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다례(八關茶禮)

2018. 12. 23. 22:37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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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다례(八關茶禮)




   지난 해의 윤달 덕분에 올해에는 팔관회가 두번 들어1)

   새해 원단(元旦)과 동짓날 하루 전이 동짓달 보름이네.

   오백여년 전에 조선을 세운 왕의 적폐청산이란 어명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풍류도의 제삿날이자 국제적 잔칫날이네.


   일용하는 양식으로 제례를 올리던 사람들의 오랜 관습에 따라

   유목민 라마교를 본받아서 일부 시류에 물든 승려들이 

   원풍(元風)을 따라 예불에도 사육제 처럼 육류를 올리자

   이를 보다 못한 인도승은 나옹에게 설하여 청풍(淸風)을 일으켰네.

   

   정쟁(政爭)중에 나옹이 여강(麗江) 신륵사에서 의문사 당하자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낸 바 있는 태조 이단(李旦)2)

   무학의 사조(師祖) 지공선사(指空禪師)3)의 뜻을 곡해하여

   삼성(三聖)4) 북두(北斗)5)를 끌어안은 불교(佛敎)를 미워했네.


   출세지향적인 화백(奉化伯)6)의 술수에 휘둘려 숭유억불이라 하여

   둘다 외래종교이자 학문의 이이제이(以夷制夷)식 다툼 속에서 

   불교가 품고 있던 우리 동이(東夷) 고유의 선도(仙道)의 뿌리는

   그들이 지은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속에 파묻혀 버렸네.


    신라를 특유의 포용력으로 화평으로 귀부시킨 고려 태조 왕건은

    후손 고려왕들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여섯번째7)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라고 하여

    이를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대 간신(姦臣)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지시켰네.

   

    하늘의 신령과 5, 명산, 대천, 龍神을 섬기는 일인 팔관(八關)은

    후대 왕들의 보살핌 속에 별다른 연등회와 팔관회로 성대하게 치르면서

    앞선 나라들의 동맹 東盟, 영고 迎鼓, 무천 舞天, 시월제 十月祭 8)를 이어와

     팍스 몽골리아나를 표방하던 원(元)과 혼인동맹 시절에 국제적 축제로 발전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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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註)

  1) 팔관회가 두번 들어 :  2018년 무술년은 양력 1월1일과 12월 21일이 음력 11월 15일로 팔관회(八關會) 행사일이다. 

        

  *** 초기 팔관회의 설행(設行) 내용


    시작연대                명칭        주체       시기     장소             주목적                           참조
    551년(진흥왕 12) 八關之法   국가(왕)    미상     미상             수행, 호국 고구려            고구려 귀화승 惠亮 주관
    572년(진흥왕 33) 八關筵會   국가(왕)    10.20   外寺             위령 7일간 열림
    645년(선덕왕 14) (八關會)    국가(왕)    미상     (황룡사)        호국, 외침방지                慈藏이 神人 예언듣고 개최(추정)
    898년(효공왕 2)    八關會     태봉(궁예)  11월    미상             (사회통합)
    918년(태조 1)       八關會     국가(왕)     11.15  개경             (대궐)  호국, 사회통합      연례행사로 이틀에 걸쳐 치름
    태조연간(추정)      八關會     국가(왕)     10.15  서경(평양성)  齋祭 (고구려 東盟 계승)    연례행사로 이틀에 걸쳐 치름


    2)  태조 이단(李旦)  : 조선조를 개국한 장군 이성계(李成桂).

       이성계의 집안은 만주로 도망간 고려인의 후손이다.

   13세기 이후 만주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그곳에 살고있던 고려인들은 만주인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성계의 집안도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만주 여진족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현재 광화문에 우뚝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입고있는 갑옷과 투구는 이성계가 건국전 도입한 여진족의 무장을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청나라를 일으킨 여진족들도 한국의 상고시대에서 고조선, 북부여, 옥저, 동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여러 구성부족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하면 조선 건국을 도운 여진족 출신의 장병들 중에는 경주 김씨도 상당히 여럿 있는데, 이는 요나라를 멸하고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처음 도읍한 하얼빈 아청(阿城)에서 왕조를 일으킨 사람들이 신라 경순왕의 외손자인 김함보(函普 또는 完顏函普)*2-1)의 후손들인 경주 김씨라는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족의 원황실에서 쓴 중국 정사(正史) <금사(金史)>와 금왕조의 가계를 기록해놓은 <송막기문(松漠紀聞)>의 사실(史實)과 관련성이 크다.  아청(阿城)은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불리웠는데,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의 5경을 둬 넓은 영토를 다스린 발해의 5경제(五京制)를 금나라가 이어받은 것이다.  발해의 5경제는 고구려의 3경제(三京制)를 계승했다.


    또한 이성계의 부하들 중에는 여진족이 상당히 많았는데 대표적인 성씨로는 청해 이씨를 들 수 있다.  나중에 청해 이씨는 조선조의 명문가로 번성하였는데, 그들의 시조는 여진족 퉁두란이며,  이성계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이성계 아버지(이자춘) 본명이 우르스부카, 이성계 본명은 아가바토르이다. 몽고의 지방행정관 천호(千戶) 시절 창씨개명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여진족식 이름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성계 아버지인 이자춘은 고려 말 여진족을 이끌고 온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에 대한 검증은 후대의 사학자들이 사료 등을 통하여 밝힐 일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孙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独与弟保活里俱。始祖居完颜部仆干水之涯,保活里居耶懒。其后胡十门以曷苏馆归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别而去,盖自谓阿古乃之后。石土门、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败辽兵于境上,获耶律谢十,乃使梁福、斡答刺招谕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盖其初皆勿吉之七部也。始祖至完颜部,居久之,其部人尝杀它族之人,由是两族交恶,哄斗不能解。完颜部人谓始祖曰:“若能为部人解此怨,使两族不相杀,部有贤女,年六十而未嫁,当以相配,仍为同部。”始祖曰:“诺。”乃自往谕之曰:“杀一人而斗不解,损伤益多。曷若止诛首乱者一人,部内以物纳偿汝,可以无斗,而且获利焉。”怨家从之。乃为约曰:“凡有杀伤人者,征其家人口一、马十偶、牸牛十、黄金六两,与所杀伤之家,即两解,不得私斗。”曰:“谨如约。”女直之俗,杀人偿马牛三十,自此始。既备偿如约,部众信服之,谢以青牛一,并许归六十之妇。始祖乃以青牛为聘礼而纳之,并得其赀产。后生二男,长曰乌鲁,次曰斡鲁,一女曰注思板,遂为完颜部人。天会十四年,追谥景元皇帝,庙号始祖。皇统四年,号其藏曰光陵。五年,增谥始祖懿宪景元皇帝。"--- 《금사》 권1 본기 권1: 世纪


     * 2-1.  김함보(函普 또는 完顏函普)  :  한국측 사서(史書)에는 《고려사절요》혹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금준(今俊)이라고 하며, 《고려사》에서 혹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그의 이름을 김극수(金克守) 또는 금준(今俊)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중국측 기록인《신록기(神麓記)》에서는 긍포(掯浦), 《흠정만주원류고》와 《어제개역금사》에서는 합부(哈富, 만주어: ᡥ‍ᠨᠸᡠ Hafu),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사고전서》 영인본에는 긍포를 감포(堪布)로 고쳤고, 《송막기문》·《금지(金誌)》·《대금국지(大金国志)》에서는 감복(龕福)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은 한국어와 만주어 발음을 한자의 음(音)을 빌려서 표기하는 음차(音借)에 따른 것이다.


   김상기(金庠基)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임에 대하여는 그리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금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후고(後考)가 필요하나, 이 당시에 여진 사회에서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이라 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375~376쪽》



   6). 화백(奉化伯) :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그는 고려 말 혼란한 정세 속에서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꿈꿨다. 그리고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협력해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정도전은 1383년(우왕 9) 함주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 교류했으며, 뜻을 모아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개국공신으로 이성계의 지지에 힘입어 막강한 권력을 쥔 정도전은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해 조선 500년 역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공민왕 시해 당시 신료들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친명파였던 정도전은 공민왕이 시해된 것을 명나라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이인임 등 친원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친원파들은 정도전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1375년(우왕 1) 원나라에서 고려와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치자는 요구를 하러 사신을 보냈을 때 그 접대를 정도전에게 하도록 명했다. 친원파의 예상대로 정도전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선왕이 명나라를 섬기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원나라 사신을 맞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에게 죄를 씌워 놓고 용서해 주는 척하니 어떻게 그들을 접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정도전은 이 일로 전라도 나주 근방에서 9년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백성들의 삶을 자세히 엿보고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으며 《심문천답(心問天答)》, 《금남잡영(錦南雜詠)》 등의 문집을 남겼다.

   1392년(태조 1) 7월 17일, 마침내 정도전과 조준, 남은(南誾) 등 52명은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성계는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후 새로운 왕조를 창업했다. 새로운 국가의 건국이라는 정도전의 원대한 포부가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정도전은 유학을 공부하면서 꿈꿔 온대로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성리학을 내세워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이편(心氣理篇)>과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을 지어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비판하며 억제했다. 또한 국가제도와 운영에 기본이 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펴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개국의 기본 강령을 세운 것이다. 


   또한 정도전의 출생지와 그의 호(號) 삼봉(三峯)은 단양 지방의 전설을 인용하여, 당대 정도전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에 의해 충북 단양 도전리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였으나, 한양도성을 옹위하고 있는 삼각산을 삼봉(三峯)이라 칭하는 그의 시(詩) 2수와 낙향시 삼각산 삼봉재(三峯齋)와 그 주변에서 3번 이사하면서 서당을 열어 학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것과 그의 부친의 집이 경북 영주와 삼각산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출생지와 삼각산에 있던 부친의 집이고 그의 호는 삼각산의 다른 이름인 삼봉(三峯)에서 따왔음을  지금은 한영우 교수도 인정하고 있다.



2017.12.20 blog.daum.net/kanghan8/15961985  삶/문학/산행/역사/우..



   7).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여섯번째  :  

   

五曰(기오왈) : 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짐뢰삼한산천음우이성대업). 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 之根本大業萬代之地(서경수덕조순위아국지맥지근본대업만대지지). 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의당사중순주류과백일이치안녕).

 

다섯째, 나는 이 나라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水德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만대 왕업의 터이다. 마땅히 사시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그곳에 가서 백일 이상 체류함으로서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 것이다.

 

其六曰(기육왈) : 朕所至願在於燃燈八關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짐소지원재어연등팔관연등소이사불팔관소이사천령급오악명산대천룡신야). 後世姦臣建白加?者切宜禁止(후세간신건백가감자절의금지). 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오역당초서심회일불범국기군신동락의당경의행지).

 

여섯째, 연등과 팔관은 나의 지극한 관심사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5, 명산, 대천, 龍神을 섬기는 일이다.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