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3. 15:12ㆍ집짓기
유교문화와 조선시대 서원건축
조선시대 서원은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고려말 성리학자였던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의 고향인 경상도 순흥(順興)에 그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1542년(중종 37)에 세우고, 그 이듬해인 1543년에 사당 앞에 학문을 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선현(先賢)을 제향하기 위한 사묘와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서원, 즉 사(祠)·원(院)을 한 영역에 결합하여 세운 서원은 백운동서원이 시초이다. 그 후 백운동서원은 1548년(명종 3) 10월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노력으로 1550년(명종 5) 2월 국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를 효시로 하여 건립된 서원들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아카데미로 공인 받으며 연이어 사액을 받기 시작했다. 1550년(명종 5)에는 해주(海州)의 문헌서원(文憲書院), 1554년(명종 9)에는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 1566년(명종 21)에는 함양(咸陽)의 남계서원(?溪書院)에 각각 사액을 내렸다. 문헌서원은 주세붕이 1549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최충(崔?, 984-1068)을 모시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며, 임고서원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모시기 위하여 1554년에 세운 서원이고, 남계서원은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모시기 위하여 1552년 세운 서원이다. 그리고, 1575년(선조 8)에는 정몽주를 모신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이황을 모신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각각 사액을 받음으로써 서원은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늘어났다.
서원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은 재야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적 기반을 누렸다. 중소지주층은 고려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신분으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고 있었으나, 고려말 사회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향리에서 품관(品官)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고, 따라서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들은 이뿐만 아니라 사상적·학문적인 면에서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고려말 조선왕조가 들어설 즈음 중소지주층 출신의 사대부 세력은 기성체제를 부정하는 데는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역성혁명론에 대하여는 찬반 양론으로 갈리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역성혁명 반대론 계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림들은 사학(私學) 활동을 통해 맥락을 잇고 있다가 15세기 후반에 들어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이 곧 사림 세력이다. 이들은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활약상이 뚜렷했다. 사림 세력은 향리에 근거지를 두고 도덕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우면서 훈신과 척신들의 정치 독점에 저항하며 정치개혁을 요구한다. 15세기 성종대를 지나면서 사림 세력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이루려고 하는데, 이들 신진 사류들에게 위협을 느낀 훈신, 척신들은 사화를 일으켜 정치적 탄압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화로 인하여 사림 세력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의 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거나 향리에 은거하여 자기세력 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향촌 활동을 하게 된다.
이와 함께 사림들은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방안으로 도학에 뛰어난 유학자를 문묘에 제향해야 한다는 문묘종사운동(文廟宗祀運動)을 전개한다. 문묘종사운동은 정몽주, 길재(吉再, 1353-1419), 김숙자(金叔滋, 1389-1456),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통을 확립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이는 곧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 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에 대한 교화라는 명분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사림의 교학 진흥을 위해 특정 인물을 제향한다는 방안이 제시되었으며, 이는 사림의 존현처(尊賢處)로서 서원이 발생하고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517년(중종 12)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되고, 백운동서원은 이황의 노력으로 1550년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1554년(명종 9)에는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 사림 세력이 정계를 주도하는 1566년(명종 21)에는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이 각각 사액을 받게 되며, 서원 건립은 지방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는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이 문묘에 종사된다.
조선시대 명종 이후 건립되기 시작한 서원은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그 건립이 현저하게 증가하기 시작해 명종대에 18 개소이던 서원이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60여 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 당시 세워진 대표적인 서원을 들면, 앞에서 언급한 소수서원, 남계서원, 임고서원을 포함해, 1567년(명종 22) 김종직을 봉사하기 위해 경상도 밀양(密陽)에 세운 덕성서원(德城書院, 후에 禮林書院이 됨), 1568년(선조 1)에 세운 김굉필의 경상도 현풍(玄風)의 쌍계서원(雙溪書院, 후에 道東書院이 됨), 1570년(선조 3)에 세운 길재의 경상도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 1573년(선조 6)에 세운 이언적의 경상도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1574년에 세운 이황의 경상도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1576년에 조식(曺植, 1501-1572)을 봉사하기 위해 경상도 산청(山淸)에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이 있다.
그러나, 서원은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엄청나게 첩설(疊設)되고 남설(濫設)되었으며, 서원과 사우(祠宇)는 그 성격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서원은 점점 서원 성립 당시의 본래 정신을 벗어나 붕당(朋黨)으로 인한 당론으로 정권을 견제하며, 또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려 국가재정과 병력을 약화시키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 역대 왕들은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다가, 드디어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서원 훼철이 단행되었다.
1864년(고종 1) 4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서원, 향현사, 생사당(生祠堂) 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것을 명하였고, 같은 해 6월 7일에는 대왕대비의 전교로 아직도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는 각 도의 해당 도신과 유수는 신속히 보고하도록 다시 명을 내린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5년 3월 9일 흥선대원군은 노론계의 중심 세력지로서 가장 병폐가 컸던 충청도 청주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한다. 만동묘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봉사한 화양서원(華陽書院) 바로 옆에 있었던 것으로,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문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등에 의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군사를 보낸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 29) 북향하여 지은 사당이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탄압은 경복궁 중건 등으로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진 1868년(고종 5)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거론된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지방 유림의 완강한 반발을 물리치며, 1868년 9월 3일 원액(元額) 외의 중외서원(中外書院) 재생(齋生)은 병적(兵籍)에 귀속시키고, 미사액서원은 철폐시키는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원을 유생들로부터 탈취하여 지방 수령이 지배 관장토록 하였다. 다음으로, 1871년(고종 8) 3월 18일에는 사액서원 중 문묘 종사자 및 충절대의(忠節大義)가 뛰어난 자 이외의 첩설한 서원에 대해 철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틀 뒤인 3월 20일에는 봉향자 일인일원(一人一院)의 원칙에 의하여 47개소를 제외한 전국의 나머지 원(院), 사(祠) 모두를 훼철했다. 이들 중에서 36개소는 남한에, 11개소는 북한에 소재한 서원과 사우다. 하지만 1874년 이후부터 당시의 정치·사회 상황에 의하여 서원은 다시 하나둘씩 복설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이 설립된 곳은 배향하고자 하는 선현의 연고지다. 이는 선현의 출생지거나 고향, 성장지, 유배지, 충절과 연관된 곳, 관리로 있었던 곳, 은거하여 후학을 지도했던 곳, 묘소가 있는 곳 등으로 구분된다.
풍기 소수서원은 안향, 영천 임고서원은 정몽주, 함양 남계서원은 정여창, 밀양 예림서원은 김종직의 고향이다. 그 외에도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은 김정(金淨, 1486-1520), 청도(淸道) 선암서원(仙巖書院)은 김대유(金大有, 1479-1551),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은 조헌(趙憲, 1544-1592), 안동 임천서원(臨川書院)은 김성일(金誠一)의 고향이다. 나주(羅州)의 미천서원(眉泉書院)은 허목(許穆, 1595-1682)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에 세운 서원이며,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은 김굉필이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은 곳에 세운 서원이다.
강학하던 곳 또는 서당이 모체가 되어 서원이 설립된 곳으로는 이황의 예안 도산서원, 조식의 산청 덕천서원,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 윤황(尹煌, 1571-1639)의 논산 노강서원,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장성(長城) 필암서원, 정구(鄭逑, 1543-1620)의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유성룡의 안동 병산서원 등이 있다. 또한 선산 금오서원은 길재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한 고향에,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이 은거하며 학문하던 곳에,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은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은거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곳에, 경주 옥산서원은 이언적이 은거하며 학문했던 곳에, 청주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강학하며 거처한 곳에 각각 세운 서원이다. 그리고 정읍 무성서원은 신라말에 최치원(崔致遠, 857-?)이 태산(泰山)고을에서 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던 곳에 세운 태산사(泰山祠)를 모체로 하여 세운 서원이다.
충절과 관련된 서원을 보면, 여주(驪州) 강한사(江漢祠)는 송시열이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로 옮긴 후에 이곳에 머물며 영릉을 매일 참배했다고 하여 좌향(坐向)도 영릉을 향한 서향을 하여 짓게 되었고, 영광(靈光) 내산서원(內山書院)은 정유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姜沆, 1567-1618)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안성 덕봉서원은 1689년(숙종 15) 일어난 인현왕후 민씨의 폐비사건을 반대한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영천 용계서원(龍溪書院)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 1392-1480)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고흥(高興) 재동서원(齋洞書院)은 단종이 폐위에되자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한 송간(宋侃, 生沒年 미상)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용인 충렬서원은 정몽주의 묘소, 용인 심곡서원은 조광조의 묘소,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이이의 묘소가 있는 곳에 세운 서원이다. 연고지이기는 하지만 절터에 세운 서원도 있다. 이러한 사찰터의 대부분은 성리학자들이 서원이 들어설 조건으로 꼽았던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그러한 서원으로는 소수서원을 비롯하여 옥산서원, 예림서원 등이 있다.
이외에 성리학의 도통을 위하여 주희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서원으로 임실(任實) 신안서원(新安書院), 공주 충현서원(忠賢書院), 화순(和順) 백록서원(白鹿書院), 곡성(谷城) 도동서원(道東書院), 강진(康津) 남강서원(南康書院)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서원은 관학과 달리 선현을 모시는 곳인데, 예외적으로 공자를 주벽으로 모신 서원도 있고, 기자(箕子)를 모신 곳도 있다. 공자를 모신 서원으로는 명주(溟州) 오봉서원(五峰書院),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울진(蔚津) 운암서원(雲巖書院) 등이 있고, 기자를 모신 서원은 평양 인현서원(仁賢書院) 등이 있다.
서원의 인사조직은 서원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서원을 총괄하는 원장(院長), 원장을 보좌하고 원장이 유고시 직무를 대행하는 원이(院貳), 강학을 담당하는 강장(講長), 원생을 훈도하는 훈장(訓長), 재(齋)의 일체 사무를 결재하는 재장(齋長), 서원의 대소사를 감독하는 도유사(都有司), 도유사를 보좌하는 부유사(副有司), 서원의 사기 장려를 담당하는 집강(執綱), 유회(儒會) 때 사무 집행을 담당하는 직월(直月), 직월을 보좌하는 직일(直日), 서원 대소사에 대한 평의(評議)를 담당하는 장의(掌議), 서원 내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색장(色掌) 등이 있다.
서원의 교육은 그렇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원생들의 목표와 학문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비형식적 자득교육(自得敎育)으로서 도학의 정맥을 잇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원 원생의 생활은 관학의 학령(學令)이나, 주희의 백록동서원 원규(院規), 또는 독자적으로 마련된 원규에 따르게 되어 있었으나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교육과정은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순서로 읽었으며, 그 외 경(經)·사(史)·자(子)·집(集)은 수시로 읽었다.
서원의 배치 및 구성 건축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원의 영역은 홍살문에서 시작된다. 홍살문은 서원 영역으로 진입함을 알리는 상징적인 출입문으로 실제로 문은 달려 있지 않다. 통로 좌우 양쪽에 기둥 하나씩을 세워 기둥 위를 서로 연결하는 부재(部材)를 걸치고, 그 위에 살을 죽 박은, 지붕이 없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서, 그 주변에는 하마비(下馬碑)나 하마석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정문인 외문(外門)이 나온다. 외문은 서원의 전면에 위치하며, 일반적으로 세 칸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외삼문(外三門)이라고 한다. 세 칸일 경우 건축 형식은 가운데 칸이 높은 솟을삼문, 또는 그렇지 않은 평삼문(平三門)으로 된다. 일부 서원에서는 누(樓)를 두는 형식을 취하여 외문을 겸하고 있다. 실례로는 남계서원의 풍영루(風櫓樓), 도동서원의 수월루(水月樓), 금오서원의 읍청루(?淸樓), 무성서원의 현가루(絃歌樓), 예림서원의 독서루(讀書樓), 필암서원의 확연루(廓然樓) 등이 있다.
서원에 따라서는 외문을 지나 들어서면 그 앞에 누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누는 외문과 강학공간 사이에 위치하여 기능적으로 두 영역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지만, 위층 누마루는 주변 경관과 서원 일곽 모두가 조망되는 곳이 되어,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회합을 하거나 시회(詩會)를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옥산서원의 무변루(無邊樓),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 서악서원의 영귀루(詠歸樓), 묵계서원의 읍청루(?淸樓), 자계서원의 영귀루(詠歸樓) 등은 대표적인 예다.
누를 지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공간이 유생들의 교육공간이다. 이곳은 기능적으로는 유생들이 수학하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고, 건축 구성상으로는 강당과 재사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당재공간(堂齋空間)이다. 강당과 재사의 배치 관계는, 서원이 정립되는 초기 시기에는 강당이 후면에, 동재(東齋)·서재(西齋) 등 재사가 전면에 서로 마주 보며 들어서는 이른바 전재후당(前齋後堂) 형식이 주를 이루었고, 그 이후에 건립된 서원 중에는 강당이 전면에, 재사가 후면에 들어서는 전당후재(前堂後齋) 형식도 나타난다. 전재후당을 한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서악서원, 도동서원, 노강서원, 예림서원, 병산서원 등이 있고, 전당후재를 한 서원으로는 필암서원, 흥암서원, 봉암서원, 죽림사(竹林祠) 등이 있다.
강당은 또, 유회나 제사 때는 유림들의 회의장소가 되며, 원장과 원이가 기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당은 원칙적으로 정면 다섯 칸 규모의 건물이어야 하지만, 서원에 따라 규모의 증감이 있는 경우가 있다. 평면 구성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그 양측에 협실인 온돌방을 설치하는 형식이 가장 많다. 강당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도산서원의 전교당(典敎堂), 남계서원의 명성당(明誠堂), 옥산서원의 구인당(求仁堂), 필암서원의 청절당(淸節堂)처럼 당(堂)으로 이름 짓고, 서원의 이름을 쓴 편액을 강당에 걸어 둔 경우가 가장 많다.
재사는 원생들이 기거하며 독서를 하는 곳으로 대개 정면 2-5칸, 측면 1-3칸 정도로 그 규모가 다양하다. 재사는 일당양재(一堂兩齋)의 원칙에 따라 동재와 서재, 두 건물로 나누어 강당의 전면이나 후면 양측에 세워졌다. 동재는 강당에서 앞을 보았을 때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고, 서재는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동재에는 서재보다 선임이 되는 원생이 기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강학공간을 지나면 그 뒤에 사당 일곽이 있는 제향공간(祭享空間)이 형성되어 있다. 신문(神門)은 사당으로 통하는 제향공간의 정문이다. 서원의 교육공간인 강당과 재사 일곽과 신성하고 존엄한 공간인 사당을 경계짓는 기능을 한다. 신문은 서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이기 때문에 정문인 외문(外門)에 대하여 내문(內門)이라 하고, 일반적으로 세 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내삼문(內三門)이라고 한다. 내삼문의 경우, 가운데 문은 신문으로서 제향시 제관과 제수(祭需)만이 통과할 수 있고, 평상시에는 서쪽문을 열어 넣고 출입을 한다.
내삼문을 지나면 나오는 사당은 서원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지존(至尊)한 곳에 자리잡는다. 사당은 제향공간의 중심으로서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베푸는 건물이다. 사당에 모시는 인물은 주로 성균관, 향교의 문묘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모시는 것과는 달리, 안향, 정몽주, 이황 등과 같이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 또는 충절(忠節)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 문중에서 받드는 인물을 모시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예외적으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공자나 기자를 모신 서원도 있다. 사당은 원칙적으로 하나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나 남계서원, 도동서원처럼 사당 옆에 별사(別祠)를 두었다가 고종 때 훼철된 곳도 있고, 강릉의 오봉서원, 고흥의 재동서원과 같이 두 개의 사당으로 이루어진 곳도 있다.
서원의 향례(享禮)는 일반적으로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 그 달의 日辰 중 중간에 있는 丁日), 또는 음력 3월과 9월의 중정일에 행하는데, 지금은 가을에 한 번만 행하는 서원도 있다. 향례가 있게 되면, 제사 삼 일 전부터 제관들이 모여 재계를 하고, 깨끗하고 한결한 마음으로 향례를 행한다. 제관 구성은 제사일을 맡아 보는 집사(執事), 홀기(笏記)를 맡아 읽는 찬자(贊者), 축을 읽는 축관(祝官), 술을 따르는 사준관(司?官), 반찬을 만지는 집찬자(執饌者),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 등으로 된다.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의 배치관계는 기본적으로 강학공간이 서원 경내의 앞에, 제향공간이 뒤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하고 있으나, 서원에 따라서는 안동의 임천서원, 고성의 수림서원, 강진의 수림서원 등과 같이 사당의 좌향축과 강당의 좌향축이 직교를 이룬 곳도 있고, 청도의 자계서원, 안동의 청성서원, 영암(靈岩)의 죽정서원(竹亭書院)처럼 강당과 사당이 서로 옆으로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기타 건물들을 살펴보면,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주요 건물로 장판각이나 장서각이 있다. 이들 건물은 선현들의 문집 등을 판각하여 서적을 펴내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며, 목판을 제작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서원은 장판각을 두고, 일반적으로 판본이나 서적들을 수장하기도 하는데, 장판고, 문집판고(文集板庫), 판각(板閣), 서고 등으로도 불린다. 구조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바닥은 땅에서 떨어뜨려 마루로 하고, 환기구나 살창을 설치한다. 규모가 큰 서원은 장판각과 장서각을 별도로 설치하기도 한다. 옥산서원의 경각(經閣), 필암서원의 경장각(敬藏閣) 등과 같이 서원에 따라서는 장판각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있다. 조선시대 서원의 서적 간행 및 보급, 그리고 수집 및 보관 등의 업무는 오늘날의 도서관 내지 출판사에 준하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
제향공간에 부속되는 건물로는 전사청,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이들 건물은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제향시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다. 전사청은 남계서원, 서악서원, 자계서원 등과 같이 사당 영역 내에 있는 경우도 있고, 예림서원, 옥동서원 등과 같이 제향공간 밖 강학공간 뒤에 있는 경우도 있고,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안동 고산서원 등과 같이 사당 가까이 담 밖에 별도의 영역에 있는 경우도 있다.
기타 서원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서원의 관리자는 원지기, 교지기[校直], 재지기[齋直]라고 하는데, 교지기는 향교 관리자에서 비롯되었다. 고직사는 서원의 기능을 수행하는 원지기의 주거 기능, 재생들의 식사, 제사시 음식을 준비하는 기능, 식량, 용품 등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 등을 갖는데, 교직사(校直舍), 관리사(管理舍), 주사(廚舍)라고도 한다. 방과 대청, 부엌 등으로 평면이 구성되는 것은 일반 살림집과 같으나, 안마당이 부엌 공간이 연장된 작업공간으로 되어 있고 사랑채가 없다. 원생들의 식사 준비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식사는 강학공간과 고직사 사이의 협문을 통해 음식을 운반하며, 원장 등은 강당의 원장실 등에서 각상을 받고, 원생은 동재와 서재에서 겸상을 한다.
고직사는 시대별, 지역별로 서원의 기능이 변화함에 따라 건축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직사는 서원 강학공간 영역 밖 좌측, 또는 우측에 위치한다. 도산서원의 경우 고직사가 둘인데, 상고직사는 ?자형 평면으로 강학공간의 서측, 하고직사는 ?자형 평면으로 도산서당 서측인 농운정사(?雲精舍) 뒤에 위치하였다. 고직사의 평면 유형은 일반적으로 ?, 또는 ?자형이 많다. 전라도 지방은 一자형, 충청도 지방은 ?자형, 경상도 지방은 ?, ?자형이 주로 나타난다.
기타 서원에 부속된 시설로는 생단(牲壇)·관세위(?洗位)·망례위(望?位)·석등 등이 있다.
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을 검사하는 단으로 성생단(省牲壇)이라고도 한다. 성생의(省牲儀), 충돌례(充導禮) 등으로 불리는 희생을 검사하고 품평하는 의(儀), 즉 생간품(牲看品)은 관계관들이 생단에 나아가 생단 주위에 서서 행한다. 생단 서쪽에 선 축관(祝官)이 생단에 준비된 희생이 정결한가를 '돌(導)'하고 물으면, 헌관이 좋으면 '충(充)'하는 것으로 의식이 끝나고 제수를 준비하게 된다. 남계서원의 생단은 강당 오른쪽인 북쪽에 있고, 예림서원은 강당 앞에 있으며, 필암서원의 경우는 생단 대신에 내삼문 앞에 계생비(繫牲碑)가 설치되어 있다.
관세위는 향사 때 헌관(獻官) 등이 손을 씻는 시설물이 위치한 곳으로서 석재 기둥을 세워 그 위에 관분(?盆), 즉 대야를 올려 놓는데, 남향일 경우 보통 사당 앞 동쪽 계단의 동쪽에 위치한다. 헌관은 일반적으로 사당 앞 뜰에 북향을 하여 횡으로 서는데, 서쪽을 윗자리로 하고, 동쪽 계단을 올라 사당에 들어가 제향하기 전에 관세위에 이르러 손을 씻는다.
망례위는 제향공간에 부속된 시설로서 제향을 지내고 난 뒤 축문을 태우고 묻는 곳이다. 향사가 끝나면 축관(祝官)은 축판과 폐를 모시고 사당 앞 서편 계단을 내려와, 사당 서쪽에 마련된 망례위에 나아가 축을 태우고 난 뒤 묻는다. 망료위는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도동서원의 경우는 담에 감(坎)을 설치하여 불을 사른 후 거기에 묻는다.
석등은 석조로 된 구조물 위나 속에 불을 밝히는 관솔불을 놓는 곳으로, 사당이나 강당 앞에 설치된다. 정료대(庭燎臺) 또는 요거석(燎炬石)이라고도 한다.
표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남은 47 원(院)·사(祠)
서원명 | 주향자 | 건립년도 | 사액년도 | 소재지 | 서원명 | 주향자 | 건립년도 | 사액년도 | 소재지 |
崧陽書院 | 鄭夢周 | 1573 | 1575 | 京畿開城 | 道東書院 | 金宏弼 | 1605 | 1607 | 慶尙玄風 |
牛渚書院 | 趙憲 | 1648 | 1675 | 京畿金浦 | 玉山書院 | 李彦迪 | 1573 | 1574 | 慶尙慶州 |
深谷書院 | 趙光祖 | 1650 | 1650 | 京畿龍仁 | 陶山書院 | 李滉 | 1574 | 1575 | 慶尙禮安 |
龍淵書院 | 李德馨 | 1691 | 1692 | 京畿抱川 | 興巖書院 | 宋浚吉 | 1702 | 1705 | 慶尙尙州 |
坡山書院 | 成守琛 | 1568 | 1650 | 京畿坡州 | 玉洞書院 | 黃喜 | 1714 | 1789 | 慶尙尙州 |
四忠書院 | 金昌集 | 1725 | 1726 | 京畿果川 | 忠烈祠 | 宋象賢 | 1605 | 1624 | 慶尙東萊 |
江漢祠 | 宋時烈 | 1785 | 1785 | 京畿驪州 | 屛山書院 | 柳成龍 | 1613 | 1863 | 慶尙安東 |
德峰書院 | 吳斗寅 | 1695 | 1700 | 京畿陽城 | 彰烈祠 | 金千鎰 | 宣祖時 | 1607 | 慶尙晋州 |
忠烈祠 | 金尙容 | 1642 | 1658 | 京畿江華 | 忠烈祠 | 李舜臣 | 1614 | 1723 | 慶尙固城 |
鷺江書院 | 朴泰輔 | 1695 | 1697 | 京畿果川 | 褒忠祠 | 李述原 | 1738 | 1738 | 慶尙居昌 |
顯節祠 | 金尙憲 | 1688 | 1693 | 京畿廣州 | 彰節書院 | 朴彭年 | 1685 | 1699 | 江原寧越 |
紀功祠 | 權慄 | 1841 | 1842 | 京畿高陽 | 忠烈書院 | 洪命耉 | 1650 | 1652 | 江原金化 |
遯巖書院 | 金長生 | 1634 | 1660 | 忠淸連山 | 褒忠祠 | 金應河 | 1665 | 1668 | 江原鐵原 |
魯岡書院 | 尹煌 | 1675 | 1682 | 忠淸魯城 | 淸聖廟 | 伯夷·叔齊 | 1691 | 1701 | 黃海海州 |
彰烈書院 | 尹集 | 1717 | 1721 | 忠淸鴻山 | 太師祠 | 申崇謙 | 高麗時 | 1796 | 黃海平山 |
忠烈祠 | 林慶業 | 1697 | 1727 | 忠淸忠州 | 文會書院 | 李珥 | 未詳 | 1568 | 黃海白川 |
表忠祠 | 李鳳祥 | 1731 | 1736 | 忠淸淸州 | 鳳陽書院 | 朴世采 | 1695 | 1696 | 黃海長連 |
武城書院 | 崔致遠 | 1615 | 1696 | 全羅泰仁 | 老德書院 | 李恒福 | 1627 | 1687 | 咸鏡北靑 |
筆巖書院 | 金麟厚 | 1590 | 1662 | 全羅長城 | 三忠祠 | 諸葛亮 | 1603 | 1668 | 平安永柔 |
褒忠祠 | 高敬命 | 1601 | 1603 | 全羅光州 | 武烈祠 | 石星 | 1593 | 1593 | 平安平壤 |
?溪書院 | 鄭汝昌 | 1552 | 1566 | 慶尙咸陽 | 忠愍祠 | 南以興 | 1681 | 1682 | 平安安州 |
西岳書院 | 薛聰 | 1561 | 1623 | 慶尙慶州 | 表節祠 | 鄭蓍 | 純祖時 | 1824 | 平安定州 |
紹修書院 | 安珦 | 1543 | 1550 | 慶尙順興 | 酬忠祠 | 休靜 | 未詳 | 1784 | 平安寧邊 |
金烏書院 | 吉再 | 1570 | 1575 | 慶尙善山 | - | - | - | - | - |
표 2. 서원 및 사우의 건립·사액수(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분 |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 | 광해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 경종 | 영조 | 정조 | 순조 | 헌종 | 철종 | 고종 | 미상 | 계 | |
건립 -사액포함 |
서원 | 4 | - | 18 | 63 | 29 | 28 | 27 | 46 | 166 | 8 | 18 | 2 | 1 | - | - | - | 7 | |
사우 | 12 | - | 1 | 22 | 9 | 25 | 10 | 23 | 174 | 20 | 145 | 6 | - | 1 | 1 | - | 43 | 492 | |
합계 | 16 | - | 19 | 85 | 38 | 53 | 37 | 69 | 340 | 28 | 163 | 8 | 1 | 1 | 1 | - | 50 | 909 | |
사액 | 서원 | - | - | 4 | 16 | 12 | 4 | 7 | 31 | 105 | 9 | 7 | 3 | 1 | - | 1 | - | - | - |
출처 : http://www.arc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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