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外

2018. 12. 26. 23:35산 이야기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서울학 

樂民(장달수)|조회 4152|추천 0|2018.05.09. 19:11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첨부파일 최종현_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pdf



최종현 <(사)통의도시연구소 소장>


Ⅰ. 들어가며
Ⅱ. 백석성 별서터 유적 일대의 사적
1. 북한산 일대의 사적
2.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3. 탕춘대
4. 북한산성
Ⅲ. 조선시대 북문(창의문) 밖 일대 문사들의 유오
1. 조선시대 후반 한성 영역의 확장
2. 위항인들의 창의문 밖 유오(遊敖)
3. 창의문 밖에서 유오(遊敖)했던 사민(士民)들의 행적
Ⅳ. 백석동천 유적(白石洞天 또는 白石亭)
1. 백석정의 연원
2. 허필과 그의 친우들
3. 각자 바위 - 월암(月巖)과 백석동천(白石洞天)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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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현재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일명 ‘백사실 계곡’이라는 곳에는 별서터 유적이 있으며 주변에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바위와 ‘월암(月巖)’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백악산 북록, 탕춘대 동편 산속 계곡에 위치한 별서터 유적은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그 북쪽의 안채 및 주변 부속시설로 이루어진 초석이 남아있으며 건물 남쪽에 타원형의 연못이 있고, 연못 남쪽 측면에는 육각평면 정자(일명 ‘백석정’)의 초석이 있다. 이 지역은 1970년부터 군사작전지역에 속해 있어 거주자를 제외한 시민들의 접근이 제한되어 왔으며 2000년대 군사작전지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에게 완전히 공개되었다. 꽤 오랫동안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므로 그 존재 자체가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005년 백사실 계곡 별서터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이라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사적에서 해제되고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6호’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9년 백사실 계곡 일대가 ‘계수가 깨끗하고 주변 숲이 자연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도롱뇽, 오색딱따구리 등의 보호종이 서식하는 지역으로 생물다양성을 갖추고 있어 보존 가치가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이유로 울시 ‘생태·경관보전구역’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백석동천’이라는 각자로 인해 이 별서터에 있는 정자를 백석정(白石亭)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 별서 및 정자의 연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학술적으로 연구된 적도 역시 없다.
2011년 종로구청 문화과에서는 ‘한울문화재연구소’에 이 일대의 정비 계획 수립을 의뢰,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종합 정비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백사실 계곡의 별서터 및 육각 정자의 내력은 추정만 될 뿐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검증 자료가 없으며 몇몇 이에 대한 시각도 유추 또는 가정에 의해 이루어져 있어 명확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백석동천 유적의 연원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거의 없는 상태임이 보고되었다.

   2012년 11월 12일 국립문화재연구소 <백석동천 옛 주인을 찾았다>는 보도자료를 통해 “백사실 계곡 연못 정자 이름은 ‘백석정’이며 추사 김정희가 이것을 매입하여 재건축하고 이용했다”는 요지의 내용을 공표했다. 이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얻은 결론을 언론에 발표한 것으로, 박규수와 추사 김정희의 시구(詩句) <동명연혁고> 등에 등장하는 백사실 계곡 별서에 대한 기록 등을 해석하여 유추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두 시인의 시구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도달한 이런 결론은 다르게 해석되고 유추될 수 있는 모호한 부분들을 근거로 삼아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김정희나 박규수 및 당대 주변 인물들의 행적에대한 넓은 조사 및 지리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시구 해석에 중점을 둔 한문학적인 방법에 국한되어 연구가 진행되면서 논란의 여지와 오류 가능성을 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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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추사 김정희 이전이나 이후의 백석동천 유적의 역사나 자취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되지 않은 매우 제한된 연구였으며 보도자료 형태의 3장짜리 보고서 형식을 취한 것이라서 제대로 된 연구라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백석동천 유적’이 위치한 백악산 북록-탕춘대 동편 산속 계곡은 북쪽으로는 북한산(삼각산)1)과 접해있고 서남쪽으로는 인왕산 북쪽 줄기와 잇닿아 있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적(史蹟)에 등장하는 북한산과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북쪽 백악산(북악산) 사이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탕춘대 그리고 세검정 등으로 대표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17세기부터 북한산 일대 지역이 세인들에게 알려지며 문인·묵객들의 유오지(遊敖地) 기능을 하게 되었다. 도성의 북문-창의문 밖으로 나와 북한산에 산재해 있는 사찰들까지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이 일대에는 조선말까지 지속적으로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17세기부터는 위항문인들도 북한산성과 탕춘대 일대를 탐방하였다.

   이 일대에 속하는 백석동천 별서터와 백석정이라 부르는 육각정자는 공식적인 기록에나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후기 문인들의 시구와 문집 일부분에서 묘사되었다. 이들의 문집과 서화(書畵)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며 백석정 일대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 분석함으로써 그 연원과 문화적 가치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이울러 이것을 바탕으로 이 주변에 위치 삼계(三溪), 탕춘대, 북한산 사적, 무계동(武溪洞) 사적-무계정사 등과의 인문지리학적 비교를 통해 그 독특한 문화적·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백석동천 일대는 탕춘대 동쪽 산곡(山谷)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사대부들의 유오(遊敖) 공간으로 잘 알려진 주변의 탕춘대와 북한산 유적 그리고 서남편에 위치한 무계정사와는 다른 장소적 의미를 가진다. 지정학적으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벼슬을 뒤로 하고 은거하여 학문과 문장에 천착하며 시와 그림으로 소일하는 사민(士民)들에게 의미있는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1) 북한산(北漢山)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렀다. 고려시대까지 기록에는 ‘삼각산’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각산’과 더불어 ‘북한산’이란 표기도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북한산으로 알려져 있다. 본 논문에서는 역사 문헌에서 직접 인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북한산으로 통일하여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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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일대 중 역사에 가장 먼저 등장하며 오랜 동안 지리적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이 일대 역사적·문화적 가치의 시발점과 중심축으로 기능했던 북한산의 사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조선초기 안평대군의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던 인왕산 북록을 중심으로 인왕산 사적을 되짚어보고 아울러 삼계, 탕춘대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백석동천 유적을 둘러싸고 있는 일대가 역사적 장소로서 가지는 의미를 정리하려 한다.


   백석동천 유적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전무하므로 그 연원에 대한 연구는 관련된 인물들의 문집과 서화(書畵)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행적을 조사, 분석하는 것을 토대로 할 것이다. 백석정 일대와 관련된 묘사가 등장하는 글과 그림 등의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 분석함으로써 그 연원과 문화적 가치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영조·정조대인 조선후기에 창의문 밖 백석동천 일대는 정치권 밖에서 은거하며 살아가는 문인들의 유오(遊敖) 장소로 시와 그림으로 묘사되었던 곳이었으나 여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현재까지 서울학 연구가 주로 도성 내부와 성저십리 일부에만 집중됨으로써 도성 밖 지역에 있는 유적이나 인물의 행적이 서울학의 대상으로 조명될 기회가 드물었는데 본 연구가 서울학의 연구 범위가 창의문 밖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바지하기 바란다.

아울러 공식적인 기록이나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관련 인물들의 행적 및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 및 문집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지리학과 역사학, 고고학, 인문학과 문헌학적인 접근들이 상호 교차하고 보완되는 학제통섭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로써 역사학으로 인식되어 온 서울학의 지평을 확대하고 사료의 제한이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하는 시도에 실마리가 되길 기대한다.


Ⅱ. 백석성 별서터 유적 일대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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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위치표시도 전체, <대경성정도> 부분, 1936,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1936년 경성 지성당(至誠堂)에서 경성부의 교열을 받아 간행한 17장(補 4장 포함)의 서울지도.




1. 북한산 일대의 사적

   북한산 남쪽 줄기 능선 중 승가사 서쪽으로 뻗은 비봉은 신라 진흥왕 16년(555)에 붙여진 이름이다. ‘왕이 삼각산을 수행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석(현재 국보 제3호)을 세웠다고 하여 비봉(碑峯)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때는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왔구나(無學誤尋到此)’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라 전해지기도 했으나 1816년(순조 16) 추사 김정희(金正憙)에 의하여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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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남쪽 계곡 모래내 영역에는 통일신라 시기에 창건한 장의사승가사가 있다. 장의사는 현(現)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이藏義寺, 壯義寺, 莊義寺 등 여러 한자로 표기된다. 지금은 사찰은 없어지고 보물 제235호로 지정된 당간지주만이 홀로 외롭게 남아있다. 이 사찰은 무열왕 6년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신라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북한산 일대는 현종(재위1009-1031년)이 잠저2)시(1006-1009년)북한산 신혈사(神穴寺)에 머물렀기 때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008년(목종 11년)에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던 순(詢)(이후 현종)이 머리를 깍고 신혈사에 머물렀던 것이, 왕족들이 불교 사찰로 왕래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1051년(문종 5년) 왕이 12박 13일 여정으로 북한산에 갔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1090년(선종 7년) 왕이 북한산에 가서 장의사, 승가굴, 인수사 등에 거둥하는 등 왕들이 북한산에 갔던 기록들이 이어진다.3)

   북한산 남쪽 기슭은 1099년(숙종 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예종, 인종, 의종 등이 행차하여 장의사, 승가굴, 인수사, 문수굴, 향림사 등에서 예불을 하고 시주하였다.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6-1105)은 1099년 9월에 재신과 일관들에게 시켜 양주(楊州)에 남경(南京)을 건설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며 같은 달 정묘(丁卯)일에 왕이 왕비, 맏아들, 양부, 관료들 및 우세 승통을 데리고 삼각산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왕들이 북한산의 장의사, 승가굴에 들러 예불을 했으며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때까지 북한산 남쪽에 위치한 남경으로의 순행이 계속되었다.4)

   그러나 고려 왕들의 북한산과 남경으로의 행차가 중지되는 시기가 있었다.
1170년(의종 24년) 8월 정중부(鄭仲夫)의 난으로 명종(明宗, 재위1171-1197년)부터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원종(元宗, 재위1260 -1274년)까지 북한산과 남경으로의 행차는 중지되었다.


2) 국왕이 즉위하기 전 살던 시기 또는 살던 집을 의미한다.

3) 1099년(숙종4년) 9월 왕이 ‘재신과 일관 등을 시켜 양주(楊州)에 남경(南京)을 건설함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같은 달 정묘일에 ‘왕이 왕비, 맏아들, 양부 관료들 및 우세승통(祐世僧統)을 데리고 삼각산에 갔다.’ 계해일 왕이 13일만에 ‘남경을 떠나 궁녀들과 함께 승가굴에 가서 제를 올리고 의복을 시주하였다’.

4) 고려시대 남경이 설치된 후 왕실에서 북한산에 행차할 때 종종 그 남쪽에 있던 남경도 함께 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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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북한산과 남경으로 행차가 다시 시작되기는 했으나 이전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1283년 8월 충렬왕(忠烈王)‘불공하려 간다는 구실로 사람을 시켜 삼각산에 길을 닦게 하였는데 사실은 자기가 놀러가거나 사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1284년(충렬왕 10년) 9월 ‘왕과 공주가 남경에 갔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북한산이나 남경으로 왕이 행차하기는 했으나 이전과 달리 북한산에 있는 사찰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과는 목적이 다른 행차였다.

   북한산 남쪽 자락에는 창건 년대를 알 수 없는 향림사(香林寺)가 비봉 남쪽 자락에 있었는데 1016년(현종 7년)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 모시면서 처음으로 이 사찰이 세상에 알려졌다. 승가굴은 북한산 비봉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한다. 당(唐)나라 고종(高宗 재위650-683)때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생불이라고 존숭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외에 현 서대문구 홍제동에 소재한 국보 제281호인 5층 석탑이 있는 사현사(沙峴寺)와 현 홍제동 321번지에 소재한 정토사(淨土寺)는 747년(경덕왕 6년) 표 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현 서대문구 홍제동 1-8번지에 소재한 옥천암(玉泉菴)은 창건자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의장사(義藏寺) 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0미터의 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백불(白佛), 불암(佛巖)이라고 한다.

   북한산에 위치한 사찰들 - 장의사, 승가굴, 문수굴, 인수사 등은 고려 왕실의 원당사찰 기능을 담당했다. 1104년(숙종 9년) 남경에 신궁을 건설한 후부터 1167년(의종 21년)까지 북한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사찰들에 왕실에서 예불하고 시주하려 왕래했다. 왕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왕실 가족과 재상 등이 개성과 남경을 왕래하는 간선도로가 조성되어야만 했다. 이때 개성에서부터 오면서 북한산에 위치해 있는 사찰로 접근하는 길과 회암사(檜巖寺) 주위로 접근하여 양주를 거쳐 남경역(南京驛)으로 진입하는 두 개의 간선도로가 있었다. 왕실에서 북한산의 사찰에 왕래할 때는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청교도서쪽대로, 즉 청교, 통파, 마산, 벽지, 영서로 이어지는 대로를 이용하여 녹반현(綠礬峴: 현재는 녹번동이라한다.)을 넘어서 모래내를 따라 북한산 남쪽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자하문(紫霞門) 창의문(장의문이라고도 함)을 이용하여 남경의 이궁(離宮)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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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들어와 북한산의 사찰들은 이전에 수행했던 왕실 원당사찰의 기능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철되고 폐사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1503년(연산 11년) 11월 30일부터 북한산으로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다음해 왕명에 의하여 향림사, 장의사, 승가사 등의 사찰이 강제로 폐사되었다. 그러나 사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일부 그 기능이나 위상이 바뀌었으며 국가의 사업을 위해 새로 건축되거나 중축된 사찰도 생기면서 존속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잠저 시(時)에 죽은 신의왕후 한씨의 기신제(忌辰祭)를 북한산 장의사에서 지내는 것을 비롯하여 조선초기에 고려시대 사찰들은 왕실의 원당사찰 기능을 수행했다. 또 세종은 젊고 유망한 집현전 학사에게 휴가를 주며 책을 읽게 하는 사가독서를 이곳 장의사에서 실시했다. 그러나 독서용산강에 조성하면서5) 왕실의 기재(忌齋)를 수행하던 장의사의 운명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조위(曺偉, 1454-1503)6)는 성종시기의 대표적인 문신 중의 한 사람인데 그는 1476년(성종 7년) 왕명으로 장의사에서 사가독서를 한 바 있다. 그 후 14년이 지난 1492년(성종 23년) 3월 17일 사가독서했던
이곳의 기억을 시로 지었는데, 이 시기 채수(蔡壽), 권건(權健), 허침(許琛), 유호인(兪好仁), 양희지(楊熙止) 등이 사가독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7)


5) 『성종실록(成宗實錄)』, 권 제277, 성종 24년(1493) 5월 11일.
6) 조위는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이후 25년 간을 어버이를 모신다고 수령자리를 주청하여 함양군수를 역임한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중앙요직을 맡아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1498년(연산 4)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사문집을 찬집했다는 죄로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송평(순천)으로 이배되어 5년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7) 당시 ‘장의사에서 놀면서 지은 시를 기록하여 우의정 허침에게 주다(錄重遊藏義寺詩寄許右相獻之(琛))’라는 조위의 시가 있어 당시의 정경을 그려볼 수 있다.


匡山讀書處 광산은 내가 독서하던 곳,
重到意悠哉 다시 오니 옛 생각이 아득하구나.
花氣薰金地 꽃 향기 절간을 향기롭게 하고,
茶烟颺石臺 차 연기 석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魚躍戱碧澗 물고기는 푸른 물 속에서 뛰어 오르고,
鳥下印蒼苔 새는 짙푸른 이끼 위에 내려앉는다.
彷佛三生夢 사는 것이 3생의 꿈과 같아서,
夷猶晩未回 머뭇머뭇 해 저물어도 돌아가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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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가굴은 1422년(세종 4년) 7개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합할 때 선종에 속했던 사찰로 연산군 때 폐사8)된 것으로 추측되며 한 세월 지난 뒤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로 중창되었다. 향림사는 1505년(연산 11년) 폐사되면서 불상들양주 회암사로 옮겨졌는데 회암사마저 1821년(순조 21년) 훼손되었다.
   소림사(小林寺)는 1396년(태조 5년) 소림굴로 혜철(惠哲)이 창건했다. 1817년(순조 17년) 관해(觀海)가 중창하고 소림사라 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졌다. 정토사는 1399년(정종 원년)에 중건되어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懿淑公主)부마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의 원당사찰로 정해져 백련사(白蓮寺)로 칭해졌다 하는데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1861년(철종 12년) 경조5부도(京兆五部圖)에는 백련산 정토사로 표현되어 있다. 그 외에도, 미타사(彌陀寺), 금선사(金仙寺) 등이 더 보이는데, 미타사는 그 연혁을 전혀 알 수 없고 금선사는 비봉 남쪽에 있던 절로, 1790년 농산(聾山)이 앉은 자리에서 수행하였으므로 임금이 초상을 그리게 하고 공양하였다고 한다.


2.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창의문 밖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르는 성곽 북쪽 자락의 깊숙한 곳에는 안평대군 이용의 별서였던 무계정사(武溪精舍)의 유지(遺址)가 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 원운서에서 “내가 정묘년(1447) 4월에 도원의 꿈을 꾼 적이 있다. 지난 해(1450) 9월 우연히 시간을 내어 유람하다가 국화가 떠내려온 것을 보고 ……비로서 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꿈에 보았던 곳과 비교해보니 풀과 나무가 우거진 모습과 냇물과 산세의 깊숙하고 한적한 모습이 조금은 흡사하였다. 금년(1451)에 그곳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무계(武溪: 무릉도원 계곡)의 뜻을 취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실은 정신을 휴양하면서 은거하기 위한 곳이었다”라고 밝히었다.


   무계정사 유지(遺址)의 입지를 살펴보면, 삼계(三溪)를 거슬러 올라가 인왕산 북쪽 성곽 밖 북동의 실개천을 따라 협곡을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좁은 협곡이 보이는데 이곳이 무계정사 동구이다.


8) 성능(聖能), 「재비봉동금폐(在碑峯東今廢)」, 『북한지(北漢誌)』, 사찰, 승가사, 1745(기축) 11월 상한산인(上澣山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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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소위 도관들이 속세와 단절한 채 살아가고자 자리잡는다고 하는 동천(洞天)인 듯 착각할 정도로 속세인들에게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입지이다.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조성할 당시에는 그윽하고 한적하여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물소리와 야생식물이 서로 엉켜있는 상태였으므로 은거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사 입지로는 제격이었다.

   무계동 골짜기는 안평대군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은 곳이였던 것 같다. 골짜기 유역 안은 여타의 골짜기와는 달리 휘어있고 비좁아서 동구(洞口)가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일단 동구에 들어서면 안쪽이 완만하고 그윽하게 생긴 땅이 나타난다. 그 “북쪽 낮은 능선(이개의 ‘무계정사기’)”에 올라서서 북쪽을 향해 바라다보면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지며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듯 마음이 후련해진 느낌이 든다. 그 시계 범위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북한산의 보현봉, 비봉, 향로봉에 이르는 산형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안평대군무계정사에 자리잡고 눈 앞에 펼쳐지는 북한산의 전경을 바라보며 무릉의 꿈을 꾸었다. 그는 무계정사 발문을 짓고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였으며 ‘낭간거사(琅玕居士)’라는 자신의 자호가 의미하는 것 같이 ‘속세와 거리를 둔 자’, ‘겨울을 이겨내는 대나무 같이 속이 빈, 세속의 욕심이 없는 자’로서 이후 삶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무계정사에 기거한 기간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이 역모로 몰려 사사(賜死)된 후 무계정사는 몰수되어 버려졌다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3. 탕춘대
   1503년(연산 9년) 11월 30일 왕이 ‘살한리(沙乙閑里-창의문 밖에 붙어있는 마을)에서 무계동(武溪洞)까지의 길과 장의동에서 살한리까지의 길을 사람들 통행을 금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1504년 7월 29일 장의사는 폐사되고 이궁을 지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때에 이미 물가에 새 정자가 들어선 상태였는데 현재 세검정이 들어선 자리로 추측되며 당시 이 정자의 명칭은 신정(新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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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왕이 장의문(창의문) 밖 조지서 터 이궁(離宮)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탕춘대(湯春臺)를 봉우리 위에 쌓았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랑(長廊)을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고 한다. 장의사 터에는 넓은 화단을 쌓고 각종 화초를 심게 했다.9) 이때부터 ‘탕춘대’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1506년(연산 12년) 3월 7일 장의사 서편 기슭 우뚝 솟은 꼭대기에 새 정자를 세웠는데 청유리 기와로 이었다하며 두견화를 주변에 심고 정자 이름을 탕춘정(湯春亭)이라 하였다. 같은 달 17일 홍제원을 냇가로 옮겨 짓고 사면에 화단을 만들고 냇물을 원 안으로 끌어들이게 하라고 명하였다.10) 연산군이 폐위되기 전까지 기간 동안 탕춘대 근처에 있던 조지서, 장의사, 향림사, 홍제원, 연서역 등이 모두 훼철되었다.

   그러나 중중 반정 이후 연산군이 조성한 두 개의 정자-황각 및 장랑-와 화단 등을 비롯하여 이곳에 조성되어 있던 시설물들은 모두 버려진 채로 있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하여 장의사 터에 총융청이 들어서게 되었다.
영조는 1754년 총융청을 탕춘대 성내로 옮겨짓고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라 고쳐 명명하였다.11)

4. 북한산성
   숙종은 즉위년부터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로부터 자강할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하기를 요청받았다. 형조판서 오정위(吳挺緯)이덕형(李德馨)의 문집에 있는 글을 인용하여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수축하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산성이다.


9)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권 제51, 연산군 9년(1503), 권 제54, 연산군 10년(1504). 권 제58, 연산군 11년(1505). 권 제61,
연산군 12년(1506).
10)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권 제61, 연산군 12년(1506) 3월 7일. 연산군 12년(1506) 3월 17일.
11) “공자(孔子)가 ‘반드시 이름을 바룬다’고 하였는데 탕춘대의 이름은 바르지 않다. 이미 경영(京營)을 설치하고 때때로 나아가기도 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다시 연융대(練戎臺)라고 고치도록 하라”명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82, 영조30년(1754) 9월 2일.


72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숙종은 4영이었던 군제를 개편하여 금위영(禁衛營)을 만들어 추가함으로써련도감, 어영청과 금위영이 삼군문(三軍門)이 되어 총융청과 수어청과 함께 5영제도를 완성시켰다. 아울러 군사적 요충지에는 산성을 구축하고 북한산성을 수축하여 도성 보위를 강화하였다. 5영제도의 설치와 함께 한성부 즉 도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흥산성(大興山城), 동쪽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서쪽에 문수산성(文殊山城) 등을 수축·보완하여 청국(淸國)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711년(숙종 37년) 김중기, 이우항, 이언강, 한배주 등의 간곡한 청에 의해한산성 축성이 결정되어 북한산성 탕춘대성(湯春臺城)을 축성하였다. 북한 행궁(北漢行宮)의 기지는 상원암(上元庵) 자리에 축조되었다. 북한산성의 역사(役事)는 4월 3일에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19일에 끝났다. 주목할 만한 것은 북한산성의 축성에 승려들의 노동력을 동원한 점이며 더불어 중요한 요충지 12곳에 불교사찰을 창건한 것이다. 사찰 승려들로 하여금 수도 한성부의 방위 기능을 분담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승병을 총 지휘한 승려는 8도 도총섭으로, 지리산 화엄사 출신의 성능(聖能)이었으며 북한산성을 수축하면서 중요한 요충지 12곳에 사찰이 창건되거나 중창되었다. 중흥사는 36칸이었던 것을 축성 후 136칸으로 중건하고 도총섭 성능이 이곳에 머물렀다. 태고사와 문수굴, 서암사는 고려시기에 창건되어 남아있던 사찰이며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국령사, 원각사, 상운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이 북한산성 축성 후 창건된 사찰인데 총 1,259칸이 조성되었다.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이 당시 도총섭이었던 성능에 의해 창건었다. 북한산성의 관리는 3군문에서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의 향곡은 마땅히 십수만 석을 운반해두어야 하는데 성안의 길이 험하고, 거두고 분배하는 방법이 편리하지 못합니다”12)는 서종태의 의견이 있은 후 북한산성의 중성(中城)을 쌓기 시작했다.13) 같은 해 6월 “북한산성의 행궁 축성에 관계한 관리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렸다”14)는 보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행궁 축성이 이 때 완결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2) 『숙종실록(肅宗實錄)』 권 제50, 숙종 37년(1711) 10월 23일 신묘.
13) 『숙종실록(肅宗實錄)』 권 제51, 숙종 38년(1712) 5월 3일 임진.
14) 『숙종실록(肅宗實錄)』 권 제51, 숙종 38년(1712) 6월 9일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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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는 북한산성의 성랑, 창고, 문루와 못을 파고 우물을 만드는 역사도 끝나면서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 산
성이 일체가 되는 구조가 완성되었다.



Ⅲ. 조선시대 북소문(창의문) 밖 일대 문사들의 유오


   도성의 북쪽 창의문 밖 동에서 서로 뻗어 흐르는 사천(沙川: 모래내)이 있다.
수원(水源)인 북한산 문수봉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탕춘대, 홍제원을 지나며 무악(毋岳)을 감아돌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가는 물길이다.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 밖의 이 물길 주변은 역사적으로 많은 유적들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북한산 일대에 왕실의 원당사찰들이 있어 예불을 드리러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세종 재위 시에는 장의사 자리에 독서당이 설치되면서 사대부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주로 왕실과 재추들만이 제한적으로 특별한 용무가 있을 때에만 드나들던 곳이었다. 연산군대에 세검정에 정자를 세우고 탕춘대를 조성하면서 연회와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행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 이 지역은 주로 왕실의 행사나 국가의 업무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왕실과 재추들만 특정 목적으로 드나들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제한된 곳이었다. 연산군 이후 탕춘대 일대가 훼철되면서 창의문 밖 지역은 오랫동안 세인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1711년(숙종 37년) 약 6개월 동안 역사(役事)를 진행하여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수축하고 총융청, 경리청, 평창 등을 설치하면서 도성과 탕춘대성, 산성은 항상 열려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도성 내외에 사는 양반계층에게는 탐방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 되어 북한산성 내외 유람이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정치권 밖에서 살아가는 남인, 소론, 강화학파 계열의 문인들까지 자주 창의문을 나와 탕춘대, 북한산, 북한산성 근처의 사찰에 찾아가 머물면서 시를 읊고 문집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74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사진 1> 위치표시도 전체, 2013

1. 조선시대 후반 한성 영역의 확장
   17세기 후반부터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됨으로써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한성은 상업 도시의 면모를 띄게 되었다. 금속화폐의 전국적인 유통과 대동법의 실시로 노동력의 상품화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불규칙이고 불안정한 기후로 인하여 각종 재난이 발생하면서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일거리를 찾아 한성부 도성 내외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한성부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유민 대부분이 도성 밖의 대로 주변이나 한강 가장자리에 거주함으로써 한성부 영역은 도성 밖까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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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 한성전도, <고지도첩>, 채색필사본, 19세기 전기, 34.4×54.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도성 밖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 대부분은 빈민으로 상품-화폐 경제체제에서 파생되는 각종 일거리로 생계를 삼았으므로 여타의 노동력을 쉽게 구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경강상업이 번창하여 전국적인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18세기에 이르면 한성부 수도권은 3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는 근대적 상업도시로의 기반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수도권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외곽에 상품 유통의 새로운 거점이 생성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전의 상업체제가 붕괴하고 개인사업자(私商)를 중심으로 한 유통체계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시전 상업체계와는 다른 유통거점들이 생기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유통체계를 장악한 세력은 대부분 경강 상인계층이었다.

   경강상업이 번성하자 사대부들도 중개인을 내세워 여기에 참여했다. 참여한 대부 유력 가문의 중개인은 그 수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경제적인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계층, 상업 중개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중인(中人) 계층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새롭게 중인으로 편입된 집단은 정치적으로 몰락해가는 양반이거나 갑자기 격상된 양민층으로 이루어진 계층으로 16세기 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17세기를 거치면서 위항(委巷)문학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존재와 위상을 드러내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이들은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되어 도성 내외 곳곳에서 시회를 비롯한 문학 활동을 벌이면서 문집도
출판하였다.


76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2. 위항인들의 창의문 밖 유오(遊敖)

1) 위항문학
   일부 중인들이 인왕산 자락을 중심으로 위항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문학은 양반사대부들이 한자를 빌려 그들의 정서와 생활감정을 표현한 상층계급의 예술활동이라 할 수 있는데 16세기 말부터 17세기를 거치면서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과 중인 이하 상인 및 천민까지도 포함하는 하층계급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이들 피지배계층의 한문학 활동이 시단(詩壇)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데까지 이른다. 당시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하급 계층을 위항인(委巷人)이라 지칭한 예에 따라 이를 편의상 위항문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항문학 활동은 주로 한시(漢詩)를 매개로 전개되었는데 시사(詩社)는 그들만의 조직이고 시집(詩集) 역시 그들의 것이었다. 양반으로 제한된 문원(文苑)의 풍토에 일군의 위항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16세기 중반인데 17세기 준비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18세기 말 옥계시사(玉溪詩社, 일명 松石園詩社)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룬 위항문학 운동은 19세기 중반 소규모의 시사로 분화, 전승되어 위항인들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하다가 19세기 말 개항기(開港期)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이르러서는 개화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위항문학 활동은 시사의 조직, 공동 시집의 발간, 공동 전기를 중심으로 한 위항인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요약된다. 시사의 조직은 17세기 말 숙종 때 임준원(林俊元)을 주축으로 한 낙사시사(洛社詩社)를 필두로 시작되었으며 18세기 말 정조 때 옥계시사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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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위항문학 시집은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가 엮은 ‘해동유주(海東遺珠)’인데 장동 김씨의 이름 있는 후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恊)15)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위항시인의 대부분이 사대부의 후원을 받고 ‘망형지교(忘形之交)’을 맺기도 하고 시(詩)로써 서로에게 응답하기도 하였다.


2) 탕춘대와 삼계 - 위항인들의 유오지(遊敖地)
   위항문학을 주도한 이들은 서울의 일정 구역 부근에 모여 산거(散居)해 살았으며 돌아가며 시회(詩會)를 열어 시를 짓고 학문과 덕행을 탁마하였다. 봄과 가을 좋은 날을 택하여 오늘날의 백일장에 해당하는 백전(白戰)이라는 시 경연대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수백 명씩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인왕산 자락을 근거삼아 활동하던 중인들의 시화활동이 창의문 밖에까지 확장되었는데 삼계(三溪), 탕춘대가 그곳이다(<지도 3> 참조).16)


15) 김창협(金昌恊, 1651-1708)은 17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문인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 농암(農巖)·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과천(果川) 출생.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집의(執義)·헌납(獻納)·대사간(大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그 후에 대제학(大提學)·예조판서·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문학과 유학(儒學)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편서에《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작품으로 글씨에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표(金崇謙表)》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의 전액(篆額) 등이 있다.
16) 이익(李瀷), 「강광지세황탕춘대유춘시축서(姜光之世晃蕩春臺遊春詩軸序)」, 『성호선생전집』, 탕춘대는 특히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솟은 곳은 우뚝하고 흐르는 곳은 넘실대며 또 빼어나게 지은 새 정자가 있어 붉고 푸른 빛이 비추니 거의 삼절(三絶)이라 이를 만하다.


<지도 3> 삼계의 현대지도


78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조선후기 삼계와 탕춘대에서 위항인들이 시회를 열거나 유오했던 것을 살필 있는 대표적인 자료로는 <이향견문록>이 있다. 조선후기의 문인 유재건(劉在建)17)이 위항문학인의 행적 및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묶어 편술한 책이 <이향견문록>이다. 여기에 수록된 ‘삼계(三溪)에서 노닐다’라는 시와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항은(巷隱)은 자가 성고(聖固)이다. 어려서부터 신실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여 향당(鄕黨)에 알려졌다. 그 손자인 동계(東溪) 최윤창(崔潤昌)이 삼계의 고사를 다시 이어가면서 이렇게 서문을 썼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만년에 한적하게 거처하시며 교유를 사절하고 서적에 잠식하셨다. 수시로 시를 읊조리다가 때로 흥이 나면 문득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나가 성곽 북쪽에 있는 삼계당(三溪堂)에 가셨다. 어떤 때는 이틀을 묵으며 노닐기도 하고 혹은 해가 질 때까지 시를 읊으며 소광(昭曠: 최고의 경지)의 본원에서 소요하셨다.


   읊으신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病懹愁着處 병든 회포 근심이 서리면
扶杖出溪堂 지팡이 짚고 삼계당으로 가네
璧上藏書籍 벽장에는 서적을 쌓아두고
檐前眞射場 처마 앞은 활터를 마련하였네
新霜天氣肅 오늘 아침 서리에 하늘 기운 차갑고
昨雨潤聲長 어제밤 비에 산골 물소리 커졌구나
始得養眞地 비로소 진정을 기를 곳 얻으매
昔病渾却志 묵은 병을 모두 잊어버렸네

   “그때 나는 이제막 냇니18)를 갈 때였는데 능히 모시고 가서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 이제 늙그막에 이르러 매양 이어나가고 싶었으나 여유가 없었다. 당질 최중식(崔重植)이 종회(宗會)에 나와 말하기를, ‘이 청명하고 화창한 절후를 당하여 온 문중 노소가 일제히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위가(韋家)의 승회를 마련한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7) 유재건(劉在建, 1793-1880). 자는 덕초(德初) 호는 겸산(兼山). 조선말기의 문인. 옥천부원군 창의 후손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해 서리계급이 되었다. 시와 글에 두루 능했고 특서예를 잘하였으며 특히 전서와 해서에서 뛰어났다.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을 편술, 위항인 308명의 전기를 모아 분류함으로써 위항인의 전기집을 이루었다.
18) 젖 먹을 때 나는 치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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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왕고께서 전에 삼계에 놀러가시곤 했는데 옛일에 따라 삼계로 놀러간다면 선지(先志)를 계승하고 천륜을 질서 있게 하는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여 드디어 날을 정하니, 1789년(정조 13년) 4월 29일이었다. 한 문중의 늙은이와 젊은이, 아이들까지 모두 28명이 소맷자락을 이어 삼계 무동(武洞)의 사이로 나갔다. 옛자취를 추심하여 잇달아 나이 순서로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바위와 샘과 구름 등은 의연히 옛날과 같았다. 이에 시 짓는 사람, 활 쏘는 사람, 바둑 두는 사람, 투호하는 사람들이 종일 즐기며 놀았으나 노래하고 악기를 타지 않은 것은 유지(遺志)를 따라서 사치하고 크게 벌이는 것을 경계하는 까닭이다.

   아 나의 할아버지가 이곳에 오신 지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 우리가 오늘날 이를 계승하였고 우리의 아들 및 손자가 50년 뒤에 또 이를 잇는다면 어찌 우리 집안의 훌륭한 행사가 아니겠는가....(중략) 그 후 1849년 동계의 손자 첨추(僉樞) 최종환(崔宗煥)이 또 삼계동에서 이 모임을 잇고 여러 종친 및 아들, 손자가 나란히 옛날의 시운에 화답하여 시축과 책을 만들었다.”19)


<그림 1> 유숙, 세검정도, 종이에 연한 물감, 26.1×58.2cm, 국립중앙박물관


19) 유재건, 2008, 「삼계고시를 잇다 향은 최태완」, 『이향견문록』, 큰항아리, 409쪽.
80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이향견문록‘박돌몽’ 편에서 탕춘대에서 빨래하고 시를 지으며 소일했던 구체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박돌몽(朴突夢)이 “처와 더불어 탕춘대에 빨래하러 갔는데 냇가에 편편한 바위가 많았다. 돌몽이 문득 빨래를 그치고 돌 위에 가서 갓도 없이 잡방이를 걷고 두 다리를 드러낸 채 퍼질러 앉았다. 웅크린 채 돌 웅덩이에 먹을 갈아 큰 붓을 쥐고 ‘소학제사(小學題辭)’를 쓰니 바위 면에 필세가 기운차게 움직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나무 그늘에 누워 소리를 내 길게 읊으니 유연히 자득한 경지였다......”20)고 썼다.


3. 창의문 밖에서 유오(遊敖)했던 사민(士民)들의 행적
   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위항문학인들이 창의문 밖으로 나와 삼계와 탕춘에서 시회를 열고 유오한 것과 더불어 17세기와 18세기에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시화와 학문에 열중하며 소일했던 양반 출신의 사민(士民)들 역시 성문 밖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혔다. 도성의 동쪽으로는 송계원(松溪院) 주변의 물가가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남문 밖에서 돈의문(서대문) 바깥으로 현량(賢良)한 양반들의 주거지와 유오처(遊敖處)가 있었다. 창의문 밖 탕춘대, 세검정을 비롯한, 북한산 주변 역시 양반 출신 사민들의 유오지로 주목받았다.


   송제로(宋濟魯, 1711-?), 강세동(姜世東, 1714-?), 정집(鄭集, 1715-?) 등이 백사회(白社會)를 결성하고 정수영(鄭遂榮)이 ‘백사노인화도(白社老人畵圖)(<그림 2>)’를 그리고 정계(송제로의 자호)가 서문을 쓴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20) 유재건, 2008, 「섬돌 위에 배운 큰 공부 박돌몽」, 『이향견문록』 , 큰항아리, 515쪽.


<그림 2> 정수영, <백사노인회도>, 「백사회첩」, 1784년, 종이에 엷은 색채, 34.2×42.7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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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성 서편 남문 밖은 자고로 사대부의 도회지로 알려져 있다.... 현량한 사대부이 연노하여 항간에 은거하는 자 또한 많아서 삼문 밖에는 가가호호 집들이 즐비하다. 노경에 한가로이 거하며 몸이 건강하고 정이 두터운 이들까지 매양 한가한 날 좋은 날씨에 지팡이를 끌고 서로 왕래하며 혹은 기약 없이 찾기도 하고 서로 초청하여 모이기도 한다.”

   서대문 밖 평동에서는 사사로운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광려(李匡呂,1720-1783)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예가 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가 쓴 과정록(過庭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참봉 이광려는 문장이 빼어나고 인품이 훌륭한 선비다. 아버지께서 평계(平溪: 서대문 밖 평동)에 거처하실 때(1780-1788)이다. 하루는 지계공(芝溪公: 外叔 李在誠)과 함께 인근 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집 사립문 안에 조그만 수레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든 솜씨가 자못 정교하여 다가가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 때 그 집 주인이 마루에서 내려와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혹 박연암21) 아니시오? 나는 이광외다’라고 했다. 대청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두 분은 문장에 대해 토론하셨다.


........이공은 이 한마디 말로 단박에 아버지와 지기(知己)가 되어 이후 자주 찾아왔다.......”22)

   창의문 밖에서 사민이 유오(遊敖)하는 장소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탕춘대(세검정)이다. 그 외에도 무계동(武溪洞)삼계(三溪)가 있으며(최근에 다시 알려진) 백석동천(白石洞天) 계곡이 있었다. 숙종대부터 창의문 밖 북한산성 내외 지역으로 유오했던 사문들 중 처음으로 기록에 보이는 인물로는 영조대의 시인 김상채가 있다. 김상채(金尙彩)23)는 영조 대 위항시인으로 손자 김종식(金宗軾)이 조부인 김상채의 시를 묶어 문집 <창암집>을 간행하여 오늘까지 전한다. <창암집>에서 따르면 김상채는 ‘세검정에 올라 여러분의 글에 차운하다(洗劍亭奉次諸公韻)’24)라는 시를 읊었다.


21) 연암은 박지원의 호이다.
22) 박종채(朴宗采), 「참봉 이광려(李匡呂)」, 『과정록(過庭錄)』,
23) 김상채(金尙彩). 생몰년대 미상. 조선 영조 때의 여항시인. 자는 경숙(敬叔), 호는 창암(蒼巖)이다.


82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숙종대에 태어나 영조대에 살았던 여항시인 박창원(朴昌元, 1683-1753)25)은 자신의 자호를 따서 명명한 <박담옹집(朴澹翁集)>을 엮었는데 이 문집은 박창원의 시(詩), 연구(聯句), 사(詞), 잡기 등을 묶은 것이다. 시는 주로 산영루(山映樓), 문수사(文殊寺), 동장대(東將臺) 그리고 필운대(弼雲臺), 탕춘대(蕩春臺), 한강 가의 읍청루(挹淸樓), 압구정(狎鷗亭), 빙호(氷湖)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남양주의 도곡(陶谷)과 석음재(惜陰齋), 여강(驪江)까지, 서쪽으로는 인천의 능허대(凌虛臺)까지, 고양의 흥성암(興聖菴) 등 서울과 인근의 명승들을 소재도 삼은 것들이다. 그는 탕춘대와 육각정자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묘사한 시 ‘탕춘대를 지나육면각에 오르다(過湯春臺登六面閣)’를 읊었다.

   창의문 밖 지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사민(士民)으로는 허필(許佖, 1709-1761)26)을 들 수 있다. 허필은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살았던 문인이자 서화가이다. 그는 18세기를 살아가면서 당대 문인 및 화가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세황, 최북, 임희수, 이현환, 신사운 등과 함께 화단에서 활동하였다. 허필은 시작(詩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강세황, 최성대, 임정27) 등 25인과
더불어 10일 동안이나 세검정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다. 이외에도 이용휴28), 이병휴29)이맹휴30), 엄경응31), 임희성32), 최성대33), 신광수34) 등 주로 남인과 소북계의 인물들과 교유하고 시회를 가졌다.


24) 김상채(金尙彩), 『창암집(蒼巖集)』 권2(卷之二), 시(詩).
25) 박창원(朴昌元, 1683-1753), 조선후기 위항시인, 본관은 밀양, 자는 선장(善長), 호는 담옹(澹翁). 아문(衙門)에서 서리를 지냈는데 신임사화 때 그만두고 시사로 들어왔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을 섭렵하여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주역>에 해박하여 괘도인 <원부차서도(原赴次序圖)><원부방위도 原赴方位圖>를 남겼으며 음율(音律), 지리(地理), 성역(星歷)에 통달하였다.
26) 허필(許佖, 1709-1761), 자는 여정(汝正), 호는 연객(烟客), 초선(草禪), 구도(舊濤). 조선후기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살았던 문인이자 서화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에 전념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고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문학과 고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 《선사창수록(仙槎唱酬錄)》 《연객유고(煙客遺稿)》가 있다.
27) 임정(任珽), 1694(숙종 20)~1750(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성방(聖方), 호는 호재(扈齋).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1728년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정언(正言)·부정언(副正言)·교리(校理)·부교리(副校理)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40년에는 대사간에 올랐으며, 1748년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 1750년에는 대사성이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해주축성비(海州築城碑),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 등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호재집(扈齋集)』이 있다.
28)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寰齋). 성호 이익의 조카. 남인 실학파의 중심이었던 가환(家煥)의 아버지. 실학의 학맥에 따라 천문, 지리, 병농 등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탄만집』·『혜환시초(惠寰詩抄)』『혜환잡저(惠寰雜著)』가 있다.
29)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이용휴의 아우이다.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경협(景協), 호는 정산(貞山)이다. 이침(李沉)의 아들이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이다.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정산고(貞山稿)》, 《심해(心解)》, 《정산잡저(貞山雜著)》 등이 있다.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83


   허필은 1737년, 그의 나이 26세 때 “북한산 남쪽 백석 별업에서 정윤, 강세황과 함께 짓다(漢南白石別業與鄭運德潤及豹菴, 同賦)”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또 그는 ‘북한산영루(北漢山映樓)’, ‘세검춘유(洗劍春遊)’라는 시를 쓴 바 있다.
‘세검정에서 봄놀이(洗劍春遊)’라는 시에서는 ‘왕성이 십리에 굽어있는데(王城十里闉)’라고 하여 도성이 백악산 북쪽 자락을 감아돌아 감싼 모습을 표현했다. 이 시는 허필이 41세 되는 해 3월 3일 경에 최성대(崔成大)35), 임정(任珽)36), 강세황 등 25명과 함께 시회를 가지고 창의문 밖 탕춘대 주변을 두루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다.


30) 이맹휴(李孟休, 1713년(숙종 39)~1751년(영조 26))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맹(孟). 자는 순수(醇叟). 지안(志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하진(夏鎭)이고, 아버지는 실학자 이익(李瀷)이다. 1742년(영조 18년)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장원, 1744년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서 《춘관지(春官志)》를 편찬했다.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하여 실학(實學)을 전공했다. 저서로『접왜고(接倭考)』·『예경설경(禮經說經)』이 있다.
31) 엄경응(嚴慶膺),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학산(鶴山). 아버지는 엄진(嚴縉)이고, 처는 정익천(鄭翊天)의 딸이다.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고, 다만 1780년(정조 4) 3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함께 교유한 이용휴(李用休), 이광환(李匡煥), 유경종(柳慶種), 강세황(姜世晃), 조중보(趙重普),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유중림(柳重臨), 허필(許佖), 임희성(任希聖), 안정복(安鼎福), 목만중(睦萬中), 채제공(蔡濟恭), 신택권(申宅權), 신광수(申光洙) 등과 ‘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로 불렸다.
32) 임희성(任希聖, 1712(숙종 38)~1783(정조 7).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시(子時). 호는 재간(在澗)·간옹(澗翁). 1741년(영조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을 거쳐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문사(文詞)보다는 실천에 힘썼다. 편저로는 『경서차록(經書箚錄)』·『국조상신열전(國朝相臣列傳)』『재간집』 3책이 있다.
33) 최성대(崔成大), 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집(士集). 호는 두기(杜機). 수원부 남경면 출신이다. 음사로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지평·장령을 지낸 뒤에 춘방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창흡(金昌翕) 이후의 제일인자라 칭해졌다. 그의 시 11수를 모아 엮은 『두기시집(杜機詩集)』이 남아 있다.
34) 신광수(申光洙), 1712(숙종 38)~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澔)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이휘(李徽)의 딸이다.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썼다. 채제공(蔡濟恭)·이헌경(李獻慶)·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郞)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였다. 제주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에 <탐라록 耽羅錄>을 지었다. 그 뒤에 선공봉사(繕工奉事)·돈녕주부(敦寧主簿)·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772년 61세때에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그 뒤에 우승지·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 關西樂府>가 유명하다. 저서로 《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이 전한다.
35) 최성대(崔成大), 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집(士集). 호는 두기(杜機). 수원부 남경면 출신이다. 음사로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지평·장령을 지낸 뒤에 춘방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창흡(金昌翕) 이후의 제일인자라 칭해졌다. 신유한(申維翰)과 친교를 맺고 화답한 것이 많았다. 그의 시 11수를 모아 엮은 『두기시집(杜機詩集)』이 남아 있다.
36) 임정(任珽), 1694(숙종 20)~1750(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성방(聖方), 호는 호재(扈齋).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1728년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정언(正言)·부정언(副正言)·교리(校理)·부교리(副校理)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40년에는 대사간에 올랐으며, 1748년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 1750년에는 대사성이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해주축성비(海州築城碑),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 등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호재집(扈齋集)』이 있다.


84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강세황(姜世晃, 1713-1791)37) “기사년(1749년) 봄 최두기, 임치재 등 여러 사람과 세검정을 유람하고 25명이 각각 읊다”38)라는 시를 지었성호 이익 ‘강광지(姜光之)39) 세황이 탕춘대에서 봄놀이 시축에 서문을 쓰다(姜光之世晃蕩春臺遊
春詩軸序)’를 쓴 바 있다. 강세황은 이 시에서 창의문, 세검정, 총융청, 탕춘대 주변의 승경을 묘사하고 ‘그 때 사람들이 지은 시를 죽 나열하다(列叙時人仍作詩)’로 마무리하였다.

   이용휴(李用休, 1708-1782)40)는 북한산 지역을 유람하였는데 허자정(허필) 엮은 <북한시권>의 발문 ‘발허자정북한시(跋許子正北漢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일찍이 두 번 북한산을 유람했으나 전혀 시를 지은 것이 없었으니 대개 동토이조(東土二祖, 慧可)를 스승으로 삼아 의위(依位)에 예배하는 뜻에서였다. 지금 이 책은 비록 가어(家語)로 만들었으나 신수(神秀)함이 다만 그 골격만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는 친우 허필에 관련된 작품, “허연객생지명(許烟客生誌銘)” “허연객여정필에 대한 만사(許烟客汝正輓)”41)를 썼다.

   참봉 이광려(參奉 李匡呂 1720-1783)42)은 북한산을 유람하였으며 이후 이를 묘사한 긴 제목의 시를 지었다. ‘비가 온 후 북한산에서부터 내려온 폭포를 보고 세검정 높은 곳에 가느다란 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간정료라는 허씨 모정이 있는 데.....’43)


37)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添齋), 표암(豹菴), 표옹(豹翁), 노죽(路竹)이다. 조선후기 문인, 화
가, 평론가. 당대 유명한 화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홍도, 신위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
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허필, 이수봉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 강희언과도 교유하였다.
38) 강세황, 「己巳遊洗劍亭與崔杜機任巵齋諸公共二十五人各賦」, 『표암유고(豹菴遺稿)』, 권1(卷一), 시(詩).
39) 광지(光之)는 강세황의 자이다.
40)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寰齋). 성호 이익의 조카. 남인 실학파의 중심이었던 가환(家煥)
의 아버지. 실학의 학맥에 따라 천문, 지리, 병농 등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탄만집』·『혜환시초(惠寰詩抄)』와 『혜
환잡저(惠寰雜著)』가 있다.
41)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詩歌).
42) 이광려(李匡呂),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 칠탄(七灘). 본관이 전주인데 덕천군 후손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천거
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림 3> 강세황, 허필, 산수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채, 22.5×5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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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무(李德懋, 1741-1793)44)는 시 ‘세검정병서(洗劍亭幷序)’, ‘세검정에 이어 소림암으로(洗劍亭仍訪小林菴)’를 읊었으며 ‘북한산유람기(記遊北漢)’에서 세검정과 소림암을 묘사했다.
   세검정;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입석(立石)이 있는데 ‘연융대(練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이 있고 3개의 석불이 앉아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만 보았고 감실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 한다.”45)

   또 이덕무 성사집 대중(成士執 大中)에게 보낸 글에서 탕춘대에서 있었던 행사에 관한 일화를 묘사한 바 있다.
   “아우는 어제 영숙(永叔) 재광(在光 朴齋家)과 함께 탕춘대에 가서 <무예도보(武藝圖譜)>를 익히고 관현 악기를 울리며 술을 들고서 헤어진 뒤에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24일에 뱃놀이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책을 바치기 전에 어찌 감히 자리를 뜰 수가 있겠습니다. 참석하지 못할 듯 합니다”46)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47)도 북한산을 유람했는데 창의문을 지나 밖으로 탕춘대, 북한산, 승가사 등지를 순행한 것으로 보인다.


43) 이광려(李匡呂), 『이참봉집(李參奉集)』, 권일(卷一), 시(詩).
44) 이덕무(李德懋)는 조선후기 실학자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이성호(李聖浩)의 아
들. 서얼 출신으로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검서관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뽑혀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다. 문자학과 서화에 두루 능통하였고 박학적 학풍으로 유명하다.
45) 이덕무(李德懋), 「기유북한(記遊北漢)」, 『청화관전서(靑花館全書)』 , 권3(卷之三)
46) 이덕무(李德懋), 「與成士執 大中」, 『아정유고(雅亭遺稿)』.(이광규 편, 『청화관전서(靑花館全書)』, 권16).
47)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
(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
(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신작(申綽, 1760~1828)·김매순(金邁淳, 1776~1840)·홍


86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그의 문집에는 북한산, 승가사, 세검정에 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9월 18일 중형을 모시고 윤이숙, 윤무구, 이휘조와 함께 북한산성을 유람하며’, ‘백운대에 올라가’, ‘행궁을 바라보며’,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까지 이르러 장난삼아 육언시를 짓다’, ‘세검정에 놀며’ 등의 시를 남겼다.48)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49)탕춘대 근처에 있던 석경루를 찾아 친구들과 지내고 그 일대를 묘사한 시를 여러 차례 지었다. ‘서원의 석경루 달밤에 폭포 감상에 화답하다’, ‘황산 동리와 더불어 석경루에서 자다’, ‘석경루에서 서옹의운에 차운하다’, ‘석경루에서 여러 제군과 운을 나누다’, ‘석경루 감회를 읊다’50)의 시에서 친구 서원(犀園) 김선(金璿)51)이 주인이었던 석경루에서 여러 사람들과 유오했던 경험들을 묘사했다. 또 그는 북한산을 다녀온 경험을 여러 시에서 묘사했는데 ‘승가사에서 동리와 함께 해붕화상을 만나다’, ‘부왕사’, ‘산영루’, ‘중흥사에서 황산시를 차운하다’ 등이 있다.52)

   박규수(朴珪壽, 1807-1876)53)는 그의 나이 14세 되는 해(1820년)에 탕춘대 주변에 위치한 석경루(石瓊樓) 잡절(雜絶) 20수를 읊었다. 석경루는 당시에 서원(犀園) 김선(金璿)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또 그는 시 ‘추창백석정(惆悵白石亭)......’의 주석에서 “석경루 북쪽은 수석이 매우 기이한데 그 위로 백석정 옛 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허씨 성의 도사가 머물던 곳인데 어느 때 도사인지 알 수 없는데 대개 도연명과 환공의 무리일 것이다.(石瓊樓北泉石甚奇上有白石亭舊地 世傳許眞人所居 眞人不知何代人 陶桓流也)”54)라고 백석정에 대해 추정하였다.

석주(洪奭周, 1774~1842)·홍길주(洪吉周, 1786~1841)·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제했다.


48) 정약용(丁若鏞), 『다산시전집(茶山詩全集)』, 권2(卷二), 시(詩).
49)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3여종에 이른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헌종 즉위 직후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문집으로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익환(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50) 김정희(金正喜), 『완당전집(阮堂全集)』, 권구(卷九), 시(詩)
51) 김선(金璿 1772-?) 조선시대 문신. 자는 사학(士鴻), 호는 서원(犀園). 연흥부원군의 후손, 재사(載士)의 아들, 1820년 도사(都事)로서 정시문과에서 병과에 급제, 승지에 이르고 문명이 높았다.
52) 김정희(金正喜), 『완당전집(阮堂全集)』, 권이(卷二), 시(詩)
53) 박규수(朴珪壽), 자는 환경(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거사.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의 손자. 장약용, 서유구 등 실학자들에게 사숙했으며 후에 개화사상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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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백석동천 유적(白石洞天 또는 白石亭)


1. 백석정의 연원
1) 선행 조사연구 - 참봉 이광려와 박규수의 시
   본 연구 이전 백석동천 유적의 연원에 관하여 보고된 것으로는 2011년 한울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것55)과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명승경관자료로 정리한 것56)이 있다. 그리고 2012년 11월 12일 국립문화재연구소 <백석동천 옛주인을 찾았다>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내 건물터와 정자터 등 별서유적이 한때 추사 김정희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확인했다’ 발표했다.

   두 연구소에서 정리한 자료에서 백석동천 유적-백석정 별서와 육각정자-의 연원과 관련하여 추사 김정희의 시문에 앞서 주목한 것은 영·정조대의 실학자, 참봉 이광려의 시문과 박규수의 시구 및 주석이다.
참봉 이광려(參奉 李匡呂 1720-1783)는 ‘비가 온 후 북한산에서부터 내려온 폭포를 보고 세검정 높은 곳에 가느다란 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간정료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허씨 모정이 있는데....(兩後自北漢沿溪看瀑將出洗劍亭見溪土又一源高澗細瀑其土有許氏茅亭扁曰看鼎寮不可以無詠)’57)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54) 박규수(朴珪壽), 「석경루잡절이십수(石瓊樓雜絶二十首)」, 『환재집(瓛齋集)』, 병서(竝序), 권지일(卷之一), 시(詩)
55) 한울문화재연구소, 2011,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종합정비계획』
56)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명승 경관자원 조사연구 및 DB구축』
57) 이광려, 『이참봉집(李參奉集)』, 권일(卷一), 시(詩)


88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세검정 높은 곳에 폭포가 있고 그 위에 간정료라는 정자가 있으며 이 정자의 주인은 허씨 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내용이다. 세검정 높은 곳 폭포 위쪽에 있는 간정료라는 정자는 그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현재 백석정 유적지라 알려진 곳에 있었던 육각정자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에서는 그 정자를 ‘모정(茅亭)’이라고 했는데 이는 정자의 지붕이 기와가 아니라 짚으로 엮어 이어 올린 것을 말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추사 김정희의 경우를 제외하면 ‘백석정’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언급한 것으로는 순조-고종대의 학자 박규수의 것이 있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알려진 박규수(朴珪壽, 1807-1876)는 14세 되 1820년 ‘추창백석정(惆悵白石亭)......’이라는 시를 읊었다.


惆悵白石亭 슬프다 백석정이여
眞人讀書處 진인께서 독서하던 곳
唯有一道溪 오직 하나의 도계가 있어
長何人間去 길이 인간 세계로 흘러가누나.


   그리고 이 시의 ‘백석정’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석경루 북쪽은 수석이 매우 기이한데 그 위로 백석정 옛 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허씨 성의 도사(‘許眞人’)가 머물던 곳인데 어느 때 도사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도연명과 환공의 무리일 것이다.(石瓊樓北泉石甚奇上有白石亭舊地 世傳許眞人所居 眞人不知何代人 陶桓流也)”58) 또 박규수는 다른 시에서도 백석정을 언급하면서 주석을 통해 “세상에 전하기를 허도사가 단약을 만들던 곳(白石亭, 相傳爲許道士煉丹處)”라고 설명하였다.

   박규수가 그의 시에서 백석정의 주인으로 언급했던 인사는 ‘허진인 또는 허도사’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와 주석에 따르면 박규수의 시대에는 백석정이라는 정자는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있었으며 그 주인에 대해서도 ‘허도사’로 전해지기만할 뿐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58) 박규수(朴珪壽), 「석경루잡절이십수(石瓊樓雜絶二十首)」, 『환재집(瓛齋集)』, 병서(竝序), 권지일(卷之一),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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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수보다 대략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광려간정료의 주인으로 언급했던 사람은 ‘허씨’인데 이는 박규수가 표현한 ‘허도사’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이광려가 위 시를 지었던 때에는 백석동천 유적지의 정자에 간정료라는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100여년 후 박규수가 시를 지었던 1820년에는 언제부터인가 ‘백석정’이라 불렀던 이 정자는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았으며 그 주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 없이 신비로운 존재로 전해지고 있었다. 허씨 성을 가진 백석정의 주인은 ‘진인’이나 ‘도사’ 혹은 ‘도연명과 환공의 무리’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둔하여 책을 벗 삼아 소일하는 도교적 삶을 영위했던 선비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백석정의 주인, 허필

   ‘도사’나 ‘진인’의 면모에 부합되는 삶을 영위하였고 참봉 이광려(1720-1783)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으며 백석정의 주인이고 허씨 성을 가졌던 인물로는 허필(許佖, 1709-1761)을 꼽을 수 있다.
허필은 1737년, 그의 나이 26세 때 ‘북한산 남쪽 백석 별업에서 정윤, 강세황과 함께 짓다(漢南白石別業與鄭運德潤及豹菴)59)라는 제목의 시를 지은 바 있다. 이 시를 통해 그는 그의 별서가 북한산 남쪽, 백악산 북록의 ‘백석’(동천)60)을 구체적으로 지명하며 자신의 별업(별장)이 여기에 있음을 명시했다.

漢南白石別業 與鄭運德潤及豹菴


落木西風白露團 잎진 나무 서풍 불어 이슬방울 둥근데
江山搖落莽愁端 강산은 쓸쓸하여 수심이 잔뜩 있네
人情每說今年熱 인정은 매번 금년의 더위를 말하지만,
天氣俄成九月寒 천기는 갑자기 구월 추위 짓노라.
磵水何心終夜去 간수는 무슨 밤에 밤새껏 흘러가나?
山花自發少人看 산꽃은 절로 피어 보는 사람이 적네


59) 조성권·박동욱 역,(허필(許佖) 지음), 2011년, 「漢南白石別業與鄭運德潤及豹菴, 同賦」, 『허필시전집(許佖詩全集)』, 소명.
60) 현재 백사실 계곡으로 세인에게 알려진 곳으로서 백석동천 유적지가 있다.


90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眉間一種烟霞色 눈썹 사이 일종의 연하 경색은 뵈니
十日同遊興未闌 십일 동안 같이 놀아도 흥은 다하지 않네

   또 허필백석 별업과 매우 가까이 있는 세검정 일대를 묘사한 시문들을 지은 바 있어 이 일대가 그가 즐겨찾던 유오지임을 시사했다. 그의 ‘세검정에서 봄놀이(洗劍春遊)’라는 시에 ‘왕성이 십리에 굽어있는데(王城十里闉)’라고 하여 도성이 백악산 북쪽 자락을 감아 돌아 감싼 모습을 표현했다. 이 시는 허필이 41세 되는 해(1749년) 3월 3일경에 지은 것인데 최성대(崔成大), 임정(任珽), 강세황 등 25명과 함께 시회(詩會)를 가지고 창의문 밖 탕춘대 주변을 두루 유람하면서 읊은 것이다.

   허필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문과 그림, 글씨에 몰두했으며 세 가지 모두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웠던 인물이다.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강세황과 특히 친하여 강세황의 그림에 화평을 쓰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허필이 글을 쓴 작품도 적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된, 백석정과 관련하여 ‘간정료’ ‘허씨 모정’로 설명했던 참봉 이광려는 간접적으로 허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려 ‘표암 강광지에 드리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암(표옹) 강세황과의 만남 및 연객 허필의 인물됨에 대해 묘사했다.


豹翁晩相識 표옹과는 늘그막에 알게 되었으나
烟翁竟無緣 연옹과는 끝내 연이 닿지 않았네


<그림 4> 허필, 산중서재, 견본에 엷은 색채, 소장처 미상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91


可憐共城郭 애닲다, 같은 성안에 살면서
傾盖兩華顚 인사를 하고 보니 우린 다 백발
多聞設許生 많은 이가 말하길 허생
人中眞散禪 사람 가운데 참 신선이라네...


   이광려는 위 시에서 세상 사람들이 진정 신선 같은 이였다고 전하는 연객(연옹) 허필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강세황과 이광려의 만남 허필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773년(영조 49년)으로 강세황이 윤 3월 영릉 참봉에 제수되어 서울 남산 회동(檜洞)으로 이사 온 이후로 추측된다.

   이광려‘비가 온 후 북한산에서부터 내려온 폭포를 보고 세검정 높은 곳에 가느다란 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간정료라는 편액이 있는 허씨 모정이 있는데....’라고 시를 쓴 것은 허필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알지 못했으므로 ‘허씨(許氏)’라고 표현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광려의 시와 허필의 시 내용을 연관지으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허필이 생존 시 백석동천 유적에 그의 ‘백석별서’가 있었으며 정자에는 ‘간정료’라는 편액이 걸려있었고 정자의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짚으로 엮어 올린 모정(茅亭)이었다. 그후 어느 때인가부터 이 정자‘백석정’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전해졌으며 박규수가 ‘추창백석정....’이라는 시를 지었던 1820년에는 그 터만 남아있고 그 연원이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광려가 묘사한 백석동천의 정자, 간정료는 그 지붕이 짚으로 된 모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정자 초석의 형식은 육각이다. 허필의 생존 시기 백석동천에 있는 정자의 형태가 육각이었음을 시사하는 시문이 있다. 박창원(朴昌元,1683-1753)61)은 탕춘대와 근처 육각정자를 묘사한 시 ‘과탕춘대등육면각(過湯春臺登六面閣)-탕춘대를 지나 육각의 정자에 오르다’을 지었다.


61) 박창원(朴昌元, 1683-1753), 조선후기 위항시인, 본관은 밀양, 자는 선장(善長), 호는 담옹(澹翁). 아문(衙門)에서 서리를 지냈는데 신임사화 때 그만두고 시사로 들어왔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을 섭렵하여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특히 <주역>에 해박하여 괘도인 <원부차자도(原赴次序圖)> <原赴方位圖>를 남겼으며 음율(音律), 지리(地理), 성역(星歷)에 통달하였다.


92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湯春朝飯訪招提 탕춘대에서 아침을 먹고 절(招提)를 찾았는데
無限詩情在杖藜 명아주 지팡이 짚고 걸으니 사정이 끝이 없네
入洞陰陰千樹立 마을에 들어서니 나무가 울창해 온통 덥고
登亭嘒嘒一蟬啼 정자에 오르니 소란한 매미들 우는 소리로다
宿雲散處看靑岫 (이하 생략)
亂石危邊聽碧溪
醉後淸風吹滿面
不知林外夕陽低


    이 시 앞부분에 ‘탕춘대를 지나 절을 보고 한참을 걸어 나무가 울창한 곳에서 (육각)정자에 올랐다’는 여정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의 지형과 지금까지 알려진 탕춘대와 백석동천 유적의 입지와 위치를 고려해보면 탕춘대를 지나 동쪽 산기슭의 물줄기(이 근처에 석경루가 있었다)를 따라 올라가면 ‘현통사’라는 절이 나오고 그 절을 지나 세칭 ‘백사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육각정자터가 나온다. 따라서 위의 시가 묘사하는 여정이 현재 남아있는 탕춘대와 육각정자-백석정 유적 사이의 여정과 거의 일치한다. 아울러 박창원(1683-1753)이 허필(1709-1761)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창원이 묘사한 육각정자 필의 정자-간정료 혹은 백석정-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탕춘대 근처 육각정자와 관련하여 현재 많은 문화재 관련 자료(집)에는 ‘세검정이 육각정자이며 영조 23년에 건립되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62) 이런 서술이 근거로 내세우는 있는 것은 김상채 <창암집>에 나오는 시와 <풍요속선>에 게재되어 있는 박창원의 시이다. 김상채(金尙彩)63) <창암집>에서 ‘세검정에 올라 차운하다’64)라는 시를 읊었는데 거기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창암집>에 실린 김상채의 시에는 ‘세검정이 육각정자이며 영조 23년에 건립되었다’는 내용은 없으며 ‘총융청을 탕춘대로 이전한 것이 영조 23년(정묘년)65)’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62)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울의 문화재>(2011), 문화재청의 <명승 경관자원 조사연구 및 DB 구축(5차)>(2012), 한국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세검정에 대해 이렇게 소개되어있다.
63) 김상채, 생몰년대 미상. 조선 영조 때의 여항시인. 자는 경숙(敬叔), 호는 창암(蒼巖).
64) 김상채(金尙彩), 「세검정봉차제공운(洗劍亭奉次諸公韻)」, 창암집(蒼巖集) 권2(卷之二),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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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검정이 육각정자라고 설명하는 문화재 관련 자료들이 참고로 하는 가장 주요한 문헌은 정조 21년(1797) 천수경(千壽慶, ?-1818)이 편집한 <풍요속선(風謠續選)>이다. 천수경은 조선 후기 여항시인들의 시를 모아 <풍요속선>을 편찬했는데 거기에 게재된 박창원의 시‘탕춘대육면각(過湯春臺登六面閣)’이라는 제목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시의 원래 제목 ‘과탕춘대등육면각(過湯春臺登六面閣)’에서 ‘과(過)’‘등(登)’이 빠진 채 잘못 기록됨으로써 <풍요속선>에는 ‘탕춘대에 있는 육각정자(過湯春臺登六面閣)’로 기재되었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이후 육각정자와 관련한 해석에서 “탕춘대에 있는 정자라면 세검정이니까 세검정이 육각정자”라고 단정한 것이다.

   박창원의 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탕춘대에 육각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탕춘대를 지나고 절을 지나서야 육각정자가 나온다. 육각정자와 관련하여 천수경 <풍요속선>에 실린 이 시를 근거로 활용할 때 박창원의 시 제목만 보고 시 내용을 자세히 살
피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결론인 셈이다. 또 원본인 박창 <담옹집((澹翁集)>을 찾아보지 않고 편찬할 때 오기(誤記)를 범한 천수경 <풍요속선>과 그것을 인용한 이차, 삼차 문헌들을 참고문헌으로 삼아 ‘세검정이 육각정자’라는 근거로 계속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해석이 생긴 것이다.


65) 「세검정(洗劒亭), 봉차제공운·정묘(奉次諸公韻·丁卯), 총융청이건우탕춘대후(摠廳移建于蕩春臺後), 무진신구정야(戊辰新構亭也)」.
66) 정선(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郞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白岳山)>,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자하동(紫霞洞)>,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필운대(弼雲臺)>, <경복궁(景福宮)>, <동소문(東小門)>, <세검정(洗劍亭)> 서울의 풍경을 많이 그렸으며 이외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통천문암도> 등 많은 산수화를 남겼다.




<그림 5> 겸재 정선(1676-1759), 세검정도, 1740년 후반, 비단에 수묵담채, 29.5×37cm, 개인소장


94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박창원, 허필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겸재 정선66)이 그린 <세검정도>(<그림 5>)에는 정자의 모습이 ‘丁(정)’ 구조로 묘사되어 있다. 이로써 박창원의 시에 등장하는 육각정자는 세검정이 아님이 확실하며 탕춘대 근처 육각정자는 백석동천 계곡에 있는 허필의 정자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조성된 대부분의 정자는 팔각정자이며 육각정자는 많지 않다. 조선시대 정자 형태에서 ‘육각’은, 팔각과 대비되어, ‘소박’, ‘겸손’, ‘절제’, ‘은둔’의 가치와 연관되며 대체로 세상과 떨어져 자연에 묻혀 소일하며 도교적 가치를 신봉하는 인물들이 즐겨 사용하던 정자 형식이다. 이런 가치를 구현하는 의미에서 육각정자의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짚을 엮고 이어 올렸는데 이런 정자를 ‘초정(草亭)’ 혹은 ‘모정(茅亭)’이라 칭했다. 모정인 육각정자 형식이 구현하는 가치는 박규수가 백석정 주인의 정체로 언급했던 ‘도사’, ‘진인’, ‘도연명과 환공의 무리’ 면모와 부합한다.

   위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8세기 백석동천 계곡에 있던 ‘모정’인 ‘육각정자’에는 ‘간정료’라는 편액이 있었으며 어느 때부터인가 ‘백석’으로 불렸다. 그 주인은 허씨 성을 가졌으며 ‘도사’ 혹은 ‘진인’으로 도교적 삶을 영위했다고 전해지고 박창원, 이광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 허필이다. 허필은 백석동천에 그의 별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별서가 육각정자인 간정료 혹은 백석정을 가르키는지, 아니면 육각정자 주변에 그의 별서 건물이 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육각정자와 그의 별서 건물을 통칭하여 ‘백석정’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허필의 사후 ‘백석정’으로 불리던 정자는 없어져 박규수가 시를 지었던 1820년에는 터만 남아 있었다.


3) 추사 김정희
   허필이나 이광려보다 후세 사람으로 백석정에 대해 직접 언급한 인물로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있다. 김정희는 ‘김황산 유근에 주다’에서 “...노친께서 엊그제 잠깐 북쪽 별서로 나가셔서 며칠 동안 서늘한 바람을 쐬실 생각이었는데 일기가 이와 같으니 산루는 도리어 너무 서늘할 염려가 있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67)라 썼다. 또 ‘금현과 더불어 함께 종 경릉의 운을 뽑다’ 시 10수에 나오는 “예전에 사들인 선인의 백석정(舊買仙人白石亭)”68)이라는 구절에 “나 의 북쪽 별서인데 백석정의 옛 터가 있다(謂余北墅, 有古白石亭舊址)”라고 주석 을 달아놓았다.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95


   김정희의 이 시구와 주석에 의거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터만 남은 백석정 부지를 사들여 새로 건립하였으며 이 별서의 주인이 되었다.” 고 보도자료를 발표하였다.69) 이 보도자료에서 추사가 백석정을 재건했다고 보는 또 다른 근거로 박규수가 지은 시가 인용되었다.


西風吹雨過。 서풍이 비를 몰아 스치더니
森肅衆峯秋。 삼연한 뭇봉우리가 가을빛일세
溼翠連山郭。 촉촉한 푸른 이내는 산곽을 이었고
飛泉響石樓    쏟아져내리는 폭포수가 석루를 울리네


   이 시의 구절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석루를 울리네’에 나오는 ‘석루’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백석정’이라고 해석하여 이 시를 지은 때 백석정이 재건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여기서 ‘석루’는 백석정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석경루’를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면 폭포가 정자보다 위쪽에 위치해있어야 하는데 백사실 계곡의 폭포는 백사실 별서터와 정자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석경루백석정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고 묘사한 박규수의 시문(石瓊樓北泉石甚奇。 上有白石亭舊址。世傳許眞人所居。 석경루 북쪽의 샘과 돌은 기이한데 그 위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네. 세간에는
허진인이 살았다고 전해 지네)을 고려하면 폭포 아래쪽에 있어 ‘폭포수가 쏟어져내리는 곳’은 백석정이 아니라 석경루이다(<지도 4> 참조). 

67) 김정희(金正喜), 『완당전집(阮堂全集)』, 권사(卷四), 서독(書牘).
68) 김정희(金正喜), 『완당전집(阮堂全集)』, 권구(卷九), 시(詩).
69)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11. 12., 『보도자료 “명승 제36호 백석동천 옛 주인을 찾았다”』.


96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위 시의 ‘석루’는 ‘백석정’이 아니라 ‘석경루’를 의미하며 이 시구를 근거로 백석정이 이 때 이미 재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지도 4> 석경루(石瓊樓) 위치도, <대경성정도> 부분, 1936년, 1:6,000, 서울역사박물관


   추사는 여러 시에서 서원 김선(金璿) 소유의 석경루에서 벗들과 모이고 유숙했다는 것을 묘사했다. “서원의 석경루 월야상폭운을 봉화하다(奉和 犀園石瓊樓 月夜賞瀑)”, “황산 동리와 더불어 석경루에 자다(與黃山東籬 宿石瓊樓)” 등 여러 편이 있다.70) 만약 추사가 백석정을 재건했다면 자신의 백석정을 놔두고 아래쪽 비교적 가까이 위치해 있는 김선의 석경루에서 친구들과 모이고 유숙했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추사는 자신의 시와 글에서 북서와 관련하여 백석정의 ‘옛 터’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 백석정을 재건했다거나 백석정에서 친구들과 모이거나 자신이 지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규수도 1820년에 읊었던 시<惆愴白石亭(슬프다 백석정이여.....)>에서 백석정의 옛 터가 있다고 하였을 뿐 백석정이 재건되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의 시 ‘예전에 사들인 선인의 백석정’의 구절로 미루어보아 추사가 아니라 그의 생부 김노경71)이 한때 백석정 터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에 있는 별서에 왕래했다고 볼 수 있다. 김노경이 1840년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추사 역시 같은 해 제주도로 유배된 후 집안이 파산에 이르면서 백석정 일대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70) 김정희, 『완당전집(阮堂全集)』, 권삼(卷三).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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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 이후 백석동천 유적의 주인
   추사 김정희 이후의 백석정에 대해 직접 언급하거나 묘사한 그림 또는 기록은 거의 없다.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백석실 별서의 최후 건물이 1830년대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철종 때 좌의정을 지냈던 심암 조두순 ‘백석정을 거처 옥호정에서 자며’라는 시에서 “백석정이 지어진 지 몇 년이나 되었다(白石亭成問幾年)”72)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이 두 기록은 재건된 백석정의 주인이나 재건된 년도에 대해 시사하는 자료로서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19일자“백악팔경”이라는 연재 특집의 한 사례로 석정의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의 백석정은 지붕이 기와로 된 육각정자임을 알 수 있는데 백석정이 언젠가 재건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 백석정의 연원이나 정자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이 외에 백석동천 유적에 관한 근대 시기의 자료로는 유적 소재지 행정구역에 관한 것이 있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편한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갑오개혁 때 이 일대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경리청계(經理廳契) 백석동(白石洞)로 처음으로 정식 주소지를 부여받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1936년에는 기도 은평면 부암리였다가 1940년 경성부 서대문출장소 부암정으로, 1943년 성부 서대문구역소 부암정으로 주소가 변천되어 왔다.


71) 김노경(金魯 敬, 1766 ~ 1840), 본관 경주. 자 가일(可一). 호 유당(酉堂). 서예가 정희(正喜)의 아버지. 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승지·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등을 두루 거쳐 이조·예조·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1822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0년에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1840년 사사(賜死)되었다. 사후 1858년(철종 9) 관직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아들 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 글씨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이 있다.
72) 조두순, 『심암유고(心庵遺稿)』, 권7, 기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11.12., 『보도자료 “명승 제34호 백석동천 옛 주
인을 찾았다”』 에서 재인용.


98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현재 남아있는, 근대 이후 백석동천 일대의 소유자와 관련된 유일한 단서는 ‘폐쇄된 부동산 등기부’ 기록이다. ‘폐쇄된 부동산 등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대정 6년(1917) 4월에 이 일대는 이인영(李寅榮)의 소유로 등록되었으며 대정 15년(1926년) 5월에는 장기홍(張基鴻)의 소유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후 조정애(趙貞愛)씨에게 넘어갔다. 1960년 압류되었다가 1963년에는 국가에 의해 공매가 공시되었고 1969년 12월 주식회사 락희화학(株式會社 樂喜化學)(‘럭키화학’)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락희(럭키)개발주식회사(樂喜開發株式會社)’로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그후 이 일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현재 소유주들에게 매각되었다.


2. 허필과 그의 친우들


   허필의 자는 여정(汝正)이고 호는 연객(烟客), 초선(草禪), 구도(舊濤)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살았던 문인이자 서화가이며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 학문과 시, 서, 화에 전념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고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근역서화징>을 집필한 오세창73)은 허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연객의 집안은 가난했으나 자태와 행동은 넉넉했고 성품이 평화스럽고 분명했으며 평이하면서도 꿋꿋했으니, 남과 더불어 이야기할 적에 말솜씨가 가히 남을 즐겁게 할 만하여 그와 잘 지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뜨락에는 오래된 녹나무(楠枏)가 있고 계단에는 아름다운 국화가 줄지어 있어서 그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세상 일을 묻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내가 밖으로 돌며 집안 일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내 김씨가 있기 때문이요, 안에서 바깥 세상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들 점(霑)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74)


73) 오세창은 1864년(고종원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中銘), 호는 위창(葦滄)이다. 한성주보 기자, 농, 상공부 참의(參議), 체신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개화 운동에 공헌하였으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서예가로서 전각(篆刻)도 잘하였으며, 서화의 감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 오경석(吳慶錫)이 수집한 우리나라 서화가의 사적을 조사하여 1928년 서화계의 중요한 문헌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를 간행하였다. <근역서화징>은 우리나라 역대의 서화가를 연구하는 데 가장 권위있는 문헌으로 평가된다.





<그림 6> 허필, <금강산도>, 종이 위에 수묵, 59.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99


   이용휴(李用休)는 ‘허자정금강산록 발문(跋許子正金剛錄)’에서 다음과 같이 에 관해 논하였다. “세상에서 도를 사모하고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할 적에는 으레 그대 가문의 정양을 든다. 그러나 정양은 벼슬을 하여 현령에 이르렀고 만년에야 비로소 소요하게 되었다. 또 단양과 서산의 승경이 풍악에 비교하여 어떻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시를 지었는지 않았는지 까다롭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다만 산으로 들어간 해가 대략 자정보다 뒤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자정(허필)의 이 유람을 과소평가 할 수 있겠는가.”75)


   허필의 친구, 이용휴에 대해서 정약용 <여유당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진사가 되고는 다시는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지 않았다. 온전히 문사(文詞)에만 열중하여 우리나라의 속담을 씻어내고 힘써 중국을 좇으니 그의 글을 기이하고 웅장하여 새롭고 교묘하여 요컨대 전겸익(錢謙益_錢虞山)76)원공도(袁石公)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자호하기를 혜환거사라 했으니 영조 말년에 명성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무릇 연마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문장을 배우려고 찾아왔다. 몸은 표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손으로 문원의 저울대를 잡은 것이 30여 년이었으니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것이다.”77)

   허필은 특히 강세황(姜世晃)과 매우 밀접한 사이였는데 강세황이연객(허필의 자호)이 나를 아는 것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났다”78)고 할 정도였다. 강세황이 그리고 허필이 평을 쓴 작품으로 <노송도(老松圖)>(<그림 7>)<문방구도(文房具圖)>(<그림 8>)가 있으며 강세황과 허필이 좌우로 나누어 그려 합한 선면산수도가 있다. 강세황이 그린 화첩에 허필이 화평을 써 넣은 것도 있다.


74) 오세창(吳世昌), 「허필(許佖)」,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75) 이용휴(李用休), 「발허자정금강록(跋許子正金剛錄)」, 『혜환(惠寰)이용휴산문전집』. 이용휴의 호는 혜환(惠寰)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이며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76) 명나라 시인.
77) 정약용,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묘지명(墓誌銘).
78) 「강빈(姜儐): “연옹지지아(烟翁之知我), 승아자지(勝我自知),.....”」.


100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그림 7> 강세황 그림, 허필 글, 노송도, <연객평화첩>,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채, 42.0×102.5cm, 국립중앙박물관


   허필은 강세황의 그림에 화평을 쓰는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시집에는 ‘강세황의 매화취조도에 쓰다’79), ‘강세황의 매화 그림에 쓰다’80) 등이 실려 있다. 강세황이 그리고 허필이 화평을 쓴 노송도(老松圖), 문방구도(文房具圖)81) 등이 연객평화첩 실려 있으며 ‘가을밤 죽헌에서 강세황과 함께 짓다’82)라는 시도 있다.


79) 조성권·박동욱 역(허필 지음), 2011년, 「제강표암세황매화취조도(題姜豹菴世晃梅花翠鳥圖)」, 『허필시전집(許佖詩全集)』, 소명.
80) 조성권·박동욱 역(허필 지음), 2011년, 「제강첨재세황(題姜添齋世晃) 광지화매(光之畵梅)」, 『허필시전집(許佖詩全集)』, 소명.
81) 강세황화(姜世晃畵) 허필서(許佖書), 「노송도(老松圖)」, 「문방구도(文房具圖)」, 『연객평화첩(烟客評畵帖)』.
82) 조성권·박동욱 역(허필 지음), 2011년, 「죽헌추야여광지동부(竹軒秋夜與光之同賦)」, 『허필시전집(許佖詩全集)』, 소명.




<그림 8> 강세황 그림, 허필 글, 문방구도, <연객평화첩>, 18세기, 25.2×102.8cm, 종이에 먹,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101


蒼翁偃蹇 쓰러질 듯 굽어 있는 늙은 소나무는
如避秦官 높은 벼슬을 피하려는 듯하고,
白雪空山 흰 눈 쌓인 고요한 산 속에서
默保歲寒 묵묵히 추위를 견디고 있구나.

   ㅡ 허필의 화제시(畵題詩)


秦淮春水泛桃花 진회에는 봄물에 떨어진 복숭아꽃 흐르고
簾幕輕寒燕子斜 장막에 스며든 가벼운 한기 제비가 날개 기울이네
一曲洞簫雙風下 퉁소 한 가락이 아래 울리고,
月明人醉莫愁家 밝은 달밤, 사람은 막주의 집에서 취하네.

   ㅡ 강세황의 관기(款記)


龍尾硯 牙營筆 廷珪遺製 李氏山房所儲 玉水滴赤銅甁 皆文房第一品也 雖南京項氏 未必皆有城陽
용꼬리 벼루, 상아로 만든 붓, 정규가 만든 묵, 그리고 이씨 산방에 있는 옥여적과 적동병은 모두 문방구 중의 제일품이다. 남경 항씨라 할 지라도 이것을 모두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양이 쓰다.


   허필남산의 남소문(南小門) 자락에 살았는데 젊은 시절 강세황의 집과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희성‘허필만시’에는 “종남산 아래 낡은 사립문(終南山下弊門扉)”이라는 구절이 있고 ‘송서가 허필에게 보여준 운자를 차운하여 지어서 양쪽에 주다’에는 “누가 가여워하랴 늙은 연객83)이(維憐老烟客), 길이 이 잠봉에 누워있는걸(長臥此蠶峯)”이라는 구절이 있다. 또 신광수의 시 ‘허필에게 부치다’에는 “종남산의 가장 깊은 동네에(終南最深洞), 이별길에 왕림하여 찾아온 그대였네(別路柱過君)” 등이 있는데 이 구절들로 추측할 수 있다.


   강세황은 ‘화천 이의숙에 대한 제문(祭花川李義叔文)’에서 허필의 됨됨이와 그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묘사했다. “1785년(을사) 6월 초열흘.....내가 본시 찬찬하지 못하여 사귀는 친구가 적고 다만 마음을 알아주고 뜻을 의탁하여 늙도록83) 변치 않은 사람이 겨우 두 세 사람뿐이었다. 


102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연객(허필의 호이다)같이 맑고 고고한 사람은 먼저 돌아간지 거의 이십 년이요, 자시(子時 任希聖, 1712-1783)처럼 단정하던 이도 무덤에 풀이 난지 벌써 두 해나 되었다.”84)하면서 절친을 잃은 서글픔을 토로했다.

   또 강세황‘허연객 금강도에 제하다(題許烟客金剛圖)’에서는 다음과 같이 허필의 성정을 떠올리며 친구를 그리워했다. “죽은 친구 허여정(허필)은 사람이 자상하고 부드러우면서 또한 강직하고 엄격한 곳이 있었다. 지금 그가 그린 <금강도>(<그림 6>)를 보니 필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데 골력(骨力)이 있으며 깎아 지르고 솟아나는 운치가 깊어 그 사람과 매우 닮았다. 유성현(柳誠懸, 柳公權, 778-865)이 ‘마음이 바르면 붓이 바르다고 말한 것이 어찌 글씨에만 국한될 말이겠는가. 백발이 되어 죽음이 멀지 않은 나이에 그림을 어루만지니 완연히 얼굴을 마주대하며 웃고 얘기하는 듯하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겠다.”85)

   임희성(任希聖, 1712-1783)86)은 ‘송서가 보여준 연객이 읊은 시에 차운하다’87)라는 시를 쓰고 ‘연객 허필 여정 만사 15수’88)를 읊었다. 또 다음과 같이 ‘허여정필에 대한 제문89)을 쓴 바 있다.
“유세차 무자년(1768) 여름 불상을 목욕시키는 하루 전 날 저녁에 친구인 서하 임희성은 녹나무를 채취해서 떡을 만들고 생선을 잘라서 회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객 허군 여정의 단천(湍阡)으로 대귀(大歸)하는 행차에 전송을 하게 되었으므로 술잔을 권하고 길게 울면서 그와 더불어 영결하노라......죽어도 썩지 않고 묻어도 묻혀지지 않으리라. 바람에 임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노니, 나는 지인(至人)에 부끄럽노라, 상량.”


84) 강세황(姜世晃), 「제화천이의숙문(祭花川李義叔文)」, 『표암유고(豹菴遺稿)』, 권6, 제문(祭文).
85) 강세황(姜世晃), 「제허연객금강도(題許烟客金剛圖)」, 『표암유고(豹菴遺稿)』, 권5, 제발(題跋).
86) 임희성(任希聖, 1712-1783).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시(子時). 호는 재간(在澗)·간옹(澗翁). 아버지는 응교 광(珖)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호군 인(隣)의 딸이다. 1741년(영조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효릉참봉(孝陵 參奉)을 거쳐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문사(文詞)보다는 실천에 힘썼다.
편저로는 『경서차록(經書箚錄)』·『국조상신열전(國朝相臣列傳)』과 『재간집』 3책이 있다.
87) 임희성, 「차송서시연객운, 양기(次松西示烟客韻, 兩寄)」, 『재간집(在澗集)』, 시(詩).
88) 임희성, 「연객허여정만십오수(烟客許汝正挽十五首)」, 『재간집(在澗集)』, 시(詩).
89) 임희성, 「제허여정필문(祭許汝正佖文)」, 『재간집(在澗集)』, 제문(祭文).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103


   이광려(李匡呂, 1720-1783)90)는 서대문 밖 월암동에 살고 있는데 북한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에 이르러 높은 암벽 사이로 떨어지는 실 같은 폭포를 보았으며 그 위에 ‘간정료(看鼎寮)’라 편액한 모정을 찾았다91). 그때 3수의 시를 썼으며 또 ‘표암 강광지에 드리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암(표옹) 강세황과의 만남 및 연객 허필의 인물됨에 대해 묘사했다.


豹翁晩相識 표옹과는 늘그막에 알게 되었으나
烟翁竟無緣 연옹과는 끝내 연이 닿지 않았네
可憐共城郭 애닲다, 같은 성안에 살면서
傾盖兩華顚 인사를 하고 보니 우린 다 백발
多聞設許生 많은 이가 말하길 허생
人中眞散禪 사람 가운데 참 신선이라네...


   이광려는 위 시에서 세상 사람들이 진정 신선 같은 이였다고 전하는 연객(연옹) 허필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강세황과 이광려의 만남 허필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773년(영조 49년)으로 강세황이 윤 3월 영릉 참봉에 제수되어 서울 남산 회동(檜洞)으로 이사온 이후로 추측된다. 이광려의 시 ‘표암댁 주인이 읊은 것을 차운하다’, ‘또 앞에 읊은 것을 이용하다’92)에 달린 주석에는 “표암의 새 집은 남산을 뒤로 두어 동산의 경치가 대단히 좋은데 이에 값을 더 치기는 커녕 도리어 싸게 샀다. 세상 물정이 이렇다. 그러나 만약 이렇지 않았더라면 옹의 차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표암에 드리다’, ‘강광지93)차헌’ 등의 시를 통해 표암과의 인연을 진정으로 묘사하곤 했다.


90) 이광려의 자는 성재, 호는 월암이다. 정종(定宗)의 후손 덕천군의 후예로 진수(眞洙)의 아들이며 문장이 뛰어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책을 통해 고구마에 대한 지식을 얻고 통신사 조엄(趙曮) 등이 고구마를 가지고 귀국하자 이를 재배하였으나 기술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동래 부사 강필이(姜必履, 1713-?)를 독려하고 자극하여 재배에 성공하게 했으며 강필이는 이를 바탕으로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했다.

91) 이광려, 「양후자북한연계간폭장출세검정견계토우일원고간세폭기토유허씨모정편왈간정료불가이무영(兩後自北漢沿溪看瀑將 出洗劍亭見溪土又一源高澗細瀑其土有許氏茅亭扁曰看鼎寮不可以無詠)」, 『이참봉집(李參奉集)』, 권일(卷一), 시(詩).
92) 이광려, 「증표암강광지(贈豹菴姜光之)」, 「표암댁차주인운(豹菴宅次主人韻)」, 「우용전운(又用前韻)」, 『이참봉집(李參奉集)』, 2권
(卷二), 시(詩).
93) 광지(光之)는 강세황의 자호이다.


104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3. 각자 바위, 월암(月巖)과 백석동천(白石洞天)


1) 월암 바위
   백석정 정자가 있는 계곡 맞은 편, 서편 언덕에는 ‘月巖’(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각자 ‘월암’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혹은 ‘월암 각자 바위 근처에 거처했던, 월암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 ‘월암’ 각석의 글씨를 쓴 사람을 이광려로 비정하는 학자들이 있으며 이광려의 호(月巖)가 이 월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백사실의 월암과 이광려가 살았던 월암동 각자는 서로 다르다. 이광려가 살았던 월암동은 인왕산 자락에 있고 백사실의 월암은 북악산(백악산) 자락에 있기 때문이다.”94) 이 조사연구에서는 이광려가 백석동천 유적지의 월암과는 관계 없는 인물이라는 결론 외에 월암과 연관된 인물에 대해 조사된 것이 없으며 차후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18세기 월암의 주인을 직접 언급한 것으로 신광수(申光洙, 1712-1775)95)의 시가 있다. 신광수는 ‘강성표 월암에 사는 것에 제하다(題姜聖標月巖幽居)’96)라는 1744년 작 시에서 월암에 강성표가 살았음을 언명했는데 여기서 강성표 강세동(姜世東, 1714-?)97)을 말한다.


背郭幽幽入草家 성을 등진 그윽한 초가에 드니
洞深車馬絶京華 마을 깊어 장안의 거마 소리 아득하다
晝家氣入山扉靜 한낮에 사립문은 구름에 잠겨 고요하고
秋樹根回石壁斜 가을나무 뿌리는 석벽을 돌아 비꼈어라
兄弟讀書聽夜雨 형제가 글 읽는 곳에 밤 빗소리 듣노니
故人持酒問黃花 친구는 술을 들어 국화꽃에 묻는다
蕭條海內知音少 소조한 나라 안에 시를 아는 이 적건만

蕙圃門中見士多 혜포 문중에는 재주 있는 선비가 많구려.


94)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10, 『명승 경관자원 조사연구 및 DB구축』, 121쪽.
95)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조선후기 영조 때의 문인.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오악산인(五嶽山人).
96) 신광수, 「제강성표월암유거(題姜聖標月巖幽居)」, 『석북시접(石北詩集)』, 권삼(卷三), 시(詩).
97) 강세동(姜世東, 1714-?) 호는 성표(聖表, 聖標) 1747년(영조 23년) 진사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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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을 등진 그윽한 초가, 마을 깊어 장안의 거마 소리 아득하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도성 밖 깊은 골짜기 ‘월암’이 있는 곳에 초가가 있으며 주인 강세동이 그곳에서 글 읽고 시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쓸쓸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인왕산 자락에 있는 ‘월암’ 외에 ‘월암(月巖)’이라 각자된 바위가 있는 곳은석정 터 맞은 편, 백석동천 계곡의 물길 서쪽 산자락인데 이 근처에 강세동이 살던 초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위 시에 등장하는 혜포(蕙圃) 강박(姜樸) 1724년(숙종 40년) 절일제(節日製)에 장원하고 이듬해 식련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영조 때 장례원 판결사에 있다가 사퇴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그의 호는 국포
(菊圃)라 알려졌으나 혜포라고도 썼다. 위 시를 쓴 신광수는 또 강세황에 대한 시 ‘강세황과 중범집에서 읊다’ ‘허자정98)에게 주다’99) 등의 시를 썼는데 이것으로 보아 강세황 및 허필과 밀접하게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2) ‘백석동천’ 각자 바위와 ‘백석(白石)’의 기원
   백석정 터가 있는(백사실) 계곡 위쪽에는 ‘白石洞天(백석동천)’이라는 각자 바위가 있다. <사진 2>의 각자도 월암의 경우처럼 이제까지 각자를 새긴 인물이나 ‘백석’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연구에 따르면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시에서 백석정 터를 매입하기 이전부터 각자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한다.


98) ‘자정’은 허필의 호이다.
99) 신광수, 「여강광지음중범댁(與姜光之吟仲範宅)」, 「우증여정(又贈汝正)」, 「기허자정(寄許子正)」, 『석북시집(石北詩集)』, 권이(卷二).



<사진 2> 각석 백석동천 각자


106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백석(白石)’이라는 명칭은 강기(姜夔, 1155-1220)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나라 번양(鄱陽)출신으로 무강(武康) 백석동천(白石洞天)에 우거했으므로 ‘백석도인(白石道人)’으로 불렸다. 자는 요장이며 백석도인은 그의 별칭이다. 강기는 다재다능하여 시사(詩詞) 이외에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음률에도 정통했다. 과거 시험에는 운이 없어 벼슬에는 나가지 못했으며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평생 가난한 생활을 했다. 강가의 사(詞)는 ‘성당의 이백과 두보와 같다’거나 ‘사인 중의 두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창작 태도가 매우 엄정하고 근명했다 한다. 그는 시 이론에도 매우 밝아 <백석도인시설(白石道人詩說)>을 썼으며 <백석
도인시집(白石道人詩集)>, <백석도인가곡(白石道人歌曲)>, <백석도인사집(白石道人詞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백석도인’ 강기에서 유래된 ‘백석’ 혹은 ‘백석동천’이 현재 백사실 계곡 백석동천 유적과 어떤 구체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백석도인’ 강기와 같은 사상과 삶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이 일대를 백석동천이라 칭하며 각자를 한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이 일대에서 허필이 은둔하여 살면서 시문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호가 연객(烟客)이었다는 점은 백석의 기원과 관련지어 볼 때 절묘하게 부합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연객(烟客)’은 구름에 몸을 의탁하고 활동하는 도인을 이르는 말
인데 도가적인 용어로 선인(禪人)을 연객이라 한다. 그런데 실제 연객이라는 호를 사용했던 허필은 스스로를 도가적인 인물이라고 규정해서가 아니라 담배를 엄청나게 피우는 골초이기에 연객이라 호를 삼았다고 한다.



Ⅴ. 결론

   백악산 북록-탕춘대 동편 산속 계곡에 백석동천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접해있고 서남쪽으로는 인왕산 북쪽 줄기와 잇닿아 있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적(史蹟)에 등장하는 북한산과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북쪽 백악산(북악산) 사이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와 탕춘대 그리고 세검정 등으로 대표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107


   북한산에 위치한 장의사, 승가굴, 문수굴, 인수사 등의 사찰들은 고려 왕실의 원당사찰 기능을 담당했다. 왕실의 왕래가 빈번하여 왕실 가족와 재상 등이 개성과 남경을 왕래할 수 있도록 간선도로가 조성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와 북한산의 사찰들은 이전에 수행했던 왕실 원당사찰의 기능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철되고 폐사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연산군 대에는 북한산으로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향림사, 장의사, 승가사 등의 사찰이 강제로 폐사되었다.

   그러나 사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일부 그 기능이나 위상이 바뀌었으며 국가의 사업을 위해 새로 건축되거나 중축된 사찰도 생기면서 존속했다. 창의문 밖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르는 성곽 북쪽 자락의 깊숙한 곳에는 안평대군 이용의 별서였던 무계정사(武溪精舍)의 유지(遺址)가 있다. 무계정사 유지의 입지를 보건대, 무계정사를 조성할 당시에는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닫지 않은 깊은 곳, 그윽하고 한적하여 상태였으므로 무릉도원(도계武溪)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 적합한 장소였다. 안평대군 사후에는 폐기되어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창의문 밖 북한산 일대는 연산군 시대에 통행이 금지되었고 장의사는 폐사었으며 탕춘대 행궁정자 등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중종 반정 이후 이 일대 조성된 정자와 시설들은 버려진 채 훼손되었고 이 지역은 일반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황량한 곳이 되었다. 왕실과 재추들만이 제한적으로 특별한 용무가 있을 때에만 창의문을 열고 드나들던 탕춘대 일대 지역은 연산군 이후 오랫동안 세인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가다가 숙종대에 와서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1711년(숙종 37년) 약 6개월 동안 역사(役事)를 진행하여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수축하고 총융청, 경리청, 평창 등을 설치하면서 도성과 탕춘대성, 산성은 항상 열려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북한산성 - 탕춘대성 - 도성의 체계가 확립되는 시기부터 이 지역은 특히 사대부들이 즐겨 찾는 유오(遊敖) 장소가 되었으며 시화를 매개로 한 사문들의 교유공간이었다. 17-18세기에 인왕산 자락을 근거 삼아 활동하던 위항인들의 시화활동이 도성 북문(창의문) 밖으로 확장되었는데 그들이 즐겨 찾던 곳은 삼계와 탕춘대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정치권 밖에서 살아가 남인, 소론, 실학파, 강화학파 계열의 문인들까지 자주 창의문을 나와 탕춘대, 북한산, 북한산성 근처의 사찰에 찾아가 머물면서 시를 읊고 문집을 남겼다.


108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18세기 인물 허필탕춘대 동편, 백악산(북악산) 북록 기슭 깊은 계곡(현 백석동천 유적지)에 백석별서를 짓고 시문과 그림으로 소일했다. 이 계곡 서쪽 높은 언덕에 있는 월암에는 강세동이 초가를 짓고 살았다. 허필과 관련한 시문을 남겼으며 그와 당대에 교유한 인물로는 강세황, 이용휴, 허필, 임희성 등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남인과 소북파 계열 사문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이 백석동천 유적지 일대에 별서를 짓고 왕래했다. 박창원, 이광려, 추사 김정희, 박규수, 김상채 등이 이 일대를 탐방하고 이곳에 관한 시문을 남겼다.

   18세기 백석동천 유적지 터 주변 일대는 무계정사, 세검정, 석경루, 탕춘대 주로 왕실과 관련한 유적들조지서, 연융대 등 특수한 국가 업무를 담당했던 관아 시설들이 있었다. ‘석경루’ 같은 별서가 있었지만 민가는 없었던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정치권에서 거리를 두고 시문과 학문에 힘썼던 남인, 소북파, 위항문학인, 실학파, 강화학파 등의 문사들이 이 일대를 유오지로 삼아 찾았으며 련된 시문을 남겼다. 이 일대 중 탕춘대, 삼계, 세검정은 사방이 트인 곳이라서 많은 인사들이 찾아와 시문 등으로 기록을 남겼던 곳임에 비해 근처, 허필의 와 월암이 있던 백석동천 유적지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계곡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북한산과 탕춘대 근처에 유오하러 온 이들에게도 거의 알려았고 그와 관련된 글도 드물었다. 북한산과 탕춘대(세검정)가 당대 유력 인사들에게도 알려진 대표적인 유오 장소라면 백석동천 계곡은 허필 주변 남인과 소론, 소북파 계열의, 정치권에서 거리를 두고 은거하며 살아가는 일부 인사들의 유오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석동천 유적지에 있던 허필의 별서로서 간정료라는 편액이 있던 정자는 각으로 된 모정이었으며 백석동천이라는 주변의 이름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백석정’이라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백석정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다.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이 한때 이 일대를 소유했으며 별서를 짓고 왕래한 바 있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19일자에 실린 백석정의 사진에 의하면, 백석정은 언젠가 기와지붕을 한 육각정자 형식으로 새로 조성되었다. ‘백석’이라는 명칭은 남송시대 ‘백석도인(白石道人)’ 강기에서 유래했으며 ‘백석동천’이라는 각자는 강기와 같은 사상과 삶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109


   백석동천 유적지는 해방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여러 사람들의 소유로 변경되었다가 현재에 이른다. 현재에는 정자의 초석과 주변 건물지의 유구만 남아있다.

   본 논문은, ‘백석정’의 연원이 18세기 허필이라는 인물에 닿아있으며 그와 우들은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삶을 영위한 인물들로서 이 일대를 찾아와 유오했다는 점을 밝혔다. 아울러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 역시 이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허필의 별서였던 모정 백석정박규수의 시를 통해 1820년에 이미 그 건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언제 어떤 인물에 의해 현재 유구와 같은 기와지붕의 육각정자로 조성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자료를 찾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초석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대략 19세기 초반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9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지붕 육각정자의 연원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다음의 과제로 남는다.


접수일: 2014. 1. 24 심사일: (1차)2014. 3. 6 (2차)2014. 10. 27.
게재확정일: 2014. 10. 31
주제어: 백석동천, 백석정, 간정료, 허필, 탕춘대, 북한산, 세검정, 삼계, 18세기 문인들의 유오지, 소북파,
남인


110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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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
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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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
112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ABSTRACT
A Research on the history of
Baek-suk-jeong(白石亭) in Baek-suk-dongcheon(
白石洞天)
Choi, Jong-Hyun
Tongui Urban Reasearch Institute

   This article studies on the history of the bower of Baeksukjeong(白石亭) in Baeksukdongcheon(白石洞天) which is located in the northern valley of mountain Baekak(白岳), the east side of Tangchoondae(蕩春臺) near the mountain of Bookhansan(北漢山). The history of the bower of Baeksukjeong(白石亭) has been not known recently and the only ruins of the bower remains. The area of Tangchoondae(蕩春臺), the northern area of the North Gate(Changiumoon彰義門) of capital city had not been open to common people except royal retainer and ministers until 18th century in Jo-sun(朝鮮) dynasty when the mountain fortress wall of Bookhansansung(北漢山城) was built by King Sook-jong(肅宗). Since the structure of the mountain fortress wall - middle castle - city castle was constructed, this area became the place for excursion and association of literary group and noblemen. In 18th century, some literary group retired from political affairs and left out of practical politics, as group of Mam-in(南人), So-ron(少論), Sil-hak(實學), school of Gang-wha(江華學派) and literary men from middle class(委巷文人),

enjoyed an outcoming to this area and get together to compose poems and some writings in Tangchoondae(蕩春臺), Samgye(三溪), Bookhansanseong(北漢山城) and temples in Bookhansan(北漢山).


서울학연구 LVII (2014. 11) 113


   Among them, Heo-pill(許佖) built some small cottage called by bower of Baeksukjeong(白石亭) or Ganjeongryo(看鼎寮) in Baeksukdongcheon(白石洞天) valley to live a lonely life of composing poems and drawings. There was a big rock in the opposite hill to the site of bower Baeksukjeong(白石亭), on which the letter ‘月巖(Wal-am)’ was carved very distinctly. Gang-sae-dong(姜世東) had his a small thatched cottage near this rock. Heo-pill(許佖) and his friends, Kang se-whang(姜世晃), Yi Yong- Hue(李用休) and Yim Hee-seong(任希聖) were scholars of Ma-min(南人) or so-book(小北) group who left out of practical politics to enjoy lonely life and made some excursion in this area. But the bower of Baeksukjeong(白石亭) was collapsed and later history of the site was not well known. The famous scholar in 18-19th century, Kim Jeong-hee(金正喜) whose father was known that he had some villa in the site of Baeksukjeong(白石亭). Tangchoondae(蕩春臺), Bookhansan(北漢山) and Saegumjeong(洗劍亭) was famous for excursion site of contemporary men of power influence but Baeksukdongcheon(白石洞天)

valley near those places was not well known because of the geographical condition and was just a place for specific group of retired literary men in 18th century.


Keywords: Baeksukdongcheon(白石洞天) Baeksukjeong(白石亭), Ganjeongryo(看鼎寮), Heo-pill(許佖), Tangchoondae(蕩春臺), Bookhansan(北漢山), Saegumjeong(洗劍亭), Samgye(三溪),excursion site of literary men in 18th century, so-book(小北) group, Mam-in(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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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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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성곽길여행(30) – <세검정(洗劍亭)>, 인조반정군이 칼을 씻은 곳| 산도 걷고 들도 걷고 (자유게시판) 
산악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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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0 | 2015.08.28. 10:41



나의 서울성곽길여행(30) – <세검정(洗劍亭)>, 인조반정군이 칼을 씻은 곳


   이제 일제시대를 벗어나 조선의 아름다웠던 계곡으로 가보자. <춘원헌>에서 다시 내려와 구기터널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도로 옆 홍제천 계곡이 보이고 그 계곡 입구에 <세검정(洗劍亭)>(신영동 168­6번지)이란 정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저 지명으로만 알려졌지만 그 지명의 유래는 바로 이 정자 때문이다.


   이곳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반군세력들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이며, 또 이곳에서 칼을 씻어 날을 세웠다고 하여 이름을 ‘세검정(洗劍亭)’으로 지은 것이다. 지금도 아름다운 계곡인데 조선시대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상상하며,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씻었다니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그것도 외적의 목을 벤 것이 아니라 같은 조선사람을 죽이려고, 또 인조반정이 가져온 역사적 후과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건 그렇고, 세검정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1748년 영조가 이를 새로 고치면서 세검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한편 이 일대는 계곡의 맑은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건너편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옛날에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시대까지도 이 근처에 종이공장이 있었는데 1941년 이 공장의 화재로 인하여 그만 세검정이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세검정은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조하여 1977년 서울시가 복원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겸재의 그림에서는 정자 주변에 담장있는데 그것은 복원이 안되었다. 당시 겸재는 <세검정도>를 세검정 준공기념으로 영조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겸재 정선은 당시 73세로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검정은 넓은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데 이 바위는 오랜 시간 흐르는 물에 씻겨서 그 평면이 무척 곱다. 그리하여 근처 여염집 아이들이 먹과 붓을 가져와 글씨 연습을 하여 먹물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한경지략》에 전해지고 있다. 또 왕의 실록편찬이 끝난 뒤 그 원고와 사초들을 씻어 저 넓은 바위에서 말린 후 재활용하는 ‘세초(洗草)’작업을 이곳에서 했다고 한다.

서울 도처에 여러 정자들이 있고, 나름의 자기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세검정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여기에 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더 있다. 이러한 정자이기에 비록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세검정 옆으로 흐르는 홍제천 계곡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들어가 보자.


   참고로 세검정이 위치한 곳의 지명은 종로구 신영동(新營洞)이다. 조선 영조 때 국방을 담당하는 5군영의 하나로 경기지역을 담당하는 군영인 총융청(摠戎聽)이 현 세검정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자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군영(新營)’이라 부르면서 신영동이란 이름이 생겼다.



▲(사진1)1977년 서울시에 의해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에 따라 복원된 <세검정>

▲(사진2)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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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골목길,홍지문,옥천암,세검정,백석동천후기2014,4,24| ▶.시(詩)의문학과국어-◀
소미림|조회 55|추천 0|2018.07.11. 18:28

 

 옥천암(玉泉庵)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의 한성의 북대문인 홍지문(弘智門) 부근에 있는 사찰로 1868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법사(淨觀法師)가 관음전(觀音殿)을 건립하여 천일기도를

올렸다.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대방 6칸과 요사채 3칸을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보타전(寶陀殿)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삼성각(三聖閣요사채가 있으며

높이 10m의 바위 남쪽 면에 새겨진 관음보살상이 유명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인 마애불은 오래 전부터 흰 칠을 하였고 지붕을 씌워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라 칭하였는데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마애불은 예로부터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와서 기도하고 영험을 얻었다고 하며

대한국 태조 고황제가 기도한 일이 있고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아들인 고조 광무제를 위해서 자주 찾아와 기도하였다고 한다.

보도각 백불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인데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부처가 백불이 된 것은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아들(고종)을 위해 치성을 드릴 때

흰 칠을 했다고 한다.

 

 

홍지문-유형문화재 제33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 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

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서울시 문화재 33호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홍제천은 우리 여성 선조들의 애환이 드러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묘, 병자호란(인조)때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왔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피해자인 그녀들은 오히려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을 뿐이다.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렸다.

공녀들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홍제천에서 몸을 씻지만, 결국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곳 주변에 눌러 앉아 살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문과 오간대수문, 탕춘대성의 옛날 모습이다.

 

 

 

 

 

 

 

 

 

'석파랑'이라는 한옥 음식점이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높은 언덕 위에 대원군별장이었던 '석파정' 별당 집 한 채가 놓여

있다. 이 별당은 서예가 손재형씨가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뒤뜰 바위 위에 옮겨다 놓은

것이란다. 대원군 별장 말고도 석파랑은 덕수궁, 운현궁, 선희궁, 칠궁 등에서 헐린 목재,

기와, 돌 등을 사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손재형 선생은 추사 이래의 명필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가이다.

손재형 선생이 타계한 후, 석파랑은 1989년 김주원 씨에 의해 매입돼

1994년부터 전통 한식당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만세문

1898년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세워졌던 것이다.

암,수 학 두마리가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만사형통과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석파랑 별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19세기 중엽 건립, 1958년 이전.

이 집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창의문(북소문) 밖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3호)의 별당이다.

1958년에 서예가 소천 손재형(1903~1981)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이 별당을 뒤뜰에 옮겨 지었다.

이 집은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 옆에 방이 있는 ㄱ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석파랑은 6·25전쟁 직후 석파정이 ‘코롬바 고아원(아마도 골롬바 어린이집)’으로

이용될 당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의 사랑채를 서예가 손재형 선생이

지금의 홍지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시 손 선생은 석파정 사랑채와 순종왕후 윤씨의 생가, 조선후기 기생 나합의 집 등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조선후기 건축물들을 옮겨와 새집을 지었고,

이후 1974년 석파랑 사랑채에 해당하는 부분이 '대원군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됐다.

 

 

흥선대원군이 앞쪽으로 돌출된 큰방을 사용하였고,

난초를 그릴 때에만 대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손님을 대접할 때는 건넌방을 사용했고.

지붕이 끝나는 측변에는 붉은 벽돌로 벽을 세웠고, 벽 중앙에 원형과 반원형의 창을

내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중국풍 건축의 특징이다.

 정면의 툇마루에 설치된 난간은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훙륭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고급자재를 사용해 지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이다..

 

 

 

 

 

 세검정-서울시 기념물 제4호.

종로구 신영동 168-6 에 있는 세검정터 (洗劍亭 터) 전경.

세검정은 조선(朝鮮) 제19대 숙종(肅宗) 때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築城)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 전하며, 그후 영조(英祖) 24년(1748)에 중수(重修)하였다.

T자형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1747년(영조 23)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의 정자는 1941년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거사 후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사천계곡(沙川溪谷)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세검정은 1944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초석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되어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 복원키로

하였으나 원위치에서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현 '洗劍亭'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鄭敾)의 <洗劍亭圖>에는

누(樓) 아래로 기둥이 높직하게 서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낮으막한 담을 돌렸고, 입구에는 일각문을 두었으며, 정자의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려져 있으나 현재 이 시설물은 없다.

 

 탕춘대 터(蕩春臺 터)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연산군 11년(1505)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

영조 27년(1751) 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둥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29년(1753)에 탕춘중성(蕩春中城)을 새로 쌓고, 30년(1754)에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鍊戎臺)'라 하고 홍상서(洪尙書)를 시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 바위에

'鍊戎臺'라고 새겼으나 세검정길 확장때 사라졌다. 탕춘대 터 에는 고급빌라 가 들어 서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탕춘대 는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한다.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총융청 터

1747년(영조23년).

조선의 5군영 중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담당하게 되어 부대를 장의사 터로 옮겨 온다.

그래서 이 지역의 지명인 신영동(新營洞)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집니다.

고종 21년(1884) 총융청이 폐지되어 빈 터만 남았다가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영(營)이라는 지명이 붙으면 군사시설과 관련이 있다. 육군이 머문 곳엔 병영(兵營),

수군이 머문 곳엔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서울에도 숭례문(崇禮門) 밖엔 남영(南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창의문(彰義門) 밖에는 신영(新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5군영(五軍營)의 하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집권한 서인정권은 광해군과는 달리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표방했다. 따라서 정권안정과 후금(後金:뒤의 淸나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군사력의 강화에 힘썼다.

인조대에 창설된 어영청·수어청과 총융청은 모두 그러한 취지에서 설치되었다.

 

특히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이 경기도의 방어선을 쉽게 뚫고

서울로 진격하여 국왕이 공주로 파천(播遷)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따라서 그해에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도성숙위를 담당할 어영군의 강화와 함께 수도

외곽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경기감사 이서(李曙)의 주관하에 경기군(京畿軍)을

정비했는데, 이때 총융청이 설치되었다.

 

담당임무는 수도 외곽 방비였는데, 1626년 수어청이 설치되자 경기도의 남부방위는

수어청에게 맡겨졌고 총융청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를 방어하게 되었다.

총융군은 정군(正軍)·속오군(束伍軍)·별대마군(別隊馬軍)이 통합된 것이었으며,

수효는 약 2만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속오군이 가장 많았으며, 별대마군은 이괄의 난 때

정부군이 크게 밀린 이유가 반란군의 마군(馬軍)이었다는 점을 반영하여 설치한

병종으로 매사(每司)의 중초(中哨)를 이루었다.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서울 莊義寺址 幢竿支柱)'-보물 제235호
장의사 터(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1 (신영동) -
현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장의사 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2009년 11월 법보신문은 당간지주 설명이 '그냥 거기에 그런 것이 있다' 라는 투의

문화재청 자료에 '엉터리' 임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기록돼 있는 이 절은 삼국통일과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충신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정착되면서 고려는 물론 조선의 임금들까지 직접 다녀가기도 했다.

특히 조선 태조비인 신의왕후의 기신제가 이곳에서 봉행된 이후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성종 때까지도 ‘법석(法席)’이 끊이질 않았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 돌연 “장의사를 없애고 그곳에 별궁을 짓고 화단을 쌓으라”는 명에 따라 하루아침에 폐사된 조선불교의 슬픈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절터다.

그리고 이곳 당간지주는 1000년 장의사의 영욕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화재다.

장의사 바로 아래, 술과 색과 놀음을 즐겼던 연산군의 탕춘대가 있었던 관계로 탑골공원의 원각사가 없어진 것과 같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질펀하게 같이 논 사대부, 유생들이 "전하, 중놈들 땜에 술맛 떨어집니다"고 했다면 끝나는 상황이다. 실제 조선때 유림들은 경치좋은 절을 유흥장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절경이라고 소문난 백사실 계곡이다.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동천은 신선이 내려와 놀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을 말한다고 한다.

동천(洞天) 즉 하늘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모퉁이 카페-

부암동은 2007년 방영된 MBC 미니시리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주요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드라마가 끝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오히려 늘고 있다.

산모퉁이는 드라마가 끝난 직후 20075월에 카페로 새롭게 단장해 오픈을 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얼마 전에는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인간의 조건에서 숙소를 부암동에 정하고 촬영을 하면서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방영 이후 드라마에서 최한성(이선균 분)의 집으로 등장했던 곳이

 산모퉁이라는 카페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북악산 산책로 일대에 카페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북악산 자락 아래 운치 있는 주변경관을

배경으로 일명 부암동 카페거리가 만들어졌다.

 

 

 

 



cafe.daum.net/j5871/Msjh/290   갈렌피겐 여시골문학






서울을 읊은 한시 - 자하문 밖 세검정| 집지기방 

박영우
| 조회 78 |추천 0 |
2017.09.11. 10:36



    


   한양 도성을 드나드는 문에는 4大門과 4小門이 있는데, 그 명칭이 너무 현학적이고 한문투라 백성들 사이에선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릅니다. 崇禮門을 남대문으로 興仁之門을 동대문으로 敦義門을 서대문으로 불렀는데, 북쪽에 있는 肅靖門은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된 문이라 북대문이라 불릴 여지가 없었습니다. 숙정문이 폐쇠된 채 제구실을 못하자 북소문(또는 북문)에 해당하는 창의문(彰義門)이 개방되어 도성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주된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彰義門 또한 다른 명칭이 있는데, '보라빛 놀이 내려앉은 문'이라는 시적인 이름의 자하문(紫霞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북문 밖 세검정 일대를 서울 토박이들은 흔히 '자하문밖'이라 부르는데, 그 일대의 풍광 또한 이름 못지 않게 수려하지요.

(蛇足 : 동대문 남녘에 세워진 光熙門(일명 남소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시구문(屍驅門)이라 불립니다. 이 문을 통해 죽은 시체들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음습한 명칭처럼 경관 또한 별로라서 이 일대를 읊은 시는 눈에 잘 띄지 않는군요.)

 

세검정(洗劍亭)

 

   자하문 밖의 대표적인 지형지물은 세검정(洗劍亭)일 것입니다.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주체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반정군들이 세검정에 모였다가 고개를 넘어 자하문(彰義門)을 부수고 대궐로 진입하여 반정에 성공한 건 사실입니다.

 

세검정에서 칼을 씻은 건 잠시겠지만 실록의 초본(草本)을 씻는 일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계가 놀라는 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초벌이 완성되면 사초(史草)의 비밀을 지키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씻어(洗草)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그 종이는 재생하기 위해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세초연(洗草宴) / 조문명(趙文命, 조선 후기)


寸管那能盡畵天(촌관나능진화천)

한치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於休盛德百王前(어휴성덕백왕전)

아아! (숙종의)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芸役(십년시흘편예역)

십년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하일초개세초연)

한가한 날 마침내 사초 씻는 잔치가 열렸네.


晩後溪炊當美饌 (만후계취당미선)

해질녘 시냇가에서 밥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우후산수승명현)

비온 뒤 물소리는 거문고 가락보다 낫구나.
舊時簪筆今如夢(구시잠필금여몽)

지난날 붓 들었던 일이 이제는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수열성서갱현연)

완성된 책을 손에 쥐어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베풀었는데. 위 시는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 조문명(趙文命,1680∼1732)이 '숙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연에 참석하여 읊은 것입니다. 그는 병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큰 정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검정에서 노닐며(遊​洗劍亭) /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層城複道入依微(층성복도입의미) 

층층 성곽 비탈길 그윽한 곳에 찾아드니,

盡日溪亭俗物稀(진일계정속물희) 

진종일 시냇가 정자엔 속물들 드물구나.

石翠淋漓千樹濕(석취림리천수습) 

푸른 돌 이끼는 흠뻑 젖고 모든 나무들도 습한데 ,

水聲撩亂數峯飛(수성요란수봉비) 

물소리는 요란하고 수많은 봉우리 날아갈 듯 하구나.

 

陰陰澗壑閒維馬(음음간학한유마) 

그늘진 산골물 계곡에 한가로이 말 매어두고,

拍拍簾櫳好挂衣(박박렴롱호괘의) 

맞붙은 나뭇가지는 옷 걸기에 좋구나.

但可嗒然成久坐(단가탑연성구좌) 

다만 절경에 정신 뺏겨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不敎詩就便言歸(불교시취편언귀) 

시 한수 짓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자 재촉하네.

 

 

자하문(紫霞門)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류,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홍제원에서 김류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세검정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정자가 있는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 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었고, 부근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의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丁자형의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다.


   세검정에는 유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저 세검정연산군 6~11년(1500~1505)경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 물가에나 물 위에 지은 정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이야기는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주도세력의 일원이었던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 영조 23년(1747)에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경기 북부와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세검정인 것이다.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에는 육각정자로 영조 23년에 지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어느 게 진짜 세검정의 유래인지는 알 수 없다.


   세검정은 책들에도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세검정은 열조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사초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했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경지략’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됐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을 거슬러 올라 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했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 ‘유세검정(遊洗劍亭)’이 있다.


   세검정의 옛 모습은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림을 보면 기둥이 높직하게 서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 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을 돌렸다. 입구에는 일각문을 뒀다. 정자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또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금방이라도 ‘콸콸’하고 소리 내는 듯 보인다. 이렇듯, 세검정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검정은 그림 속의 모습과 달랐다. 소실됐던 것을 다시 복원했기 때문이다. 1941년 세검정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세검정도 불타고 주춧돌 하나만 남게 됐고, 이를 1977년 5월에 복원했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했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돼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해 복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원위치에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돼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했다. 복원된 정자는 서남향 했는데,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가운데 칸이 넓고 양협칸이 좁아 정면은 3칸, 측면 1칸에, 개천 쪽 서남쪽으로 가운데 1칸을 내밀어 정(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암반 위에 높이가 다른 10개의 4각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건물 북쪽 협간에는 밖으로 계단을 설치해 도로에서 오르내리도록 했다. 기둥 사이에는 문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했다. 또 겹처마, 팔각지붕으로 돼 있다.

 

   1396년(태조 5)에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한 뒤 창의문(彰義門)이라는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도성의 북쪽 교외 세검정(洗劍亭)과 북한산으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에는 능양군(陵陽君,16대 인조)을 비롯한 반군들이 이 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인조반정 당시에도 2층 목조로 되어있는 문루는 소실되어 없었지만 아래의 석축으로 된 부분은 문으로서 구실을 하고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버리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세초(洗草)하여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는 차원에서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 아래 상세 안내 참고)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재생되었다.

 

세초연(洗草宴) / 조문명(趙文命, 조선 후기)


寸管那能盡畵天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於休盛德百王前 아아!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芸役 십년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 한가한 날에 사초 씻는 잔치를 막 열었네.
晩後溪炊當美饌 저녁에 시내에서 밥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 비온 뒤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보다 낫네.
舊時簪筆今如夢 지난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 직접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조문명, 학암집 권2 <세초연(洗草筵)>-

 

   세초연(洗草宴)은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 사초(史草)나 초고(草稿) 등을 물에 씻어 지우며 여는 잔치를 말한다.
세초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던 세검정(洗劍亭) 냇가에서 행해졌는데, 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베풀었다. 위 시는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인 조문명(趙文命,1680∼1732)이 '숙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연에 참석하여 노래한 한시이다 

 

 

세검정에서 노닐며(遊​洗劍亭) / 정약용(丁若鏞)

 

層城複道入依微 층층 성곽 비탈길 그윽한 곳 찾아드니

盡日溪亭俗物稀 시내와 정자뿐 세속물정 볼 수 없네

石翠淋漓千樹濕 푸른 아지랑이 속에 수림은 젖어 있고

水聲撩亂數峯飛 물소리 요란한데 봉우리 날아갈 듯

陰陰澗壑閒維馬 그늘진 계곡에 한가로이 말 매어두고

拍拍簾櫳好挂衣 맞붙은 나뭇가지는 옷 걸기에 좋구나

但可嗒然成久坐 절경에 정신 뺏겨 우두커니 앉았노니

不敎詩就便言歸 시도 이루지 못했는데 돌아가자 재촉하네



                                                      서울을 읊은 한시 - 자하문 밖 세검정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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