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東盟, 영고 迎鼓, 무천 舞天, 시월제 十月祭 & 팔관회 八關會

2018. 12. 20. 04:38차 이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동맹

동의어 동명(東明) 다른 표기 언어 東盟


요약 테이블
시대 고대/삼국
성격 의례, 제천의식
유형 제도
시행일 고구려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하던 제천의식.

내용

   ‘동명(東明)’이라고도 한다. 동맹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 등에 처음 나타난다.

≪후한서≫에서는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대회하니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는데 수신이라 부르고, 역시 10월로써 맞아서 제사한다(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라고 기록하였다.

<위지>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전 대략 같은 내용의 기록이나 다만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할 때 목수를 신좌에 모셨다(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라고 약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수(隧)는 굴·구멍·대혈신(大穴神)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목수(木隧)는 목각(木刻)의 굴신상(窟神像)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주서 周書≫ (7세기)나 ≪북사 北史≫ (7세기)의 고구려전에도 “또 신묘 두 곳이 있으니,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며 나무로 깎은 부인의 상을 만들었다. 하나는 등고신이라 부르니 이는 그 시조인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같이 벼슬을 두고, 사람을 보내서 수호하는데 아마도 하백녀주몽을 말하는 것이리라(又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 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 與朱蒙云).”라고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지≫ 동이전 한전(韓傳)에도 “5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고 난 뒤와, 10월에 농사를 마치고 나서도 귀신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동맹의 10월 제천은 농경의례로서 부족사회 공동체의 추수감사제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굴을 성소(聖所)로 삼고 여신상을 모셨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동맹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로 계승되었음을 ≪송사 宋史≫ (1345)의 “나라 동쪽에 굴이 있고 세신이라 부른다. 늘 시월 보름에 맞아서 제사하는데 이것을 팔관재라 한다. 그 의례가 매우 성대하여 왕과 비빈이 다락에 오르고 크게 풍악과 연음을 베풀었다(國東有穴 號歲神 常以十月望日迎祭 謂之八關齋 禮儀甚盛 王與妃嬪登樓大張樂宴飮).”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도 그의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 (1124)에서 10월 동맹을 팔관재 부르고, 처음 왕위를 계승한 해와 3년에 한번은 대제를 지내고, 그 조묘(祖廟)가 동문 밖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동맹이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국 동맹은 고려 말기까지 팔관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1,500년을 유구히 계승되었고, 고대 부족사회 공동체의 제의에서 비롯하여 국왕 즉위식과도 관련을 가지는 등 왕궁 제의에까지 승화,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동굴을 성소로 여기고, 여신을 모시며, 촌락공동체가 농경의례를 지내는 형태는 지금도 고형(古型)을 다분히 지니는 제주도 동제[部落祭]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본토의 몇몇 지역에서도 그러한 형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의 동제당(洞祭堂)도 신목(神木)만을 모시는 형태가 제일 많고, 여기에 작은 당집이 곁들여지는 경우도 있으나, 동굴이 있으면 그것이 당으로 모셔지는 비율은 매우 많다.

그리고 이제는 목신상을 모시는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이러한 당에 찾아가는 것을 흔히 할망당에 간다고 한다. 본토에서는 굴을 당으로 모신 사례의 보고는 2,3건뿐인 듯하나, 거기에는 여서낭신 관념도 있다.

아직도 동제신은 여신 관념이 강하여 동제당 서면조사의 통계를 보면, 여신이 남신의 2배를 넘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제사 시일도 정초와 정월대보름이 많으나 10월의 사례들도 결코 적지는 않다. 이상으로써 고금을 통한 농경민족의 유구한 공동 농경의례와 풍요다산의 여신숭배 관념의 전통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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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한국민속학개설』(이두현·장주근·이광규, 보성문화사, 197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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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   隧神
수신 단어장 추가


고구려() 때 동쪽에 있는 큰 구멍 곧 수혈()을 맡은 신(). 고구려() 사람들이 국토신() 또는 생산신()으로 받들었으며 10월에 이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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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다른 표기 언어 東盟


요약 일종의 추수감사제동명이라고도 하여 고구려 국조신에 대한 제사의식이라는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이라 부른다. 10월 국중대회 때는 수신을 맞이하여 돌아와서는 수도의 동쪽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신다"고 했다. 동맹이 농경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의 것인 만큼 수신은 곡신, 즉 지모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동맹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었다.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전제하에 10월에 팔관재를 성대히 치르는 것과 함께 왕실의 조묘가 동문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일종의 추수감사제로 동명(東明)이라고도 하여 고구려 국조신에 대한 제사의식이라는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 국중대회 때는 수신을 맞이하여 돌아와서는 수도의 동쪽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神坐)에 모신다"고 했다. 수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단군신화의 혈신, 즉 웅녀신(熊女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토신·생산신인 수혈신을 맞아 수도 동쪽 물가에서 제사지냈다는 것은 동명신화에서 하백녀가 청하(淸河)의 웅심연(熊心淵)에서 해모수와 결합했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있다. 동맹이 농경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의 것인 만큼 수신은 곡신, 즉 지모신(地母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 주몽신화에서 주몽의 어머니로 나오는 하백의 딸 유화(柳花)농업을 주관하는 지모신의 성격을 갖는 것과 같다. 그런데 고구려의 동맹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계승되고 있다. 즉 〈송사 宋史〉 고려전에는 "10월 보름에 나라 동쪽에 있는 굴의 세신(歲神)을 모셔다 제사하는데 이를 팔관재라 한다"고 했고,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전제하에서 10월에 팔관재를 성대히 치르는 것과 함께 왕실의 조묘(祖廟)가 동문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팔관회를 비롯한 공식적인 불교행사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라졌다. 다만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최근까지 명맥을 이어온 동제에서 신목(神木)을 모신다든가 당굴을 당집으로 삼는 점이 그 유습으로 짐작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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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

다른 표기 언어 迎鼓



요약 테이블
시대 고대/초기국가/부여
성격 제천의식
유형 제도
시행일 부여시대
시행처 부여 조정
분야 역사/고대사


요약 공동체의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하나로서 풍성한 수확제·추수감사제 성격을 지니는 부여시대의 제천의식.

내용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부여조(魏書 東夷傳 夫餘條)의 기록을 보면, 은력(殷曆) 정월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첫머리에,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인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以臘月祭天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라 하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오늘날의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내용이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져 그것은 종교적 제의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추수감사제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영고만은 은력 정월, 곧 12월에 행해졌다.

이것은 아마도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인 듯하다. 흉노족(匈奴族)의 경우 각 분지(分地) 내의 각각의 집단들을 누층적으로 편제하는 형태로 국가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에 부족적 차원의 제천행사를 국가적 차원의 행사로 승격시켜 흉노 전체의 결속력을 높이는 한편 각 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제천행사시 제장회의(諸長會議)를 개최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의결하였다. 부여 역시 사출도(四出道)로 지방을 일정 단위로 나누어 통제하던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국중대회(國中大會)의 모습이 흉노와 비슷했을 것이다. 부여족 전체적인 행사이므로 ‘국중대회’라 하였다.


   특히, 부여에서는 오곡이 여물지 않을 때에는 국왕이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죽음을 당해야 하는 시대였던 만큼, 추수감사제 때에는 국왕의 친제(親祭)가 거행되었을 것이다. 이때 제가(諸加)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중요문제를 토의·결단함으로써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을 것이다. 특히 한 해의 풍흉에 따라 왕의 살해나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왕의 치폐가 이때의 회의를 통해 의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부여의 국중대회는 국가의 중요 문제를 토의하는 가(加)라고 칭해지는 고급 귀족관료들의 평의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이때에는 노래와 춤이 성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고기잡이·사냥·농경 등의 중요한 생산활동을 모두 씨족원의 공동노동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풍작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면서도 씨족사회 이래의 전통을 이은 축제였다고 할 것이다.

의의와 평가

   영고는 부여가 아직 전국적인 지배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지방의 부족적인 자치력이 온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행사였다. 또한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국경일에 죄수들을 특사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동제(洞祭)와 그 시기나 내용·성격 등에서 유사점이 많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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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부여의 문화」(송호정, 『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98)
  • 「한국 고대(韓國 古代)의 축제(祝祭)와 재판(裁判)」(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154, 1997)
  • 『한국사강좌(韓國史講座)Ⅰ-고대편(古代篇)-』(이기백·이기동, 일조각(一潮閣), 1982)
  • 『한국민속학개설(韓國民俗學槪說)』(이두현·장주근·이광규, 보성문화사(普成文化社), 197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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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

다른 표기 언어 迎鼓



요약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성격을 가진 수확제·추수감사제라고 할 수 있다. 일찍 농경사회가 시작된 고대사회의 대부분은 추수가 끝날 무렵 대대적인 농경의례를 행했는데,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10월제가 이에 속한다.


   영고부여어의 한자표기로 보기도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 동이 지역 중에서도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며,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영고가 행해진 때가 겨울이었던 점은 부여사회유목이나 수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수확제·추수감사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은(殷)나라 정월에 하늘에 대해 제사하는데, 이때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고 했다.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 그 시기를 납월이라 했다. 이는 12월의 다른 명칭으로 은정월과 같다. 일찍 농경사회가 시작된 우리 고대사회의 대부분은 추수가 끝날 무렵 대대적인 농경의례를 행했는데,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10월제 이에 속한다. 영고를 부여어의 한자표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맞이굿[迎神祭]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북[鼓]이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하는 신비력을 지녔다 여긴 예맥 계통의 사회 풍속에서 나온 종교행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 동이 지역 중에서도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며,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옛 부여 풍속으로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제대로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국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여는 기본적으로 농경을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고라는 행사가 행해진 때가 유독 겨울이었던 점은 부여사회에 유목이나 수렵의 전통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여의 경우 중앙의 최고 관직명이 가축의 이름을 딴 것이고, 납월의 '납'(臘)이 제사의 명칭으로 짐승을 사냥하여 선조를 제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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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

다른 표기 언어 舞天                              



요약 테이블

시대 고대/초기국가
성격 제천의식
유형 제도
시행일 상고시대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상고시대 예(濊)에서 행하던 제천의식(祭天儀式).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전 / 무천

상고시대 예에서 행하던 제천의식.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다.


내용

   해마다 음력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즐기던 명절행사이다.

예의 무천에 관한 기록은 ≪위지 魏志≫ (3세기)와 ≪후한서 後漢書≫에 보인다. ≪위지≫ 동이전 예전(濊傳)“늘 10월절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천이라고 한다. 또, 범을 제사지냄으로써 신으로 삼는다(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라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의 기록도 이와 똑같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한(韓)의 5월·10월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의 제천의식들은 그 뒤의 기록들에도 나타나나, 예의 무천과 부여의 영고에 관한 기록은 이들 촌락국가의 소멸에 따르는 부여전(夫餘傳)·예전(濊傳)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져서 그 뒤의 기록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무천의 기록은 극히 단편적일 수 밖에 없는 자료이다. 그래서 무천은 같은 북쪽인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을 비롯해서 남쪽 한의 제천의식들과 종합적으로 살피는 것이 바람직할 수 밖에 없다. 그 중 영고는 경축하는 축제의 성격을 강하게 풍기며, 한의 제천의식은 농경의례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과 예의 무천의 10월 제사 그것이 추수감사의 축제였을 것이 분명해진다.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표방해 왔던 한국의 강한 농경문화성을 이 기록들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농경의례들은 농경문화로 특징지어지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싹터왔을 것으로 짐작되며, 무천의 10월, 동맹의 10월, 한의 10월 제천행사들은 오늘날 시월상달 관념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러한 농민의 집단적인 공동제의로는 동제(洞祭)가 있다. 이 동제도 흔히 정월과 10월많이 행해진다.


   특히, 고구려의 동맹은 ≪주서 周書≫ (7세기)·≪북사 北史≫ (7세기) 등에 의하면 목각여신상(木刻女神像)을 제사하는 여신관념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도 오늘날의 동제들이 통계상으로 남신의 2배를 넘는 강한 여신관념을 보여주고 있어서 상통하는 점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상을 종합할 때 이 3세기 무렵의 무천을 비롯한 제천의식의 기록들은 신석기시대이래 5,000년의 우리 농경문화사의 종교적인 뿌리에 관한 핵심적인 기록이라 할 것이다. 무천의 끝에는 범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까지 동제신(洞祭神)에 범 관념 따르는 지역이 적지 않지만, 특히 영동지방과 산악지대에 강한 느낌이 있고, 강릉 단오굿의 대관령 서낭신에 얽힌 범 관념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기록과 달리 무천에서만 범 신이 보이는 것도 영동의 북쪽에 있었던 예(濊)의 것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고금을 통한 일말의 마음이 괴롭고 아픔을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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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동제의 역사」(이두현·장주근·이광규, 『한국민속학개설』, 민중서관,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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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

다른 표기 언어 舞天



요약 한국 고대 종족의 하나였던 의 제천의식.


〈삼국지〉와 〈후한서〉 예전에 기록이 전한다. 〈삼국지〉에 의하면 예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라고 했다.

예는 농경을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던 사회로서, 그 주민들은 별자리를 보고 그해의 풍흉을 알았고, 삼베를 생산하고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들었다. 따라서 농사가 끝난 10월에 행해진 무천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에 해당하는 농경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농경사회로 진입한 우리 고대사회의 다른 지역에서도 대부분 이러한 농경의례를 행하고 있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삼한의 10월제와 같은 것이 이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 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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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시월제

다른 표기 언어 Oktoberfest , 十月祭

    
요약 테이블
성격 의례
유형 의식행사
행사시기10월
분야 역사/고대사


요약 삼한 사회에서 매년 10월에 거행한 추수 감사 의례.

연원 및 변천

   농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계절제 성격의 신앙의례이다. 고대 삼한 사회에서 10월에 추수를 끝내고 난 뒤에 한 해의 풍요에 감사하고 다음 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귀신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 행위를 통해 공동체원으로서의 일체감을 추구하였다. 이 때 귀신에 제사를 한다는 것은 귀신이라는 제사대상과 함께 소박한 형태로나마 일정한 형식을 갖춘 신앙의례와 관련이 깊다. 또한 가무 행위와 관련하여 ‘수십인이 함께 일어나 줄을 서서 땅을 밟고[踏地] 앉았다 섰다 하면서 손과 발을 맞추었다’ 사실은 춤을 통한 공동체원으로서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면을 엿볼 수 있다.

행사내용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하면 삼한 사회에서는 5월에 씨뿌리고 10월에 추수를 끝내고 난 뒤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으며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고 하였다.

현황

   우리나라 고대국가에서 행해진 축제이자 의례는 대개 10월 혹은 12월에 행해졌다. 12월에 있었던 부여의 영고(迎鼓)를 제외하고 고구려의 동명(東明)과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 등은 10월에 하였다한다. 12월 축제는 대개 유목민의 전통인 사육제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10월에 행해지는 축제는 농사와 관련해서 추수 감사제의 의미 담고 있다. 한 해의 힘든 노동을 통한 수확의 기쁨을 노래할 뿐 아니라 이러한 노력에 결실을 맺게해 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례가 함께 이어졌다. 농사는 공동체의 노동에 의지하는 일이 많으므로 그 결속을 다지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집단 내의 계층화가 발생하게 되면서 이러한 축제방식도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실례는 고대국가로 성장한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명제의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두 제의는 제천의례(祭天儀禮)이자 국중대회(國中大會)라 하여 특정 지배층에 의해 하늘에 대한 제사가 독점되고 여기서는 한 해의 수확에 대한 감사의 의례만이 아니라 참석한 모든 이들의 복속의식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읍락단위의 신앙의례로 구성원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원의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읍락의 생산활동과 관련하여 경제적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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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후한서』
  • 『삼국지』
  • 『진서』
  • 「한국 축제의 역사적 전개 양상」 (표인주, 『용봉인문논총』 34·35, 2005)
  • 「삼국시대 읍락사회의 신앙의례와 그 변천」 (문창로, 『북악사론』 5, 1998)
  • 「제천의례의 역사적 고찰」 (금장태, 『유교사상연구』 4·5, 199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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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제

다른 표기 언어 十月祭



요약 삼한사회에서 매년 10월에 거행한 추수감사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하면 삼한에서는 매년 5월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는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마시고 노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며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고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추수감사제는 삼한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행해졌다.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이 그것으로 부여의 영고는 10월이 아니라 12월에 행해졌다. 이러한 고대사회의 집단적인 의례는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농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자연, 즉 하늘에 대한 제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사회 초기 아직 공동체적인 관계가 강하게 남아 있을 동안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을 넘어서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농경의례는 이후에도 추수가 끝난 뒤에 치러지는 10월상달과 같은 풍속으로 계속 이어졌다. 10월에 거행되는 마을의 동제와 집안의 가신제 등이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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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다문화콘텐츠연구 제3호(통권 8호)
2010.04, 213-243 (총31페이지)

고려시대 팔관회의 설행과 국제문화교류
A study on the holding of Palgwanhoe[八關會] and the exchange of international culture in Goryeo period
전영준
               
한국어 초록
    고려의 팔관회는 왕과 신하 및 백성들이 함께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에게 제사하면서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국가행사였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제천행사가 불교의식과 합쳐지고, 국제문화를 지향하는 고려정부의 의지가 총합되어 설행되었다. 이는 국초(國初)부터 국가의 태평을 위한 목적으로 지속된 문화행사였으면서도 각국의 사신과 상인이 고려를 찾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팔관회의 설행으로 고려는 이슬람 계통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여 생활문화에 적용하거나, 송(宋)과의 문물 교류를 통하여 서역은 물론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사회에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11세기 중반에 세워진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에서도 활용될 정도로, 고려사회 전반에 활성화되어 있었다.

   당시 고려가 추진했던 문물교류는 정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불교를 활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천명하고자 하였던 정치적 지향성에 기인한다. 때문에 고려의 문화는 그 성격 자체가 국제적이면서도 타(他) 문화에 대해 개방된 태도를 보여 왔다. 특히 고려 불교를 정점으로 하는 문화의 수용 양상은 타국의 장인(匠人)을 초치(招致)하여 문화단계를 높이려는 모습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인접한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통해서 더욱 확연해진다.

영어 초록
  *** Palgwanhoe[八關會] in Goryeo period was national event serving Heaven Spirits, Five Peaks (Mountains), Famous Mountains, Great Stream, and Dragon God and sacrificing toward heroes gave up their lives for their country with the king, his servants, and people and wish the peace of country and the royal family. In other words, the offering rites to the heavens handing down from ancient was combined with Buddhist rituals and held by considering the Goryeo government's commitment having international-oriented culture. From the beginning of the Goryeo, it made an important opportunity each country 's envoys and traders looking for as well as Cultural Festival being sustained for the purpose of the peace of country. Holding??Palgwanhoe, fused by taking directly the culture of the Islamic system actively utilizedin life culture of Southeast Asia as well as the West through exchanges with Song??China. This cultural fusion was also appeared Jigwangguksa's[智光國師] pagoda in Beopcheonsa's site built in the mid-11th century and the cultural fusion of Goryeohad already been active in society as a whole.
??Exchanges of cultural products Goryeo aimed were considered by the government's demands, but they came from the directivity rectifying public sentiment by using??Buddhism and clarifying the country's prestige externally. For this reason, Goryeo's culture itself had shown an open attitude toward other cultures internationally. Especiallythe aspects the cultural acceptance centering Goryeo Buddhism revealed in attitudes trying to raise the cultural level by clearly inviting the other countries' craftsmen, but became more evident through positive exchange of goods with neighboring countries.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기록으로 본 팔관회의 설행
3. 팔관회의 사회적 성격과 국제문화교류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팔관회, 국가행사, 이슬람, 문물교류, 문화적 융합, Palgwanhoe[八關會], National Ceremony, Islam, Exchanges of CulturalProducts, Cultural Fusion



2010.04). 고려시대 팔관회의 설행과 국제문화교류. 『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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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학술·문화재 교학

    

고려 팔관회 복원 위한 첫 세미나 열린다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2.11.08 14:15




불교학술원․부산시불교연합회 주관
11월1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고려 팔관회를 복원·재현해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현대적인 불교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은 인문한국(HK)연구단 및 부산시불교연합회 공동으로 11월16일 오후 1~6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팔관회의 복원과 현대적 계승’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세미나에선 △팔관회의 역사적 불교적 의미(김상현/ 동국대) △고려 팔관회 의식에 나타난 연희 양상(윤광봉/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 △팔관회의 국제문화교류적 성격(전영준/ 제주대) △팔관회의 문화재 지정 기획과 축제문화로서의 발전 가능성(구미래/ 동국대) △팔관회의 재현과 복원을 위한 과제(한상길/ 동국대) 등 논문이 발표된다.


   발표 후에는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좌장으로 임돈희 동국대 석좌교수, 부산팔관회집행위원장 심산 스님비롯해 발표자들이 참여해 종합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주최 측은 “역사적으로 팔관회는 10월 또는 11월에 거행됐으며 이 전통에 따라 팔관회를 복원해 10월15일에 거행한다면 현재 사월초파일의 연등회 이외에 별다른 축제가 없는 불교계에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세미나는 ‘5월 연등, 10월 팔관’이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서울 연등, 부산 팔관’이라는 문화의 균형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불교 대중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팔관회는 신라 때 시작돼 고려 때 성행하다가 조선 초기에 단절되었다. 현대사회에 들어 다양한 불교문화가 복원·재현되고 있지만 그 동안에 팔관회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복원 시도가 없었다.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의 주도로 200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3회에 걸친 재현 행사가 개최됐다. 02)6713-5139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고려시대 팔관회 활용과 국제문화교류 관련| 다문화교육의 이론과 실제

여해 | 조회 75 |추천 0 | 2010.10.22. 11:51

 

 

 


첨부파일 팔관회의_설행과_국제문화교류-최종본.pdf

 

    고려시대는 대외관계의 다양성이 확산되던 시기였고, 이때의 교류 또한 한국문화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고려와 서역과의 관련성은 고려속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교류의 구체적인 현상을 분석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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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팔관회 활용과 국제문화교류 관련 201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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