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14 북한산 (박문호와의 동행 1)

2018. 12. 26. 22:35산 이야기

 

 

 

오늘은,

오래전 북한산 산행을 하고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라는 산행기를 남긴

박문호 (朴文壺)일행의 길을 따라 나서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

출처 : 호산집(壺山集) (번역문 출처 : 한국컨텐츠진흥원 조선시대유산기)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는 삼각산 산행기로써

조선후기 성리학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의 시문집 '호산집(壺山集)'에 수록되어 있다. 

호산집에는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  유화양동기(遊華陽洞記)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

독고산기(獨孤山記) 등이 실려 있다.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부악산(負嶽山)과 인왕산(仁王山) 사이를 나와 서북쪽으로 바라보니,

산이 대치하고 있는데, 마치 맹수가 두 귀를 쫑긋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경(雲卿) 황현(黃玹)이,
“이것이 백운대(白雲臺)라고 하는 것인가?”
라고 하니, 우림(于霖) 김택영(金澤榮)이,
“아니다. 이것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의 대남문(大南門)이다.”
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전 어느 봄 날

박문호(朴文壺)와 황현(黃玹) 그리고 김택영(金澤榮)은

부악산(북악산, 백악)과 인왕산 사이의 창의문으로 도성을 나섰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연융대도(鍊戎臺圖)>의 일부분, 규장각 소장.

 

박문호 일행은 북한산성 군량미 보관창고중 하나인 평창(平倉)을 지나

현재는 등산금지구역인 사자능선을 넘어 맹수의 두 귀 모양의 문수봉과 보현봉을 바라보며,

북한산에 처음 가보는 황현은 백운대냐고 물었고 김택영은 대남문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나는 많은 등산객 무리에 휩쓸리며 구기계곡에 들어섰다.

 

멀리 뾰족한 보현봉과 좌측에 문수봉이 보이는 구기계곡 입구.

 

 

 

계곡 양지바른 곳부터 얼었던 땅이 풀리며 녹은 물이 계곡을 적시고 있다.

 

 

 

깔닥고개에서 바라본 보현봉

 

 

 

보현봉은 엿본다는 의미의 규봉()이라고도 부른다.

보현봉에 오르면 도성이 훤히 보이고 경복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하여

권력찬탈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 곳이다.

 

보현봉에 오른 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과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광해군을 몰아냈던 인조는 역성혁명에 성공하였고,

냉전시기에 북한의 김신조부대 31명은 1968년 1월 21일

북한산 비봉을 넘어 승가사밑에서 매복하다가

창의문을 통과하여 청와대 코앞까지 쳐들어 갔으나 청와대진입에 실패하고

세검정, 백악, 북한산 자락에서 사라져 갔다.

 

서울 북쪽이며 북한산 남쪽인 세검정주변은 쿠테타의 기운이 서린 곳인가...

 

보현봉과 문수봉사이의 대남문이 멀리 보인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60대 일행들 - 매주 같이 산에 오르는 친구들 - 은

문수사가 다가오자 문수사 김치에 얽힌 얘기를 하며 걸었다.

오래전, 북한산에 올라 식사 후 남은 김치를 문수사옆에 묻어 두고

다음에 올라와서 꺼내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한동안 김치 파묻기를 계속 했었다고 한다. 

같은 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들은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ㅎㅎ

 

 문수사 대웅전

 

 

 

문수사 명부전

 

 

  

 두 귀〔兩耳〕 남쪽에 이르러 조금 서쪽으로 가서 문수암(文殊菴)을 만났는데,

커다란 바위 구멍〔石穴〕이 있었다.

옛날 고려의 대량군(大良君) 왕순(王詢)이 머리를 깎고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있다가, 후에 맞아들여 즉위하였는데,

이것이 아마 신혈인 것 같다.  

 

  

박문호는 고려 현종이 승려생할을 할 때 머물렀던 곳인 신혈사를

이곳 문수사의 문수굴로 판단했으나 신혈사는 삼천동 진관사 서북쪽에 있었다.

문수사는 현종사후 80년이후에 창건되어 신혈사와는 무관하다.

 

박문호가 신혈사 바위구멍으로 추측한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문수굴은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문수사에서 바라본 보현봉은

항상 강인하고 늠름한 기상으로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문수사에서 바라본 대남문

 

대남문 위쪽에서 바라본 문수사

 

 

 박문호 일행이 다녀간지 약 20년 후(1911년)의 문수사.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의 문수사,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에서 전재.

 

 

휴일 대남문 바깥쪽에는 따뜻한 햇볕아래 많은 인파가 북적거리고 있고...

 

 

 

대남문 안쪽에은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한 등산객들이

수북히 쌓인 눈위를 미끌거리며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있었다

 

 

 

 

 

눈은 많이 쌓였지만 봄날씨에 가까와서 그런지 잘 녹아내리고 있다.

 

  

 

 

 

대남문으로 들어가서 또 서북쪽으로 바라보니,

두 개의 봉우리가 마치 귀 같았다. 내가,
“이것은 백운대가 아닌가?”
라고 하니, 우림이,
“모르겠다. 옛날에 일찍이 이곳에 놀러온 적이 있지만,

중흥사(重興寺)에 이르러 멈췄기 때문에 중흥사를 지난 뒤로는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아니다.”
라고 했다.
동쪽은 용암봉(龍巖峯)이고, 그 서쪽은 노적봉(露積峯)이라고 한다.

 

대남눈으로 들어서서 산성안을 둘러보는 박문호 일행은

삼각산 봉우리 이름을 정확히 몰라서 설왕설래하고 있다. 

 

 <동국여도(東國輿圖)中  북한성(北漢城圖)>의 일부분, 규장각 소장.

  

대남문쪽에서 바라본 삼각산 봉우리  

 

 

 

대남문쪽에서 보이는 삼각산 봉우리는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이 섞여 있어서 

구분이 쉽지 않았는지 초보산행자들인 박문호일행의 대화가 중구난방이다.

두 봉우리를 보며 백운대냐는 우문에

중흥사(노적봉아래에 있는)까지만 가봐서 잘 모르겠다는 김택영의 우답에,

누군가 동쪽은 용암봉이고 서쪽은 노적봉이라고

억지 결론을 내리며 계곡을 내려갔다.

 

금위영 유영지에서 바라본 삼각산 봉우리...역시 구분이 쉽지 않다.

 

아래 흑백사진은 박문호 일행이 다녀 간 10년 후 쯤의 모습으로

삼각산 봉우리 모습이 위 사진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금위영유영지 인근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폴리트 프랑뎅의 북한산 전경(The whole view of  Mt. Bukhan), '먼 나라 꼬레(Coree)'에서 전재.

 

위 사진은 1892년 조선주재 제2대프랑스영사 및 전권공사를 역임한 이폴리트 프랑뎅의 사진이다.

구한말 주요열강의 외교관 및 성직자, 전문가들은 다양한 기록을 남겼는데 

군사요충지인 도성과 인근 북한산성, 남한산성의 사진이 여러 장 있어

주변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계곡주변으로 곳곳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조금 가다가 주점에 들어가 큰 잔으로 몇 번 마시자,

서로 더불어 탄식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며,
“이 곳은 천험(天險)이다. 비록 기병(騎兵) 일천 무리가 있다고 한들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박문호 일행은 군사요충지 북한산성의 모습을 보고 그 천험의 요지에 놀라고 있다.

 

험준한 능선을 따라 산성이 쌓여 있고

대남문부터 중흥사에 이르는 계곡주변에 산성 방어를 위한 각종 시설

(금위영유영지, 어영청유영지, 경리청 상창, 중창, 호조창, 관성소, 각종 사찰 등)의 규모와

그들이 거주하는 700여호의 가옥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고는 

막강한 외적방어 시스템에 감탄하며,

역사적으로 북방유목민족 기병부대의 기동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때문에

공포의 기병부대 침입도 능히 방어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안심하고 있다.

 

 

계곡일대에 늘어선 축대 잔해.

 

 

 

 

 

유영(留營) - 1892~1893년 사진.

 이폴리트 프랑뎅의 유영(A military camp, Mt. Bukhan fortress), '먼 나라 꼬레(Coree)'에서 전재.

 

위 사진은 유영(留營) 사진으로 북한산성 축성과 수비를 나누어 담당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유영지 중의 하나로

현판글씨로 보아 금위유영으로 보인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금위영 유영지의 축대

 

  

등산로 사이의 주거지 축대와 담장 흔적.

 

 

 

 경리청 상창지 인근 허물어진 축대

 

 

경리청 상창지 축대

 

 

경리청 상창지터에 건물 초석

 

 

 

 

경리청 상창지 뒤편 담장

 

 

 

 

경리청 상창지옆 계곡에 임금이 잠시 머무는 임시 궁궐인 행궁(行宮)과

행궁의 물품을 관리하던 호조창이 있던 자리가 있다.

 

행궁지 안내판

 

 

박문호 일행은 계곡을 따라 북한산성의 중심지로서 

경리청 창고를 관리하던 관성소와 승병을 관리하던 치영이 있는

중흥사로 내려 갔다.

 

 중흥사 주변 사진(출처불명)

 

 (2편에 계속)

출처 : 도성과 북한산성 이야기 그리고
글쓴이 : 구구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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