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5> 신라의 작은 도둑, 큰 도둑<16> 신라의 색공지신<17> 골품제 벽 넘은 선구자[다시 쓰는 고대사]

2019. 1. 17. 16:45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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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하급관리, 목숨 건 생계형 절도 … 권력층은 대놓고 뇌물

 

<15> 신라의 작은 도둑, 큰 도둑

 

 

김유신이 살았던 재매정택.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은 김유신과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정치자금 성격의 돈을 대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 권태균]

 

 

신라는 골품 신분에 따라 특권과 의무가 달리 정해졌던 사회다. 당연히 경제력도 차이가 났다.

 

왕이 하사하는 곡식의 양에도 차별을 두었다. 제33대 성덕왕은 716년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며 벼 1만석을 주었다. 712년 성덕왕은 삼한통합 때 제 일의 공을 세웠던 김유신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내를 부인으로 삼고 매년 곡식 1000석을 주기로 했다(『삼국사기』 8). 제31대 신문왕은 삼한통합 때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회답하는 표문을 잘 지었던 강수가 죽자 그의 아내에게 벼 100석을 주었다.(『삼국사기』 46).

 

 

신라시대 유물인 굽다리 접시.성골·진골·두품 신분 등에 따라 사용하는 용기와 재질이 달랐다.

 

 

진골 중 왕실의 일원이었던 여자에게는 1만석, 진골 김유신의 처에게는 1000석, 6두품 강수의 처에게는 100석의 곡식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분에 따라 10배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5두품의 처에게는 10석, 4두품의 처에게는 1석의 벼를 준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 이하 신분의 백성(평인)들은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가졌다.

 

신라 골품사회에도 도둑질이 있었다.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던 신료들이나, 하급 관리를 막론하고 도둑질은 널리 행해졌다.

 

『삼국사기』 48, 「검군(劒君)」전은 하급 관리의 도둑질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검군은 대사(大舍)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 궁중의 일을 맡은 하급 관리)이 되었다. 왕궁의 사인은 4두품이거나 잘해야 5두품 정도 신분을 가진 자들로 경제적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관리들이다.

제26대 진평왕 49년(627) 8월 서리가 내려 흉년이 되자 이듬해 봄과 여름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먹고 살았다. 그때 궁중의 모든 사인들이 모의하여 창예창(唱?倉)의 곡식을 도둑질하여 나눠가졌는데 검군 홀로 이를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그에게 “여러 사람이 다 받는데 그대만 홀로 물리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적은 것이 문제라면 다시 더 주겠다”고 했다. 검군이 웃으며 “나는 근랑(近郞)의 낭도로 이름을 올리고 풍류도를 수행하고 있다. 의리에 어긋나면 천금의 이익이 있더라도 마을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근랑은 화랑이 된 대일(大日) 이찬의 아들이다.

 

사인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누설될 것을 우려했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오늘 이후에는 다시 서로 만나볼 수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묻자 검군이 경위를 간략히 설명해줬다.

 

“어찌 담당 관리에게 말하지 않느냐.”(근랑)

“제가 죽음이 두려워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검군)

“그러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근랑)

“그들이 잘못됐고 내가 옳은데 오히려 제가 도망한다면 장부가 아닙니다.”(검군)

 

여러 사인들이 술자리를 베풀고 사과하는 체하면서 검군을 불렀다. 그리고는 검군의 음식에 은밀히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그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검군의 사건에 나타난 사인들의 도둑질은 흉년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생계형’으로 보인다. 궁의 창고 곡식을 턴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범죄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검군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세워진 비. 성을 축조한지 3년 이내에 파괴되면 성을 쌓은 사람들이 벌을 받는다는 서약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다. 신라의 율령에는 도둑질에 대한 처벌 내용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도둑질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이나 부여에서는 도둑질을 엄벌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칠 경우 남자는 데려다 그 집의 노(奴·종)로 삼고, 여자는 비(婢·여자 종)로 삼는다. 다만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는 1인 당 50만 전(錢)을 내야한다(『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8하).“ 널리 알려진 (낙랑)조선의 8조 금법(禁法) 중 한 조목이다.

 

“절도한 자는 12배로 갚아야 한다(『삼국지』 30, 「부여(夫餘)」 전).”

이는 부여의 법률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신라에서도 도둑질은 엄벌에 처했을 것이다. 이러한 도둑질은 신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조선 때도 행해졌다.

 

신라에서는 사인과 같은 하급관리뿐 아니라 조정에서 충분한 보수를 받던 진골 신료들도 도둑질을 한 예가 있다. 17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염장공(廉長公·586~648)은 김춘추를 왕으로 세우려 활동한 결사인 칠성우 중 한 사람이었다(『화랑세기』 「17세 염장공」 조). 그는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부제(副弟)로 6년간 있으며 그 집안일을 해주고 재물을 취하여 사용했다. 염장공은 15세 풍월주 유신공의 부제였던 춘추공(김춘추)을 자신의 부제로 삼았다가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김춘추는 유신공의 뒤를 이어 16세 풍월주가 됐어야 하는데 두 번 양보하여 18세 풍월주가 됐다. 염장공은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631년 5월 일어났던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염장공은 조부(調府·호별로 토산물을 거두던 관청)에 들어가 령(令)이 되어 유신공과 춘추공 양공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염장공은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정치자금을 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 35금입택 중 하나)이라 했다. 금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염장공은 미생공(10세 풍월주를 지낸 사람으로 조부의 령이 되어 치부함)과 비교되기도 했다. 미생공은 극도로 사치를 했으나 염장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했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컸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염장공이 국가에 들어오는 조세를 빼돌려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데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세 풍월주를 지낸 흠순공(欽純公·유신공의 동생)은 재물에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했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나의 아이를 네가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고 했다. 흠순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했다.

 

흠순공의 아내 보단(菩丹)은 “염형(廉兄, 염장공)은 색(色)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家風)을 손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고 했다.

흠순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 만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보단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염장공의 딸들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흠순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염장공은 정처인 보단과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보단의 언니 이단(利丹)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셋째 아들 반굴공(盤屈公)만 염장공의 딸이 아니라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영윤(令胤)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흠순공은 여러 차례 큰 전쟁을 치렀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士卒)을 사랑하기를 적자(赤子, 어린아이)같이 했다. 조정에서는 흠순공을 삼보(三寶)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흠순공의 아들 중 세 명이 집사부(執事部)의 장인 중시(中侍)가 되었다. 흠순공의 예를 보면 염장공이 도둑질한 재물을 받았어도 그 아들들의 정치적 출세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염장공이나 흠순공은 잘만 살았다.

 

역사상 관리들에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난받지 않는 불법적 수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그러한 수익은 뇌물이라 할 수도 있으나, 선물이거나 감사의 표시라 할 수도 있는 것들로 이 경우 ‘양심적 수뢰(honest graft)’ 정도로 부를 수도 있겠다(Gerhard E. Lenski, 『Power and Privilege』, 1966).

 

그런데 현대 사회의 뇌물수수는 역사상 관리들의 뇌물수수나 도둑질과는 그 결과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원전비리 사건이 터졌다. 원전 핵심 부품인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불량 케이블 180억원 어치를 납품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따르면 원전 가동 중단·연기 등으로 인한 국가·사회적 손실은 납품액의 677배에 달하는 12조 2000억 원이나 됐다.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원전제어 케이블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일본의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처럼 대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설비·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원전 관련업체들이 정권과 한국전력·한수원 고위층·간부들에게 금품을 준 권력형 비리 사건이 함께 적발됐다. 뇌물 액수를 1억8000만 원으로 계산하면 6만7700배의 국가·사회적 손실을 발생케 하는 셈이 된다.

 

한국 사회의 도처에서 작동하고 있는 뇌물 경제를 단숨에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리 헌법 제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 사회 공직자의 뇌물수수를 역사적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나마 이 시대의 검군이 도처에 있어 다행스럽다.

 

 

 

 

 

[다시 쓰는 고대사]

진흥·진지·진평왕에게 색공한 미실, 30년 간 천하 호령

 

<16> 신라의 색공지신

 

 

신라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을 뜻하는 색공(色供)은 에로티시즘이 아닌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신라의 생활 풍습이 담겨 있는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 [사진 권태균]

 

 

신라의 미실(美室)은 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이었다.

 

『화랑세기』 11세 ‘하종’ 조는 미실을 가리켜 “용모가 절묘하여 풍후함은 옥진(玉珍·외할머니)을 닮았고, 환하게 밝음은 벽화(할머니의 어머니)를 닮았고, 빼어나게 아름다움은 오도(외할머니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신묘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수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은 “이 아이(미실)는 우리의 도(道)를 일으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미도(媚道, 교태를 부리는 방법)와 가무(歌舞)를 가르쳤다.

이는 색공(色供)을 위한 교육이었다. 색공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을 뜻한다.

 

 

 

 

그렇게 색공 교육을 받은 미실은 한 평생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제24대 진흥왕과 그의 큰아들이었던 동륜(銅輪)태자,진흥왕의 작은 아들로 동륜의 동생인 제25대 진지왕(금륜), 동륜태자의 아들인 제26대 진평왕(백정) 등 3세대에 걸친 성골(왕)에게 색공을 했다. 미실의 생존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546년에서 550년 사이에 태어나서 619년에서 622년 사이 언제인가 죽었다고 추측된다(이종욱, 『색공지신 미실』, 2005).

 

미실이 처음 관계를 가졌고 평생 남편으로 삼았던 사람은 6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 세종(世宗) 한 사람뿐이다. 신국(神國), 즉 신라의 도에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제23대 법흥왕과 보도왕후 김씨의 딸이며, 법흥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혼인해 진흥왕을 낳았음)는 진골정통(眞骨正統)이었기에 대원신통(大元神統)인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신라의 대표적인 두 인통(姻統)이다. 인통은 왕비(왕후 또는 황후)를 배출하던 계통이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계승을 거울에 비춘 것과 같은 원리로 인통은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모계계승으로 이어졌다. 인통에는 왕비가 되지 못한 여자들도 모두 속하였다.

 

 

 

 

다시 미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종은 미실을 너무 그리워하여 궁으로 불러들였다. 미실이 세종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통했다.

그 때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思道)왕후를 폐하고, 자기의 딸이자 세종의 누나인 숙명을 왕비로 삼으려 했다. 그러한 사정을 미실이 이모인 사도왕후에게 알렸고, 그 사실이 알려져 지소태후가 노했다. 이에 지소태후는 미실을 출궁시켰다(『화랑세기』 6세 세종).

 

출궁한 미실은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과 서로 사랑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사다함이 561년 9월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갈 때 미실은 향가인 ‘풍랑가(風浪歌)’를 지어 위로해 보냈다. 그런데 세종이 너무 괴로워하자 두려워 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입궁시켜 세종의 부인으로 삼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픔을 이야기했다. 사다함이 친구인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하여 죽게 되었을 때 6세 풍월주로 세종을 추천했다.

 

풍월주가 된 세종의 부인 미실은 이모인 사도왕후의 명으로 진흥왕의 큰아들인 동륜에게 색공을 하여 아이를 임신했다(『화랑세기』 6세 세종). 동륜이 언젠가 왕위계승을 하면 미실을 왕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원신통의 우두머리 사도의 지휘 하에 미실의 색공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 무렵 미실은 진흥왕을 사모하여 애를 태웠다고 한다. 그러한 마음이 진흥왕에게 전달되었다. 진흥왕은 사도왕후에게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妾, 사도왕후에 달린 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라고 물었다. 사도왕후는 이에 미실을 진흥왕에게 추천했다. 진흥왕이 미실과 한번 교합한 후에는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미실은 음사(陰事)를 잘하여 총애가 날로 중하여 황후궁 전주(殿主, 황후와 같은 지위)로 발탁되었다. 진흥왕이 조정에 나가 정사(政事)를 볼 때 미실이 옆에서 모시며 문서를 읽고 옳고 그름을 판결했다. 이로써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대원신통을 뜻함)으로 돌아갔다고 한다(『화랑세기』 11세 하종).

옥진은 미실의 외할머니였다. 옥진-묘도·사도·흥도-미실 3대로 이어지는 대원신통은 탁월한 색공지신(色供之臣,색공을 하는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576년 진흥왕이 죽었을 때 사도와 미실, 그리고 미실의 동생 미생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일찍 죽은 동륜의 동생 금륜태자(진지왕)와 미실이 통하게 만들었다. 금륜이 왕위에 오르면 미실을 왕비로 삼기로 약속케 하고 금륜을 즉위시켰다(『화랑세기』 11세 하종). 그런데 왕위에 오른 금륜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태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폐위시켰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

 

579년 사도태후와 미실은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 때 진평왕은 13살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는 보명과 미실에게 색을 가르치도록 했다. 미실은 골품이 낮다고 핑계를 대며 양보했으나, 보명은 임신 3개월이라 미실이 먼저 색공을 했다.

색을 알게 된 진평왕은 스스로 보명궁에 찾아가 보명과도 상통했다. 진평왕은 즉위 1~2개월만에 미실을 우후(右后)로, 보명을 좌후(左后)로 임명했다(『화랑세기』 22세 양도공). 이로써 진평왕 대에도 색공을 한 미실은 그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미실은 진흥왕의 총애를 믿고 방탕해져 7세 풍월주 설원랑은 물론이고 자신의 동생인 미생과도 사통(私通)했다(『화랑세기』 10세 세종). 미실은 여러 왕이나 태자에게 색공을 했고, 설원랑과도 사통을 했기에 자녀들이 많았다. 미실은 왕들에게 색공을 하여 30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고 일족이 부귀를 누린 것이 사실이다(『화랑세기』 10세 미생랑). 여기서 신라 사람들의 색공은 에로티시즘(eroticism)의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행위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연유로 미실과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를 옳게 알고 인통과 색공을 이해하면 미실이야말로 신국의 도를 치열하게 산 인물임을 알 것이다. 『화랑세기』 6세 세종 조에는 인통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제13대)미추대왕(262~284)이 광명(光明)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했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조문국의 왕녀인 운모(雲帽) 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 진골(眞骨)이 아니다.”

 

이를 보면 인통은 왕비를 배출하는 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옥모부인이 낳은 딸들, 그리고 그들의 딸들로 이어지는 진골정통의 여자들이 대를 이어 왕비를 배출했다.

 

옥모의 딸 홍모(골정 갈문왕의 부인), 홍모의 딸 아이혜(제11대 조분왕의 왕비), 아이혜의 딸 광명(미추왕의 왕비), 광명의 딸 내류, 내류의 딸 아노(제19대 눌지왕의 왕비), 아노의 딸 조생(제22대 지증왕의 아버지 습보갈문왕의 부인), 조생의 딸 선혜(제21대 소지왕의 왕비), 선혜의 딸 보도(법흥왕의 왕비), 보도의 딸 지소로 이어지는 진골정통의 계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

 

미실의 인통인 대원신통은 눌지왕(417~ 458)의 동생 복호의 첩인 보미(?美)를 시조로 하였다. 라이벌이었던 진골정통은 미추대왕 대(262~284)에 옥모부인을 시조로 하였다. 대원신통이 진골정통보다 늦게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왕후와 진지왕의 왕비 지도왕후는 모두 대원신통이었다. 진평왕의 왕비 마야왕후는 진골정통이었다. 여기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왕비나 태자비를 배출하기 위해 경쟁했던 사정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왕의 후궁을 배출하는 경쟁도 했다. 이 경쟁에서 이긴 인통은 일족들이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신라 인통은 색공(色供)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색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통이 있어야 할 수 있던 것이었다. 『화랑세기』 10세 ‘미생랑’ 조에 묘도(妙道)가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으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했다”라 나오고 있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묘도는 사도왕후의 언니로 대원신통이었고, 색공의 대표적 인물인 미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미실이 색공을 하던 시기에도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왕비나 왕비의 잉첩을 배출하기 위한 색공 경쟁을 벌였다. 당시 진골정통은 지소태후를 종(宗, 우두머리)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사도왕후를 우두머리로 삼았다(『화랑세기』 11세 하종). 사도왕후는 대원신통의 번성을 위해 조카인 미실로 하여금 왕들과 태자에게 색공을 하도록 적극 지원했다.

 

 

 

 

[다시 쓰는 고대사]

가야 피 섞인 문노, 진지왕 폐위 공 세워 진골 ‘득골품’

 

<17> 골품제 벽 넘은 선구자

 

 

신라의 대표적인 용장(勇將)인 문노는 가야국 외손 출신으로 골품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문노는 화랑으로서 삼한 통합을 이룬 신라 용사들의 사기를 일으키고,진지왕을 폐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진골이 됐다. 사진은 문노의 외가 조상들이 묻힌 경북 고령 지산동의 가야 고분군. [사진 권태균]

 

 

색공(色供·신분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의 화신인 미실(美室)은 신라 여성 중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미실에 못지 않은 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대표적인 신라 남성으로는 문노(文弩·538~606)를 들 수 있다. 8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문노는 ‘사기(士氣·용사의 기풍)의 종주(宗主·맹주)’로 추앙받았다. 김유신은 삼한을 통합한 뒤 문노를 용맹한 전사의 모범으로 삼고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에 추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신라에서는 또 그를 기려 신궁(神宮·죽은 김씨 왕들의 궁)의 선단(仙壇·화랑들을 모신 제단)에서 큰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화랑세기』 8세 문노 조에 따르면 문노는 579년 미실의 총애를 받아 풍월주가 됐다. 그는 용맹했고 문장에도 능했다.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서 명성을 크게 떨쳤고, 낭도들은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삼한통일 대업이 그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하지만 문노는 골품사회 신라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에는 부족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야의 외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文華)공주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야국왕(野國王)의 사위가 되었던 가야의 찬실과 신라의 양화공주 사이에 낳은 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야국왕의 공녀(貢女·조공으로 바친 여자)라는 설이다. 야국은 왜(倭)국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문화공주는 왜국에서 가야에 조공 바쳤던 공주이고, 그 공주가 신라인 호조공의 첩이 되었던 것을 뜻한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와 가야의 관계를 살펴보자. 신라 법흥왕(재위기간 514~540)은 가야를 남북으로 나누고 이뇌를 북국왕(北國王·고령의 대가야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청명을 남국왕(南國王)으로 봉했다. 북국왕의 숙부인 찬실이 이뇌왕을 내쫓고 왕이 되자 신라에서는 호조공을 사신으로 보내 책망토록 했다. 그 때 호조공은 북국의 문화공주를 첩으로 들였다. 호조공의 아들 비조부는 아버지의 첩인 문화공주와 잠통(潛通)하여 문노를 낳았다. 문화공주는 신라의 골품이 없었기에 문노는 골품 없이 태어난 셈이다.

 

전공 세웠지만 신분 달라 출세길 막혀

 

문노가 이런 출생 배경에도 불구, 신라에서 추앙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화랑도 활동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문노는 가야파의 한 무리를 모아 화랑이 되었다. 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은 문노를 자신의 후계자인 사다함(斯多含·5세 풍월주)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게 했다. 사다함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옥진궁주의 조카다.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랑은 “천자에게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仙徒)의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있는 사람을 한가지로 규제할 수 없습니다. 문노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일정한 소속이 없는 부대)입니다” 라고 답했다.

 

세종(世宗)은 6세 풍월주가 되었을 때 친히 문노의 집을 찾아가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하건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문노는 세종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를 섬겼다고 한다.

 

문노는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554년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을 따라 백제를 쳤고, 555년에는 북한(北漢)으로 나아가 고구려를 패퇴시켰으며 557년에는 북가야를 물리쳤다.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문노는 어머니인 문화공주의 출생의 한계 때문에 출세하지 못했다. 그는 아랫사람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대저 상벌이란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라며 달랬다.

 

6세 풍월주 세종이 진흥왕에게 청하여 급찬(級?)의 자리를 내리도록 했으나 문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 진흥왕의 왕후 사도가 문노의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자기편으로 삼았다. 세종의 부인인 미실 궁주도 그를 불러서 봉사로 삼으려 했으나 문노는 승낙하지 않았다.

 

미실이 탐낸 인재 … 처음엔 발탁 제안 거절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자 이번엔 왕후 지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의 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문노에게 급찬이나 일길찬은 부족했던 것이다. 급찬이나 일길찬의 관등으로는 골품을 얻어 진골이 될 수 없었다.

 

문노의 일파는 7세 풍월주 설원랑에 불복하고 자립하여 일문을 세워 낭도들이 나뉘게 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正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했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여 서로 상하를 다투었다. 진지왕이 즉위했을 때 지도왕후의 아버지 기오공은 문노와 종형제 간이었기에 지도왕후는 문노를 따랐다. 576년 10월 지도왕후는 진지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풍월주와 다른 계통)으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고 협기가 많았기에 호국선(護國仙)이라 했고, 설원랑의 도는 향가를 잘하고 청유를 즐겨 운상인(雲上人)이라 했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민간 또는 재야)의 사람들은 문도(文徒)를 많이 따랐다.

 

문노는 부인을 잘 맞아 들였다. 그는 국선이 되었을 때 윤궁(允宮)을 받들어 선모(仙母·국선의 부인)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로 진골이었다. 그리고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의 권세는 법흥왕이 거느렸던 소위 칠총신과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문노는 그 어머니 문화공주로 인하여 진골이 될 수 없었다. 윤궁이 문노에게 몸을 허락할 때 “내가 군(君·문노)을 그리워한 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라고 말했다. 문노는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라고 했다.

 

 

포석(砲石)명 기와.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가 삼국시대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된다. 포석사에는 ‘사기(士氣)의 표상’인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휘하의 미천한 낭도들도 속속 출세

 

문노는 윤궁의 도움으로 골품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평소 설화랑, 그리고 설화랑과 사통하던 미실과는 잘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권문(權門·미실)에 거스른다면 뱃속의 아이는 어떤 처지에 있게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문노는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면 의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선모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이에 윤궁이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 사심)에서 나오니 세 가지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정(大情)은 의(義)가 되고 대사(大私)는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라며 설득을 했고, 문노가 깨달아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화랑을 받아들여 주었다.

 

문노가 골품의 장벽을 넘어 진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579년 진지왕의 폐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실을 왕비로 삼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공(진평왕)을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거사세력은 진지왕을 폐위시키는데 문노의 낭도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세종과 문노의 낭도를 하나로 합치고 미실을 원화(源花·화랑 전체의 여자 우두머리로 풍월주를 대신함)로 삼고, 미실의 남편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으로 삼아 목표를 달성했다. 이로써 문노의 낭도는 미천한 사람으로서 높은 관직에 발탁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노의 낭도는 출세하는 문으로 여겼기에 문노를 신(神)과 같이 받들었다.

 

문노는 진지왕을 폐위하는데 가담한 공으로 8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윤궁의 내조가 컸다고 하겠다. 이 때 문노는 아찬(阿?·6등급)의 관등을 갖게 되어 비로소 골품을 얻을 수 있었다. 윤궁은 기뻐하며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했다. 문노의 득골품(得骨品)은 그가 윤궁과 동골(同骨), 즉 같은 골인 진골(眞骨)이 된 것을 뜻한다. 문노가 진골이 되기 전에는 윤궁의 신분이 높아 문노가 윤궁의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문노가 득골품을 한 결과 미실이 진평왕에게 청했고, 진평왕이 명령을 내려 윤궁을 문노의 정처로 삼게 했다. 진평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가 길례(吉禮)를 행했다.

 

모범 부부의 상징이 된 문노와 윤궁

 

이때 윤궁은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라고 했다. 윤궁은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들에게 주었고 문노가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했다. 문노는 풍월주로서 유화(遊花·화랑도에 머물던 여자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문노는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모두 윤궁이 문노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로서는 문노와 같은 이를, 처로서는 윤궁낭주와 같은 이를 택해야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2년 정월 조에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화랑세기』를 보면 금강은 문노의 아들인데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문노의 종족(宗族)이 당당하게 진골이 된 것이다. 높디높은 신분적인 장벽을 뛰어 넘은 문노를 통해 신라 골품제가 그렇게 막혀만 있던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본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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