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5. 05:24ㆍ산 이야기
'북한지(北漢誌)' 성능(性能)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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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北漢誌)는., 1745년(영조 21)에 승려 성능(性能)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직책을 서윤(瑞胤)에게 인계하면서
북한산성에 관한 사적을 지지(地誌)의 형태로 편찬, 간행한 책.
2010. 2. 11 서울 유형문화재 제301호 지정(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북한산성(사적 제162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에 대대적인 축성공사.
13개 성문과 130칸 행궁, 140칸 군창,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으나
일제시대와, 6.25사변 중 대부분 파괴되었다.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1990년부터 '북한산성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성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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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37년(1711) 4월 3일 착수~10월 19일 완공.
그당시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축성할 구간을 나누고
3군문(三軍門) 군인이 분담해, 노임을 주는 모역군을 두었다.
또한 각종 장인은 물론 도성의 가구를 대, 중, 소로 분류해
3명, 2명, 1명씩 동원되어 3만 ~4만 도성인이 축성에 참여했다.
그당시 도성의 남자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도성민의 1/3 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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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 성곽 길이는 약 9.5km.
도성민들의 피와 땀.,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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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기간 동안 도성의 백성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싸 가지고 와서
축성하며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이듬해까지 기존 태고사와 중흥사를 제외한 8 승영 사찰을 건축.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진국사(노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봉성암, 원효암 등 8개 승영 사찰이 이때 지어졌다.
18세기 북한산성 내 현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북한지.
그당시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북한산의 사찰들.
향림사, 적석사, 청량사, 승가사, 삼천사, 진관사, 도성암 등 폐사
......................................주석...........................
향림사지(香林寺址) : 향로봉 아래 향림폭포 인근 옛터.
적석사지(積石寺址) : 노적봉 아래에 있었다는 옛 사찰.
청량사지(淸凉寺址) : 북한산 자락 청량산.,비구니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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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내 승병(僧兵) 주둔지가 되는 사찰 만 존속하게 된다.
그당시 기존사찰로 유지 되었던 문수사(文殊寺), 중흥사, 태고사.
그외 산성 내 1711년 이후에 창건된 사찰은 모두 승군(僧軍) 군영.
낮에는 군사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수행하는.,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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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산성 내에 새로 창건한 절이 12개.
기존 중흥사까지 13개 사찰에 350 승려가 상주.
북한산성 12성문 지킴이 승병대로서 역활을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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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12성문 요소마다 143 상량(초소)에 승병을 배치.
1894.7~1896. 2월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甲午更張)
그후, 승병수비대 제도가 폐지되었고 승영 사찰은 폐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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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어떤 목적으로
북한산성을 축조한걸까?'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한.,쟁탈 격전지.
조선시대 도성을 지켰던 중요한 곳.
북한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칭되는 곳.
한강 북쪽의 방어산성이자., 조선시대 행궁이 있는 피난 도성.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한 목적은 남한산성에 담겨있지 않을까?
한강 남쪽의 방어산성이자 행궁이 있는.,남한산성.
........................남한산성..............................
조선시대 도읍지 한양의 한강 남쪽을 지키던., 산성.
신라 문무왕 13년(673) 한산주 주장성(일명, 일장성)
남한산성이 현재 모습으로 갖춘 시기는 인조 2년(1624).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피신한 남한산성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직후였다.
산성 둘레 8km, 4문(門)과 16암문(暗門), 7사찰, 행궁 등.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으로서.,8도 승군을 동원해 축성.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 후, 1971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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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4년(1626)에 남한산성, 평양성을 축성했던.,각성.
각성이 축성한 평양성은 오늘날.,북한 국보 제1호.
스승 각성에게 축성법과 승병 통솔법을 전수받은.,성능.
숙종 37년(1711) 남한산성과 대칭된 곳에 북한산성을 축조.
축성 당시 산성 내 조선 3군문의 야영터였던.,유영.
북한산성을 축성할때 참여한 3군문이 6개월 간 머문 곳.
축성할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각각 관할구역을 담당.
북한산성은 둘레가 7,620보(步)이며, 21리 60보.
수문(水門) 북쪽에서 용암(龍岩)까지 2,292보는 훈련도감이 관할.
용암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2,821보는 금위영(禁衛營)에서 관할했고
수문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2,570보는 어영청(御營廳)에서 축성을 관할.
조선 숙종때 3군문이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기록.
북한산성의 성벽 높이는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고축(高築), 반축(고축(高築), 반축(半築), 반반축(半半築)
성벽 높이는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 쌓았다.
고축은 14척(尺)~12척,
반축은 7척~6척,
반반축은 4척~3척
고축의 경우 총 길이가 2746 보이고,
반축의 경우는 총 길이가 2906보이며,
반반축의 총 길이는 511보. 여장은 1,457보.
여장(女檣)은 성벽 위에서 조총 사격을 위한.,담장.
조선 숙종때 산성 수비군은 이미 조총으로 무장된.,흔적.
그당시 여장은 4가지 종류이며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른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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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훈련도감은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군문.
금위영은 오늘날 청와대 경호대, 경찰청 같은 군문.
어영청은 오늘날 수도사령부의 역활을 담당하는 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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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북문에서 달현까지
원효봉에서 노고산까지
서암문에서 지장리 노고산까지.,
관할구역 유영 : 노적봉 아래
.........금위영.........
대성문에서 정릉까지
대동문에서 수유현까지
동장대에서 장현까지
용암봉에서 우이천까지.,
관할구역 유영 : 보광사 아래
............어영청..............
여기현에서 지장리 마분까지.,
관할구역 유영 : 대성문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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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문 군량미 및 산성 관리 관청은.,경리청
1711년(숙종37) 북한산성을 쌓아 행궁을 세우고
1712년 산성 내 5~6 만석 향곡(餉穀)과 군기를 저장.
1712년(숙종38) 4월 숙종이 산성에 행차.
중성을 축조하도록 지시해 세워진.,중성(3)문.
1714년(숙종 40) 중성문 시구문 수문.,3문을 완공.
산성 중 방어 상 가장 취약적인 위치에 있는.,대서문.
그당시, 우마차가 산성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정문.
북한산성 축성 때, 12성문 중 문루를 얹은.,유일한 대서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12성문 중 제일 낮은 곳에 위치.
그 취약점을 보강해 세운.,중성문.
산성에서 두번째로 문루를 얹은.,중성문.
북한산성의 내성 안 행궁으로 들어서는 정문.
행궁에서 전란 시 한양을 사수할 의지가 담긴 문.
조선시대 숙종 때 방어전략을 엿볼 수 있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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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청..........
상창 : 행궁 앞 우측
중창 : 중흥사 앞
하창 : 대서문 안 북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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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 때, 영의정이 겸직한.,경리청장.
경리청은 3군문의 보미(保米) 이외에도
환곡 및 조지서에서 제조한 지류를 판매.
수익 활동을 벌여 재력이 풍부하였던 관청.
조선 숙종 때 산성 축성에
국가 재정을 총동원한.,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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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영조 23) 경리청 폐지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주관했다.
'총융청' 으뜸 무관은 종2품.,총융사.
한양 외곽(경기 일대)
경비 방어 담당.,총융청.
대남문 밖 평창까지 관할.
경기도 일대 11개 읍(邑).
대동미 보관창고 평창(平倉)
오늘날, 평창동 지명이 그 흔적.
1760년 8월에 영조(36년)가 거동 후
암문이었던 소남문에 문루를 올렸고
1765년(영조41)에는 대남문으로 개명.
대남문 밖 .,유영 터.
대성암(大聖庵) 아래 밭.
대남문 가는 길목에 넓은 공터.
1772년 영조(48년)가 세손(정조)와 함께
행궁에 거동한 후, 시단봉에 올랐다는 기록.
대성문, 대동문, 동장대는 그 이후에 개명된듯.
숙종 37년(1711) 산성 축조 당시,
산성 외곽 12성문 중 11문은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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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중성문 안 용학사 아래.,비석거리
선정비 26기가 총융청 역대 총융사.,흔적.
축성 이후 300년 역사 세월의 흔적이 담긴 곳.
용학사 비석거리는 타원형 북한산성 중앙에 위치.
비석거리를 둘러싼 12성문은 시계의 12 눈금 같다.
용학사 비석거리는 북한산성 12성문 안.,심장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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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고종 28) 북한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통영에 속했던 총융청을 분리해 경리청을 다시 설치
1894년 갑오개혁 때 경리청이 폐지된 흔적까지 남은 곳.
북한산성 수성대장.,성능.
축성 책임자로서 9개월
8도 도총섭으로서 30년 재직.
총 30년간 북한산성에 몸 담은.,성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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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 기록 속 봉우리.....
32봉우리, 3구릉지, 8대(총43개소).
<북한지> 기록 속에서 제1봉.,인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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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그 줄기가 인수봉(仁壽峰)에서
남서쪽 백운봉(白雲峰 : 백운대)으로 이어지고,
백운봉에서 산성의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경봉(萬景峰:국망봉), 노적봉(露積峰), 용암봉(龍巖峰),
일출봉(日出峰), 월출봉(月出峰), 기룡봉(起龍峰), 반룡봉(盤龍峰),
시단봉(柴丹峰), 덕장봉(德藏峰), 복덕봉(福德峰), 석가봉(釋迦峰),
성덕봉(聖德峰), 화룡봉(化龍峰), 잠용봉(潛龍峰),
보현봉(普賢峰), 문수봉(文殊峰)이 연이어 있으며,
나한봉(羅漢峰), 나월봉(蘿月峰), 증취봉(甑炊峰),
용혈봉(龍穴峰), 용출봉(龍出峰), 미륵봉(彌勒峰)
줄기가 대서문(大西門)을 향하고 있다." -북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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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는 약 1.000여.,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다.
그중 북한지에 기록된 북한산 봉우리 이름은 총 43개.
북한산국립공원 내에서 도봉산의 봉우리는.,제외한 것.
북한산 인수봉을 제1봉으로 여긴.,성능.
그곳 정상에는 불상 암각화 및 돌탑 흔적.
필자의 견해로는 조선'숙종~영조'시대 흔적.
풍화된 상태로 짐작하건데
그 무렵이 아닐까 여겨진다.
1711년(숙종 37) 음력 '4.3 ~10.18' 축성된.,북한산성.
'축성 총책임자' 팔도도총섭 성능은 약 350 승병을 관리.
산성 내 8도에서 모집한 승병이 주둔할 13개의 사찰을 건축.
그중에서., 용학사, 국녕사에 있는.,불상 암각화.
성능스님이 팔도도총섭으로 재직할때 흔적 같다.
북한산성 일대는 2천년간 군사보호지역이기 때문.
그래서, 북한산성 내 13개 사찰은., 승병 만 주둔이 가능.
인수봉 정상 '마애불 암각화 & 돌탑'은 그 무렵 흔적인듯.
북한산성을 축성한 석공 정도라면, 인수봉 등정이 가능할듯.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 옹의 부친 이해문씨 말에 의하면,
1924년 봄 인수봉 정상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을 발견.
그러나, 그후 세월이 흐르며 모진 바람에 못이겨 무너진 돌탑.
그곳 무너진 돌탑은 지금 옛 흔적 만 남아있는데
그 인근 바위틈 소나무도 뿌리채 뽑혀 날아갈 만큼
인수봉의 정상은 Z기류가 자주 소용돌이 치는 곳이다.
인수봉은 오랜 세월 동안, Z 기류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패여 골격 만 남아있는 산세.
그래서인지, 인수봉 정상 동굴 속 마애불상은
풍화작용으로 인해 흔적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현재, 인수봉 마애불상은 구전으로 만 전해온다.
'누가 언제 그곳에 마애불 암각화를 새긴걸까?'
'숙종때 산성 축성에 참여했던 석공이 새긴걸까?'
'성능이 13사찰 대불사 건립을 기원하며 새긴걸까?
비석거리 용학사 뒤., 마애불상 암각화
국녕사 대불 뒤.,불상 암각화.
인수봉은 조선시대에 몇차례 큰 지진이 발생,
그전에는 누구인가 자유롭게 오를 수 있었던듯.
1882년(고종19).,'2박3일'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
기록 상으로는.,
인수봉 최초 등정
사실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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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약 1000 여 봉우리를 모두 다니다 보면
'북한지'를 쓴 성능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12성문 내 사찰 곳곳마다 그의 흔적들.
성문 하나마다 그 인근에 사찰이 있고
조선시대 승병사찰이란 사실이 경이롭고
계곡마다 길마다 지명이 있는 사실도 놀랍다.
'물 속에 달그림자 비추는 못'.,월인담(月印潭)
'기생과 더불어 풍류를 나누는 못'.,여기담(女妓潭)
'옥구슬 물방울 울려퍼지는 여울'.,향옥탄(響玉灘)
월인담(月印潭)
여기담(女妓潭)
향옥탄(響玉灘)
우뚝선 산영루
물소리 옥구슬
굴리는듯 하다고
산영루라 하였네.
그리고 비림(碑林)
비 내리고 꽃 피니
이곳이 바로 선경이구나.
북한산성 내 중흥사 앞.,산영루(山映樓)
산영루 뒤.,비석거리.
산성 내 계곡 곳곳은 물론이고
산길 곳곳마다 그가 남긴 발자취.
그가 약 30여년에 걸쳐 남긴 흔적들.
북한산성 대문 격인 대서문을 지나서
중성문 지나면.,산영루가 산성 내 정중앙.
산영루 ~ 중흥사~ 태고사~ 봉성암.,천해대.
'성능'의 발자취가 가장 짙게
배여있는 곳.,'천해대(天海坮)'.
북한산 귀암봉(520m).,천해대(天海坮)
고려 말, 원증국사 태고 보우.,좌선 수행하던 곳.
'태고대(太古坮)' 또는 '천해대(天海坮)'라고 부른다.
조선 숙종 때 '북한지'를 쓴 성능 스님의.,30년 수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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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22일., 불교신문 뉴스
'희귀목판본'북한지.,영인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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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도 6백년을 맞아 북한산성의 온전한 모습을 기록한
지도와 각종 자료를 담은 <北漢誌>가 최근 영인되어., 주목.
1745년(英祖21년)에 완간된 <북한지> 규격(21cmx 34.5cm)
화엄사 출신 聖能스님에 의해 편찬되어 교계 시선이 집중.
북한지는 온조왕이 쌓은 옛터로부터 북한산성을 쌓기까지의
변천 과정 등 산성 축성(築城)에 많은 양(量)을 할애하고 있다.
지명이나 절의 유래, 풍경을 읊은 옛 사람들의 시문도 수록,
북한산성을 알기에 더없는 귀중 자료, 특히 산성축성 과정에서
유일한 사찰이던 重興寺 외 12개 사찰이 신축되었음을 알려준다.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4월3일 부터 10월18일까지
6개월 동안에 많은 반대와 경제적 악조건 속에 축성되었다.
축성에 참여했던 성능스님은 당시 승병의 軍營(總營)이었던
중흥사 주지로서 팔도도총섭을맡아 3백50여명의 승병을 관리.
성능스님은 1712년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한 이후에도
1745년 11월 판각될 때까지 30여년간 변화를 첨가 수정.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性能이라 쓰며, 호는 柱坡. - 끝 -
..................................성능(性能)..............................
그의 호는 계파(桂坡). 본래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의 승려.
화엄사 각성(覺性)의 문하에서 3년동안 수행하여 도를 이루었다.
1699년(숙종 25) 그가 공사 시작후 3년 만에 완공한 화엄사 장륙전.
장륙전(丈六殿)에는 그가 숙종과 만난 설화가 전해온다.
장륙전 중건을 위하여 100인 승려가 대웅전에서 백일기도.
백일기도가 끝나는 회향일에 노승의 꿈에 나타난.,문수보살.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으로 화주승(化主僧)을 삼아야 불사를 이룰 수 있다.”
이에 100인 중 그가 밀가루가 손에 묻지않아 화주승이 된다.
성능(性能)은 화주할 걱정에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다음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문수보살.
그가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절에 자주 들르는 거지노파.
성능이 시주를 요구하자 노파는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하여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라며 서원을 세운뒤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뒤 성능은 5, 6년 걸식하며 돌아다니다가 한양 창덕궁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유모와 함께 궁밖으로 나온 공주가
그를 먼저 보고 "우리 스님" 하고 반겼다고 한다.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않았는데
성능이 이를 펴보니 그 손바닥에는., ‘장륙전’ 3자.
그후, 숙종은 성능을 도와 장륙전을 완성케 하였고,
사액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왕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각황전.
숙종 25년에 시작해 28년에 완성된 각황전.
2층 팔각지붕의 건물이며, 국보 제67호이다.
위 화엄사 사진 속에서 각황전은 제일 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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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숙종은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을 성능에게 위임.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 직위를 내렸는데 9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
다시 화엄사로 돌아온 그는 수행의 여가에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
그는 이 『북한지(北漢誌)』를 판각하여
1745년(영조 21) 신임 도총섭 서봉에게 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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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에도 그는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 후에도
통도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을 증축.
그후 그는 자신의 생몰연대는 물론이고 행각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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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곧, '환생과 해탈'.
'그 연속적인 반복이라.,여긴걸까?'
1750년에 성능은 통도사 (通度寺) 계단탑을 증축하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釋迦如來靈骨舍利塔碑)를 건립.
이것이 성능 스님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발자취이다.
영축산 통도사.,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
성능은 경북 예천 사람으로.,화엄사 입적 說.
그의 부도는 화엄사 억만고터에 세워져 있고
'합천 해인사' 홍제암 부도전에도 부도가 있다.
하여, 북한산 봉성암 뒷편 언덕 위에
사리탑의 명칭은.,<傳 성능대사 부도).
'전하는 성능대사 사리탑'.,뜻말의 이름.
북한산 봉성암 뒷편 언덕.,성능 부도.
봉성암., 계단탑 위에 성능 부도.
성능은 산성 완공 후 산성축성 총본부 중흥사에서
틈틈이 집필하여 약 34년 후에 탈고한 것이.,북한지.
북한산성 축성기록을 전하는 역사지리서 이기도 하다.
북한산성 축성은 '팔도도총섭 성능' 지휘 아래.,축성.
북한지 연혁조에는 북한산성을 쌓기까지 내력이 있다.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南平壞)이었던 이후에
온조가 쌓았던 옛터에 산성을 쌓기까지의 역대 내력을 기록.
이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백제 온조가 처음 쌓았고
그 이전의 지명은 고구려 "북한산군" 또는 "평양성"이었다.
북한지 산계조에는 삼각산 및 인수봉·백운봉·만경봉 등
32개 봉(峯), 천룡강(天龍岡) 등 3개 강(岡), 의상대(義相臺) 등
8개의 대, 장춘동(長春洞)등 11개의 동, 여기담(女技潭) 등 2개의 담,
국녕폭(國寧瀑) 등 2개 폭포 위치 및 이들에 관한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국녕사폭포
북한지 성지조에는 성의 둘레·높이, 문의 수와 규모,
장대, 성곽 등 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내용이 있다.
둘레 7,620보, 성문 14, 장대 3, 성곽 143, 못 26, 우물 9.
북한지 사실조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재되어 있다.
북한산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
1659년(효종 10) 왕이 송시열에게 명해 산성 수축을 논의 시작.
숙종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축성 계획이 검토되고
1711년 2월 축성 결의, 4월에 축성을 시작, 9월에 완료.
관원조에는 경리청(經理廳)·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
낭청(郎廳)·관성장(管城將)의 인원과 임무를 수록하였다.
장교조에 경리청·관성소(管城所)·대성문(大成門)·승관(僧管)·
훈련도감유영(訓鍊都監留營)· 금위영유영(禁衛營留營)· 호조
등으로 나누어 소속 장교와 이졸(吏卒)의 인원 등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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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조에는 행궁(行宮)·내전(內殿)·외전(外殿), 사찰조에는
향림사(香林寺) 등 18개의 절과 도성암(道成菴) 등 3개 암자.
누관조에는 항해루(沆瀣樓) 등 3개 누정,
창름조에는 경리청의 상창(上倉)·중창(中倉)·하창(下倉)·
평창(平倉)· 호조창(戶曹倉)과 훈련도감유영· 금위영유영·
어영청유영 등 규모·위치·건립연대· 시문 및 관련사실 기록.
정계조에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관할 구역,
고적조에는 옛석성,·신혈사(神穴寺)· 최영장군전지(崔瑩將軍戰地)·
민지(閔漬)의 유적[閔公遺積]에 얽힌 이야기들이 밝혀져 있다.
수도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18세기 초 산성의 구조와
시설·축성 과정 등은 물론, 북한산성내의 지형과 고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
북한지(1745년) 산계편에 태고대(太古坮)로 기록된.,이 곳.
"태고대는 귀암봉 아래에 있고 귀암봉은 동장대 아래에 있으며
귀암봉은 '거북이 바위'가 있다고 하여 귀암봉이라 하였다." - 성능 -
대서문 → 청계동 → 노적동 → 백운동
→ 중흥사 → 태고사 → 귀암봉(천해대)
거북바위가 있어.,귀암봉(龜巖峰 : 520m)
천해대에서 우측으로 내려다보면.,중흥사
중흥사 바로 앞으로 태고사 지붕이 보인다.
중흥사, 태고사 아래 계곡에 신영루가 보인다.
...................................중흥사지...........................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普愚)가 중수.
이 절이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춘 시기는 1713년(숙종 39).
축성때 30여 칸 사찰이었으나, 축성후 증축하여.,136칸 규모.
성문과 수문(水門), 장대(將臺), 창고 등을 지키는 승군이 주둔.
이 절은 승군이 주둔한 산성 안 11곳 승병 사찰 등을 관장하였다.
왕실에서는 8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걸쳐 번갈아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산성 내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산성 내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절은 승병 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그리고 이들 승병들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軍器物)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僧倉)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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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영 당시에는 대웅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萬歲樓)와
나한전(羅漢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고, 근래까지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가., 2016년에 복원.
1902년 북한산 '중흥사.,사진
1896 년 8 월호 Morning Calm 중흥사 대웅전.,사진.
1903년 까를로 로제티.,중흥사 사진.
1904년 소실되어 옛 사진만 전해왔다.
2016.9.1 복원된.,중흥사.
2016.12.27
2017.1.22 만세루.,상량 법회.
북한산성 중성문을 지나 중흥사로 가는 산길이다.
조선 '숙종~영조'시대 성능 스님도 많이 다녔으리라.
그는 이 산길을 걸으며 보우 사리탑도 늘 지나쳤으리라.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북한지' 성능(性能)의 발자취를 찾아서.,걸어본다.
중흥사.,'원증국사' 태고(太古) 보우 부도탑.
천해대(天海坮).
원래, 이곳은 태고대였는데, 요즘 "천해대"라 부른다.
고려 말, 공민왕 때는 보우대사가 중흥사에 주석하면서
자주 이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참선하였다는.,수도처.
..................'원증국사' 태고(太古) 보우.................
경기도 고양시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탑비. 보물 611호.
비문은 고려 공민왕 때 문신 서예가 권주(?∼1394)가 썼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 수행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
1330년(충숙왕 17)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기도
1333년(충숙왕 복위 2) 성서(城西) 감로암(甘露庵)에서 정진
1337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을 읽다가 모든 알음알이 타파.
1338.1월 송도 전단원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 중, 크게 깨달았다.
.
그뒤 양근에서 어버이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을 점검.
1339년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5년간 머물때 지은., 태고암가.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궁중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
1347년에 호주 천호암에서 석옥(石屋)에게 도를 인정받았다.
1348년 귀국하여 중흥사에 있다가, 미원(迷源)의 소설산에서
4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 수행하며 지은.,신중자락가(山中自樂歌).
1352년(공민왕 1) 궁중에서 설법, 경룡사(敬龍寺)에 있었다.
홍건적의 난때 소설산으로 옮겼고 1356년 봉은사에서 설법.
그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
그때 그는 왕에게 신돈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로 내려가 수년간 머물렀다.
1368년 신돈의 참언(讒言)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
이듬해 3월 왕이 뉘우치고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 공민왕은 국사로 봉한뒤 영원사에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가 사양 1381년(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다.
우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다. 1382년 소설산으로 돌아와서
그해 12월 17일 입적하였는데 그의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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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고려는 원나라에 재침략을 받고 이어
사회불안에 따른 불교의 타락과 기복 신앙의 폐단은
마침내 고려사회에 배불(排佛)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
한편 원나라 쇠퇴는 공민왕에게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보우 혜근과 함께 복고정치를 수행하며 선풍(禪風) 불교를 시도.
공민왕이 훗날 《청사(靑史)》에 요승으로 기록되는 신돈을 기용.
실정한 탓에 배불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에 불교도 운명을 함께 하여 조선 유림의 배불책 탓에 탄압 받아 쇠락.
고려 말, '보우와 혜근'을 함께 이은
혼수의 법맥이 조선불교로 이어진다.
헤근은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졌으며
고려 말, 고승으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그림, 글씨, 노래는.,'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에게 출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후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로 가서 처림의 법을 받았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 주지.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후 회암사 주지.
그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나옹선사., 禪詩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1376년(우왕 2)에 문수회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던.,혜근 나옹화상.
원증국사 보우와 쌍벽인.,위대한 고승.
보우가 태고대 아래 용왕바위에 '중흥사 동쪽 암자'
'東庵'을 지어 5년간 머물렀던 암자가., 태고사(太古寺).
원래는 보우가 개인적인 수도처로 마련한 작은 암자였다.
.
그러나, 고려 멸망 후, 폐허가 되었는데 산성 축조와 함께
1713년 승병이 주둔하는 승병 사찰로 성능에 의해 중창된 것.
그러므로, 태고사 건물들은 언덕 위에 축대를 쌓은 후 지은 것.
북한지 기록에 의하면, 태고사 규모는 131칸.
경내에 '서적출판용 목판' 5700매와 활자 11두.
화약용 흑탑 1,600석을 비축하였다.'고 전해온다.
태고대에는 1910년대 5층탑이 있었고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시를., 새긴 현액과
영조가 직접 쓴 현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태고사., '원증국사 보우 사리탑 & 탑비'.
이곳 태고사는 고려 말, 보우의 수행처 암자였고
또한 조선시대 '태고 보우대사'와도 관련 깊은 사찰.
즉, 태고 보우대사는 우리나라 역사 상에서 2분이 있다.
불교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상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원효 의상이 아니라
두 분의 태고(太古) 보우(普雨)대사를 손꼽는다.
그리고, 두분 중에서도 한분 만 선택한다면
조선시대 허응당 보우대사(虛應堂 普雨大師) .
허응당 보우(普雨, 1507 또는 1509?~1565)는
중종 2~4년부터 명종 20년 무렵, 조선중기에
조정과 유림이 강력하게 추진한 법난(法難)으로
불교계가 존폐 기로에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꺼져가던 조선 불교의 법등을 밝히고.,운명한 순교자.
.
.............허응당 보우대사(虛應堂 普雨大師)...............
"조선불교 오백년 역사는 감동적인 불교성전." - 법정스님.
고려.신라 때는 왕권의 보호를 받고 좋은 환경에서 수행했다.
조선시대 승려가 백정 광대 천민 대우를 받으며 불법을 지켰다.
조선불교를 연구한., 일본 불교학자 '다까하시 도로우'.
"'신라 고려 조선'에서도 가장 위대한 고승.,'No 1' 보우."
연산군은 세조가 공들여 만든 원각사를 기방으로 만들었다.
중종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사찰 외에는 모두 철거 어명.
성종 때는 성리학의 예제를 시행하며 불교박해는 상상을 초월.
성종5년에 설산.월심.계엄.성명스님 등이
불법을 흉포했다는 죄목으로 참형 당했다.
세조의 스승이었던 신미대사의 2 제자.
학열과 학조도 유생들의 박해를 받았다.
성종때 많은 고승이 탄핵 장형 참수당했다.
조선의 유생들은 불교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
국가에서 승려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 보다는
불교 자체를 뿌리 뽑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불교가 쇠망함이 올해보다 심한적 없어
몰래 흘리는 피눈물 수건을 가득 적시네
구름속에 산 있지만 어느곳에 자취를 의탁하리
속세에도 이 한몸 용납할만한 땅이 없네. - 보우 -
무너져 가는 불교를 바라보는 보우스님의 탄식이다.
그때 중종이 죽고 명종이 12살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이며 명종의 모후로서 수렴청정.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정권의 실세가 되었으며
불교탄압을 안타깝게 지켜봤던 그녀는 불교를 재건.
먼저 팔도에 명을 내려 덕망있는 고승을 추천케 한 것.
함경감사 정만종이 불심이 깊고 시문이 뛰어나고
주역에 통달한 보우스님을 추천하였고 문정왕후는
보우스님을 궁궐로 불러 불법 중흥의 방책을 물었다.
"조정에서 폐지한 도첩제와 선교 양종을 부활시켜
불교 인재를 양성시켜야 한다."고 보우는 대답했다.
1550. 12. 15 연산군때 폐지된 선종 교종이 48년만에 부활.
문정왕후는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로 보우를 임명.
판교종사 도대사 봉선사 주지에는 수진스님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승려의 신분으로 관직을 하사받은 것이었다.
핍박받던 불교가 다시 제도권 내로 편입된 것을 뜻한다.
보우는 봉은사를 '승려 과거시험장' 승과평으로 만들었다.
봉은사 선종승과에 1기생으로 뽑힌이가 서산.사명이다.
5번 승과로 150 승려를 선발, 5000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
문정왕후와 보우 원력은 꺼져가던 조선불교 법등을 되살렸다.
현재, 강남 코엑스가 조선시대 봉은사 승과평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13대 명종(明宗 :1534~1567)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들은 순희세자 뿐이었는데 요절했기에 왕실은 존폐위기.
문정왕후는 태조 때부터의 왕실사찰 회암사를 주목하였다.
쇠락해진 회암사를 중수하며 명종의 다산을 기원.
400점의 불화를 조성하여 회암사에 모시게 하였다.
그해 3월 회암사 중건을 기념하고
왕실의 공덕을 위하여 무차대회를 준비.
문정왕후는 목욕재계하면서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법회를 하루 앞두고 문정왕후가 죽었다.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쏟아졌다.
율곡 이이도 '보우의 살을 찢어 죽여야 한다.'고 상소.
마침내 보우의 제주도 유배가 결정되고 그곳에서 운명.
그때 제주 목사는 변협이었다.과천현감으로 있을때
조정에 끈이 있는 봉은사 주지 보우를 찾아가 인사청탁
보우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마음 속에 앙심을 품었던 것.
변협이 제주목사로 있을때 마침 보우가 유배를 온 것이다.
죄인으로 온 보우를 연북정 마당에 꿇어 않히고 심하게 모욕.
불량배들을 시켜 구타하고 7일간 온갖 수모와 몽둥이 찜질 폭행.
보우는 제주 도착 7일만에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채 가부좌하고 시 한수를 남겼다.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
오십여년을 미친듯 놀았네
인간의 영욕이 무슨 상관이랴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 '
...............................................
원래 "태고대"라고 불렀던 이곳을
요즘은 "천해대"라고 부르는 까닭은
두분 보우 외에도.,성능 수행처인 때문.
천해대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북한산성 행궁지.
행궁(行宮)은 북한산성 내 유사시 왕이 머무는 궁궐.
현재, 북한산성 행궁은 복원을 위한 조사가 한창이다.
천해대는 해뜰 무렵에 오면 운무가 바다처럼 춤춘다.
이곳 거북이 바위가 하늘 운무바다 위로 헤엄을 치듯.
마치, 이곳 거북이 바위가 하늘나라와 용궁을 오고가듯.
중흥사
태고사 뒷산에서 바라본., 중흥사
북한산 대서문- 노적사 - 비석거리 - 산영루- 중흥사
- 태고사 - 원증국사 탑비 - 보우 부도탑 거쳐.,천해대.
'우리나라 'No 1 수행처'는.,천해대(天海坮)가 아닐까?'
옛 기록에는 '거북이 바위'가 있어.,귀암봉(龜巖峯).
성능(性能)의 30여년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
성능이 산성 내 제일 먼저 지은 암자이며 약 30년 수도처.
봉성암 & 성능(性能) 부도.
봉성암 입구에 보련당대사 부도가 있고
봉성암 뒤쪽 언덕에 부도가 성능대사 유물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188호.,'성능(性能 : ?~?)대사 부도'
'보련당대사' 응향(應香)은 1792년(정조16)에 입적.
'寶蓮堂大士'는 스승 師(사)가 아닌., 선비 士(사)다.
계율이 깨끗하고 엄격한 승려였는데 입적 후, 다비 3과.
다비는 시신을 불
.....................注...................
조선시대 문인 이옥(1760~1825)이
북한산성 내 사찰을 돌며 승려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쓴 문집의 기록에 의하면.,
사리 하나는 감색(紺色),
사리 둘은 금색(金色)
사흘 밤낮으로 빛을 발하여
초목이 모두 횟불처럼 환하였다.
보배 寶
연꽃 蓮
집 堂
보련당(寶蓮堂)
'보련당대사' 응향.
.........................
봉성암 산신각
봉성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
북한산성 도총섭을 맡았던 성능 사리탑이 있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부도.
태고사 입구에서 봉성암까지는 약 350m.
백운대로 향하는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서 오르다보면.,봉성암.
봉성암은 일반 등산로와는 동떨어져 있어
북한산 내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암자이다.
봉성암에서 산성 주능선으로 오르면
대남문으로 이어지는 산성 성곽이 나오고
그 오른쪽에는 보현봉으로 이어진 사자능선.
보현봉을 정점으로 하는 사자능선은
성곽에 가로막혀 현재., 출입금지구역.
즉, 보현봉 가는 길은 출입금지구역이다.
사자능선에서 바라 본.,'문수봉 & 보현봉'
문수봉과 보현봉의 사이에는 대남문
그 밖으로 나가면 문수봉 아래 문수사.
..........................
..........................
봉성암은 숙종 재위 당시 북한산성 축성 당시
산성 승군 거주를 위해 창건한 12 절 중 하나이다.
즉, 조선시대 북한산성 내 12개 국보사찰을 창건한 것.
.
봉성암은 그뒤 1860년(철종 11)에 중수.
보담(寶曇)이 쓴 상량문에 의하면 그당시
상당히 많은 승려들이 머물렀고 많은 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승유억불' 유교관이 통치관이던 조선시대에
숙종은 왜 성능에게 팔도 도총섭 직책을 맡겼으며
성능은 어떤 목적으로 산성 내 12 사찰을 창건한걸까?
'북한산성 축성 책임자'
팔도 도총섭.,성능대사.
....산성 내 13 승영사찰...
태고사 : 화약, 경판 보관소.
중흥사 : 조선 8도 승병 지휘소.
노적사 : 중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서암사 : 수구산성 일대 수비 및 관리
국녕사 : 가사당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원각사 : 승병 모집, 훈련, 양성,
부왕사 : 부왕동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광사 : 소동문(대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국사 : 보국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용암사 : 용암문 수비 관리 및 승병 양성
상운사 : 북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원효암 : 북한산성 북 &서., 파수대
봉성암 : 북한산성 남 & 동.,파수대
................................................
17세기 말, 수도권 방어를 위해 일어난 북한산성 축성론.
오랑케가 또 한양 도성을 처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
사대부들이 산속 시골로 또는 섬으로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
17세기 말, 불안정한 시국과 흉흉하던 민심이 오락가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흉년까지도 겹친 탓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민심이 가라앉자 또 다시 거론되는.,축성론.
1711년 (숙종 37) 왕이 궁궐과 도성 수비를 관장하는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려 성을 쌓게 한 것이 북한산성.
숙종이 산성 축성 책임자로 임명한 성능대사가., '8도 도총섭.'
'성능'의 발자취를 찾아서
12개의 사찰을 찾아가 본다.
원효암 & 봉성암
2 암자는 동서남북
산성 안밖., 파수대.
원효봉 8부능선 상에 위치한.,원효암.
그 안으로 들어가면.,작은 규모의 암자.
원효암 뒷마당은 제법 넓고 탁 트인 공간.
.
원효대슬랩 위.,원효암
원효암 석관수 샘물.
원효암.,뒷마당.
원래 이곳은 '원효대사 수도처' 토굴 터였다는 곳.
그당시 원효는 이곳에서., 의상은 의상봉에서 수도.
원효와 의상이 구름을 타고 서로 왕래했다고 전한다.
.
조선 숙종때 성능이 북한산성을 축성하며
원효암을 창건할때 이곳 마당을 넓힌걸까?
.
의상봉에서 바라본.,원효봉 & 대슬랩.
원효봉 대슬랩 위에 왼쪽 끝.,원효암.
그 곁에 '원효대사 옛 수도처'가 있다.
지금은.,한칸 남짓한 규모 작은 산신각.
원효암 산신각은 바로 원효대슬랩 위이며
여기에서 더 밖으로 나가면., 암릉지대 연속.
원효봉 정상까지는 리지 등반객들만 다니는 길.
원효봉을 지나면.,염초봉능선.
백운대까지 이어지는.,암릉구간.
북한지 기록 속에 지명은.,'염초봉'
원효봉 & 염초1봉
고려시대 '영취봉'이
조선 숙종 때.,;염초봉.'
'원효봉~백운대' 염초봉능선.
원효대슬랩 상단.,원효봉.
사진 속 건너편이.,의상봉.
.
원효암에서는 구파발까지 보인다.
구파발에서는 원효암 불빛이 보인다.
조선시대 구파발 파발과 관련 깊은 암자.
원효암
성능이 북한산성 축성 초기에
구파발, 송추, 대서문, 산성 내
파수대 용도로 사용했던.,원효암.
북한산성 대서문 일대 축성 당시
성능은 이곳에서 자주 머물렀을듯..
이곳은 원효대사 수행처이기도 하다.
성능이 팔도도총섭 30여년간 재직기간 중
파수대 및 거처로서 사용했다는 곳은.,봉성암.
봉성암은 성능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 아닐까?
성능의 부도로 추정되는 사리탑이
봉성암 뒷편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성능.
'성능은 언제 어디에서 운명한걸까?'
1713년 숙종39년에 성능이
처음으로 세운 사찰.,봉성암
1711년(숙종 37) 팔도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고
30년 동안 산성을 지키다가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간 그.
그가 남긴 '북한지'의 내용은 도리· 연혁· 산계· 성지·사실·
관원·장교·궁전·사찰·누관·교량·창름·정계·고적 등.,14개조.
이 책은 일반 지지의 체제를 수용한 산성지 선구적인 형태.
.
일반 지지와 달리 지형에 관한 산계조,
북한산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성지조,
북한산성 축조 배경과 과정을 적은 사실조,
시설 수비 인원을 기록한 관원·장교조,
산성 18개 절과 암자를 기재한 사찰조,
저장곡을 보관하는 창고에 관한 창름조,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관할구역을 기록한 정계조.
등 일반 지지에 설정되지 않거나 나타나지 않은 항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에 관한 지지로서 특색을 보여준다.
또한 18세기초의 수도 방위에 대한 관심,
산성의 구조와 시설·운영 및 북한산의 지형과
고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북한지.
규장각· 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봉성암 단풍길
봉성암에서는 한양도성 안이 멀리 바라보인다.
왕이 궁궐에서 행궁으로 행차하면 알수 있었을듯.
봉성암에서는 북한산성 안이 시야에 훤히 들어온다.
용암사(龍岩寺) 폐사지.,북한산대피소
용암사 폐사지에서 나온
유구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북한산 대피소 입구.,앞마당.
당초, 87 칸 규모로 창건된 후
용암문 일대의 북한산성 수비와
승병을 유치하기 위한.,입소 훈련장.
불교 탄압이 극심했던, 조선시대 중기.
.
조선 숙종때 북한산성 수성대장.,도총섭 성능.
조선 중기에 승직(僧職) 중 최고의 직위.,도총섭.
숙종때 산성 내 13 사찰은 8도 최고의 승려 수행처.
.
폐사지가 속출해 수행처를 잃어버린 승려들.
숙종때 북한산성 내 건립한 13 사찰의 승병대.
승병수비대에 8도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였을듯.
'8도 도총섭' 성능이 30년간 재직한.,북한산성.
.
북한산성 12성문 둘레길은 험준한 바위길의 연속.
승병수비대 관할 구역 7암문 주변은.,초암릉의 연속.
무공으로 단련된 승병이 아니면, 다닐 수 없는 바위길.
특히, 위문 옆 만경대 병풍암 초암릉 위 산성 구간.
'성벽 없이 축성한 그곳 여장(女檣)마다 절벽 벼랑 끝.
위문 옆 '만경대 들머리' 책바위 위에 축조한.,여장(女檣)
오늘날, 인수봉을 즐겨찾는 클라이머조차 살 떨리는 곳.
약, 300년 전에 어떻게 그곳에 올라가 산성을 축조했을까?
만경대 병풍암능선 초암릉 산성 구간에 옛 상량(초소) 흔적들.
병풍암능선 날머리 아래.,용암사(북한산대피소).
북한산성의 구간 중 가장 험준한., 병풍암 능선.
조선 숙종시대 승병수비대의 초소였을 상량.,흔적.
용암사 위치로 보아 병풍암능선은 용암사 관할구역.
용암봉 용머리바위 아래 위치한.,용암사
용암봉 옆에 위치한.,일출봉(日出峰)
일출봉 옆에 위치한., 월출봉(月出峰)
월출봉 위에 위치한.,기룡봉(起龍峰)
기룡봉 곁에 위치한.,반룡봉(盤龍峰)
용암사는 산성 승병들의., 입소 훈련장.
용맹한 용병을 배출하기 위한 승병훈련장 사찰.
하여, 용암사 일대의 암봉은 '龍'자를 사용한 지명.
팔도 도총섭 성능이 재직할때 명명한 지명인듯 하다.
.
신라시대 화랑을 길러내듯 강도 높은 체력단련과
조선시대 정예군을 뛰어 넘을 만큼 무공 단련을 통해
엄선된 8도 승병들을 13사찰에 북한산성 수비대로 배치.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을 완료한 이후,
방어 시스템.,경리청,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3군부(三軍部)의 파견대., 유영(留營)을 산성 내 배치.
십팔기(十八技) 무예로 단련된.,정예군.
그러나, 이것 만으로 부족해 임진왜란 때
이미 그 능력을 충분히 보였던 승려(僧侶)들
평상시 승려로, 유사시 승군(僧軍)으로 산성방어.
산성 내 13 사찰에 350 승려 승병수비대를 배치.
성능이 퇴임시 작성한 북한지 기록에는 410 승병.
당시, 승병수비대 입소 훈련장으로 사용했던.,용암사.
조선 숙종때 용암사 옛터가 오늘날 북한산대피소
북한산대피소는 공중 화장실이 넉넉하고 샘물이 풍부.
그곳 넓은 공터는 300 명 이상 각종 단체 집회가 열리는 곳.
그늘 쉼터도 많아 여성 등산객이 마음 편하게 즐겨 찾는 명소.
북한산대피소 -용암문 - 동장대 - 대동문 - 대성문 - 보국문.
북한산대피소에서 보국문까지.,넓고 평탄한 그늘길.
보국문 밖 <정릉>은 '조선 개국 최초의 조선왕릉.'.,명칭.
정릉에서 북한산대피소까지는 사랑이 꽃 피는.,<연인의 길>.
.
북한산대피소에서
용암문 밖으로 나가면
약 30분 도보거리에.,도선사.
북한산대피소에서 산성 안으로 내려가는.,인적 드문 오솔길.
10분 쯤 걸어가면, 좌측으로 돌을 깐 정성스러운 길이 보인다.
산성 내 가장 은밀한 위치의 암자, 봉성암(奉聖菴)으로 가는 길.
의상봉 능선이나 원효봉에서 바라다 보면
동장대가 보이는 구암봉에 등대 같은 암자.
북한산 메니아 조차 잘 들르지 않는 외딴 곳.
북한산 최고의 수행처.,천해대(天海臺)
산성 내 성능의 부도탑이 있는 암자.,봉성암.
봉성암은 성능이 선(禪)의 세계에 들기 위한.,선방.
성능이 도총섭 35년간 산성을 호국도량으로 구상한 곳.
성능은 도총섭 퇴임 후,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1745년 그가 쓴 산성에 관한 지리책.,북한지.
성능이 35년간(1711 ~1745년) 재임 후
후임을 위해 작성한 인수인계서.,북한지.
북한산성 수축을 총 지휘한 성능이
산성의 수축 과정과 수축 내용을 기록
북한산성이 6개월 만에 완성된 상황을 알수 있고
오늘날, 북한산성을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북한지.
1745년(영조 21) 북한지는 북한산성에 관한 역사지리서
.
조선 숙종때 산성의 동남쪽 파수대,,'25칸 암자' 봉성암.
봉성암이 위치한 구암봉 정상 전망대.,천해대 <거북바위>.
보현봉, 대남문, 상원봉(남장대 터)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해뜰 무렵,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운해.
거북바위는 태고의 바다 위를 헤엄치는듯.
'구암봉 천해대' 지명이 실감나는.,거북바위.
천해대 옛 지명은 태고대
중흥사의 한 암자였던.,태고사
태고사에서 유래된 지명이.,태고대.
.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국사(1301~1382)
조계종 종조(宗祖)로 추앙되는 한국불교의 거봉(巨峰)
보우가 중흥사의 주지였을때 동암(東庵) 수행처.,태고사.
.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과 같아
팔십 여년이 봄날의 꿈 속 같았네.
숨이 다해 오늘 허물을 벗어두고 가려하니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 보우 -
.
고려 말 보우국사 수도처였던.,태고대
.
조선 숙종 때 8도 도총섭 성능의 수도처.,천해대.
조선시대 8도 승병수비대의 총사령부였던.,중흥사.
봉성암(奉聖菴)은 북한산성 내 전략 전술적인 요충지.
북한산성 내 13사찰 중에서 2암자는.,파수대 역활.
봉성암
봉성암은 북한산성 밖 동남 방향을 감시 파수대.
원효암은 북한산성 밖 북서 방향을 감시 파수대.
봉성암과 원효암은 산성의 동서남북 안밖을 감시.
2012년 현재, 봉성암은 비구니 사찰.
봉성암은 1918년에 강제 폐사되어 태고사에 합병.
봉성암 - 태고사(太古寺) - 중흥사(重興寺) - 행궁.
봉성암에서 내려오면, 부도 한 기(基).,보련당(寶蓮堂).
계율이 엄했던, 응향 승려의 부도
1792년 입적 후 다비식 때.,사리 3과.
보련당 부도를 지나 곧.,태고사(太古寺)
태고사.
태고사(太古寺)는 고려 원증국사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머물던 곳.
도총섭 성능이 10 권의 서적을 집필한 곳.
"사사삼경언해, 십구사략, 천자문 등
목판 인쇄용 판각이 5700 판이나 되고
금속활자 11말이나 있었다." - 북한지 -
'목판과 활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부왕사지.,가는 길.
부왕사지
태고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면.,부왕사지.
태고사에서 왼쪽으로 곧바로 가면.,보국문.
보국문 산성 밖으로 나가면, 정릉으로 가는 길.
태고사에서 용학사로 내려가는 길목.,중흥사지.
.
태고사 아래 두물머리., 중흥사(重興寺) 옛터.
중흥사지는 태고사와 용학사의 중간 지점에 위치.
중흥사지는 행궁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찰.
중흥사는 북한산성 승병수비대 지휘소.
'산성 누관' 항해루(沆瀣樓)가 있었던 곳.
항해루 아래에 언룡교(偃龍橋)도 있었던 곳.
1915년 8월 홍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지금은 옛터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당시 산에 나무가 없어 산사태에 매몰된걸까?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계곡의 합수지점.
두 개울이 합쳐 흐르는 곳에 누관.,산영루.
그곳 암반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옥 같아.,향옥탄.
산영루.
향옥탄 건너편 비석거리 위에 있는., 선정비 26기.
그곳 비석거리 아래 비탈바위에 암각된.,325 한자.
1885년(철종 6년)에 정한.,‘북한산 승도절목(僧徒節目)
.
등산객 발길과 풍화작용으로
판독이 어려운 암각., 325 한자.
19세기 중엽 북한산성 내 사찰이 피폐하고
승병의 기강이 해이해져 승병대장 총섭(總攝)이
임용될때 그 폐단을 없애달라는 내용으로 일종의 대자보
.
산성 내 도총섭 임명에 따른 원칙을 암각.
<조선금석문총람> <고양금석문대관> 참조.
산성 축조 후, 300년 역사 기록을 품은 ,비석거리.
비석거리.
현재, 남아있는 비의 비문을 읽어보면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선정비.
그 이전 선정비는 모두 훼손된 것일까?
비석거리는 더 훼손되기 전에,
우선 보호해야 할 곳이 아닐까?
토막난 채 비석거리에 뒹구는 선정비.
구한 말 친일파 매국노.,민영위 선정비 등.
민비의 척족인 민영위는 고종 때.,최고 재력가.
총융사 신공헌 애민선정비(摠戎使 申公櫶 愛民善政碑)
1870년 10월에 건립(높이 159cm, 폭 35cm, 두께 24cm).
신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고, 행주산성 현판을 쓴 사람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인물인데
유독 신헌의 비가 2기가 있는 것이 특이.
.
비석거리 위.,옛 정자 터에 위치한., 용학사.
1915년 대홍수 때 흔적마저 사라진.,정자 터.
용학사 뒤 바위에 암각된.,불화
고려시대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거리에서 내려와 노적사 입구 조금 못 미친 곳에
가로 7m, 세로 5m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문(白雲洞門)
북한지 기록에도 있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그외에도 산성 내 괘궁암(卦弓岩), 불자인명(佛者人名).
노역각자(努役刻字), 송자각(宋字刻) 등 많은 암각문들.
그 암각문들은 북한산 유래의 한 단면을 간직하고 있는듯.
용학사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가다보면.,부왕사
북한산 3대 명당 중 하나 부왕사지.,부왕사(扶旺寺) 표석
산세에 맞춰 <扶>자 좌우가 뒤집혀 새겨진 것이 특이하다.
부왕사지
좌측 백운봉에 맞춰 지아비 부(夫)를 배치
백운봉 산줄기가 부왕사터를 감싸안은 모양
"지아비 품에 안긴 산세.",부왕사지 풍수지리설.
부왕사는 승병 유치를 위한 사찰.
부왕사지에서 왼쪽 길로 더 내려오면.,‘청하동문
큰바위 위에 암각 되어있는 .,청하동문(靑霞洞門)
'푸른 노을'이 '아름다운 계곡'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부왕동암문에서 청하동문까지 짧은 지계곡.,청하동
.
북한산은 봉우리마다, 골마다 고유지명이 있다.
전란에 대비해 신속한 군사 이동을 위한.,고유지명
청하동문 인근에도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암각
구한말 영친왕 보모로
고종 황제가 하사한.,이름.
성은 최, 이름 송설당(松雪堂)
그녀는 가문을 일으켜 재산을 모았지만
가뭄에는 많은 쌀을 궁휼미로 내 놓았고
말년에는 재산 대부분을 육영사업에 사용.
그녀가 남긴 .,'송설당집' 3권.
최송설당 암각은 '부왕사지 가는 길목' 이정표.
청수동암문에서 부왕동문 암각까지 골짜기.,청수동.
상원봉 아래 위치한 행궁을 감싸안고 흘러 청수동일까?
왕이 마시거나 궁궐 탕약을 끓이는 물.,청수.
청수동계곡
'청수가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계곡.,청수동.
청수 샘터가 인근에 위치해 있어.,청수동암문.
대남문과 청수동암문 사이에 위치한.,청수 샘터.
청수동암문 밖으로 나가면
여러 갈래 미로가 숨어있다.
삼천사계곡으로 가는 등산로.
진관사계곡으로 가는 등산로
두 계곡 사이 능선 암봉.,응봉.
응봉 옆 비봉 아래.,승가사.
조선시대 승가사는 궁궐 사찰
진관사, 삼천사는 궁녀 비구니사찰
.................................
.................................
용암문 밖 우측 계곡은., 도선사 가는 길.
바위벽에 새겨진 '정광화 김상궁의 사리탑'
도선사에서 올라오면, 10분 남짓.,도보거리.
“金尙宮淨光花之 舍利塔 同治癸酉十月 日立"
(김상궁 정광화지 사리탑 동치 계유 시월 일입)
1875년 계유년 10월에 세운 김상궁 궁녀의 사리탑.
궁을 나온 후 말년에 비구니로 여생을 마친 삶의 흔적.
'그당시, 도선사는 비구니 사찰이었을까?'
왕의 성은을 받지 못한 궁녀는 비구니와 다를 바 없는 삶.
노후에 기댈 자녀도 없어 친정으로 가거나 절에 들어간듯.
창덕궁 서쪽 쪽문인 요금문은 노후에 병든 상궁들의 퇴궐문.
'요금문을 나온 상궁이 불교에 귀의한 흔적일까?'
.
1882년 3월에는 도선암이었던., 도선사.
당시 도선암에서 하룻밤을 묵은.,창강(滄江)
매천(梅泉) 황현, 호산(壺山) 박문호.,셋이 동행.
自白雲臺至道詵菴 : 백운대에서 도선암으로
絶頂歸來似謫仙 : 놀랜 혼 불러들이고 신선을 뵙고 싶네
山僧坐睡山花發 : 산승은 앉아 졸고 산꽃은 피는데
滿院蜂聲卓午天 : 절 가득 벌 소리 한낮이로구나. -창강 -
도선사(道詵寺)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
실록이나 옛 지리지에 도선사 기록은 없다.
1882년 3월에는 봉성암보다 미미했던.,도선사.
도선사는 청담 스님 이후부터.,
오늘날 국내 제일.,'호국 도량'.
.
도선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병풍암능선.
그래서, "병풍암능선"이라고 불리우는 것일까?
북한지 기록 속 용암봉이 오늘날 병풍암능선 정상.
그 칼날능선 100m 절벽들이
연이어 줄을 서있는 아래로는
거의 인적 끊긴., 음산한 무당골.
무당골에서 본.,병풍암
무당골 입술바위
무당골., 산악인 합동 추모비
무당골.,곰바위.
도선사.
도선사 앞 광장., 주차장
도선사 광장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길가에.,부암(付巖)
붙임바위는 돌이나 동전을 올려놓고 소원성취를 비는 곳.
그래서, 붙임바위는 전국 어디나 돌을 문질러 패인 흔적이 많다.
도선사 아래.,우이동 부암(付巖)
원래는, 전란 때 많은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뿌리는 부도탑이.,부암(付巖).
길손이 사자의 명복을 비는 곳.,부침바위.
.
옛 국사당 터 인근에 으례히 있었던.,부암(付巖)
전국의 국사당 인근 화장터 지명이.,부암동(付巖洞)
<창의문> 밖 화장터 거북바위 부암 인근 동네가.,부암동.
부암동 지명의 유래.,부침바위.
.............부암동 거북바위 전설.............
고려시대 원나라에 끌려간 청년들 중 새신랑.
첫날밤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생과부가 된 신부.
신랑이 끌려간 날부터 소복 차림으로 부암 앞에 섰다.
그녀는 신랑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면서
작은 돌을 집어 큰 바위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신부의 이 같은 기원은 몇달을 두고 계속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
그 소문은 나라님에게 전해져 외교상 특별조치로
그 신부의 남편 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데
그동안 소복한채 문지를 때는 그렇게 붙지 않았던 돌이
남편의 귀환 소식을 듣는 순간 신통하게도 바위에 붙었다.
그후, 헤어진 자식을 찾으려는 어미로부터
아들 낳기를 바라는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인이 큰바위에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하여 그후 벌집처럼 움푹움푹 구멍이 파인.,부암.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자하문 밖 부암동.,거북바위
지금은 길을 넓히는 바람에 사라진.,부암동 거북바위.
.......................................................................
도선사광장에서 부암 지나.,옛 선운각
1960~1970년대 밀실정치의 산실이었다.
삼청각,·대원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었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후기까지
백자를 만들던 사기막골과 더불어
우이동 계곡은 청자 기와를 굽던 도요지.
조선시대 한양 4대문안 북쭉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4대문 밖 북한산성 행궁으로 가는 비상 출입문.,숙정문.
왕이 도성 밖으로 나올 때, 비상출입문이 숙정문(肅靖門).
한양도성 대문의 북문이자 경복궁의 북문.,숙정문.
경복궁 북문 숙정문과 북한산성 대성문은.,<왕의 문>
경복궁 - 백악산 - 형제봉능선 -대성문 - 북한산성 행궁
숙정문 - 삼청동 - 성북동 - 세검정 - 구기동 - 대남문 - 행궁.
조선시대 음양오행설에 의해
숙정문(북문)은 음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뭄때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두었다.
조선 숙종때 칠흑 같은 밤에 주변의 이목을 피해
몸종 하나만 데리고 숙정문 나들이에 나섰던.,숙빈
숙정문의 음기를 받아 숙종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희빈의 등살에 기를 펴지 못하던.,숙빈
숙종의 성은을 받아 낳은 영인군이., 조선 21대 영조.
그후,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여인들이 찾는 명소.,숙정문.
성품 곧은 여인도 숙정문을 통과하면
바람 난다고 할 만큼, 음기가 강한.,문.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된 곳 지명.,성북동.
지금은 사찰 길상사로 자리매김한.,대원각 터.
삼청동(三淸洞)은 도교의 삼청전이 있던 곳.
도성의 북쪽지구이며 경복궁의 동북에 위치.
현재, 종로구 법정동이자 행정동이.,옛 삼청동.
삼청동
'조선시대 내각' 의정부가 있던 곳이 삼청동.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의정부는 현재 경복궁 공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부 내각으로 구성된.,의정부.
조선시대 의정부 관사는
곧 오늘날, 정부종합청사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
'서울 4대문 중 북문' 숙정문 아래 삼청각(三淸閣).
1970/80년대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
1979년까지 문루도 없었던.,<숙정문>.
1396 세워진 그당시에는 숙청문(肅淸門)
16세기에 숙정문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
3봉우리가 주봉.
조선 후기
숙종시대 이후
"중각. 북각. 남각."
이라고도.,불리웠다.
.
삼각 가운데.,중각 : 백운대(836.5m),
삼각 북쪽이.,북각 : 인수봉(810.5m),
삼각 남쪽이라.,남각 : 만경대(799.5m)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삼각산"이라 불리웠던 산의 개념이
조선 후기 "산성"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특히, 숙종시대에는
북한산성 개념인 지명.,<북한>.
삼각산은 북한산성 일부분이라는.,개념.
<북한지> 기록서.,명이
그 사실을., 대변해 준다.
..............<북한지>................
지리산 화엄사에서 승려로 있다가
숙종 37년(1711) 팔도 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고 30년간 관리한.,성능.
영조 21년(1745) 팔도도총섭 직책을
후임 서윤에게 인계할 때 남긴.,기록서.
...................................................
북한산성 축성 책임자 9개월
팔도(八道)도총섭으로 30년 재직.
총 30여 년간 북한산성에 몸담은.,성능.
.
그로부터 약 200년 동안
"유비무환" 자주국방 시대.
'有備無患' 본보기.,북한산성.
북한산성 수성대장.,성능(性能).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승려.,성능(聖能).
북한산성을 쌓고 약 30년 동안이나 산성을 지켰다.
그후,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가 『화엄경』을 판각.
다시 통도사로 옮겨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 증축 후, 그의 행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쓴 '북한지(北漢誌)는 1745년(영조 21)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서윤에게 인계하면서
북한산성에 관한 사적을 지지 형태로 편찬.
1711년 북한산성을 축성한 조선 19대 숙종.
숭유억불 조선시대에 많은 사찰을 중창했다.
숙종 재위 시대에는 변혁의 기운이 들끓었다.
대도 장길산도 이 시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산속 수많은 사찰은 도적의 소굴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숙종은 불교와 긴밀히 손을 잡았던걸까?
그당시 숙종과 인연을 맺고 활약한 승려가 성능(聖能, ?~?).
화엄사 성총(性聰, 1631~1700) 문하에서 3년간 수행한 후 득도
성능은 1699년에 화엄사 각황전 공사를 시작한 이후 3년 만에 완공.
이때 숙종이 친필로 ‘각황보전’이라는 편액과
‘자비보조 홍각등계 대선사 성능’ 법호를 하사.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가의대부 팔도도총섭 겸 승 대장 성능’ 교지
1713년 팔방도승통 홍각등계국일도대선사 성능
성능은 숙종에게 깊은 존경과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 사람됨이 마음에
아무런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고요하고 자잘한 일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맑은 바람으로 기를 삼고, 밝은 달로 마음을 삼았다.” - 숙종 -
축성할 때 삼군문(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병력도 참여
훗날 포도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장붕익(당시 어영청 파총)과
조선 최고 검객 김체건(당시 금위영 별무사)의 이름도 확인된다.
성능은 중흥사에 기거하며 승군을 지휘감독
산성 축성과 수비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완공 후 승병 360명과 군사 1,000명이 지킨 산성.
북한산성 12성문 중 정문., 대서문-
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용암문-
위문- 북문-서암문에서 대서문으로 연결.
북한산의 수많은 암봉 중
가장 험준한 초암릉 만 골라
염주알을 꿰듯 바위길을 만들고
그 위에 산성을 축조한.,바위벽 요새.
북한산성은
그위에 곳곳마다
장대, 망루, 초소를 설치.
동장대는 시단봉에 설치
남장대는 상원봉에 설치.
북장대는 기린봉에 설치.
.
3 장대는 동쪽, 남쪽, 북쪽 관측이 주 임무.
행궁 및 성내 시설물 안전관리를 지휘한 곳.
3 장대의 지휘 통제소.,동장대는 2010년에 복원.
.
동장대.
나한봉., 남장대 터
남장대는 100 여평 터와 기단 만 남아 있어도
등산객들의 그늘 쉼터로 각광 받는 명소이지만
북장대는 옛터 구분조차 어려울 만큼 훼손되었다.
.
산성 축조 때, 동원된 어영청 군사 유영 터.
조선 숙종때 흔적.,주춧돌, 장대석, 물확 등.
지금은 그곳 묘의 둘레석으로 방치되어 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일까?'
.
중성문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 기린봉 정상., 북장대 터.
북장대터에서 더 올라가면.,노적봉 안부.
북장대
북장대 터에서
시야에 가득차게
바라 보이는.,노적봉.
노적가리 형태의 거대한 암봉.
북한산 '제 2의 인수봉'.,노적봉.
실존인물 밥할머니., 전설의 고향
..................노적봉.,<밥할머니> 전설.....................
임진왜란 벽제관 전투 당시 노적봉에 볏짚과 새끼줄을 쳐
노적봉이 북한산성 안 조선 군사의 비축식량으로 위장하고
개울에 생석회를 풀어 쌀뜨물인줄 안 왜군을 물리치게 한 여걸.
행주대첩 때 돌을 운반하는 행주치마를 만들어
치마부대를 이끌어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여장부.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제공한 밥할머니.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때는 이미 80세.
인조는 밥할머니 사후에 정경부인으로 책봉
남편 문옥형에게는 종2품 '가선대부'로 위계.
조선왕실의 종친으로 예우하며
본관 완산, 전주 이씨 성씨를 하사
아들 문천립도 종2품 가선대부 위계
임진왜란 때
여성으로서는
유일한 의병장.
벽제관 전투가 끝난지 2주일 후인 2월 2일에
왜군이 물밀듯 몰려오는 행주산성으로 달려가
관군을 도와 의병대를 이끌고 활을 쏘며 싸웠다.
불심이 두터워 북한산 내 사찰에
많은 돈을 희사해 일명 보살 할머니.
................................................
노적봉 정상은 북한산성 12성문의 전망대.
정상으로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길은 하나 뿐.
그 이외에는 일반 등산객이 오르기 힘든 바위길.
노적사
중성문 안, 노적봉 아래 위치한.,노적사.
산성 축조때 어영청 군사 유영터 중 한 곳.
1712년 숙종때 창건한 사찰이 진국사(鎭國寺)
'진국사는 왜 노적사로 개명 했을까?'
석가봉, 승가봉, 문수봉, 미륵봉, 원효봉, 의상봉 등
불교 색채 지명이 즐비한 북한산성 내 수많은 암봉들
노적봉은 거대한 암봉이라 아침 이슬에 촉촉히 젖는 곳.
노적(露積)이란 감로(甘露)가 가득하다는 뜻.
노적봉(露積峯) 지명 자체에 불법 대의가 함축.
중생을 구제하는 가르침이 모여 있는 곳이란 의미.
그후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 있었던.,노적사 터.
현재, 노적사는 1960년 작은 암자를 증축한 모습.
숙종 당시 노적사 85칸보다 훨씬 큰 규모가 아쉽다.
.
조선 숙종 때 축성 당시 산성 내.,13 사찰은
각각 방어시스템이 다른.,승병 수비대의 수행처.
숙종 때 창건 목적과 규모에 맞게 복원이 되었으면.,
.
12성문 중 문루(門樓) 없는.,7암문(暗門).
.
북한산성 안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을 비밀리에 운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하는.,비상문
산성 내 침입한 적을 역습할 때 사용하는 전술 전력적.,암문.
노고산일대, 평창동 일대, 경복궁 등을 비롯해
산성 밖에 배치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3 군부
조선시대 주력부대와 전술 전략적 비상 통로.,7암문
.
12성문 중 가장 큰 대성문은 경복궁에서 가까운 문.
행궁 - 형제봉 - 보토현(북악터널 위)- 경복궁.,지름길
조선시대 왕이 북한산성 행궁에 행차할때 사용하는 출입문.
.
북한산성 15성문은 각각 용도에 따라 규모가 다르듯.
산성 내 승병수비대 13개 사찰도 용도에 따라 다른 규모.
특히, 13사찰은 승병 수비대마다 고유 업무에 걸맞는.,규모.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12성문., 방어 시스템
그 자체가 곧 후손만대에 물려줄.,무형 문화재.
북한산성 12성문 내 노적봉은
수많은 암봉 중에서 하나일 뿐.,
12성문 둘레길은 모두 암릉 바위길.
..........................
..........................
.
북한산성 12성문 인근 암봉을
이어 종주하는 등반행위가 곧
"북한산성 12성문 올릿지.".
.
한바퀴 돌고나면
북한산성이 1당100
요새 임이 실감 난다.
북한산 병풍암능선
대서문에서 대남문까지 산성은.,암릉 바위길.
대서문 - 의상봉 -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상원봉(남장대 터) - 문수봉. - 대남문 - 보현봉.
대남문 - 대성문 - 보국문 - 대동문
산성은 암릉 능선으로 이어진 등산로.
그 밖으로 평균 7m 높이로 축조한.,성벽.
용암문에서 위문까지 산성은
병풍암 만경대.,초암릉 바위길.
산성 밖으로 평균 100m 낭떨어지.
북한산 암릉 중 추락사고율 1위.
위문의 옛 지명.,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백운대와 만경대능선 사이에 위치한.,위문
도선사에서 시작 되는 깔딱고개 정상에 위치.
'위문 - 북문 - 서암문'., 산성 구간은
백운대 염초봉 원효봉 .,초암릉 바위길.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듯., 살 떨리는 곳
북한산성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면.,
'얼마나 험한 곳에
산성을 축조했는지
뼈저리게 실감 난다.'
특히, 염초봉 끝자락과 이어진
원효봉의 서암문은 "시구문"이라
불릴 만큼., 많은 시신들이 나간 문.
서암문
옛 수문 위에
북한산 개울 위로
수구산성을 축조할때
많은 노역자가 숨졌던 곳.
수구산장 건너편 원효봉 중턱
그곳에 무너진 산성의 흔적이
축성 당시 그 사실을 대변한다.
1915년 8월 홍수에 휩쓸려
무너져 사라진 수구산성과 수문.
북한산성 축조때 가장 난공사 구간.
대서문 밖 개울을 방어하기 위한.,수구산성.
수구산성 인근 개울가에 위치한.,서암사 터.
산성 축성 이후 133칸 규모로 창건된.,서암사.
승병을 유치하기 위해 건립한 13 사찰 중 하나.
서암사 터
서암사는 수구산성과 수문.,승병수비대
그 역활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
조선 숙종 때 민지사 터에 건축한.,서암사.
고려 충숙왕 때., 문인공 민지(閔漬)의 별장 터.
그곳 인근 민지암은 산성 내 4대 절경지 중 하나.
..............민지암(閔漬岩)...........
서암사터에서 약 100m 거리에 위치.
바위벽 틈 석문 아래로 돌아 내려가면
개울가 넓은 암반 위로 덮개바위 있는 곳.
비가 와도 옷이 젖지 않는 곳이고
시야가 탁트인.,개울가 절경 전망대.
옛 풍류 선비들의 시문에
자주 등장하는.,민지암.
...................................
민지암 일대 계곡미는
고려시대부터., 절경지.
고려 때부터 물놀이 명소.
민지암에서 시작되는 1km 구간의 계곡미.
북한동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세심루(洗心樓) 터.
북한산성 내 세운 3곳 누관(樓館) 중 하나인.,세심루.
그곳은 원래 고려시대 민지(閔漬)의 별장 안 누각터.
큰 바위 위에 마당바위.,쉼터.
한여름에 시원한 개울 바람에 불고
나무 그늘까지 드리워지는.,세심루 터.
그곳에 앉아 주변 경관을 바라보다 보면
바람과 그늘이 마음까지 맑게 씻어주는듯.,
'그래서, "세심루(洗心樓)"라고 불리우는걸까?'
민지동은 고려 때부터 지명이고 북한동은 현재 지명.
여름철 속옷 만 입은 취객들의 추태가 낯뜨거웠던 곳.
모두 철거된 후, 차츰 자연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병이 강제 해산되고 사찰들은 폐사
1907년 삼군영 병사들이 일제에 의해 쫓겨나면서 더욱 피폐.
의병 근거지가 될 만한 건물은 파괴하고 일본 헌병들이 주둔.
1915년 홍수에 이어, 1925년 대홍수까지 겹쳐
북한산성과 북한동이 극도로 피폐했던 일제 치하.
그래도, 독립운동가에게 밥을 퍼준.,북한동의 주민들.
그무렵, 북한동 윗마을 40가구, 아랫마을 40가구가
농사 짓고 나무해다 팔고 살다가 6.25 때 다시 초토화
1951년 1.4후퇴 당시 북한산성은 중공군 인민군이 주둔.
연합군이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던 전투지역
1,000 인민군이 죽거나 부상당한 치열한 격전장.
다행히,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치하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가기 전에 원효봉 상운사에 기거
그 인연으로 주민들을 위해 관광사업을 추진
그런데, 4.19로 하야하자 북한동 주민들 기대는 물거품
이때부터 파전, 도토리묵, 막걸리 장사가 시작된.,북한동.
이제는 보리사가 된 등운각(이승만 대통령 당시., 영빈각)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할 때
경기지사가 미군 불도저로 닦은 5m 폭 도로.
.
옛부터 대서문은 사실 상, 북한산성의 정문.
구파발로부터 평지를 따라 접근할 수 있던 길.
숙종(肅宗) 37년(1711년) 축성되며 길이 열린 곳.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한지 만들던.,지장리(紙匠里)
그 옆 동리는 아마도 싸리골(杻里)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지(紙)와 축(杻)을 합쳐.,3호선 지축(역).
인사동(仁寺洞)도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 : 탑골공원 원각사터)가
인사정이 되었다가1945년 해방 후 인사동.
음식점, 숙박업소가 즐비했던 북한동이.,옛 민지동.
옛 선조들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는., 민지동.
조선시대 숙종때 북한산성 축조 이후부터는.,북한동.
대서문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무량사(無量寺)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공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100일 기도처.
영친왕을 잉태한 유래가 담긴 원찰(願刹)이며
조선왕조 최후의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무량사.
무량사
무량사를 지나 10분 도보거리가 옛 북한동(北漢洞)
파전, 빈대떡, 막걸리 냄새가 가득찼던.,북한동 마을
이곳 북한산성 마을은 참으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4대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
춘이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春二月 築北漢山城)는 기록
23대 개로왕 15년 10월에는 산성에 병사들이 번갈아 주둔.
冬 十月, 分北漢山城士卒戍之., 기록.
고려 최영장군도 북한동에서 요동 정벌을 준비.
옛날부터 군인들의 처자권속이 거처했을.,북한동.
.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조가 시작되고
삼군영(三軍營: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들이
상주했기에 북한산성 내 마을이 형성된 곳도 역시 북한동.
.............................................
..............................................
.
그곳 북한동 개울 건너 원효봉 아래 상운사(祥雲寺).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상운사는 영취봉 아래 133칸
경종(景宗) 2년(1722년)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려 본부.
상운사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면 원효봉
우측 능선을 따라가면 염초봉(영취봉) 능선,
백운대까지 이어지는 바위길은 산악사고가 빈번.
효자리에서 시작되는.,원효봉 가는 길.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원효봉 중턱에.,성문.
그 성문 밖으로 나가면, 서낭당 터로 가는 길.
.
원효봉에
T자 형태로
축조한 성곽이
눈길을 끄는.,서암문.
적은 인력으로도
효율적인 성문 방어를
하기 위한 구조로 여겨진다.
숙종 때 서암사 승병 수비대는
산성 관리 및 서암문 출입을 통제.
수구산성과 수문까지 수비를 맡았다.
서암문 위치는 인근 북문과 더불어
삼국시대부터 전술 전략적인 요충지.
"산성에서 축조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 - 북한지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했다는
기도처가.,원효봉의 원효암.
원효암은 숙종 때 산성 축조 후 지은 13 사찰 중 하나.
원효암은 원효봉 아래 10칸 암자로 대서문 일대 파수처.
건너편 의상봉, 염초봉능선, 산성 안, 대서문 밖.,파수대.
구파발(舊擺撥)까지 불빛 교신이 가능한.,파수대.
...................구파발(舊擺撥)............................
조선시대 3대로(三大路) 중 서발이 대기하던.,파발터
조선 선조 이후 공문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역참.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공문을 전달한 서발이 구파발.
...........................................................................
숙종의 "북벌" 자주국방 의지가 담긴.,원효암 파수대.
원효대사의 삼국통일 기원처에 파수대를 설치한 숙종.
병조호란 같은 참상을 다시 겪지 않겠다는 유비무환 의지.
원효암 200m 아래 위치한.,서암문.
.
원효봉의 서암문 북쪽은.,숨은벽 계곡
숨은벽계곡 들머리에 위치한., 국사당 터.
산성에서 숨진 망자의 혼을 달랜 곳 아닐까?
아직도 그곳 입구
버스 정류장 이름은
밤골 입구.,"서낭당 앞."
밤골 국사당을 지나 등산로 길가에 위치한., 부암(付岩)
조선 숙종 때 축성 노역 시신들을 화장해 유골을 뿌린 곳
'축성 노역 시신들의 위령탑' 부암(付岩)이 오늘날 부침바위.
이곳에서 밤골 능선 위로 올라가면.,원효봉 북문.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에 위치한 북문.
북문은 염초봉능선으로 들어서는 초입.
북문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염초봉능선 .
북한산성 12성문 중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술적 전략적인 요충지.,북문.
북문이 함락되면,
산성은 풍전등화.
숨은벽 계곡 초입에서
말을 타고 달려 올라오면
북문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
.
2중 성벽 구조로
설계 축조된.,북문.
산성을 축조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북문.
그곳을 지나면
염초봉능선의 바위길.
천연 산성.,염초봉 능선.
상량(上樑)터 흔적이 있는
제2 방어벽.,염초3봉(장군봉).
인근 숲속에 깨진 개와장 파편들.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올린
파수대 보초 초소가.,상량.
도봉산 벽제 송추 방향이
한 눈에 들어오는.,상량 터.
전술 전략적 요충지.,장군봉.
파랑새능선.,장군봉
..........장군봉 유래...........
고려시대 북진정책이 대세라
주목을 받지 못했던.,북한산성
고려 우왕 14년(1388년)에 우왕은
최영 장군과 요나라를 치기로 의논하고
한양의 중흥성(中興城)을 수축(修築)했다.
이때 북한산성 토성 일부는 석성(石城)으로 개축
그당시 최영 장군이 주둔한 곳이 중흥동 일대이고
장군봉은 최영 장군이 주둔한 곳에서 유래된.,지명.
숨은벽계곡 바람골에서
산성 내 중흥동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염초봉 장군봉.
동서남북 4통 8방으로
미로가 숨겨져 있는 곳.
...............................
고려말 최영 장군의 흔적이 담긴 지명.,장군봉.
고려말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그무렵 최영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항전한 요새지.
.
염초봉은 '아름다움을 부르는 봉우리'.
"염라대왕이 초대하는 봉우리."라고도
불리울 만큼.,살 떨리는 초암릉 바위길.
험준한 산세 자체가.,천연적인 성벽.
우이동 도선사를 병풍처럼 애워싼
만경대에서 병풍암까지도 험한 암릉.
위문에서 용암문까지 이어진.,산성 구간.
100 여m 높이 절벽 암릉 위에 축조한 산성.
100 여 m 벽마다 1960/70/80년대 바위길 루트.
그곳 암장 들머리에 위치한.,무당골 산악인 추모비.
축성때 산성에서 숨진 망자의 넋을 위로했을.,무당골.
얼마나 많은 노역자들이
축성 중 떨어져 숨졌을까?
원효봉에서 염초봉까지 산성구간.
만경대에서 병풍암까지 산성구간.
산성 12성문 구간 중 가장 험한 곳.
대서문 왼쪽에서 증취봉까지.,3 암문.
가사당암문.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암문은 북한산성 12성문 중 비상출입문
청수동암문 안쪽에는
떡시루 형태의 증취봉
그 아래 동굴과 넓은 공터.
인근 원각사 터는 1712년 북한산성 축조후 복원된 사찰
원래, 원각사는 부왕동암문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사찰.
그래서, 부왕동암문을 그당시 원각문이라 부르기도 했다.
부왕사가 완공된 이후부터
부왕동암문 산성 수비대를 맡자
원각사는 다른 용도로 쓰인듯..하다.
'원각사는 어떤 용도로 쓰인걸까?'
원각사 옛터에는 넓은 공터와 축대 만 남아있고
그 아래 샘터는 등산객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곳.
산성 승병대장 팔도도총섭 성능이 1745년에 쓴.,북한지.
“증취봉 가까운 동쪽에
신초 스님에 의해 74칸의
원각사가 복원되었다.” 기록.
많은 흥청을 두었는데, 장악원이 훗날 계방원(繼芳院)
연산군의 "흥청망청" 어원이 유래된., 장악원.
왕을 곁에서 모시는.,지과(地科)흥청,
잠자리를 같이하는., 천과(天科)흥청
장악원의 고친 이름.,계방원(繼芳院)
훗날 '흥청을 관리하는 기관' 운평은 계방원에서 관리
흥청들은 원각사 내 연방원과 궁궐 안 취홍원에서 거처.
연산군 때 전국 곳곳에 원각사의 분원을 설치했다고 한다.
하여, 이곳을 환희령이라 부르는걸까?
환희령
.
삼천사계곡에서 원각사로 가는 길목.,환희령.
북한산성 내 4대 절경지 중 하나.,환희령(歡喜嶺).
의상봉에서 나월봉까지 칼날암릉 연봉은 한폭의 병풍.
북방을 수호하는., '흑룡(黑龍)의 산세'.
역사적으로 굴곡이 많은.,원각사 터.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역대 대통령들이
이곳에서 기도한 후, 대통령이 되었다는 곳.
북한산에서 기가 가장 강한 곳.
용혈봉과 나월봉 사이의 증취봉.
증취봉 안부 청수동계곡 .,원각사지.
'용의 허리' 안장 위에 올라 앉아
용의 보호를 받는 산세가.,증취봉.
증취봉 뒤
나월봉 산세는
하늘로 비상하는 용처럼
칼날 암릉이 하늘을 찌른다.
나월봉
삶과 죽음의 경계선 같은.,칼날 암릉 날등.
그곳에서 추락하면.시신을 찾기도 힘든 곳.
나월봉 날등 암릉은 바위꾼조차 살떨리는 곳.
풍수지리상 의상봉에서 비봉까지는 용의 산세.
북서쪽을 바라보는 '용 머리' 형태 산세.,의상봉.
의상봉과 비봉 중간 '용의 허리'에 위치한.,증취봉.
증취봉 아래 <떡시루 바위> 아래 동굴.
떡시루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증취봉.
떡시루 바위 아래 동굴은
20 여명이 둘러앉아 쉴 수 있어
등산객이 그늘 쉼터로 즐겨 찾는다.
북한동 주민들이 300년 대대로
3년에 한번 산신제를 지내는 곳.
상원봉( 남장대 터) 아래 위치한.,행궁.
여름철 폭염 속에서도 가장 시원한 계곡.
서출동류(西出東流) 청수가 흘러.,청수동.
.
조선 역대 왕들이 피서 겸,
즐겨 찾았던.,청수동 <행궁>.
청수동에서 유래된.,청수동암문
그 인근에 사계절 맑은 청수가 마르지 않는 샘.
북한산성 행궁에 행차한 왕이 마시던 샘물이 청수.
왕실에서 탕약을 끓이는 물이라는 뜻말 지명이.,청수.
남출북류는 역수라 해서 독수(毒水) 또는 흉수(凶水),
서출동류는 길수(吉水) 또는 약수(藥水)로 여겨왔기에
'청수'가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계곡'이란 뜻 지명.,청수동.
청수동 동쪽의 동장대 인근에 있었던 행궁.
행궁과 부왕사지 아래 아름다운 계곡.,청하동.
부왕사지를 품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부왕동.
부왕동암문 밖으로 1시간 남짓 내려가면.,삼천사.
3 여울이 모인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삼천리골.
오늘날 군부대 주둔지일 만큼 전술 전략적인 위치.
'삼천리골에서 부왕동암문까지' 계곡미가 아름답다.
.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 명이 수도할 만큼 번창
삼천사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때 승병들의 집결지.
현재 삼천사에서 위로 30분 도보거리에 옛 삼천사 터.
부왕동암문과 문수봉 갈림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 숲속.
부왕동암문 쪽으로 5분쯤 더 가면 왼편 숲.
마애여래입상에서 1.5km 거리 증취봉 자락.
임진왜란 때 소실된.,사찰터 주춧돌 석등 부도.
조선시대 전임 왕의 궁녀들이 퇴궐 후, 보금자리 중 하나.
조선 역대 왕들이 행궁에 행차 할 때마다 으례히 들렀던 사찰.
'왕의 여인' 궁녀는 궐밖에서도 죽을 때까지 비구니가 되어 수절.
북한산 둘레길 인근은 거의 비구니 사찰.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백화사, 회룡사 등.
그래서, '제 2 의 왕성'이라 불리우는.,신도읍.
백화사 뒤에는 조선왕조 내시부 공동묘지.
신도 초등학교 자리는 궁녀들의 공동묘지.
그곳 주변은 조선 왕실 후손들의 공동묘지.
용출봉은 환생의 바램이 담긴 풍수지리 지명.
용혈봉 안부는 조선 역대 왕족이 묻힌.,사자의 마을.
신도읍은 '제2의 왕성' 신들의 길이 있는 읍이란 뜻 지명.
옛 용두리는 왕과 왕실 혈족 및 군신들의 공동묘지 터.
옛 용복리는 '용의 배' 뜻 지명으로 현재, 벽제 화장터.
옛 용미리는 왕의 직책 낮은 군신들의 옛 공동묘지 터.
숙종은 용두동(옛 용두리)
조선왕실 다섯 왕의 공동묘지
부친 덕종이 묻힌 서오능에 안장.
숙종은 왕으로 재임 시절에
고향현에서 고양군으로 승격.
부친 덕종이 묻힌 곳이기 때문.
수양대군의 장남이었던.,덕종.
사후 덕종으로 추존된.,조선 왕.
덕종의 두째 아들로 태어난.,성종
덕종의 왕세자였던 월산대군은
풍류를 즐기다가 35 나이에 운명.
고양시 신원리에 있는.,월산대군 묘.
수양대군이었던 할아버지.,세조.
그 기상을 그대로 닮은 듯한.,숙종.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해야 할.,군주.
'유비무환 "북벌"..,국방 의지.'
조선 중기 이래 붕당정치 당파 파벌 다툼이 절정이었던
남인과 서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해 파벌 다툼.
재임 기간 중 "북벌"의지로 국력을 모와 자주 국방을 실현.
불과, 6개월만에 축조한.,북한산성.
축성을 위해 지방 관리까지 동원한듯..
의상봉 계곡의 '여기소' 전설이 전해온다.
.............여기소 전설...................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지방 관리를
흠모한 기생이 산성까지 찾아와 머물며
만나려 했지만 뜻을 이룰 수가 없어., 자살.
아름다운 기생이 빠져죽은 소
여기소(고울 麗, 기생 妓, 늪 妓)
...........................................
'조선시대 6개월 축성 기간 동안에는
관리조차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던걸까?'
조선시대 축성 때 대서문 안
북한동 주민들은.,약 700 호.
숙종 37년(1911) 시작된, 축성 당시
하나 둘,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다.
그후 300년이 지나 남아있던 가구는 55호.
현재, 55 건축물 중 50 호는 철거.
전통 한옥 형태의 5 호는 보존.
마을 역사, 생활상., 기념 홍보관.
탐방객 쉼터, 전망대 등으로 활용.
북한동은 대서문 안쪽.,산성마을.
조선 숙종때 산성을 축조한 인부들에게
숙식 제공 목적으로 형성된, 300년 된.,마을.
살구나무가 많아서
옛 마을 지명은.,"행화촌".
2011년까지 산성마을 식당가.
300년 대대로 유지되어 왔다가
그후 북한산 아래로.,모두 이주 완료.
북한산은 자연 경관을 되찾아가고 있다.
.
12성문 밖 사찰들을 비롯해
12성문 안에 있던 많은 사찰들
12성문 안에 살던 주민들과 군사들
북한산성 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3개의 사찰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북한산성 12성문마다
민관군이 축조한 유래를
느낄 수 있는.,성문 이름들.
조선 숙종때
수문을 관장했고
북한산성 내성의 정문.,
중성문은 총 3개로 구성.
수문.
시구문
내성 정문.
북한산성이 완성된 다음해 숙종 38년 4월(1712)에
산성에 행차한 숙종은 외성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중성(重城)을 쌓을 것을 명해 축조한 내성과 중성문.
.
옛 수문은 홍수로 무너져
수문 옛터 흔적만 남아있고
시구문은 시신의 출입문이다.
중성문과 옛 수문터 사이
옥녀탕 옆 수풀 속에., 위치.
아직도 망자의 넋이 다니는듯.
.
중성문 망루에서 내려다보면
옛 수문터 위치는 전략적 요충지.
옥녀탕 아래 10m 폭포는 천연 요새.
옥녀탕은 북한산성 12성문 안에서
가장 수량이 풍부한.,'천연적인 저수지'.
현재, 옥녀탕은 자연 경관을 되찾고 있다.
.
그곳에 위치한 중성문 수문.
옛 조상들의 지혜로움 앞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곳이다.
중성문과 망루는 잘 복원되어 유지되어 있고.
중성문 옆 내성은 옛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중성문을 지나가면, 산성 내
중요 시설이 들어섰던.,옛터.
훈련도감 유영, 금위영 유영, 어영청 유영. 행궁,
경리청, 상창, 호조창(행궁 용도 어공미 보관창고)
....................조선시대 군사제도..............................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16~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부담해
정병(正兵)이 되거나 군비를 담당하는 보인(保人)이 되었다.
......................................................................................
숙종 37년 2월에 착공해 10월에 준공한 북한산성.
역시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승군이 주축이었으며,
화엄사 승려 성능으로 하여금 이를 지휘 감독케 했다.
공사가 한창이던 7월, 병조판서 김우항 주선으로
공명첩이 하사되어 이를 팔아 마련한 재원을 가지고
산성 내 8 사찰을 세우고 숙종38년 4월에 낙성되었다.
그후, 승군이 많이 모여 승병대장 총섭을 임명해 통솔.
계속해서 공명첩이 하사되어 중흥사와 태고암을 비롯해
11개 사찰이 승려의 수양처 및 군영의 구실을 갖추게 됐다.
.................................공명첩..................................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여 발급하던,
매관직첩(賣官職帖)으로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 행세.
...................................................................................
북한산성 내 승군의 배치를 보면
11개 사찰에 각 1명씩 승장과 수승을 두어
소속 사찰의 군무와 사무를 관장하게 했다.
.............북한산성 내 승군 주둔 사찰...........
중흥사.,숙종때 전국 승병 총지휘소 136칸 사찰.
상운사.,원효봉 북문 아래 승병수비대.,133칸 사찰
원효암.,원효봉 아래 10칸 암자로 대서문 일대 파수처.
노적사 .,노적봉 아래 중성문 안 85칸 승병수비대.
봉성암.,구암봉 아래 11개 사찰 2암자 중 25칸 암자.
부왕사., 승병 훈련소 및 부왕동암문 수비대 사찰.
서암사.,수구문과 서암문 수비대 133칸 사찰
국녕사.,가사당 암문 인근 승병 수비대 86칸 사찰.
원각사.,부왕동암문 아래 승병 수비대 71칸 사찰.
보광사.,대성문 일대 산성.,승병수비대 71칸 사찰
보국사.,금위영 아래 177칸 사찰로 보국문 수비대.
용암사.,승병 유치 및 용암문 승병수비대 87칸 사찰.
태고사.,고려 국사 보우의 사리탑이 있는 131칸 사찰.
....................................................................
태고사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 매,
활자 11두(斗),화약용 흑탄 1600 석을 비축.
그러나 갑오경장으로 의승군(義僧軍)이 폐지.
1950년 6.25전란 중 폐허가 되었고
1964년 청암(靑岩)스님에 의해 중창.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스님
중흥사(重興寺)를 중창 후 그 동편에 암자를 지어
5년동안 머물렀는데 그 암자가 바로 지금의 태고사.
....................................
....................................
.
12성문 안 13사찰 승병들은 검은 옷차림으로 무장.
승려 신분이지만, 관군 역활을 수행했다. -북한지 기록 -
적의 동태를 망보는.,누각
항해루.세심루. 산영루.,3곳
산영루 개울 건너.,선정비 군(群).
산영루는 조선시대 김시습이 하루종일 시를 써서
향옥탄에 띄워보냈을 만큼 산성계곡 최고의 절경지.
지금은 향옥탄 암반 위에 주춧돌만 남아있는 산영루터.
'옥소리를 내는 여울'.,향옥탄(響玉灘)
용학사 아래 비탈바위에.,선정비 26기.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수성대장.,총융사.
조선시대 역대 총융사(경리청장)들 공덕비.
북한산성 12성문 한가운데 위치한.,용학사.
북한산성 내 역대 총융사 집무실로 추정된다.
총 1645명 7개 조직으로 구성된.,산성 수성대.
...북한지 기록.....
경리청 23 (군인 7)
관성소 1178 (군인 1160)
승영 410
.
훈련도감 유영 10
어영청 유영12
금위영 유영 9
호조 3
.........
.
산성 내 중요시설이 있어
좁은 병묵지점에 쌓은 내성.
2중 방어선 내성 통제선.,중성문.
행궁과 경복궁을 잇는 지름길 출입문이.,대성문
어영청 금위청 경리청을 거쳐 행궁으로 가는 통로.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12성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
조선 왕이 유사시에 대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출입문이자.
수성대장 어영대장 금위대장이 대궐에 갈 때 이용했던.,대성문.
대서문, 대남문, 대동문, 대성문 북문, 중성문 대성문은 산성 6 대문.
.
중성문 내성 안
부왕사지 위에 있는
옛 행궁은 터만 남았다.
.
행궁 규모.
내전 28칸
외전 28칸
.
부왕사지 인근에 자생하는 각종 약초들.
전란때 부상자 치료 용도의 한약제 원료.
부왕사지는 전란 때 부상자 치료소였던듯.
.
조선시대 그 누군가 심었을.,귀한 약초들
아직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잡초와 어울어져 자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청수동암문과 부왕사지
사이에 솟는 샘물이.,청수.
'행궁과 부왕사지 사이로
청수가 흘러내리는 계곡이라
귀한 약초들이 자생하는 걸까?'
숙종 43년(1717년)에 111칸 규모로 건립된.,부왕사.
승병 유치를 위해 건립했던 승병 훈련장 사찰.,부왕사.
당시 용암사(북한산대피소) 87칸보다.,컸던.,승병 양성소.
부왕사 주변의 넓은 공터는
승병 교육 훈련장이었던듯.,
1944년 수도원 6칸을 지어
확장했지만 6.25 전란때 소실.
고려시대 사찰로
조선을 건국하기 전,
태조 이성계., 백일 기도처.
약초 재배에 명성 높았던 사찰.
(1894년 고종 31년 경리청 폐지.)
(1912년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의해)
(산성 내 건물을 10년간 영국 교회에 임대.)
.................................
.................................
성능은 1745년까지 30년 동안 중흥사 일대에 머물렀다.
그간 산성 관리 이외에도 중흥사와 태고사를 중창하고,
용암사와 서암사ㆍ진국사ㆍ봉성암ㆍ원효암을 창건했다.
또한, 태고사에 머물며《사서삼경구언해》《소미통감》
《십구사략》《당시품휘》《고문백선》《상례비요》
《전등신화》《삼운통고》《천자문》《주자필》서책을 판각
유학, 역사, 시문, 고문 등에 해박했던.,성능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
산성의 축성과정을 상세하게 기록
봉우리, 골짜기, 폭포, 사찰, 누각 등.
위치와 역사도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북한지》는 역사 지리만을 다루지 않았다.
고려 이색, 조선 김시습 문호들의 시 30여 편
우뚝 솟은 기이한 형상 몇만 겹인고,
구름 속에 솟아나온 푸른 연꽃 같구나.
신령한 빛 길이 황금의 세계를 비추고
맑은 기운 길이 흰 옥 같은 산봉에 머무르네.
우뚝한 산등성이와 멧부리는 달빛을 머금고
깊디깊은 골짜기엔 신선의 자취 숨기고 있네.
맑게 노니는 이들 다시 높은 산정에 올라가
큰 바다 내려보며 가슴 한번 상쾌하게 하고 싶네. -성능 -
1739년 3월, 어영청에서
북한산성을 적간한 뒤에
보고서에 흥미로운 기록.
성능을 만나려고 도성의 양반사대부들이
산성에 많이 찾아온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성능이 사귄 사대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오도일, 이이명, 홍세태
오도일이 1699년 여름에 “방장산인 성능에게 주다”란 시.
그는 문장에 뛰어나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불렸으며,
숙종이 "과음하지 말라." 주의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던 인물.
.
산성 안에 ‘금위영이건기비’(1715)라는 글을 남긴., 이이명
노론 4대신으로 널리 알려진 이이명은 숙종과 독대를 하고
연잉군(영조)을 왕위에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거물 정치인
《해동유주》라는 시선집을 간행한 중인 출신의 홍세태.
성능이 화엄사 장육전을 중수했을 때 기념시를 남긴 문인.
성능은 1745년에 북한산성을 떠나
화엄사에 내려가 화엄경을 판각하고,
양산 통도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전해온다.
성능은 숙종~영조대에 크게 활약한 고승이었으나
정작 그의 신상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의 이름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어
더욱 신비한 인물인.,성능(聖能).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계파(桂坡).
본래, 성능은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이었으나
화엄사(華嚴寺) 각성(覺性)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였고
그곳 장륙전(丈六殿)은 그의 원력(願力)에 의해 완공되었다.
1699년(숙종 25) 공사 시작후 3년 만에 완공
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
당시 장륙전 중건을 위해 100인 승려들이 대웅전에서 백일기도
그는 기도의 원만한 성취를 위하여 공양주(供養主)를 자원하였다.
백일기도 끝나는 회향일(廻向日)에 한 노승의 꿈에 나타난 문수보살.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으로
화주승(化主僧)을 삼아야
불사를 이룰 수 있다.”
이에 100인의 승려가 모두 시험한 결과
성능(性能)만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다.
화주할 걱정에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린 성능.
“다음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문수보살의 말씀이 들은 성능
성능이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화엄사에 자주 들르는 거지노파였다.
성능에게 시주를 요구받았던 거지노파는
시주를 약속한후 그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하여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
그뒤 성능은 5, 6년을 걸식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한양 창덕궁에 이르러 마침 유모와 함께 궁 밖을 소요하던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는 우리 스님이라면서 반가워하였다.
.
그런데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않았는데
성능이 이를 펴보니 손바닥에 ‘장륙전’ 3자가 쓰여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성능을 도와 장륙전을 완성하게 하였다.
당시 숙종이 사액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 명명했다.
그뒤 숙종은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을 성능에게 위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직위를 내렸는데 9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
그후, 화엄사로 돌아온 성능은 〈산성기사 山城紀事〉를 집필.
.
산성기사를 편집해 영조21년(1745년) 간행한.,북한지.
성능이 산성 완공 후 중흥사에 기거하면서 틈틈이 집필.
그로부터, 34년 후 영조21년(1745년)에 탈고한「북한지」
.
북한지를 판각해 1745년(영조 21) 신임 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
그뒤에도 성능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이루었으며,
다시 통도사로 옮겨 통도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을 증축.
.
성능은 화엄사에서 입적하여
부도가 화엄사 억만고터에 있다.
성능은 자신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고승.
성능은 스승 각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을 축성한 각성은 사기(史記)를 남긴 바 없다.
각성이 축성한 평양성은.,오늘날 북한 국보 제 1호.
스승 각성에게 축성법과 승병 통솔법을 전수받은.,성능.
조선 19대왕 숙종37년(1711년)에 북한산성을 축성한.,성능
북한산성 축성은 숙종 37년 4월에 착수되어
같은 해 10월에 완공되기까지 약 6개월 걸렸고
둘레 7,620보, 약 12km 석성(돌로 쌓은 성)이 완성
성곽에는 성문 외에도 시단봉(柴丹峰) 위.,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북장대 등
3개소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
행궁은 축성이 상당히 진척된 숙종 37년 8월 공사 시작
완공은 그 이듬해인 숙종 38년(1712) 5월에 이루어졌다.
북한산성 행궁 임금의 행차 기록
숙종 37년(1711) 2월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자는 의논이 결정됨.
숙종 37년(1711) 4월 3일 대대적인 축성공사 시작
숙종 37년(1711) 8월 행궁영건청 설치, 김우항, 이언강 북한행궁영건당상 임명
숙종 37년(1711) 10월 북한산성 완공(둘레 7,620보)
숙종 38년(1712) 4월 숙종대왕이 북한산성 행행(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둥함), 중성을 쌓도록 지시
숙종 38년(1712) 5월 북한산성 행궁공사 완료
숙종 38년(1712) 9월 북한산성 주관부서로 「경리청」을 신설하고, 도제조-제조를 둠
숙종 39년(1713) 탕춘대에 평창 설치
숙종 40년(1714) 중성문 완성(중성문1, 시구문1, 수문1)
숙종 44년(1718) 8월 탕춘대 외성 축성 결정
영조 21년(1745) 팔도도총섭 승려 성능(聖能)이 『북한지 (北漢誌)』를 지음
영조 23년(1747) 경리청이 총융청에 이속, 총융사가 경리청 관리함
영조 36년(1760) 8월 영조대왕이 북한산에 거둥(임금의 행차)함.
영조 48년(1772) 4월 영조대왕과 세손(정조대왕)이 행궁에 행차하여 시단봉에 오름.
덧 말.
복원 전.,북한산 중흥사지(北漢山 重興寺址)
숙종때 북한산성 축성 흔적들.
산성 내.,훼손된채 방치된.,불상들.
명량 영화 속.,임진왜란 승병
유정 사명대사.,임진왜란 의승병장.
여수., 영취산 진달래
류성룡 작.,징비록
'나라에 변고가 있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다면
허깨비 나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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