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대 동아시아의 연금술,,,,,비취색/옥색 고려청자.

2018. 12. 10. 13:23차 이야기

 

 청자의 원본인 옥/玉

 

중국은 옥을 금보다 값지게 여겨, 청자를 만들었다.

중세 서구는 연금술로, 금을 인공으로 제조하려 했다면,

동아시아의 연금술은, 옥을 인공으로 제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연금술은 실패했다면,

동아시아의 연금술은 성공했다.

 

 

淳化四年名靑磁壺, 고려(高麗) 성종(成宗)12년(993년 제작)

 

청자호의 밑면에 새긴 명문. "도공 최길회"라는 작가명 기입.

 

항아리의 굽 밑에「 淳化四年 癸巳太廟第一室 享器匠崔吉會造(순화4년 계사태묘제일실 항기장최길회조)」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것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위한 태묘(太廟)의 제1실 향기(享器)였으며, 도공 최길회(崔吉會)의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화(淳化) 4년은 고려(高麗) 성종(成宗)12년(993)으로서, 명문(銘文)이 있는
청자(靑磁)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고려(高麗) 태묘(太廟)는 성종(成宗)8년(989) 4월 15일에 착공해서 성종(成宗)11년 (992) 12월 1일에 준공되었으므로, 이 청자순화사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는 태묘(太廟)가 준공된 이듬해의 작품이었다.

고려 태조(高麗 太廟)는 경기도(京畿道) 개풍군(開豊郡) 영남면(嶺南面) 용흥리(龍興里)에 그 유지(遺址)가 있으나, 청자순화사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의 출토지는 알 수 없다. 이 항아리의 유색(釉色)은 청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담록조(淡綠調)의 황갈회색계이며, 전면에 세밀한 빙렬(氷裂)이 있고
태토(胎土)는 회백색의 자질(磁質)에 가까워서 일종의 불완전 청자이다. 말하자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기술이 아직도 정착되지 못했던 당시의 양상을 잘 전해 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기형(器形) ·유태(釉胎) 등의 특질도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중국 월주요(越州窯) 청자의 여운을 짙게 풍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청자(高麗靑磁) 생성의 초기를 밝히는 가장 확실한 유물로 주목을 받는다.

 

 

청자소문과형병 靑磁素文瓜形甁
지정번호
:
국보 제94호
지정연월일
:
1962년 12월 20일
시 대
:
고려시대, 인종 24년(1146)
  규모ㆍ양식
:
높이 22.5㎝, 배지름 9.6㎝, 입지름 8.8㎝, 굽지름 8.6㎝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소문과형병은 참외형의 몸체에 참외꽃을 입 부분으로 삼고, 굽다리를 겹치마처럼 표현한 매우 기품 있는 청자이다.
담녹색이 감도는 맑은 비색 유약이 전면에 얇고 고르게 발라져있으며, 부분적으로 유빙열(釉氷裂)이 나있다. 정선된 태토에 굽다리에는 회백색의 내화토 받침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장도면(長道面)의 고려 인종 장릉(長陵)에서 황통(皇統) 6년(1146) 명(銘)이 있는 인종시책(仁宗諡冊), 은제 젓가락, 청동제 숟가락 등 유물과 함께 발견된 화병(花甁)으로 전한다. 태토나 유약이 가장 세련되었던 12세기 중반 경 고려청자 최성기의 작품이다.
강진 사당리요(沙堂里窯)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과형화병(瓜形花甁)은

한 중 양국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과형화병으로서는 가장 세련되고 단아한 작품. (청자소문과병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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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인종 1년(1123) 당시 사신으로왔던, 송나라의 "서긍의 고려도경"을 살펴보자.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부르는데 서긍이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기 때문에 '도경(圖經)'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권32에 보이는 「기명(器皿)」과 권26의 「연례연의조(燕禮燕儀條)」에 관한 것으로 1123년경의 고려청자에 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외국 사신들의 식사 또는 만찬 석상에 나오는 그릇들은 주로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금속기였고, 청자는 귀하고 값진 것이 1123년경의 모습이었다.


둘째, 1123년 당시 고려인들은 청자의 색을 비색/翡翠色/玉色이라 하였고, 청자는 근년 이래로 제작이 공교해지고 색깔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셋째, 완, 접시, 찻잔, 술잔, 꽃병 등은 중국의 일정한 기물의 형태를 닮고 있으나 술항아리와 산예향로는 다른 그릇과 달리 뛰어나고 절묘했다.


넷째, 당시 청자의 유색이 옛 월주요산 청자의 유색과 비슷하고, 당시 새로 설치된 여요산의 청자와 비슷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섯째, 당시 찻그릇으로 금화오잔과 비색소구가 쓰였으며, 조정에서는 왕과 신하와 사신들에게 차를 다 돌린 후 격식에 따라 동시에 차를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도경』에 보이는 고려청자에 관한 기록은 1123년 당시의 뛰어난 비색청자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전성기의 청자 모습을 현존하는 1146년 인종 장릉 출토의 청자참외형꽃병 등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아울러 비색소구로서 청자소완 등이 그 당시 연회 등에서 사용되던 찻그릇임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서긍의 고려도경 내용 중, 인상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翡色)이다.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연꽃으로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 가운데 이 기물이 가장 정절하고, 나머지는 월주고비색/秘色이나 여주신요기와 대개 비슷하다."

- 「도로(陶爐)


청자의 출발이 가장 값지게 여기던 옥/玉의 재현이라는 일종의 “고대 동아시아의 연금술”이 었다, 그런데 서긍은 “산예출향”이라는 고려의 청자를 예로들며, 고려의 청자빛을 비색/翡色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당시 월주요나, 신여주요의 청자는 “신비한 색/ 秘色”이었을 따름이다.

 

서긍이 극찬한 고려청자의 수식어 翡色/비색은 玉/옥의 다른 이름인,

翡翠/비취의 색을 말한다.

중국의 월주요나 여주신요의 청자는 신비한 색/秘色이었고,,,,그러니

옥의 연금술은 고려에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 셈이다

 

서긍이 극찬햇을 대표적인 고려청자들,,,

 

 

 

 

 

 

 

 

 

 

 

 

유일하게 고려에서만 제작된 상감기법의 청자들.

 

 

 

 

 

 

 

 

열도 동경국립박물관 보관품.

 

 

 

 그러나, 안타깝게도 1350년경, 고려청자의 맥은 끊기고,

이후 조선시대에 분청사기와 백자로 변화된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해안가를 일대로 약탈을 일삼던, 왜구(倭 寇)들로 인해

해안 주변의 백성을 50리/20km 밖으로의 피난을 명 하였다.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도요지는 물자의 유통이 용이한 해안가였으며,

대표적 청자 도요지인, 전남의 강진 등의 도공들은

왜구를 피해서 도요지를 떠났고,

 결국 다시는 청자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

출처 : 사이길
글쓴이 : 그림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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