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과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고 싶다면] ① 북한산성 14성문 답사코스 ② 북한산성의 과거와 현재 外

2019. 1. 8. 01:01산 이야기




북한산성 14성문을 10시간만에 걷다

[북한산과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고 싶다면] ① 북한산성 14성문 답사코스

등록|2008.11.06 21:41 수정|2008.11.06 21:41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게 된 사연

▲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 이상기


   여행기획자 이광국 선생이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자고 제안했다. 이광국 선생과는 이미 '경주 남산 완전정복', '서울 성곽 답사'를 함께 한 바 있고, 이들 답사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운 경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북한산성 종주에 흔쾌히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에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게 되면 북한산과 북한산성 그리고 14성문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광국 선생이 카페에 북한산성에 대한 자료를 올려놓아 그것을 토대로 먼저 종주 일정과 코스를 확인한다. 11월1일(토)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10시간 북한산성 일원을 답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만나 버스로 북한산성 입구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종주 코스는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 다시 그곳으로 내려오는 원점 회귀 산행이다. 이들 코스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북한산성 지도 ⓒ 이상기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 수구문 - 중성문 - 대서문 - 의상봉 - 가사당암문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부왕동암문 - 나월봉 - 나한봉 - 청수동암문 - 문수봉 - 대남문 - 대성문 - 보국문 - 칼바위 갈림길 - 대동문 - 동장대 - 북한산대피소 - 용암문 - 노적봉 안부 - 위문 - 대동사 - 북문 갈림길 - 북문 - 원효봉 - 원효암 - 시구문(서암문) -북한산 상가지역. 

우리는 8시에 구파발역을 떠나 8시 20분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 들러 고영란 대원으로부터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면서 북한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발행한 몇 가지 답사자료를 받는다. 크게 세 가지인데 그 중 하나가 '국립공원 200% 즐기기'라는 부제가 붙은 북한산국립공원 지도이다. 다른 하나는 '서울의 진산 북한산'이라는 역사문화 안내 자료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자연·건강 지도'로, 북한산이라는 자연이 주는 정신 건강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시간 흐름도 1: 수구문에서 대남문까지

▲ 북한산성 중문에 해당하는 중성문 ⓒ 이상기


이 자료를 대충 훑어보고 우리는 바로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이때 시간이 8시 30분이다. 약 7분쯤 올라가자 수구산장이 나온다. 그 집 주인에게 수구문 위치를 물어본다. 그러자 산장 바로 위 물길이 좁아지는 데라고 말한다. 조금 올라가 보니 큰 바위가 양쪽으로 두 개고 산쪽으로 성곽 흔적이 보인다. 이곳이 수구문터이다. 수구문 위로는 경국정사라는 허름한 절도 보인다. 수구문은 북한산성 14석문 중 훼손된 후 복원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수구문을 지나 다시 상류를 따라 20여분 올라가자 대한불교 선학원 소속 법용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조계종 계열의 국녕사에 이르고 계곡을 따라 똑바로 올라가면 중성문에 이른다. 우리가 계곡을 따라 중성문에 도착하니 9시10분이다. 중성문은 행궁지에 이르는 중간의 문으로 1차로 대서문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만든 2차 방어성문이다. 중성문 옆으로는 시구문과 수문이 있었으나 수문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 대서문 ⓒ 이상기


우리는 중성문에서 다시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대서문으로 향한다. 대서문 쪽으로는 대로가 나 있고 최근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었으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신도들을 실은 소형 버스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다니고 있다. 무량사를 지나 대서문에 이르니 9시45분이다. 이곳 대서문에서부터는 의상봉으로 오르는 힘든 산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산행도 북한산성 성곽을 따라 진행된다.

가파른 길을 한 시간쯤 오르니 의상봉(502m) 정상이다. 의상봉에서는 건너편 원효봉 능선과 그 오른쪽으로 백운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의상봉을 내려가 용출봉으로 향하다 보면 가사당암문이 나온다. 가사당암문에 도착한 시간은 10시57분이다. 이곳에서는 국녕사와 백화사 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곳에서 다시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능선을 1시간쯤 타면 부암동암문이 나온다. 부암동암문에 도착한 시간은 11시53분이다. 부왕동암문에서는 삼천사와 중흥사지로 내려갈 수 있다.

▲ 암릉미가 뛰어난 의상능선 ⓒ 이상기


부왕동암문에서 다시 나월봉과 나한봉을 넘으면 청수동암문이 나온다. 도착한 시간은 12시40분이다. 부왕동암문에서 청수동암문까지 걸리는 시간을 1시간 정도로 잡으면 될 것 같다. 청수동암문에서 남서쪽 능선을 타면 비봉에 이를 수 있다. 이 비봉능선은 암릉미가 탁월해 산꾼들이 즐겨 찾는다. 청수동암문에서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문수봉을 넘지 않고 우회해 간다. 대남문에 도착하니 벌써 12시52분이다. 이곳 대남문은 북한산성 남쪽에 있는 큰 문으로 남쪽의 구기동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대성문으로 향한다.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시간 흐름도 2: 대성문에서 용암문까지

▲ 대남문 앞으로 이어진 북한산성 성곽 ⓒ 이상기


대남문에서 대성문으로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문수봉의 멋진 암릉을 볼 수 있다. 대성문에 도착한 시간이 1시47분이다. 대성문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4대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크기라든지 웅장함은 4대문 이상 간다. 그 이유는 이곳 대성문으로 임금님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대성문에서는 남쪽의 평창동계곡과 형제봉 능선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제 대성문에서부터 용암문까지는 동쪽의 성곽으로 높은 봉우리가 없고 완만한 능선길이다. 그러므로 여유있게 산행을 할 수 있다.

대성문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보국문이 나온다. 보국문은 대성문과 대동문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정릉이 나오고 북쪽으로 내려가면 태고사가 나온다. 보국문을 지나 다시 15분쯤 가면 대동문이 나온다. 대동문은 북한산성 동쪽에 있는 큰 문으로 이곳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수유리와 우이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대동문을 지나면 이제 길은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다.

▲ 동장대 앞의 노부부 ⓒ 이상기


이들 산성길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동장대이다. 동장대에 도착한 시간은 2시33분이다. 동장대는 동쪽에 있는 지휘본부로 장수가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전투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동장대에서 다음 용암문으로 가다 보면 중간이 성곽이 끊어진다. 이곳부터는 천연 암릉이 성곽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용암봉, 만경대, 백운대로 이어지는 암릉길 때문에 적이 동쪽에서 산을 넘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산성길을 따라 용암문에 이르니 2시54분이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는 다시 암릉을 통과하는 산행이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금 힘이 든다. 용암봉 서쪽을 따라 노적봉 안부에 이른 다음 다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만경대 아래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만경대 바위 능선은 정말 절경이다. 그리고 앞으로 보이는 백운대와 인수봉의 하얀 암릉도 우리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세 봉우리 즉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마치 세 개의 뿔처럼 솟아 있어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북한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다.

▲ 백운대와 만경대 ⓒ 이상기


이를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글이 조선 인조 때 정치가 청음 김상헌이 지은 시조이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전파였던 김상헌(1570-1652)은 전쟁에서 패하자 왕자들과 함께 볼모로 잡혀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간다. 이때 한양을 떠나면서 부른 노래 중에 바로 삼각산과 한강수가 나온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시간 흐름도 3: 위문에서 시구문까지

▲ 백운대 아래 있는 위문 ⓒ 이상기


노적봉 안부에서 위문까지는 계속해서 오르막길로 25분쯤 걸린다. 위문에 도착한 시간은 3시38분이다. 위문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836.5m)에 오르는 관문으로 14개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위문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우이동이 나온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백운대를 지나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백운대 동쪽으로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암봉인 인수봉이 우뚝하다.

백운대를 오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백운대 오르기를 포기하고 바로 북문으로 향한다. 북문으로 가는 길은 염초봉을 우회해 원효봉 능선을 탈 수도 있으나 상당히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동사 쪽으로 내려간 다음 다시 북문에 오르는 길을 택한다. 그러므로 이 길은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수고를 좀 해야 한다. 위문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3시47분 북문을 향해 출발한다. 이광국 선생은 무릎이 좋지 않아 내려가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내려가면서 보니 아직도 가을 단풍이 화려하다. 빨간 단풍잎과 노란 신갈나무잎이 정말 잘 어울린다.

▲ 아름다운 북한산 단풍 ⓒ 이상기


40분쯤 내려오니 대동사이다. 이 절은 염초봉 아래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노적봉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어 북문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길을 15분 정도 오르니 북문이 나온다. 이때 시간이 4시58분이다. 동서남에 있는 다른 문들에는 대(大)자가 붙었는데 이곳 북문에는 대자가 없다. 도성이나 성곽의 문을 보면 항상 북쪽으로의 출입이 적어 북문은 홀대를 당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 북문에서는 동쪽으로 염초봉과 백운대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원효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북문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의 원효봉으로 향한다. 원효봉은 이번 북한산성 14성문 종주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원효봉에 오르니 서쪽으로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가까이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멀리 한강 줄기가 석양을 받아 하얀 빛을 반사한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5시18분 원효봉을 떠나 25분을 내려가니 시구문이다. 시구문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플래쉬를 터뜨려 시구문을 사진에 담는다. 시구문을 내려오면서 보니 서쪽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다. 11월의 해는 그렇게나 짧다.

▲ 북한산성 14성문 중 마지막에 들른 시구문 ⓒ 이상기

덧붙이는 글 | 북한산 국립공원에 있는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했다. 오른쪽 의상능선으로 해서 백운대 아래 위문을 거쳐 왼쪽의 원효봉능선으로 내려왔다. 북한산의 대표적인 봉우리와 14개 성문을 지나 이루어진 이번 답사에는 10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들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답사한 이야기를 10회 내외로 연재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북한산 국립공원에 있는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했다. 오른쪽 의상능선으로 해서 백운대 아래 위문을 거쳐 왼쪽의 원효봉능선으로 내려왔다. 북한산의 대표적인 봉우리와 14개 성문을 지나 이루어진 이번 답사에는 10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들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답사한 이야기를 10회 내외로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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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과 북한산성 14성문을 종주하고 싶다면] ② 북한산성의 과거와 현재


08.11.12 11:00l최종 업데이트 08.11.12 11:00l



삼국시대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

 

 애기를 업은 형상의 북한산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개루왕 5년(132) 2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초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따르면 북한산성이라는 표현은 백제 건국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북한산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보니 그 형상이 가히 살만한 땅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후에 온조가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 그리고 다시 도읍을 북한산성으로 옮기니 지금의 한양이다. 점술가가 그곳을 명당이라고 하였으나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

 

 업힌 애기에 해당하는 인수봉

 

   여기서 부아악(負兒岳)이란 아이를 업고 있는 바위산이라는 뜻이다. 동장대 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백운대와 만경대가 겹쳐 어머니 산처럼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인수봉이 등에 업힌 어린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비류와 온조가 현재의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 올랐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가 백제가 나라를 세우는 기원전 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백제 개로왕 15년(469) 10월에는 백제가 쌍성(雙城)을 수축하고 청목령 큰 성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북한산성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이 기록은 안정복 <동사강목>에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보면 진흥왕 16년(555)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였다. 18년에는 신주(廣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산이 신라의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한양과 북한산성의 역사

 

 목멱산 북쪽 현재 서울의 모습

 

   이후 북한산 남쪽의 현재 서울이 다시 중요하게 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이다. 위위승 동정(衛尉丞 同正) 김위제(金謂磾)<도선비기>를 인용, 목멱산 북쪽 양지바른 곳에 남경을 만들 것을 상소한다. 이것은 <고려사절요> 숙종 명효대왕편 병자 원년(1096) 기록에 나온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세 곳의 서울이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이 되는데, 11ㆍ12ㆍ정ㆍ2월은 중경에 머물고, 3ㆍ4ㆍ5ㆍ6월은 남경에 머물며, 7ㆍ8ㆍ9ㆍ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일백 60여 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 하였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국가의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니, 이에 점술가인 문상(文象)이 그 말을 따라 화답하였다.

 

   이어지는 숙종 명효대왕편 신사 6년(1101) 기사에 보면, 최사추도성 건설을 주청하고 왕이 이에 따른다. 그렇다면 서울 도성은 1101년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최사추(崔思諏)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 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복원중인 중흥사의 모습

   그리고 미수 허목이 쓴 <기언 별집> '고양(高陽) 산수기(山水記)'에 보면 북한산 중흥동에 들어가 산수를 감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곳에서 미수는 고려 때 만들어진 북한산성의 흔적을 발견한다.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정(山頂)을 둘러 석문(石門)으로 된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석문을 들어가니, 반석(盤石)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절정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서울 도성은 조선 태조때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세종때 대대적으로 보완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서울 도성 북쪽의 방어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자연스럽게 논의되었다. 세조 2년(1456)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이때 네 군데 보완할 곳 중 하나로 북쪽 삼각산에 설치된 석성(石城) 즉 북한산성을 거론한다.   

 

   "경도(京都)의 사보(四輔)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산성(北漢山城)입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交戰)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本朝)가 도읍을 정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四方)을 공제(控制)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中央)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三山)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大江]은 남을 에워싸고 서(西)에는 임진(臨津)을 두고 동(東)에는 용진(龍津)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石城)이 호거(虎踞)하고 조시(朝市)가 기포(碁布)하며, 궁궐(宮闕)은 엄숙(嚴肅)하고, 여엄(閭閻)은 은부(殷富)하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북한산성

 

 북한산성 지도

   그러나 북한산성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숙종 때이다. <만기요람> 군정편 3(軍政編三) '북한산성(北漢山城)'조에 따르면 1711년 이유(李濡)의 건의로 북한산성 축성을 시작한다. 이때 설치된 것이 산성과 성문, 행궁과 창고, 절 등이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며, 대문이 4개 암문이 10개였다. 그리고 장대가 3개이고 창고가 7개이며 크고 작은 절이 14개였다.

 

   이때 세워진 4개의 대문이 대동문,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이다. 대성문은 임금의 출입을 위해 대남문 동쪽에 별도의 대문으로 만들어졌다. 북문은 출입이 거의 없어 암문이 되었고, 중성문은 처음 암문으로 만들어졌다가 대서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중에 대문의 형태로 증축되었다.

 

 4대문 중 임금이 출입하던 대성문

   장대로는 동장대와 남장대 그리고 북장대가 있다. 북한산성 안에는 왕의 임시거처로 129칸 규모의 행궁이 지어졌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행궁은 대성문의 북쪽, 대동문의 서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1999년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며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그래서 2007년 6월 북한산성 행궁지국가 사적 제479호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삼각산 태고사

 

   북한산성 안에는 또한 절이 있었는데 중심이 되는 절이 중흥사였다. 149칸이나 되었으며, 승병 지휘부에 해당하는 치영(緇營)이 있었다. 다음으로 큰 절이 태고사(太古寺)였으며 136칸이다. 태고사에는 경서(經書), 통사(通史), 당시(唐詩)의 판목이 보관되었다. 그 외 절로는 보국사(輔國寺), 진국사(鎭國寺), 부왕사(扶旺寺), 국녕사(國寧寺), 보광사(普光寺), 원각사(元覺寺), 용암사(龍巖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봉성암(奉聖菴), 원효암(元曉菴), 문수암(文殊菴)이 있다.  

 

   숙종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개 군문으로 하여금 북한산성을 쌓게 했다. 서북쪽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문 북쪽으로부터 용암봉까지는 훈련도감에서 맡았다. 용암봉에서부터 가장 남쪽의 보현봉까지는 금위영에서 맡았다. 그리고 보현봉에서 수문까지는 어영청에서 맡아 쌓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이후 현재의 북한산성

 

 1904년에 찍은 행궁 사진

   북한산성은 조선말까지 그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1904년의 북한산성 행궁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행궁이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내정전외정전, 그리고 담장 등의 유구와 축대 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정부에서는 훼손되어가는 북한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1968년 12월5일 북한산성을 사적 제162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983년 8월2일에는 좀 더 넓게 북한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바 있다. 그것은 북한산이 자연생태계와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대표적인 자연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7년 6월8일 북한산성 행궁지를 사적으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은 장기적으로 행궁지를 복원하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원증국사 부도탑

 

   이곳 북한산성에는 이들 사적 외에도 보물과 유형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보물로는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 탑과 탑비 있다. 원증국사(1301-1382)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공민왕의 왕사였다. 법명은 태고화상 보우이며 신돈에게 계를 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고화상 보우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함께 고려시대 불교의 종통을 이은 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그 외 시도유형문화재와 시도기념물이 있는데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와 중흥사지가 있다. 금위영 이건기비는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고 있던 금위영 터를 옮긴 후 이를 기념하여 숙종 41년(1715)에 세운 것이다. 북한산성 내 대성암이라는 암자 아래에 있다. 그리고 중흥사지는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주춧돌과 축대를 토대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중흥사는 앞에 언급한 원증국사 외에도 대지국사 목암 찬영이 공부한 유서 깊은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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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503호] 2011.09

입력 2011.09.07 14:05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북한산성이 올해로 축성 300년을 맞았다. 조선시대 숙종 37년(1711) 4월 초에 확장공사를 시작해서 그해 9월, 만 6개월 만에 오늘날의 모습대로 완공했다. 9월이 되면 축성 꼭 300주년이 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삼국의 영토 각축장으로 알려져 있다. 등산객들은 실제로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나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땅에 누가 침입해 들어오며, 누가 이런 땅을 두고 각축을 벌였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는다. 성 내부의 협소한 지형은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사진은 만경대에서 바라본 백운대 정상과 북한산성 성벽의 모습을 담았다. / 사진·염동우 기자

   그러나 비봉 정상에 국보 3호인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걸 보면 실제로 각축을 벌였던 것 같다. 아마 한강의 물이 주는 자연의 생산력과 그 배후지역으로 북한산이 갖는 관방기능 때문에 지형적으로는 험한 악산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북한산고려시대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 때 왕실의 피난지로서 이용됐고, 몽골의 침입 때도 방어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북한산성 축조 기록을 담은 <북한지> 연혁부분에 따르면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의 산군이었으며,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했다. 백제의 온조왕이 이를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 5)에 성을 쌓았다. 남평양성은 지금 경도의 북한산성이며, <삼국사기>에는 개루왕(蓋婁王) 5년(132)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근초고왕 26년(371)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1년 고구려 장수왕이 침입하여 이 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은 폐지되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따라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들어와서부터 본격 논의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외침을 막기 위해 ‘한양 도성을 더 높이 축조를 할 것이냐’와 새로운 성인 ‘북한산성을 쌓을 것인가’를 놓고 신하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인다. 이는 도성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 세조 때 첫 축성 상소문

   북한산성 축성에 대한 첫 상소는 의외로 일찍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북한산성 축성을 권한다. 그 때가 세조 2년(1456)이었다.

전란시 왕의 피난처로 사용했던 북한산성 행궁지의 모습. 1915년 8월 북한산의 대홍수로 건물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경도는 곧 북한산성입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조선이 도읍을 정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을 공제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은 남을 에워싸고, 서에는 임진을 두고 동에는 용진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중략) 이제 중외에 익진(翼鎭)을 열치하였으되 경도의 기내에는 단지 3진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합니다. (후략)’

   이후 잠잠하다 효종 10년(1659)효종송시열에게 북한산성 축성의 필요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북한산성 계곡에 있는 북한산성의 수문 터에 대해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2 가파른 능선길에 있는 성벽은 축성 이후 300년이 지난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대개 외침을 받는 나라는 변방의 성곽이 견고해야 끝까지 패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작은 병란만 일어나도 먼저 도성이 무너져 공사간의 비축물자가 모조리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어찌하여 조정의 정책이 이처럼 엉성할 수 있는가? 일찍이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또한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것을 관장하던 관서이며, 현재 종로구 평창동 세검정초등학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를 막아 국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왕의 피난처로 삼았으면 모두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필시 적이 쳐들어와 싸우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적의 사지가 되었을 것이다.’

   축성논의가 본격 논란이 된 시기는 1674년 숙종 즉위 첫 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가 “청나라로부터 곧 군사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전하면서부터다. 이 문제로 조정 대신들은 본격 논란을 벌이고 왕이 동조하면서 가속화됐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 29년(1703) 이조 판서 김구상소문에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 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만엽이 둘러싸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깎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군부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북한산성 축성을 건의했다.

북한산성에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문이 대서문이다.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대서문을 통해 북한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우의정 신완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대저 일을 행할 시초에는 여러 의논이 뜰에 가득한 것인데,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단연코 시행할 뿐입니다” 산성 축성 입장을 거들었다.



숙종 때 축성 놓고 찬반 상소문 잇따라

   그러나 축성 반대 입장도 만만찮았다. 판부사 서문중상소를 올려 축성 반대 입장을 밝혔다.

   “뭍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물에는 강도(江都, 지금의 강화도)가 있는데, 이제 두 곳을 버리고 따로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땅을 구하려 하면, 신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말하기를 ‘가까운 땅에 성을 만들어서, 급할 때에 임하여 옮겨 들어가서 도성을 비우고 청야(淸野)하면 적이 얻을 것이 없어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다른 군대가 도성을 지키다가 도성이 함락되면 물러가서 북성을 지킨다’고 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중히 여기는 바는 적이 달려오는 바인데, 성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완급이 있지만 성을 공격하는 자 또한 차례가 있겠습니까?”

북한산성의 암문은 비밀리에 드나들었던 문이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 가사당암문.

   예조판서 김진귀도 같은 해 축성 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 “이미 내 뜻을 개유(開諭)하였다”축성 고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반대 상소문은 축성 공사를 시작하는 숙종 37년(1711)까지 계속됐다. 병조판서 최석항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하니 그 불편한 것의 하나입니다. 도성의 백성과 같이 들어가게 되면 실로 모두 포용할 만한 형세가 못 되니…, (후략)”라며 축성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대체로 축성 반대 이유기근과 재난 등으로 경제여건이 익지 않았다는 것과 풍수지리상 도성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것,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에서 축성이 금지되었다는 것 등이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도성 가까이 산성을 축조하면 도성과 산성을 동시에 방어해야만 실효가 있는데, 두 개의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부족하고, 도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해 저항한다면 도성 내의 백성이 갈 곳이 없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용혈봉과 나월봉 사이에 있는 부왕동암문.

   이에 숙종“도성은 지킬 수 없음을 익히 헤아린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지키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밝혀 축성 공사를 강행했다. 이때가 1711년 4월 3일이다.

   장기간 축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 숙종은 공사를 신속히 끝내기를 원했다. 전국에서 부역에 동원된 인원과 승군은 총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으로 구역을 분담해서 성을 쌓도록 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약 12.7km에 달했다. 성이 완공된 뒤에는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했으며, 승군대장에게는 팔도도청섭이란 직책이 주어졌다.

축성 총책임자였던 승려 성능이 <북한지> 편찬

   초대 승군대장은 성능이었다. 성능이 바로 영조 21년, 1745년 <北漢誌(북한지)>를 쓴 주인공이다. <북한지>에 소개된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나한봉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청수동암문.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12.7km에 이르고, 성곽 시설은 수문 1개소와 북·대동·보국·대성·대남·대서문 등 6개소의 성문, 서·백운봉·용암봉·가사동·부왕동·청수동암문 등 6개소의 암문, 그리고 중성문 등 모두 14개의 문으로 이뤄졌다. 성곽공사에 이어 군사지휘소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 장대(將臺) 3개소가 마련됐다. 동장대가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할을 했다.

   성 내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 99개소저수지 26개소를 숙종 38년(1712) 10월까지 만들어 북한산성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 14개의 성문 중 북문·대동문·대서문·대성문·중성문의 5개 문은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으로 홍예와 초루가 설치되었다. 소동문·소남문·서암문·백운동암문·용암봉암문·동암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 등 9개 문의 높이는 약 7척, 너비 약 7~8척 내외로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 또 수문은 높이 16척, 너비 50척이었다. 소동문은 보국문, 소남문은 대남문, 백운봉암문은 위문, 청수동암문은 위녕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성은 노적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협곡을 차단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형이 평탄해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이 이 일대를 차단하면 행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인명을 보호할 수 있기에 이중으로 쌓은 것이다.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대남문. 도읍에서 왕이 피신하는 문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행궁은 유사시 임금이 옮겨와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다. 숙종 37년(1711) 7월에 행궁자리를 정하고 8월에 착공해 이듬해 5월에 130여 칸 규모로 완공됐다.

   산성 내 많은 절을 창건해 승군의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북한산성을 지키게 했다. 당시 병영으로 사용하던 사찰은 도총섭이 머물던 136칸의 중흥사를 비롯해서 태고사·서암사·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진국사·상운사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봉성암 등 2개의 암자가 있다.’

   이후 승군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됐고, 사찰도 점차로 해체됐다. 이어 1915년 8월 북한산에 내린 집중호우로 돌로 된 성벽만 남겨놓은 채 행궁과 동장대 등 산성 내부의 주요 시설물 대부분 무너지거나 홍수에 떠내려갔다. 현재의 산성은 1990년부터 서울 정도(定都) 600년 사업 일환으로 복원과 재정비를 거듭, 역사탐방로와 등산로로 활용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문은 모두 14개 문으로 구성

   그 북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하고, 먼저 수문 터부터 찾았다. 14개의 성문 중 수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원한 상태지만 수문은 이정표도 없이 내버려져 있다.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500m쯤 올라가니 흐르는 물 아래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게 바로 수문 터다. 수문은 북한산성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문이다. 원래 북한산성의 시구문 쪽 계곡과 중성문 옆 계곡에 두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성문 옆 한 곳의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엔 식수원 역할을 하지만 적이 침입해 올 때는 방어진지 역할까지도 했다고 전한다. 이정표라도 세워 놓으면 오가는 등산객들이 역사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수문 터에서 조금 내려와 대서문으로 향했다. 북한산성의 성문은 일반적으로 대서문과 같이 큰 성문은 홍예(무지개문)와 초루(성문 위 다락집 같은 정자)가 갖추어진 반면 암문은 군수물자나 적의 동태, 시체를 옮기기 위해 조그만 비밀문같이 만들어 사용했다.

염초봉과 원효봉 사이에 있는 북문. 문의 모양은 홍예로 복원했으나 초루가 없고 두 개의 문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는 의문이다.


   대서문은 제법 위용을 갖춘 문으로 웅장하다. 문 위에는 초루까지 갖춰져 소수의 군사들이 머물며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돼있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대서문에서 의상봉 방향으로 성곽이 연결돼 있다.

성곽 따라 계속 올라간다. 가파른 능선길이라 이 방향으로는 도저히 적이 침입할 수 없어 보인다. 그 가파른 능선에도 성곽은 끊어질 듯하면서 연결된다. 숙종 시절 병조판서 최석항 반대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후략)”한 형국이다.

   대서문에서 의상봉까지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시간이 1시간 이상은 족히 소요된 것 같다. <북한지>에서는 의상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북한산 산성주능선 위 위문과 대동문 사이에 있는 용암문.

   ‘미륵봉 아래에 있으며,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의상조사는 처음에 흥주의 태백산에 이르러 부석사를 창건하고 북한산에 와서 머물렀다. (후략)’

의상조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다. 남한산성처럼 외벽은 깎아지른 듯하지만 성 안으로는 평평한 ‘천작지형’이 아니라 양쪽 모두 험준하기 짝이 없다.

성벽은 끊어지고 험준한 암벽이 대신했다. 암벽 능선은 계속 이어졌다. 최근 깔끔하게 복원한 성곽이 암벽 능선이 끝난 뒤 연결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당암문이 나왔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위문.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암문은 성곽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 출입구로서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전쟁 때는 비밀통로로 사용됐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사당암문도 조그맣다. 키 큰 성인이 서서 들어가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낮다. 암문은 대개 계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만들어져 있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암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용출·용혈·증취봉을 오르내려 부왕동암문에 이르렀다. 해발 600m도 안 되는 봉우리지만 산세가 험하고 암벽 능선길이라 땀이 뻘뻘 흐른다. 등산로도 험해서 때로는 철제 사다리로 오르내린다. 몇 년 전 용혈봉에서 벼락이 내리친 사고가 있을 만큼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다.

   부왕동암문은 윗부분은 홍예로, 나머지 세 부분은 방형으로 복원돼 있다. 원래의 모습은 전부 방형이지 않을까 싶은데….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 궁금해진다.

   나월·나한봉을 거쳐 청수동암문으로 향했다. 나월·나한봉은 출입금지구역이라 우회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로 저 멀리 다른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나한봉을 지나 제법 큰 쉼터가 나온다. 성으로 치자면 옹성에 가깝다. 성벽에서 조금 튀어나와 옆의 성벽으로 침입하는 적을 바로 무찌를 수 있도록 한 성이다. 좌우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북문과 수문 터 사이에 있는 시구문. 시체를 나르던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이라 했으며, 서암문이라고도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동암문이다. 청수동암문에서 성 밖으로 나가면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 나온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이 세운 4개의 순수비 중 가장 높은 곳, 가장 험한 곳에 있는 비석이다.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정말 이곳에 와서 비석을 세웠을까 싶다. 말 타고 올라가기 힘든 길을 그 당시 걸어서 왔을까? 역사는 때로는 사실과 허구(신화)가 혼돈돼서 후세에 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든다.

   청수동암문 다음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지만 대남문까지는 약간 우회하는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서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등산로 따라 간다.

   한국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교식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많다. 북한산에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을 가까이서 모시는 협시 보살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보통 왼쪽에 있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은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띤다. 북한산에도 그 이름을 따서 이 봉우리들의 이름을 붙였다.

큰 성문은 홍예와 초루 갖춰

   길 따라 가다 보니 어느 덧 대남문에 도착했다. 홍예와 초루를 갖춘 웅장한 문이다. 안내판에는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중략)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후략)’고 돼 있다.

   탕춘대성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성이다. 이 성도 숙종 때 만들면서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지>에 따르면 ‘도성의 북벽(숙정문과 자하문)을 넘어 탕춘대성을 통해 북한산성으로 피난 농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왕이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하기 위해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탕춘대성은 중간의 방어선이고, 북한산성은 행궁을 건립해서 왕이 머물도록 한 것이다.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는 보국문. 소동문으로도 불렸다.

   대남문에서 대성문까지 불과 0.3km밖에 안 된다. 대남문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부왕동암문, 동쪽으로 대동문까지 불과 좌우 1km 남짓 되는 거리에 성문들이 줄줄이 있다. 결국 왕이 도성에서 피신해 올 때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기 위해선 많은 성문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대성문에 이어 보국문까지 갔다. 성곽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길게 늘어선 성벽들이 마치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같이 보인다. 만약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일찌감치 건립되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본다.

   보국문성문이지만 암문 형태로 지어졌으며, 소동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국문에서 대동문까지는 불과 700m. 이젠 등산로도 완만하다. 용암문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도 없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문이며, 가장 큰 홍예문을 가졌다.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은 만경대 남쪽 용암봉 아래에 있는 문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북한산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대동문.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는 만경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능선이 이어지지만 위험한 암릉 구간이어서 그 밑 우회 등산로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중간쯤 지점에서 노적봉 어깨를 살짝 걸쳐 지나간다. <북한지>에는 ‘노적봉은 만경대 서쪽에 있는데, 솟아오를 듯한 산봉우리와 뾰족뾰족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의 옛 석성이 여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윽고 위문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틀째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후텁지근한 날씨로 땀은 온몸을 적신다. 위문에서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지난다. 바람길이 이곳에 있는 것 같다.

북한산성 행궁도 머지않아 복원될 듯

   북한산 정상 백운대가 바로 위에 있다. 원래 백운봉이라 불리던 것이 널찍한 터가 있어 백운대로도 불리고 있다. 탁 트인 백운대에서는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북한산성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는 중성문. 대서문이 평지에 위치,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성문을 건립해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다시 조금 내려와 위문에서 북문으로 향한다. 능선은 백운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원효봉으로 이어지지만 염초봉 주변이 위험한 리지 구간으로 등산객들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일반 등산로로 우회하기로 했다. 위문에서 상운사를 거쳐 북문까지 갔다. 2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다.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북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두 개의 홍예문으로 연결돼 있다. 초루도 없어 중간에 구멍이 뻥 뚫려, 다른 성문과 또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산성은 도읍에서 피신해 들어올 수 있는 대남문을 중심으로 좌우 방어진지를 확실히 구축하고, 북쪽은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능선 따라 성곽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오르면 원효봉이 나온다.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해골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친 그 원효대사가 연관된 봉우리다. 원효대사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원효봉 밑 조그만 암자에 자리 잡고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원효암이 그 원효암인지는 알 수 없다.

능선 따라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암벽길에 놓인 철제사다리, 혹은 성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벽 따라 걷는 성문 중에 마지막 문인 서암문시구문에 다다른다. 시체를 옮기기 위한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렇게 해서 수문 포함 14개의 성문 따라 걷기는 끝났다.


   그러나 북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지를 찾아서 출발이다. 북한산성 방향에서 행궁지로 가려면 중성문·중흥사를 지나야 한다. <북한지>에는 ‘중성문은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수구(水口)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얕은 물이 흐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성문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다. 대서문이 비교적 평지에 위치해 있어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앙으로 향하는 길 정중간에 중성문을 건립해서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쇠퇴하다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전국 승군을 지휘한 팔도 도총이 이곳에 기거할 정도로 커졌다. 1904년 화재와 1915년 대홍수로 흔적만 남긴 채 건물은 전부 쓸려갔다고 한다.

   행궁지중성문에서 중흥사를 거쳐 약 1.8km 떨어진 나한봉에서 북한산성 안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쯤에 위치해 있다. 축성 초기 당시 내전과 외전 합해 총 124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1915년 홍수로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 전하고 있다. 북한산성 전체가 사적 제162호이며, 또한 행궁지도 사적 제479호로 지정돼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고양시에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일단 유물부터 찾은 뒤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한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성 행궁 터는 유적 발굴로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는 상태다. 머지않아 북한산성 행궁도 복원될 것을 기대해 본다.









북한산성 행궁 사진1| 역사자료 

                 

이한패 | 조회 71 |추천 0 | 2016.06.13. 08:47



1912년 영국교회(성공회)가 대여하여 외국인 휴양소로 사용하던 행궁은

1915년 대홍수때 산사태로 말미암아 소실되고 말았다.

최근 한수당연구원(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ahnsudang)이 찾아서 소개한 자료

 ‘Morning Calm 제146호’의하면 1915년 7월 23~24 양일간 쏟아진 대홍수 인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THE... OLD PALACE AT POUK HAN, AS IT WAS BEFORE THE STORM

(洪水 이전 북한의 옛궁전)’이라는 제목의

행궁사진이 같이 실려있어 마지막 행궁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행궁에서 마주보이는 시단봉 정상의 동장대 주변에서 촬영한 이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북한산리궁, 1937년’ 이라는 자료로 소개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조선명소’라는 엽서시리즈에  '경성북한산구이궁(京城北漢山舊離宮)' 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1915년이전 정확한 촬영년도는 아직 알 수 없다.

1902년 세키노 타다시의 최초의 행궁사진이후 1907년 헤르만 산더가 두 번째 행궁사진을 남겼고

세 번째로 남아있는 행궁사진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행궁사진)

 

 

엽서 : (조선명소) 경성북한산구이궁  

                                                                                       




북한산성 행궁터는 행궁지 입구에서 8시방향 산등성이 아래에 위치한다. 



99년 만에 모습 드러낸 북한산성 행궁 원형

99년전인 1915년 7월 산사태매몰되었던 북한산성 행궁 원형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지속적인 발굴 조사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은 2009년과 2013년 등 북한산성 행궁지의 외정전 발굴 모습

 

 

99년전인 1915년 7월 산사태로 매몰되었던 북한산성 행궁 원형이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지속적인 발굴 조사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은 북한산성 행궁지의 외정전 발굴 모습



자료출처 : 북한산성 행궁 사진1 2016.06.13

cafe.daum.net/haiankoon/gpov/1   전주이씨 해안군 종중




북한산성 행궁 사진3|역사자료

이한패 | 조회 17 |추천 0 |2016.07.16. 08:21                                            http://cafe.daum.net/haiankoon/gpov/3        





1902년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관야정)이 촬영한 북한산성 행궁. (서울=연합뉴스)


 99년 전인 1915년 7월 산사태로 매몰된 북한산성 행궁이 130여 칸 원래 모습의 바닥을 드러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경기문화재단 산하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조유전)은 사적 479호 고양 북한산성행궁지에 대한 올해 발굴조사를 계속한 결과 북한지(北漢誌.1745)와 만기요람(萬機要覽.1808),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등지에서 기록한 행궁 면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한편 기록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게 됐다고 30일 밝혔다.


이 중에서 외정전(外政殿)은 중심건물이 마루와 좌우 온돌방을 갖춘 28칸 규모로, 그 중심축에는 월대·계단·어도·대문이 일렬로 정렬했으며, 좌우행각으로 둘러싸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아가 아랫단 외대문(外大門)은 외정전의 중심축에 위치하되 그 주변으로 좌우행랑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헌 기록을 보면 외전(外殿) 영역은 처음 축조 당시 총 61칸이었다가 나중에 총 74칸으로 변화한다. 이번 조사 결과 보수와 수축 등의 과정에서 규모가 확대됐을것으로 추정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행궁 지역을 1912~1915년 영국성공회가 여름피서지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램프와 스토브 같은 서양유물이 확인됐다.


더불어 현재까지 미공개인 북한산성 행궁터 내정전(內正殿)의 초근접 사진을 최근 확보함에 따라 향후 행궁 원형 복원을 위한 결정적인 고증 자료를 얻는 수확도 있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경기문화재단은 지난해 내전 터 조사와 올해 외전 터 조사로 북한산성 행궁 복원을 위한 건축적·고고학적 자료를 충분히 확보했다고 자신했다.


1910년대 행궁 전체 모습이 사진으로 잘 남아있는 데다 이번에 새롭게 확보한 사진으로 건물의 구체적인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났고, 국립공원에 위치한 특성으로 건물 기초가 원형이 고스란히 잘 보존된 까닭에 원형 복원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내다봤다.

행궁 복원과 아울러 북한산성 내 여타 건물지와 성벽에 대한 정비, 복원이 원활하게 이뤄지면 연간 700만 명 이상이 찾는 북한산성이 수도권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디지털뉴스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북한산성행궁지

다른 표기 언어 北漢山城行宮址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사적 제479호
건립시기1712년
성격 궁궐터
유형 유적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
분야
예술·체육/건축 

요약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임시 궁궐터.

내용

   경기도 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7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북한산성 행궁지는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1711년(숙종 37) 5월에 북한산성 수축 공사를 맡았던 김우항(金宇杭)이 산성 안에 임금행차시의 처소 또는 유사시 임금의 피난처 및 지휘소로 이용할 수 있는 임시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 이듬해에 완공된 행궁(行宮: 임시궁궐)의 옛 터이다.


   당시 행궁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內殿)과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외전(外殿)으로 나뉘어 지어졌는데 내전에는 정전(正殿) 28칸과 좌우의 각방(閣房), 청(廳), 대문, 수자칸(守刺間: 궁궐 경비실) 등 부속건물 35칸이 지어졌고 외전 정전 28칸을 비롯하여 외행각방(外行閣房), 누(樓), 청, 곳간(庫間) 등 35칸의 부속건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내전터에 앞면 7칸, 옆면 4칸의 주춧돌만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석축, 담장 등의 자취와 함께 기왓장들이 드러나 있다.


   이 행궁이 불타 없어지기 이전에 찍은 일제 강점기의 사진에 의하면 행궁의 터는 입구에서 외전을 거쳐 내전으로 오를 수록 층위가 높아지며 단을 이루는 축대를 조성하고 건물을 세웠으며 팔작지붕의 내외 정전을 축으로 하여 부속건물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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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경기문화재대관』(경기도, 199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