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자락 잊혀진 역사, 잊혀진 인물들

2018. 12. 22. 17:39잡주머니



아차산 자락 잊혀진 역사, 잊혀진 인물들
[연재] 황찬익의 ‘須彌行脚’-2
2014년 11월 17일 (월) 09:01:43 황찬익 .
   
▲ 아차산 영화사.ⓒ2014 불교닷컴

서울의 외사산(外四山)

백악(북악)과 인왕, 목멱, 낙산을 한양 도성의 성곽을 따라 잇는 내사산(內四山)이라 한다면, 그보다 멀찍이 떨어져 한양도성을 바깥에서 외호하는 산이 외사산(外四山)이다. 삼각산과 덕양산(혹은 봉산), 관악산 그리고 아차산이 바로 외사산이다. 행주산성이 있는 한강변의 작은 산이 덕양산이고, 봉산은 수색에서 구파발까지 이어져 수국사와 서오릉을 경계지우는 긴 산의 흐름이 바로 봉산이다.

내사산과 더불어 겹겹이 수도 서울을 에워싸고 있어 서울을 꽃에 비유할 때 내사산과 외사산은 꽃잎에 비견된다. 그 가운데 동쪽의 바깥 꽃잎이 바로 아차산이다. 굽이치는 한강과 바로 접경을 이루어 강 건너 송파와 강동의 옛적 한성 백제의 도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높이가 287미터에 불과하지만 깊은 골자기와 수려한 바위절벽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 주말 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일대에 처음 도읍을 했던 나라는 백제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처음에 한강 북쪽에 위치했던 백제는 도읍을 한강 남쪽으로 옮긴다. 낙랑과 말갈의 위협이 주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하는 데 절대적인 후견인이었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의 죽음은 건국 초기의 온조왕에게 불길한 조짐이었던 모양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듬해 7월에는 “한강의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다시 한강의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는 것을 볼 때, 지금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진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기준으로 볼 때 검단산에서 미사리를 거쳐 광나루 근처까지 이르는 강둑을 따라 성을 쌓은 것으로 보여 진다.

한강을 중심으로 자리했던 고대국가인 백제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가운데 하나가 고려나 조선보다도 역사가 더 길었다는 점이다. 기원전 18년에 온조왕이 건국한 뒤 기원후 660년 나당 연합군에 망할 때까지 역사가 무려 678년이나 된다. 또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백제의 역사 678년 가운데 마지막 185년 동안만 공주와 부여에 도읍했고 이전의 49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지금의 서울 인근에 도읍했던 나라라는 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제 4대 왕인 개루왕 때 삼각산에 북한산성을 쌓기도 하고 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서기 371년에는 고구려의 남평양(지금의 양주)을 침공해서 고국원왕을 죽이고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으로 옮겨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곳에 도읍하기도 했다.

“동명왕 (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서기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 (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 을묘(475년)에는 도읍을 웅천(熊川)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 (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 <삼국유사> 제2 기이(紀異) 편

근초고왕이 도읍을 북한성으로 옮겼다는 그 105년 동안에 백제에는 마라난타라는 인도스님이 찾아와 불교를 전래해준다. 근초고왕의 손자인 침류왕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에서 한산에 절을 창건하여 승려 열 명을 두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절을 세운 곳이 ‘새 도읍 한산주’라는 대목이다.

“침류왕(枕流王) 즉위 갑신년,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에서 왔는데,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예우하였다. 이듬해 을유년(385년)에 절을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세우고 승려 열 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태원 17년(392년) 2월에는 교령을 내려서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게 했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고 한다.(枕流王即位甲申 東晉孝武帝大元九年 胡僧摩羅難陁 至自晉迎置宫中禮敬 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度僧十人 此百濟佛法之始 又阿莘王即位大元十七年二月 下敎崇信佛法求福 摩羅難陁 譯云童學” - <삼국유사> 백제본기

새 도읍 한산주에 세워졌다는 백제 최초의 사찰은 어디일까? 일부에서는 우면산 대성사라고도 하고 하남 춘궁리사지일 거라고도 하는데, 윗글에서 ‘새 도읍 한산주’라고 했으니 온조왕이 천도했던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 아니라 근초고왕이 다시 천도해갔던 한강 북쪽 한산주일 가능성이 더 높다.

마라난타가 창건한 절이라는 설화가 전해져오는 절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절 이름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佛)’ 자가 들어 있다. 영광의 불갑사나 나주 불회사, 군산의 불지사가 그렇다. 서울 삼각산 둘레 사찰 가운데 연혁이 백제시대까지 올라가면서 사찰 명에 불(佛) 자가 들어가는 곳이 또 있는지는 찾아볼 일이다.

침류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나서 2년 뒤 죽는다. 침류왕을 이어서 동생인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했으나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阿莘王)에게로 왕위가 이어진다. 아신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인 침류왕의 뜻을 이어서 불법을 신봉하고 복을 구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때가 서기 392년으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까지 83년의 세월 동안 한성백제시대가 더 이어진다.

   
▲ 아차산 보루ⓒ2014 불교닷컴

아단산(阿旦山) 이절〔彛寺〕

아차산의 본래 이름은 아단산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아단산과 아차산이 혼용되어 쓰인다. 아직도 아차산 인근의 주민들은 아차산을 아단산이나 아끼산, 엑끼산 등으로 부른다. 한성백제시대 한강의 고어가 아리수(阿利水)인 것과도 상관이 있을 것 같다. ‘단(旦)’은 아침 또는 해돋을 무렵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다. 아차산 너머 한강 쪽 동네의 지명도 아치울이다. 아치울 골짜기 주변에는 아직도 무속신앙의 당집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이 오랜 민간신앙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영화사는 사찰이 전하는 연혁으로 볼 때 백제가 세운 사찰은 아니다. 사찰 연혁 상으로는 672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나온다. 처음에는 화양사(華陽寺)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뚝섬 인근의 화양동이라는 지명 자체가 조선 세종이 지금의 화양동에 화양정이란 정자를 세운 이후에나 정착된 것으로 볼 때 화양사라는 사명(寺名)도 그 이후에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 화양정터ⓒ2014 불교닷컴

처음 창건할 때의 절 이름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의 영화사는 창건할 때 아차산 용마봉 아래 지금의 팔각정 터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조선 태조 4년, 경복궁에서 동편 하늘을 바라볼 때 이 절의 등불이 바라보인다는 이유로 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새벽하늘에 해가 뜰 때나 저녁에 달이 뜨는 것도 모두 동편 하늘인데 한양 동쪽의 외사산 중턱에 절이 자리 잡고 등불을 밝히고 있으니,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려는 국가기조로 새 나라를 세운 조선의 유신들이 볼 때 여간 눈엣가시가 아니었을 것 같다. 강제로 산 아래로 내려온 화양사는 중곡동 긴 고랑 입구 국립서울병원 남쪽 어딘가에 자리 잡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그런데 용마봉 아래 있었던 본래 절이 폐사된 이유가 단순히 등불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치 삼각산 보현봉 아래 지금의 일선사 전신인 보현사가 폐사된 것처럼 서울의 지기(地氣)가 흐르는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아주 오래 전부터 민간신앙이나 불교의 영험한 기도처에 자리한 사찰들은 조선 초기에 대부분 강제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용마봉 마루턱에 자리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절도 서울의 동쪽 산마루에 올라앉은 유명 기도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에서 뜨는 해를 처음 보는 곳이어서 더욱 영험하게 생각되던 절이 아니었을까? 그런 이유에서 폐사되어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이다.

   
▲ 영화사 미륵불.ⓒ2014 불교닷컴

영화사의 옛 이름 가운데 하나가 이절〔彛寺〕이다. 신촌의 봉원사를 ‘새절(新寺〕’이라 부르고 강남의 봉은사를 숭절〔崇寺〕, 수락산 내원사를 성절〔聖寺〕, 남양주 흥국사를 덕절〔德寺〕, 여주 신륵사를 벽절〔壁寺〕라고 민간 사이에서는 별칭으로 더 친근하게 불렀던 것처럼 아차산 영화사도 이절〔彛寺〕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彛)’ 자는 ‘떳떳하다’는 뜻 외에 제기(祭器)를 뜻하는데, 제기 가운데서도 깨끗한 물병이나 술병을 말한다. 아침 해를 맞는 신성한 산에 자리한 제기(祭器)처럼 정성스럽고 깨끗한 절이란 뜻이다. 영화사가 오랜 세월 기도처였음을 재차 말해주는 이름이다.

중곡동으로 옮겨진 시점에 조선 세조 임금이 이곳을 지나다가 화양사를 들렀다고 한다. 이때 돌로 새긴 미륵부처님 앞에서 세조가 기도를 올려서 지병이 낫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영화사 마당에서 오른편 산길로 올라가 외따로 조성된 미륵전 안에 모셔진 미륵불이 세조의 병을 낫게 해준 미륵부처님이다.

지금도 영화사를 찾는 기도객들은 다른 전각보다 이곳 미륵전을 더 많이 찾아 미륵전 마당에 임시 가건물을 내고 기도객들을 맞고 있다. 중곡동에서 지금의 아차산 아래로 옮긴 시점이 1907년이다. 순종황제가 황세자 신분이었던 1904년에 세자 비 순명비(純明妃) 민 씨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고종황제는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묘를 만들고 며느리를 위해 묘명(墓名)을 유강원(裕康園)이라 부르게 했다.

중곡동에 있었던 영화사를 유강원의 원찰로 삼아 지금의 아차산으로 옮기게 했으니 이때 4미터가 넘는 미륵부처님도 함께 이사를 왔다. 수십 대의 우마차를 동원해서 아차산자락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자리에 모시고 난 후, 전각을 세운 것은 그 뒤로도 40년이 지난 194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전각을 지을 때 미륵부처님의 키를 잘못 재는 바람에 부처님의 둥그런 모자는 함께 모실 수 없게 되자 전각 앞마당에 잘 모셔두고 있다. 지금도 미륵전 마당 한쪽에 주인 잃은 모자를 볼 수 있다.

어린이대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지금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은 골프장이 들어섰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골프장은 서울에 있었다. 광진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 자리가 1926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골프장이었다.

앞서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세자비 신분으로 죽었던 순명비는 나중에 순종이 즉위하게 되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추존되고 묘도 원(園)에서 능(陵)으로 승격되어 유릉(裕陵)이 된다. 지금 어린이대공원이 자리한 광진구 능동의 유래는 여기서 기원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어린이대공원에 가보면 유릉의 석물들이 한데 모아져 전시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다른 능과 비교할 때 석물의 규모가 작지만 새겨 넣은 문양이 매우 화려하고 조각 솜씨도 뛰어나다. 다만, 근엄해야 할 석인상들의 표정이 어딘가 어둡고 호랑이, 말, 양 등 석수(石獸)들의 표정도 무덤덤하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이나 그전의 고종까지도 한일합방 이후 더 이상 한 나라의 임금이 아니었다. 일제는 나라의 왕이나 왕비에게만 붙일 수 있는 ‘능(陵)’이란 단어를 못 쓰게 했다. 이때 황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명황후의 유릉이었다. 중종이나 숙종, 헌종도 이미 죽은 왕비의 무덤에 합장하여 능호를 부여했던 전례를 들어가며 고종도 순종도 먼저 죽은 부인의 능을 이장하는 모양새를 띠며 이전 그대로 홍릉, 유릉이라고 붙일 수 있었다.

   
▲ 유강원 무인석 문인석.ⓒ2014 불교닷컴

1895년 을미사변으로 청량리에 모셨던 명성황후의 홍릉이 고종이 붕어(崩御)한 1919년에 남양주 금곡에 합장되어 모셔지고, 1904년에 어린이대공원에 모셔졌던 순명황후의 능도 1926년 순종황제의 붕어로 남양주 금곡의 유릉에 합장되어 모셔지게 된 것이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임금의 장례조차도 일본 제국주의의 눈치를 봐가며 지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분노했고, 고종의 인산(因山) 일인 1919년 3월 1일에는 3.1 만세운동으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도 6.10 만세운동을 벌여 일제강점기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지를 다지는 기회로 만들었다.

일제는 두 차례 인산일에 맞춰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독립운동을 벌인 것에 대해 단단히 앙심을 품었다. 순종황제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바로 1926년 그해에 유릉이 있었던 자리를 파헤쳐 일본인 전용 골프장을 만들어버린다. 묏자리는 황실 고유의 재산이지만 순종 황제 인산 이후 황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땅에 첫 골프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유릉에 있었던 문인석이나 무인석, 돌 촛대,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등은 골프장 조경석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기구한 터는 다시 1954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미국 장교들을 위한 골프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장교들이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것을 보고 이곳에 빨리 골프장을 복구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우리나라 제1호 골프장은 내국인은 갈 수 없는 곳이었으며, 여전히 조선의 마지막 국모의 능을 지키던 문인도 무인도 여기저기 조경석으로 서 있는 채였다.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남북공동성명 발표와 남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을 수시로 다녀오면서 한 가지 중요한 보고를 한다. “우리나라도 어린이를 위한 전용 공원이나 회관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양에 가보니 거기에는 어린이 관련 기념관, 공원이 많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1972년 11월의 일이다. 이 말에 대통령 박정희는 겨울철인 1972년 12월에 착공해서 6개월 남짓한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지금의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을 개원하게 된다. 미군 전용 골프장은 고양시 원당 근처로 옮겨 한양골프장으로 새로 조성해주었다.

어린이대공원을 만들고 나서도 유릉의 석물들은 조경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여기저기 놓여 있다가 최근에야 어린이 대공원 한곳에 모아 놓고 안내판을 걸어 두었다.

아차산에 묻힌…
조선시대 한양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말이 있었다. 한양 도성에서 십리까지는 한성부윤의 관할 구역으로 한성에 속한다. 남쪽으로는 한강까지고 서북쪽으로는 구파발, 삼각산이요 동쪽으로는 중랑천이 경계다. 지금의 한양대를 지나 살곶이 다리가 성저십리의 경계다. 아차산까지 펼쳐지는 너른 대지에 말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세종대왕은 여기에 화양정이란 정자를 짓고 자주 이곳을 들렀다고 한다.

화양(華陽)은 꽃비 흩날리는 양지바른 벌판을 뜻한다. 그곳에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명황후가 먼저 잠들어 있다가 순종이 붕어하자 마중 나온 듯이 순종의 손을 잡고 아차산 넘어 금곡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 아차산에서 이어진 망우산 만해스님 묘ⓒ2014 불교닷컴

조선 태조가 자신이 묻힐 동구릉 터를 발견하고 이제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서 근심을 잊은 망우리(忘憂里)라는 동네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랑구 상봉동에서 구리시 교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도 그래서 망우리고개다. 고종도 순종도 죽어서 이 고개를 넘으며 비로소 살아서 나라 잃은 근심을 잊고 꽃향기 날리는 명계(冥界)로 갔을 것이다.

아차산에서 능선길로 굽이굽이 이어진 산이 이 고개 오른쪽의 망우산이다. 팔당에서 내려오는 한강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이 산자락에는 작은 국립묘지처럼 일제강점기에 살다간 애국지사들의 묘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용운, 조봉암, 장덕수 등 잘 알려진 지사들 외에도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오긍선, 유상규, 서병호, 서광조 선생 등의 묘소가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소 그림을 잘 그리던 화가 이중섭, 시 목마와 숙녀를 쓴 시인 박인환,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 역사학자 문일평, 서예가 오세창, 한글운동을 한 문명훤 등의 학자, 예술인 묘소도 있으며, 조선말 의사이자 한글학자였던 지석영의 묘도 함께 있다.

진작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셨어야 할 분들을 서울시립 공동묘지였던 이곳에 너무도 초라하게 모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차산 산행 올 때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여기 아무 묏자리에 앉아 핑계 삼아 음복주 한 잔 기울여야겠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90년대 초, 불교계와 인연을 맺고 불교계 잡지사와 총무원, 사찰 등에서 생활하는 틈틈이 전국의 산과 절을 자주 찾아 나섰다. 그 동안 산언저리나 절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해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기도도량을 찾아서>, <이야기가 있는 산행> 등을 출판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