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연안김씨(延安 金氏)' 종택.

2018. 12. 9. 22:42잡주머니



영광.,'연안김씨(延安 金氏)' 종택.| 우리들의 이야기 

선경나라|조회 261|추천 0|2015.12.31. 10:04

연암김씨종택(延安金氏宗宅)  

                                                  영광.,'연안김씨(延安 金氏)' 종택.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연안(延安).

고구려시대 동음홀(冬音忽), 조선 태종 때 연안도호부.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연안군(延安郡).


황해도 연안군(延安郡)을 본관으로 하는.,연안 김씨.

연안김씨 종택은 전남 영광군 평야가 보이는 산 아래.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북향 건축물 고택 중에서 하나.


대문 위에 2층 누각.,삼효문(三孝門)

조선 말, 고종의 명에 의해 지어졌단다.


현재 집주인의

14대조 조상 김진

9대조 조상 김재명

8대조 조상인 김함

3효자 효행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정려(精勵)되어

세운 대문이.,삼효문(三孝門).


'정려(精勵)'란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조선 시대 대단한 상류 주택으로 인정받은 '영광 연안김씨 종택' 


   하늘을 감동시키는 효도가 아니면

효자상을 받기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내린 효자상을 3번 받은 집안.


영광 연안김씨종택(靈光 延安金氏宗宅)

영광군 군남면 (중요민속문화재 제234호)

매화낙지(梅花落地, 매화꽃이 떨어진 형국의 길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불갑천 물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마을' 고샅물이

안들에서 서로 만나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길지.


북향으로 당당하게 앉아있는 종택은

지리적인 측면에서도, 규모면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품격을 갖추고 있다.


연안김씨 직강공파 4대손인 김영(金榮)

16세기 중엽에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숙부인

김세(金世)를 따라 영광으로 와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간리에는 김영의 셋째 아들인 인택(仁澤)이 정착.

외간종중(外澗宗中)을 이뤘으며, 현 종택은 직강공파 외간종중

15대손인 김성호(1934년생) 선생이 종부 김소희 여사와 함께 거주.


옛날에는 이곳에 초가 한 채 있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김성호 선생의 6대조 할머니와 7대조께서

근검절약 하여 가세를 일으켜 집을 지었다.


이 종택을 언제 지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안채는 고종 5년(1868년)에 상량한 기록.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안채를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2층 누각으로 된 삼효문.

솟을대문 위에 효자각을 올렸고 고종 5년(1868년)에 건립.

2층 누각은 목재가 썩는 것을 방지하려고  유리 샤시를 설치.


삼효문 아랫부분은 둥글게 휘어진 기둥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고,

이층 효자각의 네 귀퉁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이 형상화된 용두와 구름모양의 공포가 결구되어 있다.


절이나 궁궐이 아니면 용두를 올릴 수 없던 시절인데

당시 이 집안의 세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이 효자각은 김성호 선생의 14대조 김진(金辰, 1599년생),

9대조 김재명(金載明, 1738년생), 8대조 김함(金含, 1760년생)

3효자가 정려되어 처음에는 마을 어귀에 효자각을 지으려 했지만

문중회의를 거쳐 지금과 같이 대문 위에 2층 누각을 짓게 되었다 한다.


   처음에는 인조로부터

두번째는 정조 재위 동안에

세번째 고종으로부터 정려되어 

삼효문을 2층 누각으로 건축하였고

이 집은 '충효사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임금님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건축하였다. 


조선 시대 대단한 상류 주택으로 인정받은 '영광 연안김씨 종택' 


삼효문은 집안에 중요한 제례가 있을때만

일년에 한번 열어 사용하는.,2층형 누각 대문.

평소에는 삼효문 대문 옆에 대문 한칸을 두어 사용.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창문'  


삼효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돌기둥 4개씩을 세워 만든 석정려 3개가 일렬.


갓석은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석질은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연안김씨삼효문] 영광 트립, 연안김씨고택의 삼효문,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문을 만납니다. 


.......석정려 3 효자비........

'士人道康金公諱魯鉉孝行碑’

'士人道康金公諱光鉉孝行碑’

'士人道康金公諱永箕孝行碑'.

........................................


‘사인도강김공휘노현효행비'

‘사인도강김공휘광현효행비'

‘사인도강김공휘영기효행비'


[연안김씨삼효문] 영광 트립, 연안김씨고택의 삼효문,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문을 만납니다. 


영광 연안김씨 집성촌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고택.

16세기 중엽에 김영(金榮)이 군수로 부임하는 숙부

김세공을 따라 영광에 와 정착한.,연안김씨 직강공파.


영광 연안김씨 종택 삼효문 전경 

 

풍수지리 상으로.,'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이는 곧, 나라님의 은혜를 받은 명당이란 뜻.


나라님으로부터 신안 암태도를 포함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까지

사패 섬을 하사받은.,영광 연안김씨 종가.


또는 학(鶴)의 형국이라 일컬어지는., 길지(吉地).

영광군에 북향으로 넓게 자리잡은.,연안김씨 종가.

고종 5년(1868)에 지은 건축물로 아래채는 1942년 건축.


[영광연안김씨종택] 영광 트립, 영광 연안김씨종택[ 靈光 延安金氏宗宅 ], 아 이런 멋진 고택이.. 감탄 감탄... 


삼효문(三孝門) 현판 곁 누마루에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있는.,형상.

연안김씨가 명문가문 임을 대변한다.


'조선시대 국모(國母) 1명를 배출한 가문은

영의정 10명을 배출한 명문가문보다 더 낳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 간 간택 경쟁이 치열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상처를 한.,선조. 

51세 나이에 19살인 인목왕후를 맞아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낳았던.,조선 중기.


조선왕실의 외척 및 후손에게는

어떤 특전이 부여되었던 것일까?


[영광연안김씨종택] 영광 트립, 영광 연안김씨종택[ 靈光 延安金氏宗宅 ], 아 이런 멋진 고택이.. 감탄 감탄...  


황해도 연안군을 관향으로 삼는.,연안김씨(延安 金氏).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낸 김섬한.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 왕자가 왕에게 직간.


형은 북빈경(北濱京 :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豉鹽城 : 연안)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김섬한.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의 유배지인

연안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다.


관향.,황해도 연안군

인구 79,788명 (93위)



 ..............유명인.................

김자지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김여지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김시 - 조선 전기의 화가

김전 -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 - 조선 중기의 문신

인목왕후 - 조선 선조의 왕비

김승 - 진남군(정종의 서자)사위

김사철 - 일제시대의 관료

김사준 - 일제시대의 관료

김석기 - 일제시대의 관료

김현중 - 대한민국의 가수


..조선왕실 인척..

선조인목왕후

영응대군(세종의 팔남)계비 연성부부인 김씨

진남군(정종의 서자)사위 김승

의창군(세종의 서자)정비 양원군부인 연안 김씨

효혜공주(중종의 장남)부마 김희

정신옹주(선조의 서녀)사위 김규




인목대비.



조선시대 왕비는 국왕의 정실부인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던 여인이다.


중전은 왕과 함께 ‘전하(殿下)’로 불리는.,국모(國母)로서

처신 여하에 따라 정국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얼핏 떠오르는 드라마틱한 인물로는

원경왕후 민씨, 문정왕후 윤씨, 장희빈 등.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뒤지지 않는다.


열아홉의 나이로 선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인목대비는 스물다섯에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51세 선조와 19세 인목왕후의 나이 차이는.,32.


그녀는 무려 32세의 연상의 남편 선조를 만나

이듬해 첫딸 정명공주를 낳고 이듬해 둘째딸을

낳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직후에 죽어버렸다.


그리고 두해 뒤에 선조의 유일한 적통

왕자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영창대군.

선조가 평생토록 고대하던.,적자였지만,

그의 탄생은 조선왕실에 비극을 불러왔다.


영창대군이 두 돌이 되기 전

선조는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

........................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영창대군의 생모.


그녀는 계축옥사인조반정

당대의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며

실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던 여인.

 

그녀의 생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가 쓴 계축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광해군 시대를 담은 소설, 드라마에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과 대북파 정권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회복을 위해 분주했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통성을 의심받으며 불안한 정국.


위정자들로서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이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그런 위험한 시기에

인목왕후가 취했던 행위와

그 결과는 왕조 시기 지배계층의

분쟁과 탐욕의 데자뷰처럼 비춰졌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만 데리고 의주로 몽진,

의인왕후 박씨는 평안도 강계와 해주 등지로 피신해만 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또 다시 정비를 외면했던 것.


이 때문에 의인왕후는

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함경도, 강원도 일대를 전전.


당시의 고초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정비는 1600년(선조 33년) 6월에 운명.

 

선조는 후궁 공빈 소생의 두 아들 임해군 이진과

광해군 이혼을 비롯하여 14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 왕자가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1602년(선조 35년) 선조는

신료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계비 인목왕후를 맞아들였다.


그로 인해 내심 중전 자리를 노렸던

인빈 김씨는 쓴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조선 전기에는 왕후가 승하하면 3년 뒤에

후궁을 왕비로 승진시키는 형식을 택했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했던

전례에 따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14세 이상의

딸을 가진 8도의 양반가에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김제남의 딸인 바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인목왕후 김씨는 1584년(선조 17년)

김제남과 광주 노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


김제남은 당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가문도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힘을 잃은 지 오래였고 첫째 사위 심정세가

능양군의 이종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발과 인척이라.,왕실과 마찬가지.


인목왕후가 왕비에 책봉되자

제일 당황한 인물은 세자 광해군

자신보다 9세나 어린 새어머니이고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후궁 소생인

자신의 세자 입지가 흔들릴 것이 분명.


인목왕후가 1603년(선조 36년)에 정명공주를 낳자

세자 광해군은 놀란 가슴을 남모르게 쓸어내렸는데 

1606년(선조 39년)에는 새어머니가 영창대군을 낳은 것.


55세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어 기뻤던 선조.

광해군으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다.

장차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피할 수 없기 때문.


그때부터 선조의 조정 신료들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자는 소북파.

광해군을 추종하는 대북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 무렵

갑작스레 악화된

선조의 건강상태가

대세를 갈라놓았던 것.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워있던 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이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비망기의 내용을 비밀에 부쳤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 있었고 이듬해인 1608년 1월,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또 다시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발고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운명.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하라고 인목대비를 부추겼으나 선조의 유명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16년 동안의

위태로웠던 세자 생활에서 벗어나

선조 운명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는 본가의 세력으로 보나

개인의 성품으로 보나 특출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정국이 혼란한 시기에 지나치게 재산을 불림으로써

광해군과 정권을 이끌고 있던 대북파의 눈총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정치 권력을 유지하려면

수많은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불법적인 정경유착이 수반된다.


마찬가지로 정권을 탈취하는데도

그만한 재력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민감한 시점을 간과하여

인목왕후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화를 자초.


조선시대

왕비는 입궁하면

대략 1천 결 정도의

왕실토지에 대한 수세권을 얻는다.

이는 매년 1천 가마 이상의 수입을 의미한다.


그녀의 재산은

친정인 명례동에 마련한

서제소(書題所)의 차지(次知)

오윤남이 명례본궁에서 관리했다.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 출생으로 배정된 850결,

영창대군이 태어나며 배정된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

선조에 의해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해지면서

수천 결의 땅과 수백여 명의 노비 등을 모두 소유하게 된 것.


'조선시대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문은

삼정승 10명을 배출한 가문보다 낳다.'


그러나, 왕비를 배출한 가문에게는

역사 상, 멸문지화 위험도 따르는.,법.

즉, 좋은 일 만큼이나 나쁜 일도 있는 것.

 

암묵적인 왕권 도전자인 영창대군이

즉위할 경우 수렴청정 0순위.,인목대비.


그만한 재산을 품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는 정치세력의 기반.

광해군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


그 때문에 김제남에게 위험을 경고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김제남은 광해군의 불안감을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불림으로써 정치적으로 결국 화를 자초.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왕권 회복에 박차.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선무공신 책봉에 반대했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단하였고

조정에서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했던 것이다.


영창대군의 후원자였던 유영경의 죽음으로 인해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광해군이

왕위 책봉에 불만을 품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마침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수문장 이정표에게 명하여 임해군을 죽이자

그들의 불안감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과정을 재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북파는 그 정보를

정적 말살의 계기로 삼고

역모를 조작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를 비롯 100여 소북파 인사들을 숙청.


그로부터 1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에게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다.


칠서의 옥으로부터 비화된 계축옥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문경새재에서 일단의 도적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전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서자 7인.


권세 가문의

서자 일곱 명.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교유하며 죽림칠현, 강변칠우로 자처했던 자들.

 

그들은 광해군이 등극하자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상소.


   광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자 이에 반감은 품고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윤리가 필요 없는 집’

즉, 무륜당(無倫堂)을 지은 뒤, 그곳을 근거지로

전국을 오가며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에서

강도짓을 했는데 피살된 상인의 노비 하나가 살아남아

그들의 근거지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


사건에 접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

김개, 김창후,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해

서얼 출신 화적패들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그것은 권세가문 칠서 중에 한 사람인 박응서

광해군에게 비밀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상소문에서 자신들이

1608년 명나라 사신을 죽여 사회혼란을 야기하려 했고,

한편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은 뒤 일을 벌이려 했다고 자백.


거사에 성공하면

영창대군을 옹립한 다음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하게

하려 했다는 내용의 자백이었다.


대북파는 박응서의 자백을 근거로 서양갑을 국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의 수괴이고

인목대비까지 모의에 가담했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그 결과 종성판관 정협,

선조에게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 일곱 대신,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 서인 수십 명이 하옥되었다.


   그런데 박동량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대비전에서 1613년,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무덤인 유릉에 무당을 보내

저주한 일을 털어놓음으로써 인목대비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비의 처소에 있는 사람들이 선왕의 발병 이유가

돌아가신 의인왕후 박씨에게 있다 하여 수십 명의 요망한

무당과 함께 연달아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크게 벌였습니다.”

  

그러자 이이첨은 유생 이위경에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처단을 종용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고 이어서 장령 정조와 윤인 등이

폐모론을 지지하고 나섰으므로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도 연일 영창대군을 벌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결국 김제남은 1614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와 함께 영창대군을 비호했던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이

조정에서 쫓겨났으며 이덕형은 시국을 개탄

식음을 전폐한 끝에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이 사건이 정치적 조작으로,

서얼인 박응서가 도적질을 하다 잡혀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역모를 꾸몄다고 과시했으며,

서양갑 역시 죽어도 이름이나 남겨보려는

뜻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이듬해 봄 영창대군은 강화도 작은 골방에서 죽음을 당했다.

강화부사 정항이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사.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고 이 계축옥사를 통해

대북파는 서인과 남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


인목왕후는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이었고,

법통으로도 군주인 광해군의 어머니였지만

그때부터는 원수와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광해군은 이를 감안하여

1615년(광해군 7년) 4월에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다음

인목대비경운궁에 유폐시켰다.

 

경운궁은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당시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였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불탄 궁궐에 거처할 곳이 없어

피난도성 행궁으로 삼은 장소였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했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해 창덕궁이 재건되면서

광해군이 행궁을 떠나게 되자

경운궁(慶運宮) 궁호를 붙여주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경운궁에

임금을 비방하는 익명서가 발견.

중앙 조정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기자헌이 박승종을 몰아내고 유희분을 협박해

인목대비를 맞이한 다음 거사를 할 것이란 내용.


이에 허균은 김개․이강

호남과 영남의 무뢰한들을 모아

유생처럼 꾸미게 하고 인목대비를 폐함과

동시에 '기자헌 일당을 처벌하라.' 상소했던 것.


이처럼 폐모론이 기승을 부리자

기자헌은 종친과 외척, 문무백관 등

무려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아

공개토론 후 가부를 결정하자고.,주장.


하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이이첨의 주장에 동조하여

폐모 반대론자인 기자헌, 이항복,

정홍익, 김덕함 등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는

결국, 폐서인되어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좌의정 한효순, 공조판서 이상의,예조판서 이이첨

등 17인이 폐비절목을 만들어 대비의 특권과 예우를 박탈.


하지만, 명나라에서 폐서인의 고명이

내려오지 않아 인조반정 때까지 인목대비는

불행 중 다행히 대비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22년 12월, 이이첨은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서

시도한 인목대비 시해는 박승종 등이 가로막아 실패.


그때부터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한 생활.


계축일기에 따르면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했으며,

구더기가 방안과 밥솥 위에까지 끼어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었고

솜옷이 없어 7,8년 동안 추위에 시달리다가

목화씨를 심어 간신히 솜옷을 마련할 수 있었다.


궁녀들이 궐내에 텃밭을 일궈

재배한 나물로 반찬으로 삼았다.


당시 인목대비는 붓글씨를 쓰며 모진 세월을 견뎠다.

현재 보물 12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어필칠언시를 보면

그당시 고아하면서도 굳센 그녀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유폐된 그녀는

대북파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을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하고 있다고 비유했다.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 해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 잘 수만 있다면,
쟁기질, 써레질 이미 마쳤고 봄비도 충분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 또 채찍질 하는가.'


1623년 3월 13일,

 이귀, 심기원,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일단의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켰다.

거사의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였다.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집결한 그들은

창의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도성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활짝 열린 돈화문을 통과하여

손쉽게 창덕궁을 점령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해 광해군은 권좌에서 축출당했다.


이튿날 아침 능양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했으나 인목대비는

갑자기 병사들이 몰려오자 무슨 사달이 난지 몰라

문을 걸어 잠그고 능양군을 문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녀로서는

비장한 최후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빗장을 걸어 아예 출입할 수 없는 대문.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붙잡힌 광해군은 

이귀가 군사를 시켜 담장을 넘게 한 다음에

경운궁 안 바깥 뜰에 꿇어 엎드려 울었다 한다.


'광해군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인목대비가 내시를 시켜 까닭을 묻게 하자

이귀는 자신들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고하며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지만 그녀가 행차를 꺼리자

능양군이 친히 경운궁으로 갔고. 신료들이 가마를 탈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고 말을 타고 가면서 광해군을 떠메어 따르게 했다고 전해온다.


권좌에서 축출된 폐왕 광해군은

보쌈을 당한 과부 만도 못한 신세.


이미 왕이 아닌 폐서인이 되어

자신이 앞으로 살지 죽어야 할지

한치 앞 운명도 예측할 수 없는 몸.


이때 능양군은 경운궁에 이르러

말에서 내린 뒤 서청문을 통하여

궁 안으로 들어가 인목대비 앞에

재배를 올리고나서 통곡을 하였다.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왔사오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인목대비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절차에 따라 능양군에게 어보를 전달한 뒤에야,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길 간절히 청했다.


“광해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 지내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광해군에 대한 복수가

자신에게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반정의 주역들은 광해군 측의 반격을 염려

그 현장에서 곧바로 즉위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에서

예식을 치르게 했고 이튿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했는데

앞부분에서 광해군에 대한 분노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을 받아 국모가 된지 여러 해.

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인목대비는 당시 광해군의 죄를 38가지나 열거했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죄.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중립 외교를 한 죄.

무리한 궁궐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죄 등.


얼굴에는 검은 보자기가

뒤집어 씌워져 있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광해.


자신이 장차 어디로 끌려갈지

향후 어떠한 비운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등짐처렁 떠메여

인목대비 뒤를 따를 수 밖에 없는 신세.


당시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에야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 집으로 은신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보내졌다.

 

인조반정으로 대북파 이이첨·정인홍 등은 물론

북인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


광해는 창덕궁으로 끌려가

폐서인 신분으로 강등된 뒤에

선인문을 나와.,유배길을 떠났다.


현재, 창경궁 동쪽 협문인.,선인문.


원래, 궁궐의 내시가 출입하는 문.

연산군이 강화 유배지로.,쫓겨난 문.

즉, 폐주의 길에 접어들고 만.,광해군.


이는 곧, '자신의 후손이 끊긴다.'는.,의미.

자신도 '연산군처럼 죽게 될지 모르는.,운명'.


인목대비의 복수심, 인조반정 세력의 정치보복.  

자신의 가족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란 예감.

이제부터는 살아 있더라도 어차피 죽어야 할.,목숨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었다.

광해군은 왕위를 박탈당한 채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인목대비는 다시 조선왕실의 최고 웃어른으로 복귀한 것이다.


인조는 인목대비 핍박을

패륜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


인조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의 존호를 높여주고

진찬례를 자주 베풀어 광해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

아울러 그녀와 고난을 함께 했던 정명공주 혼사를 서둘렀다.


아울러 인목대비에게 갖은 선물공세를 펼쳤고

인목대비는 이후 전국의 명산 대찰을 돌아다니며

아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 김계남의 명복을 빌었다.

 

안성의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고,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위패를 모셔 명복을 빌었던 것.


조선시대 유학자 신익성

금강산 유점사를 들러 기록한

유금강내외산제기(遊金剛內外山諸記).


‘해장전에는 여러 불승 및 인목대비의 글씨,

정명공주가 손으로 옮겨 적은 불경이 많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등 왕실관련 도서관에도

인목대비가 직접 쓴 사경과 경전들이 여러 점.


정명공주가 혼인하여 출궁한 뒤

인목대비는 계속 창덕궁에 머물렀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이사.


1631년부터 잦은 설사와 복통, 고열로

잠 못 이루던 인목대비는 1632년(인조 10년)

음력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는

본색을 드러낸 인조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인목대비가 부재한 현실에서

유일한 반정의 대의명분이라는 공신들의 비호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그후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명공주는 무려 47년간 고난을 보상 받은듯

여생을 행복과 영광의 나날로 보냈다 전해온다.



'정명공주' 글씨로 쓴 화정의 붉은 포스터 눈길 '놀라운 필체' 



정명공주(貞明公主).



조선시대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여항이나 왕실에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 많다.


그 가운데 선조의 막내딸로 광해군과 인조 치세에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갖은 고초를 견뎌 내면서

여성으로는 드물게 서예에 일가견을 이룬 정명공주.

 

무릇 서예 작품에는 작가의 삶과 정신이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정명공주가 남긴 ‘화정(華政)’ 두 글자는

그녀의 인생역정을 역설적으로 묘사해주는 듯한 느낌.


‘화정(華政)’은 각기 한 장의 종이에 씌여진 글자.

‘華(화)’는 ‘꽃이 핀다’, ‘政(정)’은 ‘나라를 다스린다’.

두 글자를 더하면 ‘빛나는 정치가 백성들을 이롭게 한다’. 


광해군의 치세, 정권을 공고히 하려던 대북파 공작으로

서궁에 어머니와 함께 유폐되어 서예로 마음을 달랜 그녀.

그 암울한 시기에 남자도 익히기 어렵다는 석봉체를 익혔다.


조선 어필의 전형이었던.,한석봉 천자문.

표준서체로 삼은 선조가 좋아한 서체였다.


공주는 국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칭호.


왕자들은 출생과 동시에 대권 예비주자로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있지만

공주는 대부분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존재.

 

조선시대 27대 역대왕으로부터 35명의 공주가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모에 휘말릴 위험도 없었고,

행여 부마 가문이 풍비박산 날지라도 신분을 보장받았다.


그렇지만 드물게 몇몇 공주들은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거나,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14대왕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그러하다.


1603년 음 5월 19일, 정릉동 행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선조는 51세, 어머니 인목왕후는 19세였다.

그녀의 출산 무렵에 궐내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다.


그 무렵,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했던

광해군에게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전란 초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던 자신과 달리

분조를 이끌었던 광해군은 종횡무진 전선을 오가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당시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정명공주의 탄생은 뭇 사람들을

일희일비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은 반색하며 축하예물을 올렸고

'선조의 장인'인 김제남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뒤 1606년(선조 39년)

인목왕후의 두 번째 출산을 앞두고

양측은 또 다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55세의 선조가 적장자를 얻게 된 것.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었던 것이다.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 광해군으로서는 날벼락.

선조가 만일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마음에 둔다면

서자인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광해군의 걱정은 기우였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할 때 영창대군은 불과 세 살,

적통을 주장한다 해도 보위를 잇기에는 불가능한 나이.


당시 정릉동 행궁에서 

왕위에 즉위한 광해군은

동궁(東宮)으로 거처를 옮겼고,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영창대군은

대비전(大妃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부터 광해군은 종종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


당시, 대비전에서 인목대비를 모시던 

궁녀의 작품으로 추측되는.,'계축일기.'

천진난만한 영창대군과 그를 미워했던

광해군의 태도가 가감 없이 그려져 있다.


...................<계축일기> 중에서...................

“어느 날 대비께서 남매를 데리고 대전으로 찾아갔다.

그때 광해군은 정명공주에게 ‘이리 좀 와보렴.’ 하면서

쓰다듬기도 하고 “똑똑하고 예쁘다.” 칭찬하기도 했지만

영창대군은 본체만체 하였으므로., 머쓱해진 영창대군이

어머니의 말에 따라 임금 앞으로 나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영창대군은 ‘대전 형님이 누님은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아니하시니 나도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무슨 일로 사내아이가 되었는고.’ 라며 하루종일 울었다.”

.............................................................................. 


1613년(광해군 5년), 서얼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이

조령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전부터 영창대군이 타깃이었던 이이첨 등의 대북파.


그들을 겁박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수괴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날조된 허위 자백을 받아냈던 것.


인목대비 역시 역모에 가담했으며,

그녀가 아버지와 짜고 무당을 시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했다는 혐의도 추가되었다.

 

그 결과 김제남과 세 아들이 처형,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

이 사건은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

신흠, 이항복, 이덕형서인

남인 출신의 대신들이 모두 쫓겨나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의 대북파가 정권장악.


그해 겨울 11세의 정명공주는 마마에 걸렸지만

목숨을 건졌는데 그것은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 대북파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이 살해되며 인목대비와 공주는 지옥을 겪는다.

남몰래 쏟아내는 원한의 피눈물이 옷깃을 흥건하게 적셨다.


정명공주에게 있어서는

찬란한 내일을 꿈꾸는 소녀란

시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1618년(광해군 10년) 1월 30일,

광해군은 ‘폐비절목(廢妃節目)’을 공포.

인목대비를 ‘대비’에서 후궁인 ‘서궁’으로 격하.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켜 버렸다.

정명공주 신분은 ‘서인(庶人)’으로 강등.

선왕의 딸암을 감안하여 옹주 수준의 예우.


그당시 정명공주의 나이 16세.

이복오빠의 어머니에 대한 미움.

하여, 일찌기 혼기를 놓치고 있었다.


그때부터 정명공주는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를 모시고

서궁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며 선조가 생전에 즐겨 썼던

석봉체를 갈고 닦아 그 무렵 완성한 글씨가 바로 ‘화정(華政)’.


비참한 유폐생활.. 정명공주의 빛난 처세술 


훗날 이 작품을 물려받은 막내아들 홍만회

조정 중신이자 저명한 문인이었던 남구만에게

어머니가 고난당하실 때 쓴 것이라며 발문을 청했다.


그러자 남구만은 정명공주의 글씨가

선조의 필법에서 나왔는데 기상이 웅건

도무지 여인의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며 상찬.


그때부터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 중

최고의 서예작가로서 인정받게 된다.


남구만은 저서 '약천집(藥泉集)'에서

정명공주가 당시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무슨 이유로 서예에 몰두했는지 설명한다.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정명공주는 아직 혼인하기 전이었다.

공주는 대비를 곁에서 모셨는데,

대비는 슬프고 비통하며 두렵고

위축되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공주는 붓을 잡고 큰 글자,

작은 글자를 써서 대비의 마음을 위로

어머니의 심경을 풀어드리고자 했다.’


정명공주와 인목대비의 가슴을

시시각각 옥죄이던 서궁의 압박은

1623년(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인조반정으로 인해 일단 막을 내렸다.


인목대비는 신분이 복권되었고,

정명공주 역시 신분이 복권되었다.

정명공주 나이가 21세 때의 일이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인조는 자신의 거사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두 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주는 등 온갖 최상의 예우를 다했다.

반정 사흘 뒤 예조의 청을 받아들여 정명공주의 부마간택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공주의 나이가 많은 탓에

부마 후보자의 연령제한까지 푸는 등

소동을 벌인 끝에 8월 11일에 이르러서야

초간택으로 9명을 선발 9월 12일 재간택에서

중추부 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이 부마로 낙점.


공주보다 세 살 아래인 18세였다.

두 사람의 혼례는 해를 넘기지 않으려는

인목대비의 뜻대로 음력 12월 11일에 치뤄졌다.


신혼집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마련되었다.

​정명공주방, 혹은 영안위방을 지을 때 작은 소란.


왕명으로 인경궁을 짓다가 남은 재료 170칸을 사용하려 하자

대간에서 공주의 집 짓는 데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했던 것.

하지만 인조의 엄명으로 공사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법령에 따르면

공주의 거처는 50칸으로 한정되었지만 새집의 규모는 100 칸을 넘었다.


인조는 그 뒤에도 인목대비에게

자신의 효성을 증명하려는듯 딸인

정명공주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기존의 살림집의 증축은 물론

수많은 노비와 토지를 하사했다.

심지어 전라도의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등 섬에 있는 땅까지 하사.


김대중 대통령을 낳은.,하의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어은리.,하의도.

'물 위에 떠있는 연꽃' .,연화부수(蓮花浮水).

유인도 9, 무인도 47 천일염과 수산양식으로 소득.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37.8㎞ 지점.,하의도.

면적은 14.52㎢이고, 해안선길이는 36.8㎞.

섬 동쪽과 남쪽에 상태도(上苔島)와 하태도.


오늘날까지 공주의 섬이라 불리는 하의3도.

330년간 농민투쟁 소유권분쟁 진원지가 된 곳.

섬의 토지 소유권이 공주 후손에게 넘어간 때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경상감사 박문수가 1728년(영조 4년)에

‘영안위방이 경상도 내에서 절수 받은 토지가

8,076결이나 됩니다.’라고 보고한 대목이 적혀있다.

8,076결을 지금의 평수로 환산하면 약 5천만 평에 달한다.


정명공주 시댁인 풍산 홍씨 가문에도 지극한 성은.

1629년에 그의 부친인 홍영을 예조참판에 제수했고,

1631년 인목대비 건강이 좋지 않자 그의 품계를 높였다.


하지만 이런 인조의 선심 공세는

인목대비 김씨가 살아있는 동안 만.


정명공주가 혼인하여 출궁한 뒤에

인목대비는 계속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런데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거처 이전.


그때 인조는 경덕궁으로 거처 이전.

1631년부터 잦은 설사와 복통, 고열로

잠 못 이루던 인목대비는 1632년(인조 10년)

음력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대비의 죽음과 함께 정명공주에게 위기가 닥쳤다.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르던 도중 인경궁에서

‘반고(頒告. 왕이 국내에 반포하는 명령서)나

주문(奏聞. 중국 황제에게 사정을 알리는 보고서)에

임금을 폐위하고 세우는 것과 같았다.’ 라 쓰여진 비단 3폭.


이른바 ‘백서삼폭(帛書三幅)’ 사건이었다.

평소 대비전에 첩자를 심어두어 대비의 움직임을

감시했던 인조는 인목대비 김씨가 생전에 자신을 폐위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의혹을 품기에 이른다.


일찍이 그는 대비전의 궁녀 옥지 등 서너 명이

밤마다 문을 닫고 궁벽한 곳으로 가서 제사 지내며

기도했다는 보고를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자신을 저주하는

행위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물증을 찾지 못해 넘어가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원인 모를 질병을 앓게 된 인조는

자신의 증세가 정명공주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궁인들을 시켜 대궐 곳곳을

뒤져보니 몇몇 수상한 물건들.


이윽고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얻게 된 인조는

중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정명공주의 저주사건이

있었다며 물증까지 발견했다고 스스로 공표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은

백서삼폭과 저주의혹을

이미 승하한 인목대비나

정명공주에게 돌리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어찌 되었든지

반정의 명분을 훼손시키는 것은

자멸행위이고 자살행위라 여겼다.


결국 인조와 공신들은 구수회의 끝에

인목대비나 정명공주 역시 저주사건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대비전 궁녀 윤소원과

정상궁 2명을 주모자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정명공주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지만

속 좁은 인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


1639년(인조 17년)에도 원인모를 병에 걸린 인조는

또 다시 정명공주를 의심하면서 궁중을 수색하도록 명.

그 결과 또 다시 궁중 곳곳에서 많은 저주물이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제 공주에게 역모의 혐의만 씌우면 끝.

홍주원 일가를 비롯해 공주 주변의 인사들은

곧 불어올 피바람에 잔뜩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장유, 최명길 등 반정공신들이 결사적으로

공주를 비호함으로써 인조의 결정을 철회시킨 것.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가 운명한 후

정명공주는 반정으로 출세한 그들이

세상에 내밀 수 있는.,단 한 장의 카드.


‘지금 궁중의 저주의 변은 온 나라 신민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깰 우려가 있으므로 좋은 대책을

구하려 했지만 도리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조대왕은 왕자와

왕녀가 많지만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은 만년에 보시고 승하하셨습니다.

지난 일은 말할수록 답답할 뿐이고 지금은 홀로 정명공주만이 남았습니다.


지금 만약 애매한 일로 정명공주를 연루시켜

그녀로 하여금 놀라고 근심하여 마음을 상하게 해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게 한다면 오늘날의 수상이 된 자가

어찌 그 책임을 변명하겠습니다. 또 장차 무슨 낯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인조반정 이후 10년간 영화를 누린 정명공주는

인목대비 승하후 17년 동안 위험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인조의 감시망에서 

즐기던 서예도 하지 않았고,

친지들과 식을 주고받을 때는

한글 편지를 썼고 높은 담장 안에서

숨죽여 사는 동안 가슴이 타들어갔지만

외출도 삼가고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했다.


그 인고의 시간은

1649년(인조 27년)

인조 운명 후 멈췄다.


그리고나서

47년간 고난을

보상이라도 하듯

영광의 날이 돌아왔다.


정명공주는 효종, 현종,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종친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인조보다 36년을 더 살다가 1685년 83세에 운명.

이는 조선 역사 상에서  공주들 가운데 최장수 기록.


병자호란 때 35세였던 정명공주는

강화도 고려산 적석사에 머물렀다.


당시 공주 일행이 갑곶나루에 다다랐을 때

집안의 재화를 가득 실은 배가 먼저 와서 대기.

그런데 피난민들이 몰려오자 공주는 아랫사람에게

재화들을 다 내리고 그들을 먼저 배에 태우게 했던 것.


이에 감읍한 백성들은 그녀를 칭송하면서

후손들이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덕담.

 

과연 그와 같은 홍복을 입었는지,

정명공주의 7남 1녀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장남 홍만용은 숙종 때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


다른 아들들 역시 평생 영달을 누렸다.

영조 시대를 풍미했던 홍봉한과 그의 딸

혜경궁 홍씨, 정조의 제갈량이었던 홍국영,

훗날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도 그녀의 후손.


1682년(숙종 8년), 80세가 된 정명공주는

막내아들 홍만회에게 한 장의 글을 써주었다.


그러자, 홍만회는 글씨를 탁본하고 제목을 붙였다.

‘자위수택(慈闈手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작품)’

바로 이 글 안에 정명공주 평생의 마음이 담겨있다.


‘원컨대 나는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으면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 정명공주-


..........김제남(金悌男, 1562년 ~ 1613년 6월 1일)

조선 중기의 문신, 외척. 자는 공언(恭彦), 본관은 연안(延安).

선조의 장인으로,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는 그의 둘째딸이다.

1585년(선조 18년) 사마시 합격, 관직에 올랐으며 별시문과 급제.


연천 현감을 거쳐 1601년 사간원 정언․헌납․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로 간택, 돈녕부도정으로 특진.

보국숭록대부 (領敦寧府事)로 승자되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군.


1613년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

왕으로 추대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16년 인목대비가 폐모되면서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복권되고 의정부영의정추증.

김전의 증손자이며 김안로의 종손. 시호는 의민공(懿愍公).


.........가계도.........

조부 : 김안도(金安道).

조모 : 강씨(姜氏).


아버지 : 김오(金祦).

어머니 : 안동 권씨


부인 : 노게(盧垍, 광주 노씨)의 딸.


장남 : 김내(金琜, 1576년 - 1613년

자부 : 정씨, 군수 정묵(鄭默)의 딸

손자 : 김천석(金天錫)

손녀 : 김씨

손녀 : 김씨

손녀 : 김씨


차남 : 김규(金珪, 1596년 - 1613년)

자부 : 대구 서씨,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霔)의 딸

손자 : 김홍석(金弘錫)


삼남 : 김선(金瑄, 1599년 - 1613년)

손자 : 김군석(金君錫) - 생부 김내


장녀 : 김씨

사위 : 심정세(沈挺世, 현감 역임)


차녀 : 인목왕후, 선조의 계비

사위: 조선 14대 국왕 선조


외할아버지 : 권상(權常)

장인 : 노게(盧垍)

사돈 : 윤원형

....................


종가(宗家)가 대대로

사용하는 집.,종택(宗宅)



영광 연안김씨 종택  



영광.,'연안 김씨' 종택(宗宅).



   중요민속자료 제234호. 영광군에는 연안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신호준(辛鎬俊) 가옥과 이규헌(李奎憲) 가옥 등 유명한 옛집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제일가는 품격을 갖춘 집은 연안김씨 종택.


영광(靈光) 연안 김씨 종택(延安 金氏 宗宅) 


전남 영광 연안김씨 종택 


이 옛집은 현재 김성호씨 소유이다.

연안김씨가 영광에 들어와 살게된 것은

시조의 4대손인 김영(金嶸)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숙부를 따라 이곳에 온 16세기 중엽.


조선 시대 대단한 상류 주택으로 인정받은 '영광 연안김씨 종택' 


조선 말,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 동간리.

이 가문에는 진(瑱)· 재명(載明)· 함 등 세 효자.

나라에서 그들을 표창하여 명정(命旌)을 내렸는데

이를 모시기 위한 정문(2층 누각형)이.,삼효문(三孝門).


이 현판은 고종황제의 형님인

이재면(李載冕)이 썼다고 한다.


삼효문의 막새기와 & 망와에는

‘삼효(三孝)’를 한자로 새겨.,장식.


영광 연안김씨 종택 4 


멀리 앞뜰이 바라보이는 나즈막한 산.

그 아래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 형국이

갖추어진 연안김씨의 동족마을이 위치,


이 가옥은 마을 윗쪽 넓은 대지에 북향으로 건축.

이 집터는 매화꽃이 떨어진 형국인 길지.,학(鶴)터.


영광 연안 김씨 종택 5 


이 가옥은 안채를 비롯 사랑채·곡간채·사당·서당·

마부(馬夫)집· 안대문· 바깥대문(삼효문)으로 구성.

그밖에도 정원과 연못까지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건립연대는 1868년(고종 5)


건물의 배치는 남북방향으로 경사진 지형을

크게 몇 단으로 정지하고 전체적으로 북동향.


대지의 서측으로는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공간.

동측으로는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사랑공간을 형성.


영광 연안 김씨 종택 5 


사랑공간에의 진입은

바깥대문채인 삼효문을

통해 이뤄지도록 하였고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사랑채·서당·삼효문·마부집·연못.


영광(靈光) 연안 김씨 종택(延安 金氏 宗宅)   


이 집의 안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사당마당과 중문을 통하도록 하였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 & 아래채' 배치.


영광(靈光) 연안 김씨 종택(延安 金氏 宗宅) 


4대에 걸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은

선조들의 위패를 모셨는데 안채의 뒷편에

약간의 경사지를 정지하여 사당을 배치하였다.


영광 연안김씨 종택 4 


이 가옥의 특징은

각 건물들을 배치함에

향(向)이나 중심축, 대칭 등의

규칙적인 면이 보이지 않고 안채가

一자형 평면에 양쪽날개를 달아 증축한 점.


영광 연안 김씨 종택 5 


또한 사람이 기거하는 방보다

곡간, 쌀두지, 찬광, 밥청 등의 실들이

너무 많아 대단한 부자집이었음을 나타내준다.


연안김씨 종택 모두가 보물급!! 


조선 시대 대단한 상류 주택으로 인정받은 `영광 연안김씨 종택` 


조선 시대 대단한 상류 주택으로 인정받은 `영광 연안김씨 종택`


전남 영광 연안김씨 종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