 차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진대(晉代)에 쓰여진『화양국지(華陽國志)』「파지(巴志)」를 보면 이미 주(周) 무왕(武王)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상(商) 주왕(紂王)토벌할 때, ‘파촉지사(巴蜀之師)’ 지지를 받았으며 이때 파촉 지역에서 주나라 왕실에 바치는 공물찻잎이 들어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2). 그렇게 봤을 때 중국의 음다 풍속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찻잎과 관련된 공식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중화문화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촉 지역에서 음다의 풍속오래전부터 보편화되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겠다.


  물론『다경』에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3)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그는 B.C 2,517~2,475년까지 재위했던 삼황오제시대를 연 역사의 첫 번째 인물로서4) 오늘날 ‘차의 신’이자 ‘차의 시조’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실제 『신농본초(神農本草)』신농씨가 일찍이 100가지 풀을 맛보면서 하루에 72가지 독을 만났는데 를 얻어 그 독들을 해독했다.’는 기록이 내려오는 만큼 신농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 한데 역대 중국측 문헌에서 그와 관련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다.『다경』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고만 적고 있을 뿐이며 한국측 문헌초의선사의『동다송(東茶頌)』에서도 역시 신농씨에 대한 언급은 없다5).

  그렇게 봤을 때 염제 신농씨가 생존했다고 하는 B.C 25~26세기까지 음다의 풍속이 올라갈지는 증빙할만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있겠다. 마찬가지로 주 무왕공물로 차를 받았던 B.C 12세기에 대한 편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주 무왕에게 촉 지방에서 공물로 바친 차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증빙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황하 일대에서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라고 불리는 세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중화문화권을 형성해나갈 무렵, 장강 상류에는 고촉국(古蜀國)이라고 불릴만한 독자적인 남방문화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이 고촉국과 삼대와의 교류 관계를 살펴본다면 차문화에 대해서도 어떤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한다.


  이미 소병기(蘇秉琦)에 의해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한 다원설(多元說)이 제기된 바 있으며 그는 중국 신석기문화의 전체적 틀을 수립하기 위해서 구(區) ․ 계(系) ․ 유형론(類型論)에 입각한 연구방법론을 수립했다6). 그는 동정호(洞庭湖) 주변과 사천분지(四川盆地)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서남부(西南部)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고촉국은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중국문화의 편년을 보면 초기 신석기시대 B.C 8,000~5,000년경이며 앙소문화의 등장은 B.C 5,000년 무렵으로 볼 수 있다7). 그렇게 봤을 때 B.C 2,500여 년에 형성되기 시작한 고촉문화 서남부 구역의 신석기문화를 계승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이후 하은주 삼대가 끝날 무렵까지 무려 1,500년 가량중화문화권과 독자적인 존재로서 교류한 셈이 된다.


  1931년 사천성 지역농민이 도랑의 물을 퍼내다가 각종 옥기(玉器)를 발견하였고 이는 곧 골동품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니 이가 곧 광한옥기(廣漢玉器)로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고촉국의 유물이었다. 이후 1986년 1호갱과 2호갱이 발견되면서 훗날 ‘삼성퇴(三星堆)’라고 불리게 된 중국 고고학상 위대한 발견이 이뤄진 것이다. 중국 근대의 저명한 학자 왕국유(王國維)는 지하에서 출토된 유물의 고고학 자료와 문헌의 기록을 모두 중시하고 그것들을 비교 연구하는 이중증거법(二重證據法)을 제창하였는데 삼성퇴에 대해서도 그 방법론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촉국의 역사 문헌 기록은 간략하고 모호하여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한대 양웅(揚雄)『촉왕본기(蜀王本紀)』에 의하면魚鳧王田于湔山’, 즉 ‘어부왕이 전산에서 밭을 일구었다.’고 하여 고촉국의 어부왕 시절 이미 농경을 행하고 있었으며8) 두우왕 때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여 촉 지역은 이미 농업이 발전 단계에 이르러 경제와 사회 생활이 상당한 수준에까지 발달하였다고 한다. 즉, 삼성퇴 유적은 어부왕 시절의 유적으로서 이후 두우왕 시대때 중요한 도읍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화양국지』를 보면 잠총(蠶叢), 백관(柏涫), 어부(魚鳧), 두우(杜宇), 개명(開明) 역대 고촉국의 왕들이 등장한다9). 이들이 전설상의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인물인지 이견이 있지만 현재 중국 학자들은 삼성퇴 유적에서 발견된 상나라 초기(B.C 18~17세기) 고촉국 도성의 성벽을 두고 어부가 촉 지방을 통일한 후에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흙을 틀에 넣고 다져서 담의 외곽선을 만드는 식의 분단항축법으로 축조된 성벽은 오늘날 일부만 확인이 되고 있는데 성터의 면적이 2.6㎢로서 상나라 초기 수도인 정주(鄭州)의 상성(商城)과 규모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하다. 성벽의 축조시기는 상나라 초기로 보여지며 서주 초기까지 사용하다가 고촉문화가 점차 성도(成都)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유적지는 점차 폐기되는데 부에서는 5대 개명왕때 엄청난 홍수의 피해 때문에 천도가 이뤄졌다고 파악하기도 한다10).



 『다경』에서 육우 당대 전국의 중요한 차산지산남(山南), 회남(淮南), 절서(浙西), 검남(劍南), 절동(浙東), 검중(黔中), 강남(江南), 영남(嶺南) 등의 8대 차구(茶區)로 나누고 각각의 차구에서 생산되는 차의 품질 상 ․ 중 ․ 하 ․ 우하(又下)의 네 등급으로 분류하여 각기 상세한 품평까지 곁들이고 있다. 그 중 검남차구(劍南茶區)가 바로 사천성 일대로서 육우팽주(彭州)의 것을 상품으로, 면주(綿州)와 촉주(蜀州)의 것을 차품으로, 공주(邛州)와 아주(雅州), 노주(瀘州)의 차를 하품으로, 미주(眉州)와 한주(漢州)의 차를 우하품으로 평하였다. 


  검남차구 차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로서 성도 일대의 고차구(古茶區)처럼 당대에 빠르게 발전한 곳이다. 검남차구 중 한주는 고대에 북방으로 가는 길과 통해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예로부터 ‘촉과 싸우려면 반드시 먼저 한주를 쳐야한다(爭蜀必先破漢州).’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공주와 아주, 노주는 고대 차마(茶馬)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공주와 아주는 더욱이 운남(雲南), 서장(西藏)으로 가는 요지이기도 했다11).

  당대에 이 곳에는 작은 농가의 작은 차원을 제외하고도 장수규(張守珪)와 같은 대지주들이 운영하는 차원도 있었다12). 이들 지역은 하나같이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분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곧 주 무왕에게 공물찻잎이 도착했다면 분명 이 일대에서 생산된 차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촉국의 차 생산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추정할만한 근거가 있다.

 

  먼저 당대의 기후를 보면 수 문제 개황 20년(600) 이후, 전한 말엽 이래 장장 600여 년에 이르는 한랭건조 기후가 끝난 시점이다.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부터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4년(907)까지 약 300여 년간 중화문화권의 기후 극히 온난다습하였다. 심지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은 횟수가 무려 19차례 이상으로 중국 역사상 각 왕조 중에서 최고치를 자랑한다13). 그처럼 온난다습했기 때문에 육우『다경』을 쓸 무렵의 당나라는 차 생산에 있어서 최적화된 상태였다고 그런 시기에 이와 같은 책이 나온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소민(劉昭民)중국사에서 온난기가 몇차례 계속되었다고 했는데 당대는 제3차 온난기에 해당했으며 제1차 온난기는 바로 하, 상, 그리고 주나라 초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서안 동쪽 교외 15㎞ 떨어진 지점 반파촌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고고학자들은 대량의 죽서(竹鼠) 유해를 발굴했다. 죽서 오늘날 장강 이남과 화남의 온난다한 삼림에서만 살고 있는 것으로서 방사성 탄소 원소(C14) 측정법으로 반파촌에서 출토된 목탄, 과일 껍질, 죽서유해 등을 측정한 결과, B.C 5,000년전 서안 일대에서 죽서가 살았음이 확인되었다14).

 

  오늘날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의 기온 분포를 보면 전자는 14~15℃이며 장강 유역이 16~18℃인데 5천년 전에는 황하 유역의 평균 기온이 현대보다 2~3℃ 가량 높았음을 알 수 있다15). 심지어 산동성 성자애(城子崖) 흑도문화 유적지에서는 남방 동물이라 할 수 있는 노루는 물론 다량의 대나무, 그리고 대나무 마디 모양을 모방한 도기와 청동제 및 옥제 술잔까지 발견된 바 있어 당시 화북 일대 대나무가 자랄 정도의 온난다습한 기후였음을 알려준다16)


  또한『서경(書經)』을 보면우 임금께서 토지를 구획하시고 산에 따라 나무를 베시며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셨다.’는 문구가 나와17)  하나라때 황하 일대가 강우량이 많고 초목이 아주 무성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황하 일대가 그 정도의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면 장강 유역의 남방문화권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당시 고촉국 내에 무성하게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을테니 당시 촉인들이 이미 차를 음용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1959년 하남성 언사현에서 거대한 왕궁 유적이 발견되면서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하나라의 도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삼성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리두문화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 문화권간의 교류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도기로 제작된 조미용 그릇(盉), 술잔(觚), 제기(豆), 항아리(罐) 등의 기물들 모두 작고 밑바닥이 평평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양자의 형태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하나라의 문화가 촉 지방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영향으로만 볼 수만은 없다. 이리두문화에서 그러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 이전부터 양자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고 교류했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차문화에 대해서도 이미 양자가 오래전에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하나라 대신 상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기후는 여전히 온난다습했다. 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허에서 출토된 각종 갑골문자(甲骨文字)를 갖고 상 말에서 주 초(B.C 1,400~1,100년)에 이르는 300여 년간의 기후 상황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1~5월까지 평균 10회 이상의 강우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은허에서 출토된 물사슴과 죽서, 물소, 인도코끼리 유해를 갖고 황하 유역이 당시까지 온난다습했다고 주장하였다18).

  그런 따뜻한 기후 속에서 상나라에서는 황하 유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모작이 가능했으며 수확 시기 또한 2월에 조생벼를, 7~8월에 만생벼를 수확하여 오늘날에 비해 1개월 이상 수확시기가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상나라 때에도 역시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2℃ 이상 높았으며 1월 평균기온은 오늘날보다 3~5℃ 이상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9). 


  하지만 하~상대에는 자연 비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므로 한 곳의 토지를 경작하다가 지력이 소모되면 다른 곳의 경작지로 이동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종류의 농업 방법을 ‘작유농(作遊農)’ 또는 ‘유경(遊耕, shifting cultivation)’이라고 칭하였으며 하~상대에 여러번 천도해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주시대때 생산 기술의 발전과 농업 생산력의 제고에 따라 ‘정경(定耕)’의 비율이 높아질때까지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는데20) 그렇다고 했을 때 하~상대 황하 유역에서 이모작이 행해졌다 하여 그 생산량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지는 않았던 듯 싶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촉국과 상나라의 교류는 더욱 심화되었는데 삼성퇴에서 발견된 각종 청동제 긴 항아리(尊)나 술독(罍) 등은 상대 청동기와 그 형태가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고촉국이 일방적으로 상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촉국은 주도적으로 상나라의 문화를 수용할 줄 알았고, 당시에는 단순한 물적 교류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까지도 성행했었다.『화양국지』를 보면 당시 노팽(老彭)이라는 촉나라 인물이 은나라의 태사(太師)로 있었다21) 적고 있는데 중국 역사학자 고힐강(顧頡剛)촉 사람이 상나라 조정에서 관리된 자가 노팽 하나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촉국은 오랜 시간 촉 지방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중화문화권과 대등한 존재로 존속했는데 수많은 촉인들이 상나라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촉인들의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는 곧 고촉국의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 짐작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특히 삼성퇴의 거대한 도성은 초기 상나라의 그것과 규모상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도 당시 고촉국이 어느 정도 수준의 국가였는지 잘 알 수 있는데 그렇다 했을 때 고촉국과 상나라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교역 중 차 역시 교역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 본다.


  또한 섬서성 일대고촉국과 상의 문화가 혼재되어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고촉국 입장에서는 섬서의 남부가 곧 촉의 북쪽 국경이며, 상나라로 볼 때 이 지역은 상의 서쪽 땅이었다. 그런 국경 지대였기 때문에 양측의 문화가 혼재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 문화적 교류는 이후 주대까지 이어지는데 특시 섬서성 보계(寶鷄) 지역에서 발굴되는 서주 시기의 어국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주거지와 묘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하나같이 상 ․ 주 시기의 전통적인 중화문화, 서남 지역의 고촉문화, 서북 지역의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원시문화인 사와문화(寺洼文化)까지 유기적으로 혼합된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촉국은 예로부터 누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서『산해경(山海經)』22)에는 양잠(養蠶)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23), 실제 촉 지역에는 잠녀(蠶女)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24). 고대 촉 땅에는 청의신(靑衣神)을 제사지내는 전통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청의신은 백성을 교화하고 누에를 치는 ‘잠총씨(蠶叢氏)’라고 한다. 잠총의 시기는 고촉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고촉의 씨족 부락에서부터 고촉왕국의 건립은 잠총 때 시작된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고대 촉족(蜀族)의 최초 명칭은 촉산씨(蜀山氏)인데 이후 잠총씨가 촉산씨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건국하여 왕을 칭한 후에도 여전히 촉이라는 명칭을 씨족과 국가의 명칭을 썼던 것이다. 실제『설문(說文)』에는 촉(蜀)자를 ‘뽕나무에 누에가 있다(葵中蠶)25)이라고 풀어놓고 있다고 한다26).


  그런데 이 뽕나무는 뿌리(桑根), 뿌리껍질(桑白皮), 여린 가지(桑枝), 종자(桑椹), 잎에서 나오는 즙(桑葉汁), 목재 부분을 태워서 나온 재(桑柴灰), 나무껍질에서 나오는 즙(桑皮汁)을 모두 약용할 정도로 귀한 식물이다. 동상엽(冬桑葉), 상상엽(霜桑葉),철선자(鐵扇子) 등으로 불리는 뽕잎은 10~11월 서리가 내린 후 따서 햇볕에 말려 음용하는데 맛과 성질은 쓰고 달며 차갑다27). 그 맛이 마치 찻잎과 같은데 단순히 뽕나무를 누에 기르기에만 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차로 만들어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

  즉, 당시 촉 지방에서 뽕나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면28) 분명 식용으로서의 뽕나무에 주목했을 것이고 뽕잎을 차로 마셨다는 의미는 곧 차나무 활용에 대해서도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 셈이라 본다. 이미 산서성(山西省) 앙소문화 유적에서 반쯤 잘린 누에가 출토된 바 있었고 절강성에서는 집누에로 만든 사직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봤을 때 신석기시대 이전에 이미 야생누에를 이용해 사직물을 생산했고 집누에는 B.C 2,700여년 전에 사육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29). 이런 고고학적 근거를 살펴본다면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뽕나무를 활용했고 이는 비단 누에 사육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겠다.


  고로 주 무왕에게 헌납했던 촉 지방의 찻잎이 뽕잎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찻잎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촉 지방에서 이미 차를 달여 마셨다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 삼성퇴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준(靑銅尊)이나 청동뢰(靑銅罍) 등을 보면 무엇인가를 마셨을 때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이 어떤 액체로 이뤄진 것이라면 차 종류 중 하나가 그 안에 담겨졌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은 셈이다. 고로 차나무의 재배지와 차나무의 식물학적 특성 등을 살펴봤을 때 촉 지방에서 B.C 2,500여년 전에 차나무에 대해 인지하고 음용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기후주대 전기(B.C 1,122~1,000)에도 역시 이전과 같이 온난다습하였기에 여전히 밀림지대에 살만한 동물들이 황하 일대에서 살고 있었고 겨울 12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필 정도로 따뜻한 기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주대 중엽 이후(B.C 1,000년)가 되면 한차례 한랭기후가 찾아왔는데죽서기년(竹書紀年)』을 보면 장강(長江)과 한강(漢江)이 얼어 많은 소와 말이 얼어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가 주 효왕 13년(B.C 897)인데 장강과 한강은 오늘날 겨울에 결코 얼지 않는 지역이다. 당시 장강과 한강에 대한 기록과 꽃가루 화석에 대한 연구 결과 당시의 연평균기온이 오늘날보다 0.5~1℃ 가량 낮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주대 후기 한랭건조한 기후는 주 여왕 31년부터 선왕, 유왕, 평왕까지 약 100여 년간 계속 한재(旱災)를 일으켜 주나라를 파탄 지경에 빠뜨렸으니 이 시기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동주가 멸망하고 평왕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30). 그리고 이 시기 촉 지역의 고촉국 역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화문화권의 쇠퇴와 제1차 소빙하기(Little ice-age)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더불어 촉 지방에서 산출되는 각종 특산품 생산과 교역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보이는데 차도 어느 정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 했을 것이다31)


  당시 고촉국과 삼대는 육로와 수로로 교류했으리라 보는데 육로로는 절벽에 구멍을 뚫어 그 위에 나무를 걸쳐 길을 만든 잔도(棧道)와 철삭으로 된 적교(吊橋)인 삭교(索橋)가 있었지만 그 험난하기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로가 더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리라 보는데 중화문화권에서 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회수를 경유해 장강으로 들어선 후에 동정호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촉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말고도 한중(漢中) 지역을 경유하여 농(隴)과 촉 사이를 통과하는 또 다른 경로도 있었다. 서주 초에 주 무왕이 상 왕조의 주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 땅 여덞 나라의 우두머리와 목야(牧野)에서 회맹을 하고 난 뒤에 고촉국 사람과 말들이 이 경로를 통해 정벌에 참여했는데『화양국지』에는 당시 촉의 영역을 언급하면서 이미 대규모의 물자가 그러한 교통로를 통해 이동했음을 알려주고 있다32). 더불어『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이미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에 옹과 촉 사이에 상업의 왕래가 활발했다33)고 적고 있어 고촉국이 상과 그 뒤를 이은 주와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덧붙여 삼성퇴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청동상에서는 서방문화권 혹은 그 이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상 문화권 내에서 출토되는 1만개가 넘는 엄청난 숫자의 조개 껍질은 태평양 혹은 인도양 등지에서 수입된 것임을 알려주어 당시 문화권들 간의 교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밖에 사천성 지역의 고대 석관묘에서 바륨(Ba)이 포함되지 않은 서방문화권에서 제작된 유리 구슬이 출토된 것 등을 보면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역의 범위가 아닌, 원시적인 실크로드(Silk-road)에 대해 추론할 수 있을 정도다34).


  특히 차나무의 기원지로 꼽히는 운남, 귀주, 사천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서남부 일대는 많은 하류의 발원지로서 운남의 원강(沅江)월남 홍하(紅河)의 상류이며 난창강(瀾滄江)은 라오스 메콩강의 상류이고, 노강(怒江)은 미얀마 살온강의 상류, 용천강(龍川江)은 미얀마 이라와디강의 상류이다. 아마 이들 강을 따라 형성된 각종 수로와 해상항로를 통해서 고촉국은 이른 시기부터 서방문화권 혹은 남방문화권 내 타 지역, 즉 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까지도 문화 교류의 장(場)으로 여기고 활약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촉국을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사천성 일대는 당시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 그 곳에서 타지역으로 전해진 문화 중에는 분명히 그 지역만의 독특한 차문화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뽕나무를 통해 비교 검토하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차나무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을 음용할 줄 알았던 촉인들이었기 때문에 차문화를 언급하는데 있어 고촉문화는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실제로 중국 서남부 일대에서 퍼져나간는 각지에 변종을 만들며 오늘날까지 번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 각지로 퍼져나간 차는 비단 중화문화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각지에도 그 자손을 퍼뜨렸다. 그리고 앞서 살펴봤던 여러 강들의 양안에는 수많은 야생 차나무가 분포하고 있는데 오늘날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스리랑카 뿐만 아니라 일본, 인도네이사 등지에도 적지 않은 차나무가 재배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중국 혹은 남아시아 각국의 항구를 통해서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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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茶經』上「一之源」, “揚執戟云 蜀西南人爲茶曰蔎.”

 

2)『華陽國志』券1「巴志」第2, “周武王伐紂, 實得巴蜀之師, 著乎.《尚書》巴師勇銳, 歌舞以淩商人, 商人倒戈. 故世稱之曰, 「武王伐紂, 前歌後舞」也. 武王既克商, 以其宗姬於巴, 爵之以子. 古者, 遠國雖大, 爵不過子. 故吳楚及巴皆曰子. 其地, 東至魚復, 西至僰道, 北接漢中, 南極黔涪. 土植五榖. 牲具六畜. 桑、蠶、麻、苧, 魚、鹽、銅、鐵、丹、漆、茶、蜜, 靈龜、巨犀、山雞、白雉, 黃潤、鮮粉, 皆納貢之.”

 

3) 왕웨이 외 著 / 박점옥 譯, 2001,『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대산출판사, p.90~105. 저자들은 염제와 신농씨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신농’이라는 단어는 전국시대에 생겨났으며 그 당시의 저작인『국어』『좌전』의 기록을 보면 염제와 신농씨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있으며 두 사람의 발상지도 신농씨는 후베이 쉐현(水縣), 염제는 산시의 웨이수이(渭水) 유역으로 다르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세본』이라는 책에서부터 동일시되다가 사마천의『사기』를 거쳐 동한시대 반고의『한서』에는 염제와 신농씨를 완전히 동일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오늘날 염황(炎皇)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쓰지만 엄밀히 말해서 권력의 강약이나 시기적인 관계로 봤을 때 황염(皇炎)이 옳다고 한다.

 

4) 김대성, 2002,『금문의 비밀』, 컬처라인, p.46~66. 그는 중국학자 駱賓基의『金文新攷』(산서인민출판사 ․ 1987) 등을 참고하여 한국사에 맞게 새롭게 금문을 해석하고 있다.

 

5) 김대성, 2006,『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 동아일보사, p.299~301. 저자는 초의선사가 신농씨‘차의 신’이라는 사실과 ‘동이족의 시조’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지만 구태여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조선시대 상국이었던 明과 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염제 신농씨가 차와 연관되어 이해되는 것이 상당히 후대에 의도적으로 시행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6) 蘇秉琦, 1981,「關于考古學文化的區系類型問題」『文物』제5기. 저자는 앙소문화와 하남용산문화 사이의 문화적 계승관계 및 馬家窯, 紅山, 大汶口文化 및 良渚, 齊家文化 등의 주변지역 신석기문화를 중원지역의 앙소문화 혹은 하남용산문화의 지방형태로 파악하는 당시의 견해에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문화를 독립된 6개 區域으로 나눌 수 있으며 비록 지역간 발전단계는 불균형적이지만 개별지역마다 각기 독립적인 文化淵源과 특징 및 발전단계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구분한 6개 구역은 대체로 (1) 燕山 남북과 長城地帶를 중심으로 하는 北方: (2) 山東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東方: (3) 關中(陝西), 晋南, 豫西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中原: (4) 太湖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東南部: (5) 洞庭湖 주변과 四川盆地를 중심으로 하는 西南部:: (6) 鄱陽湖와 珠江三角洲로 연결하는 南方으로 구획했다.

 

7) 崔夢龍, 2004,「인류 문명 발달사」『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 주류성, p.341.

 

8)『華陽國志』券3「巴志」第1 “魚鳧王田於湔山.”『화양국지』에도 똑같은 문구가 등장하고 있다.

 

9)『華陽國志』券3「巴志」第1 “周失紀綱, 蜀先稱王. 有蜀侯蠶叢, 其目縱, 始稱王. 死, 作石棺、石槨. 國人從之. 故俗以石棺槨為縱目人冢也. 次王曰柏灌. 次王曰魚鳧. 魚鳧王田於湔山, 忽得仙道. 蜀人思之, 為立祠於湔.”

 

10) 黃劍華 著 / 이해원 譯, 2002,『삼성퇴의 황금가면』, 일빛, p.23~27.

 

11) 치우지핑 著 / 김봉건 譯, 전게서, p.320~324.

 

12)『太平廣記』券37, “九隴居人長守珪 家甚富 茶園陽平化仙居山內 每歲召采茶人力百餘輩 男女傭工者雜之園中.” 해석하자면 “구롱에 사는 장수규는 집안이 대단히 부유했지만 차원이 있는 양평에서 신선으로 화하여 산속에서 살았다. 매년 차 따는 사람 백여명을 불렀는데 남녀 일꾼들이 차원에서 함께 일을 했다.”는 의미다. 즉, 사천성에 살던 巨富가 거대한 차원을 조성해 차를 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으니 사천성 일대에 장수규와 같은 대형 차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13)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2005,『기후의 반역-기후를 통해 본 중국의 흥망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p.59. 저자가 정리한 중국의 이상기후 통계 자료표에 의하면 겨울 ․ 봄에 눈과 얼음이 없었던 햇수는 춘추전국시대에 8번, 전한대에 2번, 남북조시대에 2번, 당대에 19번, 북송대에 14번, 남송대에 15번, 명대에 7번으로서 당대 기후가 어느 정도로 온난다습했는지 알 수 있겠다.

 

14) 徐中舒, 1930,「殷人服象與象之南遷」『中央硏究員歷史語言硏究所集刊』제2본.

 

15)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63~65.

 

16) 姚寶猷, 1935,「中國歷史上氣候變遷之一新硏究」『中山大學語言歷史硏究所彙刊』12月.

 

17)『書經』「禹貢」, “禹敷土 隨山刊木 奠高山大川.” 해석하자면 “우 임금께서 토지를 구획하여 다스리시고 산에 이르러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셨다.”는 의미로서 전체적으로 우 임금이 중화문화권을 다스리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배경 묘사가 흡사 온난다습한 열대우림에 대한 묘사와도 같다.

 

18) 이태진, 1996,「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grobal history의 한 章」『歷史學報』149, 歷史學會, p.204.

 

19) 胡厚宣, 1945,「氣候變遷與殷代氣候之檢討」『甲骨學商史論叢續集』, 成都齊魯大學國學硏究所.

 

20) 류제헌, 2004,『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지성사, p.122.

 

21)『華陽國志』券12「序志」第1, “孔子曰:「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則彭祖本生蜀, 為殷太史.” 해석하자면 “공자가 말하길 ‘옛 것을 이어받아 전하되 함부로 창작하지 않고 확고한 신념으로 옛 것을 좋아하는 이런 나를 적이 우리 노팽에게 견주노라’라고 하였는데 팽조는 본래 촉에서 태어났으며 은나라의 태사였다.”는 의미다. 즉, 촉인 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중화문화권 등 다른 문화권에서 활약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고대 문화권들 사이의 활발한 교류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22)『山海經』은 중국 고대 역사지리서인데 편찬자와 편찬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인 견해대로라면 하나라 우임금과 그의 신하 백익이 국토를 정리하고 각지의 산물을 파악한 결과를 편찬한 것이라 하지만 이 견해는 거의 신뢰성이 없다. 편찬시기에 대해서는 서주 초기(B.C 12세기)부터 가장 늦게는 위진시대(A.D 3~4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지리적 범위도 燕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 楚人이 쓴 楚國 주변, 고촉국인이 쓴 蜀國 주변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동이계의 신화적 내용을 담은 고서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아직 일관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그 기록을 인용하는데 있어 조심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23)『山海經』「海外北境」, “歐絲之野在大踵東 一女子跪據樹歐絲.” 해석하자면 “구사의 들은 대종의 동쪽에 있는데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나무에 기대어 실을 토해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養蠶과 연관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4)『太平廣記』券479, “蠶女舊迹 今在廣漢.”. 해석하자면, “잠녀의 옛 자취가 지금의 광한에 있다.”는 의미다.

 

25)『爾雅』에 보면 葵를 뽕나무 桑으로 쓰고 있다. 葵는 해바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桑과는 다른 식물이다.

    이창복, 2006,『원색 대한식물도감』2, 향문사, p.352. 해바라기는 국화과 식물로서 아메리카산 1년초이며 그 종자로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하거나 종자 자체를 식용으로 하고 있다. 뽕나무와 종이 다른 것은 물론 잎이나 가지 등의 모양, 개화기 등이 모두 다른데 그럼에도 이와 같은 설명이 가능한 것은 당시 식물학적 지식이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보다는 지역마다 다른 식물의 명칭 사용 혹은 의미하는 상징성 등이 비슷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26) 黃劍華 著 / 이해원 譯, 전게서, p.133~134.

 

27) 자향한의원(http://www.jahyang.net).

 

28)『天工開物』券2「衣服」〈葉料〉, “又有柘葉三種, 以濟桑葉之窮. 柘葉浙中不經見, 川中最多.” 해석하자면 ‘또 구지뽕나무(산뽕나무)에는 3가지가 있는데 뽕잎이 부족할 때 보충용으로 쓴다. 구지뽕나뭇잎은 절강에서는 잘 볼 수 없으나 사천에 가장 많다.’ 라는 뜻이다. 구지뽕나무는 뽕나무과의 갈잎작은큰키나무로서 황해도 이남의 산기슭 양지쪽이나 마을 근처에서 자라고 있으며 뽕잎이 모자랄 때 이것을 代用한다고 적고 있다. 즉, 사천성 일대에는 타지역에서는 잘 나지 않는 이와 같은 독특한 식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비단 뽕잎만 활용하던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풍부하게 이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29) 박선희, 2002,『한국 고대 복식-그 원형과 정체』, 지식산업사, p.133~134.

 

30)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80~87.

 

31) 권태원, 1980,「土山茶와 茶禮考」『호서사학』8·9집, 호서사학회, p.12. 이미 중국에서 주대에 '물(水)', 우유류(牛乳類)를 총칭한 '장(漿)', '식혜(醴 혹은 甘酒)', '빙수(凉)', 산매탕(酸梅湯), 즉 매실차인 '의(醫)', '미음' 이렇게 6가지 식음료가 있었다고 하면서 당시 차는 일반적으로 음용되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주대에 차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보편적인 식음료가 아니었던 듯 싶다. 혹은 갑작스런 한랭기후를 맞아 촉 지방에서의 차 생산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고 차문화의 지속적인 전파가 불가능해졌기에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32)『華陽國志』券3「蜀志」第1, “周顯王之世, 蜀王有褒漢之地. 因獵谷中, 與秦惠王遇.” 해석하자면, “주나라 현왕치세때 촉왕이 포와 한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수렵을 하던 중 진나라 혜왕을 만났다.”이다.

   『華陽國志』券3「蜀志」第1, “以褒斜為前門,” 해석하자면 “포야로 앞문을 삼았다.”이다.

   『華陽國志』券3「蜀志」第1, “功秦至雍.” 해석하자면 “진나라를 공격하여 옹에 이르렀다.”이다.

    즉, 당시 촉나라는 포와 한의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 국토가 포야와 옹에 이르렀는데 포야란 포곡과 야곡을 의미하며 옹은 현재 섬서성 봉상현 남쪽 보계(寶鷄)를 의미한다. 즉, 당시 촉의 영토가 단순히 사천지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섬서성 일대에까지 폭넓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라 하겠다. 게다가『蜀王本紀』에는 “촉왕이 만여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포곡에 수렵을 나갔다.”는 기록까지 남기고 있어 잔도 등의 교통로가 대규모 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들 교통로를 따라 촉 지역의 문화는 중화문화권 각지로 뻗어나갔을 것이다.

 

33)『史記』券129「貨殖列傳」第69, “及秦文、(孝)[徳]、繆居雍,隙隴蜀之貨物而多賈 … 巴蜀亦沃野 … 然四塞,桟道千里,無所不通,唯褒斜綰轂其口,以所多易所鮮.” 해석하자면 “진 문공, (효)덕공, 목공이 옹에 도읍하였는데 이 곳은 농, 촉의 물자가 교류되는 요지였고 상인들도 많았다. … 파촉 또한 비옥한 땅이다. … 연이어 사방이 가로막혀 있어 잔도를 천리에 걸쳐 만들어 이를 통해서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포야의 통행로에서는 사방의 도로를 이곳 출입구로 묶어 집중시킴으로써, 여유 있는 물자와 부족한 물자가 교환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주석에는 “「在漢中.」索隠言褒斜道狹,綰其道口,有若車轂之湊,故云「綰轂」也.”이라 하여 “포야의 통행로가 굉장히 험난하고 협소한 도로여서 곡식을 실은 마차가 진나라를 다니기에 힘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두고 ‘綰穀’, 즉 ‘얽어 맨 곡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34) 정수일, 2005,『씰크로드학』, 창비, p.219.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구자들은 주대와 춘추시대 전기의 b적에서 출토된 파이앙스 구슬류(珠玉)를 유리로 착각하여 중국 유리의 제조 편년을 서주 시대까지 올려잡았으나 1927년 주대의 고성 낙양현 금촌에서 만들어진 유리 제품을 확인한 결과, 그 제조연대는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로 추정되었다. 이 유리들은 서아시아의 소다유리와는 달리 바륨을 다량 함유한 납 유리로서 중국의 독창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고로 고촉국에서 발견된 바륨이 포함되지 않은 유리는 타 문화권의 산물이 틀림없으며 이는 곧 실크로드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2. 春秋戰國時代의 起源地와 傳播 經路

 

  이후 뒷시기의 문헌에도 촉 지역과 차와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 전국시대 촉나라 왕은 동생 가맹(葭萌)을 한중(漢中)의 제후로 임명하면서 저후(苴侯)라고 부르고 그 땅을 가맹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서 현재 사천성 광원(廣元)소화(昭化) 일대인 가맹은 문헌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차를 지명으로 삼은 지역인 것이다. 또한 양웅『법언(法言)』을 편찬하면서 가맹이라는 이름을 차와 연관시켜 풀이하고 있어 인명과 지명이 모두 차와 연관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1).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을 보면 앞서 살펴봤던 ‘잔도(棧道)는 천리로 촉한(蜀漢)까지 통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2). 즉, B.C 403~221년 사이의 200여년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화문명권과 촉, 한까지 통하는 잔도, 가파른 절벽 위에 구멍을 뚫어 받침대를 세운 뒤 그 위에 널빤지를 펼쳐 만든 도로가 있었음을 거듭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B.C 316년, 진 혜문왕(惠文王)은 사마착(司馬錯)으로 하여금 촉을 정벌하게 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며3) 소양왕(昭襄王)은 B.C 311년, 사마탁을 재차 보내 반란을 일으킨 촉을 다시 정벌했다4). 이처럼 섬서(陝西) 지방에서 촉으로 진군(進軍)한 진나라 군대는 촉 지방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고 이후 초나라를 공략할 때 이미 점령한 파촉의 땅을 우회할 수 있었다. 한때 중화문화권과 대등하게 교류하며 빛나는 문화를 만들어냈던 촉 지방이 중화문화권으로 진입하려는 서방문화권 출신의 진나라에게 멸망했고, 이후 이 지역은 중화문화권으로 빠르게 통합되어 갔다.

  이 역시, 잔도를 통한 촉 정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청대(淸代) 고염무(高炎武)는 그의 저서『일지록(日知錄)』에서 “진인(秦人)이 촉(蜀)을 취한 후에 비로소 차를 마시는 일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5) 하상주 삼대에 고촉국의 차문화가 중화문화권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에 대해 재차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춘추전국시대의 직접적인 차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사료는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문명교류라는 측면과 중국 역대 기후 변화상을 살펴봤을 때 사천성 일대에서 야생 차나무든, 재배 차나무든 차에 대해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으며 또 그것을 음용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로 촉 지방을 정벌함으로써 진나라에서 차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보다 이른 시기인 춘추시대(B.C 770~403)에도 역시 이 지역에서 차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춘추시대의 차문화에 대해서 확인해볼 길이 거의 없다. 일단『다경』에는 염제 신농씨부터 차를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 확인해볼 길은 없으며 신농씨가 저술했다고 하는『신농식경(神農食經)』 실전(失傳)하여 전하질 않는다. 다만『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를 보면 신농황제식금(神農黃帝食禁) 7권이 전해질 뿐인데 그 내용이나 구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6). 


  그나마 전해지는 것이라면『안자춘추(晏子春秋)』에 적힌 기록7)이 있는데 문제는 안영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이 사실은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B.C 6세기 사람이었던 안영이 정말로 차를 마셨을지에 대해서 일단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필자는 이미 고촉국에서 차문화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음다의 풍속도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는 음주(飮酒)의 역사와 맞물려 봤을 때, 농경의 기원과 같이 이해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언급이며8) 문명교류라는 측면에서 고촉국의 그러한 문화가 중화문화권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다만, 여기서 안영이 마셨던 차가 제나라가 위치하고 있는 산동성 근방에서 난 차인지, 아니면 촉 지방에서 재배된 차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 본고에서는 서주 말기에 급격한 한랭기후가 찾아와 국가가 파탄 지경에 빠졌고 결국은 견융의 침입으로 도읍을 옮겼음을 확인했다. 이후 평왕이 동으로 천도한 이후에 비로소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으니 이때가 B.C 770년 무렵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기후 기록을 보면 겨울과 봄에 눈이 오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은 해가 8년에 달할 정도로 온난다습했는데 이는 이후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이 당시의 각종 문헌을 보면 당시 황하 일대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코뿔소와 코끼리다. 실제 그 시대 각종 코뿔소나 코끼리를 본뜬 술잔과 혁대 고리 등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어떤 동물들을 쉽게 보고 지냈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코끼리나 코뿔소황하 유역부터 시작해서 양주와 형주, 예주(하남성)를 비롯해 회남과 회북 일대, 사천성 일대, 장강 중하류 일대 등 중국 전지역에서 확인이 되는데 송나라 등에서는 코뿔소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고 초나라와 오나라는 코끼리를 군대에서도 이용할 정도로 코뿔소와 코끼리가 많았던 듯 싶다. 


  B.C 4세기 무렵, 인도 서북부를 정복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그 지역은 혼란에 빠졌고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Chandragupta)는 그 지역을 탈환한 뒤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 벵골만에 이르는 광할한 영토를 정복하고 북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게 이르렀는데 당시 그가 가진 병력은 보병 60만명, 기병 3만명, 코끼리 9천마리였다고 한다9). 아마 알렉산더인도 서북부를 정벌했을 때 그의 병사들은 이런 인도의 대규모 코끼리 부대를 보고 공포심을 느꼈는데 실제 춘추전국시대 중국이 인도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이는 곧 중국 전지역이 그만큼 온난다습한 기후였음을 알려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따뜻한 기후가 전국적으로 작용했다면 차가 제나라 지역에서 이미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하지만 산동성 일대는 춘추전국시대보다 기후가 온화했던 당대에도 차가 재배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중국에는 주요 삼림 지역이 총 7군데 분포하는데 장백산 지구, 태행산 지구, 화북평원 중남부 지구, 영소평원 지구, 하남 ․ 산동 ․ 사천 ․ 섬서성의 경계 지구, 민강 중 ․ 상류 지구, 뇌주반도 지구 등이 바로 그러하다10). 


  이들 지역 중 일부는 차의 생산지로서 적합한 지형들인데 그것은 전형적인 산림 지역이기 때문이며 또한 기후 변화에도 불구하고 적정 온도 이상의 연평균기온을 유지하던 곳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 때 이미 B.C 2세기에 삼림이 소멸되어 땔감이 부족한 사태까지 이르렀던 산동성 일대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차가 재배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차재배가 본격화되지 않아 사천성 일대에서도 야생 차나무에서 차를 얻었기 때문에 이미 춘추시대때 산동성까지 차재배 기술이 전파되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로 당시 안영이 마셨던 차사천성 일대에서 생산된 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자들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때 발효차의 대표격인 보이차(普洱茶)11)를 가져가는데 당시 파(巴)의 여자들도 결혼 예물로 차를 가져갔었다. 이는 춘추시대 차가 굉장히 귀한 물건이자 상징성이 큰 물건임을 반증하는 기록12)이며 사료상에는『좌전(左傳)』노나라 소공 13년조초나라 공왕(共王)파의 여자와 결혼한 내용이 실려있다. 기록상 확인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지만 파의 여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시집갔을 경우는 예물로 차가 딸려갔을 것이며 덩달아 사천성 일대의 차문화가 각지로 전해졌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13). 고로 춘추전국시대는 이전 시대에 비해 사천성 일대의 차문화가 보다 폭넓게 각지로 전파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온난다습한 기후가 계속되던 시기로서 벼농사와 관련된 내용이 각종 문헌에서 급증하던 때다. 마찬가지로 앞서 살펴봤던 뽕나무에 대한 내용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지금은 양잠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황하 일대에서 양장업이 장강 일대만큼이나 발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국시대가 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대립하던 진(秦)과 초(楚), 혹은 그 주변의 여러 집단들 사이에서 차문화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차문화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집단들은 차의 효용을 인식하고 그것을 그 문화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최소한 B.C 5~4세기 무렵, 전국시대가 도래한 이후부터는 중화문화권에서도 어떤 계통으로든지 남방문화권으로부터 차문화를 전수(傳受)받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실제 차의 기원을 얘기할 때 염제 신농과 달마 이외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전국시대의 명의(名醫) 편작(扁鵲)이다. 그는 모두 8만 4천가지 병에 대한 약방문을 알고 있었는데 절반도 안 되는 4만가지 약방문 정도만을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때, 너무 유명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쟁자의 흉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한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무덤 가에서 100일 슬퍼하니 편작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아올랐으니 이것이 바로 차나무였다고 한다. 이에 제자들이 그 나무를 연구해봤더니 그 잎에 담긴 여러 성분이 신비한 효능을 보여 나머지 4만 4천가지의 약방문을 거기서 얻게 되었고 이후 차가 만병 예방의 불로초로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14). 이는 그만큼 전국시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의약학도 뛰어난 발전을 이뤘는데 그때 차가 중요한 약재로 활용되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전국시대 말기가 되면 오늘날에 비해 연평균기온이 1.5℃ 높아졌는데 실제 황하 일대에 여러 지류가 교차하고 있다는 당대의 사료들『서경』과『주례(周禮)』에 기록된 황하 일대의 13개가 넘는 호수들은 당시 황하 일대가 습지(濕地)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15). 


  Marvin Harris는 어린이가 쓴맛, 신맛, 톡 쏘는 맛, 짠맛, 매운 맛 등이 나는 음식을 입에 넣으면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자연 선택 원리에 잘 맞아떨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음식들은 대개 독이 있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요리법이 진화하는 동안에 문화적 선택의 힘은 그런 타고난 거부 반응의 영향력을 쉽게 압도하게 마련인데 그 한 예로 그는 중국인들이 매우 뜨겁고 쓴 차를 즐기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는 문화가 도약한 이후 진화하는데 있어 자연 선택과 문화적 선택의 비중을 따져야만 식문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16).


  즉, 차문화에 대해 이미 인식하고 있던 사천성 일대의 사람들은 어떤 필요성에 의해 차를 음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자연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차가 초기에 약용(藥用)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또한 신농과 연관된 전설이 등장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며 그런 연유로 차는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 등에 의해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음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17).

  즉, 촉인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선택된 음다 풍속은 이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유동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전국시대를 맞이해 더욱더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지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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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판권, 전게서, p.131. 지명과 인명이 같은 경우는 요임금을 唐 지역의 당으로, 순임금을 虞 지역의 우로 부르는 것처럼 중국에서 일찍부터 사용하던 관례였는데 가맹의 경우 ‘차’라고 하는 매개물에 의해 인명과 지명이 정해진 경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戰國策』券5「秦策」第3〈蔡澤見逐於趙〉, “棧道千里於蜀漢.”

 

3)『史記』券5「秦本紀」第5, “惠文君 九年,司馬錯伐蜀,滅之.” 이 정벌전은 지금의 섬서성 勉縣에 위치하고 있는 石牛道를 통해서 이뤄졌는데 석우도는 한편으로 金牛道라고도 불린다. 진나라 혜문왕이 촉국을 정벌하고자 할때 산길이 험하고 길이 없어 촉을 정벌하지 못 하자 꾀를 내었다. 금으로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고는 말하기를 ‘이 소는 똥을 누면 그 똥이 황금으로 변한다.’고 한 것이다. 이에 촉왕이 장정 다섯을 선발하여 길을 트고 그 소를 갖고 오게 했으며 진나라 군대는 촉왕이 튼 길을 통해서 촉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고 한다.

 

4)『史記』券5「秦本紀」第5, “昭襄王 六年,蜀侯煇反,司馬錯定蜀. 庶長奐伐楚,斬首二萬.”

 

5)『日知錄』券7「茶」, “自秦人取蜀 而後始有茗飮之事.”

 

6)『漢書』券30「藝文志」第10, “神農黃帝食禁七卷.”

 

7)『茶經』下「七之事」, “晏子春秋 嬰相齊景公時 食脫粟之飯 炙三弋 五卵 茗萊而已.”

    해석하자면 “『안자춘추』에는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이었을 때 식사할 때 겉껍질 벗긴 쌀밥과 구운 고기 세 꼬치, 다섯 개의 알과 차와 나물을 먹을 따름이었다.’라고 했다.”는 뜻이다. 즉, 안영이 일국의 재상이었음에도 검소한 식단을 즐겼으며 그 안에 차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8) 왕웨이 외 著 / 박점옥 譯, 전게서, p.118~141.

 

9) 鄭柄朝, 1997,『인도史』, 大韓敎科書株式會社, p.57.

 

10) 류제헌, 전게서, p.60.

 

11)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 푸얼차(Puer tea)라고도 하며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들이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발효한 흑차의 일종이다. 여러 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푸얼현(普洱縣) 차시장에서 모아 출하하기 때문에, 普洱茶라는 이름이 붙었다. 푸얼차는 운남 대엽종 차잎을 이용하여 햇볕에 건조시켜 만든 母茶를 이용하여 만든 차를 말하지만, 원료의 부족으로 사천성, 베트남, 타이 등지의 차엽으로도 만들고 있으며, 이런 차를 변경보이차라고도 한다. 오래되면 될 수록 떫은 맛이 사라지며, 향기가 오래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잎을 우려낸 색깔은 옅은 홍색에서 세월이 지날 수록 심홍색 계통으로 변해간다. 포장에는 대나무껍질을 사용하는데 습기를 막고 잡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다. 형태는 잎차인 散茶, 쪄서 덩어리로 만든 緊壓茶가 있으며, 긴압차의 종류는 병차, 전차, 긴차, 방차, 타차 등 시중에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다. 소수민족들이 주로 마시다가 중국 본토로 알려졌으며 1726년에 이르러서는 貢茶로 지정되었다. 오래 묵은 차일수록 품질이 좋으며, 가장 오래된 金瓜貢茶인 푸얼차는 100년 정도 되었다. 자연건조법인 건창법으로 만들어진 차는 문화대혁명 때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유통되는 것은 渥堆라는 제조공정을 이용하여 미생물을 생성시켜 속성발효시킨 모차를 건조 후 긴압해서 출하는 숙병이 대부분이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청병보이차는 그 생산량이 적다.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용하는 사람들이 증가 추세에 있다. 마시는 방법은 우선 덩어리로 된 것은 잘게 부수고, 산차는 그대로 2∼3g의 찻잎을 다관에 넣는다. 끓인 물을 부어 2∼3분간 우려내어 처음 우려낸 찻물은 버리고 그 다음부터 맛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우려 마실 수 있다. 홍차보다 색이 짙고 떫은 맛이 없다.

 

12) 차나무는 한번 심으면 뿌리를 깊이 내리는 성질(直根性)이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쉽게 죽는다. 그렇기에 시집가는 딸에게 차를 예물로 같이 보내기도 하고 시집오는 며느리에게 차나무 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혼례를 마친 신부가 친정에서 마련 차와 茶食을 시댁의 사당에 바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차나무가 갖는 고유의 상징성을 반영한 행위라 할 수 있다.

 

13) 강판권, 전게서, p.129.

 

14) 이기윤, 2000,『바른 차생활의 필독서, 한국의 차문화』, 개미, p.34.

 

15)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88~103.

 

16) Marvin Harris 著 / 김찬호 譯, 1995,『작은 인간,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민음사, p.152~161.

 

17) Marvin Harris 著 / 서진영 譯, 2003,『음식문화의 수수께끼』, 한길사, p.13~19. 저자는 어떤 음식이 먹기 좋으냐 나쁘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음식의 영양가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비용과 이익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적인 측면에서의 식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이며 그것으로 환경적인 측면이나 시간, 노력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차 역시 처음에는 차의 효능 때문에 음용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식용작물의 하나로서 음용되다가 이후 그 효능이 연구됨에 따라 점차 그 성격이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약용으로 쓰이던 차가 보편화되면서 당대 이후로는 飮料로 알려졌고, 茶道라고 하는 독특한 음료 문화까지 형성된 것 역시 생태학적 제약에서 시작한 차 음용이 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독특하게 변한 문화적 양상이 아닐까 한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3. 先秦~漢代의 茶文化와 傳播 經路

 

 『한서(漢書)』를 보면 B.C 206년, 유방은 한왕(漢王)으로 봉해져 파, 촉, 한중 41현을 다스리되 그 도읍을 섬서성(陝西省)의 오지(奧地)인 남정(南鄭)으로 정하였다. 이는 유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항우가 그를 변방에 안치시키고, 관중(關中)을 삼분하여 진나라에서 항복한 장감(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을 각각 그 곳에 봉하여 유방을 견제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유방은 잔도(棧道)를 스스로 태워 끊음으로써 적을 안심시키고 서서히 힘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1). 즉, 잔도라는 것이 당시 파, 촉 지역과 중화문화권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표적인 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와 유방이 대치하며 한나라가 세워지기까지 대략 9년의 세월이 흘렀고 촉 지방에서 중화문화권으로 통하는 잔도가 끊어졌지만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전국이 재차 통일되었고 촉 지방 역시 한(漢)이라고 하는 새로운 나라의 통치구역 중 하나로서 중화문명권에 편입되었다.  

  이미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전국의 치도(治道)는 로마제국처럼 4,000마일에 걸쳐 길게 뻗어나갔고 한나라 역시 역전제도(驛傳制度)를 도입하여 각지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다2). 그렇게 봤을 때 잔도가 끊어졌다고 하여 촉 지방과 중화문화권 사이의 교류가 단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통일제국의 등장과 함께 이전보다 활발하게 촉 지방의 차문화가 타 지역으로 뻗어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한 고조 유방은 새로운 통일제국의 지방통치체제로 봉건제(封建制)와 군현제(郡縣制)를 뒤섞은 과도기적인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했는데 고조 5년(B.C 198년) 설치한 현 중에 장사(長沙)의 도릉현(荼陵縣)이라는 차 관련 행정명칭이 등장한다. 현재의 호남성 차릉(茶陵)과 염릉(炎陵) 지역으로서『다경』에 이미 거론되고 있는 지역이었다3). 즉, 전국시대 촉왕이 그 동생을 봉해 차로 이름과 지명을 삼게 했던 것처럼 한 고조 역시 차와 연관된 지명을 행정 명칭으로 삼은 셈이다.

  이후 문헌을 보면 진과 한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한 이후 중화문화권에서 차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고 음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서한(西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범장편(凡將篇)』에는 당시의 약품 20여종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천타(荈詫)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차이다4). 사마상여 사천성 출신으로서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성도(成都)에서 주점을 연 적도 있으며 그의 이런 견해는 분명 그가 고향에서 직접 본 것을 토대 위에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한 무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총신(寵臣)이었던 점을 본다면 B.C 2세기 무렵에 사천성 지방의 차문화가 중화문화권에 확실하게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사마상여가 활약할 한 무제 시기는 이전의 문제와 경제 시기 축적된 국력과 고도로 체계화된 전제왕권이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그는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동시에 지방 제후국들의 봉토를 삭감하였으며 고조 때 열후로 책봉된 사람들 대부분을 파면시키는 조치를 위한다. 


  뒤이어 상인상홍양(桑弘羊)과 동곽함양(東郭咸陽), 공근(孔僅)을 기용하여 나라의 재물을 관리하게 했는데 그들은 순전히 어용관리(御用官吏)로서 국부(國富) 확대에만 기여하는 폐단을 낳았다. 이 시기 염철론(鹽鐵論)5)이 대두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 결과, 한 무제는 철저한 팽창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는 독재정치의 폐단에 빠지게 되었다6). 염철론에서 차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훗날 차를 전매(專賣)하기 시작한 당대(唐代)에 비해 차가 상품가치가 적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금, 철, 술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지, 차가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차의 효능에 대해서 쓴 각종 서적들이 진한 교체기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화양국지』에는 부릉, 시방, 남안, 무양은 모두 명차가 난다고 하여7) 그 역사가 서한에서 진(晉)까지 200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진나라에 의해 촉 지방이 정벌된 이후에는 차문화가 진나라를 통해서 혹은 촉 지방과 교통하는 여러 집단들에 의해서 각지로 뻗어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교통이 불편했던 잔도와 같은 육로(陸路)보다는 장강(長江)과 그 수계(水系)를 따라서 장강 중 ․ 하류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8).


  실제로 1972년 호남(湖南)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시기에 차 음용에 대한 기록을 분명하게 남기고 있다. 마왕퇴 한묘의 문물은 한대 초기 문명의 축소판이라고들 말하는데 이들 문물들은 한대 초기의 농업 문명, 수공업 문명, 그리고 과학기술과 문화 예술의 발전 수준을 깊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마왕퇴 한묘 문물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바로 한대 초기 문명에 대한 특별한 각도에서의 종합적인 연구인 셈이다.

  그 중 1호묘(B.C 160년)와 3호묘(B.C 65)에서 각각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는 각각 가일사(檟一笥)와 가사(檟笥)라고 쓰여져 있었다. 가(檟)의 이체자가 적혀 있었는데 이는 곧 도(荼), 즉 씀바귀를 의미하는 쓴 차였다9). 특기할만한 사실은 1호에서 출토된 죽간 견책(遣策), 즉 부장품을 기록한 장부로서 대략 312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차 상자가 있다는 것은 당시 차가 부장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닐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3호묘에서 출토된 목간은 의간(醫簡)으로서 수량은 200개인데 재미있는 것은 성생활(性生活)과 성의학(性醫學) 등을 서술한 합음양(合陰陽)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0).

  즉, 당시에 차가 성의학과 관련되어 복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진송장(陣松長)이나 이강범이미 실전된 의학서를 마왕퇴에서 찾아냄으로써 초기 한대의 의학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극찬을 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약물명이 400종이 넘게 등장하고 있어 그 수량이『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365종을 초과할 뿐 아니라 자연계의 동 ․ 식 ․ 광물을 그대로 약재로 사용하는 극히 초보적인 처방까지 담겨 있어 굉장히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안에 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문헌기록이 아닌 실질적인 고고 자료로서의 약용되던 차의 실체를 밝혀줬기 때문이다11)


  그리고 서한 시대에 중요한 차와 관련된 기록 선제때 관료였던 왕포(王褒)가 작성한「동약(僮約)」이라는 문헌이다. 선제 신작 3년(B.C 59년) 편료라는 사람이 왕포에게 시종으로 팔려와 해야 할 일 중 차달이기(烹茶)와 차사오기가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왕포의 고향 사천성 무양(武陽)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인데 사천성 일대가 차의 주요 산지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위 기록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당시 차를 판매하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왕포처럼 시장에서 차를 사서 마시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즉, 당시 차문화가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다는 뜻이 될 텐데 이제는 차가 약이 아니라 음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12).

  이때가 B.C 2세기에서 B.C 1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이며 분명 서한 시대에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차가 실생활에서 음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차를 시장에서 팔 정도로 상품화가 되었다는 뜻은 곧 사천성 일대에서 차 생산업이 주요한 산업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하겠다. 


  덧붙여 왕총런[王從仁]『다경』에 인용된 양웅(揚雄)『방언(方言)』 ‘촉의 서남 사람들은 이라고 한다.’13)고 하였다는 기록을 서한 시대 차문화의 또 다른 근거자료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14).

  왜나하면 양웅(B.C 53~A.D 18)서한 말의 사람이지만 곽박(郭璞)진(晉)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서한 대의 인식과 다른 진대의 인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갖고 서한 시대에 차문화에 대해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참고할만 하여 본고에 같이 소개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한왕(漢王)이 일찍이 강소(江蘇) 의흥(宜興)의 명령(嶺), 즉 차산지의 ‘과동예도(課童藝荼)’라는 곳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이는 곧 학동(學童)들을 모집해 차를 경작하는 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실시한 곳으로서 이는 왕실의 관리 하에 차를 경작하는 농공업이 이미 전문화되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또한 한대(漢代) 갈현(葛玄)이라는 명사가 절강(浙江) 천태산(天台山)에 ‘식다지포(植茶之圃)’를 설립했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진시황 26년(B.C 221년)부터 유방이 한왕에 봉해질 무렵인 B.C 206년 무렵까지 중국에는 일시 약한 한냉기후가 찾아왔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상당히 온난다습한 기후였었기 때문에 소빙하기(小氷河期)라고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이내 온난다습한 기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식생에 크게 변화를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B.C 206~B.C 30년 사이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략 160여 년동안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두 차례 등장할 정도로 대체로 온난다습한 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29년 이후부터 장장 600여 년간의 제2차 소빙하기가 도래하게 되어 이후 서한과 신의 멸망, 후한 왕실의 쇠퇴와 멸망, 5호16국과 뒤이은 한족의 대규모 강남으로의 도래, 남북조시대의 등장이라는 혼란한 역사를 초래하게 된다. 화분 화석의 연구를 통해 추정했을 때 당시의 연평균기온은 오늘날보다 0.5~1℃ 가량 낮았는데 실제로『한서』등에 보면 몹시 가물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후한 이후 가뭄은 더욱 심각해졌고, 민생은 갈수록 궁핍해져 안제(安帝) 영초(永初) 3년(109) 이후 100년간 반란이 그치지 않더니 결국 황건적(黃巾賊)의 봉기 후한은 멸망하고 만 것이다15). 


  이후 삼국시대가 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16). 220~264년 사이 겨울에 장강 ․ 회화 ․ 한수가 얼어버릴 정도의 혹한은 물론 가뭄 또한 심각하여 매년 가뭄과 서리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후한서(後漢書)』를 보면 사대부와 백성이 가뭄과 흉년에 얼거나 굶주려 죽고 장강과 회수 사이에는 사람끼리 잡아먹어 인적이 끊어졌다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다17).

  상황이 이러다보니 이 시기의 차문화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가 자랄 수 있는 환경치고는 너무 한랭해진 것은 물론이요, 이전 시기에 비해 호구수가 크게 줄고 백성들의 생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18) 차를 음용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부류는 일부 특권층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삼국지(三國志)』를 보면 일부 특권층에서 차를 즐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위요(韋曜)가 그 주인공인데 그는 오나라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19) 고릉정후(高陵亭侯) 중서복야(中書僕射)까지 올라갔던 인물로써 그와 차에 대한 에피소드가 간략하게 남아있어 흥미롭다. 그가 처음에는 손호의 신뢰를 얻어 술을 못 하는 대신 를 마실 수 있었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0).

  손호가 즉위했던 3세기 중후엽(264~280) 무렵, 전국적으로 한랭기후의 영향을 받았고 농서(隴西) ․ 옹주(雍州)에서는 6월에 서리가, 성도(成都)에는 8월에 큰 눈이 내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촉 지방에서의 차 생산이 순조로울리 없었을지도 모르나 워낙 차나무가 겨울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이다 보니 꾸준히 적정량의 차는 재배되었을 듯 싶다. 제1차 소빙하기때 상문화의 쇠퇴와 전국적인 한파(寒波)로 인해 차재배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을 테지만 꾸준히 차문화가 유지되고 각지로 전파된 것처럼 제2차 소빙하기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경』을 보면『광아(廣雅)』를 인용하며 말하기를 형주와 파주 사이에서 찻잎을 떡으로 만들어 병차(餠茶) 형태로 음용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때 파, 생강, 귤을 함께 넣어 끓여 먹는다고 적고 있다21). 이 책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즙(張楫)이 지었는데 당시 차가 분명히 단순한 식음료가 아니라 약차(藥茶)22)로서 음용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동한시기와 삼국시대의 차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며 다만, 3세기 초 조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동한 시대의 명의(名醫) 화타(華佗)는 그의 저서『식론(食論)』에서 찻잎이 약물로 사용되는 상식을 논술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장강 하류 지역인 강회(江淮) 지역, 즉 지금의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에서 민간 요법으로서 차를 약물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3세기 초엽에 장강 하류 지역까지 확실하게 차문화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23).


  이처럼 수로를 따라 장강 일대에서 차가 널리 전파되었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던 잔도(棧道), 즉 ‘촉신독도(蜀身毒道)’라고 불리며 사천, 운남, 미얀마와 인도 등지를 연결했던 육로를 통해서도 타문화권으로 차문화는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독도(毒道)라고 이름 붙여질만큼 이 험난한 길은 지금의 사천 성도로부터 천서(川西) 평원을 지나 서창(西昌) ․ 도구(渡口)에 이르러 금사강(金沙江)을 넘어 운남 대리(大理)에 이르고 난창강을 지나 보산(保山) ․ 등충(騰衝)으로부터 미얀마로 가고 다시 미얀마에서 인도로 이어진다.

  요원한 상고시대에 빽빽한 열대 우림 기후 사이를 말방울을 울리며 가던 상인들은 중국과 남아시아 대륙을 소통시켰고 비록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방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찾아지지는 않지만 오늘날 미얀마와 인도의 차 재배 상황을 상기했을 때 촉신독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24).


  또한『남월지(南越志)』를 보면 ‘용천현(龍川縣)에 고로(皐盧)가 있는데 잎이와 비슷하다. 선비들은 이것을 과라(過羅) 혹은 물라(物羅)라고도 했는데 모두 이어(夷語)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25). 여기서 이어는 바로 ‘이족(夷族)이 쓰는 말’이며 고로라고 하는 차나무의 명칭 자체가 이족이 쓰던 말을 차용해서 중화문화권에서 쓰게 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즉, 중국인들 스스로도 새로운 문화적 요소인 차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외래문화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한과 동한 시대를 거치면서 중화문화권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전의 동 ․ 서 ․ 남 ․ 북방문화권이 축소됨에 따라 남방문화권의 문화적 요소였던 차문화는 이제 남월국을 평정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정벌함으로써 중화문화권의 남계(南界)를 한껏 연장시킨 중화문화권의 문화적 요소로 탈바꿈하기 시작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제2차 소빙하기는 한껏 확대되어 번영일로에 있던 중화문화권을 정체(停滯)시켰고, 결국 중화문화권의 붕괴 및 해체라는 결과를 갖고 왔다. 그리고 차문화 역시 이 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니 역사상 소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고 불리는 대분열기(大分裂期)가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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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漢書』券1上「高帝本紀」第1上, “二月, 羽自立爲西楚霸王, 王梁、楚地九郡, 都彭城. 背約, 更立沛公爲漢王, 王巴、蜀、漢中四十一縣, 都南鄭. 三分關中, 立秦三將:章邯爲雍王, 都廢丘;司馬欣爲塞王, 都櫟陽;董翳爲翟王, 都高奴. 楚將瑕丘申陽爲河南王, 都洛陽. 趙將司馬卬爲商王, 都朝歌. 當陽君英布爲九江王, 都六. 懷王柱國共敖爲臨江王, 都江陵. 番君吳芮爲衡山王, 都邾. 故齊王建孫田安爲濟北王. 徙魏王豹爲西魏王, 都平陽. 徙燕王韓廣爲遼東王. 燕將臧荼爲燕王, 都薊. 徙齊王田市爲膠東王. 齊將田都爲齊王, 都臨菑. 徙趙王歇爲代王. 趙相張耳爲常山王. 漢王怨羽之背約, 欲攻之, 丞相蕭何諫, 乃止. 夏四月, 諸侯罷戲下, 各就國. 羽使卒三萬人從漢王, 楚子、諸侯人之慕從者數萬人, 從杜南入蝕中. 張良辭歸韓, 漢王送至褒中, 因說漢王燒絕棧道, 以備諸侯盜兵, 亦視項羽無東意.”

 

2) John King Fairbank 著, / 중국사 연구회 譯 , 1994,『新中國史』, 까치글방, p.71~80.

 

3)『茶經』下「七之事」, “茶陵圖經云 茶陵者 所謂 陵谷生茶茗焉.” 해석하자면 “『다릉도경』에 이르기를 ‘다릉이라는 곳은 이른바 언덕의 골짜기에서 차가 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라는 의미다. 荼가 곧 茶와 같은 의미라는 것은『爾雅』「釋部」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도릉현은 곧 차 생산지라는 의미의 다릉현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도릉현은 당대 강남 형주의 다릉현으로 재편된다.

 

4)『茶經』下「七之事」, “司馬相如 凡將篇. 烏啄, 桔梗, 芫華, 款冬, 貝母, 木蘖, 蔞, 芩草, 芍藥, 桂, 漏蘆, 蜚廉, 雚菌, 荈詫, 白斂, 白芷, 菖蒲, 芒硝, 莞草, 授乳.”

   해석하자면, “사마장여의『범장편』에는 오탁(바꽃), 길경(도라지), 원화(서향나무), 관동(민들레), 패모(백합과), 목얼(누룩나무), 누(쑥의 일종), 금초(화본과의 관속), 작약, 계수나무, 누노(절인 대뿌리), 비렴(삽주), 환균(왕골버섯), 천탁(차), 백렴(가회톱), 백지(구리때뿌리), 창포, 망초(유산소다), 완숙(난디나무 열매), 수유가 있다.”는 의미다.

 

5)『漢書』券7「昭帝紀」第7, “二月, 詔有司問郡國所舉賢良文學民所疾苦. 議罷鹽鐵榷酤” 소제 시원(始原) 6년(B.C 81년)에 한 무제는 “담당 관리와 郡國이 천거한 현량과 문학에세 황제가 백성의 아픔과 고생을 묻고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제도에 대해 의논하여 혁파하게 하라.”는 鹽鐵會議를 열게 된다.

 

6) Ray Huang 著 / 권중달 譯, 2005,『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푸른역사, p.94. 저자는 한무제 시절 당시의 한나라가 지역간 불균형이 심하고 내부 갈등이 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내부 문제의 외면화가 필수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남월을 평정하고 조선으로 군사를 진격하고 서남이에 군사를 보내고 장건을 기용하여 서역과 교통하였으며 흉노를 8차례나 공격하여 모든 병력을 다 소진시켰다고 쓰고 있어 그의 팽창주의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7)『華陽國志』券1「巴志」第1, “涪陵郡……惟出茶.”

  『華陽國志』券3「蜀志」第1, “什邡縣 山出好茶..” “南安、武陽皆出名茶, 多陂池.” “漢嘉縣……產名茶.”

 

8) 黃劍華 著 / 이익희 譯, 2001,『오랑캐의 지하궁전』1~2, 일빛. 마왕퇴에 비해 남월왕묘는 상당히 이른 시기의 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월왕묘에서는 딱히 차와 연관된 유물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B.C 209~111년까지 5대 93년동안 동서 1만리, 강병 100만을 보유했던 강남의 대국이 당시 촉 지방과 고류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장강 상류의 차문화가 이 시기, 장강 하류까지 폭넓게 전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9) 王從仁 箸 / 김하림 ․ 이상호 譯, 전게서, p.21~22.

 

10) SBS ․ Dasol, 2002,『마왕퇴 유물전』, (주)예일그래픽스.

 

11) 陣松長, 2002,「마왕퇴(馬王堆)의 학술적 지위에 관하여」『마왕퇴 유물전』, (주)예일그래픽스.

    이강범, 2002,「중국 고대 백서(帛書)에 관한 연구」『마왕퇴 유물전』, (주)예일그래픽스.

 

12) 강판권, 전게서, p.153~154.

 

13)『茶經』下「七之事」, “方言 蜀西南人謂茶曰蔎.”

    육우는『방언』을 언급하면서 위와 같은 기록을 남겼지만 실상 위와 같은 기록은 양웅이 쓴『방언』에 없고 그보다 후대인 3~4세기대 인물인 곽박이 쓴『方言註』에 실려있다. 당대 사람이었던 육우가 그 두 책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위의 기록은 육우가 잘못 인용한 것 같다.

 

14) 王從仁 箸 / 김하림 ․ 이상호 譯, 전게서, p.19.

 

15) 劉昭民 著 / 朴基水 ․ 車瓊愛 譯, 전게서, p.115~118.

 

16) Balazs, “Entre Révolte nihiliste et évasion mistique: Les Courants intellectuels en Chine au Ⅲ siècle de notreàere,” Etudes asiatiques. Ⅱ(1948), p.91. 그는 ‘누더기를 걸친 굶주린 용병들, 유랑민, 전과자, 토지가 없는 농민, 관직이 없는 정체불명의 지식인, 신념도 법도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사력으로, 그들은 30년간의 역사를 지배하였다.’고 비판적으로 그 시대를 바라봤다.

 

17)『後漢書』券75「劉焉袁術呂布列傳」第65, “加天旱歲荒, 士民凍餒, 江、淮閒相食殆盡.”

 

18) 류제헌, 전게서, p.154~157.『속한서』「군국지」의 판적(140년)에 의거하면 전국의 인구는 9,336,665호, 47,892,413명이었다. 이 중에서 진령과 회화를 경계로 북방의 인구는 전국의 3/5, 남방의 인구는 2/5 정도였다. 그리고 장강 유역에 걸쳐 있던 형주, 양주, 익주의 총 호구수는 전국의 42.4%, 총 인구수는 전국의 37.26%였다. 그러던 것이 삼국시대 전쟁에 따른 사망, 도망, 은닉 등으로 인해 조사된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고『진서』「지리지」는 280년대 전국의 인구를 246만호, 1,616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대략 ⅓ 가량으로 인구가 줄어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성들의 제대로 된 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 손호는 제위에 오르기 전 烏程侯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는데 이 烏程은 중국에서 비교적 일찍 차를 생산한 곳이었다. 남조 송(420~479)의 山謙之가 쓴『吳興記』에 의하면 ‘오정현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온산이 있는데 거기서 임금에게 바치는 차(御荈)이 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온산에서 산출되는 임금에게 진상되던 차는 아마 손호가 오정후에 봉해진 연대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봤을 때 위요가 마셨던 차 역시 손호가 제위에 오른 후 진상되었던 오정현의 차를 하사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겠다.

 

20)『三國志』券65「吳書」第20〈王樓賀韋華傳〉, “皓每饗宴, 無不竟日, 坐席無能否率以七升爲限, 雖不悉入口, 皆澆灌取盡. 曜素飮酒不過二升, 初見禮異時, 常爲裁減, 或密賜茶荈以當酒, 至於寵衰, 更見偪彊, 輒以爲罪.”

 

21)『茶經』下「七之事」, “廣雅云 荊巴間採葉作餠 葉老者 餠成以米膏出之. 欲煮茗飮 先炙令赤色 搗末置瓷器中 以湯澆覆之 用葱薑橘子芼之. 其飮醒酒 令人不眠”

     『廣雅』(『太平御覽』券867) “荊巴間採葉作餠 成以米膏出之. 茗飮先炙令赤色 搗末置瓷器中 以湯澆覆之 用葱薑芼之. 其飮醒酒 令人不眠.”

 

22) 임재황, 2005,『내 몸에 좋은 건강약차 만들기 110선』, 팜파스, p.38. 약차란 약이 되는 차로서 약효가 있는 나무열매나 나뭇가지, 나무줄기껍질, 나무뿌리, 뿌리껍질, 잎, 그리고 각종 야생약초 등을 물에 넣어 달이거나 우려내어 유효 성분을 추출해낸 후 음료 형태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는 湯과 비슷하 탕은 예방보다 병을 치료하는 목적에서 병의 증상 완하나 체질개선의 효과, 치료에 중점하였기 때문에 한의사나 전문가가 따로 조제해야 하며 복용법을 엄격히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약차는 기호 음료에 가까운 것이며 각종 질병의 예방효과와 약간의 치료효과는 물론 누구나 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23) 금당 최규용, 2004,『금당다화錦堂茶話』, 이른아침, p.26~30. 저자는『三國志演義』의 유비가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황하 중류에 있는 나루터에서 차를 구해 가다가 도적떼에게 빼앗겼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미 중국 삼국시대때 차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三國志演義』14세기대의 소설로서『三國志』와 동시대의 기록이 아니다. 즉, 이 내용은 이미 차 문화가 융성했던 당 ․ 송대를 경험한 중국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므로 이것을 두고 삼국시대때 차문화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다 하겠다.

 

24) 王從仁 箸 / 김하림 ․ 이상호 譯, 전게서, p.21~26.

 

25) 김대성, 2006, 전게서, p.247.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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