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5. 12:04ㆍ산 이야기
樂民(장달수) 조회 57 추천 0 2018.03.25. 00:59
이 상 균
(강원도청 학예연구사)
머리말
Ⅰ. 僧侶와의 교유
Ⅱ. 學脈的門人간의 교유
Ⅲ. 其他知人과의 교유
맺음말
● 투고일: 2012. 5. 8. ● 심사일: 2012. 5. 11. ● 게재확정일: 2012. 5. 25.
사학연구 제106호(20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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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본 논문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유람을 통해 교유했던 부류를 僧侶․ 門人․其他 知人 등 크게 3부류로 분류하여 그 교유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사대부들이 주로 찾던 유람처는 산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만난 方外人은 승려였다. 유람 중 승려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고, 유람기록에도 많은 승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불교의식을 폄하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유람 중 승려를 만나 교유하기 좋아하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유람 중 作詩를 잘하는 승려를 만나면 서로 酬唱하며 교유하였다. 학식 있는 승려와는 儒․彿道에 대해 담론하며 학문적 견해를 나누기도 했다. 산중에서 면식 있는 승려를 만나면 매우 기뻐하며 소회를 나누었다. 유람은 괴리감을 가지기 쉬웠던 儒․佛者들 간의 소통과 교유를 이끌어 내는 문화행위 중 하나였다.
사대부들은 유람을 기회로 같은 學脈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문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는 淸凉山과 智異山유람자들의 교유관계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조선시대 청량산과 지리산은 嶺南士林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었다. 청량산은 退溪 李滉이, 지리산은 南冥 曺植이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이들 학맥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남사림들이 先學의 자취를 찾아 학문을 기리기 위해 자주 찾아 유람하고, 지역의 선후배 門徒들을 만나 교유했다.
이 밖에 金剛山과 開城 등의 장소도 사대부들이 유람을 위해 자주 찾던 곳이었다. 교유양상이 사승관계에 얽힌 학맥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지만, 이곳의 유람을 통해 많은 지인과 교유관계를 맺고 있다. 유람지에서 주로 벗들을 찾아보고, 유람의 큰 조력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방관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또한 지인이나 족친들과 유람을 계획하여 함께 동행하면서 회포를 풀며 親交를 더욱 돈독히 다졌다.
朝鮮時代 遊覽을 통한 士大夫의 交遊樣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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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교통편이 편리하지 않았고, 통신수단이 부족하였다. 지인이나 族親들과의 교유는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람은 평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대면하여 소통하고, 교유하는 방편 중의 하나였다.
주제어 : 士大夫, 遊覽, 僧侶, 門人, 知人, 交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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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유람풍조가 유행했다. 주로 金剛山․ 妙香山․ 지리산․ 청량산 등 당대 명산을 중심으로 유람이 이루어졌다. 유람풍조는 임진왜란 이후 확산되어 조선후기의 일반적 유행이 되었다.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기반이 있는 사대부1)들이 유람을 즐겨했다.
조선시대에 확산된 유람풍조는 수많은 유람기록을 양산하였다. 유람기록은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어 현재 약 560여 편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유람기록에는 여정, 유람자의 감회와 소회, 시대상, 생활상 등이 다양하게 담겨져 있다. 그동안 이 작품들은 대체로 작자의 성향, 문학의식 등에 대한 文學史중심의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1) 본 글에서 사용한 ‘사대부’는 조선시대 전․현직 文․武양반관료, 士族, 士林, 山林, 선비 등 지배층을 총괄하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2) 조선중기의 유산기 문학(1997, 이혜순 외, 집문당, 15쪽)에서 밝히고 있는 숫자이다.
3) 노혜영, 2002,「이재난고의 여행기 분석-서행일기를 중심으로」고문서연구 20;장현아, 2004,「유산기로 본 조선시대 승려와 사찰」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상배, 2004,「조선전기 외국사신 접대와 明使의 遊觀연구」국사관논총 104; 정연식, 2006,「조선시대의 여행 조건-黃胤錫의「西行日曆」과「赴直紀行」을 중심으로」인문논총 15,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이경순, 2008,「1688년 정시한의 팔공산 유람」역사와 경계 69; 이상균, 2009,「관동지역 기행사경도의 사료적 가치 고찰」강원문화사연구 14; 김병인, 2010,「고려시대 行旅와 遊覽의 소통공간으로서 사원」역사와 경계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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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구들은 유람의 연구시각과 분야를 넓히게 해준 매우 중요한 성과이다.
당시는 교통편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람은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기회였다. 이 같은 유람양상은 현재의 觀光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4) 정치영, 2003,「금강산 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행 관행」문화역사지리 제15권 제3호; 정치영, 2005,「유산기로 본 조선시대 사대부의 청량산 여행」한국역사지리학회지 제11권 제1호; 정치영, 2008,「日記를 이용한 조선 중기 양반관료의 여행 연구」역사민속학 26; 정치영, 2009,「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여행 연구」대한지리학회지 제44권 제3호; 김선희, 2009,「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삼각산 여행의 시공간적 특성」문화역사지리 제21권 제2호.
5) 이상균, 2011(a),「조선시대 사대부의 유람 양상」정신문화연구 제34권 제4호;
이상균, 2011(b),「조선전기 외국 사신들의 금강산 유람과 그에 따른 폐해 고찰」사학연구 101; 이상균, 2011(c),「조선시대 관동유람의 유행 배경」인문과학연
구 31,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이상균, 2012(a),「조선시대 사대부 유람의
관행 연구」역사민속학 38; 이상균, 2012(b),「조선전기 국왕의 출유성 행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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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까지 유람에서 행해졌던 인물들 간의 소통과 교유관계를 살핀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람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교유하는 것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었으므로, 시대적 변천과 특징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유람현상에 천착하여 조선시대 유람을 통한 사대부의 교유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유람기록이 방대하여 이를 모두 참고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시기별로 교유관계가 많이 나타나는 유람기록을 선별하여 공통적이면서도 특징적인 교유부류를 파악하여 본 결과 僧侶․ 門人․ 其他 知人6)으로 大分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3부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대부의 교유양상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6) 知人의 경우 의미상 승려와 문인까지 포괄할 수 있겠으나, 본 글에서는 승려와 같은 특정 신분계층, 문인과 같이 사승관계로 특징지어 나타나는 교유부류 외에 族親․ 親友․ 地方官․ 직장동료 등 일반적으로 상시 나타나는 교유부류를 기타 지인으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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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연구는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유람이라고 하는 문화행위에 내포된 다양한 목적의식과 현상을 밝히고, 유람연구의 폭을 넓히는데 미약하게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Ⅰ. 僧侶와의 교유
사대부들이 유람 중에 가장 많이 만나는 方外人은 승려였다. 사대부들이 주로 유람한 금강산․지리산․청량산 등에는 古來로부터 사찰들이 건립․운영되고 있었다. 사대부들의 산중 유람을 도운 것은 이들 사찰의 승려들이었다.7) 그러므로 사대부들의 유람기록에는 산에서 만난 승려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7) 이상균, 2012, 앞의 논문, 참조.
8) 南孝溫, 秋江集 권5, 記「遊金剛山記」. 이하 별도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문집은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에서 제공하는 원문이미지 및 텍스트를 활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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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을 통해 승려들과 교유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 高麗의 문인관료들은 산중의 사찰을 찾아 공부하고, 유람하며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고려중기 이후 居士佛敎가 유행함에 따라 문인관료와 유학자들이 입산하여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고승들과 교유하는 것이 잦았다.10)
조선시대의 사대부들도 산중의 암자에 은거하며 수양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황도 청량산의 암자에서 들어가 공부에 몰두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암자에서 공부하였다.11) 유학을 학문의 기저로 삼았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불교에 회의적인 것은 공통된 통념이었으나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유람 중 자신들을 안내해 주는 승려나 숙박하는 사찰의 주지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학문적 소양이 있는 승려들과는 교분을 쌓기도 했다. 특히 徐居正은 산을 유람하며 승려와 교유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四佳集에서 자신의 이러한 성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산을 유람하기 시작한 이래로 날마다 승려들과 함께 거처하며 때때로 등불을 돋우고 차를 달여 마시면서 경전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하곤 하였는데, 자못 관심을 둘 만한 사람이 있었다. 開慶寺에서는 智牛씨를 만났고, 興德寺에서는 信連․德行․楚牛․伊悅氏를 만났다. 하루는 절의 누대에 있는데, 연꽃이 만개하고 밝은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이에 몇몇 승려들을 오라고 하여 聯句를 짓는데, 그 자리에 온 한 스님이 있었으니, 그의 모습이 여위고 정신이 맑아 진실로 내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그 스님이 이어서 對句를 짓는데 입에서 나오는 시구마다 놀랄 만하였으므로 나는 스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12)
10) 김병인, 2010, 앞의 논문, 16~17쪽.
서거정은 유학의 虛와 불교의 虛가 다르다는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인물이었다. 유학의 허는 단순한 허가 아니라 이치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와 대비된다고 주장했다.13) 그러나 서거정은 산을 유람할 때 승려들과 거처하며 경전을 논하고 酬唱을 즐기며 교유하였던 것이다.
簡易 崔岦의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자신이 평소 명산을 유람하면서 승려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심정을 알 수 있다.
명산의 승려 보는 것 평소에 좋아하였는데 平生喜見名山僧
난리 뒤 五陵에 있는 승려가 어찌나 많은지 亂後僧多住五陵
언제나 태평세월을 만나 기력을 되찾아 安得太平身再健
명산을 쫒아 승려와 함께 등반해 볼거나 名山隨處共僧登14)
燕巖 朴趾源도 유람을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람하며 특이한 승려를 만나 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다. 산수에 登臨할 적마다 그러한 승려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한 적이 많았다고 술회하였다.15)
사대부들은 유람 중 경학과 시에 식견이 있는 승려들을 만나면 이들과 교유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대부들이 유람 중 승려와 교유하는 매개 중의 하나는 시였다. 조선시대 일부 승려들 사이에서는 시가 매우 숭상되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詩僧들이 출현하여 사대부들과 격의 없이 수창하기도 했다.16) 승려들은 산중에 유람 오는 사대부들에게 대부분 시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대부들은 유람에 도움을 준 승려의 후의에 보답하는 것으로 시를 써주곤 하였다. 이러한 승려들의 求詩 행위는 대부분의 유람기록에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12) 徐居正, 四佳集 권6, 序「贈煕上人序」.
13) 徐居正, 위의 문집, 권1,「虛谷記」.
14) 崔岦, 簡易集 권8, 還朝錄「惠允卷韻」.
15) 朴趾源, 燕巖集 권7, 別集鍾北小選序「楓嶽堂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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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이 사대부에게 구한 시를 軸으로 만들어 지니는 것은 당시의 古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의 문신인 聽天堂 沈守慶의 기록에서 당시의 이러한 풍조를 찾아볼 수 있다.
“승려가 高官과 儒生들에게 詩를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詩軸이라고 한다. 이것은 승려들의 古風이다. 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주었는데, 여성군 頤菴[宋寅]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17)
사대부들은 유람 중 승려들의 求詩에 부응하여 시를 써준 것이다.
1592년 梧峯 申之悌가 청량산 유람 시 蓮臺寺에 묵을 때 승려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승려들이 다투어 시축을 보여주었다. 시축에 이황의 시를 비롯하여 자신의 친구인 金垓의 시와 여러 儒者들의 시가 있었다. 이들이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승려들에게 써준 것이다.18)
苟全 金中淸도 스승 月川 趙穆과 함께 1601년 청량산을 유람할 때, 大乘庵의 승려 祖一이 師僧 惠默의 시축을 가지고 와서 조목에게 보였는데, 조목 자신이 쓴 절구 두편이 있었다. 일전에 조목이 유람하며 혜묵에게 써준 시를 혜묵의 제자 승려를 통해 청량산 유람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이어 조일이 종이를 올려 시를 청하자 조목이 한 수를 쓰고 함께 유람 간 琴蘭秀와 김중청이
각각 한 수씩 써 주었다.19) 浮査 成汝信이 1616년 지리산 유람 중에 만난 승려 寶心의 시축에는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지리산 일대 벼슬아치들의 시가 많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20)
16) 김상일, 2002,「조선중기 士大夫의 승려와의 交遊詩연구」한국어문학연구 39, 222쪽.
17) 大東野乘, 沈守慶撰「遣閑雜錄」.
18) 申之悌, 梧峯集 권6, 記「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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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詩를 제법 잘하는 승려들은 사대부 유람객을 만나 서로 酬唱하면서 교유했다.
於于堂 柳夢寅은 1611년 지리산 유람 중에 義神寺 주지 玉井과 太乘菴의 覺性을 만났다. 이 두 승려는 당시 시로 명성이 있는 승려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각성은 임진왜란 때 僧軍을 이끌었으며, 광해군이 덕에 감복하여 判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樂齋 申翊聖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사귄 인물이다. 유몽인은 이들과 서로 수창하며 친해졌다.
또한 이 승려들과 함께 紅流洞과 妓潭에 나아가 비파로 ‘靈山會上’과 ‘步虛詞’를 연주하고 梵唄에 맞추어 춤을 추며 어울렸다. 유몽인은 이들과 교유하며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싶었으나 작별하게 되자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21)
三淵 金昌翕은 1708년 영남지방을 유람하던 중 지리산 上佛菴에서 海機라는 주지승을 만났다. 당시 해기는 영남지역의 大首座였다. 나이가 여든 살에 가까워 기력이 쇠잔했지만 수창하는 것을 시험해 보니 매우 꿋꿋하였다고 한다. 김창흡은 해기의 작시능력이 우수함을 보고, 번뇌 망상에 대해서도 담론하였다. 헤어질 때 해기에게 절구 한수를 지어 선물로 주었다.22) 그리고 조선후기의 승려 釋應允은 1803년 지리산 實相寺에서 유람객 玉川郡守와 咸陽郡守를 만나 수창하며 교유하였다. 석응윤은 두 군수에게 함께 담론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고, 밤늦게까지 시를 聯句로 주고받았다. 이후 며칠 동안 지리산을 함께 유람하면서 수창하였다. 석응윤은 이때의 일을「頭流山會話記」로 남기고, 당시 수창한 시들을 모두 수록했다.23)
19) 金中淸, 苟全集 권5, 記「遊淸凉山記」.
20) 成汝信, 浮査集 권5, 記「方丈山仙遊日記」.
21) 柳夢寅, 於于集後集 권6, 雜識「遊頭流山錄」.
22)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8, 日記「嶺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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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은 서로 알고 지냈던 승려였는데, 평소 소식을 모르다가 산중 유람시 우연히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외딴 산중에서 면식이 있는 승려를 만나는 것은 사대부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再思堂 이원(李黿 : 큰 자라 원)은 1493년 금강산 유람시 평소 한양에서 알고 지내던 正陽寺 주지 祖仁을 만나 반갑게 해후하다.24) 東州 成悌元은 1531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表訓寺에서 승 仁玉과 信連을 만났다. 이들은 성제원이 일년 전 五申山에서 만나 알고 지낸 사이였다. 표훈사에서 다시 만나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였다고 한다. 절에 전염병이 돌아 들어가지 못하고 두 승려를 불러 이야기를 나눈 후 인옥을 데리고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25)
신지제는 청량산을 유람하던 중 蓮臺寺에서 20여 년 전 일면식이 있었던 승려 戒聖을 만나기도 했다. 계성은 이황의 제자인 안동 佳野의 進士 金彦璣의 문하에 왕래하였다. 그때 신지제가 김언기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어 서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연대사에서 서로 만났을 때 신지제는 계성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계성이 먼저 기억하고 알아보았다. 신지제는 산속에서 계성을 만난 것을 운수로 생각하였다.26) 陽谷 吳斗寅은 1651년 지리산 能仁寺에서 자신의 선친과 季父의 유람을 수행한 승 性天을 만나게 되었다. 능인사에서 점심을 먹던 승려 성천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 성천이 여러 군자들이 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를 줄줄 외우며 20년전 오두인의 선친과 5년 전 계부를 수행했던 얘기를 꺼낸 것이다. 오두인은 성천과의 만남을 특별한 인연으로 생각했고, 성천도 놀라서 감탄했다. 서로 옛일에 대한 감회를 저녁까지 나누며 친교를 쌓았다.27)
23) 釋應允, 鏡巖集下, 記「頭流山會話記」.
24) 이원 李黿, 再思堂逸集 권1, 雜著「遊金剛錄」.
25) 成悌元, 東洲逸稿 中, 記「遊金剛山記」(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46-가559).
26) 申之悌, 앞의 문집, 권6, 記「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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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洲 金道洙는 1727년 지리산 七佛菴에서 금강산 유람 중 내원통암에서 교유했던 승려 2명을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승려들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김도수를 맞이했다. 이들은 서로 지리산의 靑鶴洞과 梨花洞의 풍광에 대해 담론하며 회포를 풀었다.28)
사대부들은 유람 중 교양과 학식 있는 승려들을 만날 때면 經學과 佛道에 대해 함께 담론을 나누는 등 학문적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襄陽府使를 그만두고 1618년 금강산을 유람한 守夢 鄭曄은 明寂菴에서 승려 應祥을 만났다. 응상은 四溟堂에게 수학하여 法脈을 이었다. 조정에서 그의 덕을 높이 사서 妙湛國一都大禪師라는 法號를 내리기도 했다. 정엽은 응상을 經文의 뜻을 이해하고, 부처 이후에 전해지는 율법을 아주 상세히 이야기한 인물이라 하였다. 정엽은 응상과 더불어 心性을 논했는데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雲水菴에서 승려 法堅을 만났다. 법견은 西山大師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義僧將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지리산과 금강산에서 수도하였다. 해박함이 外典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理氣를 토론하며 교유하였다. 유가의 理氣, 불가의 윤회설과 存心法 등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논하였다. 정엽은 이때의 담론이 세속사람들과 한담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회고한다.29)
白湖 尹鑴(윤휴: 솥 휴)도 1672년 금강산 유람 중 白蓮菴에서 天悟라는 80세 먹은 승려를 만났다. 천오는 정엽이 만난 응상의 徒弟였다. 천오는 국내를 두루 유람하여 산과 물의 源委를 많이 알고 있어 윤휴와 금강산의 산세에 대해서 담론하였고, 천오가 飛白을 잘 써 윤휴가 시 몇 폭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30)
27) 吳斗寅, 陽谷集 권3, 記「頭流山記」.
28) 金道洙, 春洲遺稿 권2, 記「南遊記」.
29) 鄭曄, 守夢集 권3, 雜著「金剛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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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의 제자 樂齋 申翊聖은 1631년 휴가를 얻어 五臺山을 유람하던 중 月精寺 觀音菴의 승려 性淨을 만나 經學과 禪에 대해 서로 강론하며 교유하였다. 성정은 광해군대의 인물로 休靜大師의 법맥을 이은 제자였다. 도력이 높아 스스로 일파를 이룰 정도였다 한다. 신익성은 승려를 무척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고, 승려들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西山大師 이하 유명한 승려들을 거의 보지 못한 이들이 없고, 직접 보지 못하였어도 대개 戒行에 대해서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정과 서로 강론한 후 정엽은 금강산에 살고 있는 禪師들을 통틀어 성정이 가장 知行을 갖춘 승려라 하고, 그의 뜻과 기개가 가히 한 시대를 능가하기에 충분하다고 극찬하였다.31)
또한 승려가 논변하기 좋아하여 산중에 오는 유람객과 교유를 청하기도 했다. 1790년 遲庵 李東沆이 지리산을 유람하러 입구에 들어설 때 法喜庵에 거하는 승려 道原을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도원은 모습이 준수한데다 기량이 호탕하고 언변이 유창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도원은 사대부들과 理氣心性의 說을 논변하기 좋아하여 이동항 일행을 君子寺로 데리고 가 대접하였다. 다시 明寂庵에 초청하여 함께 유숙하였다. 이동항은 명적암에서 유숙하면서 도원과 함께 유가의 理氣論과 四端七情論, 불가의 頓悟漸修 등에 대해 서로 담론하며 교유하였다. 이동항은 도원이 가진 식견의 명쾌하고 뛰어남은 유교의 노성한 학자라도 당해내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32)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승려들을 폄하하기도 했지만 서거정․ 최립․ 박지원․ 신익성과 같이 유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승려를 만나 교유하기 좋아하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평소 자주 대하지 않던 승려들을 유람 중에 만나 교분을 쌓으며 교유하였던 것이다.
30) 尹鑴, 白湖全書 권34, 雜著「楓岳錄」.
31) 申翊聖, 樂全堂集 권7, 記「遊金剛小記」.
32) 李東沆, 遲庵集 권3, 雜著「方丈遊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朝44-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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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시를 잘하는 승려들을 만나면 서로 수창하며 교유하였고, 학식 있는 승려들과는 유․불도에 대해 담론하며 학문적 교유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산중유람에서는 지식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면식 있는 승려들을 만나면 매우 기뻐하며 소회를 나누었다.
사대부들의 유람에서 승려들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산중유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승려들이었고, 이들에게 도움 또한 받았다. 그러므로 유람을 통해 자연스러운 교감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때로는 말동무를 삼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깊은 담론을 나누며 경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유람은 서로 소원해지고, 괴리감이 들기 쉬웠던 조선시대 儒․佛者들 간의 관계에서 소통과 교유를 이끌어 내었던 문화행위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Ⅱ. 學脈的 門人 간의 교유
조선시대 유람을 통한 문인 간의 교유는 청량산과 지리산 유람자들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봉화와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慶尙左道의 청량산은 이황이 후학을 양성한 곳이었다. 그리고 진주․산청․함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慶尙右道의 지리산은 조식이 후학을 양성한 곳이었다. 이황과 조식은 동갑이며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1545년 乙巳士禍 이후 屈起하여 東․西分黨 이전에 생을 마감했다. 영남사림의 宗祖인 佔畢齋 金宗直 이후 이황과 조식의 학통으로 생겨난 학파를 통칭해 영남
학파라고 한다. 영남학파는 크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대별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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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 조선의 전 지식인이 평생에 한번 돌아봐야 할 聖山으로 인식되었다면 청량산과 지리산은 영남사람들에게 성산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청량산과 지리산 유람자들은 대부분 영남사림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고, 유람을 통해 같은 학맥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문인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청량산은 이황의 선배인 聾巖 李賢輔에 의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현보는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44년간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벼슬에서 은퇴한 뒤 자연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處士的 삶의 방식을 지향했다. 만년에 禮安 靈芝山 남록 청량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거하였다. 죽어서 龍頭山에 묻혔다가 청량산 남록으로 이장되었다.34)
청량산을 유람하고 최초로 유람기록을 남긴 인물은 주세붕이었다.
주세붕은 1544년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선배인 이현보를 배알하고 함께 유람하였다.35) 이때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지은「유청량산록」은 후대 청량산을 유람하는 사대부들의 典據가 되었고, 청량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기록물이 되었다. 주세붕의 유람 이후 청량산은 이황에 의해 더욱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문인들이 즐겨 찾고 추앙하는 산이 되었다.
청량산 유람자들의 특성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이황과의 사승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36)
이황은 주세붕의「유청량산록」의 跋文을 쓰면서 자신이 어려서부터 숙부인 李堣, 형인 李瀣(이해 , 이슬 기운 해)와 함께 산을 오가며 글을 읽은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고 하였다.37)
33) 李樹健, 1998,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일조각, 328~329쪽.
34) 본 글의 인물에 대한 行歷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및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에서 제공하는 年譜와 國朝人物考를 주로 활용하였음을 밝혀두며, 이후 인물의 행력에 대한 기술에는 별도의 주를 명기하지 않았다.
35) 周世鵬, 武陵雜稿 권7, 雜著「遊淸涼山錄」.
36) 정치영, 2005, 앞의 논문, 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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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을 ‘吾家山’이라하고 ‘淸凉山人’으로 自號할 만큼 청량산을 사랑하였다. 출사 후 1555년 2월 사직하고 같은 해 겨울
청량산에 들어가 한 달간 독서하였다. 이때 산중에서「遊山書事十二首」를 제작했다. 朱子가 겨울에 南嶽을 올랐던 일을 상고하여 겨울에 청량산을 올랐다. 이 작품도 주자의「雲谷雜詠」에 차운한 것이다.38)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관직생활을 하다가 낙향하여 1564년 4월 제자들을 이끌고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李文樑․ 琴蘭秀․ 金應麟․ 琴輔․ 李德弘․ 柳仲淹․ 柳雲龍․金 富儀․ 金富倫․ 南致利․ 權景龍․ 金士元 등의 제자들이 함께 갔다.39) 이황의 많은 제자들은 스승을 본받아 청량산에서 독서하였다. 이황이 청량산을 오가며 제자들과 강학했던 연고는 이황을 필두로 하는 영남사림들이 청량산을 지속적으로 유람하며 서로 교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570년 11월 靑城山人 權好文은 청량산을 유람하고자 가는 길에 이황을 배알했다. 권호문은 이황 백형의 딸이 낳은 자식으로 이황의 제자이자 족친이었다. 산으로 떠나기 전 이황을 먼저 배알하고 문인인 閔應祺․ 유운룡(서애 유성룡의 家兄. 하회마을 양진당 主)을 만났다. 유운룡과 함께 隴雲精舍에 들어가 학문의 방법에 대해 강론하고 술을 마시며 교유하였다. 청량산 중에 있을 때 이황이 위독하다는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와 다른 문인들과 시중을 들면서 이황의 임종을 지켰다.40)
37) 李滉, 退溪集 권43, 跋「周景遊淸涼山錄跋」. 이황은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주세붕의 청량산 유람기록을 주민에게 얻어 읽어 보았다. 그리고 도성에서 벼슬을 시작하면서 주세붕과 친하게 지내게 되어 주세붕이 초고에 가감하여 다시 쓴「유청량산록」을 보고 1552년에 발문을 썼다.
38) 이종묵, 2001,「退溪學派와 淸凉山」정신문화연구 제24권 제4호, 14~16쪽.
39) 李德弘, 艮齋集 권8, 年譜「艮齋先生年譜」.
40) 權好文, 松巖集 권5, 錄「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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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사후에도 그의 문인들과 이황을 흠모하는 사림들의 청량산 유람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葛鋒 金得硏은 부친의 壽宴자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1579년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김득연은 이황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안동에 거주하면서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김득연은 朴翼․ 權訥․ 權山斗․ 琴順先․ 禹季綏․ 朴伯魚․ 朴仲胤․ 權得說 등과 청량산을 가는 동안 이현보의 家宅인 愛日堂에 들려 이현보의 아들 李叔樑을 만나고, 도산서원에 참배하였다.41) 그리고 이황의 제자인 月川 趙穆을 배알하고 청량산 西庵에서 만나 함께 술을 마시며 담론하였다. 조목은 이황의 고향인 예안에 거주하면서 일찍이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평생 동안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신 인물이다. 벼슬에 거의 나가지 않고, 월천서당을 세워 많은 경상좌도의 사림을 양성하며 이황의 학문을 선양하는데 진력하였다. 이황의 사후 청량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조목과 같은 청량산 인근에 거주하는 이황의 제자를 배알하고 교유하였다.
1594년 신지제도 청량산 유람에서 이황의 제자인 금난수를 배알하고, 함께 유람하며 교유하였다. 금난수는 이황과 동향인으로 조목의 누이동생 횡성조씨와 혼인하여 조목과는 족친관계였다. 신지제도 이황의 문인이었던 金彦璣에게 수학한 인물이었다. 신지제는 청량산을 가면서 선배 문인인 금난수를 가장 먼저 배알했다. 금난수가 기다리고 있다가 집을 구경시키고, 배를 타고 낙동강을 함께 유람하였다.42)
1600년 安村 裵應褧(배응경, 홑옷 경)도 金玏(김륵, 옥 비슷한 돌 륵, 늑)․ 吳大源과 함께 퇴계집 간행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告成祭에 참석하러 도산서원에 가는 기회에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도산서원에서 조목․金圻(김기, 경기 기, 지경 은) 등 이황의 문도들을 만났고, 함께 고성제에 참석하였다.
청량산을 유람하고 월천서당에 들려 조목을 다시 배알하였다. 조목은 술을 대접하며 이들의 遠行을 위로해 주었다.43)
* 참고 :
(= 衣錦絅衣 의금경의 , 끌어 죌 경) : 비단옷(緋緞-)을 입고 그 위에 안을 대지 않은 홑옷을 또 입는다는 뜻으로,군자(君子)가 미덕(美德)을 갖추고 있으나 이를 자랑하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41) 청량산박물관, 2007, 앞의 책, 80쪽.
42) 申之悌, 앞의 문집, 권6, 記「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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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청은 1601년 11월 스승인 조목을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먼저 도산서원에서 조목을 배알하고 청량산으로 출발하였다. 조목의 문도 李士安․ 琴學古도 함께 했다. 그리고 조목의 동문인 春塘 吳守盈을 배알하였다. 김중청 일행은 유람 중 스승 조목에게 평소 의심나는 경전의 구절을 질문하였고, 조목은 질문에 대해 수많은 강론을 하였다. 그리고 산중에 조목의 동학인 금난수가 술을 가지고 찾아와 함께 유람하였다. 이들은 사람 간의 교유관계에 대해서 담론하고, 학문의 순서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등 학문을 강론하였다.44)
유성룡의 아들인 柳袗(홑옷 진)도 鶴峰 金誠一의 사위인 金榮祖와 1614년 청량산을 찾았다. 유성룡은 형인 유운룡과 함께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김성일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청량산 인근에 살고 있는 金坽․ 金光繼․ 金延祖 등 부친과 寒岡 鄭逑의 문도들을 도산서원으로 불러 서로 교유하였다. 유진은 유람 중 부친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이황과 있었던 일화를 자신에게 얘기해 주던 것을 회상하며, 선친의 남은 자취를 추념하였다.45)
청량산은 이황 제자의 후손들과 학맥을 이은 문하들이 지속적으로 유람하며 이황을 기리고 지역의 문도들을 만나 교유하고 있는 것이다. 1647년에는 裵幼章이 유람하였고,46) 1660년 臺隱 權璟은 從姪 虞卿과 함께 청량산을 찾아 지역의 문도 吳景利․ 吳生․ 趙生․ 朱生甫 등을 만나 교유하였다. 도산서원에서 지우인 李嘉會를 만나 손을 부여잡고 꿈인 양 눈을 비벼가며 감격하고 있다.47)
43) 裵應褧, 安村集 권3, 雜錄「淸凉山遊賞錄」.
44) 金中淸, 앞의 문집, 권5, 記「遊淸凉山記幷序」.
45) 柳袗, 修巖集 권4,「遊淸凉山日記」.
46) 裵幼章, 楡巖集 권2, 雜著「淸凉山遊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46- 가832). 이 기록은 청량산의 풍광과 유적에 대한 묘사 위주이고, 문도들과의 교유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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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년에는 葵亭 申厚載가 청량산을 찾았다. 남인에 속한 인물로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인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太白山 覺華寺의 기우제를 기회로 유람하였다. 지역 문도 琴和叔과 林宇桂가 함께 하였다. 水谷村에서 柳榰․ 金啓光․ 柳振揮․ 柳聖時가 일행을 맞이해 술을 마시며 함께 교유하였다.48) 1686년 鳩巢 權聖矩도 벗인 金止而와 河淸卿과 청량산 일대를 13일간 유람하면서 많은 문도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그의「遊淸凉山錄」에 교유하고 일일이 기록한 인물의 이름만 20여명이 넘는다. 특히 권성구가 유람을 갈 때는 마침 도산서원에서 재 간행되는 퇴계집을 교정하고 있어 지역의 문도들과 여러 인사들을 만나 교유할 수 있었다.49)
이후에도 李瀷․ 李萬敷․ 權以鎭․ 權正忱 등 이황의 학맥을 이은 많은 학자들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나, 권성구와 같이 많은 문인들을 만나 교유하며 그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것은 매우 드물다.
이밖에도 청량산은 이황과 학맥이 다른 학자들에게도 꾸준히 각광받았다. 老論의 金昌翕․ 李縡, 기호학파의 姜再恒․ 丁範祖․ 宋煥箕․ 宋秉璿 등이 청량산을 찾아 이황을 기리고 있다.50) 이는 앞서 살핀바와 같이 이황은 동서분당 이전에 생을 마쳤으므로 黨色의 혐의를 받지 않았다. 이황은 학맥과 지연을 초월하여 朝野에 崇仰받는 인물이었다.51) 분당 이후 이황의 학문을 南人이 이었다고 하지만 당파가 다른 사림들에게도 이황은 숭앙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남인과 다른 당색을 가진 사림들도 도산서원을 찾고 청량산을 유람하며 이황을 기렸다.
청량산만큼이나 영남사림들이 기리고 자주 찾던 곳은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 濯纓 金馹孫의 유람에 의해 영남사림들이 널리 찾기 시작하였다.
47) 權璟, 臺隱集 권1, 雜著「遊淸凉山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3648-07-200).
48) 申厚載, 葵亭集 권7, 記「遊淸凉山記」.
49) 權聖矩, 鳩巢集 권3, 雜著「遊淸凉山錄」.
50)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종묵의「퇴계학파와 청량산」(2001)에 자세하다.
51) 이수건, 1998, 앞의 책,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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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은 관직을 두루 거치다가 1489년 59세 때에 密陽의 田里로 돌아와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조선전기 사림파의 道學
을 본격적으로 연 굴지의 인물들인 鄭汝昌․ 金宏弼․ 김일손․ 楊浚․ 楊沈․ 洪裕孫이 그에게 수학하였다.
김종직은 모친 봉양을 위해 咸陽郡守로 재직하면서 1472년 曺偉․유호인․韓百源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으로, 어려서 김종직에게 수학하였다. 戊午士禍가 일어났을 때 김종직의 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유호인은 함양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 28세 때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자 김종직을 찾아가 제자의 禮를 행하기를 고집했으나, 김종직이 친구로 대접하였다고 한다.52) 유호인은 조위와 함께 성종 때 실시한 賜暇讀書 문신에 첫 번으로 뽑히기도 하였다.53) 1472년 여름 조위가 關東으로부터 김종직이 있는 곳으로 와서 禮記를 읽고, 돌아가기 전 김종직에게
지리산 유람을 청했다. 이에 유호인을 불러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54)
이후 김일손도 晉州牧學을 그만두고 1489년 동학인 정여창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김일손과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평소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지우였다.55)
지리산은 이들의 유람 이후에 남명학파․퇴계학파와 畿湖學派 등 학맥적 사승관계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유람하였다. 지리산 유람자들의 성향은 대체로 조식과 같이 만년에 관직과 거리를 두고 강호에 은거한 사람들이 많았고, 유람자들의 성향도 다양하게 나타난다.56) 조식이 지리산에 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유람한 이후 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자주 찾았다.
52) 國朝人物考 권26, 名流「兪好仁墓碣銘」.
53) 成宗實錄 권68, 7年6月乙酉.
54) 金宗直, 佔畢齋文集 卷2,「遊頭流錄」.
55) 金馹孫, 濯纓集 권5, 錄「頭流紀行錄」.
56) 정치영, 2009, 앞의 논문, 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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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년 조식의 문하 寒岡 鄭逑가 伽倻山에 올라 지리산을 바라보며 정여창과 조식의 명성으로 그 이름이 천하에 전해지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리산) 거기는 鄭汝昌이 젊었을 때 덕을 쌓고 살았으며, 曺植이 만년에 은둔하여 고상한 뜻을 지키던 곳이다. 우리나라 남쪽의 大山으로 제일 가는 명산이고, 두 현인의 명성에 덕을 입어 장차 천지와 함께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저 산의 큰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57)
조식은 벼슬을 모두 물리치고 합천에 우거할 때인 1558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知友였던 晉州牧使 金泓, 秀才 李公亮, 高靈郡守 李希顔, 淸州牧使 李楨과 함께 했다. 김홍․이의한․이정은 조식의 知友였고, 이공량은 조식의 매부였다. 이 때 조식은 58세, 이희안 55세, 이정이 47세였고, 김홍과 이공량은 생년이 정확치 않아 나이를 알 수 없다. 산중에서는 벼슬을 따지지 않고 나이 순으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산중에서 주흥을 즐기기며 농담도 하고, 수창하면서 유람 중 허물없이 교유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유람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서로 수 백리 떨어져 살아 훗날에 다시 만날 기약을 하기 어려워 매우 섭섭해
하고 있다.58) 실제로 이희안은 유람한 지 일년 뒤인 1559년에 사망했고, 조식이 문상을 했다. 이후 조식은 1561년 智異山 德川洞으로 들어가서 山天齋를 짓고 우거하였는데, 1563년 이정이 찾아와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정은 조식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조식과 더불어 지리산에 들어가 함께 살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561년 발생한 진주의 淫婦獄으로 조식과 이정은 의절하게 되었다.59)
57) 鄭逑, 寒岡集 권9, 雜著「遊伽倻山錄」.
58) 曺植, 南冥集 권2, 錄「遊頭流錄」.
59) 이 음부옥은 河宗萼(하종악 , 꽃받침 악)이 상처한 후 맞이한 李仁亨의 손녀 이씨부인의 수절과 관련된 송사였다. 이 과정에서 조식의 문하였던 李喜萬과 河沆 등이 이씨의 무죄판결을 항의하며 이씨 집안의 毁家黜鄕을 주도하였다. 이 일의 배후 인물로 조식이 지명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씨를 음란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쪽과 난동을 부린 조식의 제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정은 조식에게 이씨의 일에 유림이 관여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조식과 이정이 의절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희만과 하항을 구속하는 데서 마무리 지어
졌다. 후일 이정의 편에 서서 음부옥에 관한 조식의 처신을 비난했던 이황의 편지가 알려지면서 그 문인들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고, 이는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의 배척을 불러오게 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정만조,「宣祖初晉州淫婦獄과 그 波紋」한국학논총 22, 국민대학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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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의 문인이자 從叔이었던 河沆에게 수학한 松亭 河受一도 제자들과 함께 1578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鄭安性․ 河文顯․ 孫文炳․ 梁成海․ 孫誠․ 梁山海․ 梁宗海 등이 함께 하며 서로의 학문적 사승관계를 다지며 교유했다.60) 感樹齋 朴汝樑도 1610년 지평에서 사직하고 함양으로 내려와 문인인 합천군수 朴明榑․ 鄭慶雲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박여량과 정경운은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의 문인이었다. 박명부의 아우 朴明桂와 사위 盧腀․ 愼光先․ 朴明益 ․李允迪이 함께 했다.61)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浮査 成汝信도 1616년 진주에 우거할 때 지우들과 지리산을 유람하며 교유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鄭大淳․ 朴敏․ 文弘運․ 李重勳․ 姜敏孝과 아들 成鑮․ 成錞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유람목적이 仙遊에 있다 하고, 스스로를 모두 신선으로 부르며 유람했다. 마음에 맞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려 유람하였으므로 산에서 잦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文字飮을 즐겼다. 그리고 김종직과 조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62)
遲菴 李東沆은 허목의 문하로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은 인물이었으나, 1790년 조식의 학맥을 이어 받은 지인들과 지리산을 유람하며 교유했다. 이동항은 37일간에 걸쳐 지리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이동항이 남긴「方丈遊錄」에 기록된 동행한 인물만 朴聖洙․ 趙宅奎․ 李東淵․ 盧啓心․ 金致康․ 張東潤․ 尹檍․ 盧章龍․ 權必忠․ 尹東垕․ 姜龍燦․ 盧錫泰․ 盧錫漸․ 盧宣國․ 盧欽國․ 鄭生등 20여 명이 넘었고, 수행원 까지 약 70여 명이 되었다. 유람 중 만나서 교유한 인물은 30여 명에 달한다.
60) 河受一, 松亭集續集 권2, 記「遊靑巖西岳記」.
61) 朴汝樑, 感樹齋集 권6, 雜著「頭流山日錄」.
62) 成汝信, 앞의 문집, 권5, 記「方丈山仙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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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의 문인 鄭蘊의 묘를 찾아 성묘하고 후손 鄭光顯을 만나 교유하였다. 鎭洞巖에서 예전에 유람하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은 愼可默과 愼可穆을 만났고, 안희현 관아에서는 20년 만에 친구 盧晦能을 만났다. 일행들은 산에 올라 김종직의「유두류록」을 상고하고, “조식․정여창․정온이야 말로 그 이름이 우주에 드높고 빛이 서책에 남겨져 지리산의 존귀하고 위대함을 짝할 만하다.”고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洗心亭에서는 40년 만에 친구 崔昌孝와 매우 반갑게 해후하였다.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에 예를 올리고 敬義堂에서 조식의 후손 30여 명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 받았다.63)
이밖에도 지리산은 조식의 문하들과 당색이 다른 학자들도 꾸준히 유람하고 조식의 문인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西人이었던 柳夢寅은 1611년 남원부사로 부임하여 지리산을 유람하였고,64) 서인이었던 陽谷 吳斗寅도 1651년 金長生의 문인 李尙逸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오두인은 조식과의 사승관계는 없었지만 덕천서원에서 조식의 사당에 참배하고 유생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교유하였다. 그리고 조식의 묘소에 예를 표했다.65) 특히 조식의 학통과 별거한 집안의 후손인 士農窩 河益範도 1807년 지리산을 찾아 조식을 기렸다. 하익범은 조식의 私淑人 河澄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하징의 손자 河名이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고, 그 후 하익범의 집안은 老論化되었다. 하익범도 송시열의 5세손 송환기에게 수학하였다. 그러나 하익범은 지우들과 유람하며 덕천서원을 찾아 참배하고 조식을 흠모하고 있다. 유람을 마치고 정여창과 조식으로 인해 지리산의 이름이 만고에 남아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 평했다.66)
63) 李東沆, 遲菴集 권2, 雜著「方丈遊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朝44-가27).
64) 柳夢寅, 앞의 문집, 권6, 雜識「遊頭流山錄」.
65) 吳斗寅, 앞의 문집, 권3, 記「頭流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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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은 정식․ 朴致復, 기호학파의 朴長遠․ 朴來吾․ 金之白․ 송병선 등도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조식을 기리며 그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다.67) 조식도 이황과 같이 동서분당 이전에 생을 마쳐 黨色의 혐의를 받지 않은 인물이다. 학연과 상관없이 많은 사림들이 유람을 위해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던 조식의 문인들과 만나 조식을 함
께 기리며 교유하고 있는 것이다.
Ⅲ. 其他 知人과의 교유
청량산과 지리산 외에도 조선시대 유람지로 각광 받던 곳은 금강산․ 개성 등이었다. 사대부들이 이 장소들을 유람하면서 교유한 인물을 살펴보면 간혹 학문적 사승관계가 나타나긴 하지만, 청량산이나 지리산과 같이 뚜렷한 특징을 찾을 수는 없다. 지리산․한라산․ 금강산의 경우 우리나라의 三神山으로 불리며 일찍이 민족의 영산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68)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지리산은 김종직과 조식에 의해 영남사림들에게 추앙받는 산으로 자리 잡았다. 금강산은 국내 제일 유람지의 명성을 유지하며 모든 사대부들이 유람을 소망했고, 다양한 부류들이 유람한 곳이었다.
66) 河益範, 士農窩集 권2, 雜著「遊頭流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3648-88-51).
67)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정치영의「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여행 연구」(2009)에 자세하다.
68) 삼신산은 본래 중국 전설에 나오는 蓬萊山․方丈山․瀛洲山이다. 우리나라도 이것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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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역적 특성상 조선시대를 풍미한 굴지의 학파를 이루었던 인물 등과의 뚜렷한 연고성이 없었다. 청량산은 이황, 지리산은 김종직과 조식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과 같은 인물과의 개연성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금강산과 개성 등의 장소도 사대부들이 유람을 위해 자주 찾던 곳이었으므로 유람을 통한 지인들과의 교유양상이 많이 나타난다. 유람지에서 주로 벗들을 찾아보고, 유람의 큰 조력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방관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또한 지인이나 족친들과 유람을 계획하여 함께 동행 하면서 오랜 회포를 풀며 교유하기도 하였다.
1476년 吏曹正郞으로 재직하고 있던 蔡壽는 賜暇讀書 문신으로 선발되어69) 같은 해 3월 開城을 유람하였다. 사가독서 문신으로 함께 선발된 許琛․ 曺偉․ 楊熙止와 知友인 安處誠․ 成俔이 더불어 동참하였다. 개성의 察訪 宋逶, 判官 鄭希仁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교유하였다. 그리고 지인인 成世明․ 成世源을 만나 함께 유람하였다. 이들은 개성을 답사하며 고려의 흥망성쇠에 대해 논하고, 수창하며 교유하였다. 돌아오기 전 留守가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채수의 유람에 당초 사가독서 문신으로 함께 선발된 유호인이 동참하게 되어 있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함께 가지 못했다. 채수 일행은 개성유람에서 수창한 시 백여 편을 유호인에게 보여주었다. 유호인도 지인인 申從濩과 遊山具를 챙겨 1476년 4월 개성유람을 시작하였다. 개성에 도착하여 지인 趙廉老의 집에서 묵고, 다음날 經歷公의 초청을 받아 예성강을 함께 유람하며 교유하였다. 돌아오기 전에는 채수의 유람 때와 같이 유수가 僚佐들을 인솔하고 나와 巖防寺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70)
채수와 유호인은 지인들과 함께 만나 유람을 기회로 교유하며 우호를 다졌다. 그리고 유람지에서도 관료나 지인들을 만나 교유하며 유람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69) 成宗實錄 권68, 7年6月乙酉.
70) 申用漑등, 續東文選 권21, 錄「遊松都錄(蔡壽)」ㆍ「遊松都錄(兪好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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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효온은 평생 은거하며 江湖를 周遊하였는데, 지인들을 만나 교유하고 유람에 도움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남효온은
1478년 단종의 어머니 顯德王后 復位를 포함한 8事를 성종에게 올렸으나 세조의 옹립을 지지했던 鄭昌孫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그를 狂生이라 지목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躬耕과 유람생활을 하다가 39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남효온은 1458년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죽기 전까지 전국을 주유했다. 남효온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대부의 장기간 잦은 유람에는 지인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효온의 유람기록을 살펴보면 유람 중 지인을 만나는 것은 교유의 목적도 있지만 유람안내와 동행, 숙식제공의 도움을 받는 등의 이유가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남효온은 금강산 유람 중 가장 먼저 집안에 친분이 있는 지인을 만났다. 通川에서 면식이 있었던 郡守의 아들 子達을 만나 군수의 매우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高城에서는 군수가 조부인 南俊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만나서 후한 대접을 받았고, 양양군수 柳自漢을 만나 三日浦를 함께 유람하였다. 유자한은 남효온․ 金時習과 함께 평소 교분이 있는 사이었다.71) 삼일포 유람에 유자한이 배를 태워주는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삼일포 유람에는 訓導 金大倫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삼일포 유람을 마치고 松島에 정박하여 종일토록 술을 마시며 수창하였다. 간성객사에서 유숙할 때는 군수 元輔昆이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서울로 돌아가던 중 지인인 홍천현감 伯起 金楊震을 만나 함께 유숙하였다.72)
남효온은 금강산을 유람한 같은 해 가을 淸談派의 일원인 禹善言․李貞恩․李摠과 함께 개성을 유람하였다.73) 이들은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의 유적을 보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며 춤을 추며 놀기도 했다.
71) 李珥, 栗谷全書 권14, 雜著「金時習傳」.
72) 南孝溫, 앞의 문집, 권5, 記「遊金剛山記」.
73) 청담파는 탈속적 지식인으로 老․莊의 학풍을 토론하며 時政俗事를 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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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앉아 서로 시사와 옛일을 논하고, 음양 조화의 담론과 潮汐진퇴의 이치를 논하였다. 이때 밤새도록 흥취가 지극하여 속진의 회포가 사라졌다고 하면서 청담파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74) 특히 탈속의 삶을 추구했던 이들 모두에게 개성 유람은 공유하고 있던 학문을 마음껏 담론하며 교유하기에 더없이 좋은 매개였다. 그리고 1489년 평안도 祥原郡의 佳殊窟을 유람하고자 군수 李均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군수와 訓導 金普林, 從弟 南士曾과 함께 가수굴을 유람하였다. 수행원 30여 명을 동원하여 유람을 했는데, 모두 군수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남효온은 유람이 끝나고 군수 이균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수령으로서의 인품과 자질이 으뜸임을 말하고 있다.75)
이원도 1493년 금강산을 유람 할 때 지인을 찾아 함께 유람하며 도움을 받았다. 고성에 도착하자마자 젊었을 때 사귀고 지냈던 金楗부터 찾아갔다. 김건은 고성군수 金智童의 아들이었다. 이원은 지기인 김건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동행시켜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고성에 돌아 왔을 때 고성군수 김지동이 삼일포에서 배를 준비해 놓고 이원과 아들 김건 등을 태우고 함께 유람했다.76) 이원의 유람에는 지인인 김건과 그의 부친인 고성군수의 도움이 컸다.
1482년 남효온․ 洪裕孫․ 이정은․ 이총․ 우선언․ 趙自知․ 韓景琦가 동지회를 조직하여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시가와 담론으로 時事를 비판하였다. 자신들을 竹林七賢에 비유했다. 이정은은 인품이 돈후하고 학식이 깊어 남효온과 홍유손 등이 존중하였다. 癸酉靖亂 후 사람들이 생육신 김시습과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그와 남효온․ 安應世․ 홍유손 등 네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효온은 李摠을 찾아가 개성의 유람길 안내를 부탁하였다. 燕山君日記(권53, 10年 5月 己未)에 남효온이 이총을 찬양하는「玄琴賦」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두 사람은 깊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4) 南孝溫, 앞의 문집, 권6, 雜著「松京錄」.
75) 南孝溫, 위의 문집, 권4, 記「遊佳殊窟記」.
76) 李黿, 앞의 문집, 권1, 雜著「遊金剛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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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 중에 평소 면식이 있던 지인을 만나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물을 만나 교유하며 사귀기도 했다. 1516년 冲庵 金淨은 금강산 유람 중에 강릉에서 江湖居士 朴公達을 만나 교유하였다. 김정은 1514년 중종 때 폐출된 왕후 愼氏 폐위 주모자인 朴元宗 등을 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報恩에 유배되었다. 1516년 영의정 柳洵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이때 김정은 홀로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강릉의 박공달을 만나 교유하였다. 박공달은 26세 때인 1495년에 生員이 되었으나, 고향에서 修身과 독서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김정이 유람 중 우연히 박공달의 집에 묵으며 교유하였는데, 박공달의 사람됨에 탄복하여 1519년 賢良科에 추천하였다. 이로 인해 박공달은 弘文館著作, 兵曹佐郞을 역임했다.77) 그러나 박공달은 1519년 己卯士禍 때 벼슬을 버리고 다시 강릉으로 낙향했고, 김정은 錦山에 유배되었다가 1521년 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이 두 사람은 평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나 김정의 유람 중에 만나 서로 교유하며, 관직에 천거까지 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면식이 있어 평소 알고 지냈던 유람지의 지방관을 만나서 유람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耻齋(치재, 부끄러울 치) 洪仁祐는 1553년 4월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일대의 수령들을 모두 만났다. 친구인 許國善․ 南時甫와 함께 금강산과 嶺東일대를 유람하였다. 이들은 유람 중 修己治人의 문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도리, 미미한 사람도 버리지 말라는 주제 등으로 학문적 교제를 나누었다. 유람을 통해 산수 구경만이 아니라 정신을 湖海와 같이 터놓고 知友들과 함께 즐거움을 찾고자 하였다. 정양사에서는 江原都事 黃伯溫을 만나 매우 기뻐하였다. 황백온과는 금강산 유람을 함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홍인우 일행이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황백온이 먼저 금강산 유람을 하고 정양사에 왔을 때 홍인우 일행을 만난 것이다.
77) 燃藜室記述 권8,「中宗朝故事本末」‘賢良科罷復’․‘己卯黨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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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유람 여정 중 통천군수․간성군수․양양부사․강릉부사․원주목사 등 유람지의 모든 수령을 만나서 술과 음식대접을 받고 여정을 위로받았다.78) 유람 중 만난 수령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놓지 않은 것을 보면 평소에 교분이 있었던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유람자들 또한 수령들과 같은 사대부들이었으므로 초면이긴 하나 서로 안면을 트고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람은 지인들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교유하는 기회였고, 함께 숙식하고 담론하며 친교를 더욱 두텁게 만들어 주었다. 1579년 9월 정구는 벼슬에서 물러나 李仁愷․ 李仁悌․ 郭䞭과 서로 모여 글을 읽고 교유하며 지인들끼리 낙을 즐겼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였다. 영양군수에서 물러난 친구 鄭仁弘을 불러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식의 문하였다. 近思錄, 南嶽唱酬集, 朱子年譜를 가져가 산중에서 읽으며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김종직․ 김굉필․ 林薰․ 조식을 상고하였다. 그리고 유람기회에 잡념을 없애고 학문에 더욱 열중할 것을 서로 다짐하며 교유하였다. 해인사를 거쳐 知足菴에 도착했을 때 鄭德遠․ 李季郁․ 金志海․ 金渾源이 모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정구와 헤어진 지가 멀게는 3․4년이고 가깝게는 1년이었으므로, 서로 매우 반갑게 조우하였다. 학문에 관해서 토론할 때 朴叔彬․ 朴而章이 올라와 동참하였다. 저녁 무렵에 文勉․ 周國新․ 文弘道․ 曺應仁 등이 문안을 왔다. 이들은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에 白雲臺에 갈 일정이 있었으나 모두들 “벗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내는 낙은 본디 쉬운 일이 아니니, 오늘은 우선 이곳에 머물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누립시다.”하고 그대로 머물러 술을 마시며 교유하였다.79)
78) 洪仁祐, 耻齋遺稿 권3,「關東錄」.
79) 鄭逑, 앞의 문집, 권9, 雜著「遊伽倻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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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의 가야산 유람에는 많은 지인들과 함께 책을 탐독하며 학문적 교유를 즐겼다. 정구와 정인홍이 가야산을 유람하던 시기의 관계는 매우 호의적 관계였다. 그런데 1603년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황과 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배척하게 된 것은 앞서 살펴본 淫婦獄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구는 조식을 스승으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이황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인물이었다. 남명집은 정인홍의 주도로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배척하자 정구가 절교했던 것이다.
특히 지방관이 인근지역을 유람할 때는 같은 관직에 종사하고 있는 수령 등 지방관들을 많이 만나 교유하였다. 정엽이 양양부사를 그만둔 직후 금강산을 유람할 때 고성군수 趙暄이 座首 崔德立을 보내 일행을 대접하였다. 총석정에서는 통천군수와 군수의 아우 克鑑, 극감의 손님인 李興復과 모임을 가졌다. 통천군수는 金克鍵으로 省菴 金孝元의 아들이었다.
당시 김극건에게는 아들 金世濂이 있었는데, 正言으로서 광해군대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탄핵하려다 郭山으로 유배를 갔다.80) 군수는 아들의 일로 상심해 있던 차에 정엽 일행을 만나 술대접을 하며 아들의 일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낙산사에서는 萬戶 李濬, 上舍 崔基頷․ 禹泰承․ 朴宗文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교유하였다.81)
久堂 朴長遠도 1643년 부모봉양을 위해 安陰縣監으로 부임했을 때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박장원과 교유관계가 두터운 李楚老라는 사람이 함양군 沙斤驛의 찰방으로 근무하고 있어 서로 서신을 오가며 지리산 유람을 약속하였다. 두 사람은 예안현감을 지낸 梁榞과 上舍 申纘延을 만나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술을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고 수창하면서 교유관계를 맺었다.82)
80) 光海君日記 권121, 9年 11月 甲申.
81) 鄭曄, 앞의 문집, 권3, 雜著「金剛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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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지 주변의 현직 수령들이 함께 일정을 맞추어 유람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泛虛亭 宋光淵이 1679년 玉泉郡守로 부임하여 1680년 昇平府使 李益泰, 浴川縣監 李萬徵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이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공무를 보는 여가에 함께 모여 유람하며 교유하기를 약속했던 것이다.83) 道伯이 안찰하는 여가에 유람을 위해 들르는 산에는 주변의 수령들이 모두모여 유람하였다. 1784년 안찰사 李秉模가 청량산에 유람하러 가자 봉화군수 沈公著, 영양군수 金明鎭, 하양현감 任希澤, 안기찰방 金弘道, 흥해군수 成大中이 참여하였다. 심공저와 성대중은 청량산을 유람하기로 오래전 약속이 되어 있던 차에 안찰사의 유람에 참여하면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84) 관찰사의 유람 수행으로 주변 수령들과 만나 함께 유람하며 교유한 것이다.
유람지에서 즉석 교유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유람을 떠나기 전 지인들에게는 미리 서신을 보내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신익성은 지인들을 만나고자 미리 연락을 해 놓고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 도성을 떠나 道峯書院에 들려 학생 徐亨履․ 徐弘履․ 尹文擧․ 尹宣擧․ 趙壽益 등을 만나 취할 때 까지 술을 마시며 교유하였고, 강원도 金化에서는 수령인 黃泳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고성에서는 군수 李克浦와 삼일포에서 만나 함께 유람하고, 사선정에서 술을 마셨다. 이극포가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고, 신익성은 시를 지어 부채에 써주며 서로 회포를 풀고 교유하였다. 이는 모두 신익성이 유람을 하는 차에 지인들과 서로 만나 교유하고자 미리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85)
82) 朴長遠, 久堂集 권15, 記「遊頭流山記」.
83) 宋光淵, 泛虛亭集 권7, 雜著「頭流錄」.
84) 成大中, 靑城集 권6, 記「淸凉山記」. 이 유람에는 단원 김홍도가 안기찰방으로 참석하여 퉁소를 불고 있다. 김홍도의 퉁소소리가 매우 듣기 좋았다는 것으로 보아 김홍도는 퉁소를 잘 불었던 것으로 보인다.
85) 申翊聖, 樂全堂集 권7, 記「遊金剛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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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親들이 모여 유람을 함께 하기도 했다. 竹潭 金永祚는 1867년 아우 金永祐, 族弟 金永汶, 叔父, 그리고 지인인 權翼鵬과 함께 모여서 지리산의 진경을 유람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산청군에 도착하여 權翼鵬의 족친인 權正瞻을 만나 동행하였다.86) 송병선도 1869년 族親인 安時容․ 安時默․ 安時任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그리고 10년 뒤인 1879년에 다시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丹城의 선비 李達支가 따라나섰고, 1869년 유람에 함께 했던 안시임․안도행이 다시 따라나섰다. 그리고 안씨집안 족친인 安仲錫․ 安衡錫․ 安時和 등이 동행했다. 일행이 新安面에 이르러 유생 崔植敏과 그의 종형인 崔相敏, 유생 權雲煥․ 李東範․ 李炳斗와 만나 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新安書社로 가서 여러 士友들과 교유하였다.87)
이처럼 유람을 하면서 유람지와 인근에 거주하는 지인들을 만나서 교유하거나, 지인들이나 족친과 함께 유람을 하는 것은 현대의 관광현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교통편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유람을 기회로 평소 찾아보기 어려웠던 지인들을 만나 회포를 풀며 교유하고, 유람에 도움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지인과 함께 유람하며 교유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지기도 했다. 즉, 조선시대 유람이라고 하는 행위는 지인들과 소통하며 교유하는 방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86) 金永祚, 竹潭集 권2, 雜著「遊頭流錄」(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46-가940).
87) 宋秉璿, 淵齋集 권21, 雜著「智異山北麓記」ㆍ「頭流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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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유람을 통해 만났던 부류를 僧侶․ 門人․ 知人 등 크게 3부류로 대분하여 그들 간의 교유양상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는 교통편이 편리하지 않았고, 통신수단이 부족하여 지인이나 족친들의 교유는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거리에 있던 지인은 경조사 등 특별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교유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유람은 평소 만나기 힘든 사람들과 교유하는 기회가 되었다. 유람지에 살고있던 인척과 벗을 만나 함께 유람하기도 했고, 숙식을 해결하는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한 지인들과 유람을 계획하여 동행하면서 회포를 풀며 친교를 돈독히 다졌다. 유람은 평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교유하는 좋은 기회였다.
사대부들이 주로 찾던 유람처는 산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만나던 方外人은 승려였다. 산중유람에 승려들의 藍輿를 이용하고, 숙식제공을 받는 등 유람 중 승려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유람기록에도 많은 승려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불교의식을 폄하하고 비판했지만, 서거정․ 최립․ 박지원․ 신익성과 같이 승려들과의 교유를 좋아하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유람 중 작시를 잘하는 승려들을 만나면 서로 수창하며 교유하였다. 학식 있는 승려들과는 유․불도에 대해 담론하며 학문적 교유를 나누기도 했다. 산중 유람에서는 지식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면식 있는 승려들을 만나면 매우 기뻐하며 소회를 나누었다. 사대부들이 일상에서 자주 대하지 않던 승려들과 유람 중에 만나 교분을 쌓으며 교유했던 것이다. 유람을 통해 자연스러운 교감과 교유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유람은 괴리감을 가지기 쉬웠던 유․불자들의 소통과 교유를 이끌어 내었다.
사대부들은 유람을 기회로 같은 학맥을 가지고 있는 문인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는 청량산과 지리산을 찾던 유람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조선시대 청량산과 지리산은 영남사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었다. 청량산은 이황이, 지리산은 조식이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이들 학맥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청량산과 지리산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기리는 후학들이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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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의 주류도 대부분 이들의 제자인 영남사림 출신이었다. 이황도 청량산을 유람하였고, 조식도 지리산을 유람하여 이 산들이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사후에도 후학들이 先學의 자취를 찾고 학문을 기리기 위해 산을 찾아 지역의 선후배 문도들을 만나 함께 유람하며 교유하였다.
이밖에도 금강산과 개성 등의 장소도 사대부들이 유람을 위해 자주 찾던 곳이었다. 교유양상이 사승관계에 얽힌 학파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지만, 이곳의 유람을 통해 많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다. 유람지에서 주로 벗들을 찾아보고, 유람의 큰 조력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방관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또한 지인이나 족친들과 유람을 계획하여 함께 동행하면서 친교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조선시대 유람이라고 하는 문화행위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교유하는 방편 중의 하나였다. 경승의 완상을 목적으로 유람을 결행하기도 했지만, 인적교유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도 병행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유람양상은 현재의 관광에도 지속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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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연구 제106호(20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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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2009,「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삼각산 여행의 시공간적 특성」문화역사지리 제21권 제2호
A social intercourse aspect of Sadaebu’s through traveling in Joseon Dynasty
This thesis aims to find out a social intercourse patterns of Sadaebu(士大夫) through their traveling. As for it, it seems to diverse activities but this thesis will divide three kinds of them such as monks, a teacher and pupil(門人), acquaintance(知人).
Among them, Sadaebu meets monks many times because they almost travel to the mountain. When they go to the mountain, their aid is needed. Thus it is the dispensable relationship between Sadaebu and monks. According to Sadaebu’s documents, there are many Monk’s names. Most Sadaebu voiced their criticism about Buddhist’s ceremony and look down on them but some of them are in favor of meeting monks. When Sadaebu meet monks who write the poem very well, they get along with them by receiving and giving their poems(酬唱). Also when Sadaebu meet monks who have a special academic knowledge, they talk each other by giving their idea about Confucianism and Buddhism. They are very delighted when meeting monks that they already knew and easily talk to them about their internal emotion.
And Sadaebu encounters a district’s scholar in same school during this traveling. This is the special relations between them in the Mt.Chungryang (淸 凉山) and Mt.Jiri(智異山). These mountains visited most of the Joseon dynasty,
Youngnam-Sarims(嶺南士林). Mt.Chungryang the Toegye(退溪) Lee-Hwang(李滉) and Mt.Jiri the Nammyeong(南冥) Cho-Shik(曺植) is originated from the former and it is the cradle about that. Therefore the Youngnam-Sarims often travel the area in order to find out ancestor’s philosophy and admire them, even see their senior and junior scholars.
In addition, the area such as Mt.Geumgang(金剛山), Gaeseong(開城) is the most memorable place for Sadaebu. Even if their relationship between the teacher and them is not evident, they get along each other by this traveling.
During this traveling they can meet their acquaintance and the governor who can help their traveling. Moreover, they can be more familiarized with their relatives by planning to play with them.
The main method to commute their relatives and friends is to write the letter because the transportation is bad in the Joseon dynasty and there is lack of the communication method. Thus going traveling is one of the vehicles about contacting the people who don’t have chance to commute.
2018.03.25
cafe.daum.net/jangdalsoo/aYNU/263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김선희,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삼각산 여행의 시공간적 특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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