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1

2018. 11. 26. 20:05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1|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 | 조회 16 |추천 0 |2006.11.03. 00:37 http://cafe.daum.net/cjwhc/1nxV/7926 

  序論

 

 

序論


 1. 글을 쓰기에 앞서

 


    지난 5월 28일, 필자는 제주도에 있는 오′설록 박물관(o′sulloc museum)1)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주변에 차밭이 널리 조성되어 있어 경관도 수려한데다가 무료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찻가루나 각종 다기(茶器) 등을 잘 전시해놓고 차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패널을 설치했으며 더불어 각종 녹차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필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 곳이 1군데 있었다. 바로 한국차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놓은 패널 중에 구다국(句茶國)을 거론하면서 차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한 것이다.

  

   구다국 대무신왕 9년(26) 겨울 12월, 인접국가인 개마국(蓋馬國)고구려에 정복당하자 이를 두려워 항복했다는 짤막한 기사 1줄만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지는 나라이다2). 물론 한국사를 언급하는데 있어 개마국과 함께 비중있게 다뤄지지도 않을 뿐더러 고구려 초기 정복사를 거론할 때 잠시 등장하는 존재였다3). 하지만 그 국명이 차(茶)와 연관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구다국이 차와 연관이 있는 나라라면 이는 한국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차에 대한 기록인데다가 가장 이른 시기의 차와 관련된 지명의 등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에서는 도록을 따로 제작하지 않았고 차에 대한 작은 유인물 15부만 비치하고 있어 그 패널에 대한 설명을 더 요구할 수는 없었다4). 이후 시중에서 이 부분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봤지만 구다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불가능한 현시점에서 구다국과 차와의 관계를 밝혀낼 만한 것들은 없었다5). 그나마 겨우 찾아낸 자료에서도 단순히 구다국의 국명에 차(茶)라는 글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차와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에 의존한 내용이 전부였다6).

  

   그 이후 필자는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각종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고시대부터 차가 음용(飮用)되었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삼국시대에도 차가 음용되었다는 기록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단편적인 자료들에 불과했고 그것들을 갖고 차 음용의 상한시기를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관련 자료들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문헌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서라도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본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필자의 다짐에 왜 하필 차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차는 단순한 식음료(食飮料)가 아니라 애초에 약(藥)으로 쓰였던 작물이며 그 효능이 뛰어나고 구하기도 어려워 상품가치가 대단히 높았던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대 한국의학 관련 서적이나 관련 자료들이 미비한 상태에서 차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고대 한국의 의학 연구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차 재배와 연관지어 약초 재배, 혹은 작물 재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시적(巨視的)인 안목에서 파악했을 때 차 재배와 관련된 고대 국가의 경제 구조와 차 유통 구조까지도 짚어낼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약으로 쓰였던 차식음료로 보편화되면서도 차는 본래의 효능과 지위를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바로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차의 기원을 나타내는 설화(說話)에 달마대사가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7) 이러한 고대 종교와 차의 관계는 밀접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약으로도 쓰이며, 자기 수련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음료이기도 하며 일반 사람들이 물처럼 마시던 것 역시 차였던 셈이다.

  필자는 이처럼 차가 오랜 시간동안 광범위한 분야에서 음용된 역사를 살펴보는 것 자체가 역사를 복원하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닐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차를 단순한 식문화가 아닌 당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매개물(媒介物)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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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설록 티 하우스(http://www.osulloc.co.kr). 박물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의하면 박물관 명칭은 ‘origin of sulloc, only sulloc, of sulloc cha’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설록차의 기원이자 뿌리가 되는 제주도에서 설록차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의미하며 아울러 ‘oh! sulloc’이라는 감탄의 의미를 경쾌하게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2)『三國史記』券14「高句麗本紀」第2〈大武神王〉,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禁}虜掠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해석하자면 “9년 겨울 10월, 왕이 직접 개마국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자기 군사들이 백성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라는 뜻으로서 이 기사에서 구다국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다할편집실 篇, 2003,『한국사 연표』, 다할미디어, p.55. 연표상에도 구다국왕의 항복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학계에서 구다국에 대한 이렇다할 연구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4) 한미자, 2005,『오′설록 이야기, 아름다운 집념』, 눌와, p.189. 도록 대신에 장원 서성환(태평양그룹 회장)의 자서전 형식의 책이 하나 있었는데 이 역시, 차의 역사를 신라에서부터 두고 있을 뿐, 구다국에 대한 내용은 일언반구 없었다. 또한 박물관에서 나눠준 15부의 유인물에서는 정작 구다국과 한국 차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라, 고려, 조선의 차문화에 대한 설명만 들어가 있어 모순적인 모습을 자아냈다.

 

5) 서병국, 1997,『고구려 제국사』, 혜안, p.75~77. 저자는 고구려 초기의 영토확장 대상 중에서 개마국은 주목하면서도 구다국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다. 그 곳에서 개마국은 개마대산, 즉 백두산을 품고 있는 양강도와 그 이북 지역에 있다고 보고 구다국 역시 압록강 남쪽의 개마국과 인접한 국가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구다국에 대해서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6) 박권흠 ․ 오양가, 2006,『韓國의 茶文化』, 삶과 꿈, p.16. 저자는 고구려의 차문화를 언급하면서 구다국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구다국이 차와 연관이 있는 나라였다면 그 문화가 고구려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그런 내용을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아무런 학술적 근거는 없다.

 

7) 강판권, 2006,『차茶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지호, p.24~25. 저자는 중국 禪宗의 시조인 達摩와 관련된 설화를 언급하면서 인도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달마가 앉아서 명상을 하기만 하면 졸음이 몰려오자 졸지 않으려고 눈꺼풀을 베어버렸는데 땅에 떨어진 눈꺼풀에서 싹이 돋아나 차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달마는 남인도(혹은 페르시아) 香至國의 셋째 왕자 출신인데다가 대승불교의 승려로 중국에 들어왔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실제 찻잎 모양을 보면 눈꺼풀과 비슷한데다가 달마 관련 설화는 실제 차의 성분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인도기원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상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2.  韓國 茶文化 接近方法

 

   앞서 언급했지만 본고에서 필자는 고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연구 주제의 범위는 차가 언제부터 음용되기 시작해서, 어떻게 차문화가 전파되고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차를 통해서 당대사를 어떻게 조명할 수 있는지 등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존의 차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그대로 이행한다면 본고에서 애초에 얻고자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 새로운 사실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기존과는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답습(踏習)하여 한국 차문화의 역사를 신라시대1)로 설정하고 신라, 고려, 조선 등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공간 속에 한정시켜 차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한국의 차문화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차의 기원지(起源地)로 알려져 있는 중국에서 들어온 100% 외래문화로서 8~9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토착화(土着化)에 성공했고, 그 이후로 한국 식문화(食文化)의 한줄기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수긍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미 차는 신라가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중화문화권(中華文化圈)2)에서 인식되어지고 또 음용되었던 식음료로서 동시대 중화문화권이라 부를 만한 공간적 범위 이외의 지역에는 동방문화권(東方文化圈)과 북방문화권(北方文化圈), 남방문화권(南方文化圈) 등으로 구분 가능한 여러 독자적인 문화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화권들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교류에 교류를 거듭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차문화가 전부 외래문화라 하더라도 한국 차문화의 시작을 8~9세기 신라시대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고로 본고에서는 한국 차문화 중에서 이미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뤄졌고 정설화된 견해들이 자리 잡고 있는 신라대의 차문화 전래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차문화가 동방문화권에서 독자적으로 발생 ․ 계승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라시대 이전에 외부에서 차문화가 전래 ․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 기존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들이기에 기존 견해와 다른 접근방법을 쓰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차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중요한 식음료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편적으로 음용되던 식음료였던 것은 아니다. 대대로 인삼이 영약(靈藥)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을 정도의 귀중한 약재로 취급되었던 만큼3) 차 역시 신선이 될 수 있는 선약(仙藥)으로서 취급되던 작물이었다4). 그렇게 봤을 때 지금은 차가 보편적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음용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널리 애용된 것도, 또한 단순한 식음료로서 애용(愛用)되었던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차는 중국이 그 기원지로서 차의 음용 시기 또한 중국에서 가장 일렀다고 할 수 있다5). 하지만 인도가 또 다른 차의 기원지로 언급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차산지로서 인도와 중국 남부 일대가 지목받고 있으며 차 기원지에 대해 ‘중국 일원설’‘중국 ․ 인도 이원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대개 중국 남부 일대 주변에서 야생 차나무가 자라기 시작해서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보는 설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차의 기원지나 차 음용의 시작을 따지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차와 관련된 문화가 각 지역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같은 중화문화권 내에서도 차에 대한 명칭이 서로 다르고 차를 수확해서 제조 ․ 음용하는 과정 등이 다른데6) 그 외의 문화권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상기해야 할 사실은 중국측 문헌에 비해 다른 문화권에 대한 문헌이나 관련 자료들이 극히 소략(疏略)하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북방문화권의 유목국가들은 물론이요, 한국사 상의 고대국가들 역시 차를 비롯한 고대 의약학(醫藥學)이나 식물학(植物學) 관련 서적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한국차의 형태를 짐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포함한 동방문화권에서의 차문화와 관련된 문제(問題)는 비단 한국사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문명교류(文明交流)7)라는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남방문화권에서 폭넓게 음용되던 차는 이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중화문화권으로 전해지게 되었으며 한대(漢代)를 거쳐 삼국시대(三國時代)가 되면 일부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음용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차에 대한 애호(愛好)는 더 깊어져 일부 계층에서만 즐기던 차문화는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전파되니 이 시기가 바로『다경(茶經)』8)이 저술될 무렵인 당대(唐代)이다9)

  

   그렇기 때문에 고대 한국의 차문화 역시 동시대 남방 ․ 중화문화권에서의 차문화와 비교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가장 먼저 차의 식물학적 의미를 살펴본 다음에 차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남방문화권, 그리고 이후 차문화가 폭넓게 수용되었던 중화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두 문화권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중화문화권이라는 단일문화권(單一文化圈)으로 통합되어가는 역사적 과정이 곧 차문화의 전파 ․ 확산 과정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중화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파되었을 차문화에 대해 거시적인 안목에서의 문명교류라는 측면에서 살펴봄과 동시에 동방문화권의 독자적인 차문화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단, 본고에서 다룰 시대적 범위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까지이며 결론적으로 남북국 중 한축을 이룬 발해(渤海)의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대 남방 ․ 중화문화권의 차문화 역시 당대까지를 하한점(下限點)으로 삼고자 한다. 단, 당대의 차문화에 대해서는『다경』등에서 알 수 있듯이 관련 자료들이 이미 풍부하게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이전 시기인 수대(隋代)까지의 차문화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 차문화에 대한 독자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남방 ․ 중화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 분석한 뒤에 비교 고찰하는 방식으로 서술해야만 논지 전개가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에 남방 ․ 중화문화권의 범위를 설정하여 고대 차문화의 기원과 전파 경로 등을 먼저 파악한 뒤 고대의 기후와 지형 등을 고려해 동방문화권에서 차라고 불릴만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조성되었는지, 그런 식음료를 통해 하나의 단일한 문화를 형성할만한 여건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덧붙여 고대 사상이나 의학에 대해 추측할만한 자료가 거의 없지만 소략한 자료만이라도 인용하여 차와 연관시켜 서술해보고자 하겠다. 이때 동방문화권의 오랜 영약으로 알려져있는 인삼(人蔘)의 재배 환경과 비교함으로써 인삼과 더불어 차가 약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오늘날 고대 문화권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다양한 근거들이 확인되는 만큼, 차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다고 하여 차가 여러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차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비상식적인 처사라 할 수 있다. 고로 본고에서는 상정 가능한 모든 부분들을 살펴보고 한국 차문화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임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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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三國史記』券10「新羅本紀」第10〈興德王〉, “三年, 冬十二日{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흥덕왕 3년(828) 겨울 12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자 당 문종이 인덕전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는데 이때 당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고 흥덕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덧붙여 차는 이미 선덕왕때(780~785)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라고 적고 있어 오늘날 한국 차의 시작은 8세기 후반 아니면 9세기 초반으로 설정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하겠다.


 

2) 김용만, 1998,『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p.43~48. 저자는 그간의 고구려사 연구 방법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구려사를 문명사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해석했다. 그러면서 동방문화권이 중화문화권과 엄밀히 다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다원성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다. 필자 역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며 본고에서는 당시의 공간적 역사범위를 中華文化圈 東方文化圈, 北方文化圈, 南方文化圈, 西方文化圈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도록 하겠다. 이들 문화권은 시간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으며 상호 중복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한 국경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1) 중화문화권은 기본적으로 黃河를 중심으로 漢族으로 대표되는 집단 혹은 漢化된 집단들의 활동 범위: (2) 동방문화권은 遊牧 ․ 森林 ․ 農耕文化 등 복합적인 문화양상을 보이면서 대체로 오늘날의 동북삼성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과 한반도, 일본열도 등지: (3) 북방문화권은 흔히 유목민족이라고 부르며 초원과 고비사막 등지에서 활동하던 집단들의 활동 범위: (4) 남방문화권은 장강 이남 지역에서부터 동남아시아 북부를 포괄하는 지역적 범위를: (5) 서방문화권은 흔히 티베트로 알려져있는 오늘날의 서장 자치구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서쪽, 흔히 西域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언급하고자 하며 문명권이나 문화권의 개념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설명하지 않겠다.


 

3) 김동현, 2005,『인삼과 건강』, 도서출판 효일, p.18. 고려인삼의 학명은 1843년 러시아 식물학자인 C. A. Meyer에 의해 Panax ginseng C. A. Meyer로 명명하였습니다. Panax는 그리스어 Pan(모든)과 Axos(치료한다)의 복합어로서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종명을 나타내는 ginseng은 인삼의 중국어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인삼은 총 7종류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고려인삼은 세계 인삼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최고의 상품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즉, 현재까지도 인삼이 萬病通治藥으로서 취급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4)『茶經』上「一之源」, “若熱渴 凝悶 腦痛 目澁 四肢煩 百節不舒 聊四五啜 與醍醐 甘露抗衡也.” 해석하자면 “만약 열이 있어 갈증이 나고 번민이 있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눈이 깔갈하거나, 사지가 번거롭거나, 뼈마디가 편치 않거나 할 때 네댓 모금만 마셔도 제호(맑은 술 혹은 버터류) 감로(단 이슬)와 어깨를 겨룰만하다.”는 뜻인데 이는 곧 차가 여느 약 못지않게 귀중한 존재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치우지핑 著 / 김봉건 譯, 2005,『그림으로 읽는 육우의 茶經, 茶經圖說』, 이른아침, p.258~259. 육우는 ‘壺居士’가 쓴『食忌』의 다음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데, “苦茶久食 羽化 與韭同食 令人體重.” 해석하자면 ‘차를 오래도록 마시면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저자는 羽化가 ‘날개가 생겨 신선이 된다’는 뜻인데 이는 차에는 몸을 가볍게 하고 비만을 줄이고 지방을 소화시키는 효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적고 있다. 실제 뒷부분에 ‘부추를 같이 먹으면 살이 오른다’는 기록을 통해 봤을 때 차가 지방을 분해하는 효능이 있으며 그런 특성 때문에 오래전부터 선약으로 취급받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5) 橋本 實 著 / 朴龍求 譯, 2005,『茶의 起源을 찾아서』, 경북대학교출판부, p.105~114. 저자인 하시모토는 차나무 육종학의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대다수 학계의 견해인 차나무 일원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반해 일본의 구와다[桑田忠親]는 미얀마 기원설을, 최남선은 인도 기원설을, 고유섭은 페르시아 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여 차의 기원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6)『茶經』上「一之源」, “基名 一曰茶 二曰檟 三曰蔎 四曰茗 五曰荈. 周公云 檟苦荼 揚執戟云 蜀西南人爲茶曰蔎 郭弘農云 早取爲茶 晩取爲茗 惑一曰荈耳.” 해석하자면 “그 이름은 茶라고도 하고 檟라고도 하고 蔎이라고도 하고 茗이라고도 하고 荈이라고도 했다. 주공은 ‘가는 고도이다’라고 했다. 양집극은 ‘촉의 서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차를 일러 설이라고 한다’고 했다. 곽홍농은 이르기를 ‘일찍 딴 것은 차요, 늦게 딴 것은 명이요, 혹은 다른 이름으로 천이라고도 한다’고 했다.”는 뜻인데 이처럼 차에 대한 명칭이 지역, 혹은 수확하는 시기 등에 따라 다르게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7) 정수일, 2001,『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p.35. 저자는 문명은 자생성과 함께 모방성이란 고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생성이나 발달은 기필코 타문명과의 교류를 수반한다고 하면서 문명교류란 구성 요소를 달리하는 문명(이질 문명) 간의 상호 전파와 수용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즉, 교류 속에서 개개의 문명집단(문화권)은 자기의 자생성과 전파성을 다른 문명에 대한 수용성과 결부시키면서 자기의 고유 문명을 창조하고 풍부화시켜 가는데 이것이 바로 문명 발달의 통칙이라고 적고 있다. 고로 본고에서도 이런 개념에 맞춰 문명교류라는 측면 속에서 차문화의 전파와 수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8) 徐銀美, 1999,『北宋 茶 專賣 硏究』, 國學資料院, p.24. 저자는 차(茶)라는 문자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 중기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도(荼), 설(蔎), 명(茗), 천(荈) 등 10개의 글자가 쓰였었다고 하면서『茶經』은『다경』이 아닌『차경』으로 읽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강판권, 전게서, p.48~57. 저자 역시 서은미의 연구 성과를 좇아『다경』이 아닌『차경』으로 읽어야 한다고 적고 있으며 필자 역시 茶의 발음이 당대와 그 이후에 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언어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만큼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일반적인 발음대로『다경』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9)『茶經』下「六之飮」, “滂時浸俗 盛於國朝 兩都幷荊渝間 以爲比屋之飮.” 해석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풍속으로 차츰차츰 잦아들어 당나라에 들어와 성대하게 행하여졌다. 이때부터 두 국도인 장안 낙양, 그리고 형주와 투주 지방에서 집집마다 아끼고 즐기는 음료로 삼았다.”는 의미로서 이전 시기부터 음용되어오던 차문화가 당대에 이르러 크게 발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강판권, 전게서, p.92. 저자는 당대에 차와 그릇과의 만남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 시기에 비로소 차가 일부 특권층의 음료가 아닌 대중성을 띤 음료로 바뀌었다고 한다. 차문화를 주도했던 불교 역시 당대에 이르러 중국식 불교로 다시 탄생했는데 이 시기『茶經』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당 이전의 차와 그릇의 만남이 그릇 위주였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양자의 관계를 차가 주도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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