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0. 06:07ㆍ차 이야기
팔관회(八關會) 조선 종교의례 용어사전
정의 고려시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 등에 대한 불교식 제사 의례. 팔관회(八關會)는 인도에서 유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흥왕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토속신을 위한 제사를 봉행하며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고려시대에 성행하여 국가적인 제사 의식이 되었다. 고려 태조는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였고, 또 ‘천령과 오악, 명산, 산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전사자를 위령하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등의 제의적(祭儀的) 의식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신앙과 제사, 놀이 등이 융합된 국가적인 축제로 변모하였다.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고려라는 국가에 대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적인 축제였기 때문에,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폐지되었다. 팔관회는 인도의 팔재계(八齋戒) 의례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는 육재일(六齋日) 즉 매월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은 악귀가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목숨을 빼앗고 병에 걸리게 하는 불길한 날이라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이 날에는 목욕하고 단식하며 착한 일을 행하여 흉사를 피하려 하였다. 즉 액막이 풍속이었는데, 이후 불교에 유입되어 재가신도들이 팔계(八戒)를 되새기며 지키는 날이 되었다. 팔계는 오계와 삼계가 합쳐진 것으로, 오계는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헛된 말을 하지 말 것, 음주하지 말 것 등이고, 삼계는 가무를 즐기지 말 것, 사치스러운 침상을 쓰지 말 것, 때가 아니면 먹지 말 것 등의 내용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팔관회 의례도 전해졌다. 이미 3세기 후반에는 중국 불교에 팔계 즉 팔재계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팔관회도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팔관회는 문헌에 따라 팔관재(八關齋), 팔관계(八關戒), 팔재(八齋)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는데, 5세기 중엽에 『불설팔관재경(佛說八關齋經)』이 등장하면서 팔관재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중국의 팔관재는 불교의 종교 의례와 도교의 민속 신앙적 요소가 결합하여, 장수, 치병, 재액 퇴치 등 다양한 현실적 기원을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의 팔관회는 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고구려에서 귀순한 혜량(惠亮)이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처음 팔관회를 개설하였고, 602년(신라 진흥왕 33)에는 전쟁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를 7일 동안 베풀었다. 636년(신라 선덕왕 5)에는 자장(慈藏)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는데,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놓아주면 외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화랑의 세속오계에도 팔관회와 관련한 내용이 보인다. 원광(圓光)은 화랑도에게 살생유택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육재일과 봄·여름철에는 살생을 하지 않는데 이는 때를 가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팔관회 전통은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궁예는 898년부터 917년까지 20년 동안 매년 개설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918년(태조 1) 11월에 위봉루(威鳳樓)에서 개설된 이래, 매년 개최되는 국가의 정기 의례로 자리 잡았다. 특히 태조는 「훈요(訓要)」를 내려, 후세에 간신들이 연등회와 팔관회의 가감을 건의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하라며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팔관회는 고려시대 전 기간에 걸쳐 120회나 개설되었다. 그러나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팔관회는 전격 중지되었고[ 『태조실록』 1년 8월 5일], 이후 더 이상 개설되지 못하였다. 이는 팔관회가 단순한 불교 행사를 넘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고려라는 국가에 대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적인 축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건국 직후 팔관회를 사치스러운 불교 행사로 지목해 단번에 폐지시켰는데, 이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 의식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매년 두 차례 개설되었다. 서경에서는 10월 14일과 15일, 개경에서는 11월 14일과 15일에 개최되었다. 14일은 소회일(小會日), 15일은 대회일(大會日)이라고 하였다. 소회일에는 왕이 법왕사에 행차하여 불전에 공양하고 선왕(先王)의 위패에 예를 올렸다. 고려중기의 문인인 이규보(李奎報)는 「법왕사팔관설경문(法王寺八關說經文)」을 지어, 법왕사에서 경전을 강설하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대회일에는 구정(毬庭)에서 군신과 외국 사신의 하례 의식 등이 진행되었다. 이틀간의 의례 절차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왕이 법왕사로 행차한다[法王寺幸香]. ② 왕이 의봉루에 이른다[鑾駕出宮]. ③ 의봉루에 오른 왕이 태조에게 제를 올린다[太祖眞酌獻]. ④ 왕이 자리를 잡은 뒤 군신 간에 하례 의식을 진행한다[坐殿受賀]. ⑤ 지방의 관리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봉표를 왕에게 올린다[封表朝賀]. ⑥ 외국인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린다[外國人朝賀]. ⑦ 문장가들이 팔관회와 왕을 칭송하는 팔관치어를 올린다[八關致語朝賀]. ⑧ 술과 음식을 나누며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즐긴다[歌舞百戱]. 팔관회의 의식 절차는 크게 왕과 신하 간의 의례와 무대 공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군신 간에 하례를 행하는 좌전수하(坐殿受賀) 등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이고, 가무백희는 전통적·종교적 요소와 예술 및 놀이의 성격이 융합된 문화 축제라 할 수 있다. 팔관회에 관한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그 개설 목적과 취지를 ‘국가적·정치적’이라고 한다. 즉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호국 의례로서, 왕권을 신성화하고 계급 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팔관회가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무백희의 존재였다. 가무백희는 팔관회가 국가의 공식 의례이자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팔관회는 조선 건국 이후 더 이상 개설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2000년부터 부산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를 복원·재현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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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八關會)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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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한국전통연희사전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구미래 Ⅰ. 한국팔관회의 독자적 위상
특히 팔관회는 무형의 문화재에 해당하는 축제의 세부적인 의례절차와 내용이 『고려사』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문화로 전승된 평면적 팔관회를 입체적·역동적으로 재현하여 유무형의 전통문화를 총체적으로 재창조해내는 일은, 학술적·문화적 역량이 뒷받침되는 이 시대의 과업이라 할 만하다.
요약문
팔관회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안하였다. 첫째 팔관회의 기원이 되는 재가불자들의 신행의식, 둘째 나라를 위해 혹은 공동체의 문제로 사망한 이들을 위한 위령의식, 셋째 전통 사상과 문화를 아우르는 종합축제이다. 이러한 주제를 담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특히 15일 이전의 6일간은 주로 불자·일반인을 중심으로 한 수행의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려시대의 국가 불교의례인 팔관회(八關會)는 인도불교에서 팔계재(八戒齋)로 처음 성립된 수행의식이었다. 팔계재란 출가자들의 핵심계율인 사미십계(沙彌十戒) 가운데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헛된 말 하지 말고, 음주하지 말라”는 기본5계에 “사치하지 말고, 높은 곳에 앉지 말며,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는 세 가지를 포함한 것1)을 뜻한다. 재가불자들도 기본5계는 일상적으로 지켜야 했지만, 출가자처럼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매월 육재일(六齋日: 8, 14, 15, 23, 29, 30일)에 하루 동안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킴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81 중국불교에 와서는 3세기부터 팔관재(八關齋)라는 말이 등장하고,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재가신도들의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자리 잡게되면서 승려와 신도들을 중심으로 수행·치병(治病)·위령(慰靈) 등의 다양한 목적 하에 행해졌다. 당대(唐代)에 이르면 명칭이 팔관재계(八關齋戒)에서 팔관재회(八關齋會)로 바뀌고, 8세기의 기록에는 사찰에서 반승하며 밤새 범패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모여 분향과 헌화를 하는 등 대규모의 팔관재회를 개최한 내용들이 등장한다2.) 한국팔관회의 초기양상 또한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에서 혜량법사가 귀화하자 진흥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모시고 “처음으로 백좌강회와 팔관의 법을 두었다(始置百座講㑹及八關之法)”3)고 했듯이 수행의식으로 출발하였다. 그 뒤 전사한 사졸을 위한 위령제로서 팔관연회(八關筵會: 572년, 진흥왕 33)4)와 외세의 침략을 방지하는 목적의 팔관회(645년, 선덕왕 14)5) 등이 치러졌다. 이후 태봉을 세운 궁예가 팔관회(898년, 효공왕 2)6)를 개최한 데 이어, 고려개국과 함께 태조의 강력한 의지로 11월 팔관회가 개경에서 개최되고7) 이후 서경에서도 10월 팔관회가 정착하기에 이른다(표1 참조).
따라서 초기팔관회 또한 수행·위령 등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하더라도 왕이 주관하는 국가차원의 의례였기에, 그 내면에는 호국과 왕권강화 등의 이념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팔관회가 개별적으로 다양화됨에 따라 의례의
한국 국가(왕) 11월·10월 보름 사찰→대궐 일원화, 통합화 연례행사 신라팔관회 또한 혜량법사에 의해 설행된 뒤로 여러 경론이 수입되면서 교리적으로 보강되고 발전9)하여 단편적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 의례로 행해졌다. 고려팔관회에서 설행된 사선(四仙)의 화랑무(花郞舞)와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의 가장행렬은 신라팔관회의 유습으로, 화랑의 풍류와 결합된 팔관회는 신라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정착되었다.10)
9) 안지원, 앞의 책, p.144. 184 ● 불교학연구 제35호 삼국시대부터 왕조가 바뀔 때마다 미륵의 화신으로 믿었던 화랑을 참가시키면서 팔관회를 중요한 국사(國事)로 인식11)하였던 것이다. 삼국통일 후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전쟁에서 죽은 가족과 동료를 위한 위령제로서 팔관회를 개최했을 것이라 짐작되며, 신라팔관회의 전통이 고려에도 계승된 것은 이러한 풍습이 태조가 활동하던 송악지방까지 전파되어 후삼국시기에도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2) 이처럼 팔관회가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했던 고구려는 물론, 신라에서도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진흥왕 대부터 지속되었고, 후삼국에까지 이어져 고려시대에 정착한 점은 그 역사성에서 독자적이다. 물론 초기의 성격은 수행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다양한 기능을 지녔고, 개별적으로 치러진 팔관회 의식도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고려의 국가축제로 정착하는 데 중요한 특성을 이루었다. 따라서 역사성보다 더 중요한 의의는 이전 왕조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전통을 축적·종합화해온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꽃 피운 팔관회는 신라의 것과 태봉의 것을 모두 계승한 팔관회였고 당대의 전통문화를 포괄하고자 했다. 그 의도가 여러 계통의 백성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기에 고려팔관회에 담긴 의례요소가 더욱 풍성할 수 있었던 셈이다. 최남선 이래 많은 학자들이 팔관회의 정체성에 대해 제천의례·추수감사·동지의례 등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가 하면, 그 속에 담긴 사상 또한 제천사상, 선도(仙道), 산악숭배, 조상숭배, 자연숭배, 풍수지리, 무속 등 한국의 모든 전통사상을 대입시킬 수 있는 이유도 바로 팔관회의 이러한 특성에 있다.
12) 안지원, 앞의 책, pp.150~151.
고려시대에 팔관회가 공식적으로 정지되었던 것은 네 차례에 불과하며, 친유교적이었던 성종이 팔관회를 폐지하여 일시 중단되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빠짐없이 행해졌다. 연등회가 국상(國喪) 등의 이유로 정지되거나 연기되었던 사례가 많았던 데 비해 국상이 있어도 기일을 바꾸지 않고 시행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팔관회는 고려 전시대를 통해 규모 면이나 중요성에 있어 가장 비중이 큰 국가의례13)였다. 이념이 다른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팔관회는 일시에 단절됐지만, 팔관회의 역사를 소급해볼 때 수차례 왕조가 바뀌는 가운데도 1천년에 가까운 역사성을 지닌 채 전승되어온 것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교의례라는 이유로 보편적 관심에서 제외되고 학문대상으로만 다루어진 경향이 크다. 팔관회가 지닌 역사적·불교적 가치와 문화적·사회통합적 가치는 한국 특유의 축제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에 해당한다.
186 ● 불교학연구 제35호
팔관회를 계승·복원할 때 기본전제는 전통시대와 맥락이 달라진 현재에 맞게 동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로의 복원은 불가능할 뿐더러, 복원한다 하더라도 당시의 의미를 확보하기 힘들어 박제된 축제 혹은 역사 속에 머무는 축제로 남기 쉽다. 팔관회를 둘러싼 많은 요소를 본래대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팔관회의 기반을 이루었던 중요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살려나가되, 현대인이 공감하고 동참하는 전통으로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을 목적으로, 팔관회를 현대축제로 재조명한다면 어떠한 방향성을 지닐 것인지에 대해 설행시기와 의례주제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1. 팔관회의 정체성이 담긴 설행시기 팔관회는 개최시기와 의례목적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매년 두 차례의 팔관회를 열어 11월[仲冬] 보름의 중동팔관은 개경에서, 10월[孟冬] 보름의 맹동팔관은 서경에서 개최하였고 이 가운데 왕경인 개경의 중동팔관이 핵심을 이루었다. 팔관회를 둘러싼 연구쟁점은 주로 기원과 정체성의 문제로 집약되는데 여기에도 개최시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팔관회를 보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14)로 구분된다. 첫째, 팔관회를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예의 무천(舞天) 등 고대 10월 제천의례를 원류로 한 민족 고유의 제전(祭典)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는 진흥왕대의 신라팔관회가 10월에 치러졌고, 고려시대에 정착된 팔관 역시 서경에서는 10월에 치렀으며, 태조 왕건이 반포한 「훈요십조」의 내용 중 팔관회에서 섬기는 대상 신의 성격을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송사(宋史)』 고려조와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에서는 10월 동맹을 팔관재(八關齋)로 개최한다”15)는 기록 등이 있어 이를 근거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서 10월 동맹을 계승해 팔관회로 정착시켰다는 관점이다. 15) 徐兢,『 高麗圖經』 卷17, 祠宇 條 ,『宋史』 外國列傳, 高麗 條, 國史編纂委員會 번역『(국역 中國正史朝鮮傳』 譯註3, 1989). 188 ● 불교학연구 제35호 둘째, 팔관회는 11월 15일에 열린 개경팔관이 핵심을 이루면서 철야로 등불을 밝히는 연등(燃燈)을 무엇보다 중시한 동지의례(冬至儀禮)의 성격을 지닌다는 관점16)이다. 중동(仲冬)인 11월은 태양의 소멸 및 재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시절로, 동지는 짧아지기만 하던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경계의 시간이다. 따라서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1년은 이때 바뀐다는 인식이 있었고, 팔관회는 해가 바뀌는 시점에 전통적으로 성행한 불[火]문화의 한 양상으로, 한 해 동안에 사용될 불을 점등함으로써 왕실의 상징성을 확보하는 동지의례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신라에서 호국 불교의례로 실시해온 팔관회를, 고려왕조의 성립과 함께 필요한 요소들을 보완하여 종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 불교의례로 보는 입장이다. 팔관회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토착신앙과 불교의례의 양극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각도 있으나, 이처럼 양자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통설이다. 이 관점은 위의 두 가지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를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16) 편무영, 앞의 논문, pp.97~126.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89 팔관회를 현대축제로 복원할 때 전통팔관회의 날짜를 계승하되 양력 10월 15일, 음력 10월 15일, 양력 11월 15일, 음력 양력 11월 15일의 네 시기를 고려해볼 수 있다. 이들 시기는 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 변수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표3 참조). 〈표3〉 현대팔관회에 적합한 개최시기17)
190 ● 불교학연구 제35호 특히 양력 10월 15일은 개천절(開天節) 축제와 시기적·의미적으로 겹치는 점이 있다. 개천절도 음력날짜를 양력으로 바꾼 날로,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 후 국경일로 제정되었으며 본래 음력 10월 3일던 것을 1949년에 양력으로 바꾸었다. 개천절이 10월 3일로 된 과정은 단군관련 제사전통이나 민속전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민간에서 수확철인 10월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중시해왔고, 3을 길수(吉數)로 여겨 신성시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따라서 이 날을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등 고대 제천행사와 같은 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18) 아울러 개천절을 민족의 정체성과 결속을 도모하는 축제의 장으로 여겨 양력 10월 3일에 크고 작은 개천절 행사와 축제를 열고 있으며 제천의식은 음력 10월 3일에 행 양력 11월 15일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다소 애매모호하다. 고려팔관회의 개최날짜 중 음력 10월 15일은 제천의례와 연계되고, 음력 11월 15일은 동지의례와 연계된다. 그런데 팔관회 날짜를 양력 11월 15일로 정할 경우 실제 동지는 양력 12월 21일이나 22일에 들기 때문에 동지축제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91 다음으로 음력 10월 15일과 11월 15일은 실제 팔관회의 날짜를 그대로 계승하는 장점을 지니며, 특히 음력세시(歲時)의 전승주체로서 불교의 역할을 견지할 수 있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나 공동체별로 행하는 산발적인 세시풍속 외에,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전통세시를 전승해온 집단은 불교권이 유일하다.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음력은 전통문화의 이해와 전승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어서 효율성과 편리함만을 취할 수 없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일상의 삶은 양력을 따르더라도, 전통 문화와 사상의 기반이 되는 부면까지 획일화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크다는 판단이 현재 우리가 양력·음력 혼용의 문화를 영위하고 있는 이유이다.19) 그러나 음력을 사용함으로써 매년 날짜가 달라져 불편하다는 단점을 지닌다 . 음력 10월 15일은 수확을 감사하며 새 곡식을 신에게 올렸던 고대 국가의 상달 제천의례 전통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 된다. 양력 10월이 전통 제천의례의 맥을 그대로 잇는 것이 아닌 데 비해, 본래 10월이 지니는 세시(歲時)의 의미를 되살릴 뿐 아니라 보름이 지니는 의미를 갖추고 있다. 다만 고려팔관회의 핵심은 11월에 있기 때문에 서경팔관회의 시기를 계승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음력 11월 보름으로 할 경우, 고려팔관회의 핵심시기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되며, 한 해가 바뀌는 동지의례로서 전통을 부각시키는 축제특성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양력 12월 중순에 해당하여 축제를 치르기에 시기적으로 춥고, 크리스마스와 겹쳐 종교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192 ● 불교학연구 제35호 실제 음력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했을 때도 음력 11월 15일은 양력 12월 8〜9일에서부터 12월말까지에 해당하며, 다음해 정초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음력 10월15일은 이로부터 한 달이 당겨지는 셈이다. 특히 팔관회·연등회는 늘 함께 거론될 뿐만 아니라 두 의례에서 등불을 밝히는 의식[燃燈]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는 중동팔관회에서부터 정월연등회에 이르는 시기가 만물의 재생을 위해 설정된 신성한 시간, 개년(改年)의 균질적인 시간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20) 동지가 들어 있어 동짓달이라 부르듯이 음력 11월은 동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닐 뿐만 아니라, 특히 11월 15일은 달이 차는 보름이다. 따라서 하지(夏至) 이후 태양이 쇠약해지기 시작하여 극에 이르는 동짓달을 맞아, 만월의 밝음과 풍요 속에 밤새 등불을 환히 밝히고 축제를 열었던 것이다. 20) 편무영, 앞의 책, pp.97~100.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93 팔관회의 경우 시기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니만큼 위의 네 시기를 벗어난다면 전통의 계승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여러 변수를 고려하여 이들 시기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한다면 전통팔관회의 시기를 계승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만 현대축제, 세계화시대의 축제라 하여 반드시 양력일 필요는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음력 10월 15일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Ⅲ. 의례주제로 살펴본 현대팔관회 전통팔관회의 의례주제와 의례요소는 매우 풍부하다. 현대의 축제로 새롭게 계승할 팔관회는 전통팔관회에서 주관한 다양한 주제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의례요소 또한『 고려사』「 예지(禮志)」 가례잡희(嘉禮雜儀)에 팔관회 행사의 문법으로 정착되어있다. 따라서 전통팔관회의 여러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계승하는 가운데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팔관회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팔관회의 기원이 되는 재가불자들의 수행의식, 둘째 나라를 위해 혹은 공동체의 문제로 사망한 이들을 위한 위령의식, 셋째 전통 사상과 문화를 아우르는 종합축제이다. 이러한 주제를 담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특히 15일 이전의 6일간은 주로 불자·일반인을 중심으로 한 수행의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잠정적인 의례공간은 정각원(正覺院)과 대운동장을 갖춘 동국대학교에서 설행하는 것으로 가정하여 개괄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194 ● 불교학연구 제35호 팔관회의 기원인 팔계재(八戒齋)는 재가불자들이 하루 동안 여덟가지 계율을 지키는 수행의식이었다. 따라서 현대팔관회에서도 불자들의 자발적인 수행과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의례의 토대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여덟 가지 계율을 중심으로 한국불자들이 행하는 수행법을 집중 실시함으로써 신행(信行)의 참모습을 함께 되새기는 날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행이 사찰별·개인별로 진행되었다면, 이 시기는 전국의 불자들이 일심삼매로 동참하여 신행에 전념하는 날로 삼을 만하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개인의 수행 못지않게 자비와 이타행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간 불교권에서는 오히려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는 자비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도조직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크다. 따라서 수행에서 출발한 팔관회야말로 그러한 동참을 적극 이끌어내는 구심점으로 삼기에 적합하다. 아울러 좋은 일은 운동처럼 벌일수록 좋은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팔관회의 본행사날인 15일 이전의 6일 동안, 내적 신행과 외적 신행으로 나누어 불교적 신행행위를 실천한다(그림1 참조). 내적신행은 참선·염불·독경·사경·사불(寫佛)·오체투지 등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을 9일부터 14일까지 날짜별로 집중 행한다. 내적 신행의 장소는 다면화하여 의례공간인 정각원(正覺院)에서는 각 사찰의 신도단체에서 분담하여 행하고, 불교 수행법을 체험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은 동국대강당 등을 활용한다. 전국의 사찰과 가정에서도 같은 날 동일한 수행으로 함께 힘을 모음으로써 개개인의 삼매와 원력을 더 깊게 만든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95 한편으로는 자비를 실천하는 외적 신행의 적극적 행위도 함께 펼쳐 나간다. 사전에 불자들이 자발적 모금운동을 벌여 사회에서 소외된 곳을 찾아 하루를 함께 나누고 봉사함으로써 장기적인 봉사활동체제를 구축한다. 양로원·고아원·병원·교도소·유기동물보호소 등 다양한 대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사후장기기증과 같은 생명살리기 운동과도 적극 연계하여 추진할 수 있다.
15일 196 ● 불교학연구 제35호 이러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인적 자원과 철저한 사전준비·사전교육이 따라야 하므로 크고 작은 신도단체가 필요하다. 따라서 팔관회를 계기로 불교신도들의 외적 신행행위를 활성화하고, 장기적으로 행사 이후에도 지속적인 체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양한 내적 신행의 양상은 불교가 가진 무형의 자산으로, 이를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이들 내용은 가장 정적인 참선에서부터 가장 동적인 오체투지에 이르는 신행행위를 담고 있어, 점진적으로 상승되는 힘을 모아 마지막 15일에 행하는 팔관회의 국민통합적 축제를 성공적으로 기원하는 의미를 아울러 지닌다. 따라서 사전행사의 신행행위는 축제 가운데 가장 불교적인 것이자 한국불교 신도들의 일상적 신행행위를 보여주는 단계이다. 지금까지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내적으로만 행해왔던 한국불교의 무형적 자산을 보여주고 함께 체험토록 함으로써 관심 있는 이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위령과 천도의 단계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97
현대에 복원할 팔관회에서는 천지신명과 개국시조인 단군을 대상으로 한 의례적인 제(祭)가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라를 수호해줄 신적 존재에게 막연히 복을 빌기보다는, 근래에 발생한 안타깝고 억울한 공적·사회적 죽음들을 위무하는 것이 의례주체인 국민에게 더 큰 마음의 평화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비롯하여, 당대에 사회적 문제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대상으로 천도재(薦度齋)를 지냄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례로 치를 필요가 있다. 22) 『高麗史』 卷2 世家2, 太祖26年 條. 23) 안지원, 앞의 책, p.161. 198 ● 불교학연구 제35호 특히 근래의 천도재는 문제적·사회적 죽음에 대응하는 공동체적제의로 부상하고 있다. 사회적 갈등으로 초래된 문제적 죽음을 맞아 사찰을 벗어난 공간에서 종교를 초월하여 이를 공론화하고 망혼을 천도하는 천도재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도재는 의례의 당위성을 공감하는 공동체구성원이 모두 의례주체가 되는 천도재의 궁극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찰의 재정기반과 밀접히 연계된 채 폐쇄적 구도에 머물고 있던 불교 천도재가 사회공동체의 문제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수륙재(水陸齋)의 정신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수륙재를 ‘소통의 장이자 융합의 장’24)이라 여기고 있듯이, 단절되었던 전통 수륙재가 근래 각지에서 부활되고 있는 현상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25) 이때의 천도재는 규모가 큰 의례이니만큼 영산재(靈山齋)의 방식으로 치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외 천도재는 하늘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서 있는 괘불(掛佛)과 그 아래 공양물을 갖춘 재단이 그대로 대자연의 성전이 되어 고대 제천의례와 맞닿은 제의(祭儀)의 면모를 지닌다. 이처럼 의례가 펼쳐지는 공간을 장엄하게 장식한 가운데 범패(梵唄)와 범무(梵舞)를 펼침으로써 죽은 자를 위한 제의를 축제적 분위기로 조성26)하는 것이 불교 죽음의례의 특성이기도 하다. 특히 범패와 범무 등 작법이 따르는 이러한 바깥차비의 영산재는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지는 불교예술의 종합축제적 형태를 띠고 있다. 25) 구미래,「 불교 죽음의례의 유형과 변화양상」,『 종교문화비평』통권 16집(서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9), p.82. 26) 具美來,「 불화(佛畵)를 통한 불교문화의 재인식과 문화 생산」,『 韓國佛敎學』 第33輯(서울: 韓國佛敎學會, 2003), p.525.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199 죽음의례에서 보이는 이러한 축제성은 불보살을 향한 찬양과 함께, 재생과 극락왕생을 축복하는 불교적·한국적 생사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당대 문장가들이 지은 팔관치어를 왕에게 올림(八關致語) 27) 『高麗史』 卷69 志23 嘉禮雜儀, 仲冬八關會儀 條. 200 ● 불교학연구 제35호 왕이 법왕사로 행차함(法王寺行幸) 왕이 궁에서 나와 의봉문에 이름(鑾駕出宮) 의봉문에 오른 왕이 태조에 대한 제를 올림(詣祖眞酌獻) 외국인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림(外國人朝賀) 군신 간에 꽃과 술과 과실을 나눔 (宴會) 당대 문장가들이 지은 팔관치어를 왕에게 올림(八關致語) 팔관회는 고려시대의 명실상부한 종합축제로, 이러한 의례요소를 검토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재창조한다면 가장 한국적인 축제를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전통팔관회에서 현대축제로 계승할 만한 요소들을 분류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합예술의 장으로 펼쳐진 다양한 가무백희를 복원·전승하는 일이다. 가무백희는 춤과 극, 음악과 노래, 기예와 놀이 등이 어우러진 자유롭고 다양한 요소들로 진행되어 팔관회의 본격적인 볼거리였다. 주요내용은 신라의 고사를 따서 행한 사선(四仙)의 화랑무(花郞舞), 용·봉황·코끼리·말·수레·배(龍鳳象馬車船)로 구성된 가장행렬, 개국공신을 추모한 가상극, 포구락(抛毬樂), 구장기별기(九張機別技), 어룡지희(魚龍之戱), 헌선도(獻仙桃)와 이 외에도 각종 가무와 스펙터클한 기예가 펼쳐졌다. 가무백희는 이후 점차 대중화되면서 산대놀이의 기원이 되는 등 조선시대의 민속예술과 놀이로 이어졌으며, 특히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의 가장행렬은 신라팔관회의 맥을 이은 것으로 불교적 상징성이 큰 연희로 전승되어왔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201 이처럼 고려왕조 전 시기에 걸쳐 매년 전국적 규모의 종합예술행사로 실시해온 가무백희는, 고대신라에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궁중·민속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축제 자체는 지배층 중심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가곡(歌曲)·아악(雅樂)에서부터 향악(鄕樂)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를 다룬 음악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종합적인 것이었다. 팔관회를 계기로 중국 등에서 전래된 새로운 가무가 발표되기도 하고 이국적 요소들과의 다양한 결합도 이루어져, 전통과 외래적 요소,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제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28) 따라서 팔관회가 지닌 최대의 의의는 고려 500년에 걸쳐 매년 전국적 규모의 종합예술행사로 실시해온 가무백희에서 찾을 만하다. 당시 가무백희에 대한 다양한 내용은『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물론 각종 시문과 치어(致語)·하표(賀表) 등에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어29) 복원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현대에 복원되는 팔관회 또한 이러한 종합축제적 면모가 핵심을 이 28) 구미래, 앞의 논문(2005), p.148. 29)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윤광봉,「 고려 팔관회 의식에 나타난 연희양상」,『 팔관회의 복원과 현대적 계승』,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편(서울: 학술대회 발표집, 2012. 11. 16), pp.21〜57.202 ● 불교학연구 제35호 둘째, 팔관회에서 지속되었던 국제교류의 장을 발전시켜나가는 일이다. 팔관회에는 외국인들이 의례에 직접 참여하여 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외국인조하(外國人朝賀)가 하나의 의례절차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사』「 가례잡의」에 따르면,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이 좌정한 자리에 나라별로 참석자들이 나와서 예를 표하고 예물을 바치게 된다. 예컨대 합문관이 “송나라 도강(都綱) ○○ 등이 삼가 하례를 드리러 왔습니다”라고 아뢰면, 이들은 무릎을 꿇고 예물목록을 진상한 뒤 만세를 부르고 재배를 올린다. 왕이 풍악을 즐길 수 있는 좌석과 주식(酒食)을 하사하면 다시 만세·재배하고 자리로 물러가는 절차를 나라별로 행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국가 차원의 대외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로, 이들이 임금에게 하례하면서 진상품을 바치는 의식절차는 고려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이들은 정식으로 파견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경제사절단의 성격을 띠고 있어 국가관리 하에 이루어진 민간교류의 성격을 지닌다. 상인들은 내외의 경제적·문화적 흐름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들로, 고려문화가 집결된 팔관회를 통해 문물의 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판단된다. 1천 년 전부터 국가축제에 다양한 민간외국인이 참석하여 국제교류가 활발하였던 점은 오늘날의 축제에도 시사점이 크다. 인근 불교국가들의 참여를 통해 각국의 다채로운 불교문화를 펼치는 것은 물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외국인관광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도 필요하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203 셋째, 팔관회의 인문학적 토양을 계승하는 일이다. 팔관회에서는 연희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문장가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팔관치어구호(八關治語口號)를 왕에게 올렸다. 팔관치어구호는 행사 중 두 차례 올리게 되는데, 첫 번째는 소회일의 음악감상 때이고 두 번째는 대회일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30)였다. 아울러 중앙과 양계(兩界)의 병마사를 비롯한 지방의 모든 목(牧)과 도호부에서 팔관일을 경축하는 하표(賀表. 八關表라고도 함)를 올렸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를 확인함과 동시에 전국적인 결속을 다지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앙관리들이 왕에게 하례하는 좌전수하(坐殿受賀)가 끝난 뒤에는 전국 지방관아에서 파견한 지표원들이 장엄한 행렬을 이루며 순서대로 봉표(封票)를 올리고, 이어서 외국인들이 하례한 다음, 마지막으로 당대의 문장가가 팔관치어구호를 낭독하며 왕에게 헌정함으로써 군신의례를 마감하였다. 팔관치어구호는 주로 팔관회를 경축하고 왕을 칭송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이와 더불어 팔관회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 또한 많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에 계승하는 팔관회는 왕조시대의 맥락을 바꾸되 그 양상은 계승하여, 팔관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관련의 학문적·문학적 발표의 장을 다양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의례의 계승뿐만 아니라 관련논의가 활발하고 전통자료가 풍성하게 제시됨으로써 보다 확고한 전승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30) 안지원, 앞의 책, p.192. 204 ● 불교학연구 제35호 넷째, 축제의 백미를 이루는 행렬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전통팔관회에서 주된 행렬은 소회를 마친 뒤 법왕사(法王寺)에 왕래한 왕의 행렬이다. 이 행렬에는 화려한 의복과 가지각색의 의식용 소품을 갖춘 수천 명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어느 정도 축제가 무르익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법왕사 왕래행렬에는 백성들이 함께 그 뒤를 따르면서 흥취를 돋우었을 것이다. 축제행렬에 편입하는 것은 단순한 관람에서 벗어나 자신이 행렬을 하는 듯한 주체적 입장에 놓일 수 있어, 축제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게 마련이다. 이때 행렬의 뒤를 따르며 백성들이 벌이는 또 하나의 시끌벅적한 행렬은 축제적 상황으로 보아 금지되지 않았을 것이며, 흥취에 따라 가무와 놀이가 함께 병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행렬은 동서고금 없이 축제의 백미를 이루는 것으로 근대 도시축제에서는 행렬에 축제의 주요요소들을 집약시켜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 팔관회의 핵심적 의례요소 또한 연등(燃燈)이지만, 연등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현재 사월초파일 연등회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 따라서 팔관회의 의미에 적합한 축제요소들을 갖추는 가운데 연등은 의례의 주요요소 중 하나로 수용하는 정도가 적당하다. 아울러 팔관행렬은 모든 행사를 마치는 15일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만월이 뜨는 보름을 맞아 공동체의 번영과 화합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15일의 행사에 참석했던 인원을 중심으로 행렬을 구성하고 군중을 뒤쪽에 편입시킴으로써 축제적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 이는 시종일관 보름을 중요한 시기로 삼아 풍요와 밝음으로써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던 고려팔관회의 맥을 잇는 일이기도 하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205 Ⅳ. 팔관회 계승의 방향성 팔관회에서 ‘대궐행사’가 의식·공연으로 구성된 관람 중심의 내용이었다면, ‘사찰행사’와 ‘재가불자들의 수행’은 삼보에 귀의하며 심신을 닦는 신행 중심의 내용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전통팔관회에서 계승해야 할 양대 가치 또한 ‘불교신행’과 ‘축적된 전통예술’에 두어야 할 것이며, Ⅲ장의 복원내용은 이러한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전통팔관회의 현대적 계승을 정리하면 15일의 축제당일은 대궐행사에서 설행된 내용을 중심으로 복원하고, 6일 간의 사전행사는 불자들의 신행으로 수렴하자는 것이다. 206 ● 불교학연구 제35호 다음으로 6일간의 사전행사는 불자·일반인이 주축을 이루는 불교신행으로 진행하면서, 사회공동체의 평안과 행복을 위한 기도와 실천행위에 주력하도록 한다. 이 기간에 재가불자들이 일심으로 내적·외적 신행을 행하여 불교적 가치를 재조명할 뿐만 아니라, 팔관회를 계기로 불자들의 외적 신행행위를 활성화함으로써 행사 이후에도 지속적인 체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팔관회를 통해 전통 사상과 문화를 재조명·계승하는 동시에, 개인적·내부적으로 행해왔던 다양한 수행행위를 사회공동체를 위한 원력으로 일원화함으로써 불교의 내적 성찰을 기하고 외적 동참을 확산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207 참고문헌 1. 원전·『高麗圖經』 ·『高麗史』 ·『三國史記』 ·『三國遺事』 ·『宋史』 ·『朝鮮王朝實錄』 · 김종명,『 한국 중세의 불교의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1. · 안지원,『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연등·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 로』,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李杜鉉,『 韓國巫俗과 演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 李敏弘,『 韓國 民族樂舞와 禮樂 思想』, 서울: 集文堂, 1997. ·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 崔南善,『 朝鮮常識問答』, 三星文化財團 再發行本, 1972. 3. 논문 · 구미래, 「불교 무형문화의 자산과 콘텐츠 가치에 대한 고찰: 사하촌, 불교일생의례, 불교 세시풍속을 중심으로」,『 佛敎學報』 第55輯, 서울: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院, 2010, pp.519~549. 208 ● 불교학연구 제35호. ·─ ───,「 八關會의 국가축제적 성격」,『 韓國宗敎民俗試論』, 서울: 민속원, 2004, pp.123-156.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 209 The Palgwanhoe ceremony, a combination of Buddhism and indigenous culture, is a good representation of the development of an ancient religious ceremony into a national festival. The historical and Buddhist value of Palgwanhoe, in addition to its integrated cultural and social values, create a strong foundation that position it as a new, uniquely Korean festival. The processes and contents of the Palgwanhoe ceremony, considered intangible cultural assets, are described in detail in “The History of Korea”. It is the task of this modern era to recreate the flat record of the Palgwanhoe in a three-dimensional and dynamic manner in light of advances in academic and cultural competency. The restoration of the Palgwanhoe depends on emphasizing its positive, important features while reinterpreting it as a Buddhist festival that is relevant to and widely shared by a modern audience. Therefore, this paper focuses on what a recreated Palgwanhoe would look like, when it would be held, and future directions in order for it to become a reality. The Modern Succession and Lecturer at Dongguk Univ., Seoul campus 210 ● 불교학연구 제35호 The issue of timing is an important factor determining the identity of the ceremony. The optimal date for Palgwanhoe as a In particular, it would be advisable for Buddhist and ordinary citizens to engage in meditation practice six days before the 15th. the eight commandments, national festival, Buddhist rites, Buddhist festival, winter solstice festival, meditation |
팔관회의 현대적 계승과 복원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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