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저자의 답변

2018. 11. 26. 20:10차 이야기



한국차의 기원과 문화에 대하여 저자의 답변|역사관련 재밌는 얘기들

나도사랑을했으면 | 조회 19 |추천 0 |2006.11.03. 00:52 http://cafe.daum.net/cjwhc/1nxV/7933 
   여님이 올린 글을 완전하게 다 읽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 항상 분량이 너무 많은 고로.....여하튼.... 차에 관해서 역사와 관련시켜서 광범위하게 접근하여 쓴 글은 님의 글이 처음인 것 같아 읽으면서, 님의 노고에 대해 수 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고 그에 대한 평(評)도 빠지지 않고 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처음에 글을 쓸때 선생님이랑 아혜모호님이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제가 더 책임감(?)을 갖고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ㅋ 항상 분량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시지만 항상 긴 제 글을 다 읽어주시는 것에도 덧붙여 감사드립니다. 암튼...아혜모호님의 몇가지 의문사항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우선 시대와 나라에 따른 음다의 풍습을 한 눈에 정리하여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음다 풍습이 전래되기 전에 우리 동방문화권에도 자생적인 차에 대한 전통이 있어서 중국의 차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자생적인 중심지는 지리산과 백두산이 가장 최적지가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구다국이 차와 관련된 나라일 수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중국의 차문화의 시작이 약용에서라면( 촉 지방의 특수한 환경과 관련하여) 우리의 자생적인 차문화의 시작도 마찬가지인가요?  비록 지리산과 백두산 지역이 차가 자랄 환경으로 최적지라고 하더라도, 차가 꼭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인삼이 약용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처럼) 그런 문화는 생겨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단순히 중화문명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풍습에서 그것이 좋은 것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흐음...중국 차문화의 기원지사천성 일대로서 과거부터 촉(蜀)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는 고촉국 시절부터 이미 차문화가 존재했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그때의 차문화는 약용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藥用이라는 것은 개념 정립이 좀 필요할 듯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명나라 장수 양호가 지적했듯이 조선시대까지도 탕(湯)과 차(茶)를 구별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측 입장에서 말하는 탕과 차의 구분이겠지만요. 그런 상황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흔히 차라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탕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약용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면 이는 분명 차가 아닌 탕(湯)의 개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약차(藥茶)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약차는 넓은 의미에서 탕과 같다 할 수 있지만 탕(약)이 약사의 전문적인 처방에 따라 치료를 목적으로 복용하는 것에 반해 약차는 기호 음료에 가까운, 각종 질병의 예방효과와 약간의 치료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봤을때 촉 지방의 사람들 역시 처음 차를 접했을때는 이런 약차의 개념이 강했으리라 생각하며 인삼(산삼) 역시 처음에는 온전한 탕약보다는 약차로서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게 봤을때 이러한 약차의 등장에는 굳이 환경적인 면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자주 나는 식물들을 이용한 기호 음료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전통이 훗날 의약학의 발전으로 인해 개념이 바뀐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종교와 습합한 차문화를 논하면서, 불교나 도교와 습합된 차문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신앙이 바탕이 되어 있어서 받아들이기 좋았다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백화차의 효능에 대해서 거론되었는데 백화차가 대용차의 하나로 쓰인 것은 아마 종교적인 무아의 경지로(신을 만나기 위한...)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교역이라는 상황 이전에 약으로서 차가 필요했던 백두산 부근의 환경이 좀더 설득적으로 서술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연히 TV를 보고 있는데 불교에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내용의 요지는 불교는 의탁불교(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불교), 격의불교(도교의 無, 無爲 개념으로 空을 설명하는 불교), 온전불교(공을 공 그대로 이해하는 불교) 등 시대에 따라 변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외래종교인 불교가 중화문화권으로 유입되면서 도교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교와 불교에서 차가 중요시 여겨진 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 도교의 기원 동방문화권의 신선사상에서 이해하였고 이후 동방문화권에서의 도교와 차문화 수입에 부작용이 거의 없었으리라 이해했습니다(분명 불교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으니까요).

 

   암튼, 차가 꼭 필요해야만 했다는 환경 설정에 대해서는 제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 한 것이 사실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순전한 '약'으로서가 아니라 기호 음료에 가까운 '약차'로서 제가 이해하고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먹는 '비타민제 약품'이 약이라기보다는 기호(?) 식품에 가깝게 인식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굳이 동방문화군에서 차가 일찍부터 필요했고, 그로 인해 차가 발전하여 차문화가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다고 생각치는 않았는데...아무래도 아혜모호님 말씀대로 '차의 발생 당위성'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목민족들이 음식으로 인해 올 수 있는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차가 꼭 필요한 그런 사회적 상황처럼, 백두산 지역에서도 그런 어떤 이유로 차가 필요했고, 또 차가 자랄수 있는 환경으로 좋았고, 그래서 차의 생산이 늘어났고, 교역까지도 이룰수 있었다고 하면...자생적인 차문화의 의미가 더 뚜렷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제가 북방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의문이 든 것은...과연 차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그러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흔히들 유목민들은 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그 기름기를 효율적으로 제거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또한 먼지가 많고 건조한 사막성 기후 속에서 수분의 보충과 신체 기능 보존을 위해서 차를 많이 마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문화권은 '차'를 대표수출품으로서 활용하여 차마교역을 하기도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양호는 조선인들에게 왜 차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중화문화권에서도 차문화가 국내적으로 활발하게 유통된 것은 당대이며 7~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타문화권에 당의 차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럼 그 이전은??

 

   현재 북방문화권의 차문화에 대한 연구성과가 있긴 있는데 모두 최근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을 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북방문화권 차문화의 변화상에 대해 서술한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못 찾은 것일수도 있으니 찾으셨거나, 알고 계신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심지어 그 유명한 티베트의 '수유차'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그 차가 언제부터 음용되었는지는 말하고 있질 않는다. 티베트의 환경이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여년전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지금도 건조하고 산소가 부족하고 채소가 부족한 그 지역이 과거에도 그랬을텐데, 지금이야 수유차를 마신다지만 옛날에는 그럼 어쨌다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김대성, 2006,『초의선사의 동다송』, 동아일보사, p.280~284).

 

그   렇게 봤을때 저는 조로아스터교의 하오마, 힌두교의 소마, 불교의 알가 등 세계적으로 그러한 음다 의식이나 문화가 있었으므로 북방문화권과 같은, 차가 꼭 필요한 지역에서도 이미 자생적으로 그러한 차문화가 존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이들 지역은 차와 같은 생활에 필수적인 식음료 문화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자연환경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아혜모호님 말씀대로요. 그렇게 봤을때 굳이 언급한다면 백두산 일대에서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가볍게 생각해 봅니다. 티베트처럼 해발 4000m 이상 고지대도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뜨거운 차를 끓여서 자주 마시면 추위를 이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수많은 약재와 차대용 식물이 활용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흐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다른 각도로 접근해서 현재 이렇다할 답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굳이 꼽자면 '추위'와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 암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백화차의 흔적이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된다고 했는데, 원시신앙에서 사용된 백화차는 고등종교 전래 이전의 차문화에서 자생 차문화와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는 것인지.... 자생 차문화를 인삼과 관련시켜 약용의 의미를 강하게 두었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쓰고 보니 질문이 좀 뒤죽박죽이 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님의 글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감사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어리석은 질문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니오라쩨『시베리아 제민족의 원시종교』라는 책을 보면 백화차에 대한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시베리아 제민족이라 불리는 집단에는 한국사에서 흔히 보는 국가들도 확인이 되는데 특히 북방유목민 문화적 성격이 강한, 신라의 경우는 백화차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관련 자료들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앞서 제가 본론에서 언급했던 천마총의 천마도장니의 경우에도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한 것인데 이러한 자작나무가 한반도 전체에서 골고루 확인되는 것은 물론이요, 한반도 북부로 올라갈수록 희고 매끈하게 자라나 다른 나무에 비해 이채로운 느낌을 주며 어린 잎은 여러가지 약재와 나물로 쓰인다고 합니다.

 

   일단, 자작나무잎으로 만든 백화차시베리아 제민족에게는 샤먼의 의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병이나 재앙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백화차를 마시거나 백화로 만든 향불을 피우기도 했는데 이는 분명히 백화차가 약용 겸 의식용으로 쓰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정동주, 2004,『한국인과 차, 그 사색의 열린 공간』, 다른세상, p.409~410). 아마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백화로 만든 향불을 맡으며 샤먼은 무아의 경지에 빠져 입신(入神)의 경험을 체험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살펴보니 10종류의 자작나무과 식물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덤불오리나무, 물자작나무, 물박달나무, 자작나무, 개암나무, 물개암나무 6종의 열매나 껍질, 잎 등이 식용으로 쓰이고 있더군요(고경식 감수, 2005,『백두산 식물도감』, 일진사, p.105~114) 아마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엄청난 숫자의 자작나무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때 백산차류의 차대용 식물이 의식적인 부분에 쓰였을 가능성이 없는 반면 자작나무류의 식물은 의식적인 부분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작나무과에서 대부분 기름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서 모두 차대용 식물로서 활용되었지만 쓰이는 용도에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둘다 약차로서 활용되었지만 따로 자작나무류의 백화차는 의식적인 부분에서도 활용이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때 제가 신라시대의 차문화로만 백화차를 서술했느냐 하면, 이처럼 백화차의 주기능이 약차로서, 식음료로서의 그것보다 다른 기능이 더 컸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그리고 제가 인삼을 거론한 이유는, 예로부터 동방문화권이 자랑하는 가장 대표적인 약재였기 때문이지 인삼의 약용 기능과 차의 그것이 같은 맥락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인삼같은 유명한 약재가 동방문화권에서 나 그것에 대한 활용도가 높았으며 동시대 중화문화권은 그보다 의약학 수준이 떨어졌다, 거기다가 동방문화권 삼국의 의약학 수준은 상당히 높았는데 그렇게 봤을때 차에 대한 활용도 면에서도 동방문화권이 중화문화권보다 앞서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삼, 처음에는 산삼이었겠죠. 그것의 활용도 또한 약차에서 시작했다고 보지만 이후 차대용 식물에 비해 산삼은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희소성때문에 더 그 가치가 올라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약효까지 뛰어났으니...암튼 인삼 부분은 그 생육환경이 비슷해서 혹시 외래 작물인 차를 수입해서 자국에서 기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다보니 인삼을 끌어다 쓴 것이지, 반드시 차의 본래 기능이 약용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암튼...기나긴 글 다 읽고 평과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원문보기 글쓴이 : 麗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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