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7. 16:4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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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12> 신라 여왕의 탄생
경주시 신평동의 여근곡.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에 나오는 여근곡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 권태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은 성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의 모든 왕국에서는 엄연히 남녀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데 유독 신라에만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제27대 선덕(善德)여왕(632~647), 제28대 진덕(眞德)여왕(647~654) 그리고 제52대 진성(眞聖)여왕(887~897)이 그들이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차녀 선덕(덕만이라고도 함)공주가 첫 여왕이 되는 과정은 짐작이 가듯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물론 진평왕과 마야(摩耶)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출발점이 됐다. 진평왕의 남동생들인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과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이라도 아들을 낳았더라면 성골 남자의 왕위 계승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차녀 선덕공주는 처음부터 1순위가 될 수 없었다. 언니인 장녀 천명(天明)공주보다 서열이 뒤진 데다 이전에 공주가 여왕이 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한 방정식이 전개됐다. 603년 진평왕은 37살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폐위된 제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의 아들인 용수(龍樹)전군(殿君·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장녀 천명공주와 결혼시켜 사위의 자격으로 일종의 태자를 삼는 방법이었다. 용수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은 성골 신분을 갖고 있던 천명공주에 기인한다. 모계제 사회에서도 여자는 그러한 정당성을 갖지만, 실제 왕위 등의 자리는 남자가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용수의 동생)』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진평)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 전군이 사양했으나 마야왕후가 들어주지 않았고, 마침내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에는 김춘추(金春秋)가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진평왕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여왕에 올랐다.
천명공주가 동생 선덕에게 양보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太陽)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는 마야왕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용춘공에 관심을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했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했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했다.”
612년의 일이다.
천명공주의 출궁은 그가 성골을 버리고 진골로 족강(族降·신분 강등)됐음을 의미한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선덕공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용춘은 선덕공주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선덕과의 혼인을)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됐다. 하지만 용춘은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했다. 진평왕은 용수에게도 선덕을 모시도록 했으나 또 자식이 없었다. 왕위계승자가 된 선덕공주는 612년부터 21년간 왕정을 익혔다. 선덕이 왕위에 오를 때인 632년엔 40살이었다.
신라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터. 선덕여왕은 사후에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 무덤 아래에 세움으로써 이 말이 실현됐다. 도리천은 불교의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으로 사천왕 하늘 위에 위치한다.
『삼국유사』 1, 『왕력』편 중 제27 선덕여왕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골 남자가 모두 죽어(聖骨男盡) 왕위에 올랐다…이상은 중고(中古·제23대 법흥왕~제28대 진덕여왕)로 성골이고, 이하는 하고(下古·제29대 태종무열왕~제56대 경순왕)로 진골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국인들이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 하고 무열(武烈)에서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眞骨)이라 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8년조)
이러한 기록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선덕여왕의 즉위는 성골 남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성골이라는 점이다.
선덕공주를 왕위계승권자로 선택한 것은 성골종족(聖骨宗族)의 왕위 계승 원리에 어긋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부계제사회(父系制社會)에서 여자도 한 대(代)에 한해 부계성원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1972). 다만 그 여자가 혼인을 하여 남편의 집으로 가면 부계(父系)성원권을 잃게 된다. 천명공주가 출궁한 것은 성골 신분을 가진 부계성원권을 잃고 용수의 부계혈족집단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선덕공주는 혼인을 한 후에도 성골 거주구역인 왕궁을 떠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성골로서 왕위계승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선덕공주가 혼인했던 용춘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사이에 출생한 아들은 용춘의 부계성원이 되어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자는 한 대에 한해, 그것도 아버지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때 부계성원권을 가질 수 있었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와 동시에 진골로 족강된 용수보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 성골 선덕공주를 선택했다. 당시 선덕공주는 용춘 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지만 혼인을 하여 남편의 부계혈족으로 소속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선덕 즉위 뒤 중국선 측천무후 등장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인 690년 중국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자로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705년까지 15년간 재위했다. 측천무후의 즉위는 당 고종의 황후로서 황제가 된 것으로, 당 황실의 왕위계승원리와는 무관한 권력장악이었다. 그렇더라도 측천무후의 즉위는 신라의 선덕여왕·진덕여왕과 같은 여왕의 즉위에서 힘을 얻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선덕의 왕위계승 막바지 과정에도 반발이 있었다. 『삼국사기』 4, 『진평왕 53년(631)』조는 이찬 칠숙(柒淑)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을 서술하고 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평왕은 그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칠숙·석품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선덕공주라는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일 수 있다.
첫 여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삼국유사』 3, 『황룡사9층탑』조에 따르면 636년 당나라에 유학 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태화지 옆을 지나다 신인(神人)을 만나 대화했다. 자장은 신라에 말갈·왜국이 인접해 있고 고구려·백제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구적(寇賊)이 횡행하는 것이 백성들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인은 “지금 너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기에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도모하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황룡사(皇龍寺)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643년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 건축을 제안하여 탑을 건축하게 되었고 645년 완공했다. 황룡사9층탑은 선덕여왕의 위엄을 높이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사천왕사 근처 낭산의 남쪽 언덕에 있다.
여왕 위엄 높이려 황룡사탑 건립
정작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은 어렵다는 뜻)’라고 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 16년(647) 1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毗曇)의 무리였다(『삼국사기』 5). 비담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비담 일당은 춘추(春秋)를 왕으로 세우려 오래전부터 활동해온 결사인 칠성우(七星友)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선덕여왕이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나기 전 말년엔 칠성우들이 여러 부문에서 왕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1월 17일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마지막 남은 성골인 승만(勝曼·진덕여왕)을 왕으로 세우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막내동생인 진안갈문왕의 딸로 혼인하지 않고 왕궁에 살며 성골 신분을 유지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여자도 모두 소멸되었다. 그러자 춘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왕 시대가 열렸다.
신라인들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비화에도 공을 들였다. 『삼국유사』 1 『지기삼사(知幾三事)』조에 나오는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조짐이 그것이다.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을 것이라 한 것, 경주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 군사의 존재를 알아내고 잡아 죽이도록 한 일,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한 일이 그것이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의 그림이 자신이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근(女根)은 여자의 옥문(玉門·생식기)으로 그 빛이 흰색이며 흰색은 서방이므로 서방의 군사 즉 백제 병사가 왔음을 알았고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갔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무왕대에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는데 불경에 도리천(?利天)은 사천왕 위에 있어 선덕여왕이 한 말이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위에 오른 후, 세상을 떠난 후 선덕여왕의 특별함을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었던 것이다.
여자이지만 성골인 선덕여왕의 즉위는 신라 골품체제의 운용원리를 따른 왕위 계승이었다. 성골과 성골의 왕위 계승 등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밝히기로 한다.
율령 반포 법흥왕, 왕과 형제·자녀만 성골로 규정
<13> 신라 성골의 탄생
신라 제23대 법흥왕에서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성골 종족이 살던 일종의 신성 공간(성역)이었던 경주 월성(제5대 파사왕 22년인 101년부터 왕성의 하나가 됨)의 궁궐 터. 성골의 거주 구역이었던 삼궁(三宮)은 월성의 대궁(大宮), 금성의 사량궁(沙梁宮), 만월성의 양궁(梁宮)이다.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신라 골품제도의 최상위 신분인 성골(聖骨)·진골(眞骨)이란 말은 21세기 한국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어떤 조직에서 출신이나 성분을 따질 때 단골로 사용된다. “저긴 성골이잖아” 이런 식이다. 하지만 정작 성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골과 진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성골 왕의 시작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제23대 법흥왕(法興王)에서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를 중고(中古) 시대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8년조에는 “국인(國人)들이 시조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성골이라 일컫는다”고 적고 있다. 두 사서 모두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 양쪽이 왕족이면 성골이 되고 한 쪽이 왕족이 아니면 진골이 된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이병도, ‘고대 남당고’, 『서울대 논문집』, 1954). 그런가 하면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의 장남인 동륜(銅輪) 태자(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의 직계비속으로 구성된 소가계 집단이 성골을 주장해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다(이기동, ‘신라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역사학보』 53?54합, 197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삼국유사』를 따르더라도 법흥왕에서 제25대 진지왕(眞智王)까지 성골 왕의 존재를 무시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엔 차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는 법흥왕 이전의 왕들도 성골 출신이었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법흥왕대의 변화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법흥왕이 율령(律令)을 반포하면서 새로운 성골 종족(宗族·집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삼국사기』는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公服)과 그 주자(朱紫)의 질서가 정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품 신분에 따라 관리가 입는 공복의 색깔이 주색(붉은색·성골), 자색(자주색·진골), 비색(붉은색·6두품), 청색(청색·5두품), 황색(누른색·4두품)으로 달랐다. 율령 반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을 뜻한다. 법흥왕이 신라 서울인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인 6부에 사는 사람들(六部人)의 복색과 주자의 질서를 정한 것은 성골·진골과 6두품에서 1두품까지의 왕경인의 신분을 정하고 그에 따른 규정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개혁이라 하겠다.
필자는 왕과 그 형제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종족을 성골로 보아왔다(이종욱, ‘신라 중고시대의 성골’, 『진단학보』 50, 1980). 종족은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리니지(lineage)에 해당하며, 공동 조상을 가진 살아 있는 혈족을 의미한다. 그런데 종족의 범위는 몇 대의 조상을 시조로 하느냐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진다.
중요한 사실은 종족에 속한 성원들은 정치·경제·종교적 지위나 권한이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종족집단에 속한다는 것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 1972). 신라인들은 기본적으로 부계(父系) 종족을 유지했다.
신라의 성골 종족은 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왕의 아버지(세상을 떠났지만)를 시조로 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계종족이 성골이 됐다. 구체적으로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형제 공동가족이었다. 거기에 더해 왕과 형제의 딸들로 출궁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포함됐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때 정치적 지위인 왕위는 성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됐고, 친족 집단인 성골 종족은 왕을 배출하는 확고한 사회적 집단이 됐다.
실제로는 법흥왕의 아버지인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을 시조로 하는 형제 공동가족이 첫 성골 종족이 됐다. 이에 따라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입종(立宗) 갈문왕이 성골이 된 것은 분명하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법흥왕에게 진종(眞宗, 어머니가 확실치 않아 성골인지 단정하기 어려움) 전군(殿君)과 보현(普賢) 공주라는 두 동생이 더 있었다. 보현 공주는 법흥왕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 그것도 혼인을 해 남편의 집으로 가기 전 왕궁에 거주할 때에 한해 성골이었다.
법흥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카인 진흥왕이 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며(『삼국사기』 4) 그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진흥왕에게는 만호라는 누이동생과 숙흘종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은 입종 갈문왕과 지소 사이에 출생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흥왕과 사도황후 사이에는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이라는 아들이 출생했다. 이 두 아들은 성골이었다. 진흥왕은 566년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 4). 동륜은 572년 3월 진흥왕의 후궁 중 한 명이었던 보명을 범하러 보명궁에 들어가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 그래서 금륜(제25대 진지왕)이 태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진골로 강등된 용수의 아들
576년 8월 진흥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진흥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다. 동륜의 아들이었던 백정(후에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백반(후에 진정 갈문왕), 국반(후에 진안갈문왕)이 성골이 됐고,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수와 용춘도 물론 성골이 됐다.
진지왕이 그의 어머니인 사도태후 등에 의해 폐위되고, 왕위는 동륜 태자의 아들이며 진지왕의 조카인 백정(진평왕)에게 넘어갔다.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진평의 아버지 동륜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성골 종족 집단이 만들어졌다. 진평왕이 즉위하는 순간 동생인 진정 갈문왕, 진안 갈문왕과 그들의 자녀들(선덕·천명·진덕 등을 포함)이 성골이 된 것이다.
폐위된 진지왕과 그의 아들인 용수와 용춘은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이것이 족강(族降)이다. 진지왕계 종족인 용수와 용춘은 살아있는 동안 성골과 진골 두 신분을 가졌다. 그리고 603년 용수와 진평왕의 장녀 천명(天明)의 아들로 태어난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는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태어나며 진골이 됐고, 654년 왕위에 올랐지만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진평왕과 진정 갈문왕 그리고 진안 갈문왕의 삼형제는 딸은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결과 『삼국유사』 ‘왕력’ ‘제27 선덕여왕’조에 성골의 남자가 사라졌다(聖骨男盡)고 나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비록 여자지만 성골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덕만(제27대 선덕여왕)과 승만(진덕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
법흥왕에서 진평왕까지는 성골 종족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 왕위 계승은 왕의 아들만이 아니라 성골 종족으로 왕의 다음 세대에 속한 사람이면 가능했다. 실제로 진흥왕·진평왕의 즉위는 부자 간이 아니라 조카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성골 종족의 왕위 계승 원리에 따르면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거나 조카에게 넘어가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성골 남자와 정실 사이 자식이면 성골
성골의 거주 구역은 성역(聖域)이었다. 신라 골품제의 특징 중 하나로 거주지에 따른 신분 편성을 들 수 있다. 성골의 거주 구역은 대궁(大宮)·사량궁(沙梁宮)·양궁(梁宮)의 삼궁(三宮, 『삼국사기』 39, ‘직관’ 중). 삼궁은 성골이 거주하던 신성 공간 즉 성역이었다. 대궁은 월성(月城), 사량궁은 금성(金城), 양궁은 만월성(滿月城)에 있었다(이종욱, 『신라의 역사 I』, 2002). 왕의 누이, 왕과 왕의 형제의 딸들도 혼인해 삼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월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룡사는 성골 왕들의 신성함을 보장하는 사찰이 되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 남자들의 정궁(正宮) 부인들이 생산한 자녀들이 성골이 되었다(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2000). 그 결과 성골 종족은 그 규모가 작아졌기에 종족을 유지하기에 매우 취약한 면이 있었다. 부계제 전통사회의 경우 아이를 못 낳거나 여자만 생산해 부계 종족을 이어나갈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구분한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의 경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종족 내에 남자가 모두 사라졌다. 이로써 성골의 왕위 계승에 비상조치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여왕의 즉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모두 사라졌다. 왕위는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기에 성골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던 김춘추가 칠성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신라인들에게는 엄격한 신분제가 있었다. 실제로 성골 신분을 만든 율령반포 이전에는 “옛날부터 진골(古之眞骨)들이 왕위를 이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조)는 이야기가 나온다.
596년 용춘공이 화랑 중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가 되었을 때 “골품이란 것은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나온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조). 여기서 말하는 왕위는 성골이, 신위는 진골 이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다시 쓰는 고대사]
육두품 설계두, 당나라서 전공 세워 대장군까지 올라
<14> 신분의 벽, 신라 골품제
신라인의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 토기들. 신라시대에는 성골·진골과 6개 두품(頭品)으로 나누어진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가 있었다. 신분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관직·관등이 구분됐고 사용할 수 있는 옷·도구·주택과 탈것도 달랐다. 사진 왼쪽은 장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는 장식이 비교적 적고 오른쪽은 거의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 추정된다. [사진 권태균]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설계두(薛?頭)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벗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 말을 한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할 때 골품(骨品)을 논한다. 아무리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신분에 따라 법이 정해놓은 한도를 넘어 승진할 수 없다. 나는 서쪽 중화국(中華國·당시 당나라)으로 들어가 세상에 드문 지략과 비상한 공을 세워 영달의 길에 나아가 (관직을 가져) 천자의 곁에 출입해야 만족하겠다(『삼국사기』 권47).”
타고난 신분 때문에 신라에서는 더 이상 큰 뜻을 펼칠 수 없어서 당나라로 가겠다는 말이다. 골품제 사회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설계두는 621년 몰래 큰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났다. 그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을 때 자천하여 좌무위(左武衛) 과의(果毅)가 됐으며 요동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세운 공(功)은 일등이었다. 당 태종은 “우리나라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형세를 보고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으로서 나를 위하여 전쟁에서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 공에 보답하겠는가”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설계두의 소원을 전해 들은 당 태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준 뒤 대장군의 직을 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설계두의 일화에서 보듯 신라는 골품제라는 매우 엄격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성골(聖骨)·진골(眞骨)의 2개 골(骨) 신분과 6두품(頭品)에서 1두품까지의 6개 두품 신분이 있었다. 설계두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최고의 신분이 아닌 그 아래 6두품 정도의 계급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조에는 왕위(王位)와 신위(臣位)를 구별하는 것이 골품이라는 말이 나온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을 반포, 신분에 따라 백관 공복(公服)의 옷 색깔을 달리 정했다(『삼국사기』 권4). 또 6부인(六部人·왕경 6부의 사람들로 왕을 포함한 왕경인) 복색(服色)의 존비(尊卑)제도를 만들었다(『삼국사기』 권33 ‘색복’ 조). 여기서 말하는 존비 제도는 골품 신분을 구별한 것을 뜻한다.
성골·진골과 6개 두품 외에 지방인의 신분으로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가 있었다. 그 밑에 평인(平人·백성) 신분을 편제했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이 같은 골품 신분은 출생에 의하여 결정되고 신분 상승은 불가능했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 논했던 골품의 기준은 족(族)이었다. 족에는 종성(宗姓, 박·석·김씨)과 육부성(六部姓, 이·정·손·최·배·설씨)을 떠올릴 수 있다. 각 성(姓)은 하나의 씨족(clan)을 뜻한다. 각 씨족에는 서라벌 소국 형성 전후에 활동한 시조들이 있다. 그런데 법흥왕이 골품 신분을 정했을 때는 각 씨족이 만들어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났기에 씨족 성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동안 씨족이 종족(宗族·lineage)들로 나누어졌다.
종족 중 중심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했고 방계로 된 종족들은 신분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을 당했다. 신라 중고시대(법흥왕~진덕여왕)에 새로운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골 종족이 만들어졌던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성골·진골은 종성을 가진 족을 대상으로 한 신분이었다. 그 이전 왕을 배출하던 종족은 진골이라 하였다. 그중 석씨족은 제16대 흘해왕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따라서 520년 당시의 진골은 성골이 되지 못한 김씨족과 박씨족의 종족 중 두품 신분으로 족강이 되지 않은 종족들이 차지한 신분이었다.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성했다. 6두품은 왕경을 구성한 6부의 각 부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의 몫이었다. 5두품은 부를 나눈 구역인 리(里)의 지배세력을 배출하던 종족들이 차지했다.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의 세력들이 되었다. 6두품·5두품·4두품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직할했다. 그러한 직할지 중 6두품이 살던 부의 중심 구역의 일반 백성은 3두품, 5두품이 살던 리의 중심 구역의 일반 백성은 2두품, 4두품이 살던 마을의 일반 백성은 1두품이었다고 짐작해본다(이종욱, 『신라골품제연구』, 1999).
두품 신분은 육부성을 대상으로 편성된 신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왕을 배출했던 종성에 속한 세력들은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으로 6촌이나 6부의 세력이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방 신분인 진촌주는 행정촌(직경 10㎞ 정도 공간, 왕경의 부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이고 차촌주는 자연촌(직경 3~4㎞ 정도, 왕경의 리 정도의 규모)의 지배세력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신라의 골품 신분은 지역적인 편제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골은 월성의 대궁, 금성의 사량궁, 만월성의 양궁으로 이루어진 3궁에 거주했다. 진골은 3궁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도시인 왕도(王都)에 살았다. 6두품은 부(部)의 중심 마을에, 5두품은 리(里)의 중심 마을에, 4두품은 리를 나눈 마을에 살았다. 그리고 지방의 진촌주는 행정촌의 중심 마을에, 차촌주는 자연촌의 중심 마을에 살았다.
설씨의 시조 호진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습비부(習比部·옛 명활산고야촌)의 설씨족의 경우 세대를 지나며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다. 일부 종족은 신분적 지위를 유지해 부의 지배세력으로 남았다. 족강한 종족은 리의 지배세력이 되기도 했다.
골품 신분층 자체에 역사적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소멸된 것이 그 하나이고, 삼한 통합을 전후하여 왕경인의 3두품·2두품·1두품이 통합되어 평인 신분으로 된 것이 다른 하나다.
설계두는 습비부의 세력가인 6두품으로 습비부의 중심 마을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를 배출한 족은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두품 신분을 가졌을 수 있다. 『삼국사기』 2권 점해왕 3년(251) 조에는 “한기부(漢祇部) 사람 부도(夫道)가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글과 계산을 잘해 이름이 알려졌기에 왕이 불러 아찬(阿?)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예에 따라 설계두의 조상 중 누군가의 능력으로 조정의 관직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두품 신분을 받았을 수도 있다.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 등 각종 정치·사회제도를 정비했다.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경주시 효현동의 고분. 사적 제176호.
설계두가 당나라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신분 상승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따른 관직(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어지는 직)과 관등(왕정에 참여한 대가로 보수를 주는 기준)의 상한선이 있었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된 이후 령(令·장관에 해당)-경(卿·차관에 해당)-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이 설치됐다.
신문왕 5년(685)에는 사지(舍知)라는 관직이 추가돼 령-경-대사-사지-사의 5단계 관직체계를 갖추었다. 령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던 관직이다. 경은 진골은 물론 6두품도 오를 수 있었다.
관등은 왕경인에게는 17등급의 경위(京位)가(『삼국사기』 38권), 지방인에게는 11등급의 외위가 각각 설치·운용됐다(『삼국사기』 40권). 왕경인 중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각간)까지 오를 수 있었다. 6두품은 6등급인 아찬(阿?),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인 대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지방인 중 진촌주는 외위 술간(경위로 8등급인 사찬), 차촌주는 외위 5등급인 선간(選干·경위로 11등급인 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라에서는 왕경인과 지방인을 엄격하게 차별대우했다. 무관(武官)의 경우 장군(將軍)-대감(大監)-대두(隊頭)-항(項)-졸(卒)의 5단계 직이 설치·운용되었다. 장군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던 무관직이었고, 6두품인 설계두가 오를 수 있던 무관직은 대감까지였다.
6두품이라는 신분적인 제한, 설씨라는 족적인 한계로 인하여 설계두는 령이나 장군이 될 수 없었다. 대아찬의 관등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당나라에 간 설계두는 큰 공을 세웠다. 비록 전사했지만 그 공으로 인하여 당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설계두가 원하던 영달을 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설계두의 가족들이 있었다면 대장군에 맞는 신분적인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신라는 정치·사회·경제·종교·문화 등 모든 부문을 포함한 사회체제가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되어 작동하던 골품체제 사회였다. 골품 신분에 따른 특권과 의무의 굴레는 신라가 멸망하며 사라졌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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