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2] 북한산 국녕사 ~ 노적사 ~ 서암사터 길 外

2019. 1. 8. 17:37산 이야기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2] 북한산 국녕사 ~ 노적사 ~ 서암사터 길

민초들 애환 간직한 북한산 둘레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부럽잖다


 


cnbnews 제303-304호 박현준⁄ 2012.12.10 11:03:05

 

   북한산 속, 또 한 번 잊혀진 절터를 찾아가는 날이다.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와 북한산성 방향으로 가는 버스(34번, 156번, 704번)로 환승한다. 은평뉴타운을 지나 백화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북한산성 대서문길보다 언제나 한산하여 봄가을 시즌에도 북한산성 오르기에 호젓함을 느끼게 하는 코스다. 백화사 안내판을 따라 골목길로 잠시 들어서면 둘레길 표지판과 만나면서 여기소 경로당 앞 여기소(汝其沼) 옛터를 알리는 안내석이 서 있다. 설명문에 북한산성을 쌓을 적에 어느 지방관리가 올라 왔는데 그를 사랑하는 기생이 만나러 왔다가 끝내 못 만나고 이 소(沼)에서 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이라고 시적(詩的) 풀이를 해 놓았다.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해석이 너무 좋아 미소 짓는다. 경로당 뒤편 물 흐르는 계곡쪽으로 가 보았더니 여기 소는 시멘트로 메워진 채 매 마른 물길이 되어 있었다. 그 사랑도 이렇게 매 말라 가는구나. 백화사 방향길로 잠시 나아가면 동네 슈퍼와 음식점이 있다. 그 옆으로는 회백색 바위 하나가 앉아 있다. 계곡을 메우고 길을 만들었기에 길옆에 반은 묻혀 볼품없이 되었다. 자연하천이 살아 있을 적에는 번듯한 바위였을 것이다. 둘레길에 세워놓은 길안내 지도에 ‘소금바위’라고 적혀 있다. 소금바위?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진관사 입구에 가면 세종의 9째 아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묘역이 있다. 그 신도비에 옮기기 전(前)의 묘역이 ‘양주 중골(中興洞) 솜바위(면암:緜岩)를 정북으로 등지고 앉았다(자좌:子坐)’고 했다. 진관사 입구엔 세종 9째 아들 묘역 또 잠시 후 지나갈 내시묘역을 답사한 기록(박상진 님)에 의하면 내시묘역에 묻힌 분들 후손이 소장한 가승(家乘)에 선조들 묘역이 ‘중골(中興洞) 솜바위(緜岩) 동쪽’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곳 중골에 랜드마크가 될 만한 상징물로 솜바위(緜岩)가 있었다는 말이다. 솜바위는 어느덧 유래를 모르는 후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소금바위로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 소금장수 전설 하나 덧붙여지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소금바위를 지나 작은 돌다리를 건너 백화사로 들어간다. 근래에 개산(開山)한 비구니스님들의 작은 절이다. 안쪽 흰 바위에 삼존불을 모셨다. 근년에 모신 마애불 중에는 꽤 균형잡힌 모습을 하고 있다. 백화사를 나오면 둘레길에 이곳이 내시묘역(內侍墓域)길임을 알리고 표지판이 붙어 있다. 2003년 11월에 은평향토사학회에서는 이 곳 백화사 뒤 옛 내시가문 사패지에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 45기의 조선 내시묘역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렸다. 외관이야 일반 사대부집 선영과 다를 바 없었으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야곱의 묘소가 있기에 세계의 순례길이 되었듯이, 북한산 둘레길이 역사와 옛사람들의 삶, 이야기가 있는 길이 되는데 한 축을 맡을 만한 유산이었다. 그런 내시묘역이... 금년(2012년) 4월 5일 한 일간지에 45기묘가 완전히 갈아엎어져 평탄지가 된 사진과 함께 자손들이 4억 8000만원에 이 땅을 팔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2012년 이 시점에 우리 세대가 한 일이라니. 이제는 이 길 이름을 바꾸자. ‘내시묘역 없는 길’.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길 우측 철조망 너머는 사라진 내시묘역이며, 좌측은 송금물침비(松禁勿侵碑)의 주인공 이해룡(李海龍) 선생이 묻혀 있는 경주이씨 선영(先塋)이다.




   살짝 오르는 고개마루에서 우측 의상봉/가사당암문 길로 접어들어야 하나 고개 아래 30여m 지점에 세워져 있는 경천군 송금물침비(慶川君 松禁勿侵碑)를 둘러본다. 선생은 임진왜란 즈음하여 역관으로 일본과의 화평교섭에 공을 세워 이 지역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잡인들이 이 사패지 안에 들어오지 말고 소나무도 베지 말라는 금표비를 세운 것이다. ‘경천군 사패지이니 정해진 경계 내에는 침범 및 소나무 벌목 금지(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만력 42년(광해군 7년 1614년). 조선시대에는 소나무 무단벌목을 엄히 다스린 실록기록이 있다. 한두 그루 베면 곤장 100대(斫 一二株者杖一百), 서너 그루 베면 곤장 100대+군대징집(三四株者杖一百 充軍), 열 그루 이상이면 곤장 100대+전가족 변방이주(十株以上者杖百 全家徙邊). 우리 땅 소나무는 이렇게 해서 보존된 것들이다. 최근 동일한 또 하나의 금표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와 짝을 이룬 비인데 약 1km전방 북한산초등학교 담 옆에서였다. 내용은 동일한데 송금(松禁)이 금송(禁松)으로 순서만 바뀌어 있다. 무심하게도 이 비석은 그 간 잊혀져 뒷면에는 ‘정씨 박씨 합장지묘’라 기록했으니 어느 민초가 가져다 묘표(墓表)로 삼았던 것이다. 자손 없는 내시의 삶 고스란히 담긴 흔적 갔던 길을 잠시 되돌아와 의상봉/ 가사당암문 방향으로 간다. 막바로 의상봉과 가사당암문길이 갈라진다. 오늘은 우측 가사당암문길이다. 주변에는 조선시대 잊혀진 묘의 석물(石物)들이 눈에 띈다. 자손 없는 어느 내시의 삶의 흔적이었을까? 내시묘역 철조망이 끝날 즈음 왼쪽 등성이에 무너진 오랜 석축(石築)이 보인다. 잠시 오르면 넓은 평탄지에 낙엽 속에서 깨어진 기와편들이 고개를 든다. 잊혀진 절터, 어느 누구도 올라와 보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기록해 주지도 않는 절터, 이런 곳에 오면 마음속에 싸~한 바람이 지나간다. 오르는 길 계곡은 맑다. 500여m 오르면 등산로 옆에 작은 민묘(民墓) 두 기가 있다. 주변 낙엽 속을 한참을 들치노라면 몇 개의 기와 쪽이 손에 잡힌다. 아마도 아래 큰절에 속했던 암자터일 것이다. 큰 절도 잊혔는데 암자야 더해 무엇 하리. 게다가 암자터를 파내고 묻은 묘도 잊혀져 이제는 반은 평평해졌다. 이 길을 다니는 산사람들에게는 절터도 암자터도 모두 마음 밖이다. 이제부터는 길이 가팔라진다. 백화사에서 가사당암문까지는 2km 남짓한 거리이다. 오르는 길 옆 계곡은 수량은 많지 않아도 깨끗하고 바위가 수려하기에 매니아들이 다니는 길이다. 한 시간 남짓 올라 가사당암문에 도착한다. 의상봉과 용출봉(龍出峰) 사이에 수줍게 숨어 있는 문이다. 네모진 문 안으로는 백운대가 위풍 있게 자리 잡는다. 암문 프레임 속에 산의 실물을 담은 듯하다. 문밖 성벽에 기대어 커피 한 잔 마신다. 이 곳이 햇볕 따습고 바람도 없는 명당이다. 성벽에는 300년 전 성(城)을 싼 사람들이 기록한 각자(刻字)가 세월에 무디어져 간다. 八牌(팔패). 이 곳은 팔패에 속하는 이들이 쌓았구나. 북한산성 축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에도 축성을 위한 조직편성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이런 각자(刻字)로 짐작할 수 있다. 패(牌)란 우리가 요즈음에 쓰는 단어 속에도 살아 있듯이 ‘패거리’, ‘깡패’처럼 그 무리를 일컫는 말인데 아마도 산성을 쌓을 때 1패, 2패, 3패...로 나누어 책임구역을 맡기는 실명제(實名制)였을 것이다. 잘못 쌓거나 무너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불려와 다시 쌓아야 했으니 인위적으로 훼손하지 않은 지역은 300년이 지나도 온전한 곳이 많다. 북한산성 축성사를 정리한 북한지 암문에서 200여m 가파르게 내려가면 국녕사(國寧寺)가 있다. 산성 축성 시에 지어졌는데 86간에 승려 청휘, 철선이 창건하였다 한다.(八十六間 淸徽 徹禪 所刱). 가사당 암문을 지키기 위한 거점 사찰이었다. 영조 때 학자 여암 신경준 선생의 가람고(伽藍攷)에 소개되어 있으나 한국사찰전서(1979년)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국녕사는 옛 국녕사터에 중창한 것이다. 자리만 그 곳일 뿐 옛 국녕사의 법등(法燈)은 전해지지 못하였다. 중창한 뒤 1991년 불탔다 하며 1998년 능인선원에서 본격적인 중창을 거쳐 대가람이 되었다. 24m의 국녕대불과 만불은 가히 장관이다.



   대불 뒤 능선 바위에는 인위적으로 무엇인가 새긴 것 같은 흔적이 완연하다. 흔히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여러 번 확인하여도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또 하나 옛 국녕사의 흔적이 있다. 절 앞 좌측 언덕길에 종형(鐘形)의 한월당대선사(漢月堂大禪師) 부도(浮屠)가 있다. 국녕사에서 도를 닦다 열반하신 것은 분명한데 기록이 없으니 어느 분인지 알지 못한다. 국녕사를 뒤로 하고 산성 안으로 내려간다. 북한산성 계곡에 닿을 즈음 범용사가 자리잡고 있다. 내려가는 길이 너무 협소하다. 북한산성대로인 계곡길에 닿는다. 여기에서 우향우, 산성 안 중성문(中城門)으로 들어간다. 문은 대문과 좌측 암문이 있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을 쌓은 이듬해(1712년) 숙종은 몸소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는데 이 때 대서문 쪽이 낮으므로 든든한 방어를 위해 안쪽에 중성(重城)을 쌓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2년 뒤(1714년) 성이 완성되었으니 그 때 만든 문이 중성문(中城門)과 암문(暗門)이었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산성 안에서 명(命)이라도 끊어지면 그 육신은 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암문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암문은 슬픈 이름 시구문(屍口門, 屍柩門)이 되었다. 나의 한 길친구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결코 이 문으로 다니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가며 장난을 친다. ‘귀신 환생이요~’. 문안으로 들어가 잠시 오르니 계곡에 걸린 다리 운하교(雲河橋)가 있고 다리 건너 안 쪽에는 노적사(露積寺)가 있다. 옛 분들은 여기를 노적동(露積洞)이라 불렀다. 잠시 가파른 길 올라 노적사에 닿는다. 노적봉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다. 300년 전 산성을 쌓은 후 이 자리에는 진국사(鎭國寺)란 절이 자리잡았었다. 85간으로 북한지를 지은 성능스님이 창건했던(八十五間 僧聖能所刱) 절이었다. 폐사된 자리에 60년대에 노적사가 세워졌다. 노적사란 이름은 원래 원효봉 아래 상운사(祥雲寺)의 옛 이름이다. 혹시 옛 자료를 읽는 분들은 혼동하지 않으시기를.



   노적사에는 불탑과 석불을 세웠는데 불탑에는 네팔로부터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모셔와서 봉안했다 한다. 그래서 노적사는 적멸보궁이 되었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노적사 법당에도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벽을 뚫어 유리창 밖으로 불탑에 경배하도록 해 놓았다. 부처의 진신사리는 본래 석가가 돌아가시자 그 사리(舍利)를 8 탑에 봉안하였다. 후에 아쇼카왕이 8만4000 탑을 만들어 그 곳에 분산 안치했는데 모든 탑에야 어찌 안치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부처의 진신사리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100개의 사리를 가져다가 황룡사, 태화사,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한 불교도들의 믿음이 깊어지면서 근래에는 여러 사찰이 동남아에서 진신사리를 옮겨 봉안하는 일이 많아졌다. 노적사를 나와 북쪽 능선길을 넘어간다. 노적봉을 오르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 길은 출입제한구역이 되었다. 출입금지구역은 아니건만 이 곳을 지키는 직원은 위압적인 자세로 길을 막는다. 훈련도감 창고 적석사 오른편엔 경외로운 노적봉 능선 위에는 펜스로 둘러친 사묘(私墓)가 잘 가꾸어져 있다. 그 능선 너머로는 옛 건물터가 층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가 경작했던 밭고랑에는 석축도 보이고 무수히 많은 기와 파편들이 밟힌다. 아마도 적석사(積石寺)의 옛터일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적석사는 기록되어 있는데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적석사는 훈련도감의 창고가 되었다(今爲訓局倉舍-北漢誌에서). 오른쪽으로는 노적봉의 경외(敬畏)로운 모습이 길손을 내려다본다. 10여분 정도 걸었을까 사오백평은 실히 넘을 넓은 터 한 켠에 주춧돌이 배열되고 석축도 가지런한 평탄지가 나온다. 훈련도감이 있던 곳이다. 북한지에 따르면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축성 시에 대서문 옆 수문에서부터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를 거쳐 용암봉까지 2292보의 성을 쌓고 이 쪽 구역을 방어하였다(自水門北邊 至龍岩二千二百九十二步). 아래로는 돌을 반듯하게 손질하여 만든 연못도 보인다. 비상시에 사용할 수원(水源)이었다. 북한지에 기록된 연못을 보면 모두 26곳인데 11개소가 훈련도감 관할구역에 있었다. 이 곳 연못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훈련도감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각자(刻字)가 새겨진 바위들일 것이다. 방위를 그려 놓은 바위야 보면 이해가 되는데 ‘戊’를 새긴 바위와 ‘戊法臺와 알 수 없는 문양’을 함께 새긴 바위는 해득하기 어렵다. 본래 戊라는 글자는 창 과(戈)에 도끼날이 붙은 무기를 뜻하는 글자였다. 그러니 ‘도끼날 붙은 창’이란 뜻으로 창 모(矛)의 옛 글자 형태이기도 했다. 훈련도감다운 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戊가 천간(天干)에 다섯 번째 글자로 빌려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뒤에 일이다. 또 알 수 없는 문양은 무엇일까? 아마도 날 달린 창 두 개를 캐릭터화 하여 만든 훈련도감의 심볼 마크는 아니었을까? 이제 오던 길을 이어서 간다. 잠시 후 노적봉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의 안부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노적봉이며, 왼쪽으로 가면 북장대터로 이어진다. 북한지에는 ‘장대는 3개인데 북장대는 중성문 서북에 있다(在中城門西北)’고 하였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북한도에는 노적봉에서 내려와 혈(穴)을 맺은 봉우리 위에 북장대 그림이 완연하다. 이 안부 갈림길 좌측 끝 제일 높은 봉우리에 북장대가 있다는 말이다. 잠시 후 민묘가 하나 있는 470m 봉우리에 닿는다. 북장대 흔적은 남은 것이 없다. 초석으로 쓰였을 돌 몇 개가 전부인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봉우리 이름은 정확하지 않은데 북한지에 기린봉(麒麟峰)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노적봉 아래에 있다(在露積峰下)고 했으며 달리 이 봉우리를 지칭할 만한 다른 이름은 언급한 것이 없다. 아마도 이 봉우리가 기린봉 맞을 것이다. 이제 안부로 회귀하여 대동사 방향으로 넘어 간다. 백운대 아래 백운동암문(위문) 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만난다. 앞쪽으로는 대동사가 있고 좌로 길을 잡으면 상운사 갈림길이다. 이 길로 내려오면 개연폭포를 지나는데 이내 보리사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50년대 말 이승만 대통령 방문시에 영빈관으로 사용한 등운각 건물이다. 연전(年前) 번성하던 북한동 마을이 있던 이곳은 어느덧 공원화되었다. 새로 지은 북한동역사관만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을씨년스레 앉아 있다. 어디서 온 흰둥이도 관심없는지 길게 하품을 한다.



   하산길은 계곡길로 잡는다. 잠시 내려 오면 계곡 건너 원효봉 아래에 있는 덕암사 갈림길을 만난다. 북한산 산꾼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 절이다. 심력(心力)이 깊은 비구니 스님이 주지로 계신다. 산문에 들어서면 연대를 알 수 없는 작은 석불이 길손을 맞는다. 아직 모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임시로 봉안하였다 한다. 절 마당에는 큰 석불 입상이 아랫세상을 내려다보신다. 법당은 바위굴 안에 있는데 차디찬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불단 위에는 관세음과 대세지 두 보살을 협시보살로 여래께서 앉아 계신다. 산꾼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덕암사 본래 철원 심원사에 계시던 보살인데 6.25 전생 때 본존불은 인왕산 환희사로 가고, 협시보살은 이 곳 덕암사로 왔다고 한다. 6.25는 부처님도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경기도 문화재 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라도 이산가족을 함께 사시도록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 염원을 담고 덕암사를 나선다.




   계곡옆길 내려오기를 잠시 철층계를 내려 오면 바위 사이에 칠유암(七遊巖)이라고 쓴 바위가 계곡 안에 있다. 순조 때의 문신 석재 윤행임(尹行恁)의 북한기(北漢記)에는 "삼백보 정도 따라 오르니 칠유암이 나타난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의 평장사 민지가 6명의 지인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서 이로써 바위 이름을 정했다 (沿上三百步 出七遊巖 世傳高麗平章事閔漬從六人乎遊 巖之名以此)." 라고 칠유암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민지(閔漬)는 고려 충렬왕, 충선왕 때의 문신으로 이 곳에 그의 유서(遺棲:옛터)가 있었다(高麗文仁公閔漬遺漬在水口門內- 북한지). 칠유암 아래에는 서암사터가 있다. 산성을 쌓은 후 승려 광헌이 133간으로 창건한 절이다.(一百三十三間僧廣軒所刱). 처음에는 민지사(閔漬寺)였었는데 민공의 이름을 기휘(忌諱: 옛분이나 높은 분의 이름자를 피함)하여 서암사로 고쳤다. 요즈음 중창하려고 터 닦기가 한창이다. 서암사라는 사명(寺名)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계곡길을 계속 내려오면 홍수에 쓸려간 수문(水門)터를 만난다. 앞 쪽 바위에는 희미한 각자(刻字)가 보인다. 아마도 성을 쌓고 문을 지을 때 사람들이 적어 놓은 기록인 것 같다. 이제 무너진 수구문을 지나 속세로 돌아온다. 목이 출출하다. 일행과 들린 막걸리집 벽에 낙서가 눈에 띤다. 西厓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白沙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누군가가 취흥(醉興)에 젖었나 보다. 홍만종(1643~1725)이 지은 명엽지해(蓂葉志諧)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선조의 명신인 송강 정철, 일송 심희수, 서애 유성용, 월사 이정귀, 백사 이항복 이렇게 5인이 모였는데 가장 멋진 소리(聲)가 무엇인지 겨루기로 했다. 자아~ 이 소리는 어떻겠소? 맑은 밤 밝은 달에 누 위로 지나는 구름소리(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송강 산 가득 붉은 단풍에 먼 산 바람소리(滿山紅樹 風前遠岫聲) 일송 새벽창 잠결 작은 술통에 술 거르는 소리(曉窓睡餘 小槽酒滴聲) 서애 산간 초당에 도련님 시 읊는 소리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월사 화촉동방 그윽한 밤 그녀 치마끈 푸는 소리(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백사 이 저녁 문득 백사(白沙) 선생과 한 잔 하고 싶구나.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34, 156, 704번 버스환승 백화사 하차 걷기 코스 여기소 ~ 백화사 ~ 경천군 금송비 ~ 옛절터 ~ 옛암자터 ~ 가사당 암문 ~ 국녕사 ~ 중성문 ~ 노적사 ~ 적석사터 ~ 훈련도감터 ~ 북장대터 ~ 보리사 ~ 덕암사 ~ 칠유암 ~ 서암사터 ~ 수문터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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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2] 북한산 국녕사 ~ 노적사 ~ 서암사... 2012.12.10 | CNB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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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화엄십찰 '청담사'의 위치는 북한산 어디일까

덕성여대·은평구청 학술대회
'청담사' 명문 기와 출토 건물지
'청담사' 명문 기와 출토 건물지[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서울 은평뉴타운 조성 과정에서 '삼각산 청담사 삼보초'(三角山 靑覃寺 三寶草)라는 명문 기와가 나온 곳은 과연 신라 화엄십찰 중 하나인 청담사의 터일까.

덕성여대 산학협력단·미술문화연구소는 서울 은평구청과 함께 '청담사' 기와 출토지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대회를 22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었다.

화엄십찰은 통일신라시대 화엄종을 퍼뜨린 10개 사찰로, 최치원904년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이름이 나열돼 있다. 그중 하나가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에 있는 청담사다. 한주는 서울을 뜻하고, 부아산은 북한산 줄기인 북악(北岳)의 옛 명칭이다.

지난 2007∼2008년 발굴조사에서는 '청담사' 명문 기와 외에도 6동의 건물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기와, 자기가 출토됐다.


   당시 학계에서는 명문 기와를 근거로 기와 출토 지점과 통일신라시대 후기 혹은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석조보살입상이 봉안된 자씨각(慈氏閣) 일대가 그간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던 청담사지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 북한산의 절터 가운데 고려시대 이전에 제작된 유물이 나온 장소가 자씨각 일대밖에 없다는 점도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거론됐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건물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확인되지 않았고, 석조보살입상과 건물지 사이에 연관성이 규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곳을 청담사지로 간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명문기와(왼쪽)와 그 탁본(오른쪽)
명문기와(왼쪽)와 그 탁본(오른쪽)이 기와에는 '삼각산 청담(三角山 靑潭)이란 글자가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날 학술대회에서도 배재훈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남향, 사면에 회랑이 있는 독특한 건물 구조로 봤을 때 이 건물지를 사찰로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한성과 서울을 잇는 교통망의 거점에 있다는 점에서 관용 건물 또는 원(院)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승연 경기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유적의 위치와 배치, 평면 구성 등을 고려하면 이 건물지를 청담사의 중심 사역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청담사에 관한 사료와 발굴 유적의 추정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대해 "사원 중창에 따른 이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이외에도 청담사지의 보존정비 방향 검토, 고려청자의 출토 사례를 통해 살펴본 청담사의 위상, 청담사지 출토기와 고찰 등에 관한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9/22 10:06 송고









옛 선비들 풍류 즐겼던 ‘북한산 무릉도원’ 등산코스 아시나요?


   북한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주변의 경관은 북한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예로부터 유명했다. 북한산 산영루(山映樓)와 민지암(閔漬岩), 칠유암(七遊巖) 등은 이름 난 경치로 시인묵객들이 찾은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특히 산영루가 있던 총융사 선정비 맞은 편 계곡 일대는 무릉도원으로 부를 정도로 옛 선인들이 제일의 경관으로 손꼽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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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탐방안내소에서 계곡방향으로 가는 등산로 들머리에 큰 버드나무가 있다.


   그 아름다운 경관을 등산을 통해 즐기기 위해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이다. 도보탐방로와 차도로 같이 이용되는 대서문과 중성문 올라가는 길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길과 두 갈래로 나눠진다. 다시 접속되는 지점까지 계곡길은 1㎞이고 차도는 1,8㎞라고 안내하고 있다. 계곡길은 흙길이면서 짧고, 차도는 시멘트길이면서 길어 당연히 계곡길이다.

   보통 등산객들은 이 계곡 등산로를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이곳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북한산의 풍경을 벗 삼아 놀던 바로 그곳이다. 계곡에 들어서면 위쪽은 처마 같고 밑은 평상 같이 묘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고려 충숙왕 명 재상 민지가 놀던 곳이라 하여 민지암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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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계곡엔 어디든지 큰 바위가 있어 쉬기에 좋다.


   민지암에서 100m쯤 올라가면 계곡 중간에 큰 바위가 군데군데 널려 있고, 한쪽으로는 넓은 암반이 깔려있다. 그 위로 큰 바위와 암반 사이에 폭포가 걸려 있다. 이 폭포 밑에 20~3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하나 있다. 바위 앞면에 ‘七遊巖’(칠유암)이라고 새긴 큰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칠유암에서 옛 선비들이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시와 술로 탁족회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조선 숙종․영조 때의 시인 강박은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여기서 ‘칠유련구(七遊聯句)’ 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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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나치기 쉬운 칠유암 바위. 계곡 중앙에 있어 조금만 관심 기울이면 볼 수 있다.


   도보탐방로와 차도가 다시 접속되는 1㎞ 거리의 계곡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주위를 잘 살피면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접속되는 지점에서 불과 20m 앞이 분기점이자 원점회귀 지점이다. 1972년 완공한 새마을교를 지나면 삼거리이다. 왼(북동)쪽으로는 백운대 방향이고, 오른쪽은 중성문과 중흥사지, 북한산성대피소로 올라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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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원효봉과 염초봉이 보인다.


   계곡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 왼쪽으로는 음식점과 등산용품 매장들이 늘어서 있다. 이 매장과 음식점들은 오는 6월까지 산성 주차장 인근 새 건물로 철수해야 한다. 상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합의했다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

상가가 완전히 없어질 즈음 조그만 주차장과 마지막 화장실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차가 올라올 수 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고 돌아가야 한다. 간혹 이곳에 주차하고 등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본격 등산로다. 흙으로 된 길과 나무가 우거진 숲을 즐길 수 있다. 곧바로 중성문이 나왔다. 안내문에는 축성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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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12대문 중의 하나인 중성문.

   ‘중성문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 해인 숙종 38년(1712년)에 산성수비 보완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한 성이다. 당시 별도의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유영․창고 등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중성문에서 행궁터까지는 실제로 그리 멀지 않다. 운하교(雲河橋)를 지나 용하사 방향으로 곧장 올라갔다. 노적교를 지나서 나온 삼거리에 부왕동암문 0.9㎞→, 대남문 2.2㎞↑, 산성탐방지원센터 3.3㎞↓ 이정표가 있다. 물론 대남문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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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영루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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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영루 흔적만 남아 있다.

   ‘북한산의 무릉도원’ 이라 불렸던 산영루가 나왔다. <북한지> ‘산영루는 중흥사 앞에 옛날 작은 다리를 덮고 누각을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지>를 쓴 1745년 당시에 벌써 산영루가 없어졌다고 하니,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오래된 듯하다. 이후 산성을 축성할 때 다시 지어 1907년 사진엔 산영루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다. 이 산영루가 있던 총융사 선정비가 있는 앞쪽 계곡 일대를 ‘무릉도원’이라 불렀으며, 북한산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꼽았다. 지금은 장주형 초석 10개만 남아 그 옛날 풍경의 자취만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1910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인 신부는 깊은 계곡의 폭포수와 넓은 암반 등 주위의 경관이 뛰어나 “아름다운 조선”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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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총영사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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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총융사 선정비.


   산영루 바로 뒤 용학사 앞 오솔길 주위에 많은 비석들이 서 있다. 이른바 ‘비석거리’로 불리고 있는 등산로이다. ‘무슨 비석인가’ 궁금해 하는 등산객들이 많을 것이다. 이 비석들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총융사의 재임 시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대부분 1800년대 세운 것들이다. 예전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높이 1~2m 비석 21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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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영루 옆에 있는 계곡.

   불과 200여m 위에는 북한산성 중심부에 있었던 중흥사지와 태고사가 있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부의 또 하나의 옛 석성인 중흥산성 남쪽에 자리했으며, 고려 말기 고승 보우(普愚)가 중수한 북한산성 내의 중심사찰이었다. 지금은 초라한 흔적만 남았지만 한번 둘러보면 그 절터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숙종 37년 북한산성을 축성한 후 증축하여 136칸 규모의 대사찰이 되었다. 산성 안의 승군 350여명을 거느리는 팔도도총섭의 총지휘부 승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컸다. 등산로 가는 길에 현재 중건 사업을 벌이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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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중흥사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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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중흥사지 터 입구.


   중흥사지 지나자마자 나오는 이정표가 ‘←0.8㎞ 북한산대피소, 대남문 1.8㎞(태고사 방향)→’를 가리키고 있다. 북한산대피소로 바로 갈 수 있지만 잠시 태고사로 둘러가도 좋다. 태고사에는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태고사고려 충혜왕 때인 1341년 고승 보우삼각산 중흥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수도처로 마련한 동암인 곳이다. 절 크기는 조그만 하지만 뒤쪽엔 고려 후기의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제 749호)과 그 탑비(보물 제611호)가 눈길을 끈다. 국사탑은 원증국사 보우의 묘탑으로 수십 년 간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 복원되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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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611호인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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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태고사에서 북한산성대피소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에 좌우로 참나무가 군락을 이룬 분위기 있는 등산로이다. 대피소 바로 밑 옹달샘에 도착했다. 샘물은 몇 년 전까지 마실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각종 균의 검출로 ‘음용 부적격’이다. 주변엔 화장실과 넓은 공터가 있어 등산객들의 집결지로서 활용한다.

이곳에서 원점회귀 하기 위해서는 위문으로 가야 한다. 용암문 0.2, 백운대 1.7㎞라고 안내하고 있다. 주변엔 소나무는 별로 없고, 참나무와 활엽수 종류가 우점종을 점하고 있다. 소나무는 가끔 눈에 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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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749호인 태고사 원증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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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749호 태고사 원증국사탑.

   백운대 못 미쳐 노적봉 갈림길에 왔다. 노적봉은 위험구간으로 입산통제하고 있다. 백운대 가는 길은 밧줄 잡고 가야하는 다소 위험한 구간의 연속이다. 위험할수록 경관은 뛰어난 법이다. 하늘재에서 백운산장으로 올라가는 깔딱고개에서는 백운대와 인수봉 등을 전면에서 보지만 여기서는 이들 봉우리의 뒷모습과 원효봉, 염초봉, 노적봉 등의 준령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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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대피소 올라가는 등산로는 참나무가 숲을 이룬 한적한 길이다.

   위문에 도착해서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를 머리 위로 쳐다본다. 시간이 되면 백운대 정상에서 북한산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하산길은 여러 갈래다. 원점회귀 하기 위해선 산성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북한산성으로 하산 길은 가파른 돌계단의 연속이다. 무릎에 다소 부담을 줄 수 있다.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걷는 게 좋다. 이 코스는 원효봉상운사로 가는 오른쪽 갈림길이 딱 한번 나오는 것 외엔 갈림길도 없는 외길이라 등산로를 따라 곧장 내려가면 된다. 오른쪽으로 염초봉의 웅장한 암벽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엔 계곡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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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문


   마침내 원점회귀 지점인 등운각에 도착했다. 지도엔 등운각으로 표시돼 있지만 등운각을 아는 사람은 하나 없었다. 지나가는 비구니에게도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주변 상인은 “옛날에 등운각이란 개인 별장이 있었지만 약 15~16년 전쯤 보리사라는 절로 바뀌었다. 20년 넘게 장사했지만 누가 사는지, 왜 바꿨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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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대피소에서 백운대 방향으로 가는 등산로.

   보리사 주변엔 상가들로 북적거렸다. 1972년 건립한 새마을교를 지나 올라갔던 길로 그대로 내려왔다. 북한산성 탐방센터에서 보리사(등운각)~중성문~태고사~북한산 대피소~용암문~위문~보리사(등운각)로 다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는 약 11㎞ 남짓 되는 거리로 한나절이 조금 더 걸리는 등산길이다. 산에서 도시락을 먹고 옛 선비들이 즐겼던 무릉도원과 유적을 둘러보면 하루 종일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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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길에서 하산길에 있는 대동사 입구.



선비들 풍류 즐겼던 ‘북한산 무릉도원’ 등산코스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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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산의 유적| 북한산

박성근(해오름) | 조회 10 |추천 0 | 2008.09.30. 16:26

 


〈북한산의 유적〉 




   북한산성은 방어시설인 성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사시 북한산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군사들이 기거하면서 외적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따라서 성벽과 더불어 행궁, 경리청, 창고, 장대, 사찰 등 각종 시설물들이 있었다.


북한산을 등산로만 따라 무심히 걸으면 최근 복원된 성가퀴와 성문만 볼 뿐 특별히 북한산성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대다수의 유적들은 파괴되고 대부분 흔적만이 남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유적과 흔적이 남아 있음에 놀라게 된다.


산성과 성문을 제외한 나머지 북한산성 유적은 대부분 산성계곡을 따라 흩어져있다. 이 밖에 북한산성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성의 흔적을 하나하나 답사하면 산행 못지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산성〕


■ 산성의 길이

길이는 약 8.5km (당시 표기법에 의하면 7620보)로 현재 원효봉능선 구간은 「훈련도감」에서 산성주능선 구간은 「금위영」에서 의상봉능선구간은 「어영청」에서 축성하였다. 능선길이는 그 이상 되지만 능선의 형태에 따라 성을 축조하여 위험한 구간에는 성벽이 없고, 일부 구간은 여장(如墻, 성가키,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으로 의상봉능선과 원효봉능선 등의 비탈 사면에 있다)만이 있는 형태로 나머지 구간은 체성(성의 몸체)에 여장을 덧붙인 형태로 축성되었다.


■ 성문 (별도 자료 참조)


■ 성벽의 구조

성벽은 체성(體城)성체와 지축여장(只築女墻)으로 나누어져 있다. 체성은 성벽의 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의 높이는 체성을 기준으로 한다. 지축여장은 체성위에 올려진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하며 성첩 또는 성가퀴라고도 불린다. 

성문이 있는 구간에서는 체성(성벽의 몸체)을 쉽게 볼 수 있으나, 능선의 중간 구간에서는 성가퀴만을 볼 뿐 성벽을 볼 수가 없다. 보통 눈에 보이는 성가퀴가 자연적 능선위에 축조하였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성가퀴를 넘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가는 온전한 성벽(몸통)이 아직도 분명하게 남아있어 그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북한산성의 복원의 대부분이 체성 복원이 아니라 성가퀴 복원이다.

현재 체성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시구문에서 산성계곡 방향으로 이어지는 성벽이다. 약4~5m의 체성이 아직도 뚜렷히 남아있다. 의상봉능선을 따라 가면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으로 하산하는 도중 옛 성벽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며 증취봉에서 부왕동암문으로 거의 다 내려오면 성가퀴 너머로 세월의 이끼가 그대로 묻어있는 옛 성벽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산성주능선에서도 등산로상에서는 하얀 성가퀴만 눈에 들어오지만 성가퀴 너머로 눈을 한번만 돌리면 역시 옛 성벽을 볼 수 있다. 

(주능선상에 체성만 남아있는 성벽)

(의상능선에서 체성만 남아있는 성벽)

(용암문 옆 체성과 성가퀴가 같이 있는 성벽)

 

■ 성가퀴의 구멍 형태  

성가퀴를 안에서 보면 바깥으로 뚫린 구멍이 모두 정사각형 형태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두 개가 정사각형이라면 한 개는 직사각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구멍을 보면 두 개는 수평으로 반듯하게 뚫려있지만 한 개는 45도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파져있는 것이다. 이 구멍들은 아래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구멍으로 수평 구멍은 먼 적을 물리치는 원총안, 경사를 이룬 구멍은 가까운 적을 물리치는 근총안이다. 

(성가퀴에는 세개의 구멍이 있으며, 좌우는 원총안, 중앙이 근총안이다)


■ 수문지

북한산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은 문이다.

수문지는 북한산성매표소에서 계곡길을 따라 약7분 올라간 지점에 있는 경국사 앞 계곡에 위치한다.

수문은 14성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높이 16자, 너비 50자의 규모이다. 4대문의 성문이 보통 높이 11~13자, 너비 13~14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수문의 흔적은 계곡 양 옆에 수문장처럼 서있는 거대한 바위에서 산비탈로 이어지는 성벽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1915년 폭우시, 중성문의 수문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물이 일시에 수구를 무너뜨리며 그 여파로 수문이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문지)


■ 중성문의 옆 수문 흔적

중성문의 옆 계곡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살펴보면 계곡 양 옆의 바위에 홈이 파진 것을 볼 수 있다. 성벽의 흔적으로 2차 방어선의 개념을 가진 중성문에서 물을 모아 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향해 수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설도 있다.



〔건물 및 건물지〕


■ 장대

장대란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든 장군의 지휘소로 전체의 움직임을 관찰 할 수 있도록 전망이 좋은 장소에 만들어졌다.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 모두 3개의 장대가 있었으며 현재 동장대만이 복원된 상태이다.  

동장대는 산성주능선상의 북한산대피소와 대동문사이에 위치하며 우이동을 굽어 볼 수 있으며 대남문을 비롯 산성계곡과 행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남장대는 의상봉능선상의 716봉(청수동암문 바로 옆)에서 북동쪽을 굵게 뻗은 능선(일명 남장대능선)상에 있으며 대남문, 대성문, 동장대 그리고 의상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등산로가 행궁지(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 보아 유사시 보고체계를 짐작케 한다.

북장대는 중성문 북서쪽, 즉 노적봉에서 산성계곡으로 뻗어 내린 능선(북한산성계곡과 백운대로 오르는 계곡 사이의 능선)상의 중간봉우리에 설치된 장대로 산성계곡, 중성문 일대와 북문을 바라볼 수 있는 장대이다. 

(동장대)


■ 행궁지

행궁은 유사시 임금의 거처가 되는 궁궐로 산성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대남문으로 약4km  오르면 보이는 「청수동암문 1.46km, 대남문 1.45km, 산성매표소 4.0km」이정표에서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약20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안내판에는 옛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황량한 자취만 남아있다지만 사진을 보면 생각한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사진으로 전해질 정도로 잘 보전되어 오던 행궁. 이는 고종 때 대규모 산성 및 행궁 보수를 통해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그 옛날 또 하나의 궁궐을 북한산성에 만들어 놓았지만 외세의 침입도 아닌 1915년 대홍수에 무너져 없어졌다.

현재 행궁지 자리에는 나무와 잡풀이 공터를 뒤덮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축대와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주춧돌. 무성하게 자란 풀을 들쳐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있는 주춧돌을 볼 수가 있다. 행궁지에서 내려오는 등산로 옆으로도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공터가 단계적으로 보인다. 지금은 야생화들로 뒤덮여 버린 공터. 행궁지뿐만 아니라 보조시설까지 생각하면 그 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추측이 가능하다.

등산로는 남장대능선으로 이어져 의상봉능선상의 716봉으로 연결된다. 남장대능선에는 남장대지가 남아있어 그 당시의 보고체계를 짐작케한다. 

(행궁의 옛사진)

(현재의 행궁지)

(행궁지 주위의 축대)


■ 훈련도감 유영지(訓練都監 留營址)

조선 후기 군부대의 하나인 훈련도감이 있던 자리로 노적사에서 북장대능선으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다. 지금은 주춧돌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이다.


■ 어영청 유영지(御營廳 留營址)

조선 후기 군부대의 하나인 어영청이 있던 자리로 현재 대성암 자리에 위치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어영청은 보현봉에서 수문남측까지 즉 의상능선상의 성벽과 소남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을 만들었다. (안내판의 내용으로 실제는 부왕동암문이 소남문으로 이중 표기됨)

현재는 유영지터가 밭으로까지 사용되고 있다. 


■ 금위영 유영지(禁衛營 留營址)

중흥사지에서 대남문으로 가다 대동문, 보국문 갈림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정면으로 거대한 축대가 눈길을 붙잡는다. 분명 인공적인 축대, 그 규모가 제법 거대하다. 이 축대 위가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이다.

금위영은 북한산성 축성시 훈련도감, 어영청과 더불어 3군문의 하나로 용암봉 동남쪽에서 보현봉까지의 축성 및 소동문(대성문 또는 대남문이라는 두 가지 설), 대동문, 용암문, 동암문(보국문) 축성한 부대로 축성이후 효율적 산성 자치와 관리를 위해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등을 관할하였다. 

원래 대성문 근처에 있었으나 위치가 높아 축성 4년 뒤인 171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위영터 역시 잡풀과 나무만이 자라고 있는 빈 공터로 맞은편에 당시 이전 사유를 기록한 가로 약2m, 세로 약1m 규모의 북한산성금위영이건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가 구석에 세워져 있다.

금위영터에서 바라보는 노적봉과 백운대의 하얀 암벽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금위영 유영지 축대)


■ 경리청 상창지((經理廳上倉址)

경리청이란 북한산성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산성 군량미관리가 주된 임무가 되었다. 그에 따라 창고가 산성내 여러 곳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상창은 행궁지 갈림길 바로 옆에 터만 남아있다.

이 외 중창은 중흥사 옆에, 하창은 대서문 안쪽에, 호조창(왕을 위한 곡식 비축), 평창(탕춘대성) 등이 있다.

현재는 300년이 지난 잘 다듬어진 거대한 바위들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는 잡풀이 무성한 너른 터만이 남아있다.

(경리청상창지 축대)


■ 산영루터(山映樓址)

산영루는 누관(樓觀)이다. 누관이란 누각이나 망루의 뜻으로 전망을 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산영루 이외에도 중흥사 앞에 항해루(沆瀣樓)이 있었으며 이 누관은 모두 다리위에 만들어진 시설물이다.

산영루터는 선정비 바로 옆에 주춧돌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 일대는 너른 암반과 시원한 소 그리고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바위 사면이 어우러져 풍류가 절로 우러나오는 곳이다.

 



〔사찰터〕


■ 중흥사지(重興寺址)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북한산성 축성의 관할본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360명의 승군을 산성내 11개 사찰에 주둔시켜 관리하던 총지휘본부 역할도 했던 사찰이다. 숙종 때의 승려인 「성능」이 팔방도승통 겸 팔도도총섭이 되어 증흥사에 기거하면서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에 관한 주요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숙종 37년 산성 축성할 때부터 30여년간 증흥사에 머물며 산성에 관한 일 이외에도 중흥사와 태고사를 중창하였고, 용암사(북한산성대피소 자리, 폐사), 서암사, 진국사(현재 노적사), 봉성암, 원효암을 창건하였다. 또한 북한산성에 대한 사료를 정리하여 북한지를 편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현재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남문 방향으로 약3.5km 오른 지점인 북한산대피소 갈림길(이정표 : 북한산장 0.8km, 대남문 1.92km) 바로 옆에 있으며 얼마 전까지 너른터와 축대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로 최근 대웅전이 복원공사 중이다.

(중흥사 옛사진)

(현재의 중흥사지)

(중흥사지의 축대)


■ 부왕사지(扶旺寺址)

북한산성 축성 이후인 조선 숙종 43년(1717년)에 심운이 창건한 사찰이다. 산성계곡에서 부왕동암문으로 오르는 도중에 위치한 사찰로 현재는 높이 2m에 달하는 거대한 주춧돌이 남아 예전의 영화를 전한다.

(부왕사지 초석)


■ 삼천사지(三千寺址)

삼천사지는 증취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옛 삼천사의 절터이다.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삼천사 위치보다 월씬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찾기가 어렵다.

지금도 석축, 주춧돌 등 일부가 남아있다.


■ 용암사지 석탑

용암사는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 세워진 사찰로 현재의 북한산대피소 자리에 있었다. 옛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목재로 만든 대피소 옆에 무너진 석탑만이 그 역사를 전한다.

지금은 석탑이 돌무더기처럼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북한산성 축성 총 책임자인 성능에 의해 창건되었다.

(용암사지 자리에 있는 북한산 대피소)

(무너진 용암사지 석탑)

 

 


〔음각 글씨 및 그림〕


■ 소남문의 옛 글자 흔적

소남문은 의상봉능선상의 부앙동암문을 말한다. 문 바깥(삼천사방향)에서 홍예 형태를 이룬 문 위쪽을 보면 희미하게 「小南」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 대성문의 음각 글씨

대성문을 산성 밖에서 바라보면 성문 우측 성벽에 축성을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대성문의 음각글씨, 금영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 백운동문 음각 글씨

백운동은 산성계곡 노적사 갈림길에서 중흥동까지 구간의 계곡으로 추정되며, 이 계곡의 이름을 거대한 바위면에 글씨로 새겨 놓았다.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상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다.

 


■ 청하동문 음각 글씨

청하동은 산성계곡에서 부왕사지까지 구간의 계곡으로 추정되며, 이 계곡의 이름을 거대한 바위면에 글씨로 새겨 놓았다.



〔비석〕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遺址)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국보3호)가 있던 자리이다. 원래의 비봉 정상에 있었느나 풍화가 심하여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도 원래 있는 자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라 진흥왕 16년(555년)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비는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판독함으로써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비봉 정상의 북한산 순수비 옛모습, 출처 서울문화재)


■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북한산성 축성을 담당한 3군문의 하나인 금위영이 소동문(보국문) 근처에서 현재의 자리를 이전한 사유와 금위영의 축성시 담당 범위와 관리범위 등을 기록한 비.

숙종 41년(1715년) 금위영이 이전한 후 만든 비로, 비문의 글은 도제조 이이명이 적었다. 


■ 선정비군(善政碑群)

부왕동암문 갈림길을 지나 중흥사지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면 용화사 아래의 비탈진 바위면에 세워진 23개의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들은 대민선정비, 청덕선정비, 영세불망비의 세 종류로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총융사의 재임시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00년대에 세운 것이다.



■ 북한승도절목비문(北漢僧徒節目)

선정비가 있는 바위면에는 선정비와 더불어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이라는 319자의 명문이 가로 225cm, 세로 110cm의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다.

북한산도절목은 19세기 중엽, 산성내의 대사찰들이 피폐하여 승도가 흩어짐에 따라 책임자인 승군대장인 팔도도총섭의 임명시 발생하는 각종 폐단을 없애고 산성수호에 완벽을 기할 것을 촉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기타〕


■ 훈련도감 유영지 옆 우물

북한산 훈련도감 유영지 옆에 있는 우물로 직사각형의 형태로 아직도 그 우물벽이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2003. 12. 31 자료 올림, 2005. 12. 31 자료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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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30








5000피트 상공서 북한산성 비경 최초공개
수천폭의 동양화 절경마다 역사의 숨결이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600년 고도 지켜온 천혜의 요새

 국내 산성중 가장 험준 삼국시대부터 명맥…대기오염 옥에 티


기사본문
등록 : 2011-06-19 07:44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북한산성 전경이 언론사상 최초로 5000피트 상공에서 카메라에 잡혔다. 지난 6월 7일 오전 경기도가 제공한 헬기로 <데일리안>이 단독 탑승해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북한산성 전체를 렌즈에 담았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북한산성 성벽은 신록이 짙게 깔린 기암괴석의 암봉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었다. 둥그렇게 능선이 휘어지는 원효봉을 타고 성벽이 이어졌으며, 문루 없는 북문은 석축홍예만 남아 고색창연 했다. 영취봉과 시자봉 구간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북한산성에서 가장 험준한 곳으로, 암봉이 자연 성벽이 될 만큼 천혜의 요새다. 헬기의 고도가 높아지자 백운대와 만경대가 눈 아래 펼쳐진다. 북한산의 절경이 여기에서 멈췄다. 암벽사이로 펼쳐지는 경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천년전 백제의 깃발이 백운대에 세워진 후 고구려와 신라도 이곳에 대장기를 세웠다. 고려와 조선도 깃발을 꼽았다. 세월이 흘러 일제도 북한산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에 쇠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도 태극기를 꼽았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였을 때 마다 북한산성은 역사의 현장이 됐고, 민족과 수난을 같이 겪었다.

   헬기가 용암봉을 지나면서 보국문까지 성벽은 굴곡이 심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졌다.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복원한 총지휘소인 동장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장대가 완공되었을 때 숙종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던 곳이다.

   동장대 성벽을 따라가다가 대동문을 만나고 계곡 아래서 대성문도 만났다. 대성문은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 원래 소동문이었으나 성안에 있는 행궁과 산 아래 임금이 거처인 경복궁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보니, 유사시에 임금의 통로로 이용됐다. 국왕이 출입하는 성문이라 위용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으로 고쳤다. 대성문은 1992년 복원됐고 현판의 글씨도 산성을 쌓은 숙종의 친필을 집자해서 걸었다.  



▲ 헬기에서 본 북한산성 전경 ⓒ 최진연 기자





▲ 백운대와 만경대 뒤쪽은 문수봉 능선 ⓒ 최진연 기자


   보현봉 상공에서 헬기는 잠시 멈췄다. 문수봉을 잇는 능선 한가운데 대남문이 카메라에 잡혔다. 대남문 북쪽으로 백운대와 인수봉 등 산성의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동쪽 능선 따라 성벽은 끝없이 연결됐다. 서쪽은 나한봉, 용출봉 등 5개의 암봉이 성 내부를 감싸고 있다. 북한산성의 극치를 이곳에서 만났다. 여장에는 삼군영 옛 군사들의 예지가 번뜩이는 것 같다. 성문안쪽 계곡에는 옛 군병들의 훈련장이 있던 터다. 

   대남문북한산성 남쪽문으로 비봉능선을 통해 탕춘대성서울도성으로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대남문은 소실된 문루와 성벽, 여장을 1991년 복원했다.

   서쪽으로 고도를 낮추자 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이 나온다. 구파발에서 올라가는 길이며, 모든 물자가 이곳을 통해 오갔다. 등산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성문이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강점기에 파손된 채 방치되다가 1958년 당시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복원할 때 성문으로 연결된 오솔길을 확장했다. 복원 전에는 소달구지만 다니던 길이었다. 대서문 홍예 좌우에는 누혈(빗물을 빼내는 기구)이 설치돼 있으며 여장도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납작한 한 돌 덩어리를 10개나 세웠으며, 돌마다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서문 상공에서 북한산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내부의 각 시설과 사찰도 조망된다. 만경봉에서 대서문까지의 골짜기는 길고 급경사다. 홍수 때는 물살이 급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관광객과 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점을 운영했던 산성마을도 2011년 1월에 완전 철거됐다. 각종 생활오수가 계곡으로 흘러들어 북한산을 오염시킨다는 민원 때문이다.

산성 도착 20분이 지나면서 맑은 하늘은 잠시뿐이고, 대기오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 상태가 청명하지 않았다.  

▲ 서쪽에서 본 영취봉과 노적봉 ⓒ 최진연 기자


   북한산성의 역사는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쪽성으로 개로왕 5년(132) 토성으로 처음 쌓았다. 그 후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한강 일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백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와 손잡았다. 다시 고구려가 퇴진하자 백제는 한강 하류, 신라는 죽령 이북 강원도까지 점령했다. 그 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지면서 이 지역은 신라 땅이 됐다. 555년 10월 신라는 북한산 비봉에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진흥왕순수비(국보3호)를 세웠다.

   고려 때도 북한산은 중요했다. 거란이 쳐들어오자 태조 왕건의 재궁을 성안으로 옮겼고, 몽고군과 격전도 있었다. 고려 말 우왕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최영장군을 보내 노적봉 일대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당시 한양산성은 현재 중흥사 일대와 향로봉아래 거대한 절터와 석축흔적이 남아있는 향림담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전국토가 황폐화됐고, 병지호란 때는 청나라에 치욕을 당했다. 선대왕 인조의 굴욕을 잊을 수 없었던 숙종은 전국의 성곽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 헬기에서 본 백운대 정상 ⓒ 최진연 기자


   이때 피난처로 천험의 요새인 북한산성을 택했다.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동원된 장정만 4만여 명, 전국의 승려들도 동원됐다. 남한산성 축조에 승려가 동원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완성되자 산성에 남은 350명의 승려들은 불경을 공부하면서 무술을 익히고 유사시에 성을 수비하는 승군이 됐다.  

   성벽은 백운대를 중심에 두고 28개의 암봉을 타고 넘으며 13km 남짓 연결된 대규모 포곡식 산성으로 14개의 성문과 성내부에 중성도 구축했다. 유사시 임금의 피난처인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사시설, 100여 곳의 우물과 저수시설도 만들었다. 특히 성내에는 당시 승군대장이 머물렀던 중흥사 등 11개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사찰은 전통의 가람 배치를 따르지 않고 성문주위에 지어 산성수비에 목적을 두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지역에 걸쳐 있다. 경기도청 문화체육관광국 김병만 문화재 팀장은 “북한산성 전체 둘레는 12.7km이며, 서울시에 속해 있는 성벽구간이 5.6km, 경기도 성벽구간은 2.8km 라고 밝혔다. 나머지 3분의 1은 자연암벽이 성벽이 됐다고“ 했다. 특히 김 팀장은 ”1998년 경기도와 시울시가 성벽관리와 복원을 분리하기로 서로 협약을 체결했다“고 했다. 또한 산성내부는 경기도가 관리하고 있으며 향후 행궁지와 성곽시설물 등은 발굴 정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청 문화재관리팀 이미경 팀장은 “북한산성은 용암문에서 대서문 인근까지 약 5.6km가 서울에 속해 있고, 이중 3.6km는 복원이 완료됐으며, 용암문에서 용암동을 잇는 230m 구간은 올해까지 복원을 마친다고 했다. 대남문에서 대서문까지 1.7km 성벽은 내년에 착공해 2020년까지 모든 성벽이 복원된다고 밝혔다.”특히 경기도 포천지역 석산의 화강석 재질이 북한산성 성돌과 비슷해 헬기로 산성까지 운반하는 어려움이 있다" 고도 했다. 북한산성 복원공사는 국고보조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 구파발 상공에서 본 북한산성 전경 ⓒ 최진연 기자


   북한산성은 국내 산성중에서 가장 험준한 곳이며, 성벽은 남북이 긴 형태로 쌓았다. 성벽은 낮은 곳부터 해발 700m 이상 봉우리까지 축조됐다. 지형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고축, 반축, 반반축으로 쌓았으며, 평지에는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등성이로 올라갈 수록 성벽은 점점 낮아진다. 정상주위에는 여장만 쌓기도 했다. 성벽은 바깥만 돌로 쌓고 성문과 계곡부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해 양쪽을 돌로 쌓아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북한산성은 숙종의 명으로 다시 쌓은지 올해 300년이 됐다. 산성에서 만나는 하잘것없이 보이는 성돌 하나에도 선조들의 호국 정신이 배어있다. 사적과 보물, 문화재도 즐비하다. 북한산성이 있었기에 산 뿌리 아래 600년 고도는 최첨단의 문화홍수를 쏟아내는 거대도시로 상전벽해가 됐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