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9>고려『삼국사기』와 중국『삼국지』.<10> 신라·신라인의 유산.<11> [다시 쓰는 고대사]

2019. 1. 17. 16:44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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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246년은 백제 융성기 … 『삼국지』선 ‘멸망’ 엉터리 기록

 

<9> 고려 『삼국사기』와 중국 『삼국지』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서울 풍납토성 출토 자료에 대한 연대측정에 따르면 성 안에서 출토된 자료로는 기원전 199±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연대인 기원전 18년보다 훨씬 앞서 백제가 건국됐음을 의미한다. 대방태수 궁준(왕준)을 전사케 한 고이왕도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삼았다.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 전경.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을 엊그제 벌어진 낭만의 전쟁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망상을 키워간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 흔적을 모두 청산했을까? 아니다.

 

지난 호에서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1919년 발표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진전좌우길전집』, 별권 1)라는 논문에서 ‘신라 건국신화부터 16대 흘해왕(訖解王·310~356)까지 역사는 사료에 따른 게 아니라 편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것’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일왕을 옹호하고 일본 단일민족설을 지키려고 쓴 이 논문은 한국인을 폐멸시키는 도구로 사용됐다.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허구로 만들어 일선동조론이나 창씨개명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쓰다는 신라·백제의 고대사를 말살하는 근거를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한전’에서 끌어왔다. 그래서 ‘한전’과 우리 손으로 신라·백제의 역사를 쓴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려 한다.

 

1145년 왕명에 의해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기록했다.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는 위·촉·오 삼국의 역사(220~265)를 다룬다. 그중 위나라를 다룬 ‘위지(魏志)’ 끝에 ‘동이전’이 있고 그 안에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한에 대한 ‘전(傳)’이 있다. 그 ‘한전’에는 삼국시대와 그 이전인 기원전 190년대에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따라서 『삼국지』 ‘한전’의 기록으로 한반도 삼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한전’은 인문지리서여서 신라·백제 역사를 다룰 중심 자료가 될 수 없다. 1919년 쓰다의 사료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당연히 『삼국사기』로 다루는 것이 정통이었다.

 

 

백제의 고대사가 담겨 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

 

 

이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를 볼 순서다. 마침 두 사서에 하나의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24, ‘백제본기’ 2에 나오는 고이왕 13년(246)의 기록이다.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고이왕)은 낙랑의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을 보내어 낙랑 변방의 백성들을 빼앗았다. 유무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므로 왕은 침범당할까 두려워서 그 백성들을 돌려보냈다”라고 나온다.

 

『삼국지』 ‘한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할했기에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속하게 했다. 그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삼국지』에 나오는 관직명)가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帶方)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다. 2군(낙랑과 대방)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고 나온다.

 

여기서 삭방과 대방은 대방군이고 왕준은 궁준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 246년의 전쟁을 놓고 두 사서의 기록에 차이가 난다.

 

첫째, 『삼국지』와 달리 『삼국사기』엔 궁준의 전사에 대한 내용이 없다. 백제군은 대방의 태수인 궁준의 전사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그들이 아는 전쟁만 충실히 기록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삼국지』는 “궁준이 전사했다. 낙랑과 대방이 현재 황해도 지역에 있는 기리영을 공격해온 한(韓, 백제)을 낙랑군과 대방군의 2군이 멸(滅)했다”고 한다. 거짓된 기록이다. 백제는 246년에 망하지 않고 더 강성해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한전’은 백제(百濟)를 삼한 수십 개 소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작은 백제국이 대방군 기리영으로 쳐들어가 낙랑과 대방의 군대와 전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다. 실제 백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마한의 여러 소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246년 당시에는 이미 현재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정복한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지』의 찬자인 진수는 백제나 신라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도 구할 수 없어 그런 엉터리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한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한전’에는 중국과의 관계, 그들이 파악한 한의 정치조직, 한의 습속, 산물 등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귀신을 믿어 국읍(國邑)에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꼬리가 긴 닭이 나는데 그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국(國)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없어 당시 한반도 남부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백제의 정치사나 사회사를 재구성할 때 『삼국지』 ‘한전’은 도움이 안 된다.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도 ‘한전’이 아니라, 신라인 스스로가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다뤄야 한다.

 

‘한전’과 달리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전혀 다른 신라의 모습이 풍성하게 기록돼 있다. 유리왕 19년(42) 이서국(伊西國, 현재 청도)을 정복한 이래 탈해왕 대(57~80)에는 우시산국(현재 울산)과 거칠산국을 병합했다. 그리고 파사왕 대(80~112)에는 음즙벌국·실직곡국·압독국(현재 경산)·다벌국·비지국·초팔국을 병합했다. 벌휴왕 2년(185)에는 조문국(현재 의성), 조분왕 2년(231)에는 감문국(현재 김천), 첨해왕 대(247~261)에 사벌국(沙伐國, 현재 상주)을 병합함으로써, 즉 1세기 중반에 시작된 신라의 진한 소국 정복이 3세기 중반 일단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풍성한 한국 고대사를 쓰다는 폐멸시켰다. 그런데 현재 한국 역사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있는 한국사는 그와 무관할까?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뒤 한국에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제대로 된 한국사 개설서가 한 권도 없었다. 당시 한국사의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역사가는 쓰다가 교수로 있던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병도(1919년 졸업)와 손진태(1927년 졸업)였다.

 

실증사학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는 1930년대 중반에 ‘삼한문제의 신고찰’(『진단학보』 1·3·4·5, 1934~36)이라는 논문으로 내물왕 이전 역사를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지』 ‘한전’으로 다루며 삼한론을 폈다.

그는 『한국사』(고대편, 1959)에서 “‘백제본기’에 열재(列載)된 고이(왕) 이전의 제왕(諸王) 기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그들은 대개 부락국가 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왕들이거나 혹은 진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世系)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바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했다. “

(신라) 내물 이전의 세차(世次)가 얼마만큼 확실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역시 백제를 고이왕 이전의 그것에 대한 의문과 마찬가지여서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원시국가로서의 지지(遲遲)한 걸음을 걸어온 신라가 부근의 군소 제국을 병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로 발전하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왕(제17대)시로 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했다.

 

소위 한국 실증사학의 뿌리는 쓰다의 한국사 폐멸 사학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해방이 돼도 내물왕 이전 역사는 또 축소·은폐됐다.

 

손진태는 “민족을 발견했다”며 단군을 시조로 한다는 순수 혈통의 한민족을 주장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8). 단군은 20세기 들어 대종교에서 받들기 시작했고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기념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에서 1949년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인 개천절로 정하며 민족의 시조로 공식화됐다. 개천절을 만드는 데 손진태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단군은 한국 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건국세력일 뿐이다. 고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씨족이 사라져 현재 한국인과 단군의 연결고리는 일찍이 끊겼다.

 

쓰다에서 시작된 신라 역사 왜곡은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 이어지고 있다. 2002년 편찬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에는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됐다(기원전 57)…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고등학교 『한국사』(2014) 중 하나는 ‘신라는 진한의 한 소국에서 출발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다(기원전 57년). 초기의 신라는 6부족 연맹체였는데, 박·석·김의 세 성씨가 연합하여 이사금을 선출했다. 4세기 후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했다(주 미래앤컬쳐).

모두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의미 있게 보지 않는다. 현대 한국사학은 식민사학의 청산을 외쳐왔지만 스스로 일본의 한국사 폐멸 사학(소위 식민사학)의 틀 속에 머물며 교과서까지 왜곡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인 다케다 유키오(전 도쿄대), 기무라 마코토(도쿄 도립대학), 이성시(와세다대) 교수에게 제국 일본의 선학이 날조한 한국사를 비판하고 넘어서라고 주문했었다.

 

 

 

 

성씨로 본 현대 한국인, 절반 이상은 신라인의 후손

 

<10> 신라·신라인의 유산

 

 

경주에 있는 성씨의 본거지. 1 박씨의 조상인 박혁거세의 알이 발견됐다는 신화가 서린 나정. 2 김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탄생신화가 서려 있는 계림. 3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암봉. [사진 권태균]

 

 

한민족의 시조는 누구인가? 단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 인식은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를 은폐하고 만들어낸 잘못된 것이다. 은폐·축소됐던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를 떠나면 신라·신라인이 한국·한국인에게 전해준 역사적 유산 두 가지를 우선 찾을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의 사회적·정치적인 틀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먼저 신라인이 다수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매우 특별한 사실을 주목하겠다.

 

1985년(경제기획원 조사)에 있었던 인구 및 주택센서스 결과를 보자. 당시 274개 성(姓)이 조사됐는데, 전체 인구 4044만여 명 중 김씨(878만여 명, 그중 경주 김씨는 152만여 명, 김해 김씨는 376만여 명)·이씨(598만여 명, 그중 경주 이씨는 152만여 명, 전주 이씨는 237만여 명)·박씨(343만여 명, 그중 밀양 박씨는 270만여 명)·최씨(191만여 명, 그중 경주 최씨는 87만여 명)·정씨(178만여 명, 그중 경주 정씨는 30만여 명, 동래 정씨는 41만여 명)가 5대 성으로 나타났다. 2000년에도 286개 성 중 같은 성이 5대 성으로 나타났다. 5대 성은 전체 인구의 반이 넘었다. 김씨와 이씨의 비율은 어느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러니 위와 같은 문답이 생겨난 것이다.

 

5대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그중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의 출발을 보자. 내물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치원의 초상.

 

 

신라의 건국신화에 이씨·최씨·정씨를 포함한 육부성의 조상이 모두 나온다.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남쪽으로 지금(고려)의 담엄사로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오니 급량부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고허촌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오니 이가 사량부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 넷째는 자산진지촌이니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라 하여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의 성을 최씨, 본피부의 성을 정씨라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량부를 정씨, 본피부를 최씨라 하여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경주 이씨는 알평을 조상으로, 경주 정씨는 지백호를 조상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경주 최씨는 소벌도리의 자손이 된다.

 

다음은 박씨와 김씨의 종성(宗姓). 박씨는 『삼국사기』 1,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나온다. 현재 박씨들 중에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밀양 박씨를 본관으로 한 사람들이 많다. 김씨 중에는 김유신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가 많다. 그러나 신라인 김유신과 그 일족이 아니었다면 김해 김씨는 번성할 수 없었다.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도 적지 않다. 한편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석씨 세력은 16대 흘해왕(310~356)을 마지막으로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그 세력이 줄어 그 후손들이 5대 성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그대로 믿자는 것은 아니다. 5대 성의 각 성은 여러 본관으로 나뉜다. 많은 본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5대 성에 포함되지 않은 종성 석씨와 육부 성인 손씨·배씨·설씨를 포함하거나, 원래 신라 종성인 김씨를 가졌던 안동 권씨 같은 성을 포함하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사람의 비중은 더 커진다.

 

주목할 사실은 현재 한국인 중 고조선·부여·백제·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한국인이 다수라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은 이후 신라에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되었다.

 

대신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신라인들은 그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삼한통합으로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조직을 편성했고, 그에 따라 보다 많은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직에는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후 옛 신라 땅에는 상주·양주·강주, 옛 고구려 땅에는 한주·삭수·명주, 옛 백제 땅에는 웅주·전주·무주의 9주를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삼한통합 후 신라의 통치 영역과 통치 인구가 3배 정도 늘어난 것을 뜻한다. 그리고 685년에는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의 4단계 관직체계를 영-경-대사-사지(舍知)-사의 5단계 체계로 바꾸어 신료의 수를 늘렸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요즘으로 보면 계장 단계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그 밖에도 삼한통합을 전후하여 조부(調府)의 경(卿)을 한 명 더 늘리는 식으로 관부에 따라 복수의 관직을 설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무왕 18년(678)에 선부(船府)를 새로 설치한 것은 그 한 예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이는 대신라 시대에 한국역사를 이끌어 가던 지배세력으로서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층을 두텁게 만들었다.

 

대신라 시대에 종성과 육부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경에만 머물러 산 것이 아니라 지방으로 이주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원성왕계 후손들의 왕위계승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지방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원성왕과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 명주(현재 강릉)로 이주한 김주원(강릉 김씨의 시조가 됨)이 그 예다.(『삼국유사』 2, 『원성대왕』)

 

『삼국유사』 2, 『처용랑·망해사』조를 보면 헌강왕대(875~886)에는 왕이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고, 금강령에 행차하니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고, 동례전의 잔치 때에는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법집(語法集)』에는 그때 산신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고 나온다.

헌강왕 대에 이르면 이미 신라 왕경의 지배세력들(현재 5대 성을 포함한)은 그들이 토지나 노비를 갖고 있던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 잡고, 소위 후삼국 시대라고 하는 전국(戰國)의 상황을 헤쳐 나가, 후일 고려의 지배세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려는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된 나라로 건국 초부터 신라의 지배세력과 지방행정 조직 등 신라의 사회적·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경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인들이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시킨 것과 달리 고려에서는 옛 신라인들을 통하여 왕정을 펴나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것도 역성혁명으로 고려의 사회적·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려에서는 신라의 골품세력들이 향리층이 되고, 조선에서는 고려의 향리들이 양반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인을 조상으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의 수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늘어난 것이다.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려와 조선의 각종 과거시험에 다수가 합격하는 등 정계 진출을 하며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5대 성을 가진 세력들이 번성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세종장헌대왕실록』 151, 『전주부』 조를 보면 토성(土姓)이 아홉인데 그중에 이씨가 있다. 여기 나오는 전주 이씨는 알평을 시조로 하는 경주 이씨에서 갈라진 본관으로 보인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왕을 배출한 세력으로서 전주 이씨는 급격하게 번성해 나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대 성은 아니나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양반의 사생활』(하영휘 저, 2008)의 주인공 조병덕(1800~1870)을 주목할 수 있다. 조병덕은 양주 조씨(趙氏) 20세손으로, 19세손인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1796~1870)과는 13촌 관계에 있었다. 조병덕은 족숙(族叔)인 조두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병덕의 둘째아들 조장희의 진사 합격에 조두순의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1858년 4월 토색질을 한 범인을 잡으려고 교졸(校卒)들이 조병덕의 집에 난입하자 집에 있던 사람들이 교졸들을 결박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조두순에게 알려 사건을 해결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는 지방에 머물던 조병덕이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의 도움으로 그 세력을 유지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은 다른 씨족이나 본관을 가진 가문에서도 마찬가지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5대 성을 가진 사람들은 신라의 진골과 6두품을 거쳐 고려의 향리층, 조선의 양반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일족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며 그 세력을 번성시킨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어떤 가문(종족, lineage)은 번성하고 어떤 가문은 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5대 성(씨족, clan)은 번성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성씨나 따지고 족보나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대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말자는 것이다. 혹 5대 성에 속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경우 신라의 유산을 잇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도 윗대의 여러 조상, 어머니, 할아버지 대의 세 분, 증조할아버지 대의 일곱 분 중에는 확률적으로 반 정도가 5대 성을 가진 분들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에 거의 모든 한국인은 신라 오리진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다시 쓰는 고대사]

내물왕 이전 형성된 지방편제, 지금의 군·면·리로 발전

 

<11> 신라·신라인의 또다른 유산

 

 

경주시 오야리의 지석묘. 한국의 초기 국가인 소국 형성 이전 촌장이 정치 지배자로 있던 촌락 사회(추장 사회)의 표지적 유적이 지석묘다. [사진 이종욱]

 

 

군(郡)·면(面)·이(里)는 현재 한국 지방 행정구역상의 단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편제의 기원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것도 제17대 내물왕(356~402) 이전 신라 때다.

 

신라가 정복했던 경상북도 지방의 진한(辰韓) 소국(小國) 중 이서국은 청도군으로, 골벌국은 임천현을 거쳐 현재 영천시로, 압독국은 장산군을 거쳐 현재 경산시(경산군)로, 조문국은 문소군을 거쳐 현재는 의성군으로, 사벌국은 상주(尙州)를 거쳐 현재 상주시(상주군)로, 감문국은 개령군을 거쳐 현재의 김천시가 되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피정복 소국 지역의 촌들은 면(面)에 해당하는 행정촌으로 편제되었고, 행정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와 비슷한 자연촌으로 편제됐다. 현재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틀은 신라 초기, 내물왕 이전 국가 형성 과정에 그 기원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침묵을 강요받았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사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일본인의 주장에 따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은폐·왜곡시켜 왔다. 그와 달리 필자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해 왔다.

 

신라는 내물왕 이전에 몇 단계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 아래에 그 정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그러한 단계가 현재 한국사에 어떤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지 보겠다.

 

서라벌소국 이전 단계는 추장사회

 

『삼국유사』 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 전한 시절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1일 6부(六部, 당시는 6촌)의 조(祖)들이 각기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고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가 있다. 그때 6촌의 촌장(村長)들은 군주(君主)를 모셔 나라를 세우자는 의논을 했다. 이 기록에서 서라벌소국 형성 이전에 서라벌 지역에 6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라벌소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서라벌 지역에 등장했던 6촌이라는 정치체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을까? 필자는 이를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state) 이전 ‘추장사회(酋長社會, chiefdom)’에 해당한다고 보아 왔다(Conrad Phillip Kottak, 『Cultural Anthropology』, 2002).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촌의 촌장들이 조상으로 받들어졌고,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렸고, 후일 촌을 단위로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성(姓)을 준 사실 등으로 혁거세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현재 경주 지역에 있던 촌락사회(또는 촌장사회)는 인류학에서 말하는 추장사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서라벌 6촌, 촌락사회에 대해 다룬 바 있다(『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 서라벌 6촌의 각 촌은 동서와 남북이 각기 10㎞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는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기에 쾌적한 공간이라고 한다. 각 촌은 농경 등의 이유로 직경 2~3㎞ 정도 되는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촌락사회에서는 촌장이 하나의 촌 전체를, 마을의 장이 마을을 다스리는 2단계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석묘를 표지적 유적으로 하는 이러한 촌과 마을은 한반도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존재했다. 그중 촌들은 현재 면(面)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촌을 나눈 마을들은 현재 이(里)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추장사회)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신라 제17대 내물왕릉 추향대제. 지금도 내물왕 후손들이 왕릉 앞에서 때맞춰 제사를 지낸다.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을 모신 사당인 숭신전(崇信殿). 신라는 석씨 왕인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沙伐國)을 정복함으로써 진한 소국을 모두 정복했다. 기존 견해보다 100년 정도 앞섰던 것이다.

 

소국 면적 1000㎢ ? 백성은 1만

 

서라벌소국은 서라벌 6촌을 통합해 형성됐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에는 기원전 69년에 6촌장들이 모여 “우리는 위로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해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입방설도(立邦設都·나라와 도읍을 세우는 일)하지 않겠는가” 했다고 나온다. 그때 나정(蘿井) 근처에 나타난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는데, 6촌장들이 기원전 57년에 혁거세를 군주로 삼아 입방(立邦)과 설도(設都)를 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혁거세 집단이 서라벌소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입방이다. 서라벌소국의 군주가 되었던 혁거세 세력은 남산 서쪽 산록에 왕실의 보호시설로 금성(金城·『삼국유사』에는 나정 근처에 위치한 창림사(昌林寺)로 나옴)이라는 왕성과 그 안에 왕궁(후일 사량궁)을 축조했다. 이 같은 왕성의 축조는 설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형성된 서라벌소국은 대체로 1000㎢ 정도의 토지와 1만 명 정도의 백성으로 형성됐다. 6촌을 모체로 해 편성된 6부가 서라벌소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이때 촌락사회의 2단계 위에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3단계의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시간이 지나며 왕성 주변에 주택과 관청들이 들어섰다. 『삼국사기』 1에는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이 월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왕궁(후일 대궁)을 지어 왕들의 거처로 삼았다. 이로써 왕성을 둘러싼 도시로서 왕도(王都)가 확대되었다. 후일 왕도로 발전한 서라벌소국의 도읍은 6촌(후일 6부로 개편됨) 중 일부 촌에 걸쳐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도읍의 주인공인 왕과 그 일족들은 소국을 세울 때부터 6촌의 세력집단인 촌장(후일 부장) 세력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530년대까지 신라의 왕들이 6부 중 한 부의 부장이었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왕은 처음부터 6촌의 세력이 된 일이 없다. 마치 현재 대통령이 종로구청장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서라벌소국 형성 후 6촌장을 시조로 하는 육부성(六部姓)과 왕을 배출한 종성(宗姓)은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사용하는 성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서라벌소국이 형성될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소국이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 소국의 구조는 서라벌소국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경주 조양동38호분에서 출토된 한경(漢鏡).

삼한소국의 왕들은 한경 등 중국제 물품을 가지고 위세를 과시했다.

 

 

 

진한 세력들 원거리 교역 시작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내군(內郡·중국 본토의 군)에서 온 고인(賈人·상인)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하며 원거리 교역을 했다고 나온다. 그 과정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이 크게 세 개의 교역권을 구성했다. 『후한서』나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후였다. 그 하나가 현재 경상북도 일대의 소국들로 형성된 진한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은 중국의 상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했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수출했다. 그 과정에 삼한 소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지고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 비록 신라의 경우보다 2세기 이상 늦기는 하지만 『삼국지』 ‘왜인’ 조에는 239년에 중국 측에서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에게 동경(銅鏡) 백매 등의 물품을 보내며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한 사실이 나온다. 이는 중국제 물품으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진한의 정치세력들은 스스로 낙랑군에 사람을 보내 원거리 교역을 했다. 이러한 원거리 교역체제를 위세품(威勢品) 교역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받아들인 중국제 위세품으로는 경주 조양동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등에서 출토한 것과 같은 동경·동탁·철제 무기·철제 농기구 등이 있다. 신라의 경우 위세품 교역은 소국 정복을 하기 시작한 1세기 중반 이후 점차 의미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다른 현상이다. 신라는 그러한 위세품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성장한 변한의 북쪽 지역에 있던 소국들은 지리적인 이유로 서라벌소국을 원거리교역의 창구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으로 소국연맹의 각 소국에는 왕들이 있었다. 소국의 백성들은 각 소국 왕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진한연맹의 공동 시민권은 없었다. 그리고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서라벌소국도 연맹 내의 다른 소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단지 서라벌소국의 왕은 진한 연맹의 맹주로서 원거리 교역을 주관했고 외적 방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소국 간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진한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경상북도로 그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서술도 바꿔야 할 때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진한 소국들이 서라벌소국에 정복됐다.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 24~57) 19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정벌해 멸했다고 나온다. 그후 신라는 제12대 첨해왕(247~261)대에 사벌국을 정복할 때까지 진한의 모든 소국들을 정복했다.

 

『삼국사기』 2에는 제11대 조분왕(助賁王, 230~247) 7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내항해 제택(第宅)과 전장(田莊)을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형성됐던 소국들을 단위로 군을 편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때 군으로 편제된 과거 소국의 영역에 성주(城主)를 칭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2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군을 통합해 다스리던 지방관으로는 185년에 지방관으로 처음 파견됐다고 하는 좌군주(左軍主)와 우군주(右軍主)를 들 수 있다.

 

이웃한 소국들을 정복하며 서라벌소국 영역은 신라의 서울인 왕경으로 바뀌었다. 그 안의 6촌은 6부로, 촌 안의 마을들은 이(里)로 편제됐다.

 

이제 우리는 빼앗긴 역사를 찾아야 한다. 8회에서 본 것과 같이 내물왕 이전 역사를 폐멸시킴으로써 제국 일본은 일선동조론과 창씨개명 정책을 펴며 한국인 폐멸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을 밝혔다.

그리고 9회에서는 광복 후 한국인 연구자들은 식민사학 청산을 외쳐왔으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는 일제가 만든 한국사 폐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보았다.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의 고리를 끊고, 한국인의 오리진과 한국 사회체제의 구조적 틀이 신라의 내물왕 이전 역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도 바꾸어야 한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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