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平山 遊山記 연구
권 혁 진 (강원대학교)
<국 문 초 록>
본고는 청평산 유산기에 대한 연구이다. 청평산 유산기는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꾸준히 창작되었다. 산을 유람 때 가족이나 친척, 지인 등이 동행했다.
이들은 주로 말과 도보로 유람하였으며, 하루나 이틀에 걸쳐 유람하였다. 청평산을 유람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뛰어난 인물들로 인해 고결한 기풍을 지닌 산으로 인식되는 청평산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청평산 유산기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산행 코스를 분석해 본 결과 각 유산기의 산행 코스는 거의 동일하였다. 먼저 폭포를 구경하고, 영지를 지나 청평사에 들른 다음, 서천을 거쳐 선동에 있는 식암을 방문하였다. 청평산이 유명한 이유는 산수가 빼어나기 때문이지만, 뛰어난 인물들이 은거라는 방식으로 청평산에 거처했기 때문이었다. 이자현 김시습 등의 은거 방식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킨다면 청평산만의 특성이 드러날 것이다.
유람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상반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추후의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청평산은 계곡이 아름다운 산으로 그려지거나, 뛰어난 인물로 기억된다. 이자현과 김시습 등이 거처함으로써 청평산은 은둔의 산이란 독특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이와 같이 인물의 은둔으로 기억되는 것은 다른 산과 차별화되는 청평산 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 주제어
유산기, 동행인, 산행코스, 은거, 불교,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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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Contents
1. 서론 2. 본론 2.1 자료 개관과 창작시기 2.2 동행인 2.3 교통수단 2.4 준비물 2.5 여행시기와 기간 2.6 여행동기 2.7 산행코스 2.8 청평산과 관련된 인물 2.9 불교에 대한 인식 2.10 청평산에 대한 이미지 3. 결론
1. 서론 산을 유람하고 그 유람의 결과를 기록한 글이 遊山記다. 유산기 연구는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져왔다. 산을 바라보는시각에 대한 연구는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결과 산은 신이 살고 있는 신비한 장소가 아닌 인간이 살고있는 장소, 아름다운 경관으로 詩興의 원천이 되는 곳, 단순한 探勝의 대상이 아니라 道體가 깃들인 곳으로 이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 한 지방의 상징적 존재이자 민족의 상징적 존재 등1)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의 연구는 특정 시기와 특정 계열을 중심2)으로 산수유기를 분석하기도 했으며, 유산기에 나타난 士意識3)에 주목하기도 하였고, 한 지역의 특정한 산을 집중적으로 분석4)하기도 하면서 연구의 지평을 넓혀왔다. 또한 유산기에 나타난 관광의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넓혀가기도 했다.5)
1) 이혜순 외 3인, ?조선중기의 유산기 문학?, (집문당, 1997). 이 책은 유산기의 성립과 배경뿐만 아니라 금강산유기·지리산유기·청량산소백산유기·묘향산유기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고 찰하고 있다. 2) 안득용,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 山水遊記 硏究 : 農巖 金昌協과 三淵 金昌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8; 안득용, 「農淵山水遊記硏究」, (?동양한문학연구?, 22, 동양한문학회, 2006); 안득용, 「16세기 후반 영남 문인의 산수유기-芝山 曺好益 산수유기 에 나타난 지연인식과 형상화를 중심으로-」, (?어문논집?, 55, 민족어문학회, 2007).
3) 최석기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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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연구의 대상이 된 산은 금강산·지리산·청량산·소백산·묘향산 등이다. 이 산들이 연구된 까닭은 명산이기도 하지만, 자료가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淸平山은 앞서 연구된 산들과 비교했을 때, 전국적인 지명도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인들이 남긴 자료가 다수 남아 있다는 것은, 영서라는 특정 지역에서 의미 있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산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의미를 갖고 있는 산에 대한 연구는 유산기 연구의 지평을 넓힐 것이다.
본고는 淸平山을 유람한 후 지어진, 청평산 유산기에 대한 연구이다. 누가, 언제, 누구와 함께 유산을 하였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유람하였는지, 등반코스는 어떠한지 등과 같은 기초적인 항목들에 대하여 조사함으로써, 차후에 이어질 본격적인 청평산 유산기 연구의 초석을 놓고자 한다. 본고의 조사 과정을 통하여 청평산 유산기와 다른 유산기와의 동이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아울러 차후에 논의를 진행시킬 부분도 드러날 것이다. 동이점을 드러내고, 추후 탐구할 부분을 찾는 것을 본 연구의 일차적 과제로 삼고자 한다.
2. 본론 유산기는 산을 유람한 후 그 결과를 기록한 글이기 때문에, 산행에 필요한 준비물이나 교통수단, 동행 인물 등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항목들은 각 유산기마다 들어있다. 기존의 연구 중 정치영의 분석 방법6)을 참고하여 청평산 유산기를 분석하도록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기존의 유산기와 유사한 성격뿐만 아니라 청평산 유산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도 드러날 것이다.
4) 김기영, 「관악산유산록의 작품 실상과 교육적 가치」, (?어문연구?, 38, 어문연구학회, 2002); 박영민, 「18세기 청량산 유산기 연구」, (?한자한문연구?, 1,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2005); 정치영,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Ⅰ?, (민속원, 2007). 강정화, 「동아시아의 명산(名山)과 명산문화(名山文化) ; 지리산(智異山)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조선조 지식인의 산수인식(山水認識)」, (?남명학연구?, 2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8); 노규호, 「한국 遊山記의 계보와 두타산 遊記의 미학」, (?우리문학연구?, 28, 우리문학회, 2009); 김선희, 「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삼각산 여행의 시공간적 특성」, (?문화역사지리?, 21,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9). 5) 육재용, 「산수유람록에 나타난 선인들의 관광의식 일고찰-금강산 유람록을 중심으로-」(?관광연구?, 25, 대한관광경영학회, 2010).
6) 정치영,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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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자료 개관과 창작시기 청평산과 관련된 유산기는 청평산의 유람만을 다룬 작품과,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청평산을 유람한 내용이 포함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청평산의 유람만을 기록한 작품을 살펴보도록 한다. 金尙憲(1570~1652)의 <淸平錄>7)은 1635년 3월 8일부터 14일 사이의 유람을 적은 글이다. 3월 8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출발하여 가평을 지나 安保驛에서 숙박을 하였는데, 시 두 편으로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9일에 안보역에서 출발하여 춘천에 도착하였고, 10일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춘천 시내에 위치한 邀仙堂에 갔다 온 사실을 간략히 적었다. 11일부터 13일까지가 청평산 유람에 대한 내용이다. 배를 타고 귀가한 날짜는 14일이다. <淸平錄>은 온전히 청평산의 유람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앞뒤의 내용들은 청평산 유람을 하기 위한 여정의 기록이기 때문에 청평산만의 유산기라고 할 수 있다.
朴長遠(1612~1671)은 1651년 8월에 <遊淸平山記>8)를, 그 해 12월에 <重遊淸平記>9)를 지었다. 徐宗華(1700~1748)는 <淸平山記>10)를 남겼고, 安錫儆(1718~1774)의 작품으로는 <遊淸平山記>11)가 있으며, 趙寅永(1782~1850)은 <淸平山記>12)를 지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청평산만의 유산기는 6편이다.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청평산 유람의 내용이 포함된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梁大樸(1543~1592)이 1572년에 지은 <金剛山紀行錄>13) 속에 청평산을 유람한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丁時翰(1625~1707)의 <山中日記>14)와 金昌協(1651~1708)이 1696년에 지은 <東征記>15) 안에서도 청평산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유산기나 기록 속에 실린 청평산 유람의 기록은 모두 3편이다. 한편 윤휴의 <楓嶽錄>16)은 직접 청평산을 유람한 것은 아니지만, 청평산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를 적어놓고 있어서 참고할 만 하다. 7) 金尙憲, <淸平錄>, (민족문화추진회, ?淸陰集?, 1988). 8) 朴長遠, <遊淸平山記>, (민족문화추진회, ?久堂集?, 1993). 9) 朴長遠, 같은 책. 10) 徐宗華, <淸平山記>, (?藥軒遺稿?), ?춘천지리지?, (춘천시, 1997), 313~315쪽에서 재인용. 11) 安錫儆, <遊淸平山記>, (?霅橋集?), ?한국역대산수유기취편? 4, (민창문화사, 1996), 455~459쪽에서 재인용. 12) 趙寅永, <淸平山記>, (민족문화추진회, ?雲石遺稿?, 2002). 13) 梁大撲, <金剛山紀行錄>, (민족문화추진회, ?靑溪集?, 1988). 14) 丁時翰, <山中日記>, (연세대본, ?愚潭先生文集?).
15) 金昌協, <東征記>, (민족문화추진회, ?農巖集Ⅱ?,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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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조사된 자료 중 청평산만을 다룬 유산기는 6편이며,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포함된 것은 3편이다. 이들 작품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꾸준히 창작되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 저 자 작 품 출 전 1 金尙憲(1570~1652) 淸平錄 淸陰集 2 朴長遠(1612~1671) 遊淸平山記 久堂集 3 朴長遠(1612~1671) 重遊淸平記 久堂集 4 徐宗華(1700~1748) 淸平山記 藥軒遺稿
5 安錫儆(1718~1774) 遊淸平山記 霅橋集(비올 삽,번개칠 잡,빛날 합) 6 趙寅永(1782~1850) 淸平山記 雲石遺稿 7 梁大樸(1543~1592) 金剛山紀行錄 靑溪集 8 丁時翰(1625~1707) 山中日記 愚潭先生文集 9 金昌協(1651~1708) 東征記 農巖集Ⅱ 2.2 동행인 金尙憲은 조카 光煥과 李得培, 李重慶, 崔再亨, 崔弘耆17)와 함께 여행을 하였다. 박장원은 사내 종 둘과 두 아들 鑌과 銓, 사위 李敏采, 생질 李齊黃과 유람하였다. 또한 一千이라는 이름을 가진 笛工도 수행하였다18). 두 번째 산행에서는 두 아들 鑌과 銓, 생질 李齊斗, 齊泰와 함께 산을 올랐다.19) 안석경과 서종화, 그리고 조인영과 김창협은 동행인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정시한은 司果 文元健이 後立과 庚福을 데리고 원주에서 쫒아왔다는 표현으로 보아20), 시간차를 두고 출발하여 도착지인 청평사에서 이들을 만났음을 알려준다.
16) 尹鑴, <楓嶽錄>, (민족문화추진회, ?白湖集?, 1993). 17) 김상헌, 앞의 책. “阿煥兩李, 得培重慶二崔再亨弘耆生隨至.” 18) 박장원, 앞의 책. “二子鑌,銓及坦腹郞李敏采載仲,姊子李齊黃從焉, 銓與齊黃。乃未冠者。笛工名一千者亦隨焉.” 19) 박장원, 앞의 책. “遂與鑌, 銓兩兒, 甥李齊杜漢卿,齊泰有道, 聯鑣入山, 自月初日日催行者李敏采載仲, 前記所謂, 坦腹郞者也.” 20) 정시한, 앞의 책. “文司果元健率後立庚福, 自原州追到, 卜馬不實, 轉仆道路云: “可慮, 夕文生來宿, 庚福亦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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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박은 고향 사람과 동행하였으며, 다른 여행자들과 달리 아버지를 모시고 유람을 하였다. ⓐ 마침 우리 고향 사람 崔崑은 수령의 친족으로서 객관에 묵으며 노닐고 있은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우리가 풍악산으로 놀러간다는 말을 듣고 동행하기를 청했다. 그가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그래도 세속을 벗어날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길동무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했다.21) ⓑ 구경을 마치고 법당으로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생각해 보니, 초여름이 차차 더워져 가매 나뭇잎들이 점점 무성해지는구나. 그러나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한다면 그곳의 일기는 여기보다 조금씩 늦으니 반드시 길을 곱절로 서둘러 가면 나머지 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셨다. 그리하여 말을 재촉해 길에 올랐다.22)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동행자들은 가족이나 친척, 지인과 노비, 笛工 등이다.
동행인의 성격은 청평산 유산기만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없다. 청평산 유람은 다른 큰 산들의 유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행인의 규모가 작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유람 코스가 짧은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3 교통수단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먼 거리를 여행할 때 대부분 말을 이용했듯이, 청평산을 유람하는 여행자들도 말을 타고 유람하였다. ‘歡喜嶺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폭포를 보았다.’23)는 구절로 보아 김상헌은 말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박장원의 경우 ‘단지 술병과 술통을 가지고 말 한 마리와 사내종 둘을 데리고 떠났다.’24)는 표현이 있다. 또한 ‘절의 스님 대여섯 명이 藍輿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영접해서, 비로소 말에서 내렸다. 가마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影池에 이르렀다.’25)는 구절도 보인다. 그는 말을 이용하여 청평산에 도착하였으며, 산 속에서는 남여를 타거나 도보로 이동하였다. 귀가할 때는 도보와 배와 말 등을 이용하였음을 다음 자료가 보여준다.
21) 양대박, 앞의 책. “適有吾鄕人崔崑, 以府伯門族, 旅遊賓館已閱月矣, 聞將遊楓岳, 請與同行, 雖無翰墨之才, 尙有出塵之想, 深喜其得一友也.” 22) 양대박, 앞의 책. “覽畢, 還法堂, 將欲留宿, 家君言念初夏向熱, 木葉漸䌓, 金剛之遊, 日候乍晩, 必須倍道入山, 可及殘花, 促駕登途” 23) 김상헌, 앞의 책. “到歡喜嶺, 下馬觀瀑布.”
24) 박장원, 앞의 책. “悉屛旟隼, 只提壺榼, 一馬二童以行, 實厭煩而取約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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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은 오로지 도보에 의지하였다. 배회하다가 돌아갈 시간을 잊고 있었는데,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잔도를 지나면서 州吏에게 샛강에 배를 대기시켜 놓았는지를 물었다. 강의 날씨는 고요하였는데, 바람이 불어 소용돌이가 일어나자 술에서 깨어났다. 술을 찾았건만 없고, 과일 안주 또한 바닥이 나서 배 안에 포개어 누우니 옛사람의 일화와는 달리 단지 노저으며 내려가는 것만 같을 뿐이었다. 여우고개 가까이 배를 댄 후 말을 타고 돌아왔다.26)
안석경의 경우 말을 이용하여 유람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 없다. “물을 밟으며 구불구불하게 십리를 갔다. 물이 갑자기 달라지고 구름 낀 나무가 울창하니, 이곳이 山門이다. 걸을 때마다 볼만하였다.”27)는 것으로 보아 도보로 산행을 하였던 것 같다.
정시한은 주로 말을 이용했으나 걷기도 하면서 산행을 하였다. 몇 번인가 시내를 건너고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서 냇가에서 밥을 지어먹고 쉬며 말도 쉬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淸平寺 아래 九松亭에 닿았다. 폭포와 반석이 있어 경관이 좋았다. 여기에서 말을 놓고 걸어서 오르니 影池가 있다.28) 김창협의 경우, “그 길로 牛頭亭의 옛 터를 찾았다. 민가에 들러 말에 꼴을 먹이고 가다가 다시 소양정에 올랐다.”29)는 자료는 주로 말을 타고 여행했음을 알려준다. “골짜기로 들어가 10리 정도를 가니 山僧들이 藍輿를 가지고 와서 맞이했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물소리도 활발하여 들어갈수록 그윽한 곳이 었다. 남여에서 내려 九松臺에 앉았다.”30)는 표현은 남여를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25) 박장원, 위의 책. “寺僧五六人, 備籃輿來迎, 始捨馬, 或擔或步, 至影池.” 26) 박장원, 위의 책. “歸路一任足胝, 徘徊忘歸, 不覺出蘿之晩暮也. 過棧, 候吏艤船於枝江, 江日臥 波, 風湍醒酒, 呼酒酒盡, 肴核且傾, 舟中枕藉, 古人之事, 但鼓枻而下, 近泊狐峴, 策馬,而歸.” 27) 안석경, 앞의 책. “踏水屈曲行十里, 水忽殊異雲木蔚然, 是爲山門, 步步生耳目.” 28) 정시한, 앞의 책. “累渡溪流, 轉入轉深臨溪攤飯抺馬, 小時促行, 至淸平寺下九松亭, 有瀑布盤 石之勝, 捨馬步上, 有影池.”
29) 김창협, 앞의 책. “歷見牛頭寺舊基, 入民家秣馬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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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을 유람한 여행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산행을 하였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말과 도보를 이용한 유람이었고, 비록 자신들이 준비해간 것은 아니었지만 남여를 이용하기도 했다.
2.4 준비물 여행자들은 여행에 나서기 전이나 여행 도중에 선인들의 유산기를 휴대하여 유람의 경로를 참고하곤 했다. 그런데 청평산 유산기에서 선인들의 유산기를 휴대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여행 전에 선인들의 유산기를 읽었다는 대목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지로 이름 지워진 이유는 先祖의 기행문에 다 실려 있다.31)
위의 기록을 통해 김창협은 여행 전에 선조의 유산기를 숙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장원은 술병과 술통을 가지고32) 유람을 하였으며, 김창협도 흥이 날 때 마다 술을 찾았다.33) 정시한은 ‘냇가에서 밥을 지어먹고 쉬며 말도 쉬게 하였는데’34) 식량을 준비하여 여행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저녁에 노비 搜理가 와서 이불을 갖고 왔는데 곧바로 돌아가게 했다.”에서 볼 수 있듯 여행 중 덮고 잘 이불도 준비했다. 양대박은 풍류적인 유람을 하였는데, 흥이 날 때마다 미리 준비한 胡琴과 鐵笛을 연주해서 흥취를 북돋웠다.35) 여행자들이 청평산을 유람할 때 준비한 물품들은 식량과 이불, 술, 호금, 철적 등이었다.
30) 김창협, 같은 책. “入谷行十許里, 寺僧持籃輿來迎, 樹林翳鬱, 水聲濺濺, 漸入幽境, 下輿坐九 松臺.” 31) 김창협, 같은 책. “所以得名者, 具在先祖記中.” 32) 박장원, 앞의 책. “悉屛旟隼, 只提壺榼, 一馬二童以行.” 33) 김창협, 앞의 책. “坐臺上呼酒飮一杯, 從一僧往觀影池, 木影陰森, 水光沖融, 別有一段幽異之 景, 酌酒一杯而歸.” 34) 정시한, 앞의 책. “累渡溪流, 轉入轉深臨溪攤飯抺馬.”
35) 양대박, 앞의 책. “胡琴銕笛, 響裂崖谷, 緩㘘徐行, 疑入畫圖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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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여행시기와 기간 김상헌의 청평록은 1635년 3월 8일부터 14일 사이의 유람을 적은 글이다.
이 기간에서 11일부터 13일 사이가 청평산 유람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청평산을 유람한 기간은 3일인 것이다. 박장원은 1651년 8월36)과, 12월37)에 유산기를 남겼다. 처음 산행은 辛卯年(1651) 팔월 丁卯日부터 다음날 戊辰日까지 이틀 동안이었다. 두 번째의 산행에서도 이틀 동안 산행을 하였다. 안석경은 유산기 말미에 “때는 己未年 天中節이다.”38)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하룻밤 禪堂에서 잤다는 것으로 보아 이틀간 산행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대박은 청평산 구경을 마치고 법당에서 자려고 하다가 금강산 일정 때문에 가마를 재촉해 길에 올랐기 때문에 하루 만에 구경을 마쳤으며, 여행 시기는 다음의 글에서 유추할 수 있다.
구경을 마치고 법당으로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생각해 보니, 초여름이 차차 더워져가매 나뭇잎들이 점점 무성해지는구나. 그러나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한다면 그곳의 일기는 여기보다 조금씩 늦으니 반드시 길을 곱절로 서둘러 가면 나머지 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셨다. 그리하여 가마를 재촉해 길에 올랐다.39)
丁時翰은 8월 7일부터 11일까지 유람한 사실을 <山中日記>에 기록하였다. 김창협은 8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유람을 하였다. 청평산 유람은 여행하기에 좋은 기후와 경치를 보여주는 8월에 많이 이루어졌다. 박장원, 안석경, 정시한, 김창협 등이 이 시기에 유람하였다. 이밖에 김상헌은 3월에, 양대박은 여름에 산행을 하였으며, 박장원은 두 번째 산행을 12월에 하였다. 청평산을 유람한 사람들은 주로 청평산의 산행코스가 짧았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에 걸쳐 유람하였다. 김상헌은 3일, 정시한은 5일간 머무른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고르지 못한 날씨 때문이었다.
36) 박장원, 앞의 책. “遂於辛卯八月丁卯, 悉屛旟隼, 只提壺榼, 一馬二童以行.” 37) 박장원, 같은 책. “去秋遊淸平山, 翫而樂之, 重賦赤壁, 期在瀑氷, 而自閱蘇詩, 必待臘日.” 38) 안석경, 앞의 책. “時己未天中節也.” 39) 안석경, 같은 책. “覽畢, 還法堂, 將欲留宿, 家君言念初夏向熱, 木葉漸䌓, 金剛之遊, 日候乍晩, 必須倍道入山, 可及殘花, 促駕登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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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여행동기 선인들이 산을 찾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산을 여행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는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금강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기 위한 것. 둘째, 산행을 공부의 한 수단으로 삼아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심신을 수련하기 위한 것. 셋째, 금강산에 축적되어 있는 문화역사유산을 체험하기 위한 것40)이었다. 유산기를 남긴 많은 이들이 산행을 하게 된 동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선인들이 청평산을 여행하게 동기는 무엇일까? 두 사람이 여행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박장원의 경우를 살펴본다. 春州의 청평산은 본디 小蓬萊로 불렸으니 관동 지방에서 일대 명산이다. 그러나 온 나라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단지 山水가 뛰어나고 기이하다는 것 때문이겠는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머물러 살았으니, 고려조에는 李資玄이 있고, 이조에는 金悅卿 같은 이가 있으니, 傳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의 고결한 기풍과 뛰어난 운치는 지금 듣는 사람들까지도 흥기시킬 만하니, 이는 진실로 다른 산에서는 자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근세에는 退陶 이선생과 白沙 李相國이 繡衣 차림에 부절을 지니고서 祝融의 시를 남기기도 했고, 참소를 입고 서울을 떠나면서 西湖의 유람을 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분이 두루 탐방한 것은 산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었으니, 또한 가히 생각할만 하다. 나는 들은 것만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겨, 항상 한 번이라도 산을 오르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춘천 땅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삼년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돈을 들여서도 유람을 하지 않은 것은 늦춘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41)
40) 정치영, 「금강산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행관행」, (?문화역사지리?, 15(3), 2003). 41) 박장원, 앞의 책. “春州之淸平, 素稱小蓬萊, 蓋亦關東之一名山也, 然其擅名於國中者, 豈徒以山水之瑰奇已哉, 自古多爲聞人之所盤旋, 在麗有若李資玄, 在我朝有若金悅卿, 前後相望於傳記, 其高風逸韻, 至今聞者, 猶足以興起, 則此固他山之所稀有也. 近世退陶李先生及白沙李相國, 或以繡衣持斧, 留祝融之吟, 或以遭讒去國, 縱西湖之遊, 茲二公之所探歷, 必皆不以山而以人, 亦可想矣. 余以所聞, 亦非不足, 而百聞不如一見, 常欲足一及山而無繇也. 幸守茲土, 已及三年, 而顧未能爲百錢之遊者, 非緩也. 蓋有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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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원은 청평산이 관동 지방에서 명산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이유는 경치가 뛰어난 까닭도 있지만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이자현과 김시습 같은 인물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고결한 기풍과 운치로 인하여 청평산은 다른 산과 차별화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직접 보고자 산을 오른다고 밝히고 있다. 박장원의 여행동기는 아름다운 산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자현과 김시습 같은 인물들로 인하여 고결한 기풍과 운치를 지닌 산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안석경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한다. 청평산은 春州에 있는데, 뛰어난 경치로써 이름이 났다. 息菴 李公이 거처하고부터 산이 더욱 알려졌다. 뒤에 淸寒子와 百淵翁이 때때로 와서 보곤 차마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정취를 깊이 느끼어 탄식하며 높이 노래해서 산과 골짜기를 빛냈다. 이에 청평산의 이름을 사람들이 말하게 되었다. 이해 한 여름에 나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병이 들었다. 그러나 소양강을 한 번 지나고자 하여 돌아가는 길에 소양정에 이르렀다. 정자는 강에 임하여 있어서 환하게 터져있다. 멀리보이는 산이 동북방에 있으면서 위엄 있는 산이 많은데, 물가의 사람이 저것이 청평산이라 한다. 나는 눈이 열리고 심장이 뛰어서 술이 깨듯 아픈 것이 흩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드디어 북쪽으로 강을 건넜다.42)
청평산은 본래 뛰어난 경치로써 이름이 났는데, 이자현이 거처하면서 더욱 알려졌고, 김시습과 김창흡이 찾아 들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청평산의 명성을 알고 있던 차에 소양강을 지나며 청평산을 보고 산행을 하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안석경은 여러 인물들로 인하여 명성이 자자해진 청평산을 동경하고 있다가, 청평산을 지나가게 되자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하였던 것이다.
제한된 자료이지만 선인들이 청평산을 유람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뛰어난 인물들로 인해 고결한 기풍을 지닌 산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다른 유산기와 구별되는 청평산 유람 동기이다.
42) 안석경, 앞의 책. “淸平山在春州, 殊勝名, 自菴李公居之而山逾聞, 惟有淸寒子, 若百淵翁, 時時來見, 不忍去. 感慨高歌餘情, 耿山壑於是乎山之名, 殆人人誦之矣. 是年中夏余之春州道病, 欲一過昭陽而歸及昭陽亭, 亭臨江豁然, 多遠山其東北而隱然者, 水人曰彼所謂淸平山也. 余則目開而心揚, 不覺醒然而疾散也. 遂北渡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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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산행코스 청평산 산행코스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출발지에서부터 청평산까지의 이동 경로와 청평산 내에서의 일정, 그리고 출발지로 돌아오는 길이다.
세 부분을 포함시키되, 중요한 장소만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작자 / 코스
김상헌 소양정→牛頭山→扶服遷→淸平洞→歡喜嶺→폭포→松壇→影池→淸平寺(1박)→西川→仙洞→식암→羅漢殿→見性庵→養神庵(2박)→서천→牛頭寺의 遺址
박장원
소양나루→狐峴→起落棧→龍潭→歡喜嶺→影池→청평사(1박)→서천→息庵→羅漢殿→선동→귀가
서종화 九松臺→이층폭포→歡喜嶺→오층석탑→盛香院 옛 터→影池→청평사→西川→부도→식암→나한전→천단→견성암→소요대→立巖→龜巖→혈암→경운봉 정상→식암→이층폭포→칠층석대→서천
안석경 소양정→牛首村→泉田村→瑾亞棧→九松臺→폭포→영지→청평사→견성암→식암→나한전→서천→松壇→진락비→청평사 禪堂(1박)→영지→용담→구송대
김창협 소양정→扶服遷→九松臺→雙瀑→影池→청평사→西川→松壇→仙洞→息菴→羅漢殿→見性庵→청평사(1박)→影池→西川→九松臺→牛頭亭 옛 터→소양정
양대박 牛斗寺→동구→歡喜峴→폭포 옆의 대→폭포→영지→청평사→서천→慶雲洞→청평사 법당→古良峽→南津江→狼川縣
정시한 淸平山 입구→九松亭→影池→眞樂公重修淸平記→법당→西行廊→仙洞息庵→청평사(1박,2박)→진락공이 노닐던 옛 자취와 시내 주변 돌아봄→청평사(3박)→암자 뒤 석대→서천→선동→청평사 西寮(4박)→영지→구송정→고개→낭천 이상의 산행 코스를 분석해본 결과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산행 코스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청평산에 들어가면서 먼저 폭포를 구경하고, 영지를 지나 청평사에 들른다. 그 다음 서천을 거쳐 선동에 있는 식암을 방문한다. 여기까지는 모든 여행자들의 공통된 경로이다. 이 때문에 중요한 경유지 또한 동일하다. 이후에 식암 뒤의 산을 오르는 코스와, 왔던 길로 하산하는 두 가지 코스로 나뉘게 된다. 귀가 길은 대부분 다시 춘천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양대박과 정시한은 춘천으로 향하지 않고 지금의 화천인 낭천으로 향하고 있다. 두 사람의 귀로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청평산의 유람만이
목적이 아니라, 청평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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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청평산과 관련된 인물 청평산 유산기는 청평산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평산이 알려진 이유가 경치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뛰어난 인물이 거처하였기 때문43)이라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청평산과 인물의 관계는 중요하다. 주로 언급된 사람은 이자현, 김시습, 김창흡이다. 보우화상이 언급된 경우도 있는데, 보우화상은 불교와 관련된 부분에서 고찰하도록 한다.
ⓐ 청평사는 본디 慶雲山의 普賢院이었는데, 고려 때 이자현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서 37년 동안 은거해 있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라고 고쳤다.44)
ⓑ 청평산은 春州에 있는데, 뛰어난 경치로써 이름이 났다. 息菴 李公이 거처하고부터 산이 더욱 알려졌다. 뒤에 淸寒子와 百淵翁이 때때로 와서 보곤 차마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정취를 깊이 느끼어 탄식하며 높이 노래해서 산과 골짜기를 빛냈다. 이에 청평산의 이름을 사람들이 말하게 되었다.45)
ⓒ 李公은 고려 때의 學士이다.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산속에 은둔하여 평생토록 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그 고상한 마음씨와 우아한 흥취는 비록 眞隱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을 공정히 따져보면, 禪說을 끔찍이도 좋아하여 이미 息庵을 지었고, 또 말을 끊고 단정히 앉아서 몇 달 동안 나가지 않았던 등의 일은 空을 배우는 무리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거처하던 방을 문수원이라고 이름했으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46)
ⓓ 春州의 청평산은 본디 小蓬萊로 불렸으니 관동 지방에서 일대 명산이다. 그러나 온 나라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단지 山水가 뛰어나고 기이하다는 것 때문이겠는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머물러 살았으니, 고려조에는 李資玄이 있고, 이조에는 金悅卿 같은 이가 있으니, 傳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43) 박장원, 앞의 책. “蓋亦關東之一名山也. 然其擅名於國中者, 豈徒以山水之瑰奇已哉. 自古多爲聞人之所盤旋.” 43) 조인영, 앞의 책. “夫大嶺以西, 山莫尊於寒溪, 水莫盛於谷雲, 而是山甲乙者, 豈水石云乎. 高士尊宿之蹟爲獨多也. 地以人名不其然乎.” 44) 김상헌, 앞의 책. “淸平寺, 本慶雲山普賢院, 高麗李資玄棄官隱居于此者三十七年, 更名淸平寺.” 45) 안석경, 앞의 책. “自息菴李公居之而山逾聞, 後有淸寒子, 若百淵翁, 時時來見, 不忍去, 感慨高歌餘情, 耿山壑, 於是乎山之名, 殆人人誦之矣.” 46) 양대박, 앞의 책. “李公, 高麗時學士也. 早年掛冠, 嘉遯山中, 平生足跡, 不出洞門, 其高情雅致, 雖比之眞隱無媿, 而夷考其行事, 則酷好禪說, 旣作息庵, 又默言危坐, 數月不出等事, 與學空之徒異者無幾, 而所居之室, 名以文殊院者, 尤可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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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고결한 기풍과 뛰어난 운치는 지금 듣는 사람들까지도 흥기시킬 만하니, 이는 진실로 다른 산에서는 자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근세에는 退陶 李先生과 白沙 李相國이 繡衣 차림에 부절을 지니고서 祝融의 시를 남기기도 했고, 참소를 입고 서울을 떠나면서 西湖의 유람을 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분이 두루 탐방한 것은 산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었으니, 또한 가히 생각할 만 하다.47)
ⓔ 고려 때 希夷處士 이자현이 그 속에 은거하여 37년 동안 청정하게 守道하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교화되어 산에 도적이 없어지고 계곡과 숲속에는 맹수가 물러갔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淸平이라 했으니 기록의 내용이다.48)
ⓕ 壽春의 관청으로부터 동쪽으로 40리에 청평산이 있는데, 본래의 명칭은 慶雲山이다. 산이 험하고 깊은데다가 도적과 맹수가 많았으나, 고려 때 처사 李資玄이 와서 머물자 사나운 짐승들을 물리치고 도적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淸平이라 불렀다고 한다.49)
이자현은 청평산과 제일 먼저 인연을 맺은 후,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유산기 작자 중 이자현을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유산기의 서두에 항상 청평산의 유래와 함께 등장하며, 유람 코스의 많은 부분들은 이자현과 관련된 유물들이다. 이자현과 관련된 자료는 ⓐ~ⓕ이다. 이 자료들은 이자현이 젊은 시절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에 은거하자 주변이 교화되어 도적과 맹수가 없어졌고,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청평이라고 했다는 산의 유래를 알려준다. 이자현의 행동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지만, 젊은 시절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것에 대해서 대체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47) 박장원, 앞의 책. “春州之淸平, 素稱小蓬萊, 蓋亦關東之一名山也. 然其擅名於國中者, 豈徒以 山水之瑰奇已哉. 自古多爲聞人之所盤旋, 在麗有若李資玄, 在我朝有若金悅卿, 前後相望於 傳記. 其高風逸韻, 至今聞者, 猶足以興起, 則此固他山之所稀有也. 近世退陶李先生及白沙李 相國, 或以繡衣持斧, 留祝融之吟, 或以遭讒去國, 縱西湖之遊, 茲二公之所探歷, 必皆不以山 而以人, 亦可想矣.” 48) 조인영, 앞의 책. “高麗之際, 希夷處士李氏資玄者, 隱其中, 三十七年, 淸淨守道, 人與物俱化 之, 山無盜賊, 谷藪屛猛獸, 故改名以淸平, 志實也.” 49) 서종화, 앞의 책. “壽春治東四十里有淸平山, 本名慶雲山, 險而邃且多盜賊猛獸, 自高麗處士
李資玄來居, 帍豺屛跡盜賊不入, 因以淸平稱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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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긍정적인 시각은 이황이 이자현의 은거를 칭찬한 것에서 영향을 입은 것 같다. 이황은 사관(史官)이 이자현을 몹시 깎아내리고 심지어 그를 가리켜 탐욕스럽고 인색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반론을 폈다. 이자현처럼 명성과 부귀를 떨치고 화려한 생활에서 몸을 빼면서 원망하거나 뉘우침이 없이 끝까지 변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없거나 아주 드물기 때문 에 높일 만하다고 하였다.50) 정시한도 이자현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자현을 불자로 보기 보다는 유학자의 연장선상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51) 양대박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자료 ⓒ에 나타난 것처럼 양대 박은 기본적으로 이황의 견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禪說을 좋아하며 암자를 짓는 등과 같은 일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김시습과 관련된 자료는 ⓑ와 ⓓ이다. 김시습에 대한 평가는 이자현의 경우와 비슷하다. 고려에 이자현이 있다면, 조선에는 김시습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자현과 동등한 위치로 평가하고 있다. 김창흡에 대한 자료는 ⓑ이다. 이자현으로 인하여 청평산이 알려지고, 김시습과 김창흡이 청평산에 머물렀기 때문에 청평산이 빛났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안석경은 늙은 중과의 대화 중에 김시습과 김창흡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이 청평산에서 놀며 즐긴 사실을 회고하였다.52) 또한 ‘예전에 세 군자가 있었는데, 나는 세 군자에 미치지 못한다’며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평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자현과 김시습, 김창흡을 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50) 이황, <過淸平山有感幷序>, (민족문화추진회, ?퇴계집?, 1988). “余讀東國通鑑, 嘗怪史臣論資玄之辭, 深加貶剝, 至指爲貪鄙吝嗇, 噫. 何其甚也. 自古, 高人逸士如資玄比者豈少哉. 然類多出於畎畝之中, 草澤之遠, 其與木石居, 鹿豕遊, 而飯糗茹草, 乃其素所積習, 而其心安焉, 其於長往而不返, 固亦無難矣. 至若脫屣於聲利之場, 抽身於紈綺之叢, 不怨不悔, 終始不變如資玄者, 蓋絶無而僅有之, 斯不亦可尙哉.” 51) 정시한, 앞의 책. “仍見眞樂公藏骨處, 出見誌石, 字刓未能盡解, 面初書公諱, 骨在缸中, 人人出見, 悟欲出以示我, 我止之則云, 今朝有一上佐手探數三骨節, 以見渠亦參見, 無腐朽之色, 白淨如新云, 誌石二葉, 與缸幷置石隙中, 往來監兵守令或命出缸於坐觀玩云, 雖未知自何時有此駭異之事, 而前賢遺骨無有斂葬者, 褻慢至此極可廖心爲之悼歎不能已.” 52) 안석경, 앞의 책. “宿禪堂, 細月照臥, 時聞老釋言, 言及淵翁, 瀏瀏不能已, 竹笠葛袍一笻, 灑然其風標可想也. 又言二百年前長髥頭陀來往是寺云, 余曰此淸寒子也. 因諷其萬樹凝霜, 千山積雪云云. 冀千載之下知余之素志之語, 恨然欲涕下, 盖梅月翁中年 居谷雲, 晩居雪嶽, 淵翁中年居雪嶽, 晩居谷雲, 是山也. 在谷雲雪嶽之間, 故二公之游喜於是山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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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청평산이 유명한 이유는 산수의 빼어남도 있지만, 이자현, 김시습, 김창흡과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은거라는 방식으로 거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위 자료들 만으로는 이들의 은거 방식과 역사적 의미, 그리고 은거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등을 면밀하게 고찰할 수 없다. 유산기 이외의 자료들을 보충하여 은거와 관련된 부분을 연구한다면, 隱居史에서 청평산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뒤따르는 연구가 요구된다.
2.9 불교에 대한 인식 유산기를 남긴 조선시대의 저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불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유학자들은 금강산의 불교적 기원을 비판하는 동시에, 절을 세우기 위해 동원된 백성의 재산과 노동력을 부각시켜, 금강산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불교적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53)하기도 했으며, 불교나 무속으로 타락한 사회 풍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54) 청평산 유산기에서도 위와 같은 비판적인 입장을 읽을 수 있다.
극락전은 妖僧 普雨가 창건한 것이다. 경내 건축물의 기둥과 주춧돌은 갖은 기교를 부린 것으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극락전은 사치스럽고도 화려했는데, 노란색과 푸른색, 붉은 옻으로 칠하여 막대한 재력을 들인 것이다. 보우를 죽였다고 해서 어찌 흡족하겠는가? 당시의 불사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55) 위 자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보우라는 인물과 화려한 사찰 건물이다. 보우는 유교 세력으로부터 희대의 妖僧으로 비판받았는데,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유생들의 반대 상소 속에서도 불교융성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종단을 부활하는 데 전념했는데, 度牒制에 따라 승려를 뽑는 한편, 僧科試를 부활시켰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보우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찰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재력을 탕진한 것과 건축 과정에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53) 이혜순 외 3인, 앞의 책, 31쪽. 54) 최석기, 앞의 책, 393~398쪽. 55) 박장원, 앞의 책. “尋向極樂殿去, 殿是妖僧普雨所創也. 寺中柱礎之窮極奇巧, 固亦創見, 而至於此殿之奢麗. 金碧朱漆, 費了無限財力, 彼普雨何足誅, 可惜當時事佛之至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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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梵閣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가니, 처마에 편액이 걸려 있는데 能仁寶殿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로새긴 창과 수놓은 閤門, 그리고 채색이 화려한 은빛 깃발이 사람의 눈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그 토목의 공 교로움과 주옥의 번화함은 화려하여 비할 것이 없었다. 빈 처마 바깥으로는 모 두 황금으로 칠했는데, 겹겹의 기둥과 층층한 난간이 모두 용트림 무늬와 비단 자리를 펴놓았으니, 이것은 바로 요승 普雨가 창건하여 스스로 살던 곳이었다. 보우는 명리를 피하여 부처를 배우려 불교에 몸을 의탁하였으나, 능히 망령된 생각을 없애고 청정함을 지키지 못해서 옳지 않은 道로써 서울에 출입하면서, 안으로는 환관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권간들에게 아첨하여, 헛되이 국고를 소비 하고 제멋대로 산 구렁을 메워 백성들을 그가 시키는 일에 몰려들게 하였다. 그 리하여 마침내는 귀신과 사람이 모두 격분하여 그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 으니, 이것이 어찌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56) 보우의 인물됨과 사찰의 화려함에 대하여 예리하게 비판하던 양대박은 이자 현에 대해선 비난과 칭찬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자현의 은거에 대해서 고상한 마음씨와 우아한 흥취는 眞隱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좋아한 사실에 대하여 혹평하고, 절의 이름을 문수원으로 부른 것에 대하여 가소롭다고 하였다.57) 양대박의 유산기 뿐만 아니라 다른 유산기도 불교에 대한 비난과 칭찬이 혼재하는데58), 이것은 청평 산 유산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스님이란 신분은 같지만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56) 양대박, 앞의 책. “過梵閣入法堂, 當簷揭扁曰能仁寶殿, 雕窓繡閤, 彩勝銀幡, 眩矅人目, 西偏
有極樂殿, 土木之巧, 珠玉之繁, 侈麗無比, 虛簷外方, 皆以黃金塗之, 重楹覆檻, 盡鋪龍紋綺席, 乃妖僧普雨所創而自居者也. 雨也逃名學佛, 托迹空門, 不能除妄想守淸凈, 顧以左道, 出入都 下, 內結䆠寺, 外附權奸, 虛竭內帑, 謾塡廬壑, 使甿俗輻輳於指揮之間, 竟致神人共憤, 得以誅 之, 豈非理數歟.” 57) 양대박, 같은 책. “李公, 高麗時學士也. 早年掛冠, 嘉遯山中, 平生足跡, 不出洞門, 其高情雅致, 雖比之眞隱無媿, 而夷考其行事, 則酷好禪說, 旣作息庵, 又默言危坐, 數月不出等事, 與學空 之徒異者無幾, 而所居之室, 名以文殊院者, 尤可笑也.” 58) 박장원의 다음 자료에서도 이중적인 입장을 읽을 수 있다. “相與坐定, 談玄說妙, 亹亹可聽.”,
“暗想飛錫飄然, 爲之一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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懶翁은 뛰어난 선승이다. 이 산에 머무른 것이 오래되었으며, 입적하자 부도 를 세웠다. 조선에 들어와 妖僧 普雨가 공사를 일으켜 중건하였는데 강화도의 돌과 和國의 단청으로 칠하여 장대하고 화려하였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절 의 시말이다.59) 위 자료에서 조인영은 나옹화상에 대해서는 뛰어난 스님이라고 칭찬하면서 도, 보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우를 요승이라고 부르면 서,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불사를 일으켰다고 지적하였다. 박장원과 동일한 내 용으로 비판을 하였고, 이후의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대체로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殿寮와 廊序가 빙 둘러 있으면서 화려한 것이 엄연한 하나의 叢林이었는데, 근세에는 僧徒들의 부역이 번거로워 절을 지키면서 사는 자가 수십 명도 안 되 어서 장차 廢刹이 되게 생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법당의 서북쪽 모퉁이 에는 極樂殿이 있는데, 이 역시 보우가 세운 것으로 金碧과 丹漆이 지나치게 사 치스러워 보통 절과는 달랐다.60) 김상헌도 상반된 입장을 보여준다. 청평사가 퇴락해감을 아쉬워하는 반면 에, 보우가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극락전을 지은 것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 고 있다. 이상에서 청평산 유산기에 나타난 불교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조선시 대 대부분의 유산기는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청평산 유산기에 나타난 불교에 대한 인식은 상반된 의견이 섞여 있다. 이자현 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은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禪說을 믿 고 따른 것에 대해서는 혹평을 하였다. 한편 청평사에서 주지를 지냈던 보우에 대해서는 妖僧이라고 할 정도로 폄하하였고, 그가 세운 불사들의 호화스러움 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옹화상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기도 했는데, 불교에
대해 호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한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자현에
59) 조인영, 앞의 책. “懶翁高禪也. 住此山者久, 寂而浮圖存焉, 入本朝妖僧普雨興工役重建, 沁都 之石和國之丹漆窮壯麗, 無度院之始末也.” 60) 김상헌, 앞의 책. “殿寮廊序, 周匝繁麗, 儼然一大叢林也. 近歲髡徒役繁, 居守者無數百指,
將爲廢刹可惜. 法堂西北隅有極樂殿, 亦普雨所建, 金碧丹漆, 僭侈異常.”
淸平山 遊山記 연구 _ 23
대하여 상충된 입장이 있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 부분도 진전된 논의가 필요하다. 2.10 청평산에 대한 이미지 청평산을 유람한 사람들은 청평산을 어떠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가? 위 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청평산이 알려진 이유는 경치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뛰어난 인물이 거처하였기 때문61)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김상헌은 청평산의 골짜기에 주목한다. 골짜기는 서천과 선동을 지칭하는 데, 이 곳 泉石의 아름다움은 大關嶺 서쪽에서는 비슷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62) 김상헌은 산이 높고 웅장하며 기묘한 것 등에서 청평산의 특징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계곡을 주목하였다. 박장원은 일단 산의 외형적 특성에 대하여 언급한다. 청평산은 본디 小蓬萊 로 불릴 정도로 관동 지방에서 명산이라고 말한다. 청평산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나라 안의 名山을 많이 보아 왔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마치 읍하듯 하고, 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비거나 부족함이 없으며, 형용이 온화하고 氣色 이 빼어나며 기이하기로는 이 산 만한 것이 없었다. 63) 위 글은 청평사를 에워싸듯 솟아있는 주변의 산을 잘 형상화했다. 그런데 청평산이 이름난 것은 山水가 뛰어나고 기이한 것보다, 알려진 인물들이 머물 러 살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다른 산에서는 자주 찾아
보기 힘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64) 조인영은 청평산을 경치보다는 뛰어난
61) 박장원, 앞의 책. “蓋亦關東之一名山也. 然其擅名於國中者, 豈徒以山水之瑰奇已哉. 自古多 爲聞人之所盤旋.” 61) 조인영, 앞의 책. “夫大嶺以西, 山莫尊於寒溪, 水莫盛於谷雲, 而是山甲乙者, 豈水石云乎. 高士尊宿之蹟爲獨多也. 地以人名不其然乎.” 62) 김상헌, 앞의 책. “蓋淸平一洞泉石之美, 大嶺以西, 未有其似, 造化之巧, 亦豈非有窮也哉.” 63) 박장원, 앞의 책. “是行也. 當使笛者笛酒者酒以取樂. 而笛則時或三奏, 酒輒數行而止, 不至於 奇樂者, 意亦不在酒不在絃管也. 國內名山, 吾見多矣. 拱揖環抱, 無少空缺, 形容蘊藉, 氣色秀 異, 未有若此山者也. 此古來畸人賢士之所以愛而不捨也歟.” 64) 박장원, 같은 책. 春州之淸平, 素稱小蓬萊, 蓋亦關東之一名山也. 然其擅名於國中者, 豈徒以
山水之瑰奇已哉. 自古多爲聞人之所盤旋, 在麗有若李資玄, 在我朝有若金悅卿, 前後相望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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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대저 大嶺의 서쪽으로 산은 寒溪보다 높은 것이 없고, 물은 谷雲보다 성한 것 이 없으니, 이 산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어찌 水石 때문에 말하는 것이겠는가? 고준한 선비가 머물렀던 자취가 유독 많아서 이다. 땅은 사람으로써 이름나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65) 청평산을 다른 산과 비교했을 때, 산으로 친다면 설악산보다 못하고, 계곡의 수량은 화천에 있는 谷雲九曲보다 못하고 보았다. 그러나 그곳보다 이름난 것은 뛰어난 선비들이 많이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 때문에 청평산이 유명해졌다고 결론짓고 있다. 안석경도 청평산이 뛰어난 경 치로써 이름이 났지만, 이자현이 거처하고부터 산이 더욱 알려졌고, 뒤에 김시 습과 김창흡이 자취를 남겨 산과 골짜기를 빛냈다고 기록하고 있다.66) 결국 청평산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그릴 수 있다. 외형적으로 뛰어난 경치가 하나이다. 이 때의 경치는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뛰어난 인물로 기억되는 청평산이다. 앞에서도 다루었 던 이자현과 김시습, 김창협 등이 거처함으로써 청평산은 독특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청평산은 다른 산과 차별화되었다. 3. 결론 유산기에 대한 연구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산에 주목하였고, 이후 지역 에서 의미를 갖고 있는 산에 대한 연구로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 청평산 유산기에 대한 연구의 일차적 목표는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을 통하
傳記. 其高風逸韻, 至今聞者, 猶足以興起, 則此固他山之所稀有也. 近世退陶李先生及白沙李
相國, 或以繡衣持斧, 留祝融之吟, 或以遭讒去國, 縱西湖之遊, 茲二公之所探歷, 必皆不以山 而以人, 亦可想矣., 余以所聞, 亦非不足, 而百聞不如一見, 常欲足一及山而無繇也.” 65) 조인영, 앞의 책. “夫大嶺以西, 山莫尊於寒溪, 水莫盛於谷雲, 而是山甲乙者, 豈水石云乎. 高士尊宿之蹟爲獨多也. 地以人名不其然乎. 然而希夷, 史臣多貶之, 比之樊英之盜虛名, 种放 之累晩節, 信斯言也. 箕潁可羞也. 退溪李先生獨序列之, 辨史誣而表章其賢, 繫以詩曰, 東韓 隱逸誰修傳, 莫持微疵屛白珩, 盖嗟惜之也.” 66) 안석경, 앞의 책. “淸平山在春州, 以殊勝名. 自息菴李公居之而山逾聞, 後有淸寒子, 若百淵翁,
時時來見, 不忍去. 感慨高歌餘情, 耿山壑. 於是乎山之名, 殆人人誦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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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청평산 유산기의 특징을 살펴보는 동시에, 차후에 심층적으로 논의가 진행 되어야 할 부분을 찾는 것이다. 본고에서 분석한 자료 중 청평산만을 다룬 유산기는 6편이며,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청평산이 포함된 것은 3편이다. 이들 작품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서 꾸준히 창작되었다. 산을 유람할 때의 동행인은 가족이나 친척, 지인과 노비, 笛工 등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산행을 하였다. 보편적인 방법은 말과 도보를 이용한 유람이었다. 유람객들은 식량과 이불, 술, 호금, 철적 등을 지참하였고, 대체로 하루나 이틀에 걸쳐 유람하였다. 청평산을 유람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뛰어난 인물들로 인해 고결한 기풍을 지니게 된 산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다른 산의 유람 동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산행 코스를 분석해본 결과 대부분 유람객들의 산행 코스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평산에 들어가면서 먼저 폭포를 구경하고, 영지를 지나 청평사 에 들른다. 그 다음 서천을 거쳐 선동에 있는 식암을 방문한다. 여기까지는 모든 여행자들의 공통된 경로이다. 이 때문에 중요한 경유지 또한 동일하였다. 청평산이 유명한 이유는 산수의 빼어남도 있지만, 이자현, 김시습, 김창흡과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은거라는 방식으로 청평산에 거처했기 때문이었다. 이 들의 은거 방식의 성격, 역사적 의미와 은거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등에 대한 추후의 연구가 요구된다. 유산기에 나타난 불교에 대한 인식은 상반되어 나타난다. 이자현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은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禪說을 믿고 따른 것 에 대해서는 혹평을 하였다. 한편 청평사에서 주지를 지냈던 보우에 대해서는 妖僧이라고 할 정도로 폄하하였고, 그가 세운 불사들을 지나친 호화스럽다 하면서 부정하였다. 그러나 나옹화상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도 진전된 논의가 필요하다. 청평산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외형적으로 뛰어난 경치를 지닌 산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이 때 경치는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구체 화되어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뛰어난 인물로 기억되는 청평산이다. 앞에서도 다루었던 이자현과 김시습, 김창협 등이 거처함으로써 청평산은 독특한 이미
지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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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山 遊山記 연구 _ 27
? Abstract
A Study on the Cheongpyeongsan(淸平山) Yousangi(遊山記) Kwon, Heok-Jin
This manuscript identifies the Cheongpyeongsan Yousangi(遊山記). The Cheongpyeongsan Yousangi had constantly created from 16 century to 19 century. When the writers of the works toured Mt. Cheongpyeong, they were accompanied by their families, relatives, or acquaintances. They went sightseeing on horseback or on foot, taking one day or two days.
The Cheongpyeongsan Yousangi features the writers’ motive for touring the Cheongpyeongsan. The motive is seeing the Cheongpyeongsan that contains the nobility of distinguished persons with their own eyes. This study analyzes the hiking courses of the Cheongpyeongsan in Yousangi and finds that every hiking course is almost same. First, see the sight of the waterfall. Second, go to The Cheongpyeong-sa, stopping by the Yongji(影池). And then, visit to sikam(息庵) at seondong(仙洞) section by way of Seocheon(西川) section.
The reason for Cheongpyeongsan’s fame is that historic figures retired to hermitage in the mountain, as well as the mountain had great scenic beauty. The characteristic of the Cheongpyeongsan shows through a discussion about Ja Hyeon Lee and Si Seup Gim’s retirement and its historical meaning. The authors of the Cheongpyeongsan Yousangi take different positions in Buddhism. This part needs further research.
The Cheongpyeongsan is imagined by beautiful valley and historic figures. Ja Hyeon Lee and Si Seup Gim lived in seclusion at the Cheongpyeongsan so that the mountain has a unique image ‘the mountain of the seclusion’. This is a differentiated feature from other mountains.
[Key Words]
Yousangi, Accompanied, Hiking course, Retirement, Buddhism, Valley
권 혁 진 ●●●● 강원대학교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현진에버빌 104-203 E - m a i l : hjh49@paran.com 접수 일자: 2011. 04. 15 심사 수정: 2011. 06. 15 게재 결정: 201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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