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다함-16세 풍월주로 서라벌 떨쳐 [풍류인물열전]

2019. 1. 17. 16:46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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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인물열전]

사다함-16세 풍월주로 서라벌 떨쳐

 

화랑 우두머리 ‘사다함’

16세 풍월주로 서라벌 떨쳐

미실공주와 비련이 靑鳥歌(청조가)로

 

'임이여 잡은손 차마 물리라뇨'

 

 

 

 

김사다함(金斯多含)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의 풍월주(風月主)이다. 풍월주란 화랑들의 우두머리요, 화랑은 또한 낭도들의 우두머리로서 인품과 자태가 매우 빼어난 사내 중의 사내였으니 사다함이야말로 당시 서라벌에서는 으뜸가는 풍류남아였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 적진으로 돌격한 용장(勇壯)한 소년 장수였으나, 밖으로는 굳세고 안으로는 어진 마음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평소에는 낭도를 거느리고 산수간을 유람하며 학문과 무술을 닦고 향가(鄕歌)를 즐겨 부르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멋과 슬기를 갖춘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그런 까닭에 불과 12세 어린 나이에 화랑도에 입문하여 제2인자인 부제(副弟)가 되고, 16세에는 제5세 풍월주가 되어 1천여 명의 낭도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김이사부(金異斯夫)의 부장(副將)으로 가야정벌전에 출전하여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 풍월주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울린 것은 16세 때요, 짧지만 비극적 한삶의 막을 내린 것은 17세 때였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매우 짧았지만,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 두 군데나 지면을 베풀어 그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비록 김부식(金富軾)이 사대주의 역사관과 유학적 윤리관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사다함이 화랑정신에 충실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으나, 그에 앞서 사다함이 나이는 비록 어렸고 일생 또한 매우 짧았지만 그의 비범한 풍도와 아름다운 행적은 역사에 길이 전할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사다함이 이처럼 앞선 시대에 풍월주로서 화랑의 모범이 된 까닭에 그의 후배 풍월주인 김용춘(金龍春)·김유신(金庾信)·김춘추(金春秋)·김흠순(金欽純) 등이 삼한통일에 평생을 바쳤고, 후배 화랑인 김반굴(金盤屈)·김관창(金官昌) 등도 나라를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친 점도 크게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범한 風度(풍도)와 行蹟(행적)으로 역사에 남아

 

사다함과 그의 연인 미실궁주(美室宮主)의 이루지 못한 비련, 사다함과 그의 사신(私臣 : 家臣) 무관랑(武官郞)의 비극적 우정은 신라사 뿐아니라 우리나라 풍류사에도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다.

 

역사를 되짚어보라.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한 때가 13세요, 고구려의 호동왕자(好童王子)가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든 나이가 15세요, 평강공주(平崗公主)가 대궐을 뛰쳐나와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나이가 16세였다. 또한 관창이 황산벌에서 전사할 때 16세였으며,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유학을 떠날 때 불과 12세였다. 이들의 삶과 사랑도 우리나라 풍류사의 앞장을 아름답게 장식했지만,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비련 또한 당대 서라벌을 울린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고, 풍류사에 길이 남을 비상한 사연이었다.

 

하지만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사연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책에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오로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가 1천 3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덕분이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년)조의 기록을 소개한다.

 

‘9월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로 하여금 이를 치게 하고 사다함으로 부장을 삼았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전단문( 檀門, 성문)으로 들어가 흰 기를 세우니 온 성중이 두려워 어쩔 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몰아 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전공을 논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어서 왕이 좋은 논밭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왕이 굳이 권하므로 포로는 받아서 풀어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논밭은 전사들에게 나누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조는 이보다 좀더 상세한 편인데, 특히 첫머리에 ‘사다함은 진골이며 나밀왕(奈密王 : 奈勿尼師今)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다.

본래 귀한 가문의 후예다. 풍채가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곧았다. 당시 사람들이 화랑으로 받들고자 하므로 할수없이 맡았다. 무리가 1천 명이나 되었으나 그들의 인심을 다 얻었다.’ 라고 했으며, 뒷부분에 가서는 ‘사다함이 전에 무관랑과 더불어 죽음을 같이 하는 친구가 되고자 약속했는데, 무관이 병으로 죽자 매우 구슬피 울다가 7일 만에 죽으니 그때 나이 17세였다.’ 라고 끝맺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이 따른다. 무관랑이 무슨 이유로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 또 비록 함께 죽기를 약속했다고는 하나 앞날이 구만리같은 사다함이 어찌하여 그처럼 단순하고 어리석게 따라 죽었는지 전혀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나타나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화랑세기’ 출현으로 드러난 비밀들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사다함의 가계와 출생의 비밀, 짧지만 극적이었던 일생을 재조명해보기 전에 김대문과 ‘화랑세기’에 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대문에 관해 이렇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김대문은 본래 신라의 귀족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년)에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그는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 인종(仁宗) 23년(1145년)까지도 김대문의 저서들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화랑세기’는 그 뒤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취를 드러내지 않다가 1989년 2월 32쪽 분량의 발췌본이 공개된데 이어 1995년 4월에는 162쪽 분량의 필사본이 공개됐다.

이 필사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박창화씨가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1965년 세상을 떠났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자 곧 치열한 진위논쟁이 벌어졌다.

양측의 주장은 지금도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최근에는 진본설 쪽으로 무게가 더욱 쏠리는 추세다. 그러나 이 글은 전문적 연구논문도 아니고, 지면관계상 진위논쟁을 상세히 소개할 수도 없다.

다만 필자도 이 필사본을 진본으로 보고 있으며, 본편은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역주하고 소나무출판사에서 1999년에 펴낸 ‘화랑세기’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진흥왕 원년(540년)부터 신문왕(神文王) 원년(681년)까지 존재했던 초대 풍월주 위화랑(魏花郞)부터 32세 풍월주 신공(信功)에 이르는 풍월주 32명의 전기와 가계, 그리고 화랑의 조직과 파벌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남자 238명, 여자 180명 등 418명에 이른다.

 

‘화랑세기’ 서문에는 풍월주를 설치한 내력이 나오는데, 이 내용 일부는 ‘삼국사기’에도 두 군데나 나온다. 첫 번째는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조의 화랑 설치에 관한 기록으로 그 전문은 이렇다.

 

‘봄에 비로소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를 모아 놀게 하고, 그 행실을 본 뒤에 뽑아서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명을 선발했다. 한 명은 남모(南毛)요, 또 한 명은 준정(俊貞)인데 모인 무리가 300여 명이었다. 그러나 두 여인이 미모를 다투다가 서로 질투하게 되어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권해 취하자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다. 그래서 준정은 사형당하고 무리는 화목을 잃은 채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다시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를 뽑아 곱게 꾸며서 화랑이라고 부르고 받들게 했는데 무리가 구름처럼 모였다. 그들은 도덕과 의리로써 서로 연마했고, 혹은 가무로써 서로 즐겼으며, 산수에서 노닐고 즐겨 멀리 가보지 않은 데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사람됨의 올바름과 간사함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뽑아서 조정에 천거했던 것이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보필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는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교를 설시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나오거니와, 실로 삼교(三敎 : 유·불·선)를 포함한 것으로 많은 백성을 접촉해 교화시켰다. 또한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공자(孔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老子)가 주장한 요지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받드는 것은 석가(釋迦)의 교화다’ 라고 했으며,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들의 자제들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했는데 국인들이 모두 이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국력팽창기 眞興王(진흥왕) 때 花郞(화랑) 설치

 

두 번째는 열전 김흠운(金歆運) 편의 뒷부분인데, 그 내용은 앞에 소개한 기록과 같다. 그러나 그 시기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으로 나오지만, ‘화랑세기’를 비롯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는 진흥왕 원년의 일로 나온다.

진흥왕은 7세에 즉위했으므로 재위 10년간은 모후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기였고, ‘화랑세기’ 서문에도 원화폐지와 풍월주설치는 지소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덧붙인다. 신라는 법흥대왕 23년(536년)에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세운 이후 진흥대왕 때에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 진평대왕(眞平大王) 6년(584년)에 건복(建福), 선덕여제(善德女帝) 3년(634년)에 인평(仁平), 진덕여제(眞德女帝) 원년에 태화(太和) 등으로 연호를 바꾼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고, ‘화랑세기’에도 임금을 대왕·대제 등으로 불렀다. 또 ‘삼국유사’에도 제(帝)라는 칭호와 더불어 임금의 죽음을 훙(薨)이 아니라 붕(崩)으로 썼다.

이는 신라·고구려·백제가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제국의 제후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당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따라서 필자도 신라의 임금을 대왕·대제 등으로 표기한다.

 

사다함의 아버지는 구리지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구리지(仇梨知), ‘화랑세기’에는 구리지(仇利知)로 한 글자가 틀리지만 우리말을 한문으로 표기한데 따른 차이이므로 그런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정작 의문은 어찌하여 그 이름이 향기롭지 못하고 하필이면 구린내를 연상시키는 구리지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랑세기’는 그 사연을 이렇게 시원하게 일러주고 있다.

구리지의 아버지 비량(比梁)과 어머니 벽화(碧花)가 정말로 구린내가 진동하는 뒷간에서 관계를 하여 그가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물왕의 후손이며 진골인 고귀한 신분의 비량과 당시 임금인 법흥대왕의 부인인 벽화후는 어떻게 해서 뒷간에서 사통(私通)하게 되었을까.

‘화랑세기’ 사다함조는 그 사정을 이렇게 전해준다.

 

‘5세 풍월주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이 벽화후를 그리워해 늘 후(后)의 뒷간으로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해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이름을 구리지라 했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벽화후와 같고 담력은 비량공과 같았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事)를 좋아했다. 금진낭주(金珍娘主)와 통해 토함(兎含)·새달(塞達)·사다함을 낳았다. 새달은 (제4세 풍월주) 이화공(二花公)의 첩이다…’

 

뒷간에서 관계해 태어난 아버지 구리지

 

사다함이 내물왕의 7세손이라 했으니 비량은 내물왕의 5세손이요, 따라서 골품(骨品)은 진골이지만 같은 내물왕의 5세손으로 성골인 법흥대왕과는 같은 항렬인 셈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법흥대왕과 진흥대왕 재위시의 거물로서 부국강병을 통한 신라 급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 거칠부(居柒夫)는 5세손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상이 같은 황족이요 총신이라 하더라도 법흥대왕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부인과 간통한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기록에는 비량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보통 사람이라면 제정신이 박혔다고 보겠는가.

 

그런데, ‘화랑세기’ 제1세 풍월주 위화랑조에 그 해답이 나오니, 그것은 바로 비량이 법흥대왕과 더불어 비처왕(毗處王 : 炤知王)의 이른바 ‘마복칠성(摩腹七星)’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신라에는 어느 나라 어떤 민족한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마복자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마복자란 글자대로 해석하면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들’이란 뜻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부하 중에서 임신한 아내가 있을 경우 그 임신한 아내를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잠자리를 같이하면서 장차 태어날 아이와 일종의 양부자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는 집단의 결속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 마복자제도는 황실에도 있었고 화랑들에게도 있었으며,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고, 나아가 출세의 발판으로 삼기도 했으니, 사대주의 유학자 김부식이 이 불온서적 ‘화랑세기’를 보고 펄펄뛰며 분개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든 ‘화랑세기’ 위화랑조 첫머리에 따르면 비처왕에게는 나중 법흥대왕이 되는 김원종(金原宗)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다함의 할아비 비량, 미실궁주의 할아비 아시(阿時), 거칠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태종(苔宗), 그리고 수지(守知)·융취( 吹)·위화랑 등 7명의 마복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한 관계가 있었기에 법흥대왕이 벽화와 비량이 뒷간에서 사통하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던 것이다. 구리지는 그렇게 태어났는데, 자라서 화랑이 되고 금진낭주와 통정하여 토함·새달·사다함 3남매를 낳았다. 금진은 위화랑과 오도부인(吾道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었다.

본래 금진은 언니 옥진(玉珍)과 더불어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는데, 옥진은 비대왕자(比臺王子)를 낳았지만 금진은 소생이 없었다. 법흥대왕이 죽자 황궁에서 물러나 홀로 살고 있을 때에 구리지의 구애를 받아들여 사다함 3남매를 낳았던 것이다.

 

어머니 金珍(김진)의 好色이 비극의 씨앗

 

사다함이 태어난 것은 진흥왕 7년(546년)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가야정벌전에 출전한 진흥왕 23년(562년)에 16세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역산한 것이다. 그런데 사다함은 겨우 3~ 4세에 아버지를 잃는다. 구리지가 진흥왕 9년(548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독산성싸움에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전했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린 사다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건이 또 벌어진다. 평소 색사를 매우 밝히던 어머니 금진이 아버지가 출전할 때마다 아버지의 사신인 설성(薛成)과 밀통하더니 아버지가 전사하자 공공연히 동거하며 그의 아들 설원(薛原)을 낳았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설성이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용양신이 단순한 신하인지, 남색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진흥왕 10년(549년)에 태어난 설성과 금진의 아들 설원, 사다함과 아비가 다른 이 동복아우 설원은 뒷날 설화랑(薛花郞)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다함이 죽은 뒤 그의 연인이었던 미실궁주의 정부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후원에 힘입어 제7세 풍월주가 된다.

 

사다함 형제는 한동안 어머니 금진을 따라 황궁에 들어가 자랐다. 진흥제의 맏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가 태어나자 사도황후(思道皇后)의 명에 따라 금진이 유모로 입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금진은 대궐에서 쫓겨나고 만다. 사도황후가 출산후 3개월간 진흥제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기회를 틈타 대왕을 유혹하여 임신을 했고, 그로 인해 노발대발한 사도황후가 내쫓아버린 것이었다. 궁에서 쫓겨난 뒤에도 어머니 금진의 색광증은 나을 줄 몰랐다.

 

그렇게 자라난 사다함이 어느새 나이 12세가 되어 문노(文弩)의 제자가 되었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조에 따르면 그는 비조부(比助夫)와 가야국 문화공주(文華公主)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른바 가야파 화랑도의 대부였다. 사다함이 당대 으뜸가는 검객이며 협객인 문노의 제자가 되어 검술을 배우게 된 것은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앞서 사다함의 형 토함은 이미 화랑이 되어 이화랑의 부제로 있었다. 부제란 풍월주의 보좌역인 동시에 후계자였으니 화랑도의 제2인자를 가리킨다. 하지만 토함은 아우 사다함에게 그 직위를 물려주고 이화랑과 더불어 동륜태자의 경호에 전념했다. 그런 까닭에 사다함이 이화랑에 이어 5세 풍월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문노가 자신의 낭도 500명을 거느리고 사다함의 휘하에 들어갔고, 무관랑이 휘하에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관랑 역시 인망이 있어 거느리는 낭도가 많았으며 나이도 사다함보다 몇 살 위였다. 사다함이 나이는 어리나 풍도가 비범하다는 말을 듣고 어느날 무관이 사다함을 찾아와 만나보니 과연 명성과 다름없이 인품과 자태가 빼어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해서 무관은 자신의 낭도를 이끌고 사다함의 휘하에 들어가 사신(私臣)이 되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당시 신라에서는 임금이 아닌 성골·진골 귀족들도 개인적으로 신하를 거느렸고, 이 사신들은 자신의 주군(主君)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화랑이 어느 날 궁중에서 지소태후에게 아뢰었다.

“토함의 아우 사다함이 나이가 아직 어린데 수많은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태후가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다함을 불러 음식을 내리면서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이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따름이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알아 좋다고 하는 것이옵니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기특히 여겨 대왕에게 일러 귀당비장(貴幢裨將)을 삼아 궁문을 관장케 하니 그의 낭도 1천여 명이 더욱 사다함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 출전할 때 사신인 무관랑과 어머니의 정부인 설성도 사다함을 따라 참전했다.

 

 

 

 

가야정벌전에서 으뜸가는 전공세워

 

그러나 사다함은 홀어머니에게는 효성을 다했지만 설성은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진흥제가 사다함이 노래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을 알고 불렀다. 사다함이 어머니 금진과 짝이 되어 춤추고 노래하니 진흥제가 매우 즐거워하며 칭찬하여 이를 계기로 모자가 화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다함은 어머니가 설성과 사는 것을 묵인한 대신 집을 나와 따로 살았다.

 

사다함과 미실궁주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혼인을 약속하게 된 것은 가야로 출전하기 전이었다.

미실궁주는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신라 도약기인 진흥제 중기부터 진평제 초기까지 약 40년간 오로지 비상하게 빼어난 미색 하나로 제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른 일세의 여걸이었다.

절세미녀로 태어난 미실은 색공(色供)을 통해 진흥제와 그의 아들 동륜태자, 동륜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뒷날 진지왕(眞智王)이 되는 금륜태자(金輪太子) 3부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제부·자·손 3대에 이르는 3명의 대왕과 1명의 태자를 색정의 포로로 삼았으며, 사다함을 비롯하여 지소태후와 이사부와 사통하여 태어난 6세 풍월주 세종(世宗), 7세 풍월주 설화랑, 심지어는 자신의 친동생인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등 4명의 풍월주를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이요, 그녀와 세종과의 아들인 하종(夏宗)은 11세 풍월주, 설화랑과의 아들인 보종(寶宗)도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두 차례나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를 부활시켜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화랑들을 호령했으니 일세의 여걸이요, 요화였던 미실의 한평생이야말로 신라 화랑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미실은 사다함과 동갑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미진부요, 어머니는 법흥대왕의 후궁이며 초대 풍월주 위화랑의 손녀인 묘도부인(妙道夫人)이다. 미진부의 아내는 본래 법흥대왕과 백제 동성대왕(東城大王)의 딸 보과공주(寶果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였다. 그러나 남모가 준정에게 살해당하자 불과 16세에 홀아비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어머니 삼엽궁주를 따라 매일 궁중에 들어갔다가 묘도와 눈이 맞아 미실과 미생을 낳았다.

미실이 자라면서 천부의 미색을 보이자 할머니 옥진이 보고, “이 아이가 자라면 분명 우리의 뒤를 이어 색공으로 이름을 떨치리라”하고 방중술 등 색사의 온갖 비방·비술과 가무·시문 등을 가르쳤다.

그렇게 성장한 미실은 15세 무렵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에게 시집간다. 미실이 그동안 연마한 온갖 비술과 절기를 펼쳐 세종을 섬기니 세종은 며칠도 못가 정기가 고갈되고 말았다. 태후가 이를 알고 크게 노해 아들을 잡아먹을 년이라면서 미실을 쫓아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융명( 明)을 세종의 정실로 삼았다.

 

김부식이 ‘화랑세기’를 보고 가장 기가 막힌 부분이 바로 미실궁주를 비롯한 신라 귀족들의 난잡하고 문란하고 패륜적인 성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김부식이나 현대인이나 신라인들의 성관념·사회관·국가관·신앙생활을 자신의 윤리·도덕적 기준에 따라 비난할 권리가 없다.

신라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불렀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서라벌 제일의 미녀 美室(미실)을 사로잡다

 

미실이 사다함과 만난 것은 그렇게 황궁에서 쫓겨난 직후였다. 사다함과 미실은 만나자 마자 하루도 못 보고는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 변함없이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혼인을 약속하고 진흥제의 허락까지 받아냈다. 그러다가 사다함이 이사부의 부장으로 가야정벌전에 출정하게 되었다. 그때 미실이 이런 향가를 지어 부르며 사다함을 떠나보냈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서강대 정연찬 교수가 해독하고 ‘풍랑가’ 또는 ‘송출정가’라고 제목붙인 그 향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 생략).

 

 

-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아보고 /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

 

 

이것이 바로 ‘균여전’에 11수, ‘삼국유사’에 14수 등 지금까지 알려진 25수 외에 최초로 발굴된 또 한 수의 향가다.

 

이에 사다함이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전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대로 으뜸가는 전공을 세우고 서라벌로 개선했는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철석같이 믿었던 내 사랑 미실이 그 사이에 다시 세종의 아내로 입궁하고 없는 것이 아닌가. 사다함이 출전한 동안 미실을 하루도 잊지 못해 병이 난 세종이 태후에게 울고불며 통사정해 다시 미실을 정궁으로 삼고 융명은 첩으로 강등해버린 기막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랑을 빼앗긴 사다함의 가슴은 미어질 듯했다. 신분이 비슷하다면 힘으로 되찾아오기라도 하겠지만 상대는 태자·왕자 다음가는 세종 전군(殿君). 지소태후가 이사부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사다함이 애통한 심사를 담아 부른 노래가 바로 ‘청조가(靑鳥歌)’ 였으니, 청조란 미실을 이름이었다.

 

 

-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되리 /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되어 /

매일 아침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

 

 

‘靑鳥歌(청조가)’는 당시 최고의 인기 유행가

 

이 노래의 내용이 매우 구슬퍼 그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고 전하며 따라불렀다고 하니, 비록 그 사연은 애달프지만 당시 서라벌에서는 최고의 인기 유행가였음에 틀림 없었으리라.

 

어쨌든 사다함은 서라벌로 개선한 뒤 이화랑의 뒤를 이어 풍월주에 올랐으며, 설성의 아들이며 씨다른 아우인 설원을 부제로 삼았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 컸기에 만사가 귀찮았다. 거기에 엎친데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어머니 금진의 색광증이 또다시 도졌다. 전에도 한꺼번에 다섯 명의 사내를 정부로 거느려 대왕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가신이요, 친구인 무관랑이었던 것이다.

무관랑도 가야정벌전에서 공이 컸지만 신분이 낮아 상을 받지 못했으므로 사다함이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어머니 금진궁주가 이번에는 준수한 무관랑에게 눈독을 들여 아들 몰래 마수를 뻗쳤던 것이다.

무관랑은 사다함에게 죄스러웠지만 상대가 대왕의 후궁이라 거역할 수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이 일은 사다함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다함은 오히려 이렇게 무관을 위로했다.

“이는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나는 너를 진정한 벗으로 여기는데 어찌 그 일로 우리의 의가 상할 수 있으랴.”

하지만 무관랑의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무관랑이 어느날 밤 황궁의 담장을 타넘어 도망치다가 구지(해자)에 떨어져 크게 다쳤고, 그 때문에 죽고 말았다.

 

사랑에 배신당한 데다 친구마저 잃어버린 사다함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심신의 고통이 너무나 심했다. 마침내 그는 병들어 누워 종일 눈물만 흘렸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금진이 아들을 안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모두가 내 탓이다! 너를 잃고 내가 어찌 살랴! 차라리 내가 죽을 터이니 너는 제발 일어나다오!”

사다함이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다 운명에 달린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살아서 어머니의 은혜를 다 갚지 못했는데, 죽어서 저세상에서 마저 갚겠습니다.”

 

이보다 앞서서 문병온 이화랑이 사다함에게 “아우가 만일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풍월주를 계승하는 것이 좋을까?”하고 물었다. 사다함이 세종을 추천했다. 죽어가면서도 사랑하는 미실을 빼앗아간 세종을 다음 풍월주로 천거할 정도로 사다함은 멋진 사내였고 진정한 장부였다. 그렇게 사다함은 병든 지 7일 만에 세상을 떴다.

색공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사다함이 죽은 뒤 미실궁주가 천주사에서 그의 명복을 빌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미실을 품에 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는구나. 하지만 내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날 터이다.”

 

풍월주 사다함의 일생은 이처럼 슬프게 막을 내렸지만 그의 일생은 비록 짧았으나 비상했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역사에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 옛날 사다함과 무관랑을 비롯한 그의 낭도들이 무리지어 무술을 연마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던 경주 남산은 거대한 야외 불교미술관으로 변했고,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비련의 무대였던 대궁·양궁·사량궁 등 신라 황궁이 있던 월성터는 사적 1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아무 건물도 인적도 없이 빈숲에 바람만 쓸쓸한 폐허가 되어 옛사람들의 자취는 찾을 길 없다.

 

 

글/ 黃源甲 ( 황원갑 소설가· 한국풍류사연구회장)

 

 

경제풍월

 

 

 

 

 

화랑세기의 진실

 

 

 

 

 

미실은 창작된 캐릭터

 

박창화『화랑세기』의 환생, 드라마 「선덕여왕」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하였던 드라마 「선덕여왕」 이 세간에 회자되었다. 선덕여왕의 탄생과 유랑,그리고 신라에 되돌아 와 궁중 절대 권좌의 미실에 맞서는 과정에서, 그 드라마틱한 전개와 함께 작가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드라마의 내용을 사실이라 여기면서, 미실이 세종의 부인이면서 진흥왕의 애첩으로서, 진지왕
의 황후를 지내고, 설원랑의 정부라는 점에 의아해 한다.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고대사회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또한 화랑들의 당파성과 적극적인 정치개입, 권모술수 등을 그럴 듯하다고 이해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드라마 「선덕여왕」 은 박창화의 창작물『화랑세기』를 저본으로 각색한 드라마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허구의 미실이 드라마의 흐름을 주도하고, 그 밖의 등장 인물이나 내용전개, 궁중 귀족간의 난혼, 미실의 남동생 미생의 자녀가 80∼100명을 헤아린다는 내용 등은, 박창화의『화랑세기』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 한국고대사학계는 ‘필사본『화랑세기』의 진위문제를 둘러 싸고 18년여에 걸쳐 지리한 논쟁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필사본『화랑세기』’ 에 보이는 신라사회의 난혼과 모계적인 습속, 화랑도의 제사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당연시하고자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2007년도에 이르러 ‘필사본『화랑세기』’ 의 초고인『화랑세기』잔본이 새로이 발견되고,『화랑세기』와 같은 전적이 남아 있지 않음을 한탄한 박창화의 술회가 밝혀짐으로써, ‘필사본『화랑세기』는 박창화의 창작욕구에서 비롯한 소설류에서 위서로 탈바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김대문의『화랑세기』와 화랑도

 

신라 성덕왕 때 한산주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은『화랑세기』를 저술하면서, 화랑도를 ‘어질게 국왕을 보좌하는 충신을 비롯하여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고 평가하였다.『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기뻐하였으며, 산수를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신라에 필요한 인재를 뽑아 쓰기 위하여 진흥왕 때에 설치한 것이다. 이는 15∼18세의 화랑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집회로서, 1인의 화랑과 7∼800명 내지 1,000여 명의 낭도로 구성되었고, 낭도들 가운데는 몇몇 승려가 배속되었다. 이들 승려는 청소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화랑과 낭도를 훈도하는 책임을 졌다. 화랑도는 동시기에 몇 개의 집단이 존재하였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화주(花主)가 있었다. 이는 율령제하의 골품제사회를 지향하는 신라조정이 하층민들을 융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이해한다.

 

화랑은 전시에는 직접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나, 사다함, 김유신, 김흠춘, 반굴, 관창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항상 그의 선친이나 친족과 함께였다. 이는 신라 귀족사회의 특징을 보여줌과 함께 화랑도가 신라 청소년들의 일종 정치·군사적 수습과정이었음을 시사한다.

 

화랑도들은 공훈을 세우는 것을 부귀를 얻고 종족과 친구들에게 영예를 남기는 일로서 여겼으며, 항상 임전무퇴의 정신을 견지하였다. 임전무퇴는 진평왕대에 원광법사가 화랑도에 속한 귀산과 추항에게 전수한 세속오계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백제의 경우 적에게 항복하거나 패퇴하는 것을 군율로써 처형하였지만, 신라에서는 ‘임전무퇴’를 향후 전장에 나아갈 모든 청소년들에게 교육함으로써 명예로운 전사(戰死)를 택하도록 주지하였다. 신라 화랑도에게 전쟁에서의 임전무퇴와 전사는 형률로써의 강제가 아닌 명예로운 선택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화랑은 ‘어질고 신의가 있으며, 단체생활에서 우의를 지니고 방정하고 우아한 용모를 갖춘 존재로서, 서리를 이겨내는 꿋꿋한 기상을 지닌 청년’이었다. 드라마「선덕여왕」 에서처럼 용화향도를 따돌리고 정치권과 결탁된 모습은 신라 화랑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신라 화랑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드라마 「선덕여왕」 에는 미실이 원화, 문노가 국선, 기타 각 세대별 풍월주와 10개 화랑도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명칭은 각 시대별 화랑의 명칭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진흥왕대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명의 여자를 원화(源花)로 받들어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노닐게 하였으나 서로 다투어 죽이게 되자 이를 폐지하였다. 그 후에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 먼저 풍월도를 일으키고자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들었다고 한다.

이들 화랑을 예쁘게 분바르고 단장시켜 미륵선화로 일컫고 받들었는데, 이는 불교의 미륵하생사상에 바탕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화랑들이 분바르며 단장하고 할복자결하는 ‘낭장결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후 통일신라 말경에 풍류도의 영향으로 화랑은 선랑으로 일컬어졌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의 가문에서 선랑을 중심으로 낭도를 모아 교육하고, 선랑이 국가에 등용될 경우에 국선으로 일컬었다. 조선 전기의 사서 편찬자들은 다시 풍월도와 원화, 화랑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함으로써 풍월도를 이끄는 존재로서 풍월주를 상정하였다. 이로써 화랑은 원래의 이미지를 상실하여 무당을 의미하는 박수·무녀·화랭이 등으로 칭해졌다. 화랑의 명칭은 시대를 달리하여 ‘원화 → 화랑·미륵선화 → 선랑 → 국선· 선랑 → 풍월주’ 등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은 신라사회의 모계적 흔적과 함께 화랑의 무격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화랑 사다함과 무관랑의 우정을 동성애로 봄으로써 ‘조선의 기이한 풍속’으로 폄하하였다.

이는 박창화의『화랑세기』에 이어져 신라사회의 난혼과 모계적인 습속, 화랑도의 제사집단으로서의 성격으로 묘사되었고, 드라마 「선덕여왕」 에는 난혼과 일본 무사적인 ‘낭장결의’의 할복 등으로 재생산되었다.

 

드라마에서 그려낸 화랑상으로 인하여 우리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지 않을까 염려된다. 문화컨텐츠가 범람하는 사조 속에서 역사드라마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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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된 동기는 이종옥 교수님이다.

이 분의 글이 중앙일보에  [다시 쓰는 고대사] 로 연재되어 계속 스크랩하다가 '미실'이가 나와서 그동안 중단했었다. 진위는 후에 밝혀질 일이지만 황당하다.

 

만약 문제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사실이라면 진본은 일본에 있다는 말 아닌가?

왜 일본에 확인하지 않는가? 왜놈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고대부터 동,서양을 떠나 왕실의 근친은 성행했지만 이건 아니다.

왕부터 아래 신하, 화랑 통틀어 신라 전체가 전부 미친거다. 아비와 통하고 그 자식과 통하고, 그 아래 자식과도 통했으니 말하자면 할애비,애비, 손자까지 전부 통했다. 도통이 따로없다.

또 그 어미도 마찬가지다. 동네 똥개 이러지 않는다.

 

그런데 웃기는게 군대갔더니 고무신 꺼꾸로 신은 여자나 마찬가지인 미실이한테 뭔 '청조가'를 부르니

이게 바로 '병신육갑'하는거다.

이걸 연속극으로 만들어 잘나갔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오히려 미실이가 잘난 여성인양 표현하고 한술 더 떠서 신라시대 동성애 어쩌구 논문까지 쓰는 대가리 똥밖에 안찬 인간 쓰레기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러니까 왜놈들이 역사조작하고 쭝국놈들은 동북공정이라며 고구려가 지네 부족이였다고 우기는거다.

부끄러운 역사가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원나라에 핍박당한 200년 역사는 어디 가고, 청나라에 당한 수모,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당한 수모를 좀 자세하게 연속극 만들어서 해보면 어떤가?

누가 그러더라. 단일민족? 웃기지말라고.

 

 

내 새끼. 내 후세 사람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그런 역사를 만들어봐라. 가짜라도.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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