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6. 22:34ㆍ산 이야기
지금으로부텨 300여년전 1707년,
삼각산 산행을 하고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라는 산행기를 남긴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溺)의 흔적을 따라 삼각산을 오르기로 하고 나섰다.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는 삼각산 산행기로써
성호 이익의 시문집 성호집(星湖 集)'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컨텐츠진흥원의 '조선시대 유산기'와
김윤우의 '북한산 역사지리'에 실린 번역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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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지지(地誌)를 살펴보건대, 삼각산을 일명 부아산(負兒山)이라고도 하였다.
부아산은 서울의 종산(宗山)으로서, 대개 도봉산으로부터 (그 맥이) 남쪽으로 달려와서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비로소 우뚝 솟았다.
백운봉 남쪽에는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는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그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 중 인수봉이 더욱 깎아세운 듯 우뚝 솟아 있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하며,
바라다보면 가장 빼어난 절경이다.
실로 다른 두 산봉우리와 나란히 대치하고 있어서 삼각(三角)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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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제작 추정,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경기도 양주목,규장각 소장>의 부분 확대.
이익은 먼저 지지를 참고하여 삼각산의 이름과 주변 지리적 상황을 설명한다.
어린아이(인수봉)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아산(負兒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삼각산,
백두대간 한북정맥의 도봉을 거쳐 백운봉에 우뚝 솟은
서울의 종산 삼각산은 세 봉우리(백운봉, 만경봉, 인수봉)로 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인수봉이 가장 빼어난 절경이라고 기록한다.
위 지도는 1700년대 중반에 제작된 팔도군현지도의 (한성부를 포함한)양주목지도의 일부분으로써
백두대간에서 뻗어와서 도봉산 - 삼각산 - 북한(한양의 북쪽으로 현재의 북한산지역) - 북악으로 이어지는
지세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익의 설명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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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노적봉(露積峯)이며, 노적봉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이다.
중흥동에는 중흥사(中興寺)가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취봉(鷲峯)이며, 그 줄기가 남쪽으로 돌아서 가다가 고개를 이루는데,
이 고개가 곧 석가령(釋迦領)이다.
이 석가령 동쪽을 조계(漕溪)라고 하는데, 이 곳에는 조계사(曹溪寺)가 있다. 절 경내에 폭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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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漕溪)와 조계사(曹溪寺)를 거쳐 석가봉에 오르게 된 이익은
석가령-현재의 대동문 바로 옆에 위치한 석가봉-을 중심으로 삼각산과 그 주변을 설명한다.
노적봉아래 삼각산의 중심인 중흥동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 중흥사와
석가령밖의 조계(계곡)의 조계사와 (조계)폭포의 존재를 설명한다.
나는 북한산 산행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수유동, 우이동 방면은 거의 오른 적이 없어
이번 산행을 준비하며 약간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쉽게 파악할 것으로 알았던 '조계'와 '조계사'의 존재와 위치때문에
산행준비때부터 산행을 마치고 산행기를 쓸때까지도 혼란을 격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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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령의 서쪽 줄기는 나한봉(羅漢峯)의 여러 산봉우리이고,
이 산봉우리들이 노적봉의 오른쪽 산록과 더불어
중흥동의 골짜기 입구에서 띠가 매이고 옷깃이 합쳐지듯 서로 만난다.
이곳이 바로 옛 북한산성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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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봉에서 바라보는 삼각산 안쪽은
오른쪽 노적봉에서 내려온는 능선과 왼쪽 나한봉방향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중흥동계곡에서 좌우 옷깃처럼 가지런히 만나는데
이곳이 삼국시대이래로 전략요충지인 옛 북한산성터(한수 이북의 산성)로
중흥산성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다시 설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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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령에서 곧장 남쪽은 보현봉(普賢峯)의 여러 산봉우리가 되고,
그 맥이 점점이 뻗어 나가며 열지어 인왕산(仁王山)이 되니,
이 일대가 바로 우리나라 조종의 만세토록 공고한 터전이다.
지금 감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보현봉의 서쪽 줄기는 문수암(文殊菴) 산봉이 되고,
문수암의 물은 탕춘대(蕩春臺)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니
이것이 그 대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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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제작, <대동방여전도(大東方與全圖)中 경조오부(京兆五部)>
대동여지도 이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방여전도'에 수록된 도성도인 '경조오부'도
삼각산과 도성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지도이다.
종산(宗山) 삼각산의 지세가 뻗은 곳에 자리잡은 한양,
이익은 한양을 천만년 이어갈 왕조의 터전으로 염원하고...
구기계곡, 세검정, 사천(沙川, 모래내)을 거쳐 한강으로 흐르는 물길과 함께
삼각산 설명을 마친다.
이제 산행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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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해년(丁亥年 ; 1707, 숙종 33) 중춘(仲春) 에 북한산을 유람하러 가고자 하였는데,
따라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 있어 마침내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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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삼각산 유람을 떠난 때는 1707년 봄기운이 한창인 중춘(음력 2월)이었다.
때는 북한산성이 축조되기 4년전이었다.
이름모를 동행자 한 사람과 같이...
내가 성호 이익의 흔적을 따라 삼각산을 오르기로 한 때는
2010년 8월 한여름 뜨거운 태양을 식혀주는 폭우가 쏟아지는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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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경자일(庚子日)에 집에서 출발하여 18일 신축일(辛丑日)에
동소문(東小門)을 경유하여 느린 걸음으로 조계동(曹溪洞)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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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경기도 안산 첨성리의 성호(星湖)라는 호숫가 근처에 있는 집을 출발하여
도중에 어디선가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익이 하룻밤 머문 곳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본디 이익 집안은 여주 이씨지만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일가의 세를 형성하였는데
그곳 어느 인척의 집에 머물렀지 않았을까?
다음날 지금은 혜화문이라 부르는 동소문을 거쳐 삼각산을 향해 나섰다.
<대동방여전도(大東方與全圖)中 경조오부(京兆五部)>의 부분 확대.
타락산(지금의 낙산)위쪽에 있는 혜화문을 나서 안암동위쪽 길을 지나
적유현(狄踰峴, 지금의 미아리고개)을 넘어 삼각산을 왼쪽으로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수유현을 지나 조계사가 있는 조계동으로 들어섰다.
지도에는 조계사와 비슷한 화계사(花溪寺)가 표시되어 있다.
나는 8월 7일,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수유역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우이동계곡에 도착했다.
산행전에 조계사의 위치를 찾아 봤으나 알 수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이익이 조계를 거쳐 석가령을 올랐기에 석가령에 오름직한 코스를 살펴봤다.
진달래능선 좌우의 계곡인 구천계곡과 소귀천계곡 둘중의 하나로 판단하고
계곡이 깊을 것 같은 소귀천계곡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결과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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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入山)에 대한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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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에 들어서며 그 심정을 시로 읊었다.
설레임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당시에 처한 이익의 충격적 상황에서 맞이하는 입산에 대한 심정을 표현했을까?
이 산행기에는 그 시가 없다.
나는 쏟아지는 비로 넘치는 우이동계곡에 들어섰다.
오랜 무더위 끝에 밤새 내린 폭우에 수량이 풍부해졌다.
초입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 안내도.
삼각산 수유리 주변에는 4.19 국립묘지를 위시해
이시영선생, 이준열사 등 근현대 독립운동가 분들의 묘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우이계곡 입구에는 천도교의 '의창수도원'이라 부르는 봉황각이 있는데,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선생이
한일합방이후 종교를 통한 국권회복을 기틀을 마련하기위해 건립한 건축물로써,
이곳에서 양성한 천도교 지도자들이 3.1운동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우이계곡에 흐르는 계곡물
아름다웠을 우이계곡이 지금은 음식점과 점포가 들어차고
계곡의 반쯤을 축대로 쌓아 아스팔트 길을 내버려 계곡의 자연스런 맛을 없애버리고
곳곳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보를 쌓아 인공폭포 구실을 하는게 영 볼썽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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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허각(步虛閣)에 올라가 11층 폭포를 구경하고 또 관폭(觀瀑)에 대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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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허각이라는 누각에 올라 조계의 11층 폭포를 구경하고 시를 짓는다.
이익보다 앞선 1630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에게,
"... 묘소의 왼쪽은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여 긴 폭포가 아주 장관을 이루었다.
이곳이 바로 조계폭포입니다.
평생 한 번 구경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의정께서도 가고 싶으면 같이 가서 묘소에 절도 올리고 조계동 물과 바위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라며 조상묘소 참배와 명승지 조계의 경치구경을 권한다.
지금은 오르는 계곡은 아름답다던 그 모습이 아니다.
소귀천계곡은 우이계곡을 오르다가 이곳 할렐루야 기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계곡옆에 조성된 기도동산.
십자가홍살문(?)
국적도 없고 족보도 없는 조형물...헐~
할렐루야 기도원으로 오르는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음식점 영빈관.
'꽃등심 1인당 1만원 무한리필'을 자랑하는 영빈관.
영빈관이면 영빈관 다워야지 꽃등심 만원이 뭐꼬?
일반인 출입금지!
명산 계곡에 들어서서 공원을 사유화하고 있다.
여기서 출입을 사양하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소귀천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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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바꾸어 조계사(曹溪寺)에 들어가 기숙하였는데,
징(澄)이란 승려의 시축(詩軸)에 있는 시에 차운(次韻)하여 율시를 한 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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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조계사에서 징이란 스님과 밤을 보낸다.
산행후 삼각산 조계사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서울 견지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는 '삼각산 조계사'로 명명하고 있지만,
1910년 창건된 각황사를 1937년에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절이름을 태고사로 하다가
1954년 조계사로 개칭하였기에 이익이 머문 삼각산 조계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華溪寺)-위 경조오부에 花溪寺로 표시-는 조계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여 살펴봤으나,
화계사는 1522년 절이름 '화계사'로 창건되어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삼각산화계사'로 조계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화계사의 주지는 수경스님으로 불교계의 4대강사업 반대를 대표하다가 얼마전,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에 큰 충격을 받고 속세를 홀연히 떠났다.
화계사 홈페이지에는 스님동정란에 마지막 글이 실려 있다.
조계사의 흔적을 찾던중,
이익이 삼각산을 다녀간 4년후 1711년에 북한산성이 축조되었고
그 이후 1800년대초에 제작된 '동국여도中 북한성도'에 조계사가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도(東國與圖)中 북한성도(北漢城圖)>
지도 오른쪽 계곡입구쯤 조계사가 있다.
<동국여도(東國與圖)中 북한성도(北漢城圖)>의 부분 확대.
현재의 화계사 위치와 비슷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산등성이위에 대동문-동대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과 바로옆 석가봉이 있는 걸로 봐서
현재의 수유리계곡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혹시 화계사를 '조계에 있는 절'이란 의미로 조계사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6년(1406년)에,
'...조계사(曹溪寺) 중 성민(省敏)이
절의 수와 노비·전지를 줄이는 것에 반대하여 승려 수 백명과 신문고를 치다 ...'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명종 11년(1556년) 에,
'한성부에서 삼각산 조계사 뒷산의 바위가 4∼5장 쯤 무너져 떨어진 이변을 아뢰다'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貞蕤閣集)에,
'...홍대용·박지원·이덕무 등과 함께 승가사에 올랐다.
이덕무가 먼저 돌아가기에 가는 길에 보통정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북한산을 거쳐 조계에서 놀다가 다시 서상수와 이덕무를 만나 묵으며 기행시를 지었다. ..'
과거 몇몇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조계(사)는 꽤 오래동안 실존했던 절인 것 같다.
나는 조계사를 찾아 오른 소귀천계곡이 잘못된 선택임을 산행 후에야 알게 되었다.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있다.
덕분에 물은 차고 넘친다.
물폭탄이 이어진다.
용담수(龍潭水)라는 약수터 푯말.
물은 계속 흐른다.
드디어 대동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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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여명이 밝을 무렵에 석가령을 넘어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를 조망하여 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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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이른 새벽 조계사를 나서 대동문옆 석가령에 올랐다.
삼각산 지세를 이곳에서 살펴보았다.
나도 드디어 대동문에 올랐다.
아름다운 홍예문에 들어섰다.
바깥쪽 홍예.
안쪽 홍예.
안개 자욱한 대동문.
숙종 글씨를 집자하여 제작한 대동문 편액.
대동문에서 백운대방향의 성곽을 따라 갔다.
비밀의 문안에 숨어있는 듯...
북한산성 방어를 총지휘하던 동장대
동장대를 조금 지난 곳에
밖으로 볼록 튀어나간 성곽인 곡성(曲城)
곡성에서 본 서울시내
곡성에서 본 동장대
조금씩 구름이 걷히고 있는 성 안쪽 모습
이익이 좌우 능선이 옷깃처럼 가지런히 모인 곳이라 말한 중흥동.
구름에 휘감긴 봉우리는 의상봉이다.
곡성에서 바라본 백운대방향에 노적봉 허리만 보이고 있다.
삼각산 봉우리가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는 곳인데
구름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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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에 들어가 비로소 아침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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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삼각산의 유명 사찰, 중흥사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이익이 방문한 이때는 30여칸 작은 절이었으나
4년후 북한산성 수비의 핵심역할을 하는 136칸의 큰 사찰로 증건하였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허물어진 축대와 저수조 흔적이 중흥사의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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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종조손(從祖孫) 종환(宗煥)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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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1681년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이 유배중이던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680년 경신대척출로 남인일파가 대거 실각할 때 사헌부대사헌인 아버지도 유배를 당하였고
이익이 태어난 다음 해에 그곳에서 '분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 하다' 운명하였다.
어머니의 집안이 있는 안산에 정착한 이익은 몸이 허약해 뒤늦게 글을 배웠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비분과 강개로 가득찬 둘째형 이잠(李潛)에게 가학을 배웠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신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수천권의 서적을 보고 풍부한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 이하진이 유배지에서 죽은지 24년 후,
주변인으로 살던 형 이잠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노론계의 거센 반발과 숙종의 진노를 일으켜 참혹한 국문(鞠問)을 당한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장형(杖刑)을 당했는데,
30대씩 17~8회 600여대 가까이 맞은 끝에 목숨이 끊어졌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흉인(兇人)으로 평가하는 노론의 분노와 광기가 서려있는 죽음이었다.
이익이 삼각산에 오르기 불과 6개월전 일이었다.
친형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정릉 이씨' 가문은 살얼음을 걷는 상황이었기에
산에서 우연히 집안의 손자 종환을 만났으니 그 동병상련의 심정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익은 이 충격으로 출세를 포기하고 학문의 길에 전념하게 되는데...
당시 혁명적인 학문 실학의 기반을 형성하여 가문과 후손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수십년 후 또 한번 정적 노론의 잔혹한 처벌이 후손들에게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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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백운봉에 올라가려고 하였는데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아 길이 막혀 올라 가 보지 못했다.
백운대를 바라보면서 절구시를 한 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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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산정상 백운대를 오를려고 했으나 겨울눈이 녹지 않아
오르지 못하고 아쉬움을 시로 달랜다.
중흥사 앞 계곡의 물은 흐르고 있다.
그날처럼 오늘도 유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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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內城)의 남은 터를 따라가며 석문(石門)을 구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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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각산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군사상의 전략요충지로서
백제 초기부터 중흥동 고석성(中興洞 古石城)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이 각축이 벌이던 한강유역의 중심 거점이었던 북한의 산-삼각산-은,
백제는 수도를 한수 남북으로 옮겨가며 북방진출의 교두보로 삼았고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북한산군으로 일컬었고
신라는 진흥왕때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우며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9년(1598년)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아뢰는 말 중,
'중흥동(中興洞)에는 옛날 산성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석축이 완연합니다.
세인의 전언에 고려 때 최영이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산봉의 암석에는 아직까지 깃대를 꽂았던 구멍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고려 우왕 당시 최영장군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의 장소로 삼고
변란을 대비한 전략적 요새지로 중흥산성을 쌓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익이 본 내성(內城)은 고려 우왕 때 수축한 중흥산성의 흔적으로,
석문(石門)은 중흥산성의 궁문(宮門)으로 보고 있다.
나는 중흥사 바로 밑에 있는 산영루를 찾았다.
산영루 초석앞의 계곡
비오는 산영루는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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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바꾸어 문수암에 들어갔다.
여기서 문수암에 대한 절구시를 한 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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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중흥동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대남문쪽으로 올라가 문수사를 찾았다.
나도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이익이 올라간 후 조성된 북한산성의 경리청상창지의 허물어진 축대
금위영 유영지 터
안개 자욱한 대남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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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올라가 서해(西海)를 조망하여 바라보고,
이어 문수암에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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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 뒷편 문수봉에 올라 한강과 그 너머 서해를 바라보며
광활한 세계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해가 저물고 안개구름이 자욱해서 한치 앞을 볼 수가 없다.
두 주전 서해 방향은 이런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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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현봉에 올라가 왕성(王城)을 굽어본 후 보현봉에 대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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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보현봉에 올라 도성을 바라보는 이익은
수없이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집안의 좌절, 형 이잠의 비극적인 죽음...
완전무결의 주자학이 지배하는 체제와 목숨건 권력투쟁, 사상투쟁...
군(君)과 신하(臣下)의 관계는 무엇인가?
선비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백운봉 바위를 가슴에 품고 어두운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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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탕춘대를 따라 내려와 출산(出山)에 대한 율시를 한 수 지었다.
마침내 국도(國都)의 북문(北門)을 경유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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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산행을 정리하며 시를 지었고
창의문을 넘어 인간사회로 돌아왔다.
난 어둠 가득한 계곡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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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성호 이익은 평생 초야에 묻혀 후진양성과 학문에 매진하여
성호학파라는 일군의 학자군을 키워내고,
사회개혁, 정치개혁, 통치체재 개편, 중화세계 탈피 등
주자성리학을 실날이 비판하는 주장으로 실학의 학문적 기반을 구축하여
'성호사설'을 비롯하여 상당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익 사후-1742년- 영정조 시기에
그의 학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재들이 중용되어 정권의 지도급인사로 참여하여
조선후기 르네상스시대를 이끌었으나
1801년 학자군주 정조가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하자
이익의 후예들에게 노론세력의 복수가 가해진다.
당시 사학인 천주교 신자를 역율로 다스렸는데
남인들이 한 때 천주교를 신봉했던 것을 빌미로 삼아 탄핵하였다.
대표적인 표적은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이었는데,
이익의 조카사위인 이승훈은 북경에서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고,
이익의 종조손으로 성균관대재학을 역임한 조선 최고의 천재, 이가환은
서학(西學)은 적극 수용하되 서교(西敎, 천주교)는 거리를 두었으나
고문 끝에 숨을 거두고 기시(棄市,시신의 목을 베는 것)되었다.
이승훈의 처남인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 함께 잡힌 형 정약종의 적극적인 변호로
형 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정약용은 간신히 유배에 처해져 19년간의 유배생활을 한다.
이익을 가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정약용은
장기간 유배를 통해 이익 학문을 계승하고 뛰어넘으며
야만의 세월에 견디어 냈다.
그 해는 이익이 세상을 뜬지 38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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