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7. 16:4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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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김유신은 가야의 우두머리이자 신라의 영웅”
<18> 삼한 통일의 씨앗
김유신 장군묘.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는 유신공의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나온다. 현재 김유신 장군 묘에 대한 진위논쟁이 있다. [중앙포토]
김유신(595~673)의 삶에 대해 역사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고려시대의 평이 있다. 『삼국사기』 43, 김유신(하) 열전에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하여 서로 막힘이 없었으며, 나라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계획은 시행되었고 그의 말을 들어주어, 그의 말이 쓰이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게 했으니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유신은 그의 뜻대로 일을 행하여 상국(당나라)과 계책을 같이 하여 삼토(三土·삼국의 땅)를 통합해 한 집안을 만들고 공명으로써 한평생을 마칠 수 있었다”라고 나온다. 한국 역사상 지금까지 이 같은 평을 들을 수 있는 신하가 유신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현대 한국사에서 이런 인물을 한 명이라도 배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신라 사람들은 김유신을 어떻게 평했을까? 신라인 김대문은 유신에 대해 “가야지종(加耶之宗·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지웅(神國之雄·신라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해 우리 동방을 바로 잡으니 혁혁한 공 세워 이름 남기니 해와 달과 더불어 견준다”고 평가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 공조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신의 삼한통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가야의 우두머리와 신국의 영웅에 대해 살펴보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이 증조부
유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금관가야(또는 금관국,가락국,본가야)의 마지막 왕 구충(구해,구형)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이 나온다<표 참조>. 6대 좌지왕(407~421), 7대 취희왕(421~451), 9대 겸지왕(492~521), 10대 구충왕(구해, 구형, 521~532) 등 5대에 걸쳐 신라 여자를 왕비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신라는 금관국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가야에 대해 정치적 간섭을 했고, 금관국은 점차 신라에 부용국으로 변해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노종·무덕·무력(武力)과 더불어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므로, 왕이 예로써 그들을 대우해 상등(上等)의 위를 주었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도록 했다. 이 때 무력의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구해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진골 신분으로 대우 받았다. 무력은 진흥왕과 사도왕후(대원신통)의 딸 아양공주(대원신통)를 아내로 맞아 서현(대원신통)을 낳았다. 서현은 만명과 야합하여 임신을 했는데, 만명의 어머니인 만호태후(지소태후의 딸로 진골 정통)는 서현의 어머니 아양공주 가문이 진골정통이 아닌 대원신통류였기에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현과 만명은 만노군으로 도망하여 유신을 낳았다.
김유신 장군 초상. [사진 권태균]
화랑도 활동하며 영웅의 길 준비
유신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유신을 보고 싶어 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했고 직접 만나보고는 “이는 참으로 나의 손자다”라고 했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이로써 유신은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가야파들로부터도 추앙을 받게 됐다.
유신은 나이 열다섯에 14세 풍월주 호림공의 부제가 됐고(609년), 18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으며(612년), 22살에 상선(上仙, 풍월주를 지낸 후에 오르는 자리)이 됐다(616년). 유신은 화랑도 활동을 통해 영웅의 길을 걸을 준비를 했다. 화랑이 되었을 때 가야파들은 유신을 받들기 시작했다. 가야파는 8세 풍월주 문노(기오공의 딸 지도왕후와 종형제)를 모시던 화랑도들로부터 시작된 무리들이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 조에 따르면 이들이 문노의 화상을 모셨던 사실이 나오고,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난 뒤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맹주)로 삼아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행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신은 가야파라는 프리미엄을 갖고 화랑도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유신이 부제가 되었을 때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고 한다. 그 때 가야파의 낭도 한 사람이 유신에게 “가야의 정통아니냐. 자기를 사적으로 도와달라”고 했다. 유신이 “나는 만호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느냐.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공을 세워 승진하라고 했다. 후에 그 낭도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 같은 자세로 유신은 능히 각 화랑도를 화합했다고 한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유신은 가야 정통이지만, 그의 어머니 만명은 진골정통이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진골정통의 라이벌인 대원신통류 아양공주의 아들로 대원신통에 속했다. 따라서 유신은 화랑도의 3대 파벌인 삼파(三派, 진골정통·대원신통·가야파) 모두와 맥이 닿은 후손이었던 것이다. 유신은 늘 화랑도들에게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게 되면 나라에 외우(外憂, 외국 적의 침입)가 없어질 것이니, 가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유신의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한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언제부터인가 유신에 대한 신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와 전투서 공 세운 뒤 엘리트 부상
612년 유신이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을 때 날마다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했다. 이에 춘추의 작은 아버지 용춘공이 유신을 사신(私臣)으로 발탁했다. 그 때 용수공 또한 그 아들 춘추공을 유신에게 맡겼다. 유신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고 말했다. 18세가 된 유신은 춘추공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다”고 했다. 춘추공은 이에 유신의 부제가 되었고, 나중에 유신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맞았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609년 이후 화랑·풍월주·상선을 거치며 유신은 스스로 중심이 되어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결사인 칠성우를 만들고 이끌었다.
진평왕 51년(629) 8월 대장군 용춘과 서현 그리고 부장군 유신을 보내어 고구려 낭비성을 침범했는데, 고구려 군대에 맞선 신라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은 말했다. “내 듣건대 옷깃을 정돈해야 옷이 바로 되고 벼리를 쳐들어야 그물이 펴진다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 벼리와 옷깃이구나!”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뽑아 들고 적진으로 향해 바로 나아가서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돌아왔는데 들어갈 때마다 혹은 장수의 목을 베어오고 혹은 깃발을 빼앗아왔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쳐서 5천여 급을 목 베어 죽이니, 그 성이 그제야 항복했다.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진평왕 51년조) 이 전쟁을 통해 유신은 군사적 엘리트로 데뷔했다.
고려시대에도 업적 칭송 받아
유신이 춘추를 그의 부제로 삼은 612년 이후 햇수로 43년이 되는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42, 김유신(중) 열전에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을 계승자가 없어 유신이 재상인 이찬 알천과 의논해 이찬 춘추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태종무열대왕이었다고 한다. 춘추의 왕위 계승에는 유신이 만든 칠성우가 큰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 유신이 있었다. 이로써 유신의 춘추 왕 만들기 43년 프로젝트는 마침내 성공하게 된 것이다.
660년 정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던 유신은 백제를 침공할 대장군으로 태자 법민을 모시고 5만 병력을 거느리고 13만 당나라 군대를 응원하여 백제를 정복하였다.(『삼국사기』5, 태종무열왕 7년)
668년 6월 21일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를 정복하는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 때 왕은 풍병을 알았던 유신을 서울에 머물게 했다. 결국 신라군은 유신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한통합을 이뤄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조에 보면 신문왕(681~692) 때 당 고종(650~683)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열왕(시호)의 묘호를 당태종과 같은 태종(太宗)이라 한 것은 문제 삼았다. 신문왕은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서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당 황제는 그 글을 보고 그가 태자로 있었을 때 하늘에서 “삼십삼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다”고 해서 책에 기록해 둔 것이 생각나서 이를 꺼내보고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말도록 했다. 죽은 유신이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신라를 구한 것이다.
『삼국사기』 43, 김유신(하) 열전에 따르면 42대 흥덕대왕이 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했다고 나온다.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는 54대 경명왕 때 유신을 추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사람들은 유신을 대왕으로 추봉해 기억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를 기억한다. 고려시대에는 “향인들이 유신을 칭송하여 지금까지 잊지 않는다. 사대부들이 그를 알고 있는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꼴 베는 아이와 소 먹이는 아이들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 된 품이 반드시 보통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고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43, 열전 3, 김유신 하)
대한민국에서도 1977년 경주에 통일전을 세워 태종무열대왕·문무대왕·김유신(흥무대왕)의 영정을 모셔 삼한통합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다시 쓰는 고대사]
통일로 ‘대박’ 일군 신라, 평화 만끽하며 권력다툼 몰두
<19> 신라 멸망의 서곡
문무왕의 수중릉. 신라 중대의 왕들은 양백성(養百姓·백성을 보살핌)과 무사이(撫四夷·외적을 진압함)를 국가 목표로 삼한통합을 완성했다. [사진 권태균]
신라의 역사는 상·중·하대(代)로 구분된다. 시조 혁거세~제28대 진덕여왕이 상대, 제29대 무열왕~제36대 혜공왕이 중대, 제37대 선덕왕~제56대 경순왕을 하대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2, 경순왕 9년(935) 조)
중대에는 김춘추의 종족(宗族)들이, 하대에는 원성왕의 종족들이 나라를 지배했다. 중대와 하대의 왕들은 색깔이 달랐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신라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했다.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은 중대의 중흥을 일궈냈다. 이 시기엔 왕위 장자계승의 원칙이 지켜졌다. 왕자가 없을 때는 왕의 동생이 계승하기도 했다. 왕위는 매우 안정됐고, 왕들은 강력한 왕권으로 왕국 전체를 비교적 잘 통치했다. 중대의 왕들은 신라를 대평화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한통합은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결국 대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합에 성공한 이후 김유신의 말대로 외우(外憂)가 없어졌기에 통일신라는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제33대 성덕왕은 733년 8월 보름에 월성의 한 언덕에서 시종들과 경치를 보며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김유신의 적손(嫡孫) 윤중을 불러오게 했다. 왕은 자신과 모든 신료들이 안평무사(安平無事)한 것은 모두 윤중의 조부 김유신의 덕택이며 이를 잊는다면 도리가 아니라 했다. 윤중을 가까운 자리에 앉히고 왕은 김유신의 무용담을 열거하며 극찬했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돌아갈 때에는 절영산의 말 한 필을 선물로 줬다.(『삼국사기』 『열전』 3, 김유신 하)
유교로 무장한 신료 양성, 중국 배우기
이 무렵 성덕왕을 포함한 신라인들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삼한통합으로 늘어난 옛 백제·고구려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게 된 신라의 왕들은 통치체제를 확대 개편하였다. 문무왕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조에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치라고 했다. 삼한통합으로 신라의 재정수입도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신문왕 7년(687) 5월에는 문무관료전을 차등 있게 지급했다. 2년 후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에게 매년 조(租·곡식)를 차등 있게 나눠주었다.
중대 신라는 중국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교리로 무장한 신료를 양성했다. 유교적 윤리와 같은 당시에 만들어진 중국화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한통합으로 신라가 평화를 이룰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대에는 무열왕·문무왕·신문왕과 같은 뛰어난 군주가 있었다. 신라 중대를 연 무열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이다.
둘째, 왕과 국가를 위해 열정을 다한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 같은 신료집단이 있었다.
셋째, 삼한통합을 이룬 신라는 새로이 늘어난 토지와 인민을 통해 인적자원과 재정확대를 기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넷째, 외국과의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종욱, 『신라의 역사 2』, 2002)
혜공왕과 왕비, 반란군에게 피살
하지만 중대의 대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혜공왕(765~780)에 이르러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을 대신해 태후는 섭정을 했다. 혜공왕은 장년이 되어서는 노래와 여색에 빠졌다. 나라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재난도 겹쳤다. 민심이 떠나자 나라는 편치 않게 되었다. 780년 2월에는 김지정이 무리를 모아 궁궐을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달 뒤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혜공왕과 왕비는 반란군에 살해됐다.(『삼국사기』 9, 혜공왕 16년)
김양상은 제37대 선덕왕이 됐다. 신라 하대(下代)가 열린 것이다. 김양상이 왕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왕정을 장악할 생각은 없었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의 조카뻘 되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의 집은 왕경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김경신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제38대 원성왕(785~798)이다. (『삼국사기』, 10, 원성왕 즉위조)
신라 하대(下代)를 연 제38대 원성왕의 능인 괘릉(사적 제26호). 원성왕의 후손들은 왕위계승 전쟁을 벌여 신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후 제52대 효공왕까지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 왕정이 붕괴되어 갔다. 신라도 멸망의 길을 치닫게 됐다.
인사정책은 난맥상을 보였다. 이 때문에 중대의 칠성우와 같은 인재들이 더 이상 등장할 수 없게 됐다. 제41대 헌덕왕 14년(822) 상대등 충공은 정사당에서 관리를 뽑은 뒤 병가를 얻어 집에 머물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때 집사부의 시랑(侍郞) 녹진이 찾아가 어렵게 충공을 만났다. 녹진은 “그동안엔 재주가 큰 사람은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고 작은 사람은 낮은 직책을 맡겨, 벼슬자리에는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정치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풍토가 달라졌다고 개탄했다. 어떤 사람이 가까운 사이면 그가 설령 인재가 아니더라도 높은 자리로 끌어 올려주고, 미워하는 사이면 재능이 있더라도 구렁창으로 빠뜨리니 나라 일이 혼탁하게 될 뿐 아니라 인사문제를 처리하는 사람도 병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충공은 녹진의 직언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이를 태자에게도 알리라 했다.
822년 ‘김헌창의 난’ 뒤 종말 향해 질주
같은 해인 822년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신라의 종말을 재촉했다. 아들을 낳지 못한 헌덕왕은 이해 정월 아우 수종을 부군(副君·왕위계승권자)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게 했다. 2월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해 복속시켰다. 김헌창은 9개 주 중 5개 주, 5개 소경 중 3개 소경을 장악했다.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의 보고를 들은 조정에서는 8명의 장군을 뽑아 왕도의 8방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 이찬 균정, 잡찬 웅원, 대아찬 우징, 각간 충공, 잡찬 윤응 등이 동원되었다.
조정에서 보낸 군대는 도동현·삼년산성·속리산·성산 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웅진에서 김헌창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김헌창은 성에 들어가 열흘을 버텼는데 성이 함락되기 전 자결했다.(『삼국사기』 10,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8명의 장군 중 여럿은 왕위계승전을 벌였다. 이들은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이었다. 제릉(제43대 희강왕), 균정(제45대 신무왕의 아버지), 우징(제45대 신무왕), 충공(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등이 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창의 난은 신라 멸망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원성왕 후손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이들에게는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태자(太子) 제도는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군사적 힘이 중요했을 뿐이다. 헌덕왕은 조카인 제40대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을 쫓아내고 왕좌에 오른 조선의 수양대군(세조)과 다를 바 없다. 희강왕·민애왕·신무왕은 836년 12월부터 839년 1월까지 짧은 기간에 왕위계승전을 벌였다. 희강왕은 큰아버지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민애왕은 6촌인 희강왕을 목매 죽게 하고 왕위를 빼앗았다. 우징(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 5000명을 동원한 왕위계승전에서 민애왕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했다. 중대에 삼한통합을 했던 신라의 군사력은 이제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렸다. 또한 왕권도 땅바닥에 떨어졌다.
원성왕계 종족들의 왕위계승전은 그 후 100년도 못 가 신라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오직 왕위를 장악하기 위한 권력다툼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백성도, 국가도, 그 뒤에 이어질 역사도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어떤가. 신라 하대의 왕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들과 같이 정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객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쓰는 고대사]
진성여왕 등극 후 군웅 할거 … 다시 쪼개지는 통일신라
<20·끝> 대신라의 멸망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935년 10월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그로 인해 많은 신라인들이 고려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은 9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경순왕릉(사적 제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사진가 권태균]
삼한통합으로 한때 태평성대를 누렸던 신라는 8세기 말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에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전이 이어져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었다. 멸망의 징조는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제49대 헌강왕 6년(880) 9월 9일 왕은 측근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민가는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피리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왕은 시중 민공(敏恭)에게 “내가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집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데 정말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은 “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합니다. 변경지방은 조용하고 평온합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것은 모두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는 그대들이 나를 잘 도와준 힘이지 내가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며 즐거워 했다. 헌강왕과 시중 민공의 대화는 신라의 평화와 번영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었다. 『삼국유사』 2, 『처용랑 망해사』 조에 나오는 대목이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하니 남산신이, 금강령에 행차하니 북악신이,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지신(地神)이 춤을 추었다. 『어법집』에는 그 때 산신이 춤을 추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다.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사태를 미리 알고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지신과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춤으로 경고한 것인데 국민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났다하여 술과 탐락(耽樂)함이 심했던 까닭에 나라가 마침내 망했다고 한다.
중앙 지배 벗어난 군웅들 ‘영토’ 확장
헌강왕의 동생인 제50대 정강왕(886~887)을 거쳐 여동생인 제51대 진성여왕(887~897) 때에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889년에는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賦稅)를 바치지 않아 국가의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독촉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영기를 보내 잡게 했으나 성루를 바라보고 진격하지 못했다. 그 때 그 지역에 토착해 살던 촌주(村主) 우련이 힘껏 싸우다 죽었다(『삼국사기』 11, 진성왕 3년).
이 무렵 지방에는 많은 군웅(群雄)들이 등장했다. 891년 북원의 양길과 그를 보좌하는 궁예(弓裔), 892년 완산주의 견훤(甄萱) 등이 부상했다. 896년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들이 여러 주·현의 군대를 물리치고 서울 서쪽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민가의 재물을 빼앗아갔다. 897년에는 백성들이 곤궁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이는 자신이 덕이 없기 때문이라 하고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벌어졌다(『삼국사기』 11, 진성왕 11년).
이렇게 지방의 여러 주·군·현에 도둑(실제는 신라왕의 지배를 벗어난 군웅)들이 등장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처음에 지방의 군웅들은 촌(직경 10여 ㎞ 정도 영역)이나 주·군·현의 직할지(직경 30~40㎞ 정도 영역) 안의 성에 웅거하고 그 지역을 지배하는 정도였다. 지방의 군웅들은 나름대로 정부조직을 만들어 운용하였다.
그런데 891년 10월 북원의 양길이 궁예를 보내 북원의 동쪽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했다. 그리고 892년에는 견훤이 완산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를 칭했는데, 무주(武州)의 동남쪽 군·현이 항복하여 예속했다. 효공왕 2년(898) 7월에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아 드디어 송악군에 도읍을 정했다. 899년에는 양길이 궁예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품은 것을 미워하여 국원 등 10여 성의 성주와 함께 궁예를 치려고 진격했으나 양길의 군대가 달아났다. 900년에는 국원·청주·괴양의 군웅들이 궁예에게 항복했다. 대군웅들이 등장한 것이다. 강주의 왕봉규, 명주의 김순식, 죽주의 기훤 등도 대군웅들이다. 이들은 일정 지역의 군웅들을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거느렸다.
경애왕 4년(927) 9월 견훤이 고울부(현재 영천)에 쳐들어 오자 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포석정(사적 제1호, 경주시 배동)이 포함된 포석사(鮑石祠)에는 삼한통합을 가능케 했던 ‘사기의 종주(宗主)’인 문노의 화상이 있다. 927년 11월 경애왕이 포석사에 가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기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 지방 이주 세력들 상당수 ‘봉기’
대군웅 중 견훤과 궁예는 특별했다. 왕을 칭한 것이다. 견훤은 앞서 후백제를 세웠을 때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 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안남군 개국공’이라 했다. 그런데 900년에 견훤은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의자왕의 오래된 원한을 풀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후백제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와 관직을 설치했다. 그 해 8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항복하지 않아, 금성의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고 연변 부락을 약탈해 갔다.
궁예는 901년 왕을 칭했다. 904년에는 백관을 설치했는데,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 나라이름을 마진, 연호를 무태라 했다. 패강도의 10여 군현이 궁예에게 항복했다.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같은 해 8월 궁예가 신라 변읍(邊邑)을 빼앗아가고 죽령 동북쪽에 이르렀다. 왕은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을 걱정했으나 막을 수가 없어 성주들에게 명을 내려 성벽을 굳게 지키라 했다.
후백제와 마진(태봉)이 들어선 후 대신라의 영역은 군웅, 대군웅 그리고 후백제와 태봉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국시대가 됐다.
918년 왕건이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후에는 후백제와 고려를 축으로 하는 패권쟁탈전이 벌어졌다. 927년 견훤은 신라 왕경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가기도 했다.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했다. 이듬해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대신라에 뒤이어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게 됐다.
9세기 후반 등장한 군웅들은 누구였나. 이를 밝히는 일은 한국인의 오리진을 찾는 작업이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918년 8월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을 시행한 일이 있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1등으로 삼고, 견권 등 7인을 2등으로 삼아 포상하고 제3등인 2000여 명에게도 비단과 곡식을 차등 있게 주었다(『고려사』 태조 원년(918) 8월). 이때 포상 받은 사람들은 고려의 태조 개국공신들이다. 이들 개국공신과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는 데 공을 세운 삼한공신은 진성여왕 이래 성장했던 지방의 군웅들이 많이 포함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군웅들 중에는 왕경인으로 신라 말에 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다수 있었다고 본다.
그 예들이 있다(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 2001). 고려 『김의원 묘지명』(1153년 작성)에는 “공의 이름은 의원이고, 나주 광양현 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래 신라에서 나왔는데, (신라)말 난을 피했다가 이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고려 『박경산 묘지명』(1158년 작성)에는 “박씨(朴氏)의 선조는 계림(鷄林·신라) 사람으로, 대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예이다. 신라 말에 그 후손인 찰산후 적고의 아들 직윤 대모달이 평주로 이주하여 관내 팔심호의 읍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직윤 이하의 후손은 평주 사람이 되었다.” 직윤의 아들·손자·증손자가 모두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고 나온다. 이제현(李齊賢) 묘지명(1376년 작성)에는 그의 성이 이씨로 시조가 혁거세 때의 좌명대신 이알평이라고 한다. 그의 조상 중에 고려 초의 삼한공신 금서(金書)가 있었다고 나온다. 태조 개국공신과 삼한공신들이 중앙과 지방에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사정을 알 수 있다.
신라의 DNA, 한국·한국인에게 이어져
935년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왕건은 맏딸을 경순왕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다. 왕건은 경순왕의 큰 아버지 억렴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훗날 현종의 아버지가 되었다. 왕건은 918년 6월 왕위에 오르며 궁예가 만든 품계와 관직, 그리고 군읍의 이름을 신라의 제도로 돌렸다. 고려 조정의 신료나 지방의 지배세력인 향리들도 신라인의 후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고 본다. 신라 지배세력들이 없었다면 고려 통치조직을 운영할 인적 자원을 채울 수 없었다. 『박경산 묘지명』의 내용도 그 중 한 예다. 고려 향리의 적지 않은 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태조 개국공신(918년 고려건국)과 삼한공신(고려의 전국통일)의 후손들로 지방의 군현을 본향(本鄕)으로 삼아 가문을 번성케 하였다.
왕건과 이성계의 두 차례 역성혁명은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를 정복한 것과는 달랐다. 종성과 육부성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신라인들이 고려의 향리층이 되었고, 고려의 향리층은 조선의 양반층으로 되었다. 많은 면에서 신라·신라인이라는 역사적 유산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 한국·한국인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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